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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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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백제 초대 국왕
견훤 | 甄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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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제후왕
상보 | 尙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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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견훤릉.jpg
충남 논산에 위치한 견훤왕릉 비석
<colbgcolor=#008080><colcolor=#fbe673> 출생
(음력)
867년
신라 상주 가은현
(現 경상북도 문경시 가은읍)
사망 936년 10월 1일[1] (향년 69세)
고려 공주 황산
(現 충청남도 논산시)
능묘 전 견훤왕릉
재위기간
(음력)
후백제 초대 국왕
892년[2] 또는 900년[3] ~ 935년 3월 (43년 또는 3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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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8080><colcolor=#fbe673> 본관 전주 견씨[4]
성씨 이(李) → 견(甄)[5]
훤(萱)[6]
부모 아버지 아자개[7]
어머니 상원부인(?) 또는 남원부인(?)[A]
형제자매 능애, 용개, 보개, 소개, 대주도금
배우자 본처 상원부인(?)[A]
고비
자녀 9남 2녀[10]
존호 대왕(大王) → 상보(尙父)[11]
시호 없음[12]
연호 정개(正開)[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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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훤왕릉 전경

1. 개요2. 생애3. 가족 관계4. 평가
4.1. 긍정적 평가4.2. 부정적 평가
5. 여담6. 대중매체7. 관련 문서8.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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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신라 말기의 군인이자 후백제창업군주.

견훤은 본래 남북국시대 신라의 장군으로 신라 서남 해안에서 해적을 토벌하기 위해 배치되었으나 889년을 전후한 시기부터 거병하여 892년에 무진주를 점령하고 백제(百濟)[B] 왕이 되었으나 공공연히 왕을 자칭하지는 못하고 자서(自署)[15]할 때 신라서면도통(新羅西面都統) 지휘·병마·제치(指揮兵馬制置) 지절도독(持節都督) 전·무·공등주군사(全武公等州軍事) 행전주자사(行全州刺史) 겸(兼) 어사중승(御史中丞) 상주국(上柱國) 한남군(漢南郡) 개국공(開國公) 식읍이천호(食邑二千戶)[16]라고 하였다. 900년에 비로소 완산주에 도읍하여 200여 년 전에 멸망한 백제의 부활을 선포했다. 이때 견훤이 재건한 백제를 먼저 있었던 부여씨의 백제와 구분하기 위해 후백제로 부른다. 신라, 궁예, 왕건 등과 후삼국의 패권을 놓고 수십 년간 다투었으나 935년(태조 18) 음력 3월에 적장자인 신검이 일으킨 정변으로 왕위에서 축출되었고 대리집정을 하던 신검이 같은 해 음력 10월 17일에 왕위에 올랐다. 권력을 잃은 견훤은 금산사에 갇혔으나 나주를 통해 탈출하여 과거의 숙적 고려 태조에게 귀순하였고 10만이 넘는 고려군의 선봉으로 후백제를 총공격하였다. 936년(태조 19) 음력 9월 8일[17]에 후백제는 대패하여 신검과 그 신하들이 항복하였고 견훤은 신검이 처형되지 않고 용서받자 울분을 참지 못해 등창이 나 수일만인 음력 9월 8일(계해일)[18] 황산(黃山)의 절에서 사망하였다.

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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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가족 관계

호족 간 정략결혼 하면 무려 부인 29명을 둔 왕건이 유명하지만, 견훤 역시 여러 호족의 여식과 정략결혼을 해 아들 약 10명과[19] 여러 딸이 있었다.

견훤의 가족들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의 <견훤 열전>과 《삼국유사》의 <견훤 열전> 등에 남아있으나 저마다 차이가 있어 그 전하는 바가 조금씩 다르다.

삼국사기》중 견훤이 조물성을 공격했다는 기록에서 수미강(須彌强)[20]이 등장하며, 또한 사위로는 지훤(909~914 활동)과 박영규(889년~935년 이후 활동)가 있었는데, 애복의 귀부 시점과 국대부인의 귀부 시점이 다르다는 점을 고려하면 애복의 남편이 지훤이었던 듯하다.
삼국사기 삼국유사 - 이제가기》
본처 미상 상원부인(上院夫人)
고비(故比)
시비녀(侍婢女)
언급 없음
장남 견신검(神劍) 성(成)
차남 견양검(良劍) 태사 겸뇌(謙腦)
3남 견용검(龍劍) 좌승 용술(龍述)
4남 견금강(金剛)
*수미강(須彌强)
태사 총지(聰智)
5남 언급 없음 대아찬 종우(宗祐)
6남 미상
7남 견능예(能乂)
나인남(內人男)
좌승 위흥(位興)
8남/장녀 견애복(哀福) 태사 청구(靑丘)
차녀 국대부인(國大夫人)
이외에 월광(月光)이라는 아들이 있었다. 활동지역을 감안하면 견양검으로 추정되기도 하지만 불확실.

견훤의 딸에 대한 기록은 견훤이 고려에 피신할 때 같이 간 견애복이 유일하다. 그리고 견훤의 사위로 무진주 호족 지훤, 순천 호족 박영규 두 명이 기록에 남아있다. 이 호족들과 결혼한 견훤의 딸들에 대해서는 어떤 기록도 남아있진 않지만 지훤의 경우 활동 시기가 910년 이전이기 때문에 지훤의 아내는 견훤이 20대쯤에 본 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4. 평가

4.1. 긍정적 평가

그 당시[21] 주존(州尊)인 도통태부(都統太傅) 견훤은 군대를 통솔하며 만민을 보호하는 방벽의 언성이었다. 태부는 본디 선행을 쌓아 장군의 집안에 태어났고 바야흐로 웅대한 뜻을 펴기 시작하였다.
옥룡사동진대사비(玉龍寺洞眞大師碑)[22]
견훤은 한때 고려를 멸망 직전까지 몰아 세웠던 전적도 있었고, 신라의 임금까지 갈아치웠을 정도로 위세가 강력한 패왕이었다. 또한 개인적으로도 훌륭한 야전 사령관에 공산 전투에서 왕건의 목숨을 위협할 정도로 뛰어난 전술가적 면모도 갖추고 있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특히 순수하게 육상에서의 군사적 능력만으로 따지면 왕건보다 뛰어나 궁예, 유금필과 함께 후삼국시대 최고의 명장이다. 소수의 군사로 남해안을 휩쓸고 전라도 지역을 장악한 것도 탁월한 군사적 업적이라 볼 수 있지만, 2차례 조물성 전투에서도 왕건을 거세게 밀어붙였음도 눈에 띈다.

특히 걸작이라 할 만한 것은 서라벌 기습공산 전투이다. 신라와 고려의 합작에 의해 전략적으로 상주로의 진출이 봉쇄당하고, 북쪽의 고려와 동쪽의 신라, 남쪽의 대야성에 주둔한 김락의 군세에 협공당할 위기에 놓인 상황에서도, 고려군의 약점을 꿰뚫어보고는 신속한 기동전으로 고려군 전선의 간극을 치고들어가 서라벌을 유린하고, 서라벌을 구원하기 위해 달려오는 왕건을[23] 요격해 그야말로 박살을 내버렸다. 이때 왕건은 거의 한 달간 행방불명이 되기까지 했다. 고창 전투에서도 호족 세력들이 왕건의 편을 들기 전까지는 후백제가 주도권을 쥐고 있었다. 물론 해전에서는 왕건을 제압하기가 어려워 나주를 빼앗겼지만, 이것도 나중에 제대로 반격을 개시하여 나주를 탈환하고, 예성강을 기습해 수도 개경을 공격하는 등 고려에 큰 한 방을 먹이기까지 한다.

다만 아무래도 맨땅에서 시작해서 자수성가했다는 게 보기 좋은 성공 스토리라 그런지, 견훤에 대한 일반의 인식은 상당히 오히려 부풀려진 부분 또한 있다. 견훤의 출생지인 문경과 성장지인 상주는 밖으로는 고구려, 안으로는 독자적 병력을 보유해서 가끔은 왕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 진골들에 대한 대비책에 고심하던 내물 마립간~소지 마립간 등이 신라 왕실에게만 충성하는 정예 부대를 키워 안팎의 위협을 분쇄하기 위해 전력을 다해 육성한 추풍령 지역에 속했다. 이 일대는 지증왕 왕가가 따로 직할 정예 부대를 양성하기 시작한 경북 서북부 조령 일대와 함께 신라 정예병 부대와 왕궁 근위대에 배타적으로 인력을 공급하는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견훤이 대단히 어린 나이에 서라벌로 들어간 후 상당히 빨리 승진한 건 물론 본인의 무력적 소양이 있었기에 가능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견훤이 아버지 아자개의 빽, 더 나아가서는 가문의 빽으로 서라벌에 있는 부대에 입대해서 스타트가 남들보다 유리했던 게 어느 정도 작용했음은 부인하기 어렵다. 진정한 밑바닥 흙수저 성공 스토리는 장보고지만 역시 출발 시점이 견훤보다 불리했던 탓이었는지 이쪽은 최종 커리어가 분명 견훤만 못하다.

그러나 견훤과 비슷한 시기에 서라벌에 있는 중앙 부대에 입대한 말단 병사가 한둘이 아니었는데 견훤처럼 성공한 사람은 단 하나에 불과했음을 생각해보면, 견훤의 능력과 성공이 그 시대에서 단연 가장 뛰어난 정도였음에는 논란의 여지가 없다. 서남해로 발령받아 신라 중앙군 부대를 접수한 건 물론 남들보다 유리한 출발이지만, 오히려 불리한 부분도 있었다. 백 년 혹은 수백 년 전까지 전통이 거슬러 올라가는 신라 정예병 부대들을 오로지 자기 커리어와 실력, 인품으로 설득해서 백제 부흥군을 만든다는 과업 자체는 누가 생각해도 어려운데, 김헌창보다는 명백히 신분과 가문 뒷받침이 좋지 못한 견훤이 이걸 자기 능력만으로 해낸 것이다.

연구에서는 순천에 있는 군부대를 접수한 후 광주로 진격하는 과정에서 광주 호족들을 설득하는 데 상당한 갈등이 있었고, 또 그 광주를 접수한 후에는 전주나주에 있는 호족들을 설득하는 과정에서도 긴장이 있었던 걸로 밝혀지고 있다. 그런데 견훤은 그런 상황에서 주변 모든 해적과 해상 호족들을 제압해서 나라를 세운 것이다. 불가능해보일만큼 어려운 과업을 해낸 것으로 그야말로 맨손으로 나라를 일으켜 세운 인물이라 할 수 있다.[24]

다만 이런 자수성가형 인물들이 대개 그렇듯이 독선적인 면이 강해서 호족 세력의 반대를 무릅쓰고 장자인 신검 대신에 후처의 아들인 금강을 태자로 삼으려했다가 뒷통수를 맞았다는 평도 있다.

재능도 상당했지만 그 끈질긴 근성도 대단한 수준이었다. 무려 67세라는 많은 나이에도 직접 군사를 이끌고 친정해 왕건과 맞붙어 수차례 승리한 바 있을 정도였으며, 그 오기와 끈기 또한 대단하여 신라로 통하는 요충지인 대야성의 경우에는 20여년이나 끈질기게 공을 들인 끝에 점령하였고, 왕건이 궁예의 신하를 지낼 적에 압도적인 해군력으로 빼앗아버렸던 나주를 다시 십수년의 공을 들여가며 키운 해군으로 도로 빼앗았으며, 그 여세를 몰아 개경까지 진격하여 고려 왕궁을 공격했으니, 그야말로 근성의 화신이라 불릴 만하다. 육전과 해전 양면에서 고려군을 잘근 잘근 씹어드셨다.

또한 《삼국사기》에 남아있는 견훤의 과격한 행보와 드라마 <태조 왕건>의 영향으로 대체로 호방한 성격 탓에 정치와는 거리가 있는 인물이라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의외로 정치적으로도 상당히 유능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상술했듯 순천에서 광주 호족들을 설득하고, 광주를 접수한 후에는 전주 호족들을 설득하는 과정이 어려웠을 텐데 그걸 해낸 것이며, 말년에는 비록 신검의 쿠데타로 빛이 바라기는 했지만 왕자들을 지방 도독으로 임명하면서 어느 정도 중앙집권화를 시도했다.

특히 호족들을 휘어잡는 솜씨는 호족들의 지역 기반을 약화시키기 위해 천도와 개호를 반복하고 미륵 신앙을 이용해 공포정치를 통한 왕권 강화를 시도하다 실패하여 자멸한 궁예를 크게 능가했다. 나주 지역의 지지는 얻는 데 실패했다는 점을 고려해도, 사성 정책과 결혼 동맹으로 철저한 왕권 강화보다 호족간 군신(君臣)의 동맹을 맺는 차원에 머문 왕건과 견줄만 하다. 비슷한 시기에 나라를 세워 왕이 되었던 궁예가 결국 중앙 집권화에 실패하여 호족의 대표격인 왕건의 손에 죽었고, 광종 이전의 초창기 고려가 호족 연합적 국가의 성격을 띠게 되었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당장 일개 군졸들이 견훤이 고려에 투항해 자신들 앞에 나타났다는 것만으로 사기를 잃고 고려군에 많은 수가 항복했다는 것은, 그만큼 그에 대한 백성들의 신뢰가 대단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하나 견훤에게 돌려지는 억울한 비난으로는 이른바 '포용력'이 부족하다는 것이고 그 이유 중 하나로 청주, 공주, 나주 일대가 처음에는 백제 부흥에 참여하지 않았던 걸 드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대단히 근거가 부족한 주장이다. 그곳들만 백제 유민이 사는 지방은 아니었고, 애초에 청주 출신 궁예가 고구려 정체성 초월을 외치며 청주, 공주 일대 호족들에게 크게 대우했던 게 가장 큰 이유였다. 이후 궁예가 쓰러지자 해당 지역들이 바로 후백제에게 달려간 걸 보면 알 수 있다. 나주는 광주와 오랜 대결의식이 이유였는데 실은 이 나주마저도 견훤의 후백제를 당해낼 순 없었다. 그렇게 보면 '포용력' 좋다는 왕건도 신라의 여러 명군이 통일신라 정예군을 양성한 경북 서남부는 끝내 포섭하지 못했었고 그 일대는 내내 견훤을 강하게 지지했다.[25]

게다가 경남 일대는 후삼국시대 내내 후백제가 쥐고 있었는데, 후백제가 내내 살상만 저지르고 '포용'은 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견훤이 지나치게 경상도 일대를 중시하는 모습을 보여 옛 백제 일대 포섭이 미뤄진 건 사실이었으나, 군사적으로 봤을 때 그 지역들은 다소 가치가 떨어짐은 부인할 수 없다. 견훤의 대전략은 조령과 추풍령 전체를 장악하여 옛 나제동맹이 고려를 막았던 바로 그 소백산맥 철벽 방어선을 구축한 다음 신라 왕실이 스스로 굴복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듬이었음을 간과해선 안 된다.[26]

궁예와 달리 이렇다 할 공포정치는 펼치지 않았던 점도 눈여겨볼 부분이다. 고창 전투에서 져서 전세가 크게 밀리게 되지만 그럼에도 그걸로 다 끝난 건 아니었다. 발해 유민이 고려로 대거 유입되어 후백제 못지 않게 양면전선에 고생하던 고려의 북부 국경 방어 부담이 거진 없어진, 견훤이 통제할 수 없는 외부 요인에 견훤 자신이 후계 문제를 엉망으로 만든 실수가 겹쳐지는 바람에 패배했을 뿐이었다. 그래서 《삼국사기》와 달리 《삼국유사》에서는 재평가를 받았다.

4.2. 부정적 평가

탁월한 군사적 역량과 전술 그리고 결단력과는 달리 장기적인 비전에서는 왕건만 못했다. 완산주를 수도로 삼고 백제 부흥을 명분으로 세웠지만, 견훤 자신이 신라 장군 출신이었기에 쟁패 기준을 주로 통일신라 시대에 맞춘 흔적이 있다. 이 점은 소위 마지막 전국인(戰國人)이라는 항우와도 통한다.

역량을 주로 원신라 지역에 집중했는데, 그럼에도 견훤 본인의 연고지이자 아버지 아자개의 지배지였던 상주시가 자신이 아닌 고려에 붙은 건 아무래도 견훤이 여러 가지 이유로 부친 아자개와 화해하지 못했던 원인이 크다. 그리고 경순왕 옹립은 오히려 가장 큰 실수였다. 통일신라 정예군을 양성하는 산실이었던 경북 서남부를 내내 틀어쥐었던 걸 보면, 견훤 자체는 거병 전에도 신라군 내의 기대받는 유망주이자 명장이었음은 분명하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신라 쪽에서 내분이 벌어지는 순간 계속해서 원신라 지역을 잠식했던 역량 또한 칭찬받을 만하다. 그러나 경애왕 다음으로 가장 명분 있고 능력 있는 경순왕이 언제까지나 견훤의 통제를 따르며 감사해줄 거라 생각했던 건 크나큰 오판이었다.

견훤이 누가 보더라도 단기전에 집착한 걸 두고 견훤 자체에만 원인을 돌리긴 어렵다. 후백제가 경제력 측면에선 잠재성이 큰 옛 침미다례를 잃은 반면, 고려가 옛 신라의 무열왕계 왕실이 거의 수백 년 동안 군사 지역으로 유지해왔던 추풍령 일대를 확보하면서 정예부대와 중요한 요새, 지정학적 유리성을 얻은 걸 보면, 후백제가 처한 판세가 장기전보다는 단기전에 대단히 유리하게 짜여 있던 상황도 무시할 수 없다.[27] 이 때문에 견훤이 고려와 신라의 연합 전선을 어떻게 해서든 파훼하기 위해 그 포위망을 절묘하게 뚫고 서라벌을 습격해 들어간 것 자체는 나쁜 선택이 아니었다.

사실 백제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나라를 멸망시킨 것도 그렇거니와 가장 최근인 6세기 이후 내내 다툰 상대는 신라였지 고구려가 아니었고, 자연히 백제 부활과 의자왕의 복수를 천명한 견훤의 입장에서도 이들에게 태봉-고려와의 백제고토 쟁탈전보다는 신라 멸망이라는 선물을 안겨줄 필요가 있었다.[28] 역시 외지인 출신으로 나라를 세운 궁예가 미륵신앙과 함께 대신라 강경책을 정치적 자산으로 삼았던 것을 보면, 패서라는 홈그라운드의 지원과 용인 하에 대신라 유화책을 펼칠 수 있었던 왕건이 오히려 특이한 경우라 할 수 있다.[29]

그러나 서라벌 습격 당시 저지른 만행들이 도가 지나쳤던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굳이 죽일 필요가 없었던 경애왕을 살해한 것까지야 그래도 경애왕 하나 때문에 후백제가 7년 동안 골탕 먹은 바 있었으니 그러려니 해도, 경애왕의 애꿎은 왕비를 강간하고 서라벌에서 온갖 약탈을 자행한 건 현대인들의 눈으로 봐도 정말 용서가 안 되는 행위였다.

이 때문에 인근 호족들의 지지를 완전히 잃어버려 대세가 완벽히 고려로 넘어가게 하는 단초를 제공했다. 더군다나 서라벌을 완벽하게 파괴해 신라에 충성하던 경상도 일대의 호족들마저 신라를 포기하게 만들었다. 그렇다면 그들을 잘 구슬려서 자신 쪽으로 끌어들이는 것이라도 시도해야 했지만, 서라벌에서 이미 신나게 깽판친데다 비록 개박살나긴 했어도 구원군을 보내준 왕건과 대비되어 신라에 충성하던 호족들의 지지는 고려 쪽으로 기울고 말았다.

또 다른 문제는 바로 경순왕. 신라 왕실의 계보는 신덕왕~경애왕 시절에 다시 박씨에게 넘어간 상황이었는데, 경순왕은 아이러니하게도 신라에서 가장 오랫동안 집권했던 정통성이 있는 김씨였기에 신라 왕실을 와해시키기는커녕 도리어 가장 정통성이 있는 인물을 임금으로 만들어 신라 왕실의 정통성만 끌어 올려준 셈이 되었다.

물론 서라벌 강습 자체야 고려와 신라의 연합 전선을 끊기 위한 전술로서는 가장 좋은 판단이었다. 서라벌에서 처신만 나름 잘 했더라면 전략적으로도 좋은 판단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굳이 경애왕을 자살로 몰아넣을 필요도 없었고, 항복만 시켜서 고려와의 관계를 끊게 한 다음 물러나거나 아예 경애왕을 수도 완산으로 끌고 가서 인질로 삼을 수도 있었다. 그 다음으로는 정통성이 매우 떨어지는 인물을, 그러니까 김씨 방계나 박씨 방계 내지 석씨처럼 정상적으로는 왕이 될 수 없는 계통의 인물을 옹립했어야 했다.

그런데 하필이면 견훤이 경애왕 제거 후 신라의 새 군주로 세운 경순왕은 할아버지가 문성왕의 외손자이자[30] 경문왕의 사촌인 김인경[31]이며 아버지는 효녀 지은 설화로도 유명한 화랑 김효종, 어머니가 헌강왕의 둘째 딸 계아태후로 효공왕 이후로 단절된 김씨 왕가 중에서는 가장 정통성이 높다고 봐도 큰 무리가 없다. 그리고 후백제군이 서라벌 습격 이후 신라에서 철수하자, 경순왕은 한동안은 후백제의 눈치를 보면서 말을 듣는 시늉은 하였지만, 고창전투에서 후백제가 대패하자 보란듯이 후백제와 국교단절을 해 버리고는 고려와의 친교 노선을 강화하여 멸망하는 그날까지 후백제와는 내내 으르렁대기만 하였다.

그러나 신라에 대한 견훤의 행보를 잘 살펴보면, 단순히 전략안이 부족했다고만 치부하기엔 후세인들이 보기에 뭔가 이상할 정도로 이미 경명왕 시절부터 신라 측 사정을 너무나도 잘 알며 기민하게 대응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견훤과 김씨 족단 반역자들 사이의 오래된 커넥션이 있었을 수 있다는 말. 동서고금 이런 거래가 공짜로 이뤄지는 게 없는 이상, 김씨 족단이 왕으로 세우고 싶어하는 인물을 배제하면서 약속 위반을 하는 건 견훤 입장에선 선택하기 어려운 일이었을 수 있다. 애초에 경순왕의 외조부 헌강왕 자체가 견훤이 10대 후반 풋풋한 청소년 시절에 모셨던 신라왕이기도 했고.

사실 이 복잡한 문제를 이해할 수 있는 단서는 이미 위에서 제시되었다. 후백제는 기본적으로 다면전선을 강요받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신라, 특히 서라벌 통제에 많은 인력과 자원을 쏟아부을 수 없는 상황인 탓이 컸다. 우선 서라벌 공격 자체가 철저한 기습 기동전이었기 때문에 제대로 된 보급이 불가능했고, 결국 지금까지의 진군에 소모된, 그리고 앞으로 고려군을 맞아 치를 결전에 필요한 물자는 서라벌 약탈로 충당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후백제군의 장렬한 훼이크 기동을 보면 애초부터 모든 건 현지보급으로 때운다는 것이 실제 계획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약탈이 불가피한 상황에서 학살만 통제할 수 있을 리도 없고.

또한 경애왕을 인질로 삼거나, 정통성 없는 왕을 세워 꼭두각시로 만드는 것 역시 기본 전제는 완산에서 서라벌을 통제할 수 있어야 했다. 당장 국왕의 친정조차도 철저한 기습 끝에 간신히 성공시킨 상황이었고, 그 다음에는 고려의 대군을 맞아 싸워야 하는 공산 전투가 기다리고 있었다. 대놓고 반백제 스탠스를 취했던 경애왕을 살려두기에는 고려군과 싸우는 사이 뒤에서 신라 박씨 왕족들이 또 무슨 짓을 벌일지 모르는 상황이었고, (내통설을 긍정할 경우) 김씨 족단을 배신하고 '정통성 없는 왕'을 강제로 옹립하는 것 역시 한창 공산에서 싸우는 와중에 무슨 통수를 맞을지 알 수 없는 자폭행위였다. 내통설을 배제한다 해도 어쨌든 견훤의 입장에서는 동쪽 끝 서라벌을 통제하기 위해 어느 한 집단과는 확실한 손을 잡는 것이 이도저도 아닌 애매한 줄타기보다는 리스크가 적다고 판단할 만한 상황이었다.

실제로 견훤은 서라벌 습격과 공산 전투로 삼남 일대의 주도권을 잡은 후에도 안정적으로 세력권을 경영하지는 못했다. 당장 나주와 대야성을 군사력으로 탈환해야 했고, 신라 역시 지속적으로 침공해 경북 중북부 지역을 흡수하는 데 몇 년의 시간을 보내다가 그조차도 다 완수하지 못 한 채 고창 전투의 패배를 맞이했다.[32] 즉 후대인들이 보기에는 역사에 남을 악수라 할 만한 이 결정은 결국 서라벌 기습-공산 전투라는 외통수 상황에서 견훤이 그나마 고를 수 있는 차악의 선택이었다고 볼 수 있다. 하다못해 대야성만 고려군에게 빼앗기지 않았어도 완산-금성을 잇는 거창로의 통제권은 확실해 후속병력에게 서라벌 통제를 맡길 수 있었을 테니, 견훤에게는 조금 더 다양한 선택지가 있었을 것이다.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역시 후백제의 어정쩡한 시작과 위치였다. 아래에서 다시 '신라 장군'으로서 견훤의 정체성 문제를 거론하지만, 이런 권신으로서 가장 좋은 선택지는 그 옛날 동탁이 협천자하여 장안으로, 조조가 협천자하여 허창으로 천도했던 것처럼 아예 신라 조정을 통째로 들어서 완산으로 끌고 오는 것이었다. 실제로도 견훤은 서라벌의 주민들을 대거 전주로 끌고 가기도 했지만 끝내 조정을 이동시키지는 못했다. 이미 '백제'라는 간판을 되살려 써먹은 탓이었다.

동탁ㆍ조조는 실제로는 한실을 핍박했음에도 공식적으로는 매우 강경하게 한실의 신하로 스스로를 규정했지만, 후백제는 스스로 신라와 동등한 국가임을 주장한데다가 심지어 신라가 '복수'의 대상이었으므로 신라 조정을 이동시킴은 자체로 신라 멸망을 뜻했기 때문이다. 당장 신라를 완전히 병탄할 여력은 없는 상황에서 견훤은 서라벌의 신라 조정을 유지시켜야 하는 입장이었고, 그러자면 남아 있는 신라 조정이 자력으로 자신에게 대항할 가능성, 더불어 자신이 떠난 후 신라 조정이 어떠한 사달로 인해 자멸할 가능성을 모두 차단해야 하는 복잡한 상황에 처했다.

이를테면 세상일이 아 다르고 어 다르다고, 경애왕을 죽여야만 한다 해도 그 방식을 달리했다면 상황을 조금은 유리하게 이끌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즉 '경애왕에게 모욕을 주며 살해(혹은 자살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좀 더 그럴싸한 정치적 명분, 예를 들어 박씨 왕가의 세습을 규탄하며 김씨 왕가의 '복귀'를 처음부터 출병의 명분으로 주장하고, 경애왕의 주살 역시 김씨 족단과 같은 신라인들 스스로의 손에 맡기며 확실한 공범으로 삼는 방향으로.

하지만 일단 서라벌 공격 자체가 매우 기습적이라 이런 정치적 구호를 내걸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고, '신라에 대한 복수'를 건국 명분으로 내건 외지인 국왕 견훤으로서는 그런 유연함보다는 구백제계들을 한방에 사로잡을 수 있는 퍼포먼스가 필요했다.[33] 게다가 이 때의 견훤은 이미 환갑이 넘었다. 오로지 개인의 카리스마만으로 무연고지의 호족들을 규합해 국가를 세운 견훤으로서는 반드시 자신의 대에서 신라 병합을 완수하여 후대에 물려줄 필요가 있었는데, 딱 10살 젊은 왕건과 달리 신라를 장기적으로 흡수할 복안을 가지고 온건하게 대응하기에는 시간이 많지 않았고 최대한 힘의 우위로 찍어누르는 길을 포기하기가 어려운 환경이었다.[34]

물론 견훤에게도 삼한통일을 할 수 있는 천재일우의 기회가 없진 않았다. 바로 왕건의 쿠데타로 궁예가 몰락했던 즈음인데, 왕조 자체가 뒤바뀌는 상황 속에서 친궁예파 세력의 이탈이 끝없이 벌어졌다. 궁중 쿠데타를 일으켜서 왕건의 목에 칼을 겨눈 환선길, 왕건에게 반기를 들었던 이흔암, 서원경 세력의 임춘길, 명주의 김순식 등이 모두 이 즈음 왕건에게 반기를 들었던 세력들이었다.

철원군에서는 끝없이 왕건에게 반기를 드는 사람들이 나타났고, 지방에서는 성주들이 후백제에게 투항하는 등 왕건의 쿠데타 직후 고려는 점차 공중분해되는 혼란스런 상황이었다. 최악의 시나리오를 가정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로 절호의 호기였던 셈.[35] 이런 상황에서 만약 견훤이 '왕위를 찬탈한 역적을 토벌한다'는 구실로 북벌군을 일으켜 고려를 공격했다면 승산이 얼마나 되었을까? 하지만 견훤은 이런 엄청난 호기를 흘려보내면서 도리어 왕건에게 즉위 축하 사절단을 보내버렸다. 외부에서의 지원이 없어 왕건에게 반기를 드는 세력들이 모두 사라지면서 왕건의 통치 기반만 안정화하는 데 이바지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과연 이때가 견훤이 왕건을 공격할 만한 찬스였는지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환선길은 어설프게 쿠데타를 일으켜 후백제가 연계할 것도 없었고, 이흔암은 정사의 기록에서조차 쿠데타 시도가 있었는지도 애매해 아예 예방 숙청된 것이라는 설이 있으며, 임춘길은 변경에서 반란을 시도했다가 세력 전체가 일거에 제거되었다. 김순식은 후백제로서는 먼 거리라 애초에 시도조차도 불가능했다. 후백제가 고려에 사신을 파견한 것은 918년 8월로 환선길과 이흔암이 숙청된 시점에서 더 이상 손을 쓸 도리가 없다고 판단했을 공산이 크다.

고려는 이런 문제들을 덮자마자 혁명 석 달 만에 아자개의 귀부라는 초특급 이벤트를 일으켜 왕건의 지배 체제가 공고함을 대내외에 과시했다. 무엇보다 궁예는 미륵부처를 자칭하며 대놓고 불교계에서 숙청을 벌였고 도선대사를 내세운 왕건 정권은 당대 한반도 불교계의 강력한 지지를 얻고 있었다. 당시 고려의 수도는 내륙인 철원이었고, 후백제는 다 망해가는 신라의 대야성조차 뚫지 못한 채 허송세월만 보낸 게 2년 전이었다. 즉, 후백제도 내부 정비의 시간이 필요해 왕건에게 유화책을 썼던 것이지, 반란이 몇 건 있었다고 해서 후백제의 공세가 필승이었다고 단정짓기는 어렵다.

또 한가지 견훤의 1차 목표는 바로 신라가 마지막 힘을 쥐어짜내 우주방어하던 대야성이었다. 때문에 대야성에서 5차례나 전투가 벌어진 것인데, 왕건이 고려의 주인이 된 918년에서 2년 뒤인 920년 3차 대야성 전투에서 마침내 후백제가 대야성을 차지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진례성(오늘날의 창원시)까지 진격했는데, 신라가 고려에 구원 요청을 하여 왕건이 군사를 움직이자 더는 진격하지 않고 물러났지만, 그래도 후백제의 오랜 숙원이던 대야성을 마침내 점령한 것이다.

후백제는 신라와 전쟁할 때도 대 고려 전선에 상당수 수비 병력을 배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삼국사기》 <견훤 열전>에 1만 대군을 투입했다고 특별히 기록된 걸로 보아서 고려와 화친을 맺고, 대 고려 전선의 병력 일부도 대야성에 보내 총공격한 것으로 보인다. 때문에 왕건이 병력을 보내자 무리하지 않고 물러난 것이다. 이를 볼 때 견훤은 고려의 내란 당시 이 혼란을 이용해 고려에 침공하는 것과 신라에 침공하는 것을 저울질 하다가 일단 왕건과는 화친하는 척 하고, 숙원이던 신라의 대야성을 공격하기로 결심한 듯 하다. 아직 국내가 완전히 안정되지 않았던 왕건으로서는 견훤과의 화친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으니, 후백제에 먼저 선공을 가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즉, 견훤은 고려와의 화친을 이용해 대야성을 점령함으로서 충분히 이득을 본 것이다.

이 부분을 기록한 《삼국사기》에서 김부식이 '견훤은 우리 태조와 겉으로는 화친하는 것 같았지만 속으로는 상극이었다.'고 말하듯이, 애초에 견훤의 화친은 진짜로 고려와 화친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를 철저히 이용해 신라를 공격하려는 것이었다. 위에 언급되었다시피 비교적 빠르게 안정된 고려를 치는 도박에 걸기보다 대야성이라는 확실한 이득을 취했으니, 이걸 실책이라 해야 할지는 의문이다. 잊지 말아야 할 점은 대야성이 그저 그런 신라의 여러 성들 중 하나가 아니라, 뚫리면 자국의 수도인 서라벌까지 위기일발의 상황에 놓일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였다는 것이다.

거기다 기왕에 고려와 신라 양쪽 중 하나를 고르자면 당장 오늘 내일하는 신라가 만만찮아 보이는 고려보다 더 좋은 선택지였을 것이다.[36] 실제로 이후에 견훤은 서라벌에 쳐들어옴으로서 신라가 자기 나라 하나 건사하기도 어렵다는 걸 증명하던 판국이었으니 차라리 대야성부터 먼저 먹고 나아가 신라 전체까지 통째로 먹을 발판을 마련하는 게 고려와 싸우는 것보다 낫다고 판단했을만 하다. 여기에 고려는 나주시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기에 진짜 정면으로 붙으면 최악의 경우엔 남북에서 고려가 공격해올 수도 있는 양면전선이라는 불리한 지경에 있었다.

여기서 현대인들이 유념해야 할 것은, 당시는 통일신라가 300년 가까이 한반도 중남부에 군림하고 있던 시기라는 것이다. 즉 국토 전체에 걸쳐 경주를 중심으로 구축된 인프라가 건재했고, 신생국가들인 고려와 후백제 모두 이 기반 위에서 국가전략을 채택해야 했다. 간선도로는 경주를 시종점으로 방사형으로 뻗어나가 있었기 때문에 후백제는 무주에서 전주로 북진하는 과정에서 간선도로를 아예 새로 닦다시피 해야했고, 그나마 큰 돈 안 들이고 진군할 수 있는 경로가 바로 경주행이었다.[37] 그러므로 건국 직후부터 바로 경주행의 관문인 대야성 공략을 시도했고, 이게 좌절된 이후로는 역시 신라 방면으로 내달리는 태봉-고려를 저지하기 위해[38] 한주로와 삭주로의 핵심 경유지인 상주 지역을 두고 쟁탈전을 벌인 것이다.

즉 후백제에게 고려를 멸망시키는 북진은 애초에 당면 과제도 아니고 그럴 수도 없었다. 북진하려면 상주를 확보하고 주 진격로가 될 한주로를 장악해야 하는데, 그 상주는 당장 아버지인 아자개가 지배하고 있었고 그 다음에는 또 조령-죽령 일대의 방어선이 가로막고 있었다. 웅청주야 백제 유민의식이 강한 지역이라 궁예의 몰락과 함께 후백제를 택했지만 조령 방어를 맡을 중원경(충주)은 삼국시대의 쟁탈지였기 때문에 딱히 어딘가에 강한 소속감을 가지고 있지 않았고, 정치적 이득을 따져본다면 다름아닌 왕건의 처가 지역이었다. 웅청주의 귀부와 반란을 가지고 고려의 공중분해니 통일의 호기니 하는 말은 현대인의 상식으로 가볍게 의문을 가질 수는 있으나 실질적으로는 불가능에 가까웠다.[39]

또한 후계자 문제에 있어서 신료 및 호족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장남 신검이 아니라 막내 금강에게 물려주려 했던 것 또한 본인의 치명타로 작용해버렸다. 이러한 견훤의 막내 금강으로의 왕위 세습 시도는 이후 고려는 물론 조선까지도 혹평이 쏟아진 일이 되었다. 차라리 제2대 왕은 견신검이, 제3대 왕은 견금강이 왕위를 승계받는 형제 세습 방식의 해결책을 제시하거나 아예 주변에서 반항을 못하게 찍어눌러놨다면 또 모를까.[40] 본인의 선택이 결국 마지막 지지 세력까지 홀라당 날려먹은 꼴이 되었다.

결국 본인은 아들에게 왕위를 찬탈당한 채 처참히 유폐당하는 속된말로 뒷방 늙은이나 다름없는 초라한 신세로 전락했고, 이후 후삼국 통일이라는 대업은 제3자이자 라이벌인 왕건이 이루고 말았다.[41] 그리고 이러한 왕위쟁탈전 속에 고려로 도주하며 자신의 입장에선 적국인 고려에 그것도 한때 최고 지도자인 왕으로서 역사상 가장 굴욕적인 항복을 하고 자신이 세운 나라를 고려와 함께 무너트렸다.

그리고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견훤 자체는 신라 혈통 신라 장수, 그것도 보통 장수가 아니라 신라 왕실 근위대의 장교였을 가능성이 대단히 높고[42] 백제왕이 된 것도 사실 그에게 있어선 차선책이었다는 사실이 최근 연구에서 지적되고 있다. 때문에 초반에 구태여 긴 관직을 유례없이 늘여 쓰고 백제 왕이란 칭호는 꽤 오래 참은 건, 신라 왕실에 보내는 무언의 시위, 인정 투쟁이었다는 것. 당시 당나라에서는 안사의 난황소의 난을 거치면서 각지에서 지방 절도사를 자칭하며 심지어 중앙정부의 공인까지 받아내는 세력들이 일어났고, 멀리 가면 서로마 제국 말기에 야만족 왕들이 중앙 조정을 압박해서 관직을 따내는 시도가 있었는데, 견훤의 행태가 바로 그것이었다. 하지만 신라는 체제의 한계도 있었고 신라 왕실에 그 누구보다도 열심히 충성해야 할 견훤이 반란군짓하는 게 얄미웠던지 이런 행동을 받아주지 않았으며, 때문에 견훤이 선택한 차선책이 백제 부활이었다.

다만 견훤은 후세인들이 도무지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신라 서면 도통'이란 칭호만큼은 백제 왕이 된 이후에도 꽤 오랫동안 자처하였는데, 이는 그의 본심이 백제 왕보다는 당당한 신라 대장군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견훤이 불필요하게 서라벌에서 만행을 저지르고 옛 백제 영토보다는 신라 영역에 관심이 깊었던 것에선, 그가 백제 왕으로서의 역할에 나름 충실했음에도 내면 한 곳에선 여전히 신라 장수로서의 정체성을 버리지 못했음이 분명히 보인다. 이는 혈통 논란에도 불구하고 신라 자체를 격렬하게 증오하여 아예 부정의 대상으로 삼았던 궁예나, 나면서부터 고구려 유민 의식이 강한데다 신라 왕실한테 별로 피해도 혜택도 그닥 본 적 없어 냉정하게 제3자 입장에서 이득을 취할 수 있었던 왕건과는 크게 비교되는 측면이다.

여담이지만 결국 견훤은 소원 성취는 한 셈이었다. 경애왕을 살해하고 경순왕을 옹립한 시점의 그는 적어도 서라벌 자체의 실질적인 주인장이나 마찬가지였고, 신라 왕실의 운명을 좌지우지하는 최고권력자가 되어 있었으니... 이는 백제 왕이라기보다는 통일신라를 한 손에 쥐고 흔드는 권신에 더 가까운 모습이었다. 위에서 언급된 경순왕의 정통성 문제도 이에 따른 것일 수 있다. 진짜 신라를 이용만 할 생각이었다면 정통성 확실한 경순왕쯤 되는 인물을 왕위에 앉힐 이유가 없다. 신라에 애증의 감정을 품고 있었다고 한다면 어느정도 설명이 된다. 차마 자격 없는 인물을 신라의 왕위에 올려놓을 생각은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자신이 세운 나라를 자기 손으로 멸망시키는 전무후무할 선택지도 백제왕은 어디까지나 차선이었고 백제인으로서 정체성이 없었다고 가정하면 납득이 가능한 행보다.

후기신라 몰락과 후삼국의 개막의 근원에는 신라의 지독한 골품제, 특히 진골 절대우위의 독주체제와 이에 불만을 품은 6두품 이하 지식인들의 이탈이 있었음을 고려하면, 지방 호족 출신인 견훤도 이러한 신라 중앙조정과 상층부를 독점하는 진골 귀족세력에 대한 반감이 있었을 것이고, 그와 동시에 그 한계를 깨부수고 신라라는 체제 안에서 정상에 서보고 싶다는 이율배반적인 욕망에서 자유롭지는 못했을 거라고 예상해볼 수는 있다. 하지만 바로 이 때문에 신라 왕실은 절대로 견훤을 용서할 수가 없었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신라 왕실이 견훤에게 딱히 못해준 게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10대 중후반 나이에 서라벌 소재 군부대에 입대한 것만 해도 골품제 안에서는 엄청난 특혜였던데다 이후 경과를 보면 불과 20대 중반에 서남해 방수군 비장으로 승진해 부임하는데 이건 그 시대 기준으로도 아주 입지전적인 출세였다. 고려 시대에 꽤 괜찮은 무반 가문 출신이었고 유능하기까지 했던, 최충헌이나 이의방조차도 견훤 같이 빠르게 커리어를 쌓진 못했었다.

물론 견훤이야 본인 능력이 오늘날 한국군 기준 원스타에 불과한(?) 신라 왕실 근위대장에서 끝나기엔 아깝다고 생각했겠고 그래서 신라군 총사령관인 '도통'으로 임명받고 싶었던 것이며, 온 서라벌을 초토화시키고 귀족들을 압송해가면서도 박씨 왕실을 끝장내고 김씨 왕실을 복귀시키면서 끝내 신라라는 국가의 외형만은 남겨두었던 것은 나름 젊은 시절 추억을 생각해서 베풀어준 아량 쯤으로 봤을 수는 있다. 그러나 이런 앞뒤 상황을 보면 신라 왕실이 그걸로 견훤에게 감사해줄 수는 없었다. 타고난 정체성을 끝내 극복하지 못한 이러한 행태와 한계는 삼한 재통합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삼국사기》 열전은 바로 <견훤 열전>이 마지막을 장식한다. 김부식은 사론에서 궁예와 견훤을 함께 평하고 있는데, "옛적 중국의 항우이밀은 뛰어난 재주를 가져도 결국 한나라당나라의 흥기를 막지 못했는데, 궁예나 견훤 같은 흉한들이 어찌 우리 태조께 대항할 수 있었겠는가? 이들은 모두 우리 태조를 위해 백성을 모아준 이들일 뿐이다"라는 평가를 남기고 있다. 그러나 사서를 편찬하는 김부식의 입장을 고려하며 그냥 알아만 두자.[43]

5. 여담

  • 이름을 진훤으로 읽어야 한다는 설이 있는데 甄은 성으로 읽을 때 보통 '진'으로 읽기 때문이다. 안정복이 《동사강목》에 甄의 음을 '진(眞)'이라고 쓰고 있는 것도 근거 중 하나다. 때문에 이 인물을 다룬 이도학 교수의 책 제목은 대놓고 《진훤이라 불러다오》이며 이이화 등 다른 몇몇의 사학자들도 저서에서 '진훤'으로 표현하고 있다.[44] 이는 피휘로 발생한 것이다. 중국 삼국시대에 손견의 '견(堅)'자와 더불어 발음이 같은 '견(甄)'자를 사용할 때도 같은 발음을 피하기 위해 '진'이라고 읽게 되었고 이것이 신라에 들어와 발음에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이에 대한 반박도 있다. 중국에서 甄을 뭐라고 읽든[45] 한국에는 한국 고유의 독자적인 음이 있으므로 이를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전주 견씨 족보》에 비록 고려 시대에 진씨를 견씨라 부르게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고 해도, 다른 역사적 사료가 발견되지 않는 이상 사실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 족보는 원래 조작이 심하기 때문에 사료적 가치는 거의 인정받지 못한다. 게다가 한국의 족보는 거의 조선 시대 중후기에 만들어진 것[46]이기 때문에 족보가 만들어질 당시에 잘못된 사실이 들어갔을 가능성이 높다[47]. 그러니 역사적으로 한국의 견씨가 항상 견씨라 불려온 이상 당연히 견훤이라고 부름이 맞다는 것이다.
  • 이덕무가 쓴 《청장관전서》에 의하면 견훤은 후백제 도성에 전국에 있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서적을 모두 수집했다고 한다. 그리고 신라의 수도 서라벌을 쳤을 때 서라벌에 보관되어 있던 역사서들까지 싹 긁어다 가지고 왔다고. 하지만 후백제가 멸망하면서 전부 불태워졌다고 한다. 물론 사실 여부는 알 수 없지만 개연성은 어느 정도 있는 추론이다. 전쟁 났을 때 역사책이 싹 불타 버리는 일은 이때만 그랬던 것도 아니므로.
  • 궁예와 공통점이 몇 있다. 별 지지세력 없이 시작해 자수성가해서 한 국가의 지도자까지 올랐다는 점, 왕건을 거의 죽일 뻔했지만 죽이지 못하고 나라를 넘겨준다는 점, 강제 폐위된다는 점, 자신의 아버지와의 관계가 아주 안 좋았고 자신 역시 아들과의 관계가 좋지 못했다는 점, 망국의 군주로 둘 다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점, 사후에 고려가 시호를 지어주지 않은 점 등이다.[48] 다만 궁예와는 거울상처럼 뒤집힌 차이도 있다. 궁예에게 있어 신라가 격렬한 미움과 부정의 대상이었던 반면 견훤에게는 선망의 대상이었다는 점, 궁예는 신라에게 뭔가 혜택을 받은 게 전혀 없었던 반면 견훤은 나름대로 신라 체제에 은혜를 입었던 측면이 있었던 점, 궁예 자신은 그럼에도 신라 왕실에게 그다지 반감이 없었던 패서의 고(구)려계 유민들이 기반이었던 반면 견훤은 가장 반신라 감정이 극심했던 백제계 유민들이 기반이었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역설적인 공통점이 이 부분에서 나온다. 둘 다, 정작 기반으로 삼은 지역 정서가 본인들 성향과는 정반대였음이 아이러니다.[49]
  • 500여년 후 완산주 본관의 가문에서 나온 무장이 고려를 멸망시키고 새로운 나라개국군주가 된다. 그의 마지막 군사활동은 견훤의 행보와 닮았으면서도 다른데 이쪽도 견훤처럼 장자가 아닌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려다 이에 반발한 다른 아들들의 반란으로 인해[50] 왕위를 빼앗기고 총애하던 아들을 잃어버리자 어떻게든 감시에서 벗어나 복수를 위해 노구의 몸을 이끌고 전장에 나섰다는 공통점이 있다. 하지만 견훤은 결국 복수에 성공하나 그 대가로 나라를 잃고 자신도 시호 하나 받지 못하며 쓸쓸히 역사 뒤편으로 사라진 반면 이성계는 복수에 실패했지만 그가 일으킨 나라는 500년을 이어졌고, 그 자신은 조선의 개국군주로서 이름을 남길 수 있었고 유일한 황제국이 세워지며 황제로 추숭되었다.
  • 정작 조선에선 동국통감 등 사서에서 궁예보다 더 악랄한 반역자가 되었다. 이유가 경애왕을 찬탈하고 경애왕이 죽은 과정과 자신의 아들들을 편가르기 했다는 거였는데, 정작 그렇게 따지면 조선 왕조 개창자인 이성계 또한 우왕과 공양왕한테 했던 행동들이나 아들들 편가르기한 것 또한 견훤과 같았다는 것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언급이 없다.
  • 표준영정이 제작된다고 한다.# 하지만 춘향 영정 논란때문에...#
  • 세계사에서 나라를 개국한 왕과 멸망시킨 왕은 여럿이 있지만, 자신이 개국한 나라를 자신의 손으로 멸망시키고, 자신으로 시작된 시대를 자신의 손으로 끝낸 사람은 견훤이 유일하다. 제후와 왕들이 난립한 중국, 중세 유럽이나 인도에서조차 없는 전무후무한 기록.[51] 군주정이 점차 사라지는 현대를 보면 다시는 등장하지 않을 것이다.
  • 후삼국시대에서 가장 뛰어난 명장이자, 후삼국시대의 문을 열고 스스로 닫은 걸출한 군주였다. 후삼국시대는 그가 백제를 다시 세우면서 시작되었고, 그가 직접 백제를 멸망시키면서 비로소 끝났다. 창업군주로서 자신이 건국한 나라를 스스로 무너뜨렸으니 한국사, 나아가 전세계사적으로 보아도 이런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다 간 군웅은 찾기 힘들다.[52][53]
  • 황간 견씨(黃澗甄氏)의 시조이기도 하다.[54][55] 그의 아들들인 신검, 양검, 용검, 금강 또한 성씨가 이씨가 아닌 견씨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견훤의 피가 흐르는 가문은 황간 견씨에 국한된 것은 아니고, 슬하의 딸들과 결혼한 사위들, 그들 가문이 번창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통혼한 집안들을 통해서 혈손이 이어지고 있다. 여계[56] 후손으로서 대표되는 집안으로 순천 박씨[57], 평강 채씨[58], 광주 지씨[59] 등이 전해지고 있다.[60]

6. 대중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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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음력 9월 8일, 율리우스력 9월 26일.[2] 칭왕한 해. 《삼국유사》에서는 칭왕 시기에 대해 892년 혹은 889년이라는 두 전승을 모두 쓰고 있으나, 《삼국사기》 <열전>에서 경인(庚寅; 930년)이 후백제 42년이라고 하고 있으므로 역산해보면 889년 칭왕이 맞다는 설도 존재한다. (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826쪽).[3] 공식적으로 후백제를 건국한 해.[4] 성씨로 쓸 때는 "진"으로 읽는다는 설이 있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문단 참조.[5] 일단 정사인 《삼국사기》에는 아버지인 아자개가 이씨였고, 견훤 본인은 견씨였다고 적혀있긴 한데 후삼국시대 당대에는 성씨 사용이 일반적이지 않았기 때문에 아자개와 견훤 또한 과연 성씨를 적극적으로 사용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왕건이나 환선길, 박술희처럼 당대에도 성씨를 사용했던 다른 인물들과 달리 견훤 가문의 인물들은 정작 기록상으로도 딱히 성씨를 의식하면서 기록되어 있지 않아 오히려 후백제가 멸망한 뒤에 성씨를 적극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고려시대 추세에 맞춰 후손들이 견훤의 휘에서 따온 견씨를 사용하기 시작했을 개연성이 다분하다. 다만 이제가기에 근거하면 견훤의 후손들은 한동안 견씨를 쓰지 못하고 이씨를 쓰다가 잠잠해진 뒤에 다시 견씨를 쓰기 시작했을 정황이 있기 때문에 적어도 아자개는 이씨였을 개연성이 높다. 이총언 같이 중국식 성씨가 따로 있어도 이름과는 같이 사용하지 않거나 혹은 아예 고유어와 한자식 이름을 따로 가진 경우들이 후삼국시대 인물들 중에서 종종 관찰되는데 이제가기에 따르면 아자개 또한 '이원선'이란 한자식 이름이 또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삼국사기나 다른 중국 사서와는 교차검증되지 않는, 삼국유사에서 인용한 내용이지만 견제가기가 아니라 굳이 '이제가기'로 되어 있는 이상 우리가 그 신뢰도를 폄하하거나 낮춰보긴 상당히 어렵다. 이제가기 기록을 100% 신뢰한다면 아자개와 견훤은 그대로 진흥왕의 후손이 되긴 하지만 정확히 따져보면 부계 조상도 아니고, 기껏 수백년 전 조상 할머니가 진흥왕 후손이란 얘기라서 영 어설프다. 그런 식으로 따지면 당장 왕건의 딸들이 낳은 한국 성씨의 시조들은 모두 왕씨의 후손이 되는데 이렇게 되면 현대 대한민국에서 왕건 후손이 아닌 자는 거의 없게 될 것이다. 게다가 진흥왕 후손임만 굳이 강조하려면 김씨를 자처해야지 구태여 이씨를 자처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게다가 아자개와 견훤의 고향이 눌지 마립간의 추풍령 일대 신라 직할 왕실령 확립과 관련 있음이 고고학적 발굴로 확증된 이상, 이들이 신라 6부 출신인 이씨의 후손이 절대로 될 수 없다고 부정하기는 더욱 어려워졌다.[6] ''자의 특성상으로 잘못 읽는 사람도 가끔 보인다. 이 '훤'(萱, 원추리 훤) 자는 9세기 한반도에서 유행했던 이름으로 보이는데, 다른 시대에도 가끔 보이지만 유독 9세기에 견훤, 지훤, 신훤, 기훤, 익훤(弋萱), 공훤(公萱), 배훤백(裵萱伯) 등등 많이 나온다.[7] 이씨(李氏)로 아들과 성씨가 다르다.[A] 아자개의 부인으로 견훤이 상원부인과 남원부인 중 누구의 소생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리고 상원부인은 견훤의 아내라는 기록도 있어 확실하지 않다.[A] [10] 장남 견신검[11] 후백제의 국왕이었으나 아들 견신검의 반란으로 왕위에서 쫓겨났으며, 이후 고려로 귀순하여 '상보'가 되었다. 후일 고려에서 신라의 경순왕에게도 상보 지위를 수여했는데, 이때 '봉(封)'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걸로 보아, 고려에서는 상보를 작위의 일종으로 여겼음이 파악된다. 경주를 식읍으로 받은 경순왕이 고려에서 '낙랑군왕(樂浪郡王)'으로 봉작되었음이 확인되므로, 양주(楊州)를 식읍으로 받은 견훤 또한 고려에서 왕작을 받았을 것이 유력하지만 확인되지는 않고 있다. 만약 낙랑군왕에 대응되는 왕작이었다면 옛 백제 왕들이 전통적으로 승계했던 대방군왕(帶方郡王)이었을 가능성이 높다.[12] 고려는 망국의 군주 경순왕에게는 시호를 지어준 것이 확인된다. 하지만 경순왕과 마찬가지로 왕건에게 투항한 망국의 군주인 견훤과 견신검 부자에게는 시호를 지어준 사실이 파악되지 않고 있다.[13] 태봉궁예도 정개(政開) 연호를 썼는데 한자가 다르다. 한국어나 일본어 위키 등에서 정개 원년을 후백제가 건국된 900년으로 잘못 서술한 내용이 있다. 하지만 <편운화상 부도비 명문>으로 보아 정개 원년은 901년이 맞다. 최소 910년까지는 사용했다.[B] 후백제는 백제와 구별하기 위해 사서에서 붙인 이름이고, 당대에는 백제라고 칭하였다. 궁예가 세운 후고구려도 마찬가지로 자칭한 국명은 고려였다.[15] 자필 서명.[16] 삼국사기 권50 진훤열전(甄萱列傳)의 기록이다.[17] 원문에는 가을 9월(秋九月) 갑오(甲午)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음력) 9월에는 갑오일이 없으며, (음력) 8월 9일(갑오일)을 견훤의 사망일인 (음력) 9월 8일(계해일)로 오기한 것으로 보인다. 고려사 번역문에서는 음력 날짜는 원문대로 9월 8일(계해일)로 그대로 두었고, 추가로 병기하는 양력 날짜는 음력 8월 9일에 해당하는 9월 26일(갑오일)로 해놓았다. 덧붙여 가을 9월도 오기가 되어 가을 8월(秋八月)로 고쳐야 옳다. 참고로 고려사에서는 음력을 사용하므로 1~3월은 봄, 4~6월은 여름, 7~9월은 가을, 10~12월은 겨울로 표기하고 있다. 예컨대 봄 3월(春三月), 겨울 10월(冬十月) 같은 식이다.[18] 후백제가 고려에 항복한 날은 음력 8월 9일(갑오일)로 추정된다. 만약 원문처럼 항복일인 갑오일음력 9월 8일(계해일)로 이해해버리면 견훤이 등창이 생겨 수일만에 사망했다는 기사와 모순이 생겨버린다. 항복일을 음력 8월 9일(갑오일)로 바르게 수정할 경우 신검 등 후백제 인사들에 대한 처리에 20일 정도 소요되었고 신검이 사면되자 견훤은 울분을 참지 못해 등창이 나 수일만인 음력 9월 8일(계해일)에 사망하였다는 것이 된다.[19] 《이제가기》에는 9명이라 한다.[20] 견신검 또는 견금강. 견신검이라는 설이 더 유력하다.[21] 해당 기록은 동진대사 경보가 전주 임피군으로 귀국한 천우 18년(921년) 시점이다.[22] 전남 광양에 있는 옥룡사에 세워진 후삼국시대의 선승 동진대사 경보(慶甫, 860~974)의 행적을 새긴 비석이다. 비석의 실물은 남아있지 않고 비문만 전하고 있는데, 비문은 958년 고려 광종 때의 학사 김정언(金廷彦)이 지었다고 알려져 있다. 경보는 또한 도선의 제자라고 한다. 그리고 해당 비문은 왕건과 대적했던 견훤에 대해 '도적 수괴' 정도로 취급하는 《고려사》 및 후대의 기록들에 비하면 그나마 견훤에 대해 긍정적인 언급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23] 이때 왕건은 위기에 빠진 서라벌을 구한다는 정치적 퍼포먼스를 위해 일부러 느긋하게 왔고 이것이 큰 패착이 되었다.[24] 단, 신라군 부대들을 견훤에게 빼앗겼다고 본 신라 왕실은 그럴 수가 없었지만. 견훤은 본인이 자수성가했다고 생각했겠지만 아자개와 신라 왕실은 견해가 대단히 달랐던 것 같다.[25] 물론 그 일대는 다름아닌 무열왕계 왕실이 삼백여 년 동안 왕실 직할령에 가깝게 지배력을 유지했기에 다른 원신라 지역들 중에서는 원성왕계 왕실에게 가장 비토가 강한데가 다름아닌 견훤의 출생지 및 성장지였긴 하였으나.[26] 고려사 DB 검색 서비스 미비로 운주로 검색하면 920년대 후반 기록이 먼저 검색에 걸리지만, 고려사 918년조 기록을 찬찬히 잘 보면 지금의 공주, 청주 일대가 태봉 붕괴 전후로 후백제에게 넘어간 원사료가 나온다. http://db.history.go.kr/KOREA/item/level.do?itemId=kr&types=r#detail-kingYear/kr_001r_0020_0030_0070/1/0918/08 (계해 웅주(熊州)·운주(運州) 등 10여 개의 주현(州縣)이 모반하여 백제(百濟, 후백제)에 붙자 전 시중(侍中) 김행도(金行濤)에게 명하여 동남도초토사 지아주제군사(東南道招討使 知牙州諸軍事)로 임명하였다.) 해당 부분은 국학자료연구원 나말여초정치제도사에서 자세히 다루고 있기도 함. 아울러 김갑동 저 고려의 후삼국 통일과 후백제, 충청남도문화연구원 편저 백제사 시리즈 백제유민편 또한 참조[27] 관산성 전투가 바로 이 추풍령을 노린 공세였다. 즉 성왕 대 백제 중흥의 최후를 알린 대과업을 견훤이 성공시킨 것.[28] 사실 이 지역은 금강이라는 천연 방어선이 있는 탓에 북진을 시도한다 해도 요새를 두고 대치하는 지리한 지구전이 될 공산이 컸다. 고려 건국 직후 금강 바로 이북의 웅ㆍ청주 일대의 후백제 귀부를 절대 '작은 이득'으로 치부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고려와 후백제의 최후 결전장이 금강 유역(충청도)에서 한참 떨어진 오늘날의 구미 지역인 이유도 마찬가지다.[29] 궁예의 대신라 강경책은 궁예의 성장배경이 백제의 중심지였던 충청지방 그중 청주지방이었기 때문이다. 궁예가 고려란 국호를 바꾼 시점이 평양까지 영향권에 둔 시점이었으며 이때부터 패서호족의 숙원인 북벌을 멈추고 친위세력인 청주인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신라에 집중하게 되었다.[30] 외손녀사위라고 보기도 한다. 종법 질서가 확립되는 조선시대 전까지 사위는 아들과 거의 대등하거나 때로는 더 앞서는 위치에 해당했기 때문에 큰 차이는 없다.[31] 외가 쪽으로만 김씨 왕가를 잇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양반도 진골이었다. 본인도 태종 무열왕의 7세손에 해당했다.[32] 심지어 대야성과 나주를 회복하고도 강주는 끝내 회복하지 못했다.[33] 즉 후대의 시선에서 보기에는 굳이 서라벌을 불태울 필요가 있느냐 싶겠지만, 반대로 백제인들이 보기에는 "저 상주 산골 출신이 백제 왕족이라고 구라치는 거 흐린 눈 하고 왕이라고 모셨더니 복수는 개뿔 신라 왕은 살려주고 서라벌은 곱게 내버려둬?"라는 불만이 터질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하필 백제는 국왕이 외적에게 살해당한 사례가 3국 중 가장 많았다. 특히 왕건이 태봉을 뒤엎은 920년대 당시에는 웅주와 청주 일대 많은 구백제계가 고려를 버리고 후백제를 택한 상황이니 더더욱. 이런 퍼포먼스는 아주 헛된 것은 아니라서 후에 그가 신검과 그를 내세운 호족 세력에게 쫓겨나고서도 민심은 여전히 견훤에게 우호적이었고, 이는 신검의 늦은 즉위와 일리천 전투에서 백제군의 무더기 투항으로 입증되었다.[34] 서라벌 습격-공산 전투 당시의 상황을 보면 계획 이상의 군사적 성과, 그 성과에 반비례해 추락한 민심, 고령으로 조급한 상황 등등 여러모로 적벽대전의 조조와 겹치는 부분이 많다.[35] 고려는 건국 4일 만에 반역자가 나올 정도로 상황이 심각하게 돌아간 반면, 견훤은 즉위한 지 20년 가까이 되었기에 왕건보다 기반은 굳건하였다.[36] 그리고 고려가 차지한 지역보다 신라가 차지한 지역이 더 꿀땅이라서 조선시대에 이른바 삼남이라 부른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세 곳은 거의 다 후백제와 신라가 나눠먹고 있었다. 즉, 견훤이 신라를 먹으면 이 삼남을 모두 먹다시피 한지라 고려에 비해 그리 꿇리지 않는 위치에 서게 된다.[37] 도로는 단순히 땅을 다진다고 해서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대규모 인원과 물자를 수송하기 위해서는 수레가 다닐 정도의 너비와 평탄성이 보장되어야 하는데, 비포장 토사도로는 큰 비가 오면 바로 노면이 패이고 쓸려나가는 데다가 평상시에도 지속적으로 데미지를 입기 때문에 이를 유지보수하고 관리할 인원과 조직이 갖춰져야 한다. 후백제의 영역인 호남권이 전국적으로 보면 평탄하다고는 하지만 핵심 영역인 무진주 방면만 해도 내장산을 비롯한 호남정맥이 버티고 있어 만만히 볼 수 없다. 또 인원과 물자를 노리는 도적들을 방지하고 치안을 유지하는 비용도 무시하기 힘들다.[38] 고려 건국을 전후해서 이 남진의 목적은 각각 신라 멸망(태봉)과 신라와의 연합전선(고려)으로 180도 달랐다. 하여간 태봉-고려 역시 언제나 목표는 경주였지 후백제가 아니었다.[39] 단, 이 문제에서는 고려 또한 후백제와 마찬가지로 이중전선에 시달리고 있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미 경덕왕 때부터 여진족들이 발해의 통제를 벗어나서 신라 동북면 일대를 압박해오기 시작했고, 이에 훗날을 염려한 경덕왕이 대대적인 군제 개편을 통해 북변에 쇠뇌수 부대를 확충하고 축성 사업을 시행한 일이 있었다. 과연 이미 901년 시점 이래로 여진족들의 군사적 압박이 점차 강해지고 있었다. 후백제가 나주, 강주, 대야성을 잃은 상황에서도 고려가 섣불리 공세를 감행할 수 없었던 건 고려 또한 이중전선으로 군세 일부를 할애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컸다. 고려가 이중전선의 족쇄에서 크게 자유로워졌던 건 발해 유민들의 대거 유입과 유금필의 북방 정벌 덕택이었다.[40] 전자는 이전 중국삼국시대 때 오나라의 손책손권, 후대 네팔비렌드라갸넨드라, 벨기에의 보두앵과 알베르2세의 사례가 있고, 후자는 조선태종이 행해서 삼남 세종이 물려받기 쉽게 만들었다. 단, 중요한 사실은 손책은 예기치 못한 암살 사건으로 어쩔 수 없이 동생 손권에게 넘겨준 것이기에 만일 손책이 장수했다면 손권은 자리를 아예 물려받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으며, 갸넨드라 역시 2001년에 지방 도시를 시찰하던 도중 수도 카트만두에서 당시 조카였던 디펜드라 왕세자가 형 비렌드라 국왕을 쏴 죽이고, 본인도 총기 자살하는 참변을 저지르며 왕실에 큰 공백이 생겨 왕위를 이어 받은 경우였기에 만약 디펜드라가 비렌드라를 살해하고, 자살하지 않았다면 왕위에 오르지 못했을 공산이 크다.[41] 중국 남북조시대와 비교하는 견해가 있는데, 견훤은 부견과는 공통점이 전혀 없고 오히려 고환과 비슷하다. 고환은 북위의 알짜배기 지역을 제패했고 북위 중앙정부와도 인연이 깊었으나, 북위 황가에 대한 탄압은 고환의 고씨 일가가 그 시대 기준으로도 비상식적으로 극악했다. 우연히도 왕건수문제라기보다는 우문태와 더 비슷하다. 우문태가 차지한 서위 일대는 북위 입장에선 변경지였고, 우문태 자체도 북위 조정에서 받은 혜택은 거의 없었으나, 북위 황가에 대한 대접은 그럭저럭 양호한 편이었다. 왕건의 패서 지역도 통일신라 입장에선 변경지였으나, 그랬기에 통제가 느슨한 편이었고 신라 왕가에 대해선 보다 우호적이었다.[42] 진흥왕의 군제 개혁 이후 서라벌에 주둔하는 왕실 근위대는 거의 조령과, 견훤의 출생-성장지인 추풍령 일대에서만 신병을 받게 되었고 서라벌 일대 주민은 거꾸로 왕실 근위대 입대가 지휘관이든 장교든 병사로든 원천차단되었다. 반대로 서라벌 방어 부대는 주로 9서당이 기원인데 9서당의 구성원이 죄다 서라벌화되면서 특성화하는 취지가 사라지자 다시 군제 개혁이 단행되어 9서당은 해체되고 대신 6기정이 등장하여 9서당의 임무를 인계받게 된다. 물론 6기정 구성원은 대부분 서라벌인들이었던 걸로 판단된다.[43] 개인 저서라도 왕조국가에서 현 왕조에 대한 충심을 나태내야할 판인데, 삼국사기는 아무리 저자가 김부식이라도 엄연히 관찬 역사서이다. 왕조 국가가 전대 역사서를 편찬할 때는 자신들의 정통성을 강조하기 마련이므로, 삼국사기에서 궁예와 견훤의 평도 결국 왕건을 돋보이게 하는 결론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44] 만일 견씨를 진씨로 바꿔 읽는다면 견미리와 같은 현대 한국의 견씨 성을 지닌 사람들이 전부 진씨로 바꿔야 하는 문제가 생기며 견씨들의 개인 생활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게 된다. 견씨 집안에서는 고려 왕조의 탄압을 피해 성의 음을 바꿨다고 전해진다.[45] 甄의 중국어 발음은 Zhēn이다.[46] 한국 역사상 만들어진 시기가 확인된 것 중 가장 오래된 족보는 조선 세종 때 만들어진 《문화 류씨 영락보》이지만 이건 서문만 남아있고, 성종대 편찬된 《안동 권씨 성화보》가 본문이 남아 있는 최초의 족보이다. 즉, 고려 시대 이전을 다루는 족보 기록들은 신뢰도가 0이다. 사료가 정말 없으면 어쩔 수 없이 족보를 참고하는 경우도 있지만 발해사 연구하는데 《협계 태씨 족보》를 활용했다가 망했던 북한의 예처럼 사료 비판이 정말로 철저하게 이뤄져야 한다는 결론만 무수히 나오는 것이 현실이다.[47] 거기에 조선 중기부터 이뤄진 공적/시적 신분세탁(공명첩, 족보 매입 등)으로 양반가가 70%를 찍는 지역도 나올 지경이었다. 그리고 순조/고종 때 노비 철폐도 되었으니 족보의 신빙성은 더욱 낮다.[48] 같은 망국의 군주 경순왕이 왕릉도 있고 시호까지 받은 것과 비교하면 좀 격이 떨어지기는 한다. 한마디로 궁예와 견훤은 죽어서도 왕으로 대접받은 경순왕과는 달리 고려로부터 사후엔 아예 왕 취급을 받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이는 고려가 신라 왕조의 정통성을 받았다는 것만 중요했던 게 이유는 아니었다. 그게 이유였으면 '신라사기'가 아닌 '삼국사기'가 나올 수가 없었기 때문. 이는 고려 왕조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한반도의 다른 남은 왕조에는 가급적 권위를 줄 수가 없었던 고려 왕조의 사정 탓이지, 고려가 실제로 당대에 견훤이 세운 나라를 백제로 여기지 않아서가 아니다. 후백제가 나라 아닌 반란군 집단이라는 건 적어도 당대 동아시아 사회에서는 신라 혼자만의 일방적인 주장이었다. 그렇게 따지면 양길/기훤-궁예의 나라를 계승한 고려도 반란군인 점도.[49] 궁예는 청주 지역 호족들과 친밀했는데 그런 구 백제 지역의 반신라 정서의 영향인 듯 하다. 그래서 고구려계 호족들과 거리감이 있었던지 이후 궁예는 고려라는 국호를 버리고 마진, 태봉을 사용한다.[50] 박시백의 고려사에서도 견훤 파트에 그와 이성계의 공통점으로서 이 점이 짤막하게나마 잠시 언급된다.[51] 그나마 비슷한 예는 측천무후.[52] 건국하자마자 무너져 단명한 왕조나 창업군주가 후계자와 대립각을 세운 국가는 역사적으로 많다. 다만 창업군주가 타국으로 망명한 경우부터는 찾기 힘들어지며, 아예 최전선에 직접 출전하여 자신이 세운 나라를 멸망시킨 사례는 견훤이 유일무이하다. 사실 공화정 지도자까지 따지자면 베냉 인민공화국의 건국자 마티외 케레쿠도 견훤마냥 자신이 세운 체제를 자신이 앞장서서 무너뜨리긴 했으나, 케레쿠는 외세에 빌붙어 최전선에서 베냉 인민공화국을 멸망시키지 않았을뿐더러 베냉의 독립을 주도하고 베냉의 초대 대통령이 된 인물도 아니었기에(참고로 케레쿠는 오히려 프랑스 군인 출신의 식민부역자였다) 견훤보다 임팩트가 작을 수밖에 없다.[53] 견훤과 비슷하게 상식적으로 도저히 불가능한 기록을 달성한 파란만장한 인생을 보낸 군주는 2개의 나라(명나라, 청나라)를 섬기며 이 모든 국가들의 역적이 된 오주오삼계와, 왕정과 공화정의 국가수반을 모두 역임한 유일무이한 사례인 불가리아시메온 2세, 왕가 외 출신으로 추존 군주가 된 김유신 정도가 있다. 덤으로 시메온 2세는 견훤의 사망 1000년으로부터 1년 뒤에 태어났다.[54] 아버지는 이씨였지만 견훤은 이씨가 아닌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55] 기록의 실전(失傳)으로 인해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정황상 오늘날 견씨들은 견훤의 막내아들인 견능예의 후손들로 추정된다.[56] 견훤의 딸들을 통해서 파생된 후손들.[57] 사위인 박영규의 집안.[58] 채송년의 외가가 무주 지씨다.[59] 사위인 지훤의 집안.[60] 여계 후손으로만 따지고 보면 이 양반도 숙명의 라이벌만큼이나 자손들을 번창시키면서 수많은 후손들을 두게 된 인간 승리자이기도 하다. 다만 왕건의 경우 상술했듯 여계 후손까지 따지면 후손 아닌 사람들을 찾기가 더 어려울 정도기에 견훤과 비교되기에는 무리가 있다. 물론 견훤에게는 사서에 드러난 자녀들은 소수에 불과할 정도로 자손이 아주 많았다고 적혀있기 때문에 남계 자손도 성씨 사용이 매우 드물었던 당대부터 계산해 볼 때(소수 대귀족이나 대호족, 그런 전통이 가문에 원래 있었던 특수한 경우 외엔 본격적인 한국의 성씨 사용은 고려 초기부터 시작한다) 실제로 후손이 얼마나 될지 이제 와서는 정확히 알기 힘들다. 이는 왕건의 경우도 마찬가지인데, 왕씨 왕족들도 조선 왕조가 개창하면서 광범위한 변성했기 때문에 남계 후손의 경우도 현대까지 왕씨를 유지하고 있는 경우보다 훨씬 많다고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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