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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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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지 여부를 떠나 우리나라가 6·25의 폐허에서 허덕일 때 '우리도 하면 된다'는 자신감을 국민들에게 불러일으켰다. 정치를 하면서 우리가 최대 정적이었지만 국민들에게 강한 자신감을 심어준 것은 평가할 만하다."
김대중 전 대통령[2]
박정희는 초대 대통령 이승만과 함께 한국 현대사에 가장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로 긍정적인 면으로나, 부정적인 면으로나 한국 근현대사에 있어 결코 건너뛰고 평가할 수 없는 인물로 여겨진다.김대중 전 대통령[2]
군부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이후 대통령이 되어 1960~1970년대 새마을운동을 비롯한 여러 경제개발정책으로 대한민국의 경제 성장을 주도하였고 한강의 기적의 발판을 만들어 대한민국이 선진국으로 가는 기틀을 마련하고 빈곤에서 탈출시킨 반면 유신 체제 선포와 정적 탄압으로 장기 독재를 하여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후퇴시키고 인권탄압을 자행하던 독재자로서의 어두운 일면이 존재한다.
박정희는 4.19 혁명으로 이승만이 몰락하고, 장면 내각이 출범한 이후로도 여전히 정치가 혼란하고 민생은 낙후되어 있던 당대 대한민국의 정국 속에 군부 쿠데타를 일으켰다. 대한민국이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적으로 성장하여 근대화를 달성하고 북한과의 체제 경쟁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을지 중대 기로에 있던 이 시기에 박정희는 능숙한 정치력과 공포정치를 통해 20년 가까이 최고 권력자의 자리에 올랐다. 그의 집권을 전후로 대한민국은 지각변동이라 할 만큼 모든 것이 완전하게 뒤바뀌었기에 그 공과가 어떤 대통령보다도 뚜렷하다.
대표적인 공을 꼽는다면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을 거치며 심각하게 피폐해져 최빈국을 벗어나지 못하던 상황이던[3] 한국의 재건에 주력하였다는 점이 있다. 정부 주도 하에 1차 ~ 4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4]을 설계하여 성공적으로 추진하였고, 각종 산업 육성과 대기업 성장 지원 등으로 연간 경제 성장률이 9회에 걸쳐 10%를 넘기며 18년 동안 GDP를 약 28배 상승시키며[5] 한강의 기적을 주도했다. 또한 미래 산업에 대한 식견으로 경부고속도로, 중화학공업 건설 등을 강행하여 신흥공업국으로 변모했으며, 이외에도 녹화사업으로 한국의 산림을 재건하고 쌀의 자급자족을 달성하여 보릿고개로 불리던 만성적인 식량난을 없애며 절대적 빈곤율을 기존의 1/6로 감소시키는 등[6]에 따르면 한국의 절대적 빈곤율은 1961년 66.9%에서 1979년 11.2%로 감소했다.] 대한민국이 선진국으로 도약하는 기반을 마련했다.
대표적인 과는 정치적으로 중앙정보부를 위시한 김영삼 질산 테러 사건, 김대중 납치 사건 등의 정적 탄압과 인혁당 재건위 사건을 위시한 용공조작 사건과 사법살인, 1972년 10월 유신을 기점으로 사실상의 1인 독재 체제를 확립하여 권위주의 독재로 회귀하여 한국의 자유민주주의를 크게 후퇴시킨 점을 꼽을 수 있다. 이후 1974년 ~ 1975년 동안 긴급조치를 9차례 시행하며 겨울공화국으로 비견되는 억압적인 사회적 분위기를 조성하였으며, 이외에도 징병률의 급격한 상승 및 병급여 사실상 동결[7] 등 징병제 개악, 금지곡 지정을 비롯한 문화 검열, 선감학원과 서산개척단 등 부랑아 가혹 행위를 비롯하여 적지 않은 방면에서의 인권·기본권 침해가 꼽히고, 경제적으로도 양극화 및 부정부패, 노동 착취[8] 등의 문제가 있었다.
이런 이유로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대한민국 현대사는 박정희라는 인물을 빼놓고 절대 논할 수 없으며, 특히 경제 및 산업 구조에 그 영향을 크게 드리운 인물이다. 정치인이지만 동시에 경제학자이기도 한 유승민은 저서에서 박정희의 경제적 공과와 명암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박정희 대통령은 군인 출신이지만, 경제에 관한 분명한 철학, 전략과 용인술, 득실에 대한 철저한 계산력[9]을 갖춘 지도자였다. 포항제철(현 포스코), 울산·구미·창원·여수의 중화학공업, 경부고속도로, 새마을운동과 농어촌 근대화, 복지제도 도입 등 1960~1970년대의 수많은 업적들은 박정희 대통령과 우수한 경제관료들, 그리고 무엇보다 성실하고 근면한 국민들이 만들어놓은 합작품이다.
유승민, 『야수의 본능으로 부딪쳐라』 377쪽
유승민, 『야수의 본능으로 부딪쳐라』 377쪽
초기의 한국경제는 자유시장경제, 자본주의를 기본으로 했지만 그와 동시에 관치경제, 계획경제의 성격이 강했다. 특히 1960~1970년대의 박정희 모델은 다분히 국가주도형이었고 박정희 모델이 큰 성공을 거둠에 따라 1980년대 이후 수십년 동안 그 성공신화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박정희 모델 이후에 우리 경제가 새로운 도약을 하기 위해서는 경제제도의 선진화와 이를 뒷받침하는 정치의 선진화가 필요했으나 둘 다 미흡한 상태에서 IMF위기를 맞게 된 것이다.
1960년대 이후 30년 동안 고속성장을 가능케 했던 제도는 1990년 이후 더 이상 성장에 플러스로 작동하지 않고 오히려 장애물이 되었다. ... 박정희 모델로 성공한 경제가 박정희 모델을 극복하지 못함으로써 정체된 것이다.
유승민,『야수의 본능으로 부딪쳐라』 347쪽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심층적인 평가는 대한민국이 민주화된 199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될 수 있었다. 군사정권 당시에는 독재자였던 그를 비판하는 것은 곧 범죄로 취급되어 금기시되었고, 박정희가 사망한 뒤에 집권한 전두환이 그를 깎아내리는 작업을 진행하기도 했지만 여전히 박정희 시대의 경제 성장을 기억하는 민중들 사이에서 박정희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는 이루어지기 어려웠다. 이후 민주화를 거쳐 1990년대에 이르러 박정희 정권 시절 자행된 여러 국가폭력의 진상이 조금씩 드러나면서 박정희 대통령의 과오에 대한 부분 역시 조명되기 시작했다.1960년대 이후 30년 동안 고속성장을 가능케 했던 제도는 1990년 이후 더 이상 성장에 플러스로 작동하지 않고 오히려 장애물이 되었다. ... 박정희 모델로 성공한 경제가 박정희 모델을 극복하지 못함으로써 정체된 것이다.
유승민,『야수의 본능으로 부딪쳐라』 347쪽
제6공화국 출범 이후 보수 정권과 민주당 정권을 오가는 시대상에 따라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대중의 평가 역시 그 영향을 받아 변화하는 경향이 있다.[10] 그럼에도 역대 대한민국 대통령 중에서 꾸준하게 최상위권의 지지율을 기록하고 있는 인물이다.
2. 긍정적 평가
3. 부정적 평가
4. 논란이 있는 평가
[1] 2009년 SBS에서 방영한 육성 회고록 방송 中. YS는 박정희 정권 시절 초산테러, 의원직 제명 등 갖은 정치적 탄압을 받았다. 이 때문에 그는 한평생 박정희를 증오하였으며 3당 합당 이후 보수계열 인사들, 특히 박정희 정부의 고위인사였던 김종필과 한배를 타게 된 이후에도 박정희에 대한 긍정적인 재평가는 한사코 거부하였다.[2] 출처. DJ 또한 YS와 마찬가지로 박정희 시절 갖은 정치적 박해를 받았고, 1973년에는 중앙정보부에 의해 일본에서 납치되어 살해될 뻔 하였다. 하지만 김대중 전 대통령은 집권 이후 화해와 용서의 정신을 내세우며 박정희에 대해 높게 평가하는 멘트를 여러차례 하였고, 집권기간동안 박정희기념도서관의 설립 예산을 지원하였다. 다만 당시 이런 행보는 DJP연합으로 공동정권을 잡은 김종필, 박태준 등 구 공화계 인사들의 존재 때문에 일부 의도되었다.[3] 1968년까지 한국이 1인당 GDP가 200달러를 밑도는 최빈국이었던 것 자체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한국보다 1인당 GDP가 낮은 나라도 적지 않았기에 최빈국 중에서도 하위권이었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덤으로 제1공화국 당시 실질 환율이 공식 환율과 2배나 차이가 났기에(1961년 장면 내각에서 달러당 130원의 공정환율로 2배 평가절하되었고, 1965년 고정환율제가 폐지되고 단일변동환율제로 바뀌어 달러당 255원으로 정상화되었다.) 실질적으로는 1인당 GDP가 500~900달러대인 극빈국 수준이었다. 흔히 한강의 기적을 논할 때 극적인 효과를 위해 오래도록 고난에 허덕이던 한국이 초고속 성장을 했다고 표현하는 경우도 적지 않으나 한국은 전통적으로 조선시대와 같은 전근대에도 현재와 비슷하게 세계에서 중견국 이상의 반열에 속하는 체급으로 평가되는 경우가 많으며 국운이 완연히 기울었던 대한제국 시기 조차도 (아시아 국가 대다수가 식민지였다는 것과 비교적 규모가 큰 한국의 인구를 감안하더라도) 경제 규모에 있어 당대 아시아 최상위권 수준이었다.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의 여파로 기존 한국의 체급에 비해 비정상적으로 국력이 쇠퇴했던 것으로 보는 것이 보다 정확하다. 따라서 현재는 한강의 기적을 표현하는 것과 관련하여 한국을 전통적인 가난한 나라로 전제하는 것을 지양해야 한다는 의견도 상당하다.[4] 1차 계획은 1960년 이승만 정부의 3개년 계획으로 최초 기획되었으며, 장면 내각은 이를 토대로 5개년으로 재편성하여 보완해 1차 계획의 초안을 설계했고, 박정희 정부는 이를 수정, 보완한 1차 보완계획안을 수립하여 실행했다. 이후 2차 계획은 박정희 정부와 미국, 서독측 고문단의 협력으로 설계되었으며, 3차 ~ 4차 계획은 전적으로 박정희 정부가 설계, 실행했다.[5] 세계은행 통계에 따르면 1961년 24.2억달러로(1961년 공정환율을 기존 달러당 65원에서 130원으로 2배 평가절하했기에, 1960년 39.6억달러 규모에서 크게 하락했다.) 39위였으나(북한, 아르헨티나, 인도네시아와 동구권 사회주의 국가 등 통계에서 빠진 국가가 많기에 실제로는 40위권 중반이다), 1979년 669.5억달러로 22위까지 상승했다. GDP의 규모만 본다면 엄청난 상승세를 기록했으나, 18년 동안 인구 또한 2500만에서 3700만으로 증가했기에 가파른 인구성장세에 따른 요인도 동반했으며, 동기간 세계 인구는 30억에서 43억으로 증가했다.[6] [[https://www.gapminder.org/tools/#$model$markers$billy$encoding$selected$data$;;;;;;&chart-type=mountain&url=v2]|갭마인더 재단][7] 유신 전에는 경제성장률에 따라 인상률이 높았는데, 유신 이후에는 경제성장률이 이전보다 높아졌는데도 급여 인상률을 대폭 낮췄다. 물가상승률을 감안하면 사실상 군 급여를 삭감한 수준.[8] 그 여파로 IMF 외환위기 이전까지 한국의 노동 시간은 압도적인 세계 최악 수준이었으며, 과거에 비해 많이 나아졌다는 지금도 한국의 노동시간은 압도적인 선진국 최악 수준이다.[9] 대표적으로 베트남 전쟁 파병이었는데 프랑스가 미국에게 넘긴 뜨거운 감자 베트남 전쟁을 넘겼으나 유럽은 명분없는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기에 홀로 싸우기에는 여론도 의식해야 하는 등 전전긍긍한 상태였다. 이때 박정희는 미국이 '한국을 구해준 미국을 돕자'라는 명분으로 파병카드를 꺼냈는데 사실 이는 표면적 명분이고 실상은 미국이 주한미군까지 빼내려고 할 정도로 전황이 안 좋게 흘러가자 이 시기에 접근하여 전투병력을 제공해주는 대신 F-4/전차/M16소총 보급 등 한국군 현대화 지원, KAIST 설립 지원 요청 등등[10] 후임 전두환 정부의 격하와 문민정부 역사바로세우기로 평가가 하락하였으나, 1997년 IMF 사태 이후 박정희 신드롬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긍정적으로 재평가되었고,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와 재평가 이전에는 역대 대통령의 선호도와 직무 평가에서 항상 압도적인 1위를 차지했다. 이러한 흐름속에 제 2의 박정희를 자처한 이인제가 정계에서 선전한 것을 시작으로, 자녀인 박근혜가 정계에 진출하여 그 후광속에 2012년 과반 득표로 대통령에 당선될 정도로 박정희 향수는 공고했다. 허나 2016년 최순실 게이트로 박근혜의 평가와 동반하여 평가가 크게 하락하였으며, 이후 문재인 정부 동안 일부분 회복되었으나 2024년 윤석열 정부 비상계엄 이후에는 부정적인 방면에서 재조명되고 있다. 다만 박정희의 지지층은 60~70년대의 경제성장을 직접적으로 경험한 노년층에 편중되어 있기에,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평가가 떨어지는 경향성은 지속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