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5 13:53:49

인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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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유사과학의 일종인 대체의학으로 분류하나, 한국, 중국, 북한, 대만 4개국에는 독립된 한의학부가 존재하여 의학사에 준하는 학위를 부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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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명칭
2.1. Arts2.2. Humanities2.3. 그 외
3. 인문학의 주제와 분과 학문
3.1.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주제들3.2. 학문 분류3.3. 인문대학학과
4. 인문학의 위기에 대한 논의와 극복을 위한 제언
4.1. 학술 성과 계량 기준 부재4.2. 인문학 연구 성과 축적에 소홀함4.3. 인문학의 가치를 인문학계 스스로 입증하지 못함4.4. 다른 학문 분야에 비해 수준이 낮은 국내의 인문학 교수들
4.4.1. 비판 없는 학문적 세계와 그에 따른 저조한 학문적 성과4.4.2. 인문학 바깥 세계의 견제 부재와 그로 인한 카르텔 형성
4.5. 취업 시장에서 상대적으로 외면받는 인문학 전공자
4.5.1. 학부 졸업생의 현실4.5.2. 대학원의 현실
4.6. 세상과 지나치게 유리된 인문학
4.6.1. 과학기술 시대의 인문학
4.6.1.1. 적대적인 관계를 허물고 교류할 필요성4.6.1.2. 교류를 넘어서서 과학을 주도하는 인문학의 필요성
4.7. 외국의 현실4.8. 인문학 위기에 대한 풍자4.9. 인문학의 발전을 저해하는 인문학 옹호론
4.9.1. 인문학을 배워야만 통합적 사고력을 기를 수 있는가?4.9.2. 인문학적 감수성이 실존하는가?4.9.3. 인문학은 시장을 도덕적으로 만드는가?
4.9.3.1. 반론
4.9.4. 인문학의 경제적 가치는 높다?4.9.5. 문화와 예술의 발전에 도움을 주는가4.9.6. 인문학의 가치와 인문학 지원의 필요성을 입증할 책임은 수요자에게 있다?
5. 고전의 가치6. 외국어의 중요성7. 인문학에 대한 말8. 관련 문서

1. 개요

1. "인문"이란 인간과 인간의 근원문제 및 인간의 사상과 문화를 말한다.
2. "인문학"이란 인문에 관하여 탐구하는 학문으로서 언어학·문학·역사학·철학·종교학 등의 학문과 직관·체험·표현·이해·해석 등 '인문학적 방법론'을 수용하는 제반 학문 및 이에 기반을 둔 융복합 학문 등 관련 학문분야를 말한다.
인문학 및 인문정신문화의 진흥에 관한 법률 제3조
/ Humanities, Arts, Liberal Arts

인문학은 인간의 삶, 사고 또는 인간다움 등 인간의 근원 문제에 관해 탐구하는 학문이다.

인문학은 인간과 인간의 근원문제, 인간의 문화에 관심을 갖거나 인간의 가치와 인간만이 지닌 자기표현 능력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 연구하는 학문 분야로서 인간의 사상과 문화에 관해 탐구하는 학문이다. 오늘날 인문학은 자연과학, 사회과학, 형식과학 및 응용과학 이외의 연구 분야로 더 자주 정의된다.

사회과학자연과학과 다른 점은 연구분야와 연구방법론에서 찾을 수 있다. 사회과학과 자연과학은 인간을 둘러싼 사회계와 자연계의 현상에 대해 귀납법적으로 (경험적으로) 접근하거나, 연역법적으로 보편적인 법칙(당위) 에서 특정한 법칙을 유도하는 과학적 방법론을 추구한다. 반면 인문학은 인간의 본질에 대해 사변적이고 비판적이며 또한 분석적으로 접근하여 인간 본질의 정수를 다루는 것을 목표로 한다.[1]

다만 최근에는 실제 인문학으로 묶이는 각 학문분과에서 석박사 급 연구자들이 과학적 방법론을 사용하는 연구사례도 볼 수 있다. 예컨대, 언어학은 언어에 대한 가설을 세운 후 이를 귀납적이거나 연역적으로 검증한다. 즉, 화자직관에 대한 실험 및 관찰을 통해 귀납법적으로 언어의 본질을 탐구하거나(귀납법), 강력최소주의가설(SMT)[2] 등 공리로부터 연역적으로 그러해야 하는 당위를 도출해낸다. 인류학의 경우도 가설검증을 위해 종족이나 사회문화에 대한 관찰을 일반화하고 이를 통해 해당 가설을 귀납적으로 검증한다.

이를 이유로 교수를 비롯한 연구자들 내에서 '최근에는 인문학 연구에 과학적 방법론이 쓰이고 있으니 과학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하고, 인문학을 과학의 영역에 편입시키려는 시도도 있다. 이러한 트렌드를 반영하여 간학문적 연구의 개념으로서 인문사회과학이라는 문과계통의 포괄 개념을 만들기도 하지만,[3] 대한민국에서는 공식적으로 국가과학기술표준분류체계에서 대분류상 인문학(HF)과 사회과학(HG)을 완전히 분리하는 분류 방식을 채택하고 있으며,[4] 인문학 및 인문정신문화의 진흥에 관한 법률을 통해서도 인문학에 대한 법적 정의를 확립하고 있다.

2. 명칭

2.1. Arts

총체로서의 인문학에 대응하는 영어 어휘는 'Arts(아츠)'이다. 마찬가지로 인문학사는 'Bachelor of Arts(B. A.)'라고 한다. 흔히 아트라 하면 '예술'만을 뜻하는 것이라 오해하기 쉬우나, 이는 예술과 인문이 명확히 구별되지 않았던 고대의 학제 배경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오늘날 인문학의 범주로 포함되는 학문들은, 중세 대학 교육의 태동기에 'Ars Liberalis[5]'라고 불렸다. "자유(혹은 순수)와 기술"이라는 의미이다.

'Arts'에 대해선 좀 더 복잡한 설명히 필요한데, 직역하면 '기술', '학문', '지식'을 뜻한다. 그리스어 technē를 번역하기 위해 사용한 단어로, 본 의미는 원래는 Scientia(생김새를 보면 알겠지만 현재 이학을 의미하는 영단어 Science의 어원이다. 주로 "지식"을 의미하는 epistemē를 번역하기 위해 차용되었다.)와 유사한 의미를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제는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히포크라테스의 명언 "의술은 길고, 생명은 짧으며…(하략)"에 그 흔적이 남아있다. 르네상스를 거쳐 근대 이후 자연과학이 발달함에 따라 구분이 엄밀해진 것이 오늘날에 이르러 정착하였다. 그 결과 현재는 arts와 sciences(이학)이 대중들이 보기에는 아예 반대되는 개념으로 쓰이게 되었다. 예컨대, 손자병법의 영문명은 'The Art of War(전쟁의 기술)'이다. 조선시대에 어문학경영학학문의 일종으로 보지 않았듯, 분쟁에서 이기기 위한 기술처럼 오늘날 소위 문과 학문이라고 생각하는 것들 대부분을 당시엔 학문이 아닌 '기술'로 간주하였기에 우리가 인문학, 리버럴 아츠, 아트, 순수인문학(Humanities) 따위를 구분하는데에 혼선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 명칭은 오늘날에도 많은 대학교의 인문대학을 뜻하는 영어 명칭인 'College of Liberal Arts'로 남아 있다. 그러나 소위 문, 사, 철을 중심으로 한 인문학만을 묶어서 '리버럴 아츠'라고 부르기에는 다소 어폐가 있는데, 리버럴 아츠는 수학자연과학 같은 오늘날의 인문대 과정에 포함되지 않는 기초 학문을 폭넓게 아우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데카르트라부아지에라이프니츠를 떠올리면 쉽다. 따라서 리버럴 아츠는 인문학보다는 교양학 또는 자유(자율)전공학으로 번역하는 쪽이 더 적절하다는 의견이 있다. (###) 외국에는 리버럴 아츠만을 전문적으로 교육하는 리버럴 아츠 칼리지(학부중심대학)가 여러 곳 있는데, 이들 대학이 모두 오늘날의 '인문학'에 해당하는 과목만을 가르치는 것은 아니다.

한편 위의 서술과 같이 리버럴 아츠 칼리지에서 인문학 뿐만 아니라 자연과학도 다루는 것은 맞지만, 외국의 연구중심대학의 경우 College of Science 등을 별도로 두어 자연과학은 이곳에서 주관하고, College of Liberal Arts / Department of Liberal Arts 등은 한국의 인문대학(또는 문과대학)과 유사한 인문학 프로그램을 제공하기도 한다.[6] 또한 사전에 따라서 현대의 Liberal Arts를 자연과학을 제외한 분과로 설명하는 경우도 있다. #

2.2. Humanities

교양으로서의 의미를 강조할 때는 '휴머니티스(Humanities)'라고 칭하기도 한다. 휴머니티스는 르네상스 시기 이후 인문주의자들[7] 사이에서 새롭게 재발굴된 라틴어 단어 휴마니타스(Humanitas)에서 유래한다. 그런데 이 휴마니타스 역시 키케로가 수사학에서 연설자가 갖춰야 할 덕목으로 그가 생각했던 것, 즉 로마 시민의 교양지식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므로, 사실상 본래 의미는 Ars Liberalis와 다르지 않았다. 단, 이쪽은 프랑스 계몽주의를 거치면서 인본주의 등의 색채가 덧입혀지기 시작한다.

르네상스 이후 학자들 사이에서 Humanities가 '순수인문학'으로서의 입지를 차지하게 된 것은 데카르트로부터 시작된 Rationalism[8]의 영향이 크다. 코페르니쿠스의 전환을 통해 기존의 기독교적 세계관의 영향력이 줄어들고 Cogito Ergo Sum이라는 명제와 함께 신을 대신해 세계관의 중심에 선 인간의 '합리적 이성'에 대한 담론은 인간이 가진 사유 그 자체의 기능을 학문의 중심에 두게 만들었다.

다만 근대적 담론의 붕괴 이후 학술적으로도 현장에서도 이들을 정확하게 구분하고 있지는 않다. 모든 인문대학이 전통적인 리버럴 아츠를 포기한 것도 아니며, 철학 분과에서 수학과 순수과학에 대해 심도 있게 연구하는 곳도 많다. 라틴어권 국가에서도 인문학을 일컫는 단어로 Humanities와 Liberal arts가 꽤 혼용되어 쓰이고 있다. 미국에서는 아직도 '리버럴 아츠 컬러지' 열풍이 대단하며, 한국에서도 융합형 인재 담론과 자유전공학부를 필두로 한 간학문적 교육이 재조명되고 있다. 인문학의 범주와 실제 그리고 취업에 대한 논의는 현재진행형이다.

2.3. 그 외

  • 문학(文學): 옛날식 표현으로, 오늘날 한국어에서 '문학'이라고 하면 '문학 작품' 또는 '문학 작품을 배우는 학문'을 뜻하는 경우가 많다. 그나마 남아 있는 표현은 '문과'다. 인문대학/문과대학의 학사 과정을 졸업하고 받는 학위 또한 '문학사(文學士)'이다. 이러한 문리 분류는 일본의 학제에서 따 왔는데, 아직까지도 일본에서는 후술할 '인문과학'과 더불어 '문계(문과)', '문학부(인문학부)'와 같은 표현이 일반적으로 쓰인다.
  • 인문과학(人文科學): 대중적으로 통용되는 용어로서는 서구권에서는 유럽권에서 국가에 따라 사용하는 단어 및 개념이지만,[9] 반대로 동양에서는 주로 일본에서만 볼 수 있는 표현으로[10] '인문과학'이라는 단어를 아래와 같이 자연과학, 사회과학에 대한 어조 맞추기 개념으로 만들어진 조어로 설명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인문학이 거의 과학으로부터 분리된 개념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에 일부 연구자, 교수들과 그들 밑에서 배운 학생들 외에는 거의 쓰이지 않는다.[11]
    なお、 humanities という用語は、 science という意味は含まない。本来的には人文学と呼ばれるべきであるが、「人文科学」は自然科学・社会科学と語調を合わせるために作られた言葉である。人文学とは、そもそも分析的な学問である科学であることを拒否するものであり、性質上総合的に研究される学問である。ただ、近年は学問境界が曖昧になっており、総合的な研究をするための手段として、科学的手法が用いられることも多々ある。


    또한 humanities 라는 용어는 science 라는 의미는 포함하지 않는다. 본래는 인문학이라고 불려야 하지만, '인문과학'은 자연과학·사회과학과 어조를 맞추기 위해 만들어진 말이다. 인문학이란, 원래 분석적인 학문인 과학인 것을 거부하는 것이며, 성질상 종합적으로 연구되는 학문이다. 다만, 최근에는 학문 경계가 모호해지고 있어, 종합적인 연구를 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과학적 수법이 이용되는 일도 많이 있다.



  • 인문사회과학(人文社會科學): 인문학과 사회과학의 학제간 연구 개념으로서 쓰이는 단어지만 인문학과 마찬가지로 일부 연구자, 교수들과 그들 밑에서 배운 학생들 외에는 거의 쓰이지 않는다.

3. 인문학의 주제와 분과 학문

3.1.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주제들

이해를 돕기 위해 프랑스 고졸자격시험(바칼로레아)에서 출제된 문제들을 첨부한다. 대략 이런 물음들을 가지고 머리를 쥐어뜯는다 고민한다는 걸 알면 되겠다. 출처는 이곳[12]

1장 인간(Human)
질문1 - 스스로 의식하지 못하는 행복이 가능한가?
질문2 - 은 필요한가?
질문3 - 과거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우리는 자유로운 존재가 될 수 있을까?
질문4 - 지금의 나는 내 과거의 총합인가?
질문5 - 관용의 정신에도 비관용이 내포되어 있는가?
질문6 - 사랑이 의무일 수 있는가?
질문7 - 행복은 단지 한순간 스쳐지나가는 것인가?
질문8 - 타인을 존경한다는 것은 일체의 열정을 배제한다는 것을 뜻하는가?
질문9 - 죽음은 인간에게서 일체의 존재 의미를 박탈해 가는가?
질문10 - 우리는 자기 자신에게 거짓말을 할 수 있나?
질문11 - 행복은 인간이 도달 불가능한 것인가?

2장 인문학(Humanities)
질문1 - 우리가 하고 있는 에는 우리 자신이 의식하고 있는 것만이 담기는가?
질문2 - 철학이 세상을 바꿀 수 있는가?
질문3 - 철학자과학자에게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가?
질문4 - 역사가는 객관적일 수 있는가?
질문5 - 역사학자가 기억력에만 의존해도 되는가?
질문6 - 역사는 인간에게 오는 것인가, 아니면 인간에 의해 오는 것인가?
질문7 - 감각을 믿을 수 있는가?
질문8 - 재화만이 교환의 대상이 될 수 있는가?
질문9 - 인문학은 인간을 예견 가능한 존재로 파악하는가?
질문10 - 인류가 한 가지 언어만을 말하는 것은 바람직한가?

3장 예술(Arts)
질문1 - 예술 작품은 반드시 아름다운가?
질문2 - 예술 없이 아름다움에 대하여 논할 수 있는가?
질문3 - 예술 작품의 복제는 그 작품에 해를 끼치는 일인가?
질문4 - 예술 작품은 모두 인간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가?
질문5 - 예술이 인간과 현실 사이의 관계를 변화시킬 수 있는가?

4장 과학(Sciences)
질문1 - 생물학적 지식은 유기체 일체를 기계로만 여기기를 요구하는가?
질문2 - 우리는 과학적으로 증명된 것만을 진리로 받아들여야 하는가?
질문3 - 계산, 그것은 사유를 말하는 것인가?
질문4 - 무의식에 대한 과학은 가능한가?
질문5 - 오류는 진리를 발견하는 과정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가?
질문6 - 이론의 가치는 실제적 효용가치에 따라 가늠되는가?
질문7 - 과학의 용도는 어디에 있는가?
질문8 - 현실이 수학적 법칙에 따른다고 할 수 있는가?
질문9 - 기술이 인간조건을 바꿀 수 있는가?
질문10 - 지식은 종교적인 것이든 비종교적인 것이든 일체의 믿음을 배제하는가?
질문11 - 자연을 모델로 삼는 것이 어느 분야에서 가장 적합한가?

5장 정치와 권리(Politics&Rights)
질문1 - 권리를 수호한다는 것과 이익을 옹호한다는 것은 같은 뜻인가?
질문2 - 자유는 주어지는 것인가, 아니면 싸워서 획득해야 하는 것인가?
질문3 - 법에 복종하지 않는 행동도 이성적인 행동일 수 있을까?
질문4 - 여론이 정권을 이끌 수 있는가?
질문5 - 의무를 다하지 않고도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가?
질문6 - 노동은 욕구 충족의 수단에 불구한가?
질문7 - 정의의 요구와 자유의 요구는 구별될 수 있는가?
질문8 - 노동은 도덕적 가치를 지니는가?
질문9 - 자유를 두려워해야 하나?
질문10 - 유토피아는 한낱 꿈일 뿐인가?
질문11 - 국가는 개인의 적인가?
질문12 - 어디에서 정신의 자유를 알아차릴 수 있나?
질문13 - 권력 남용은 불가피한 것인가?
질문14 - 다름은 곧 불평등을 의미하는 것인가?
질문15 - 노동은 종속적일 따름인가?
질문16 - 평화와 불의가 함께 갈 수 있나?

6장 윤리(Ethics)
질문1 - 도덕적으로 행동한다는 것은 반드시 자신의 욕망과 싸운다는 것을 뜻하는가?
질문2 - 우리는 좋다고 하는 것만을 바라는가?
질문3 - 의무를 다하는 것만으로 충분한가?
질문4 - 무엇을 비인간적인 행위라고 하는가?
질문5 - 일시적이고 순간적인 것에도 가치가 존재하는가?
질문6 - 무엇이 내 안에서 어떤 행동을 해야 할 지를 말해 주는가?
질문7 - 우리는 정념을 찬양할 수 있는가?
질문8 - 종교적 믿음을 가지는 것은 이성을 포기한다는 것을 뜻하는가?
질문9 - 정열은 우리의 의무 이행을 방해하는가?
질문10 - 진실에 저항할 수 있는가?
질문11 - 진리가 우리 마음을 불편하게 할 때 진리 대신 우리에게 위안을 주는 환상을 좇아도 좋은가?
프랑스 고졸 자격시험 문제로, 한국에서는 수준 높은 대학은 1학년, 일반적인 대학교는 인문사회대학 기준으로 2학년 정도 되어야 접하는 수준이며, 답도 천차만별이다. 참고로 프랑스에서 이 시험은 실업계 진학자 외에는 대부분 응시하는 시험으로 알려져 있다. 제시되는 문제 중에 하나를 골라 쓰는 방식의 시험이고, 자기 개인적인 의견을 쓰는 것이 아니라 질문에서 담고 있는 철학적인 문제 설정을 발견하고 그것에 대해 논리적으로 답변하는 것이 바로 시험의 목적이다. 당연히 자신이 배운 지식이나 고전들을 동원하여 논거로 활용해야 한다. 이런 문제를 어떻게 채점하나 객관식이 아니잖아! 묻는 사람이 있을 텐데, 어느 정도 글을 형식화해서 써야 하기 때문에 얼마든지 거를 수 있다. 문제설정 발견->테제->안티테제->종합 심화->결론 순으로 써야 한다는 듯.[13]

예를 들어 4장 과학 장의 7번 질문인 '과학의 용도는 어디에 있는가?' 에 대해서 대한민국 인문계 대학원생들이 생각하는 방식대로 쓴다면 다음과 같이 쓸 수 있을 것이다.
  • 문제설정 발견: 이 문제는 과학은 단순히 진리 확인에 그치는 학문이어야 하는가? 공학 같은 실용학문의 발전을 위한 수단이어야 하는가? 아니면 인류 공동체의 행복을 보장하는 수준까지 나아가야 하는가?의 논란과 연관되어 있다.
  • 테제: 우선 과학은 단순히 진리 확인만 하면 된다고 치고 논거를 전개할 수 있을 것이다. 진화론, 트랜스휴머니즘 같은 사례를 예시로 들며 과학이 하는 역할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 안티테제: 그러나 당연히 이에 반하는 여러 사례들이 나올 수 있다. 우생학,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 같은 사고들을 예시로 들면서 과연 진리만 추구하는 과학이 올바른 것이냐고 반문하며 논리를 전개할 수 있을 것이다.
  • 종합 심화: 허나 그렇다고 과학을 잠재적 문제아로 매도하고 거부하는 것 또한 옳지 않다. 과학이 오늘날 인간 문명을 풍요롭게 만든건 사실이기 때문이다. 또한 아인슈타인이나 클레어 페터슨[14] 지구 같이 무분별한 과학적 결과물의 남용을 경계하고 조언한 사례를 들수도 있을 것이다. 예시로 든 건 약간 양비론, 양시론적 접근이긴 하지만, 종합심화는 이런 식으로 입장을 전개하는 단계이다.
  • 결론: 따라서 우리 인간은 과학의 부정적 측면을 억제하고 긍정적 측면을 유지하는 방식으로 나아가는 방법을 찾아야 할 것이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마무리 할 수 있다.

3.2. 학문 분류

현대 한국에서는 인문학의 분과를 흔히 문사철(文史哲)로 나눈다. 일각에서는 이 중 '사'를 사회과학으로 인식하려는 시도도 있다. 그러나 이는 절대로 세계에서 인정받는 구분이 아니다. 서울대학교 인문대학은 인문학 제분야를 설정할 때 국내에서 흔히 사용되는 이른바 文·史·哲 체계가 1950·60년대 대만 학계에서 쓰인 것으로 그 역사가 짧고 결코 절대적인 권위를 지니지 않는다고 밝힌 바 있다[15]. 영미권[16] 및 독일어권[17]의 최신 인문과학 편람과 하버드 대학교에 따르면 크게 언어, 예술, 역사, 사상으로 구분할 수 있다.

한편, 위 편람에서 언급한 언어, 예술, 역사, 사상을 제외한 다른 학문 분과의 경우 인문학의 범위가 어디까지인가가 애매하다.
  • 법학: 연구방법론사회과학보다는 인문학과 비슷하다. 다만 역사상 '인문정신'을 대표하는 3학4과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므로 분류가 애매하다. 단적으로 미국 학제에서의 법 관련[19] 박사학위는 J.D.(Juris Doctor)[20]로, '철학 박사(Ph.D)'가 아니다. 또 오늘날은 과학적 방법을 들여온 법학[21]도 있기 때문에 법학 전체가 인문학에 속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 신학: 내용 및 방법론 등에서 종교학 등 여러 인문학과 겹치지만, 법학과 정확히 같은 역사적 이유로 인해 분류가 애매하다. 법학과 마찬가지로 중세 대학의 3학4과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라 심화 과정이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법학의 JD에 준하는 전문석사 학위의 경우도 북미에선 MA(Master of Arts)가 아닌 MDiv(Master of Divinity)이며, 박사 학위의 경우에도 전통적으로는 PhD가 아닌 (북미 기준) ThD(Doctor Theologiae), 혹은 (영국 기준) D.D(Doctor Divinitatis)이다.

3.3. 인문대학학과

고등교육기관의 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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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인문학의 위기에 대한 논의와 극복을 위한 제언

정확히 정의하자면 "인문학계에 지원을 해주어야 하냐" 혹은 "인문대에 진학할 필요가 있느냐"에 대한 논쟁이다. 인문학은 비생산적인 것을 넘어 현대 사회에서 스스로의 가치를 증명하는데 실패했기에 인문학에 투자하는 것은 낭비라는 인식도 함께 생겨났다. 여기에 대한 국내 인문학계의 대표적 변명은 고작 "인문학이 스티브 잡스의 돈벌이에 도움에 됐다"면서도 한 편으로는 "돈 밖에 모르는 '천박한' 자본주의 탓에 인문학이 몰락한다"라는 모순적 주장이 보이기도 한다. 덕분에 정치지도자와 대학 운영진의 인식에도 영향을 끼쳤고, 인문학에 투자할 필요가 없거나 인문대 역시 경영대화시켜야 한다는 논리가 생겼다.

이 때문에 인문학의 위기에 대해서 "인문학의 위기란 없다. 이미 인문학은 위기를 넘어서 끝장이 났기 때문이다. "라는 자조적인 표현까지 있을 정도다.

4.1. 학술 성과 계량 기준 부재

인문학 연구자의 연구성과를 객관적으로 측정할 수 있는 계량화된 기준이 없다. 이 문서의 다른 학문 분야에 비해 수준이 낮은 인문학 교수들 문단에서 인문학에 대한 적절한 비판과 견제가 없음을 지적했다. 이것이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 필요한 중요한 요소는 바로 객관적인 학술 성과 지표이다.

이공계에서는 SCIE 저널에 논문을 얼마나 많이 게재했는지, 또 그 저널의 impact factorJCR가 어느 정도인지를 통해 학술 성과를 평가한다. 물론 이 방식에도 많은 비판이 있다. 학술적으로 중요함에도 impact factor나 JCR에 저조해서 주목받지 못하는 분야는 연구비 수주나 학생 진로 설계에 늘 불리함을 안고 있다는 점, 그리고 장기적인 학술적 가치보다는 당장의 점수만을 추구한다는 점 등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은 나름의 가치를 창출하는 분야에서나 용납된다.

국내 인문학계가 같은 비판을 할 때는 설득력이 없다. 이공계와 같은 성과 계량화에 대해 인문학에서도 우려의 목소리는 다음과 같이 늘 있어왔다.
학술진흥재단의 학술지 등급제도이다. 연구업적을 ‘빨리’ 계량화하려면 객관적인 점수 환산방식이 필요하고, 그것을 위해 학술진흥재단이 학술지를 ‘심사’하여 ‘등재지’와 ‘등재후보지’를 나누어다른 점수를 부여하는 것은 대한민국의 젊은 연구자들이라면 다 아는 사실이다. 학술진흥재단으로서는 개별연구업적의 질 관리를 위해 불가피한 장치라고 하겠지만, 이러한 제도의 틀 안에 있는 개별 연구자로서는 내용이 좋은 논문을 내려고 노력하기보다는 ‘등재지’에 통과할 수 있는 정도의 논문을 여러 편 만들어내려고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대학 단위의 외부 평가든 개인 단위의 연구업적 평가든 모든 평가는 ‘무엇을’ 썼느냐는 묻지않고, ‘몇 점으로 환산되는’ 업적을 냈느냐만 묻기 때문이다.
박찬길, 신자유주의 시대의 인문학, 어디로 가고 있는가.
그런데 그렇다면 지금처럼 계량화된 기준조차 없어서 얻는 것은 무엇인지 생각해봐야 한다. 위 인용이 언뜻 보기엔 맞는 멋있는 말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상은 인문학자들을 과대평가하고 있다. 계량화된 기준이 있으면 위 인용처럼 점수 잘 받기 위한 성과를 내는 일에 초점을 맞춘다. 그게 마냥 나쁜 것이 아니다. 어쨌든 뭐라도 하는 셈이다. 그러나 계량화된 기준이 없으면 내용이 좋은 논문을 내기는커녕 그냥 연구를 하지 않는다. 계량화를 반대한다는 것은 최소한의 비판조차 거부하겠다는 뜻일 뿐이다.

그리고 위 인용에서 계량화된 체계에서는 내용이 좋은 논문보다는 점수가 좋은 논문에 초점을 맞춘다고 우려하지만, 사실은 기우일 뿐이다. 대개 점수가 좋은 논문이 내용도 좋기 마련이다. 이공계에서 괜히 네이처, 사이언스 등에 목을 매는 것이 아니다. 논문 심사 과정에서 깐깐한 reviewer의 공격에도 manuscript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만큼 그 manuscript가 잘 조직되어야(well-organizaed) 하고, 논리적 허점이 최소화되어야 하며, 또한 저널 명성에 걸맞게 새로운 현상이나 기술이 보고되어야 한다. 이들 저널에 수록되는 논문의 질이 높아질 수밖에 없고, 이는 다시 그 논문을 다른 연구자들이 많이 인용하는 것으로 순환한다.

인문학계에서 우려하는 사안은 다음과 같다.
  • 엄밀한 성과 측정
    • 대외 기관의 대학 연구 투자
    • 논문 평가의 수치화
    • 학생들의 지원률과 등록금 측정
    • 지원률 및 등록금 대비 학생들의 취업률 및 졸업 후 소득
    • 학점 평가의 수치적 객관화
  • 성과에 의한 투자 증감
    • 교수의 연구비 투자
    • 교수 TO 확대
    • 학생 장학금 지원 증가

대충 위와 같다. 대부분의 인문대는 교수진의 주관적 판단에 의해 학생을 평가하고 뽑는 경향이 강하다. 이는 다양한 의견의 반영이라는 긍정적인 결과도 극소수 있으나, 대개 교수에게 권력이 지나치게 집중되어 다양한 권력형 범죄를 일으킨다. 이를 막기 위해선 학생회에 의한 교수진 평가 및 견제, 학생 평가의 척도 공개 및 객관화 등을 이루어야 한다.

4.2. 인문학 연구 성과 축적에 소홀함

여기에 기껏 쌓은 연구 성과물들이 지속적으로 전산화 되고 관리를 하지 않아 그냥 묻혀 사라지는 경우도 흔하다. 특히 전산화나 저장이 빈약하다. 2000년대 초반까지의 학술 문헌들이 ISBN도 달리지 않은 채로 출판되고 방치되어 국립중앙도서관과 국회 도서관에도 없이 중고책 사이트에 잠깐 올라왔다 사라지거나, 교수나 연구회의 출판 이력에만 방치 되어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각 기관 대학 도서관에 1부 정도를 간혹 찾을 수 있는 수준이다. 근래 증가하는 장서로 인해 대학 도서관들도 장서 폐기를 지속적으로 검토하는 현실에서 과거에 보관된 1, 2부가 계속 보관되고 있길 바랄 수는 결코 없다.

이에 더해 학문의 연구 결과는 출간된지 오랜 시간이 흘러야 다시 조망되는 경우도 있는데, 지속적인 접근과 축적을 관리하지 않으면서 학문에 깊이가 있기를 바라는 것은 망상일 뿐이다. 그저 최신 연구로만 학문의 폭을 줄이고 있을 뿐이다. 정보, 자연과학 분야가 논문과 저서들을 넘어 회색 문헌들 또한 지속적으로 축적하고 관리하기 위한 여러 방안들을 만드는 것에 비해 매우 빈약하다.

4.3. 인문학의 가치를 인문학계 스스로 입증하지 못함

교육기관의 연구가 사회적으로 요구되지 않는 분야에 대해 무조건적으로 투자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도 비판할 수 있다. 공학, 자연과학 등 소위 '이과' 학문이나 상경 계열의 학문들이 인문 계열과 예체능 계열보다 많은 투자를 받는 이유는 사회적으로 수요가 많기 때문(=사회에서 그 가치를 입증받았기 때문)이다. 해당 분야의 전문가를 원하는 타 기관이 많은 만큼, 교육기관에 투자할 사회적 유인이 발생한다. 반면 인문대는 그러하지 못하기 때문에 투자가 적을 뿐이다. 인문대에 대한 투자가 줄어드는 원인은 결국 인문대 측에서 자신들의 투자 유인을 만드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외부의 투자를 원하는 여러 대학이 있을 때, 자신의 투자 매력을 증명할 책임은 각 대학과 소속 교수에게 있다. 인문대는 과거의 영광에만 집착하여 이러한 노력을 소홀히 했고, 결국 대학 신입생들과 사회의 관심을 잃은 것이다.

일찍이 약 20년 전에도 지상파에서 이런 담론이 나온 적이 있었다. 아래의 내용은 그 중 일부이다.
손석희:
(상략) 다시 말하면 어떻게 보면 인문학이 가지고 있는 순수주의 내지는 자칫 잘못하면 엄숙주의, 이렇게 흐를 수도 있고 인문학자들이 내비치고 있는 권위주의, 이런 것과 통한 것이 아니냐, 그래서 결국은 대중들과 멀어졌고 대중들과 멀어진 상황에서 인문학에 대한 경원시, 그것이 사회에도 그대로 연결이 되고 결국은 사회 진출에도 어려움이 되고 이런 것들이 악순환이 되는 것이 아니냐 하는 취지에서 드렸던 질문인데요. 거기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우선 김혜숙 교수께 드렸드면 좋겠는데요.

김혜숙:
인문학이 대중과 소통에 실패했다, 이 말을 굉장히 많이 하시는데 사실 지금 붐을 일으키고 있는 경영학이나 혹은 그런 것 관련한 학과들이 대중과 소통해서 그 학과들이 잘 되거나 이런 것들은 아니라고 봅니다. 그러니까 어떤 학문이 발전하기 위해서 대중과의 소통이라는 것이 꼭 필요조건이냐, 이건 거기에 대해서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고요. 물론 여태까지 인문학의 엄숙주의라든가 혹은 순수주의 이런 걸로 표현하는 이런 경향들이 있다고 생각을 하고 또 대중적인 글을 쓰는 걸 굉장히 경원시하는 이런 풍토가 있는 게 사실입니다. 그런데 저는 인문학을 한다고 해서 모두 학문의 길로 갈 필요도 없다고 생각을 해요. 인문학 인력들이 좀더 다양해져 가지고 어떤 사람들은 굉장히 재능을 발휘해서 대중과 소통능력이 뛰어난 사람들이 있거든요. 글이나 말로나 이런 것들로, 이런 분들은 이런 쪽으로 가고 또 학문적으로 굉장히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사람은 이렇게 가고 또 굉장히 다른 종류의 재능을 발휘해 가지고 소위 요즘 만화니 영화니 해가지고 굉장히 그런 쪽으로 관심 갖는 학생들도 많고 그런데 이런 쪽으로 해서 좀 더 문화 및 저변에 가서 직접적으로 사람들하고 부딪치면서 자기 지식을 활용하는 그런 태도가 굉장히 중요하다고 봅니다.

손석희:
김혜숙 교수님처럼 말씀하시면 굉장히 개방된 정서를 가지고 계신 분인 것 같고요. 그런데 대개 저희들이 듣기로는 현실이 그렇지 않다고 들었기 때문에 탁 선생께서 어떻게 보시고 그 다음에 이필상 교수께서 말씀해주시죠.

탁석산:
저는 근본적으로 인문학은 인문학 자체는 대중과 소통할 수 없다, 이렇게 보거든요. 오해를 많이 하시는 것 같아요. 예를 들어서 17세기 조선의 장자제도에 관한 연구, 이런 게 대중과 소통할 수 없거든요.

김주연:
근데 왜 인문학자들이 취직 못 시킨 게 학자들의 책임이다, 이런 말씀하고는 모순되지 않습니까?

탁석산:
인문학이라는 것 자체가 대중과 소통할 수 없다는 거죠. 외로운 작업이고 순전히 자기 호기심에 의해서 시작되는 것이거든요. 예를 들어서 칸트 전공하셨죠? 그런데 ‘칸트의 물자체에 관한 연구’ 이런 책을 냈다고 했을 때 대중이 읽을 수 없다는 거죠. 왜냐 하면 굉장히 높은 수준의 학문이거든요. 그걸 훈련 받지 않은 대중이 접근할 수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인문학자가 대중과 소통해야 된다는 의무감은 없다고 생각해요. 그 문제에 관해서는.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그걸 제대로 수행 안 하고 있다는 거예요. 뭐냐 하면 지금 우리나라 대학 어떻게 돼 있느냐 하면 수십 년 동안 교수가 연구와 그 다음에 학생을 가르치는 강의를 겸용하고 있거든요. 그 두 가지를 동시에 다 수행하고 있는데 제 생각엔 인문학의 경우에는 강의를 하는 것이 아니라 연구에 집중해야 된다, 저는 그게 우선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렇게 한다면 대중과 소통 분야가 어떻게 돼 있느냐 하면 아까 힌트를 주셨는데 그건 대중과 소통에 소질이 있는 사람이 있다는 거예요. 무슨 말이냐 하면 가공업자가 있다는 거죠. 그러니까 인문학 하는 사람은 원천기술이라고 볼 수 있고 그 다음에 그걸 갖다 유통시키는 사람, 그 전 단계는 가공업자이고 정말로 대중화 시키는 사람은 유통업자라고 할 수 있거든요. 그런데 지금 한국 인문학의 가장 큰 문제점은 이 역할 분담이 없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교수한테 모든 걸 요구하는 거죠. 연구도 하라, 그 다음에 대중과 소통도 요구하고 심지어는 대중적인 스타가 되기도 원하는 거예요. 저는 이 문제가 대학 내외의 근본적인 문제라고 생각하는 거죠. 그래서 지금이라도 방법이 있다면 분리를 해야 된다는 얘기죠.
그래서 저는 한국에서 어떠냐 하면 지금 어느 정도의 순수주의가 있기 때문에 연구자만을 우대하는데 그것이 아니라 연구자, 가공업자, 유통업자가 역할분담을 해서 각각 역할 한다면 인문학을 하고 싶은 사람은 자기 마음껏 하고 그 다음에 가공업자 유통업자가 소통할 수 있거든요. 대중과 얼마든지. 저는 이렇게 된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인문학다워진다는 거죠. 그래서 대학에서 이 문제를 해결한 다음에 그 다음 문제를 논의해야지 지금처럼 연구 주체인 교수가 모든 것을 떠안고서 문제를 안고 가려고 하니까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는다.

손석희:
지금 말씀은 대학 안에 그 세 가지의 부류의 교수들이 다 있어야 된다는 주장이신가요?

탁석산:
예, 그렇죠.

김혜숙:
사실 인문학자들만 분류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대학 자체가 어떤 대학은 순수학문으로서 예를 들면 서울대를 우리가 국가적인 차원에서 키워야 된다 라고 한다고 하면 거기는 학문적인 그걸 중심으로 가야죠. 그런데 모든 대학이 지금 같은 종류의 프로그램과 같은 종류의 학문적인 아젠다를 가지고 작업하고 있거든요. 그러니까 지금 이런 분화가 안 되는 건데 어떤 대학은 자기네가 살아남기 위해서 소위 이런 식의 가공업자들을 하는데 더 치중하겠다 라고 하면 그런 방식으로 갈 수가 있는 거죠.

탁석산:
그게 시장의 논리거든요.

김혜숙:
그렇죠.

탁석산:
시장이 경쟁을 하고 효율성을 추구하기 때문에 한국 전체로 봐서 인문학에서 어떤 효율성이 있는가에 관해서 합의가 있어야 되는데 모든 대학이 똑같은 걸 가지고 중복투자를 하고 있다는 거예요. 한마디로 얘기해서.

손석희:
거기에는 두 분이 의견이 같으신가요?

김혜숙:
저는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모든 대학이 똑같은 종류의 목표와 이런 걸 가질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손석희:
이필상 교수님.

이필상:
저는 인문학의 내적인 문제하고 외적인 문제하고 서로 연결이 돼서 악순환이 이루어지는 것 같아요. 인문학이 자꾸 무너지는 그런 현상이 생긴 것이 아닌가 생각이 되는데요. 내적인 문제 차원에서 보면 엄숙주의, 순수주의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만 그들만의 학문, 이렇게 여겨지거든요. 그래서 그걸 가지고 어디다 써먹냐, 일반 대중들은 생각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자꾸 사람이 없어지는 경향이 생기는데 문제는 외적인 요인으로 가장 크게 작용하는 것이 제가 보기에는 현실적인 요인으로서 취업입니다. 공부해서 취직 안 된다, 오히려 그럴 바에 다른 것 공부하자, 이렇게 나온다는 거예요. 그래서 인문계열에 진학해도요, 그거 공부해서 나 정말 이 다음에 그 분야에서 일하겠다, 그런 사람 많지 않습니다.

김혜숙:
교육시장을 개방하라는 거예요.

이필상:
교직 진출하겠다, 이런 식으로 준비하기 위해서 들어가지 그 공부만 해서 그것만 해서 뭐하겠다, 그런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다는 것이거든요. 어쨌든 간에 내적인 차원에서 시대에 부응하면서 정말 대중과 가까이 하면서 젊은이들을 끌어안고 정말 그거 배워서 스스로도 인간다워지고 멋있는 삶을 살지만 정말 내가 사는데 아주 유용한 학문이다, 그런 인식을 줘야 되는데 그런 면에서는 실패한 것이 아닌가,

손석희:
그럼 이걸 여쭙고 싶은데요. 지금 나온 말씀으로는 우리 탁 선생님 말씀이나 아니면 거기에 동의하신 김혜숙 선생님의, 교수의 방법론이 맞건 틀리건 따로 논쟁해야 될 문제이긴 합니다만 그렇다는 전제 하에 그런 방법론으로서 대중들에게 가까워지고 그 다음에 또 하나는 아까 계속해서 김혜숙 교수께서 말씀하신 부분이 공정한 룰이었는데요. 취업시장을 개방하자, 이런 말씀 아니었습니까? 교육시장도 마찬가지고. 그렇게 됐을 경우에 다른 분야, 지금 이필상 교수께서 나와 계시니까 여쭙는 것인데 예를 들어서 사회과학대 쪽에서는 예를 들면 직종 같은 것에서도 전혀 제한을 두지 않는다 라든가 했을 때 그것을 국가가 개입하던 어찌됐든 어떤 방식으로 해서든 그것을 실현시켰을 때 아무런 문제가 없겠습니까? 그러니까 이건 또 각 대학간에 이기주의가 또 발생할 수 있는 그런 문제이기 때문에 그래서 여쭤보는 겁니다. 지금은 쉽게 말하면 각 회사에서 경영대나 법대나 이렇게 전부 학생들을 뽑는데 그런 경우가 많죠. 이걸 전부 다 개방하도록 했을 경우에,

이필상:
개방이 지금 돼 있죠. 중요한 건 시장논리라는 것이 물건을 파는 사람이 있지만 사는 사람이 있어야 되거든요. 기업에서 "야~ 인문학 공부한 사람 써보니까 정말 필요하다." 장기적으로 보고,

손석희:
그렇죠. 그게 근본적인 문제겠죠.

이필상:
그래서 그 수요를 창출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되는 거죠. 무조건 개방하라, 갖다 써라 했을 때 쓰겠느냐 그런 얘기예요. 시장논리가 아니죠. 개방논리가 아닙니다.
2006. 09. 21 MBC 100분 토론 - <인문학, 왜 위기인가?>

※참고
손석희: 토론 진행자
김혜숙: 이화여대 철학과 교수
김주연: 숙명여대 명예교수
탁석산: 철학저술가.
이필상: 고려대학교 경영학과 교수

4.4. 다른 학문 분야에 비해 수준이 낮은 국내의 인문학 교수들

4.4.1. 비판 없는 학문적 세계와 그에 따른 저조한 학문적 성과

국내 인문학은 공학, 자연과학, 사회과학과 비교했을 때 극단적으로 수준이 떨어진다. 특히 국내 인문학계에서는 명문대 교수조차 A&HCI[22] 저널에 평생 단 한편도 논문을 출판하지 못한 경우가 흔하다. 이는 연구 수준이 낮아 해외 학자들의 동료 평가를 통과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대학원생은 물론 학부생조차 왕왕 SCI 상위 저널에 논문을 등재하는 경우가 있는 이공계의 기준에서 바라보면 상상하기 조차 어려운 참상이다. 국내 인문학계는 '대학은 학문을 하는 곳이지 취업을 하는 곳이 아니다'라고 주장하며 지원을 요구하고 있지만, 사실 인문학과는 취업만 못하는 것이 아니라 학문조차 못하고 있다.

이런 차이가 발생하는 여러 이유 중 하나는 바로 학문적 비판과 견제의 유무이다. 가령 이공계 교수들은 SCIE 저널 논문을 얼마나 많이 쓰는지, 또는 어느 정도 JCR 순위의 저널에 논문을 출판하는지, 정부 과제나 기업 과제를 얼마나 수주했는지 등으로 개별 연구자를 평가하고 때로는 비판한다. 어느 교수의 실적에 대한 최종 평가는 그 교수의 소속 대학이나 기관이 담당한다. 또 개별 실적은 관련 기관에서 심사한다. 교수가 제출한 SCIE 논문 manuscript는 그 manuscript를 받은 저널이 최종 결정한 reviewer가 심사하며, 과제를 주는 정부 기관이나 기업은 그 교수의 논문 실적이나 예전 과제 실적 등으로 교수를 평가한다. 논문 실적이 저조한지 여부는 소속 기관이 지정한 SCIE 논문의 편수나 impact factor의 합산 등으로 정량적으로 결정되며, 최소한의 실적을 달성하지 못한 교수는 재임용이 거부된다. 과제 수주 실적이 저조하면 이는 대학원생이나 박사 후 연구자에게 연구 수당을 지급하지 못하는 상황으로 이어진다. 이렇듯 이공계 교수들은 대부분의 활동이 곧 평가와 직결되므로 학문적 성과 창출을 소홀히 할 수 없다.

그러나 인문학 교수들이 위와 같은 경험을 하는 빈도는 극단적으로 적다. A&HCI 저널 실적과 같은 명확한 기준을 세움으로써 어느 교수의 재임용 여부를 결정하는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 그런데 정말 그랬다간 짐 싸야 하는 교수가 부지기수이니 그게 걱정되어서 대부분의 학장이나 총장 라인도 엄격한 재임용 기준을 세우지 못한다. 학생들에게 연구 수당을 지급하는 곳은 애초에 거의 없다. 그러다보니 실적이 떨어질 것 같으면 수준 낮은, 그러나 관계자들이 자신의 지인들로 채워져 있는 국내 저널에 논문을 제출함으로써 해결한다. 인문학자로서 살아남기 위한 자체적인 컨텐츠 개발에 소홀할 수밖에 없는 구조이다.

여러 대학교의 이공계 학과와 인문계 학과의 홈페이지에서 이러한 분위기 차이를 엿볼 수 있다. 대한민국에서 적어도 20위권 안에 들어가는 대학교의 이공계 학과 교수들은 대부분 자신의 연구실 홈페이지가 있다. 교수들의 소속 학과 홈페이지나 구글 검색을 통해 교수들 연구실 홈페이지에 쉽게 찾아갈 수 있다. 이 홈페이지에는 그 교수의 약력, SCIE 논문 실적, 특허 실적, 연구비 수주 실적, 연구 분야 등이 소개되어 있다. 비록 교수의 홈페이지가 그 교수를 홍보하기 위함이 주 목적이지만, 교수 자신을 견제하고 채찍질하는 기능도 적지 않게 수행한다. 교수의 경력과 실적이 우수하든 떨어지든 그게 모두 대중에게 공개되어 있기 때문이다. 대중들은 그 교수가 어떻게 그 학교에 임용될 수 있었는지 (즉 그 학교의 위상에 맞게 임용되었는지) 짐작할 수 있고, 그 교수가 왕성하고 성실하게 가치 창출에 임하는지 지켜볼 수 있다. 이러한 정보는 그 교수 연구실에 들어가고자 하는 지원자들과 그 교수에게 연구비를 주고자 하는 여러 기관에도 중요한 참고 자료가 된다. 이렇게 정보가 열려있으므로, 대학교에서도 실력자를 교수로 임용하려고 하며, 실력없는 인물이 기존 교수의 라인에 속했다는 이유만으로 교수들 간의 담합을 통해 임용되기는 어렵다.

그러나 대부분의 인문학 교수들은 이러한 홈페이지조차 없다. (홈페이지를 만들 능력조차 있는지는 둘째 치고) 대중들은 도대체 어느 교수가 그 학교에 뭐가 뛰어나서 임용되었는지 알 길이 없다. 그 학교의 인문학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만한 정보가 사실상 없는 셈이다. 어느 교수가 요즘 성실히 연구하는지 놀러 다니는지 때로는 같은 학과 교수들조차 알 길이 없다.

4.4.2. 인문학 바깥 세계의 견제 부재와 그로 인한 카르텔 형성

인문학 교수들이 알아서 인문학 본연의 연구를 성실히 하도록 만드는 제도가 없다면, 인문학 밖의 상위 기관(소속 대학, 정부 등)이라도 이들을 견제해야 한다. 인문학 분야의 연구와 교육 분위기를 이공계 수준으로 빡빡하게 만들도록 지침을 내리고, 이를 충실히 수행하지 않을 시에는 지원금 삭감과 같은 초강수를 두어야 한다. 적어도 인문계열의 학장 자리에는 다른 분야 인물이 보다 냉정한 시각으로 그 학교 인문학계를 바라보도록 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하지만 2023년 기준 대부분 대학교 인문학 교수들은 학생들 취업률에 관한 압박 정도만 경험할지언정, 이공계 교수들 수준의 강도높은 연구 활동을 수행해야 한다는 압박을 경험하지 않는다. 대한민국에서 사실상 누구도 건드리지 않는 세력인 셈이다.

이렇게 해외 연구자의 동료평가를 받지 않고, 국내 관련 기관들의 견제도 받지 않는 학계는 필연적으로 부패로 얼룩지기 마련이다. 이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는 다음의 두 가지이다.

첫째, 부패한 교수가 해임되지 않는다. 가령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서는 제자 논문 표절로 해임된 교수가 대법원의 판결과 해임 취소 판결을 받았다.[23] 여기서 주목할 것은 두 가지이다. 2013년에 발각된 표절이 2019년에서야 교수의 해임 처분으로 이어진 점, 그리고 서울대 연구진실성위원회의 구성에 오류가 있다는 점이다. 주변의 비호가 없었다면 진작 해임되고도 남았을 일이 이렇게 질질 늘어진다. 외부 견제를 받지 않는 학문 분야에서는 이러한 일이 (다 알려지지 않아서 그럴 뿐) 자주 일어난다. 만일 위에서 예를 든 서울대 인문대가 외부의 견제를 상시 받으며, '문제의 교수를 제때 해임하지 않으면 다른 교수들의 연구비 수주에도 타격이 간다'라는 상황에 놓인다면, 저러한 (대법원도 인정한) 연구 부정이 이렇게 오랜 세월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있었을까?

둘째, 학계의 특정 그룹들이 카르텔을 형성하고 외부인을 배척한다. 신규 교원을 임용할 때, 학문적 역량을 냉정하게 판단하기보다는 어느 교수의 라인에 있는지를 따진다. 심지어 특정 교수가 자신의 제자를 후임 교수로 대놓고 지정하여 임용시키는 사례도 있다. '교수'라는 직위가 가지는 무게감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는 행위이다. 여기에는 국내 인문학계의 인원이 제한적이어서 같은 분야를 전공한 연구자가 손에 꼽힐 정도로 적다는 점도 한 몫 한다. 그러다보니 이미 국내 인문학계는 자유롭고 비판적인 사고를 증진하기보다는 특정 이념에 복종하며 생존해야 하는 환경이 되었다. 주류 학계의 정설에 반하는 연구 결과를 발표하면 동료들의 폭언을 듣거나 교수 평가에서 불이익을 받는 등 학문의 자유가 현실적으로 제한되고 있다. 국내 인문학계에서의 학문의 자유는 단순히 정부에게 처벌받지 않는다는 의미일 뿐, 동료의 따돌림, 교수의 부당한 채점, 연구 평가의 불이익, 교수 임용의 어려움 등에서 자유로워진다는 뜻이 아니다.

4.5. 취업 시장에서 상대적으로 외면받는 인문학 전공자

4.5.1. 학부 졸업생의 현실

파일:인문학의 봄.png
명문대라 불리는 곳의 현실
많은 이들이 인문계 학생들의 낮은 취업률의 탓을 인문학으로 돌린다. 이러한 사고에는 기업과 사회가 인문학을 외면한다는 식의 두루뭉술한 결론만 있을 뿐 '왜'에 대한 고찰이 없다. 이는 취업이 쉬운 다른 학문 분야 출신 학생들이 사회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 깊이 살피이 않은 채 나온 주장이다. 이공계, 사회과학계, 상경계 학생들이 취업이 상대적으로 잘 되는 것이 그들의 전공 덕분일까? 그렇게 보기에는 부족하다. 왜냐하면 학부 졸업생 중 대다수는 어차피 전공을 잘 살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학사 학위 취득자를 뽑으려는 기업 입장에서는 지원자의 전공 내용은 그리 중요하지 않은 셈이다.

인문학 학부 졸업생이 취업 시장에서 불리한 이유 중 하나는 대부분의 인문대 학부 졸업생들의 업무 능력이 현저히 떨어져서이다. 하다못해 MS Office의 삼신기인 Word, Excel, PowerPoint 사용 능력은 고사하고 한컴오피스 한글조차 제대로 다룰 줄 모르는 인문학 졸업자가 넘쳐난다. 그렇다고 다른 분야 커리큘럼이 이러한 기본적인 업무 능력을 배양하기에 유독 잘 되어 있느냐 하면, 꼭 그렇지도 않다. 이공계 학과의 실험 과목 데이터를 정리하느라 Excel을 쓰는 경험을 제외하면, Word, PowerPoint, 한글 등은 모든 학과의 프로젝트 발표나 레포트 작성에 두루두루 쓰이기 때문이다. 결국 인문대 학생들이 자기계발에 소홀했다는 결론 외에는 다른 원인이 나오기 어렵다. 오랜 시간에 걸쳐 여러 전공 출신의 학사 학위 소지자를 채용한 바 있는 기업들도 위와 같은 데이터가 자꾸 쌓이면 인문계 출신들이 대체로 일을 잘 못한다는 인식을 가지며, 결국 몇 년만 지나면 인문학 출신을 서류 심사에서부터 배제하기 십상이다.

그렇다보니 인문학 전공자들은 면접에서 '당신의 전공으로 우리 회사에 어떤 도움이 되겠냐?'는 식의 질문을 엄청나게 받는다. 상경계열이나 공학계열 출신은 이런 질문을 거의 받지 않는다. 인문학 전공자들이 기업에서 굵직한 업무는커녕 기본적인 행정 업무조차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는 사례가 수두룩하기 때문이다. 설령 인문학적 소양이 필요한 업무조차 인문학 외의 다른 학문 전공자를 뽑아서 해결한다. 많은 기업의 채용 담당자들은 공대생에게 철학을 가르치는 게 인문학 전공자에게 기술을 가르치는 것보다 더 쉽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실제로 어느 정도는 사실이다. 여기에 인문학 특유의 '비생산적인 아이디어'라는 이미지까지 들어가면 인문학 전공자들에 대한 부정적 평가는 더욱 심해진다. 2010년대를 거치며 대기업에서 인문학적 소양을 갖춘 사람을 뽑겠다는 식으로 언플을 하는 사례가 많이 늘었다. 그러나 실상은 기업들이 '인문학 전공자, 깊이 있게 철학 등을 연구한 사람'이 아니라 그냥 '책 좀 읽어본 이과생, 상품을 좀 더 잘 팔 수 있도록 소비자의 마음을 끌어내는 기술을 가진 사람'을 원하는 것이다. 인문학이 아니라 마케팅 부문 지식을 요구하는 셈이다. 결국 인문학 중 아랍어나 포르투갈어와 같은 어문계열 중 소수의 인원만 취업에 성공한다.

4.5.2. 대학원의 현실

인문학 대학원들 중 이른바 인서울, 지거국 정도만 빡빡한 기준(e.g., 논문심사 수준의 면접, 논문연구사 등)으로 대학원생을 받는다. 물론 그 빡빡한 기준이라는 것조차 타 대학 출신들을 배척하려는 순혈주의가 작용한 것이므로 마냥 곱게 볼 수는 없다. 학문적 순혈주의가 정상적인 학계에서는 'Academic Inbreeding'이라고 불리는 학문적 병폐이나 국내의 인서울과 지거국 외의 인문학계가 워낙 타락해서 뜻하지 않게 순기능으로 작용할 뿐이다. 물론 그 후에 수준높은 인문학 교육과 연구 과정을 밟는지는 또 다른 문제이다.

그 외의 수도권 대학 정도만 돼도 최소한의 자질만 있다 싶으면 수업계획서 대충 보고 나서 입학시킨다. 모자라는 건 나중에 입학하고 나서 신나게 털어주면 된다. 그리고 석사는 대충 써도 학위는 받지만, 박사학위자라면 털리는 걸로 끝나지 않고, 학위를 받지 못할 수도 있다. 실제로 인문학 전공자들은 취업을 하려면 회사들이 기피하고, 공부를 하려고 하면 궁핍함을 감수하고 더 심화된 다음 과정을 밟아야 한다. 그나마 석사까지면 늦어도 30대 중반 즈음에 끝나니까 좀 낫다. 물론 남자 기준이다. 군대 갔다 오고, 대학 졸업한 뒤 이거저거 자격증 시험 치고, 그 다음 대학원 응시해서 2년 내에 졸업할 경우. 박사를 잘못 밟으면 박사 학위도 못 따고, 그냥 40대 초반 석사로 남게 되면서 그나마 취업의 기회가 남아있는 30대를 통째로 날려먹을 수 있다. 당연히 40대 석사가 30대 학사나 20대 고졸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불리하다. 이러면 인생은 진짜로 헬게이트. 인문학 분야의 시간 강사들은 가뜩이나 이쪽 업계가 급여가 낮다. (이들의 고충은 국문학 전공 시간강사 김민섭이 출간한 수필집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에 잘 드러나 있다.) 물론 책을 써서 인세를 받을 수도 있지만 인문학 책도 사기꾼이 너무 많기 때문에 많이 팔리지가 않는다.

다행히 한국에서도 소위 '인문학의 위기' 가 품은 심각성을 인식하는 사람들이 있다. 인문학의 위기 혹은 가로지르기 글에 따르면, 인터넷·디지털·정보통신의 영향으로 학제간 연구가 중요해진 시대에 '필요/필요가 아닌 것, 이과/이과가 아닌 것, 인문학이 아닌 것/인문학' 같은 식으로 특정 학문을 차별하는 짓은 과거 시대의 짓이며 심각한 문제를 일으킬 것이므로 그만둬야 한다고 한다. 왜냐하면 인터넷은 지식의 생산과 소비를 시공간의 제한을 건너뛰어 연결하여 순환 속도를 빠르게 만들면서 지식은 총체성을 상실하고 부분으로 분해된 다음 재결합을 통해 새로운 용도로 전환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즉 인문학 측에서도 다른 학문을 이해할 필요가 있고, 타 학문에서도 '인문학적 감수성'으로 대표되는 인문학의 '좋은 점'들을 배울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방송이나 일부 강연에서 인문학 콘서트 등이 우후죽순 열리면서 '인문학 열풍' 이 불고 있다. 그러나 보통의 인문학 토크콘서트가 '인문학에 대한 맛보기' 수준의 이야기를 대중들이 경험하는 콘셉트로 잡고 있는 한계 때문에 사유가 동반되지 않은 요점 정리식 신변잡기에 불과하다는 지적도 있다.[24] 그리고 사실 이런 곳에서 논하는 인문학의 수준이라 해봐야 고등학교 윤리와 사상 수업보다도 낮은 수준의 내용이거나, 심지어 비전공자가 대충 알아보고 만들어 이곳저곳 오류로 가득찬 엉터리 이야기들도 허다하다. 심하면 지상파 예능과 유튜브 영상의 질적 차이가 거의 없을 정도. 때문에 인문학 전공자들 중에는 오히려 저런 겉핥기식 인문학이 인문학의 의미와 가치를 왜곡한다며 싫어하는 사람도 있다.

기업이나 대중매체에서 조금이나마 인문학에 관심을 갖는 것만으로도 큰 의미는 있다. 이런 움직임들이 거름으로 뿌려져서 인문학의 토양이 비옥해질 있는 바탕이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문학 열풍을 기업 차원에서 후원하는 프로그램이 대두되기 시작했는데, 이 가운데 대표적인 사례로는 신세계그룹에서 2014년부터 시작한 SSG 지식향연이 있는데, 무척 괜찮은 구성과 파격적인 특전 때문에 화제가 되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조.

4.6. 세상과 지나치게 유리된 인문학

4.6.1. 과학기술 시대의 인문학

4.6.1.1. 적대적인 관계를 허물고 교류할 필요성
“과학기술 시대”의 인문학 - 김영식

문제가 되는 것은 대부분의 인문학자들에게 인문학의 대상이 고착되어 바뀌지 않고 있고, 서양의 르네상스 시기나 중국 송대, 또는 기껏해야 서양 계몽사조기 또는 우리나라 개화기의 전통적인 대상과 주제가 그대로 내려오고 있다는 점이다. 그 후 인간의 삶은 크게 바뀌었고 최근 수십년, 특히 지난 십여년 동안의 인간의 삶의 방식은 엄청나게 바뀌었으며, 따라서 이렇게 변화되어 새로워진 인간의 삶, 문제, 가치 등을 인문적 반성, 탐색의 대상으로 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새로운 인문학은 전통적인 인문학의 대상, 주제들만이 아니라 현재의 인간의 삶의 현실과 문제를 대상으로 해야 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전통적 인문학의 주제와 대상들이라는 것들이 사실은 르네상스 시기나 송대와 같이 새로운 사상적 조류, 새로운 문화와 사회의 모습이 대두되던 시기에 그에 따라 생겨난 새로운 삶, 가치, 문제들이었다는 것을 다시 상기할 필요가 있다. 오늘날 또한 그러한 새로운 사상, 문화가 새로운 가치, 문제 등을 빚고 있는 시기이고 그런 면에서는 새로운 인문학을 요구하는 시기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전문적인 과학기술 지식이 일반 학문, 특히 인문학으로부터 분리되는 데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던 것은 “과학혁명” (Scientific Revolution)이라고 부르는 과학상의 획기적 변혁이었다. 16, 17세기 서양에서 일어난 과학혁명의 결과 그 동안의 과학과는 크게 다른 “근대과학”이 형성되었고, 이 근대과학이 발전해 나가는 과정에서 과학은 기술에 응용이 가능해졌고 막대한 비용이 소요되는 거대한 규모로 성장했으며 이해하기 어려워졌고, 무엇보다도 ‘전문화’되었다. 그리고 전문화가 진행되면서 과학은 점점 문화 일반이나 인문학으로부터 분리, 격리, 소외되게 되었던 것이다.

19세기에 이르러서 이같은 유리 상태는 심해지고 차츰 고착화되었다. 그리고 그같은 유리 상태의 고착과 함께 과학과 인문학 양쪽에 종사하는 사람들 사이의 대립 상태 비슷한 것이 생겨났다. 당시 새로 부상하는 과학기술이 지적인 우위와 실용적 가치를 내세우는 데 대항해서 인문학 또는 인문주의가 고전과 교양 위주 교육의 도덕적 우위를 선언한 것은 그 같은 예였다. 이는 결국 과학기술에 대한 전통적 인문학자들의 우월감과 반감이 표출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인문학자들에게서는 이와는 상반되는 태도도 찾아볼 수 있었다. 전문 과학지식에 대해 지니는 과학자들의 전문성을 인문학자들이 존중하기도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 같은 “존중”은 또 한편으로는 인문학자들이 전문 과학지식을 전문 과학기술자들에게만 맡기고 자신들의 관심 대상으로부터 제외시킨 채 무시해 버리는 효과를 빚어냈다.

게다가 현대의 사회, 문화에서 과학이 엄청난 중요성을 지니게 되었다. 오늘날 과학은 사회와 문화의 모든 영역에서 중요한 요소가 되어 있고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무엇보다도 과학은 기술을 통해서 그 같은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당초 자연세계에 대한 지적 추구의 중요성 때문에 지식인의 관심 대상에 포함되어 있던 과학이, 이제는 현대 지식인의 생활의 필수적 부분, 관심의 필수적 부분이 되었다. 그런데도, 자신들을 둘러싼 세상은 온통 과학기술의 세상이 되어가고 있는데도, 오늘날 인문학자들이 현대 사회, 현대 문화의 가장 특징적인 과학기술은 제외시키고 무시하고 있는 것이다. “인문학의 위기”란 바로 인문학이 과학을 포함한 여러 전문지식으로부터 분리되고 격리된 때문에 일어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인문학의 위기가 한국에서 특히 심각한 것은 그같은 분리 상태가 한국 사회에서 특히 심하기 때문이다.

이같은 문제의 해결책으로 여러 의견이 제시되지만 대게 원론적인 수준에 그치고 있다. 여기서 김영식 연구자는 인문학자가 과학기술을 적극적으로 배우고 비판해야 한다는 정면돌파를 주장했다. 새로운 인문-과학 패러다임의 연구나 과학의 인문학적 환원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며, 현대 사회의 주류는 인문학이 아니라 과학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문학자가 과학기술을 연구하고 빈자리를 직접 찾아 나서야 한다고 본다.
4.6.1.2. 교류를 넘어서서 과학을 주도하는 인문학의 필요성
어차피 21세기 첨단 기술은 여러 학문 분야의 융복합으로 이루어진다. 더 나아가서는 아예 학문 분야간 벽이 허물어진다. 당장 국내 주요 대학들의 이공계 학과 교수들의 연구 분야를 보자. 물리학부 교수의 연구 분야가 사실은 화학에 더 가깝고, 기계공학부 교수의 연구 분야가 사실은 컴퓨터과학에 가까운 사례들은 엄청 많다. 이 많은 이공계 교수들도 학부생 시절의 학문적 배경은 자신의 전공 분야에 국한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대학원과 박사 후 연구 과정을 거치며, 살기 위해, 자신만의 컨텐츠 개발을 도모한 결과 학제간 융복합을 통한 기술을 개발한 것이다. 이는 이공계뿐 아니라 의학/치의학 등의 분야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새로운 기술이나 컨텐츠를 누구의 개발로 인식하는가?'이다. 어느 기술에 A 분야와 B 분야가 어느 비율로 결합되든 그걸 주도한 사람이 A 분야의 과학자면 그 기술은 A 분야의 기술로 인식된다. 따라서 대학교의 인문학 계열에서 적극적으로 과학 기술을 공부하고 도입하여 기술이나 컨텐츠를 개발해야 한다. 그래야 대중은 '인문학이 밥값을 한다.'라고 생각한다. 인문학이 21세기에 가야 할 방향으로 흔히 IT 기술에 인문지식을 이식하거나 물리학 기반의 기술에 색채론을 접목시키는 등의 사례를 든다. 그러나 이들은 과학기술 기반 위에 인문학적 지식을 얹는 수준에 불과하다. 이러한 유형의 컨텐츠는 '과학 기술에 인문학을 접목시켰다.'라고 받아들여지지 '새로운 인문학 기술이 과학을 활용하였다.'라고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과학 기술이 사회의 인간성을 말살시키므로 이럴 때일 수록 인문학적 지식이 더 필요하고...'와 같은 1990년대의 이야기들은 '말로 모든 것을 해결하는 인문학'이라는 전근대적인 인식을 벗어나지 못하므로 오히려 배격하는 것이 좋다.

4.7. 외국의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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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f your child majored in fine arts or philosophy, you have good reason to be worried. The only place where they are now really qualified to get a job is ancient Greece. Good luck with that degree.
여러분의 자녀가 순수예술이나 철학을 전공했다면[25] 적잖이 고민하실 만도 합니다. 이제 그들이 정말로 취업할 수 있을 만한 곳은 고대 그리스밖에 없거든요. 그 학위를 활용할 수 있길 빕니다.[26]
코난 오브라이언, 다트머스 대학교 졸업식 축사 중 영상
It's a sad fact about our culture that a poet can earn much more money writing or talking about his art than he can by practicing it.
시인이 시를 쓰기보다 예술론을 논하는 쪽이 돈이 되는 것은 미국 문화의 슬픈 모습이다.
W.H.오든(미국의 시인)
이러한 현상은 외국도 크게 다르지 않다. 당장 시민권 부여 자격만 봐도 소위 '스템'(Science, Technology, Engineering & Math 직역하면 이공계)계열 전공자를 우대하지 인문학 전공자를 우대하지 않는다. 옆나라인 일본만 해도 최고대학인 도쿄대학에서 문과 1(법학/정치학), 문과 2(경제학)에 비해 문과 3(광의의 문학)은 선호도나 취업률이 떨어지며, 미국 또한 '인문학의 위기' 를 외칠 만큼 인문학은 찬밥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세계 최고 명문인 하버드 대학교마저 인문계열 학생 수가 감소하였고, 그나마 있던 다른 학생들도 다수가 전공을 바꾸려는 경향을 보이는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 대학들도 인문학의 위기 세계의 모든 선진국들 중 미국, 유럽, 일본, 한국을 모두 포함한 대부분이 기술중심사회이며, 싱가포르홍콩 같은 도시국가가 아닌 이상 모두 과학기술을 기반으로 한 제조업이 고부가가치 기반산업으로 경제에 중요하게 작용한다.[27] 인문학의 위기 전세계적 현상 그렇기 때문에 유수의 대학에서 인문학을 전공하는 학생들도 밥벌이용으로 경제학이나 경영학 복수전공을 하는 경우가 많다.[28] 그리고 인문학으로 졸업한 학생들 중에서도 뛰어난 학생들은 많은 수가 MBA나 로스쿨로 진학한다. 그나마 졸업생에게 전부 높은 연봉의 정규직 교사/교수 직위를 보장해 주는 그랑제꼴 고등사범학교가 개설되어 있는 프랑스가 조금 나은 형편이랄까... 물론 퇴학당하지 않을 자신이 있다면야...[29]

오죽하면 "인문학의 위기는 전 세계적 현상"이라는 뉴스기사가 나올 정도이다.[30] 미국에서는 인문학 연구 자금 지원금이 2009년부터 계속 감소하고 있으며 2011년 기준으로 과학기술 분야 연구개발비의 0.5%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 미국 전체에서의 인문학 전공비율은 1966년부터 2010년 사이에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하버드 대학교 인문학 연구소장은 인문학이 선진국이나 개발도상국 모두에서 심각한 고전에 직면해 있다고 주장했다. #, #

정치권에서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2014년제너럴 일렉트릭 공장을 방문했을 때 인문학을 공부하는 것보다는 경영학 같은 실용학문을 배우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다는 취지의 말을 했다가 인문학계가 항의하여 사과하는 일도 있었다.

미국 뿐만 아니라 영국에서도 2011년부터 인문학 분야에 대한 정부 직접 지원을 끊어버리고 수업료로 대체하였으며, 호주 역시 1억 300만 호주 달러(한화로 약 995억 원)의 인문학 연구 자금을 의학 분야로 돌리겠다고 발표하였다. 인도 또한 인문학은 빈사 상태이며 반대로 직업학교와 경영, 기술 분야 연구는 인기가 높아지고 있다.

중국은 말하기조차도 민망하다. 체제도 체제이거니와 1960년대중국 대륙의 유구하고 찬란한 문화를 싸그리 파괴와 혼란으로 몰아넣었던 문화대혁명 탓에 인문학이 말살당했기 때문이다. 중국 사회과학원 같은 유수의 학술 기관이 있다고 하지만 학자 개인의 견해를 다는 것은 물론 각주 하나, 단어 하나까지 각별히 조심해야 하고 문화대혁명 관련 공문서 및 기록들은 체제붕괴의 위험성과 연관되기 때문에 모두 공개금지 조치가 되어 있다. 이 때문에 중국의 정치인들은 대부분 이공계열 출신들이다. 시진핑만 해도 칭화대학 화학공학과를 졸업했고, 후진타오 전 주석도 칭화대학 수리공정과를 졸업했으며, 그 전 주석이었던 장쩌민상하이교통대학 전기공학과를 졸업했으니 말 다한 셈. 리커창 총리는 비이공계이나 사회과학인 경제학을 전공했다. 물론 그것은 문화대혁명이 휩쓸고 간 대륙 얘기고 홍콩대만한족 자체의 문화 수준이 높은 관계로 인문학이 여전히 살아 있으며, 문과 출신에게 그럭저럭 많은 기회를 준다. 특히 사실상의 도시국가인 홍콩은 인문사회계열 인재의 수요가 많기 때문에 인문사회계열 전공자를 선호하는 분위기가 있다. 당장 중국사 사료는 베이징홍콩이나 타이베이에서 수입해 오는 판. 홍콩대학홍콩중문대학베이징대학보다 사료 보유량이 더 많으니 말 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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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 위부터)
A: 선생님, 문과는 대학에서 무엇을 하나요?
B: 부모님 돈으로 미팅 가서 놀거나 취업할 때 자랑스럽게 얘기하기 위해서지.
C: 의사소통 능력이 필요한 사회에선 어쩔 수 없지.
D: 하지만 불문학이나 셰익스피어가 사회에 무슨 쓸모가 있지?
E: 경상계는 해외에선 이과고, 사회를 움직이는 다수가 대학에서 배울 게 있나요?
A: 대부분의 문과에게 대학을 다녀야 할 이유가 있나요?
C: 선생님, 대답해 주세요!
T: 결론부터 말하면 없다.

일본도 이런 만화가 나오는 걸 보면[31] 사정은 비슷한 듯.

4.8. 인문학 위기에 대한 풍자

――― MENU ―――
샤를르 보들레르 800원
칼 샌드버그 800원
프란츠 카프카 800원

이브 본느프와 1,000원
에리카 종 1,000원

가스통 바슐라르 1,200원
이하브 핫산 1,200원
제레미 리프킨 1,200원
위르겐 하버마스 1,200원
시를 공부하겠다는
미친 제자와 앉아
커피를 마신다

제일 값싼
프란츠 카프카
오규원, 「프란츠 카프카[32]
이제 나의 친구들은 더 이상 우리가 사랑했던 동화 속의 주인공들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고흐불꽃같은 삶니체상처 입은 분노스스로의 현실엔 더 이상 도움될 것이 없다 말한다.
-신해철,[33] <나에게 쓰는 편지>에서 발췌

4.9. 인문학의 발전을 저해하는 인문학 옹호론

4.9.1. 인문학을 배워야만 통합적 사고력을 기를 수 있는가?

인문학을 통해 통합적 사고력을 기를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인문학의 분과학문 간 경계는 훨씬 희미하므로, 곧 어느 한 분야를 전공하더라도 다른 분야에 대해 모르면 그야말로 수박 겉핥기만 하게 될 확률이 높다는 것. 예를 들어 근대성(modernity) 같은 문제는 문사철 중 어느 한 학문을 탐구하든 간에 반드시 마주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통합적 사고가 적용되는 부분은 본 페이지에 서술된 내용을 기준으로 이야기하자면 'Humanities'라고 불리는 '순수인문학' 분과이다. 대중이 받아들이기 쉬운 내용부터 설명하자면,

(1)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라는 말이 있듯 인간이 서술하는 역사는 비록 사료가 존재한다고 할지라도 당시의 시대상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절대적 진리'가 아니다.[34] 하물며 역사 속에서 수없이 반복되는 문명의 쇠락과 번영이란 물적 인프라 차원의 문제에서 발생하기도 하지만, 그 집단이 가진 형이상학적 세계관에 의해 벌어지는 경우도 다반사다. 만약 '풍수지리'에 대한 이해가 없는 사람이라면, 조선시대의 마을이 형성되는 원리 자체를 파악하지 못한 채 도시의 비효율성에 대해서만 주목하게 될 것이다.[35]

(2)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근친혼을 하지 말라"와 같은 일견 인류보편적으로 보이는 도덕률이라 할지라도, 그 근원을 따지고 들어가보면[36]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권력체계에 기반하고 있다는 관점도 있다. 따라서, 특정 시대의 사조를 알기 위해서는 그러한 사조가 발생하고 받아들여지게 된 당시의 역사적 배경내지는 시대상 따위에 대한 이해가 필수불가결하다.

(3) 인간의 사유가 언어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관점에서, 한 시대가 가진 언어적 한계는 그 시대가 가진 사상적 한계이기도 하므로, 특정 시대, 특정 사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시대에 통용되는 언어체계를 파악해야하는 상황이 종종 발생한다.[37][38]

(4) 따라서 '하나의 정답'이 아닌 '다원화된 담론'을 결과값으로 지향하는 현대 인문학의 특성상, Humanities에 속한 학문이 특정한 시기의 역사 / 사상 / 언어에 대해 최대한 실제에 가까운 결과값을 얻기 위해서는 특정 분과만의 지식이 아닌 학제간 교차검토를 통해 만들어진 통합적 사고가 필수라 할 수 있다.[39][40]

현대의 인문학이 중세 3학4과의 직접적인 후신이라고 가정한다면[41], 현대의 모든 분과 학문들은 인문학으로부터 갈라져 나왔다고 할 수 있다. 자연과학18세기 무렵까지만 해도 자연철학으로 분류되었으며, "사회과학" 또한 19세기에 와서야 오귀스트 콩트에서 유래하였기 때문이다. 오늘날까지도 이러한 전통이 세계 각 대학에 남아있다. 예컨대 세계의 많은 대학에서 인문대학(college of humanities)은 항상 단과대학 리스트의 맨 앞에 오며,[42] 입학식이나 졸업식 등 공식적인 학교 행사에서 최선두에 선다.

그러나 위 주장과 근거들은 다음의 관점에서 문제가 있다.
  • 위 내용들은 통합적 사고를 뒷받침한다기보다는 연구를 수행하면서 타 분야 지식을 도입한 사례일 뿐 '통합적 사고'라는 이름을 굳이 붙일 이유가 없다. 더군다나 저 정도는 이미 학부생 수준에서 배우는 내용들이다.

4.9.2. 인문학적 감수성이 실존하는가?

인간의 삶과 사고에 대해 연구하는 학문적 특성상 가치사상이 공부에 내재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인문학을 전공하는 학생은 같은 문과이면서도 상대적으로 사회과학 전공 학생들에 비해 감수성이 풍부하고 삶 그 자체에 대한 고민을 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굳이 비교하자면 사회과학은 '모든(혹은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제도와 문화를 다루지만, 인문학은 '특정 인물'의 사고에 대해 집중적으로 파고들기 때문에 공감적인 요소가 더 많은 것. 실제로 인문학을 동경하여 인문대학에 진학한 대학생들 중에는 문학소녀나 청년 철학도 같은 희귀종들이 꽤 있다. 하단의 시에 이와 같은 인문학적 감수성이 잘 드러나 있다.
내가 박식한 천문학자의 말을 들었을 때,
증명과 숫자들이 내 앞에 줄지어 나열되었을 때,
차트와 다이어그램이 더해지고 나누어지고 측정되는 모습을 보면서,
강의실에 앉아 사람들의 박수를 받는 천문학자의 강의를 들었을 때,
이상하게도, 갑자기 지치고 싫증이 나서
슬그머니 자리를 떠 밖으로 나와 홀로 거닐며,
신비로이 촉촉한 밤 공기 속에서, 이따금씩,
깊은 고요 속에서 별들을 바라보았다.

월트 휘트먼(Walt Whitman), 《When I heard the learn'd astronomer》
마이너스 곱하기 마이너스는 플러스가 되지만, 그 이유는 따지지 마세.
(Minus times minus equals plus, the reason for this we need not discuss.)

위스턴 휴 오든(Wystan Hugh Auden)의 시 중에서[43]

그러나 이러한 "인문학적 감수성"은 인문학 중에서 문예에만 한정된다. 문예를 제외한 다른 학문들은 논리학적 사고력을 바탕으로 현상의 사실관계를 분석하면서 발전해왔다.

근대 역사학의 기초를 다진 레오폴트 폰 랑케는 독일 역사주의 연구방법론을 발전시켰다. 랑케는 왕조를 정당화하기 위한 선전문구에서 역사학을 분리시켜 과학에 가까운 학문으로 만들었다. 물론 자연과학의 경험주의와는 조금 다른데 이에 대해선 해당 문서에서 다룬다.

가치판단을 연구하는 윤리학에서도 결국 학문적 논쟁의 향방을 가르는 것은 합리적 논증이다. 감수성은 감정이나 힘에 호소하는 오류이다.

결국 인문학적 '감수성'이라는 용어 자체가 사실은 '논리적 사고'를 기반으로하는 이공계열로부터 그와 구분되는 자신만의 가치를 주장하기 위한 차별화 전략의 일종이며, 수박 겉핥기하듯 인문학에 발을 담근 이들로부터 비롯된 인문학에 대한 몰이해의 산물이다. 소위 '인문학적 담론'이라는 것들의 중심에 있는 철학부터가 논리학을 기반으로 하는 학문이므로, '인문학적 사유'가 무엇인지 철학 텍스트 한 줄이라도 읽어본 사람이라면 근본도 없는 '감수성'의 갑작스러운 등장은 황당할 수밖에 없다. 인문학과 이공계 모두 (사실의 비중을 떠나) 추론과 논리를 기반으로 결론을 세우는 기본적인 뼈대는 같기 때문이다. 그저 상술한 대로 인문학이 '생기 넘치는(?)' 대상인 인간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인간적으로 보일 뿐이다.

4.9.3. 인문학은 시장을 도덕적으로 만드는가?

시장과 인문학 (2013) 참조.

오늘날 인문학이 위기인 것은 이와 같은 인문학 본연의 가치를 인문학 스스로가 소홀히 하고 있거나 다른 사회적 지향을 옹호하고 지지하는 도구적인 차원에 자신을 가두어 두고 있기 때문이다. 경쟁을 정당화하고, 약육강식과 승자독식을 용인하는 태도, 현대인들의 고통과 소외, 차별과 억압에 둔감해진 채 추상적 개념과 몇 가지의 도식으로 정리된 정지 상태, 다른 학문 영역들과 더 이상 교류 혹은 협력하지 못하고 타 영역의 발견과 발전으로부터 더 이상 지적 자극과 영감을 받지 못하는 답보 상태 등이 인문학자들 스스로 지적하는 인문학 위기의 현상들이다. 중요한 것은 인문학의 위기가 인문학만의 위기가 아니라는 점이다. 인문학의 위기는 인문학 스스로를 도태시킴과 동시에 인간을, 사회를 소외시킨다. 소통하지 못하는 인문학은 고립되어 다른 학문과도 그리고 사회와도 상생할 수 없다. 결국 인문학은 내적 외적 반성과 성찰, 끊임없는 지향을 통해 소통과 상생이라는 인문학적 가치를 복원시켜야만 한다. 왜냐하면 인문학의 위기는 곧 인간의 위기이며, 인간의 위기는 곧 사회의 위기이자 국가의 위기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끊임없는 성찰과 자기반성을 통해, 소통과 상생이라는 인문학적 가치를 복원하는 것만이 위기를 타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될 것이다.

인문학이 위기인 이유는 위 문단 그 자체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경쟁을 정당화하는 태도?" 왜 경쟁이 나쁘다고 하는 것일까? 오히려 독과점 시장의 폐해가 크다. 수험지옥 때문에 자살하는 입시생의 사례도 물론 있다. 그러나 그것은 경쟁이 인간을 하나의 기계적인 톱니바퀴로 보는 비인문학적 사고의 산물이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인문학 외의 분야, 예를 들어 "기름밥" 먹고 "지이이이잉"하는 소리 내는 기술 분야를 천시하는 사고방식, 폼 나는 정장 입고 일하는 직장만이 고급스러운 직장이라는 인식을 자녀들에게 대물림하는 사회의 인식과 가정교육이 수험생들을 자살로 내모는 것이고, 공무원이 아니면 안정적인 수입을 얻을 수 없는 경직된 고용구조가 극단적인 선택으로 내모는 것이다. 오히려 경쟁이 없는 사회는 인간을 태어나서부터 결정된 부모의 학벌, 재산, 인맥에 따라서 신분을 결정짓게 하는 비인간적인 사회다. 수능 지옥 입시지옥 사회에서는, 없는 집 자식도 머리가 좋다거나 노력만 한다면 수능 한 번으로 명문대를 갈 수 있었지만, 지금의 입시제도는 너무나 복잡하고, 가진 자에게 유리한 정보격차가 심한 제도이다. 한 마디로 경쟁을 극단적으로 없애는 제도다. 인문학이 위기인 이유는, 현실을 모른다는 것이다.

경쟁은 나쁜 것이 아니다. 고통과 소외가 문제라고 지적은 할 줄 아는데, 그 고통과 소외가 어디서 오는 것인지는 구체적으로 지적하지 않는 애매모호한 태도. 비인문학적인 것은 비인간적인 것이라고 단정하는 태도. 그런 태도가 모여서 기업들로 하여금 인문학도를 기피하게 만드는 것이다. 한 마디로 탁상공론과 도덕론에 그치기 때문에 위기인 것이지, 사회가 인문학을 핍박하기 때문에 위기인 것이 아니다.[44]

경제학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시장은 원래 의도와 관계없이 ‘교환이득’과 ‘정보유통’이라는 수단을 통해 상생과 소통이라는 고상한 가치를 우리에게 제공한다. 만일 사정이 그렇다면 시장이야말로 인문학적 가치를 가장 잘 구현하는 사회제도가 아닐까? 그러나 아래와 같은 이유로 인해 이에 대한 답은 부정적이다.

교환이득에 기반한 시장적 호혜성이 형식적이고 제한적이라는 점을 살펴보기 위해 사물에 대한 시장의 평가 방식 그 자체를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시장은 시장에 고유한 사물의 가치 평가 방식을 갖는데 이로 인해 시장의 “부패 경향”이 촉발된다(마이클 샌델 2012). 다시 말해 시장에서 어떤 대상에 가격을 매기는 행위는 그 자체가 어떤 특정한 성향이나 경향을 부추기는 효과가 있다. 우리가 사회적 삶 속에서 중요한 가치라고 간주하는 것들이 상품으로 거래되기 시작하면 대상의 고유한 미덕은 변질되기 시작한다.

이와 관련해 한 가지 사례를 들어보기로 하자. 퇴근 이후 유치원에 아이를 늦게 찾으러 오는 부모들에게 10분당 5000원의 벌금을 매긴다고 가정해보자. 이러한 제도가 시행되기 이전에는 사람들이 설사 늦게 도착한다 할지라도 발걸음을 빨리 하려고 노력하였다. 늦지 않는다는 규칙을 지키는 것은 ‘도덕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부득이하게 늦을 경우에도 그는 양심의 가책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벌금 제도가 도입되고 난 다음부터 상황은 바뀌게 되는데, 이제 더 이상 사람들은 도덕이나 양심의 가책 때문에 발걸음을 빨리 서두르지 않는다. 늦을 것 같으면 사람들은 벌금을 낼 요량으로 보다 더 천천히 걸을 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개인이 마치 극장의 영화 티켓을 구매하듯이 늦을 권리를 구매하면 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늦을 권리가 상품으로 간주되는 순간 벌금이 가격으로 변질된다. 도덕이나 미덕이 재산권에 의해 구축(驅逐)되는 셈이다. 설사 이후 이러한 벌금 제도를 폐지한다 할지라도 여전히 사람들은 지각할 것인데 왜냐하면 한 번 상품이라고 간주되었던 대상은 지속적으로 상품으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이제 사람들은 늦을 권리라는 상품을 ‘제로의 가격’으로 구입하게 된다(Gneezy and Rustichini 2000)

따라서 인문학적 견제와 비판은 경제학 논리로 옹호될 수 없다.
4.9.3.1. 반론
해당 주장은 인문학 내에서도 일부에 불과하다. 인문학 내에서도 이런 시장과 도덕에 대해서 여러 논쟁이 지금도 벌어지고 있으며, 현실적으로도 하나의 입장만이 전적으로 옳지는 않다. 참고로 여기 쓰여진 반론도 인문학 내에서 이미 더 체계적으로 논쟁된 입장에 불과하니, 관심이 있다면 인문학 서적을 찾아보자.

먼저 이러한 비판에 전제되는 인문학의 조건은 "시장화나 가격을 매기는 행위는 부당하다."이다. 인문학자의 이러한 주장은 시장의 개념을 왜곡하고 있다. 여기서 벌금이란 공급자(유치원)가 자신이 공급할 수 없는 부분에 대해 "벌금"이라는 제도로 불이익을 제공하는 것이다. "교환이득에 기반한 호혜성"에서 벗어나는 문제이기 때문에, 애초에 시장화나 자본주의화라고 볼 수 없다. 자본주의와 시장은 교환이득을 통해 서로의 효용을 극대화하는 제도이다. 서로 상호호혜적인 교환이 성립되지 않는다면 시장이나 자본주의가 아니다.

그리고 정말로 합리적인 소비자라면, 벌금을 내리는 유치원이 아니라, 다른 유치원에 아이를 보낼 것이다. 상술한 인문학자의 비판은 일단 자신이 생각하는 진리 명제를 설정하고 난 후, 그 명제에 합치되어 보이는 상황을 가정해버렸다. 과학적이지 못하고, 비현실적인 비판이기 때문에 비판으로서 제대로 기능할 수 없다.

이러한 인문학자의 도덕론적 비판을 어느정도 받아들이더라도 경제학의 입장에서 반론이 가능하다. 경제학의 전통적인 전제는 "모든 것에 가격을 매길 수 있다"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반론해보도록 하자. 법경제학적으로 볼 때 인간이 가진 미덕이나 도덕적 관념은 "측정불가능한 가치나 리스크(개인의 평판과 명성, 인맥, 신뢰감)에 대한 확대해석/과대평가"가 작용되는 현상이다. 얻는 것에 비교했을 때 감당 가능한 리스크 혹은 대가라 생각될 경우, 인간은 그것을 실행하는 것이 꼭 불합리하고 비도덕적인 행동인 것인가? 살인이나 폭행 같이 명백히 극단적인 불이익을 가하는 행위에 대해선 사회적 합의를 통해 무기징역이나 사형처럼 철저한 응징이라는 가격을 매기고 가격에 대한 정보를 널리 퍼트려(=대중을 교육하여), 그러한 사고방식을 차단하면 된다. 그리고 상술한 "지각할 권리로 인식된다"는 부분에 대해서도, 오히려 유료 시간연장 서비스를 제공하면 될 일이다. 고객들과 협상하여 합리적인 가격을 맞춘다면, 유치원에서도 직원들의 야근으로 인한 불이익이 줄어들고, 야근으로 시간이 늦어질 수밖에 없는 부모들의 문제도 해결된다.

4.9.4. 인문학의 경제적 가치는 높다?

시장과 인문학 (2013) 참조.

삼성경제연구소가 국내 CEO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97.8%가 인문학적 소양이 경영에 도움이 된다고 답했고, 인문학적 소양이 풍부하다면 채용할 의사가 있다는 대답도 82.7%에 이른다고 보고하고 있다. 시장 환경의 변화에 어느 누구보다도 예민한 감각을 지닌 이들 CEO의 답변은 인문학이 시장에 미칠 영향이 추상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는 기대감을 넘어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것임을 예증하고 있다(2011년 2월 SERICEO 회원 498명을 대상으로 실시).

다음은 국내외 기업들이 자신들의 경영 전략에 인문학을 접목한 사례들이다.
  1. <토이스토리>, <몬스터주식회사>, <니모를 찾아서>, <라따뚜이> 등의 작품으로 잘 알려진 컴퓨터 애니메이션 제작사 ‘픽사(PIXAR)’는 구성원 전체의 협력적 활동과 고갈되지 않은 창조성을 구현하는 것으로 명성이 높은데, 이처럼 픽사가 지속적으로 창조성을 유지할 수 있는 원인 중 하나는 ‘픽사 대학’(Pixar University)이라고 불리는 사내대학이다. 픽사는 조직의 창조성을 위해 인문학을 적극 활용하고 있는 바, 픽사 대학에서는 문학, 철학, 글쓰기 등의 인문학적 과정과 예술교육 및 기술교육에 이르기까지 100여개의 과정을 개설하여 직원들로 하여금 일주일에 최소 4시간씩 교육을 받도록하고 있으며, 교육을 업무로 간주하고 있다.
  2. 구글(Google)은 2011년 신규 채용 인력 6,000명 중 5,000여명을 인문학전공자로 충원하겠다고 발표했다.
  3. 인간의 본질적인 행동 패턴과 직관에 대한 인문학적 이해를 제품의 기능 및 디자인에 반영했다고 알려진 ‘애플(Apple)’의 혁신적인 제품은 인문학과 기술의 접목이 제시하는 미래기술생활환경의 좋은 예이다.
  4. IBM은 미래전망을 위해 자연과학, 공학자 및 인문학자가 포함된 전담부서를 두고 있다.
  5. 인텔(Intel)은 2010년 미래 컴퓨터, 인터넷, 모바일 기술의 발전 방향 및 인간과의 소통방식 연구를 강화하기 위해 ‘상호작용 및 경험 연구소(Interaction & Experience Research)’를 설립하였다. 인텔의 이 연구소는 ‘사회적 통찰’, ‘경험 디자인’, ‘이머징 기술’, ‘미래 전망’ 등 4개 팀으로 구성되었으며, 2020년까지 ‘컴퓨터와의 경험방식을 재창조’하자는 미션 아래 다양한 관점과 지식의 융합을 도모하고 있다.
  6. 야후(Yahoo)는 심리학, 문화인류학 등 25명의 인문학자로 팀을 구성하여 네티즌이 어떤 광고에 반응하고 클릭하는지 연구하고 있다.
  7. 유니레버(Unilever)는 정기적으로 시인과 작가를 초청해 ‘글쓰기 워크샵’을 진행하고, 연극배우가 연출하는 역할극을 통해 직원의 커뮤니케이션역량을 점검하는 등 인문학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8. 국가별로 상이한 역사적, 문화적 맥락을 파악하여 무의식적 욕구의 차이를 제품 개발 및 마케팅에 반영하기 위해 월마트(Walmart)는 2011년 2월 ‘Global Customer Insights’팀을 발족하였다.
  9. 삼성전자 디자인 경영센터에는 15%가 넘는 인문학 관련 전공자들이 고용되어 있는데, 이들은 커뮤니케이션 및 지식 융합의 창조적인 아이디어를생산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
  10. 삼성그룹은 인문학적 소양과 기술을 갖춘 통섭형 인재양성을 위해 ‘삼성컨버전스 소프트웨어 아카데미(Samsung Convergence SoftwareAcademy)’를 신설, 2013년 상반기 신입사원 공채에서부터 적용하기로 하였다.
  11. SK C&C의 정철길 사장은 ‘CEO가 들려주는 오페라의 유령’을 주제로 한 토크 콘서트에 직접 나서 인문적 교양 함양의 필요성을 몸소 실천하는 사례를 남겼다.
  12. 포스코(POSCO)는 신입사원 채용과 임직원 교육에서 ‘문리(文理) 통섭형’인재관을 강조하고 있으며, 인도네시아와 인도 등의 제철소 운영과 관련 2011년이슬람 문화 이해를 위한 강좌도 진행한 바 있다.
  13. 2013년 KB 국민은행은 인문학분야 베스트셀러 28권을 활용한 심층면접을 통해 인재를 선발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요소는 매우 단편적이고 지속적이지 못하다는 반론이 제기된다. 마케팅이나 콘텐츠 연구에서 통계학, 경제학, 공학 등의 주류 학문을 보조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 인문학 그 자체로 비즈니스를 한 경우는 굉장히 드물다. "소비자의 심리를 이해하기 위해" 인문학을 도입한 것이지 인문학에서 출발한 것은 아니며, 대규모 채용 또한 "인문학적 소양을 지닌 기술자"나 "외부인사"에 그친다. 일반 직원이라도 학벌은 거의 명문대이다. 인문학의 메리트를 통해서 뽑힌 것인지, 그냥 명문대라는 학벌 덕분에 채용된 것인지 불분명하다. 공학을 보면 출신성분이 명문대부터 특목고 출신까지 다양하기 때문에 공학의 전공 메리트가 드러난다.

연구 분야도 "인간의 미래를 예측하라", "사회문화를 연구하라", "인간적 가치와 윤리를 연구하고 이를 제품에 반영하라" 같이 명백한 성과 측정이 불가능하고 매우 실험적인 것들이 대부분이다. 이런 실험적인 분야들은 경영진의 도전정신으로 인해 추진되었다가, 애매한 성과로 인해 기업 홍보팀의 홍보 소재로 내몰리다가, 결국 주주들의 인건비 감소 압박에 가장 먼저 폐부되는 분야다. 장기적인 인문학 진흥 정책으로선 부적합한 예시다.

4.9.5. 문화와 예술의 발전에 도움을 주는가

문화산업 분야에서의 인문학 활용현황과 활성화 - 한국교양기초교육원

인문학은 문화산업에 대하여 대체로 다음의 세 가지 경로를 통하여 기여할 수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첫째, 인문학은 보다 나은 인문학 콘텐츠를 공급함으로써 문화산업의 생산성 제고에 외부효과를 일으킬 수 있다. 둘째, 인문학은 교육내용의 개선을 통하여 문화산업에 종사하는 콘텐츠 중심 인력 및 기술 인력들의 수준을 높임으로써 문화산업 혁신에 기여할 수가 있다. 셋째, 인문학은 연구인력 및 교과과정의 학생들이 콘텐츠 산학협력시스템을 통하여 문화산업 제작-유통-소비과정의 연구개발에 참여함으로써 문화산업의 생산성을 높일 수가 있다. 이는 요약하면 인문학의 근본적인 연구방식의 변화, 교육 커리큘럼의 변화, 문화콘텐츠 연구개발시스템의 개선을 요구하는 것이다.

문화산업콘텐츠 생산 및 소비의 과정에서 인문학의 역할은 간략하게 세 가지로 나뉜다.
  • 우선은 문화산업의 소재가 되는 인문학적 콘텐츠의 공급이다.
  • 둘째로는, 인문학적 소양을 핵심으로 하는 기획 및 창작인력의 공급이다. 이들은 인문학적 소양과 교육을 바탕으로 인문학적 콘텐츠를 문화산업으로 전달하는 통역자이며 문화산업콘텐츠의 생산과정에 새로운 인문학적 성과를 추가하는 인문학콘텐츠 생산자이기도 하다. 인문학적 소양은 후반부에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IT기술을 첨가하여 문화산업콘텐츠를 구현하는 과정을 감독하는 인력에 게도 크게 요구된다.
  • 셋째, 문화산업의 마케팅을 위하여 국내외를 포함하는 소비자정보에 대한 지식의 생산 및 접근성의 제고도 인문학의 영역이다.

현대 헐리우드 영화산업은 신화이론에 대한 연구와 그에대한 투자로 일구어낸 '영웅서사 플롯'[45]의 등장 및 제반 시스템을 토대로 발전해왔다. 이는 인문학이 단순히 콘텐츠의 소재를 제공하는 소스로 기능할 뿐만이 아니라 콘텐츠 시장 자체를 형성하는 메커니즘을 제공할 수 있음을 증명하는 명백한 증거이다.

또한 반대급부의 그레이드에서 프랑스의 영화산업이 현대예술영화 시장을 선도하게 만든 것 역시 <까이에 뒤 시네마>로 대변되는 장뤽 고다르 등 인문학을 기반으로 한 비평세력이었다. '선언의 시대' 이후 현대 예술의 흐름을 보면, 특정 사회에 굳건하게 형성된 인문학적 토대는 문화 시장에 있어 단순히 개별 표현물이라는 한계를 넘어, 시장 전체를 지배할 수 있는 담론과 헤게모니를 제공한다는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라 할 수 있다. 가령 마이클 잭슨의 춤은 이제와 많은 사람들이 따라할 수 있고, 누군가는 더욱 화려하게 재단할 수도 있는 하나의 동작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여전히 팝의 황제이며 다른 사람들이 따라할 수 없는 아우라를 가진 것은, 그가 '컬러TV 시대의 등장'과 '흑인문화의 본격적인 궐기'를 선언하는 하나의 '혁명'이며 '상징'이기 때문이다. 마이클 잭슨의 '동작'을 '상징'으로 만드는 것은 '비평[46]'이 가진 기능 중 하나이며 이는 그 사회 구성원들의 인문학적 소양과 사회 자체가 가진 토대를 기반으로 한다.

좀 더 와닿는 예를 제시해보자면 대한민국처럼 글로벌 IT 산업에 있어 선도적인 지위를 가지고 있고, 동시에 그 어느 나라보다 게임산업과 일상이 가깝게 엮여 있는 국가에서 과거 프랑스가 그랬듯 '예술 게임 이론' 따위가 등장하여 새로운 시장을 개척해 나가는 흐름이 등장하지 않는 것은 '창의적인 개발자'가 없어서가 아니라, 그러한 개발자의 '창의력'을 소비하고 (돈이든 아이디어든) 그에 투자하려는 계층이 없기 때문이다.[47] 서로 다른 각 종목의 레전드를 모아 축구팀을 짠다고 한들 그 팀이 좋은 축구팀이 되는 것은 아니며, 마찬가지로 음악, 미술 연출 등의 예술적 요소를 짜집기 하여 만든 게임이라는 매체가 단순히 그러한 요소를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예술이 가진 담론에 올라타기는 요원하다.

한때 술집 안주거리 공연에 불과했던 영화라는 매체가 오늘날 종합예술의 지위를 넘어 '1번 매체' 취급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은 음악과 미술과 스토리(문학)가 들어갔기 때문이 아닌, 영상이라고 하는 새로운 표현 방식을 통해 리얼리즘[48]이라고 하는 새로운 미학적 지평을 열었기 때문이며, 이러한 의미부여 작업에는 앙드레 바쟁, 장뤽 고다르 등 인문학 출신 비평가들의 역할이 지대하였다. 프랑스의 경우 이러한 작업을 통해 지금까지도 예술영화의 종주국이라는 지위를 유지하고 있지만, 이와 같은 공정은 그러한 비평을 제시하는 사람의 인문학적 소양뿐만이 아니라, 창작자, 소비자, 투자자 등 그러한 그들의 비평을 이해하고 돈과 시간과 아이디어를 투자할만큼의 '주변환경'이 받쳐줘야만 실현가능한데, 이러한 '주변환경'을 형성하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가 바로 그 사회가 가진 '인문학적 토대'인 것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대중의 부정적 인식과 싸우고 있는 게임업계가 인문학계에 투자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의견이 문화연구 전공자들 사이에선 제법 오래 전부터 오르내리고 있다. 과거, 카메라의 등장으로 기록매체로서 지위를 위협받던 그림이나, 서커스 같은 취급이나 받으며 술자리 안주거리에 불과했던 영화는 예술로서의 지위를 획득하기 위해 인문학의 힘에 기대었다.

따라서 인문학이 문화와 예술에 도움을 주느냐는 질문은 그 자체로 어리석은 우문이다. 현대 순수예술과 대중문화는 이미 인문학과 한 몸이었으며, 인문학적 토대의 부족은 그 자체로서 문화 예술의 성장을 가로막는 장벽이다.

4.9.6. 인문학의 가치와 인문학 지원의 필요성을 입증할 책임은 수요자에게 있다?

과거부터 인문학은 권력자나 지방 재력가들이 국가나 집단을 운영하면서 부딪히는 각종 난관들에 대한 해답을 구하기 위해 이들의 후원을 받으면서 발전해왔다. 즉, 학자들이 연구하고 성과를 내도록 후원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학자들이 이룩한 학파 그 자체의 명성으로 인한 홍보효과도 있겠지만, 본질적으로 정부나 기관을 운영하는 고위직과 재력가들이 스스로 필요하기 때문에 후원한 것이다. 한마디로 인문학의 가치를 인문학계 스스로 입증하지 못했다는 주장은 인문학 지원 필요성에 대한 인과관계를 거꾸로 이해한 것이다.

과거의 수많은 귀족과 왕족들이 돈이 남아서 유흥삼아 유명한 사상가들을 후원한 것이라고 착각하기 쉬운데, 물론 그런 경우도 있겠지만 진짜 이유는 위대한 사상가들이 만들어낸 사유체계가 통치에 엄청난 도움을 주기 때문에 후원하는 것이지 단순히 자신들의 우아함과 고상함을 멋내고 뽐내기 위해서 취미삼아 후원한 게 절대 아니다.

통치를 하다가 보면은 수많은 이해관계가 얽히면서 어떤 것이 옳은 판단인지 매우 헷갈리는 경우가 정말 수도없이 많다. 하지만 권력자들은 각종 격무에 시달리기 때문에 학자들처럼 인간의 사유체계와 도덕적 관념에 대해 공부할 절대적인 시간이 매우 부족했다. 그렇기 때문에 인류가 문명을 이룩한 후 권력자들은 꾸준히 학자들에게 장기간 투자를 해왔고 이것은 동서고금 어느 사회를 가나 공통된 현상이었다. 단순히 고상한 취미가 아닌, 현실적인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우리가 인문학이라고 부르는 학문에 꾸준하게 거액을 투자한 것이다. 물론 그것이 항상 성공하는 것은 아니긴 하다. 유럽 근대 종교개혁, 계몽주의와 여말선초 신진사대부들의 성리학처럼 시대를 바꿔서 인간 사회를 한 단계 발전시키는 사상도 있는 반면, 중세말기 가톨릭과 조선후기 성리학처럼 오히려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꾸준한 투자가 카르텔화되어 한 때 새로운 사상조류였던 것들이 교조화된 사상으로 변질되어 사회를 좀먹기도 한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어느 시대와 지역을 막론하고 새로운 사상조류를 이끌어내지 못한 인문학의 위기는 반드시 사회를 병들게 하고 국가를 망하게 하여 사람들에게 현세지옥을 열어주었다. 인문학의 위기는 크게 투자의 부재로 인한 인문학의 빈곤과 기득권에 의해 수명이 다된 오래된 사상조류가 성행하는 인문학의 카르텔화 두 가지이다. 사상에 대한 꾸준한 투자와 학문적 지원이 끊기거나 혹은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간다면, 그 사회는 반드시 장기적으로 회복불가능한 거대한 문제를 남기게 된다. 그리고 현재 우리나라는 바로 전자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통치를 하게 되면 반드시 방대한 인문학적 학문 성과를 기반으로 한 이론과 철학, 사상들의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인문학에 대한 지원을 필요로 하는 수요자는 통치자들이지 인문학자들 본인 자신이 아니다. 오히려 인문학자들은 통치에 새로운 사상과 아이디어를 제공해주는 공급자에 가깝다. 따라서 인문학을 방치하게 된다면 그 대가는 국가를 운영하는 통치주체들에게 고스란히 되돌아오게 된다. 그래서 새로운 사상을 발굴하거나 받아들이지 못한 수많은 왕조 국가들이 멸망했고 그 사회의 기득권들은 숙청당해갔다. 현대 민주주의 사회는 과거 왕조국가와 달리 국민이 주인인 국가이다. 과거와 달리 인문학의 위기로 인한 사상의 부재는 과거처럼 왕족과 귀족이 아닌 모든 국민에게 피해로 다가온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각종 저출산과 부동산 문제, 성장동력 고갈로 인해 고생하고 있는 오늘날 우리나라이다. 지금당장 돈이 안된다고 미뤄놨던 수십년간의 인문학 방기가 결국 빚더미처럼 수많은 사회문제와 병폐로 우리에게 다가온 것이고, 우리 모두에게 현재의 불행을 안기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위 주장은 다음과 같이 반박할 수 있다.

재화와 용역의 가치는 공급자가 먼저 만들어서 수요자에게 어필해야 수요자가 필요성을 기반으로 그 가치를 판단하여 공급자로부터 재화 또는 용역을 받을지 말지를 결정하는 것이 공급과 수요의 기본적인 관계이다. 통치자들(수요자)가 필요에 의해서 학자들(공급자)을 후원하고 학자들로부터 국정 운영의 해답(재화 또는 용역)을 받았다면 그것은 학자들이 먼저 자신들의 연구 성과가 국정 운영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먼저 어필했고, 통치자들이 그것을 받아들여본 뒤 그 가치를 인정했다는 것이다. 당장 동양에서도 유가의 공자가 각국의 통치자들에게 자신의 사상을 널리 전파하기 위해 주유열국을 한 것도, 법가의 상앙이 효공을 4번 만나 자신의 사상을 어필한 끝에 인정받은 것도 이러한 맥락에 기인한 것이다. 한마디로 학문과 그 연구성과의 가치를 입증할 책임은 공급자인 학자에게 있는 것이지, 수요자인 통치자들에게 주어지는 의무사항이 아니다.[49]

그리고 위 주장은 당시의 학문체계가 지금과는 달랐음을 간과한 주장이다. 과거 왕정시대에는 응용과학과 사회과학, 형식과학이라는 독립된 개념도 없었을 뿐더러,[50] 자연과학 조차도 자연철학이라는 이름 하에 철학에 종속되어있던 시기였다. 즉, 이 당시의 리버럴 아츠는 지금의 인문학(humanities)과 완전히 동등한 것이 아니라 철학의 지배적인 영향력 하에 있던 자연과학, 사회과학 등을 모두 아우르는 복합적인 영역이었고, 당연히 이 시기의 학자들은 지금의 인문학자처럼 진짜 인문학만 파는 사람이 아니라 현대의 사회학, 경영학, 경제학, 천문학 등에 해당되는 여러 학문을 아울러 공부한 인재였기 때문에 당연히 통치자들이 이들로부터 자문을 구한 것이다.[51] 반면에 지금의 인문학은 자연과학의 분리를 시작으로 사회과학과 형식과학이 따로 분리되고서 남은 "나머지"이다.[52] 현대에는 인문학을 파는 사람이 자연과학이나 사회과학을 보조적으로 파는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인문학만 파는 것이다.[53]

그리고 대한민국은 인문학계 그 자체의 카르텔화가 더 큰 문제이며, 투자의 부재로 인한 인문학의 빈곤은 카르텔화에 의한 결과에 가깝다. 위의 "다른 학문 분야에 비해 수준이 낮은 국내의 인문학 교수들" 문단을 보면 알겠지만, 인문학계 그 자체가 세상과 유리되어 카르텔화된 고인물이 된 마당에 사회에 자신들의 가치를 널리 알리는 학문적 성과가 저조해져 일반 사회에서 인문학의 가치를 저평가하는 악순환이 벌어지는 것이다.[54] 오죽하면 인문학계가 30년 동안 달라진 적이 없다고 어느 교수가 자조했을까?#[55] 서구권에서 적어도 수백년 또는 천년 이상 누적된 철학과 사상이 그 뿌리가 튼튼할 수 있었던 것도 결국은 학계의 품위 손상 방지를 위해서라도 그만큼 학계를 청정하게 유지할 시스템까지 꾸준히 유지해왔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한국같은 경우는 그것을 바로세울 사상과 철학을 스스로 키워낼 역량 자체가 학계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 원인은 당연히 한국 인문학계의 카르텔화이다. 그리고 그 카르텔화를 초래한 근본적 원인은 4.1~4.4 문단에서 지적된 문제점에 대한 자정의식이나 내외부 비판에 귀기울이지 않고 스스로 카르텔이 된 한국 인문학계의 본질적인 구조적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사회 및 국가적인 관심과 지원이 꾸준할 때 카르텔이 생성될 가능성이 더 낮아질 수도 있다면 인문학계는 사회적 관심과 국가적 지원만 받는 게 아니라 활동을 얼마나 했는가, 연구성과를 얼마나 어떻게 냈는가를 사회와 국가에 보고해야 할 책임(이것도 사회에서 요구하는 관심의 한 영역이므로)도 동반되어야 한다는 얘기가 된다.[56]

그리고 인문학의 지원이 저조하여 각종 사회문제가 따라왔다는 위 주장에 대한 반례가 영국이다. 영국은 인문학의 기반이 아시아권보다 매우 튼튼함에도[57] 한국처럼 지역간 격차,# 높은 집값#으로 고생하고 있다.[58] 위 주장대로라면 인문학의 기반이 튼튼한 곳에서는 사회문제가 일어날 일이 없어야 하지만, 영국의 사례는 결코 그러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영국병 또한 대처리즘이라는 새로운 사상적 토대를 바탕으로 당대에는 잘 극복했다는 평을 받았지만, 현 시대에는 그 이면에 있었던 대처리즘의 각종 부작용이 주목되고 일부는 현 시대에서 해결해야 할 과제로 대두되었다.

이는 사회문제가 단순히 개개인의 도덕성에 기대야 하는 이상론적인 문제가 아니라 변화하는 사회상과 시대에 맞는 제도적 장치가 뒷받침되어야 하는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려면 단순히 사상에 기반한 원론적인 해결책만 제시할 것이 아니라 직접 현장에 나서서 실태를 조사하고, 사상을 담되 그에 걸맞은 실지적인 해결 방안을 만들어 실행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현대사회에서 이 역할을 인문학이 아니라 사회과학이 담당하고 있다. 따라서 지금의 통치자들이 필요로 한다면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직접 분투하는 사회과학을 지원하지, 과연 사회에 뭘 해줄 수 있느냐에 대해 아직도 대답하지 못하고 있는 인문학에게 지원할 명분이 한참 부족하다.

'어느 시대와 지역을 막론하고 새로운 사상조류를 이끌어내지 못한 인문학의 위기는 반드시 사회를 병들게 하고 국가를 망하게 하여 사람들에게 현세지옥을 열어주었다.' 라고 한다면, 지금의 인문학계는 '새 시대에 맞는 새 사상조류를 이끌어낼 능력이 지금 존재하는가?'를 검증하는 것이 급선무이다. 진실로 인문학이 사회에서 지속적인 후원을 받으려면 현대의 인문학이 어떤 가치와 사상, 세계관에 관한 담론을 담은 연구성과로 어떻게 사회에 도움이 되는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성찰해야 한다. 인문학 위기의 원인을 정치권과 사회와 국민 탓으로 돌리는 것은 인문학계 그 자체가 다른 학계와 동등한 수준으로 정상화된 뒤에 주장해도 늦지 않는다.

5. 고전의 가치

왜 오늘날에도 우리는 고대철학을 연구하는가 라고 물을 사람들이 있을 법하다. (중략) 오늘날 우리들의 철학적인 사색과 과학적인 사고 전체의 본질적인 개념들도 모두 고대의 정신에서 생겨난 것들이다. 원리, 원소, 원자, 물질, 정신, 영혼, 질료와 형상, 가능태와 현실태, 실체와 속성, 존재와 생성, 인과관계, 전체, 의미, 목적, 개념, 이념, 범주, 판단, 추리, 증명, 가설, 이론, 요청, 공리 등등의 개념들은 그리스 사람들에 의해서 형성되었다. 우리들이 이 개념들의 본래적인 뜻을 연구하지 않는다면, 우리들은 이 개념들을 올바로 들여다 보지도 못하고 맹목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된다. 그런데 우리들은 단순히 개별적인 철학의 기본개념들만 고대철학의 은혜를 입고 있는 것이 아니다. 논리학, 형이상학, 윤리학, 심리학 및 우주론 등과 같은 철학의 본질적인 여러 부문들도 다 고대에 이룩된 것들이다. 그리고 또 관념론, 실재론, 회의론, 유물론, 감각주의 및 이것들이 뒤섞인 형태 등등, 철학적인 사고의 여러 유형들도 이미 그리스 시대에 발달했다.
요한네스 힐쉬베르거, 《서양철학사》 중에서
전기공학을 전공하고 컴퓨터 보안을 위한 수학적 모델링으로 박사학위를 딴 사람이 하기에는 뭔가 기묘한 조언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만나는 학생들에게 대학에서 남은 시간 동안 최고의 인문학 강의를 들으라고 강력 권유한다. 1995년 내가 수강한 디지털 회로 강의는 이제 전혀 쓸모가 없는 구식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그해 내가 들었던 문학과 역사 강좌는 지금도 내 마음에 깊이 남아 있다. 존 로크, 토머스 홉스, 임마누엘 칸트 등 시간이 지나도 변치 않는 인간의 본성에 관한 위대한 교훈과 이야기들은 지금도 여전히 밝은 등불이 되어 인류의 앞길을 비추고 있다. 빠르게 질주하는 세계에서 성공하려면 의식적으로 뒤로 물러나, 지금 달려가고 있는 미래가 정말 우리가 만들고 싶은 미래인지를 확인할 줄 알아야 한다.
앤 미우라 고(Ann Miura-Ko), 벤처 캐피털 Floodgate의 임원(《지금 하지 않으면 언제 하겠는가》, 175면에서 인용)
인문학은 매우 심오하며 다른 분과학문과 비교하여 고전(classics)이 매우 중요한 학문이다. 예컨대 물리학을 전공하는 학생이라고 해도 물리학사(史)를 전공하지 않는 한 아이작 뉴턴의 <프린키피아>를 전부 볼 필요는 없으며, 그 주요 개념을 현대적으로 해석한 고전역학 교과서를 이해하는 정도로 충분히 넘어갈 수 있다. 그러나 정치철학을 전공하려는 학생은 한 번이라도 반드시 플라톤의 <국가론>을 제대로 읽어 볼 필요가 있으며, 이와는 별개로 현대 정치철학자들의 플라톤에 대한 해석도 눈여겨 봐야 한다. 따라서 마음먹기에 따라 인문학은 그야말로 평생을 파고들어가도 모자랄 정도의 엄청난 독서량과 생각의 깊이를 요구하는 학문이 된다. 실제로 유명 철학의 원전을 강독하는 대학원 수준 수업의 경우 1시간 강의에 채 2페이지를 못 나가는 경우가 허다하다. 한 구절 한 구절도 놓쳐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처럼 인문학은 고전을 통해 과거 사람들(학자들)의 생각을 받아들일 수 있고, 이를 비판하며 새로운 생각을 발전시킬 수 있기 때문에 중요시한다. 고전을 공부하는 이유는 그 자체로서의 가치도 있지만, 새로운 생각을 위한 참고(레퍼런스)로서의 성격이 더 강하다. 당장 학자들만이 아니라 일반인들도 혼자 결정을 내리기 힘들면 다른 사람에게 조언을 구하지 않던가. 고전은 그런 '조언자'로서의 역할을 맡고 있다. 물론 고전이 무조건 옳다는 식의 교조주의는 인문학의 자멸을 불러오기 때문에 피해야 하며 실제로도 인문학에서 경계한다.

하지만 인문학에서 고전이 그다지 중시되지 않는다는 반론도 있다. 고전을 읽더라도 단순히 '누가 어떠 어떠한 얘기를 했다더라.' 거나 '그의 주장은 이러이러하다.' 로 끝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왜 그런 주장을 하게 되었는지, 그 과정을 더욱 중시한다.[59] 예를 들어 프린스턴 대학교의 유명한 철학자 길버트 하먼은 사무실 문에 "철학사 꺼져" 같은 문구를 붙여놓기도 했고, 분석철학의 거장 콰인은 철학사 강의를 지루한 작업이라 평가하면서 진짜 철학(즉 자기 연구)을 하고 싶어하기도 했다. 고전 중심의 강의가 인문학 교육의 본질이라고 하는 것은 좀 비약이다.

무엇보다도 학부 커리큘럼에서는 고전 한 권을 정해서 한 학기 동안 강독하는 강의가 있을 수 있지만, 대학원에서는 논문주제로 어떤 고전을 선택하는 것이면 또 모를까 이런저런 고전들을 정독해 볼 시간조차 없다. 어떤 이는 고전에 대한 반발조차 고전의 영향 하에 있다며 아전인수격 해석을 하지만, 이는 그가 현대 분석철학 등의 연구 동향에 무지하다는 증거일 뿐이다. 콰인이나 하먼의 연구는 고전의 해석이나 비판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 고전을 몰라도 그들의 연구를 이해하기에는 지장이 없으며 그들의 연구를 이해하기 위해서 더 필요한 것은 동시대의 동료들의 연구 성과와 타 학문 분야의 연구 성과들이다. 당장 대학교에서 분석철학 수업을 듣게 되면 두꺼운 고전이 아니라 중요한 현대철학자들의 논문을 읽어야 한다는 말을 자주 듣게 된다.

철학뿐만 아니라 전통적으로 인문학이라고 간주되던 여러 학문 분과들이 이러한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렇다고 고전이 인문학 커리큘럼에서 당장 빠지는 일은 없을 것이고 여전히 자주 마주치기야 하겠지만, 고전이 인문학의 본질이라고 하는 것은 고정관념에 가깝다.

이제는 정치철학을 전공하려는 학생도 플라톤의 국가론을 굳이 제대로 한 번 읽어볼 필요가 있는 것은 아니다. 또한 유명 철학의 원전을 강독하는 수업은 실질적으로는 고전 자체를 가르친다기보다는 외국어로 된 고전을 제대로 해석하고 읽어내려면 어떻게 하는지를 가르치는 목적, 본인이 앞으로 연구자로 살아가면서 자기가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한 명의 학자나 몇 권의 책은 과거에서부터 현재까지 나온 주요 해석과 논점, 저자의 의도와 목적 및 당시의 비판 대상 등을 다 숙지해야 한다는 점이 더 크지 고전 자체가 일반인들에게 그 정도의 가치를 가지므로 그렇게까지 읽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즉 나는 신칸트학파의 입장에서 순수이성비판으로 박사를 딴 칸트와 순수이성비판의 전문가이자 대학교 강사요 하고 말하기 위해서는 1시간 강의에 2페이지를 나가는 정도의 밀도를 가질 수 있을 정도의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사가 대학원생들에게 몸소 가르치는 목적이 크다. 고대철학이라면 나는 프랑스 계통의 플라톤 박사고 테아이테토스 전문가요라고 말하기 위해서는 이 구절은 무슨 파피루스본에서는 글자가 불명확한데 우리 프랑스 계통에서는 이렇게 읽으며 양피지본이나 밀랍판본보다는 파피루스본을 정본으로 보고 이 구절은 유대어를 정본으로 따르고 이 구절은 히브리어로 된 양피지본을 정본으로 삼고 독일 학자의 주석을 따른다 이런 걸 하려고 그렇게 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대학원생을 독립된 연구역량을 갖춘 한 명의 학자로 양성하기 위해 대학원 수업을 그렇게 하는 것이기에 좀 다르다는 것이다.

6. 외국어의 중요성

인문학 학문들은 전공 지역에 따라 다르기는 하지만 영어 말고도 제 2외국어 습득이 중요한 경우가 많다. 왜냐하면 해당 나라에서 해당 시기 쓰여진 문헌을 읽어야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서양 고전철학은 영어에 고전 그리스어, 고전 라틴어는 당연히 해야 하고 프랑스어, 독일어 역시 중요하고 날이 갈수록 아랍어, 히브리어, 아람어 같은 고대의 동지중해 언어들까지 요구되고 있다. 한국에 온 대학교 철학 외국인 교수들 가운데에서도 고전철학 전문가에 젊은 서양인이면 한국어는 못해도 이런 고대의 동지중해 언어들을 구사해서 고대의 문서나 조각글들을 해석할 수 있는 역량이 되는 사람들이 있다.

7. 인문학에 대한 말

"The human race is filled with passion.
Medicine, law, business, engineering, these are all noble pursuits, and necessary to sustain life.
But poetry, beauty, romance, love, these are what we stay alive for."
"인류는 열정으로 가득 차 있어.
의학과 법학, 상학과 공학, 이것들은 고귀한 목적을 가지고 있고, 삶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하지.
하지만 시, 아름다움, 낭만, 사랑은 우리가 삶을 사는 목적이란다."
- 죽은 시인의 사회

8. 관련 문서


[1] 특히 귀납법적 방법론이 종용되는 응용과학(자연과학 사회과학 공통)에서의 연구는 통계학적 검증절차를 포함한다. 그러나 순수과학으로 갈수록 통계학적 논증 그 자자체는 중요도가 떨어지게 되고, 궁극적으로는 수학과 고도의 추상적 분야를 다루는 일부 이론물리학 분야에서는 통계적 방법론을 전혀 쓰지 않고 엄격한 형식주의연역논증으로 연구가 이뤄지기도 한다. 인문학은 사변적이고 자연과학은 경험적이라는 이분법이 항상 들어맞지는 않으며, 경험적 귀납법과 논리적 연역법은 응용학문 영역과 순수학문 영역 간 경계가 불분명한 스펙트럼으로 나타난다.[2] Strong Minimalist Thesis: 언어는 접면부 조건에서의 최적해.[3] 더 나아가 인간과학(Human Science)이라는 개념도 있긴 하지만 이쪽은 기존 인문학/사회과학 소속 학문 이외에도 신경과학, 진화생물학 등의 자연과학 소속 학문까지 포함하는 개념이기 때문에 '인문사회과학' 개념과는 좀 다르다.[4] 이들 대분류의 상위 분야는 '인문사회과학' - '인문사회학'으로 명명되어있지만, 프랑스의 SHS처럼 대분류 단계에서 하나로 묶인 형태가 아니다.[5] 복수형은 Artes Liberales.[6] 텍사스 대학교, 오리건 주립대학교, 뉴햄프셔 대학교, 펜실베이니아 주립대학교, 퍼듀 대학교, 콜로라도 주립대학교, 버밍엄 대학교, 사우스햄튼 대학교, 맨체스터 대학교, 브리스톨 대학교, 킹스 칼리지 런던, 더럼 대학교[7] 사실상 이 사람들이 오늘날의 "인문학"이라는 용어를 만든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 12세기 말에서 13세기 즈음부터 활동하기 시작한 이들은 당시 교회의 권위에 반항하면서 고전을 원어로 직접 읽고 연구하는 자유롭고 독립적인 학풍을 추구하였다. 그 결과 르네상스 이후 자연과학의 발달과 종교개혁을 이끌어내게 되었다.[8] 단순히 합리성/합리론이라고 부르는 일상적 용법이 아닌, 인간이 진리에 도달하기 위한 방법으로서의 '이성'이 인식론적 한계를 넘어 어떻게 지식을 정당화시키는가에 대한 담론 전반(근대철학)[9] 독일은 인문과학(Geisteswissenschaft)이라는 단어를 쓰면서 확실하게 (문화)과학의 하위 범주로 분류하지만, 이탈리아는 인간과학(scienze umane)이라는 개념을 쓰기는 하지만 사회과학(Scienze sociali)과 연계된 개념으로서 다루어지며, 여기서 설명하는 내용은 '인문학적 학문(Discipline umanistiche)'이라는 용어가 별도로 존재한다. 프랑스는 인문학(lettres)이라고만 부른다. 다만 2010년부터는 '인문사회과학(SHS; Sciences humaines et sociales)'이라는 분류로 개편하여 간학문적 연구의 개념으로 다루고 있긴 한데, 여기서도 관련 학문들이 '인문학'과 '사회과학'에 소속되어있다고 명백히 언급한다. 그야말로 케바케.[10] 같은 한자 문화권인 중국에서는 '人文学科(인문학과)'로 부르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연과학과 사회과학 등을 '자연학과, 사회학과' 등으로 칭하는 것은 아니다.[11] 구글 검색어를 통한 관심도 비교#상으로는 최근 5년 기준으로 인문학이 50 이상인 반면, 인문과학이 4로 '인문학' 명칭의 인지도가 압도적으로 높음을 알 수 있다.[12] 《세계의 교양을 읽는다》, 최병권, 이정옥 엮음, 휴머니스트, 2003. 이 책의 소주제들이 88년부터 02년까지의 실제 기출문제다.[13] 참고로 테제, 안티테제, 종합은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변증법을 논하며 제시한 대표적인 논거 전개방식이기도 하다. 물론 그 이전에도 변증법은 있었지만.[14] 납의 반감기를 측정해 지구의 나이가 45억 년이라는 주장을 하였다. 연구 과정에서 납 오염이 심각함을 인지하고 무분별하게 납을 사용하는 기업들을 비판했다.#[15]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인문대학 발전방안 연구, 1995. 7-8쪽[16] Rens Bod: A New History of the Humanities - The Search for Principles and Patterns from Antiquity to the present.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14[17] Helmut Reinalter · Peter J. Brenner: Lexikon der Geisteswissenschaften - Sachbegriffe, Disziplinen, Personen. Wien ; Köln ; Weimar: Bohlau Verlag, 2011, XX-XXI[18] 언어학 중 1950년대 이전의 전통적 구조주의 방법론을 사용하는 경우에만 해당한다. 촘스키 이후 많은 언어학 분야는 인문학의 특성을 보이지 않기 때문에 언어학을 인문학으로 분류해야 하는지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자세한 내용은 언어학 문서 및 이론 언어학 문서 참조.[19] 실무가 양성에 초점을 둔지라 대륙법계의 법학과 동일시해 그냥 '법학'이라고 퉁치면 오해가 생길 수 있다.[20] 일본에서는 법박사로, 한국에서는 법학전문석사로 번역했다.[21] 법경제학[22] 이공계의 SCI와 사회과학의 SSCI에 대응하는 학술 데이터베이스다.[23] [단독] 해임된 '표절 교수'…서울대 과실로 소송 끝 복직, SBS 뉴스, 2023.06.13.[24] 당장 정반대인 수학이나 과학만 해도 특정 사안에 대해선 계산과 검증이 필요하듯이, 인문학 역시 좀 더 심도 있게 이해하려면 관련 배경 및 세부 사항부터 그와 관계된 배경지식을 알아야 한다. 인문학도 하나의 학문으로서 충분히 깊이가 있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 때문에 대중매체에서는 그저 '생각의 전환'을 위한 소재로만 소비되고 있다.[25] 위 사진의 자막에서는 인문학이라고 오역을 했지만(인문학은 그냥 art라고 하고, fine art라고 하면 순수예술이 된다), 워낙 인문학 자체가 죽어가는 상황이라 컬트적인 의미로 받아들여졌다.[26] 정작 코난은 역사학과 문학을 전공했다(...). 물론 본인이 인문학 전공자이기 때문에 오히려 실상을 더 잘 알게 되어 저렇게 말했을 수도 있다.[27] 영미권이나 이에 영향을 받은 국가들은 실용주의가 강조되는 경향이 짙다.[28] 그래서 그런진 모르겠지만 전세계적으로 전설적인 위상을 자랑하는 펀드매니저 빅5는 워렌 버핏을 제외하면 모두 인문학 전공자들이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 현재의 상황에 맞춘 해석인 것이, 이 펀드매니저들의 나이를 보면 답이 나온다. 워렌 버핏1930년대 출생, 나머지는 아무리 젊어도 1950년대 출생이다. 이때를 생각해보면 순수과학은 물리학을 필두로 1920년대부터 이어진 오랜 빙하기를 맞았을 때고 공학은 금융이나 사회분야에 널리 퍼지지 않았었다. 통계학이 사회 보편적인 분야에 퍼진 것도 1960년대 이후인데... 그저 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적인 고도성장기에 수리적인 분야에 관심이 없던 머리 똘똘한 학생들이 당시 길이 열리던 펀드 매니저로 나섰다는 것이 더 설득력 있다.[29] 오히려 박노자의 회고에 따르면, 역설적으로 구 소련의 경우 취업 걱정이 원칙적으로는 없었기 때문에 대학생들이 먹고 살 걱정을 크게 하지 않고 원하는 인문학 전공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었다고 한다. 다만 이것이 곧 구 공산권 국가들의 인문학 연구 성과가 자본주의 국가보다 뛰어나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애초에 일당독재 체재 하에 철저한 검열이 이뤄지는데다, 외국 학계와 교류하기 어려운 폐쇄적 환경에서 제대로 된 학문 발전을 기대하긴 어렵다. 때문에 중국도 그렇고 북한의 인문학 사정은 그야말로 시궁창. 학문 수준은 초보 수준이고, 그나마도 주체교의 경전인 주체사상을 보조하는 데에나 쓰인다.[30] 미국에서도 문과의 인기가 떨어지고 있고 인문학 기피가 심각해지고 있다. #[31] 원작은 고바야시 모토후미의 만화 한 장면이다.[32] 이 시는 1987년에 발표되었다. 즉 당시에도 문학은 돈 안되는 학문이라는 인식이 있었다는 것.[33] 신해철은 서강대학교 철학과 출신이다. 최종학력은 중퇴.[34] 태조 왕건이 승리한 결과 고려가 건국되었으나, 그 과정에서 폭군으로 서술되어버린 궁예가 실제로도 폭군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35] 인간이 살아가는 터전이 '효율성'을 기반으로 구성되기 시작한 것 자체가 근대 이후 '산업화 이데올로기'가 등장하면서부터라는 사실을 현대인은 자각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36] 니체, 푸코 등으로 대변되는 이러한 방식을 현대철학에서는 계보학적 접근이라 한다.[37] 일례로, 서양 근대철학사에서 가장 큰 담론중 하나였던 존재론의 경우, 인도유럽어족의 언어체계에 존재하는 Be동사로 인해 특정 결론에 도달하는 경우가 되레 있었다(ex> Being is Being / to be or not to be) 하지만, 이로 인해 도출된 진리값 혹은 담론들은 언어적 체계가 상이한 한국사람이 듣기에는 이해도 되지 않을 뿐더러 논리적 결함을 느끼기까지 한다.[38] 롤랑 바르트가 주장하는 '에크뤼티르'담론 따위가 이러한 사실에 주목하는 대표적 사례이다.[39] ex1>한국보다 에 대해 훨씬 많은 단어를 가지고 있는 에스키모의 경우 똑같은 눈을 보더라도 한국사람보다 더 많은 종류의 눈을 '볼수있다' (문학) => 이러한 '인신론적 차이'는 인식론(input)=>형이상학(explain)=>윤리학(Output)으로 이어지는 사상체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요인이고 (철학), 이렇게 다른 사상체계를 가진 집단이 문명을 이룩하게 될 경우 한국인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시스템화된 문화를 발전시키게 된다 (역사)[40] ex2> 조선시대에 일어났던 각종 사화들이 일종의 헤게모니 싸움(철학)의 일환이었다는 점이나, 한자체계 아래서 지식을 독점하고 권력을 잡은 사대부(역사)들이 한글(문학)의 반포를 격렬하게 반대했다는 점 등을 보면 알 수 있듯 인문학적 담론과 연계된 이슈들은 애당초 태생부터 서로 뒤섞여 있는 경우가 많다.[41] 다만 이는 보는 시각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자연과학 또한 인문학만큼이나 3학4과의 적장자라고 볼 여지가 있으며, 현대에 "인문학"이라고 분류되는 학제는 19세기 대학 제도의 변화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보는 시각이 있기 때문이다.[42] 서울대학교를 비롯한 우리나라의 많은 대학들도 마찬가지이다. 단 고려대학교의 경우는 그 전신인 보성전문이 법과와 상과로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에 이를 직접적으로 계승하는 법과대학경영대학이 가장 앞에 오며, 한양대학교 역시 그 전신이 동아공과학원-한양공대이기 때문에 공과대학이 가장 앞에 온다. 성균관대학교의 경우 조선 성균관의 후신임을 표방하기 때문에 그 정신을 계승하는 유학대학(儒學大學)이 맨 앞에 온다. 물론 이 대학들도 그 다음 순서는 자연스레 인문대학이 위치한다.[43] 어디까지나 농담성으로 인용한 것이니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는 말자(…). 사실 해당 문장은 정확히는 그 시인의 평전에 대해 논평할 때 나온 것이지, 오든의 시에서 나온 게 아니다. (출처)[44] 한국의 인문학은 조선시대와는 거리가 있고 대개가 다 구미수입산이다.[45] 조지프 캠벨의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을 참고하면 좋다.[46] 이는 단순히 잡지에 쓴 평론가의 기고문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단순히 '멋있다'라는 감정을 넘어서는 순간, TV를 보며 배를 긁던 대중 또한 이러한 '비평'의 주체로서 의견을 인터넷에 내놓을 수 있으며, 의견을 내놓지 않더라도 이러한 사고가 모이면 그 자체로 하나의 시대적 담론이 된다.[47] 그나마 게임계의 경우 인디 게임을 통해 이러한 창의력과 예술을 선보일 기회가 생겨났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자세한 것은 내용이 길어지니 해당 문서를 참고하라.[48] 해당 링크에는 현재 영화이론에서 말하는 리얼리즘에 대한 설명이 기술되어있지 않다.[49] 참고로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국민이 주인"이라는 말은 어디까지나 국민주권의 개념을 설명하기 위한 말이고, 이런 나라에서도 보통은 직접 민주주의의 한계성으로 인해 대의제를 통해 국민의 대표가 국정을 이끌어간다. 즉, 민주주의 국가 조차도 (선출된) 국민의 대표가 통치자이지, 모든 국민이 통치자로서 국정 운영 전면에 나서는 것이 아니다.[50] 당장 과학의 독립이 19세기의 일이었다.[51] 정책들의 세부적이고 부분적인 문제들이야 실무자와의 합의에서 나오겠지만, 적어도 그 정책의 큰 틀을 설계하는(또는 그것을 돕는) 것은 학자급 인재들의 몫이었다. 자신의 가치와 사상, 세계관에 관한 담론으로 세상을 이끌거나, 어떤 것을 우선순위에 두고 선택할 것인가와 같은 더 고차원적인 측면의 가치관에 대한 조언을 할 정도가 되려면 적어도 세상에 관한 배경지식이 상당히 폭넓게 형성되어야 하며, 이들을 아울러 공부하고 세상에 나아가 실행함으로써 새로운 세상을 경험하고, 그에 따라 자신이 공부해온 철학을 한단계 더 발전시켜 새로운 사상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 당대의 철학이 순수한 의미의 철학 외에도 여러 학문을 아우른 것도 이런 이유였고, 동양에서도 선비들이 6예(예禮-의례, 악樂-음악, 사射&어御-군사훈련, 서書-문서처리, 수數-수학)를 같이 공부한 것도 공부한 철학과 사상을 세상에 활용하기 위한 뒷받침이었다.[52] 응용과학은 자연과학 학문을 실생활에 응용하는 개념으로 파생되었다.[53] 예를 들어 지금은 사회과학의 하위 학문인 정치학경제학이 역사학과 철학에 그 기원을 두고 있지만, 사회과학이라는 개념으로 분리 독립한 현대의 정치학과 경제학에서 역사학과 철학이 '지배적인'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오히려 형식과학인 수학의 영향을 더 많이 받고 있다.[54] 4.3 문단의 인용문에 맨 처음 언급된 손석희의 발언을 참고하면, 손석희는 "인문학자들이 내비치고 있는 권위주의, 이런 것과 통한 것이 아니냐, 그래서 결국은 대중들과 멀어졌고 대중들과 멀어진 상황에서 인문학에 대한 경원시, 그것이 사회에도 그대로 연결이 되고 결국은 사회 진출에도 어려움이 되고 이런 것들이 악순환이 되는 것이 아니냐"라고 토론에 참여한 철학자 및 교수들에게 분명히 질문했다. 그리고 그 누구도 이 질문에 인간 사회에 대한 오해가 있다는 반응 없이 모두가 질문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답변했다. 이들 조차도 저 발언이 인과관계가 잘못되었거나 인간 사회에 대한 이해가 무지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음을 알 수 있다.[55] 본 글을 쓴 교수는 전주대학교 전임교원이다.[56] 4.1 문단에서 지적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57] 당장 옥스브리지라고 불리는 천년 가까운 역사의 명문대인 옥스퍼드 대학교케임브리지 대학교가 있다![58] 다만 지역간 격차는 한국보다는 상대적으로 덜하지만 이것도 어디까지나 중세 봉건제 기반의 지방분권이 역사적으로 뿌리깊었기 때문이었지, 정말 인문학을 잘했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다.[59] 현대철학이 지향하는 바가 '하나뿐인 정답'이 아닌 다원적인 담론이 되어버린 시점에서 어찌보면 당연한 이야기다. 애시당초 근대철학의 단계에서만 하더라도 버클리의 사례를 고려하면, 특히나 철학의 경우 텍스트보다 콘텍스트에 대한 이해가 훨씬 더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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