최근 수정 시각 : 2024-04-04 15:33:16

의령옹주


조선의 왕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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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왕 · 추존 국왕 · 왕비 · 추존 왕비 · 왕세자 · 왕세자빈
후궁 : 환조 ~ 연산군 · 중종 ~ 고종
왕자 : 목조 ~ 연산군 · 중종 ~ 고종
왕녀 : 익조 ~ 연산군 · 중종 ~ 철종
※ 작호가 있거나 성년까지 생존한 사람만 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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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태조의 황녀
의령옹주 | 義寧翁主
<colbgcolor=#94153e><colcolor=#ffd400>
조선 태조의 왕녀
의령옹주 | 義寧翁主
파일:호안공_이등과_의령옹주_묘역.jpg
호안공 이등과 의령옹주 묘역 전경
출생 생년 미상
사망 1466년(세조 11년) 2월 24일(음력 2월 1일)
능묘 호안공 이등과 의령옹주 묘역[1]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 산 85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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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94153e><colcolor=#ffd400> 본관 전주 이씨
부왕 태조
생모 찬덕 주씨
부군 계천군 이등(啓川君 李登)
자녀 슬하 4남 3녀
장남 - 이황(李宺)
차남 - 이선(李宣)
3남 - 이림(李穼)
4남 - 이효(李孝)
장녀 - 정소(鄭韶)의 처
차녀 - 김맹형(金孟衡)의 처
3녀 - 이만생(李晩生)의 처
봉호 의령옹주(義寧翁主[2], 宜寧翁主[3])
}}}}}}}}} ||
1. 개요2. 생애3. 가족 관계4.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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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태조후궁 찬덕 주씨 사이에서 태어난 딸. 딸이 적었던 태조의 서장녀이다.[4] 옹주의 어머니 찬덕[5] 주씨는 신분이 낮았던 듯하다.[6]

2. 생애

생년을 짐작할 수는 없으나 남편 계천위 이등이 1379년생이므로 비슷한 연령대가 아닐까 추측한다.[7] 조선 개국 이전에 하가한 듯한데, 남편과 사이에서 자녀 4남 3녀를 낳았다. 1466년(세조 12년)에 사망했다.

1423년, 태종의 국상기간에 이복동생인 숙신옹주와 함께 신을 섬기는 모임이라 핑계대며 거문고를 타고 술을 마시자 사헌부에서 탄핵하였으나 세종이 허락하지 않았다.[8]

어찌 본다면 조선의 건국부터 계유정난 이후까지 모두 목격한 인물이라고 볼 수도 있기에 의령옹주를 주인공으로 한 관찰자 시점의 사극도 나올 법하나 잘 알려진 인물이 아니라 그런지 언급이나 등장은 없다.

3. 가족 관계

  • 시부 : 판사수감사 이개(判司水監事 李開)
    • 남편 : 계천군 호안공 이등(啓川君 胡安公 李登, 1379~1457)
      • 장남 : 이황(李宺)
      • 차남 : 문량공 이선(文良公 李宣)
      • 삼남 : 이림(李穼)
      • 사남 : 이효(李孝)
      • 장녀 : 정소(鄭韶)에게 출가
      • 차녀 : 김맹형(金孟衡)에게 출가
      • 삼녀 : 이만생(李晩生)에게 출가

4.

파일:서울특별시 휘장_White.svg 서울특별시의 기념물
33호 34호 35호
방학동 은행나무 호안공 이등과 의령옹주 묘역 경천군 이해룡 사패지 송금비

파일:서울특별시 휘장_White.svg 서울특별시의 기념물 제34호
호안공 이등과 의령옹주 묘역
胡安公 李登과 義寧翁主 墓域
소재지 <colbgcolor=#fff,#191919>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 산 85번지
분류 유적건조물 / 무덤 / 무덤
수량 / 면적 분묘 2基, 석물 9基, 토지 46.77㎡
지정연도 2013년 7월 18일
파일:호안공_이등과_의령옹주_묘역.jpg
호안공 이등과 의령옹주 묘역[10]
[clearfix]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에 의령옹주와 남편 호안공 계천위 이등의 묘가 있다. 2013년 7월 18일에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34호로 지정받았다. 이등은 사후 시호를 받아 호안공으로도 불리며, 이에 서울특별시에서 기념물로 지정할 때 '호안공 이등과 의령옹주 묘역'이라 명칭을 정했다.
[1]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34호[2] 《조선왕조실록》, 《묘비》[3] 《선원록》[4] 태조의 다섯딸 중 경순공주에 이어 둘째 딸로 추정된다.[5] 잠깐 사용하다 사라진 봉작으로 정3품 혹은 종2품의 품계로 태조 시절에 사용했던 품계이다. 그 이외에 현의(賢儀), 숙의(淑儀), 찬덕(贊德), 순성(順成)의 순으로 후궁의 품계가 있었으며 그 아래로 상궁궁녀가 있었다[6]세종실록》 기록에 따르면 의령옹주가 천생이라고 하니, 그 어머니인 주씨는 종이나 노비 출신으로 신분이 낮았던 모양이다.[7] 1379년 부근 출생이 맞다면 어림잡아도 90대까지 살았다는 의미니 태조의 자식들 중 가장 오래 장수했다고 할 수 있다.[8] 세종 5년 5월 11일 경인 4번째기사[9] 조선 초기에 일시적으로 쓰였던 내명부 작위로 정3품이다. 태종시대에 최초로 사용되었고 세종시대엔 내명부가 새로이 정리되어 사라졌다.[10]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