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wiki style="padding: 5px 0 0; margin:-5px -10px; background: linear-gradient(to right, #582d2d, #663334, #663334, #582d2d)" {{{#!wiki style="display: inline-table; min-width: 25%; min-height: calc(1.5em + 5px)" {{{#!folding [ 20세기 ] {{{#!wiki style="margin: -5px -1px" | <rowcolor=#cd9f51> 1901 | 1902 | 1903 | 19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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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쉴리 프뤼돔 | 테오도르 몸젠 | 비에른스티에르네 비에른손 | 프레데리크 미스트랄 | |
| <rowcolor=#cd9f51> 1904 | 1905 | 1906 | 190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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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세 에체가라이 | 헨리크 시엔키에비치 | 조수에 카르두치 | 러디어드 키플링 | |
| <rowcolor=#cd9f51> 1908 | 1909 | 1910 | 191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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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돌프 오이켄 | 셀마 라겔뢰프 | 파울 폰 하이제 | 모리스 마테를링크 | |
| <rowcolor=#cd9f51> 1912 | 1913 | 1915 | 191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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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르하르트 하웁트만 | 라빈드라나트 타고르 | 로맹 롤랑 | 베르네르 폰 헤이덴스탐 | |
| <rowcolor=#cd9f51> 1917 | 1919 | 192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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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를 기엘레루프 | 헨리크 폰토피단 | 카를 슈피텔러 | 크누트 함순 | |
| <rowcolor=#cd9f51> 1921 | 1922 | 1923 | 192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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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나톨 프랑스 | 하신토 베나벤테 |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 브와디스와프 레이몬트 | |
| <rowcolor=#cd9f51> 1925 | 1926 | 1927 | 1928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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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지 버나드 쇼 | 그라치아 델레다 | 앙리 베르그송 | 시그리드 운세트 | |
| <rowcolor=#cd9f51> 1929 | 1930 | 1931 | 193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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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마스 만 | 싱클레어 루이스 | 에릭 악셀 카를펠트 | 존 골즈워디 | |
| <rowcolor=#cd9f51> 1933 | 1934 | 1936 | 193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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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반 부닌 | 루이지 피란델로 | 유진 오닐 | 로제 마르탱 뒤 가르 | |
| <rowcolor=#cd9f51> 1938 | 1939 | 1944 | 194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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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펄 벅 | 프란스 에밀 실란패 | 요하네스 빌헬름 옌센 | 가브리엘라 미스트랄 | |
| <rowcolor=#cd9f51> 1946 | 1947 | 1948 | 194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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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헤르만 헤세 | 앙드레 지드 | 토머스 스턴스 엘리엇 | 윌리엄 포크너 | |
| <rowcolor=#cd9f51> 1950 | 1951 | 1952 | 195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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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버트런드 러셀 | 페르 라게르크비스트 | 프랑수아 모리아크 | 윈스턴 처칠 | |
| <rowcolor=#cd9f51> 1954 | 1955 | 1956 | 195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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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니스트 헤밍웨이 | 할도르 락스네스 | 후안 라몬 히메네스 | 알베르 카뮈 | |
| <rowcolor=#cd9f51> 1958 | 1959 | 1960 | 196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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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 살바토레 콰시모토 | 생존 페르스 | 이보 안드리치 | |
| <rowcolor=#cd9f51> 1962 | 1963 | 1964 | 196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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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 스타인벡 | 요르기우스 세페리스 | | 미하일 숄로호프 | |
| <rowcolor=#cd9f51> 1966 | 1967 | 1968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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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슈무엘 요세프 아그논 | 넬리 작스 | 미겔 앙헬 아스투리아스 | 가와바타 야스나리 | |
| <rowcolor=#cd9f51> 1969 | 1970 | 1971 | 197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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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뮈엘 베케트 |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 파블로 네루다 | 하인리히 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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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패트릭 화이트 | 에위빈드 욘손 | 하뤼 마르틴손 | 에우제니오 몬탈레 | |
| <rowcolor=#cd9f51> 1976 | 1977 | 1978 | 197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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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솔 벨로 | 비센테 알레익산드레 | 아이작 바셰비스 싱어 | 오디세우스 엘리티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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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체스와프 미워시 | 엘리아스 카네티 |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 윌리엄 골딩 | |
| <rowcolor=#cd9f51> 1984 | 1985 | 1986 | 198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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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로슬라프 사이페르트 | 클로드 시몽 | 월레 소잉카 | 조지프 브로드스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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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기브 마푸즈 | 카밀로 호세 셀라 | 옥타비오 파스 | 나딘 고디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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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데릭 월컷 | 토니 모리슨 | 오에 겐자부로 | 셰이머스 히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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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스와바 심보르스카 | 다리오 포 | 주제 사라마구 | 귄터 그라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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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5년 프랑스의 공영방송인 프랑스 2가 발표한 ‘가장 위대한 프랑스인’ 명단이다. | |||||||||
| TOP 10 | |||||||||
| 1위 | 2위 | 3위 | 4위 | 5위 | |||||
| 콜뤼슈 | |||||||||
| 6위 | 7위 | 8위 | 9위 | 10위 | |||||
| 11위~100위 | |||||||||
| 11위 | 12위 | 13위 | 14위 | 15위 | |||||
| 16위 | 17위 | 18위 | 19위 | 20위 | |||||
| 장 가방 | |||||||||
| 21위 | 22위 | 23위 | 24위 | 25위 | |||||
| 26위 | 27위 | 28위 | 29위 | 30위 | |||||
엠마뉘엘 수녀 | 장 물랭 | ||||||||
| 31위 | 32위 | 33위 | 34위 | 35위 | |||||
| 볼테르 | |||||||||
| 36위 | 37위 | 38위 | 39위 | 40위 | |||||
크리스찬 카브롤 | 쥘 페리 | ||||||||
| 41위 | 42위 | 43위 | 44위 | 45위 | |||||
미셸 사르두 | |||||||||
| 46위 | 47위 | 48위 | 49위 | 50위 | |||||
하룬 타지프 | 에리크 타바를리 | ||||||||
| 51위 | 52위 | 53위 | 54위 | 55위 | |||||
다비드 두이예 | 장 자크 골드만 | ||||||||
| 56위 | 57위 | 58위 | 59위 | 60위 | |||||
| 달리다 | 레옹 지트론 | 니콜라스 윌로 | |||||||
| 61위 | 62위 | 63위 | 64위 | 65위 | |||||
파트리크 푸아브르 다르보르 | 프랑시스 카브렐 | ||||||||
| 66위 | 67위 | 68위 | 69위 | 70위 | |||||
| 71위 | 72위 | 73위 | 74위 | 75위 | |||||
| 르노 | 베르나르 쿠슈네르 | ||||||||
| 76위 | 77위 | 78위 | 79위 | 80위 | |||||
미셸 세로 | 미셸 드러커 | 라이무 | |||||||
| 81위 | 82위 | 83위 | 84위 | 85위 | |||||
레이먼드 풀리도르 | |||||||||
| 86위 | 87위 | 88위 | 89위 | 90위 | |||||
질베르 베코 | 조제 보베 | 장 페라 | |||||||
| 91위 | 92위 | 93위 | 94위 | 95위 | |||||
| 뤽 베송 | 티노 로시 | ||||||||
| 96위 | 97위 | 98위 | 99위 | 100위 | |||||
세르지 레기아니 | 프랑수아즈 돌토 | ||||||||
| ※ 출처 | |||||||||
|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 }}}}}}}}} | ||||||||
| 1957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 |||
| <colbgcolor=#000><colcolor=#fff> 알베르 카뮈 Albert Camus | |||
| <nopad> | |||
| 출생 | 1913년 11월 7일 | ||
| 프랑스령 알제리 콩스탕틴 주 몬도비 (현 알제리 엘타르프 주 알드라안) | |||
| 사망 | 1960년 1월 4일 (향년 46세)[1] | ||
| 프랑스 부르고뉴 욘 빌블르뱅 | |||
| 국적 | | ||
| 직업 | 소설가, 철학자, 저널리스트, 극작가 | ||
| 서명 |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calc(1.5em +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5px -1px -11px" | <colbgcolor=#000,#000><colcolor=#fff,#fff> 부모 | 아버지 뤼시앵 카뮈, 어머니 카트린 생테스 | |
| 배우자 | 시몬 이에(1934년 결혼, 1940년 이혼)[2] 프랑신 포르(1940년 결혼)[3] | ||
| 자녀 | 딸 캐서린 카뮈 아들 장 카뮈 | ||
| 학력 | 그랑 리세 (졸업) 알제 대학교 (철학 / 학사) | ||
| 병역 | 면제 (결핵) | ||
| 종교 | 무종교[4] | ||
| 신체 | 176cm[5] | ||
| 등단 | 1942년 「이방인」 | ||
| 정당 | → [6] | ||
| 상훈 | 1957년 노벨문학상 | }}}}}}}}} | |
1. 개요
이리하여 나는 부조리에서 세 가지 귀결을 이끌어 낸다. 그것은 바로 나의 반항, 나의 자유 그리고 나의 열정이다. 오직 의식의 활동을 통해 나는 죽음으로의 초대였던 것을 삶의 법칙으로 바꾸어 놓는다. 그래서 나는 자살을 거부한다.[7] 《시지프 신화》 |
프랑스의 작가, 기자, 철학자.
프랑스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중 한 명이다. 1957년에는 역대 두 번째로 어린 43세의 나이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8] 실존주의자로 분류되지만, 정작 본인은 그러한 평가를 거부했다.[9]
2. 생애
2.1. 유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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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owcolor=#fff> 어린 시절의 알베르 카뮈 | 알베르 카뮈(가운데)와 가족들[10] |
프랑스령 알제리 태생이라는 사실에 그를 알제리 아랍계로 아는 사람도 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11] 당시 프랑스는 알제리를 단순 식민지나 명목상으로만 같은 국가에 속해 있을 뿐인 외지(外地)가 아닌 프랑스 본토의 확장된 영토로 취급했다. 그래서 프랑스 본토로부터 새로운 땅에서의 기회를 노리고 이주한 프랑스인, 이른바 피에 누아르들이 많았으며, 카뮈의 아버지 뤼시앵 카뮈[12]나 어머니 카트린 생테스[13]도 그 중 일부였다. 카뮈가 태어날 당시의 알제리는 그저 프랑스라는 국가의 한 지역이었고, 따라서 그는 프랑스 태생이었다[14]. 카뮈가 알제리 태생이라는 말은, 카뮈가 사망(1960)한 후 알제리가 프랑스로부터 독립(1962)한 현재의 관점에서 본 것이다.[15] 즉, 그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그저 프랑스 본토의 알제리 지방에서 나고 자랐을 뿐인 순수 프랑스인이었으며,[16][17] 현재의 알제리 아랍인과는 거의 무관한 인물이다. 당연하겠지만 이슬람을 믿지도 않았다.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8월 3일 뤼시앵은 알제리 원주민 보병으로 징집당해 프랑스 본토로 투입됐다. 이에 8월 30일 카트린은 두 아들과 함께 친정인 알제의 동쪽 거리인 리옹 가[18]로 이주했고, 카뮈는 이 곳에서 유년기를 보낸다. 그러다 10월 11일에 제1차 마른 전투에서 부상당한 뤼시앵이 군병원에서 사망했다. 미망인이 된 카트린은 문맹에 청각 장애가 있었고, 그나마 받는 연금도 매우 빈약했기에 가정부로 일하며 살림을 꾸려 나갔다. 훗날 카뮈는 "나는 마르크스를 통해 자유를 배운 것이 아니다. 가난을 겪으면서 자유를 배웠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라고 회고했다.
1921년 카트린과 가족들은 시내 중심에서 더 멀리 떨어져 집세가 더 저렴한 방 3칸짜리 집으로 이사했다. 카뮈는 한 집에서 할머니, 어머니, 형, 외삼촌 두 명과 함께 살았다. 할머니는 회초리로 집안의 질서를 잡았고, 외삼촌 중 한 명인 에티엔은 술통 제조공으로 청각 장애, 언어 장애가 있었고 카뮈를 데리고 사냥과 수영을 다녔다.[19]
1923년 동네의 공립학교 2학년이었던 카뮈는 담임이던 루이 제르맹의 눈에 띄었다. 제르맹은 집으로 모친과 할머니를 찾아와 진학을 해야 한다고 설득했다. 카뮈는 제르맹에게 무료로 개인 교습을 받고, 중고등부 장학생 시험을 준비하게 됐다. 카뮈는 1957년 12월 노벨상 수상 기념 연설문인 '스웨덴 연설'을 '어머니 다음으로 감사하는 사람'이라고 하며 제르맹에게 헌정했다. 이듬해 장학생으로 선발된 카뮈는 알제의 그랑 리세에 입학한다. 고등학교에서 카뮈는 축구를 즐겼고, 여름이면 철물점, 선박 회사에서 일하며 집에 생활비를 보탰다.[20]
1930년 바칼로레아[21] 시험 제1부에 합격한 카뮈는 가을 학기에 철학 반으로 진급했다. 이곳에서 카뮈는 평생의 스승 장 그르니에(Jean Grenier)를 만난다. 그르니에는 당시 생계를 위해 고등학교 철학 교사를 하고 있었고 중년 이후에는 소르본 대학교의 미학, 예술학 교수가 된 철학자, 작가이다. 그르니에의 제안으로 카뮈는 여러 글을 읽고, 또 직접 글을 쓰기 시작했다.[22] 두 사제는 카뮈가 죽기 전까지 30년 동안 편지를 주고받았으며 편지에는 서로에 대한 신뢰와 애정, 고백이 넘쳐난다.[23] 그러다 12월, 고질병인 결핵으로 쓰러진 카뮈는 더 이상 그의 삶의 기쁨이었던 축구를 하지 못하게 되었다.[24]
1931년 카뮈는 치료를 위해 알제의 여러 거처를 전전하다 10월에 철학 반 수업에 복귀했다.
1932년 카뮈는 바칼레로아 시험 제2부에 합격했다. 이에 10월에는 그랑제콜[25] 입시 준비반 1학년에 들어갔고, 친구들과 교류하며 다양한 글을 썼다.
1933년, 독일에서 아돌프 히틀러가 권력을 잡자 카뮈는 반파시스트 운동 조직인 암스테르담-플레열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그러다 건강이 악화되어 파리 고등사범학교[26] 입시 준비를 포기하고 알제 대학에서 수학했다.
2.2. 작가 활동
1934년 알제의 유명한 안과 의사의 딸이던 시몬 이에를 친구를 통해 만나 결혼했다. 그런데 시몬은 모르핀 중독자에 바람기가 있어서 두 사람의 사이는 악화되어 갔다. 한편 대학에서 장학금을 더 이상 받지 못하게 되자 가정교사, 알제 도청의 자동차 면허증 및 등록증 교부 부서에서 일하면서 기자의 일자리를 찾기 시작했다.1935년 알제 대학에서 철학 학사 과정을 마친 그는 6월에 철학 학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외국으로 여행을 다니고, 여러 글을 쓰면서 시간을 보낸다. 그리고 그르니에의 설득으로 공산당에 입당하여 무슬림 계층에 대한 선전 공작을 담당했다. 가을에는 친구들과 '노동극단'을 창단해 여러 공연을 선보이기 시작한다.
1936년 아내와 같이 유럽으로 여행을 떠났다가 그곳에서 우체국 유치 우편으로 도착한 편지를 보게 되었고, 시몬이 마약을 공급해 주던 의사와 내연 관계였음을 알게 되어 그녀와 이혼을 결심한다. 다만 법적인 이혼은 1940년이 되어서야 확정됐다.
1937년 공산당이 국제적 전략상 반식민주의 운동을 우선순위에서 제외하고 파시즘 타도를 앞세우자, 카뮈는 공산당과의 불화로 탈당했다. 가을에는 오랑 출신의 여성 프랑신 포르를 처음 만났고, 그녀는 장차 카뮈의 두 번째 아내가 되었다.
1938년 10월, 철학 교수 자격시험에 응시하려던 카뮈는 폐결핵 후유증으로 인한 공직 부적격이라는 신체검사 결과로 인해 계획이 좌절됐다. 이후 일간지 《알제 레퓌블리캥》을 창간한 편집국장 파스칼 피아를 만났고, 카뮈는 이 신문을 통해 처음으로 기자가 되었다. 그는 편집 기자로 활동하면서 다양한 문학 작품들에 대한 서평을 실었다.
1939년 2월, 카뮈는「부조리에 대한 에세이」를 써 나가는 한편 프란츠 카프카에 대한 연구 논문을 완성했다. 그리고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방인」집필을 시작할 것임을 알렸다. 그러다 여름부터 유럽에는 전쟁의 불안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카뮈는 그리스 여행을 계획하고 있었으나 국제 관계의 긴장으로 계획을 취소했다. 마침내 9월 1일 독일이 폴란드 침공을 일으켰고,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다. 카뮈는 전쟁에 동조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목숨이라도 걸고 싶어서 군입대 신청을 했으나 건강상의 사유로 병역이 면제되고 만다. 이후《알제 레퓌블리캥》이 정부의 검열로 정간당하자《수아르 레퓌블리캥》으로 이름을 바꿔 발간하기 시작했고 카뮈는 이 신문의 편집장을 맡았다. 하지만 이 신문도 발간이 계속될 희망은 보이지 않았다. 카뮈는 새로 바뀐 신문에 스페인 공화파를 옹호하는 글들을 실었다.
카뮈는 프랑스의 알제리 식민지배에 부정적인 글을 남기기도 했고, 베르베르족으로 흔히 알려진 이마지겐 부족에 대한 프랑스의 억압과 더불어 아랍계들의 차별도 고발했다. 그 때문에 정부의 압력으로 일하던 신문사에서 해고당하자 이에 언론인 노조가 반발하면서 시위를 벌여 결국 복직한 일도 있었다.
2.3. 레지스탕스 기자
1940년 1월,《수아르 레퓌블리캥》마저 발행 금지 처분을 받아 직장을 잃은 카뮈는 오랑에 체류하면서 철학 가정 교사로 생활했다. 3월에는 알제리를 떠나 파리로 향해 신문 《파리 수아르》의 편집부에서 일한다. 그러던 5월 10일, 프랑스 침공이 발발했고 6월 초에 독일군의 파리 점령이 임박하자 카뮈는 《파리 수아르》 편집부 사람들과 함께 클레르몽페랑으로 피난했다. 카뮈는 피난지의 허름한 호텔방에서 줄담배를 피워 대며《시지프 신화》의 집필에 몰두했다. 9월에는 팀들과 리옹으로 가 호텔에 묵는다. 한편 이 시기 이미 오래 전부터 별거 중이던 시몬 이에와의 이혼이 법적으로 확정되자, 프랑신과의 결혼 약속을 지킬 수 있게 되었고 11월 말에 프랑신이 리옹으로 와 카뮈와 합류했다. 이에 12월 3일 리옹에서 프랑신과 결혼했다.[27] 이때 신문사 조판부 동료들이 결혼식에서 증인이 되었다. 이후 《파리 수아르》의 감원으로 카뮈는 해고당했고, 카뮈와 프랑신은 오랑으로 되돌아갔다.1941년 카뮈 부부는 프랑신의 언니가 빌려준 아파트에 거주하면서 생활고를 겪었다. 카뮈는 사립학원의 강사로 생활하면서 소설을 계속 써갔고, 《이방인》의 원고를 완성하였다. 또한 7월에 전염병 티푸스가 오랑 지역에 창궐하여 《페스트》의 창작에 영향을 미쳤다. 11월에는 갈리마르 출판사 편집 위원회에서 《이방인》의 출판을 결정했다.
1942년 2월, 《페스트》의 집필을 계속하던 카뮈에게 결핵이 재발하였다. 7월이 되자 교사인 프랑신이 방학으로 자유로워져 카뮈 부부는 요양을 위해 프랑스의 비바레 지방의 마을에서 지냈다. 카뮈는 요양 생활을 하면서 레지스탕스에 가담할 길을 모색했다. 5월에는 《이방인》이 출간됐고, 이어 10월에는 《시지프 신화》가 출간됐다. 한편 카뮈 부부는 생활고로 인해 마을에 계속 머물 처지가 아니었다. 그래서 프랑신은 개학을 맞아 집과 직장을 구하기 위해 10월에 먼저 알제리로 돌아갔다. 카뮈도 한 달 후인 11월 11일에 돌아가기로 하고 미리 배표를 사 놓았으나, 11월 8일 연합군이 횃불 작전으로 모로코와 알제리에 상륙하고 이에 응수해 독일군이 안톤 작전으로 비시 프랑스를 점령하면서 프랑스 남부와 알제리 사이의 연락이 끊겼다. 그렇게 카뮈는 프랑스가 해방될 때까지 아내와 헤어진 채로 2년 동안 그녀의 소식을 듣지 못했다.[28]
1943년에는 프랑스에 거주하면서 《페스트》와 여러 작품들을 손질하고, 장폴 사르트르, 시몬 드 보부아르를 만나기도 했다. 10월에는 갈리마르 출판사에 《오해》와 《칼리굴라》의 원고를 보냈다. 한편 파리의 호텔에 체류하면서 비밀 지하 신문 '콩바(Combat)'와 접촉했다. 이어 12월에는 전국 레지스탕스 위원회 책임자 클로드 부르데를 만나 콩바의 활동에 가담하게 되었다.
| | |
| <rowcolor=#fff> 알베르 카뮈가 레지스탕스 활동을 위해 사용했던 위조 신분증.[29] | 콩바 편집장 시절의 알베르 카뮈(가운데) |
1944년 카뮈는 콩바의 편집장이 되었고, 'C'라는 필명으로 콩바에 수많은 기사와 사설을 기고하면서 레지스탕스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2.4. 종전 이후
1944년 8월 25일, 프랑스가 나치 점령에서 해방되자 《콩바》 사설에 숙청의 필요성을 역설하면서 과거를 잊고 관용과 용서를 베풀자는 주장에 맞서 반역자들을 엄격하게 처벌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이후 10월에 프랑신이 파리로 와 카뮈의 원룸에 합류했다.1945년에는 부역 지식인 처벌 수위를 놓고 프랑스 지식층은 논쟁으로 들끓었다. 레지스탕스 출신 지식층들 사이에 의견이 갈렸다. 대표적인 논전은 프랑수아 모리아크의 관용론과 알베르 카뮈의 정의론의 격돌이었다. 모리아크는 과도한 숙청을 우려하며 이렇게 주장했다. "우리는 학살자와 희생자라는 쳇바퀴보다 더 나은 것을 바란다. 그 어떤 대가를 치른다 해도 제4공화국이 게슈타포의 장화를 신어서는 안된다." 이에 카뮈는 1월 11일 《콩바》에 '정의와 자비'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이렇게 맞섰다. "비록 인간의 정의가 너무나 불완전하다고 해도, 인간의 정의를 완수하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선택이다. 우리는 정직함을 필사적으로 견지함으로써 그 불완전함을 교정하고자 한다."
하지만 프랑스에서는 소위 나치 청산이란 구실로 광범위한 숙청이 벌어졌다. 이 와중에는 부역 혐의자가 제대로 된 절차나 재판도 없이 임의로 처형되기도 하고 각종 징계나 불이익등 법의 테두리를 벗어나는 일들이 벌어지자 경악하여 이를 크게 규탄했다.[30] 이 때문에 샤를 드골이 허겁지겁 이를 막기 위한 조치를 취해야 했다. 카뮈는 사형 제도를 거부하는 입장이었기에 이런 무분별한 폭력뿐만 아니라 드골이 법적으로 나치 부역자를 처벌하는 일에도 일부 반대했다. 문학가이며 언론인인 로베르 브라지야크가 나치에 부역한 죄로 처형될 때 프랑스의 문학가들이 탄원서를 쓰며 브라지야크의 처형에 반대했고 카뮈도 이에 참여했지만 드골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31] 결국 브라지야크는 1945년 2월 6일 총살형을 당했다.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자, 8월 8일 카뮈는 《콩바》에 "기계 문명의 야만적 횡포가 극에 달했다. 멀지 않은 미래에, 집단 자살이냐 아니면 자연과학적 성과의 현명한 사용이냐 하는 문제에 봉착하게 될 것이 분명하다." 라는 내용의 사설을 기고했다. 9월 5일에는 쌍둥이 남매인 딸 카트린과 아들 장이 태어났다. 그리고 11월 15일 《누벨 리테레르》와의 인터뷰「아닙니다, 나는 실존주의자가 아닙니다.」를 통해 장폴 사르트르의 철학과 거리를 두었다.
1947년 2월, 출판계 노동자 파업으로 《콩바》가 심각한 재정난을 겪자 《알제 레퓌블리캥》부터 《콩바》까지 카뮈와 함께 일했던 파스칼 피에가 사임했고, 카뮈 역시 6월 3일 '독자들에게'라는 제목의 글과 함께 《콩바》에서 물러나게 된다. 그리고 6월 10일 《페스트》가 출간됐다. 출간 후 한 달만에 초판 2만 부가 매진되고[32], 그해의 비평가상 수상작으로 선정되는 등 폭발적인 반응을 보였다.[33] 카뮈의 저서들 중 상업적으로 성공한 최초의 작품이었다. 그러나 이로 인해 아직 끝나지 않은 자신의 탐구에 대해 사람들의 기대감이 높아지자 카뮈는 이에 지쳐 우울해했다. 한편 이 시기 프랑스가 미국과 소련에 대하여 독립적인 입장을 취할 것을 촉구하기 위해 모리스 메를로퐁티, 장폴 사르트르 등과 함께 서명 운동에 참여했다.
2.5. 알제리 전쟁
카뮈가 알제리 전쟁 당시 민족해방전선(FNL)과 프랑스 정부 가운데 프랑스 정부 편을 든 것은 당대 좌파 지식인들에게 매우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이 전쟁은 반란이며 새로운 범아랍민족주의와 사회주의가 만나 반프랑스 움직임을 만드는 폭력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는 프랑스 우익들과 비슷한 주장을 한 것이다.카뮈는 알제리의 독립은 반대하되 자치권의 확대를 주장했다. '알제리의 독립은 인정할 수 없으나 프랑스인과 평등하게 살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카뮈의 옹호론자들은 당시 카뮈의 어머니가 알제리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어머니의 신변을 염려하여 한 주장이라는 말도 한다. 하지만 카뮈의 제안은 프랑스 측에서 동의할 수 없는 것이었고 알제리도 마찬가지였으니 그는 양쪽에서 까였다. 알제리는 카뮈를 극렬 프랑스 우익으로 여겼으며 공산당 동료들과 알제리 독립을 지지하던 언론인이나 지식인들(특히 장폴 사르트르 등)은[34] 그를 배신자로 낙인찍고 무시했다.
그렇다고 우익과 군부에서도 그를 환영하지 않았다. 카뮈는 알제리에서 자치정부를 세우거나 그에 준하는 자치권을 부여하자는 주장이었기 때문이다. 프랑스 우익들에게 알제리는 '신성한 프랑스의 영토'였기에 받아들이기가 힘든 주장이었다. 그래서 그의 주장은 사실상 양측 모두 외면을 했다.
알제리가 독립하자 알제리에서 그에 대한 모든 흔적은 철저하게 지워졌다. 이것은 그가 알제리를 고향으로 여겼다지만 정작 이방인 등 그의 여러 작품들 속에서는 프랑스인이 주축이지 알제리인들은 거의 나오지 않는다는 점도 한 몫한 듯하다. 현재 그가 살던 집은 일반 가정집이며 1961년에 그를 추모하여 카뮈가 살던 알제리 티파사에서 만들어진 카뮈 문학기념비는 지금까지도 60년 넘게 용케 남아 있지만 카뮈의 이름은 끌로 지워진 채 방치되어 보존 상태가 엉망이었다. 기념비 맨 밑에 끌로 깎여져 지워진 게 알베르 카뮈 이름.
2000년대 중반 고려대학교 교수이자 역자 김화영이 알제리에 가서 보았을 때 기념비는 40년 넘도록 관리되지 않았으며 현지인들이 마구 험하게 다루는지 금이 가고 깨지고, 기념비 글귀도 흐릿해질 정도로 상태가 안 좋았다. 그래도, 2019년에 알제리에서 본 이들이 찍은 사진을 봐도 아직은 글도 다 알아볼 수 있고 상태는 나쁘지 않다. 2018년에 찍은 카뮈 기념비
2.6. 아이러니한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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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알베르 카뮈의 사망을 보도한 프랑스 신문 《콩바》[35] |
| 사고 현장을 촬영한 흑백 영상 |
카뮈는 1957년 노벨문학상 수상 당시 받은 상금으로 프랑스 남부의 루르마랭에 작은 집을 샀다. 남은 생을 한적한 마을에서 조용히 살기를 원해서였다. 이후 루르마랭에 체류하면서《최초의 인간》집필에 열중했다.
1960년 1월 3일, 카뮈는 루르마랭에서 파리로 가기 위해 갈리마르 출판사 사장의 조카이자 친구였던 미셸 갈리마르의 설득으로 그의 차에 탑승했다.[36] 도중에 1박을 하고 1월 4일, 욘 지방 몽트로 근처의 빌블르뱅에서 차가 플라타너스 나무를 들이박는 교통사고를 당했다. 카뮈는 현장에서 목이 부러져 즉사했고, 갈리마르도 닷새 뒤 병원에서 사망했다. 생전에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인터뷰에서 "자동차 사고로 죽는 것보다 더 의미 없는 죽음은 상상할 수 없다."란 말을 남겼다. 9월에는 카뮈가 사랑하던 어머니 카트린마저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다.
유작으로 다 완성하지 못한《최초의 인간》을 남겼는데 세상을 떠날 당시 유품에 이 원고가 있었다. 그 밖의 유품으로는 기차표 및 지갑, 펜, 메모지같은 것들이 있었다.[37]
카뮈는 루르마랭의 공동묘지에 묻혔고, 후일 아내 프랑신 카뮈도 같은 묘지에 묻혔다.
3. 사상
3.1. 카뮈의 '부조리'
그의 사상을 정리하자면, 니체 사상에서 인생론 부분을 구체화 시킨 것이다. 카뮈는 부조리를 기존에 내가 가지고 있던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이 무너진 것에서 오는 상태로 정의한다. 가령 세상에 산타클로스가 없다는 것을 깨닫는 어린아이의 고통도 일종의 부조리다. 물론 카뮈 시대 사람들에게 더 일반적인 것은 산타클로스 정도가 아니라 모더니즘에 대한 믿음이 양차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사라진 것에서 오는 부조리였다. 과학과 이성을 백날해봐야 우리가 올바르게 사는 것은 커녕, 모두 전쟁의 잿더미만 남겼다는 분노와 상실감 속에 유럽은 있었다.카뮈는 '부조리'에서 내가 느끼는 고통도 결국 내가 살고자 하는 강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라고 본다. 살고 싶어서 세상을 이해하려고 하고, 의미를 찾으려 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부조리를 견디다 못해서 자살로 나아가는 것은 너무 황당한 일이다. 카뮈는 세상에 대한 나의 신념이 깨졌다고, 즉 세상을 「나의 신념」이라는 하나의 통일된 원칙으로 "조리있게" 합일하는데 실패하여 죽는 것을 가장 어리석은 일로 여긴다. 왜냐면 니체적인 관점에서 보면, 신념이라는 것은 결국 내가 잘 살고, 행복하게 살려다 보니까 생긴 것인데 이를 위해서 죽는 것은 목적과 수단이 뒤집힌 것이기 때문이다.
이 부조리에 관해서 카뮈는 동시대의 실존주의자들에게 매우 비판적이었다.[38] 당시 프랑스의 실존주의자들은 저 유명한 장폴 사르트르를 포함하여 대부분 에드문트 후설의 현상주의에 기반하고 있었다. 그런데 카뮈는 이들 후설 계열은 세상에 어떤 의미도 없다는 것을 또다시 하나의 절대적인 진리로 받아들이는 태도, 다시 말해서 종교화 시키려 든다고 비판한다. 그가 특히 문제의식을 가지는 것은 그들의 이성에 대한 태도이다. 실존주의자들 중에는 이성이 완전한 설명을 제공하지 못하기 때문에 무의미하다고 말하는 주장도 심심찮게 나오는 중이었다. 이에 대해서 카뮈는 니체적인 의견을 제시한다. 그는 이성이 완전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무의미하지도 않다고 주장한다. 어찌되었든 한 관점으로서 각각의 이성은 훌륭한 역할을 수행한다는 것, 다시말해 '상대적 이성'으로서 작동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대적 진리가 아니므로 폐기하라는 것은 카뮈가 보기에는 허무주의로 직행열차를 타는 것이나 다름없다. 카뮈가 보기에 실존주의자들이 이렇게 무진리를 교리화 시키는 태도가 나오는 이유는 그들이 여전히 절대적인 진리를 찾고 싶다는 욕망에 휘둘리고 있기 때문이다. '초월'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카뮈의 비판은 장폴 사르트르에게 특히 모욕적이었다. 프랑스 지성인 대부분이 혐오하는 프랑스 일반 가톨릭 교인들과 별 다를게 없다는 비판으로 다들 이해가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르트르는 그럼에도 카뮈에게 호의적인 대대적인 문학평론을 썼다. 여기서 사르트르는 자신의 철학적 불만은 단 한 문장만으로만 언급하고 넘어가는 인내심을 보여줬다.
3.2. 시지프 신화
부조리의 해결 방법에 있어서 카뮈는 사르트르는 물론, 자신이 모티브로 삼은 니체와도 매우 다른 접근을 한다.니체의 경우에는 초인으로 불리는 것인데, 내가 느끼는 것들은 동물적인 것의 변형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가령 내가 느끼는 사랑과 그 감정에 대한 추구는, 인간이란 동물이 진화해오는 과정에서, 그것이 집단생활을 통한 생존에 유리하게 작용했기에 도태되지 않고 유전되어온 형질일 뿐이다. 다만 선배인 아르투어 쇼펜하우어와 달리 니체는 그렇다고 그게 무의미하다고 보지 않는다. 니체는 인간의 가장 멋진 점을 상상력이라고 여긴다. 비록 시작점은 생존본능이지만 인간은 결국 자신의 생존을 뛰어넘는 것을 추구하는 존재, 즉 '초인'이 되고자 한다는 것이다. 니체는 이렇듯 상상력을 중요하게 여긴다.
사르트르의 경우에는 그가 '고독'이라 말하는 경험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고독은 내가 세상의 다른 사람들의 가치관이나 세계관에 빠져서 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그리고 나만의 독자적인 가치와 세계관을 여러 경험을 쌓으면서 형성해 나가야 된다고 말한다.
이렇듯 큰 맥락에서 니체와 사르트르는 모두 가치관을 스스로 창조해나가는 작업을 해법으로 제시한다. 내가 결국 스스로 생각하고 선택해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카뮈는 그러한 니체의 상상력 추구나 사르트르의 창조 등을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카뮈가 니체나 사르트르와 전혀 다른 종류의 사람을 대상으로 책을 썼기 때문이다. 니체와 사르트르 경우에는 지적이면서 창의적인 것을 추구하는 사람들 가령 자신들과 같은 혁명적인 지식인이나 예술가 등을 염두에 두고 사상을 전개했다. 반면에 카뮈는 그가 고려하는 사람이 노동자라는 것을 명확히 밝힌다. 사상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수동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위치에 놓인 노동자로서는 니체나 사르트르와 같이 스스로 상상력과 지적인 발랄함을 발휘하라는 조언은 사실상 불가능하게 들릴 수밖에 없다. 이러한 노동자 계급의 입장을 생각한 것은 카뮈가 그러한 집안 출신이고, 많은 블루칼러 일을 해본 경험 때문일 것이다. 카뮈는 이러한 일반 노동자 계급의 시점에서 어떻게 부조리를 타파할지를 고민한 것이다.
카뮈는 '초월'을 추구하는 것에 비판적이다. 추상적인 것을 추구하면서 결국 내 삶의 경험을 한계 짓는 다는 것이다. 가령 엄격한 교리에 따라서 수행하는 수도자는 이성과의 경험을 할 수가 없을 것이다. 초월과 영원성과 같이 추상적인 개념의 반대편에는 감각적인 생생한 경험이 있다. 카뮈는 유명한 호색한 돈 후안과 연극배우라는 직업을 예시로 든다. 돈 후안은 눈 앞의 여성만을 열렬히 반복해서 사랑한다는 것이다. 그에게 영원한 사랑이란 것은 없다. 그저 매 순간만이 있을 뿐이다. 배우 또한 마찬가지인데, 작가와는 달리 연극배우는 자신의 활동을 후세에 남길 수가 없다. 연극을 녹화 기록하는 것은 거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결국 배우의 연기는 오로지 매 무대에 오르는 순간에만 존재한다. 바로 피자마자 덧없이 지는 꽃 같은 것이다. 그럼에도 배우는 돈 후안과 마찬가지로 매 순간에 자신의 최대를 담아 '소진'시키며 연기한다.
매 순간을 '소진'시키는 것은 카뮈에게 중요하다. 모든 진리는 무의미하다. 그렇다면 결국 남는 것은 감각적 경험 뿐이다. 카뮈가 보기에는 절대적인 진리가 없기 때문에 그 어떤 경험도 우열이 있을 수는 없다. 가령 화가의 가난한 생활은 은행가가 보기에는 무가치한 경험이지만, 비평가가 보기에는 가장 풍부한 영감의 경험일 수도 있다. 은행가도 비평가도 상대적 진리를 말하기 때문에 경험을 딱히 딱 얼마짜리 경험이다 하고 가치를 매길 수가 없어지는 것이다. 여기서 카뮈는 재밌는 생각을 하는데, 경험의 질의 차이가 무의미하니까 경험의 '양'이 많은게 좋은 것이란 거다. 그래서 거의 똑같은 수작을 여성에게 피우는 돈 후안이나 거의 같은 연기를 반복하는 배우의 삶이야 말로 지극히 모범적인 삶이 되는 것이다.
같은 이유로 똑같은 일을 반복하면서도 견뎌내는 지극히 현대의 일반 노동자적인 삶 또한 영웅적인 삶이다. 카뮈는 이를 '시지프 신화'에 빗대어서 서술한다. 시지프는 신의 미움을 받아서 산 꼭대기에 바위를 올려놓는 끝없는 형벌을 받는 그리스 신화의 인물이다. 산 정상이 꼭지점 같이 뾰족하기 때문에 그 위에 동그란 바위가 세워질리가 만무하고, 그래서 힘들게 올려놓은 바위는 번번히 다시 산밑으로 굴러 떨어진다. 매우 무의미한 노동이 반복되는 삶인 것이다. 하지만 카뮈는 시지프가 그럼에도 이 노동을 멈추지 않는다는 점을 주목한다. 굴러떨어진 바위를 쫓아 산을 내려오면서 시지프는 고통과 허무함과 무의미함을 뼈저리게 느끼지만, 그럼에도 이에 무너지지 않고 받아들이고, 때로는 악에 받쳐서 또 때로는 행복하게 '반항'을 하며 주체성을 유지한다. 이렇게 삶의 무의미함을 인식하면서도 이를 꿋꿋이 견디고 받아들이는 것이 인간다운 삶이라고 카뮈는 주장한다.
4. 작품 특징
'부조리 문학'이란, 세상에는 어떠한 불변의 정의나 법칙이 없다는, 아니 있다 하더라도 이해조차 할 수 없는 '부조리'를 보여주며 이에 주인공이 어떻게 대처하는지를 보여준다. 그렇기에 허무주의적 혹은 불가지론적인 태도를 가지는 경우가 많다. 뿐만 아니라, 부조리 문학은 주로 블랙/다크 코미디가 대다수이다.초기 부조리 문학은 대체로 부조리를 매우 괴롭고 혼란스러운 것으로만 표현한다. 때문에 주인공이 보일 수 있는 가장 용기 있는 태도는 기껏해야 고도를 기다리며와 같이 체념 뒤의 냉소 정도에 불과하다. 하지만 카뮈는 다르다. 그는 오히려 부조리를 그 사람이 살아있고, 살고 싶어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으로 본다. 그래서 그다지 나쁘게 여기지를 않는다. 그리고 더 나아가 구체적으로 부조리와 함께 어떤 식으로 살아가야 할지 방향을 제시한다.
카뮈가 제시하는 해결책은 '반항'이다. 세상이 나를 배반하는 듯하고, 갑자기 모든 친숙했던 것이 외계적인 것으로 변하는 것이 부조리라면, 카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악받치듯 저항하는 것이 인간이고 또 그게 바람직한 것이라고 본다.그래서 초기 부조리 문학의 등장 인물들이 멘붕과 넋이 나간 듯 한 대사를 늘어놓다 끝나는 반면에, 카뮈의 《이방인》 주인공은 격렬히 반항하는 끝에 죽음을 맞는다. 카뮈의 표현에 따르면 부조리 문학의 인물들은 "철학적 자살"을 한 것에 불과하지만, 그의 작품 주인공은 세상 앞의 "사형수"가 되기를 스스로 택하고 앞으로 걸어 나온다는 것이다. 그래서 카뮈는 세상이란 폭력 앞에 스스로 처형당하기를 택하는 인물들을 진정한 영웅으로 표현한다.
5. 작품 목록
5.1. 소설
- 《이방인》(L'Étranger, 1942)
- 《페스트》(La Peste, 1947)
- 《전락》(La Chute, 1956)
- 《행복한 죽음》(La Mort heureuse, 1971)
- 《최초의 인간》(Le Premier Homme, 1994)
5.2. 희곡
- 《칼리굴라》(Caligula, 1944)
- 《오해》(Le Malentendu, 1944)
- 《포위 상태》(L'État de siège, 1948)
- 《정의의 사람들》(Les Justes, 1950)
- 《악령들》(Les Possédés, 1959)
5.3. 에세이, 철학서
- 《안과 겉》(L'envers et L'endroit, 1937)
- 《결혼》(Noces, 1938)
- 《시지프 신화》(Le Mythe de Sisyphe, 1942)
- 《반항하는 인간》(L'Homme révolté, 1951)
- 《여름》(L'été, 1953)
- 《단두대에 대한 성찰》(Réflexions sur la guillotine, 1957)
- 《저항, 반항, 죽음》(Résistance, rébellion et mort, 1960)
5.4. 단편집
- 《추방과 왕국》(L'Exil et le royaume, 1957)
- 〈간통한 여인〉(La Femme adultère)
- 〈배신자 또는 혼란스러운 정신〉(Le Renégat ou un esprit confus)
- 〈침묵하는 사람들〉(Les Muets)
- 〈손님〉(L'Hôte)
- 〈작업 중인 예술가〉(Jonas ou l'artiste au travail)
- 〈자라는 돌〉(La Pierre qui pousse)
6. 어록
어제의 범죄를 벌하지 않는 것은 내일의 범죄에 용기를 주는 것과 똑같이 어리석은 짓이다. 공화국 프랑스는 관용으로 건설되지 않는다.[39]
자살이란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없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다.
비록 인간의 정의가 너무나 불완전하다고 해도, 인간의 정의를 완수하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선택이다.
원칙은 큰 일에나 적용할 것. 작은 일에는 연민으로 충분하다
우리는 정직함을 필사적으로 견지함으로써 그 불완전함을 교정하고자 한다.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자살이다.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를 판단하는 것이야말로 철학의 근본 문제에 답하는 것이다.[40]
산꼭대기를 향한 투쟁만으로도 인간의 마음을 채우기에 충분하다; 우리는 시지프가 행복하다고 상상하여야 한다.[41]
반항하는 인간이란 무엇인가? '농(non)'이라고 말하는 사람이다.[42]
삶에 대한 절망 없이 삶에 대한 사랑도 없다.
지성이 아름다움 속에 몸을 던지면 허무로 식사를 하게 된다. 위대함이 목을 죄는 듯한 이 경치들 앞에서는 인간의 사념들 하나하나는 인간에 대한 부정일 뿐이다.
작가는 누구나 자신의 책 속에서 반드시 자신에 관해 글을 쓰며 자신의 모습을 그려 보인다는 식의 생각은 낭만주의가 우리에게 물려준 유치한 발상들 중의 하나이다.
나는 내게 맡겨진 이 삶을 사랑한다. 이 삶의 이야기를 자유롭게 해보고 싶다. 이 삶은 나의 인간 조건에 대하여 긍지를 갖게 해준다. "뭐 그렇게 자랑스러워 할 건 없어."라고 사람들은 흔히 말하지만, 분명 자랑스러워할 만한 것이 있다. 이 태양, 이 바다. 젊음이 용솟음치는 이 가슴, 소금맛이 나는 나의 몸, 그리고 부드러움과 영광이 노란 빛과 푸른 빛 속에서 서로 만나는 장대한 무대장치가 바로 그것이다.
왜냐하면 한 인간에게 있어서 자신의 현존을 깨닫는다는 것은 곧 더 이상 아무것도 미래에 대하여 기대할 것이란 없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만약 영혼의 상태를 나타내는 풍경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가장 천박한 풍경일 것이다.
'1분 후에, 1초 후에'하고 그는 생각했다. 올라오던 것이 멈췄다. 그리고 그는 수많은 돌들 가운데 섞여 있는 돌이 되어 가슴 가득한 희열 속에서 움직이지 않는 세계의 진실로 돌아갔다.[43]
7. 여담
- 2009년 12월 프랑스 대통령 니콜라 사르코지는 카뮈의 문학을 깊이 존중한다고 말했으나 정작 프랑스 좌파와 카뮈의 딸은 이를 반기지 않았다. 공산당에 가입하고 좌익사상의 활동가로 지냈던 카뮈의 문학을 우파 대통령인 사르코지가 존중한다는 것이니. 2009년 11월에 사르코지는 알베르 카뮈의 팡테옹 안장 계획을 발표했었는데, 프랑스 국립묘지 안장에 관한 최종적이고 궁극적인 결정권이 대통령에게 부여되어 있다는 점에서 그것은 충분히 실행 가능한 구상이었으나 여론이 좋지 않아 무산되었다.
- 원래 장래 희망은 축구 선수였고 알제 대학 재학 시절 축구부에서 골키퍼로 맹활약했으나 결핵이 재발하면서 축구를 그만두게 되었다. 배우 활동에도 관심이 있었으나 여의치 않아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원래 작가가 되고 싶다는 꿈도 없었고 소설은 그냥 자기 머리에서 나오는대로 썼다고 한다. 그러나 책을 좋아하기는 했던 듯싶다.《작가수첩》이라고 이름붙인 메모장에다가 아이디어가 머리속에 떠오르면 그 즉시 메모했다고. 《작가수첩》은 카뮈 사후에 출판되었고,[44] 한국에도 번역 출판되었다.
- 카뮈의 공식 프로필 키는 176cm로 기록되어 있고, 이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프랑스 성인 남자 평균 키가 170cm 언저리였다는 걸 감안하면 작지 않은 키다.[45] 그러나 허버트 R. 로트먼이 쓴 카뮈 평전에서 그가 만난 카뮈의 대학 시절 축구 친구들이 카뮈를 작은 체구였다고 회상하고 있는 걸 보면 역시 176cm는 프로필상의 키고, 르네 샤르 등의 주변 인물과 찍은 사진들로 보건대 실제 키는 170~173cm 정도였던 걸로 추정된다.[46] 골키퍼로서는 상당히 불리한 피지컬로 맹활약했다는 걸 생각하면 축구 재능도 상당했음을 알 수 있다. 이 골키퍼조차 본인이 자신이 있어서 선택한 포지션이 아니라, 축구는 하고 싶은데 체구도 작고 어릴 때부터 몸도 허약한 편이라 필드 플레이어처럼 몸싸움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것이다.
- 카뮈가 20대에 지인에게 보낸 편지에는 공산당에 가입은 하지만 결코 어떤 이념에 맹목적으로 세뇌당하진 않을 거라는 문구가 있다. 후일 알제리 전쟁에서 보여준 애매한 태도도 그의 성향이 영향을 끼쳤을 가능성이 있는데, 그는 괴물이 되어버린 자본주의든, 패배한 파시즘이든 이미 부작용을 드러내기 시작한 사회주의든 권력화한 이념은 부조리를 양산하기 마련이기에 노동자들의 소규모 자치 조직을 중심으로 사회를 재편하는 방향(아나코 생디칼리슴)에 우호적이었다. 때문에 장폴 사르트르를 비롯해 당시 많은 사회주의자들과 갈등을 빚었다.
카뮈의 알제리 독립 반대도 이러한 성향의 일면이라는 분석이 있다. 알제리가 독립해도 새로운 제국주의 집단의 탄생일 뿐이라는 인식을 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 특히 알제리 독립을 이끌던 민족해방전선은 친소련적인 급진 사회주의 정당이었고, 카뮈는 이들의 과격하고 폭력적인 노선에 매우 비판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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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46세의 나이로 요절했다.[2] 카뮈는 이미 1936년부터 시몬의 불륜을 알아차려 별거를 하고 있었다. 이후 1940년에 법적으로 시몬과의 이혼이 확정되자마자 결혼을 약속했던 프랑신과 결혼식을 올렸다.[3] 수학교사 겸 피아니스트로 활동했다.[4] 1956년 8월 31일, 《르 몽드》지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종교적 입장에 대해 "나는 신을 믿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무신론자인 것은 아니다."라고 하였다.[5] 공식 프로필 상에서의 키다. 그의 자세한 신장에 대해서는 기타 항목 참고.[6] 1956년 헝가리 혁명을 소련이 강경하게 진압한 것을 두고 소련을 비롯한 공산주의 정당들이 더이상 진정한 공산주의를 추구하고 있지 않다고 비판하며 프랑스 공산당을 탈당했다. 이 때문에 장폴 사르트르와 갈등을 빚기도 했다.[7] 인간이 삶의 부조리(의미를 갈망하는 인간과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우주)를 인식했을 때, 자살을 통해 부조리를 회피하는 것이 아닌 반항과 자유, 열정을 통해 부조리를 직시하며 살아가는 방법을 제시한다.[8] 노벨문학상 역사상 최연소 수상자는 1907년의 러디어드 키플링(수상 당시 41세)이다.[9] 그가 실존주의로 불리기를 거부한 이유는 그가 동시대에 활동한 실존주의 철학자들에게 비판적이었기 때문이다. 실존주의자들이 고정된 진리의 거부를 떠들지만 실제로는 그 고정된 의미의 거부를 또다시 고정된 진리로 만들려는 태도를 보인다는 것이다. 이 시각은 그의 철학에서 가장 핵심적인 문제의식이다.[10] 카뮈에게 어깨동무를 한 남자가 카뮈의 형이다.[11] 알제리계 출신으로 유명한 프랑스인은 지네딘 지단이 있다. 지단의 아버지인 스마일 지단(Smail Zidane)은 알제리 전쟁 당시 프랑스군에 협력했던 알제리 출신 민병대인 아르키(harki) 출신이라는 의혹을 사기도 했다. 하지만 지단의 부모는 전쟁 발발 이전에 프랑스로 건너왔으며, 지단 본인도 자신의 부친은 아르키가 아니라는 주장을 하고 있다.[12] 알베르 카뮈의 증조부(뤼시앵에게는 조부) 클로드 카뮈가 1830년대 즈음에 알제리 해안지대에 정착했다. 다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뤼시앵은 고아원에서 자랐다고 한다.[13] 1882년 알제에서 태어났는데 부모가 스페인 왕국 발레아레스 제도 출신의 스페인인이었다. 카뮈는 스페인을 혈통에 의한 자신의 제2의 조국이라 칭한 바 있다.[14] 현대에 아키텐인이나 부르고뉴인이란 말이 없고 다 프랑스인이다. 즉 알제리는 프랑스가 지배하는 외지가 아니라, 노르망디나 아키텐과 같은 행정구역들처럼 그냥 프랑스의 일부였다는 것이다.[15] 알제리는 1962년에 프랑스로부터 독립하기 전까지 하나의 독립 국가로 존재한 적이 없었고, 유사 이래 항상 특정 국가의 일부로 존재했던 지역이다. 쉽게 말해 프랑스는 알제리라는 독립적 정체성이 있는 '국가'를 병합한 게 아니라, 바로 이전까지 오스만 제국의 영토였던 알제리라는 '지역'을 자국 영토로 편입한 것이다. 알제리는 국가 상태에서 프랑스에 병합당한 게 아니고 국가였던 적도 없었기 때문에 카뮈가 살았던 당시 기준에서는 '프랑스령 알제리', '프랑스계 알제리인', '알제리계 프랑스인' 같은 말은 모두 없었다. 게다가 식민지였던 인도차이나나 보호령이었던 모로코 등과 달리 알제리는 프랑스 본토의 일부로 여겨졌으며 본토의 행정망이 그대로 이식되었다. 이것은 알제리 전쟁에서 프랑스 우파가 알제리 독립을 반대한 논리 중 하나였다.[16] 이러한 사실은 그의 작품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가령 그의 대표작인 이방인이나 페스트는 배경이 각각 현재 알제리의 도시인 알제와 오랑인데, 작품 내에서 등장하는 인물은 이방인에서 그냥 스쳐 지나가는 비중으로 나오는 아랍인들을 제외하고 전부 프랑스인이다. 카뮈가 인물 설정을 이렇게 한 이유는 그가 알제리를 프랑스의 일부로 여겼을 뿐더러, 당시 알제리의 대도시들은 전부 프랑스계, 유럽계가 주류였고 아랍계가 비주류였기 때문이다. 페스트에서는 첫 장부터 '오랑 시는 프랑스의 한 도청 소재지에 불과하다.'라는 문장이 나온다.[17] 알베르 카뮈 전집을 번역한 김화영 교수에 의하면, 프랑스 현지에서 유학할 당시 프랑스어로 쓰인 프랑스어 사전(불불 사전)에 예문으로 카뮈와 지드의 문장이 다수 실려 있었다. 이는 카뮈가 사용한 프랑스어가 표준 프랑스어에 적합했다는 뜻이다. 알제리는 현재 아프리카에서 가장 넓은 대국이지만 지리적 연유로 도시들은 지중해 연안에 집중돼 프랑스 식민 지배의 영향으로 집중 개발되어 있었고 내륙에는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데, 카뮈 역시 프랑스 본토와 가까운 연안 지역에서 태어난 인물이고 부모도 프랑스어를 쓰니 프랑스어를 모국어로 습득할 환경은 프랑스 본토인들과 차이가 없었다. 현재 알제리의 공용어인 아랍어와 베르베르어는 당연히 할 줄 몰랐다.[18] 오늘날의 벨루이즈다드 가.[19] 이에 카뮈는 미완성 유작인 《최초의 인간》에 그와 함께했던 감동적인 기억을 적어놓았다.[20] 이때의 경험을 자신의 대표작 《이방인》에 주인공 뫼르소를 통해 드러냈다.[21] 프랑스의 고등학교 졸업 시험이자 대학 입학 자격 시험이다.[22] 그르니에의 산문집 '섬'이 알려져 있다. 카뮈의 '섬' 서문에는 '오늘 처음으로 이 '섬'을 펼쳐보게 되는 저 낯모르는 젊은이를 뜨거운 마음으로 부러워한다'는 유명한 문장이 포함되어 있다.[23] 이들의 서한집도 번역되어 있다.[24] 이후에도 카뮈의 결핵은 계속해서 그의 꿈과 계획에 발목을 잡았다.[25] 프랑스의 엘리트 양성을 위한 전문 교육기관들을 말한다.[26] 프랑스의 그랑제콜 중 하나로, 초일류 고등교육기관이다. 카뮈는 이곳에 진학해 대학 교수가 되길 꿈꿨다. 실존주의를 대표하는 철학자이자 훗날 카뮈와 자주 교류한 장폴 사르트르가 이 학교 출신이다.[27] 당시 카뮈는 형편이 넉넉치 않았던 터라 결혼 예물이 10달러짜리 구리 반지가 전부였다.[28] 이때 카뮈는 갑작스런 헤어짐과 귀양살이로 인한 충격을 「작가수첩」에 "마치 쥐새끼 같은 꼴이 되었구나!"라고 기록했다. 또한 단기간에 전쟁, 질병, 이별, 귀양살이 등 온갖 고통스러운 경험을 겪은 카뮈는 자신과 같이 전쟁 속에서 고통을 겪은 사람들의 이미지를《페스트》에 적어놓았다.[29] 알베르 마테(Albert Mathe)라는 가명을 사용했다. 이외에도 생년월일, 출생지, 부모 모두 허위 정보이다.[30] 프랑스의 소위 나치 청산 과정에서는 추악한 무리수도 많았다. 대표적으로 점령군 치하에서 단지 생존을 위해 독일군에게 몸을 판 여자들을 창녀, 매춘부라 비난하며 광장 한복판에서 머리를 박박 밀고 돌을 던져댔다. 심지어 사적인 감정을 위해서 무고한 사람을 나치 부역자로 누명씌워서 처형시키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당장 패탱조차 많은 논란이 있다.[31] 시몬 드 보부아르 같은 지식인은 브라지야크의 사면 탄원서에 서명하기를 거부했다.[32] 이후 7월에서 9월 사이에 9만 6,000부가 판매되었다.[33] 당시 미국을 방문 중이던 장폴 사르트르는 하버드 대학교에서 열린 강연에서 예정된 주제 대신 즉흥적으로 이 작품에 대해 이야기했다.[34] 당시 사르트르는 소련을 방문하는 등 공산주의에 매우 우호적인 시선을 가지고 있었기에 카뮈와는 대립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옛 문학 동지의 정을 생각해서 프랑시스 장송이라는 제자의 서평을 사르트르의 잡지인 '현대' 지에 싣는 형식으로 에둘러서 비판했지만 결국 들통났고, 카뮈도 장송이 아닌 '현대지 발행인(사르트르)' 명의 앞으로 반박문을 편지로 써서 맞서다가 결국 죽을 때까지 철천지원수가 되었다.카뮈 대 사르트르 논쟁 (경향신문)[35] 카뮈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활발하게 활동했던 지하 신문으로, 기사에서 카뮈를 '우리 중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이라고 치하했다.[36] 카뮈의 코트에는 기차표가 있었는데, 원래 전날 아내인 프랑신 카뮈와 같이 기차를 타려고 했다. 하지만 카뮈가 갈리마르의 차를 타고 가기로 하자 프랑신 카뮈는 먼저 기차를 타고 파리로 돌아갔다.[37] 미완성임에도 카뮈의 마지막 소설이라 그런지 미완성인 채로 출판되었으며, 국내에서도 정식 번역되어 출판되었다.[38] 실존주의자들이 부조리를 하나의 결론으로 "받아들이고 동의했다"는 형식으로 부조리를 해소해버린다는 지점에서 카뮈는 이것을 철학적 자살이라고 표현한다.[39] 프랑스의 2차대전 전후 적극적인 나치 부역자 청산을 주장하면서 한 말.[40] 시지프 신화의 첫 두 문장.[41] 시지프 신화의 마지막 문장.[42] 반항하는 인간. 농은 영어의 No에 대응하는 프랑스어다.[43] 행복한 죽음의 마지막 구절.[44] 방대한 양 때문에 나뉘어 출판되었다.[45] 참고로 그의 방계 후손인 세인 카뮤는 프랑스계 미국인으로 일본에서 활동하는 탤런트인데 185cm의 장신이다.[46] 5피트 6인치 168cm. https://www.nytimes.com/books/first/t/todd-camus.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