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2-02 03:07:49

카를

1. 개요2. 실존인물
2.1. 신성 로마 제국황제
2.1.1. 카롤루스 왕조2.1.2. 룩셈부르크 왕조2.1.3. 합스부르크 왕조2.1.4. 비텔스바흐 왕조
2.2. 기타 유럽 국가들의 군주
3. 가상인물4. 한국 아마추어 무선 연맹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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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 남성형 여성형
그리스어 카롤로스(Κάρολος)
네덜란드어 카럴(Karel) 카를라 (Carla), 카롤린(Carolien), 카를레인(Carlijn), 샤를로터(Charlotte)
노르웨이어 카를(Carl/Karl)
라틴어 카롤루스(Carolus)
덴마크어 카를(Carl/Karl)
독일어 카를(Carl/Karl) 샤를로테(Charlotte), 카를라(Carla/Karla)
라트비아어 카를리스(Kārlis) 카롤리나(Karoīna), 카를리나(Karlīna)
러시아어 카를(Карл), 코롤(Коро́ль) 카롤리나(Кароли́на)
루마니아어 카롤(Carol)
리투아니아어 카롤리스(Karolis) 카롤리나(Karolina)
벨라루스어 차를츠(Чарльз)
불가리아어 크랄(Крал)
세르보크로아트어 카를로(Karlo/Карло), 크랄례(Краљ) 카를라(Karla), 카롤리나(Karolina)
스페인어 카를로스(Carlos) 카를라(Carla), 카롤리나(Carolina), 카를로타(Carlota)
스웨덴어 카를, (Carl/Karl), 칼레(Kalle) 카를라(Karla)
아일랜드어 카를루스(Carlus), 셰를라스(Séarlas), 카할(Cathal) 셰를라트(Séarlait)
영어 (Carl), 찰스(Charles) 샬럿(Charlotte), 캐롤라인(Caroline), 캐럴(Carol/Caroll)
캐럴린(Carolyn), 칼라(Carlna), 캐롤라이나(Carolina)
이탈리아어 카를로(Carlo) 카를라(Carla), 카롤리나(Carolina), 카를로타(Carlotta)
체코어 카렐(Karel)
포르투갈어 카를루스(Carlos) 카를라(Carla), 카롤리나(Carolina), 카를로타(Carlota)
폴란드어 카롤(Karol), 크롤(Król) 카롤라(Karola)
프랑스어 샤를(Charles) 샤를로트(Charlotte), 샤를렌(Charlène), 카롤린(Caroline)
핀란드어 카를로(Kaarlo), 카를레(Kaarle), 칼레(Kalle), 카를(Karl) 카롤리나(Karoliina)
헝가리어 카로이(Károly) 커롤러(Karola), 커롤리너(Karolina), 셔롤터(Sarol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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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rl/Karl

일반적으로 카를이라는 명칭으로 불리는 경우, 철자가 독일어Karl 혹은 영어와 북유럽어의 Carl이다. r을 묵음으로 처리할 경우 '칼' 혹은 '카알'이라고 읽기도 한다. 다만 은 '날붙이'의 한 종류인 단어이기도 한지라 인명으로 쓸 때는 구분의 편의성 탓에 '카를'의 범용성이 더 높은 편. 어원은 '남자', '자유인'을 의미하는 게르만 조어 'Karal'이다. 러시아어 코롤(Коро́ль), 불가리아어 크랄(крал), 세르비아어 크랄례(краљ), 폴란드어 크룰(Król) 등 슬라브어에서 을 의미하는 어휘도 여기서 유래하였다.

국가별로 부르는 방식이나 철자에 다소 차이가 있다. 영어권에서는 '찰스', 프랑스어권에서는 '샤를', 스페인어권에서는 '카를로스', 이탈리아어권에서는 '카를로', 라틴어로는 '카롤루스' 등으로 비슷하면서도 다양하게 불리는 편. 다만 러시아의 경우는 이름으로 쓰는 사람이 소수이긴 해도 의외로 게르만과 같은 '카를(Карл)'이다. 이를테면 러시아 공사관이였던 카를 베베르(Карл Вебер)가 있다.[1]

보통 서유럽 인명이 기독교 성인들에서 비롯한 경우가 많은 것을 보면[2] '야만인' 취급을 받던 게르만의 이름을 쓴다는 것이 의아해보일지는 몰라도 헨리, 윌리엄, 리처드, 루이스 등 유럽 여러 나라에서 흔하게 쓰이는 이름 상당수는 알고 보면 다 고대 게르만어 어휘에서 비롯한 이름이며, 특히 귀족이나 전사계급 등에서 사용해온 사례가 많다.[3] 한편 한국 가톨릭에서 세례명으로 쓸 땐 '가롤로'라는 표기를 쓴다.

역사적으로나 지금이나 굉장히 많이 쓰이는 이름이다.

아래는 이 명칭에 해당되는 인물들. 일반인들은 동명이인으로 묶어 처리했으며 국왕들은 따로 항목이 있는 경우에 한해 계보 및 배경 국가 설명에 필요한 간단한 언급을 해두었다.

2. 실존인물

주로 독일권 출신 인물들이다. 여기에 없는 인물들은 칼(인명) 문서 참조.

2.1. 신성 로마 제국황제

프랑크 왕국-신성 로마 제국으로 이어지는 계보상에 이 이름을 이어받은 제왕들이 분포한다. 중세 초에는 꽤 널리 쓰인 이름이었는데,[4] 1세나 2세 하는 식의 서수가문(House)이 아니라 작위(Title)를 기준으로 하므로, 통치 가문이 바뀌어 혈연이 무관해지더라도 서수를 그대로 이어서 세어나간다.[5]

흥미롭게도 여기 해당하는 군주들은 본인 시대에 광대한 영토를 다스렸으나, 아들들에게 다시 쪼개서 분할 상속시킨 예가 많다. 그렇지 않은 경우도 아예 후계 상속 자체가 난항인지라 절대 순탄하게 상속시켰다고는 할 수 없다. 어쨌든 어느 쪽이건 그 영향이 서유럽 각국에 끼친 영향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 게다가 공교롭게 재위중 다른 왕들에 비해 굵직한 이슈가 많았다는 점도 공통점이다.

2.1.1. 카롤루스 왕조

  • 카를 2세(대머리왕)
    루도비쿠스 1세의 아들. 서프랑크(프랑스)의 국왕이었다가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를 겸직. 본거지가 서프랑크여서 그런지 프랑스에서도 자국 왕가의 실질적인 시조격으로 취급하며 샤를 2세로 부른다.
  • 카를 3세(비만왕)
    루트비히 2세의 3남. 동프랑크(독일) 출신으로 서프랑크를 흡수하여 프랑크 왕국의 재통일을 실현했으나 다시 그 아들들에게 영지를 분할했다. 프랑스에선 샤를 3세지만 일반적으로 넘버링을 붙이지 않고 비만왕으로 불리며, 대신 비슷한 시기의 '단순왕'이라는 이명을 갖는 공식 계보상의 '샤를 3세'가 따로 있다.

2.1.2. 룩셈부르크 왕조

  • 카를 4세
    보헤미아 군주인 맹인왕 요한의 아들. 즉 현재의 체코 출신으로 체코어에도 능통했다. 황위계승권을 성문화한 '금인칙서'의 제정으로 유명하다.

2.1.3. 합스부르크 왕조

  • 카를 5세
    부르고뉴와 플랑드르의 군주인 필리프(카스티야의 군주로서 펠리페 1세)의 장남. 통일 스페인의 초대 국왕 카를로스 1세이기도 하다. 부친이 물려준 부르고뉴를 기반으로 출발해 선대의 후광 및 본인의 기지에 힘입어 차츰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약관의 나이에 카스티야와 아라곤을 아우르는 스페인 및 그 식민지의 군주가 되었으며, 마침내는 최대 경쟁자 프랑수아 1세를 이기고 신성 로마 제국의 제위까지 손에 넣어 스페인, 독일,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벨기에, 이탈리아 모두의 역사에 굵직하게 거론될 정도로 직접적이면서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6]. 재위중 쌍독수리 문장을 사용.
  • 카를 6세
    신성 로마 황제 레오폴트 1세의 차남. 처음에는 신성 로마 황위 대신 왕가가 끊어진 스페인의 왕위를 노렸으며, 실제로 스페인 왕위계승전쟁에 뛰어들어 스페인과 중유럽을 아우르는 카를 5세 시대의 영광을 재현하려 했다. 그리고 루이 14세를 상대로 한 이 전쟁에서 사실상 이겼는데, 카를 5세 시절과 같은 초강대국 복귀를 걱정한 주변국들의 압력 탓에 스페인의 왕위는 포기하고 대신 신성 로마의 황제가 되었다. 다만 본인은 스페인 왕위를 내준 것을 두고두고 아쉬워했다. 그런데 그 본인도 스페인의 카를로스 2세처럼 합스부르크 직계의 대를 끊은 장본인이기에, 그 유명한 딸 마리아 테레지아가 결혼으로 후계를 이었다.

2.1.4. 비텔스바흐 왕조

  • 카를 7세
    바이에른의 선제후, 막시밀리안 2세의 아들. 카를 6세의 사망으로 남계 후손이 끊어져 계승 문제가 생겼던 합스부르크 왕가를 대신해 잠깐 제위를 차지했다. 애초에 혈연성도 없으면서 계승 원칙까지 씹어가며 프랑스를 끌어들여서 즉위했고, 본인의 야심도 대단했기에 잘하면 합스부르크를 몰아내고 새로이 비텔스바흐 왕조를 부활시킬 수도 있었겠지만, 프랑크푸르트에서 대관식을 올리고 있던 순간, 분노한 마리아 테레지아가 보낸 합스부르크군에게 본진 바이에른을 침공당하는 소위 빈집털이를 당하면서, 즉위 후에는 정작 단 한 번도 황제로써 권력을 휘두르지 못하고 사실상 반역자 취급을 받으며 도망만 다니다 3년만에 죽었다(…). 계보상 카를이라는 명칭을 이어받은 마지막 황제. 1차 대전으로 퇴위한 카를 1세는 신성로마제국이 망하고 나서라 넘버링이 8세로 그대로 이어지지 않고 초기화된 것이다.

2.2. 기타 유럽 국가들의 군주

  • 부르고뉴의 카를 (용담공)[7]
    15세기 부르고뉴를 강국으로 이끈 정복 군주이자 카를 5세의 할머니인 마리의 부왕. 부르고뉴를 독립 왕국으로 성장시키려는 야심을 갖고 재위중 주변 소국들을 빠르게 흡수 합병했지만 스위스를 치다 대패를 당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으며 로렌을 둘러싼 낭시 전투에서 장렬히 전사했다. 또한 그의 유산은 딸 마리와의 혼인을 통하여 합스부르크가 어부지리로 챙겼다. 근데 따지고 보면 결과적으로 후대 합스부르크 왕가에 그의 피가 흐르게 된 셈. 이쪽도 프랑스에서는 샤를로 불린다.
  • 카를 알렉산더
    프란츠 1세의 동생으로 형수인 마리아 테레지아의 여동생과 결혼했다. 오스트리아 계승 전쟁과 7년 전쟁 당시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군의 총사령관으로 활약했으며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의 총독을 지내기도 했다. 형인 프란츠 1세가 로트링겐 공국을 루이 15세의 장인에게 넘기고 토스카나 대공이 되자 명목상의 로트링겐 공작이 되었다. 만약 후사를 남겼다면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가문은 프란츠-마리아 테레지아 계통과 카를-마리아 안나 계통, 두 계열로 이어졌겠으나 아내가 요절하는 바람에 후사를 남기진 못했다.
  • 테셴의 카를
    레오폴트 2세의 아들(1771~1847). 신성 로마 황족이면서 당대의 먼치킨 지휘관 중 한 명. 이미 약관의 나이부터 몸소 전투를 지휘하여 연전연승해 네덜란드 방면의 총독까지 역임했고, 이후 나폴레옹 전쟁을 맞아 젊은 나이로 맹활약하며 연합군측의 뛰어난 지략가로 이름을 날렸다.[8] 나폴레옹 전쟁 당시 휘하 원수들, 개중에서도 최고급인 앙드레 마세나를 격파한다던가 장 란을 전사시킨다거나 하는 가공할 수준의 전적을 올렸다.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나폴레옹의 리즈시절 최대의 적수 중 한명으로 꼽힌다. 나폴레옹과의 전적을 제외한다면 1800년 호엔린덴 전투에 종군했을때 딱 한번 졌다.(...) 단, 그의 불운은 상대가 최종 진보스 나폴레옹이였다는 점. 결국 1809년 바그람 전투에서 몸소 총지휘권을 쥐고 나폴레옹과 쌍방 모두 거의 전군을 동원하여 거국적으로 건곤일척의 승부를 벌여 패전.[9] 이후 그 책임을 통감하고 이후로는 나폴레옹 전쟁에 가담하지 않았다. 만년에는 테셴의 공작 직위를 누리며 전술서 집필 등으로 활약했다.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카를 1세
    프란츠 요제프 1세의 뒤를 이은 오스트리아 제국의 마지막 황제다. 사실상 망조는 이미 부왕 때에 들어있었고 그 본인은 뒷수습 정도의 위치에 불과. 사실 그 자신도 평화주의자라는 점에서 제국의 지도자로는 부적격이었다. 같은 명칭의 카를 1세가 제국의 창업자였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그가 마지막 군주라는 사실은 꽤 아이러니한 일이다. 이런 수미상관스러운 면에서는 오리지널 로마들과도 통한다. 동로마 서로마 둘 다.[10] 결국 제국이 해체된 후 스위스로 망명하여 포르투갈에서 죽었다.

3. 가상인물

4. 한국 아마추어 무선 연맹

1955년에 체신부의 인가를 받아 아마추어무선사들이 서로 모여 만든 단체(비영리 사단법인)이다. 상당히 역사가 오래되었다. 영어로는 'The Korean Amateur Radio League'로 줄여서 KARL (칼) 이라 부른다.
더 자세한 사항은 '아마추어 무선 참고'

[1] 러시아어 코롤(Коро́ль)이 아닌 카를(Карл)을 쓰는 경우는 조상이 대체로 독일계나 스웨덴계이다. 역사적으로 표트르 대제의 개혁 이래 많은 서구인 전문가들이 제정 러시아에 관료나 군인, 기술자 등으로 고용되어 정착했고 그 후손들은 조상들의 명명법을 따랐다.[2] 가령 영미권에서 매우 흔한 이름 '마이클'은 미카엘, '피터'는 사도베드로에게서 비롯되었고, '폴'도 사도 바울에게서 비롯되었다.[3] 애초에 중세 유럽의 상층부를 이룬 것이 누구인지를 생각해보면 명료하다. 오늘날 서유럽 인명의 기원은 대개 게르만이나 로마, 혹은 기독교 전통에서 비롯한 것이 일반적이다.[4] 이름은 대상의 본질을 뜻하므로, 이름 붙이기는 곧 그 대상에 바라는 것, 즉 소망하는 바를 부여하는 행위였다. 특히 이러한 언어문화적 심상체계는 유럽처럼 인도유럽어족에 속하는 곳에서 많이 보였고, 중세 유럽 귀족들은 모계나 부계, 혹은 그와 무관하게 부유하고 명성있는 사람의 이름을 따서 자식 이름을 짓고는 하였다. 대체로 중세 초기에는 남계우선 장자상속제가 정착하지 않았기에 공계(公係)적 경향이 크고, 차츰 부계 조상에서 따온다든가 장자와 차자 이하에 주로 물려주는 이름이 고착화하는 경향이 나타난다. 중세 초기에 왜 "카를"이 인기있는 이름이었는지는 여기서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5] 그래서 같은 인물이라도 헤아리는 작위에 따라 다르게 불릴 수 있다. 예컨대 사생아 기욤잉글랜드 국왕으로서는 기욤 1세이지만, 노르망디 공작으로서는 기욤 2세이다. 그저 대표 작위로 헤아리는 게 일반적이기에 자연스레 오늘날에는 잉글랜드 왕국 기준으로 널리 알려졌을 뿐.[6] 간접적으로 끼친 영향으로는 서유럽과 그 식민지들 전역에 광범위하게 걸쳐 있다고 봐도 된다.[7] '용감공'으로도 불리지만 용담공이 더 일반화되어 있다.[8] 당시 나이가 고작 20대 후반~30대였다.[9] 하지만 포로를 제외하고 전사자만 따졌을 경우 오히려 나폴레옹 측이 오스트리아를 능가하는 큰 인명 피해를 냈다. 만약 카를 측의 병력이 더 우세했다면 나폴레옹의 몰락은 몇년 더 앞당겨졌을지도 몰랐을 정도. 사실 나폴레옹으로서도 큰 피해를 감수하고서까지 이기지 않으면 안 되는 전투였다.[10] 동로마: 콘스탄티누스 1세콘스탄티노스 11세, 고대 로마(서로마)): 로물루스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