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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대체역사 웹소설 총통님 미국 가신다!의 개변된 역사와 사건을 설명하는 문서다.2. 1부(1화 ~ 274화)
- 월 스트리트 폭탄 테러 사건 저지
원 역사에서 1920년 9월 16일에 일어난 폭탄 테러를 히틀러가 예고하고, 이를 들은 잭 모건이 미리 범인을 잡으면서 폭탄 테러가 터지지 않았다. 원 역사에서 범인은 끝내 잡히지 않았기에 누군지 밝혀지지 않았지만, 여기서는 범인이 이탈리아에서 온 무정부주의자였다는 설정.[1] 결과도 발표되지 않은 채 범인도 뒤에서 조용히 처리했다고 한다. 아마 모건이 주인공에게 그러려고 했듯이 공구리친 모양.
- 히틀러 컴퍼니 설립
히틀러가 주식을 통해 돈을 번 후 본격적으로 사업을 시작하면서 자신의 이름을 딴 회사, 히틀러 컴퍼니(일명 HC)를 세웠다. 그 뒤 미래지식을 통해 성공할 인물들을 대거 스카우트했다. 이렇게 끌어들인 이들을 지칭하는 이름은 히틀러 사단.[2] 그리고 코카콜라나 워너 브라더스 등의 주식을 쓸어담아 대주주가 된다.
- 에디슨 고등발명연구소 설립
히틀러에게 스카우트된 에디슨과 테슬라가 공식적으로 화해하면서 설립된다. 이후 3부 시점에서는 고령이었던 에디슨은 타계했고, 2대 연구소장은 테슬라가 하고 있는 중.
- 라디오 대중화
에디슨 고등발명연구소에서 FM 기술을 연구하고, 야구장 독점중계권을 얻어낸 히틀러가 술집, 음식점에 라디오를 뿌리고 뉴욕 FM 라디오 방송국 '테슬라 라디오'를 설립한다. RCA는 이를 견제하려고 했지만 루스벨트가 손을 쓴 탓에 견제하지 못하면서 원 역사보다 빠르게 라디오 산업이 발전하기 시작한다. 처음엔 야구 중계로 시작했지만 음악, 뉴스, 드라마, 재난 알림과 실종자 구조까지 라디오로 이뤄지면서 엄청나게 인기를 끌게 된다. 그리고 전국 각지에 있는 라디오 매니아들이 테슬라 라디오로 몰려들었고, 현대식 애프터 서비스를 지원하는 테슬라 스토어가 전국에 들어선다.
정치인들은 라디오를 주목하며 위험하다고 판단해 히틀러를 견제하려고 했지만, 되려 히틀러가 규제에 찬성하는 바람에 명분을 잃었고,[3] RCA는 히틀러와 타협해 파이를 나눠먹게 된다.[4] 이후 원 역사에서 최초로 세워진 상업 라디오 방송국, 웨스팅하우스의 KDKA 방송국이 경쟁에 뛰어들어 공화당 후보 인터뷰를 따내자 히틀러는 반대로 민주당 후보 인터뷰를 따내고, 더 나아가 대선 토론과 개표 방송까지 라디오를 통해 이뤄지면서 라디오의 중요성이 어마어마하게 커지게 된다.
- 보드게임 캐피탈리즘, 호! 개발
모노폴리의 원형이 된 게임인 지주 게임을 인수한 히틀러가 개발했다. 모노폴리처럼 J. P. 모건을 캐릭터로 내세웠다. 오락거리가 별로 없던 시대라 엄청난 인기를 끌었고 대회까지 열리게 되었고 나중엔 잭 모건이 캐피탈리즘을 하다가 게임에서 파산패한 사진이 대서특필되기도 했다.
- 히틀러의 자서전 출판
데일 카네기가 히틀러를 취재하면서 《내가 미국에서 보낸 2년, 어느 독일인의 투쟁.》이라는 이름으로 자서전이 출간되었다. 출간 직후 미국에서 엄청난 인기를 끈 것은 물론,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도 출간되며 백만 권 넘게 팔린다.
- 폰지사기 방지
히틀러가 찰스 폰지가 사기꾼이라고 폭로하면서 주정부 차원에서 조사가 이뤄지면서 폰지사기가 들통난다. 이후 주정부에서 폰지의 계좌를 동결해버리고, 폰지는 잠적하고 도망치다 붙잡혀 사기 피해자들에게 구타당해 사망했으며, 사기 피해자들은 비록 전부는 아니지만 히틀러의 폭로로 연방정부에서 폰지의 계좌를 빨리 동결해 폰지가 사기 금액을 들고 달아나지 못하게 되며 피해 금액을 상당수 돌려받을 수 있었다. 허스트가 조금 과장해서 쓴 기사에 따르면 거의 6천만 달러어치나 되는 피해를 막을 수 있었다고. 이 사건으로 히틀러는 명실상부한 영웅이 되면서 아메리카 이민자 연맹의 뉴욕 지부장이 된다. 덕분에 히틀러의 지지 세력 중에서도 폰지사기의 피해자들은 상당한 크기를 차지하며, 동시에 빚더미에서 자신들을 구해준 히틀러에게 열렬한 환호를 보내고 있다. 여러 분야에서 나비 효과를 일으킨 사건 중 하나로, 작중에서는 이 사건으로 프랭크 시나트라의 가족이 열렬한 히틀러 지지자가 됐다.
- 로켓맨 만화 출판
히틀러가 건즈백의 관심을 끌기 위해 시클그루버[5]라는 필명으로 스타워즈를 모티브로 한 로켓맨이라는 이름의 SF 만화 원고를 그려 보냈고, 이게 정식 출판되면서 미국은 물론 유럽에서도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미키 마우스 클럽처럼 로켓맨 클럽이 결성되고 어지간한 등장인물들은 다들 로켓맨을 볼 정도. 스토리는 지구를 통일한 제국을 무너트리고 세워진 민주주의 공화국[6]에 소속된 주인공 로켓맨과[7] 사이드킥인 말하는 고양이가 제국의 잔당 및 외계인들과 싸우는 내용으로, 제국의 경례 방식은 나치식 경례이며 그 외에도 스톰트루퍼, 라이트세이버, I Am Your Father 등이 등장한다. 그리고 이 만화로 인해 로켓 재판이 벌어지거나 무솔리니가 로마 진군에 실패하고 이탈리아에서 내전이 터지는 등의 나비 효과가 일어난다.
- 미키 마우스 클럽 조기 창설
미키 마우스 클럽이 원 역사보다 더 빠르게 창설되어 예상을 뛰어넘는 성공을 거둔다.
- 로켓 개발
고다드가 히틀러의 지원을 받아 로켓 개발을 지속하면서 마침내 뉴 프론티어 1호의 발사에 성공한다. 해당 로켓을 발사한 장소의 이름은 다름 아닌 에어리어 51. 일부러 기밀인 척하는 여론플레이를 통해 발사는 성황리에 진행되었고 이후 로켓맨 만화의 매출도 폭발적으로 늘었다.
- 소비에트-폴란드 전쟁
회귀한 트로츠키에 의해 원 역사와 반대로 붉은 군대가 차근차근 진격하여 폴란드를 압박하고 스탈린이 맡은 전선만 무리한 진격으로 폴란드군에게 격퇴당한다. 거기다 원 역사에서 무리하게 루마니아를 치다가 내분으로 5개월 만에 멸망한 헝가리 평의회 공화국도 멀쩡히 존속하고 있으며, 독일은 폴란드에 대한 감정도, 소련에 대한 감정도 좋지 않았기에 폴란드로 가는 연합군 물자를 방해할 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 하지만 후술할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이 일어나면서 독일 내에서 반공 정서가 퍼지자 태도를 바꿔 폴란드로 가는 연합군 물자를 통과시킨다. 덕분에 폴란드의 숨통이 트이며 전세가 교착된 상태로 종전된다. 다만 폴란드가 불리한 상태로 종전되었기에 발트 3국의 독립과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분할은 이뤄지지 않았으며, 오히려 폴란드의 동부 영토가 소련에 넘어갔다.
- 영화 희망의 승리 개봉
워너와 그리피스가 히틀러의 자서전을 영화화하여 공동으로 제작해 개봉했다. 미국과 독일, 오스트리아에서 엄청난 인기를 끌고 영국과 이탈리아에서도 관심을 보인다.
- 영화관에서의 팝콘과 콜라 제공
본래 영화관에서는 따로 음식을 팔지 않고, 바깥에서 사오는 간식이라고 해봐야 초코바나 사탕 정도였는데 마침 옥수수의 과잉 공급으로 옥수수 농부들이 힘든 점과 영화 희망의 승리가 인기를 끄는 점을 이용해, 히틀러가 한 달간 제휴 영화관에 오는 모든 관람객에게 팝콘과 콜라를 무료로 제공하겠다고 선언한다. 덕분에 농부들 사이에서도 히틀러의 영향력이 커졌으며, 팝콘과 콜라가 원 역사보다 더 빨리 영화관의 상징으로 자리잡게 된다. 옥수수의 운송은 잭 모건의 철도 회사에서 맡았다. 덤으로 옥수수 수요 증가를 위해 콘치즈도 개발했는데 히틀러콘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 에디슨과 테슬라의 노벨상 수상
원 역사와 달리 에디슨과 테슬라가 공동으로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하게 된다. 히틀러는 노벨상 시상식 참가를 위해 스웨덴으로 가기 전 먼저 영국에 들러 케인스와 만나 향후 찾아올 대공황에 대한 대비책을 세우고, 톨킨, 크리스티, 히치콕을 영입하였다. 이후 스웨덴에서 열린 시상식 당일, 히틀러 사단 멤버들은 히틀러 몰래 몰래카메라를 준비해 사진을 찍던 순간에 히틀러 콧수염을 달고 나왔다.
- 히틀러의 독일 방문과 H 클럽 창설
노벨상 시상식에서 슈트레제만과 만나 독일에 와달라는 부탁을 받자 히틀러는 마침 소비에트-폴란드 전쟁 문제도 해결할 겸 미국으로 돌아가기 전 독일에 들르기로 한다. 그리고 독일에 오자 격한 환영을 받고, 히틀러의 팬클럽인 H 클럽을 창설한 헤스를 만나게 된다.
-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히틀러가 슈트레제만과 함께 맥주홀에서 시간을 보내고 나오던 중 PTSD에 시달리는 반유대주의자이자 무정부주의자인 참전용사에게 암살당할 뻔한 사건이 터진다. 다행히 슈트레제만이 몸을 던져 막은 덕분에 히틀러는 별로 다치지 않았으나, 순간적으로 아이디어를 떠올린 히틀러가 꾀병을 부려 입원한 후 이 사건을 널리 소문냈고, 이번 사건이 마치 소련의 사주인 것처럼 선동하여 반공 정서를 퍼트려 독일이 폴란드로 가는 연합군 물자를 통과시키게 만든다. 그리고 미국에 이 사건이 알려지자 히틀러의 쾌유를 비는 행사가 전국적으로 열렸으며, 루스벨트는 아예 노스햄프턴급 중순양함을 보내[8] 그를 미국으로 데려온다.
- 자동차 브랜드 뉴프런티어 출범
히틀러가 포르셰를 영입하면서 보급형인 포드와 달리 좀 더 비싸고 고급스러운 자동차 브랜드 뉴프런티어를 출범하고, 뉴프런티어 911을 선보인다. 뉴프런티어의 로고는 다름 아닌 평화 기호. 포드는 당연히 이를 고깝게 보고 공격하면서 포드와의 질긴 악연이 시작된다.
- 페니실린 조기 발견
히틀러가 세운 호프눙 재단의 의뢰로 플레밍이 푸른곰팡이 연구를 하면서 원 역사보다 더 빨리 페니실린이 발견된다. 작중에서는 컴파운드H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리고 옥수수와 멜론, X선을 이용해 정제법을 연구하고, 옥수수 농장이 많고 테네시 주와 라이벌 관계인 켄터키 주에 첫 컴파운드H 공장이 세워진다. 그 뒤 히틀러의 총력전 선포로 개량 및 양산에 성공한다. 이렇게 조기 발견된 페니실린의 등장은 원래 죽었어야 했을 인물들이 죽지 않게 되는 방향으로 이끌기 시작했다.
- 국제교류협회 창설
히틀러의 제안으로 미국과 독일 간에 청년들이 오가며 교류하는 국제교류협회가 창설된다. 프랑스도 참가 제의를 받았지만 반독 감정이 남아있는 탓에 꺼려서 일단 미국과 독일 간에만 교류가 이뤄진다. 이를 통해 베르너 폰 브라운이나 레니 리펜슈탈 등이 미국에 오게 된다.
- 로켓 재판
디트로이트 컨벤션에서 시클그루버의 정체가 히틀러라는 사실이 공개된 것을 계기로 로켓맨이 더더욱 인기를 끌자, 근본주의자들이 득실대는 테네시 주에서 반-성경주의라는 이유로 로켓맨을 금지시키는 촌극이 벌어진다. 이에 테네시 주의 두 청년이 일부러 로켓맨을 읽다가 체포되어 재판을 받자는 발상을 하면서 일명 로켓 재판, 혹은 시클그루버 재판이 벌어진다. 그리고 히틀러가 증인 출석 요구를 받자 조셉을 통해 재판관(판사)에게 뇌물을 먹여두고, 테네시 주의 라이벌인 켄터키 주에 컴파운드H 공장 건설 계획을 유치하고[9] 루스벨트에게 연설을 배운 뒤 증인으로 선 당일, 증언을 아예 연설로 하여 과학계와 종교계 어느 한쪽 편을 드는 대신 오히려 이런 재판을 통해 보여지는 성숙한 미국의 민주주의를 찬양하며 그 둘을 하나로 합쳐서 칭찬하고, 화룡점정으로 자신이 도이치인인 동시에 미국인이라서 자랑스럽다고 선언하여 어마어마한 박수를 받는다.[10] 그리고 해당 재판이 라디오로 생중계되면서 히틀러의 이미지는 끝을 모르고 치솟았다. 한편 재판 자체는 유죄판결로 끝난 대신 주정부에서 무죄방면했고 해당 로켓맨 금지법도 얼마 안 가 폐기되었다.
- 피플 매거진 창설
히틀러와 허스트가 공동으로 유명인사들의 칼럼을 다루는 잡지, 피플 매거진을 창설한다.
- 히틀러의 켄터키 대령 직위 수여
켄터키 주에 첫 컴파운드H 공장을 세운 히틀러에게 켄터키 대령 직위가 수여된다.[11] 이를 전해들은 히틀러는 상병에서 대령이면 몇 계급 특진인지 잠깐 세어 보았고, 하얀 양복을 입고 치킨을 튀겨야 하는 거 아니냐고 자조한다.
- 투나잇 토크쇼
RCA가 무성영화 배우들을 초청하는 것과 반대로 테슬라 라디오에서 데일 카네기를 사회자로 내세워 유명인사들을 초청하는 라디오 토크쇼를 시작한다. 이들 중 이름이 공개되지 않은 한 명이 있었는데, 다름 아닌 미국 부통령 캘빈 쿨리지. 문제는 쿨리지가 워낙 과묵하고 딱딱한 성격이라 같이 등장한 히틀러와 채플린이 어떻게 토크쇼를 진행해야 할지 고민하는데, 쿨리지는 놀랍게도 둘이 투닥거리는 모습을 보고 웃는다. 이에 둘이 콤비로 만담을 선보여 쿨리지를 웃기며 토크쇼는 대히트를 친다.
- 라팔로 조약 체결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이 끝나고 히틀러의 귀띔을 받은 슈트레제만이 러시아와 조약을 체결한다. 이를 통해 힘러가 우크라이나 지역에 농장 관리인으로 파견된다.[12]
- 하딩 정권의 부패 스캔들 폭로
원 역사에서는 하딩이 죽고 나서야 폭로되었지만, 여기서는 히틀러와 루스벨트에 의해 하딩이 살아있을 때 폭로되었다. 처음에는 어마어마한 부패에 불륜, 사생아까지 있다는 말이 너무 황당해서 반신반의하던 사람들도 폭로 내용 대부분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고 하딩에게서 등을 돌려 지지율이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이목을 분산시키려고 IRS가 히틀러 컴퍼니에 대한 세무조사를 진행했지만 너무 깨끗해서 오히려 대비만 되었다.[13] 결국 하딩에 대한 탄핵 소추안이 하원에서 통과되자 충격받은 하딩은 그대로 쓰러진 뒤 그나마 탄핵당하는 것만은 막으려는 아내에 의해 수면제 과다 투입으로 사망하고 부통령 쿨리지가 대통령직을 승계한다.
- KKK의 위축
히틀러를 고깝게 여긴 KKK가 히틀러를 공격하자 히틀러는 원 역사에서 슈퍼맨을 이용해 KKK를 비웃음거리로 만들었던 방법을 이용한다. 디즈니 애니메이션에 최대한 귀여운 이미지로 KKK를 연상시키는 캐릭터, 꼬마유령 쿠스퍼를 등장시키는 것. 그리고 KKK의 행진 날짜에 맞춰 미키 마우스 클럽과 로켓맨 클럽 회원들이 먼저 행진을 하면서 KKK는 만화 캐릭터 취급을 받으며 비웃음거리로 전락한다.
이에 몇몇 단원들이 분위기를 반전시키려고 인기를 끌고 있는 흑인 뮤지션 루이 암스트롱을 습격했지만 실패하고 대중의 시선은 더 차가워졌고, 그 와중에 단원 한 명이 엉덩이에 총을 맞고 그 단원의 어머니가 히틀러에게 편지를 보내자 히틀러는 그 단원에게 컴파운드H를 투여해 살려주고 개과천선하게 만드는 모습을 보여주며 컴파운드H에 대한 신뢰성 상승과 KKK에 대한 여론 악화, 히틀러 본인의 이미지 상승을 동시에 이뤄낸다.
- 컨테이너의 등장
모건 3세가 해운업을 성장시킬 방법을 고민하던 중 히틀러가 컨테이너를 제안하면서 원 역사보다 20~30년 더 빨리 등장한다. 그런데 컨테이너선 실험을 위해 IMM에서 유조선을 인수하면서 마치 JP모건이 석유업에 뛰어드는 것처럼 보이게 되었고, 이대로면 기존의 석유 회사들의 견제가 들어올 것이 뻔한지라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던 히틀러는 기발한 생각을 떠올린다.
- 새 유전들의 발견
컨테이너 사업을 위해 눈속임을 하고자 히틀러가 심령술사, 점성술사, 마술사, 1세대 탐험가들을 고용하고 심지어 다우징 로드까지 동원해 석유 탐사에 나서서 실제로 유전을 여러 개 찾아낸 뒤,[14] 직접 채굴하는 대신 컴파운드H 양산을 위해 매각하겠다고 발표한다. 하지만 이 유전들의 실체는 석유가 나오긴 하지만 대부분 셰일 가스로 하나같이 채산성이 떨어지는 곳들. 미국 내 셰일 가스의 매장량은 천문학적이지만, 그 셰일 가스를 제대로 활용하는 셰일 혁명이 일어나기까지는 백 년 가까이 이른 상황. 그리고 로열더치쉘이 인수를 제안하자 정부는 영국 회사인 로열더치쉘의 인수를 허락해야 하는지 고심하다 미국 회사인 스탠더드와 히틀러의 협상을 유도하는 선에서 끝내기로 했지만, 이 소식을 들은 전국의 히틀러 팬들이 백악관, 히틀러 컴퍼니, 뉴저지 스탠더드에 단체로 편지를 보내면서 업무가 마비될 지경이 된다.
결국 스탠더드는 로열더치쉘보다 많은 1600만 달러에, 추후 발견되는 원유는 배럴당 45센트에 유전을 인수하고 대신 히틀러가 새로운 유전을 찾으면 스탠더드가 10년간 계약 우선협상권을 갖기로 한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히틀러가 꿈에서 조지 워싱턴을 만났다고 하면서 동부 텍사스에서 채산성 높은 초대형 유전을 발견하고, 이를 그냥 대중에 공개해버리면서 스탠더드는 물을 먹게 된다. 이때 히틀러가 받은 편지들은 그대로 빅데이터로 사용된다.
- 질병에 대한 전면전 선포
제시 모건이 폐렴으로 쓰러지면서 히틀러가 질병에 대한 전면전, 총력전을 선포하자 전 세계 의학계에서 연구에 힘을 쓴 끝에 컴파운드H 개량에 성공한다. 원 역사에서는 이 폐렴으로 제시 모건이 사망해서 아내를 아끼던 잭 모건이 그 충격으로 칩거를 하게 되었고,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는 첫째 아들을 잃었으며, 프랭클린 D. 루스벨트는 소아마비가 악화되어 휠체어 신세를 졌던 것을 생각하면 무수히 많은 인물들에게 영향을 끼친 발견이 되었다.
- 이탈리아 내전
무솔리니가 로켓맨 만화를 따라했다는 오명을 쓰고 비웃음거리가 되면서 로마 진군으로 권력을 잡지 못하고, 대신 남부에서 세를 불린다. 한편 북부에서는 레닌의 수작으로 노동자들이 대규모 파업을 일으킨다. 그리고 국왕은 계엄령을 선포하면서 이탈리아는 삼국지마냥 정부군, 파시스트, 사회주의자 셋으로 나눠진 형국이 된다. 그리고 북부 노동자들의 파업 진압 과정에서 총격전이 일어나 그대로 사회주의 혁명군이 결성되어 내전이 터지고 만다.
영국과 미국은 사회주의의 확산을 막기 위해 컨테이너선을 통해 구호물품을 보내고, 사회주의 의용군은 이탈리아 북부로 향해 혁명군에 합류하고, 무솔리니는 파시스트들을 이끌고 정부군에 합류해 내전을 사회주의자들의 책임으로 몰아 이미지를 세탁한다. 그리고 허스트 직원들이 파견되어 내전 장면을 유성영화 카메라로 촬영한 뒤 영화관에서 뉴스로 상영하면서 미국에 이탈리아의 상황이 대대적으로 알려진다. 덕분에 기부 행렬이 꼬리를 물었으며, 교황까지도 모든 미디어 매체를 총동원해 이탈리아와 오스트리아의 상황을 알리기로 한다. 그 뒤 정부와 파시스트 연합군이 볼로냐에서 대패하고 혁명군이 로마로 가는 길이 뚫리자 전 세계에서 로마와 교회를 지켜야 한다는 소리가 나온다. 그리고 비행선을 통해 교황의 연설이 생방송되며 혁명군에 대한 여론은 더더욱 안 좋아지고, 비행선을 습격한 혁명군 대부분이 격추당해 죽고 일부가 포로로 잡힌다.
결국 이 사건으로 인해 전세가 뒤집히고, 소련이 지원을 끊어버리며 혁명군이 백기를 들 가능성이 커진다. 하지만 소련이 너무 갑작스럽게 지원을 끊어서 혁명군이 순식간에 무너지고 정부군과 파시스트가 학살을 할 가능성이 커지자 내전의 결과는 바꾸지 않으면서 학살을 막기 위해 히틀러가 직접 로마를 방문한다. 그리고 무솔리니가 MI5의 지원을 받아 영국 스파이로 활동한 기록을 약점으로 잡아 섣불리 행동하지 못하게 만들고, 직접 혁명군과의 항복 협상에 나선다. 그리고 혁명군 측은 이를 받아들인다.
그 뒤 국제연맹과 파리에 모인 예술가들까지 동참해 이탈리아의 상황을 전 세계에 알렸고, 전쟁고아들을 고아원이나 미국, 유럽의 가정으로 입양 보냈으며, 진성 공산주의자 난민은 이탈리아 정부와 파시스트 둘 다 수용을 거부하면서 별수 없이 소련이 이들을 수용한다.
- 히틀러-모건랜드 건설
히틀러와 아멜리아가 결혼하게 되면서 아예 결혼식을 위해 전용 축제장을 만들고 결혼식이 끝나면 놀이공원으로 운영하기로 한다. 물론 이목을 끌기 위한 목적도 있었지만 이 정도로 큰 축제장을 만들려면 당연히 노동자가 많이 필요하기에 컨테이너 도입 후 실직하게 될 부두 노동자들을 흡수하겠다는 목적도 있었다. 원래 히틀러는 디즈니랜드라는 이름을 붙이려고 했으나 히틀러의 결혼식을 위한 축제장인 데다 히틀러의 인기가 더 높다는 이유로 디즈니가 거부해서 대신 히틀러-모건랜드라는 이름을 붙였다. 건설된 곳은 뉴올리언스.
- 컨테이너의 본격적인 도입과 IWW의 파업
컨테이너가 본격적으로 도입되면서 세계산업노동자연맹(IWW)은 이를 수많은 부두 노동자들의 일자리를 빼앗는 행위라고 비난하며 파업을 벌인다. 히틀러가 노동자들의 정규직 전환, 부두 노동자들에 대한 히틀러-모건랜드 직원 채용 혜택, 2년간 취업 지원금 지원 등의 21세기 기준으로도 관대한 조건을 제시했지만 IWW는 파업을 끝내는 조건으로 20년(...) 연금 제공과 부두 노동자들의 다른 히틀러 컴퍼니 계열사 채용 혜택 제공 등의 터무니없는 조건을 내세우며 루스벨트의 중재안도 무시하는데, 사실 이들은 소련의 지령을 받고 있으며, 노동자들을 지원하는 게 아니라 파업을 통해 이탈리아 정부군을 지원하는 컨테이너선을 멈추는 것이 진짜 목적이기 때문.
갈수록 쿨리지 행정부와 IWW의 충돌이 격해질 때쯤 히틀러가 IWW와 협상하겠다고 선언해 충돌을 막고, 협상 과정을 라디오와 유성영화 카메라로 생중계하기로 한다. 사실 히틀러 역시 IWW의 요구를 들어줄 생각은 없었고 IWW가 터무니없는 조건을 내세우는 점을 부각시켜 여론을 악화시키는 것이 진짜 목적이기 때문. 그리고 히틀러의 의도대로 지지부진한 토론이 이어지는 것에 더해 히틀러와 IWW 측에서 내세운 조건 역시 알려지면서 IWW에 대한 여론은 악화되고, 이탈리아 내전 상황이 전해지면서 상대적으로 IWW에 대한 관심이 식어버린다. 결정적으로 IWW 내 과격파가 협상 도중 폭주해 부두에서 폭동을 일으키는 장면이 촬영되어 전국에 퍼지면서 IWW에 대한 인식은 그야말로 시궁창에 처박힌 끝에 결국 IWW는 분열되고 파업은 흐지부지된다. 그리고 이 모습에 실망한 헬렌 켈러는 IWW를 떠난다.
그러나 미국과 영국을 제외한 다른 국가들은 컨테이너 도입에 미적지근한 반응이었고, 이에 히틀러는 이탈리아 내전 당시 컨테이너를 활용한 자료를 공개하여 컨테이너의 가치를 증명하며 사실상의 공개입찰을 진행한다. 여기에 슘페터의 서적에서도 컨테이너가 소개되며 점차 컨테이너에 대한 주목도가 높아진다. 그리고 미국과 영국이 서로 컨테이너를 먼저 확보하려고 하자, 히틀러는 양국이 합동 위원회를 구성해 각자 공급받을 컨테이너와 크레인의 비율을 조정하자고 제안한다. 이후 미국, 영국, 이탈리아, 독일, 스페인, 일본 등이 협상을 통해 컨테이너를 공급받았지만, 프랑스는 악감정 때문에 컨테이너를 도입하지 않는다. 다만 일본은 협상에 참가했음에도 공급받은 컨테이너가 현저히 적어 국제 청소년 교류 위원회 설립 반대로 보복을 시도한다.
- 히틀러와 아멜리아의 결혼
뉴올리언스에 히틀러-모건랜드 건설이 완료되면서 마침내 둘의 결혼식이 이뤄진다. 결혼식은 대규모 축제 형식으로 이뤄져 미국 전역에서 이를 구경하러 사람들이 몰려들었으며, 디즈니가 결혼식을 기념해 만든 애니메이션 환타지아를 상영하고 이에 걸맞은 음료수로 환타를 개발해 선보였다. 웨딩드레스는 샤넬이 직접 디자인했고, 리펜슈탈은 퍼레이드를 기획했으며, 그리피스는 결혼식 과정을 촬영해 다큐멘터리로 제작했고 해당 영상은 전국의 영화관에서 상영되었다. 그리고 다큐멘터리를 본 사람들의 히틀러-모건랜드에 대한 기대감도 높아진다.
-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혼란
히틀러의 명성이 높아지며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도 히틀러에 대한 지지 여론이 높아졌지만, 반대로 배후중상설을 믿으며 반유대주의로 똘똘 뭉친 자유군단 같은 극우 세력도 세를 불리기 시작한다. 이들은 컴파운드H가 사람들의 정신을 조종하기 위한 유대인들의 음모라고 주장하고, 공화주의, 민주주의를 반대하며, PTSD 치료를 위해 지어지는 제대군인 병원 건설을 막는 등의 모습을 보이고, 이에 맞서 H 클럽과 툴레 협회, 로켓맨과 던전&워리어의 팬인 젊은이들은 히틀러와 공화국을 찬양하며 충돌이 격해진다. 히틀러는 이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아멜리아의 제안으로 원래 하와이로 가려던 신혼여행을 독일과 오스트리아로 가기로 한다.
- 히틀러의 두 번째 독일 방문
히틀러가 두 번째로 독일을 방문하자 로켓맨 팬들이 공화국군과 제국군 코스프레를 하고 나올 정도로 격한 환영을 받는다. 이때 양쪽에서 광선검을 내밀자 히틀러가 한쪽을 선택하면 제국이나 공화국을 선택했다는 소리가 퍼질 것 같아 두 광선검을 양손에 동시에 든다. 하지만 후겐베르크 등의 반유대주의자와 일부 사회주의 세력은 히틀러를 고깝게 보고 신문을 통해 공격한다. 이에 히틀러는 먼저 괴벨스를 스카우트하고, 레마르크에게 소설 공동 집필을 제안하고, 샤흐트를 만나서 마르크를 빌리며 향후 찾아올 독일의 인플레이션에 대비한다.
- 서부 전선 이상 없다 출간
히틀러가 레마르크에게 소설 공동 집필을 제안하고 스토리 플롯을 건네주면서 원 역사보다 빠르게 서부 전선 이상 없다가 출간된다. 먼저 후겐베르크 계열이 아닌 소규모 영세 신문사에서 연재했는데, 히틀러의 이름값 덕분에 신문 판매량은 높았지만 사람들이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이고, 후겐베르크와 일부 보수 인사들, 융커들은 이때다 싶어 마구마구 공격을 퍼붓는다.
하지만 사실 대전쟁을 겪었던 사람들은 대놓고 열광하는 대신 차가운 분노만을 느끼고 있었기에 미적지근한 것처럼 보인 것이었고, 오히려 스트라이샌드 효과로 서부 전선 이상 없다에 대한 관심은 더욱 높아지고 연재되는 신문 판매량은 상승, 후겐베르크의 신문 판매량은 하락한다. 거기다 미국을 비롯한 외국에서도 관심을 보인다. 덕분에 독일의 여론도 바뀌어 제대군인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나오던 제대군인 한 명이 자유군단에게 습격을 당하자, 자유군단이 인파에게 돌팔매질을 당하는 일이 일어난다. 거기다 H 클럽 회원들은 자진해서 병원과 컴파운드H 공장의 경비를 선다.
- 히틀러의 오스트리아 방문
오스트리아는 인플레이션에 식량난으로 독일 이상으로 혼란에 휩싸여 시민들은 매일같이 시위를 벌이고 있으며, 심지어 소련은 오스트리아를 거쳐 이탈리아 내전에 개입하고 있는데, 오스트리아 정부는 이를 제대로 단속하지도 못하는 상황. 이에 슈트레제만과 에케너의 제안으로 히틀러가 오스트리아로 갈 때 제국의회 대표진과 함께 체펠린 비행선을 타고 가기로 한다. 히틀러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도이치인인 만큼 양국의 화합에 딱 맞는 인물이기 때문. 이에 히틀러는 비행선을 통해 글을 홍보하고, 혹시나 찾아올지도 모르는 비행선 사고에 대비해 비행선에 헬륨을 사용하는 조건으로 승낙한다.
오스트리아 정부는 히틀러의 투자를 받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최소한 시민들의 불만이라도 잠재우기 위해 히틀러에게 로켓맨에 등장하는 다크 로드 복장을 입고 와달라고 하고, 히틀러가 오스트리아에 방문하자 시민들은 처음으로 시위가 아닌 환영식에 모여들고, 크로네의 가치가 잠시나마 안정되는 기적이 일어나며 히틀러에게 신용을 창조하는 사나이라는 별명이 붙는다. 이때 히틀러의 가족들과도 만난다.
- 오스트리아의 인플레이션 해결
히틀러의 인기와 크로네의 가치가 잠시나마 안정된 점까지 더해져 시민들이 "아돌프 히틀러를 재무장관으로!"라고 외치고 다니자 총리마저 진짜로 재무장관 직을 맡을 의사가 있는지 묻는다. 물론 히틀러는 거절했고 그 결과 크로네의 가치가 다시 급락했으며, 사회주의 세력이 준동하기 시작하고, 영국, 프랑스를 비롯한 국제연맹 금융위원회도 지원을 할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히틀러가 "형제들은 서로를 도울 의무가 있다"며 이런 상황이 계속되면 안슐루스가 일어날 수 있다는 떡밥을 던지고, 슈트레제만도 여기에 동참하자 국제연맹 금융위원회도 움직일 수밖에 없게 된다. 거기에 오스트리아의 상황을 신문, 영상, 라디오 등으로 알려 지원을 받아내기로 한다. 마침 이탈리아 내전으로 바티칸도 위험해지자 교황까지도 모든 미디어 매체를 총동원해 이탈리아와 오스트리아의 상황을 알리기로 한다.
결국 국제연맹 금융위원회는 자금 지원을 결정했고,[15] 크로네의 가치가 다시 안정되었으며, 다시 재무장관에 임명된 슘페터가 계속해서 케인스, 샤흐트와 논의하며 재정 정책을 이끌어 인플레이션을 해결해나간다. 거기다 한때 싸웠던 폴란드까지 오스트리아를 지원하며 식량 가격도 안정된다.
- 공화국 기사단 창설
히틀러가 바이마르 공화국의 유지를 위해 자유군단 같은 극우 세력과 융커들에게 공식적으로 맞설 조직을 창설할 생각을 한다. 실제 히틀러와 나치 독일이 상징에 집착했고, 나치의 만행에도 불구하고 친위대 군복 같은 게 현대까지도 인기를 끌었다는 점을 이용해 역으로 공화국 기사단의 군복을 그걸로 차용하기로 한다. 물론 색깔은 남색으로 바꾸고 흑적금 국기 패치를 다는 등 개조는 거쳤다. 첫 단원들은 H 클럽 회원들 중 자원자로 뽑았다. 공화국 기사단은 이후 독일만이 아니라 미국, 영국, 프랑스, 튀르키예 등 타국에서도 지부가 창설되어 가입하는 사람들이 늘었으며, 개중 일부는 공화국 기사단 복장을 입고 메이시스 추수감사절 퍼레이드에 참가하기도 했다.
- 교황의 연설 생방송
모든 미디어 매체를 총동원해 이탈리아와 오스트리아의 상황을 알려 지원을 받아내는데 성공했지만, 분위기를 확고하게 할 만한 대형 이벤트가 필요했기에 교황의 연설을 라디오를 통해 생방송으로 내보낸다는 아이디어를 떠올린다. 테슬라는 바다에 배를 띄워 중계국으로 활용하면 라디오 전파를 보낼 수 있지만, 이탈리아-오스트리아 국경 지대를 비롯해 네덜란드, 독일, 유럽 중부에는 라디오 방송국이 없어 전파를 보낼 수 없고 새로 지으려면 반년은 걸린다고 지적한다. 이에 히틀러는 비행선을 중계국으로 활용하는 아이디어를 떠올린다.
하지만 프로젝트에 워낙 많은 인원이 투입되어 정보가 새나갔고, 이탈리아 혁명군이 비행선을 직접 공격할 수도 있어 호위 전투기를 투입해야 하는데 독일과 오스트리아는 전투기 보유가 금지된 상황. 히틀러는 전투기 자체는 민간 비행기에 기관총을 달아서 만들기로 하고, 통제위원회의 허락을 받기 위해 시민들을 공략하기로 한다. 프로젝트를 대대적으로 공개해서 이번 프로젝트가 신앙을 수호하기 위한 십자군인 것처럼 홍보하고, 전 유럽에서 파일럿 지원자들을 받았다.
프랑스 정부는 이를 극렬하게 반대하고, 프랑스인이 호위대에 지원하는 것도 금지한다. 이로 인해 가톨릭 지지층이 흔들리는 와중에도 고집을 꺾지 않지만, 히틀러가 보란 듯이 프랑스인 파일럿들을 제외시켜 버리고 폴란드군 소속 파견군을 지원받아 생제르맹 조약을 우회하며 호위대를 꾸리자 결국 프랑스 정부는 자국민의 호위대 참가 금지를 철회하며 사실상 백기를 든다.
그리고 마침내 연설 당일, 이탈리아 혁명군이 비행선을 습격하는 일이 일어나지만 1차대전의 베테랑 에이스 조종사들로 구성된 호위대의 분투로 우세한 교환비를 내며 비행선을 지켜냈고, 교황의 연설은 무사히 라디오로 생중계되었다.[16] 덕분에 독일 내에서는 국뽕 분위기가 치솟았고, 독일의 각 주에서 히틀러의 방문을 요청하는 전화가 빗발친다. 한편 비행선을 습격한 혁명군 대부분은 격추당해 죽었지만 일부가 포로로 잡혔으나 혁명군 측에서는 히틀러 측의 자작극으로 우기면서 오리발을 내민다. 이후 해당 비행선 습격 사건 당시의 영상은 뉴스 릴과 다큐멘터리 영화로 제작된다.
- 리히터 암살 시도와 자유군단의 위축
오스카 디를레방어가 자신을 따르는 자유군단 멤버들과 함께 히틀러를 유대인의 꼭두각시로 여기고 리히터를 암살하려 한다. 자유군단은 지부마다 통일된 조직이 아니라서 과격파 몇 명이 계획한 일이기에 자유군단 측에서 순순히 디를레방어를 넘기면 되겠지만, 자유군단 측에서는 계속 발뺌하는 상황. 히틀러는 이 사건을 계기로 이 참에 자유군단을 뿌리 뽑을 생각을 한다. 지금 독일의 모든 주 총리가 자신을 원하는 상황을 이용해 모든 방문 약속을 취소하고 허겁지겁 미국으로 돌아가려는 모습을 보인 뒤, 언론에 히틀러를 향한 암살 계획이 있다는 정보를 흘려 현지 경찰의 협조를 받아 독일 전역에서 자유군단이 벌인 범죄행각을 드러내는 것. 그렇게 되면 자유군단은 물론 그 뒤를 봐주는 융커 군부들도 가만히 있을 수 없게 된다.
히틀러의 계획은 성공해 자유군단을 향한 여론은 급격히 나빠지고 단원들은 줄줄이 탈퇴한다. 이에 젝트가 히틀러와 독대하여 이번 사건은 군부와 무관하다고 말하면서도 범죄자를 잡는 건 경찰의 일이라며 선을 긋는다. 물론 실상은 자유군단이 공격받게 내버려두면 유사시 예비병력이 줄어들고 우익 세력도 타격을 받아 독일의 재무장 가능성도 물건너갈 게 뻔한데, 그렇다고 자유군단을 지키면 군부의 중립성이라는 환상이 깨지니 이도 저도 아닌 입장을 취하는 것. 하지만 히틀러가 무조건 디를레방어와 다른 가담자들의 목을 가져오라며 선을 그어버리자 젝트는 더 이상 고집 부리길 포기한다. 그리고 히틀러는 취소했던 일정을 다시 재개한다. 이후 디를레방어는 도피 중 지인의 집에 들렀다가 그의 현상금을 노린 지인이 대접한 청산가리를 탄 수프를 먹고 사망한다.
- 히틀러의 그리스도 최고 기사단 훈장 수여와 로마 교회의 재정운용
교황의 연설을 생방송으로 내보낸 공로로 히틀러에게 그리스도 최고 기사단 훈장이 수여된다. 아무리 큰 공을 세웠어도 이런 훈장은 몇 년은 걸려야 받을 수 있고, 훈장 자체도 너무 격이 높아서 당장 수여할 만한 수준은 아니었는데, 사실 이는 일종의 뇌물이었다. 히틀러 컴퍼니와 모건 하우스에 로마 교회의 재정운용을 맡기기 위한 것.[17] 그렇게 되면 히틀러를 로마 교회의 편으로 끌어들이는 것은 물론, 상상을 초월하는 돈을 긁어모아 공산주의의 위협으로부터 로마 교회를 지킬 수 있기 때문이다.
- 자동차 브랜드 리퍼블릭 출범
히틀러가 유럽에도 자동차를 보급하기 위해 새로운 브랜드 리퍼블릭을 출범한다. 유럽에 고급 브랜드인 뉴프런티어를 출시해봐야 안 팔릴 게 뻔하니 포드처럼 보급형 자동차를 만들어 팔기로 한 것. 히틀러는 처음엔 폭스바겐이라는 이름을 생각했으나 폭스바겐을 번역하면 '국민차'라 너무 심심한 이름이라며 리퍼블릭이라고 지었다. 여기에는 공화국이라는 이름을 브랜드로 사용해서 일반 대중도 공화국에 친숙한 감정을 느끼게 만들기 위한 숨겨진 목적도 있었다. 리퍼블릭에서 출시한 차는 다름 아닌 리퍼블릭 비틀. 사전예약 방식도 독특하게 전용 예금계좌를 개설해 매주 돈을 채워넣고 기간이 되면 차를 인도받거나, 은행 대출을 받아 차를 사는 할부 형식으로 구매할 수 있었다.
- 메이시스 추수감사절 퍼레이드
미국에서 히틀러에 대한 지지가 높아졌다지만 여전히 독일을 향한 시선은 좋지 않은 상황. 마침 슈트레제만이 원 역사보다 더 빠르게 바이마르 공화국 총리로 임명되자, 히틀러가 곧이어 찾아올 루르 점령에 대비하고 도스 안을 앞당기기 위해 독일에 대한 여론을 돌릴 방안을 고민하다 비행선을 미국과 독일의 우호의 상징으로 내세우기로 한다. 체펠린 비행선은 미국의 발주로 독일에서 만들어져 미국으로 건너온 물건인 데다 교황의 연설 건으로 비행선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기에 딱 좋은 선택지였다. 이를 위해 1924년부터 메이시즈백화점 일대에서 열리던 메이시스 추수감사절 퍼레이드를 앞당겨 열기로 한다. 비행선은 물론 미키 마우스, 꼬마유령 쿠스퍼 등 인기 많은 캐릭터들의 풍선을 만들어 퍼레이드를 여는 것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모으기로 한 것. 루스벨트가 뉴욕 주지사로 재임 중이었기에 매우 쉽게 허가를 받아낼 수 있었고, 루스벨트는 더 나아가 퍼레이드 날 진짜 비행선을 깜짝 등장시키자는 아이디어를 낸다.
한편 포드 모터스 쪽에서는 이를 의식해 자기들도 추수감사절 퍼레이드를 열기로 하고, 기부 재단 규모도 세 배 이상 늘리겠다고 발표한다. 히틀러는 기부가 늘면 좋은 일이라며 무대응하기로 했지만 공화국 기사단에서 포드에 맞서서 자체 기부 캠페인을 시작했고, 로켓맨과 뉴프런티어 팬들, 컴파운드H로 목숨을 구한 환자와 가족들, 텍사스의 초대형 유전으로 부를 움켜쥔 중소업체들, 콘벨트의 농부들, 가톨릭 교회 등등도 잇따라 기부 행렬에 동참했다.
그리고 당일 퍼레이드는 성공적으로 이루어진다.
- 배상금 협상과 루르 점령 저지 및 히틀러 플랜
프랑스의 푸앵카레 대통령이 루르 점령 계획을 준비하고 있었으나 대충 봐도 프랑스가 독일을 선제침공하는 모습이라 역풍을 우려한 벨기에가 발을 빼려 하는 것과 독일이 배상금 내길 거부하는 것, 교황의 비행선 연설 때 프랑스의 비협조적인 태도 때문에 호위대가 위험에 처했다는 여론이 커져 불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히틀러의 방법을 따라하기로 한다. 독일 경제가 살아나기 시작하며 소비가 활성화된 점을 이용해 독일인들이 돈을 쓰는 모습을 영화관에서 뉴스로 보여주기로 한 것. 이를 통해 독일의 경제는 견고하며 배상금을 못 내겠다는 독일의 요구는 부당하다고 설파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독일 마르크의 가치는 계속 하락하고 있으며, 독일인들은 인플레이션이 심해지자 돈의 가치가 더 떨어지기 전에 사재기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프랑스인들도 독일에 와서 물건을 싹쓸이해가며 돈의 가치는 떨어지고 물가는 치솟고 있다. 하지만 푸앵카레는 고의적으로 이 사실을 알리지 않고 독일이 잘 사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이에 히틀러가 언론왕 허스트를 움직여 프랑스가 제2차 세계 대전을 일으키려고 루르 점령을 준비하고 있다고 선동하자 이걸 부정할 수도, 인정할 수도 없던 푸앵카레는 미국 대사를 불러 적당히 항의했으나 그 정도로 멈출 생각이 없던 히틀러와 허스트는 더더욱 선동을 이어갔고, 또 끔찍한 전쟁이 일어날 수 있다는 분위기에 전쟁의 잔흔이 남아 있던 미국인들도 동요한다. 이 때문에 배상금에 관한 협상 자리에 미국과 영국에서도 대표단을 보내야 한다는 여론이 커진다. 이 상황에서 히틀러가 대표단 합류 제의를 받지만, 거절한다. 물론 진짜로 합류하지 않으려던 것은 아니고 거절하는 모양새를 보여 지지 여론을 만들기 위한 것.
그리고 본격적으로 선전선동을 시작한다. 먼저 프랑스에서 비행선 습격 사건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의 프랑스판 버전을 상영했는데, 러닝타임의 70% 이상이 르네 퐁크를 다루고 있어 프랑스인들의 국뽕을 채워주는 동시에, 전투를 마치고 돌아온 퐁크가 독일인 파일럿 우데트와 포옹하는 장면을 넣어 반독 여론을 잠재운다. 프랑스 정부는 스크린 쿼터제를 도입해봤지만 소용없었고, 후술할 투탕카멘의 무덤 발견까지 겹쳐 여론은 점점 식어간다.
그리고 히틀러는 대표단에 합류, 아멜리아, 조셉과 함께 프랑스로 간다. 어차피 협상 자체는 실패할 수밖에 없으니 협상장 밖에서 예술가들과 인맥을 만들어 시민들을 공략하기로 한다. 그리고 협상 자리에서는 100% 기계적 중립을 고수하고, 회의가 끝날 때는 아멜리아와 함께 샤넬이 디자인한 옷을 입고 나와 기자들의 관심을 끌고, 예술가들과 자주 만난다. 거기에 다양한 레스토랑을 찾아 식도락을 즐기는 모습을 보이고, 이집트 테마의 카드 게임을 개발했으며, 파리의 모든 예술가들을 초청한 대규모 연회를 열겠다고 선언한다. 덕분에 세간의 시선은 협상 자리보다 히틀러 부부의 행보에 집중된다.
한편 루르 지역에서는 프랑스와 벨기에 관료들에 대한 반발심이 커지던 중 누군가에 의한 선로 폭파로 열차 사고가 발생한다. 누가 범인인지 알 수 없는 상황에 히틀러의 귀띔을 들은 아데나워가 프랑스가 붉은 세기라는 공산주의자들을 후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이 사실을 폭로해 프랑스의 자작극처럼 보이게 만든다. 이로 인해 프랑스의 여론은 분열되고, 이런 상황에도 푸앵카레는 루르 점령 계획을 강행한다. 이런 상황에서 히틀러는 연회를 앞두고 연설을 준비한다.
그리고 연회 당일, 히틀러는 자유를 강조한 연설을 하지만 프랑스에서는 미적지근한 반응이었고, 되려 루르 점령에 찬성하는 여론이 커진다. 하지만 사실 히틀러의 연설은 프랑스를 향한 것이 아니었고, 프랑스가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이후 50억 프랑에 달하는 배상금을 갚았다는 점에 자극받은 독일에서 배상금을 갚겠다며 금 모으기 운동이 일어난다. 독일인들이 자발적으로 단결해서 벌인 일인 데다 영국과 미국을 비롯한 타국에서도 우호적인 여론이 커지자 프랑스도 루르를 점령할 수 없게 된다. 여기에 융커들은 기부 행렬에 동참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밝혀지며 융커들에 대한 여론도 악화된다.[18]
후겐베르크는 여전히 음모론을 떠들며 히틀러를 공격하려고 했지만, 내부의 히틀러 지지자를 통해 이를 알게 된 히틀러가 해결방안을 고심하다 아멜리아의 제안으로 부부 싸움을 하는 척하기로 한다. 그리고 그 이유가 독일의 배상금 액수 때문인 것처럼 소문을 내고, 극적인 화해를 준비한다. 마침 아멜리아의 임신 사실이 드러나며 쉽게 화해할 수 있었고, 배상금 협상에 관해서는 프랑스에서는 예술가들을 이용해 평화를 향한 프랑스인들의 열망 덕분에 협상이 가능했다는 분위기를, 독일에서는 독일인들이 금 모으기 운동의 강인함을 보여준 덕분에 협상이 가능했다는 분위기를 만들어 양쪽의 국뽕을 채워준다. 결국 프랑스 정부는 루르 점령 계획을 포기하며 사실상 히틀러에게 굴복한다.
그 뒤에는 루이 암스트롱을 비롯한 유명 뮤지션들을 불러 평화를 기원하는 축제를 열기로 하고, 유명 뮤지션들이 모두 참가하는 평화를 기원하는 노래를 작곡하여 부른다. 제목은 세계의 아이들(Children of the World). 이 노래는 유럽 각국에 라디오로 송출되어 큰 인기를 끌었고, 협상 결과 독일의 배상금 액수가 확 줄어들었으며 이 결과는 히틀러 플랜이라고 불렸다. 그 덕분에 독일은 물론 영국, 프랑스의 경제도 안정되면서 유럽 국가들이 점차 뭉치기 시작한다.
- 투탕카멘의 무덤 발견
히틀러가 하워드 카터를 후원하면서 투탕카멘의 무덤 발견을 예언했고, 발굴 현장에 프랑스인 영화감독과 애거서 크리스티 등을 동행시켰다. 그리고 정말로 투탕카멘의 무덤이 발견되면서 전 세계로 소식이 퍼져나갔고, 특히 프랑스에서 발굴 현장을 촬영한 영화관 뉴스를 상영하며 자연스레 이쪽에 사람들의 눈길이 쏠려 독일에 대한 관심은 식어갔다.
- 투탕카멘 카드 개발
투탕카멘의 무덤 발견으로 이집트에 관한 열풍이 불자 이를 이어가기 위해 히틀러가 이집트 테마의 카드 게임을 개발한다. 히틀러가 따로 이름을 붙이진 않았지만, 사람들이 투탕카멘 카드라고 부르면서 이 이름으로 굳어진다. 이집트에 관한 열풍 덕도 있었지만 그 자체로도 재밌어서 엄청난 히트를 친다.
- 국제연맹의 국제 청소년 교류 위원회 설립 및 히틀러의 위원장 추천
국제연맹이 이탈리아 내전을 끝낸 히틀러를 새로 창설할 국제 청소년 교류 위원회의 위원장으로 추천한다. 이는 국제연맹이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으며, 동시에 히틀러가 문화를 마음대로 퍼트려도 좋다고 허락한 것과 다름없었다. 하지만 일본이 컨테이너 문제 때문에 설립을 반대하자 히틀러는 외무성 내의 파벌을 압박하고 에스코피에 셰프가 열 연회를 이용해 민주당과 공화당의 힘을 합친 초당적 협력을 해보기로 한다.
- 무솔리니의 위기
이탈리아 내전은 끝났지만, 히틀러는 아예 무솔리니를 포함한 파시스트들을 치워버리기로 한다. 이탈리아의 공화주의자, 민주주의자들은 이미 파시스트들에게 탄압당해 대부분 사라졌으나, 그 무솔리니조차도 교회만큼은 건드리지 못했다는 점을 이용해 교회를 대안으로 밀어주고 신부와 목사들을 선거에 내보내기로 한 것. 그리고 헤밍웨이가 무솔리니를 비판하는 기사를 내고, 국제연맹에서 전쟁범죄 조사위원회가 구성되어 무솔리니를 조사하면서 무솔리니는 궁지에 몰린다. 결국 무솔리니는 조롱받으며 프랑스로 망명한다.
- 에드워드 왕자와 리펜슈탈의 스캔들
에드워드 왕자와 리펜슈탈이 눈이 맞은 뒤 파리에서 밀회를 나누던 장면이 파파라치들에게 딱 걸려 스캔들이 터진다. 이에 히틀러는 아예 그 둘을 이어주고 리펜슈탈을 차기 왕비로 만들기로 한다. 그러기 위해서 두 사람을 로미오와 줄리엣으로 만들고자 일단 두 사람이 헤어진 것처럼 보이게 만들어 스캔들을 잠재운다.
이후 예루살렘 회담에서 에드워드 왕자가 리펜슈탈을 데리고 참석했다가 들키면서 스캔들이 재점화된다. 아무리 기자들이라도 왕자를 상대로 결례를 저지를 수는 없어서 리펜슈탈을 상대로 파파라치 짓을 했고, 히틀러 컴퍼니 소속 촬영기사들은 그런 기자들의 모습을 찍어 텔레비전으로 내보냈다. 덕분에 시민들의 기자들에 대한 분노와 리펜슈탈에 대한 동정 여론이 커진다. 한편 조지 5세는 세계 대전이 끝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왕자라는 놈이 독일 평민 여자랑 놀아난 것에 분노하며 길길이 날뛰었지만, 왕실의 반대가 오히려 이들을 로미오와 줄리엣으로 만드는 결정적인 열쇠가 된다.
에드워드가 중국으로 떠나는 리펜슈탈에게 금반지를 건네주며 사실상 청혼을 하고, 기자회견에서 리펜슈탈과의 스캔들을 인정하며 자신은 결코 가벼운 마음으로 교제를 이어오지 않았고, 지금까지 많은 고민을 했으나 그녀와의 관계가 대영제국의 국익에 해가 된다면 어쩔 수 없이 관계를 끝내겠다고 발표한다. 이 작전은 먹혀들어 찬성 여론이 반대 여론보다 압도적으로 많아진다. 그리고 리펜슈탈은 영국 대사관의 무도회에 공식 초대를 받으며 사실상 영국 왕실에게 인정받는다.
- 히틀러의 노벨평화상 수상
프랑스의 배상금 협상과 이탈리아 내전 종식까지 활약한 히틀러에게 만장일치로 노벨평화상 수여가 결정된다. 이때 푸앵카레가 히틀러가 국제연맹의 국제 청소년 교류 위원회 위원장을 맡는 것을 반대하자 히틀러가 노벨평화상 공동 수상을 제안하여 외통수에 빠트린다. 결국 푸앵카레는 히틀러의 제안을 승낙한다.
- CIA의 창설
기존의 정보망에 한계를 느낀 히틀러가 통일된 정보조직을 만든다. 이를 위해 탐정 회사들을 인수하기로 하지만, 탐정업은 기본적으로 인맥 관리인데 탐정 회사들에는 능력 없이 인맥 하나로 높은 자리에 오른 무능한 간부들이 득실거리는 상황. 그러나 무능하다고 이들을 쳐내면 인맥도 날아가버린다. 이에 히틀러는 후버의 도움을 받아 이들이 불법을 저지른 증거들을 찾아내고 협박해 사직시킨다. 그리고 유능하지만 빛을 못 본 이들을 빈자리에 앉힌다. 여기에 케렌스키의 도움을 받아 러시아 정보망, 인맥을 얻어낸다.
- 일본의 상황 변화
일본에도 히틀러주의와 로켓맨 등이 퍼졌지만 일본 정부가 반제국주의 성향이라는 이유로 로켓맨을 금지시키려 하자 제3제국[19] 잡지 출판사와 구독자들을 중심으로 반발이 일어난다. 여기에 일본이 컨테이너 문제 때문에 국제 청소년 교류 위원회 설립을 반대하자 히틀러는 외무성 내의 파벌을 압박하고 민주당과 공화당의 초당적 협력을 통해 일본을 흔들기 시작한다.
- 뉴프런티어 가이드 발간
히틀러가 프랑스의 민심을 사로잡기 위해 미쉐린 가이드를 떠올린다. 프랑스인들에게 음식은 국가적 자부심이기에 음식 평론가들을 동원해 프랑스의 레스토랑들을 소개하는 가이드북을 발간하기로 한 것. 에스코피에는 이 소식을 듣고 히틀러를 시험해볼 겸 연회를 여는데, 히틀러의 지식은 깊지만 프랑스 요리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라는 걸 꿰뚫어본다. 하지만 뉴프런티어 가이드북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 출판에 도움이 되겠다는 뜻을 밝힌다. 그리고 히틀러가 디저트를 보고 아이디어를 떠올려 밀크셰이크를 만들자 감탄하면서 프랑스에 소개해야겠다고 하고, 히틀러 셰이크만 아니면 된다는 말에 히틀러 셰이크로 이름을 붙인다(...). 이후 밀크셰이크는 아예 프랜차이즈를 차려 판다. 그리고 뉴프런티어 가이드가 정식 출간되자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 블랙 카드 출시
히틀러가 VVIP 고객들에게 블랙 카드를 선물하고 쇼핑, 집 관리 등에서 특권을 제공한다. 일종의 한정 멤버십 클럽을 만들어 VVIP들과의 인맥을 만드는 것은 물론, 그들이 어디에 있고 무엇을 하는지 실시간으로 정보가 들어오는 효과도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블랙 카드를 악용하는 간부들이 나오자, 오히려 블랙 카드의 혜택을 대폭 강화해 간부들이 블랙 카드만 쓰도록 유도하여 서로의 회사 계좌를 감시하게 만들고, 등급마다 혜택에 차등을 두어 승진할 수 있도록 노력하게 만들었다.
블랙 카드를 쓰는 사람들이 한 가지 불만을 갖고 있는 것은 과도할 정도의 건강 관리. 실제 저 시대의 위인들은 애주가, 애연가들이 많았는데 대표적으로 윈스턴 처칠이야 말할 필요 없는 애주가이자 애연가이고,[20]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도 주치의가 자신에게 절반만 피우라 말할 것을 예상하고 담배 피우는 양을 2배로 말한 애연가이다. 이 위인들의 생명 연장을 위해 히틀러는 전속 주치의를 통한 의료 시스템, 전속 트레이너를 통한 운동과 영양 관리를 의무적으로 실시하게 만들었다.
- 세계 청소년들을 위한 캠핑장 건설
히틀러가 탐정 훈련을 위해 몬태나에 광활한 부지를 구입해 몰래 시설을 건설하던 중, 뉴욕 월드가 냄새를 맡고 이를 파헤치기 시작한다. 보도가 나가면 히틀러의 이미지에 타격이 생길 것이 뻔했고, 그렇다고 건설을 취소하면 더더욱 수상하게 보일 테니 일단은 뉴욕 월드의 장단에 맞춰서 꽁꽁 숨기는 척하면서 아예 훈련 시설을 캠핑장으로 바꿔버린다.
이후 뉴욕 월드의 보도가 나갔으나 의심스러운 정황에도 불구하고 히틀러를 의심하는 여론보다 지지하는 여론이 압도적이었고, 뉴욕 월드 기자들이 취재를 거부당하는 일이 일어난다. 그리고 마침내 주정부 차원에서 조사가 시작되지만, 진실이 드러나자 뉴욕 월드의 이미지는 대폭락한다. 결국 뉴욕 월드는 신문 2면에 한 달간 공짜로 몬태나의 캠핑장에 대한 특집 기사를 싣는 것으로 용서받는다. 이후 밝혀진 사실은 히틀러에 의해 쫓겨난 탐정 회사 간부가 뉴욕 월드에 정보를 흘린 것이었다.
이후 월트 디즈니가 이 캠핑장의 존재를 알게 된 후 흥분해서 히틀러의 허락 하에 건설을 진두지휘하여 진정한 자연을 만끽할 수 있는 장소로 만든다.
- 미국의 국제연맹 가입 논의
국제 청소년 교류 위원회가 창설되고, 히틀러가 몬태나에 캠핑장을 지은 것을 계기로 윌슨이 미국의 국제연맹 가입에 도움을 요청한다. 여당인 공화당은 국제연맹 가입에 부정적이었지만, 이들은 히틀러에게 빚을 지고 있었기에 다루기 쉬웠다. 특히 상기한 캠핑장을 미국 각 주에 지으면 그만큼 수입도 일자리도 늘어날 것이므로 이를 미끼로 사용해서 쉽게 요리할 수 있었다. 당연히 그만큼 히틀러의 인맥은 더더욱 넓어지고 끈끈해졌다. 사무실에 앉아서 정치를 좌지우지할 수 있게 된 것. 이후 쿨리지 대통령 재임 중에 마침내 가입하게 된다.
- 로스차일드의 독일 국채의 매입과 프랑스의 반유대주의 정서 확산
로스차일드가 뜬금없이 독일 국채를 마구잡이로 사들이기 시작하는데, 사실 이것은 모건 하우스가 독점하는 국채 유통에 숟가락을 얹으려는 심산이었다. 만약 로스차일드가 매입한 물량을 한번에 풀어서 국채의 가격을 폭락시켜 히틀러 플랜을 흔들고, 독일 국채의 2차 발행도 막히면 자연스레 독일은 로스차일드에 도움을 청할 수밖에 없기 때문. 당연히 독일 입장에서는 안 좋은 일이지만, 정작 프랑스 입장에서는 마치 로스차일드가 프랑스인들의 돈을 독일로 보내는 것처럼 보였기에 반유대주의 정서가 퍼진다. 물론 이것 때문만은 아니고, 자신들은 기껏 승전국이 되었는데도 경제적으로 빌빌거리고 있건만 정작 패전국인 독일은 히틀러 플랜으로 빠르게 경제회복 중인 것을 보고 불만을 품으면서 증오할 대상을 찾게 된 것. 기껏 독일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에서 극우와 파시스트들을 무너트렸는데 이대로라면 내독나없이나 카이저살마냥 프랑스에 파시스트 정권이 들어설 확률이 높았다.
히틀러는 일단 프랑스에서 반유대주의 성향이 가장 큰 왕당파 가톨릭 정당인 악시옹 프랑세즈를 견제하기 위해 교황에게 연락을 취하여 이를 금서목록으로 지정하고 모든 가톨릭 종교 운동과 평신도 단체가 교계의 통제를 받도록 하여 시간을 번다. 그리고 모건 하우스와 협력하여 로스차일드의 공세를 막기로 한다. 한편 프랑스에서는 폭동이 일어나 유대인들이 약탈과 폭행을 당하는 일이 벌어지는데, 놀랍게도 공화국 기사단 견습단원들이 스스로 반유대주의에 맞서 유대인들을 보호한다. 히틀러는 이들이 위험에 빠질까봐 적당히 통제만 한 후, 미국 내부에서도 퍼지는 반유대주의를 잡기 위해 찰스 코글린을 만나 경고한다. 그러다가 유대인 문제는 유대인이 해결하면 된다는 생각을 떠올리고 리히터를 써먹기로 한다.
이후 리히터가 파리까지 직접 찾아가 바롱 에드몽드 드 로스차일드를 만나는데, 막상 로스차일드는 유럽에 반유대주의 정서가 퍼지는데도 아랑곳하지 않는 모습을 보이자 리히터는 그의 진짜 목적은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이주가 활성화되도록 하여 이스라엘을 건국하는 것임을 깨닫는다. 하지만 리히터가 전 세계의 유대 공동체에서 로스차일드가 이 일에서 손을 떼길 촉구하는 서명을 보여주자 로스차일드는 잠시 할 말을 잃는다. 그리고 만약 로스차일드의 의도대로 된다면 많은 돈을 벌겠지만 유럽 경제가 무너질 테고, 사람들은 로스차일드와 유대인에게 책임을 돌릴 거라고 지적한다. 이를 보여주듯 전 세계의 각기 다른 유대인 공동체들은 프랑스에서 벌어진 일과 로스차일드에 관심을 보이며 어디까지가 유대인인지, 유대인으로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등에 대해 논쟁했지만, 대부분 히틀러주의를 따라 히틀러 컴퍼니를 지지하자는 결론을 내리며 서명을 모았다.
한편 미국에서는 케렌스키가 히틀러에게 러시아계 유대인 이민자들을 데려오고, 로스차일드가 국채를 시장에 풀지 못하면서 모건 하우스가 반사이익을 본다. 결국 로스차일드가 채권 흔들기를 포기하며 반유대주의 정서 확산은 멈춘다.
- 반유대주의 정서 타파 시도
로스차일드 사건은 끝났지만 유대인 문제는 여전히 잠재적인 위협으로 남아있는 상황. 이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로스차일드처럼 시오니즘을 지지하는 방법도 있지만 그건 문제가 많기에, 반대로 유대인들이 각 나라의 국민으로 인정받을 수 있도록 돕기로 한다. 당시에는 유대인이지만 유대인보다는 유대교를 믿는 미국인, 영국인, 독일인, 프랑스인 등 각 나라의 국민으로서의 정체성이 더 강한 유대인들이 많았기에, 이런 유대인들의 노력을 보여주며 반유대주의 정서를 타파하기로 한다. 우선 유대계 독일인인 프리츠 하버의 행적을 프로파간다로 활용하고, 레니 리펜슈탈을 그 과정을 촬영할 감독으로 쓰기로 한다.
- 포드 대 뉴프런티어
포드의 반유대주의 성향과 히틀러의 에디슨, 포르셰 영입 등으로 포드 모터스와 히틀러 컴퍼니는 사사건건 충돌해왔다. 지분 싸움과 추수감사절 퍼레이드 이후로도 포드가 계속해서 포드 자동차가 안전하다고 선전하며, 반유대주의 기사를 신문에 실어 히틀러를 간접 공격하고, 심지어 자사 신문을 통해 뉴프런티어 자동차가 위험하다고 선전하고, 자사 딜러들도 여기에 동참한다. 히틀러는 우선 사고 통계를 이용해 뉴프런티어의 안전장치의 법제화를 추진하고, 충돌 테스트를 하고 이를 촬영해 영화관에서 상영하기로 한다. 여기 등장하는 더미 캐릭터의 이름은 덤 앤 더머. 또한 보험 회사들은 자동차 사고로 인한 중상자와 사망자가 줄어든다면 오히려 이득이었기에 히틀러 컴퍼니를 지지한다.
히틀러가 내놓은 충돌 테스트 영상은 상당한 인기를 끌었고, 대중의 관심이 커지면 청문회가 열릴 테고, 그 자리에서 안전벨트 로열티를 공짜로 풀면 다른 자동차 회사들도 안전장치의 법제화에 반대할 명분이 사라질 것이었다. 하지만 포드도 그 정도는 예상하고 다른 자동차 회사들과 연합해 로비를 준비할 테고, 그럼 히틀러라고 해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다. 따라서 히틀러는 로비가 아닌 여론으로 상대하기로 한다. 이미 여론은 히틀러를 지지하고 있지만, 확실한 증거가 필요했기에 여론조사를 위해 조지 갤럽을 영입하고, 미네소타에서 농민노동당이 압승할 거라는 예측을 발표, 이를 증명하여 여론조사의 힘을 증명한다. 그리고 자동차 안전장치 법제화에 대한 여론조사를 시작하는데, 자동차 안전장치 법제화에 찬성하는 비율이 무려 89%나 된다는 결과가 나왔고, 여론을 무시할 수 없던 정치인, 기업인들도 줄줄이 포드에게서 등을 돌린다. 그리고 포드 자동차의 판매량도 급감한다. 결국 충격을 받은 헨리 포드는 회사 일은 아들에게 맡기고 한동안 별장에서 요양하기로 했고, 에드셀 포드가 회사를 맡은 뒤 히틀러와 협력 관계로 돌아선다.
- 중국의 상황 변화
위안스카이 사후 군벌들이 난립해 개판이 된 중국에 소련이 손을 뻗자 히틀러도 따라서 손을 뻗기로 한다. 원 역사와 달리 소련이 쑨원이 아닌 천중밍을 후원하자, 히틀러는 자신들이 쑨원을 지원해야 한다고 판단한다. 우선 쑨원이 독실한 기독교 신자라는 점을 이용해 중국에 진출한 교회를 이용해 존 레이튼 스튜어트 목사를 통해 쑨원과 장제스에게 무기와 자금을 지원하기로 한다. 하지만 천중밍이 탄광을 빼앗기 위해 북상하는 상황에서 쑨원을 지원해도 천중밍에게 도로 빼앗길 확률이 큰 상황. 이에 히틀러는 그 탄광을 자기가 사들여버리기로 한다. 그럼 탄광은 미국인의 사유재산이 되고, 미국은 자본주의 체제로서 개인과 기업의 정당한 사유재산에 대한 권리를 보장하기 때문에 만약 탄광을 천중밍에게 빼앗기는 일이 벌어지면 중립을 지키는 쿨리지 대통령도 자국 기업의 사유재산과 이익을 지키기 위해 외교적으로 압박을 가하는 등 어떻게든 움직이게 될 테니 천중밍도 함부로 손댈 수 없다. 지원 자금은 탄광 매입으로 꾸며서 송금하고 운영 권한은 혁명 정부가 유지한다고 명시하면 탄광을 지키면서 자금도 지원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애초에 미국인들은 중국에 관심이 없었기에, 판다 외교를 떠올리고 판다로 관심을 끌기로 한다. 판다 이름은 푸로 짓고, 쿵푸를 하는 판다를 주인공으로 한 애니메이션도 만들기로 한다. 그리고 장쭤린은 동북 3성의 군수물자 생산 확대를 위한 도움을 요청하고, 독일 군부는 소련에서 군사훈련을 하겠다고 하자, 이 세 가지를 연결하여 장쭤린에게 치장물자를 사들여 쑨원에게 지원하고, 그 대가로 공작기계와 비행기, 비행선을 제공하고, 독일 군부의 군사훈련 장소를 소련 대신 만주로 하고 독일 장교들로 이루어진 군사고문단을 쑨원에게 파견하기로 한다. 수송은 IMM에 싼 가격으로 맡기면 그만.
그러나 정작 젝트는 이 제안을 거절할 가능성이 컸기에, 아예 독일 방위군을 사들여버리기로 하고 독일 장교들을 매수한다. 어차피 미국은 일본의 영향력을 줄이기 위해 환영할 테고, 변수는 영국. 영국도 공산주의라면 기를 쓰고 막겠지만 영국 정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모르고, 독일 장교들처럼 매수하기엔 돈이 너무 많이 드니 영국의 암호체계를 깨부수자는 발상을 한다. 쉽게 말해 통신을 감청하겠다는 것.
한편 장제스가 미국으로 오는 길에 아돌프 이오페에 의한 암살 시도가 있었지만 유람선을 통째로 매수해 연극을 벌인 CIA에게 그대로 가로막혀 실패한다. 만약을 대비해 그 뒤로도 장제스를 철저히 호위하고, 괴벨스를 통해 쑨원과 장제스를 중국 공산화에 맞서는 첨탑으로 포장한다. 여기에 공화국 기사단까지 중국에 진출한다. 그리고 판다 '푸'와 '피글렛'이 미국에 도착하자 엄청난 인기를 끌고, 디즈니에서 '용의 전사, 판다!'라는 이름으로 제작한 애니메이션도 대인기를 끈다.
이후 장쭤린이 승기를 잡아 우페이푸가 이끄는 즈리 군벌을 산산조각 내며 제2차 직봉전쟁을 마무리한다. 이때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은 쑨원이 북상하자 히틀러는 쑨원에게 노틸러스 호를 보내 둘이 손을 잡도록 유도한다. 그런데 소련이 갑자기 천중밍에 대한 지원을 대폭 늘리자, 히틀러는 발터 모델에게 희망을 걸어보기로 한다. 그리고 히틀러의 예상대로 천중밍이 공세를 시도하지만 모델은 이를 막아낸다. 하지만 천중밍은 머리를 써서 탄광과 도시를 포위하기만 하고 직접적인 공격은 하지 않고, 삐라를 뿌려 사상전으로 나간다. 이로 인해 도시에 남겨진 시민들은 굶주리게 되었고, 현지에 파견된 독일군이 반격을 준비할 때까지는 시간이 걸리고, 미국이 억지로 군사적으로 개입하면 천중밍의 선동이 사실이라고 증명하는 꼴이 되기에 항복밖에 답이 없는 상황. 이때 히틀러가 베를린 봉쇄를 떠올리고 비행선을 이용해 도시에 보급을 한다는 아이디어를 낸다. 그리고 쑨원이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반천중밍, 반소를 주창한다. 그리고 교황청과 에케너, 니미츠가 비행선을 지원하고, 호위 파일럿들에게 플라잉 크루세이더라는 이름을 붙인다. 거기다 다른 교단 종파들도 모두 손을 잡고 광둥성 수송작전을 지원한다.
하지만 광둥에는 비행선이 착륙할 만한 공터가 없어서 무용지물이 되나 싶었지만, 린드버그를 시작으로 파일럿들이 손수건으로 낙하산을 급조해 과자에 매달고 뿌리는 기지를 발휘하여 어느 정도 식량을 전달해준다. 그러나 이걸로는 한계가 있는 상황에, 히틀러의 아이디어로 컨테이너를 비행선에 매달고 떨어트려 대량으로 식량을 전달하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텔레비전과 라디오 덕분에 전 세계의 이목이 광둥성에 쏠리고, 이렇게 지원된 물품 중 허쉬 초콜릿이 간접광고로 엄청난 인기를 끌면서 다른 회사들이 너도나도 뛰어들고, 유대교, 시크교, 힌두교, 이슬람, 불교 등등이 모조리 지원을 결정하면서 광둥성은 종교의 자유의 상징이 된다. 그리고 원래 반서방 성향을 띠고 있던 중국인들도 반공주의로 전향하여 코카콜라를 사는 등 히틀러 지지 운동을 벌인다. 여기에 미국에서는 해군 지원자가 300% 증가한다.
그리고 쑨원이 사망하고 장쭤린이 국민당을 집어삼킬 야욕을 드러내자 장제스가 국민당을 지키기로 결심한다. 그 뒤 천중밍의 세력이 갈수록 약해지던 중, 일부 장교가 독단으로 비행선을 공격해버린다. 그러나 역으로 비행선의 폭격으로 인해 이들은 궤멸되고 천중밍 본인은 생사불명이 된다. 그리고 장쉐량과 장제스가 국민당의 권력을 놓고 기싸움을 벌이던 중 히틀러가 직접 중국에 방문하여 이들을 중재하고 힘을 합치게 만들었다.
- 튀르키예의 상황 변화
일단 중국 문제는 넘겼지만, 히틀러가 소련에 있는 미래를 아는 누군가가 진심으로 공산주의를 신봉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본격적으로 나서기 전에 선수를 쳐야 한다고 판단한다. 그러기 위해서 소련과 가까운 중동에 손을 뻗기로 하고, 먼저 튀르키예의 케말을 끌어들이려 한다. 마침 케말은 튀르키예 독립 전쟁이 마무리되어가자 로잔 조약 협상 과정에서 모술을 튀르키예와 이라크 어느 쪽에 귀속시켜야 할지 논의하던 중이었고, 협상에 미국을 끌어들이기 위해 미국 기업들에게 대규모 개발권을 부여하려는 차에, 모술에 석유가 있다는 말을 듣고 로잔 조약 협상에 대한 영국과 프랑스의 기본방침, 모술에서 석유가 발견되었을 때 각국이 보일 반응까지 전해듣고 경악하고, 모술의 석유 지분 일부를 히틀러 컴퍼니에 넘기고 튀르키예 개발 사업에서 우선권을 가지는 대가로 협력 관계를 맺는다. 거기다 튀르키예에 공화국 기사단 지부까지 설립된다.
그리고 허버트 후버가 히틀러를 찾아와 일본이 적백내전에 개입하기 위해 시베리아에 출병한 뒤 아직도 거기 주둔하고 있고, 장쭤린과도 가깝게 지내는 등 만주에 진출하려는 낌새를 보인다며 장쭤린을 미국의 영향권 아래로 끌어들일 수 있도록 지원해달라고 부탁한다. 히틀러는 그 대가로 모술에서 대규모 유전이 발견되었고 튀르키예가 미국 기업들에게 대규모 개발권을 부여하려고 한다는 소식을 말해주며 미국 정부가 튀르키예를 지원한다면 자신도 장쭤린을 지원하겠다고 하고, 이 소식에 기겁한 후버는 당장 백악관과 히틀러 컴퍼니 간에 핫라인을 깔아야겠다고 한다.
이후 모술의 유전 소식이 세상에 알려지고 튀르키예의 태도가 180도 바뀌자 영국은 튀르키예에게 협박과 회유를 했지만 케말은 히틀러 컴퍼니를 통해 실시간으로 영국과 프랑스의 정보를 전달받고 있었기에 소용없었고, 여기에 튀르키예에서의 이권을 노린 미국도 끼어들면서 난항을 겪은 끝에 협상이 끝나고, 마침내 로잔 조약이 체결되고 모술은 원 역사와 달리 이라크가 아닌 튀르키예에 넘어가게 되면서 케말에 대한 지지율은 하늘을 치솟는다. 그리고 튀르키예에도 공화국 기사단 지부가 창설되고 투탕카멘 카드와 캐피탈리즘, 호!와 던전&워리어 등이 들어오면서 히틀러에 대한 우호적인 여론도 커진다. 이후 튀르키예는 독일의 국제연맹 상임이사국 가입에 찬성한다.
- 트럭 운송업의 발전과 주간 고속도로 건설
히틀러가 아이젠하워와 폰 노이만을 영입해 컨테이너 운송을 위한 트럭 운송업을 발전시키고, 자동차 안전장치 건으로 충격을 받은 헨리 포드가 요양을 위해 물러나고 에드셀 포드가 회사를 맡으면서 히틀러 컴퍼니와 협력을 결정, 히틀러 컴퍼니와 포드 모터스를 비롯한 각종 자동차 기업들과 연방정부까지 주간 고속도로 건설에 끌어들여보는데, 연방정부는 여론을 의식해 지원법을 통과시키나 다른 자동차 기업들은 발을 뺀다.
- 악시옹 프랑세즈의 분서 사건과 구텐베르크 프로젝트
프랑스에서 샤를 모라스의 주도하에 극우 정치인, 지지자들이 집회를 열어 히틀러의 책들과 뉴프런티어 가이드북, 세계의 아이들 음반 등을 불태우는 일이 일어난다. 분서 대상이 된 작가들은 분노해서 비판 성명을 냈으며, 프랑스인들 중에서는 5~8% 정도만이 악시옹 프랑세즈를 지지했다. 하지만 5~8% 정도라도 상당한 숫자였고, 프랑스의 경제회복이 더딘 상황에서는 언제든 50%, 80%로 늘어날 수 있었기에 히틀러는 대책을 세우기로 한다.
프랑스가 경제회복이 늦은 것은 반독 감정 때문에 다른 나라와 달리 컨테이너를 도입하지 않았기 때문이지만 그렇다고 히틀러를 적대하는 프랑스 정부에 공짜로 컨테이너를 제공할 수는 없고, 아마 프랑스 정부는 관세장벽을 세우려고 하겠지만 그럼 경제회복은 더더욱 늦어진다. 히틀러는 고민 끝에 책을 불태웠으니 책이 해답이라고 판단해 분서 대상이 된 책들을 싸고 읽기 쉬운 페이퍼백으로 출판하기로 한다. 마침 분서 사건 덕분에 분서 대상이 된 책들에 대한 관심이 더 늘어난 참이었기 때문. 그리고 신문과 작가들, 사서들까지 동원해 판다 북스라는 출판사를 세워 페이퍼백을 대량으로 찍어내는 구텐베르크 프로젝트를 실행한다.
신문에 연일 구텐베르크 프로젝트 선정 도서와 분서 사건에 관한 이야기가 실리면서 자연스레 책에 대한 관심은 높아졌고, 심지어 아서 코난 도일은 새로운 셜록 홈즈 시리즈를 페이퍼백 한정으로 발매하기로 한다. 그러나 고속도로 프로젝트와 구텐베르크 프로젝트로 공화당에 대한 지지율도 높아지면서 위기를 느낀 민주당은 '연방 공무원이 정치적 내용이 담긴 서적을 공적인 장소에서 추천하는 걸 금지한다'는 정치적 중립을 내세운 애매모호한 법안의 입법을 추진한다. 이에 히틀러는 '정치적 내용'이 들어간 책을 그냥 다 빼버리는 식으로 응수한다. 심지어 셜록 홈즈 시리즈도 대영제국에 대한 지지가 들어갔으니 빼버렸다.
당연히 여론은 불타올랐고 아서 코난 도일이 셜록 홈즈 신작의 출판까지 보류하겠다고 하자 전 세계의 셜로키언들이 민주당에 대해 분노하였고, 민주당은 황급히 여론을 달래기 위해 형사처벌 조항을 삭제하고 규제 대상도 명백한 정치적 선동물로 한정하는 등 법안을 개정한다.
한편 프랑스에서는 구텐베르크 프로젝트와 악시옹 프랑세즈의 분서 덕분에 프랑스의 책벌레들이 모인 부키니스트 거리가 더더욱 활성화되고 악시옹 프랑세즈에 악감정이 깊어지는데, 악시옹 프랑세즈는 화형식에서 태울 책이 없어 그런 곳에서라도 기부를 받는 형편이 된다. 그 와중에 애독가 한 명이 이를 역이용해 화형식에서 군주정 옹호, 반유대주의 서적을 불태운다는 아이디어를 낸다. 기자 친구까지 불러서 대대적으로 알리려는 건 덤. 덕분에 악시옹 프랑세즈에 대한 지지율은 되려 3~4%로 떨어지고, 반대 시위에 이어 예술가들과 가톨릭 신도들까지 이들을 비판하고 나선다.
- 일본의 시베리아 개입 실패
일본이 시베리아에서 곧 철수하려던 타이밍에 갑자기 대규모로 들이닥친 소련군에 의해 이틀 만에 도시를 잃고 5천 명 이상이 투항하는 일이 벌어진다. 관동 대지진 직전에 벌어진 일이라 이번 패배로 일본 사회는 흔들릴 게 분명하고, 이제 와서 추가 파병도 불가능한 상황. 하지만 소련군이 만주까지 접근하는 건 영국과 미국도 원하지 않을 테니, 히틀러는 제3제국에 연락을 넣어 일본에 있는 패를 늘리고, 협상 과정에 끼어들기 위해 백악관에 연락한다. 이상한 점은 소련군이 아무리 일본군이 방심하고 있다고 해도 굳이 자신들의 피해도 클 게 뻔한 시가전과 포위전을 택하고, 대규모 포로수용소를 미리 지어놨다는 것인데, 히틀러는 실제로 소련과 중국이 포로들을 대상으로 공산주의 세뇌 프로그램을 벌인 민주 운동을 하려는 것으로 추측한다. 그리고 구텐베르크 프로젝트 건으로 빚이 있는 민주당의 협력을 받기로 한다.
한편 일본인 두 명이 굳이 히틀러가 아닌 리히터에게 찾아와서 일본인과 유대인은 같은 민족이라며 일본인은 북이스라엘 왕국이 멸망하면서 사라진 잃어버린 10부족의 후예라는 주장을 하고, 리히터는 근처 정신병원에서 동양인 두 명이 탈출했나(...) 생각하면서도 정신병자는 정신병자대로 써먹을 수 있겠다고 생각한다. 한편 일본에서는 시베리아 소식이 전해지면서 완전히 난리가 났는데, 육군이 책임을 피하기 위해 히틀러 컴퍼니에 책임을 덮어씌우려 든다. 대략 '미국이 모종의 음모를 꾸며서 일본군이 습격을 받았고, 그 중심엔 최근 만주에 진출한 히틀러 컴퍼니가 있다'는 주장. 일본 외무성은 그 소문을 최대한 가라앉히려 하고 있지만 공화국 기사단 일본 지부가 이런 헛소문으로 인해 피해를 입으면 곤란하니, 워너 형제에게 연락해서 일본에 촬영진을 보내기로 한다. 어차피 곧 관동 대지진도 터질 테니 이를 이용하면 여론을 반전시킬 수 있기 때문. 하지만 이 경우 조선 독립에도 영향이 갈 텐데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다 유일한을 불러 이야기를 나누고, 그에게 중국, 조선, 일본을 맡기기로 한다.
그러나 일본 육군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여론은 점차 험악해지고, 사회에 기여하는 히틀러 컴퍼니와 달리 부를 빨아들이기만 하는 일본 재벌에 대한 여론도 안 좋아진다. 그러던 중 트로츠키에 의해 공화국 기사단 일본 지부에 사회주의자들이 침입, 음모론을 사실로 만들어 히틀러 컴퍼니에 대한 여론을 악화시키려는 음모가 일어나지만 다행히 히틀러가 사전에 이를 발견하여 오명을 쓰는 길을 피하고, 모건 하우스를 통해 소련이 직접 운용하는 유럽의 투자사들을 조사한다. 그리고 괴벨스와 테슬라를 위해 준비된 비행선 노틸러스 호를 관동 대지진이 터지는 타이밍에 보내 피난민들을 지원하고 학살을 방지하는 컨트롤 타워 역할을 맡기기로 한다. 조사 결과 소련은 일본의 경제 폭락에 베팅했다. 관동 대지진을 이용해 돈을 벌어들이려는 것. 그러나 이것은 히틀러 컴퍼니도 마찬가지였던지라, 히틀러는 고민하다 아멜리아의 충고를 받아들여 자신이 원하는 길을 걷기로 한다.
그리고 마침내 노틸러스 호가 출항하고, 괴벨스와 테슬라가 히틀러주의를 홍보하며 전 세계에서 격한 환영을 받는 동안 일본에서만큼은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이며, 군부와 재벌을 비롯해 일부 자경단까지 폭동을 벌이며 반히틀러주의를 떠들고 다니고, 반대로 공화국 기사단이나 제3제국 등 다이쇼 데모크라시를 이끄는 이들은 히틀러 컴퍼니를 지지하며 갈수록 일본의 혼란은 심해진다.
- 관동 대지진
1923년 9월 1일, 원 역사대로 관동 대지진이 터지고 관동이 초토화되는 엄청난 피해가 발생한 후 흉흉한 소문이 나며 자경단이 결성되어 관동대학살이 벌어지...려던 찰나, 히틀러가 보낸 외국인 촬영진이 이 장면을 다 찍은 덕분에 의화단 운동처럼 열강이 개입할 것을 우려한 경찰과 헌병들이 나서서 자경단을 해산하고 정부에서도 자경단의 활동에 제동을 걸며 학살을 막았다. 그리고 노틸러스 호가 예정대로 비상 컨트롤 타워 역할을 맡아 관동 전역에 라디오 전파를 쏘며 대피소와 현황을 알리고, 창고에 쌓인 컵라면을 무료로 배급하고, 그나마 상태가 나았던 항구에 IMM 소속 컨테이너선들을 입항시켜 지진으로 집을 잃은 피난민들에게 컨테이너를 임시 숙소로 제공하는 등 구호에 힘쓴다. 정작 히틀러 컴퍼니를 욕하던 언론과 재벌들은 모조리 도망가버렸고, 촬영진을 통해 학살이 벌어질 뻔한 광경을 본 외국인들은 기부에 소극적으로 돌아서면서 히틀러 컴퍼니가 일본의 유일한 희망이 된다.
이 덕분에 공화국 기사단에 기부금이 폭증하고, 히틀러가 맡은 국제 청소년 교류 위원회도 거대 조직으로 성장할 기회가 생기면서 이를 통해 국제연맹을 집어삼킬 생각을 한다.
다만 당장 급한 문제는 컵라면 공급인데, 이 일로 지진 피해가 수습된 뒤에도 컵라면의 수요는 계속해서 늘어날 테니 생산비용을 낮추기 위해 밀가루의 단가를 낮추고자 상무장관이던 후버와 협상해 군 비축 밀가루를 공급받기로 한다. 물론 군 비축 물자를 민간기업에 함부로 내줄 수는 없지만, 지진이라는 특수한 상황인 데다, 군 비축 밀가루도 엄밀히 말하면 농가를 지원하기 위한 정책인데 앞으로 밀 생산량이 늘어나더라도 수요가 그만큼 따라가질 못하면 농가는 파산할 텐데, 그 밀로 라면을 만들어 아시아 시장에 수출하면 밀 농가가 수출 판로를 얻으면서 안정될 것이라는 논리로 설득하였다.
이후 소련에서 프라우다를 통해 히틀러 컴퍼니가 지진을 이용해 일본에서 돈을 벌어들이고, 심지어는 테슬라가 만든 지진 발생기로 지진을 일으켰다는 음모론까지 주장하며 히틀러를 공격하자, 히틀러는 모건 하우스를 통해 조사한 소련이 직접 운용하는 유럽의 투자사들에 대한 정보를 풀어 반격한다. 소련을 맹신하는 사회주의자들은 소련을 따라 히틀러를 공격했지만, 그동안의 행보 덕분에 오히려 히틀러를 지지하는 사회주의자들도 많이 나타난다. 하지만 모건 하우스를 통해 알아낸 정보만으로 모두를 설득하기엔 부족해서 로스차일드의 힘을 빌리기로 한다. 로스차일드와는 저번에 국채 매입 건으로 충돌했지만, 얼마 전 프랑스에서 있었던 악시옹 프랑세즈의 분서 사건과 반유대주의 정서를 가라앉힌 것은 히틀러 컴퍼니였기에 오히려 로스차일드 쪽에서 목숨을 구걸해야 하는 처지였기에 쉽게 설득이 가능했다.
그리고 로스차일드에게 받아낸 정보를 어떻게 터트려야 할지 고민하던 찰나, 영국에 딱 맞는 인물, 미친 불독이 있다는 것을 떠올리고 윈스턴 처칠에게 이 정보를 넘긴다. 그 뒤 이브닝 스탠더드를 통해 이 사실이 알려지고 오히려 소련에 대한 파장이 커지면서 자연스레 히틀러 컴퍼니를 향한 음모론은 가라앉는다. 이제 일본에 쐐기를 꽂기 위해 공화국 기사단원들을 모아 퍼레이드를 하기로 한다. 이걸 막았다간 일본 황실이 히틀러 컴퍼니를 견제하는 꼴이라 여론만 악화될 게 뻔해서 허락할 수밖에 없는 상황. 더군다나 이번 지진 관련 수훈자 중 유일한의 공로가 매우 컸는데, 알다시피 유일한은 조선인이고 독립운동까지 했기에 일본 황실은 유일한에게 훈장을 줘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에 빠진다. 결국 훈장 대신 감사장을, 그것도 황실이 직접 수여하지는 않는 것으로 타협한다.
히틀러는 이번 기회에 국제 청소년 교류 위원회 권한을 넓혀 지진 같은 비상상황에 국제적인 구호 활동을 조직, 지휘하는 국제협력 위원회를 만들어 국제연맹에서 힘을 얻기로 한다. 또한 독일 정부나 기업들이 일본에 대규모 지원을 하게 만들어 독일을 국제연맹에 가입시키고, 최종적으로 미국까지 가입시킬 생각을 한다. 그런데 히틀러가 저번에 관동 대지진을 예언한 덕분에 히틀러가 부탁하기도 전에 크루프와 지멘스 등에서 줄줄이 기부 행렬이 이어졌고, 덕분에 손쉽게 목적을 달성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아직 보험 문제가 남아있었다. 히틀러가 일본에 컨테이너 항구를 지으면서 값비싼 보험 계약들을 맺었는데 관동 대지진 덕분에 엄청난 보험금이 들어오게 생겼지만, 아무래도 일본으로서는 그 정도의 돈을 지불하기 부담되는 데다 이를 억지로 뜯어내면 일본 내 반발도 커질 게 뻔한 상황. 결국 현직 대장대신인 다카하시 고레키요가 파견되어 히틀러와 협상에 나선다. 고레키요는 일본 내 복구 과정에서 사업 우선권을 부여하겠다고 제안하나, 히틀러는 일본에 돈만 쏟아붓고 돌아오는 이익도 없는 제안을 거부하고 대신 만철 지분과 그 뒤에 있는 황실의 재산을 거론한다. 일본 황실은 어떤 재벌보다 더 큰 부를 소유하고 있기 때문. 일단 협상은 결론을 내지 못하고 미뤄졌으나, 관동 대지진 이후 복구 과정에서의 정경유착이 1927년 쇼와 금융공황으로 이어진다는 걸 아는 히틀러는 여유롭게 그 실체를 들춰낸다. 그리고 스캔들이 터지면서 일본 재벌에 대한 여론 악화는 물론, 해외자금도 빠져나가면서 일본의 국가 이미지 자체가 박살 난다. 그 와중에 유일한은 박용만에게 사비로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한다.
- 독일의 국제연맹 협력국 지위 부여
히틀러의 활약으로 독일에 국제연맹 협력국 지위가 부여된다.
- 중국 공산당 일제 암살 사건
장쭤린이 관동 대지진을 틈타 일본의 영향력을 줄이기 위해 히틀러에게 만철과 별개로 만주 철도부설 독점권을 맡긴다. 히틀러는 이 참에 장쭤린과 장제스까지 합쳐 소련을 향한 반격과 조선 독립운동까지 손댈 생각으로 장쭤린에게 친서를 보낸다. 그리고 장제스에게 청방과 홍방의 인맥이 필요하다고 요청한다. 그리고 이들을 이용해 공산당원들을 모조리 제거하기로 한다. 그러던 중 갑자기 중국에 있던 CIA 요원 몇 명의 정체가 들통 나는 일이 벌어진다. 그 주체는 코민테른도 천중밍도 아닌 영국의 MI6로, CIA와 접촉한 것도 공격하려는 게 아니라 협력하기 위해서였다.
이후 MI6와 CIA가 연계하여 중국 공산당을 쓸어버리기로 하고, 마오쩌둥을 비롯해 목표로 했던 인물 대부분을 암살하는데 성공한다. 다만 저우언라이의 암살은 실패한다.
- 언론의 극단주의 타파와 TV의 발명
관동 대지진 이후 일본의 재벌들이 언론을 통해 히틀러 컴퍼니를 깎아내릴 것을 우려한 히틀러가 서로 다른 당파들을 대변하는 언론인들을 만들고, 진실만을 보여주면서 극단주의를 조금씩 줄여나가는 식으로 세계정세를 안정시키고, 에디슨 고등발명연구소에 TV의 발명을 의뢰하기로 한다.
- 가라유키상의 구출
후세 다쓰지가 국제연맹의 국제 청소년 교류 위원회와 협력해 네덜란드령 동인도의 유곽을 폐쇄하고 가라유키상을 구출한다. 그리고 이 사실이 알려지며 일본의 이미지는 바닥을 친다. 그리고 이렇게 구출된 이들은 히틀러 컴퍼니의 도움을 받아 어린이들은 해외로 입양되고, 성인 여성들은 새로운 일자리와 숙소를 얻게 된다.
- 유일한 암살 미수 사건
일본에서 예정대로 퍼레이드가 이뤄지고, 히틀러 컴퍼니에 대한 지지와 재벌들과 사회주의자들에 관한 비난 여론이 커지던 찰나, 일본 경찰 한 명이 퍼레이드 한복판에서 유일한을 암살하려고 시도하는 사건이 터진다. 다행히 유일한은 어깨에 총을 맞고 살아남았으나 이 사건이 알려지면 조선에서 독립운동이 더 거세지고 그럼 일본이 군대를 동원하면서 유혈사태가 일어날 게 뻔했고, 이게 범인의 진짜 목적일 수도 있는 상황. 히틀러는 이 상황을 국가개조의 기회로 삼기로 한다.
이미 일본에서는 오쓰 사건이 터진 적이 있는 데다 퍼레이드 현장에는 수많은 외국인이 있었기에 이 사실은 널리 알려졌고, 유일한과 조선에 대한 관심도 높아진다. 사회 각계의 유명인사들은 물론 로마 교황청까지 사태를 주시하고 있다는 성명문을 발표할 정도. 이에 일본 전국에서 히틀러에게 보내는 사과문이 쏟아지고, 노틸러스 호는 경성으로 간다. 일본으로서는 공채 발행이 막히면 끝장이라 어떻게든 히틀러의 마음을 돌려야 했고, 히틀러는 무려 천황이 직접 사과하라는 조건을 건다. 물론 이것은 아무리 그래도 무리였던지라 황족 중 한 명이 유감을 표하는 것으로 타협했고, 동시에 조선으로 가는 비행선과 홍보팀을 방해하지 말라는 조건을 건다.
그리고 조선에서는 예상대로 시위가 일어났지만, 히틀러의 의도대로 어떠한 폭력 사태도 일어나지 않고 평화롭게 진행되었고, 노틸러스 호와 외국 기자들이 철통 감시를 하면서 일본군도 전혀 손대지 못한다. 오히려 유일한에게 동조하는 일본인들도 나오는 지경. 결국 노부히토가 나서서 유감을 표하기로 했고, 여기에 히틀러가 유대인의 하수인이라고 믿는 히로히토와 내각이 그들을 써먹을 요량으로 유대인들의 일본 이민을 허가한다. 그렇게 유대인들은 홋카이도에 자리를 잡게 된다. 그동안 시온주의를 지지하던 로스차일드 프랑스 방계는 안 좋아하겠지만, 영국 방계는 오히려 좋아할 테니 그들을 분열시켜 지배하기로 한다. 이후 중국의 상황 변화로 하얼빈에도 유대인 정착촌이 들어섰다. 그리고 홋카이도 정착촌은 점차 성장세를 거듭하며 엄청난 수익을 냈고, 그에 따라 히틀러 컴퍼니가 얻는 배당금도 엄청나게 들어온다.
- 히틀러의 노벨평화상 수상
이탈리아 내전, 관동 대지진, 조선의 시위를 해결한 히틀러에게 노벨평화상 수상이 결정된다. 하지만 아멜리아의 출산이 가깝다는 이유로 히틀러는 직접 받는 것을 거절하고 조셉에게 대리 수상을 맡긴다.
- 히틀러 컴퍼니 신사옥 건설
히틀러 컴퍼니의 사옥을 새로 짓기로 하는데, 최종 디자인 시안으로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과 펜타곤이 낙점된다. 둘 중 무엇을 선택할지 고민하는 히틀러에게 아멜리아가 그냥 둘 다 지으면 된다고 충고했고, 그에 따라 펜타곤 가운데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이 세워진 모습으로 짓기로 한다. 이 사실이 알려진 후 각 주에서 유치 경쟁이 벌어졌지만, 히틀러는 뉴욕에 남기로 결정한다. 그렇게 뉴욕에는 히틀러 컴퍼니의 신사옥이자 새로운 랜드마크, 일명 펜타곤 타워가 들어선다.
- 로켓 퍼레이드
전 세계의 공화국 기사단 단원들이 히틀러의 득녀를 축하하는 의미에서 로켓 모형을 만들어 퍼레이드를 벌였다.
3. 2부(275화 ~ 370화)
- 히틀러 컴퍼니의 악마의 대변인 임명
1925년, 히틀러 컴퍼니의 규모가 커지면서 히틀러도 모든 것을 살필 수 없어 조금씩 부패나 횡령을 일삼는 간부들이 나타나기 시작하던 차에, 엘리자베스 네인이라는 뉴욕 월드 기자가 이를 파헤치다가 히틀러의 눈에 띄게 된다. 히틀러는 그녀를 아예 악마의 대변인으로 삼아 히틀러 컴퍼니가 깨끗하게 유지될 수 있도록 관리하기로 한다.
- 폴란드의 상황 변화
독일 내에서 반폴란드 정서가, 폴란드 내에서 반독 정서가 커지는 와중에도 히틀러 컴퍼니가 폴란드에서 공격적으로 사업을 확장하며 오히려 폴란드 내에서 히틀러 컴퍼니와 공화국 기사단에 대한 지지율은 갈수록 치솟는다. 그러던 중 피우수트스키가 원 역사처럼 쿠데타를 일으키고, 대통령이 되는 것을 거부하고 독일과는 외교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것이며, 공화국 기사단은 아무런 문제가 없고 히틀러는 존경할 만한 사내라는 말을 남긴다.
- 1925년 독일 대통령 선거와 독일-폴란드 관세전쟁
히틀러가 다음 독일 대통령으로 힌덴부르크 대신 다른 인물을 물색한 결과, 파울 폰 레토포어베크를 밀어주기로 한다. 어차피 독일에 반폴란드 정서가 팽배한 마당에 좌익, 중도 인사는 선거에서 이길 수 없으니 차라리 우익 후보 중 중도에 가까운 인물을 밀기로 한 것. 다만 정작 레토 본인이 출마를 거절할 가능성이 높으니, 극우들이 어디까지 선을 넘을 수 있는지 보여줘 레토가 생각을 바꾸게 만들기로 한다. 이를 위해 괴벨스를 동아프리카로 보내 슈트레제만 내각의 아스카리 지원책을 돕는다. 그리고 만약을 대비해 아데나워에게도 출마 제안을 한다.
후겐베르크는 이를 고깝게 보고 어떻게든 힌덴부르크를 당선시키려고 한다. 이를 증명하듯 극우 세력은 아스카리 지원책을 반대하고 나서고, 레토는 이에 분노하면서도 출마는 거절하려 했지만 히틀러가 직접 레토를 찾아간다. 그리고 히틀러의 지시로 괴벨스의 여정에 후겐베르크의 신문사 기자들이 동행하게 되는데, 이들은 당연히 아스카리 지원책에 반대하며 제대로 된 증명 절차도 없는데 어떻게 복무 사실을 증명할 거냐고 지적한다. 이것 자체는 합당한 지적이라 괴벨스도 골머리를 앓았지만, 히틀러의 귀띔을 받은 방위군 장교가 아주 간단하게 증명해냈다. 모두에게 빗자루를 들려주고 독일군 제식을 지시한 것. 그리고 모인 사람들 모두가 간단하게 통과한다.[21]
트로츠키는 히틀러가 지지하는 레토의 당선을 막기 위해 극우 세력을 이용하기로 한다. 그 뒤 폴란드에 놀러온 독일인 관광객이 민족민주당 지지자들에게 집단폭행당하는 일이 벌어졌고, 이 일을 계기로 독일과 폴란드에서 반폴란드, 반독 정서가 갈수록 커진다. 히틀러는 정서를 직접 가라앉힐 수 없다면 차라리 맞불을 놓기로 한다. 그 방법은 바로 가짜 전쟁을 벌이는 것. 물론 진짜로 총 들고 싸우는 건 아니고 관세전쟁을 벌이는 것으로, 독일이 폴란드산 물품에 관세 100%를 매기고, 폴란드는 히틀러 컴퍼니의 도움을 받아 이를 우회하여 물품을 파는 것으로 겉으로는 싸우면서 실질적으로는 양쪽 다 이득을 보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덕분에 독일과 폴란드 모두 경제가 빠르게 발전한다.
그리고 히틀러가 직접 베를린에서 자신을 믿지 말라는 연설을 하여 독일의 민주주의 지수를 끌어올리고, 레토가 대선 출마를 결정하며 중도 계열 정당들이 레토를 지지하고, 독일 공산당은 사민당과의 후보 단일화에 실패하고 도리어 당원들이 급속히 이탈하기 시작한다. 아직 힌덴부르크가 레토포어베크보다 근소한 우위에 있었지만, 갤럽의 여론조사 데이터를 이용해 선거전략을 구상하고 거리 유세, 라디오 방송 등으로 점차 지지율이 역전되기 시작한다.
한편 국제연맹에서는 에티오피아와 튀르키예가 독일의 국제연맹 상임이사국 가입을 찬성하며, 독일을 상임이사국, 폴란드를 준상임이사국으로 승격하는 조건으로 관세전쟁을 멈추라고 중재하면 된다고 주장한다. 프랑스는 이에 반대했지만 다른 국가들은 모두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다.
그리고 마침내 대선 결과가 발표되는 날, 레토포어베크가 힌덴부르크를 71% 대 24%라는 압도적인 표차로 누르고 당선된다. 레토포어베크는 원 역사의 힌덴부르크와 정반대의 행보를 보이며 관세전쟁을 끝낼 준비를 한다. 프랑스 쪽에서는 여전히 이를 방해하고 있었지만, 프랑스의 채권자인 모건 하우스가 나서서 프랑스 정부를 압박하자 간단히 해결된다. 그리고 레토포어베크가 직접 바르샤바로 향해 폴란드 대통령 모시치츠키와 회담을 가지며 관세전쟁은 끝나고 관세협정이 맺어진다.
- 트로츠키의 중앙인민위원회 부의장 등극
트로츠키가 레닌의 믿음을 사면서 스탈린을 밀어내고 중앙인민위원회 부의장이라는 2인자 자리에 오르게 된다.
- 에티오피아의 상황 변화
히틀러 컴퍼니가 아스카리를 비롯한 흑인들을 지원하는 것을 본 에티오피아가 히틀러 컴퍼니의 투자를 받고 싶다고 요청한다. 이에 히틀러는 철도 개발 및 트랙터 지원, 공립학교와 병원을 비롯한 각종 시설들의 건설, 철도 부설 10년 후에는 국가에 양도까지 하겠다며 빵빵한 지원을 해주고, 그 대가로 국제연맹에서의 지원과 커피 수출권을 받기로 하고, 이를 이용해 커피하우스 사업을 하기로 한다. 이후 에티오피아는 약속대로 독일의 국제연맹 상임이사국 가입에 찬성한다.
- 텔레비전의 발명
에디슨이 고등발명연구소를 통해 원 역사보다 일찍 텔레비전을 발명한다. 그리고 독일 기업의 협조를 받아 대량생산을 시작한다. 그리고 독일 대선 중 최초로 공개, 소련에서 추방당한 독일인들이 조국으로 돌아오는 광경과 인터뷰를 텔레비전으로 보여준다. 여기에 하인리히 힘러에 관한 이야기와 예루살렘 회담 역시 텔레비전으로 방영되면서 인기를 끌었다.
- 소련의 종교 탄압 저지와 교회 일치 운동을 위한 예루살렘 회담
지금까지는 히틀러가 트로츠키의 공격을 방어하는 식이었지만, 히틀러가 반대로 소련을 공격하기 위해 종교를 이용하기로 한다. 이를 위해 비오 11세에게 소련에서의 정교회 탄압 건으로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한다. 그리고 케렌스키에게 트로츠키가 중앙위원회 부의장에 임명되고 스탈린은 쫓겨날 처지라는 소식과, 대대적인 정교회 탄압이 이뤄지고 있으며 남은 이들은 지하로 숨어들었다는 소식을 전달받는다. 이를 이용하면 소련을 내부부터 흔들 수 있을 테니 히틀러는 로마 교황청과 콘스탄티노플 교회를 이용하기로 한다. 문제는 로마 교황청은 앞서 쌓아놓은 인맥 덕분에 협조할 테지만, 콘스탄티노플 교회는 1453년 동로마 멸망 이후 이슬람교가 장악한 튀르크 특성상 지금 나설 만한 상황이 아니라는 것. 이에 히틀러는 직접 케말에게 연락하기로 한다.
튀르키예는 튀르키예 독립 전쟁으로 그리스와 치고받은 데다 독립 이후로도 그리스와의 갈등이 심해 그리스-튀르키예 인구 교환을 앞두고 있었지만 그리스인과 튀르크인을 구분하는 것도 힘들고, 이들을 추방하든 받아들이든 간에 문제가 많은 상황. 그러다 히틀러가 이번 협상을 중재하고 싶다는 전보를 보내자 한 명만 나선다면 이 문제가 해결될 거라며 히틀러를 튀르키예로 초청한다.
이후 히틀러가 직접 튀르키예에 방문하자 엄청난 인파가 몰리고 케말이 직접 나와서 포옹할 정도로 격한 환영을 받는다. 얼마 안 되는 반히틀러 근본주의 세력은 이미 히틀러주의와 케말주의가 대세인 대다수 국민들에게 찍히면서 인구 교환 이야기는 쏙 들어가며 말 그대로 히틀러 한 명만 나선 덕분에 문제가 해결된 상황. 그리고 본래 목적인 소련의 종교 탄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구텐베르크 프로젝트를 이용하기로 한다. 가톨릭/정교회를 위한 성경은 물론, 체첸의 무슬림들을 위해 코란도 찍어내서 배포하기로 한 것.
이를 위해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인 바실리오스 3세와 만나 협력하고, 소련 국경을 통해 성경과 코란을 밀수한다. 그리고 티콘 총대주교의 편지가 세상에 알려지며 전 세계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킨다. 히틀러는 이 분위기를 이용해 교회 일치 운동을 일으키겠다고 선언한다. 원 역사에서 1965년 교황과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가 함께 만나 상호파문을 취소했는데, 이를 앞당기기로 한 것. 그리고 이것을 텔레비전을 통해 실시간으로 보여주기로 하면서 텔레비전의 데뷔 기회로 삼는다. 여기에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도 동참 의사를 보이고 거기에 장로회, 루터교, 침례교, 감리교 등의 개신교 교단들까지 참여하게 되면서, 가톨릭-정교회에 그친 원 역사보다 판이 커진 기독교의 대통일이 이뤄지게 된다. 심지어 이슬람마저도 관심을 보이며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 대다수의 관심이 쏠린 상황.
소련은 처음엔 밀수된 성경을 있는 대로 사들였지만 당연히 이런 조치는 코브라 효과를 불러일으켰고, 태도를 바꿔 전 세계에서 쏟아지는 비난에 대응하면서 밀수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고 성경을 모조리 소각하여 밀수를 틀어막았다. 히틀러는 불이익이 커진 밀수꾼들이 손을 털었으니 다시 이익을 키워주기 위해 돈이 될 만한 상품을 끼워팔기로 한다. 그 상품은 바로 코카콜라. 이 작전은 먹혀들어 고위 당 간부들까지 콜라 확보에 혈안이 되고, 이를 더 부추기기 위해 아예 투명한 콜라까지 개발하기로 한다.
소련은 이를 막기 위해 당원증 갱신을 선택, 평당원도 고위 간부들을 고발할 수 있게 하고 성경을 읽거나 콜라를 마시는 것이 적발되면 직위해제, 제명까지 시키며 상호감시 및 비판 체제를 구축한다. 그리고 독일에서 교환 프로젝트로 온 농업기술 전문가들을 스파이로 의심하고 조사하던 중 힘러가 탈출하려다 사살당하는 일이 벌어진다. 히틀러는 이를 외교 문제로 키우기로 하고 먼저 라디오를 통해 이 사실을 알리고 가족들을 위한 재정적 지원 및 인터뷰, 국제연맹을 통한 규탄 성명까지 낸다. 그리고 소련이 나머지 인원의 추방을 결정하자, 소련에서 추방당한 독일인들이 조국으로 돌아오는 광경과 인터뷰를 텔레비전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힘러를 독일의 영웅으로 만들고 하인리히 힘러의 노래까지 만들어 퍼트린다.
그리고 곧 있을 교단들 간의 회담 장소로 예루살렘이 선택된다. 하지만 너무 많은 종파가 끼어들어 다들 어떻게든 자기 존재감을 내보이려는 탓에 합동 성명문에 대한 합의가 이뤄지지 않은 상황. 이에 히틀러는 자신이 예루살렘으로 가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한다.[22] 회담 과정은 철저히 비공개로 이루어졌으며, 1차 회의는 각 종파의 교리 차이로 인해 딱히 좋은 결과를 내지 못했지만 히틀러는 오히려 기자들에게 긍정적인 메시지를 전달한다. 이는 원 역사의 필라델피아 제헌회의를 참고한 것으로, 텔레비전을 통해 전 세계의 눈이 예루살렘에 향하고 있는 와중에 이런 메시지를 내놓으면 교회도 서로 양보할 수밖에 없기 때문. 이 와중에 구텐베르크 프로젝트와 히틀러 컴퍼니의 종교의 자유를 위한 움직임에 각 기독교 종파는 물론 유대교, 힌두교, 불교, 시크교, 조로아스터교, 자이나교, 이슬람, 무신론자 연맹에서까지 사람들이 히틀러에게 찾아와 감사를 표한다.
한편 이 와중에 에드워드 왕자와 리펜슈탈의 스캔들이 터지고, 중국에서는 천중밍이 공세를 통해 도시를 고립시키는 일이 일어난다. 이때 히틀러가 베를린 봉쇄를 떠올리고 비행선을 이용해 도시에 보급을 한다는 아이디어를 내자, 교황청과 에케너, 니미츠가 비행선을 지원하고, 호위 파일럿들에게 플라잉 크루세이더라는 이름을 붙인다. 거기다 다른 교단 종파들도 모두 손을 잡고 광둥성 수송작전을 지원하였으며, 유대교, 시크교, 힌두교, 이슬람, 불교 등등이 모조리 지원을 결정하면서 광둥성은 종교의 자유의 상징이 된다.
그리고 마침내 로마 교황, 콥트 교황, 콘스탄티노플 세계 총대주교 셋이 만나 포옹하고 상호파문을 취소하며 화해하고, 세계 인권 선언을 발표하는 것으로 예루살렘 회의는 마무리된다. 이외에 이슬람, 유대교, 힌두교를 비롯한 세계 각지의 종교 단체들이 50개 정도 모여들어 종교적 화해와 세계 인권 선언 승인을 하기도 했다.
- 세계 인권 선언오늘 우리는 단순한 종교적 합의 그 이상을 이루어냈습니다. 예루살렘에 모인 기독교계를 포함한 50개의 종교단체들은 한 선언에 동의를 표했습니다. 바로 전 세계 시민들이 마땅히 누려야 할 인권에 대해서입니다. 오늘날 세계 각지에선 전쟁과 기아, 종교 탄압이 자행되고 있으며... (중략)제1조. 모든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로우며 동등한 존엄과 권리를 지닌다. 모든 사람은 이성과 양심을 가지고 있으므로 서로를 형제애의 정신으로 대해야 한다. (중략)모든 사람은 자기 생명을 지킬 권리, 자유를 누릴 권리, 그리고 자신의 안전을 지킬 권리가 있다. 어느 누구도 노예가 되거나 타인에게 예속된 상태에 놓여선 안 된다. (중략)모든 사람은 자신의 의견을 자유롭게 표현할 권리를 지닌다. 이 권리는 남에게 간섭받지 않고 자신의 의견을 가질 자유. 그리고 국경에 구애받지 않고 모든 매체를 통하여 정보와 사상을 모색하며 전파할 자유를 포함한다. (중략)모든 사람은 자신의 권리와 의무, 자신에게 씌워진 형사상 혐의에 대해 독립적이고 공평한 법정에서 공정하고 공개적인 재판을 받을 평등한 권리를 가진다. 또한 범죄혐의로 고발당한 모든 사람은 자신의 변호를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이 보장되는 공개 재판에서 법률에 따라 유죄로 입증될 때까지 무죄로 추정받을 권리를 가진다. 누구도 행위 당시의 국내법 또는 국제법상으로 범죄에 해당하지 않는 일을 행한다면 유죄 판결을 받지 않는다. (중략)모든 사람은 사상, 양심 및 종교의 자유에 대한 권리를 가진다. 이러한 권리는 종교 또는 신념을 번경할 자유. 단독 또는 다른 사람과 공동으로 선교, 행사, 예배 및 의식을 통해 자신의 종교나 신념을 표명하는 자유를 포함한다. (후략)- 317화 디그니타스 인피니타(Dignitas Infinita) 中
히틀러가 관세전쟁 종전, 예루살렘 회담, 중국 사건까지 모든 걸 하나로 묶어서 끝내고 소련에 결정적인 한 방을 먹이기 위해 몇날 며칠을 고민한 끝에 세계 인권 선언을 작성하였다. 그리고 예루살렘 회의의 마무리에 이것을 발표하며 결정타를 박는다. 이 모습에 감화된 소련 스파이가 전향하는 일이 벌어진다. 그리고 텔레비전을 통해 각국에 세계 인권 선언을 맞춰서 발표하며 각국의 국뽕을 채워준다.
- 단치히 테러 미수 사건
단치히의 독일 민족주의 단체가 독일과 폴란드의 화해 분위기에 격분해 테러를 일으키려고 계획했지만 CIA에 적발되어 일망타진되었다.
- 히틀러 컴퍼니 자체 화폐 발행
케인스와 슘페터가 H 크레딧이라는 히틀러 컴퍼니의 자체 화폐 발행을 제안한다. 공화국 기사단 지부를 쇼핑몰 삼아 사용할 수 있게 하자는 것. 이는 국경과 국가를 가리지 않고 사용할 수 있는 초국가적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나 다를 바 없기에 히틀러는 당장 받아들이긴 힘들지만, 대공황이 찾아올 경우 대비하기에 매우 좋은 시스템이기에 샤흐트를 끼워서 세 명에게 프로젝트를 맡긴다. 이후 H 크레딧은 대공황 시기에 마침내 활용된다.
- 소련과 히틀러 컴퍼니의 조선 독립운동 지원
소련이 만주 조선인들 사이에 파고들면서 독립운동을 지원하기 시작한다. 히틀러는 이미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이 옅어진 데다 조선 독립은 이 시대의 조선인들이 결정할 문제였기에 어디까지나 유일한이 사비로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하는 것을 눈감아주는 정도였지만, 소련이 조선에 손대기 시작했다면 자신도 나서야 한다고 판단, 유일한의 소개로 만난 김좌진, 이범석, 홍범도와 손을 잡는다.
소련이 뜬금없이 조선에 손댄 것은 바로 히틀러주의의 모순을 공격하기 위해서였다. 히틀러주의는 자유와 평등을 지지하지만 문제는 식민지. 이 시대의 열강들은 죄다 식민지를 갖고 있는데 식민지 해방을 지지하면 유럽이 등을 돌릴 것이고, 반대로 식민지 해방에 반대하면 제국주의 편을 드는 꼴이 된다. 마침 1925년 여름 을축년 대홍수가 일어날 테니 그 틈을 파고들면 조선을 공산주의 국가로 독립시킬 수 있는 것. 이에 히틀러는 조선 독립은 피할 수 없으니 제3의 방식, 우리만의 방식으로 민족주의를 이끌기 위해 국민군단이 간도를 확보하게 만들고 한족, 만주족, 유대인, 조선인, 몽골족까지 다섯 민족이 힘을 합친 나라를 세우는, 말 그대로 오족공화를 실현하기로 한다. 그리고 국민군단은 소련의 지원으로 창설된 고려 해방전선보다 선수를 쳐서 보민회를 습격하고 간도를 장악한다.
일단 소련의 극동 침공은 막았지만 식민지에 관한 입장 문제가 남아있는 상황. 그런데 뜻밖에도 원 역사에서 김일성과 어울리던 빨갱이로 알려진 박헌영이 히틀러주의를 철학적으로 해석하여 퍼트리며 강렬한 반공주의를 내세우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 박헌영은 히틀러 컴퍼니가 개인의 해방을 지원하지만, 개인은 히틀러 컴퍼니에 종속되지 않으며, 스스로 자립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히틀러주의라고 주장한다. 히틀러는 이것이 자신들에게 딱 맞는 이론이라 판단해 박헌영을 밀어주기로 한다.
- 프랑스의 극우 정서 재확산
세계 인권 선언과 독일-폴란드의 화해 무드로 프랑스 내에서 독일을 다시 보는 분위기가 생기면서 친독 성향이 커졌지만, 그만큼 반독 성향도 커지고 반유대주의 극우 성향의 민족주의자들도 날뛰기 시작한다. 분서로 비웃음을 받았던 악시옹 프랑세즈도 다시 세를 넓히기 시작했고, 괴한들이 히틀러 셰이크와 모터스, 공화국 기사단 지부와 샤넬 매장까지 습격하는 일이 벌어진다. 소련은 이 분위기를 이용해 프랑스 공산당에게 자금을 지원, 민족주의자들을 더더욱 부추겨 프랑스를 혼란에 빠트리라고 지시한다.
히틀러가 이 상황을 타개하겠다고 투자를 늘렸다간 독일이 프랑스 경제를 장악한다는 비난만 들을 테고, 반대로 투자를 줄이거나 발을 빼면 프랑스 경제는 악화되고 민족주의자들은 더더욱 날뛰게 될 게 뻔해서 딜레마에 빠진다. 이에 히틀러는 아예 자신이 민족주의자들을 지원하면 된다는 발상을 떠올린다. 극우 세력 간에도 다툼이 있을 테니 이들 사이에 트로이 목마를 심어서 균형을 맞추고, 여차하면 이들이 자신의 돈을 받아먹고 있었다는 사실을 터트려 몰락시키면 되는 것. 그리고 겉으로는 괴한들의 습격으로 인한 부상자들을 찾아 위로하는 정도의 모습만 보인다. 그 뒤 로켓 발표로 프랑스의 극우 단체들이 타격을 입은 상황을 틈타 이 사실을 폭로해서 불의 십자단을 비롯한 극우 단체들을 더더욱 약화시킨다.
- 히틀러의 국제인권 위원회 의장 선출
세계 인권 선언 덕분에 히틀러가 국제 청소년 교류 위원회에 이어 국제인권 위원회 의장으로 선출된다.
- 미국과 독일의 국제연맹 상임이사국 가입 및 폴란드의 준상임이사국 승격
독일-폴란드 관세전쟁이 끝나면서 독일이 국제연맹 상임이사국으로 가입, 폴란드가 준상임이사국으로 승격되고, 이를 해결한 공로로 미국도 국제연맹 상임이사국으로 가입한다. 그리고 미독관계가 매우 끈끈해지면서 미국이 프랑스에게 자유의 여신상을 받았던 것처럼 독일에게 동상을 보내주기로 한다. 그 동상의 디자인은 히틀러가 맡게 된다. 한편 이와 별개로 러시모어 산에도 조각상 건설이 진행된다.
- 황고둔 사건 저지
히틀러가 하얼빈의 유대인 공동체를 통해 무타구치 렌야가 원 역사보다 몇 년 빨리 황고둔 사건을 일으키려고 한다는 정보를 전달받자, 먼저 장쭤린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오렌지 플랜을 시행한다. 그 뒤 히틀러 컴퍼니의 보안부 요원들이 철도 경비대로 파견되어 철도를 지키다가 일본군 공병대가 철도에 폭탄을 설치하려는 것을 목격하고 체포를 시도하다 일본군이 저항하자 비행선과 컨테이너를 통해 전차까지 지원받아 공격하여 궤멸시켰다. 일본 측에서는 필사적으로 오해라고 주장했지만 당연히 안 먹혔고, 일본은 제멋대로 타국 원수를 암살하려 한 데다 군대가 고작 사기업 경비대에게 격퇴당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일본은 전 세계의 규탄과 비웃음을 받고 일본 경제는 나락을 가게 된다. 히틀러는 이 참에 확실하게 만주를 집어삼키기 위해 중국에서 여론전을 펼칠 겸 코카콜라를 비롯한 상품 생산량을 늘리고, 조선인들과 유대인들을 동원해 만주를 지키기로 한다.
한편 렌야는 황고둔 사건이 실패하자 시선을 돌리겠다고 상하이에서 일본인 승려 몇 명을 습격한 후 중국인들이 일본 거류지를 습격한 것으로 꾸미는 자작극을 일으키자는 발상을 하지만, 이 발상을 들은 해군 쪽에서는 오히려 관동군을 막으려 한다. 일본 내에서는 TV 송출을 중단해 소식을 숨기려 했지만 공화국 기사단 지부를 통해 정보가 더 빠르게 퍼져나갔고, 쌀값 폭등으로 일본에서 사상 처음으로 반전 시위가 일어나며 천황을 중심으로 한 나라의 근간 자체가 흔들리기 시작한다. 결국 렌야를 비롯한 관련자들을 소환해 조사 및 처벌을 약속하고, 내각 총사퇴를 하기로 한다.
히틀러는 이 틈을 타서 천황과 황실에 반대하는 일본인들을 키워주기로 했고, 마침 자기한테 친필 편지를 보낸 노부히토와 인연을 맺는다. 그리고 일본 정부에 공화국 기사단을 핍박하는 일이 없도록 하고, 일본군이 시베리아 극동에서 수집한 정보를 공유하라는 조건을 내건다. 이후 주동자들은 대부분 할복했지만, 렌야는 그대로 도주해버린다.
- 을축년 대홍수
1925년 여름 을축년 대홍수가 일어나자 소련이 이 틈을 파고들려고 하지만, 히틀러 컴퍼니가 비행선을 이끌고 먼저 구호를 온 것도 모자라 히틀러가 직접 조선에 방문하며 히틀러 쪽이 조선인들의 민심을 얻게 된다.
- 커피하우스 사업
을축년 대홍수 당시 히틀러가 조선인들을 구호하는 모습과 박헌영의 주장을 인상 깊게 본 처칠이 식민지 관련 문제에 관한 도움을 요청한다. 처칠은 백인의 의무를 떠들면서 식민지 유지의 필요성을 역설했지만 히틀러는 어차피 식민지가 독립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그의 착각을 이용하기로 하고 경제와 문화를 퍼트려 식민지 젊은이들을 끌어들이기로 한다. 이미 공화국 기사단 지부가 각국에 존재하지만 단원이 아닌 사람까지 끌어들일 수는 없는 상황. 마침 에티오피아산 커피를 수입하고 있으니 본격적으로 커피하우스 사업을 시작하기로 한다. 커피는 물론 음악, 보드게임과 던전&워리어, 투탕카멘 카드 등을 즐길 수 있는 문화공간으로 만들어 자연스럽게 식민지 젊은이들의 마음을 얻는 것이 목적.
- 이산가족 상봉 프로젝트
스탈린이 국제연맹에 소련 특별 전권대사로 파견되어 세계혁명 노선의 포기 선언을 한다. 물론 이것은 상대방을 방심시키는 화전양면전술에 지나지 않았으며, 선언이 나온 직후 프랑스와 벨기에에서 히틀러 컴퍼니의 라디오와 텔레비전의 독점을 걸고 넘어진다. 물론 이것 자체는 충분히 문제 삼을 만한 일이긴 하지만 타이밍이 너무 공교로운 것을 볼 때 소련의 수작이 분명한 상황. 각국의 정치인들은 소련의 말에 넘어가 낙관에 빠졌기에, 히틀러는 대중을 설득해야 한다고 판단한다. 러시아 내전 이후 수십만, 수백만 명의 백계 러시아인들이 해외로 도망쳤으며 그 중 가족들끼리 헤어진 사례가 많다는 점을 이용, 남북 이산가족 상봉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텔레비전을 통해 이산가족을 찾아주자는 아이디어를 낸다. 대부분은 백계 러시아인들이지만 내전이 벌어졌던 이탈리아를 비롯해 세계 곳곳에 이산가족이 있으니, 그야말로 전 세계인들이 참여하는 프로젝트가 된 것.
이산가족 상봉 프로젝트가 발표되자 스탈린의 계획은 그대로 박살 나고, 러시아 이민자들은 하나로 뭉치게 되었으며, 공화국 기사단도 이산가족 상봉에 힘을 보탠다. 그리고 라디오와 텔레비전을 통해 재기하려던 파시스트들은 외면을 받게 된다.
- 팽르베선 건설
독일이 크루프를 통해 생산한 신형 전차를 만주를 지키기 위해 보냈다가 프랑스에서 황고둔 사건을 핑계로 국제연맹 조사단을 보내 베르사유 조약 위반 사실을 걸고 넘어지려 든다. 명목상으로는 장쭤린과 봉천군벌이 자체적으로 추진하는 프로젝트이므로 걸릴 만한 건덕지는 없었지만 프랑스가 이 사실을 눈치채고 독일을 따라 신형 전차를 개발하고 나서 극우 정권이 들어선다면 프랑스에 대한 인맥이 끊어지는 것은 물론이요, 자칫해서 독일을 침공했다간 그대로 독일이 삼켜질지도 모르는 상황. 어떻게든 프랑스의 군사력을 정체시키기 위해 프랑스가 만주에서 눈을 돌리고 다른 데 힘을 쏟게 만들고자 마지노선을 떠올리고, 프랑스가 마지노선이 아닌 팽르베선을 짓게 만들기로 하고, 이를 위해 실제 히틀러가 했던 라인란트 재무장에 대한 정보를 흘린다. 그리고 프랑스는 여기 그대로 낚여서 팽르베선 건설을 밀어붙인다. 그 와중에 원 역사와 달리 벨기에 국경까지 선을 연장해서 짓는 바람에 벨기에가 독일 쪽으로 붙어버렸고, 건설 과정은 원 역사와 비슷하게 히틀러 컴퍼니 자회사가 맡아서 설계도까지 히틀러 손에 들어온다.
- 인공위성 개발
고다드가 개발한 로켓 기술의 발전으로 저궤도에 로켓을 올려 지구를 공전시키는 일종의 인공위성 발사를 추진한다. 히틀러는 이 인공위성에 전 세계의 언어와 음악을 담은 황금 레코드판을 싣고 쏘아 로켓을 인류의 희망의 상징으로 삼기로 한다.
- 광란의 20년대
대공황이 얼마 남지 않은 시기, 플로리다 부동산 개발 붐이 불면서 흐름에 탑승하지 않으면 바보 취급을 받는 상황에서도 히틀러 컴퍼니는 오히려 보수적인 자세를 취하자, 그동안 히틀러 컴퍼니에 억눌려 있던 회사들은 신나서 날뛰기 시작한다. 소련이 세계혁명 노선의 포기 선언을 한 것도 대공황이 닥칠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고, 만약 대공황이 닥치고 거품이 꺼진다면 그때를 틈타 자본주의 국가들의 붕괴를 노릴 것이 뻔했다. 때문에 히틀러는 대공황을 대비한 방주 계획을 세우고, 모건 하우스 역시 여기에 동참한다. 그리고 소련이 대공황을 노려 이득만 챙겨서 빠져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거꾸로 소련이 빠져나가는 것을 두고 대공황을 일으키려는 것이라고 선동한다.
- 대공황
원래 후버가 취임한 1929년부터 시작되어야 할 대공황이 아직 쿨리지가 대통령으로 있는 1928년부터 터진다. 검은 수요일로 불리는 월가 대폭락으로 대공황이 시작되면서 낙관론을 펼치던 쿨리지 대통령은 레임덕이 와버렸고, 아직 상무부 장관이던 후버는 일명 후버 플랜을 작성해 기업이 함부로 임금을 삭감하거나 노동자를 해고하지 못하도록 하고, 관세를 대폭 높인다면 대공황을 극복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런 조치가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켰다는 것을 아는 히틀러는 그의 주장을 단칼에 자르고 케인스, 슘페터, 샤흐트와 논의해서 만들었던 H 플랜을 내놓는다. 경제가 회복될 때까지 실업자들에게 임시 일자리를 제공하는 히틀러 컴퍼니만의 뉴딜 정책.
한편 휴이 롱은 지지자들과 함께 관세 도입에 반대하며 워싱턴 D.C.로 행진하고, 루스벨트도 뉴욕에서 라디오 및 지지집회를 열면서 다음 대통령이 되기 위한 사도들의 전쟁이 시작된다.
소련은 이때를 틈타 무정부주의자들을 지원해 라디오로 가짜 뉴스를 뿌려 뱅크런을 일으키고, 쿨리지 대통령은 이를 진정시키기 위해 라디오 방송을 통해 연설을 했지만 오히려 뱅크런을 가속시키는 악수가 되고 만다. 이에 히틀러가 제대로 된 연설문도 없이 임기응변으로 연설을 결정, 우리가 두려워할 것은 공포 그 자체이며 원초적인 집단의식과 소속감, 미국인들이 겁쟁이냐는 도발적인 질문과 개척자 정신에 대한 찬양까지 미국인들의 국뽕을 자극하는 연설을 한다."미국 시민 여러분, 저는 HC의 아돌프 히틀러입니다. 여러분께서도 이미 아시겠지만, 최근 몇 주 동안 많은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뉴욕 증권거래소에서 시작된 주식폭락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으며, 최근에는 은행들의 부실위험으로까지 번졌습니다. 저와 모건 하우스는 위기에 처한 은행들을 지키고, 예금주들을 돕기 위해 막대한 현금을 공급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 발표 직후 뱅크런은 진정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하지만 며칠 전 미국의 주요 도시들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라디오 방송이 이어지며 뱅크런이 다시 시작됐습니다. 이 라디오 방송들은 정부의 허가를 받지 않았으며, 현재 수사당국에서 범인 조사 및 검거에 나섰습니다....신문과 라디오 방송들은 경제불황, 실직, 자살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어제까지 끝없는 호황을 노래하던 자들이 오늘은 끝없는 불황을 예언합니다. 그들의 말 한마디에 우리의 미래가 결정되는 것처럼 보이죠. 하루아침에 전 재산을 날리고 좌절한 투자자, 자신들의 학비를 주식에 몽땅 탕진한 부모들의 이야기가 언론을 뒤덮고 있습니다. 어제까지 아무 문제 없던 사회가 이젠 문제로 가득해 보입니다.여러분, 잠시 눈을 감고, 그리고 다시 뜨고 주위를 둘러보십시오. 무엇이 바뀌었습니까? 공장이 멈췄습니까? 아니면 땅이 황폐해졌습니까? 아닙니다! 공장은 여전히 돌아가고 있고, 농장에서는 그 어느 때보다 풍성한 수확물이 자라고 있습니다. 물건을 만들 손과 기술, 땅을 일굴 힘과 지혜는 그대로입니다! 숫자의 장난 뒤에 가려진 미국의 진짜 힘은 조금도 상처 입지 않았습니다!그렇다면 누가 우리를 무너뜨리고 있습니까? 바로 우리 안의 공포입니다! 그리고 그 공포를 부추겨 이득을 얻으려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우리가 서로를 불신하고, 각자 살 길만 찾으며 무너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동안 쌓아 올린 모든 것을 의심하고 부정하게 합니다! 그들은 여러분이 무작정 은행으로 달려가 돈을 뽑도록 부추겼습니다. 패닉에 빠져 서로를 밀치고 먼저 구명선에 오르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미국인 여러분들을 겁쟁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니, 막대기로 쿡쿡 찌르면 움직이는 양이라고 생각합니다.여러분, 모두 주위를 한 번 둘러보십시오. 가족과 다른 시민들이 보이실 겁니다. 거리에 계시든, 아니면 집에 계시든 주위를 둘러보십시오. 어떤 얼굴이 보이십니까? 겁쟁이의 얼굴입니까? 수만 년간 이 대륙에서 살아온 원주민, 새로운 기회를 찾아 아메리카로 건너온 유럽인 개척자, 한때 노예였지만 자유를 되찾은 흑인과 동양인들. 이들이 정녕 겁쟁이로 보이십니까? 고작 확인되지 않은 속삭임과 몇 장의 불길한 신문기사에 벌벌 떨며 모든 것을 내팽개치는 겁쟁이로 보이십니까?! 서로를 밀치고 은행으로 달려가는 순진한 양 떼로 보이십니까?!모두가 두려워한다면 그 두려움은 현실로 이루어질 겁니다. 하지만 모두가 희망을 가진다면 그 희망이 현실로 이루어질 겁니다. 이제 여러분의 힘을 보여줄 때입니다! 창문을 여십시오! 발코니로 나오십시오! 거리로 나오십시오! 옆에 있는 가족과 이웃의 눈을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외치시는 겁니다!"나는 두렵지 않다! 나는 미국인이다! 나는 두렵지 않다! 나는 미국인이다!"여러분, 저와 함께 외쳐주십시오! 여러분의 심장이 뛰는 소리를, 꺾이지 않는 의지를 온 세상이 듣게 합시다! 그들이 우리에게 심으려 했던 건 공포였지만, 우리가 오늘 되찾는 건 바로 용기입니다! 그들이 우리에게 안기려 했던 건 절망이었지만, 우리가 함께 만들어갈 것은 바로 희망입니다! 자리에서 일어나십시오! 그리고 세상을 향해 외치십시오! 당신은 두렵지 않다고! 당신은 미국인이라고! 여러분은 두려우십니까?! 정말 자리에서 일어서시지도 못할 정도로 두려우신 겁니까?!"
이 연설이 송출된 직후 모든 미국인들이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나는 두렵지 않다! 나는 미국인이다!"를 외쳤고, 뱅크런은 거짓말같이 멈춘다. 이후 가짜 뉴스를 퍼트린 범인들은 밝혀졌지만 소련이 이들을 지원했다는 증거는 나오지 않았고, 목적도 알 수 없는 상황.
- 보너스 군대 사건
그런데 이 와중에 보너스 군대가 롱에게 합류하면서 지지율이 루스벨트를 뛰어넘고, 백악관은 이를 위협으로 간주하기 시작한다. 즉 소련의 목적은 반공 정서를 자극하여 유혈사태를 일으켜 역으로 공산주의에 대한 지지를 이끌어내는 것. 하필 시위통제를 맡은 지휘관은 반공주의자, 반유대주의자, 파시즘과 나치즘 지지자로 유명한 모즐리였다. 히틀러는 유혈사태를 막기 위해 루스벨트와 롱을 통제하기로 하고, 직접 비행선으로 시위 현장에서 연설을 한다. 그리고 시위의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연주자와 예술가들을 불러들인다.
시위대를 쓸어버리려던 계획이 어긋난 모즐리는 분노한 나머지 백악관의 명령조차 씹고 시위대를 모조리 체포해서 빨갱이라는 증거를 만들어내려고 했지만, 아멜리아의 아이디어로 히틀러 컴퍼니가 시위 현장에 사람들 대신 인형들을 남겨두는 일명 솜의 반격작전(Cotton Counter-Offensive)을 펼쳤고, 평범한 시민들까지 여기에 동참해 무려 10만 개의 인형이 모이게 된다. 얼마 뒤 모즐리가 시위 현장에 돌입하지만 거기 있던 것은 인형들뿐이었고, 이 일로 모즐리는 비웃음거리가 된 것도 모자라 직후 보직해임되고 헌병들에게 체포된다.
이 사건 덕분에 인형 판매량이 급증하고 제대군인들에 대한 관심도 커진다. 마지막으로 보너스 문제가 남았지만 정부는 보너스를 지급할 여력이 없기에 차라리 H 크레딧을 대신 지급하기로 한다. 그리고 차기 대선에서 히틀러는 루스벨트를 지지하기로 하고, 대신 롱을 러닝메이트로 삼게 한다. 그리고 협상 마지막 날 드디어 방주 계획이 공개된다. 일명 우리 시대의 번영을 위한 H 플랜. 그리고 발표를 들은 각국 대표들이 국제연맹으로 몰려들고, 히틀러 컴퍼니 측은 H 플랜을 발표하며 각국에 투자를 약속하고, 스탈린은 이에 맞서 소련 쪽에서도 투자를 약속한다.
- 스탈린 암살 사건
그런데 H 플랜의 발표를 틈타 뜻밖에도 소련 측에서 스탈린을 암살하는 초유의 사건이 터진다. 시기가 너무 공교로운 탓에 히틀러 컴퍼니가 범인으로 의심받는 상황이 되었고, 소련은 이를 대대적으로 선전하며 내부를 결집시키면서도 직접 히틀러 컴퍼니를 범인으로 몰지는 않는다. 때문에 소련이 범인이라고 주장해봐야 되려 의심만 키우는 꼴이 될 테니, 선동과 날조에는 선동과 날조로 승부하기 위해 소련이 무정부주의자들을 지원했던 것을 역이용해서 무정부주의자들을 범인으로 몰아 음모론을 만들어낸다.
얼마 뒤 각국의 무정부주의자 단체들이 줄줄이 자기들이 범인이라고 주장하는 성명을 내고, 안톤 고르디옙스키에게서 들은 정보를 퍼트리면서 외교관으로 위장한 소련 스파이들이 줄줄이 페르소나 논 그라타로 지정되어 추방당하는 일이 일어난다. 이제 소련은 히틀러 컴퍼니에 신경 쓰기 힘들어졌고, 누가 범인인지도 알기 힘들어졌다.[23] 그리고 히틀러는 다름 아닌 로켓을 반격 수단으로 삼기로 한다.
- 로켓 뉴프런티어 1호 공개
독일에서 공화국 여신상이 공개되는 날, 히틀러는 자신이 개발한 로켓 뉴프런티어 1호의 모형을 같이 공개한다. 그동안 로켓맨을 읽은 사람들은 모두 열광했으며, 인공위성 발사와 달 탐사 계획까지 발표하자 전 세계가 들썩였다. 대공황 시기에 경제와 전혀 상관없는 로켓에 대한 소식을 발표했음에도 사람들 사이에서 희망이 솟아오르고, 히틀러에 대한 지지 역시 솟아오른다. 스탈린 암살 사건에 대한 음모론까지 묻혀버린 건 덤.
이제 본격적으로 H 플랜을 가동하기 위해 전 세계에서 가장 대공황의 영향을 받지 않은 국가, 중국을 이용하기로 한다. 중국 경제는 은본위제와 H 크레딧[24] 중심이라 세계 금융 시스템에서 독립되어있으며, 지금은 히틀러 컴퍼니가 사실상 시장을 독점하고 있기에 대공황을 타개하려면 중국에 진출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히틀러 컴퍼니에 협력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영국과 프랑스는 자기들이 참여하지 않으면 H 플랜이 성공하기 힘들 것이라고 판단, 처음에는 거절하면서 자기들에게 더 유리한 조건으로 협상하려 했으나 전혀 아쉬울 것 없는 히틀러 측에서[25]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으면서 오히려 히틀러가 중국 시장을 독점하기 위해 일부러 자신들의 거절을 유도한 것이라는 착각에 빠져 어떻게든 H 플랜에 참여하기 위해 H 크레딧을 중국 시장에서 사실상의 화폐로 인정해주며 적극적으로 협력하기로 합의한다.
- 찰스 린드버그의 대서양 무착륙 횡단
찰스 린드버그가 원 역사처럼 대서양 무착륙 횡단 계획을 발표하는데, 원 역사와 달리 파리가 아닌 베를린을 목적지로 잡고, 심지어 비행기 이름을 스피릿 오브 히틀러로 짓는다. 이에 히틀러도 린드버그를 돕기 위해 비행기에 신형 무전기를 탑재하고 길을 안내하기 위해 비행선을 무려 열 대나 띄우기로 한다.
1928년, 마침내 대서양 횡단이 시작되는데, 하필 뉴욕-베를린 최단 루트에 허리케인이 발생해 우회하며 4시간이 더 걸리게 되었고, 베를린에는 밤 11시에나 도착할 수 있는데 자칫하면 어둠 속에서 길을 잃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히틀러가 라디오로 이 사실을 알린 덕분에 독일인들이 자기 집은 물론 자동차까지 이끌고 나와 베를린까지 이어지는 길을 모두 밝혔고, 이를 본 린드버그는 명대사를 남긴다."독일의 빛이 보인다. 저것이 독일의 불빛이다."
이후 린드버그가 마침내 베를린에 착륙하며 또다시 미국-독일 관계의 진전을 이루어냈고, 그 뒤에는 하와이-베이핑 횡단을 계획한다.
- 히틀러의 국제연맹 사무총장 선출
네빌 체임벌린이 히틀러를 통제하겠다며 국제연맹 사무총장으로 추천한다. 하지만 나중에 생긴 유엔 사무총장이면 모를까 국제연맹 사무총장은 강대국들의 꼭두각시 자리에 지나지 않기에 히틀러에게는 족쇄나 다름없었다. 어차피 체임벌린을 비롯한 일부 정치인들만 주장하는 거라 히틀러는 신경 쓰지 않으려고 했으나, 일반 회원국들은 일제히 이에 찬성한다. 상임이사국들은 이에 반대했지만, 독일-폴란드 관세전쟁 이후 폴란드가 준상임이사국으로 승격되었기에 준상임이사국인 폴란드 역시 이사회 안건 상정이 가능했고, 일반 회원국들은 상임이사국들이 이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H 플랜에도 반대하겠다고 선언한다. 말 그대로 약소국들이 뭉쳐 강대국들을 압박하게 된 것이다.
결국 히틀러는 부전조약을 맺는 조건으로 국제연맹 사무총장직을 수락한다. 그리고 환호하는 인파 앞에서 짧고 굵은 연설을 한다."오늘 제가 말씀드릴 건 그리 많지 않습니다. 우린 새로운 시대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4. 3부(371화 ~ 462화)
- 아프가니스탄 쿠데타 미수 사건
히틀러가 국제연맹 사무총장에 취임한지 4년차인 1932년, 고등발명연구소에선 이미 드론이 개발되었다.[26] 한편 소련에서는 트로츠키의 지시로 부하린이 히틀러의 눈을 아프가니스탄에 묶어놓기 위해 국왕의 유럽 순방을 틈타 쿠데타를 일으킨다. 이에 아프가니스탄 국왕 아마눌라 칸은 히틀러에게 무릎 꿇고 애걸복걸한다. 아프가니스탄은 제국의 무덤이라 불릴 만큼 전투가 힘든 곳이지만, 국왕이 히틀러에게 도움을 청한 이상 명분은 갖춰졌고, 반란군의 목적은 산맥 점령이 아닌 카불 점령이므로 굳이 산맥을 돌아다닐 것 없이 반란군이 카불까지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한 번에 없애버리면 주력군은 분쇄될 것이고, 아프가니스탄 국민들의 대다수인 파슈툰족들이 알아서 잔당들을 토벌할 것이었다.
히틀러는 그동안 개발한 드론들을 이용해 데저트 스톰 작전을 시행한다. 그리고 반란군이 카불에 다가오자 드론을 보내 그대로 반란군 수장 하비불라 칼라카니를 암살하고, 반란군 사이에 진이 쫓아온다는 공포가 퍼지기 시작한다. 여기에 드론에 사이렌을 달아 반란군이 더더욱 겁먹게 만들었고, 이에 반란군에 붙었던 마을들도 돌아서고 반란군 병사들도 도망치면서 그대로 반란군은 와해된다. 그리고 히틀러는 보이지 않는 신비를 다스리는 사령관이라는 뜻의 '아미르 알 가입', 진을 다스리는 분이라는 뜻의 '사히브 알 진'으로 불리게 된다.
이로써 아프가니스탄 쿠데타 사건은 마무리되었지만, 소련의 목적은 다른 곳에 있었다.
- 일본 쇼와 천황 암살 사건
히틀러의 눈을 아프가니스탄에 묶어놓는 사이 소련은 공산주의 성향의 조선인들을 이용해 일본에서 연쇄폭탄 테러를 일으킨다. 히틀러 컴퍼니 보안부에서 17건의 테러를 막는데 성공했지만, 8건은 막지 못해 그대로 20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한다. 이로써 수많은 일본인이 조선인들에게 분노를 쏟아내며 학살이 벌어질 것이 뻔했기에 히틀러는 재일 조선인들을 모두 피난시키는 페이퍼클립 작전을 시작한다. 이게 가능했던 것은 관동 대지진 이후 모든 재일 조선인이 공화국 기사단에 가입했기 때문.
그리고 예상대로 분노한 일본인들에 의해 조선인을 대상으로 한 학살이 벌어질 뻔했지만 히틀러 컴퍼니 쪽에서 한 발 앞서 조선인들을 모두 항구로 이동시킨다. 하지만 조선인들의 숫자에 비해 배가 부족하고 폭도들이 점점 다가오는 절체절명의 찰나, 히틀러 컴퍼니와 협력하던 기업들이 자유기업 연맹을 설립, 모두 조선인들을 태우러 배를 보낸다.
테러를 주도한 것은 다름 아닌 기타 잇키로, 국가개조를 위해 소련과 손을 잡은 것이다. 이후 혼란을 틈타 야스히토와 손잡고 반란을 일으켜 도쿄 대부분을 장악하나 이 광경을 본 쇼와 천황은 단호히 거부했다. 그런데 허탈하게 황궁을 떠나려 한 히로히토가 차에 탑승한 순간 폭탄이 터져 그대로 폭사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한다. 이 대외비 사태는 여러 첩보망을 통해 히틀러에게 알려졌으며, 해외순방 중이던 노부히토도 히틀러를 통해 알면서 결단의 기로에 놓인다. 한편 의문의 연쇄 폭탄 테러 후 내지가 본격적인 대혼란에 접어들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조선의 독립운동이 급물살을 타게 된다.
- 일본 내전
A. 1932년 상황
예상치 못한 천황의 사망을 계기로 단순 쿠데타로 끝났어야 할 이 사건은 육군과 해군 양 파벌로 갈라진 내전으로 치닫게 된다. 육군은 야스히토를, 해군과 히틀러 이하 국제연맹은 노부히토를 새 천황으로 내세웠으며, 이를 위해 히틀러는 유대 개척촌이 있는 홋카이도를 장악하고 과거 히틀러 컴퍼니에게 예치당한 황실 기탁금 모두를 노부히토에게 지원해준다. 얼마 뒤 모든 결심을 한 노부히토가 직접 라디오 연설을 하게 되는데, 놀랍게도 그는 황실 특유의 고어가 아닌, 히틀러의 연설을 참고해 지극히 대중적인 표현을 사용해 일본인들의 마음을 뒤흔든다. 그 결과 규슈 전체가 육군에 대항하는 반란에 호응해 단 3일 만에 장악되고, 노부히토를 지지하는 임시 군사정부가 수립된다. 얼마 뒤 도쿄 정부는 야스히토를 새 천황으로 옹립하고, 야스히토를 지지하는 육군이 고베 영국 총영사관을 습격하거나 렌야가 풀려나는 등 개판이 된다. 심지어 잇키는 해군 장병들의 가족들을 인질로 잡고, 규슈를 제압하기 위해 조선을 식량 공급지로 삼고, 내선일체를 내세운 자치권[27]을 보장해 조선의 협조를 구하려 했다.
결국 노부히토가 삿포로에서 즉위하면서 일본은 남쪽의 다이와[28] 천황과 북쪽의 헤이세이[29] 천황이라 불리는 두 명의 천황이 대립하는 구도에 놓이게 된다. 헤이세이 천황은 도쿄 정부가 구상하려는 조선 계획에서 더 나아가 즉각적인 자치권을 약속해 조선을 온화적으로 대하려는 계획을 발표한다. 한편 국제연맹에서 영국 총영사관 습격 사건이 거론되고 도쿄 정부와 삿포로 정부가 서로 정통 정부를 자처하며 싸우는 상황에서, 히틀러는 도쿄 정부의 영국 총영사관 습격 사건 조사를 위해 국제연맹 조사단을 파견하려 하자, 도쿄 정부는 이들을 감시한다는 조건을 내걸어 승인했지만, 이것까지 히틀러의 예상 범위에 있었기에 CIA 산하 신규 특수부대 707 부대를 통한 총영사관 인질 구출 작전을 감행한다. 이 작전은 성공적으로 이루어져 마침 쿠데타에 반대하는 고베 시민의 대규모 시위로 도시 전체가 혼란에 빠진 틈을 타 국제연맹 조사단으로 위장한 707 부대가 구치소를 습격해 일본군 초병 전원을 처리하고 관련 증거 수집과 함께 인질들을 구출해 도쿄 정부를 궁지에 몰아넣는다.
그래서 도쿄 정부의 잔혹 행위가 세상에 알려지자, 곧바로 국제연맹의 맹폭적인 지탄이 쏟아졌고 이에 열받은 도쿄 정부 측 대표단은 국제연맹 탈퇴를 선언하며 퇴장하지만 반대로 삿포로 정부 대표단은 본 사건의 강력한 유감 선언과 반란군들에 대한 책임을 엄중히 물겠다고 선을 그은 덕에 아주 깔끔하게 일본의 상임이사국 지위는 물론 합법 정부로서의 정통성을 모두 획득하여 외교적 우위를 점한다.
한편 고베 구출 작전 중 비밀리에 합류한 도쿄제국대 산하 전염병연구소 과학자의 다급한 망명이 받아들여져 그를 통해 도쿄 정부의 음모가 접수되었는데, 그 음모는 소련으로부터 장티푸스나 페스트 바이러스가 담겨진 생화학 무기를 입수해 규슈에 투하할 생화학전이 임박했다는 살벌한 경고였다. 이를 위해 따로 "제로 부대"라 불리는 전담 부대가 창설되어 최종 작업 중이며, 일본 현지의 습하고 더운 환경에 맞추기 위해 어딘가에서 인체실험을 자행[30]하고 있을 거라는 기밀도 전하자, 히틀러는 자국민에게도 그런 짓을 그냥 해버리는 일본 파시스트의 광기에 경악하며 이를 막기 위한 대책에 나선다. 일단 이 모든 것이 물증이 없는 불확실한 추측에 불과해 공식 고발하기엔 이르므로, 먼저 극단적 반소주의자로 꼽히는 영국의 윈스턴 처칠을 섭외해 소련의 상임이사국 자격 심사를 위한 국제연맹 대표단을 보내 코민테른의 음모에 대한 물증을 수집한다. 한편 이미 도쿄 정부에 생화학 무기가 준비된 만큼 이를 막기 위해 규슈 현지에 알렉산더 플레밍 이하 컴파운드 X 실무진들을 보내 생화학 무기가 착탄되는 순간 규슈 모든 도시에 방역을 시행할 준비를 하는 것은 물론, 삿포로 정부 측도 이 첩보를 보내 나름의 준비를 할 수 있도록 한다.
그래서 삿포로 정부는 짧은 시간 동안 황실 기금을 쏟아부어 미국산 함재기를 급히 구매해 항모 비행단의 기종 변환 훈련을 완수한 뒤,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의 지휘 하에 생화학 공격이 이뤄지기 직전에 도쿄 정부 공군의 전력을 최대한 박살 내기 위한 선제 공격을 가한다.[31] 이 공습을 통해 간토 수도권에 있던 공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혀 도쿄 정부는 도쿄 수호를 위해서라도 작전을 멈췄어야 하나, 그러면 규슈를 공격할 각이 영영 사라지는 것은 물론 아무리 소련이 도와주고 있다지만 지금 멈춘다면 혼슈 전체에 대한 해상 봉쇄가 실현되어 사멸당할 게 뻔했기에, 도쿄 정부의 핵심에 선 잇키의 주도로 작전을 철회하지 않고 그대로 강행해버린다. 이렇게 도쿄 정부 공군이 작전 강행을 하려는 정황이 특정되자, 내심 이대로 멈추길 바랬던 히틀러는 아쉬워했지만 바로 다음 수였던 최신 기술 레이더를 탑재한 특수 비행선을 비밀리에 배치한 것은 물론, 아직까지 상용화되지 않은 DDT 살충제를 비상 방역 수단으로 투입해 도쿄 정부가 바라던 기대 효과를 하나도 이루지 못해버린다. 거기다 불발된 생화학 폭탄을 통해 소련이 내전에 개입했다는 물증까지 확보당해 소련이 공식 고발당하는 처지까지 만들어버렸다.[32] 이 때문에 도쿄 정부 내부에 동요가 일자, 잇키는 이 작전 실패의 책임을 이시이 시로에게 돌려 숙청하고 은폐해버린다.
B. 1936년 상황
이후 일본 내전은 4년이나 지났음에도 전혀 해소되지 못한 채 두 진영으로 사실상 분단된 소강 상태로 접어든다. 이 지경까지 장기화되자, 내부 전열을 추스른 삿포로 정부 측 해군의 봉쇄 작전으로 혼슈 본토 전역은 물자가 희귀해질 지경에 놓여버린다. 이러한 열악한 처지를 이겨내기 위해 도쿄 정부는 총력전 체제로 전환된 뒤 의회와 모든 정당의 해산, 재벌 기업의 해체, 서양식 정장과 사치품, 자유 언론까지 전부 금지시켜 내부 혼란을 최대한 억누르려는 극단적인 통제와 이에 대비되는 농촌 지원 정책[33]으로 버티려 했다.
그나마 소련이 어떻게든 봉쇄를 뚫고 지원을 넣어주고 있던 데다 프랑스의 악시옹 프랑세즈가 도쿄 정부를 지지함으로써 이들에게도 외교적 활로가 열려있었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하지만 이들의 지지만으론 전세가 반전되긴 힘들었으며, 거기다 이전 도쿄 정부의 반인륜적 범죄가 널리 알려진 덕분에, 4년 사이에 창설된 국제연맹군이 군사 고문단 차원에서 참전할 수 있었으며, 심지어 국제연맹 소속 연합 해군이란 명분 하에 미국의 태평양 함대 중 일부가 삿포로 정부를 위해 파병하기까지 하면서 도쿄 정부는 되돌리기 어려운 수세에 놓이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도쿄 정부의 공군 책임자가 된 무타구치 렌야는 항공부대를 모조리 쓰가루해협에 투입하는 무리수를 두고, 기름이 없다는 말에 송근유를 항공기에 넣어버렸다. 그 결과 기껏 투입한 항공부대는 전투가 시작되기도 전에 절반 이상이 추락해버렸고, 그 탓에 조종사가 모자라자 제대로 교육도 못 받은 신병을 갈아넣는 막장이 발생한다.[34]
그러나 이러한 렌야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생산력이나 인력 면에서 여전히 삿포로 정부가 극단적으로 열세[35]였기에 물리적으로 도쿄 정부를 박살 내는 건 불가능했을 뿐더러, 설령 국제연맹군이 공식적으로 참전해 직접 상륙 작전에 나섰다간 엄청난 수준의 피해만 남을 게 뻔했다. 이러한 방식은 오히려 소련만 좋아할 시나리오였기에, 일단 불나방처럼 하코다테 등 삿포로 정부의 해군 기지를 노리려는 도쿄 정부의 시도를 박살 내기 위해 신기술 VT 신관을 도입해 대응을 더 효율적으로 만들고, 이 기술의 존재를 미국과 영국에게 알려 두 열강이 삿포로 정부를 도와주도록 이끌어낸다. 그 결과 물량이라는 도쿄 정부의 얼마 안 되는 장점조차 퇴색되고 만다.
결국 홋카이도를 향한 공습 시도가 모두 무위에 그치고 그 소식이 혼슈 전역의 시민들에게 알려지자, 지금까지 도쿄 정부에 나름 순응하고 살던 일본 시민들의 민심은 바닥에 떨어진다. 거기다 미국 태평양 함대가 삿포로 해군과 공동 작전을 벌이고 있다는 소식까지 알게 되자, 곧 도쿄로 미군이 들이닥칠 거라는 공포심이 만연해져 기본적인 일상부터 붕괴[36]되는 대혼란의 상태에 접어든다. 한편 내전이 터진 이래로 삿포로 정부에게 형식적으로 충성해온 규슈 7현 연합은 천황이라는 권위 자체에 근본적인 회의감을 품은 나머지, 아예 독립 공화국을 선포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도쿄 정부에 대한 신뢰를 잃은 혼슈의 거의 모든 지방들과 오키나와까지도 두 천황 모두를 따르지 않고 독립해버리는 초대형 사태로 커진다. 저러한 일본의 대분열을 본 국제사회는 공화 전국시대의 시작이라 칭한다.[37] 그나마 분열을 막으려던 일부 세력도 제로 부대의 인체실험에 대한 사실이 공개되면서 힘을 잃고 만다.
그렇게 은폐되던 제로 부대의 반인륜적 범죄는 순식간에 일본 열도 전역에 널리 알려져 지방의 분리 독립 열기는 극심해지고 도쿄 정부는 통제를 포기하는 걸 넘어 아예 무정부 상태로 붕괴된다. 한편 이러한 분열은 지금까지 고생하다 기껏 승리를 거둔 헤이세이 천황 이하 삿포로 정부 입장에서도 굉장히 나쁜 상황[38]이었기에, 이 분열을 막기 위해 국제연맹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비슷한 시기에 모든 독립 지방정부들도 긴급 구호 요청을 보낸 만큼 양측 모두의 간절한 요청을 받게 된 히틀러는 일본을 영원히 바꿔버릴 절호의 기회[39]로 삼아 일본의 미래를 논하기 위한 상하이 원탁회의를 주관한다. 한편 이 논의 과정에서 다이와 천황과 기타 잇키 등 도쿄 정부 관계자의 행방이 드러났는데, 삿포로 해군의 묵인 하에 소련 잠수함 편을 통해 블라디보스토크로 이미 망명해버렸다는 것이다. 그들을 놓아준 이유는 황족을 반역죄로 사형시킬 때 불러올 중대한 정치적 부담을 이길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40]
얼마 뒤 상하이 원탁회의가 열리고 여기에 헤이세이 천황이 삿포로 정부의 대표를 겸해 친히 회의장에 강림했지만, 이젠 천황에 대한 권위가 소멸해버렸기에 이전과 다르게 여러 지방정부 대표단은 전부 의도적으로 외면해버리는 초유의 모습이 노출[41]되었다. 이를 눈으로 직면한 헤이세이 천황은 그저 착잡했지만 히틀러는 이제 예전의 일본으로 영원히 돌아갈 수 없으니, 일본이란 나라가 사라지지 않도록 황실의 결단[42]을 촉구할 뿐이었다. 결국 헤이세이 천황이 이를 수용하여 일본 연방제국이 탄생하며 일본 내전은 종전된다.
- 조선 독립
한편 조선 국민군단은 자신이 꿈꾸는 신세계 질서를 위해 일본 양 진영의 제안을 모두 거부하고 공세 한 번으로 해방시키는 무장 독립 전쟁을 감행한다. 이를 위해 특별히 미키 마우스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장갑열차를 동원해 압록강 침공 작전을 개시한다.
미키 마우스는 압록강 국경선 일대에서 몇 번 전투를 치르고 물러났지만 사실 이렇게 물러나는 것이 계획이었다. 히틀러 컴퍼니가 이미 일본군의 암호체계를 해독한 덕분에 피해가 최소화된 반면 일본군의 피해는 심각했는데, 조선 주둔군은 이미 본토의 지원이 끊겨 고립된 반면 국민군단은 보급과 인력 문제가 없기에 국민군단과 일본군이 동등하게 싸웠다는 사실이 증명된 시점에서 이미 일본군이 패배한 것과 다름없던 것. 즉 구정 공세처럼 전략적 승리를 거둔 것이다. 그리고 전투 과정을 담은 영상 필름이 유포되고 일본군 포로의 인터뷰까지 나가자 일본인들은 동요하기 시작하고, 조선인들은 당당히 반일을 외치면서 오히려 일본인이 조선인들을 피해다녀야 하는 상황이 된다.
이 와중에 만주 국경선에 배치된 일본군은 제멋대로 만주로 진격하는 월권 행위를 저지르고, 장쭤린의 봉천군과 국민군단은 이미 이를 예상하고 진격해오는 일본군을 갈아버린다. 이는 명백한 주권 침해 행위이자, 조선을 수호할 마지막 여력도 탕진한 셈이 되었기에 이를 통보받은 히틀러는 이제 일본은 조선을 지킬 자격을 상실했다고 판단, 일본령 관동주의 반환과 조선의 국제연맹 위임통치령을 선언하며 박헌영 등 여러 방면을 통해 조선총독부에게 최후통첩을 보내버린다.
궁지에 몰린 우가키 조선총독은 결국 박헌영의 제안을 받아들여 조선에서 철수를 결정하고, 마침내 1932년에 조선은 해방된다. 내전이 중요했던 삿포로 정부는 조선 독립을 곧바로 승인하는 걸 넘어 아예 돈을 써서 진해 등 조선 여러 도시에 남은 해군 시설을 대여하는 계약을 맺는 아이러니한 행보를 보였으며, 귀향할 방법이 없어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된 조선에 살던 일본인들은 이번에도 자유기업 연맹이 수배한 상선을 통해 원하는 곳으로 태워준다.
마침내 해방된 조선에는 국제연맹의 지원을 받아 신생 정부가 수립될 예정이었으나, 조선총독부가 물러나기 전 지폐를 미친 듯이 찍어내 인플레이션을 일으키고, 화교들이 이 기회를 노리고 조선 자본에 침투하기 시작하자, 히틀러 컴퍼니가 직접 관리하기 위해 샤흐트가 먼저 파견되고 뒤이어 리히터도 아시아 출장 중 겸사겸사 들러 도와주면서 경제 위기를 극복해내었다.
이후 조선의 정식 국호는 대한민국이 아닌 대한 공화국으로 정해졌으며 박용만이 대통령, 유일한이 부통령, 박헌영이 외무장관이 되었다. 거기다 바다 건너 일본 내전이 장기전으로 길어지자 헤이세이 천황의 삿포로 정부를 도와주는 병참기지로 활용됨에 따라 건국 초 경제 안정에 도움이 될 전시 특수를 얻는 행운을 누리게 된다.
- 탈식민화 촉진
조선의 순조로운 해방이 이뤄지자, 당연히 그걸 지켜봤을 전 세계의 모든 피지배 민족에게 독립 정서가 퍼지기 시작한다. 거기다 히틀러의 국제연맹이 지배자로서의 덕목을 식민지에 베풀지 못하고 혼란만 자초할 거라면 국제연맹 차원에서 전면 개입해 그들의 독립을 이끌어낼 것이니, 지금까지의 통치 논리였던 백인의 의무와 문명화를 스스로 증명해보라는 공개 압박까지 시전하자, 독립 열망에 기름을 부은 것은 물론 반발하면 오히려 자신들이 야만적인 지배자라는 걸 자인하는 셈이었기에 프랑스와 영국 등 식민 열강들도 수세에 몰리게 된다. 반대로 독일 등 식민지를 완전히 상실한 1차 대전 패전국이나 중국, 폴란드 등 무수한 중진국 회원들은 적극 찬성하면서 히틀러의 선언을 여론전으로 막을 수도 없게 된다. - 필리핀 독립
히틀러의 연설과 조선 독립이 이뤄진 타이밍에 맞춰 미국에서도 히틀러와의 친선을 위해 필리핀 독립을 추진한다. 이 소식을 들은 히틀러는 저 결정에 시장 확보 같은 미국의 이익을 쫓기 위한 불순한 의도가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나 아무튼 무혈 해방은 좋은 일인 만큼 적극 환영해준다. - 인도 원탁 회의
조선의 해방 소식이 인도에도 알려지게 되면서 독립을 위한 인도인들의 저항이 수면 위에 오르게 된다. 이를 위해 비폭력 투쟁의 상징인 마하트마 간디가 직접 제네바까지 찾아와 히틀러를 접견하고 거기서 인도의 점진적인 해방으로 의견이 모아진다. 얼마 후 이 소식을 들은 영국 의회는 대영제국의 세계 지배에 있어 인도 지배는 매우 중요하고, 인도 식민 통치 이전에 만연했던 샤티 등 전통적인 악습을 끝낸 것에 큰 기여를 한 점 등을 들어 영국의 인도 지배를 합리화하는 등 이전보다 강한 반발을 불렀다.
하지만 인도 유지 초강경파에 속한 윈스턴 처칠을 향한 히틀러의 맞춤형 회유책이 먹혀 그가 인도 논의에서 빠져버렸고, 어느덧 16년 장기 집권 중인 영국 자유당 내각도 인도 통제에 한계가 왔음을 인정하고 있기에, 영국 수상을 필두로 영국령 인도 대표단 48명과 23개의 인도 번왕국 대표단 64명을 모두 소집해 최소 자치권, 최대 독립을 염두에 둔 인도 "원탁회의"가 런던에서 개최된다.
이후 이 회의가 어떤 식으로 흘러갔는지 별다른 묘사가 없다. 허나 인도의 외교권 회복과 국제연맹 합류가 순조롭게 이루어졌다는 언급을 통해, 영국도 인도의 독립을 승인해줬음이 드러난다. 덕분에 인도는 별다른 반영 감정 없이 영연방이란 정체성을 가지며 영국의 반공 외교 노선에 연대하게 되었으나, 아프리카 등 영국의 잔여 식민지 지역의 자치권 열망을 부추기는 결과로 마무리되었다. -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혼란
조선과 필리핀의 독립 소식, 그리고 인도조차 무혈 해방 가능성이 높아지려 하자, 프랑스가 지배하던 서아프리카와 인도차이나도 독립을 열망하는 저항의 여론이 커지기 시작한다. 하지만 프랑스는 영국이나 미국과 다르게 정치적으로 굉장히 분열된 상태다 보니, 예전부터 히틀러의 세계화를 반대하며 식민지 포기를 반대하는 극우 정당의 지지세가 강해 섣불리 영국처럼 했다가는 오히려 프랑스 정부가 무너질 위험이 컸다.[43]
그러던 차에 인도차이나 총독부가 프랑스 정부의 승인 없이 독단으로 공화국 기사단 인도차이나 지부를 금지하는 초유의 사건을 일으켰다. 이 원인은 공화국 기사단과 히틀러 컴퍼니가 현지의 민족 자본을 육성해 오히려 자신들의 특권을 빼앗으려 한다고 간주한 동남아 화교들의 로비가 먹힌 것이다.[44] 당연하게도 이 내막이 알려지자 반 총독부 시위가 매일 열리는 건 물론이며, 이 사태의 원흉인 화교들을 습격하는 증오 범죄가 자주 벌어질 정도로 치안이 악화되어 버린다.
그 지경에 가자, 오래 전부터 해방을 위해 투쟁하던 호찌민 이하 공산주의 해방 단체들이 성장하게 되는데, 특이하게도 호찌민은 예전부터 히틀러의 탈식민화 행보를 진심으로 여겼는지, 오히려 코민테른이 지령한 해방전쟁을 비현실적이라 거절하면서 자신의 이념을 버리고 오로지 민족주의 관점에 따라 히틀러와의 협력을 바라려 했다. 마찬가지로 호찌민의 이러한 이중적인 성향을 이미 인지했던 히틀러는 인도차이나 총독부가 공화국 기사단을 규제한 것과 별개로 대민 지원을 포기하지 않고 그들에게 접근하기 시작한다. 결국 헝가리 혁명에서 드러난 소련의 실태를 보며 큰 환멸감을 느낀 호찌민은 공산주의 노선을 포기하고 히틀러주의로 노선을 변경, 베트남 공산당을 베트남 독립당으로 바꾼다.
그러나 프랑스에서 악시옹 프랑세즈가 집권하면서 이런 혼란 속에서도 인도차이나에 대한 프랑스의 집착은 갈수록 심해진다. 식민지 치안병력은 대폭 확대, 총독부의 독단적인 결정이었던 공화국 기사단 금지 정책도 수년째 유지되고 있으며, 히틀러 컴퍼니의 인도적 지원이 간신히 최악의 상황을 막고 있는 상황.
- 에드워드 왕세자의 결혼식
처음엔 왕실 내부적으로 여러 반대를 받았지만 결국 영국 대중들의 지지에 힘입어 에드워드 왕자와 레니 리펜슈탈의 공개 연애는 마침내 결혼으로 꽃피우게 된다. 이는 단순히 두 인물의 결혼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평화의 시대에서 영국과 독일 간의 새로운 우호를 보여주는 사건이 된 만큼, 이미 과거 '세기의 결혼식'을 이뤄낸 히틀러 컴퍼니 측이 결혼 준비를 위탁받아 최대한 성대하고 웅장하게 만들 구상을 세우고 있었다. 그러다 동시에 진행 중이던 인도 원탁회의의 취지가 추후 인도가 독립을 하게 되더라도 영국과 인도 간의 관계가 우호적인 선에서 남을 수 있도록 끝을 맺는 것[45]인 만큼, 무수한 인도인들의 호감을 얻기 위해 이 결혼식을 영국 런던과, 인도 봄베이에서 두 번이나 하고, 특히 인도에선 모든 과정을 인도식으로 치르는 파격적인 결정을 내려, 전 세계의 굉장한 기대를 받게 된다. 이에 맞춰 히틀러는 아예 세계에서 가장 비싼 불꽃놀이를 겸할 로켓을 발사하기로 한다.
먼저 런던에서 공식 결혼식을 끝낸 뒤, 얼마 지나지 않아 2차 결혼식이 열리는 날이 오자, 사전에 간디의 요청과 아멜리아 등 결혼식 기획진들의 호응에 따라 졸지에 히틀러는 최소 수십만 명의 관객들 앞에서 인도식 축하 댄스를 추어 결혼식의 화룡점정을 담당해준다. 동시에 인도를 비롯한 공화국 기사단 지부가 설치된 전 세계의 모든 나라에서 모두 64개의 로켓이 하늘로 발사되기도 했는데, 이는 제국주의라는 구체제 정신에서 벗어나 전 세계를 존중하는 세계화를 상징하는 사건인 만큼, 로켓 발사의 본 무대가 된 인도는 무려 150만 명이나 히틀러 컴퍼니에 지원하는 역대급 성과를 남기며 2차 결혼식을 성황리에 마무리시킨다.
- 로켓 러시 현상 촉진
에드워드 왕자의 결혼식과 함께 이루어진 로켓 64개의 다발적인 발사는 곧 미국을 넘어 전 세계에 우주에 대한 막대한 환상을 불어넣게 된다. 사실 이 모든 것의 근본이라 할 수 있는 만화 로켓맨이 크게 흥행했을 때부터 이러한 환상이 미국에서 먼저 탄생했었는데, 이를 주목했던 일부 미국 기업들이 먼저 우주 산업에 뛰어든 적이 있었다. 하지만 아직 우주 산업의 기반은커녕 이론적 개념부터 제대로 완성하지 못한 20세기 중반[46]이었기에, 결국 이들은 굉장한 손해만 입고 포기해버렸다. 결국 우주 산업은 히틀러 그 자체인 히틀러 컴퍼니와 국제연맹 아니면 아무도 건들지 못했으나, 이번에 로켓 발사가 크게 실현되자 이번엔 전 세계의 기업가들이 혹해 다시 우주 산업에 뛰어들려는 현상이 발생하게 된다.
이를 잘 파악한 히틀러 컴퍼니는, 국제연맹의 명의로 된 각국을 위한 로켓을 만들고, 그 나라들은 우주 개척에 홀린 대중들의 요구를 저렴하게 만족시키는 공익 사업 모델을 제시함으로 뒤늦게 출발한 여러 후발 주자들보다 훨씬 앞서나가게 된다. 유일하게 소련만 이러한 흐름에서 벗어났는데, 히틀러가 선보이기 시작한 로켓 기술이 군사적으로 응용될 잠재력이 넘쳐난다고 판단한 트로츠키는 소련 로켓 과학의 거장, 세르게이 코롤료프 박사의 초기 연구[47]를 아낌없이 지원해준다.
- 헝가리 혁명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에서 소련이 승리한 덕분에, 원래대로라면 일찍 사라졌어야 할 헝가리 평의회 공화국은 1930년대까지 현존할 수 있었으나, 폴란드 동부를 통한 육로가 개통되었던 만큼 소련의 간섭에 너무나 휘둘리고 있었다. 더욱이 히틀러 컴퍼니와 국제연맹이 창조한 범세계적인 콘텐츠들을 바로 옆동네 오스트리아나 체코, 폴란드도 누리는 판에 헝가리는 소련 때문에 소외받다 보니, 알게 모르게 소련을 향한 헝가리 국민들의 불만이 커지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소련의 상임이사국 선발 심사를 겸할 겸 일본 내전 개입 의혹을 파헤치기 위해, 윈스턴 처칠 이하 국제연맹 조사단이 헝가리로 입국하게 되면서, 이들의 불만이 터지게 된다. 소련은 소비에트 체제의 한계라 할 수 있는 일상의 빈약함을 어떻게든 덮기 위해, 부다페스트 전체를 꾸며 국제연맹이 실상을 파악하지 못하려는 위장을 시전하려 했으나, 이를 위해 부다페스트 시민들을 과하게 몰아붙이기도 했고, 결정적으로 위장을 위해 잠시 진열한 소련산 라디오를 어느 아이가 훔쳤다가 공산당 간부에게 발각되어 구타당하는 사건이 벌어지자, 부다페스트 시민의 불만이 폭발해 대규모 폭동으로 번지게 된다. 이렇게 폭동을 일으킨 시민들이 먼저 찾아간 인물은 처칠로, 엄연한 영국의 고위 인사인 그를 지지자로 섭외한다면 자신들의 정당성이 국제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기에, 덮어놓고 호텔로 들이닥쳐 처칠에게 구원 요청을 보낸다.
이 지지 요청에 처칠은 크게 감명받았는데, 그토록 자신이 경계하던 소련 공산주의의 실태가 드러난 순간이라 기뻐한 것도 있겠지만, 마침 폭동을 주도한 헝가리 반공 비밀단체의 명칭이, 히틀러의 공화국 기사단과 뭔가 억양이 비슷한 그림자 기사단이었던 것도 큰 요인이 되었다. 그래서 단순 지지 선언을 넘어 해당 폭동의 구심점을 자처하기로 한 처칠은 단순 시민 반란이 아닌 거대한 반공 혁명으로 자리잡을 수 있도록 헝가리 임시 정부를 적극적으로 지원해줬으며, 전 세계 언론들의 시선을 이끌어 공산 정부 치하 헝가리의 상황을 직접 알리는 역할을 대행해준다.
하지만 처칠의 개입은 어디까지나 국제연맹은커녕 영국 정부와도 합의를 하지 않은 독단 행동이었기에, 국제적으로 봤을 때 외국인의 내정 간섭이나 다름없어, 소련에게는 저들을 진압할 합법적인 명분이 있었다. 그렇기에 트로츠키는 명장 미하일 투하쳅스키와 지금까지 양성한 소련 기갑부대를 대규모로 보내 헝가리 반공 혁명을 무력으로 진압하기로 결정해, 부다페스트는 바로 전쟁터로 변해버리게 된다. 그렇게 부다페스트에 도착한 소련 진압군이 가장 먼저 마주한 건 오뚝이 바리케이트와 그 위에 달린 무수한 인형들[48]로, 공장도 없는 시민군이 하루 아침에 만들 수 있도록 히틀러 컴퍼니의 싱크탱크 참모진들이 긴급하게 입안해 임시 정부에게 전달함으로써 탄생한 광경이었다. 덕분에 시가전을 준비할 충분한 시간을 벌 수 있었지만, 소련군의 규모가 대단했던 만큼 결국 전부 청소되었고 소련 전차가 그대로 돌입할 수 있게 되자, 시민군의 현장 지휘도 겸하던 처칠은 자신의 흑역사 갈리폴리 전투에서 뼈저리게 느낀 교훈까지 파내어 투하쳅스키의 소련군을 수렁에 빠트릴 준비까지 세운다.
그 계략은 당시 오스만 군이 천혜의 해안 절벽을 요새화해 굉장히 많은 영국군을 갈아버렸던 것처럼, 부다페스트의 외곽부터 골목 단위로 폭파시켜 소련 기갑부대를 무용지물로 만들고, 소련 보병들의 진격로를 제한시켜 최소한 구역 하나가 돌파당할 때마다 소련군에게 굉장한 출혈을 안겨버리는 전술이었다. 거기다 부다페스트는 유럽 대륙 최초이자 전 세계에서 두 번째로 지하철이 개통된 도시로, 폭파한 잔해로부터 자유로운 지하통로가 깔려있다. 이를 잘 알던 시민군은 모든 지하철역과 통로를 소련 보병을 갈아버리는 지옥의 소굴로 개조해 작전이 지속될수록 소련의 손실을 눈덩이처럼 불어나게 만들었다. 이러한 전례도 없는 시가전 전술에 휘말린 투하쳅스키는 도시 전체를 고립시켜 아사시키려는 극단적인 명령까지 내릴 정도로 코너에 몰린다.
결국 혁명이 장기전으로 길어지자, 부다페스트를 비롯한 모든 헝가리 시민들은 난민이 되어 각자의 이념에 따라 동쪽으로, 서쪽으로 흩어져 피난 가기 시작한다. 이에 히틀러의 국제연맹은 독일의 적극적인 협조[49]를 받아 일단 수십만 명 내외의 난민 문제를 잠시 해소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를 불리한 입지[50]를 뒤엎을 새로운 기회로 여긴 소련은 부다페스트에 대한 포위를 잠시 중단하면서, 아예 헝가리에 있을 모든 반동분자의 서유럽 피난을 용인해주는 파격 선언을 터트려, 아까보다 차원이 다를 대규모 난민 위기를 국제연맹에게 떠넘겨 버린다.
이렇게 최소 몇백만 명 이상의 헝가리 난민 폭탄을 떠앉게 된 히틀러는 21세기에도 해결하지 못한 이 위기를 어떻게 해소할 것인가에 대해 산하 경제학자들과 논의한다. 하지만 넘어올 예상 난민 규모가 굉장한 만큼, 오히려 히틀러 컴퍼니의 유산 중 하나를 포기해야 겨우 난민 문제를 극복할 수 있다는 답답한 결론만 남을 뿐이었다. 그때 폰 노이만의 '우주 개발을 향한 대중들의 관심'이란 아이디어[51]에 영감을 받아 새로운 프로젝트, 달 개척이 수면에 떠오른다. 히틀러는 여기서 더 나아가 헝가리 난민 같은 인도적 위기에 그 나라가 얼마나 지원해주냐에 따라 그 나라의 달 개척권을 국제연맹이 승인하겠다고 선언한다.[52] 마침 세상은 공상과학이 점점 실현된다는 낙관론적 열기에 빠져있어, 전 세계 국가들, 특히 중국과 인도[53] 등 중진국들은 이번 프로젝트를 통해 자신들의 국제적 위상을 끌어올릴 절호의 기회로 삼아 의심은커녕 적극적으로 기부 대열에 뛰어드는 효과를 만들어내었다.[54]
그렇게 거의 모든 헝가리의 반공 성향 시민들이 소련군의 용인 하에 서쪽으로 떠나 전 세계로 흩어지고, 일부 강경파 시민들과 헝가리 임시정부만은 결사항전을 추구하며 부다페스트에 남으려 했다. 허나 이대로라면 소련이 바라는 대로 고립무원 속에 괴멸될 게 뻔하다고 판단한 처칠은 임시정부 구성원 모두를 설득해 미래의 투쟁을 위한 임시정부 전원 탈출 작전을 세운다. 이번에도 처칠은 갈리폴리의 전훈을 가져왔는데, 당시 영국군의 성공적인 철수 절차를 모티브로 삼아 겉으론 결사항전을 작정한 것처럼 보이기 위해 아직까지 남은 도심 건물과 지하통로, 하수로를 폭파해 소련군의 시선을 끈 사이 임시정부 구성원 전원은 피난민 대열에 위장해 합류하는 계략을 선보였다. 이 계략은 아주 잘 먹혀 처칠과 임시정부 구성원, 마지막 시민군 모두 서쪽에 있을 오스트리아 국경에 이르는데 성공했으며, 이를 경축하기 위해 직접 히틀러와 오스트리아 총리, 심지어 처칠과 갈리폴리의 악연이 있는 튀르키예의 케말 대통령까지 찾아와 이들을 맞이해주었다.
결과적으로 1932년의 헝가리 혁명은 소련의 진압으로 끝나긴 했지만, 혁명을 이끈 임시정부 조직이 살아남는데 성공한 만큼, 장기적으로 소련과 헝가리에게 굉장한 부담을 떠앉게 되는 결말로 종결된다. 이에 소련은 헝가리 혁명을 국제연맹이 사주했다고 간주, 상임이사국이고 뭐고 전부 단념하고 국제연맹을 탈퇴하며 외교 채널을 차단해버린다. 이후 서유럽 국가에서 소련의 제2차 5개년 계획에 동참 중인 서유럽 기업들을 여론으로 압박해 포기하게 만들자, 소련은 소련대로 아직 철수하지 못한 해외 기업들의 소련 자산들을 전부 몰수 및 국유화를 시전함으로써 동서 갈등은 최악의 국면에 이르게 된다.
- 국제연맹군 창설
사실 국제연맹이 헝가리 혁명에 적극 개입하지 못한 이유는, 정치적 정당성이 소련에게 있다는 점도 있지만 국제연맹이 즉시 투입할 수 있는 독자적인 군사력이 없었다는 점이 컸다. 그래서 지금까진 히틀러 총장의 카리스마를 앞세워 모든 회원국들이 연대하는 외교적 연대로 이겨낼 수 있었지만, 이번 소련처럼 닥치고 무력으로 밀어붙인다면 아무 의미도 없었을 게 뻔했다. 거기다 소련의 대규모 기갑 전력이 여러 언론들을 통해 드러나자 당장 소련과 국경을 접하던 모든 국제연맹 회원국들은 수많은 소련의 기갑 부대를 공동으로 막을 군사 동맹이 지금 당장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되기 시작한다.
이러한 공감대에서 착안된 게 국제연맹군 창설로, 제네바에 국제연맹 직할 통합 사관학교를 설치해 인종을 초월한 지휘체계를 편성하고, 상비군을 계속 유지하는 건 경제적으로 무리기 때문에 비상 상황일 때 주요 회원국들이 즉시 파병할 수 있는 예비 동원부대 창설을 법제화한다. 거기다 프랑스 등 상대적으로 위기 의식이 덜한 후방 국가들이 반대할 경우를 대비해 독일의 재무장 논란을 우회할 수 있는 인터마리움 동맹 창설을 스페어 카드로 준비해둔다. 이 새로운 군대에 대한 소식이 널리 알려지자, 무려 전 세계에서 약 180만 명 이상의 지원자가 아직 창설도 되지 않은 국제연맹군에 지원하려는 열광적인 호응을 바로 이끌어낸다.[55]
하지만 우려했던 대로 상임이사국이었던 프랑스의 강경한 반대[56]로 국제연맹군 창설이 표류해버린다. 하필 프랑스 정치 구도가 뒤집히는 사태[57]가 벌어진 정국이었기에, 프랑스 외교단의 협조도 불가능한 상태였으며, 자칫하면 프랑스의 거부권 행사로 모든 게 표류하는 건 물론, 소련처럼 프랑스 소재 유대, 히틀러 컴퍼니 자산이 강제 국유화될 시나리오가 발생할 수 있었다. 이를 지켜본 히틀러는 역으로 프랑스의 극단화를 역이용하기로 한다.
우선 프랑스에 있는 히틀러 컴퍼니 자산을 프랑스 기업들에게 직원들의 고용 보장을 조건으로 모조리 싸게 팔아넘긴다.[58] 프랑스 기업들은 다들 승리를 거뒀다며 희희낙락했지만, 얼마 안 가 정작 인수한 공장들을 돌릴 수 없다는 현실에 직면하게 된다. 공장들은 나사 하나부터 핵심 엔지니어, 판매 유통망까지 전부 히틀러 컴퍼니에 의존하고 있었던 것. 심지어 히틀러 컴퍼니의 철수로 인해 팽르베선 건설까지 중단되면서 히틀러 컴퍼니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현실에 직면한다. 결국 프랑스 기업들은 히틀러 컴퍼니를 쫓아내고도 히틀러 컴퍼니와 협력해야 하는 신세가 된다.
거기다 안보리 회의가 열리기 직전, 비밀리에 브리앙 프랑스 외무장관과 합의해 그가 강경하게 반발하면서 안보리 회의를 전면 보이콧을 하는 것처럼 보이게 위장한다. 이는 6.25 전쟁 개전 당시 소련의 오판에서 따온 것으로, 그때 소련처럼 시작부터 보이콧을 하는 바람에 프랑스의 거부권이 무력화되고, 결국 프랑스의 악시옹 프랑세즈는 국제연맹군 창설을 막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브리앙 장관에게 프랑스를 배반했다며 책임을 물 수도 없는 난감한 처지에 놓인다.
이렇게 프랑스가 초전 이탈한 덕분에 결국 국제연맹군 창설안이 통과된다. 먼저 연맹군 지휘부 및 사관학교 창설을 위해 1차 모집은 단 2천 명의 장교 출신들만 뽑기로 하지만, 그 2천 명에 들어가기 위한 전 세계 장교들의 지원 열풍은 더 강력해진다. 이들을 선발하기 앞서, 히틀러는 독일의 한스 폰 젝트 장군을 연맹군 사관학교 교장으로, 미국의 조지 C. 마셜 장군을 국제연맹군 준장 및 참모차장으로 먼저 초빙해 자칫 중구난방이 될 수도 있는 국제연맹군의 기반부터 확실하게 잡아둔다.[59] 또한 히틀러 컴퍼니의 생산능력을 전시에 군수체제로 전환할 수 있도록 하고, 국제연맹군이 쓸 신형 돌격소총을 개발하였으며, 여성 지원자들은 후방 근무로 돌려 보조요원으로 쓰기로 한다. 국제연맹군의 구호는 소련에 대항하는 자유의 상징이 된 힘러를 기념하여 '힘러를 위해서'로 정해진다.
이렇게 국제연맹군의 기틀이 잡히면서 국제연맹에 대한 인기도 높아졌고, 자연스럽게 국제연맹 관련 굿즈와 패션도 유행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특기할 만한 점은 국제연맹이 원 역사의 유엔 이상의 권위와 무력을 갖추게 되었다는 점으로, 실제로 유고슬라비아 왕국에서 벌어진 알렉산다르 1세에 의한 크로아티아인 탄압이 국제연맹이 개입한 직후 중단되었을 정도였다.
- H 크레딧의 기축 통화화
프랑스에서의 히틀러 컴퍼니 철수 이후 H 크레딧의 위상이 하늘을 뚫을 듯 승천하자, 모건 가문과 협력해 본격적으로 H 크레딧을 기축 통화로 만들기로 한다. 이를 위해 히틀러는 이제 막 탄생한 신생국 사우디아라비아 왕실과 협조해, 당대의 제국주의 논리와 결이 아주 다른 매우 후한 지원[60]을 사우디에 해주는 대신 드넓은 사막에 존재하고 있을 유전 개발권을 얻어내고, 석유 거래 대금은 오로지 H 크레딧으로만 지급한다는 조건을 내건다.
얼마 뒤 아무도 찾지 못했던 굉장한 유전이 발견되고 H 크레딧의 가치가 치솟자, 전 세계의 유대인들이 가장 먼저 H 크레딧을 긁어모으기 시작하고 뒤를 이어 시류를 파악한 미국과 영국, 그리고 여러 제3세계 국가들이 적극 편승하면서 H 크레딧이 주도하는 신질서가 확립된다. 하지만 진작에 히틀러를 손절한 프랑스는 사정이 달랐는데, 히틀러 컴퍼니의 철수 이후 식민지의 혼란은 더 악화되고 새로운 경제 질서에서 이탈한 덕분에 프랑스 경제는 날이 갈수록 악화되고 있었다. 거기다 독일이 국제연맹군을 통해 재무장을 시도한다는 위기론이 만연하고 있었기에, 프랑스의 총리 라 로크는 독일을 견제할 겸 기업가들의 파산을 막기 위해 국가 주도의 군수산업 육성에 올인하는 극단적 정책을 시행한다.[61] 또한 내부적으로 민심을 극우로 묶기 위해 이미 결론이 난 드레퓌스 사건을 다시 꺼내 프랑스를 반유대주의로 결집시키고 이탈리아와 스페인을 아군으로 끌어들일 구상을 세운다.
- 대숙청
마침내 레닌이 사망하고 트로츠키가 최고지도자로 등극한다. 이렇게 정계를 장악한 트로츠키는 가장 먼저 구시대적인 기병 전술을 고집하던 세묜 부됸니를 체포하고, 이를 결사반대하던 그리고리 지노비예프와 레프 카메네프 등 중앙위원회의 반 트로츠키파 전원을 순식간에 숙청해버린다. 이 광경에 기겁한 또 다른 경쟁자, 니콜라이 부하린은 자신의 직위까지 급히 버리고 튀르키예를 통해 국제연맹에 망명한다.
그렇게 스위스에서 히틀러와 접견하게 된 부하린은 자신과 가족의 생존을 위해, 자신이 알고 있는 소련의 모든 기밀 정보들을 최대한 실토해 국제연맹이 다음 대전략을 준비할 수 있게 된다. 허나 트로츠키가 시전한 반 트로츠키파 숙청은 스탈린이 초래한 실제 대숙청에 비하면 희생자가 매우 적을 것이며, 초기 소련에게 있어 아깝게 사라진 인재들[62]이 이 세계관에선 거의 다 살아남아 소련을 더 위협적으로 만들어버릴 거라며 우려한 히틀러는 부하린의 정보를 더 꼼꼼히 검토해본다. 그러다 이상할 정도로 스페인 공화국에 대한 자료가 아예 없다는 걸 파악하자, 이것도 트로츠키의 계략일 거라 직감한 히틀러는 스페인의 혼란을 늦게나마 예의주시한다.
부하린의 망명 후에도 내부 숙청 작업은 별 저항 없이[63] 순조롭게 이루어져, 붉은 군대는 투하쳅스키와 미하일 프룬제[64]가 주도하는 기계화 부대 재편을 막는 걸림돌이 모두 사라진다. 이를 기반으로 프룬제는 세계 혁명을 위한 대전쟁 준비에 박차를 가한다.
- 스페인 내전
소련의 숙청 사건이 벌어진지 3년 뒤인 1936년, 스페인은 곧 다가올 총선을 앞두고 극단적으로 분열되어 위기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었다. 이러한 스페인의 불안은 북쪽의 프랑스도 동쪽 멀리 있는 소련도 잘 알고 있었기에, 프랑스는 실제 나치 독일처럼 우익을 밀어주고, 반대로 소련은 스페인 좌익을 지원해 곧 내전이 초래되도록 혼란을 부추기고 있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이 선거는 극좌도 극우 세력도 아닌 신생 중도파였던 스페인 공화연합의 승리라는 굉장히 이례적인 결과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이는 히틀러 컴퍼니의 공공연한 후원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평화를 원하는 대중들의 열망이 컸기 때문이다.
하지만 준군사조직을 갖춘 좌파나 우파가 원 역사처럼 내전을 일으킨다면 확고한 지지기반이 없는 공화연합 내각은 손쉽게 무너질 위험이 여전했다. 그렇기에 히틀러는 과거 국제연맹군에 지원했다 아쉽게 떨어진 모든 스페인 출신 지원자들을 소집해 공화연합 휘하의 준군사조직을 창설하기로 한다. 거기다 스페인 공화국 기사단과 로켓맨 팬클럽을 무장 조직으로 탈바꿈해 비상시 정부를 수호할 민병대로 재편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다 한다. 한편 프랑스의 공공연한 극우 세력 지원에 대해 발작한 스폐인 좌익 세력들이 무기고 강제 탈취를 사방에서 감행하는 등 위기는 더 악화되자, 더 이상 스폐인 내전을 막을 방법이 없다고 판단한 히틀러는 실제 내전의 촉발 원인이었던 스페인령 모로코의 군사 반란의 진행 과정을 참고해, 모로코의 군사 반란이 본토로 확전되지 못하도록 자체적인 사보타주 작전을 감행한다.
결국 모로코에 있던 군부가 프란시스코 프랑코를 중심으로 원 역사처럼 군사 반란을 일으키자, 사전에 히틀러와 정부 측의 이상에 공감한 모든 스페인 해군 수병들이 프랑코의 봉기를 전면 거부하며 정부 편에 선다. 거기다 본토의 극우 민병대를 지휘하기 위해 급히 비행기로 돌아가려던 모든 반란군 고위 장교들이 사전에 히틀러 측의 사보타주로 생긴 비행기의 기체 결함으로 사고사당하는 일이 연이어 터져, 자칫했다가 모로코의 반란군은 고립무원의 지경에 놓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스페인 내전에 사력을 다하기로 작정한 프랑스가 대놓고 수십 대의 프랑스군 소속 수송기를 모로코에 보내는 일이 발생해, 히틀러가 이루려 했던 반란군 지휘부의 고립은 실패해버린다. 거기다 이젠 작정하고 극우 민병대에게 군사 지원을 넣기 위해 프랑스 수송대가 의용대로 위장해 공공연하게 스페인 국경을 넘는 일이 알려지자, 이에 더 격분한 공산 진영은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 정부를 불신임하고 지방의 무기고를 점거, 민병대로 무장해버려 결국 스페인은 북부와 남부는 극우 진영 반란군이, 서부는 공산주의 혁명군이, 그리고 나머지 중부와 동부만 공화정부가 통제하는 3파전으로 찢어지게 된다.
이 지경까지 가자, 히틀러는 사전에 준비했던 대로 스페인의 공화국 기사단을 전부 민병대로 재편할 수 있도록 이끌어내며 원래 국제연맹군을 위해 만들어놓은 스페인 군수공장들의 생산 물자들을 전부 이들에게 돌아갈 수 있게 바꾼다. 거기다 스페인 극우 진영 중에 원래 스페인 가톨릭 교회 측도 가담하는 만큼, 특별히 교황을 접견해 교황청 차원에서 스페인 극우 진영을 지지하는 일이 없도록 압박을 넣는데 성공한다. 이 와중에 스페인 공화국 기사단은 히틀러의 전략을 벤치마킹해 TV와 라디오를 통해 전 세계에 도움을 호소하였고, 전 세계의 공화국 기사단원들이 이에 화답하여 공화정부를 지원한다. 한편 반란군도 여론전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는 만큼, TV와 라디오를 통해 공화정부와 기사단원들이 각종 전쟁범죄를 일삼는다는 가짜 뉴스를 유포해 스페인 보수~극우층의 단결을 추구하는 한편, 스페인으로 파견 온 프랑스의 샤를 드골 장군은 국제연맹의 사주를 받고도 남을 국제 종군기자들의 스페인 북부 출입을 원천 차단해 언론플레이에 휘둘리지 않으려는 대응을 선보인다.
특히 드골이 지휘하는 "성전 군단"은 마치 나치 독일의 전술을 모방이라도 한 것처럼 기계화부대를 앞세운 기동전을 수행해 아직 정부 측이 대비하지 못한 북동부의 여러 소도시들과 전략 거점들을 단숨에 점령해낸다. 물론 카탈루냐 지방의 레리다에서 거센 저항을 처음 맞닥뜨렸으나 이미 히틀러가 보여준 여러 신기술들의 존재를 인지하고 있던 드골이 거기에 맞대응하는 전술을 구사해 큰 어려움 없이 레리다를 점령하는데 성공한다. 문제는 레리다 점령 후 극우 연합이 주관한 대중 집회에서 발생했는데, 여기서 주요 스페인 가톨릭 성직자들이 교황청의 정치적 중립 강조를 무시한 공개 지지 선언을 하고, 반대로 이러한 스페인 교회의 기류에 반발한 일부 성직자들을 가택연금한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이 사건이 주요 국제 언론들을 통해 유출되자, 처음엔 미적지근했던 교황청의 입장이 급변하여 지금 당장 지지를 철회하지 않을 시 스페인 교회와 모든 반란군에 대한 파문을 시전할 거란 최후통첩을 갈겼으나, 이미 극우 진영 깊숙이 들어가버린 스페인 성직자들은 오히려 음모론을 설파[65]하는 걸로 무시해버렸다. 결국 교황청은 스페인 교회를 파문하는 충격적인 결단을 강행해버린다.[66]
이렇게 되어 전 세계 가톨릭교도의 지지를 확보한 교황청은 아예 내전이란 굉장히 정치적인 국제 문제에 직접 개입하기로 작정한다. 그래서 국제연맹과 교황청을 비롯해 현직 총리가 성직자거나 가톨릭 정당이 집권한 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벨기에 등의 지도자들을 베를린에 소집해 유럽에서 거악이 되어버린 프랑스를 정면 직격하기 위한 가톨릭 연맹을 결성하기로 한다. 즉 20세기에 신성 동맹이 부활한 것이다.
한편 하술한 프랑스의 체제 전환 사건 때문에 국민파 반란군의 진격이 잠시 중단되고 대신 서부의 공산 진영 민병대가 공화정부의 도시를 향해 공격하면서 이 두 진영의 충돌이 격화된다. 이번 내전에서 양 측은 각자가 개발한 신기술[67]과 신무기[68]의 실험장으로 삼았기에 기존 전쟁과 차원이 다를 손실이 커져가고 있었다. 이 지경을 지켜보던 히틀러는 자신의 특기, 심리전으로 공산 진영을 흔드는 계략[69]을 선보여 공산 진영을 뿌리 째 뒤흔드는 데 성공한다.
이러한 심리전에 말려들어 공산 진영이 분열되고 궁지에 몰리자, 애초에 스페인 혁명에 대한 미련이 없던 트로츠키 이하 소련 지휘부는 스페인 서부의 금을 모조리 털어 다섯 척의 수송선에 넣고 튀는 행위를 시전한다. 이 중 한 척은 영국 해군의 정찰 비행선에 발각되어 나포되었지만, 두 척은 소련으로, 나머지 두 척은 다름 아닌 프랑스로 무사히 넘어가버렸다. 이를 통해 프랑스가 지원하는 국민파 반란군의 생명이 연장되자, 히틀러가 인도차이나의 독립을 지원하는 듯한 움직임을 꾸며내 프랑스가 정규군을 스페인이 아닌 인도차이나로 보내게 만들어 국민파 반란군의 발을 묶어놓는다. 결국 스페인 내전은 어느 한쪽이 우세를 점하지 못하고 2년 넘게 교착 상태가 지속된다.
- 프랑스 공화왕국의 탄생
교황청의 공개적인 반프랑스 선언과 마치 중세로 돌아간 것마냥 신성 동맹의 부활이라는 사건까지 발생하자, 프랑스 내부 여론은 혼란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그 혼란은 프랑스 성직자들의 진영 갈등에만 그쳤을 뿐, 이미 정치적으로 국가주의 성향의 악시옹 프랑세즈 지지자들이 판을 치고 있던 터라, 극우 정부를 완전히 위협할 수준은 되지 못했다. 그럼에도 자기들에게 적대적인 야당 연합이 이걸 기회로 삼을 거라며 우려하던 모라스와 라 로크는 끝내 의회를 해산하고 헌법을 개정해 왕정을 복고하되, 적절한 왕위 계승자를 찾을 때까지 왕위를 공석으로 두는 왕 없는 왕국을 선포해버린다. 그렇게 프랑스 공화왕국이라는 해괴한 체제가 탄생하면서, 공화국 기사단을 비롯한 프랑스 내부의 반정부 세력은 모조리 제압당하고 다시 분서 집회가 열리는 가운데, 드레퓌스 사건이 재점화되어 반유대주의 정서마저 치솟는 광기로 돌입하자 결국 바롱 에드몽드 드 로스차일드도 한때 적대하던 히틀러 컴퍼니의 도움을 받아 자산을 해외로 빼돌린다.
체제를 완전히 바꾼 대형 사건이니 만큼, 드골이 이끌던 성전 군단도 본국이 안정될 때까지 공세를 멈춘다. 허나 조만간 의용군 차원이 아니라 프랑스 정규 사단이 본격적으로 참전하게 될 테니 준비하라는 지시를 드골에게 보내며 스페인을 향한 프랑스의 야망은 더 강해진다. 한편 프랑스 정부는 점점 심각해지는 재정 악화를 메꾸기 위해 소련과 손을 잡아 재정 지원을 받고, 동시에 프랑스 유대인들의 자산을 헐값에 몰수 및 강탈하게 된다. 이로써 사실상 프랑스 유대인들의 국외 추방이 벌어지자, 이전 헝가리 난민 수용을 통한 경제적 과실을 기대한 주변 여러 나라들과 일본 자치 정부[70]들이 경쟁적으로 유치전에 나서면서 이전과 달리 난민 수용은 큰 어려움 없이 끝난다.
이렇게 유대인들을 내쫓는 프랑스 정부가 최종적으로 노리려 했던 건 프랑스 로스차일드 가문의 자산으로 그 막대한 자산을 탈취하기 위해 로스차일드 가문을 압박했지만, 이미 한 발 앞서 위험 신호를 감지한 로스차일드 측과 히틀러 컴퍼니, 그리고 모건 하우스의 연합 작전에 따라 로스차일드 은행의 자산 모두가 모건 하우스 산하 기업과 영국,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독일 기업으로 넘어가 프랑스를 제대로 엿을 먹여버렸다.[71] 이렇게 엿을 먹어버린 프랑스는 이판사판으로 그동안 억지로 모은 프랑스의 H 크레딧을 일시에 팔아 국제 시장을 흔들려고 했으나, 이마저도 미국과 영국이 H 크레딧을 전략 비축 자산으로 규정해버려 이 발악도 허무하게 막혀버린다.
하지만 그런다고 포기할 프랑스가 아니었고, 오히려 프랑스는 소련과 손을 잡고 군비를 증강하며 전쟁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결국 히틀러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전쟁을 피할 수 없음이 명백해지자, 히틀러는 인간 기자로 위장한 X와의 대담 자리에서 자신이 가진 권력을 휘두르는 손쉬운 방법으로 당장의 희생을 막는다 한들, 그로 인해 더 많은 사람들이 짓밟히는 길은 원하지 않기에, 멀리 돌아가더라도 자유롭고 평화로운 사회에서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편안히 지낼 수 있는 길을 택하였음을 되뇌이고 끝까지 자신이 택한 길을 걷기로 결심을 굳힌다.
5. 4부(463화 ~ )
- 지령 77호 발동
그로부터 2년 뒤, 1938년의 새해가 시작될 무렵 동서 양 진영은 점점 임박한 전쟁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국제연맹은 이제 안정권에 들어간 국제연맹군의 총지휘권을 상황 발생 시 즉각적으로 히틀러에게 몰아주는 비상대권 결의안을 통과해 지휘 체계를 확고히 하는 한편, 소련의 내부 상황이 일촉즉발 상태까지 간 바 어떤 작전을 위한 비밀 동원령을 발동한다.
이렇게 히틀러가 예의주시하던 당시 소련의 전력은 총원 300만의 대병력과 최소 수천 대의 기갑 전력을 갖출 수준으로 증강했으며, 산하 괴뢰국인 헝가리조차 대략 50만이나 끌어모은 상태였다. 이 대전력을 가지고 소련은 지난 2년 동안 수시로 국경 지대에서 위협적인 군사 훈련을 반복적으로 시행했으며, 국제연맹에게 양면전선의 부담을 안겨주기 위해, 이미 경제적으로 한계 상태였던 프랑스를 지원해준 것이었다. 이렇게 주도하던 트로츠키의 소련 정부는 이상하게도 핀란드와 발트 3국에 대해 유화적으로 대했었는데, 그 이유는 곧 임박한 대전쟁을 앞두고 쓸데없이 전선을 늘려 부담을 키우고 싶지 않기 위해 벌인 행위였으며, 대전쟁을 선포하기 전 먼저 상대방의 전력을 깎아놓기 위한 테러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 음모를 급히 망명한 고르디옙스키의 제보를 통해 알게 된 국제연맹 측은 대비에 나섰으나 이젠 되돌릴 수 없게 된 소련은 작전을 강행한다.
- 붉은 목요일
트로츠키의 지령을 받은 공산주의자들은 그동안 컨테이너를 이용해 조금씩 옮긴 부품으로 간이 잠수정을 조립해 미국과 영국, 이탈리아의 군항을 공격하고, 영국과 독일 정치인들을 상대로 생화학 테러를 감행하고, 대서양 해저 케이블을 끊는 등 전 세계를 상대로 테러와 사보타주를 일으킨다. 일명 광란의 날 또는 붉은 목요일로 불리게 된 이 사건으로 독일과 이탈리아 등도 피해를 입었으나, 가장 피해가 큰 영국에서는 새뮤얼 총리와 의원 11명이 사망하고 22명이 중태에 빠졌으며, 스캐퍼플로에서 HMS 넬슨과 로드니가 침몰하는 등 수상함대 전력의 3할이 전투불능 상태에 빠지고 그로 인해 항구까지 막혀 복구에 최소 3~4개월이 걸릴 정도로 가장 큰 피해를 입으면서 그 영국이 순식간에 해양 패권을 상실하고 말았다. 결국 CIA의 경호로 무사할 수 있었던 처칠이 원 역사처럼 전시 총리로 임명되었다.
테러 직후 수십 개의 테러조직이 자신들이 범인이라는 성명문을 발표하면서 영국에서는 반독 감정을, 독일에서는 반영 감정을 자극하려 시도했지만, 이런 대규모 테러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후버 국장과 FBI의 활약으로 아예 피해가 전무했고, 오히려 FBI가 확보한 자료를 통해 테러의 배후가 소련임이 만천하에 드러나면서 국제연맹을 중심으로 뭉친 국가들을 분열시키려는 소련의 수작이 가로막히게 된다. 이건 미래인이 아닌 회귀자인 트로츠키가 진주만 공습(1941년 12월 7일) 이전인 1940년 8월 21일 암살당해서 미국의 힘을 몰랐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미국의 힘을 알고 있었다면 아무리 트로츠키라도 최소한 각국과 동시에 미국에게 대규모 테러를 저지르지는 않았을 것이다.[72]
한편 이번 사건으로 인해 프랑스도 상당한 피해를 입었으나, 사실 이는 프랑스의 자작극이었다. 악시옹 프랑세즈가 자국민을 상대로 자작극 테러를 일으킨 후, 그 혐의를 국제연맹과 히틀러주의자, 유대인들에게 덮어씌운 것이다. 이를 명목 삼아 스페인 공화정부에 정식으로 선전포고하고 반란군이 정권을 잡게 만들어 스페인을 아군으로 끌어들인 후, 이탈리아도 침공해 정부를 전복시키고 무솔리니를 복권시킬 속셈이었다. 이 때문에 국제연맹군을 소집하려 해도 소련과 달리 국제연맹 상임이사국으로 남아있는 프랑스는 거부권을 행사할 것이므로, 소련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프랑스를 상임이사국 자리에서 내쫓아야만 했다. 결국 히틀러는 모든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을 준비해야 한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연설에 모든 것을 건다.
{{{#!folding [ 히틀러의 선전포고 ]
"전 세계 시민 여러분. 저는 국제연맹 사무총장 아돌프 히틀러입니다.
지난 며칠 동안 전 세계에서 혼란과 비극이 반복되었습니다.
주로 유럽과 아메리카를 노린 테러 공격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일상을 위협받고, 심지어 목숨을 잃었습니다.
국제연맹 사무총장으로서 저는 자유와 민주주의, 평화와 인권을 향한 이번 공격을 결코 좌시할 수 없습니다.
미국 FBI는 이번 테러의 배후에 모스크바가 있었다는 구체적인 증거를 발견했습니다.
또한 국제연맹 정보부와 영국, 독일의 정보기관들 역시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들을 찾아냈습니다.
소련 정부는 수년에 걸쳐 조직적인 테러와 사보타주를 준비해왔으며, 지금 이 순간에도 전 세계에 잠입시킨 수천이 넘는 스파이들을 이용해 혼란을 일으키려 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왜 이런 짓을 벌이는 것일까요? 영토 때문일까요? 자원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이것은 '미래'를 건 전쟁입니다.
모스크바가 약속하는 미래는 하나의 사상, 하나의 목소리, 하나의 지도자만이 존재하는 침묵의 세계입니다.
개인의 꿈과 희망이 국가라는 기계의 부품으로 전락하고, 자유로운 생각이 인민에 대한 반역으로 처벌받는 세계입니다.
그들은 그것을 유토피아라고 부르지만, 사실 그것은 자유의 죽음에 가깝습니다.
우리가 꿈꾸는 미래는 어떤 것입니까? 서로 다른 목소리가 어우러져 더 위대한 화음을 만들어내는 세계입니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이 우주탐험을 꿈꿀 수 있고, 억압받던 식민지 시민들이 스스로의 운명을 결정하며, 심지어 저처럼 이름 없던 한 오스트리아인 병사가 세계 평화를 위해 일할 기회를 얻는 곳입니다.
소련군은 동유럽에 수백만이 넘는 대군을 집결시켰으며, 곧 폴란드와 오스트리아, 체코슬로바키아를 노린 대대적인 공세를 벌일 예정입니다.
트로츠키 위원장과 모스크바가 내세우는 세계혁명론은 결코 동유럽에서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바르샤바에서 벌어지는 일을 못 본 척 눈을 돌린다면 내일은 베를린에서, 모레는 런던과 베이징, 도쿄에서 같은 일이 벌어질 것입니다.
이건 머나먼 외국의 전쟁이 아닙니다.
자유가 살아남느냐, 아니면 폭정이 승리하느냐를 결정짓는 순간입니다.
국제연맹 사무총장으로서 부여받은 권한에 따라, 저는 이 순간 부로 비상사태를 선언합니다!
이번 선언은 소련의 지도부가 교체되고 그들이 저지른 범죄에 대한 합당한 처벌을 받기 전까지 유지될 것입니다.
존경하는 각국 대표단 여러분, 전 세계 시민 여러분.
오늘 우리는 인류 역사상 가장 중요한 갈림길에 서 있습니다.
대전쟁이 끝난 이후 지난 수십 년간 피땀 흘려 건설해온 이 국제연맹이라는 조직이 과연 살아있는 희망인지, 아니면 공허한 말에 불과한지를 증명해야 할 시험의 순간입니다.
이 길은 분명 힘들고 고통스러울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 명백한 침략 행위 앞에 침묵한다면, 국제연맹 헌장은 한낱 휴짓조각으로 전락할 것입니다.
작은 나라들은 더 이상 강대국의 약속을 믿지 못할 것이며, 세계는 다시 한번 불신과 공포, 그리고 끝없는 군비 경쟁의 시대로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자유에는 국경이 없습니다. 인권에는 인종이나 피부색이 없습니다. 폭정에 맞서는 저항은 우리 모두의 의무입니다.
오늘 바르샤바에서 쓰러지는 한 명의 자유 시민은 내일 베이징과 도쿄에서 쓰러질 우리 자신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이 자리에서 모든 회원국과 시민들에게 요청합니다.
단순히 규탄 성명을 내는 것을 넘어, 국제연맹 헌장을 향한 우리의 결의를 행동으로 보여줍시다.
군대를 보내고, 의약품을 보내고, 지원 물자를 보냅시다. 그렇게 전 세계에 보여줍시다! 자유를 파괴하려는 자들은, 자유를 사랑하는 모든 인류를 적으로 돌리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역사는 지금의 우리를 바라보며 심판할 것입니다.
나중에 태어날 아이들이 '그 거대한 어둠 앞에서 당신은 무엇을 했습니까?'라고 물을 때, 우리는 부끄럼 없이 답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새벽이 오기만을 그저 기다린 것이 아니라, 온 힘을 다해 새벽을 끌어당겼노라고 말입니다!"}}}
지난 며칠 동안 전 세계에서 혼란과 비극이 반복되었습니다.
주로 유럽과 아메리카를 노린 테러 공격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일상을 위협받고, 심지어 목숨을 잃었습니다.
국제연맹 사무총장으로서 저는 자유와 민주주의, 평화와 인권을 향한 이번 공격을 결코 좌시할 수 없습니다.
미국 FBI는 이번 테러의 배후에 모스크바가 있었다는 구체적인 증거를 발견했습니다.
또한 국제연맹 정보부와 영국, 독일의 정보기관들 역시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들을 찾아냈습니다.
소련 정부는 수년에 걸쳐 조직적인 테러와 사보타주를 준비해왔으며, 지금 이 순간에도 전 세계에 잠입시킨 수천이 넘는 스파이들을 이용해 혼란을 일으키려 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왜 이런 짓을 벌이는 것일까요? 영토 때문일까요? 자원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이것은 '미래'를 건 전쟁입니다.
모스크바가 약속하는 미래는 하나의 사상, 하나의 목소리, 하나의 지도자만이 존재하는 침묵의 세계입니다.
개인의 꿈과 희망이 국가라는 기계의 부품으로 전락하고, 자유로운 생각이 인민에 대한 반역으로 처벌받는 세계입니다.
그들은 그것을 유토피아라고 부르지만, 사실 그것은 자유의 죽음에 가깝습니다.
우리가 꿈꾸는 미래는 어떤 것입니까? 서로 다른 목소리가 어우러져 더 위대한 화음을 만들어내는 세계입니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이 우주탐험을 꿈꿀 수 있고, 억압받던 식민지 시민들이 스스로의 운명을 결정하며, 심지어 저처럼 이름 없던 한 오스트리아인 병사가 세계 평화를 위해 일할 기회를 얻는 곳입니다.
소련군은 동유럽에 수백만이 넘는 대군을 집결시켰으며, 곧 폴란드와 오스트리아, 체코슬로바키아를 노린 대대적인 공세를 벌일 예정입니다.
트로츠키 위원장과 모스크바가 내세우는 세계혁명론은 결코 동유럽에서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바르샤바에서 벌어지는 일을 못 본 척 눈을 돌린다면 내일은 베를린에서, 모레는 런던과 베이징, 도쿄에서 같은 일이 벌어질 것입니다.
이건 머나먼 외국의 전쟁이 아닙니다.
자유가 살아남느냐, 아니면 폭정이 승리하느냐를 결정짓는 순간입니다.
국제연맹 사무총장으로서 부여받은 권한에 따라, 저는 이 순간 부로 비상사태를 선언합니다!
이번 선언은 소련의 지도부가 교체되고 그들이 저지른 범죄에 대한 합당한 처벌을 받기 전까지 유지될 것입니다.
존경하는 각국 대표단 여러분, 전 세계 시민 여러분.
오늘 우리는 인류 역사상 가장 중요한 갈림길에 서 있습니다.
대전쟁이 끝난 이후 지난 수십 년간 피땀 흘려 건설해온 이 국제연맹이라는 조직이 과연 살아있는 희망인지, 아니면 공허한 말에 불과한지를 증명해야 할 시험의 순간입니다.
이 길은 분명 힘들고 고통스러울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 명백한 침략 행위 앞에 침묵한다면, 국제연맹 헌장은 한낱 휴짓조각으로 전락할 것입니다.
작은 나라들은 더 이상 강대국의 약속을 믿지 못할 것이며, 세계는 다시 한번 불신과 공포, 그리고 끝없는 군비 경쟁의 시대로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자유에는 국경이 없습니다. 인권에는 인종이나 피부색이 없습니다. 폭정에 맞서는 저항은 우리 모두의 의무입니다.
오늘 바르샤바에서 쓰러지는 한 명의 자유 시민은 내일 베이징과 도쿄에서 쓰러질 우리 자신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이 자리에서 모든 회원국과 시민들에게 요청합니다.
단순히 규탄 성명을 내는 것을 넘어, 국제연맹 헌장을 향한 우리의 결의를 행동으로 보여줍시다.
군대를 보내고, 의약품을 보내고, 지원 물자를 보냅시다. 그렇게 전 세계에 보여줍시다! 자유를 파괴하려는 자들은, 자유를 사랑하는 모든 인류를 적으로 돌리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역사는 지금의 우리를 바라보며 심판할 것입니다.
나중에 태어날 아이들이 '그 거대한 어둠 앞에서 당신은 무엇을 했습니까?'라고 물을 때, 우리는 부끄럼 없이 답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새벽이 오기만을 그저 기다린 것이 아니라, 온 힘을 다해 새벽을 끌어당겼노라고 말입니다!"}}}
이러한 명연설을 들은 수억 명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처지가 폭풍 속에 들어왔음을 제대로 실감하게 된다. 그렇기에 연설이 끝난 직후 전 세계의 시민들은 솜의 반격작전 때처럼 자기 집 앞에 로켓맨 인형을 세워 히틀러와 국제연맹을 지지하는 침묵의 연대가 이루어졌다. 국제 외교계도 마찬가지였기에 프랑스를 제외한 각국 정부들 모두 줄줄이 소련과 프랑스를 규탄하는 가운데, 국제연맹군 추가 모집이 시작되자 전 세계의 시민들의 자원 입대 열풍이 쏟아진다. 이를 더 도와주기 위해 미국은 가장 먼저 자국민의 국제연맹군 합류를 허락했으며, 튀르키예는 더 나아가 소련과의 국경 협상을 중지하고 국제연맹에 지원을 요청하면서 사실상 국제연맹 측으로 참전을 선언하였다.[73]
- 제2차 세계 대전
소련은 폴란드를 세계혁명을 위한 첫 목표로 삼고 폴란드 동부에 세운 괴뢰국에서 소련군이 폴란드군으로 위장해 시민들을 학살하고 이를 명분으로 폴란드를 침공하려 했으나, 이를 눈치챈 폴란드가 국제연맹이 지원한 제트기를 동원하여 소련군을 선제 공격하며 제2차 세계 대전의 서막이 열린다.
이 선제 공격은 아직 국제연맹 모두의 공감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 급히 감행된 거라, 처음엔 핀란드처럼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이며 중립을 지키려는 나라들이 몇몇 있었다. 하지만 괴벨스를 시작으로 채플린, 케말, 처칠 등이 줄줄이 지지 연설을 하자 전 회원국들의 지지가 모이기 시작했고, 그런 분위기 속에서 국제연맹 사무총장 신임 투표가 열리자 마치 실제 히틀러가 추앙받았던 것처럼 전 세계 외교관들의 광적인 지지와 환호를 받으며 재신임과 비상대권이 순식간에 승인된다. 덤으로 프랑스의 상임이사국 직위도 순식간에 박탈되었다. 이로써 국제연맹 내에서 신임을 잃은 프랑스는 더 이상 잃을 것도 없겠다, 스페인 내전에 공식 참전해 공화정부를 압도했으며, 결국 수도 마드리드를 함락시키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공화정부는 처음부터 마드리드를 포기할 생각으로 군수공장을 재배치한 지 오래였고, 내전은 지루한 게릴라전으로 접어들게 된다.
국제연맹군의 선제 공격 이후로 대규모 공중전이 벌어지고 있었는데, 수만 단위의 프로펠러 전투기로 몰아붙이는 소련 공군의 물량 공세에 맞서 국제연맹 공군은 조기경보선의 레이더 지원을 받아 붐앤줌 전술로 갈아버릴 정도로 선전하고 있었다. 그러다 계속 손실을 보던 소련도 조기경보선을 침묵시키기 위해 즈베노 프로젝트를 통한 유효 타격을 입히는 데 성공하여 국제연맹의 제트기가 대놓고 날뛰지 못하게 발목이 잡혀버리고 만다. 덕분에 1:5 비율로 갈려나가느라 제대로 진격을 못하던 소련 지상군도 폴란드 전역과 동프로이센을 향한 공세를 밀어붙일 수 있게 된다. 지상군의 압박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자, 국제 의용군과 영국 등 전 세계 원정군이 모두 도착할 때까지 시간을 끌어야 했던 국제연맹은 한스 폰 젝트 장군과 실무자 대표로 온 월트 디즈니의 지휘 하에 '마우스(Maus) 프로젝트'라 불리는 기만전을 시행한다.
마우스 작전은 소련군의 침공을 일찌감치 예상한 히틀러가 국제연맹군 수뇌부와 상의한 끝에 만든 작전으로, 원 역사의 고스트 아미(Ghost Army)를 수십 배의 규모로 확대한 것이다. 디즈니와 전 세계의 디즈니 스튜디오 직원들을 중심으로 한 각종 예술가들과 엔지니어들이 고무 인형으로 만든 전차, 장갑차, 트럭, 항공기, 벙커들을 각지에 배치하고,[74] 이동식 풍향계와 스피커를 이용해서 소리도 그대로 모방하며, 포병대는 진짜 포병대의 근처에 가짜 포를 배치하고 섬광탄과 연막탄, 소리를 흉내 내서 소련군의 공격 루트를 가짜들에게 유도하는 방식이다. 고무 인형으로 된 가짜인 만큼 빠르게 배치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어 1~2일마다 백만대군 단위의 세트장을 계속 만들어내고 그 사이에 진짜들을 교묘하게 섞어 넣어 아군의 피해를 최소화하고 적군의 피해를 극대화한 뒤 히트 앤드 런을 반복하게 하였다. 주코프는 얼마 안 가 인형들로 장난치는 것을 알아차렸지만, 당시 소련군의 기술로는 블록버스터 영화급의 연출로 도배한 세트장과 진짜 부대를 구별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75] 결국 소련군의 초기 공세는 지연될 수밖에 없었다.[76]
당시 국제연맹군은 소련군의 침공을 막아내기 위해 각지에서 병력들을 소집해 전선으로 동원하고, 소련군의 공세를 저지하기 위한 방어선을 만드는데 상당한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마우스 작전으로 그 시간을 번 것이다. 마우스 작전은 수뇌부를 제외하면 아군에게도 철저히 비밀로 붙여져 있어 말단들도 전혀 몰랐고, 국제연맹군의 장교들도 상당수는 당일이 되어서야 알았을 정도였다.[77] 그 귀중한 시간 동안 폴란드 국민들의 순조로운 피난을 성공시키고, 폴란드-독일 국경선 일대에 잡아둔 일명 "모델 선"을 구축하며 아프리카의 강뉴 부대와 아스카리[78] 등 전 세계의 의용군들이 모일 수 있었다.
한편 미국은 국제연맹군에 자국민의 자원 입대까진 허가하며 물자 지원도 준비하곤 있지만 공식 참전까진 논란이 있었다. 이에 아멜리아는 프랭클린 D. 루스벨트 前 대통령[79]을 만나, 미국의 역할은 굳이 전시 체제로 돌입할 필요 없이, 단순히 후방에서 물자 지원에만 힘쓰는 민주주의의 병기창 역할로만 서면서 오히려 전후 세계 질서의 패권을 쥐라는 미국에게 더 유리할 제안을 전하며, 이를 미국 정계도 받아들이게 만든다. 처음부터 히틀러와 히틀러 컴퍼니는 각국마다 역할 배분을 나눠놓았다고.[80] 물론 히틀러 컴퍼니 자체적으로도 군수물자 생산에 총력을 다하였으며, 전체적인 계획을 조율하는 마셜에게는 토트와 슈페어가 전속으로 붙는다.
소련군은 처음부터 장기전을 벌였다가는 자멸할 것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어떻게든 빠르게 끝내고 싶었고, 가짜고 진짜고 한번에 쓸어버리고 돌파하기 위해 중국 봉천정부와의 밀약을 통해 무언의 불가침조약을 맺은 뒤 장쭤린의 묵인 하에 약 100만 명 규모의 소련 극동군단까지 폴란드로 투입하는 도박수를 쓴다.[81] 결국 소련군의 선봉대가 바르샤바 교외까지 도달하는데 성공[82]하자, 히틀러는 발터 모델이 제안한 대로 폴란드 동부를 포기하되 정예병력이 도시에 남아 시간을 끌며 적의 손실을 강요하는 사이 주력 병력이 방어선을 뒤로 재배치하면서 반격을 준비하는 모델 플랜을 실행하고, 개전 직전부터 폴란드의 구심점으로 드높임 받던 유제프 피우수트스키에게 재차 국외 피난을 권유했다. 허나 이미 살 날이 머지않던 피우수트스키는 마지막 권유마저 거절한 채 아예 병석을 박차고 나와 결사항전을 준비하던 바르샤바 수비군 일선에 나아가 항전을 준비한다.
소련의 제정신 아닌 물량공세를 마주한 히틀러는 일단 원 역사의 맨해튼 계획과 우란프로옉트에 참가한 과학자들을 모아 핵무기를 개발하는 일명 "아톰 프로젝트"에 박차를 가하고 있으나 시간 사정 및 기술적 역량이 부족해 핵 효과를 극대화할 대륙 간 탄도 미사일의 등장까지 기다릴 시간이 없었다. 그렇기에 일단 핵무기 대신 드론을 적극 활용해 최전선의 소련군을 24시간 내내 괴롭혀 사기를 깎아내는 것에 초점을 둔다. 이 전술은 잘 먹혔는지 헝가리와 맞댄 오스트리아와 체코슬로바키아 방면의 소련군의 진격이 대단히 지지부진했으며, 그 사이에 미하엘 비트만을 비롯한 1차 독일 지원군이 파견되어 이 방면의 방어선을 더 보강시킨다.
거기다 극초반부터 셸쇼크의 위험성을 잘 알고 있어 국제연맹군과 의용군을 위한 복지들[83]에 굉장히 힘을 써왔기에 복지는커녕 당장 싸울 군수물자 보급도 취약한 소련군보다 굉장히 풍요로운 환경 속에서 싸울 수 있었다. 이 복지 격차도 심리전 수단[84]으로 잘 활용되어 소련군의 진격로마다 러시아어 반공 서적과 국제 신문 등 흥미를 유발시킬 매체와 사치 보급품 등을 일부러 유기해 소련군 정치장교조차 어찌하지 못할 정도로 내부 군기를 망쳐놓는 데 큰 효과를 거두었다.
이렇게 되자 거침없이 진격하던 소련군은 자리야 1호의 부작용과 국제연맹군의 전방위적인 하이브리드전에 몰려 진격이 둔화되고 각종 부작용에 시달리기 시작한다. 파도 같던 소련이 주춤하기 시작하자 극동도 변화가 찾아오는데, 아버지의 행보에 실망한 장쉐량이 히틀러 컴퍼니에게 독자적으로 접촉하고, 한국과 일본은 합동으로 블라디보스토크를 공습하는 계획을 세워 소련이 생각하지 못한 양면전선이란 부담을 안겨줄 계획이 추진된다. 여기에 장제스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독립 세력을 지원하고, 필리핀도 한일 합동작전에 동참을 선언한다.
결국 소련이 공세종말점에 도달하자 만슈타인과 구데리안, 패튼이 제안한 대로 기갑전력을 총동원해 적군을 포위섬멸한 후 공세로 전환하는 만슈타인 플랜으로 전환하고, 소련군은 국제연맹군의 낚시에 걸려 방어선을 돌파했다가 보급선이 끊어지고 국제연맹군에게 포위되었다. 그리고 히틀러가 개발한 CDL(운하 방어등)과 야간투시경으로 무장한 국제연맹군은 야간에 습격을 반복하여 소련군을 지치게 만든다. 이에 트로츠키는 연대책임으로 10분의 1형을 적용하면서까지 군 기강을 잡으며 전선의 붕괴를 막으려 하지만, 중립을 지키던 핀란드조차 국제연맹에 붙을 생각을 하기 시작하고, 이 와중에 처칠은 오데사 상륙작전을 구상한다. 그나마 튀르키예군과의 합동 작전이라는 게 갈리폴리보다는 나은 점이지만. 히틀러는 원 역사 소련군이 독소전쟁 때 문자 그대로 천만대군에 총 3천만에 달하는 인구를 징집했다는 것을 알고 있고, 소련은 러시아 제국과 구조가 다르기 때문에 그때까지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 평하며 방심하지 않지만, 랜드리스가 없기 때문에 무기는 몰라도 병사들에게 필요한 경공업 계열의 물품들은 부족해서 보급에 더 고생하기는 할 거라고 판단한다.
예상보다 소련군이 빠르게 밀려나자 프랑스는 양면전선을 형성하려던 계획이 어긋났고, 오히려 스페인 내전 참전 건으로 경제제재를 맞고 국제무역에서 단절된 후 석유 비축고가 바닥나자 대통령이던 모라스는 기존의 전쟁 계획을 포기하고 히틀러에게 손을 내밀고자 했지만, 라 로크는 오히려 쿠데타를 일으켜 모라스를 감금한 뒤 정권을 완전히 손에 넣고 리비아 유전지대를 확보하겠다며 이탈리아 침공을 강행, 사르데냐, 리비아, 알프스 3곳을 동시에 공격하였지만 알프스 전선에서의 무솔리니의 공격은 이탈리아 산악사단에 막혔다. 워낙 못 싸우기로 유명한 이탈리아군이지만, 알프스 전선은 기본적으로 방어 측이 유리할 뿐더러 스투르초 총리가 일찌감치 프랑스 방면 국경의 방비를 강화하면서 정예병인 알피니와 베르살리에리를 배치했고, 심지어 이들은 국제연맹의 빵빵한 지원까지 받고 있었기에 오히려 프랑스군이 털리는 결과를 초래한 것.
그러나 이탈리아 해군은 영국 해군이 마비되면서 지중해의 최강자가 된 프랑스 해군의 상대가 되지 않았기에 사르데냐는 지키지 못했다. 프랑스는 이를 교두보 삼아 이탈리아 본토, 이집트 수에즈 운하까지 공격할 것이므로, 이를 막기 위해 처칠이 몰타와 크레타를 국제연맹군에게 제공하기로 했고, 견원지간이었던 그리스와 튀르키예가 연합함대를 편성하여 프랑스에 맞서기로 하였다.
한편 리비아에 배치된 롬멜은 독일군과 이탈리아군, 이집트와 팔레스타인에 있던 영국군, 아스카리들까지 합쳐 알제리 방면에서 침공해오는 프랑스군에 맞서지만 이들을 모두 합쳐도 적군에 비해 병력이 부족했는데, 예루살렘에 정착한 유대인들이 프랑스군이 쳐들어오면 자신들도 위험해질 거라 판단해 군대에 자원하면서 무려 3만 명이 넘는 자원병들이 모이고, 전 세계에서 유대 자본까지 밀려들어오며 숨통이 트인다.
그리고 스페인에서는 마드리드 함락 후 공화정부가 게릴라전을 벌이면서 내전이 지지부진해진 상황에서 프랑코가 게릴라의 폭탄 테러로 중태에 빠진다. 이에 프랑코의 측근들은 서로 자기가 권력을 차지하겠다고 다투기 시작하고, 공화정부 게릴라는 스코르체니의 훈련을 받으며 갈수록 세를 불린다. 이로 인해 프랑스에서 스페인 지원에 반대하는 시위가 열렸다가 진압되는 등 다시 반대 세력이 고개를 들 기미가 보이자, 라 로크는 하루빨리 결정적인 승리를 거둬야 한다고 부하들을 닦달하지만, 이미 인도차이나에서조차 독립 전쟁이 확대되고 있었다.
한편 유럽 전선에서는 패튼 부대의 진격이 너무 빠른 탓에 결국 소련군에게 포위당하고 마나, 이탈리아의 사보이아 기병연대가 소련군 참호를 정면돌파하고 이들을 구출하는 기막힌 일이 일어난다. 또한 북아프리카에서는 알제리로 파견된 드골이 기갑부대를 이끌고 리비아를 침공했지만 롬멜이 이끄는 국제연맹군에 가로막히고, 프랑스 해군 역시 사르데냐를 빠르게 점령하는 건 성공했지만 몰타와 크레타에 모여있는 연합함대를 무시하고 수에즈로 갈 수는 없었기에 함대결전을 준비한다. 이 와중에 교황청은 십자군마냥 연합함대 수병들에게 기사 작위를 내린다는 아이디어를 냈으나 대부분 무슬림인 튀르키예 수병들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을 테니 전대사 정도만 내려주기로 한다. 그리고 히틀러 컴퍼니의 지원을 받아 순식간에 오일머니를 벌어들인 사우디아라비아 왕실도 지하드를 명목으로 엄청난 수준의 자금을 지원한다. 덕분에 아제르바이잔 CIA 지부는 자금이 3배나 늘었고, 페르시아와 아프가니스탄을 중심으로 장기 게릴라전에 돌입한다. 여기에 소피아는 작년 여름 캠프에서 겪었던 일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종교와 민족, 국가들 간에 경쟁을 붙여 서로 더 많은 돈을 내게 만든다는 아이디어를 내면서 전 세계에서 엄청난 금액의 돈이 모인다.
히틀러는 이렇게 얻은 돈을 통해 소련 내부의 민족과 종교 갈등을 부추겨 캅카스와 중앙아시아의 무슬림들은 물론,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 등의 동유럽 지역에도 분열을 일으켰고, 폴란드 역시 이에 동참한다. 그리고 마침내 패튼을 비롯한 국제연맹군이 바르샤바를 해방시킨다. 이로 인해 투하쳅스키가 참모총장직에서 물러나고 그 자리에 앉게 된 주코프는 러시아의 전통적인 강력한 무기라 할 수 있는 광활한 영토와 혹독한 기후를 이용하기 위해 키예프 외곽까지 철수를 결정하나, 얼마 안 가 안드레이 블라소프의 전향과 러시아 자유군단 창설 소식이 전해진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지중해에서는 몰타를 중심으로 1차 지중해 해전이라고 불리게 될 함대결전이 벌어지기 시작하고, 프랑스 함대는 재머를 사용하며 이탈리아의 신형 전함인 리트리오를 우선적으로 노린다. 이에 국제연맹 함대는 조기경보선 아르고스 호의 도움을 받아 제트기를 동원해 제공권 확보에 주력하고, 공중전과 해상전이 벌어지는 와중에 프랑스 구형전함인 프로방스가 처음으로 유폭당한다. 그러나 얼마 안 가 국제연맹 함대의 리트리오도 포격을 맞아 조함 불능상태가 되었고, 긴급 수리에 들어가는 사이 아베로프를 비롯한 그리스 함대가 갑자기 진형에서 이탈하자 처음에는 도망치는 줄 알았으나 되려 이들은 프랑스 함대를 향해 돌진하며 최대한 근접해 어뢰를 쏘는, 사실상의 자살 행위를 택하며 시간을 벌어준다. 이 모습에 감격한 국제연맹 함대는 일제히 아베로프를 구하기 위해 포격전을 벌이고, 결국 아베로프는 침몰하나 프랑스 전함 스트라스부르도 직격탄을 맞아 피해를 입는다. 결국 프랑스 함대가 후퇴를 결정하며 1차 지중해 해전은 국제연맹군의 승리로 막을 내린다. 전투가 끝난 직후 각국 함대들은 일제히 침몰한 아베로프의 승조원들을 구조하고, 이는 수백 년간 원수지간이었던 그리스-튀르키예 관계에 변화를 주기 시작한다.
이후 바르샤바에서 해방 기념식이 열리고 히틀러가 직접 바르샤바에서 연설을 하던 순간 암살당할 뻔하지만,[85] 연단 전체에 방탄유리를 둘러싼 덕분에 무사할 수 있었고, 암살범이 현장에서 사살된 직후 히틀러가 자신이 무사함을 드러내며 연설을 이어간다."바르샤바 시민 여러분! 전 무사합니다!국제연맹 사무총장으로서, 제 피는 전 세계 모든 시민의 자유와 명예를 위해 흐릅니다! 저들이 히틀러를 죽일 수 있다면 죽여도 상관없습니다! 전 그저 수많은 사람 중 한 명에 불과할 뿐입니다!만약 제가 이 자리에서 죽더라도, 여러분 모두가 아돌프 히틀러가 될 것입니다! 저들이 제 육신을 죽여 없애더라도 세계와 자유, 평화를 향한 신념은 여러분 속에서 계속 이어질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아돌프 히틀러입니다!"
이 사건으로 히틀러에 대한 전 세계의 지지도는 무려 89%에 달했으며, 이 소식을 들은 트로츠키는 암살 시도가 히틀러의 자작극이라고 확신하며 노동자들의 강제 징집과 포로로 잡힌 장교의 가족들을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리는 등 갈수록 원 역사의 스탈린 같은 면모를 보이기 시작하고, 우크라이나에 아무것도 남겨두지 않는 청야 전술을 지시한다.
그런데 이 와중에 장쉐량이 히틀러에게 장쭤린이 갑자기 남벌을 시도할 것이라고 알린다. 기타 잇키의 꼬드김에 넘어간 장쭤린이 제2차 세계 대전 탓에 아무도 중국에 신경 쓰지 않는 상황에서 자신이 재빠르게 중원을 통일하면 히틀러도 자신을 인정할 수밖에 없으리라 생각한 것. 장쉐량은 이에 반대하며 아버지를 설득하려 시도했지만 오히려 별장에서 사실상의 유폐에 처해진다. 그러길 일주일째, 갑자기 히틀러에게서 쑨원이 선물로 보냈던 삼민주의 책을 전달받은 장쉐량은 히틀러의 숨은 뜻을 알아차리고 아버지를 납치해 강제로 설득하겠다는 생각을 품는다. 이를 위해 중국의 하얼빈 정착촌에 이주한 유대인들을 비롯한 다양한 민족들을 규합, 장쉐량이 고용한 용병으로 위장시켜 침투시킨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들에게 붙은 이름은 모사드.
그러던 중 알프스 전선을 정면으로 뚫지 못한 프랑스가 리구리아에 상륙 작전을 벌이면서 알프스 수비군은 샌드위치 신세가 되어버리고, 무솔리니는 이탈리아 자유 공화국을 선포하고 이탈리아군은 제노바를 중심으로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한다. 히틀러는 사르데냐를 되찾기 위한 수단을 고심했으나 정공법 말고는 방법이 없다는 결론이 나오자 베르사유 조약을 위반하면서까지 독일과 이탈리아가 협력해 진행한 새로운 유보트 프로젝트를 통해 개발한 SLC, 별칭 마리알레(돼지; Maiale)로 불리는 인간어뢰를 동원해 사르데냐 항구에 정박한 됭케르크를 노리는데, 어뢰에 탑승한 침투조 2명이 폭탄을 설치하고 빠져나오던 중 프랑스군에 발각되고 만다. 하지만 이들은 최대한 심문 시간을 끌어서 됭케르크에 설치된 폭탄을 터트리는데 성공하였고, 곧이어 이탈리아군은 MT 고속정을 동원하여 사실상 자살 공격이나 다름없는 기습을 벌인다. 물론 실제로 일본군처럼 자살 공격을 한 것은 아니었고 탈출이 가능했지만 여전히 위험한 것은 매한가지고 탈출해도 십중팔구 포로로 잡혔기에 상당히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그렇게 2차 지중해 해전도 사실상 국제연맹군의 승리로 막을 내리면서 자연스레 본토의 지원이 끊긴 북아프리카 주둔 프랑스군은 고립되어 북아프리카 전역은 사실상 국제연맹군의 승리가 확정된 상황. 하지만 북아프리카를 잃는다고 해서 프랑스가 포기할 리 없었기에 히틀러는 드골을 프랑스 문제를 해결할 열쇠로 낙점하고 그를 트로이 목마로 써먹기 위해 롬멜을 시켜 그의 권력욕을 자극하는 방식으로 꼬드긴 뒤, 일부러 리비아 유전지대를 파괴한 채로 넘겨주며 가짜 승리를 안겨다준다. 히틀러의 목적은 다름 아닌 드골의 명성을 높여 그가 프랑스를 구할 구국의 결단, 즉 쿠데타를 일으키게 만드는 것으로, 이 가짜 승전보에 넘어간 라 로크는 리비아의 석유를 공급받기 위해 지브롤터 점령을 계획한다.
한편 중국에서는 모사드가 쑨원과 히틀러의 어록집을 배포하여 중국인들에게 삼민주의와 히틀러주의를 퍼트렸고, 이에 자극받은 이들은 일명 청위병이라고 불리며 반전 시위를 벌였고, 그 탓에 장쭤린의 명성은 갈수록 떨어진다. 그러나 장쭤린 납치 계획은 결국 누출되고 말았는데, 장쭤린은 이를 알고도 장쉐량의 모습에 마음이 동했는지 비로소 마음을 고쳐먹고 연극에 어울려주겠다면서 자진해서 납치당하여 남벌을 멈춘다는 성명문을 발표하고, 풀려난 뒤에는 일부러 길길이 날뛰며 장쉐량을 총살하라고 한다. 그리고 재판정에서의 장쉐량의 연설이 알려지자 중국인들이 다들 나서서 장쉐량의 총살 집행을 중단하라는 시위를 벌였고, 장쭤린은 이에 못 이기는 척 장쉐량을 사면하고 공직에서 물러나겠다 선언한다. 그 와중에 장쭤린 곁에서 그를 부추긴 기타 잇키는 이성순에게 걸려 체포당하며 국제연맹 특별교도소에 갇힌다.
이 일로 장쉐량이 권력을 물려받게 되고, 곧이어 장쉐량과 장제스가 타협하면서 남북 총선이 치러지게 되자, 장제스는 자신이 당선되기 위해 장쉐량의 치부를 들춰내 공격하지만 장쉐량은 히틀러가 자신에게 보내준 삼민주의 책을 이용해 반격한다. 히틀러는 대소련 견제를 위해 둘의 싸움을 더욱 부추긴다. 총선에서는 장제스가 무난히 승리하겠지만 장쉐량을 만주의 지배자로 내세워 장제스와 소련 양쪽을 견제할 필요가 있었던 것.
한편 소련군이 철수하면서 청야 전술을 실시하여 초토화된 서부 우크라이나에 국제연맹군이 진입하면서 굶주리고 초췌한 주민들과 파르티잔들을 마주하게 되자 독일군 장교들 사이에서 이들을 토벌하기 위해 파르티잔에 협조한 주민들을 처벌하자는 의견이 나왔으나, 다름 아닌 패튼이 이에 누구보다도 앞장서서 반대하며 주민들에게 관용을 베풀고, 집단농장 금지와 사유재산 보장 등을 통해 민심을 얻으면서 성자라고 불리게 된다. 히틀러는 피우수트스키 장군이 주장했던 인터마리움을 퍼트려 폴란드 정부의 지원은 물론 폴란드인들을 비롯한 동유럽 주민들이 스스로 국제연맹군에 자원하게 만들고,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의 독립은 순조롭게 진행된다. 그런데 독립한 우크라이나에서 반유대주의가 퍼지면서 포그롬이 일어나자 히틀러는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 안드리 멜니크에게 경고를 보내는 한편 포그롬에 대해 솔직하게 발표하여 전 세계의 유대 자본으로 우크라이나 독립을 지원하기로 한다. 그리고 포그롬에 대한 발표가 나가자마자 전 세계의 유대인들이 소련의 광궤와 호환되는 핀란드의 기관차를 모조리 사들여 국제연맹군에 지원한다. 여기에 히틀러는 공화국 기사단 각 지부의 유대 공동체를 동유럽 마을들과 하나씩 연결하는 자매 도시 개념을 도입해 기부 캠페인을 촉진하고, 미국에서는 5백 만 명의 유대인들이 모두 행동에 나서면서 정계가 들썩인다. 그리고 롱 대통령은 공화당과의 협조를 위해 다름 아닌 허버트 후버를 중용하기로 결정하면서 마셜, 슈페어, 토트, 후버까지 보급행정 드림팀이 모인 국제식량 위원회가 결성되어 동유럽 주민들을 지원한다. 그리고 라스푸티차 기간 동안 소련군이 공세를 진행하는 것을 막기 위해 CIA와 무자헤딘이 바쿠 유전지대에 드론을 보내 아잔을 울려 무슬림들을 자극해 봉기를 일으키는 동시에 V2 로켓을 동원해 공습을 벌였고, 이 틈을 타 무자헤딘들은 자동소총과 휴대용 로켓을 동원해 바쿠 유전지대를 공격한다. 그리고 이것을 지하드로 대대적으로 홍보해 전 세계의 무슬림들을 자극한 결과 프랑스 식민지였던 알제리와 모로코, 튀니지에서도 민심이 요동치기 시작한다.
결국 소련군은 아제르바이잔 봉기를 진압하겠다고 그동안 사용을 꺼리던 생화학무기까지 꺼내들었고, 히틀러는 스웨덴을 통해 소련과 비밀리에 협상을 주선하나 외교관으로 나선 몰로토프는 생화학무기 사용을 한사코 부인한다. 그러자 히틀러는 교도소에 갇혀있던 기타 잇키를 찾아가 재판에서 자유롭게 신념을 내보이는 것을 대가로 소련의 일본 내전 개입과 생화학무기 개발 사실을 증언해달라고 요청하고, 잇키는 이를 받아들이면서 소련이 생화학무기를 로켓에 탑재하려는 연구를 진행 중이라는 사실까지 밝힌다. 그리고 얼마 후 기타 잇키의 재판이 생중계되는 동안 잇키는 약속대로 소련의 일본 내전 개입과 생화학무기 개발 사실을 증언하면서 자신의 신념을 드러내는 연설을 하지만, 대부분의 일본인들은 잇키의 연설에 넘어가지 않고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으며, 그를 따르던 반란군 잔당은 오히려 그의 증언에 실망해서 투항하거나 자결해버렸다.
방송이 나간 직후 소련을 향한 국제적 압박이 다시 시작되고, 히틀러는 일부러 혁명기념일에 맞춰서 핀란드만에 유보트를 보내 바다에서 순항 미사일을 모스크바로 쏘되 직접 뭔가를 타격하지 않고 단지 모스크바 상공을 지나가게만 해서 공중에서 터트림으로써 후방도 안전하지 않다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이 메시지는 매우 잘 먹혀들어 정치국 간부들조차 트로츠키에게 반대하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다.
[1] 원 역사에서 범인이 이탈리아의 아나키스트 루이지 갈레아니를 따르는 갈레아니주의자라는 추정이 있었다. 이 설을 따른 것.[2] 그 이름을 들은 독자들은 현실에 존재했던 진짜 히틀러 사단이 떠오른다며 여러 드립을 쏟아냈다.[3] 물론 히틀러 역시 자기가 찬성한 규제를 모조리 적용하면 라디오 산업은 끝장이라는 건 잘 알고 있었기에 진심으로 한 소리는 아니었고 계속 그렇게 나 견제하면 그냥 다 같이 죽어버리겠다는 일종의 협박을 겸한 블러핑이었다.[4] 워낙 제대로 물먹은 탓에 훗날 사장이 되는 협상인으로 왔던 사르노프마저 "히틀러씨 당신은 정말 좆같은 사람입니다"라며 대놓고 욕이 섞인 비꼬는 칭찬을 할 정도.[5] 히틀러의 예전 성이다.[6] 히틀러 본인은 스타워즈에서 따온 거지만, 마침 독일도 제국이 무너지고 공화국이 세워진 상황이라 독일을 모티브로 한 것 아니냐는 소리를 들었다. 한편 중국에서는 청나라를 무너트리고 중화민국이 세워진 자기들 상황을 따왔다고 생각했고, 일본 제국에서는 반제국주의라는 위험사상을 다룬 작품으로 인식했다.[7] 그리고 거미 인간, 박쥐 인간 같이 중간에 폐기한 아이디어도 언급된다.[8] 루스벨트의 입지가 강화된 것인지, 아니면 해군이 예산을 더 탔는지 노스햄프턴급 중 한 척인 '시카고(CA-29)'가 원 역사보다 훨씬 일찍 나온다. 함장은 태평양 전쟁의 전설 체스터 니미츠.[9] 테네시의 라이벌이라는 점 외에도 농업이 발달해서 컴파운드H 양산에 필요한 옥수수를 쉽게 구할 수 있다는 점도 있었다. 덕분에 최첨단 산업으로 얻은 경제효과로 난데없이 로또 맞아서 신난 켄터키는 아예 주지사가 나서 로켓맨을 가장 미국적인 만화라고 찬양하고 히틀러가 맘 바꾸지 말라고 대령 직위까지 내려버린다.[10] 이 모습은 맥주홀 폭동 이후 체포된 히틀러의 재판 과정을 참고한 것으로 보인다.[11] 할랜드 샌더스가 이 직위를 받은 것으로 유명하다.[12] 사실 이는 소련에 있는 누군가가 미래를 아는지 확인하기 위해 히틀러가 SS급 카나리아 역할로 보낸 것이었다.[13] 이때 세무조사 지표 자료 정리를 진두지휘한 리히터는 여자랑 하룻밤 잔 것보다 더 끝내주는 상황이었다며 피로에 찌든 상태에서도 매우 흥분해있었다.[14] 당연히 다우징 로드 같은 걸로 찾아낸 건 아니고, 자료 노트에 유전의 위치가 있었기 때문에 찾을 수 있었던 것이다.[15] 프랑스는 히틀러를 고깝게 보고 있어 자금 지원에 반대했으나, 미국, 영국, 독일, 오스트리아 모두 히틀러를 지지하고 있었고, 특히 미국과 영국은 안슐루스가 일어나 기껏 족쇄를 채운 독일이 폭주하거나 오스트리아까지 공산화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을 뿐더러 미국은 히틀러가 이탈리아 내전 상황을 미디어 매체로 알린 덕에 이탈리아를 수월하게 지원할 수 있었고, 영국은 히틀러가 개발한 컨테이너 도입을 추진 중이었기에 자금 지원에 흔쾌히 찬성했다. 결국 혼자서 반대를 이어나갈 수 없었던 프랑스도 타협 끝에 자금 지원에 찬성한다.[16] 연설은 이탈리아어로 했기 때문에 같이 송출된 통역 방송까지 듣지 못하거나, 가톨릭 교회에 직접 가서 신부들의 통역을 듣지 못한 사람들은 무슨 내용인지 알아듣지 못했으나, 교황의 목소리를 듣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에 전율했다.[17] 원 역사에서도 로마 교회는 모건 하우스에 재정운용을 맡겼다.[18] 그나마 힌덴부르크는 금 모으기 운동 초창기 때 본인이 거주 중인 저택을 기부하였고, 여론이 안 좋아지는 것을 파악한 융커들도 뒤늦게 기부를 하긴 했으나 욕을 먹는 건 피할 수 없었다.[19] 1913년 일본에서 창간된 실존하는 잡지로, 나치 독일과는 아무 상관없다. 반제국주의, 반군국주의 성향을 보이면서 만주와 조선의 포기를 주장했다. 원래는 사회주의 성향이었으나 작중에서는 이탈리아 내전 이후 분위기가 돌아섰다고 한다.[20] 그런데 저러고도 90살까지 살았으니...[21] 이 일은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바이마르 공화국과 나치 정권은 아스카리들에게 군인 연금을 지급했으나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중단되었고, 1964년에야 재개되었는데 그때까지 생존한 아스카리들의 복무 사실을 증명할 방도가 없었으나 한 독일인 은행가의 아이디어로 모두에게 빗자루를 들려주고 독일군 제식을 지시한 것. 그리고 실제로도 모인 사람들 모두가 간단하게 통과했다.[22] 조셉은 히틀러가 무슨 메시아냐고 한다.[23] 히틀러가 안톤을 배려해 안톤과 별 관련이 없는 사람들만 골라서 폭로했기에 안톤은 의심받기는커녕 내부감찰이라는 중역을 맡게 된다.[24] 히틀러 컴퍼니에서 자체적으로 사용하는 일종의 화폐로, 원래는 히틀러 컴퍼니 지부들끼리 서로 환전에 드는 비용이나 수고를 줄이려는 목적으로 사용되었으나 히틀러 컴퍼니의 높은 신뢰도와 충성도 때문에 다른 중국 기업들이 알음알음 사용하더니 어느샌가 중국 은행까지 취급하는, 사실상의 공용 화폐가 되어버렸다.[25] 상술했듯 중국 시장은 이미 히틀러 컴퍼니에 대한 높은 신뢰와 충성도를 바탕으로 히틀러가 장악한 것이나 다름없는 상태였고, 대공황의 극복을 위해선 중국 시장이 필수적이었다. 즉 이 시점에서 세계 각국에는 H 플랜에 참여하고 경제가 히틀러 컴퍼니에게 종속되는 것을 감수하면서 경제 위기를 극복하든가, 아님 그대로 대공황으로 경제가 망하든가 둘 중 하나를 고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26] 뜬금없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의외로 드론의 개념 자체는 제1차 세계 대전 시기부터 존재했고 캐터링 버그 같은 원시적인 드론도 제1차 세계 대전 시기에 개발된 적 있다.[27] 물론 즉시 주는 게 아닌 10년 뒤에야 자치권을 보장하고 20년 뒤에나 일본 의회까지 진출할 수 있도록 참정권 제한을 풀어주겠다는 약속이었다.[28] 최초의 일본 왕조라는 상징을 가진 야마토(大和)의 음독 발음을 가져왔다.[29] 히틀러가 직접 출전(出典)해준 연호로, 이것의 유래는 노부히토의 조카이자 실제 천황으로 재임했던 아키히토의 연호를 가져왔다.[30] 대상자는 지금까지 억류한 삿포로 정부 해군에 합류한 해군 장병의 가족들로 이들은 유대인도 식민지인도 아닌 엄연한 일본인이다.[31] 해당 작전의 암호문도 니타카 산에 올라라였다.[32] 이 고발을 통해 소련의 상임이사국 진출을 저지할 수 있으며, 더 나아가 소련이 야심차게 추진 중이던 경제 개발 계획에 동참하던 서유럽 기업들에게 윤리적인 비판을 당할 명분을 줄 수 있게 된다.[33] 무상몰수 무상분배를 원칙으로 한 공산주의에 가까운 토지 개혁을 통해 농민층의 지지를 확보했다.[34] 재밌게도 렌야가 항공부대에 붙인 이름은 카미카제였다.[35] 4년 전부터 총력전에 돌입한 도쿄 정부가 동원하고 있던 일본 육군 및 예비 전력은 거의 수십만에 달한다. 반면 급히 도망치느라 겨우 홋카이도와 규슈에 거점을 마련한 삿포로 정부는 해군 수병과 해군 육전대, 규슈 반란군 모두를 합쳐도 5만 내외에 불과했다.[36] 물가가 파탄 상태에 이르러 암시장으로 생필품을 구하려다 체포당한 민간인이 150만 명을 넘을 지경이었다.[37] 왜 공화냐면 옛날 다이묘처럼 지방 유력 인사를 내세웠던 것과 다르게, 독립 국가를 자칭한 각 지방들이 극히 일부만 빼면 거의 다 민주주의에 기반한 공화국 정신을 기치에 내세우며 거병했기 때문이다.[38] 중앙 질서로부터 자립한 지방 도시들은 모두 제대로 된 자치 질서가 확립되기 전인 데다, 무엇보다 경제가 무너진 상태에서 독립한 거라 코민테른이 심어둔 일본 공산당 잔당 세력이나 좌익 선동가들의 선동에 취약했다. 히틀러가 일본을 내버려둘 수 없는 이유도 이러한 불안 때문이다.[39] 기존 일본 경제의 근간이었던 재벌들도 몰락해 백지 상태가 된데다, 사실상 헤이세이 천황이 직접 부탁할 정도로 일본에서 아주 절대적이었던 천황의 권위가 땅에 떨어졌다. 이러한 상태는 실제 역사에서 추진하려 했지만 시대적인 어려움으로 포기한 일본 대개조 계획을 실현할 수 있게 된다.[40] 삿포로 정부의 이러한 선택은 제4제국 등 내전 종결 후 부활한 자유 언론들을 통해 퍼져 극과 극의 손익을 불러왔다. 긍정적인 효과는 도쿄 정부 잔당 인물들과 소련이 남기고 떠난 좌익 선동가들이 경거망동 자체를 할 수 없을 정도로 국가와 민족의 역적으로 낙인찍을 수 있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엄연한 전범 책임이 있을 다이와 천황 이하 도쿄 정부의 탈주를 방조한 덕분에 일본 황실 전체에 대한 배신감으로 이어져, 지금까지 당연하게 여겨온 천황의 신성과 권위가 붕괴되어 버리는 부정적 현상을 자초해버렸다.[41] 또한 일본 특유의 지역 갈등이 더 심해진 모습도 드러났다. 여기선 규슈 생화학 폭격 미수에 대해 얼마 전까지 적이었던 규슈 공화국과 폭격기 생산 공장이 있던 오사카 시국 간의 책임 공방전만 나왔지만, 이러한 원한 섞인 갈등이 이 두 지방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42] 그 결단이라는 건 메이지 유신 이래로 황실의 특권이 보장되던 메이지 헌법의 폐기와 천황 스스로 신격화를 포기한 인간선언을 하라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히틀러가 아예 인간선언을 위한 대본까지 만들어주었다.[43] 이 형편은 소련의 트로츠키조차 잘 알고 있어 히틀러가 주도하려는 자본주의식 탈식민화가 프랑스에선 안 될 거라며 낙관할 정도.[44] 화교들은 수백 년 전부터 동남아에 진출해 각종 산업을 집어삼켰고, 프랑스는 이들의 자본을 통해 식민통치를 수월하게 하였고 화교들은 프랑스군의 보호를 받으며 현지인들을 착취하고 있었다. 그런데 식민통치가 끝나고 프랑스가 철수하면 현지인들의 분노가 고스란히 자신들에게 돌아올 것이 뻔했다.[45] 이렇게 할 수만 있다면, 수십 년 이내로 대영제국 체제가 해체되어 영연방으로 대체되더라도, 인도(+파키스탄, 방글라데시)가 여기서 탈퇴하지 않고 끝까지 남아 오히려 미래의 영연방이 엄청난 경제, 외교 공동체로서 국제 무대에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된다.[46] 그나마 있는 로켓과학과 우주 과학자들도 전부 히틀러 컴퍼니가 옛날부터 장학생으로 육성하고 선발한 젊은 인재들이었기에, 이들에게 수백만 달러를 제시하더라도 그 누구도 히틀러 컴퍼니를 배신하지 않았다.[47] 실제 역사에서 코롤료프의 발사 실험은 수많은 실패가 반복되다 겨우 성공할 수 있었는데, 하도 실패하다 보니 국고낭비 혐의로 고발당해 잠시 숙청당했다가 구사일생으로 복권되어 돌아올 정도였다. 그런 식으로 실패를 용납할 여유가 없던 스탈린과 다르게 트로츠키는 실패 없는 진보는 없다며 더 많은 지원을 약속해주었다.[48] 굳이 있을 필요 없는 인형을 놔둔 것은 바로 수년 전 미국에서 있었던 보너스 군대 사건을 재연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의미였다.[49] 유럽의 그 누구보다 가장 앞장서서 헝가리 난민들을 포용하는 자세를 보임으로써, 이를 구실로 베르사유 조약의 남은 배상 문제를 완전히 털어내는 보상을 얻을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50] 헝가리 혁명에 대한 소련의 무력 진압 시도는 전 세계 공산주의자에게 큰 배신감을 안겨주는 제국주의적 침략행위나 다름없었다. 그렇기에 상황이 장기화될수록 코민테른만 불리해지게 된다.[51] 우주 개발이 계속된다면 달의 소유권 문제가 발생할 텐데, 그걸 미리 막기 위해서라도 국제연맹이 지금 컨트롤타워 역할을 해야 한다.[52] 물론 달 개척은커녕 달 유인 착륙이 실현되려면 최소 몇십 년이나 걸려야 가능하기에, 이 불편한 진실을 알고 있다면 효과는 크지 않았을 것이다. 히틀러에게 이 아이디어를 처음 들은 괴벨스도 만약 대중들이 깨닫는다면 열정이 식을 수도 있다고 우려할 정도.[53] 여기는 간디가 직접 전국 라디오 연설을 통한 적극적인 참여를 촉구한 덕에, 무려 8천만 명의 인도 시민들이 기부에 연대했다.[54] 전 세계에서 각출된 기부금들은 원래 경제 체제라면 전부 미국 달러 등 국제 통화로 환전하느라 수수료 등 불필요한 행정 절차가 가득했겠지만, 공화국 기사단 지부나 히틀러 컴퍼니 산하 지사가 배부한 H 크레딧 단위로 모금되어 이 절차들을 잔뜩 생략할 수 있었다. 이렇게 전 세계에서 나온 H 크레딧의 정확한 수치가 집계되는 대로, 유럽 전역에 설치된 히틀러 컴퍼니 산하 기업들이 그 가치만큼의 상품들을 구호품으로 발송해버리는 절차로 이루어졌다.[55] 이 중에는 갓 작가 생활을 시작한 조지 오웰도 있었다.[56] 가장 큰 사유는 역시나 독일의 재무장 우회 의혹이었으며, 국제연맹군이 장차 프랑스의 식민통치에 가장 방해가 될 훼방꾼이 될 거란 극우 세력의 프레임이 먹힌 점도 있다.[57] 불의 십자단이 악시옹 프랑세즈에 합류하면서 악시옹 프랑세즈의 세력이 다시 커진 판국에 소련이 해외 기업 자산을 몰수한 사건이 터지면서 열받은 프랑스 자본가들이 책임을 소련이 아닌 히틀러 컴퍼니에게 돌려, 그들에게 가장 적대적인 악시옹 프랑세즈를 후원하는 현상이 벌어졌다. 여기에 라 로크가 히틀러처럼 TV와 라디오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자신들을 알린 것까지 겹치며 악시옹 프랑세즈가 무려 35%나 되는 지지율을 확보해 단숨에 프랑스 정계는 국수주의 극우 세력이 장악해버렸다.[58] 반면 바롱 에드몽드 드 로스차일드가 이끄는 프랑스의 로스차일드 방계 가문은 아무리 반유대주의가 강하더라도 지금까지 유대인이 축출된 적 없으니 굳이 탈출할 필요가 없다며 위기 경보를 무시하는 안일한 판단을 해버렸다.[59] 국제연맹군 내에서 통용되는 단위를 확실하게 미터법으로 적용해서 야드파운드법에 익숙한 미군 출신 장교들이 헷갈려 하는 언급이 있다.[60] 각종 인프라, 학교 건설, 장교 육성 훈련 위탁 등의 지원을 기본적으로 제공하는 걸 시작으로, 유전 탐색 및 발굴의 위험은 전적으로 히틀러 컴퍼니가 부담하되, 만일 유전이 채굴된다면 그 유전 수입의 50%를 사우디 왕실에게 그냥 헌납해준다는 굉장히 후한 조건이었다.[61] 프랑스의 재정 상태가 매우 나쁜 만큼, 산업 육성을 위한 재원은 전부 국채로 벌충하겠다는 방안을 세웠다. 이때 프랑스의 재무장관은 이런 식으로 강행했다가 국가 신용도가 나락으로 갈 위험이 크다고 경고했으나, 라 로크는 이를 무시하고 정책을 강행한다.[62] 헝가리 혁명 진압전에 참가한 미하일 투하쳅스키나 트로츠키가 각별히 지원해주는 코롤료프가 대표적인 예시.[63] 애초에 붉은 군대는 트로츠키와 우호적인 핵심 장교진들이 많아 이번 숙청 사건에서 희생당한 장교들이 손에 꼽을 만큼 적을 수밖에 없었다. 반대로 실제 대숙청 당시엔, 이러한 특징 때문에 굉장히 많은 붉은 군대 장교진들이 트로츠키파 혐의로 숙청당했으며 결국 독소전쟁 개전 당시 상상을 초월하는 졸전과 역사적인 대패를 불러오는 결과를 자초했다.[64] 원래대로라면 작중 시점에서 7년 전에 의문사당했어야 했지만, 레닌이 몇 년 더 장수하고 프룬제와 우호적인 트로츠키가 버틴 덕분에 현 시점까지 붉은 군대의 핵심 인사로 건재할 수 있었다.[65] 히틀러가 유대인 및 프리메이슨과 한패이며 교황이 이들에게 속고 있다는 악시옹 프랑세즈의 주장을 따라한 것이다.[66] 참고로 이들을 지원하는 악시옹 프랑세즈는 이미 수년 전 파문당했지만, 정작 프랑스 내에서는 별 반응이 없었다. 애초에 프랑스는 아비뇽 유수라든가 나폴레옹이 대관식을 치르기 위해 교황을 직접 파리까지 데려오거나 관을 교황이 내려주는 대신 자기가 직접 집어 쓴 사건 등, 역사적으로 계속해서 교황청과 충돌해왔기에 교황청 말이라고 마냥 따르지도 않았을 뿐더러, 지금의 프랑스인들은 교황청보다 악시옹 프랑세즈를 더 믿고 따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 스페인 내에서는 가톨릭의 위세가 강하고 그만큼 교황청의 영향력도 크기 때문에 파문이라는 단어가 주는 충격은 차원이 달랐다.[67] 공산 진영의 의용군 사령관으로 파견 온 게오르기 주코프는 자리야 1호라고 이름 붙인 페르비틴을 뿌려 공산 진영이 그 어떤 요새에도 무제한 인해전술로 밀어붙일 수 있게 만들었다.[68] 국제연맹군을 위해 몇 년 빨리 발명된 돌격소총을 공화정부 측 시민군에게 뿌려 기존 소총과 차원이 다를 화력을 뿌릴 수 있었다. 이 돌격소총에 굉장한 손실을 당한 공산 진영은 이걸 "히틀러의 세탁기"라는 별명으로 따로 부를 정도였다.[69] 미국까지 망명한 부하린에게 소련을 조롱하는 내용의 만화 아이디어를 알려 트로츠키의 소련에 대한 정통성을 흔드는 걸 시작으로, 소련이 뿌리는 각성제가 가진 심각한 부작용을 폭로하는 만평 만화를 드론을 통해 뿌렸다.[70] 특이하게도 외국인에 대해 굉장히 배타적이던 일본 민간인들 차원에서 자발적으로 나섰는데, 이들은 과거부터 떠돌던 일유동조론에 기반한 것도 있겠지만 자신들의 구원자로 나선 히틀러를 신앙 수준으로 믿었던 데다, 이미 유대 정착촌이 있는 홋카이도의 여러 마을들이 경제적으로 굉장히 번영하는 걸 알고 있었기에 유대 자본이 더 들어와야 폐허가 된 국토를 회복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한 점도 있었다.[71] 심지어 모건 하우스와 예전부터 사이가 나쁘던 미국 유대계 은행, 쿤 로브 뱅크 측 유대인 관계자들도 악시옹 프랑세즈에게 제대로 한 방 먹일 기회라고 판단해 모건 하우스와 손을 잡고 이 작전에 가세하기도 했다.[72] 트로츠키가 사망했을 때는 프랑스 침공(1940년 5월 10일~6월 25일)부터 얼마 뒤였고 독소전쟁의 시작을 연 바르바로사 작전(1941년 6월 22일)도 벌어지지 않았을 때였다. 즉 트로츠키는 2차대전이 독소전쟁과 태평양 전쟁으로 인해 역전했음을 전혀 모른다.[73] 튀르키예 내각에서는 반대가 컸지만 뛰어난 군재를 가지고 있던 아타튀르크는 이대로 중립을 지키려 했다가는 소련이 얼마 안 가 튀르키예를 침공할 것임을 예측하고 소련이 본국에 쇄도하기 전에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고, 내각에서도 아타튀르크의 군재를 인정해서 결국 받아들인다.[74] 단순한 고무 인형은 아니라서 바퀴가 달려있고 소리도 그대로 흉내 낼 수 있었다.[75] 설령 소련군이 열화상 장비가 있다 하더라도 인형 안에 히터 같은 것을 넣어 속이면 되는 문제다. 현실에서도 유고슬라비아 전쟁 당시 세르비아군이 나토군을 속이기 위해 나무와 천으로 전투기와 전차의 인형을 만든 후 안에 히터를 설치하여 나토 공군의 열화상 장비를 속이는 전술을 사용한 바 있다. 어찌나 잘 먹혔는지 나토가 '세르비아 애들 전투기가 저렇게 많았나?'라고 오판할 정도로 말이다.[76] 국제연맹 공군이 초장에 제트기를 보내 기선제압을 한 것도 마우스 작전에 동원된 고스트 아미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한 사전 연출이었다.[77] 마셜은 마우스 작전이 잘 통할지 우려했지만 다행히 디즈니의 완벽주의 성향에서 나온 연출 기법과 진짜 가짜의 움직임을 교묘히 배치하고 이동시키는 독일 출신 국제연맹군 장교들의 기량에 힘입어 성과를 냈다. 가짜라는 걸 알고도 대응하기 힘들도록 굉장히 정교한 움직임을 펼쳤다고.[78] 원래 독일이 지배하던 독일령 동아프리카 출신 주민들이 먼저 아스카리로 자원했는데, 지난 독일 정부가 아스카리 참전 용사들을 계속 챙겨준 선의가 아프리카에 잘 알려져 있다 보니, 원래는 아스카리와 동떨어진 일반 흑인 주민들조차 스스로 아스카리를 자칭하며 경쟁적으로 이 의용군에 끼어드는 열풍이 발생했다. 결국 아스카리라는 기치 아래 모인 아프리카 의용군만 10만 명에 달했고, 이 소식을 들은 레토포어베크 독일 대통령은 자신이 직접 지휘한 아스카리 병력이 2만 명이었는데 어떻게 그보다 많은 사람이 모인 거냐며 의아해했다.[79] 당시 FDR은 4년 일찍 대통령직을 시작해서 2선 하고 물러난 상태였지만, 외교관 양성 아카데미를 운영해서 국제연맹에 관여하고 있었던 막후 실세 중 하나였다.[80] 원 역사의 무기대여법과 달리 군수물자는 일부 미국 기업들의 자율성에 맡기고 대부분은 전시 중에 국제연맹군에 속한 각국에게 식량과 생활품을 지원해주는 역할이다.[81] 장쭤린도 히틀러의 이상을 잘 알고 있고 경제적 번영을 누린 빚을 졌다는 걸 부인하진 않지만, 핀란드처럼 굳이 전쟁에 휘말리기보단 중립을 지켜 양측 모두로부터 이익을 추구하려는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당장 그의 아들인 장쉐량부터 뭐하는 짓이냐며 항의했으며, 히틀러와 국제연맹 지휘부도 불쾌하게 볼 정도였던 만큼, 장쭤린의 선택은 자충수로 끝날 가능성이 높다.[82] 이때 소련군은 카츄샤 다연장로켓까지 제작해 본격적인 시가전까지 준비하고 있었다. 이전 부다페스트 전투에서 지독한 살육의 전훈을 겪어왔기에 아예 도시를 초토화시키면서 돌파할 작정이었던 것.[83] 심지어 화상통화 기술까지 발명 및 실용화까지 되었는지, 최전선의 병사와 후방의 가족들이 화면으로 만날 수도 있었다.[84] 공교롭게도 이를 총괄하는 국제연맹 기관의 명칭이 어느 유명한 소설의 기관의 명칭을 연상시키는 "진실부"였다.[85] 이는 트로츠키의 지시가 아니라 소련군 출신의 장병이 저지른 독자적인 행동이었다. 거짓으로 전향한 척하고 러시아 자유군단에 합류하여 기회를 노린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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