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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échal d'Empire
프랑스 제1제국 제국원수 ||
||프랑스 제1제국 제국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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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대 에슬링 대공, 앙드레 마세나 André Masséna, 1er prince d’Essling | |
| |
<L'enfant chéri de la victoire> 승리의 여신의 총아 | |
출생 | 1758년 5월 6일 |
사르데냐 왕국 니차 | |
사망 | 1817년 4월 4일 (향년 58세) |
프랑스 왕국 파리 | |
신체 | 172cm |
매장지 | 프랑스 파리 페르 라셰즈 묘지 |
재위 | 에슬링의 대공[A] |
리볼리의 공작[B] | |
국적 | |
군복무 기간 | 1776년 ~ 1817년 |
계급 | 제국 원수(프랑스 제1제국) |
지휘군단위 | 사단→군단(보병) |
참전 | 프랑스 혁명전쟁 나폴레옹 전쟁 ┗제1차 이탈리아 전쟁 ┗취리히 전투 ┗바그람 전투 ┗아스페른-에슬링 전투 |
서훈 | 레지옹 도뇌르 훈장 에투알 개선문 남쪽 23열 |
가족 | 쥘 마세나(부) 마르게리트 파브르(모) 안 마리 로잘리 라마르(부인) 마리 안 엘리자베트(장녀, 요절) 프로스페 자크 마세나(장남) 빅투아르 테클르 마세나(차녀) 프랑수아 빅토르 마세나(차남) 안나 드벨(둘째 며느리) 빅토르 마세나(손자) 오노레 샤를 레유(둘째 사위) |
1. 개요
나는 상대가 마세나라는 소식이 들려올 때마다 제대로 먹고 마시고 잘 수 없었다. 좀처럼 걱정에서 헤어나올 마음을 편히 먹을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나에게는 한시도 경계심을 늦출 이유가 없었다. |
프랑스 혁명 전쟁과 나폴레옹 전쟁 때의 프랑스군 장군. 초대 리볼리 공작이자 초대 에슬링 대공.[3]
루이니콜라 다부, 장 란, 루이가브리엘 쉬셰등, 나폴레옹의 원수들 중에서도 가장 유능했던 인물로 꼽힌다.
나폴레옹의 데뷔전이라고 할 수 있는 툴롱 전투 이전부터 마세나가 이끄는 군대는 승리를 거듭했고 당대 유럽에서 마세나보다 훌륭한 야전기록을 세운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라고 한다. 나폴레옹의 원수들 중 상당수는 마세나 휘하에서 복무한 적이 있을 정도였다.
다만 문제는 '돈을 너무 밝힌다'는 것이었다.
2. 생애
2.1. 마세나의 출생과 군 경력
젋은 시절의 마세나 초상화 |
1758년 당시 사르데냐 왕국의 영토였던 니차[4]에서 와인상의 아들로 태어났다. 마세나가 6세가 되던 1764년, 아버지가 죽자 재혼한 어머니는 어린 마세나를 아버지의 친척집에 보내버렸다. 이렇게 마세나는 부모의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하며, 불우한 어린시절을 보내야 했다.
마세나가 13세가 되자 그는 상선에서 사환으로 일했다. 그는 지중해 및 프랑스령 기아나에도 다녀왔으며, 그렇게 4년 동안을 배에서 보냈다. 1775년에 니차로 돌아온 그는 프랑스로 건너가 프랑스군에 입대하여 이탈리아 지역 연대에서 종사했다. 귀족이 아닌 사람이 오를 수 있는 최고의 지위[5]에까지 올랐다. 그 후 1789년 비 귀족 출신으로서는 최고 계급인 준위로 승진한 후 군대를 제대했으며, 그 해 8월에 안 마리 로잘리와 결혼하고 아내의 고향에서 생활했다. 한동안 밀수업으로 재미를 보던 그는 혁명이 발발한 뒤인 1791년 군대에 복귀하여 장교가 되었고, 1792년에는 대령으로 승진한다.
2.2. 마세나와 혁명전쟁
프랑스 혁명전쟁이 발발할 당시 1792년 4월, 마세나의 부대[6]는 사르데냐 왕국의 핵심지인 피에몬테 근처에 배치되어 있었고, 마세나는 전투를 대비해 자신의 부대를 그곳에서 훈련시켰다. 그는 자신의 군단이 정규 군단으로 인정받기를 희망하고 있었다. 1792년 10월 경, 그는 고향인 니차를 한달 내에 점령시켰다. 그 덕분에 그의 군단은 비로소 정규군단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마세나의 부대는 4개의 지원병 부대에 포함되었으며, 나중에는 이탈리아 방면군에 배속되었다.마세나는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혁명으로 인해 고위 장교들이 줄줄이 숙청당해 공석이었던 관계로 그는 빠르게 진급했으며,[7] 1793년 8월에는 여단장으로 진급했고 같은 해 12월에는 사단장으로 진급했다. 2년 간 그는 이탈리아에서 큰 활약상을 선보였고, 1794년 사오르지오 공격에 참여했고, 1795년 로아노 전투에 참가, 1796년에는 나폴레옹의 지휘 하에서 2개의 사단으로 구성된 전위대를 지휘했다. 마세나는 이탈리아 전역을 통해 나폴레옹의 가장 중요한 부하 중의 하나가 되었다.
근데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제2차 이탈리아 전쟁 당시 마세나는 훌륭한 활약을 했다. 그 해 봄에는 몬테노테와 데고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지휘를 했으며, 여름에는 로나토와 카스틸리오네, 바싸노, 칼디에로, 아르콜라 등의 중요한 전투에서도 지휘를 했다.
제 2차 취리히 전투 당시 마세나와 그의 부대[8] |
1799년에 마세나는 스위스 헬베티아 방면군의 후임 사령관으로 부임, 취리히에서 카를 대공과 2번에 걸쳐 피터지는 싸움을 했다. 첫 번째 전투에서는 패배를 당했지만[9] 그러나 그는 기 죽지 않고 9월 두 번째 전투에서는 승리를 거두었다.[10] 그 후 러시아가 제2차 대프랑스 동맹에서 발을 빼게끔 만드는 일련의 전투들에도 참가함으로 전선에서 러시아군을 몰아냈다.
1800년에 마세나는 이탈리아에 돌아와서 제노바 공성전에 참가하여 함락시킴으로서 그의 위대한 군사적 업적 중 하나를 기록시켰다. 하지만 이탈리아 전역은 갈수록 암울해져갔고, 그는 연합군에게 포위당했다. 이탈리아에 주둔했던 많은 장군들이 항복했지만, 그는 적극적으로 버티면서 원군을 기다렸다. 그러나 마침내, 마세나는 6월 4일에 병사들이 안전하게 귀국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조건을 단 채 오스트리아군에 항복하고, 제노바를 연합군에게 내주었다.[11]
그래도 마세나가 버틴 것이 헛된 것은 아니었다. 나폴레옹은 마세나가 제노바에서 오랜 기간동안 버티는 동안에 전쟁 준비를 마치고 오스트리아군의 배후로 침입할 수 있었다. 나폴레옹은 마렝고 전투에서 승리를 거둠으로서 연합군을 이탈리아 반도에서 몰아냈다. 마세나는 나폴레옹이 돌아간 뒤 이탈리아에 주둔한 프랑스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지만, 나중에는 나폴레옹에 의해 물러나야 했다.
사실 마세나는 나폴레옹에 대해 그리 호감을 품은 것은 아니었다. 나폴레옹이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았을 때, 그는 이를 비판했으며, 사석에서 나폴레옹을 비꼬곤 했다고 한다. 하지만 나폴레옹으로서는 마세나의 지지를 얻는 것이 중요했고, 마세나 역시 자신의 출세를 위해서는 나폴레옹과 타협해야 했다.
2.3. 나폴레옹 전쟁시기
나폴레옹 전쟁 시절 마세나의 초상화 |
마세나는 퐁텐블로 궁전에서 이 시기 나폴레옹과 그의 참모진들과 함께 사냥을 나섰는데, 하필이면 나폴레옹이 처음으로 쏜 총알에 마세나의 눈이 맞았다고 한다.
이후 마세나는 1809년 나폴레옹이 오스트리아 원정을 감행하자, 원정에 참여하여 나폴레옹을 위해 싸웠다. 그는 대육군 제4군단을 지휘하여 에크뮐 전투와 에베르스베르크 전투에서 승리를 일구었다. 나폴레옹이 다뉴브 강을 건너 북상할 무렵, 마세나는 1809년에 아스페른-에슬링 전투[13]에서, 마세나의 군대는 아스페른을 점거한 뒤 아스페른 성당을 요새로 삼아 이틀간 몰려오는 적들과 피범벅이 되도록 싸웠다.[14]이 때 당시, 베시에르 원수와 란 원수의 갈등으로 결투가 일어날 뻔하자 이를 중재했다고 한다.[15] 그 후 벌어진 바그람 전투에서 승리한 공으로,[16] 1810년에는 에슬링 공의 작위도 하사받았다. 이 때 그의 군단은 한번도 패하지 않았기에, 그는 "승리의 여신의 아들"이라는 별칭을 얻게 되었다.
1810년, 나폴레옹은 마세나를 반도 전쟁에 투입시켰다. '승리의 여신의 아들'이라면 이 문제를 거뜬히 해결시킬 수 있을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세나는 이 원정에 반대하고 있었으며 심지어 나폴레옹 면전에서 공개적으로 반대 의사를 내비치기까지 했다. 그러나 결국 나폴레옹은 포르투갈 침공군 사령관으로 마세나를 임명했고, 마세나는 시우다드 로드리고와 알메이다를 성공적으로 점령, 포르투갈로 쇄도했다. 하지만 그는 스페인 반군을 토벌하기 위해 오랜 시간을 끌어야 했던 데다가, 당시 치통에 시달리는 바람에 멀리 원정을 가는 데 차질을 빚어야 했다. 게다가, 그는 스페인에 투입된 다른 프랑스 원수들과도 마찰을 빚으며 지휘계통의 혼선을 초래했다. 마세나 휘하에 있었던 원수들은 베시에르, 술트, 네 정도가 있었는데 네의 경우 마세나가 웰링턴의 부대에 추격당할 때 후위대를 지휘해 떨쳐버리는 등의 성과를 보였지만 마세나의 지휘를 불평했으며 베시에르는 지원을 약속하고서 정작 지원해주지 않았다. [* 사실 이 시점에서 원수들은 서로 협력해 목표를 달성하는 것보다 남이 못하고 내가 잘해서 군공을 세우자는
포르투갈에서 마세나는 부사코 전투에서 영국-포르투갈 연합군 사령관 웰링턴 자작[17]과 치열하게 맞붙는다. 5차례나 공격을 감행하였음에도 웰링턴은 이를 모두 막아내었다. 그러나 마세나는 끈질기게 측면을 공략했고 결국 연합군은 철수할 수 밖에 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1810년 7월 마세나는 그의 군단을 이끌고 리스본 북부까지 밀고 들어가는데 성공하였다. 그런데 그의 눈 앞에는 웬 우주방어 요새들이[18] 즐비해 있었다. 포루투갈을 방어하는 영국군 사령관 웰링턴이 어마어마한 방어선을 갖춘 것이다. 이른바 "토레스 베드라스 방어선"이다. 이것을 본 마세나는 너무나 어이가 없어서, 부관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왜 저런 방어선이 설치될 때까지 내게 보고를 하지 않았느냐?! 포르투갈로 진격할 수 없게 됐잖은가!"
"아무래도 웰링턴이 만들었나 봅니다."
부관이 엉겁결에 한 대답.
그러자 마세나는 매우 격분하여 부관을 향해 욕설을 퍼부었다.부관이 엉겁결에 한 대답.
"야 이 새끼야![19] 당연히 웰링턴이 세웠겠지! 그런데, 웰링턴이 산을 창조했단 말이냐?!"
어쨌든, 마세나는 포르투갈로 진격하기 위해 웰링턴의 방어선을 공략해야 했다. 그는 몇몇 요새를 큰 희생을 치러가며 함락시키는 데엔 성공했으나, 장기전으로 치달으면서, 마세나는 곤경에 처했다. 웰링턴이 방어선 바깥의 포르투갈 영토 내의 모든 식량을 공출하는 청야작전을 실시한 바람에, 마세나의 군단은 굶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견디다 못한 마세나는 후퇴했고, 스페인 국경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재앙은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었으니, 사부갈과 푸엔테스 데 오뇨로에서 패배한 뒤로[20] 그의 자리는 오귀스트 마르몽으로 교체당하기에 이르렀다.이후 파리로 불러간 마세나는 자신을 질타하는 나폴레옹을 마주해야겠다. 그는 나폴레옹에게
그래서 에슬링 공작, 그대는 더 이상 마세나가 아니오? [21]
라며 면박을 받았다. 이후 마세나는 군을 은퇴하고 자녀 교육에 집중하는 한편 회고록을 집필하며 시간을 보낸다. 러시아 원정이 한창이던 1812년 7월, 그의 자리를 대체한 오귀스트 마르몽도 웰링턴 자작에 의해 살라망카 전투에서 패배하자 당시 황제의 부재로 섭정이었던 장자크레지스 드 캉바세레스는 마세나를 다시 한 번 반도 전쟁의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기로 결정한다. 그는 이 직책을 받아들였으나 고열로 인해 한 달도 채 못간 8월 사임한다. 이후 1813년에 다시 한 번 황제의 신임을 얻어 대육군 8군단을 지휘하게 된 마세나는 툴룽 항구에서 쿠데타를 꾸미던 프로방스 지역의 왕당파들을 제압하고 영국 해군의 지중해 함대를 상대로 항구에 상륙하지 못하게 막았으며 탈영병들을 검거하였다.
2.4. 말년
마세나는 나폴레옹이 쫓겨나고 루이 18세가 집권했을 때 퇴역했다. 그는 루이 18세에게 성 루이 기사단 대훈장을 수여받았다. 자연국경으로 인해 마세나가 태어난 샤르데나 왕국은 다시 독립했지만 그는 왕으로부터 귀하를 허가받아 프랑스인으로 그대로 남아있었다. 그 이후 루이 18세는 그를 귀족으로 봉한다. 그는 귀족회의에 참석하여 영향력을 과시하였다.마세나는 부르봉 왕정복고기인 1814년 12월,
마세나: “장군 때문에 내 머리카락 중 검은 머리카락이 남아나질 않았소!”
아서 웰즐리: “우리는 서로 대등하게 주고 받은 거 같습니만..”
마세나: “아니! 장군이 나보다 거의 2-3배는 더 많은 피해를 주었소!“.
라고 말했다. 포르투갈 원정까지 이야기나올 정도면 꽤 친하게 대화했던 듯하다. [22] 아서 웰즐리: “우리는 서로 대등하게 주고 받은 거 같습니만..”
마세나: “아니! 장군이 나보다 거의 2-3배는 더 많은 피해를 주었소!“.
나폴레옹이 이듬해 복귀했고, 마세나는 중립을 지켰다. 복위한 나폴레옹은 그가 부르봉 왕조에 충성한 걸 용서해주었다. 마세나는 여전히 중립적으로 행동하였으나 나폴레옹이 주최한 5월 축제[23]에 상원 의원으로서 참석하였다. 나폴레옹이 완전히 몰락하였을때, 나폴레옹 빠돌이 샤를 드 라 베두아예르가 로마 왕 나폴레옹 2세가 나폴레옹 1세의 뒤를 이어야 한다고 열정적으로 주장하자 마세나는 잊어버려 젊은이!라며 반박하였다.
프랑스 임시정부는 마세나를 파리 사령관을 맡게 하였으나 부르봉 왕조가 복귀한 이후 그는 교체되었다. 그는 루이 18세에게 충성을 맹세했지만 나폴레옹이 복귀할 당시 아무 대응도 안했다며 직책에서 해임되었다. 이어 초왕당파들 뇌물 수수 의혹을 제기하자 스스로를 변호하였다. 그는 복귀한 부르봉 왕조에 대해 그다지 호감을 가지지 못했으며, 루이 18세에 대한 충성심이 강한 것도 아니었다. 예를 들어, 나폴레옹을 위해 싸우다가 체포당한 미셸 네의 법정이 열렸을 때, 1차적으로 재판 권한이 있던 전쟁위원회 위원으로서 그는 반대표를 던졌고, 이 위원회는 대부분 네의 동료 원수들로 채워져있었기에[24] 2차적인 권한이 있는 상원으로 넘겨졌다. 이후 상원에서 그는 검사측 증인으로 호출되었으나 출석하기를 거부했다. 차마 동료를 해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이후 1817년, 회한에 잠긴 채 결핵에 걸린 마세나는 파리에서 쓸쓸히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죽기 전에
페르 라셰즈에 위치한 마세나의 무덤 |
3. 평가
니스에 위치한 마세나의 동상 |
그는 위험에 둘러싸여있을때도 살아서 돌아왔다. 패배했어도, 그는 마치 승리자인 것처럼 다시 (싸울) 준비가 되어있었다. |
나폴레옹이 프랑스 제1제국을 세우기 전부터 마세나는 활약하였으며, 프랑스 역사상 뛰어난 군대를 이루고 원수봉을 쥐게 될 수많은 장교들이 혁명전쟁과 나폴레옹 전쟁 시기에 그의 밑에서 실력과 경험을 쌓아나갔다.
세인트 헬레나에서, 나폴레옹은 최고의 원수가 누구냐는 질문에 그는 쉬셰라고 대답했지만 마세나가 최고라고 회고하였다. 다만 백일천하 때 나폴레옹을 따르지 않고 중립을 지켰기에 사실상 죽은 사람으로 취급했다고.
나폴레옹이 엘바 섬을 탈출한 이후에 그가 나폴레옹을 따라갔다면 워털루 전투의 승패가 달랐으리라는 추측도 있다. 당시 나폴레옹을 따른 장군들의 면면을 보면 미셸 네나 장드디외 술트 등 현장 지휘관들은 그럭저럭 있었지만[26] 나폴레옹 곁에서 2인자 노릇을 하며 전장을 조율할 수 있는 인물이 죽거나 나폴레옹을 떠나는등의 이유로 없었다. 당시 건강상태가 나빠[27] 나폴레옹 본인의 실수도 제법 있었던 것을 고려하면 그러한 실수를 지적하고 바로잡을만한 참모장이 부재했던 것은 뼈아프다. 물론 그가 참전하여 워털루 전투에서 승리하였다 해도 전쟁 자체의 결과까지는 바꾸지 못했을 것이다. 아마 마세나도 그러한 사실을 이미 알고 중립을 지켰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매우 방탕한 생활을 했다. 여성 편력이 심한 그에겐 숱한 정부가 따라다녔으며, 도박을 일삼아 재산을 탕진하기도 했다. 그는 생애 내내 빚에 시달렸다. 이 빚을 갚기 위해, 그는 군사활동을 통해 각지에서 약탈을 일삼았고, 그결과 프랑스 육군 최악의 약탈자라는 약명을 얻게 되었다. 과거의 가난한 마세나는 이러한 군사행동 덕분에 파리와 고향에 저택을 장만하고 부를 축적하여 자신의 아이들을 유복하게 자랄 수 있게 이바지하였지만, 그의 과거처럼 자라게 될 아이들은 더욱 더 많아졌다. 이 점에서 본다면, 그는 참으로 이중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A] 에슬링의 제1대 대공(1er prince d’Essling)[B] 리볼리의 제1대 공작(1er duc de Rivoli)[3] 정식명칭은 1st Duc de Rivoli, 1st Sovereign Prince de Essling.[4] 현재의 프랑스 니스(Nice). 1860년 프랑스에 할양되었다.[5] 당시는 귀족만이 사관이 될 수 있었으며, 평민들은 부사관에 그칠 수밖에는 없었다. 부사관이 되는 것만 하더라도 당시로서는 영예였다.[6] 지원병 부대였다.[7] 이 시기에 그는 나폴레옹의 툴룽 전투에도 참전하였다.[8] 제노바 공성전, 아스페른 에슬링 전투와 더불어 그의 뛰어난 전투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9] 마세나는 카를을 격퇴하는데 성공했으나 전장의 상황상 홀로 남아 있어도 아무런 의미가 없었기에 마세나가 알아서 후퇴한다. 즉, 전장을 먼저 이탈했기 때문에 패배라고 기록된 것이라 단순히 패배라고 치부되기엔 억울한 감이 있다.[10] 이때는 카를 대공이 없었다. 대신 알렉산드르 코르사코프가 지휘하는 러시아-오스트리아 연합군을 상대로 이긴 것.[11] 오스트리아군이 편의를 봐 줘서 그와 그의 7,000명의 군대는 무사히 프랑스로 돌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이것 때문인지 나폴레옹의 신임을 잠시 잃었다.[12] 야사에 따르면, 이에 대한 미안함으로 나폴레옹이 반도 전쟁 총사령관 직위를 주었다고 한다.[13] 이 전투에서 장 란 원수가 전사했다.[14] 아스페른 마을을 점거했을 당시, 마을을 철저히 약탈했다고 한다. 이 일로 마세나는 후세까지 두고두고 까이게 되었다(...).[15] 이유는 즉슨 베시에르 휘하의 기병대를 란이 투입시켜 오스트리아 군을 격퇴시키는 데 활용한 것. 베시에르는 이에 왜 자신의 기병대를 멋대로 쓰냐며 화가 나 있었지만 오히려 란은 ”우리들이 싸울 때 뒤에서 뒷짐만 지고 있지 않았냐?“ 며 응수한다. 이에 베시에르는 그에게 결투 신청을 하고 란 역시 이에 응했으나 직전에 마세나가 중재하였다.[16] 마세나는 이때 낙마사고를 당했기에 마차에 타서 지휘하였다. 오스트리아군 저격수들이 그를 노렸지만 다행히 모두 빗맞췄다.[17] 이 시기에는 자작이었다.[18] 이것은 포르투갈이 처음 구상하다 예산문제로 완공하지 못한 것을 웰링턴이 착공하여 완수한 물건이다.[19] 원문에는 Devil이라 나와있다.[20] 사실 전술적으로만 본다면 이 전투에서 마세나는 웰링턴의 측면을 노출시키며 거의 승리할 뻔 했다. 그러나 마세나가 웰링턴의 측면을 공격할 것을 명령한 순간, 베시에르 휘하 장군인 르픽이 지휘권 문제로 마세나의 공격 명령을 거부하면서 승기를 잃어버렸다.[21] 에슬링 공이라는 작위 자체가 아스페른 에슬링 전투, 바그람 전투에서 마세나의 뛰어난 지휘와 활약으로 얻은 작위였다. 나폴레옹은 그 눈부신 활약을 믿고 반도 전쟁에 투입했는데 힘도 못쓰고 영국 장군에게 무너졌으니..[22] 이외에도 마세나는 그와 같이 저녁 식사를 하면서 ‘장군이 반도 전쟁에서 자신과 원정군을 굶게 해줘서 이렇게 식사를 할 수 있게 되었다.’라고 농담을 건네자 웰링턴은 ’잠을 못 자게 한 장군 덕분에 나도 저녁 식사를 할 자격이 있다.‘며 역으로 받아치며 웃어주었다.[23] 복위한 나폴레옹이 민심을 얻기 위해 벌인 이벤트, 소위 “자유 제정”에 대한 선언과 개혁을 홍보하는 축제였다.[24] 모르티에, 주르당, 오주로 원수 등. 여담으로 몽셰 역시 이 위원회의 위원장이었으나 그 역시 네를 처벌하기를 거부해 한동안 투옥되었다.[25] 사실 반도 전쟁에서의 실패는 몇몇을 제외한다면 누구라도 실패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부하와 원수들의 명령 불복종만 봐도 알 수 있다시피 당시 마세나는 너무 운이 안 따라주었다.[26] 다만 술트는 베르티에의 뒤를 이후 백일천하 기간동안 나폴레옹의 총참모장이 되었다.[27] 주치의가 아편까지 처방할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