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26 22:33:51

장바티스트 주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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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대 주르당 백작, 장바티스트 주르당
Jean-Baptiste Jourdan, 1er Comte Jourdan
파일:Le_maréchal_Jourdan.jpg
<colbgcolor=#002654><colcolor=#ffd700> 출생 1762년 4월 29일
사망 1833년 11월 23일 (향년 71세)

1. 개요2. 생애

[clearfix]

1. 개요

프랑스 혁명 전쟁나폴레옹 전쟁 때의 프랑스군 장군이자 나폴레옹이 임명한 26인 원수 중 한 명. 초대 주르당 백작.

2. 생애

리모주에서 외과의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에는 리옹에서 비단 상인의 견습생으로서 일을 하기도 했다. 1776년에 주르당은 미국 독립전쟁을 지원하기 위해 출발한 프랑스군 연대에 입대했지만, 미국의 풍토가 맞지 않았는지 곧 제대해서 돌아왔고, 제대 후 1784년에 결혼, 리모주로 돌아와서 여러가지 장사일을 했다. 1789년에 프랑스 혁명이 터지자 자원해서 입대했고, 북부 방면군에서 부관격으로 종군했다. 주르당의 승진은 누구보다도 빨랐는데, 1793년에는 사단장이 되었고, 혼드쇼트 전투의 승리의 주역이었지만 숙청당한 우샤르 장군(Houchard)[1]을 대신해서 라자르 카르노의 추천을 받아 북부군 총사령관의 자리에 올랐다. 그 후 북부군을 이끌고 프랑스를 침공해온 오스트리아군을 1793년 10월 와티그니 전투에서 격파했다.

그런데 잘 해놓고도 의심을 받는 상황(...)[2]이 발생했고, 친구 베르트랑 바레르가 미리 경고를 해준 덕분에 주르당은 체포를 피해 고향 리모주로 돌아와 비단 장사를 하고 있었다.

다른 원수들처럼 그대로 끝나나 싶었는데 다시 복직하는 데 성공, 1794년에는 상브르-뫼즈 방면군의 총사령관으로 지목되었다. 상브르로 가는 통로를 열기위한 시도를 했지만 결국 실패했고, 게다가 이어진 전투에서도 그다지 성과가 나오지 않자, 주르당과 그의 부대는 의기소침해졌다. 그러나 카르노와 공안위원들이 마지막 시도라도 해보라고 닥달하자(...) 이번에는 통로를 열었을 뿐만 아니라 플로이루스 전투에서 승리했다.(1794년 6월 26일)

이 결과에 깊은 감명을 받았는지 혁명군은 라인 전역을 계획했고(1795년) 주르당은 라인강을 건너 반 혁명세력과의 전투를 계속했다. 1796년 모로의 바이에른 침공군의 좌익군을 맡아 지휘했다. 그 때 원정을 나가있던 프랑스군 지휘부에 "빈으로 진격하라"는 명령이 내려지게 되는데, 당시 주르당의 좌익군과 모로의 중앙군은 다뉴브 강 유역에 있었고, 나폴레옹이 이끄는 우익군은 이탈리아와 스티리아에 있었다. 전역이 전개되고, 주르당과 모로의 좌익군과 중앙군은 오스트리아의 국경에 거의 다다랐다. 그런데 오스트리아의 카를 루트비히 대공이 이끄는 오스트리아군이 좌익군과 중앙군을 썰었고, 이들은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카를 대공이 암베르크와 뷔르츠부르크에서 주르당을 격파하고 모로를 발라버린 것까지는 좋았는데 모로와 주르당을 추격하는 과정에서 각각 후위대에 번번히 막히게 되었다. 주르당의 상브르-뫼즈 방면군은 후퇴할 수 있었지만 이 과정에서 주르당은 자신의 부하 마르소를 잃는 등의 피해를 겪어야 했다. 이로 인해 진격전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 작전의 실패를 떠넘기기에 급급했던 공화국 정부에 의해 주르당은 해임되었고 그 후 약 2년간 군인으로서는 실직자의 생활을 해야 했다. 그러나 그 기간동안에 주르당은 정치적 두각을 드러내며 1798년에 공포된 징병제도를 창안하게 된다. 설계자인 주르당의 이름을 따서 "주르당 법"이라고 불리게 된 이 법률은 20~25세의 남성중에서 미혼 혹은 결혼을 했더라도 자녀가 없는 사람을 대상으로 매년 일정한 숫자를 징병하는 것을 기본골격으로 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방위산업체 노동자와 공무원 그리고 국가가 지정한 특정 전공의 대학생과 성직자들에게는 병역면제의 혜택을 부여하고 있다. 사실상 현대 국민국가들이 시행하고 있는 병역법의 원형으로 최초의 근대적 징병제로 평가된다.

그러다가 1799년에 전쟁이 재발하자 주르당은 라인 방면군의 사령관으로 다시 취임하게 된다. 하지만 또다시 카를 대공에게 처절하게 박살난 뒤 완전히 절망하여 그로 인해 건강을 해치게 되자(...) 앙드레 마세나에게 지휘권을 넘겨주었다. 주르당은 다시 정계로 돌아와 공무원으로 일하던 중, 1799년 11월 9일에 나폴레옹의 "브뤼메르 18일의 쿠데타"가 일어나자 반대파로서 두각을 드러냈다. 그러나 그로 인해 500인 의회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그러나 곧 주르당은 나폴레옹의 새로운 체제에 동화되었고, 1800년에는 보병과 기병 감찰관이 되었다. 그 후, 프랑스의 보호국인 치살피나 공화국에 프랑스의 대표로서 찾아가기도 했다.

1804년에 나폴레옹의 원수 명단에 들어갔고, 프랑스의 보호국인 신생 이탈리아 왕국에 1806년까지 남아 있었다. 그리고 나폴레옹이 형 조제프 보나파르트를 위해서 만들어준 나폴리 왕국에 군사 고문으로 따라갔다. 1808년에 조제프를 따라 이베리아 반도 전쟁에 참가했지만, 반도 전쟁 내내 다른 원수들은 나폴레옹에게 직접적으로 의존했고, 조제프와 주르당은 완전히 무시당했다.[3]

그러다 1813년에 비토리아에서 웰링턴 공작이 이끄는 영국-포르투갈 연합군에게 무참히 박살나면서 주르당은 무너져 가는 제국에 대해 더 이상 어떠한 행동도 취할 수 없게 되었다. 1814년 제1차 왕정복고 때 부르봉 왕가에 충성했지만 나폴레옹이 엘바 섬을 탈출해 백일천하가 일어나자 다시 나폴레옹에게 충성했고, 소규모의 군대를 이끌었다. 그러다가 워털루 전투에서 나폴레옹이 패배하자 다시 부르봉 왕가에게로 충성을 강요받게 되었다.

그러나 주르당은 그것을 거절하고, 조용히 살고 있었다. 그런데 동료 원수가 붙잡혀 재판을 받는다는 소식을 듣자 다부와 같이 법정에서 열심히 변호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부와는 달리 붙잡히지도 않고 경찰의 감시도 받지 않았다. 주르당은 1816년에 그르노블의 행정관으로 취임했고, 1819년에는 백작이 되었고, 귀족사회에서 인정을 받았다.

정치적으로 주르당은 왕당파와 현저한 대립을 해왔으며, 1830년에 일어난 7월 혁명을 지원해 주었다. 이후 주르당은 잠시 외교 업무를 맡았고, 앵발리드의 행정관이 되었다. 주르당은 거기서 말년을 보냈으며, 그곳에서 눈을 감았다.(향년 71세)

주르당이 저술한 책으로는 다뉴브 군의 작전(Opérations de l'armée du Danube) (1799)과 1796년의 원정에 대한 회고록(Mémoires pour servir a l'histoire sur la campagne de 1796) (1819), 그리고 기타 출판되지 않은 개인적인 수필들이 남아있다고 한다.


[1] 그 이유가 어처구니 없는데, 적을 추격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단두대에서 목이 잘렸다.(...)[2] 하필이면 공안위원회에 찍혔다. 주르당의 정치적 견해나 전쟁의 방향에 대해 걱정하는 일련의 발언들이 문제가 되었던 것.[3] 이에 조제프는 나폴레옹에게 편지를 보내 주구장창 장군들이 말을 안 듣는다며 징징댔지만 나폴레옹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평소에 잘 했으면 장군들이 그랬겠냐는 식이었다. 그래도 형이라고 지원군은 곧잘 보내주곤 했으나 러시아 원정을 시작하면서 지원군은 커녕 원래 있던 병력마저 빼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