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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 |||||||||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 }}}}}}}}} |
}}} ||
프랑크 왕국 카롤루스 왕조 제2대 국왕 | |||
신성 로마 제국의 시조 카롤루스 대제 Carolus Magnus | |||
<nopad> 812년 ~ 814년 데나리우스 은화[1] | |||
<colbgcolor=#ffcc20><colcolor=black> 제호 | Karolus Imperator Augustus 카롤루스 임페라토르 아우구스투스 Imperator Augustus Romanum gubernans Imperium 로마 제국을 다스리는 황제 | ||
이름 | Karl (카를, 프랑크어)[2] Karolus (카롤루스, 라틴어) | ||
출생 | 742년 4월 2일[3] | ||
프랑크 왕국 왈롱나 주 에르스탈 시[4] | |||
사망 | 814년 1월 28일 (향년 71세) | ||
프랑크 왕국 아헨 시[5] | |||
재위기간 | 프랑크인의 왕 | ||
768년 10월 9일[6] ~ 814년 1월 28일 (46년) | |||
랑고바르드 국왕 | |||
774년 7월 10일[7] ~ 814년 1월 28일 (40년) | |||
서로마 제국 황제 (명목상) | |||
800년 12월 25일[8] ~ 814년 1월 28일 (14년) | |||
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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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 | 중세 독일어 (리푸아리안 방언[10]) | ||
조부 | 궁재 카롤루스 마르텔 | ||
부왕 | 피피누스 3세 | ||
종교 | 가톨릭 | ||
시복 | 1179년, 제3차 라테란 공의회 → 교황 베네딕토 14세 공인 | ||
축일 | 1월 28일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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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Pater Europae
유럽의 아버지
프랑크 왕국 카롤루스 왕조의 제2대 왕이자 서로마 제국의 멸망 이후, 서유럽에서 로마 제국의 황제에 오른 첫 번째 인물로 이후 수백 년 동안 이어진 신성 로마 제국의 시조로 여겨지기도 한다.[11]유럽의 아버지
프랑크 왕국의 왕으로서 이탈리아, 중유럽, 이베리아 등의 지역으로 지속적인 외정을 펼쳐 제국의 판도를 크게 확장했으며 로마 교황과 가톨릭 교회의 보호자를 자처하는 프랑크 왕국의 정책을 적극 계승하여 서유럽 전체에서 정치적, 종교적 권위를 확고하게 다진 군주가 되었다. 이후 공식적으로 황제가 되어 서로마 제국의 제위에 올랐다.
내정에도 업적을 남겨 통치하는 동안 제국의 경제를 크게 발전시켰으며 이른바 카롤링거 르네상스라고도 불리는 문화의 발전도 이 시기에 있었다.
2. 언어별 표기
고·중세 프랑크어 | Karl(카를) |
라틴어 | Karolus Magnus, Carolus Magnus(카롤루스 마뉴스)[12] |
프랑스어 | Charlemagne(샤를마뉴), Charles Ⅰ(샤를 1세) |
독일어 | Karl der Große(카를 대제)[13] |
이탈리아어·스페인어 | Carlo Magno(카를로 대제) |
영어 | Charlemagne(샬러메인), Charles the Great(찰스 대제) |
네덜란드어 | Karel de Grote(카럴 대제) |
한국어 | 카롤루스 대제 |
중국어 | 查理曼(Chálǐ màn, 사리만), 查理曼大帝(Chálǐ màn dàdì, 찰리 대제) |
아무래도 샤를마뉴가 제일 많이 통용된 편이다. 이는 프랑스의 영향이 컸다기보다는, 근대 영국에서 프랑스식 표기를 받아들여 샤를마뉴라는 표기를 많이 썼는데, 영어 서적이 널리 퍼지면서 샤를마뉴라는 명칭이 아시아까지 널리 퍼진 측면이 크다. 물론 애초에 근대 유럽 내에서 프랑스어의 영향력이 컸기 때문에 영국에서도 프랑스식 표기를 쓰게 된 것이기도 하지만.
그러나 오늘날에는 프랑스와 독일 사이에서 카롤루스를 어느 한쪽만의 위인으로 놓지 않기 위한 중립적인 표기로, 프랑스어도 독일어도 아닌 라틴어 표기 카롤루스 마뉴스(Carolus Magnus)가 자주 통용되고 있다. 그래서 표준 명칭은 카롤루스 대제(Carolus Magnus)이다. 그의 이름이 영단어 King, 독일어 단어 König 등 "왕을 뜻하는 단어 파생에 영향을 주었다."는 오해도 있는데, 카롤루스 마뉴스가 등장하기 훨씬 이전부터 고대 게르만 제어를 사용한 민족들은 왕이나 지도자를 두고 Cyning, Kœnugr, Koening이라는 표현을 썼으며 King, König 등은 전부 여기서 파생된 단어들이었으므로 카롤루스 대제를 본떠서 생긴 단어는 아니다. 애초에 카를 또는 칼은 고대 게르만 제어에서 남자 등의 의미를 지니지, 군주라는 의미를 지니지는 않았다. "위대하다"는 의미로써 보통 대왕이나 대제 등을 표현하고자 사용되는 라틴어 마그누스(마뉴스)가 각자의 언어 방식으로 마뉴, 망누스, 마그노 등등으로 변환된 셈이다. 이 마그누스라는 별칭으로 유명한 고대인을 하나 예로 들자면 폼페이우스, 즉 그 유명한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가 있다.
국내 일부 역사 교양서에서 등장하는 ‘샤를마뉴 대제’라는 표기는 엄밀히는 ‘역전 앞’과 마찬가지로 ‘대제’를 두 번씩이나 사용하는 겹말 오류라고 할 수 있다. 즉, 샤를마뉴 대제라는 표현은 따지자면 ‘샤를 대제 대제’ 또는 ‘샤를마뉴마뉴’나 다름없는 표현이다. 사하라 사막처럼 언중의 이해를 돕기 위해 추가된 것으로 여겨진다.
카롤루스 대제의 할아버지 카롤루스 마르텔을 비롯해, 카롤루스 대제가 이 이름을 처음으로 쓴 인물은 아니지만 가장 유명한 군주이기 때문에, 유럽의 왕가에서 찰스, 카를, 카를로스 등 같은 어원의 이름들이 자주 쓰이게 된 시초로 꼽힌다.
3. 생애
자세한 내용은 카롤루스 대제/생애 문서 참고하십시오.4. 외양 및 성향
1112년 ~ 1114년 상상화. 독일에서 제작. |
15세기 상상화. 프랑스에서 제작.[16] |
1512년 상상화.[17] 알브레히트 뒤러 작(作) |
"눈이 크고 눈빛은 활기를 띠고 있었다. 코는 약간 길었고, 머리는 금발이었으며, 표정은 쾌활하게 웃는 듯했다."
라고 한다. 젊은 시절에는 목소리가 가늘고 높은 편이었다고 전하며, 말을 급하게 할 때에는 더듬거리기도 했다고. 대식가이며, 구운 요리를 특히 좋아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몸은 균형이 잘 잡힌 전사형이었다. 그는 중년에 약간 배가 나왔던 것을 빼면 평생 동안 젊은 시절의 몸매를 유지했다고 한다. 키가 매우 컸다고 전해지는데, 19세기 중반에 그의 관을 열고 신장을 재 본 결과 192cm의 장신으로 확인되었다.[18] 사치스러운 옷보다는 모피 상의에 푸른 망토를 걸치기를 좋아했지만 무기만은 고급 무기를 고집했다.앞서 서술했듯이 카롤루스 대제는 구운 고기를 좋아했는데, 의사들이 건강을 위해 구운 고기 말고 삶은 고기를 먹으라고 조언해서 카롤루스 대제는 의사들을 싫어했다고 한다. 그래서 유언도 "나를 그냥 내버려 두게! 당신들의 치료약 없이 죽는 것이 낫겠어!"라고 의사들의 치료를 거부하는 내용이었다.
카롤루스가 글을 쓰지 못하는 문맹이었다는 이야기는 유명한데, 실제로 그는 죽기 직전까지도 침대 베개 밑에 서판을 놔두고 자기 전에 꼬박꼬박 연습을 하며 상당히 노력했음에도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그래서 그의 서명은 공문서에 2개의 줄을 열십자로 긋는 것이었다고.[19]
Temptabat et scribere tabulasque et codicellos ad hoc in lecto sub cervicalibus circumferre solebat, ut, cum vacuum tempus esset, manum litteris effigiendis adsuesceret, sed parum successit labor praeposterus ac sero inchoatus.
그는 글을 배우기 위해 노력했고, 침대의 베개 밑에 언제나 서판을 두고 틈이 날 때마다 글자를 익히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일찍부터 시작한 게 아니라 너무 늦게 시작했기에,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20]
그는 글을 배우기 위해 노력했고, 침대의 베개 밑에 언제나 서판을 두고 틈이 날 때마다 글자를 익히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일찍부터 시작한 게 아니라 너무 늦게 시작했기에,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20]
다만 아인하르트의 서술이 말하는 실패라는 게 카롤루스가 완전한 문맹이라는 것인지 "온전히(fully) 마스터하는 거에 실패했다."는 것인지가 애매한 편이라, "카롤루스는 문맹이다."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허나 이 시기 지배층이 대체로 실용적인 글쓰기에 능숙했기 때문에 카롤루스의 경우 상당히 예외적인 케이스에 속했다고 할 수 있다. 글자 에피소드와는 별개로 카롤루스는 라틴어를 유창하게[21] 말하고 들으며 이해할 수 있었으며, 그리스어도 알아들을 수 있었다고 한다. 서사시를 좋아하여 궁정 학자들에게 이를 많이 수집하게 하였고, 가장 좋아하는 것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저서인 《신국》이었다고 하니 무식하다고 하긴 어렵다.
또한 서체의 통일이 필요함을 느끼고 본인의 지원하에 문맹들도 쉽게 읽을 수 있는 새로운 서체를 개발하기도 했는데, 이것이 카롤링거 서체(Carolingan Minuscule)이다. 로만 하프 언셜(Roman Half Uncial)과 인술라 서체(Insular Script)의 영향을 받아 780년 만들어졌는데 개별 글자들끼리 모양을 다르게 해 문해 난이도를 낮춘 것과 전체적으로 둥글둥글하게 생긴 것이 특징이다. 카롤링거 르네상스 하에 전 서유럽으로 퍼져 약 400년 동안 쓰였다. 이후 쇠퇴했으나 블랙 레터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오늘날 로마자 소문자의 기원이 되었다. 여기서 각 서체의 차이를 확인할 수 있다.
전형적인 고대 말 ~ 중세 초중반 게르만 왕국의 전사왕에 가까운 성격을 가지고 있는 인물로, 아군에게는 인자하고 관대하며 적에게도 대범하지만 일정 선을 넘어서면 잔인하고 무자비한 행동도 서슴치 않았다. 호색한이기도 하여 여러 번 결혼도 하고, 자식도 많이 낳았지만 동시에 친딸들의 순결을 위해 결혼을 시키지 않는 등의 모습도 보였다. 전형적인 난세를 사는 영웅호걸의 성격에 가깝다고 해야 할 것이다. 물론 친딸들도 결혼만 안 했지 사생아는 많다고 한다.[22] 당시 중세인 기준으로 술을 적게 마시는 편이었다고 하는데, 하루에 딱 1잔만 마셨다고 한다. 다만 당시 중세의 술잔은 거짓말 좀 보태서 세숫대야 정도였으니 현대인 기준으로는 그래도 많이 마시는 편이다. 또한 상술되었듯 호탕한 전사왕이면서도 한편으로 은근히 문화에도 관심이 많아 중세 유럽 문화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 인물이기도 하다. 다만 정복자,전사로서의 이미지가 워낙 강하고 세종대왕 같은 그 자신이 대단한 학자인게 아니라 본인 휘하의 유능한 관료나 학자들을 후원하는 방식이라 아무래도 문화 쪽으로의 이미지는 약하다.
또한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서 아직도 그리스도의 빛을 거부하는 미개하고 건방진 이교도들을 죽이든 개종시키든 정화해야만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수많은 정복과 강제개종을 밀어붙인 인물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가톨릭 교회를 그저 정치적 도구로 활용해 통치정당성 확보와 지방통치체계 구축에 써먹기도 하고 동시에 이슬람인 아바스 왕조와도 원교근공의 원칙에 입각해 상당히 가까운 관계를 맺었으며, 동로마 제국과는 정치적 입장에서 심한 분쟁의 소지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적대시하지는 않는 등 마냥 종교적 인물이라기엔 현실적인 정치적 감각도 상당했다.
5. 가족
총 4명의 정실 부인을 두었으나 2명의 부인을 뚜렷한 이유 없이 내쳤다.정실 부인 이외에 별도로 6명의 첩을 두었다.
정실 부인들로부터 8명, 첩으로부터 20명의 자녀를 얻었다.
아들 넷 중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경건왕 루트비히가 그의 뒤를 이었다.
6. 평가와 역사적 귀속
Pater Europae(유럽의 아버지).[23]그가 건설한 프랑크 제국이 각각 서프랑크,중프랑크,동프랑크 왕국으로 갈라지고, 다시 서프랑크와 동프랑크가 각각 오늘날 프랑스와 독일의 모태가 되었다는 점에서 그의 영향력이 얼마나 큰지 굳이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다. 프랑크 왕국을 동로마 제국과 비등한 하나의 제국으로 키워냈으며, 서로마 제국의 멸망 후 한동안 역사의 주변부로 전락했던 서유럽을 다시 서서히 역사의 중심 무대로 올라오게 하는 토대를 놓은 걸출한 군주이다. 당대 프랑크 왕국은 문화나 경제력 등의 소프트파워에 있어서는 기존 그리스도교 세계의 종주국이었던 동로마 제국에는 미치지 못하였으나, 인구나 군사력 등의 하드파워에 있어서는 앞섰다는 평가를 받는다.[24] 그의 군사적 확장으로 서방 가톨릭 세계는 독자적인 튼튼한 토대를 마련할 수 있었고, 폐허나 다름없던 서방의 지적 풍토에 있어서도 문화적 부흥을 일으킨 점이 높이 평가받는다. 따라서 "로마 멸망 이후 야만과 혼돈 속에 빠져있던 서유럽이 카롤루스의 치세에 본격적인 부흥기를 맞이하였다."고 하는 게 고전적인 역사관이다. 이후 역사학자들은 카롤루스의 통치기를 카롤링거 르네상스라고도 불렀다.
다만 최근에는 앙리 피렌을 필두로 하여 서로마 제국의 멸망과 카롤루스에 의한 부활에 대한 비중을 줄이고, 카롤루스 이전에 이미 로마 세계와 지중해 문명의 계승자로서 서유럽을 회복시킨 메로베우스 왕조, 그 밖에 스페인의 모태가 된 서고트나 북이탈리아에 세워진 랑고바르드 역시 차츰차츰 야만에서 벗어나 국가적 틀을 잡아가기 시작했던 것들을 재조명하며 카롤루스 왕조와 메로베우스 왕조의 차이점을 들어 둘을 구분짓는 시각도 대두되고 있다.
프랑스, 독일, 베네룩스, 이탈리아 등 서유럽의 주요 나라들 대부분이 그에게서 기원했음을 고려하면[25] Pater Europae(유럽의 아버지)라고 해도 크게 무리는 없을 것이다. 거의 전설적인 인물이다보니 유럽의 여러 왕국들은 카롤루스를 대제(大帝)라 불렀으며 자신들의 정통성을 카롤루스 대제의 프랑크 왕국에서 찾았다.
프랑스에서는 클로비스 1세와 함께 오랫동안 국부와도 같은 지위에 있었고 중세 이래 생성된, 중세 그리스도교 - 기사도 문학 구전에 의해 거의 신화적인 전설들로 포장되어 신격화되기도 했다. 서프랑크의 카롤루스 왕조라면 당연한 말이고 카롤루스 왕조 직계가 끊어지자 이를 모계 계승으로 이은 카페 왕조 및 카페 왕조의 부계 분가인 발루아 왕조, 부르봉 왕조, 오를레앙 왕조 등은 전부 카롤루스 대제와 프랑크 왕국 역사를 자국 및 왕조의 주요한 선조 역사로서 매우 중시하였다.
하지만 근대 후기 내셔널리즘이 확산되면서 프랑스인들은 프랑스 땅에서 훨씬 오래된 그 자신들의 기원 중 하나인 고대 갈리아족에 대한 재인식을 하며 이를 중요하게 여기게 되었으며, 또한 게르만적 정체성이 강력한 독일인 계열 세력 국가들인 프로이센 왕국, 오스트리아 제국과의 첨예한 대립이 두드러지면서 프랑스인이라는 민족을 구성하는 3대 요소인 게르만, 라틴, 켈트 정체성 중에 게르만적인 정체성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확산되었고 결국 게르만적 정체성을 격하시키는 운동이 일어나면서 이때에 카롤루스에 대한 프랑스 내의 폄하도 두드러지게 발생하였다. 그러나 클로비스 1세에 대해서는 그 정도의 격하 현상이 발생하지 않았는데 이는 클로비스 1세와 그의 메로베우스 왕조 프랑크 왕국이 비록 게르만계 출신이라고는 하지만 독일인 민족 형성에는 그다지 영향을 끼치지 않은 집단이었으며 반면 카롤루스의 경우에는 독일인 민족 형성에 영향을 끼친 카롤루스 왕조의 핵심적인 인물이고 메로베우스 왕조와는 달리 카롤루스 왕조는 수도 및 행정 관리 체계부터가 독일 방면에 더 치우쳐져 있었기 때문이다.[26]
오늘날 프랑스는 라틴, 켈트적 정체성을 가진 국가로 분류되기는 하지만 프랑스의 실질적 시작점이라 할 수 있는 메로베우스 왕조의 프랑크 왕국의 지배층이 게르만계 민족인 프랑크족이었다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중세 프랑스 왕국은 게르만적 정체성도 분명히 내포한 체계였다. 애초에 켈트에 대한 내셔널리즘적 재인식은 무려 19세기에 들어서서 일어난 일이지 그 이전의 프랑스인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게르만계인 프랑크인이나, 하다못해 라틴계인 로마[27]에서 찾았지 그보다 이전의 고대 켈트족에서 찾지는 않았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으로 천 년 가까이 프랑스를 지배했던 카페 왕조 혈통이 왕위에서 단절되고 이후 이탈리아계(정확히는 코르시카계) 왕조인 보나파르트 왕조가 잠시나마 프랑스를 통치하기까지 하면서 탄생한 프랑스 공화국과 프랑스 제국 시기부터 급격히 확산된 내셔널리즘 의식 속에서 "너는 게르만, 우리는 라틴과 켈트" 등으로 정체성을 딱딱 구분지으려는[28] 시도가 일어났고 이 때문에 프랑스인이라는 개념 내에서 게르만으로서의 정체성 색채가 상당기간 부정되어버린 것이며 그 때문에 카롤루스도 마찬가지로 프랑스의 역사적 위인 중 한 명임에도 강한 폄하를 당하게 된 셈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근대 프랑스의 황제 자리에 오른 나폴레옹이 직접 "프랑스에 샤를마뉴 시대의 영광을 되찾아 줄 것이다."라고 말하는 등, 카롤루스의 프랑스에서의 존재 자체가 그 시기에 부정된 것은 아니다.
한편 독일 방면에서는 물론 게르만계로서 독일 지역을 정복하고 게르마니아 토착 민족들인 색슨인[29], 튀링겐인, 프리스인, 알레마니인 등등을 정복 전쟁으로 모조리 정복한 뒤, 그 전부를 가톨릭으로 개종시켜 하나의 집단 체제 안에 넣어 독일인이라는 민족적 정체성을 태동시키게 한 카롤루스를 당연히 자국과 자국민들의 위인 중 하나로 여기긴 했지만 바로 그 카롤루스의 가장 주요한 침략 대상이 다름이 아니라 오늘날의 독일 땅과 그 땅의 토착 게르만계 민족들이었다는 점으로 인해 카롤루스에 대한 숭상이 중세 프랑스처럼 활발히 이루어지지 못했다.
즉, 카롤루스와 프랑크 왕국 사람들은 이런 게르마니아의 토착 게르만 신화를 믿는 게르만계 민족들을 게르만 친척 내지 동족이 아니라, 죽든지 아니면 그리스도교로 개종하든지 택일해야 할 사악하고 어리석은 사교도들로 간주하고 있었고, 실제로 밑의 카롤루스의 일대기를 읽으면 알 수 있겠지만 그는 게르마니아 지역에 정복 전쟁을 감행하여 무수히 많은 게르만계 토착 민족들을 학살하고 억압적인 강제 개종 정책을 시행하여 독일 전역을 평정한 자로서 게르만계 민족들 중 하나인 프랑크인의 지도자이기는 하지만, 그에게는 독일인의 선조 게르만계 민족들을 도륙한 외세 정복자로서의 이미지도 분명하게 존재한다. 당연히 근현대 독일인들로서는 무턱대고 카롤루스를 숭앙하기에는 다소 꺼림칙한 면이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그럼에도 카롤루스가 그렇게 독일 지역을 정복하고 가톨릭을 전파하고 게르마니아의 온갖 게르만계 민족들을 통합시켜 차츰 하나의 독일인이라는 민족적 정체성을 형성케 하는 시발점이 되었으므로 카롤루스는 독일인의 위인으로도 분명히 평가를 받지만 그럼에도 그 독일인의 선조들을 학살했다는 카롤루스의 역사적 특징 때문에 대단한 위인 취급을 받을 수 있는 입장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카롤루스 걔 그냥 우리 조상님인 작센족들 학살한 놈이잖아 대체 우리가 왜 존경해야 돼?'라는 인식조차도 독일에서 내셔널리즘 의식이 형성되며 독일민족의 정체성에 대한 관념을 재고하였기 때문에 대두된 인식이다. 위에서 카롤루스에게 있어 다른 게르만족은 그냥 경쟁상대이자 정복대상에 불과했다고 서술했고 그게 사실이긴 하다만, 그렇다고 중세 독일계 국가들에서 카롤루스를 단순히 외부의 정복자로 여긴 건 아니다. 전근대 유럽 가톨릭 국가 전반적으로 카롤루스는 그리스도교 전체의 영웅이자[30] 독일을 중심지로 두고 있는 신성 로마 제국의 역사적 기원자로서 독일에서도 크게 평가받는 인물이었다. 신성로마제국의 근간이 가톨릭인 만큼 이교도 탄압과 정복전쟁을 탓하기는 뭐했기 때문이다.[31] 이해가 잘 안 간다면 광개토대왕-장수왕이 한반도의 태반을 정복하고 나머지는 속민으로 삼은 것이나 문무왕이나 고려 태조(고려)가 여타 국가들을 정복한 것이나 당대 피정복민들에게는 그저 정복당한 것에 불과했지만 어찌됐건 하나의 정치체에 포섭되는 계기를 만듦으로써 문화교류를 촉진하고 민족적 동질성을 높인 걸로 평가받는 것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32]
말하자면 카롤루스는 본래 프랑스와 독일 양쪽에서 국조로 숭상받고 다른 유럽 국가들에게도 전설적인 인물로 숭상받고 있었으나, 19세기에 체계화된 근대적 내셔널리즘으로 인해 자국민들의 민족 정체성에 대한 여러가지 재고 방식들로 인하여 19세기에서 20세기 초까지 프랑스와 독일 쌍방 모두에게 꽤나 역사적인 푸대접을 받은 셈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과격하고도 비역사적이며 비학문적인 형태의 내셔널리즘이 차츰 사그라들고 민족 개념에 대한 역사적 고찰이 좀 더 학문적이고 다변화된 형태로 재구축된 20세기 중엽부터 프랑스에서는 프랑스 민족 정체성을 구성하는 요소 중 하나로서 조상의 일원인 프랑크인의 게르만적 정체성을 다시 재고찰하고 인정하게 되었으며 카롤루스 역시 중요한 역사적인 위인으로서 대우하게 되었다. 물론 개개인의 역사관이나 학문적 수준에 따라서 카롤루스에 대한 인식 역시 꽤 다르기는 하지만 그래도 기본적으로 현대 프랑스에서 카롤루스는 매우 중요하고도 위대한 역사적 위인으로 대우받고 있다.
독일에서도 마찬가지로 앞서 언급하였듯이 독일 민족의 정체성을 형성하는데 가장 지대한 영향을 끼친 카롤루스를 자국의 위인으로 여기지만 그렇다고 해서 카롤루스가 프랑스의 위인이기도 하다는 점을 부정하지는 않으며 양쪽 모두 카롤루스를 공통의 자국 위인으로 여기게 되었다. 애초에 중세 시대에 서프랑크와 동프랑크로 프랑크가 분열할 때에 이미 프랑크 왕국에 대한 계승의식에서 프랑크 왕실로서의 정통성 계승은 카롤루스 왕가 직계가 가장 오랜 기간 잔존했던 서프랑크(=프랑스)[33]가 이었다고 보는 것이 거의 자타공인이었으며 반대로 서로마 제국으로서의 정통성 계승은 동프랑크(=독일)를 중심으로 신성 로마 제국을 건립하고 카롤루스의 모계 후손임을 주장한 오토 대제에 의해 독일로 이어졌다고 보는 것이 역시 거의 자타공인이었다. 즉, 카롤루스 왕조의 유산은 프랑스와 독일 양쪽 모두에게 이어져 내려왔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물론 그럼에도 앞서 언급한 카롤루스의 독일 방면에 대한 침략자로서의 역사적 행적 때문에 현대 독일에서는 여전히 카롤루스를 그렇게 크게 대접하지는 않고 있다. 카롤루스가 제국의 수도로 삼고 자신의 고향처럼 여긴 아헨 지역을 제외한 다른 독일 지역에서의 카롤루스에 대한 인식은 꽤나 조촐한 축으로 현대 프랑스가 현대에 와서 다시 카롤루스를 자국의 위인으로 크게 홍보하게 된 것과는 꽤나 대비되는 모습이라 하겠다. 실제로도 독일인들은 카롤루스가 자국 위인이기도 하지만 프랑스와 독일 중 어느 쪽 위인에 가깝느냐고 묻는다면 프랑스 쪽에 가깝다고 생각한다는 여론이 일반적이기도 하다. 이같은 독일인들의 카롤루스에 대한 시선은 현대 프랑스와 독일에서 각각 여론 조사를 통해 선정한 위대한 프랑스인 100인과 위대한 독일인 100인 항목에서 카롤루스가 프랑스인 위인 100인에는 선정되었지만 독일인 위인 100인에는 선정되지 못한 것으로도 잘 드러나고 있다.
또한 카롤루스의 영향력은 독일, 프랑스뿐 아니라 중세 이탈리아에도 크게 스며들어 있는데, 그가 정복한 북부 이탈리아가 훗날 중프랑크 왕국이 되었고 다시 이 중프랑크가 동프랑크의 후신인 신성로마제국에 합병된 채 수백 년이 지나기도 했지만 이탈리아인의 카롤루스에 대한 인식은 딱히 아무런 생각이 없거나 혹은 부정적인 편이다. 현대 이탈리아인들의 경우에는 중세 초 북부 이탈리아를 장악한 프랑크인들에 대해서는 자신들의 조상의 일원이라기보다는 그저 위대했던 로마 제국이 멸망한 후 이탈리아 반도를 스쳐지나간 한때의 외세 정복자로 생각하는 경향이 훨씬 강하며, 또한 현대 이탈리아인들에게 있어서 프랑크 자체가 딱히 동경의 대상도 아니다. 애초에 이탈리아 반도가 로마 제국의 본류인만큼 이탈리아인들에게는 고대 로마에 대한 동경의 정서가 압도적이며 프랑크에서는 정체성을 찾지 않는다. 민족이나 집단의 정체성을 공고히 다지는 것에는 '구심점'이 될 만한 강력한 국가의 후예임을 표방하는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보편적으로 쓰인 수법인데,[34] 이 상황에서 이탈리아인들이 로마제국에 비하면 하위호환에 불과한 프랑크를 써먹을 이유도 없었다. 즉, 딱히 프랑크나 카롤루스 대제를 자국의 대단한 위인처럼 생각하지는 않는다. 아예 카롤루스를 자국 위인이 아니라 이탈리아를 침략한 외국인 침략자로 보는 정서가 더 강할 정도이다. 물론 중프랑크 왕국이 오늘날의 이탈리아의 전신격 국가들 중 하나인 만큼 북부 이탈리아인들에게 프랑크족 혈통이 전혀 없는 건 아니지만, 어디까지나 생물학적으로만 그럴 뿐 정신적 의미에서 북부 이탈리아에 유입된 프랑크족은 현대 북부 이탈리아인들이 자신들의 후손이라는 정체성을 가지도록 하는 데 실패한 셈이다.[35] 애초에 중프랑크 왕국 자체가 서프랑크 왕국과 동프랑크 왕국에 비해 후대에 물려준 유산이 적고 나라 자체도 오랫동안 존속하며 정체성을 형성하지 못한 채 그냥 신성로마제국에 흡수되었으니 당연한 결과이기도 하다. 그나마 프랑스 및 독일어권(스위스/오스트리아)과의 접경지대 정도가 카롤루스 대제에 대한 인식이 상대적으로 관대한 편인데, 이쪽은 그나마 해당 국가 주민들과 혈통이든 문화든 언어든 섞여서 교류한 역사가 많기 때문이다.
한편 여기까지 읽는다면 "왜 카롤루스와 프랑크인들이 같은 게르만족을 공격했느냐?"는, 오랫동안 단일한 민족 문화 속에서 살아온 한국인들 입장에서는 할 수 있는 질문이 나올 수 있다.[36] 켈트, 게르만, 라틴과 같은 것은 하나의 민족 개념이 아니라 제어 사용자 민족들 전체를 지칭하는 말이다. 학계에서는 줄여서 제족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고대 켈트는 아일랜드에서부터 남부 독일, 이베리아 북부와 중부에서 이탈리아 북부, 발칸반도 북부에서 무려 아나톨리아에 이집트까지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켈트 제어 사용자 민족들 전체'를 의미하는 것이며 하나의 민족인 것이 아니다. 게르만 역시 마찬가지로 프랑크, 작센(색슨), 앵글로, 프리스, 튀링겐, 알레마니, 랑고바르드 등등의 중세 게르만계 민족들은 같은 게르만 제어를 사용하는 각기 다른 민족들인 것이지 하나의 단일한 민족집단이 아니었으며, 친연성은 있었을지라도 서로 간의 뚜렷한 단일의식은 당연히 존재하지 않았다.[37] 따라서 프랑크가 게르만계 민족이었다는 것이 그들이 다른 게르만족을 위해야 한다는 의미가 되지 않는다. 또한 현대 독일인이 게르만계 민족들 전체를 대변하는 위치에 있는 것도 아니다. 그들은 게르만계 민족들 중 하나인 독일족일 뿐인 것이다. 근현대의 사례이지만 아돌프 히틀러가 겉으로는 범게르만주의를 외쳤으나 실상은 게르만족의 도살자라고 불려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너무나도 많은 게르만족(네덜란드인, 노르웨이인 등 비독일계 게르만족뿐만 아니라 자신과 같은 독일인까지)을 학살한 바 있다.
또한 당대 게르만계 민족들은 포르투갈 방면으로 이주 정착하여 오늘날 포르투갈인의 기원적 조상이 된 수에비족, 북부 이탈리아 방면으로 이주 정착하여 오늘날 이탈리아인의 혈통적 조상 중에 하나가 된 랑고바르드족, 프랑스 방면으로 이주 정착하여 오늘날 프랑스인 정체성의 중심축을 담당하게 된 프랑크족, 히스파니아 방면으로 이주 정착하여 오늘날 스페인인의 기원적 조상 중 하나가 된 비시고트(서고트)족 등 구 서로마 제국령으로 이주 정착한 게르만계 민족들과, 반대로 오늘날의 독일 땅인 게르마니아 지역에 잔존한 작센(색슨)족, 알레마니족, 튀링겐족 등 잔존 게르만계 민족들로 구분지을 수 있었는데 이주 정착한 게르만계 민족들은 문화적으로는 현지의 로마 문화에 동화되고 종교 또한 전원이 가톨릭으로 개종하였지만 반면 옛 로마 제국 영토로 적극적으로 진출하지 않고 그냥 원래 살고 있던 곳에 잔존한 게르만계 민족들은 전원이 인신공양을 하는 전통신앙을 믿고 있었다. 그런데 시대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그리스도교가 가장 뿌리깊게 혐오하고 증오해온 것이 인신공양과 강신술이므로, 카롤루스와 프랑크인들은 저 게르마니아의 잔존 게르만계 민족들을 그저 개종시키지 못하면 죽여 없애야 할 이교도로 볼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게르만족들은 원래부터 우리는 다 같은 한 게르만 민족이라는 인식 자체가 없었고, 로마 멸망 이후에는 로마의 잔재 위에서 그들의 유산을 흡수하고 본격적으로 부족이 아니라 나라로서의 역사를 시작하게 된 이들과 그냥 원래 살던 울창한 숲 속에 눌러앉은 채 살던 이들로 더더욱 갈라지게 된다.
다른 사례로 중세 바이킹 침략이 있는데, 널리 알려졌다시피 잉글랜드인은 본래 유틀란트 반도에 살던 게르만족 중 하나인 앵글로족과 색슨족에서 기원하였다. 그러나 당시 바이킹이 만약 '우리는 본래 한 민족이었으니 이제 다시 합치자'고 침략을 정당화하는 프로파간다를 쓴다면 잉글랜드인들은 그저 '이교도 오랑캐들이 궤변을 늘어놓는다'고 반응할 것이며, 반대로 잉글랜드인들이 바이킹에게 '우리 조상은 본래 당신 조상의 이웃부족 아니 어쩌면 아예 같은 부족민이었을 수도 있소! 그러니 동족상잔을 멈춰주시오'라고 평화를 호소해도 바이킹들은 그저 '십자가에 매달린 약골이나 믿는 돼지들이 내 도끼가 무서워서 실성했구나'라는 반응을 보였을 것이다. 한쪽은 고향을 떠나 로마 문명과 가톨릭의 세례를 받은지 수백 년이 됐고, 다른 한쪽은 고향에 계속 눌러앉아 기존의 문화를 지킨지 수백 년이 됐으니 당연한 결과이며, 게다가 갈라서기 전에 다같이 유틀란트 반도에 살던 시절에도 아마 경쟁 부족으로서 서로 죽고 죽이는 싸움을 자주 했을 것이다.
또한 이외에 벨기에와 네덜란드에서도 카롤루스는 우리 조상이고 영웅인데 웬 엉뚱한 프랑스, 독일놈들이 훔쳐가느냐 하는 목소리가 많은데, 이는 프랑크족이 발흥한 고향이 오늘날 벨기에-네덜란드가 속해있는 라인강 하류 저지대 지방이었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여러 프랑크 부족들을 통일한 중심축인 살리 부족[38]이 저지대에서 기원하였고, 현대에도 네덜란드어가 프랑크어의 직계 후손에 가장 가까운 언어로 분류된다.
아무튼, 그리고 어쨌건간에 오늘날 카롤루스는 프랑스, 독일, 벨기에, 네덜란드 등지에서 각자 자국의 위인으로 여겨지고 있으며 비록 20세기에 서로 간에 카롤루스가 누가 그들의 위인인지를 두고 논쟁하기도 했지만 오늘날에는 그들 모두의 공통 위인으로 인정하고 있다. 어쨌건 그의 존재와 행적이 중부유럽 민족들의 국가적 정체성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고 이것이 저 나라들의 역사적 행보의 기반이 되었기 때문이다. 굳이 카롤루스 개인의 정체성을 말하자면 아까도 언급했듯이 그는 "나는 게르만인"이라는, 당시에는 있지도 않았던 개념의 생각을 하지는 않았으며 당연히 당시 프랑크인들이 전부 그러했다. 그들은 그저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이자 서로마인이자 프랑크인"으로 생각하였을 뿐이다.[39]
카롤루스와 그의 프랑크족의 혈통 기원, 문화적 정체성으로 볼 때에는 오늘날의 네덜란드 지역에서 살았던 여러 프랑크 부족중의 하나인 살리족에게서 출발하였으며, 근처에 살던 또 다른 프랑크 부족인 프리시족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살았으나 살리족이 프랑스 지역에 정착한 뒤에 다시 네덜란드를 침략하여 프리시족의 나라인 프리지아를 멸망시키고 프리시족을 복속시켰으며 이 과정에서 다른 여러 프랑크 부족들 또한 살리족에 복속 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살리족과 프리시족, 다른 여러 프랑크 부족의 융합으로 프랑크계 부족들이 모두 통일되었는데, 일단 프랑크족 통합의 주축인 살리족이 원래 살던 곳이 오늘날 네덜란드 지방이고 마찬가지로 네덜란드에 살던 이웃인 프리시족 역시 살리족에 통합되어 네덜란드인이라는 정체성으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카롤루스는 네덜란드의 역사적 위인으로도 대우받고 있다. 벨기에의 경우에는 그 네덜란드와 프랑스의 정체성을 모두 함유하며 탄생한 나라로서 마찬가지로 카롤루스를 자국 위인으로 간주하고 있다.
최종적으로 전반적으로 유럽에서 카롤루스는 서중부 유럽 전체의 위인이지만 동시에 "굳이 딱 한쪽만 따진다면 어느 쪽의 위인인 것이냐?"를 묻는다면 아무래도 프랑스 쪽에 가깝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는 상태이다.
7. 전설상에서의 모습
이후 수많은 기사 전설의 주인공이 되었으며, 《아서 왕 이야기》도 상당 부분 카롤루스 전설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졌다. 카롤루스 르네상스와 15세기의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다른 점이라면 카롤루스 르네상스는 라틴 문화, 즉 고대 로마의 학문과 문화를 부활시키거나 계승하려는 움직임이었다면, 이탈리아 르네상스는 그리스 문화, 즉 동로마 제국에서 전승되고 있었던 고대 그리스의 문화나 학문을 계승하려는 움직임이었다.흔히 《샤를마뉴의 12기사》라고 불리는 롤랑 경을 포함한 12명의 동료들 이야기가 유명하다. 다만 《롤랑의 노래》에선 200살이 넘는 노인으로 등장한다.
8. 여담
위에서 서술했듯 카롤루스 대제의 서명은 원래 단순한 열십자였지만, 나중에 가면 이게 그 유명한 'K-R-L-S' 형태의 서명으로 변한다. 정확히 말하면 KAROLVS란 철자를 십자가 형태로 배치한 것.
스타의 뿌리를 찾아 조상을 추적하는 프로그램인 Finding Your Roots에 의하면, SNL 등에서 활약하고 있는 미국 코미디언 빌 헤이더가 무려 카롤루스의 후손 중 하나로 밝혀졌다.
9. 매체에서의 등장
9.1. 소설
9.1.1. 닥터후 웹 소설
서기 팔백년 벨기에의 한 만찬에 참가하려다 파란색 빛 속으로 사라졌는데, 마침 그때 만찬에서 음식 맛을 보던 10대 닥터가 손수 구출하러 아르덴 숲에 갔다가 연도 불명의 외계 행성에 워프한다. 거기에 모무스라는 외롭고 정신나간 외계 컴퓨터가 카롤루스 대제 말고도 윈스턴 처칠, 클레오파트라,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갈릴레오 갈릴레이, 프랜시스 드레이크, 칼리굴라 등 인류 역사의 유명인들을 잔뜩 납치해 그곳의 문명을 재건하려 했는데, 닥터의 설득으로 모두 원래대로 돌아간다. 닥터와 도나가 아가사 크리스티를 만난 건 이 직후의 일이다.9.2. 만화 및 애니메이션
9.2.1. 굿모닝 보스(원작)
'샤를마뉴 심'이라는 트랜스젠더 디자이너가 나온다. 카롤루스 대제와는 무관하고 앙드레 김을 패러디한 이름이다.9.3. 게임
9.3.1. 문명 시리즈
문명 3에서 프랑스 문명의 군사 지도자로, 문명 4에서 신성로마 문명의 지도자로 등장한다. 또 문명 4에는 카롤루스 시대를 집중 조명한 시나리오가 있으며, 문명 6의 시나리오 가운데 하나인 바이킹에서도 프랑크족의 지도자로 출연한다.9.3.2. 크루세이더 킹즈 2
DLC 샤를마뉴에서 드디어 주인공으로 등장했다. 연속되는 이벤트를 통해 중간에 뭔가 잘못돼서 죽어버리지만 않는다면 역사대로 미칠듯한 정복과 12기사들의 등장이 이어진다. 다만 플레이어가 잡지 않으면 툭하면 전쟁에서 불구가 되거나 죽어버리거나 하기 때문에 생각처럼 팍팍 치고나가지를 못한다. 거기에 쓸데없이 아키텐의 반란을 고증해서 아키텐의 영주들이 샤를마뉴를 싫어하기 때문에 얘들을 중심으로 동생 카를로만이나 메로비우스 왕조의 마지막 생존자를 왕으로 추대하는 반란이 일어난다. 홀리퓨리 들어서는 부족정이 미칠듯이 버프되는 바람에 작센에게 탈탈 털리는 모습까지 목격되었다.9.3.3. 토탈 워: 아틸라
DLC인 샤를마뉴의 시대에서 등장한다.9.3.4. Fate 시리즈
Fate/EXTELLA LINK에서는 세이버 클래스의 샤를마뉴가 등장하며 엑스텔라 링크의 주연을 맡았으며, 룰러 클래스의 카를 대제도 등장했다. 자세한 것은 카롤루스 대제, 샤를마뉴, 카를 대제 참조.9.3.5. Carolus Magnus
그의 이름을 딴 보드게임도 있다. 2000년 SDJ 후보에도 올랐으나 토레스에 밀려 수상하지는 못했다.9.3.6. 도미네이션즈
샤를마뉴의 팔 유물함이 전쟁 전당 전설 유물로 등장한다.자세한 내용은 전설 유물/샤를마뉴의 팔 유물함 문서 참고하십시오.
9.3.7. 유희왕 오피셜 카드 게임
자세한 내용은 샤를 대제(유희왕) 문서 참고하십시오.9.3.8.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2: 결정판: 승자와 패자
1개 시나리오에서 이 인물을 다룬다.9.4. 기타
- 독일-프랑스 합작 블록버스터 다큐 <샤를마뉴>가 ARTE TV를 통해 2014년에 방송되었다.
- 크리스토퍼 리가 2010년, 그의 나이 88세에 발표한 파워 메탈 Charlemagne: By the Sword and the Cross는 바로 카롤루스 대제에 대한 노래다. 크리스토퍼 리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외가 쪽 혈통이 바로 카롤루스 대제의 쌍독수리 문장을 사용하는 카랑디니 가문이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무려 91세의 연세에 카롤루스 대제 연작인 Charlemagne: The Omens of Death (2013)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 미국의 밀리터리 잡지인 암체어에서 선정한 위대한 장군 100명에 이름을 올렸다.
- 할리우드 배우 키아누 리브스와 젊은 시절이 닮아 보여서 관련 밈과 드립이 많다.
- 플레잉 카드 속 K♡의 모티브로 알려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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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카롤루스 대제 생전에 묘사된 유일한 초상화이다.[2] 고대 게르만어에서 기원한 유럽의 흔한 인명이었다. 카를 (Karl) - 독일어, 카롤루스 (Karolus, Carolus) - 라틴어, 카롤 (Carol) - 루마니아어, 카를로 (Carlo) - 이탈리아어, 카를로스 (Carlos) - 에스파냐어, 샤를 (Charles) - 프랑스어, 찰스 (Charles) - 영어, 카롤 (Karol) - 폴란드어, 카럴 (Karel) - 네덜란드어, 칼(Karl, Carl) - 스웨덴어[3] 740년 또는 747년이라는 설도 있다.[4] 現 벨기에 리에주 주 에르스탈. 다만 독일의 아헨 시와 이에 대해 논쟁이 있다.[5] 現 독일 노르트라인 베스트팔렌 주 아헨[6] 즉위 장소는 누아용(Noyon) 대성당[7] 즉위 장소는 파비아(Pavia) 대성당[8] 즉위 장소는 성 베드로 대성당. 오늘날 개축된 대성당이 아닌 과거의 대성당이다.[9] 유골 조사 결과에서 나온 키이다.[10] 독일 라인란트팔츠, 헤센, 자르 지방에서 사용되던 중세 고지 독일어 방언으로 분류되는 중부 프랑크어의 일종인 리푸아리아 프랑코니안 방언을 사용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럼에도 이전 문서에는 라인 프랑코니안을 사용했다고 기재되어 있었는데, 라인 프랑코니안과 중부 프랑코니안어는 엄연히 다르다. 펜실베이니아 독일어가 여기에 속한다. 프랑크족이 사용하던 프랑크어는 여러가지 방언으로 갈라졌다.# 다만 모어에 대해서는 논란이 좀 있다. 이 외에도 라틴어를 제2언어로 구사했다. 참고로 수도 아헨에서는 리푸리아 방언이 사용되었다.[11] 신성 로마 제국은 카롤루스 대제 사후에 탄생한 동프랑크 왕국에서 기원했지만, 카롤루스는 서로마 제국의 멸망 이후 서유럽에서 로마 제국을 계승하는 첫 번째 사례를 만들었고, 실제로 신성 로마 제국을 창시한 오토 왕조의 오토 대제는 그 정통성을 카롤루스로부터 찾았으므로 카롤루스를 신성 로마 제국의 시조로 봐도 큰 무리는 없다.[12] 카롤루스 시대에 쓰였을 대중라틴어에서는 gn이 '니'로 발음된다. '카롤루스 마그누스'라는 표기도 존재한다.[13] ß(에스체트)는 일반적으로 ss와 같은 발음이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항목 참고.[14] 카롤루스 임페라토르 아우구스투스의 약자[15] 당시 라틴 문자에는 소문자가 없었고, V가 U의 발음을 갖는 문자였다.[16] 생전 모습에 가장 가깝게 묘사한 편이다.[17] 카롤루스 대제가 머리 위에 쓰고 있는 관은 신성 로마 제국 황제관이다. 다만 실제로 카롤루스 대제가 저 관을 쓴 적은 없는데, 카롤루스는 8 ~ 9세기의 사람이고, 저 황관은 10세기에 만들어졌기 때문에 관을 쓴 모습은 상상화이다.[18] 카롤루스 대제는 늙은 나이인 72세에 죽었으므로 그가 젊었을 때엔 더 컸을 것으로 보인다. 지금도 매우 큰 키인데 당시로서는 어마어마한 장신이다.[19] 지금도 유럽과 미국에서는 글을 모를 경우 X표를 치면 서명한 것으로 간주하는 관습이 있다. 그래서 서기 800년 크리스마스 때 교황이 카롤루스에게 서로마 황제의 제관을 씌워주었을 때, 동로마 제국에서는 "글자도 못 읽는 왕 주제에"라는 식으로 비아냥대기도 하였다. 웃긴 점은 동로마 제국에서도 바실리오스 1세 같은 문맹 황제들이 있었다는 점이다. 물론 카롤루스와 마찬가지로 바실리오스 또한 무식한 인물이 아니며, 오히려 카롤루스와 같이 명군의 반열에 오른 인물이다.[20] 카롤루스 대제의 전기 작가인 아인하르트의 기록.[21] 전기작가 아인하르트의 말에 따르면 "모국어만큼 자유롭게"[22] 유명한 일화로 딸 이마는 샤를마뉴의 비서관이자 전기작가 아인하르트와 몰래 사귀었는데 어느 날 밀회를 즐기고 나와보니 눈이 하얗게 쌓여있어 발자국이 남을까봐 이마가 아인하르트를 번쩍 들어서 행정관까지 옮겨주었다는 일화가 있다. 다만 하필 그날 밤 샤를마뉴가 잠이 안와서 서성거리다 창밖으로 이 공주님 안기를 봐버렸고 두 사람을 불러 벌을 내리려 했으나 진심어린 간청으로 사랑을 허락받았다는 이야기.[23] 프랑크 왕국의 강역 때문에 유럽이 아니라 서유럽이라는 태클이 나올 수 있지만, 일단 통칭은 Pater Europae(파테르 에우로파이)다.[24] 인구의 경우는 막 분열되었을때 혹은 고토회복 직후의 동로마 제국은 약 2500~3000만 정도로 넘사벽이었으나 프랑크 제국이 완성됐을 무렵에는 이슬람 세력의 확장으로 세력을 많이 잃어버려 인구도 많이 줄어들은 상태였다. 양쪽 다 인구는 1000~1300만 사이로 추정된다. 특히 동로마 제국은 워낙 오랫동안 존속하면서 전성기와 쇠퇴기가 자주 반복되다보니 시대에 따른 인구편차가 크다. 멸망 직전에는 아예 도시국가로 되돌아간 상태였으니...[25] 비록 동유럽 및 영국, 스페인 등 이 말에 해당되지 않는 지역은 상당히 많긴 하지만, 이들 지역 일부 역시 간접적으로 카롤루스의 영향을 받았다. 영국 왕실은 노르만 왕조를 통해 카롤루스 대제의 혈통을 이어받았고, 스페인 왕실의 경우 압스부르고 왕조, 보르본 왕조를 통해 카롤루스 대제의 혈통을 이어받았다. 다만 그 전에도 페르난도 3세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프리드리히 1세의 손녀와 결혼하면서 미약하게나마 이어져 오고 있었다.[26] 메로베우스 왕조의 수도는 현재까지도 프랑스의 수도인 파리였고 핵심적인 행정 관리 체제도 어디까지나 오늘날의 프랑스 땅에 한정되어 있었지만 카롤루스 왕조의 상징적인 수도는 카롤루스 대제로 인해 오늘날의 독일에 속한 아헨이 되었고 카롤루스 왕조는 독일 방면 개발에도 열심이었다.[27] 켈트계인 갈리아인과 라틴계인 로마인의 혼혈인 갈로-로만.[28] 실제로는 그렇게 구분되어질 수 없음에도 그리 되었다. 요컨대 독일인들도 순수한 게르만계 고대 민족들의 통합으로만 구성된 것이 아니라 서슬라브계 민족들이었던 보헤미아인, 포메라니아인, 소수의 폴란드인들도 섞여서 형성된 민족이다. 거기에 고대 남독일 지역을 장악하며 오랜 세월을 살아갔던 켈트계 민족인 보이족도 따지자면 오늘날 독일인의 혈통적 기원 중 하나이므로 독일인은 무조건 게르만으로만 구성되었다는 식으로 치부될 수 없었으며 게르만, 켈트, 라틴의 융합체인 프랑스인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러나 당시는 내셔널리즘의 광풍이 세계를 휩쓸던 때였고 그런 식으로 민족 개념을 단순화, 국가 단위로 일원화하려는 과격하고 비역사적인 행태가 세계 각지에서 만연했다.[29] 브리튼 제도로 건너간 앵글인, 색슨인을 의미하는 게 아닌, 독일 지역에 잔류했던 작센인을 의미한다.[30] 실제로 로마 제국 영토 바깥의 문화권까지 전부 가톨릭 문화권이 된 건 카롤루스의 정복활동이 큰 영향을 끼쳤다.[31] 중세 후기의 튜튼 기사단만 해도 폴란드에게 깨질 때까지 계속 학살극을 벌였다.[32] 물론 독일도 이후의 역사를 더 거친 뒤에 민족적 동질성이 완성된 것처럼 한국의 경우 또한 고려 이후 한 팀이 되어 북방의 강대국들과 항쟁을 거듭하면서 삼국의 유민의식이 사라지게 된다.[33] 루이 5세가 마지막 카롤루스 왕조 프랑스 왕이었으며 그 이후로는 카롤루스의 모계 후손인 위그 카페가 카페 왕조를 개창하며 프랑스 왕위를 차지하였다.[34] 예를 들어 중세에서 근대에 이르기까지 유럽 각국이 개나소나 로마제국과 어떻게든 엮여보고 싶어서 발버둥 쳤던 것도 결국 핵심이유는 유럽사에서 로마제국이 가진 넘사벽의 위상, 상징성을 도용해서 자기네 국가의 정당성 등을 확보하기 위함이었다. 중국사의 수많은 유목민 정복왕조들 역시 일단 정복이 이루어진 후에는 죄다 중화의 계승자임을 표방한 것도 그래야만 한족들의 반항을 누그러뜨리고 통치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35] 이 지역의 경우 차라리 이전에 이 지역을 정복했던 랑고바르드족이 남긴 흔적이 훨씬 더 클 지경이다.[36] 사실 한국사의 삼국시대와 후삼국시대 그리고 6.25 전쟁을 생각하면 그런 질문을 하는 것 자체가 이상하다고 볼 수 있다. 같은 민족끼리도 모종의 이유로 서로 적이 되는 경우가 매우 많기 때문이다.[37] 이는 한국사에서 같은 한국계라도 따로 나라를 이루면서 살았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서로 간 문화나 언어의 유사성 및 잦은 교류를 통해 동질감을 느끼면서 외부 민족과는 구별된다고 인식은 하더라도 정치체가 달랐기에 단일한 민족이라는 의식에는 이르지 못했던 것과도 유사하다. 강대한 외부의 적인 당나라의 침공으로 인한 고구려와 백제의 멸망 및 이들을 포섭한 신라의 삼국통일과 곧이어 함께 강대국 당나라에 대항한 나당전쟁을 통해 다양한 한국계가 하나의 정치공동체에 속하여 활동하는 경험을 하게 되나, 물론 이걸로 처음부터 모든 게 완성된 건 아니었고 거기에 속하지 않은 한국계는 외국으로 흘러가버리거나 발해를 따로 세우기도 한다. 이후 통합에 실패한 신라는 다시 옛 경계선을 따라 분할되고, 그렇게 분할된 나라들 중 하나였던 고려가 재통합은 물론이고 이전에는 포섭되지 않았던 한국계인 발해인도 대거 추가로 포섭하게 되나, 분열적인 요소는 여전히 상존하고 있었고, 북방의 강대국들을 상대로 한 집단으로서 치열한 항쟁을 거듭한 뒤에야 비로소 강력한 단일의식이 완성된다. 정리하면 근대적인 의미의 한 민족이 형성되는 과정은 지난하고, 단순히 한번 물리적으로 통합했다고 끝도 아닌 것이다. 이런 와중에 느슨한 부족 단위로 여기저기 퍼져있던 집단들 사이에서 공통의 경험도 없이 강력한 동족의식이 생기는 건 당연히 만무했다.[38] 프랑크 제국의 법전인 살리카법이 바로 이 살리 부족의 법이라서 살리카법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39] 비슷한 경우로 청나라의 만주족 또한 스스로를 "몽골과 만주, 중원, 위구르, 티베트의 지배자이자 만주족"으로 생각하였을 뿐 퉁구스인으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만주족의 입장에서 나나이족, 우데게족 등 다른 퉁구스계 민족들은 문명화되지 않은 야인여진일 뿐이었다. 심지어 한국 역사에서도 광개토대왕릉비를 보면 신라와 백제에 대해 '남쪽 오랑캐들이자 우리 위대한 고구려의 속국이다'라는 인식이 드러나있다. 다만 백제의 경우 가장 먼저 전성기를 달린 백제라는 나라 자체의 수준이 낮지 않기도 했고, 백합야 전투에서 드러나듯이 출자가 같다는 인식은 있었으나 치고박고 싸운 역사가 워낙 오래되어 서로를 경멸하게 되었다. 신라의 경우는 형제의 맹약을 맺을 정도로 대우해주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