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서(晉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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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張茂(? ~ 322)
동진의 인물. 자는 위강(偉康).
2. 생애
젊어서부터 고독하고 빈곤한 생활을 하였으나, 포부가 있고 행실이 올곧아 마을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초공 진민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장무는 의병을 일으켜 진민의 동생 진빈(陳斌)을 토벌하고 군(郡) 전체를 온전히 지키니, 낭야왕 사마예가 그를 징소해 연속(掾屬)으로 삼았다.낭야왕 사마예가 지시를 내려, 늙어서 쓸모없어진 국가 소유의 소 30마리를 가져다 팔려 하자, 장무가 간했다.
"소를 잡을 때 지켜야 하는 금기가 있으므로, 이것들을 사는 자는 함부로 도살할 수도 없습니다. 또, 이 소들은 노쇠하여 농사를 짓거나 수레를 끌 수도 없으니, 이는 백성들에게 쓸모없는 물건을 팔아 이득을 챙기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에 사마예는 소를 파는 것을 그만두었다. 이후 장무는 승진하여 태자좌위솔, 오흥내사를 역임했다.영창 원년(322년) 3월, 대장군 왕돈이 무창(武昌)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그 심복인 심충이 호응해 오흥(吳興)에서 거병했다. 이때 심충은 장무와 그의 세 아들들을 전부 살해했다. 주찰(周札) 휘하에서 부장을 지내고 있던 장무의 동생 장앙(張盎)도 심충의 공격에 맞서 싸우다가 전사했다. 이에 동진 조정은 장무를 태복(太僕)으로 추증해주었다.
3. 일화
- 장무는 젊었을 적에 거대한 코끼리가 나오는 꿈을 꾼 적이 있었다. 장무가 점쟁이 만추(萬推)를 찾아가 그 꿈의 해몽을 부탁하자, 만추가 말했다."그대는 마땅히 대군(大郡)을 다스리게 될 것이나, 이로 인해 좋지 못한 일을 당하게 될 것이오."
장무가 어째서 그러느냐고 다시 물으니, 만추가 다시 말했다."코끼리는 거대한 짐승이고, 짐승은 곧 지역을 다스리는 것을 의미하니, 이에 따라 그대가 대군을 다스리게 될 것이라 하였소. 하지만 코끼리는 그 상아 때문에 결국 인간에게 사냥당하고 목숨을 잃는다오."
과연 점쟁이의 말처럼 훗날 장무는 왕돈의 난에 휩쓸려 일족이 살해당하는 참사를 당하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