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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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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80,000명(이라크 내전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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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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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스탄시리야 마드라사
바그다드의 모습

1. 개요2. 역사
2.1. 고대2.2. 아바스 칼리파 조의 수도
2.2.1. 알 만수르의 건설2.2.2. 초기 도시 구조2.2.3. 세계 최대의 도시2.2.4. 일시 쇠퇴와 중흥2.2.5. 쇠퇴와 침체기2.2.6. 안정기2.2.7. 칼리파 vs 술탄2.2.8. 부흥기와 종말
2.3. 중근세
2.3.1. 티무르의 2차 파괴2.3.2. 오스만 vs 사파비
2.4. 오스만 제국2.5. 근현대2.6. 바트당 정권 시기2.7. 현대
3. 지리
3.1. 그린 존
4. 경제5. 이슬람 성지
5.1. 쉬아 열두이맘파: 카지미야5.2. 순니 하나피파: 아자미야
6. 언어별 명칭7. 창작물에서8.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이라크 수도이자 최대 도시. 중세 이슬람 제국수도 중 하나였다. 당대 명칭은 마디나트 알 살람[3], 즉 '평화의 도시'였다. 하지만 별명과 맞지 않게 몽골 제국에게 파괴되었으며, 현대에는 이라크 내전ISIL로 인해 정세가 혼란해지면서 원래 인구보다 많이 줄어들었다가 그나마 조금씩 안정되면서 회복세에 있다. 티그리스강이 도시를 지난다.

바그다드는 "신의 축복을 받은 도시" 라는 뜻이다. 오랜 역사를 지닌데다가 이라크의 최대도시인만큼 명소가 많지만 아직까지 한국에서 이라크가 여행금지국가로 지정되어 있기 때문에 현재는 외교부 허가 없이는 방문할 수 없다.

아드하미야(Adhamiyah), 카흐(Karkh), 카라다(Karrada), 카디미야(Kadhimiya), 만수르(Mansour), 사드르시티(Sadr City)[4], 알라시드(Al Rashid), 루사파(Rusafa), 뉴바그다드(Tisaa Nissan = 4월9일) 등 9개 구가 있다.

2. 역사

2.1. 고대

파일:이란 이라크 지구.jpg
바그다드 서쪽 외곽의 카시트 왕조 시기 유적인 두르 쿠리갈주[5]지구라트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중심부에 위치한 도시지만, 중심지 역할은 고대 이래로 바빌론셀레우키아, 크테시폰이 수행해 왔다. 바빌론은 바빌로니아의 도읍으로 번창했고, 셀레우키아는 셀레우코스 왕조의 대도시로 번성했고, 크테시폰은 아르사케스 왕조 파르티아 제국과 사산 왕조 페르시아 제국의 수도로 번영했다. 기원전 14세기에는 카시트 왕조의 쿠리갈주 1세가 바그다드 중심에서 서쪽으로 약 30km 떨어진 곳에 거대한 아칼쿠프 지구라트를 비롯한 도시를 건설했으며 이 도시 유적의 위치는 현재 바그다드 주에 속해 있다.

역사적으로 천 년 이상 번영하던 바빌론은 기원전 3세기 셀레우키아에 대체되었고, 셀레우키아는 다시 기원전 1세기 무렵 크테시폰에 흡수되었다. 한편 사산 제국 시기 크테시폰의 교외 마을로 형성된 바그다드는 페르시아어로 '신이 하사한'의 뜻을 지녔고, 아람어를 쓰는 아랍계 나바테아인이 거주했다. 7세기 가량 서아시아 최대 도시로 번영하던 크테시폰은 651년 사산 왕조가 멸망하면서 도읍지로서의 기능을 상실했고, 마다인으로 축소되었다. 그후 이슬람 세계로 편입된 서아시아의 중심지는 다마스쿠스(현재 시리아의 수도)로 옮겨졌다.

2.2. 아바스 칼리파 조의 수도

파일:attachment/baghdad.jpg
출처는 BBC 뉴스 일러스트.

2.2.1. 알 만수르의 건설

"바로 이곳이 내가 도읍을 건설할 곳이로다. 물자들이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 운하 등을 통해 이곳에 당도할 수 있을 것이다. 군대와 백성들을 부양할 수 있는 곳은 바로 여기 뿐이다. 실로 이곳이 내가 살 곳이고, 나의 후예들이 통치할 곳이다"
새 수도를 정하기 위한 탐사 도중 칼리파 알 만수르가 남긴 말. 앗 타바리의 기록.

750년 3차 피트나 당시 압바시야 혁명으로 우마이야 왕조를 멸망시키고 이슬람 세계를 장악한 아바스 왕조는 왕가의 지지세력인 후라사니 아랍인 및 페르시아인의 고향에 가까운 메소포타미아 일대를 중심지로 삼았다. 하쉬미 이맘을 칭하며 쉬아 세력을 포섭하기 위해 우선 쿠파 (나자프)에서 대관식을 올린 앗 사파흐는 현 팔루자 일대인 안바르에 알 하쉬미야란 신도시를 세워 수도로 삼았다.

다만 이는 임시수도 격이었고, 그의 동생이자 후계자인 알 만수르는 제국의 규모에 걸맞은 페르시아식 원형 도시를 건설하기로 했다. 역사가 앗 타바리에 의하면 기독교 수사들이 안젠가 티그리스 강변의 바그다드에 미클라스란 왕이 대도시를 건설할 것이라 예언했고, 이 이야기를 들은 알 만수르는 자신의 아명이 미클라스였다며 좋아했다 한다.
"건설하라. 알라께서 너희를 축복하시리라."
알 만수르, 첫 벽돌을 놓으며

역시 페르시아식 원형 도시 구조를 가진 발흐 출신의 바르마크 가문의 주도 하에 티그리스 강변의 바그다드 일대에 대규모 신도시 건설이 추진되었다. 알 만수르를 수행하는 두 페르시아인 천문학자 나우바크트 아바지와 마샬라 빈 아타리는 풍요를 뜻하는 불과 사자 (레오)의 달인 7월을 공사 개시 달로 잡았고[6], 762년 7월 30일 알 만수르는 친히 그 첫 삽을 떴다.

이슬람권 각지에서 불러모은 수천여의 설계가, 공학자, 법률가, 측량가, 목수, 대장장이 등이 바그다드로 몰려들었다. 또한 도합 10만여명의 일꾼들이 투입되었고, 알 만수르는 그들의 보수를 일시불로 지급하는 호탕함을 보였다. 각 면이 46cm인 정사면체 모양의 진훍 벽돌로 성벽과 건물들이 세워졌고, 강둑과 주요 건물들에는 대리석도 쓰였다. 전승에 따르면 하나피파의 교조 아부 하이파가 벽돌 갯수 통계와 식수 및 벽돌 주조용 운하 개설을 맡았다고 한다.[7]

763년, 중앙에 녹색 돔을 지닌 금문 (밥 알 다합) 궁전[8]과 그 동남쪽의 대사원 (알 만수르 사원)[9]이 우선 완성되자 알 만수르는 평화의 도시란 뜻인 마디나트 앗살람 (مدينة ااسلام)이라 명명하고 입주했다. 다만 이 지명은 민간에 정착하지 못하여 행정 상으로만 쓰였고, 결국 기존 페르시아어 지명인 바그다드에 대체되었다. 곧 바그다드는 남쪽 20km 지점의 기존 대도시인 크테시폰을 대체했다. 시가지는 점점 확장되어 원형도시, 앗 샤르키야 (알 카르크), 아스카르 알 마흐디 등 세 구역으로 분할되었다.

2.2.2. 초기 도시 구조

파일:바그다드 원형도시.png
원형 도시 일대의 상세 지도[세부] 다만 원형도시는 고고학적 조사가 거의 이루어지지 못한 탓에 거의 기록상으로만 모습을 추측한 것이다.[11]

알 만수르의 원형 도시는 피루자바드, 다라브처럼 원형 성벽을 두르고 중심부에 종교/정무 구역을 두는 페르시아식 도시 구조로 세워졌다. 대부분의 건물들은 기존 메소포타미아 양식대로 진훍 벽돌에 갈대를 더했고, 중심부에 지어진 금문 궁전의 걍우 고르나 사르베스탄의 사산 왕궁처럼 전면의 이완 (높은 아치)와 높은 돔을 지닌 중심 건물로 구성되는 페르시아 양식으로 세워졌다. 대사원의 예배당 역시 수십개의 목재 기둥들로 평평한 천장을 지탱하는 페르시아의 신전 건축이 반영되었다. 766년[12]에 완공된 둘레 10km의 원형 성벽은 콘스탄티노폴리스처럼 2중으로 구성되었다. 외성은 높이 30m에 두께 44m였고, 내성은 두께 50m에 성탑들로 보강되었다. 외성 밑에는 보축된 벽과 해자가 있었다.[13]

원형도시에는 4개의 성문이 있었다. 남쪽의 쿠파, 바스라 성문은 유프라테스의 물을 티그리스로 끌어오는 사라트 운하와 접했다. 쿠파 성문은 메카 순례의 출발지이기도 했다. 서북쪽의 시리아 (샴) 성문 역시 운하들과 접했고, 하르비야 구역으로 이어졌다. 또한 안바르를 거쳐 팔미라 사막로를 통해 다마스쿠스로 이어졌다. 동북쪽의 호라산 문은 티그리스 강과 쿨루드 강에 접했고 동안으로 건너가는 다리로 이어졌다. 동시에 이름답게 호라산 도로의 시발점이었다. 중심부에서 4개의 성문으로 이어진 곧은 대로의 길가에는 아치 형태의 상점들이 있었고, 작은 길이나 골목들이 갈라져 나와 시가지로 이어졌다. 본래 설계 시에는 원형도시 내부가 주거 & 상업 공간으로 채워질 예정이었지만, 최종 설계안에서는 바깥 부분에만 민간 건축이 허가되는 것으로 바뀌었다. 이는 칼리파 알 만수르의 개입 때문이었다.

원형도시에 대한 애정이 컸던 알 만수르는 도심부가 시끄럽거나 붐비지 않도록 성 밖의 알 카르크 일대를 시장으로 설정하여 주거와 상업 구역을 구분했다.[14] 또한 밤에는 성문을 통한 상업 왕래를 금하여 차분한 분위기를 유지했다. 중심부인 금문 궁전과 대사원 주변에도 궁성를 두르고 일종의 그린벨트를 두어 정무/종교 구역과 민간 구역을 구분했다. 궁전과 대사원 사이에는 높은 벽이 있었고, 인근에는 칼리파 전용 수변 공원도 있었다. 궁전 바깥의 시리아 문 방향에는 근위 기병대 병영과 본래 근위 기병대장 및 사힙 앗 슈르타 (경무감)의 응접실 용으로 계획되었다가 후일 공공 예배당으로 쓰인 두 회랑이 있었다. 그외에는 중심부에서의 건축이 금지되었다.

중심부를 둘러싼 그린벨트에는 도로 외에 녹지만이 있었다. 그린벨트 바깥에는 왕자들의 궁전, 각종 관공서들, 궁정 시종들의 거처 등이 세워졌다. 원형도시를 관리하기 위해 고용된 인원도 적지 얺았다. 칼리파 직속 근위대와 경찰 병력 외에도 야간 초병, 램프 점화원, 건강 검진원, (상품의 무게와 질을 감정한) 시장 감시원인 무하타시브, 채무 추심원 등이 공무원으로 고용되었다. 한편 48m[15] 높이를 자랑한 금문 궁전의 녹샘 돔 꼭대기에는 창을 지닌 기마상이 있었다. 민담에 따르면 기마상의 창끝은 적이 오는 방향으로 종종 바뀌었다고 한다. 다만 금문궁전은 772년 원형도시의 호라산 성문 밖의 언덕에 쿨루드 궁전이 세워진 이래로 점차 칼리파들의 외면을 받게 되었다.[16]

바그다드의 초창기 주민들은 크게 칼리파가 이주시킨 군대 및 그 가족과 경제적 이유로 정착한 현지 나바테아인 및 아랍인 평민들로 구성되었다. 후라사니 아랍인 및 페르시아인으로 구성된 전자는 원형도시 동북쪽 하르비야 (حربية) 정착했다. 공신 세력인 이들은 아브나 앗 다울라[17], 즉 국가의 아들들로 불렸다.[18] 하르비야는 세부적으로 마르브 알 루드 (마르우르드)[19] 출신들로 구성된 마르우루디야, 파르스 출신들로 구성된 푸루스[20], 호라즘 출신들의 구역 등이 있었고 부하라 출신들이 세운 모스크도 있었다. 건설 당시 이후에도 9세기 초까지 몇 차례 더 페르시아 인들이 유입되며 시가지의 건축 양식도 점차 변화하게 된다.

원형도시 내에는 많은 공원과 정원이 있어 쾌적했고 이를 활용한 저택과 산책로가 있었다. 티그리스 강에서 끌어온 운하들로 물이 풍부했기에 분수대와 공공 욕탕 (함맘)도 많았는데, 하룬 알 라시드 시기에는 수천개에 달했다고 한다. 또한 길은 정기적으로 세척이 이루어지는 등 당시 바그다드는 세계에서 가장 청결한 도시였다. 이러한 원형도시는 특권층만을 위한 공간이 아니었는데, 성문 통행세 (門稅)가 저렴하여 서민들도 왕래할 수 있었다. 시내에는 체스 등을 둘 수 있는 게임장과 공연장 뿐만 아니라 주점도 있었고 거리에서는 알-카스쿤[21]이라 불린 이야기꾼이 천일야화 등을 읊는 등 전반적으로 전성기 로마나 당나라와 유사한 활기찬 도시상을 보였다.

2.2.3. 세계 최대의 도시[762-836]

파일:Baghdad_150_to_300_AH.png
원형도시와 바그다드 시가지 전경

아바스 왕조 치하의 바그다드는 이슬람 황금기에 명실상부한 이슬람 세계의 중심지로서 화려한 문명을 꽃피웠으며, 문화, 예술, 정치, 종교의 중심지로서 번영했다. 당나라 시대까지 번영한 실크로드의 한 축으로서 바그다드는 세계적 규모의 경제 교류의 핵이었다. 한때는 인구가 200만명에 달한다고 칭해질 정도로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도시였다.[23] 당시 바그다드와 맞먹는 규모의 도시는 당나라의 수도인 장안동로마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 뿐일 정도였다. 역사상 처음으로 수표가 쓰인 것도 아바스 왕조 하의 바그다드에서였다. #

알 만수르는 무역로의 교차, 온화한 기후, 강을 끼고 있어 물을 구하기 쉽고 방어에 유리한 지형 등을 고려하여 수도 위치를 정했기에 바그다드는 빠르게 발전하였다. 교통의 요지이고 안전하며, 기후까지 온화한 바그다드에는 전세계 각지에서 다양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초기 주민들은 대부분 압바시야 혁명을 이끈 군인과 그 가족 등 엘리트 층이었는데, 가진 것은 무력 뿐이었던 그들이 필요한 물품과 서비스를 충족시키기 위해 초기부터 상업이 발달하였다. 상인들이 몰리며 교통이 좋은 성문 주변에는 시장 열렸고, 다양한 물품 사기 위해서 더 많은 상인들이 왕래하는 연쇄 효과를 내었다. 상술했듯 수표 등 예금 시스템도 있었기에 외지인들도 상업에 쉽게 뛰어들 수 있었다. 또한 티그리스 강과 페르시아 만을 통해 인도와 중국, 육상 교통로를 통해 이집트나 아르메니아 등 원거리 교역도 활성화되었다.

이로써 이슬람권 외부의 언어, 사상, 지식도 자연스럽게 전래되어 문화적 다양성에 이바지하였다. 왕래하는 이들 중에서는 지식인들도 많았고, 특히 엘리트층의 초청으로 더욱 유입되었다. 역대 칼리파들은 대부분 학문에 조예가 깊었고, 도서관과 학교들을 후원했다. 마침 탈라스 전투로 제지 기술이 아바스 왕조에 전래된 상황에서 바그다드는 제지 산업의 중심지로 떠올랐고, 많은 서점과 도서관이 세워졌다. 대부분의 도서관들은 사적 용도였지만, 칼리파나 고관들은 공공 도서관도 운영했다.[24] 주민들은 계층을 막론하고 지식을 추구했고, 이로써 학자들의 대한 후원이 늘어남으로써 이슬람 황금기가 계속 이어지는 원동력이 되었다. 따라서 바그다드는 학문이 매우 발달한 국제 도시로 발전하였다.

특히 알 만수르가 토대를 놓은 후 알 마문이 완성한 연구 기관인 지혜의 집은 동서양의 학문을 집대성하였고, 당대 최대 규모의 도서관을 지녔다. 당시 지혜의 집에서 활약한 학자들 중 알 콰레즈미, 알 킨디, 알 자히즈 등이 유명하다. 8-9세기의 개방적인 분위기 하에 아랍인, 페르시아인, 시리아인과 무슬림, 네스토리우스파 / 정교회 기독교도, 조로아스터교도, 유대교도 등이 함께 번역과 연구 사업을 진행했다. 그중에서도 그리스 고전 서적에 대한 수집과 번역, 주해가 가장 빈번했다. 다양한 고전 서적이 번역되면서 9세기 중반 압바스 왕조의 관학이 된 무타질라파가 출현 했고, 세속적인 사회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또한 번역 사업들로 인해 구전 중심의 아랍 학문 사조가 기록 중심으로 이전되기도 했다. 동시에 칼리파의 도시 답게 이슬람 신학 연구도 활발하였고, 무타질라파 외에도 하나피파한발리파 등 여러 신학 사조가 출현해 서로 논쟁했다.

도시의 정체성에 있어 본래 바그다드가 속한 크테시폰 광역권에선 대부분 아랍어와 페르시아어가 통용되었지만, 알 만수르는 아랍어를 기반으로 한 도시를 세웠다.[25] 다만 훌완-하마단-라이-쿠미스-니샤푸르-메르브로 이어지는 호라산 도로의 시발점이던 바그다드에는 하르비야의 페르시아 공동체 외에도 많은 페르시아 인들이 왕래했다. 바그다드의 페르시아인 인구는 적었지만 건축에 있어서는 페르시아 영향력이 강했고, 점차 페르시아인 학자들이 유입되면서 아랍-페르시아 혼합 문화가 주류가 되었다. 도시 창건 후에도 768년, 라이 총독을 맡던 미래의 칼리파 무함마드 알 마흐디가 바그다드로 이주할 무렵 2차로 많은 페르시아인 군인들이 일대에 정착했다. 9세기 초에는 알 마문에 의하 3차로 페르시아인 유입이 이루어졌다.[26] [27]

807년 하룬 알 라시드는 대사원을 허물고 기존의 햇볕에 말린 벽돌 대신 가마에 구운 벽돌에 모르타르[28]를 발라 중건했고, 809년에 완공되었다. 다만 당시 급증하던 바그다드 인구 때문에 곧 금요 예배 시에 밀집도가 심해졌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본래 행정 건물로 쓰이던 인근 다르 알 카탄 (목화상의 집)이 부속 예배당으로 전환되었다. 시간이 갈 수록 후자가 더 넓고 쾌적했기에 아예 대사원 본당이 되었고, 기존의 대사원은 앗 사흔 알 아티크 (옛 안뜰)라 불리며 보조 역할로 전락했다가 875년에는 금요 예배당 기능을 상실하였다. 그 옆의 금문 궁전은 쿨루드 궁전에 밀려 소외되며 쇠락하다가, 알 아민이 보수하고 새 익랑과 광장을 더하여 재사용하였다. 하지만 4차 피트나 중 812-13년간의 바그다드 공방전 당시 수비측 본부로써 많은 돌 포격을 당해 파괴되었고, 이후 황궁 지위를 상실한다.[29] 또한 이때 쿨루드 궁전 역시 포격으로 크게 파괴되며 기능을 상실했다.[30]

한편 본래 티그리스 강 서안에 국한되었던 시가지는 점차 동안으로도 확장되었다. 바르마크 가문의 재상 자파르 빈 야흐야가 대중의 눈을 피해 음주 등 향락을 즐기기 위해 티그리스 강 동안의 공터에 건립한 궁전은 호화롭기로 유명했고, 803년 그의 실각에 일조하였다. 그후 자파르의 궁전은 왕자이던 알 마문에게 주어졌고, 4차 피트나 후 819년 바그다드에 입성한 그는 내전 중 파괴된 금문 궁전[31] 대신 자파르 궁전을 증축하여 새로운 황궁으로 삼았다. 당시 사실상 재상이던 알 하산 빈 사흘이 이 사업을 담당했기에 자파르 궁전은 이후 하사니 궁전으로 불리게 되었다. 증축 공사가 끝날 때까지 알 마문은 임시로 772년 서안의 호라산 성문 밖에 세워진 쿨루두 궁에 머물렀고, 825년 장인이 된 하산에게 하사니 궁전을 넘겼다. 이를 시초로 하여 점차 관공서들이 티그리스 동안으로 옮겨졌고, 바그다드의 중심축 역시 이전되었다.

2.2.4. 일시 쇠퇴와 중흥[836-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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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세기 후반, 시가지 확장으로 외성이 추가된 바그다드

9세기 중반의 혼란 이후 점차 이슬람권 각지에 지역 왕조들이 분립하면서 칼리파의 권위가 하락하자 바그다드는 점차 정치적인 영향력을 잃고 종교적인 영향력, 혹은 통합 이슬람 세계의 상징이라는 역할로 전락해 갔다. 4차 피트나 당시 공성전으로 인해 금문 궁전 등 시가지가 피해를 입은 것과 836년 ~ 892년간 튀르크 군대를 위해 압바스 조의 수도가 사마라로 이전되었던 것도 큰 타격이었다. 862년 즉위한 알 무스타인이 오랜만에 다시 바그다드를 수도로 정했지만, 865~866년 간 사마라에 기반한 튀르크 군대가 알 무타즈를 옹립한 후 바그다드를 포위하여 1년간 공방전 끝에 항복을 받아내고 사마라를 수도로 확립했다. 이때 포격은 별로 없었지만 바그다드 주민들은 식량난을 겪어야 했다. 그후 최대의 위기를 넘긴 칼리파 알 무타미드가 말년을 알 마문의 과부 바룬이 살던 하사니 궁전에서 보내기도 했고, 바그다드가 겪은 반세기 간의 쇠퇴는 892년 알 무타디드의 즉위와 함께 종식되었다.

즉위 직후 바그다드로 환도한 알 무타디드는 시리아 ~ 이란 서부의 영토를 회복하고 방치되어 막혔던 두자일 운하를 복원하여 세수를 확보하였다. 동시에 그는 기존의 왕성이던 원형도시 대신 티그리스 강 동안 (알 루사파)을 새 도심으로 선택하고, 하사니 궁전을 황궁으로 삼았다. 알 무크타디는 하사니 궁에 감옥을 더했고, 높은 궁성을 세웠다. 또한 크테시폰의 사산 조 왕궁 유적을 허물어 이궁인 타즈 궁전을 신설했다. 대사원에 대해서도 다르 알 카탄을 원상 복구시키고 반대 방향으로 버려진 금문 궁전의 일부를 허물어 원래의 대사원과 연결, 재활용하였다.[33] 기존에 궁전과 대사원을 분리하던 벽에는 17개의 홍예문을 내었고[34] 이러한 증축 부분은 사업을 주도한 바드르 알 무타디디의 이름을 따서 바드리야라 불렸다. 10세기의 여행가 아흐마드 빈 루스타는 복원된 대사원에 대해 구은 벽돌로 견고히 지어졌고, 티크 (상록수) 나무로 기둥과 천장이 구성되었으며 내부는 청금색 타일로 치장되어 화려했다고 기록하였다.

건설 사업 외에도 알 무타디드는 관리들의 부패와 세습 등의 폐단을 척결하고 학문을 후원하여 문화 중흥을 이끌었다. 뒤이은 알 무크타피도 이집트를 수복하고 친히 바그다드 주민들의 민생을 살폈다. 알 무크타피 역시 건설에 적극적이어서 하사니 궁전 남쪽의 타즈 궁전을 완공시킴과 함께 북쪽에 피르두스 궁전, 동쪽에 투루아 궁전[35] 및 여러 정원 등을 더하였다. 901년 알 무크타피는 부왕이 세운 하사니 궁전의 감옥과 시종들의 숙소를 철거하고 그 자리에 칼리파를 위한 금요 (회중) 사원을 건립했다. 본래 궁전 사원 (자미 알 카스르)라 불리던 모스크는 현대에는 칼리파들의 사원이란 뜻인 쿨라파 모스크 (자미 알 쿨라파)로 불리고 있다.[36] 하사니 궁을 중심으로 한 이러한 건물군은 칼리파 구역인 '다르 알 칼리파'라 불리게 되었고, 이후 3세기 반동안 공식적인 칼리파의 거처가 되었다. 10세기 초엽 바그다드는 120만 ~ 2백만 가량의 인구를 유지했다. 그러나 이러한 중흥기는 908년 알 무크타피가 요절, 어린 아들 알 무크타디르가 즉위하고 외척과 튀르크 권신들이 득세하며 20여년만에 종식되었다.

2.2.5. 쇠퇴와 침체기[908~10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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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그리스 동안의 쿨라파 모스크. 902~908년에 세워진 쿨라파 모스크의 미나렛 (높이: 34m)은 현존하는 가자 오래된 중세 바그다드 건축물이다[38]

알 무크타디르는 929년의 정변 후 왕권을 잃었고, 결국 932년 튀르크 권신 무니스에게 살해되었다. 이후 재차 튀르크 장군들의 권력 투쟁이 터지며 사마라의 혼란기가 위치만 바그다드로 바꿔 재개되었고, 대장군 (아미르 알 우마라)가 정치를 좌지우지 하며 칼리파는 완전히 허수아비가 되었다. 이를 상징하듯 915년 칼리파의 권위를 샹징하던 대사원의 미나렛이 전소된 것에 이어[39] 941년 3월의 밤, 금문 궁전의 상징이던 48m 높이의 녹색 돔이 벼락에 맞아 붕괴하였다.[40] 945년에는 페르시아인 시아파 세력인 부와이흐 왕조가 바그다드를 비롯한 이라크 전역을 점령, 수니파 칼리파 직위를 좌지우지했다. 그나마 바그다드 시민들에게 있어서는 타민족에 시아파이긴 해도[41] 치안을 유지시켜 주는 부와이흐 조가 차선책이었다.

부와이 왕조 시기 원형도시는 더욱 쇠락하여 대사원 정도만이 제기능을 하였다. 위용을 뽐내던 2중 성벽도 이미 912년 무렵에 이미 폐허만이 남아 있었고, 금문 궁전도 벽만이 잔존했다. 그나마 부와이 조의 전성기를 이끈 아두드 앗 다울라가 쿨루드 궁전 유구를 재활용하여 당대 최대의 의료 시설인 알 아두디 병원[42]을 세우는 등 서안 구역의 부흥에 공헌하였다. (979년) 알 라지 등의 대학자가 활동한 것도 그의 치세였고, 당시 바그다드 인구는 50만 전후를 유지했다. 다만 983년 아두드 앗 다울라의 사후 정치 불안이 이어졌고, 1030년대 들어 다일람 부대를 시기한 튀르크 군부의 항명이 잦아졌다. 아부 칼리자르의 경우 이라크 군주가 되었음에도 아바즈에 머물렀다. 1048년 아부 칼리자르 사후 내전이 재발했고, 결국 1055년 12월 토그릴 1세가 메카 순례를 핑계로 군대를 이끌고 오자 부와이 군주 알 라힘이 복속했고 칼리파 알 카임도 술탄으로 인정했다.

이로써 이라크는 셀주크 제국령이 되었다. 하지만 튀르크 병사들의 약탈과 방화로 사부르 도서관이 소실되는 등 시가지가 파괴되자 반셀주크 여론이 치솓았다. 두려워진 토그릴은 복속 후 제후로 남아있던 알 라힘을 성밖 진영으로 소환해 유배 보냈다. 그러자 부와이 조의 튀르크 장군이던 아불 하리스 아르슬란 알 바사시리가 파티마 왕조에 복속한 후, 1058년 12월 셀주크 내전을 틈타 우카일 왕조와 바그다드를 기습 점령했다. 이후 약 1년여간 바그다드에서 쉬아 칼리파 (알 무스탄시르)의 명의로 금요 예배와 이드 행사가 진행되고 알 카임은 아나에 유폐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이는 1060년 1월, 내전을 끝낸 토그릴이 알 카임과 함께 바그다드를 수복하며 마무리되었다. 알 바사시리는 쿠파 인근에서 저항하다 전사한다.

2.2.6. 안정기[1060~1125]

셀주크 제국이 수니파 정권이긴 했지만 압바스 칼리파의 권위는 기존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토그릴은 페르시아인 재상 니잠 알 물크를 바그다드에 두어 정무를 맡겼고, 칼리파는 여전히 허수아비로 남았다. 니잠 알 물크는 바그다드의 안정을 회복했지만, 무타질라파 계열인 아슈아리파 신학을 후원했기에 9세기 후반 이래로 한발리파로 기운 칼리파와 순니 민중과 마찰을 빚었다. 1077년에는 한발리, 아슈아리 지지자끼리 충돌해 폭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술탄 말리크샤 1세는 칼리파 알 무크타디에게 자신의 외손자이자 그의 아들인 자파르에게 양위하도록 협박하기도 하며 술탄-칼리파 관계는 점차 파탄에 이르렀다.

말리크샤 사후 셀주크 제국이 시리아, 이라크, 호라산 등지로 분열된 이래로 정통성을 지닌 이라크 셀주크 술탄들이 바그다드에 머물기도 하며 칼리파와 불편한 공존을 이어갔다. 셀주크 시기 바그다드 신도심에는 쿨라파 모스크와 압바스 영묘군이 있는 알 루사파 모스크, 그리고 술탄의 셀주크 모스크가 3대 사원으로 꼽혔다. 한편 칼리파 알 무스타지르 시기인 1099년, 십자군예루살렘을 함락하고 학살을 자행하자 바그다드 여론은 폭발했다. 특히 다마스쿠스 카디 (법관) 아부 사드 알 하라위가 팔레스타인 난민들과 칼리파 궁전 앞에서 라마단 기간에 취식하는 등[44] 시위를 벌였다. 하지만 당시 셀주크 왕공 간의 내전이 진행 중이었기에 그 눈치를 보던 칼리파가 실질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1101년의 십자군 중에는 레몽 드 생 질[45]의 부대가 바그다드를 목표로 진군했지만 룸 셀주크에게 괴멸되기도 했다. 1105년 내전이 무함마드 타파르의 승리로 귀결된 후에야 알 무스지르는 대십자군 지하드를 선포했지만, 역시 별 후속 조치가 없자 여론의 분노는 이어졌다. 1110년 시리아-바그다드의 쉬아 군중이 칼리파 부인의 입성을 방해하며 시위하다가 진압되었고, 이듬해 2월에는 알레포 카디 이븐 알 카샤브가 주도한 지하드 요구 시위가 동로마 사절의 도착과 함께 폭동으로 변하여 대사원의 민바르 (설교단)와 칼리파 옥좌가 파괴되기도 하였다. 결국 무함마드 1세가 친정에 나섰으나 시리아 영주들이 십자군 편을 들며 실패했고, 1118년 그의 사후 셀주크 내전이 재발하였다.

2.2.7. 칼리파 vs 술탄[1125~1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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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무스타지르가 계획하고 알 무스타르시드가 세운 바그다드 외성의 유일한 잔존부인 알 와스타니 성문 일대

1120년대 들어 고질적인 셀주크 내전의 혼란을 틈타 베두인계 마즈야드 왕조의 두바이스가 바그다드를 습격했고, 니잠 알 물크의 아들인 재상 아흐마드가 이를 격퇴하고 성벽을 보강했다. 한편 신임 칼리파 알 무스타르시드는 셀주크 내전을 틈타 왕권 회복을 천명하며 아흐마드를 해임, 친위대를 조직하고 술탄 마흐무드 2세를 돕는 척하며 와시트를 공격했다. (1125년) 하지만 칼리파의 군대는 총독 이마드 앗 딘 장기[47]에 패했고, 1126년 마흐무드 2세가 바그다드로 진격해 장악했다. 이때 셀주크 군이 칼리파 궁을 약탈하자 분노한 시민들이 봉기해 셀주크 군을 격파했다. 그러자 술탄의 명으로 장기가 바그다드에 진입해 민병대를 진압했고, 알 무스타르시드는 정무에서 배제된 채로 궁에 연금되었다.[48]

웅크리던 알 무스타르시드는 1132년 마흐무드 2세의 사망과 함께 셀주크 내전이 재발하자 쿠트바 (금요 예배문)에서 70여년만에 셀주크 왕가 언급을 삭제하고 거병하여 바그다드 및 힐라를 장악했다. 그러자 술탄 마수드의 명으로 모술 총독 장기가 다시 칼리파 군과 대결했는데, 알 무스타르시드는 성유물인 부르다 (무함마드의 외투)를 걸치고 전투에 임하자 장기의 군대가 흩어졌다. 손쉬운 승리를 거둔 알 무스타르시드는 바그다드로 패주해 온 마수드를 책봉, 그에게 병력을 지원해주었다. 하지만 1133년 토그릴 2세를 격파하고 하마단을 장악한 마수드는 은혜를 저버리며 약속한 영토를 내주지 않았다. 이에 알 무스타르시드는 모술을 공격했으나 실패했고, 1134년 토그릴 2세의 복위를 도왔다. 패배한 마수드는 재차 바그다드를 망명했고, 칼리파에 의해 추방당했으나 그 직후 토그릴 2세가 사망하자 하마단을 접수했다.

그후 세력의 판도가 바뀌어 칼리파-장기 vs 두바이스-마수드 구도가 형성되었고, 1135년 알 무스타르시드는 주변의 반대에도 하마단으로 친정을 나섰다가 케르만샤에서 대패하였다. 포로가 된 그는 궁전 연금을 조건으로 풀려났고, 이에 바그다드 주민들이 반발하자 총독 베그 아바는 성벽을 일부 허물어 저항을 방지했다. 소식을 접한 마수드는 돌연 알 무스타르시드의 폐위를 선언, 아제르바이잔으로 유배를 명했다. 준비하던 알 무스타르시드는 하마단 외곽에서 암살되었다. 뒤를 이은 칼리파 알 라시드는 부친의 과업을 이어 술탄의 사절 및 총독 베그 아바를 축출한 후 바그다드를 장악, 성벽을 재건하며 공성전을 대비했다. 동시에 대립술탄 다우드를 책봉하였고, 이에 마수드가 1136년 바그다드를 포위했다.

수비대는 결사 저항하며 여러번 공격을 격퇴했지만, 패색이 짙어졌다 여긴 알 라시드는 동맹 장기의 모술로 피신했다. 이로써 항전의욕을 상실한 수비대는 다음날 항복했고, 마수드는 현지 카디들을 모아 알 라시드의 폐위 및 그의 숙부 알 묵타피의 옹립을 선포했다. 모술에서 추방된 알 라시드는 이스파한으로 향했다가 아사신에게 암살되었다. 알 묵타피는 때를 기다리며 종교 사무에만 집중했다. 따라서 1138년 동로마 제국의 공격에 직면한 장기의 선동으로 바그다드 대사원의 금요 예배에서 지원군 파병 여론이 일은 것과 1144년 에데사 (알 루하)를 함락한 장기에게 아미르 호칭이 하사된 것 외에는 별 사건 없이 평화가 유지되었다.

한편 카트완 전투 후 셀주크 제국이 약화되던 1152년, 술탄 마수드가 사망하고 또다시 내전이 터지자 알 묵타피는 치밀히 준비한 끝에 1154년 거병하였다. 마침 대술탄 산자르 역시 반군에 패배한 상태였다. 칼리파 군대는 빠르게 힐라와 와시트를 장악했고, 셀주크 내전에 있어 이라크 불간섭을 약속한 마수드의 동생 쉴레이만샤를 지원했다. 하지만 1156년, 마수드의 조카 무함마드 2세가 내전에서 승리한 후 지발 (이란 서부)에 진입한 칼리파 군대를 격파했다. 1157년 초, 무함마드 2세는 모술의 쿠트브 앗 딘과 함께 3만의 병력으로 바그다드를 포위했다. 알 묵타피는 각지의 병력을 티그리스 강 동안의 신도심으로 집결시킨 후 다리를 전부 파괴하며 맞섰고, 성벽도 강화하였다. 무함마드 2세는 서안에 잔영을 세우고 많은 투석기로 강 건너편을 포격했다.

알 묵타피는 시민들을 무장시켰고 부상자에게 5 디나르를 하사하는 등 내부 결속을 높혔고, 실제로 수비대는 석유를 통한 화공으로 첫 공격을 격퇴했다. 이에 무함마드 2세는 다리를 복구해 정면 공격에 나섰으나 수비측 화공이 투석기를, 수비측 투석기가 파성추를 파괴하자 철수하였다. 한동안 봉쇄로 일관하던 무함마드 2세는 6월 말엽, 4백여 개의 사다리를 동원한 총공세를 펼쳤으나 수비대의 화살 세례에 격퇴되었다. 그 직후, 십자군에 대한 지하드로 기세를 올리던 누르 앗 딘의 압박으로 모술 군대가 이탈하고 하마단에서도 반란이 터지자[49] 무함마드 2세는 포위를 풀고 철수했다. 하마단을 수복한 무함마드 2세는 칼리파와의 우호를 회복한 후 1159년 사망했고, 알 묵타피 역시 이듬해 사망하였다.

2.2.8. 부흥기와 종말[1157~1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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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1년 앗 나시르 가 세운 새 황궁인 압바시 궁전. 1980년 사담 후세인이 보수하였다.

12세기 후반 들어 압바스 칼리파 조는 점차 이라크를 확보하며 자립하였고, '최후의 위대한 셀주크' 무함마드 2세 사후 칼리파를 위협할 만한 세력은 없었다. 1163년에는 알 무스탄지드가 마즈야드 후국을 멸하며 바그다드의 안보를 완전히 확보하였다. 다만 그간 수차례 셀주크 조와 벌인 공성전으로 시가지는 심하게 파괴되었다. 특히 한때 영광을 품던 원형도시 일대는 거의 폐허가 되었고, 대사원만이 금요 예배마다 칼리파가 바스라 문을 통한 요란한 방문을 할 뿐이었다.[51] 동안의 신도심 역시 타즈 궁전이 파괴되는 등 큰 피해를 입었다.

그나마 알 무스타디가 타즈 궁전을 재건하고 1174년 그의 아내 바나프 샤가 티그리스 강에 다리를 놓는 등 시가지 재정비를 위해 노력하기 시작했다. 1181년에는 현재까지 남아있는 새 황궁을 세웠고, 압바시 궁전으로 불리며 타즈 궁전을 대체하며 현재까지 대표적인 후기 압바스 건축물로 남아있다. 아라베스크, 쿠란 구절, 무카르나스로 장식된 벽은 공성전을 대비해 두텁게 지어졌다. 따라서 유사시에 칼리파의 성채로도 쓰였고, 현재까지 보존되는 이유가 되었다. 외부에 비해 낮은 온도를 유지하도록 설계된 내부에는 마드라사와 모스크도 있었다.
도시의 건물 대부분이 사라졌고 남은 것은 오직 도시의 허울 좋은 이름 뿐이었다. 도시는 마치 누군가 머물고 지나간 흔적이 지워지는 것 같았으며, 무언가의 자취가 서서히 흐려지는 느낌이었고, 상상력의 덧없는 환영 같았다. 시선을 끄는 아름다움 같은 것은 더 이상 없었으며, 여유롭게 유랑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이끄는 매력도 이젠 찾아보기 힘들다. 도시에 남은 것은 맹수같은 야생의 느낌 뿐이다.
아랍 여행가 이븐 주바이르 (1184년)

한편 1160년부터 30년 가까이 일디귀즈 가문의 섭정 하에 놓여 있던 셀주크 제국은 1186년 섭정 팔라반의 사후 혼란에 빠졌다. 팔라반의 동생 키질 아르슬란과 조카 쿠틀루그 이난츠 간의 내전을 틈타, 술탄 토그릴 3세가 거병하여 하마단을 장악하고 실권을 회복했다. (1187년) 아제르바이잔으로 후퇴한 키질 아르슬란은 앗 나시르에게 술탄의 귀환을 경고하며 복속을 대가로 원군을 청했다. 토그릴 역시 자신의 술탄 책봉과 바그다드의 다르 알 술탄(술탄 궁전)을 보수해 자신을 기다릴 것을 요구했다. 후자의 뻔뻔함에 분노한 앗 나시르는 술탄 궁전을 파괴하였고, 60만 디나르를 들여 1만 5천의 기병대를 편성했다. 1188년, 재상 잘랄 앗 딘 우바이둘라 이븐 유누스가 이끄는 칼리파 군대는 하마단으로 진군했다. 하지만 자신감이 넘치던 그는 키질 아르슬란과의 합류를 기다리지 않고 곧바로 다이마르그에서에서 토그릴과 회전을 벌였으나, 마흐무드 바르잠 알 이바이 휘하의 튀르크멘 병력이 배신하는 바람에 참패했다. 포로가 된 잘랄 앗 딘은 처형되었다.

하지만 알 나시르는 패배에 굴하지 않고 이라크 전역에서 긁어모은 세금으로 새로운 군대를 편성해 파병했다. 이번에는 키질 아르슬란과 합류했고, 쿠틀루그 이난츠 역시 연합군에 합류하였다. 연합군은 압도적인 전력으로 하마단을 점령, 산자르 이븐 쉴레이만샤를 술탄으로 옹립했고 토그릴은 아제르바이잔의 튀르크멘 영주 이즈 앗 딘 하산 이븐 킵차크의 성채에 피신하여 살라흐 앗 딘에 원군을 청했다. 다만 하틴 전투 직후 십자군을 압박하던 그가 응하지 않자 아들 알프 아르슬란을 바그다드로 보내 칼리파에 사죄, 존중을 표했으나 앗 나시르는 응하지 않고 티크리트를 점령했다. 결국 2년여 간의 농성 끝에 토그릴은 항복했고, 키질 아르슬란에 의해 타브리즈 인근의 카흐란 성채에 구금되었다. (1190년) 그후 키질 아르슬란은 앗 나시르의 허가 하에 허수아비 술탄 산자르를 폐위시키고 스스로 술탄에 올랐다. 동시에 칼리파 군대가 하디타 및 아나를 점령하며 2세기 반만에 모술-키르쿠크를 제외한 이라크 전역이 압바스 칼리파 령으로 회복되었다.

그러던 1191년, 키질 아르슬란이 암살되고 네 조카들이 내전에 돌입하며 지발 (이란 서부)은 재차 혼란에 빠졌다. 1192년, 혼란을 틈타 유배지에서 탈출한 토그릴은 쿠틀루그 이난즈를 격파하고 하마단을 수복하며 술탄으로 복귀하였다. 한편 라이로 도주한 쿠틀루그 이난츠는 호라즘 왕조의 테키쉬에게 도움을 청했고, 그가 당도하자 토그릴은 협상하여 사돈을 맺는 한편 호라즘에 복속했다. 하지만 1193년, 테키쉬가 떠나자 토그릴은 라이를 장악했고 순식간에 이스파한 등 이란 주요부를 석권했다. 40여년 만에 술탄의 힘이 가장 강해지자 앗 나시르 역시 테키쉬에게 개입을 청했고, 이에 후자는 선발대를 보냈으나 토그릴에게 격파되었다. (1194년) 테키쉬는 재차 대군과 라이로 향했고, 토그릴은 주변에 반대에도 후퇴나 농성 대신 회전을 벌였다가[52] 패배한 후 쿠틀루그 이난츠에게 잡혀 처형되었다. 테키쉬는 그의 수급을 바그다드로 보냈고, 앗 나시르는 이를 궁전 앞 성문에 메달아 선조들의 넋을 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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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3년 앗 나시르가 세운 앗 사라이 모스크

다만 기존의 동맹은 곧 적이 되었다. 테키쉬는 앗 나시르의 하마단 할양 및 바그다드를 방문해 복속을 표하라는 요구를 무시하며 술탄을 자칭했고, 칼리파의 사절을 공격했다. 이에 앗 나시르는 재상 무아야드 앗 딘 이븐 알카삽에게 군대를 주어 직접 고토 수복에 나섰다. 1195년, 무주공산이던 후제스탄이 정복되었고 호라즘령 아잠 (이란) 총독 쿠틀루그 이난츠가 전향해 왔다. 그후 연합군은 하마단을 점령, 테키쉬의 아들을 생포한 후 라이와 이스파한을 점령하며 이란 주요부를 3세기만에 평정했다.[53]

하지만 1196년, 테키쉬가 직접 반격에 나선 시기에 무아야드 앗 딘이 하마단에서 급사했고 이어진 전투에서 칼리파 군이 패배하며 테키쉬가 서부 이란을 수복했다. 이듬해 앗 나시르는 하마단 재점령을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테키쉬가 술탄으로써 쿠트바 언급 및 바그다드 지배권을 요구하자 분노하여 구르 왕조기야스 알 딘 무함마드와 동맹을 맺었다. 그리고 구르 군대에 패배한 테키쉬가 조건 없는 복속을 표하자 앗 나시르는 그를 술탄으로 책봉하며 평화를 이루었다. (1198년)

1200년 호라즘의 새 술탄 알라 웃 딘 무함마드는 쉬아 칼리파를 옹립하고 바그다드를 위협했다. 앗 나시르는 분노했지만 당시 호라즘 왕조는 호라산을 평정하는 등 제국화되고 있었기에 호라즘에서 바그다드를 거쳐 메카로 순례하는 이들을 박대하는 것 외에는 별 대응을 못했다. 한편 1202년경 태후 주무루드 카툰이 셰이크 마루프 묘원에 세운 자신의 영묘는 티그리스 강 서안에 조성된 마지막 압바스 시기의 주요 건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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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2년에 세워진 앗 나시르의 모친 주무루드 카툰 (시트 주바이다) 영묘. 부속 건물로 하나피, 샤피이 마드라사가 있다.

1217년, 제국 건설을 완성한 알라 웃 딘은 칼리파에게 자신을 샤로 인정해 줄 것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하자 앗 나시르를 폐위시키기 위해 바그다드로 진격했다. 다만 자그로스 산맥을 건널 때 눈보라를 만나는 바람에 수천 명의 동사자가 발생하자 철군했다. 이후 1220년 몽골-호라즘 전쟁이 터지자 앗 나시르는 몽골에게 사절을 보내 자신 대신 이단자를 심판해줘서 고맙다며 막대한 선물을 보냈다. 이후 호라즘 조는 몽골에 정복되었고, 몽골 제국과 아바스 왕조는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다.

알 무스탄시르 1세의 시기인 1233년에는 아르빌 아미르 괴크보리는 유언으로 도시가 압바스 칼리파 령이 되었다. 이듬해 (혹은 1227년) 그는 쇠락한 하사니 궁전을 개조하여 현재까지 바그다드의 대표적인 유적지로 남아있는 무스탄시리야 마드라사를 건립했다. 니자미야와 함께 바그다드의 양대 대학으로 유명하던 해당 마드라사에서는 신학을 중심으로 의학, 수학, 문학, 문법학 등을 가르쳤다. 설립 후 30여년만에 파괴된 무스탄시리야 마드라사는 1960년대에 무스탄시리야 대학교로 복원되어 현재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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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4년 알 무스탄시르가 세운 무스탄시리야 마드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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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무렵 세워진 수피 성인 셰이크 우마르 수흐라와르디 영묘

압바스 칼리파 조와 몽골 제국 간의 우호 관계는 1231년, 호라즘 왕조가 멸망하며 양국이 접경하게 되며 긴장 관계로 변모했다. 이를 파악한 알 무스탄시르 1세는 군대를 양성하였고, 그 덕에 1238년과 1245년에 바그다드 인근으로 침투한 몽골군 분견대를 격파할 수 있었다. 또한 침략의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 칼리파 알 무스타심카라코룸에 조공을 바쳤고, 1246년 구유크 칸과 1251년 몽케 칸의 즉위식 때 축하사절을 파견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알 무스타심은 여성 샤자르 앗 두르를 옹립한 맘루크 왕조에 개입하려 하고, 맘루크 조와 시리아 아이유브 왕조 간의 대립을 중재하는 등 칼리파의 권위 과시에도 노력했다. 한편 1255년에는 홍수로 대사원 등 서안 일대가 피해를 입었다.

같은해, 몽케 칸은 동생 훌라구에게 서아시아 평정을 명했다. 이에 따라 서쪽으로 출정한 훌라구는 1256년 가을 아사신의 항복을 받아냈다. 이후 그에게 서신을 보내 항복을 권유했다. 알 무스타심은 고관인 이븐 알 아카미와 논의 한 끝에 훌라구를 조롱하는 답신을 보내어 거절했다. 항복 요구가 거절당하자, 훌라구는 한족 출신 장군 곽간 (郭侃)[54]의 지휘 하에 1257년 11월부터 바그다드를 에워싸기 시작했다. 이때 동원된 몽골군 중에는 다수의 조지아 출신 기독교도가 있었다. 이들은 지난날 조국을 무참하게 짓밟았던 무슬림에 대한 적개심이 매우 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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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8년 1월 11일, 몽골군이 티그리스 강 양쪽 강변에 진을 치고 도시에 대한 포위망을 완성시켰다. 이에 무스타심은 항전을 결심하고 2만 기병대를 출정시켜 이들과 맞붙게 했다. 몽골군 공병들은 수로를 통해 상류로 침투하여 홍수를 일으켰다. 아바스 왕조의 기병들은 불어난 물에 퇴로가 막혀버렸고, 뒤이어 포위망을 형성한 몽골군에게 섬멸되었다. 1월 29일, 몽골군은 공성전을 시작하였고 2월 5일에 강 건너의 요새가 함락되었다. 알 무스타심은 그제서야 항복 협상을 요구하였으나, 훌라구는 거부하고 사절단으로 파견된 도시의 3천 유력인사들을 살해했다.

2월 10일, 더 버티기 힘들어진 도시는 항복했다. 훌라구는 진정으로 항복한 건지 의심스러워서 3일간 지켜본 뒤 항복이 확실하다는 걸 확인하자 2월 13일에 입성했다. 동시대의 기록에 따르면, 몽골 군인들이 모스크, 궁전, 도서관, 병원 등을 약탈하고 파괴했으며, 바그다드의 36개 도서관에 보관된 책들이 모조리 파괴되었고 가죽 표지들은 약탈자들의 샌들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특히 수많은 역사 문서와 책을 소장하고 있던 '지혜의 집'이 처참하게 파괴되었다. 몽골 장병들은 도망치려는 시민 수만 명을 모조리 학살했는데, 어린 아이나 늙은이조차도 용서하지 않았다.

1258년, 몽골 제국의 공격으로 바그다드가 함락되고, 알 무스타심이 피살[55]된 사건은 바그다드 몰락의 결정타였다. 이 때 바그다드는 몽골군의 약탈과 학살로 황폐화되었으며, 이후 바그다드는 종교적 상징성마저 상실했다. 당시 지혜의 집, 니자미야, 무스탄스리야 등 유명한 학문의 금자탑이 잿더미로 변한 사실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소실 이상으로 인류의 손실이었다. 또한 이때 몽골군에 의해 운하 등 관개 시설들이 파괴되며 일대의 농업 생산량이 급감하게 되었고, 향후 도시의 인구 부양력 및 사막화 방지에 돌이킬 수 없는 악영향을 미쳤다.

한편 알 무스타심의 숙부와 먼 친척이 혼란 중에 빠져나와 각각 알 무스탄시르 2세, 알 하킴 1세로 즉위했다. 후자는 아인잘루트 전투 직후 안바르에서 몽골군 부대를 격파했고, 이에 고무된 전자가 맘루크 조의 추대를 받은 후 베두인 병력을 모아 바그다드 수복을 위해 히트 전투를 치렀지만 바그다드의 샤흐나 (총독) 알리 바하두르 알 콰레즈미와 사령관 카라 부가에게 패하여 전사했다.[56] 따라서 유일한 칼리파로 남은 알 하킴 1세는 이후 카이로에 머물며 압바스 칼리파는 다시 바그다드로 돌아가지 못하고 맘루크 통제 하에 카이로에서 2세기 반동안 꼭두각시를 하다 오스만 제국에 흡수된다.

2.3. 중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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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세기 중반, 16년간 바그다드 총독 (아미르)을 지낸 아민 앗 딘 무르잔이 1356-58년에 세운 상인회관인 칸 무르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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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르잔이 세운 무르잔 모스크-마드라사-영묘. 1946년 알라시드 도로 확장을 위해 원 위치에서 옆으로 옮겨졌다.

1258년의 대참극과 일 칸국의 건립 후, 훌라구는 무슬림 여론을 인식하여 자신이 파괴한 바그다드의 시가지와 여러 명소들을 재건했다. 흥미롭게도 일 칸국령 바그다드의 첫 총독은 포위를 주도한 중국인 장군 곽간이었다. 일 칸국 지배 하에서 반세기 이상 안정이 이어지며 바그다드는 어느 정도 도시 규모를 회복했다. 14세기의 여행가 이븐 바투타는 여전히 바그다드가 세계 최대의 도시들 중 하나로, 주민들은 대부분 한발리파 무슬림이라 기록하였다. 다만 수니 무슬림들의 구심점은 하나피파의 교조인 아부 하니파를 모신 아부 하니파 모스크였다. 대사원은 1258년의 파괴에도 살아남아 1327년 이븐 바투타가 기록을 남겼지만, 15세기를 전후로 완전히 파괴되어 사라졌다.

1335년 일 칸국의 붕괴 후에는 몽골-튀르크계 잘라이르 왕조가 바그다드를 수도로 삼아 자립했고, 1358년 우와이스 1세가 타브리즈 정복 후 천도하였다. 이후 그는 자신의 해방노예 아민 앗 딘 무르잔을 바그다드 총독에 봉했는데, 무르잔은 1364년 반란을 일으킨 후 이듬해 체포되지만 우와이스 1세는 친구라며 용서해주고 재차 총독에 봉했다. 1374년 우와이스 1세의 사후 1384년 티무르의 공격으로 잘라이르 조는 이란 서부를 뺏기며 약해졌고, 1385년 킵차크 칸국토크타미쉬 칸에게 타브리즈마저 상실한 아흐마드 잘라이르는 바그다드로 피신했다.[57] 비록 토크타미쉬의 귀환 후 타브리즈를 수복하지만, 1386년 티무르가 점령하자 바그다드가 다시 잘라이르 조의 수도가 된다. 그러나 1393년 여름, 티무르가 바그다드까지 진격해 오자 아흐마드는 저항을 포기하고 맘루크령 이집트로 피신한다.

2.3.1. 티무르의 2차 파괴

티무르는 바그다드에서 많은 연공과 아흐마드의 아들 알라 앗 다울라 등 많은 포로들을 취한 후 사르바다르 계열의 카와자 마수드 사브제바리에게 통제권을 넘기며 회군했다. 다만 1394년, 아흐마드가 맘루크 지원군[58]과 함께 돌아오자 카와자 마수드 역시 싸우는 대신 휘하 병력과 도주했다. 이로써 아흐마드는 바그다드를 수복했지만, 1397년과 1398년 연달아 정변 시도가 있는 등 민심을 얻지 못했다. 두려움을 느낀 그는 자지라에 기반한 흑양 왕조의 카라 유수프에 군사 지원을 요청했는데, 그가 보낸 튀르크멘 군대는 바그다드 약탈에만 치중하다가 아흐마드가 뜯어 말린 후에야 돌아가는 등 사태를 더욱 악화시켰다.

아흐마드에 대한 평판이 최악이던 1398년, 티무르의 아들이자 아제르바이잔 총독인 미란 샤가 바그다드 점령을 시도했지만 아흐마드는 가까스로 격퇴해 낼 수 있었다. 1399년에는 조지아 왕국의 장수로 활동하던 아흐마드의 아들 중 하나가 바그다드에 와서 정변을 일으켰다가 살해되기도 했다. 1400년, 티무르가 인도 원정을 마치고 회군하자 아흐마드는 자신이 다음 대상이라 여겨 바그다드를 떠났다. 한편 1400년 11월 ~ 1401년 3월까지 시리아를 유린한 티무르는 마치 사마르칸트로 회군하는 것처럼 위장하였다. 그러자 아흐마드가 망명지를 떠나 바그다드로 돌아왔는데, 그러자 티무르는 갑자기 남하하여 모술을 점령하였고 로스탐 휘하 2만 대군을 바그다드로 보내었다.

아흐마드는 재차 도주하여 오스만 제국으로 망명했고, 그의 부관 파라즈가 바그다드를 수비하였다. 1401년 5월, 일단의 차가타이 기병대가 바그다드에 이르렀다. 그들이 티무르 군 소속임을 몰랐던 파라즈는 항복을 거부한 후 요격해 격퇴했고, 이에 도시가 저항을 결심했다 여긴 티무르는 대군과 함께 당도하였다. 6월 초 시작된 포위는 파라즈의 분전과 함께 40일 가량 지속되었고, 티무르 군대는 작열하는 이라크 태양 아래 일사병으로 큰 사상자를 내었다. 7월 9일 도시가 함락되자 티무르는 병사들에게 각각 2인 이상의 주민 수급을 가져오게 하였고, 이로써 바그다드 주민의 대부분인 9만[59]이 학살당한 후 120개의 해골탑이 세워졌다. 남녀노소를 막론한 학살과 시가지의 무분별한 파괴는 바그다드에 회복할 수 없는 피해를 안겼다. 특히 옛 원형도시 유적이 이때 완전히 소멸하였고, 몽골 지배기에 번성했던 기독교 공동체 역시 쇠퇴하게 되었다.

그로써 한때 세계 최대, 최고의 도시이던 바그다드는 지방 도시로 전락하고 말았다.파괴가 얼마나 심했는지 티무르는 이번에는 총독도 두지 않고 철수했다.[60] 이후 그는 아제르바이잔에서 월동하며 바예지트에게 재차 아흐마드와 카라 유수프의 축출을 요구하였으나 거절당하였고, 둘은 서로를 비방하는 서신을 주고받으며 냉전을 벌인다. 한편 티무르의 회군 후 또다시 바그다드로 돌아와 재건에 나서던 아흐마드는 1402년 초엽, 티무르가 손자 아부 바크르 빈 미란샤 휘하 차가타이 기병대를 파견해 기습을 가하자 놀라 불과 몇 주만에 속옷만 입은 채로 배를 타고 도주하였다. 다만 앙카라 전투의 혼란을 틈타 아흐마드는 4번째로 바그다드에 돌아왔다. 이번에는 망명 동지이던 카라 유수프와 함께였는데, 그들의 친선은 바로 깨졌다.

분쟁 끝에 카라 유수프가 바그다드를 차지했고, 축출된 아흐마드는 티크리트를 거쳐 재차 맘루크 조로 망명했지만 신임 술탄 파라즈가 티무르는 두려워하며 투옥시켰다. 그러나 1402년 말, 아부 바크르 (혹은 미란샤)가 이끄는 티무르 군대가 재차 남하하자 카라 유수프는 파괴된 바그다드 성벽에 의지하는 대신 출정하였다. 양측은 힐라와 바그다드 사이의 알가미 운하에서 조우하였고, 카라 유수프는 용감히 싸웠지만 패배했다. 따라서 바그다드는 다시 티무르 령이 되었고, 이번에는 총독 및 수비대가 배치되었다. 이듬해 카라 유수프 역시 맘루크 조로 망명했고, 파라즈는 그 역시 투옥시켰다.[61] 옥중에서 둘은 다시 의기투합 하여 카라 유수프가 아제르바이잔, 아흐마드가 이라크를 점유하기로 합의했다.

1405년, 티무르의 사망 소식이 전해진 후에야 파라즈에 의해 (복속 서약과 함께) 석방된 둘은 각각 힐라와 타브리즈로 돌아갔다.[62] 힐라에서 아흐마드는 병력을 편성, 바그다드에 배치되어 있던 소수의 티무르 군대를 격퇴하고 도시를 수복한다. 그후 아흐마드는 약속을 어기고 아제르바이잔 수복을 시도하며 흑양 조를 공격했고, 잠시 타브리즈를 점령하는 성과를 올렸으나 1410년 카라 유수프에게 패배한 후 서로잡혀 처형되었다. 티무르 조가 석방한 아흐마드의 아들 알라 앗 다울라 역시 살해되었고, 조카 샤 왈라드가 바그다드에서 즉위했으나 1411년 카라 유수프가 도시를 점령하여 20여년 간의 혼란을 종식시켰다. 힐라, 와시트, 바스라 등 이라크 남부로 축소된 잘라이르 조는 1432년에 흑양 조에 정복되어 사라진다.

2.3.2. 오스만 vs 사파비

바그다드는 폐허 상태이다. 이곳에는 사원도, 신도들도 없고, 기도하는 소리도 들리지 않으며, 시장도 열리지 않는다. 야자수 대부분은 말라 비틀어졌다. 이곳은 이제 도시라고 부를 수 없는 상태이다.
알 마크리시 (1437년)

15세기 중반 바그다드를 지배한 흑양 조는 호라산, 아나톨리아 방면 진출에 신경 쓰며 이라크에 소홀했다. 1469년 흑양 조를 대체한 백양 왕조 역시 아제르바이잔 지역을 중심으로 삼고 바그다드에 별 기여를 하지 않았다. 그러던 1508년, 흑양 조를 멸한 사파비 왕조는 바그다드의 쉬아 성지들을 보수했다. 다만 사파비 조는 찰디란 전투 후 수세에 몰렸고, 1524년 이스마일 1세의 사후 바그다드 총독 줄피카르 칸은 술탄 쉴레이만 1세에게 서신읗 보내어 충성을 서약하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 오스만 주력군은 모하치 전투 등 유럽 전선에 묶여 있었기에 개입하지 못했고, 사파비 군이 바그다드를 포위한 후 함락할 때에 줄피카르 칸 역시 전사했다. 그리고 1533년, 이브라힘 파샤가 이끄는 오스만 군이 타브리즈를 점령하며 양국의 전쟁이 재발했다.

1534년 가을, 타브리즈에서 이브라힘 파샤와 합류한 쉴레이만 1세는 추위가 다가옴에도 무리하여 바그다드로 남하했다. 다행히 당시 사파비 제국은 이란 서부를 빼앗기고 샤가 도망 다니는 등 멸망 위기에 놓여 있었기에 바그다드를 제대로 수비하지 못했고, 총독 테길리 메흐메드 칸은 이란으로 도주하였다. 따라서 이브라힘 파샤의 선발대는 바그다드를 무혈 점령했고, 다음날 쉴레이만 1세가 개선했다. (1534년 12월) 쉴레이만 1세는 바그다드에서 월동하며 이듬해 봄까지 머물렀고, 이슬람 성지들의 복구 및 관개 수로 정비 등 인프라 재건에 힘썼다. 1535년 3월에는 이브라힘 파샤의 정적 이스칸데르 첼레비가 부근에서 처형되었고, 이후 쉴레이만 1세는 강력한 수비대를 남기며 타브리즈로 북상했다.[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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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9년에 세워져 1660년 중건된 와지르 모스크

카이로 압바스 칼리파위를 이어받은 오스만 술탄들은 바그다드의 성벽과 성지 등 여러 시설들을 재건했고, 이로써 도시는 점차 회복하였다. 다만 사파비 조는 카르발라, 쿠파, 카지미야, 사마라 등 쉬아 성지들이 많은 이라크를 수복하고자 하였다. 1622년, 무굴 제국과의 전쟁을 마무리 한 아바스 1세는 1621년 이래로 예니체리 장교 수바쉬 바크르의 점거 하에 있고 에르주룸 총독 아바자 메흐메드 파샤가 반란을 일으킨 이 때를 이라크 수복의 적기라 판단했다. 1623년, 오스만 조정은 바크르의 파샤 책봉 요청을 거부하고 디야르바크르 총독 하피즈 아흐메드 파샤를 바그다드에 봉하여 파견했다. 그러자 바크르는 아바스 1세에 도움을 청했고, 후자는 준비해 둔 군대를 급파하였다.

상황이 급변하자 하피즈 아흐메드 파샤는 바크르와 협상하여 그의 조정에 대한 충성을 회복시켰다. 하지만 1624년 1월, 바그다드를 포위한 사파비 군은 바크르의 아들 무함마드의 내통 덕에 도시를 함락하였다. 뒤이어 바그다드를 시아파 도시로 만들려는 샤의 계획에 따라 수니파 주민 대부분이 학살되었고, 주변 부족들도 대부분 새 지배자에 복속하였다. 뒤이어 모술, 키르쿠크 및 쉬아 성지인 나자프, 카르발라까지 사파비 령이 되며 오스만 제국은 순식간에 바스라를 제외한 이라크 전역을 상실했다. 이에 1625년 가을, 무라트 4세는 하페즈 아흐메드 파샤를 대재상에 봉하며 바그다드 수복을 명하였다. 우선 모술을 탈환한 그가 남하하자 사파비 군은 아바스 1세가 지시한 청야전술에 나섰다. 그럼에도 11월, 오스만 군은 포위에 나설 수 있었다.

공성전은 도중 오스만측 대포가 성벽을 허물며 전황이 기울던 1626년 초엽, 아바스 1세가 친히 원군과 당도하자 오스만 군은 요새화된 진영으로 철수하여 포위를 이어갔다. 이에 압바스 1세는 오스만측 보급품 수송대를 요격하며 압박했고, 하페즈 아흐메드 파샤는 수 차례 출격해 사파비 군과 맞섰으나 연속으로 대패했다. 자신 역시 부상을 입은 하페즈 아흐메드 파샤는 1626년 7월, 포위를 풀고 모술로 철수했다. 다만 사파비 조의 2차 지배 역시 길지 않았다. 1638년 봄, 무라트 4세는 11만 대군을 이끌고 바그다드로 향하였다. 197일 간의 행군 도중 대재상 바이람 파샤가 사망하여 타야르 메흐메드 파샤로 교체되었다. 한편 사파비 조도 수비 병력을 5배인 4만명으로 늘렸고 대포 100문을 배치했다. 1631년 조카 사피 콜리 칸을 대신해 바그다드 총독이 된 벡타쉬 칸 고르지는 성벽 강화에 공을 들였다.

당시 바그다드 성벽에는 4개의 문이 있었다. 북문인 아지미야 성문, 남문인 카란륵 (어두운) 성문, 아크 (하얀) 성문, 쾨프뤼 (다리) 성문이었다. 오스만측 사가 이브라힘 누리에 따르면 성벽은 25m에 7~10m 두께였고, 포격을 대비해 토대가 있었으며 넓으면서 깊은 해자가 있었다 한다. 성벽에는 총 208개의 요새화된 성탑들이 있었다[64]. 오스만 군은 7만 5천의 기병, 3만 5천의 보병 및 대포 200문을 지니고 있었다. 그외에 8천의 공병 및 2만 4천의 수송병이 있었다. 11월에 당도한 오스만 군은 본래 두 파샤들이 남문과 북분을 각각 공격하려 했다가, 메흐메드 파샤가 두 성문이 잘 요새화되어 있다고 여겨 비교적 약한 아크 성문에 전력을 집중하기로 했다. 공성전 개시 후 사파비 수비대는 6천여씩 돌아가며 습격에 나서 포위군에 큰 피해를 주었다.

그럼에도 메흐메드 파샤는 40일간 봉쇄에 나서며 도시를 큰 전투 없이 얻으려 했으나, 인내심이 부족한 술탄 무라트 4세의 성화에 1638년 12월 25일 직접 선두에 나서 총공격을 감행했다. 이는 성공하여 바그다드는 함락되었으나, 막판에 메흐메드 파샤는 총을 맞아 죽었다. 성문이 뚫린 후 수비대에게는 이란으로의 귀환이 보장되었으나, 일부는 카란륵 성문에서 최후까지 저항했다. 비록 승리했지만 오스만 군 역시 막대한 피해를 입었기에 새 재상 케만케쉬 무스타파 파샤는 사파비 조와 협상하여 1639년 5월에 오늘날 이란-터키 및 이란-이라크 국경의 토대가 된 주하브 조약을 체결했다. 한편 회군 후 무라트 4세는 오스만 황궁인 톱카프 궁전에 바그다드 정복을 기념하기 위해 바그다드 정자를 세웠다.

2.4. 오스만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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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4년에 세워진 성채 (시타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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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8년에 옛 압바스 영묘 자리에 세워져 1825년에 중건된 아스피야 모스크

17세기 중반 이래로 바그다드에서는 1733년 나디르 샤의 침공으로 벌어진 바그다드 공성전 외에는 큰 전쟁이 없었지만, 이따금씩 콜레라 등 역병이 돌아 한번은 주민 중 2/3이 사망하는 등의 참극을 겪었다. 그럼에도 바그다드는 대부분의 시기 서아시아 최대 도시였고, 오스만 총독이 상주했다.

2.4.1. 이라크 맘루크 왕조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이라크 맘루크 왕조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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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들어 총독들이 바그다드 맘루크 정권을 세우자 새로운 모스크와 시장이 건설되는 등 도시는 재차 부흥기를 겪었다. 우선 하산 파샤는 현지 부족들을 제압하고 법과 질서를 확립했다. 그는 땔감과 식자재에 대한 세금을 폐지하고 많은 건축 사업을 벌였다. 우선 바그다드에 여러 주택과 학교들을 세우는 등 인프라 구축에 나섰고, 현지 수니파 학자들이 학업을 지속하도록 후원하였다. 그가 행정 치소로 삼은 바그다드 동안의 앗 사라이 모스크 일대는 자디드 하산 파샤라 불리게 되었다. 하산 파샤의 치세로 이라크는 수세기 만에 안정을 회복했다. 그는 조지아, 체르케스계 맘루크들을 장교 및 관료로 등용하여 기존의 예니체리 군부를 견제하는 맘루크 정권을 탄생시켰다. 1716년 하산 파샤는 바그다드에 다리를 세웠다. 1718 ~ 1719년, 바그다드와 사마라 일대에 역병이 돌아 수천의 사람이 죽었으나 곧 지나갔다.

1721년, 조정으로부터 이란 고원의 새 세력인 아프간계 호타키 왕조의 공격에 대비하라는 명을 받은 하산 파샤는 바그다드 주변에 참호를 팠다. 이후 이란 원정에 나선 하산 파샤는 케르만샤를 장악한 후 하마단 진격을 준비하던 1723년 사망하여 바그다드 인근의 알 아다미야에 안장되었다. 그의 사후 계승한 아흐마드 파샤 역시 부친의 정책을 이어받아 조지아 맘루크 친위대를 2천명까지 확대시키는 등 정권의 기반을 강화했다. 1747년 아흐마드 파샤의 사후 조정은 맘루크 정권의 세습을 막고자 조정의 고관을 총독으로 바그다드에 파견했다. 하지만 그가 제대로 퉁치하지 못하여 현지 주민들의 불만을 사자, 바스라 태수인 아흐마드 파샤의 사위 술레이만 파샤가 맘루크 부대와 함께 술탄의 명도 어기며 북상하였다. 이에 바그다드에서 예니체리 부대가 사라이 (궁전)를 포격하는 등 3일간 봉기를 일으키자 총독은 도주했고 술레이만 파샤 아부 라일라가 맘루크 정권을 확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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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중반의 바그다드 지도

이후 주민들의 환영과 함께 입성한 술레이만 파샤는 무혈 쿠데타로써 바그다드 총독에 올랐다. (1749년 10월) 오스만 조정 역시 내키지 않았지만 그를 인정했다. 술레이만 파샤는 밤에 나가는 것을 좋아해 아부 라일라라 불렸다. 문타피크 등 여러 부족들을 제압하고 바스라를 완전히 바그다드 정권 하에 둔 술레이만 파샤는 1762년에 사망했다. 그의 사후 7인의 맘루크들이 경쟁하다 조정의 개입으로 바스라 태수이던 알리 파샤가 집권했으나, 2년만에 아흐마드 파샤의 아들인 우마르 파샤가 찬탈하였다. 평화가 유지되던 1772년, 바그다드에 역병이 돌아 다수가 사망하던 차에 일부 가문들이 시내에서 약탈과 파괴를 일삼으며 혼란을 일으켰다. 그럼에도 진압할 병력이 부족하여 역병이 사그러진 후에도 한동안 약탈이 계속되었다. 1774년에는 바스라에 역병이 돌았고, 이듬해 이란의 잔드 왕조가 바스라를 점령했다.

이에 조정은 우마르 파샤를 폐위, 새 총독들을 파견했으나 역시나 별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여 아흐마드 파샤의 또다른 사위인 압둘라 파샤가 집권해 맘루크 정권을 재확립했다. 1778년 그가 사망한 후 측근 살림 에펜디가 일시적으로 집권했고, 무함마드 아젬 및 이스마일 카히야 등이 반발하며 바그다드 주민들까지 파벌로 나뉘어 5개월간 내전을 벌였다. 둘은 각각 주민들의 서명을 받아 조정에 보냈지만, 조정은 키르쿠크 태수 카르쿠클리 하산 파샤를 새 총독에 봉하였다. 1778년 중반, 바그다드에 입성한 그는 기존 인사들을 대부분 용서했지만 성채에 있던 무함마드 아젬은 파샤를 칭하며 베두인 부족들과 연대해 맞서다가 패한 후 잔드 왕조로 망명했다. 1779년, 문타피크 부족의 활약으로 바스라가 회복되자 이전 포위 시에 용감히 싸운 태수인 우마르 파샤의 아들 술레이만 파샤가 재차 태수로 복귀했다.

그 무렵 이란에서 돌아온 무함마드 아젬이 바그다드를 습격하며 길을 막는 등 밤낮으로 위협했음에도 하산 파샤가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자, 분노한 주민들은 그를 축출하고 이스마일 카히야를 임시 총독으로 선출핶다. 1780년 가을, 조정은 바스라의 술레이만 파샤를 바그다드 총독에 봉하였고 이로써 맘루크 정권이 재차 부활했다. 大 술레이만 파샤는 이라크 내부를 평정하여 안정을 회복했다. 1786년 이라크에는 극심한 가뭄 (카스바크, خصباك)으로 인한 기근과 역병이 돌았고, 바그다드에서 민란이 일어났으나 술레이만 파샤는 이를 진압하였다. 주모자들은 십자가형에 처해졌고 나머지는 투옥되었다. 이때 축출된 우바이드 부족장 술레이만 앗 샤위는 문타피크 부족장 투와이니와 바스라 등지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던 1779년, 투와이니는 요구대로 바그다드로 와서 용서를 빈 후 파샤와 술탄의 사면을 받고 마즐리스 (통치위원회) 위원이 되었다.

안정이 회복되자 술레이만 파샤는 여러 건설 사업을 벌였다. 우선 바그다드 성벽을 재건했고, 주변에 참호를 둘렀다. 시내에는 총독궁을 세웠고, 쇠락해 있던 상점들을 복원했으며 1791년에는 술라이마니야 마드라사를 건립하였다. 또한 쇠락해 있던 무스탄시리야 마드라사를 세관의 카라반사라이로 개조했고, 거기서 얻은 수익은 술라이마니야 마드라사의 운영비로 설정했다. 무스탄시리야 시장 역시 유대인 상인이자 재무관인 이븐 다니엘에게 매각되었다. 그외에 쿠블라니야 모스크와 수크 사라진 (샌들 시장)이 보수, 알파들 모스크 및 쿨라파 (수크 알 가잘) 모스크가 재건되었으며 무르자니야 마드라사가 확장되었다. 쿨라파 모스크에는 이성, 물리적 과학을 가르치는 근대 학교도 더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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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1년에 세워진 술라이마니야 모스크 & 마드라사. 미나렛 옆의 돔은 누만 에펜디의 영묘이다.

시내 외에도 바그다드 북쪽 외곽의 알 아와이디야의 티그리스 강변에 궁전을 세웠다. 이후 1797년과 1799년 등 사우디령 네지드에 원정군을 보내는 등 와하비 세력을 견제하던 술레이만 파샤는 1802년 사망한다. 사후 맏사위 알리 파샤가 즉위하자 예니체리 대장 아흐마드 아간가 반발하여 바그다드 성채를 장악하고 내전을 벌였다. 알리 파샤는 궁지가 몰린 순간 아흐마드 아가가 피살되며 반란은 끝났다. 부족들을 제압하고 사우디 침공을 격퇴한 알리 파샤는 1807년, 예배 중 암살되었다. 사후 조카이자 大 술레이만 파샤의 사위인 小 술레이만 파샤가 계승했고, 암살범들을 시내에 효수하였다. 다만 그는 사이드 에펜디 등의 지역 유지들과 틀어졌고, 상소의 결과 조정은 할라트 에펜디에 바그다드 총독 임명권을 주어 파견했다. 술레이만 파샤는 군대를 모아 싸워 승기를 잡았으나, 밤중에 군대가 흩어지자 도주하다가 피살되었다. (1810년)

사후 大 술레이만 파샤의 맘루크 출신인 압둘라 파샤 앗 투툰지가 집권했다. 이에 압둘라흐만 아가가 大 술레이만 파샤의 아들 무함마드 사이드 베이를 지지하며 반기를 들었고, 예니체리 부대와 바그다드 성채를 장악했다. 시내에는 재차 불안이 감돌았고, 가게 주인들은 약탈을 우려하여 물품을 집으로 옮겼다. 압둘라 파샤는 강 건너편 카르크의 자부르, 아킬 부족 등을 동원해 시가전에 나섰다. 5시간의 전투 끝에 패배한 압둘라흐만 아가는 영국 영사관에 숨었다가 도주했고, 잔당들도 각자의 집에 틀어박혔다. 이후 박해를 받고 바그다드에서 탈출한 사이드 베이는 문타피크 부족장 하무드 및 자심 베이 앗 샤위와 거병하여 글리윈 전투에서 압둘라 파샤를 격파하고 집권했다. (1813년) 승전 후 사이드 베이는 하무드와 2천 병력을 대동하고 바그다드에 입성하여 사이드 '파샤'가 되었다.

하지만 아직 어린 편이던 사이드 파샤는 하무드와 모친 나비 카눔에 의존했고, 특권을 박탈당한 샴마르 부족이 바그다드와 모술 및 알레포 간의 도로를 차단했다가 2달 간의 토벌 후에야 진압되기도 했다. 이후 사이드 파샤 정권이 부패와 향락에 빠지자 大 술레이만 파샤의 사위 다우드 파샤가 몰래 키르쿠크에서 조정의 총독 책봉을 받아 바그다드로 남하했다. 사이드 파샤는 하무드와 함께 맞섰고, 바그다드의 무아담 성문 밖에서 승리했다. 안도한 사이드 파샤는 하무드를 돌려보냈는데, 성내에서 민중 봉기가 일어나자 다우드 파샤는 바그다드에 무혈 입성하였다. (1817년 2월) 사이드 파샤는 전의를 잃고 모친의 집에 숨었다가 예니체리 대장인 사이드 알리위 아가에게 발각되었다. 알리위 아가는 나비 카눔의 면전에서 그를 도끼로 난자함 후 목을 베었다. 그후 다우드 파샤가 바그다드 맘루크 정권의 마지막 왈리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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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맘루크 파샤들이 안장된 아지미야 모스크

1821년, 바반 후국의 압둘라 파샤와 카자르 왕조령 케르만샤 총독 샤자데가 이라크를 침공했다. 오스만측 원군을 격파한 샤자데가 바그다드 근처의 하바브에 이르자 많은 바그다드 주민들이 팔루자나 힐라 등지로 피난을 가는 등 난리가 났다. 바그다드와 불과 20km 거리인 칸 바니 사드에 당도한 카자르 군대는 바그다드 근교를 약탈했다. 풍전등화에 몰린 이때, 남쪽에서 역병이 몰려와 북으로 퍼졌다. 샤자데 역시 이에 감염되는 등 카자르 군도 피해를 입었고, 진격은 정체되었다. 그후 다우드 파샤는 나자프의 시아파 지도자인 셰이크 무사 카시프 알 기타에게 중재를 청했고, 카자르 군은 철수했다. 샤자데는 케르만샤로 돌아간 직후 사망했다. 그를 계승한 호세인 미르자 역시 부친의 과업을 이루고자 군대를 모아 이라크를 재침했으나, 바그다드 북쪽의 샤흐르반에 이르러 또다시 역병이 퍼지자 저번처럼 결국 철수했다.

1826년, 문타피크 부족을 제압한 다우드 파샤는 당시의 메흐메드 알리나 오스만 조정을 본떠 근대화 및 군사 개혁에 나섰다. 우선 과거 나폴레옹의 부하였던 프랑스인 데포에를 교관으로 영입했고, 유럽의 기술자들을 데려와 소총 생산 공장을 설립했다. 또한 근대화의 일환으로 아랍어와 터키어로 발간된 이라크의 첫 신문사 겸 인쇄소인 이라크 저널을 설립했으며 학자 및 작가들을 후원하여 문화 및 교육 진흥에 힘썼다. 그외에 수로를 청소, 보수하여 농업 생산력을 증진하려 하였다. 하지만 이집트에 이어 또다른 아랍 근대 국가가 설립되는 것을 원치 않았던 조정은 곧 실력 행사에 나서게 된다. 예니체리 숙군 작업, 대러시아 전선 기여 등의 명령에 거부한 다우드 파샤는 1830년에 마흐무트 2세의 해임 명령을 전한 사절 사디크 에펜디를 죽이며 강경히 대응했다. 따라서 술탄은 알리 르자 파샤 휘하의 신식 군대를 파견했다.

다우드 파샤는 방어를 준비하려 했으나 마침 타브리즈발 역병이 덮쳤고 티그리스 강이 범람하여 홍수까지 벌어지는 등 악조건이 연이어 터졌다. 그 사이에 모술에 당도한 알리 르자 파샤는 태수 카심 파샤 알 아므리, 사푸크, 아킬 부족장 술레이만 알 간남 휘하의 선발대를 보내어 바그다드를 포위하게 했다. 선발대는 혼란스럽던 바그다드에 무혈 입성했고, 사푸크는 시가지 동부에 집을 구했다. 하지만 점령군이 약탈을 자행하자 다우드 파샤의 친위대와 주민들이 봉기하였다. (1831년 6월) 사푸크는 티그리스 강을 건너 도주했고, 카심 파샤는 살해되었다. 이후 원정군 선발대는 성밖으로 후퇴했다. 다만 얼마 후 당도한 알리 르자 파샤의 분대는 바그다드를 포위했다. 10주간의 공격 끝에 9월에 도시는 함락되었다. 다우드 파샤는 이스탄불로 송환되는 조건 하에 항복했다.

2.4.2. 근대화 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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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1년, 메흐메트 나므크 파샤가 오스만 주둔군의 병영으로 세운 쿠슐라. 우측의 시계탑은 미드하트 파샤가 더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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앗 나시르가 세운 모스크를 19세기에 페르시아 양식으로 중건한 하이다르 카나 모스크. 라시드 거리에 있으며, 20세기 초에는 이라크 민족주의의 산실이기도 했다.

오스만 조의 직접 지배는 근대화와 중앙 집권화가 이루어진 1831년에 알리 르자 파샤에 의해 회복되었다. 알리 르자 파샤 역시 결국 남아있는 맘루크들과 협치해야 했으나, 그들은 점차 구심점을 잃고 아랍 사회에 동화되었다. 1832년 압둘 가니 알 자밀의 반란 후 바그다드는 긴 평화를 누렸다. 1845년에 역병을 겪고, 1853년 바하이교 교주 바하올라가 머문 것 외에는 특별한 일이 없었다. 총독들 중 메흐메트 나므크 파샤의 경우 1851-52년, 1861-67년간 장기 집권했다. 1864년 바그다드 에얄레트는 바그다드 빌라예트로 개편되었다. 같은해 바그다드는 지진을 겪었지만 곧 재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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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6년, 바그다드 중심부의 시장 일대

1869년에는 유명한 미드하트 파샤가 부임하며 1870년 시의회가 구성되는 등 개혁이 추진되었다. 같은해 근대적인 시가지 조성 및 확장을 위해 천년 가까이 유지된 성벽의 대부분이 철거되었다. 당시 인구는 약 6만 5천명이었다. 1879년 쿠르디스탄의 기근 후 바그다드에는 많은 쿠르드 인이 유입되었다. 이에 힘입어 1895년, 도시의 인구는 10만에 이르렀다. 1897년에는 티그리스 강에 알 카르 (하미디예) 다리가 놓였다. 1907년 기준 바그다드의 인구는 약 18만 5천명으로 추산되었다. 1909년에는 극장이 설립되었고, 1911년 바그다드에는 오스만 제13 군닫이 배치되었다. 대전 직전인 1914년 사마라 ~ 바그다드 간 철도가 개통했고, 이듬해 이스탄불까지 연결되었다. 같은해 신시가지의 상징인 라쉬드 거리가 조성되기 시작했고, 콜레라가 돌았다.

2.5. 근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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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1년에 완공된 가톨릭의 성 요셉 성당과 쿨라파 모스크 1955년에 조화를 상징하며 세워진 압부드 혹은 다키르 건물[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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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바그다드에 입성하는 영국군

1916~1918년 아랍인들의 반란과 연합군의 간섭으로 오스만 제국은 이 지역에 대한 통제권을 상실했고, <후세인 맥마흔 서한>(1915)의 약속을 무시하고 <사이크스-피코 협정>(1916)에 따라 영국이 메소포타미아에 대한 통치권을 장악하면서 1920년부터 1932년까지 영국신탁통치하에 놓였다. 그러다가 1932년에 영국이 물러나면서 바그다드는 이라크 왕국의 수도로 정해졌다. 당시 인구는 약 30만이었고, 그중 유대인이 10만 가량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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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바그다드 총독 할릴 파샤가 조성한 라시드 거리. 1917년 이라크 최초로 가로등 점등이 되는 등 바그다드의 샹젤리제란 별명이 있다. 본래 이름은 할릴 쿠트 거리였으나 영국군 주둔 후 힌덴부르크 거리를 거쳐 앗나스르 거리가 되었다가 1936년 칼리파 하룬 알 라시드를 따서 명명되었다.

1941년 4월, 라시드 알리의 친독 쿠데타 후 영국군이 재차 개입하자 그는 도주했고 바그다드 시장은 항복했다. 다만 6월 초엽, 유대인들이 영국군을 도왔다는 소문에 반유대 폭동이 벌어져 약 180명이 살해되고[66] 유대 상점들에 대한 약탈이 벌어졌다. (파르후드) 폭동 진압 과정에서는 3백여 폭도가 피살되었다. 1950년 바그다드의 인구는 크게 늘어 58만명이 되었다. 다만 유대인들은 대부분 이스라엘로 이주했다. 1958년 7월의 쿠데타로 공화정이 설립된 후 피살된 하심 왕가 일원들의 시신은 바그다드 거리에 조리돌림 되었다.

2.6. 바트당 정권 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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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에 공화정을 수립한 7.14 혁명을 완공된 자유 기념물. 불의에 대한 항거를 바빌론, 압바스 양식으로 재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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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에 완공된 사담 후세인 '개선문' (카디시야의 검). 2003년 미군이 이곳을 통과한 사진이 유명하다.[67]

일련의 피바람 후 1970년대 들어 바그다드는 사담 후세인 정권 하에 오일쇼크와 함께 호황기를 맞았다. 상하수도, 고속도로, 철도 등 여러 근대적인 시설들이 확보 혹은 확장되었다. 이는 1967년, 1973년 폴란드 기술자가 제출한 설계안 대로 진행되었다. 하지만 1980년대 이란-이라크 전쟁으로 시가지 개발에 대한 자금은 급감했고, 이란군의 미사일 공격으로 여러명의 사상자가 나왔다. 1990년 걸프 전쟁 때는 미군의 공습을 당했고, 2003년 이라크 전쟁 때도 미군의 폭격을 심하게 당하는 수난을 겪었다.

사담 정권의 몰락 후 미군정 하에서 바그다드에는 종파간 전쟁이 벌어지는 헬게이트가 열렸다. 순니-쉬아 민병대 간의 테러가 연이었고, 정부의 고위 공무원이나 각국 대사관 인원들도 삼엄한 무장 경호 하에서만 이동할 수 있었다. 15만의 아시리아인이 살던 도라 구역은 알카에다 등 극단주의 단체들의 공격과 납치 등을 겪은 후 2014년에는 기존의 1%인 1500명만 남아있었다. 혼란 와중에 국립 박물관의 유물들이 상당수 약탈되었고[68] 국립 도서관의 역사적 가치가 높은 서적들도 여럿 소실되는 문화 인프라의 붕괴를 겪었다. 이러한 혼란기는 2008년에야 소강 상태이다 2014년 재개되어 2017년에야 완전히 안정을 찾았다.

2.7. 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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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담 정권이 붕괴되고, 2003년 이후에 미군이 주둔한 뒤로는 이슬람 반군들과 미군 사이의 전투로 도시 곳곳에 폭탄 테러나 총격전이 일어나는 등 혼란기를 겪기도 했다.[69] 또한 바그다드에는 옛날부터 수니파시아파가 도심 곳곳에 섞여 살았는데, 이라크 전쟁 이후로 수니-시아파 간 종파갈등이 극도로 치달으면서 하루가 멀다 하고 종파간 테러와 폭력사태가 이어졌고, 도시 곳곳에는 종파간 영역을 나누는 분리장벽이 설치되는 등 도시 분위기가 매우 살벌해졌다. 알라시드 구의 도라(Dora) 지역은 사담 몰락 전에는 15만 명의 기독교도 아시리아인만다야교도들이 살았지만 이라크 전쟁 이후 알 카에다 같은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이 날뛰면서 거의 대부분이 다른 지역이나 나라로 이주하였다.

미군이 철수한 이후로 혼란상이 많이 줄어들 것 같았지만, ISIL이라는 이라크 역사상 최악의 이슬람 극단주의 테러 단체의 등장으로 다시 위험한 도시가 되었다. 그나마 바그다드가 함락되네 마네 소리가 나올 정도로 ISIL 세력이 바그다드에 근접했던[70] 2014년에 비해 2016년에는 이라크 정부군이 힘을 되찾고, 각지에서 다에시 군에 대한 반격이 성공하며, 서방 세력의 연이은 공습으로 IS의 전체적인 세력이 크게 줄어든 상황이라, ISIL은 2016년 6월 기준으로 바그다드에서도 한참 멀리 쫓겨난 상황이다. 2016년 5월 바그다드 폭탄 테러, 2016년 카라다 폭탄 테러 등 여전히 잔혹한 테러는 일어나긴 하지만, 확실히 상황 자체는 좀 나아진 편이다. 이후 테러만 줄어들고 안정을 되찾는다면 여행금지가 먼저 풀릴 것으로 보인다.

2013년부터 바그다드 남동쪽 10km 떨어진 곳에 비스마야 신도시를 건설한다. 신도시 건설은 대한민국의 한화건설이 주도하고 있다. 2015년 바그다드는 유네스코 문학 창의성 도시로 선정되었다. 아랍 도시들 중에선 처음이다.

2019년 6월 4일에 바그다드의 그린 존(Green Zone)이 이라크 전쟁 16년 만에 일반인들에게 공개되었다.#

2019년 10월 1일부터는 생활고를 견디다 못한 이라크 시민들의 반정부 시위가 일어났고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100여 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

반정부 시위도 문제이지만 세력권을 잃은 IS는 점조직화되어 계속 게릴라식 테러를 저지르고 있는 관계로 바스라 등 남부 이라크면 몰라도 모술, 바그다드 등 중부, 북부 지역은 한동안 여행 금지 지역 상태일 것으로 보인다.
2020년 1월에는 이란 장군 가셈 솔레이마니가 바그다드 국제공항에서 미군에게 암살되며 긴장감이 돌기도 했다.

3. 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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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그리스강이 도시를 가로지르며 바그다드에서 강 동쪽 지역을 알 루사파, 서쪽 지역은 카르크로 부른다. 티그리스강을 접하면서도 유프라테스강과 멀지 않은 곳에 있다. 메소포타미아 평원 중심부에 위치한만큼 대부분이 평야인데다 저지대이며 해발고도가 34m에 불과하다.

3.1. 그린 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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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린존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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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살 2세가 세우고 사담 후세인이 증축한 공화국 궁전

티그리스 서안의 지역으로, 넓이는 약 10 제곱킬로미터다. 바그다드에서 가장 보안이 철저한 곳으로 손꼽히며, 각종 정부 기관 및 외교 공관들이 밀집된 조계지 느낌이다. 바트당 시절부터 정부 구역으로 개발되었고, 현재까지도 이라크 정치 1번지이다. 2003년 ~ 2009년간 미군이 주둔하다가 민정으로 이관되었고, 한동안 안보를 이유로 통제 구역으로 유지되다가 2018년 핵심 구역을 제외한 대부분이 민간에 공개되었다.

4.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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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그다드 혹은 알 마문 타워. 걸프전 당시 파괴된 통신탑을 대체하기 위해 1994년 세워졌다. 본래 '국제 사담 타워'라 불렀으나 2003년 현 이름으로 바뀌었다. 높이는 204m로, 90년대 중반 기준 카이로 타워보다 높고 쿠웨이트 해방 타워보다 낮은 중동의 주요 마천루였다.

이라크 인구의 22%를 차지하는 최대도시인만큼 경제적으로도 가장 중요한 도시이며 많은 기업들이 활동하는 곳이다.

과거에는 많은 관광 자원을 가진만큼 관광객이 많이 방문했으나 여러 전쟁을 거치며 대부분의 국가가 이라크를 여행금지국가로 지정하여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기면서 관광업이 침체되었었다. 2020년대인 현재는 비교적 안정을 되찾아 여러 국가에서 관광객을 유치하는 중이다.[71]

5. 이슬람 성지

바그다드는 1400년 이슬람 역사 중 500년 가량 이슬람권의 중심지이자 교통이 발달한 서아시아의 최대도시 중 하나였기에 순니, 쉬아, 수피 등 여러 종파들의 성지를 지닌 신성한 도시이기도 하다.

5.1. 쉬아 열두이맘파: 카지미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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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두이맘파의 7대 이맘 무사 알 카짐과 9대 이맘 무함마드 알 자와드가 안장된 카지미야 (혹은 알-카지메인) 성지

이라크 내에서도 나자프(쿠파)와 카르발라에 밀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바그다드 북쪽 외곽의 카지미야 역시 시아파의 주요 성지 중 하나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이란 최대의 성지라 꼽히는 마슈하드보다 더 중요한 곳인데, 바로 12 이맘들 중 7대와 9대 이맘들을 모시고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8세기 말부터 아바스 왕조의 칼리파들이 당대 학문적, 신앙적으로 명성을 드높혀가던 쉬아 이맘들을 경계하여 본래 그들이 거주하던 메디나에서 이라크로 소환하여 죽을 때까지 감금하였기에 알리와 후세인 이후로도 7 ~ 11대 이맘들은 (이란에서 죽은 8대 이맘 알리 레자를 제외하면) 모두 이라크에서 사망하게 된 것이다.[72]

10세기 부와이 왕조 (열두이맘파를 신봉함)에 의해 세워진 카지미야는 이슬람력의 일곱 번째 달인 라잡 25일마다 무사의 순교를 기념하는 백만에 달하는 쉬아 순례객들로 붐비게 된다. 그러다 보니 2005년에는 수백명이 압사당하는 참사도 있었다. 카지미야 일대는 바그다드 중에서도 쉬아 세가 가장 강한 곳이며, 명문 쉬아 마드라사들이 있다. 따라서 이라크 외에 이란이나 레바논, 바레인, 아제르바이잔 등 외국인들도 가끔 볼 수 있다.

5.2. 순니 하나피파: 아자미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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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니파 하나피 마드하브의 교조인 아부 하니파 앗 누만이 안장된 영묘 및 모스크. 아자미야란 이름은 아부 하니파의 칭호인 이맘 알 아짐 (위대한 이맘)에서 유래되었다. 다만 아자미야는 거의 구역 이름이 되어서 성지 자체만을 부를 때에는 아부 하니파 모스크로 지칭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10세기 말엽 부와이 왕조 시기에 처음 세워져 셀주크 제국기에 확장되었으나 시아파인 사파비 왕조에게 파괴되었다가 17세기 오스만 제국기에 현재의 구조로 재건되었다.

6. 언어별 명칭

아랍어 بغداد
히브리어 בגדאד
영어 Baghdad
러시아어 Багдад
그리스어 Βαγδάτη
힌디어 बग़दाद
중국어 巴格达
일본어 バグダード
스페인어 Bagdad
프랑스어 Bagdad

7. 창작물에서

  • <시간탐험대> 애니메이션의 주요 무대. 마침 아바스 왕조의 최전성기인 9세기로 번영하는 세계 수도의 모습을 하고 있다.
  • 영화 <알라딘의 새로운 모험>의 배경 도시이다.
  • 소련, 러시아의 실험주의적 아방가르드 밴드인 아욱치온의 앨범 중 <바그다드에서는 모든 것이 고요하다>라는 앨범이 있다

8. 둘러보기



[2018년] [2019년] [3] مدينة السلام[4] 1959년 압둘 카림 카셈 정권에 의해 지방 이주민들을 수용하려고 건설된 신도시로 시아파 다수 거주지역이다. 처음에는 타우라(Thawra, 혁명)였다가, 1982년 사담시티로 바뀌었고, 2003년 이후 시아파 성직자 알사드르의 이름을 따 바뀌었다. 구역 전체가 빈민가라고 불러도 무방할 정도로 생활 여건이 좋지 않으며, 치안도 대단히 위험한 지역이다. 미군 주둔 당시 미군이 호위를 맡아도 안전이 보장되지 않을 정도였다.[5] 현 지명: 아카르 쿠프 عَقَرْقُوف[6] 나우바크트는 조로아스터교도 출신의 이슬람 개종자였는데, 미트라 신앙과 연계하여 불의 달을 선택했다 한다. 마샬라 빈 아타리는 유대계 페르시아인이었다[7] 다만 그는 이후 셰이크 알 이슬람 직위를 권한 알 만수르의 부탁을 거절했다가 괴씸죄로 투옥되어 옥사한다[8] 각 면이 1년을 상징하듯 365m인 정사각꼴이었다. 금문궁전은 녹색 돔 궁전으로도 불렸고, 면적은 170m2 정도로 엄청 크지는 않았지만 화려했다. 상징적인 중앙의 녹색 돔 밑에는 각 면이 9m 정도인 정사각꼴의 알현실이 두 층 있었다. 아래 층의 천장은 9m 높이의 아치형이었다. 알현실 앞에는 아이완이라 불린 벽감과 그 위에 얹힌 14m 높이의 아치가 있었다.[9] 각 면이 91m인 정사각꼴이었다. 진흙벽돌 벽에 목재 기둥과 목재 주두가 지붕을 지탱했다. 기둥은 이집트-그리스식 돌기둥처럼 여러 목재 원통이 풀과 철심으로 고정된 형태였다. 다만 미나렛 근처의 기둥들은 통나무였다. (목재가 적은 중동의 특성상 통나무 기둥은 매우 귀했다) 먼저 건설된 궁전의 벽면에 맞추느라 키블라 (메카 방향)를 향하지 않은 것도 특징이다[세부] 장소들) 1. 알 만수르 모스크 (대사원) 2. 금문 궁전과 시리아 문 방향의 두 회랑 3. 여러 관공서들 (보물고, 무기고, 대법원, 토지세청, 공립 빵집, 관세청, 비서실, 왕자들의 궁전 4. 알 무트바크 감옥 5. 바스라 문 6. 호라산 문 7. 시리아 (샴) 문 8. 쿠파 문 9. 무사이브 모스크 10. 수문장 숙소, 사다카 (헌금) 위원회, 마구간 및 낙타 우리 11. 구 교량 12. 신 교량 13. 와다흐 궁전 및 모스크 14. 하라니 홍예거리 15. 샤르키야 구역 모스크 16. 수피 마루프 카르키 영묘 17. 알리 성지 (마슈하드 알 민타카) 18. 견과류 저장고 (다르 알 자우즈) 19. 후마이드 이븐 압둘 하미드 궁전과 앗 샤이르 (보리) 문 20. 재상 아두드 앗 딘 궁전 21. 사라트의 옛 수도원 22. 주바이다의 카라르 궁전 23. 쿨루드 궁전 24. 왕실 마구간 25. 교량 부서와 경찰청 26. 술라이만, 살리흐 왕자 궁전 27. 시리아 문 감옥 28. 사이드 알 카팁 궁전과 고아원 29. 페르시아인 상가 (두칸 알 아브나) 30. 페르시아인 광장 (회랑) 31. 샤비브 광장 (회랑)[11] 애초에 원형도시의 정확한 위치와 (카르크 구 일대인 것은 합의되었지만) 규모에 대해서도 직경이 1km 인지 3km인지에 대해서도 결론이 나지 않은 상황이다[12] 혹은 768년[13] 11세기의 학자 알 카팁에 의하면 원형성벽의 1/3을 짓는데만 벽돌 16만 2천개가 쓰였고, 성벽 높이는 24m였다 한다[14] 이에 더하여 무흐타시브란 관직을 두어 시장 관리 및 속임수 방지 등을 맡겼다[15] 혹은 39m[16] 이러한 경향은 특히 하룬 알 라시드 대에 심해졌고, 쇠락하던 금문 궁전을 알 아민이 보수해 썼으나 4차 피트나 때 파괴된 후 완전히 방치되었다.[17] 사산 제국령 예멘의 페르시아-아랍인 혼혈을 부르던 알 아브나에서 유래된 것이다.[18] 이들은 9세기 초까지 아랍화 된다.[19] 현 아프가니스탄의 무르갑[20] 아랍어로 페르시아인들 이란 뜻이다[21] 이는 현재까지 전통 직업으로 남아있다[762-836] [23] 당시 수만명만 사는 도시도 대도시라 불릴 정도였고, 좀 잘 나가는 국가들의 인구가 수백만명 수준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매우 대단한 수치다.[24] 대표적으로 알 마문, 사부르 빈 아르다시르, 니잠 알 물크, 알 무스탄시르 1세의 도서관이 유명하다. 사부르의 도서관은 불과 70여년만에 셀주크 조의 방화로 소실되었다. 니자미야, 무스탄시리야는 1258년에 소실되었다.[25] 페르시아인들도 8세기 중반부터 아랍어를 기본 언어로 쓰게 된 결과이다[26] 페르시아화는 후일 부와이 왕조가 집권하며 심화되었고, 이때에는 쉬아화도 함께 진행된다.[27] 바그다드의 주요 페르시아인 가문들로는 발흐 출신의 바르마크 가, 고르간 출신의 술리 가 등이 있었다.[28] 시멘트 + 석회 + 규사 + 물[29] 이후로도 금문궁전의 기본 골격은 유지되었으나, 890년대 대사원 증축을 위해 일부가 헐렸고 941년에는 폭우로 상징인 녹색 돔마저 붕괴하며 유적지로 남았다. 돔 아래 중심 건물의 벽은 1258년에도 파괴를 면하긴 했으나 15세기를 전후로 대사원 유적과 함께 사라진다[30] 인접한 주바이다 궁전 역시 파괴되었다. 이로써 티그리스 서안의 쇠락과 동안으로의 중심지 이전이 가속화되었다[31] 알 마문이 죽은 동생의 거처를 이어 쓰길 거부하며 버려졌다[836-908] [33] 이때 쇠락한 미흐랍, 민바르, 막수라 등이 복원 및 치장되었다[34] 13개는 중정, 4개는 측랑으로 이어졌다[35] 마수디에 의하면 건설에 40만 디나르 소요. 하사니 궁전과 지하 통로로 연결되어 하렘과 시종들이 외부에 보이지 않고 다닐 수 있었다. 다만 해당 통로는 1074년 홍수로 파괴되었다[36] 본래 칼리파 전용이었으나 곧 민간에도 개방되어 제2의 대사원으로 쓰였다. 주민들은 밤에 닫을 때까지 이곳에서 여러 논의를 하는 등 회의장으로도 활용했다.[908~1060] [38] 벽돌과 모르타르로 안뜰 동남쪽 모퉁이에 세워졌고, 상부와 하부 모두 페르시아식 장식인 무카르나스로 치장되었다. 몸체에는 쿠파체와 아라베스크 문양이 장식되어 있다[39] 곧 복구되긴 했지만 후일 다시 중괴한다[40] 다만 돔을 지탱하는 벽은 1258년까지 잔존했다[41] 물론 바그다드 내에도 여러 민족과 종교가 공존했다[42] 유명 페르시아인 의사들이 활약, 1258년 파괴[1060~1125] [44] 관료들이 이를 제지하려 하자, 하라위 "너희는 성지가 프랑크에게 더럽혀졌는데도 침묵했으면서 이런 의례에만 신경쓰느냐?"며 독설을 퍼부었다[45] 후일 트리폴리 백국 설립[1125~1157] [47] 후일 장기 왕조를 세우는 그가 맞다[48] 이때의 공로로 장기는 이듬해 모술과 알레포의 아타베그로 봉해진다.[49] 무함마드 2세의 형 말리크샤 3세가 거병[1157~1258] [51] 1160년 투델라의 벤자민이 기록함[52] 쿠틀루그 이난츠가 전향할 것이라는 거짓 첩보를 믿었다고..[53] 일련의 빠르고 수월한 정복은 이란인들이 호라즘 세력을 이방인 혹은 야만인으로 여겼기 때문이었다.[54] 당나라의 명장 곽자의의 후손[55] 그의 죽음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전자는 위의 그림처럼 금은보화가 가득한 방에 감금해서 아사시켰다는 것이고 후자는 양탄자로 감싼 후에 말발굽에 압사시켰다는 것인데 진실은 알 수 없다[56] 이때 일 칸국 군의 무슬림 병사들은 전투에서 열외되었다[57] 이때 하캬리 후국의 이즈 앗 딘 쉬르가 그를 돕는다[58] 바르쿠크가 다마스쿠스까지 동행하며 배웅했고, 많은 재물과 함께 심복인 사드 앗 딘 이브라힘까지 붙여주었다[59] 혹은 2만[60] 1258년에도 그러진 않았다. 물론 영토에 크게 연연하지 않는 티무르 특유의 스타일도 있을 것이다[61] 그리고 서신으로 티무르에게 알렸다. 다만 티무르의 송환 요구는 거절했다[62] 물론 돌아간 후에 맘루크 조에 별다른 조공을 하지 않고 입을 씻는다[63] 1536년에 바스라까지 복속하며 이라크 전역은 오스만 제국령이 된다.[64] 그중 94개는 동벽에 있었다[65] 사진 자체는 1964년에 찍은 것[66] 부상자는 약 1천여[67] 파일:external/90b2082cfe1ee06f604b232853a867ffed9d7e115f07d35e11a7bd608cd512b1.jpg[68] 튀르키예, 이스라엘, 아랍에미리트는 물론 일부는 경매로 유럽이나 미국까지 팔려갔다가 2020년대야 환수된다[69] 그런데 이런 위험한 도시에 들어간 민간인이 있었다. 로렌스 앤서니라는 남아프리카의 환경운동가로, 순전히 바그다드의 동물을 위하여 들어갔다고. 그가 한 일을 보려면 본인의 서적《바그다드 동물원 구하기》를 참조.[70] 한 때는 바그다드 외곽에서 불과 1.6km 떨어진 곳까지 IS가 진출했을 정도였다.[71] 특히 사우디아라비아와 요르단, 이란 등 중동 이웃 국가들은 이라크는 그래도 시리아에 비해 정세가 안정되었다고 판단해 외무부의 방문 금지 단계에서 해체했다.[72] 결과적으로 생사가 확실한 11명의 이맘들 중 5명이 이라크에 매장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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