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10-09 11:15:10

앙드레 마세나


나폴레옹의 26인 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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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슬링의 제1대 대공, 앙드레 마세나
André Masséna, 1er prince d’Essling
파일:attachment/앙드레 마세나/마세나.jpg
<L'enfant chéri de la victoire>
승리의 여신이 가장 아끼는 아이
이름 앙드레 마세나(FR: André Masséna)
생몰년도 1758년 5월 6일 ~ 1817년 4월 4일
출생지 샤르데냐 왕국 니스
사망지 부르봉 왕정복고 파리
매장지 프랑스 파리 페르 라셰즈 묘지
재위 에슬링의 대공[A]
리볼리의 공작[B]
국적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024px-Royal_Standard_of_the_King_of_France.svg.png파일:kJtlrdW.png파일:프랑스 국기.png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18px-Flag_of_the_Kingdom_of_France_%281814-1830%29.svg.png
군복무 기간 1776년 ~ 1811년
계급 프랑스 제1제국 대육군 제국의 원수
지휘군단위 사단군단(보병)
참전 프랑스 혁명전쟁
나폴레옹 전쟁
제1차 이탈리아 전쟁
취리히 전투
바그람 전투
아스페른-에슬링 전투
서훈 레지옹 도뇌르 훈장
에투알 개선문 남쪽 23열
가족 쥘 마세나(부)
마르게리트 파브르(모)
안 마리 로잘리 라마르(부인)
마리 안 엘리자베트(장녀, 요절)
프로스페 자크 마세나(장남)
빅투아르 테클르 마세나(차녀)
프랑수아 빅토르 마세나(차남)
안나 드벨(둘째 며느리)
빅토르 마세나(손자)
오노레 샤를 레유(둘째 사위)


1. 개요2. 생애
2.1. 마세나의 출생과 군 경력2.2. 마세나와 혁명전쟁2.3. 나폴레옹 전쟁과 그의 말년2.4. 그 후
3. 평가

1. 개요

프랑스 혁명전쟁나폴레옹 전쟁 때의 프랑스군 장군. 초대 리볼리 공작이자 초대 에슬링 대공.[3]

말이 필요없다. 프랑스 혁명전쟁에서 나폴레옹 다음가는 장군을 뽑으라고 하면 이 남자다.
루이 니콜라 다부와 함께 원수들 중에서도 가장 유능했던 인물로 꼽힌다.


나폴레옹의 데뷔전이라고 할 수 있는 툴롱 전투 이전부터 마세나가 이끄는 군대는 승리를 거듭했고 당대 유럽에서 마세나보다 훌륭한 야전기록을 세운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라고 한다.

다만 문제는 '돈을 너무 밝힌다'는 것이었다(…).

2. 생애

2.1. 마세나의 출생과 군 경력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340px-Marshal_Massena%2C_duc_de_Rivoli%2C_prince_d%27Essling.jpg
젊은 시절의 마세나

마세나는 니스[4]에서 태어났고, 아버지는 상점을 경영하고 있었다. 마세나가 6세가 되던 1764년, 아버지가 죽고 어머니가 재혼했고. 어린 마세나를 아버지의 친척집에 보내버렸다. 이렇게 마세나는 부모의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하며, 불우한 어린시절을 보내야 했다.

마세나가 13세가 되자 그는 상선에서 사환으로 일했다. 그는 지중해 및 프랑스령 기아나에도 다녀왔으며, 그렇게 4년 동안을 배에서 보냈다. 1775년에 그는 니스로 돌아와 프랑스군에 입대하여 이탈리아 지역 연대에서 종사한다. 귀족이 아닌 사람이 오를 수 있는 최고의 지위[5]에까지 올랐다. 그 후 1789년 비 귀족 출신으로서는 최고 계급인 준위로 승진한 후 군대를 제대했으며, 그 해 8월에 앤 마리 로잘리와 결혼하고 아내의 고향에서 생활했다. 한동안 밀수업으로 재미를 보던 그는 혁명이 발발한 뒤인 1791년 군대에 복귀하여 장교가 되었고, 1792년에는 대령으로 승진한다.

2.2. 마세나와 혁명전쟁

프랑스 혁명전쟁이 발발할 당시 1792년 4월, 마세나의 부대[6]는 국경지대인 피에몬트 근처에 배치되어 있었고, 마세나는 전투를 대비해 자신의 부대를 그곳에서 훈련시켰다. 그는 자신의 군단이 정규 군단으로 인정받기를 희망하고 있었다. 1792년 10월 경, 그는 니스를 한달 내에 점령시켰다. 그 덕분에 그의 군단은 비로소 정규군단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마세나의 부대는 4개의 지원병 부대에 포함되었으며, 나중에는 이탈리아 방면군에 배속되었다.

마세나는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줄줄이 공석이었던 관계로 그는 빠르게 진급했으며, 1793년 8월에는 여단장으로 진급했고 같은 해 12월에는 사단장으로 진급했다. 2년 간 그는 이탈리아에서 큰 활약상을 선보였고, 1794년 사오르지오 공격에 참여했고, 1795년 로아노 전투에 참가, 1796년에는 나폴레옹의 지휘 하에서 2개의 사단으로 구성된 전위대를 지휘했다. 마세나는 이탈리아 전역을 통해 나폴레옹의 가장 중요한 부하 중의 하나가 되었다.

근데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제2차 이탈리아 전쟁 당시 마세나는 훌륭한 활약을 했다. 그 해 봄에는 몬테노테와 데고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지휘를 했으며, 여름에는 로나토와 카스틸리오네, 바싸노, 칼디에로, 아르콜라 등의 중요한 전투에서도 지휘를 했다. 가을에서는 리볼리 전투와 만토바 함락에도 참가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440px-Battle_of_zurich.jpg
제 2차 취리히 전투

1799년에 마세나는 스위스 헬베티아 방면군의 후임 사령관으로 부임, 취리에서 카를 대공과 2번에 걸쳐 피터지는 싸움을 했다. 첫 번째 전투에서는 패배를 당했지만[7] 그러나 그는 기 죽지 않고 9월 두 번째 전투에서는 승리를 거두었다.[8] 그 후 러시아가 제2차 대프랑스 동맹에서 발을 빼게끔 만드는 일련의 전투들에도 참가함으로 전선에서 러시아군을 몰아냈다.

1800년에 마세나는 이탈리아에 돌아와서 제노바 공선전에 참가하여 함락시킴으로서 그의 위대한 군사적 업적 중 하나를 기록시켰다. 하지만 이탈리아 전역은 갈수록 암울해져갔고, 그는 연합군에게 포위당해버렸다. 이탈리아에 주둔했던 많은 장군들이 항복했지만, 그는 적극적으로 버티면서 원군을 기다렸다. 그러나 마침내, 마세나는 6월 4일에 병사들이 안전하게 귀국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조건을 단 채 오스트리아군에 항복하고, 제노바를 연합군에게 내준다.[9]

그래도 마세나가 버틴 것이 헛된 것은 아니었다. 나폴레옹은 마세나가 제노바에서 오랜 기간동안 버티는 동안에 전쟁 준비를 마치고 오스트리아군의 배후로 침입할 수 있었다. 나폴레옹은 마렝고 전투에서 승리를 거둠으로서 연합군을 이탈리아 반도에서 몰아냈다. 마세나는 나폴레옹이 돌아간 뒤 이탈리아에 주둔한 프랑스군 사령관에 취임되었지만, 나중에는 나폴레옹에 의해 물러나야 했다.

사실 마세나는 나폴레옹에 대해 그리 호감을 품은 것은 아니었다. 나폴레옹이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았을 때, 그는 이를 비판했으며, 사석에서 나폴레옹을 비꼬곤 했다고 한다. 하지만 나폴레옹으로서는 마세나의 지지를 얻는 것이 중요했고, 마세나 역시 자신의 출세를 위해서는 나폴레옹과 타협해야 했다.

2.3. 나폴레옹 전쟁과 그의 말년

1804년 마세나는 나폴레옹의 신임을 얻어, 다시 지휘권을 잡았다. 그 해 있던 첫 원수 임명에 그의 이름이 올랐고, 그는 프랑스 원수가 되었다. 마세나는 1805년 오스트리아 원정 당시 독립적으로 군사행동을 취하여 다시 이탈리아로 돌아가, 마세나는자신을 털어버린 원쑤 오스트리아군을 상대로 싸웠고, 베로나를 함락, 칼디에로에서 싸웠다. 나폴리 왕국 공략전에도 참가하여 그곳을 장악함으로서 나폴레옹의 이탈리아에 대한 세력권을 확립시킨다. 1807년에는 대육군 우익을 지휘하여 폴란드를 휩쓸었다. 1808년에 나폴레옹으로부터 다른 원수들처럼 자신이 승리를 거둔 지역의 이름을 딴 리볼리 공작위를 하사받았다.

이후 마세나는 1809년 나폴레옹이 오스트리아 원정을 감행하자, 원정에 참여하여 나폴레옹을 위해 싸웠다. 그는 대육군 제4군단을 지휘하여 에크뮐 전투와 에베르스베르크 전투에서 승리를 일구었다. 나폴레옹이 다뉴브 강을 건너 북상할 무렵, 마세나는 1809년에 아스페른-에슬링 전투[10]에서, 마세나의 군대는 아스페른을 점거한 뒤 이틀간 몰려오는 적들과 피범벅이 되도록 싸웠다.[11] 그 후 벌어진 바그람 전투에서 승리한 공으로, 1810년에는 에슬링 공의 작위도 하사받았다. 이 때 그의 군단은 한번도 패하지 않았기에, 그는 "승리의 여신의 아들" 이라는 별칭을 얻게 되었다.

1810년, 나폴레옹은 마세나를 반도 전쟁에 투입시켰다. '승리의 여신의 아들' 이라면 이 문제를 거뜬히 해결시킬 수 있을 거라고 믿은 나폴레옹은 그에게 포르투갈 침공군 사령관으로 마세나를 임명했고 마세나는 시우다드 로드리고와 알메이다를 성공적으로 점령, 포르투갈로 쇄도해 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스페인 반군을 토벌하기 위해 오랜 시간을 끌어야 했던 데다가, 당시 치통에 시달리는 바람에 멀리 원정을 가는 데 차질을 빚어야 했다. 게다가, 그는 스페인에 투입된 다른 프랑스 원수들과도 마찰을 빚으며 지휘계통의 혼선을 초래했다. 우여곡절 끝에, 1810년 7월 마세나는 그의 군단을 이끌고 포르투갈로 진격했다. 그런데 그의 눈 앞에는 웬 우주방어 요새들이[12] 즐비해 있었다. 포루투갈을 방어하는 영국군 사령관 웰링턴이 어마어마한 방어선을 갖춘 것이다. 이른바 "토레스 베드라스 방어선"이다. 이것을 본 마세나는 너무나 어이가 없어서, 부관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왜 저런 방어선이 설치될 때까지 내게 보고를 하지 않았느냐?! 포르투갈로 진격할 수 없게 됐잖은가!"
"아무래도 웰링턴이 만들었나 봅니다."
부관이 엉겁결에 한 대답.
그러자 마세나는 매우 격분하여 부관을 향해 욕설을 퍼부었다.
"야 이 새끼야![13] 당연히 웰링턴이 세웠겠지! 그런데, 웰링턴이 산을 창조했단 말이냐?!"
어쨋든, 마세나는 포루투갈로 진격하기 위해 웰링턴의 방어선을 공략해야 했다. 그는 몇몇 요새를 큰 희생을 치러가며 함락시키는 데엔 성공했으나, 끝내 웰링턴의 방어선을 뚫지 못해 부사코에서 발렸다. 장기전으로 치달으면서, 마세나는 곤경에 처했다. 웰링턴이 방어선 바깥의 포르투갈 영토 내의 모든 식량을 공출하는 청야작전을 실시한 바람에, 마세나의 군단은 굶을 수 밖에 없었다. 결국 견디다 못한 마세나는 후퇴했고, 스페인 국경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재앙은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었으니, 사부갈과 푸엔테스 데 오뇨로에서 패배한 뒤로[14] 그의 자리는 오귀스트 마르몽으로 교체당하기에 이르렀다. 그 후에는 마르세유에서 지방군 사령관으로 쭉 지냈다(...).

2.4. 그 후

마세나는 나폴레옹이 쫓겨나고 루이 18세가 집권했을 때 퇴역했다. 나폴레옹이 이듬해 복귀했지만, 마세나는 나폴레옹의 휘하에 들어가는 것을 거절했고, 되려 나폴레옹에 대해 충성을 보이는 것에 싫증을 냈다. 이후 나폴레옹이 완전히 몰락하자, 마세나는 루이 18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하지만 그는 부르봉 왕조에 대해 그다지 호감을 가지지 못했으며, 루이 18세에 대한 충성심이 강한 것도 아니었다. 예를 들어, 나폴레옹을 위해 싸우다가 체포당한 미셸 네의 법정이 열렸을 때, 그는 검사측 증인으로 호출되었으나 출석하기를 거부했다. 차마 동료를 해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마세나는 1817년, 회한에 잠긴 채 파리에서 쓸쓸히 세상을 떠났다. 페르 라셰즈에 묻혔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340px-PereLachaise_Andre_Massena.jpg
마세나의 무덤

3. 평가

마세나는 나폴레옹을 제외하면 가장 뛰어난 군 지휘관이었다는 호평을 받은 인물이다. 그는 북부 이탈리아에서 큰 활약을 펼쳤으며, 뒤이은 폴란드 원정, 오스트리아 원정에서 대활약했다.[15] 그는 확실히 유능한 전략가였다.

나폴레옹이 엘바 섬을 탈출한 이후에도 그가 나폴레옹을 따랐다면 워털루 전투의 승패가 달랐으리라는 추측도 있다. 당시 나폴레옹을 따른 장군들의 면면을 보면 미셸 네니콜라 장드듀 술트 등 현장 지휘관들은 그럭저럭 있었지만 나폴레옹 곁에서 2인자 노릇을 하며 전장을 조율할 수 있는 인물이 없었다. 당시 건강상태가 나빠 나폴레옹 본인의 실수도 제법 있었던 것을 고려하면 그러한 실수를 지적하고 바로잡을만한 참모장이 부재했던 것은 뼈아프다. 물론 그가 참전하여 워털루 전투에서 승전했다고 해도 전쟁 자체의 결과까지는 바꾸지 못했을 것이다. 아마 마세나도 그러한 사실을 이미 알고 복귀를 거부했던 것일 수 있다.

하지만 그는 매우 방탕한 생활을 했다. 그에겐 숱한 정부가 따라다녔으며, 도박을 일삼아 재산을 탕진하기도 했다. 그는 생애 내내 빚에 시달렸다. 이 빚을 갚기 위해, 그는 군사활동을 통해 각지에서 약탈을 일삼았고, 그결과 프랑스 육군 최악의 약탈자라는 약명을 얻게 되었다. 이점에서 본다면, 그는 참으로 이중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440px-Statue_massena_nice.jpg
니스에 있는 마세나 동상
[A] 에슬링의 제1대 대공(1er prince d’Essling)[B] 리볼리의 제1대 공작(1er duc de Rivoli)[3] 정식명칭은 1st Duc de Rivoli, 1st Sovereign Prince de Essling.[4] 당시에는 사르데냐 왕국의 부속이었다.[5] 당시는 귀족만이 사관이 될 수 있었으며, 평민들은 부사관에 그칠 수 밖에는 없었다. 부사관이 되는 것만 하더라도 당시로서는 영예였다.[6] 지원병 부대였다.[7] 마세나는 카를을 격퇴하는데 성공했으나 전장의 상황상 홀로 남아 있어도 아무런 의미가 없었기에 마세나가 알아서 후퇴한다. 즉, 전장을 먼저 이탈했기 때문에 패배라고 기록된 것.[8] 이때는 카를 대공이 없었다. 대신 알렉산드르 코르사코프가 지휘하는 러시아-오스트리아 연합군을 상대로 이긴 것.[9] 오스트리아군이 편의를 봐 줘서 그와 그의 7,000명의 군대는 무사히 프랑스 영토로 돌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이것 때문인지 나폴레옹의 신임을 잠시 잃었다.[10] 이 전투에서 장 란 원수가 전사했다.[11] 아스페른 마을을 점거했을 당시, 마을을 철저히 약탈했다고 한다. 이 일로 마세나는 후세까지 두고두고 까이게 되었다(...)[12] 이것은 포르투갈이 처음 구상하다 예산문제로 완공하지 못한 것을 웰링턴이 착공하여 완수한 물건이다.[13] 원문에는 Devil이라 나와있다.[14] 사실 전술적으로만 본다면 이 전투에서 마세나는 웰링턴의 측면을 노출시키며 거의 승리할 뻔 했다. 그러나 마세나가 웰링턴의 측면을 공격할 것을 명령한 순간, 베시에르 휘하 장군인 르픽이 지휘권 문제로 마세나의 공격 명령을 거부하면서 승기를 잃어버렸다.[15] 사실 반도 전쟁에서의 실패는 몇몇을 제외한다면 누구라도 실패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부하의 명령 불복종만 봐도 알 수 있다시피 당시 마세나는 너무 운이 안 따라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