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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 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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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rl J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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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카를 구스타프 융
Carl Gustav Jung
출생 1875년 7월 26일
스위스 투르가우주 케스빌
사망 1961년 6월 6일 (향년 85세)
스위스 취리히주 퀴스나흐트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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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심리학자, 정신과 의사
수상 명예박사 학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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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크 대학교 (1909)
포덤 대학교 (1912)
하버드 대학교 (1936)
알라하바드 대학교 (1937)
바나라스 힌두 대학교 (1937)
캘커타 대학교 (1938)
옥스퍼드 대학교 (1938)
제네바 대학교 (1945)
취리히 연방 공과대학교 (1955)
취리히 시 문학상 (1932)
RSM 명예회원 (1939)
SAP 회장임명 (1946)
퀴스나흐트 명예시민 (1960)
배우자 에마 융 (1903년 ~ 1955년, 사별)[1]
자녀 5명
종교 개신교
서명 파일:Carl_Jung_signature.svg.png

1. 개요2. 프로이트와의 관계3. 말년4. 의의, 한계와 영향5. 융의 이론들6.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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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스위스의 심리학자이자 정신과 의사.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함께 심리학, 정신분석학의 큰 줄기를 만든 학자이다. 프로이트의 수제자라 불릴 정도로 많은 영향을 받았지만, 결국엔 아들러의 사상을 받아들여[2] 자신만의 독자적인 이론을 창시해냈다. 콤플렉스 심리학 그리고 분석심리학의 선구자이다. 또한 서양 지식인 사회에서 큰 반향을 얻고 있는 영성주의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인간의 영혼(정신)이란 각각 대극, 대립적인 요소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요소들은 대립이 아니라 조화를 이룬다는 이야기이다. 건전한 정신이란 조화와 균형을 이룬 상태의 영혼이라는 말. 또한 집단무의식, 콤플렉스, 그림자, 페르소나, 아니마아니무스 등의 개념을 도입하였다.

신경증 환자가 그 나름의 법칙을 갖고 있다는 통찰을 입증하기 위해, 융 자신이 치료경험이나 그 당시 심리학에서 무관한 신화, 종교, 연금술, 신비주의 등 여러 분야를 끌고 와서 이론을 만들었기 때문에 문제의 여지를 보인다는 주장이 있다.

융은 동양사상에 대응하는 서구사상의 원류[3]연금술을 재발견하였다. 연금술을 물질의 변화가 아닌 영혼의 연성으로 해석하였으며, 상징들이 가진 의미를 추적하고 해석하였다. 이러한 상징들에 대한 해석은 꿈이나 환자에게서 채집할 수 있는 인간 무의식에서 나타나는 상징들과 연결되어 사례 해석의 뒷받침이 되었다.

동양의 최고수준의 정신문화에도 깊은 조예를 가지고 있었다. 대표적인 일례로 전문적인 수행자들이 주로 읽는 전진교의 조사 여동빈의 태을금화종지를 번역하기도 했다. 서양에서는 이 책을 <황금 꽃의 비밀 The Secret of the Golden Flower>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어 영성에 관심있는 이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2. 프로이트와의 관계

처음엔 프로이트와는 나이 차이가 꽤 났음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친밀했다. 프로이트의 신경증 관련 논문[4]을 읽고 융은 크게 감명을 받아 공식적으로 프로이트를 지지하였다.[5] 그러자 학계에서 명망있는 유명인과 학자들은 융에게 협박편지를 보내고 일갈하려 시도했다. 하지만 융은 모두 거절한 뒤 프로이트를 만나러 갔다. 둘은 만나자마자 13시간이나 대화를 나누었고 이후 편지도 자주 나눴다. 자연스레 뒷사정을 안 프로이트는 융에게 고마운 감정을 가졌을 것이고 프로이트에게 융이 얼마나 각별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6]

프로이트는 정신분석학을 창시하고 제2인자로 융을 아들처럼 아끼고 늘 옆에 데리고 다녔다.[7] 미국 여행도 같이 갔었다. 하지만 미국 여행 이후에 사이가 나빠져서[8][9], 서로 연락도 안 하더니 융이 프로이트를 무시하기 시작했다.[10] 그러다 결국 견해 차이로 결별하게 되었다.[11]

프로이트와의 결별 이후 융은 프로이트의 이론을 부정한다.[12] 비판적인 입장을 갖고 더 넓은 의미로서의 이론이 필요했다고 생각한 융은 분석심리학을 창시했다. 프로이트를 비판한 이유는 대략 두 가지인데, 첫째는 프로이트가 자신의 이론을 교조화하려 했고 그걸 융에게 암시적으로 부탁한다는 뉘앙스를 풍겼다는 것이었다. 이미 정신분석학의 최고 권위자였던 프로이트가 융에게 후계자를 내외적으로 표했던 일화를 보면 당연한 사건이다. 둘째는 오로지 성(性)만으로 인간정신을 해명한다는 것이 융에게 있어서 불합리하게 여겨졌다는 것이었다.[13]

프로이트는 오이디푸스 이론을 자기 학파의 핵심 이론으로 지켜야 한다 주장했으나, 융은 아니라고 보았고 결국 둘은 견해 차이로 결별하게 된다.[14] 뿐만 아니라 프로이트 산하에 있던 다른 제자들도 많이 갈라섰다. 말년에 프로이트는 융을 살짝 받아들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일화
  • 어느날 융은 프로이트와 초심리학에 관한 논쟁을 펼쳤다. 그때 공교롭게 방 전체가 울릴 정도로 큰 소리가 났다. 그러자 융은 "잠시 후 또 폭음이 나리라는 것을 지금 예고합니다"라고 말했다.[15] 그리고 몇초 후 엄청난 폭음이 방 안에 또 울렸다고 한다. 그러자 프로이트는 아연실색하며 융을 바라보았고 융에게 유령의 존재를 인정했다고 전해진다.[16] 그날 이후 그 사건은 두번 다시 프로이트 입 밖에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17]
  • 프로이트는 칼 융과 논쟁을 하면 자주 실신했다고 전해진다. 대표적인 일로 1912년 뮌헨에서 정신분석학회가 열렸는데, 어떤 학자가 아메노피스 4세(이그나톤)에 관한 화제로 대화의 방향을 돌렸다고 한다. 그 요점은 아메노피스가 아버지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가졌기 때문에 아버지를 기리는 기념비를 모두 파괴했다는 것이다. 이에 융은 개인적인 아버지에 대한 분노가 아니라 오히려 아버지를 우러러보는 마음으로 기렸다고 했다. 프로이트 눈으로 보기엔 '아버지의 기념석주 파괴 행위'를 옹호하려는 듯한 융이 눈엣가시였다. 그리고 논쟁이 끝나자마자 바로 실신했다고 한다. 융은 그를 부축하여 옆 방 소파에 뉘었다. 반쯤 회복한 프로이트가 융이 마치 아버지라도 되는 양 나약한 모습으로 융을 올려다 보았다는 일화가 있다. (기억 꿈 사상 292p)
  • 브레멘에서 출발한 미국행 여행에서 서로 매일 함께 지내면서 서로의 꿈을 분석했다고 한다. 그러다 프로이트가 어떤 꿈을 꾸었다. 융은 그가 사생활에 관해 좀더 상세한 정보를 나에게 제공해준다면 꿈의 해석이 더욱 풍성해지겠다고 말했다. 융의 말에 프로이트는 갑자기 기묘한 시선, 의심이 가득 담긴 그런 시선으로 융을 째려보았다고 한다. 그러면서 "하지만 나의 권위를 위태롭게 할 수는 없어!"라고 소리를 질렀고 그 순간 융은 반박을 해보려 했지만 주변 사람들의 시선과 자신의 사회적 위치를 감안해 물러났다고 한다. 이 일화는 프로이트와 융의 관계를 아주 사실적으로 드러낸 유명한 일화다. 융은 자서전에서 이 사건 이후 프로이트와 결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직감했다고 언급한다.[18] 하지만 프로이트의 깊은 통찰과 폭넓은 경험을 공유하고 싶었던 융은 그런 프로이트를 놓치고 싶지도 않았지만 한편으론 융의 성격상(극단적인 과학적 교조화에 대한 혐오, 지적 반항기질 등) 권위를 잃었지만 권력을 부리려는 연장자를 따르고 싶어하지 않아했다.

3. 말년

중년 이후 자신을 위한 집을 스스로 짓기 시작했다. 조금씩 지어가며 마음가는 대로 덧붙이고 하는 공사여서 깔끔하지는 않으나 완결은 지은 듯 하다. 내부는 스스로 그린 상징으로 장식되어 있다하며 자신의 저서 레드북[19]과 마찬가지로 일반인에게 공개하지 않는다. 이 집에 관한 일화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장편소설인 1Q84에서 언급되어 있는데 집의 입구에 '차가워도 차갑지 않아도 신은 여기에 있다' 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는 내용이다. 이 글귀의 영문 번역은 'Cold or Not, God is Present'인데 카를 융의 집에 새겨져 있는 실제 문구는 'Called or Uncalled, God is present'(실제 문구는 라틴어 Vocatus atqua non vocatus deus aderit.) (“불리었든 불리지 않았든, 신은 존재할 것이다)로 번역되며 영어 번역의 발음이 비슷할 뿐 뜻은 상이하다.

말년에는 언동이 지리멸렬해진 탓에 정신분열증을 앓은 것은 아닌가하는 의혹이 있는데 검증된 바는 없기 때문에 그대로 믿을 만한 사항은 아니다. 83세 당시 특집으로 기획된 BBC 인터뷰에 정정한 모습이 영상으로 남아있다. # 인터뷰 내용은 결코 정신분열증인 사람이 말할 수 없는 통찰력 있는 내용이다. 말년에 그는 깊은 통찰력과 분석을 통한 사회비평으로 명성을 날렸다.[20]

4. 의의, 한계와 영향

융의 집단무의식 개념은 현대 철학이나 (문화)인류학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물론 그의 무의식 개념이 그대로 쓰인 것은 아니며, 같은 문화권에서 나타나는 신화, 설화, 상징 등에 내포된 의미를 분석하는 개념으로 사용된 것이다. 이는 질베르 뒤랑, 조지프 캠벨,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의 저작을 살펴보면 알 수 있다.

현대 심리학과 정신분석학에 융의 영향력이 대단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현대에는 재검증을 거쳐서 융의 개념을 그대로 사용하지는 않는데, 이는 융의 이론이 현대에서 주류를 차지하는 심리학과는 차이가 많기 때문이다. 프로이트의 이론도 현대엔 문제점이 많이 발견되어 대부분이 사장되었지만, 그래도 정신분석학의 창시자로서의 업적을 인정하여 융보다는 훨씬 많이 다룬다. 개론서에선 융에 관한 내용이 한 줄 정도 나오는 것도 길게 나오는 편이라는 우스갯소리도 있다.[21]

더군다나 융의 저작은 프로이트의 저작에 비해 진입 장벽이 높다. 프로이트의 저작은 정신의학에 문외한인 사람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게끔 쓰인 데다 문장이 예술적이지만, 융의 저작은 정신의학, 종교, 신화에 대한 배경 지식이 없으면 받아들이기 어려운 내용일 뿐더러 독일 철학서들만큼이나 문체가 난잡하기로 악명이 높다. 현재 한국 융 연구원이 융의 저작들을 일부 번역한 것이 놀라울 지경이다.

많은 사람들이 칼 융의 이론과 분석이 허무맹랑한 오컬트에 속한다고 치부하지만, 이는 융의 저서를 잘못 읽었거나 몇몇 개념을 오해한 데서 비롯된 착각이다. 실상 그의 인격 통찰과 이론을 본다면 결코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진실을 담고 있다. 즉 오컬트 및 특정 단체[22]가 칼 융의 극악무도한 글 솜씨에 의해 이해를 못하고 혼용하거나 맥락과 상관없이 빌려다 쓴 것이다. 흔히 떠도는 낭만적 낙관주의, 리비도와 육체의 오묘한 이치들은 칼 융이 말하고자 한 바가 아니다.

그는 오로지 개인의 인격(personality)에 초점을 맞춘 프로이트의 한계를 극복하여, 개인 너머에 존재하는 집단 무의식을 체계적으로 연구한 인물이다. 즉, 칼 융은 비과학적이라고 방치되었던 신화와 역사, 비의들을 체계적으로 분석함으로써 인간의 정신세계를 밝히려고 시도했던 것이다. 인간학에서는 인간의 합리적 생각은 물론이고 비합리적 미신마저 이해해야 한다.

5. 융의 이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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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에난티오드로미(Enantiodromie)
    심적 대극의 반전 현상으로, 주로 인생 후반기에 일어나는 급격한 심리적 변화를 가리킨다. 예를 들어 외향적 감정형이던 사람이 어떤 계기로 그 대극인 내향적 사고형으로 돌변하는 경우가 있다. 이런 극단적인 심리적 변화를 잘 감당하지 못하면 정신질환에 걸리기 쉽다.
  • 무의식(das Unbewußte, the unconsciousness)
    자아에 속하지 않으며 자아와 아직 연관되지 않고 있는 모든 심리적 경향과 내용을 일컫는 말이다. 개인무의식과 집단무의식으로 나뉜다. 개인무의식은 개인의 출생 이후 경험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며 개인에 따라 성격이 다르다. 집단무의식은 선천적인 것으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인류 보편적 성격을 띠고 있다.
  • 상징(Symbol)
    원형은 상징을 통해 그 모습을 나타낸다. 요컨대 상징은 무의식의 방대한 정보가 압축된 압축파일인 것이다. 그리고 무의식의 원형적 상징은 절대 인물의 특성이 아니다. 주로 원형을 '영웅', '나이든 현자' 등으로 이해하는데, 원형은 신화적 과정이다. 영웅을 영웅의 과정에서 빼면 그 어떤것도 남지 않는다. 드라마 각본을 연기하는 연기자라고 봐도 좋다. 특히 자기원형은 수학적 도형적 상징을 통하지 않고는 스스로 모습을 나타낼 방도가 없다.
    • 1) 꿈의 상징
      자기 상징들을 꿈에서 만나게 된다. 꿈의 해석은 상징해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상징 해석은 자기의 메세지를 듣기 위한 필수과정인 셈이다. 꿈은 성욕의 왜곡된 소원성취라는 면도 있지만 예시적인 면이 더 강하다.[23]

    • 2) 종교 상징
      종교도 상징을 통해 진리를 나타낸다. 태곳적부터 인간의 무의식적 범람과 대극적 활동의 표현을 종교를 통해서 드러냈다고 한다. 종교가 일종의 그릇 역할인 셈이다. 그리고 종교의 신성적 상징들의 변천과 역사를 보면 당시의 인간의 정신 활동을 유추할 수 있으며 앞으로의 진행 방향도 예측할 수 있다고 한다.[24] 그러한 상징을 잘 활용할 때 종교의 긍정적인 기능이 발휘되는 법이다. 종교상징을 제거한 개신교는 그런 점에서 가톨릭에 비해 빈약한 면이 있다.
    • 3) 만다라(Mandala) 상징
      만다라는 산스크리트어로 '원륜(圓輪)'이라는 뜻이다. 원래는 힌두교와 탄트라불교에서 종교 의레를 거행하거나 명상할 때 사용하는 상징적인 그림을 가리킨다. 만다라는 기본적으로 통합된 우주를 상징하는 것으로, 통합상징이라고도 한다. 대개 원이나 사각의 형태를 띤다. 만다라 상징은 기독교와 다른 종교에서도 나타나며, 미술치료를 받는 정신병 환자들의 그림에도 자주 등장한다. 정신병 환자들의 경우, 만다라는 해체된 정신을 통합하고자 하는 무의식적인 욕구를 담고 있다. 중세 연금술에서도 신, 즉 통합상징을 원이나 구로 나타냈다.

6. 기타

  • 한국 분석심리학의 선구자인 이부영 교수는 아쉽게도 근소한 차이로 융 본인을 직접 만나지는 못했다. 당시 장학생 신분으로 유학중이던 이부영 교수는 우연에 가까운 이유로 분석심리학을 선택하게 되었는데, 도착 당시 융 본인은 몇 개월 전에 사망. 따라서 지도교수는 마리아 폰 프란츠가 되었다.
  • 전혀 연관이 없겠지만 타이토의 슈팅게임 다라이어스 외전의 곡들(VISSIONERZ, SELF등)이 융의 심리학에 영향을 받았다.
  • 나스 키노코가 창작한 타입문 세계관에 영향을 끼친 핵심 설정 요소이다. (아키타입 원형 , 집단무의식 아라야의 개념 등)
  • 한국에서는 Jung을 영어식으로 "정"으로 잘못 읽는 경우가 많다. 반대로 정씨 성을 가진 한국인이 자기 성을 Jung이라고 적어놓은 것을 보고 외국인들이 '융'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다. 본격 미스터 융.
  • 과거 일밤 코너였던 '전원정답! 참! 잘했어요!'에서 이계인이 이 사람의 명언[25][26]을 언급하자 방송 나간 이후 실시간 검색어에 오르내리기도 했다.
  • 존 데이비슨 록펠러의 딸 에디스 록펠러 맥코믹이 1913년 취리히에서 융에게 치료받고 큰 감명을 받아 연구를 지원하고 전업 정신분석가가 되어 50명 이상의 환자들을 치료했다. 융의 책을 영어로 번역하고 출판해 미국에 그의 이론이 알려지는데 도움을 주었다.
  • 리처드 도킨스가 만든 이론 중 하나가 그 유명한 가설인데, 이 밈 가설은 융의 집단적 무의식, 원형과 상당히 유사하다.
  • 융은 언어에 대단히 능통해서 최대 5–6개 국어를 했으며, 영어, 독일어, 라틴어, 그리스어 뿐만 아니라 간단한 몇몇 아프리카 부족 언어나 고대어로도 문헌 독해가 가능했고, 저 언어들로 의견 전달까지 할 수 있었다.
  • 정치적 성향은 중도진보이며 개방적인 자유주의자로서 외국인에게 대단히 우호적이었다. 그런 성향인지 타민족과 대화를 하면 상대방 나라의 언어를 이용한 언어유희 및 농담을 하며 서슴없이 지냈다.
  • 융이 스스로 평가하길 자신의 인생은 늘 고독했다고 말한다. 늘 주변 사람들이 그의 곁에 많았지만 말이다. 이런 발언을 통해 그의 고민을 유추할 수 있다. 내적인 환상과 종교상징에 대한 호기심과 외경심을 느끼며 이를 탐험하고자 했지만 현실적 조건이 늘 발목을 잡아 노심초사했다는 것.
  • 융의 할아버지는 바젤 대학교 의대 교수였다. 근데 정작 융의 가정은 가난해서 할아버지 빽과 아버지의 소문난 덕성 덕분에 대학등록금을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융의 외가쪽 선친이 괴테라는 전설이 있다. 그의 자서전에선 융은 그런 전설을 듣고 의심쩍이면서 동시에 상당한 영향을 받은 듯하다.
  • 융의 취미는 호수에서 보트 타기이다.
  • 그의 저작 양은 가히 상상을 초월한다. 대표적인 예로 프리드리히 니체에 관한 논문을 써서 지금 시중에 책으로 나와있다. 칼 융, 차라투스트라를 분석하다는 450쪽으로 구성되어있는데 실제 논문을 지금 구성되어있는 책 분량으로 계산하면 약 1천장을 훌쩍 넘는다고 한다.
  • 융은 저서 리비도의 변환과 상징(1912)[27]을 쓰기 마음 먹었을 때는 이미 프로이트와 이별하기를 마음 먹었었다. 마지막 장의 이름이 희생인데, 그 희생은 자신을 뜻하기도 한다고 전해진다.[28]
  • Flow 이론으로 유명한 심리학자 미하이 칙센트미하이는 십대 시절 스키를 타러 스위스에 갔다가 우연히 융의 강의를 듣게 되었는데[29], 이를 계기로 심리학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헤르만 헤세는 1916년에 처음 융을 만났고, 그의 대표적인 소설 황야의 늑대(1927)는 분석심리학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고 평가된다.
  • 노벨물리학상 수상자인 볼프강 파울리는 융보다 25세 연하였지만 오랫동안 친구로 지내면서 특히 융의 '동시성 연구'에 관심을 갖고 공동연구를 했다.
  • 나치 정권에 보호를 받았다는 오해가 있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실제로 미국 연합군에게 히틀러의 정신감정을 해줬고,[30] 뿐만 아니라 연합군 스파이와 협조를 하였다. 다만 사이가 틀어진 스승 프로이트가 유대인 박해를 피해 영국으로 망명하면서, 무주공산이 된 독일-오스트리아 심리학계에서 수혜를 봤다든가(적극적으로 의도한 건 아니지만) 나치 민족주의와 국가주의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심리분석학을 전개했다는 비판이 있긴 하다. 참고로 융은 비유대인 스위스 출신이라 유대인들이 많았던 빈 심리학계에서는 아웃사이더에 가까웠다고 한다. 그래서 프로이트와의 갈등도 이런 계급적 문제가 무관하지 않을거라는 분석도 있다. 그나마 개방적인 성향상 반유대주의자나 적극적인 부역 혐의는 제기되지 않는다.
  • 국내에 나와 있는 융 심리학 개설서로는 위에서 언급된 이부영 서울대 명예교수가 쓴 "분석심리학(일조각)"이 널리 알려져 있다. 1978년 초판이 발행되었고 2000년에 개정판이 나왔는데, 개정판에는 초판에서 미처 다루지 못했던 '분석심리학과 예술' 및 융이 말년에 제기한 학설인 '비인과적 동시성'이 추가되었다. 현재는 2011년에 개정된 제3판이 나와 있다.

[1] 혼전 성씨는 '라우셴바흐(Rauschenbach)'.[2] 융이 직접 말하길 프로이트 성이론과 아들러의 이론 모두 긍정한다.[3] 일종의 신토불이. 당시 불교 사상이 지식인 사이에서 유행했으며, 융도 티베트 사자의 서 같은 번역서에 서문을 쓰기도 했다.[4] 1900년 <꿈의 해석>, 1901년 '일상 생활의 병태 심리', 1905년 '성 이론에 관한 세 논문'과 '위트와 무의식과의 관계'[5] 당시 프로이트의 평판을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20세기 큰 획을 그은 위인으로 생각하면 안된다. 그는 오스트리아 출신 조촐한 유대 집안 출신이였으며 학계에서 따돌림 당하는 외톨이 신세였다. "정신병은 여자만의 병이 아닌 인간의 병으로서 남자도 걸릴 수 있다"라고 발언 후 학계에서 파문 당하고 생활고에 빠질 정도였으니 말이다. 주류 의사와 동료학자들은 그를 업신여겼다.[6] 프로이트(1856)와 칼 융(1875)의 나이차이는 19살이고 미국 여행 이전 그 둘을 알던 사람들은 부자관계와 같이 친밀했다고 알려져있다.[7] 융의 친아버지는 융이 바젤 대학교에 입학 한 후 얼마있다 별세했다. 그래서 융에게 있어 프로이트는 아버지와 다름없는 존재였으며, 실제로 둘은 부자관계처럼 보일 정도로 친밀했다고 전해진다.[8] 프로이트는 자신의 권위를 무너트리고 1인자의 지위를 빼앗아 갈 거라는 식으로 해석을 하며 암시적으로 융을 경계했다. 융은 그 당시 프로이트는 자기 이론의 권력화에 몰두한 나머지 자기 이론인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본인을 동일시하였던 것이라고 추측했다. 평소에 융에게 아버지로서 대접을 받았던 프로이트는 오이디푸스(융)에게 당할 (권력)살해를 두려워했다는 것이다.[9] 융이 프로이트의 꿈을 해석하려던 중, 그에게 사생활을 얘기해달라고 말하자 프로이트는 "하지만 나의 권위를 위태롭게 할 수 없어!"라고 거절했다. 융은 그 순간 프로이트가 그 말을 하며 스스로 권위를 상실했다고 말했다. (칼 융 기억 꿈 사상 자서전 295p)[10] 미국여행을 갈 때 두 사람은 '우리가 미국에 새로운 바람을 불게 할 거다!'며 갔는데 스승이었던 프로이트는 일반석에 제자였던 융은 귀족층이 타는 1등석에 타고 갔다고 한다.[11] 제드 레벤펠드의 소설 살인의 해석에서 미국 여행을 온 지그문트와 카를 융이 왜 사이가 틀어졌는지에 대한 내용을 다뤘다.[12] 융의 자서전을 참고하면 프로이트를 완전히 부정하진 않았다고 한다.[13] 자서전 중 "내가 프로이트의 성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일반에 널리 잘못 알려져 있지만, 오히려 그와 반대로 성은 내 심리학에서 정신 전체의 본질적인(유일한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표현으로서 커다란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나 나의 주요한 관심은 성의 개인적인 의미와 생물학적인 기능을 넘어서서 그것의 정신적인 측면과 신성체험적인 의미를 탐구하고 설명하는데 있다."[14] 프로이트와의 결별은 융만의 진리에의 열망이 만들어낸 일이다. 융은 학자로서 권위와 명성보다는 진리를 추구했다. 물론 그 과정은 고통스러웠지만 말이다.[15] 융이 말하길 "촉매에 의한 외면화 현상의 한 가지 예가 될 것입니다." 그러자 프로이트는 "헛소리 하지마시오!"라고 말했다. 융이 다시 답하길 "잠시 후 또 폭음이 나리라는 것을 지금 예고합니다."라고 하며 프로이트의 두 눈을 계속 응시했다고 전해진다. (자서전(영문판) 289p)[16] '유령'이라는 단어가 유치하기 때문에 우스운 일로 생각할 수 있지만 융에게는 진지한 체험으로서 '동시성 현상'이라는 논문까지 만들었다.[17] 정신분석학을 과학의 영역으로 포섭시키기 위해 프로이트는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사실 그의 과학적 이론화는 정신분석학의 사활이 달린 문제였기에 이런 사건들이 프로이트에게 있어서 얼마나 황당하고 소름이 돋는 얘기일지 짐작할 수 있다.[18] 융은 권위 찬탈의 두려움을 암시적으로 보여주는 일화임을 알 수 있다고 서술했다. 또한 그 발언으로부터 프로이트 자신 스스로의 권위를 상실하게 했다고 서술했다. (기억 꿈 사상 295p)[19] RED BOOK. 카를 융이 말년에 지은 저서로, 원래 제목은 새로운 책이라는 뜻의 Liver Novus였으나 붉은 표지를 염두에 둔 카를 융이 별칭으로 레드 북이라고 부르던 것이 공식 명칭이 되었다. 해당 책에 포함된 삽화도 모두 카를 융 본인이 그렀다. 다만 미완성으로 남았으며 원고는 공개되지 않았다. 그러다 2001년에 심리학자들에 한해서 공개되었으며 2009년에 들어서는 일반 대중들에게도 공개되었다.[20] 융의 말년엔 이미 프로이트가 역사상 가장 유명한 위인으로 세손가락 안에 뽑히고 철학사에서는 전무후무한 업적을 남겼으니 그와 중요한 관계였던 융도 더 유명해졌다. 인텔리층에서의 윗어른으로 모시는 분위기가 상당했다고 전해진다.[21] 사실 일반적으로 개론서의 성격 파트에선 한 단락으로 짚어보고 넘어가는데, MBTI를 설명하기 위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또 흔히 프로이트의 성적 발달 이론을 소개하면서 오이디푸스 컴플렉스와 엘렉트라 컴플렉스를 같이 소개하는데, 여기서 엘렉트라 컴플렉스는 융이 만든 개념이다. 프로이트의 이론은 남성 중심으로 설명한다.[22] 신비주의 단체, 히피, 사이비 종교 분파[23] 비유를 하자면 프로이트는 꿈이 일종의 가면의 역할을 하여 진실된 내용을 왜곡한다고 주장했고, 그에 반해 융의 꿈은 때로는 가면 역할과 예시(豫示) 역할, 보충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24] 이는 『아이온』, 『기억 꿈 사상』에서 언급된다. 가령 선한 하나님에 집착한 인간은 '악'을 만든 하나님이라는 모순을 타락천사, 적그리스도 등의 개념으로 대극의 평행을 이뤄냈다는 것이다. 이런 균형 메커니즘은 종교계에서 파문당한 바뤼흐 스피노자가 실제로 사회비평을 할 때도 사용된다.[25] 나는 많은 남자들을 믿었다 하지만 그들은 나를 배신했다. 나는 많은 여자들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날 배신하지 않았다.[26] 이 말이 <우먼센스>라는 한 여성 잡지에 그 내용이 실렸고, 이계인이 우연찮게 그 여성 잡지에서 이 내용을 읽었던 것으로 추측된다.디씨에서 해당 사실을 언급한 글[27] 프로이트가 반대했다고 한다.[28] -저서 <꿈 기억 사상>[29] 눈이 빨리 녹아버려 스키를 탈 수 없었고, 시간을 때우려고 그곳에서 열리는 무료 강연을 들으러 갔는데 그게 융의 강연이었다고 한다.[30] 궁지에 몰리면 자살할 것이라고 얘기했는데, 정확히 들어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