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colcolor=#fff> 앙투안 라부아지에 Antoine Lavoisier | |
본명 | 앙투안로랑 드 라부아지에 Antoine-Laurent de Lavoisier |
출생 | 1743년 8월 26일 |
프랑스 왕국 파리 | |
사망 | 1794년 5월 8일 (향년 50세) |
프랑스 제1공화국 파리 콩코르드 광장 | |
국적 | [[프랑스 왕국| ]][[틀:국기| ]][[틀:국기| ]]1743~1792 [[프랑스 제1공화국|]] 프랑스 제1공화국1792~1794 |
직업 | 화학자 |
학력 | 파리 대학교 (졸업) |
소속 | 세금 징수 조합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 |
배우자 | 마리 안 피에레트 폴즈[1] (1771년 결혼) |
종교 | 가톨릭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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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자크 루이 다비드가 그린 앙투안 라부아지에와 그의 아내 마리 안 라부아지에 |
프랑스의 화학자. 학문으로서의 화학을 사실상 창시한 인물로 근대화학의 아버지(le père de la chimie moderne)라 불리고 있다. 화학을 연금술과 구별하여 진정한 독립학문으로 분리해 낸 그의 업적을 화학 혁명이라 한다. 하지만 이렇게 나라에 엄청난 기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징세청부업자로서 당시대 세리 기준으로도 어처구니가 없을 수준의 폭리를 취했고, 이로 인해 프랑스 혁명 기간동안 혁명을 지지했음에도 불구하고 처형되어, 후에 공포정치에 부당하게 희생당한 과학자들이 복권되는 와중에도 저지른 죄가 명백하여 끝끝내 복권되지 못하였다.
2. 업적
- 질량 보존의 법칙 (1774년)
라부아지에는 화학 반응에서 질량이 보존된다는 법칙을 확립하기 위해 정밀한 실험을 거듭했다. 당시 화학계에서는 물질이 연소하면 질량이 감소한다는 플로지스톤설이 지배적이었다. 라부아지에는 플로지스톤 이론이 틀렸음을 증명하고자 했고, 이를 위해 특별한 장비를 준비했다. 그는 밀폐된 환경에서 실험을 진행하여, 화학 반응 후 물질의 총 질량이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의 실험 중 가장 유명한 것은 금속을 연소시키는 실험이었다. 그는 밀폐된 용기에 금속을 넣고 연소시켰을 때 발생한 물질을 모두 측정해보았다. 그 결과, 연소 후 남은 물질의 질량은 연소 전의 질량과 정확히 일치했다. 이 실험은 결국 질량 보존의 법칙을 입증하게 되었고, 과학계에서 물질 변화의 관점을 완전히 뒤바꾸었다.
- 연소 이론 정립 (1770년대 후반)
18세기 중반, 화학계는 연소가 '플로지스톤'이라는 물질이 빠져나가면서 일어난다고 믿고 있었다. 하지만 라부아지에는 이를 반박하고, 연소가 산소와의 결합 과정임을 주장했다. 라부아지에는 여러 가지 실험을 통해 연소의 본질을 파헤치기로 결심했다. 그는 주석을 연소시킬 때 발생하는 가스를 수집하여 분석했는데, 그 가스는 공기와 다르게 반응을 일으키며 새로운 성질을 보였다. 이를 통해 그는 연소가 산소와의 결합임을 확신하게 되었고, '산소설'을 발표했다. 이 이론은 당시의 플로지스톤설을 철저히 뒤엎었으며, 화학의 패러다임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실험실에서의 수많은 연소 실험 끝에, 그는 산소가 연소를 촉진하는 결정적인 원소임을 증명해 보였다.
- 물의 화합물 증명 (1782년)
물의 본질에 대한 논란은 18세기까지도 계속되었다. 많은 화학자들이 물을 기본적인 원소로 생각했지만, 라부아지에는 물이 두 원소—산소와 수소—의 결합물이라는 이론을 제시했다. 그는 실험을 통해 물이 결합된 화합물이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산소와 수소를 분리해 보았다. 라부아지에는 수소 기체를 수집하고 이를 산소와 결합시켜 폭발을 일으켰다. 그 결과, 물이 생성되는 것을 확인했다. 그는 이 실험을 통해 물이 단순한 원소가 아니라 수소와 산소의 화합물임을 명백히 증명했다. 이 발견은 물리학뿐만 아니라 화학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으며, 후에 화학자들이 물을 이해하는 방식에 큰 영향을 미쳤다.
- 원소와 화합물의 정의 정립 (1789년)
라부아지에는 화학 물질을 더 체계적으로 분류하기 위해 '원소'와 '화합물'의 정의를 명확히 했다. 당시 화학자들은 물질이 무엇인지에 대해 구체적인 기준을 정하지 못했으며, 여러 가지 혼란스러운 분류법이 존재했다. 라부아지에는 실험과 관찰을 통해 물질을 두 가지로 분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원소'를 더 이상 분해할 수 없는 물질로, '화합물'을 두 개 이상의 원소가 결합된 물질로 정의했다. 이를 바탕으로 그는 《화학원리》라는 저서를 발표했다. 이 책에서 그는 화학적 물질의 분류와 그들의 성질을 체계적으로 정리하며, 화학을 근본적으로 바꾸었다. 이 정의는 현대 화학의 기초가 되며, 화학 분류학의 발전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
- 현대 화학 명명법 체계 확립 (1780년대)
18세기 말, 화학자들 사이에서 물질의 명명법이 무질서하게 사용되고 있어 혼란이 일었다. 라부아지에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화합물의 명명법을 표준화하려 했다. 그는 화합물의 구성 원소와 그 비율에 따라 이름을 붙이는 방안을 제안했다. 예를 들어, 물은 '산소와 수소의 화합물'로 이름을 붙였고, 산화철은 '산소와 철의 결합물'로 명명했다. 라부아지에는 파리의 과학 모임에서 이 제안을 발표했고, 당시 많은 학자들이 이를 받아들였다. 이후 그의 명명법은 국제적으로 채택되었고,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화학 명명법의 기초가 되었다. 이는 화학의 정밀성과 일관성을 높이는 중요한 발전이었으며, 과학적 소통을 원활하게 했다.
- 산(Acid)의 본질 정의 (1776년)
라부아지에는 산의 본질을 정의하는 데 집중했다. 당시 산은 그 성질에 대해 명확히 정의되지 않았고, 화학자들 사이에서도 다양한 이론이 존재했다. 라부아지에는 실험을 통해 산의 핵심 성분이 산소임을 발견했다. 그는 여러 가지 산을 실험하며 공통적인 특성을 찾아내었고, 산이 산소를 포함한 물질임을 확신했다. 예를 들어, 황산과 염산을 실험하면서 이 두 물질의 주요 성분이 산소라는 것을 밝혀냈다. 이 발견은 '산소설'을 보강하는 중요한 증거가 되었으며, 이후 산에 대한 정의를 새롭게 정립하는 데 기여했다.
- 도량형 통일 및 미터법 제안 (1790년대 초)
프랑스 혁명 직후, 새로운 사회 질서가 필요했듯, 라부아지에는 과학적인 도량형 체계를 새롭게 정비할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가 제안한 미터법은 ‘지구의 자오선 길이를 기준으로 하는 미터’를 정의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라부아지에는 당시 과학자들과 협력하여 지구의 자오선 길이를 측정하고 이를 1/10,000,000로 나누어 미터를 정의했다. 이 새로운 도량형 시스템은 과학적 실험에서 일관성을 유지할 수 있게 해주었고, 결국 전 세계적으로 사용되는 미터법이 되었다. 그의 제안은 단순히 수치적인 변화가 아니라, 국가간 과학적 소통을 위한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 화학 실험의 정량적 방법론 확립 (1770년대 후반)
라부아지에는 실험을 통해 정확한 결과를 얻기 위해 기존의 주관적인 방법을 버리고, 정량적인 접근을 시도했다. 그는 물질을 정확히 측정하고, 실험을 반복하는 과정에서 화학 실험이 더 정밀하고 객관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가장 대표적인 실험은 질량 측정을 통해 화학 반응에서 질량 변화가 없음을 증명하는 실험이다. 그는 정밀한 저울을 사용하여 반응 전후의 질량을 정확하게 측정했고, 이를 통해 질량 보존의 법칙을 입증했다. 그는 실험의 반복 가능성과 정확성을 강조하며, 실험실에서의 과학적 방법론을 현대적인 기준으로 끌어올렸다.
- 탄소와 산소의 결합으로 이산화탄소 생성 규명 (1772년)
라부아지에는 탄소가 산소와 결합하여 이산화탄소를 생성한다는 사실을 실험을 통해 밝혀냈다. 당시 화학자들은 연소 현상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으며, 라부아지에는 연소가 단순히 '불꽃'이 아니라 화학 반응임을 보여주었다. 그는 주석을 연소시키면서 그 결과로 발생하는 가스를 수집하고 분석했으며, 그 가스는 공기와 전혀 다른 성질을 보였다. 이를 통해 그는 이산화탄소가 탄소와 산소의 결합으로 생성된다는 사실을 규명했다. 이 실험은 오늘날 우리가 이산화탄소의 생성 원리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기초가 되었다.
- 농업 화학 연구 (1770년대 후반)
라부아지에는 농업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토양과 비료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다. 그는 화학적 관점에서 농업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고, 농업에 화학적 접근을 도입했다. 라부아지에는 다양한 종류의 비료가 작물 성장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했고, 특히 질소, 인, 칼륨이 토양에 미치는 영향을 실험을 통해 분석했다. 이 연구는 비료의 화학적 성분을 분석하고, 이를 농업에 활용하려는 기초적인 접근을 마련했다. 그의 연구는 후에 농업 화학의 발전을 이끌었으며, 현대 농업에서 화학 비료의 사용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3. 생애
과학계의 엄친아로 그의 아버지는 당시 유명한 변호사였고 집안은 부유했으며 아버지의 영향으로 처음에는 변호사를 지망해 법과 대학에서 공부했다.물에서 수소와 산소를 발견하여 기존의 패러다임인 아리스토텔레스의 4원소설 이론을 무너뜨렸다. 그리고 질량 보존의 법칙을 발견하였다. 참고로 다른 학자들도 비슷한 시기에, 혹은 더 빠른 시기에 발견한 경우[2]가 있지만 나중에 프랑스 대혁명과 아내인 마리의 홍보 활동으로 명성이 두드러지게 되었다.
프랑스의 유명한 화학자, 부유한 부르주아로만 알려져 있으나 현대의 미터법(Metric system) 제정을 주도했던 인물이다. 샤를모리스 드 탈레랑페리고르가 1790년 프랑스 혁명 위원회에 도량형 통일을 제안하기 이전부터 이미 영국의 공학자 제임스 와트의 요청에 의해 나름대로 인치, 피트, 엘과 같은 각 지역 및 교구별 단위를 연구하고 계량하고 있었기 때문. 1788년부터 9개의 황동 실린더로 길이와 질량을 십진법 기반으로 연구하며 본인의 개인적인 연구에도 나름대로 정리한 단위들을 사용했으며 동료 화학자들에게도 동일한 단위를 사용할 것을 권유하였다.
탈레랑 페리고르의 요청을 받아들인 프랑스 정부는 다시 해당 연구를 진행할 연구기관을 파리 과학 아카데미로 정했는데, 라부아지에는 1785년부터 파리 과학 아카데미에서 이사직을 맡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 때부터 도량형 통일은 제임스 와트가 개인적으로 요청한 것이 아닌 국가지원 사업이 되어버린 것. 라부아지에와 기타 소속 연구원들은 천문학자 중 한 명은 파리 북부 됭케르크로 보내고 한명은 스페인 바르셀로나로 보내 프랑스 남부 지역에서 다시 만나도록 하여 북극에서 파리 노틀담 성당을 통과하여 적도까지 가는 길이의 천만분의 1단위를 검증하도록 지시한다. 이 단위가 바로 오늘날 1미터다. 장 들랑브르와 피에르 메생으로 이루어진 원정대는 1년 여행을 예상했으나, 강도도 만나고 골절상을 입으면서 결국 총 7년이나 걸렸다. 그러나 그들이 파리로 돌아왔을 때 라부아지에는 이미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뒤였다.
프랑스 혁명 당시에는 적극적으로 협조하여 혁명 정부로부터도 존중을 받았으며 위험에 처한 동료들을 구해내는 공헌을 하기도 했지만, 유명한 징세청부업자였기 때문에 공포 정치 시대에 체포된다. 죄목은 불법 징세. 그 외에도 혐의 중에는 담배에 해로운 물질을 첨가하여 사람들을 아프게 했다는 것도 있었는데 이건 증거가 없어 무죄 판결. 아무튼 징세 청부업자로 얻은 악명 때문에 라부아지에가 살아남을 가능성은 없다고 봐도 좋았다. 당시는 개념 박힌 당원들이 혁명 진행에 대해서 싸우던 상황이었고, 걸핏하면 시민군 사령관이 의회에 들어가서 총으로 협박하던 상황이었으니 더욱 그렇다.
결국 이런 이유 때문에 1794년 5월 8일 기요틴에서 목이 잘려 생을 마감한다. 이때 같이 일했던 세금 징수원들도 함께 처형당했다. 라부아지에는 단두대에서 "유언은 아내에게 편지로 남겼다"라는 말을 남긴 뒤 차분하게 죽음을 맞이했다고 한다. 그렇게 아내에게 보낸 편지이자 사실상의 유언장에는 '아직도 못다한 실험이 있는데...'라는 과학자로서의 아쉬움, 자신의 처형을 외면한 동료들에 대한 원망, 자신의 처형 후 홀로 남을 아내 마리 안 라부아지에를 걱정하며 당신을 사랑했고 자신이 죽어도 잘 살라고 고백하면서 모든 마음을 정리하는 내용을 남겼다. 그의 죽음에 수학자 조제프루이 라그랑주는 "그의 머리를 베어버리기에는 일순간으로 족하지만, 똑같은 머리를 다시 만들려면 100년도 더 걸릴 것이다."라고 애통해했다고 한다.
4. 징세청부업자
라부아지에는 부친의 의도로 신분 상승을 노려 세금 징수 조합에 가입해서 징세청부업자로 활동했다. 때문에 대중들의 미움을 받았고 프랑스 대혁명의 공포정치 때 처형되었다.징세청부업자 항목을 보면 알 수 있듯, 징세청부업이라는 개념은 민중 입장에서는 대재앙이나 다름없었으며 때문에 징세업자에 대한 대중의 혐오는 역사가 깊다. 성경에서 모든 이들에게 욕먹는 직업 세리가 바로 이 징세청부업자다.[3] 성경에도 언급된다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그 기원은 고대 로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징세청부업자는 국가에 소속된 징세 공무원이 아니라 민간 업자였다. 구체제 당시의 징세청부업은 일단 국왕에게 목돈을 빌려준 뒤, 일정 기간 동안 특정 지역의 세금 징수권을 받아내는 일이었다. 물론 세금을 얼마나 거두느냐는 징세업자 마음대로였기에 이들은 최대한 민중을 쥐어짰고, 일반적으로 이들이 거두는 세금은 국왕 직할지에 비해서 적어도 2배가 넘었다.
라부아지에는 이것으로 어지간한 귀족 이상의 어마어마한 소득을 올렸는데 연수입으로 최대 15만 리브르의 수익을 기록한 적이 있다. 이것이 오늘날 화폐가치로 200억원이 넘는다는 주장도 있지만, 프랑스 대혁명 당시 아시냐 지폐 파동으로 하이퍼 인플레이션이 발생해 화폐가치가 수백분의 일로 폭락했었기에 명확한 비교는 어렵다. 하지만 당대 최고액의 연금을 상속받은 라파예트 후작의 1년 연금소득이 12만 리브르였으니 귀족 못지 않은 수입을 올린 것은 분명하다.
이러한 막대한 소득은 그가 그 유명한 다이아몬드를 사서 태워버리는[4] 기행을 펼치거나, 개인 실험실을 구입하는 등의 행동을 할 수 있었던 근간이었다.[5] 그러나 그는 악랄한 징수 수법으로 얻은 막대한 소득을 아낌없이 연구에 쏟았기에 징세청부업자들 중에서는 의외로 그리 재산이 많은 편이 아니었으며, 크게 사치를 부린 것도 아니고 의외로 검소한 면모도 있었다. 하지만 일반 서민들에게는 일단 징수 수법부터가 비호감인데 값비싼 도구를 마구 써가며 실험을 하니 그것이 사치로 비춰졌다.[6]
라부아지에가 특히 많은 미움을 사게 된 것은 그가 파리를 드나드는 통행세를 징수하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7] 라부아지에는 통행세 징세활동에 질량 보존의 법칙을 응용하여, 파리 전체를 성벽으로 둘러싸고 통행세를 걷으면 확실하게 세금을 걷을 수 있다는 이론을 실천에 옮겼다. 파리라는 도시에서 (사람들이 단체로 미쳐서 화폐를 태워버리거나(...) 내부에서 새로 만들어내지 않는 이상) 돈은 혼자 소멸하거나 생성되지 않기 때문에, 파리를 출입하는 사람이 없다면 파리 내부의 돈의 양은 일정하다. 그러므로 파리로 들어오는 돈의 양은 파리 전체의 수입, 파리에서 빠져나가는 돈의 양이 파리 전체의 지출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논리는 공학과 물리학 분야에서 널리 쓰이는 연속방정식(continuity equation)이나 가우스 법칙과 상통한다. 또한 파리의 경계 전체를 감시하는 것보다는 정해진 성문만 감시하는 것이 월등히 간편하기 때문에 이론적으로만 좋은 것이 아니라 실용적이기도 하다. 현대 경제에서도 외화의 송금을 감시하고 과세하는 데 정확히 같은 원리가 적용된다. 아무튼 라부아지에는 이런 방법을 통해 통행세 탈세를 사실상 원천 봉쇄하여 막대한 돈을 긁어모을 수 있었고, 물론 동시에 그를 향한 대중들의 분노 또한 하늘 높은줄 모르고 치솟았다. 자크 샤를이 "이건 너무하지 않습니까?"라고 말할 정도였다.
이러니 프랑스 혁명 기간에 단두대에서 임금과 귀족 다음으로 징세청부업자들의 목부터 떨어지게 된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일단 혁명정부는 세금을 거두는 것 자체는 범죄가 아니고 오히려 정부의 공무를 대행하는 것이었기에 정말 필요한 액수의 세금만 거둔 것으로는 죄를 묻지 않겠다고 했으나, 징세청부업자 중에 털어서 먼지가 안 나오는 사람은 당연히 없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혁명은 갈수록 과격화되어 마침내 자코뱅당이 정권을 잡고 악명높은 공포정치를 실시하게 되었다. 혁명재판소에서는 라부아지에의 연수입 15만 리브르 중 10만 리브르, 즉 전체 수입의 2/3가 부당이득이라는 판결을 내렸다. 자코뱅당은 모든 위법 행위에 대해 사형을 집행한다는 방침을 천명했고, 공포정치가 극에 달했던 1794년 5월 라부아지에는 다른 징세청부업자들과 함께 처형당했다. 그로부터 두 달 후 로베스피에르가 처형당하며 공포정치는 막을 내렸다.
이를 두고 야사에서는 혁명 지도자인 장 폴 마라가 원래 과학계에 진출하고 싶다는 꿈이 있었으나 심혈을 기울여 쓴 논문이 라부아지에에게 까여서 개인적인 원한이 있었다는 루머가 있는데, 마라는 의학 연구자로 라부아지에와 계통이 달랐고 아무리 서슬 퍼런 국민공회 시절이라지만 혁명가의 개인적인 원한을 갚기 위해 무고한 사람을 처형하는 것은 어려웠기에 신빙성은 그다지 높지 않다. 애초에 그런 개인적 원한관계가 개입할 필요도 없는 것이, 징세업자들은 오래 전부터 프랑스 민중들의 공적이었고 라부아지에는 그 중에서도 가장 대중의 눈에 주목받기 쉬운 통행세 징수자로서 혁명에 직접적으로 불을 붙였으니 목이 잘려서 죽을 이유는 차고도 넘쳤던 셈이다.
막시밀리앙 드 로베스피에르 등의 영향을 많이 받은 재판관 중 수석 재판관인 코피나르는 "공화국은 과학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혁명은 신속한 재판을 원하고 있다!"고 말하며 결국 사형선고를 내렸다. 또는 "우리에겐 과학자가 필요하지만, 탐관오리는 필요없다!"라고도 한다. 이쪽이 더 말이 된다는 의견이 있는데, 과학자들 중에서도 프랑스 혁명을 지지하고 중용된 인물도 있었기 때문이다. 위에 서술한 몽골피에 형제만 해도 지금은 발명가로 알려졌지만 당시에는 새로운 과학을 만든 과학자로서 우대받았고 위에서 언급한 자크 사를도 혁명이 한창인 1795년에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 회원으로 추천되어 나중에는 국립공예원(Conservatoire national des arts et métiers, CNAM) 물리학 교수까지 지내는 등 혁명정부에서 상당히 우대받았다.
애초에 프랑스 혁명을 주도한 부르주아 계층은 과학에 호의적이었다. 당시 부르주아 계층 사이에 자리잡은 계몽사상과 자연과학은 상호 간에 깊은 영향을 주었고, 따라서 부르주아 계층은 자연과학과 친숙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부아지에의 행적은 도저히 눈감고 넘어가줄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5. 아내 마리 안 라부아지에
라부아지에 사후 그의 부인인 마리 안 라부아지에가 남편의 유고를 정리했다. 지금 그의 업적이 알려진 것은 마리의 공로가 컸다. 금슬이 좋아서 같이 실험도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질 정도이다. 마리는 남편보다 15살 연하로, 라부아지에가 28살, 마리가 13살(!)일 때 결혼했다. 물론 그 시절에는 이 정도 나이차 결혼은 어느 국가나 흔했다.
라부아지에는 1771년 어려움에 처한 13세 여자아이를 보살피면서 낭만적 성향을 보여주었다. 친구인 자크 폴즈의 딸인 여자아이가 어마어마한 부자에다 괴물같이 음침한 남자와 강제결혼을 해야 하는 처지였다. 폴즈는 라부아지에의 직장 상사이기도 했으므로 그의 딸 마리 안에게 도움을 줄 만큼 잘 아는 사이였다. 마리 안을 돕는 방법은 그 아이와 결혼해주는 것이었다.
그는 결혼 직후, 공동 농장에서 폴즈를 보좌하며 지루한 회계 일에 파묻혀 지내야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매우 성공적인 결혼이었다. 공동 농장은 진짜 농장 형태가 아니었다. 루이 16세의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세금을 징수하던 독점 조직이었다. 세금을 내고 차익이 생기면 그때서야 농장 주인들은 이익을 챙길 수 있었다. 공동 농장은 이익이 많이 남는 사업이었으며, 그런만큼 부패도 심했다.
데이비스 보더니스, 김민희(옮긴이), E=mc2, <생각의 나무>, 2001, pp. 50-51
그는 결혼 직후, 공동 농장에서 폴즈를 보좌하며 지루한 회계 일에 파묻혀 지내야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매우 성공적인 결혼이었다. 공동 농장은 진짜 농장 형태가 아니었다. 루이 16세의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세금을 징수하던 독점 조직이었다. 세금을 내고 차익이 생기면 그때서야 농장 주인들은 이익을 챙길 수 있었다. 공동 농장은 이익이 많이 남는 사업이었으며, 그런만큼 부패도 심했다.
데이비스 보더니스, 김민희(옮긴이), E=mc2, <생각의 나무>, 2001, pp. 50-51
그녀는 함께 세금 징수일을 하던(나중에 같이 처형된다) 자크 폴즈의 딸로 결혼 전 이름은 마리 안 피에레트 폴즈였다. 무려 50살 먹은 남자 다메르발(d'Amerval) 백작의 신부가 되게 생기자 이를 막으려던[8] 자크는 동료들 중에서 그 남자 대신 딸과 결혼해줄 상대를 찾아보았고 이 요청을 받아들인 라부아지에가 신부로 맞이했다. 일종의 정략결혼이었던 셈이지만, 둘의 금슬은 같이 생활한 이야기를 듣다보면 이상적인 부부상으로 여겨질 정도로 좋았다. 실험실에서 같이 실험하는 게 연애질이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러나 이와 별개로 자식을 얻는데는 실패했고 부부는 자식이 없었다.
마리는 남편이 처형되었을때 큰 충격을 받았고 남편의 사형을 반대하지 않은 남편의 친구, 동료들과는 평생 연을 끊었다고 한다. 뒤늦게 그의 시신을 다시 묻으면서 당시 참석한 화학자 앙투안 푸르크루아(1755–1809)는 라부아지에는 화학의 신이었다며 뒤늦게 애도를 표했지만 그 자리에 있던 아내 마리는 말 그대로 무시하고 대꾸도 안 했다. 그도 라그랑주처럼 외면했기 때문이다. 위의 라그랑주도 라부아지에가 사형판결을 받을 때 쥐죽은 듯 있었던지라 저 말을 하고도 마리에게 백안시당했다고 한다. 라그랑주로서는 조금 억울한 면도 있었을 것이, 라그랑주는 이탈리아 출생이라는 빌미로 프랑스에서 추방당할뻔한걸 라부아지에의 비호로 프랑스에 남을 수 있었다. 은인인 라부아지에를 외면한 모습으로도 보이지만 보호자였던 라부아지에까지 처형당하는 상황에서 본인의 목소리를 낼 수는 없었을 것이다. 라부아지에의 죽음을 결사반대하고 자비를 요청한 사람은 대부분 해외에 있거나 외국인, 그것도 영국이나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출신이라서 혁명 정부조차도 쉽게 잡아들이거나 죽일 수가 없는 사람들이었다. 영국 화학자 헨리 캐번디시는 라부아지에를 살려주면 거액으로 보상하겠다는 요청을 했었다. 물론 이 요청은 무시당했지만 부유한 귀족이자 화학자로 명성이 자자한 캐번디시는 이후에도 포기하지 않고 라부아지에를 영국으로 망명시키는 방안까지 기획했었다고 한다.
참고로 캐번디시는 데번셔 공작 집안 태생이었고 외할아버지는 켄트 공작으로 양가로부터 재산을 물려받았다. 그러다 보니 권력과 재산은 상당했지만, 그는 독신으로 살면서 자식도 남기지 않고 죽었다. 대신 화학자들에 대한 교류와 투자, 도움을 엄청 줬기에 라부아지에를 그가 맡았더라면 영국 과학계의 역사가 달라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캐번디시는 산소를 발견하고 지우개를 발명한 과학자 조지프 프리스틀리[9]가 프랑스 혁명을 지지하다가 왕당파에게 살해당할 위기에 처하자 그를 미국으로 망명시킨 적도 있었다. 이를 볼 때 캐번디시가 라부아지에를 구하려고 한 것은 딱히 정치적인 의도가 없이 정말 동료 과학자를 구하겠다는 순수한 의도였을 가능성이 높다.
그가 죽은 뒤 혁명정부는 모든 재산과 자료까지 압수하여 다 없애려고 했다. 하지만 몇 달 안 가서 자코뱅 정권이 무너지면서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마리도 남편처럼 죽을 위기에 처했는데 남편이 죽고 한 달도 안 돼 6월에 구속되어 교도소에 갇혔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코피나르와 로베스피에르가 처형되고 무죄 판결을 받아 두 달 만인 8월 17일에 풀려났다. 다만 혁명을 부정한 것이 아니라 지나치게 과격했던 자코뱅당만 자른 것이었기에 라부아지에의 유죄는 뒤집어지지 않아, 결국 부당이득으로 취득한 재산은 전부 몰수되었고 다만 기록과 자료만 1796년 마리에게 다시 돌려줬다. 그리고 마리는 이걸 세상에 알리는 데에 남은 평생을 바쳤다.
나중에는 공동 장례식으로 아무렇게나 묻힌 라부아지에의 유해도 다시 찾아서 제대로 장례식을 치렀는데 이때 참석한 전 세계 화학자들이 3천 명이 넘는다. 물론 이 자리에 라그랑주와 푸르크루아를 비롯한 이들도 참석했지만 앞서 말한 대로 마리는 대꾸도 하지 않고 무시했으며 그들이 남편의 연구자료 및 기록에 대한 공동 연구를 제의하자 분노어린 얼굴로 즉각 거부했다. 이때 '더 이상 남편의 자료를 욕심내지 말라'는 말을 한 것이 남편이 죽고 난 다음에 이들에게 한 유일한 말이었다고 한다.
그런 마리를 위로하던 사람이 미국 출신으로 특이하게 유럽으로 와서 독일에서 백작 작위를 받은 미국 화학, 이공학자인 벤저민 톰슨(1753–1814)이었다. 벤저민 톰슨은 간첩 혐의를 받아서 유럽으로 망명했다 한다. 수여받은 백작위의 이름이 "럼퍼드 백작"이라서 럼퍼드로 불리는 경우가 많다. 마찰로 열이 만들어지는 것을 증명한 "럼퍼드의 대포 실험"처럼 말이다. 참고로 이 사람이 남긴 유산으로 만든 학교 중에 하나가 웨스트포인트. 결국 마리는 1804년 그와 재혼하게 되었지만 톰슨과의 사이가 나빠서 결국 4년 만에 이혼한다. 톰슨은 마리에 대해 '여전히 전 남편을 잊을 수 없었기에 더 이상 같이 살 수 없었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마리는 전처럼 그대로 첫 남편 라부아지에를 세상에 알리면서 살아가다가 1836년 향년 78세로 라부아지에를 따라갔다. 이런 기록을 보면 마리는 정말이지 진심으로 라부아지에를 깊이 사랑했던 모양이다.
6. 평가
본인 뿐만 아니라 후대에 끼친 영향 등을 생각해볼 때 엄청난 과학자 중 하나. 거꾸로 산소나 화학 비슷한 이론을 발견한 다른 나라의 학자들은 묻히고 라부아지에의 이름만 남았으니, 허무한 최후를 제외한다면 시대의 덕을 봤던 과학자라는 평가도 가능하다.라부아지에의 도덕적 자질 등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자코뱅당이 몰락한 이후에도 라부아지에는 복권되지 않았으며, 정부에서 압류한 연구결과를 마리 라부아지에에게 돌려주는 데 2년이 걸렸다는 것을 고려하면 온건파 내부에서도 라부아지에에 대해 이견이 있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그에 대한 도덕적 평가는 징세청부업에 대한 시대적 인식과 혁명 과정에서의 광기, 시대적 배경과 인식 등 여러 사안을 고려해야 하는 작업이다. 국왕 입장에서 징세청부업자는 자신에게 금융지원을 해주는 고마운 사람이다. 현대식으로 말하면 징세청부업자는 국왕에게 카드 할부를 제공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카드 할부나 대출을 막아버리면 급전이나 목돈 투자가 필요할 때 실행할 수가 없으니, 민중의 증오에도 불구하고 당시 국왕에게는 징세청부업이 필요했다. 그러나 이런 평가도 라부아지에에 대한 변호가 될 수는 없고 오히려 라부아지에는 필연적으로 프랑스 왕국과 같이 죽을 수밖에 없었다는 결론만 나오는데, 라부아지에를 비롯한 징세업자들이 시스템적으로 왕제가 정한 것보다 훨씬 많은 세금을 떼어 민중이 가난에 신음하는 와중에 부당이득을 취해 사치(라부아지에는 그 사치가 과학 연구였다는 변명거리라도 있지만)를 부렸던 것은 사실이며 필연일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결국 현대의 카드 할부보다 폐단이 심한 징세청부업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구체제는 망할 수밖에 없었고, 라부아지에도 구체제와 함께 망하고 만 것이다.
그를 처형한 혁명 정부라고 그의 과학적 업적과 가치를 몰랐던 것은 아니었다. 프랑스 혁명의 주요 배경이 이 징세업자들의 난립으로 인한 프랑스의 재정 악화인 것을 생각하면 혁명 정부가 라부아지에 같은 징세업자를 처벌하지 않았다면 혁명의 본질 자체가 흐려질 여지가 컸다. 아무리 좋게 봐주더라도 혁명 정부로선 그의 도덕적 과오가 과학적 업적보다 크며 그러한 과학적 업적도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민중을 착취해서 번 돈으로 쌓은 것이라며 용서할 수 없다는 것이 혁명 정부의 입장이었다.
Why?, 앗! 시리즈 등 과학 학습 만화에에서 라부아지에의 도덕적 문제에 대한 언급은 잘 나오지 않는다. 앙투안 라부아지에(Why?) 참고. 보통 그가 징세청부업자였다는 것을 짤막하게 소개하거나, 그 직업 때문에 처형당했다는 것을 소개하는 수준에서 그친다. 더 나가면 시대의 흐름에 희생된 비운의 천재 과학자, 혹은 저런 훌륭한 과학자를 알아보지 못하고 처형한 한심한 프랑스 혁명 정부 이런 식의 논조로 쓰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10] 정보매체들이 많아진 요즘엔 솔직히 과오를 인정하고 담담하게 서술하는 경우도 많다.
7. 기타
프랑스의 과학자들은 자신들의 후원자였던 혹은 직접 과학연구를 하던 귀족들이 프랑스 혁명때 줄줄이 처형당하자 스폰서가 끊겨 후원자들을 찾아서 영국과 오스트리아 등지로 넘어가거나, 연구자금이 없어서 그냥 조용히 지내게 된다. 그 당시 과학자들은 라부아지에처럼 부유한 부업을 갖고 있지 않는 이상 과학자 후원을 취미삼는 귀족들 밑에서 일하는 게 보통이었다. 라부아지에의 제자 중 하나인 엘뢰테르 이레네 뒤퐁이 대표적으로 미국으로 망명길에 오른 후 엄청난 화학 회사를 차려 버리는데, 그게 바로 세계에서 2번째로 큰 화학 회사이자 합성고무, 나일론, 테플론 등을 개발한 듀폰 그룹이다.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 따르면 라부아지에의 처형에는 위의 초상화를 그린 자크 루이 다비드의 복수심이 개입되었다고 한다. 해당 문서로.
물을 매우 높은 온도로 가열하면 수소와 산소로 분해된다는 것을 알아냄으로써 물, 불, 흙, 공기가 세상의 모든 물질을 만드는 기본 성분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을 깨서 물이 원소가 아님을 증명하였다. 참고로 이 내용은 한국 교육과정에서 중학교 2학년 과학에 등장한다.
7.1. 루머
사람은 목이 잘려도 몇 초간 의식이 남아있고, 라부아지에가 자신이 사형당하는 순간 친구에게 부탁해 '내가 참수당한 이후에 내 의식이 얼마간 남아있는지'를 실험해달라 했다는 괴담이 유명하다. 전에 목이 잘린 뒤에도 잠시 의식이 있었던 사람이 있다는 글을 본 적이 있는데 자세한 기록이 없었다며 마지막 실험을 도와달라는 말과 함께 목이 잘리고 정신이 붙어 있는 동안 눈을 깜박일 테니 기록으로 남겨달라고 말했다고 한다.[11] 실시간 베스트 갤러리 등에 의해 라부아지에 괴담이 대중들 사이에 급격히 퍼져나갔으나, 이는 과학계의 유명한 괴담으로 사실이 아니다. 라부아지에에 관해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전기를 포함해 어떠한 역사기록에도 관련 실험에 관한 내용이 없다. 디스커버리 채널의 TV쇼에서 라부아지에 전설을 처음으로 꺼낸 의사 로버트 핑크도 이 전설을 자신의 친구한테서 들었다고 고백했으며, 그 친구도 "책에서 읽은 적이 있지만 어떤 책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밝혔기에 그저 신빙성 없는 괴담에 불과하다. 조금만 생각해 봐도 목이 잘리는 극심한 충격을 받고 어떤 행동을 하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물론 참수형 항목에 나와 있듯 실제 실험 기록이 없지는 않다.
[1] 혼인 이후의 이름은 마리 안 라부아지에.[2] 대표적인 경우는 러시아의 과학자이자 시인이었던 미하일 로모노소프(1711-1765)로, 독일 유학파 출신으로 많은 학문에 통달하여 오로라에 대한 사실을 밝혀내기도 했으나 당시 러시아는 정치/경제/문화적으로 서유럽에 비해 뒤떨어져 있었기에 그의 발견은 주목을 받지 못했다.[3] 신약성서의 루가의 복음서에 나오는 자캐오 또는 삭개오를 성 루가는 세관장이요 부자라고 설명한다. 그런데 예수에게 자캐오가 만약 사람들에게 속여서 빼앗은 게 있다면 네 배로 배상하고,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이웃들과 나누겠다고 회개를 곧 삶의 방식을 바꿈을 하여 이웃들과의 관계를 회복하자,예수께서 그의 집에 머물겠다고 하셨는데, 사람들이 옆에서 듣고는 예수께서 죄인의 집에서 머무신다고 수근거렸다고 기록한다 . 심지어 바리사이파가 기도할 때에 자기 의를 드러내고, 세리를 멸시하는 반면에, 세리는 하느님 앞에서 회개하는 기도를 드리자, 하느님이 세리의 신실한 믿음을 의롭다고 인정하셨다는 비유를 예수께서 드셨는데, 로마 가톨릭신학자인 존 도미니크 크로산은 로마 가톨릭의 교종과 성매매 여성을 중간착취하는 포주에 빗대기도 한다. 예수의 비유/한국기독교연구소[4] 그냥 다이아몬드를 태우기만 한 게 아니라, 태양광을 모으기 위해 지름 132cm짜리 거대한 렌즈를 주문하고, 그 렌즈를 지탱하기 위해 2층버스만한 구조물을 설치해서 다이아몬드를 태웠다. 그리고 다이아몬드의 연소 결과 '고정된 공기'가 나온다는 것을 확인하여 다이아몬드가 탄소의 결정체임을 입증했다.[5] 이러한 점 때문에 라부아지에는 과학적 연구 성과에는 재정적 요소(연구 지원금 등)도 분명히 영향을 끼친다는 주장의 사례로 자주 언급된다.[6] 그러나 위의 다이아몬드 실험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실험을 제대로 하려고 자연히 고가의 장비, 재료를 아낌없이 투자했으니 자연스레 다른 데 쓸 돈이 부족해서 나온 부산물에 불과했을 뿐이다. 사채업자나 다름없던 일의 특성상 폭력배들을 고용해서 강제로 징수해야 하는 경우도 빈번했기에 의외로 고정비용이 상당했으며 국왕에게 약속된 금액은 무조건 맞추어야 계약유지 및 갱신을 할 수 있었기에 이 짓도 쉬운 건 아니었다. 그러니 자연스레 쓸데없는 데 돈을 안 쓴 것뿐이지 인격이 고상해서가 절대 아닌 것이다. 또한 그 검소하다는 것도 부자 기준이지 일반인 기준에선 충분히 잘먹고 잘 산 축에 속한다. 더욱이 후대에 과학사엔 이름남긴 연구에 돈을 들인 것도 결국 자기자신의 지식욕을 채우기 위한 수단이었으니 엄밀히 따지면 사치라고 봐야 한다. 프랑스 혁명정부가 다른 징수업자와 같이 처리해 버린 게 다 이유가 있는 셈이다.[7] 통행세는 중세 이래 봉건 시스템에서 가장 중요한 세금 수입원이었다. 중세 후기에 그 유명한 상파뉴 정기시가 호황을 이루게 된 것은 상파뉴 백작이 통행세를 폐지하자 유럽의 모든 상인들이 상파뉴로 몰려들었기 때문이었다. 상파뉴 백작은 통행세를 걷지 않더라도 지역 산업의 활성화로 세금 수입이 증대될 것이라고 예측했고 그의 예측은 맞아들었다. 그러나 훗날 상파뉴를 획득한 프랑스 국황이 통행세를 다시 부과하기 시작하자마자 상파뉴 시장은 크게 쇠퇴하였다.[8] 물론 자크 폴즈는 결혼을 강력히 반대했지만 결혼을 주선한 사람이 자크 폴즈의 외삼촌이자 당시 프랑스의 재무총감인 조제프 마리 테레이였고, 테레이가 '결혼에 반대하면 세금 징수업자 자리에서 잘라버리겠다'고 엄포를 놓는 통에 더 이상 반대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이후 마리와 라부아지에가 결혼하자 군말없이 두 사람을 축하해주었다고 한다.[9] 프리스틀리보다 먼저 산소를 발견했지만 스웨덴 출생이라 잘 알려지지 못한 카를 셸레라는 사람도 있다. 자세한 내용은 산소 문서로.[10] 실제로 Why? 화학 편에서는 라부아지에가 주인공 일행에게 자신이 발견한 '질량 보존의 법칙'을 설명해 준 뒤에 곧바로 민중들이 들이닥치는 전개가 나오는데, 이때 박사가 라부아지에의 징세청부업자로서의 과거를 설명해 주고 엄지(여자아이)가 "그런 이유로 저런 훌륭한 과학자를 처형한다고요?"라고 말하며 안타까운 이미지가 나왔는데, 같은 컷에서 잘 보면 민중 하나가 "더러운 세리 녀석."이라고 그를 욕하며 끌고 가고 라부아지에도 거기에 반박하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11] 약 30초간 눈을 깜박였다고 한다. 단 이는 사후경직일 수도 있어 정확하게 얼마나 의식이 있었는지는 알기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