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2-29 20:38:30

에마뉘엘 그루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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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2654><colcolor=#ffd700> 이름 에마뉘엘 드그루시 후작[1]
Emmanuel de Grouchy, marquis de Grouchy
출생 1766년 10월 23일
사망 1847년 5월 29일

1. 개요2. 생애
2.1. 혁명 이전2.2. 혁명 이후2.3. 그루시는 어디 있는 거야!?2.4. 치욕의 말년
3. 평가4. 관련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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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Où est Grouchy!?"
"그루시는 어디 있는 거야!?"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에마뉘엘 그루시는 프랑스 혁명 전쟁나폴레옹 전쟁 당시의 프랑스군 장군이자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임명한 26인 원수 중 한 명이다. 나폴레옹의 원정에서 여러 전장을 전전하며 큰 활약을 보였으며 끝까지 나폴레옹을 배신하지 않은 충신이었으나,[2] 사단장 내지는 기병대장 이상의 임무는 맡아보지 못했기 때문에 총사령관과 같은 큰 직책을 맡기에는 부적합했고 결국 잘못된 판단으로 인해 나폴레옹의 몰락에 일조한 인물이다.

프랑스 혁명에 활동한 수학자니콜라 드 콩도르세와는 인척 관계로, 콩도르세의 아내인 소피는 그루시의 누나이다.

2. 생애

2.1. 혁명 이전

혁명 프랑스군의 장교들 중에서는 특이하게도 후작가의 장남으로 태어난 구체제의 귀족 출신이다. 1766년 수도 파리에서 프랑수아 자크 드그루시 후작의 장자로 태어났다. 왕립군사학교에 입학해서 포병으로 근무를 시작했으나 기병대로 병과를 바꿨고, 우수한 근무성적으로 근위대에 들어간다.

그의 아버지는 루이 15세의 시종직을 수행하기도 했고 왕족의 서자라는 소문이 돌 정도로 궁정에서의 영향력이 큰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루시는 일찍부터 반체제 사상으로 여겨지던 공화주의 사상에 감화되어 이를 꾸준히 옹호했으며 이로 인해 위험 인물로 찍히고 진급에도 차질을 빚었다.

2.2. 혁명 이후

혁명 이후 공화파에게 좋은 평가를 받아 1792년에 혁명전쟁이 발발하자 고위 귀족이었음에도 그루시는 기병 연대장으로 복직, 곧 이어서 소장(Maréchal de camp)으로 진급하여 남동부 최전선으로 갔다. 그리고 1793년에 방데 전쟁이 발발했을 때 봉기군을 진압하면서 크게 활약했고, 그 전공으로 사단장까지 진급했다. 하지만 로베스피에르의 공포 정치 시대에 출신 성분이 문제가 되어 일시적으로 군에서 나와야 했지만 목숨에는 지장이 없었고 이내 복귀할 수 있었다. 1795년에는 아일랜드 원정군의 참모로서 종군했으며, 혁명군의 아일랜드 원정에서 중요한 부분을 담당했다. 1798년에는 사르데냐 국왕의 퇴위와 더불어 피에몬테의 군정 총독으로서 부임했다. 또한 1799년에는 오스트리아-러시아 연합군을 상대로 한 전쟁에서 사단 지휘관으로서의 훌륭한 역량을 보여주어 그의 능력을 입증했다.

그러나 노비 전투에서 패배해 퇴각하는 프랑스군의 사이에 섞여서 퇴각하던 그루시는 14군데에 부상을 입고 포로로 붙잡혔다. 그 후 곧 석방되어 그는 프랑스로 돌아올 수 있었다.

브뤼메르 18일의 쿠데타 당시, 이에 소극적으로 반대 입장을 표명했지만, 나폴레옹에게도 중용되어 호엔린덴 전투에서 또 다시 큰 전과를 올렸다. 그루시가 새 체제에 순응한 것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그는 나폴레옹 휘하에서 여러 차례 전쟁에 참가하게 되었다.

1805년의 오스트리아 전쟁, 그 후의 독일·폴란드 원정, 그리고 1808년의 이베리아 반도 전쟁에 참가했다. 특히 독일·폴란드 원정 중 벌어진 아일라우 전투프리틀란트 전투에서는 크게 활약했다. 1809년에는 이탈리아군의 기병대 지휘관에 임명되어 이탈리아 부왕 외젠 드 보아르네의 빈 진군에 함께했다. 1812년의 러시아 원정 당시, 그루시는 대육군의 네 개 기병군단을 지휘했고, 스몰렌스크와 보로디노의 격전에서 기병대를 지휘했으며, 모스크바 후퇴 당시 나폴레옹은 그루시에게 호위대의 지휘를 맡겼다. 그렇지만 화려했던 그루시의 기병대장 역할은 1813년 나폴레옹이 그루시를 군단장으로 올리면서 끝났고, 게다가 프랑스로 돌아가게 되었다.

1814년에는 프랑스 방위 전쟁에서 방어전을 지휘하며 분전했지만 크라온 전투에서 큰 부상을 입게 되었다. 그 후 퐁텐블로 조약에 따라 나폴레옹이 실각하고, 부르봉 왕조가 복귀하자 완전히 찍혀서[3] 나폴레옹의 휘하 요직 중 하나였던 추격기병대 지휘관의 직책을 박탈당하고, 군에서 퇴출당했으나 나폴레옹이 엘바 섬에서 탈출하자 나폴레옹에게 달려가 재기용되었고, 원수봉을 받음과 동시에 귀족원의 일원이 되었다. 그 후 나폴레옹을 따라 워털루 전투에서 예비 기병대를 지휘하게 되었다.

2.3. 그루시는 어디 있는 거야!?

워털루 전투에서 나폴레옹은 그루시에게 전군의 1/3 가량인 3만 3천 명을 떼어주고 16일 리니 전투에서 패배해 달아나는 프로이센군을 추격하는 임무를 맡겼는데, 그루시는 프로이센군의 주력을 따라잡지 못하고 와브르에서 블뤼허가 남겨놓은 미끼 부대를 상대하느라 시간만 낭비했다. 그루시는 이들을 열심히 추격하며 어떻게든 박살내려 했지만, 6월 17일까지도 여전히 이 미끼 부대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었다.

18일 워털루 근처에서 포성이 들려오자, 이에 부하들이 "워털루 상황이 좋지 않은 것 같으니 일단 퇴각하는 게 어떻겠습니까?"라고 의견을 내놓았지만, 그루시는
"임무는 끝까지 수행해야지."

라며 3만 3천의 귀한 병력을 데리고 와브르에서 헤맸다.
{{{#!wiki style="text-align:center"
영화 워털루(1971년작)에서}}}파일:먹을거줘3.gif

제라르(4군단장): 들립니다, 대포 소리입니다.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가죠, 우리는 병력의 1/3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의무는...
그루시: 주제넘게 내게 의무를 가르치는 건가, 제라르? 황제께서 내게 내린 명은 확실하다. 블뤼허의 등에 검을 겨누는 것.
제라르: 장군께서 대포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가지 않으시겠다면, 저라도 가게 해 주십시오!
그루시: 내 병력을 나누면 프랑스는 날 목 매달아 버릴 거다. 프랑스는 옳을 거야, 아마.

이에 반해 나폴레옹은 그루시가 프로이센군을 잘 처리할 걸로 기대했다가 프로이센군이 워털루에 나타나자 기겁했고, 다음과 같은 유명한 절규를 내뱉었다.
"Où est Grouchy!?"
"그루시는 어디 있는 거야!?"

황급히 그루시군에게 워털루로 오라는 전령을 보냈지만, 전령은 끝내 그루시에게 도착하지 못했고[4], 그렇게 나폴레옹이 영국군과 프로이센군에게 샌드위치 신세로 털리는 동안 그루시는 와브르의 프로이센 미끼를 열심히 추격한 끝에 와브르 전투에서 격파하는 쾌거(?)를 올렸다.[5] 이 행적이 적들에게도 충격적이었는지, 당시 영국군마저도 그루시가 오판을 한 게 아니라 그루시가 나폴레옹을 배신했다고 판단했을 정도였다.

그렇게 신나게 와브르에서 프로이센 군대를 박살낸 그루시는 전투에서 이긴 후에야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사실상 멘붕한 뒤 실제 전투의 마무리를 한 건 그루시였고, 그루시가 성공적으로 전열을 정비, 수습한 덕택에 그가 이끄는 3만 3천과 패잔병을 합쳐 8만의 병력은 연합군의 추격을 물리치고 프랑스로 무사히 귀환할 수 있었다. 그 뒤 다부에게 자신의 지휘권을 반납했다. 후퇴가 승리보다 더 어렵다는 점에서,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업적은 이렇게 나폴레옹이 몰락할 때 발휘되었다.

2.4. 치욕의 말년

나폴레옹 몰락 후, "그가 열렬한 혁명 지지자였다."는 것이 드러나자 부르봉 왕가 및 귀족들은 군사재판에 세워 그를 사형에 처할 생각을 했고, 실제로 그루시의 동료들 상당수는 처형당했다. 그루시는 나폴레옹이 유배당하자 별 수 없이 미국으로 망명해야 했는데, 만일 그러지 않았다면 동료들처럼 사형당했을 것이다. 그래도 분위기가 가라앉고 보나파르트파의 몰락이 확실해진 뒤에는 동정론이 대두되어 1822년 귀국할 때는 별다른 처벌 없이 넘어갔는데, 그래도 적이었던 왕당파의 조롱과 함께 싸운 보나파르트파의 멸시 속에서 쓸쓸한 나날을 보내야 했다.[6]

7월 혁명으로 즉위한 루이필리프는 그루시를 후작으로 복권시키고 명예 원수봉을 다시 쥐어주었다. 배신자가 아니라는 것도 결국 증명되어 이 사람과는 달리 그나마 마지막 명예만은 지킬 수 있었다. 이로써 동정론도 조금이나마 생겨났다. 그러나 무능력과 오판으로 자신이 따르던 주군을 파멸로 이끌었다는 사실만큼은 변하지 않았다. 결국 그 오명은 죽을 때까지 따라다녔으며, "워털루 전투의 패배는 내 탓이 아니다."[7]라는 회고록을 여러개 써내다 1847년에 생테티엔에서 쓸쓸하게 생을 마감해야 했다.

3. 평가

워털루 전투에서의 오판 한 번으로 여생을 불행하게 보낸 인물. 워털루 전투 당시 그루시에게 내려진 명령은 '전투에서 패배하여 흩어진 프로이센 군이 재정비해서 워털루에서의 영국군과의 일전에 끼어들지 못하게 할 것'이었다. 그러나 그루시는 미끼 부대에 낚여서, 사령관인 블뤼허까지 낙마하는 부상을 입었다가 간신히 탈출할 정도로 긴급하게 퇴각했던 프로이센 군이 다시 결집하고 워털루에 끼어드는 것을 막지 못했다.

여기에는 물론 그루시 본인의 문제가 가장 컸다. 나폴레옹이 내린 명령 자체는 정상적이었고, 그루시는 명령을 제대로 수행하지도, 그렇다고 능동적인 판단으로 아군을 구해내지도 못한 것이다. 하지만 좀 더 사정을 살펴보면 나폴레옹의 책임도 크다. 당시 나폴레옹은 오랜 전쟁으로 다른 원수들이 대부분 전사하거나 배신해 인재풀이 극히 모자란 상황이었기 때문에, 남은 사람들 중 가장 믿을만한 인사였던 그루시를 중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루시는 이전까지 평범한 기병대장이나 사단장 업무만을 맡았고, 그 이상의 업무는 맡아보지 못했다. 이런 인물에게 하루아침에 전 병력의 1/3을 맡겼으니 어찌보면 당연히 헤맬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그루시에게는 임기응변 능력이 부족했다. 프랑스의 원수들은 나폴레옹에게 대들 만한 깡을 가지거나[8] 짬이 나폴레옹 못지 않은[9] 원수 몇몇들을 빼면 전쟁 내내 수동적인 모습만을 보여 줬다. 물론 이들 중 애당초 원수감이 아니었던 인물들도 있었겠지만, 나폴레옹이 부하들의 개별적인 판단을 할 수 없는 상태로 만든 탓도 있다. 물론 나폴레옹은 희대의 명장이며 그의 방식을 따랐을 때 전투에서 가장 성공적이었기 때문에, 그의 판단을 맹신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10] 또한 나폴레옹 본인이 잘못했다고 해도 정치적, 외교적인 관점으로 봤을 때 황제의 실수보다는 부하의 실수가 부대 사기나 지휘 관리 측면에서 유리하다.[11] 즉, 부하에게 책임을 물리는 것 자체는 정치인이자 황제의 위치에 있던 나폴레옹으로서는 피치 못할 선택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폴레옹의 남 탓은 그냥 독박을 쓰는 정도가 아니라 인신 공격과 협박을 동반한 무시무시한 것이었고, 나폴레옹과 같이 싸워본 원수들은 그의 명령에 따르지 않아 나오는 부정적인 결과를 홀로 책임진다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잘 알고 있었다. 결국 원수들은 융통성 있는 작전이 필요하거나 나폴레옹이 명백하게 실수한 상황에서도 바른 말을 하지 못했고, 그루시 또한 나폴레옹의 명령을 어겼을 때 어떤 책임을 질지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루시는 확실치도 않은 정보로 나폴레옹의 명령을 어기는 도박을 하느니 차라리 받은 명령을 충실히 수행하기로 마음먹은 것이고 이는 그루시가 열성적인 나폴레옹의 지지자라는 점과 시너지 효과를 내어 결국 그루시는 융통성 있는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일을 그르치고 말았던 것이다.

결국 워털루에서의 뻘짓으로 역사에서 그에게 남은 것은 "Où est Grouchy(그루시는 어디 있는 거야)!?" 뿐이었다. 그래도 그루시는 능력과 별개로 충성심만큼은 확고했기 때문에 휘하의 병력들을 안전하게 살려내 프랑스로 무사 귀환시켰다. 이렇게 그루시가 살려내 귀환시킨 휘하 병력 덕분에 나폴레옹은 기회가 한 번 더 주어졌겠거니 생각했지만, 제국 의회나 수많은 기회주의자들의 훼방, 그리고 자기 자신의 의욕 결여로 인해 포기하고 말았다. 설령 나폴레옹에게 진짜 기회가 한 번 더 주어졌더라도, 나폴레옹에 대항해 손잡은 온 유럽의 열강들을 정예병들이 고갈된 프랑스 혼자 이긴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심지어 워털루에서 이겼더라도 나폴레옹은 결국 패배했을 것이라는 게 역사가들 사이에서의 예측이다.

4. 관련 링크


[1] 국립국어원의 외래어 표기 용례상 로망스어권 인명의 전치사 및 관사는 뒤 요소와 붙여 적도록 하고 있다.[2] 후술하지만 워털루 전투의 패배로 나폴레옹의 파멸이 확정됐을 때도 배신은 커녕 도망조차 치지 않고 7~8만여 명의 생존병들을 수습해 프랑스로 귀환시키는 데 성공한 인물이다. 나폴레옹 몰락 당시 중용되던 원수들도 수없이 배신하거나 자리를 바꿨는데 그루시는 그러지 않았다는 점만으로도 충성심을 알 수 있을 것이다.[3] 귀족 출신인데도 혁명을 지지하고 나폴레옹에게 충성한 것 때문인데, 이와 비슷한 인물로 루이니콜라 다부가 있다.[4] 참모장인 술트가 전령을 딱 한 명만 보내는 실수를 했는데, 그 전령은 가다가 영국군의 포탄을 맞고 죽었다. 이에 나폴레옹은 "베르티에(전임 참모장)였다면 20명은 보냈을 거라고!"라고 울화통을 터뜨렸다고 한다. 당연히 중간에 사고로 죽든 적에게 붙잡히든 전령이 도망치든 할 가능성이 있으니 중요한 명령을 전달할 전령은 여러 명을 동시에 보내서 각자 따로 가는 게 기본이었는데 술트가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른 것이다.[5] 그러나 사실 와브르에 있던 프로이센 병력은 약 1만 7천 정도로, 그루시가 대포 숫자는 40문에 병력은 1만 6천이나 많았다. 그럼에도 피해는 둘 다 비슷비슷했고 프로이센군이 패배하고 이리 저리 도망치긴 했지만 전사자나 부상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 병력이 1만 6천이나 더 많았다면 아예 완벽히 쓸어버릴 수도 있을텐데 그렇지 못했다는 건 그루시가 역시 원수라는 직책을 수행하기엔 부족한 인물임을 잘 보여주는 사례.[6] 심지어 대육군의 동료들 중 일부는 그루시가 나폴레옹을 배신했다고 가정하기까지 했다. 물론 그루시는 무능으로 인해 나폴레옹에게 큰 피해를 끼치기는 했으나 배신한 적은 없으며, 하다못해 부르봉 일가 내부에서도 그는 나폴레옹에게 열성적으로 충성하고 배신한 적이 전혀 없는 명백한 반역자로 규정되었다. 애초에 배신했으면 오히려 돌아온 뒤에도 멸시가 문제가 아니라 보나파르트 일파에 의해 살해당하거나 숙청당하거나 했을 것이다.[7] 다만 이 사람 잘못한 게 아닌 건 맞다. 그런데 회고록에 자신의 잘못을 덮기 위해 주작한 내용들을 상당수 넣어서 문제가 되었다.[8] 란, 뮈라, 베르티에 등.[9] 마세나, 모르티에 등.[10] 예를 들어, 오스트리아 전쟁에서 전투가 벌어지기 전 란과 그의 휘하 원수들은 나폴레옹에게 퇴각을 요청했지만 나폴레옹은 결전을 준비시켰고, 결과는 아우스터리츠 전투의 대승이었다.[11] 실제로 나폴레옹뿐 아니라 수많은 군주들이 이런 이유로 부하들에게 책임을 물렸다. 조조와 양수계륵 일화를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동시기 서양에서도 비슷한 일화가 많다. 호엔린덴 전투에서 프란츠 2세의 18살짜리 동생 요한 대공이 무리한 공격으로 패배했지만 책임을 진 건 (보다 신중하게 움직이려고 했던) 부하 사령관 라우어 장군이었고,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도 연합 군대의 사령관인 쿠투조프는 자신들의 군과 프랑스 군의 격차를 알고 회전을 벌이지 않으려고 기를 썼으나 결국 혈기왕성한 젊은 황제 알렉산드르 1세의 강경한 전투 의지를 꺾지 못하여 반강제로 전투를 벌이고 대패하여 그 책임을 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