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9 02:53:39

육군사관학교 독립유공자 흉상 철거 논란/비판 및 논란



1. 이념적 색채 논란
1.1. 홍범도의 경우
2. 대한민국 국군 정통성 부정 논란3. 홍범도자유시 참변 관련 역사 왜곡
3.1. 홍범도 장군이 가담했거나 책임이 있다?3.2. 독립군이 무장해제 거부로 자유시 참변을 당했다?3.3. 독립군이 몰살당했다?3.4. 일본과의 밀약?3.5. 무장해제된 부대의 실체
4. 뉴라이트의 개입5. 국방부의 이중잣대
5.1. 박정희5.2. 백선엽
5.2.1. 주장 번복과 영상 비공개
5.3. 육군사관학교의 설립 목적
6. 기타 쟁점
6.1. 창군 이후 인물 관련6.2. 빨치산 활동 관련6.3. 홍범도함 함명 변경
7. 여론을 무시한 강행

1. 이념적 색채 논란

홍범도를 제외한 나머지 4인은 공산주의와 아예 무관하며, 이회영김좌진아나키스트, 이범석지청천대한민국 정부수립에도 관여한 우파 민족주의 인사이다. 홍범도의 경우에도 소련 공산당에 가입하기는 했으나 공산주의를 적극적으로 신봉하거나 추종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리고 소련에 살면서도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의 관점 및 해방 이후 대한민국의 관점 불문 한민족에게 해악을 끼친 것도 없다. 따라서 이념적인 색채를 핑계삼아 흉상 철거를 시도했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고 있다.[1]
  • 박승환은 애초에 일제강점기가 시작하기도 전인 1907년에 생을 마감한 인물이다. 당연히 시대적으로도 그렇고 실제로도 공산주의자유주의 등 근대 사상과는 접점이 없었으며, 오히려 한국사 최후의 유교적 신민(臣民)이자 무반에 가까운 일생을 보냈다. 그는 조선 말에 과거 시험을 통해 군문에 들어 대한제국 시기에 자결하기까지 평생 동안 유학적 덕목에 따라 조정과 군주에 충성하였다.
  • 지청천'대한민국반공통일연맹 최고위원'이승만 정부의 초대 무임소장관을 지냈었으며 무엇보다 대한민국 국군의 전신인 한국광복군의 총사령관을 지내고, 해방 이후 제1공화국 수립에 참여하여 대한민국의 병역법을 창시한 인물이다. 심지어 지청천은 대한민국 정부수립의 지지자였을 뿐 아니라 한국전쟁 직전과 초기 북한을 경계하며 국군의 전쟁준비태세와 방어태세를 강조했던 인물이다.
  • 대한민국 초대 국무총리국방부장관을 역임한 이범석은 생전은 물론 현재까지도 좌파는 커녕 '파시스트', '파시즘 동조자'라는 말을 들을 정도의 인물이다. 당시 일민주의의 창시자 중 한 명이면서 대한민국 국군의 기초를 다졌다고 하기에도 모자람이 없는 인물이다. 그는 1946-1950년 한국군의 숙군에도 깊게 연관되어 있으며, 좌익 계열에 대한 집단 처형과 같은 대대적인 제거 작전을 승인했다. 여담으로 1995년 문민정부 때 정부서울청사 국무회의실에 이미 이범석 장군의 흉상이 건립된 적이 있다. #

실제로 이종섭 장관 역시 홍범도를 제외한 4인에 대해서는 “그분들은 아닌데, 육사에 독립운동보다 창군 이후 군사적 분야에 대해서만 하는 게 좋겠다는 개념 설정을 하게 된 것”이라는 핑계를 댔다. 그러나 창군 이후 초대 국방부 장관을 지낸 이범석 흉상까지 제거하겠다는 것에서부터 일단 앞뒤가 안 맞는 핑계이며, 창군 이후 인물들의 흉상을 비치하는 것은 현재 육사 내에 위치한 5인 흉상을 유지하는 것과 충돌하는 사안이 전혀 아니다. 양자 모두 육사와 연관이 있는 상징적인 인물인 만큼 함께 비치할 수도 있고, 위치를 조금씩 달리하여 비치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후술하겠지만 해당 독립운동가들, 특히 (너무 오래 전의 인물인) 박승환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육군과 육사에서 오랫동안 뿌리로 삼아 왔던 인물들인지라 설득력 없는 변명에 불과하다.

1.1. 홍범도의 경우

그래서 결국 공산주의 관련 논란을 소거법으로 지워가다 보면 홍범도 장군만이 남는다. 홍범도가 소련 공산당에 가입한 것은 어쨌든 역사적인 사실이다 보니, 또 나머지 인물들은 워낙 근거가 터무니없다 보니 진영을 막론하고 비판이 대세로 굳어지는 와중에도 홍범도 장군의 사례에서는 옹호론이 쉽게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이 논란에는 크게 두 가지 쟁점이 있다.
1. 홍범도는 정말로 공산주의자인가?
2. 공산주의와 얼마나 연관이 있는 사람까지 배제해야 하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홍범도가 (공산주의에 어느 정도 동조적이었을지는 모르겠지만) 열성적인 공산주의자라고 보기는 어렵다.

홍범도 장군은 소련 공산당에 가입했다고는 하나, 자신의 기록에서 적극적으로 공산주의 사상을 설파하거나 주창한 적은 없었다.[2] 또 소련으로 넘어가서 한국에 해가 되는 일을 한 적도 없으며,[3] 주로 집단농장에서나 근무하였다.[4] 심지어 1937년에는 소련의 최고 지도자이자 독재자였던 이오시프 스탈린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까지 당했다.[5][6]

또한 홍범도 개인의 이념이 아니라 1910년대에서 1930년대 사이에 활약했던 독립투쟁단체의 수장이라는 직위에 초점을 둔다면, 소련에 유화적인 입장을 취한 것은 당대의 국제정세로 보나 투쟁 환경으로 보나 충분히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만약 홍범도가 본격적인 활동을 벌인 시기가 1930년대 중반이었다거나, 스탈린소련을 지지하고 소련 공산당에 입당해 스탈린주의를 추종하며 코민테른의 마리오네트가 되어 움직였다면 비판받아 마땅하다. 스탈린주의는 그 이념적 잔혹성과 극단성에서 일본의 군국주의를 상회했으며, 스탈린 본인도 현대 사회주의 진영에서 '국가자본주의'라고 비난할 만큼 억압받는 민족들의 해방보다는 소련의 국가주의적인 영광에 심취했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1930년대 중반 중일전쟁이 시작되면서 공산주의 세력 대신 중화민국이라는 훨씬 합리적인 대안[7]이 생겨났으며, 서방 영미권도 반일적인 입장으로 돌아서서 한국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기 시작했다. 중국호로군과 함께 손 잡은 지청천, 중국혁명군과 손잡은 양세봉이 대표적인 경우다.[8] 따라서 이 시점에서 굳이 저런 대안들을 내버려두고 스탈린의 소련이나 마오의 중공 등 공산주의를 파트너로 골랐다면 그건 그 사람이 빼도박도 못하는 공산주의자라는 소리이며, 기실 백범일지에 적힌 "일본에서 독립해서 소련에 나라를 갖다 바치려는 사람들"은 바로 이런 부류의 인간들을 비난하는 것이기도 하다.[9]

그러나 홍범도가 적극적으로 활동했던 1910년대~1920년대 한반도를 식민지배하던 일본 제국영일동맹으로 대영제국의 비호를 받고 있었으며, 가쓰라-태프트 밀약 이후 미국과도 밀월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청나라청일전쟁의 패배 이후 급격히 해체되었고, 신해혁명 이후 중국의 정세는 불안정했으며, 한때 영일동맹 견제 수준에서나마 조선에 관심을 보였던 독일 제국러시아 제국은 점점 상태가 나빠진 끝에 결국 제1차 세계대전의 패배로 해체되었다. 그리고 일제는 그 세계대전의 승전으로 국제연맹상임이사국 지위를 획득했고, 자연히 어느 나라도 이런 강대국과 굳이 척을 지면서 조선독립을 도울 마음이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한반도뿐 아니라 전 세계 모든 식민지의 해방을 이념적으로 밀어붙였던 소련과 공산 진영은 당연히 독립운동가들에게 매력적인 선택일 수밖에 없었다. 물론 소련도 겉으로는 식민지 해방을 외치면서 폴란드-소비에트 전쟁에서 우크라이나와 벨로루시의 독립운동 세력을 잔혹하게 진압하고 핀란드 내전에 개입하여 괴뢰국을 세우려 하는 등 내로남불이 심했던 것은 사실이고, 1차대전 종전 시점인 1920년대가 되면 미합중국도 열강의 지위를 획득하고 본격적으로 세계의 탈식민화를 요구하기 시작했으니, 이를 두고 소련이나 공산주의유일한 혹은 무조건적인 해방자로 간주할 수는 없다. 그러나 소련은 동유럽에서야 자신이 제국주의 침략자였을지라도 동아시아에서는 지정학적인 이유에서 일본 제국을 위협적인 경쟁자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제국의 국력을 약화시킬 수 있는 조선독립에 상당한 관심을 보였다. 이런 측면에서는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있어 일본에 대한 경계심(과 관심)이 비교적 덜했던 미국에 비해서도, 소련이 적어도 (홍범도가 주로 활동했던) 20년대까지는 확실히 더 적극적이었다. 그리고 당연하지만 소련을 투쟁의 무대로 삼고자 했다면 소련 공산당 가입은 사실상 선택지가 없는 문제였다.

범위를 좁혀서 국제 정세가 아닌 지역 정세를 살펴봐도 마찬가지다. 일제강점기 일제가 한반도를 장악한 이후 독립운동가들은 투쟁의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만주로 이동했다. 당시 만주는 일본 제국, 러시아 제국-소련, 중국계 만주 군벌들, 그리고 몽골이나 만주계 독립세력 등의 각축장이었다. 그런데 1910년대북양군벌이든 그 이후의 혼란상을 거쳐 1920년대 말 이후로 정권을 잡은 장쭤린봉천군벌이든, 중국령 만주의 지배자들은 세력에 따라 다소의 차이는 있었지만 대체로 인접한 강대국인 일본 제국을 건드리지 않기 위해 친일적인 입장을 취하곤 했다.[10] 러시아 혁명 이후 패망해서 쫓겨온 러시아 백군의 잔존세력들[11] 역시 소련 적군의 위협에 맞서 자신들을 지켜줄 반공진영의 최대 물주 일본 제국을 무시할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내몽골이나 만주 역시 푸이만주국의 사례에서 알 수 있다시피 거대한 중국 본토 통일국가[12]의 압력에 맞서 자주와 독립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일본 제국에게 손을 벌렸다.

때문에 해당 지역에서 활동하던 한인 독립운동가들은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신세를 면할 수 없었으며, 여기에서 유일하게 자유로운 세력은 바로 이들 모두와 적대하는 소련이었다. 게다가 만주사변을 전후해 일본이 본격적으로 만주로 진출하기 시작하면서, 독립운동가들은 만주에서조차 쫓겨나 김구임시정부처럼 중화민국 정부를 따라 중국 내륙으로 들어가든, 소련의 손을 빌리든, 아니면 아예 미국이나 유럽 쪽에서 외교적인 해결책을 모색하든 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한국 독립세력과 정확히 마찬가지로 똑같이 저 네 세력(일본제국, 만주 독립군벌, 러시아 제국, 유목민족)을 적대했던 장제스중화민국이 완전히 다른 이념적 지향에도 불구하고 1949년 국부천대 직전까지 소련과의 협력관계를 이어갔던 근본적인 이유이며, 또한 그 중화민국이 한국 독립세력의 최대 후원자였던 지정학적 원인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를 두고 오늘날 그 누구도 장제스가 소련과 협력했다고, 혹은 심지어 장징궈가 소련에 유학했다고 공산주의자라며 비난하지 않는다.

또한 1920년대를 활동했던 인물로서 현실적인 한계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물론 제2차 세계대전 도중에도 서방 진영과 소련은 알력 다툼이 심했고, 조지 오웰처럼 스페인 내전 등에서 공산주의 - 정확히는 현실사회주의 - 의 전체주의적 속성을 깨닫고 비판하는 사람들은 비판했지만, 적어도 이후의 냉전 시기처럼 대놓고 적대하는 상황은 아니었다. 당대 지식인들이 바보도 아니고 모두 친공산주의적이었다는 건 명백한 견강부회이나, 적어도 (마르크스주의스탈린주의적 독재는 부정할지라도) 사회주의적 대의에 대해서는 지금보다도 우호적인 시선이 많았다. 이러한 경향성은 소련이 독소 불가침조약을 맺고 주변국들을 침략하면서 체제의 범죄가 점점 수면 위로 드러나던 1940년대 기준으로 더 과거일수록 더 뚜렷하게 드러나는데, 예컨대 러시아 혁명 시기의 혁명가들은 나름대로 이상론적인 대의를 품고 있었고, 서구의 지식인들은 이를 낭만적으로 바라보았으며, 이러한 기조는 1937년 스페인 내전국제여단까지도 이어졌다.

1920년대를 살았던, 그것도 일생을 독립운동에 바치느라 제대로 교육받지도 못한 홍범도에게 (당대 서구 사회의 지식인들조차 제대로 알지 못했던) 소련의 범죄나 (1980년대 미국의 학자들조차 쉽게 예상하지 못했던) 공산주의의 궁극적 패배를 예상했어야 한다고 요구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요구이다. 적어도 그가 북쪽의 누구마냥 그 이념을 추종하다가 무언가 사고를 친 것도 아닌 바엔 더더욱 그렇다.

게다가 홍범도8.15 광복남북분단 이후 북한 김일성 정권에 부역했던 인물도 아니고, 광복을 보지 못한 채 1943년에 사망한 인물이다. 공산당 가입 이력 하나만으로 폄훼하기에는, 1945년 수립된 김일성북한 정권에 직접 가담 내지 동조할 일이 아예 없었다.[13] 홍범도 입장에서는 나라를 되찾겠다고 평생을 가시밭길만 걷다가 이역만리 타국에서 눈을 감을 수밖에 없는 것도 한인데, 후손들이 사상검증을 하겠다고 모욕을 일삼으니, 죽어서도 편치 못한 셈이다.

현대 대한민국 국군은 공산주의에서 갈라져나온 주체사상 국가인 북한을 주적으로 두고 있고,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규정하는 대한민국 제6공화국헌법은 소위 '공산전체주의'를 배격한다. 이것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세부적으로 파고들어가면, 대한민국이 적대하는 대상은 '공산주의'가 아닌 '북한'이고, 그것은 상대(북한)가 대한민국 헌법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협하는 국가이기 때문이며, 단지 그 국가가 하필 극단적인 공산주의 체제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공산주의도 같이 적대할 뿐이다. 이는 북한이 아니라 가상적국 관계인 중국을 상대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물론 우리도 자유민주주의를 잘 지켜나간다는 전제 하에서 주변국 중 자유와 민주, 인권 등이 잘 정착된 국가들과는 대체로 지킬 것이 많은데다 충돌을 피하고 최대한 대화와 외교로 풀어가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어지간해선 굳이 싸울 일이 없기야 하겠지만, 논리학적으로 "자유민주주의를 추구하는 국가가 적이 아니"라는 것이 "공산주의를 추구하는 모든 국가는 적"이라는 결론을 전제하지는 않는다.

당장 우리 주변국 가운데 러시아는 공산주의의 정반대에 위치한 극우 독재국가에 가깝지만 팽창주의적인 행보를 보이고 있어 국군이 예의주시하는 대상이며, 반대로 베트남은 공산주의, 심지어 공산당 일당독재가 유지된다는 점에선 "공산전체주의" 국가이지만서도 우리나라나 주변국에 특별한 위협을 끼치지 않기 때문에 우리의 적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홍범도한국전쟁은커녕 대한민국 헌법이 만들어지기도 이전에 죽은 사람이며, 만약 그가 조금 더 늦게 태어나 더 오래 살았더라면 항일전쟁 시기엔 팔로군에 부역했지만 독립 이후 대한민국에 참여하며 지리산의 종북 빨치산들을 토벌하기까지 했던 차일혁 총경 같은 삶을 살았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홍범도의 속내를 알 수 없는 우리들이 단순히 공산당 가입 이력만으로 그를 공산주의자라 섣불리 낙인찍을 수 없는 이유다.

한편 2023년 12월에는 국가보훈부가 2024년도 이달의 독립운동가 38명을 공개했는데, 그중 1월의 독립운동가로 이승만 전 대통령이 등재됐다. 이승만의 독립운동 경력 자체에 대한 이견은 많지 않으나 사사오입 개헌과 3.15 부정선거 등 공과가 뚜렷한 이승만을 두고 정부가 업적만 강조하는 것에 대한 지적이 나오고 있다. 이승만기념관 건립을 추진 중인 정부가 이승만을 ‘건국 대통령’으로 추앙하면서 1948년을 건국 시점으로 못 박으려는 것 아니냐는 의혹도 나오고 있다. 또 소련 공산당 가입 이력을 문제 삼아 육군사관학교 교정에서 흉상을 철거하는 방안을 추진하는 홍범도의 사례와 대비된다는 지적도 나온다. #

2. 대한민국 국군 정통성 부정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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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범도 장군에 대한 역대 대한민국 정부의 태도[14] #
◇평화방송: 어저께 입장문 보니까 맨 마지막 줄에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는 정예 강군으로 육성하도록 최선을 다해 지원할 것입니다'라고 나왔는데 이 자유민주주의가 어디에서 근거한 것입니까?

◆국방부 대변인: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평화방송: 이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겠다는 이유를 대셨는데 이 자유민주주의 우리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헌법에서 찾으신 것입니까?

◆국방부 대변인: 네, 그렇겠죠.

◇평화방송: 우리 헌법의 어디에도 자유민주주의 없습니다.[15]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이지... 자유민주적 기본질서 어느 헌법에서부터 들어오신지 아십니까?

◆국방부 대변인: 잘 모르겠...

◇평화방송: 유신헌법입니다, 유신헌법 입헌민주주의 헌법이라는 평가를 받지 못하는... 그런데 이 자유민주주의 이 내용에 대해서 우리가 헌법재판소가 그 내용에 대해서 어떻게 판단한지 아십니까?

◆국방부 대변인: 잘 모르겠습니다.

◇평화방송: 이 안에 이념을 배제하지 않습니다, 우리 민주주의는 북한식 사회주의만 배제하는데[16] 북한식 사회주의가 오기도 전에 사망하신 홍범도 장군이 북한식 사회주의를 했다고 추정하시는 것입니까?

◆국방부 대변인: 제가 추가로 드릴 답변 없습니다.
대한민국 헌법 전문(前文)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 (후략)
1987년 10월 29일
애초에 대한민국 헌법에 왜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명시가 되어 있는지 한번 생각해보자.

육군의 뿌리를 찾는 데 있어 "창군 이후 군사적 분야에 대해서만 하는 게 좋겠다는 개념 설정을 하게 된 것", 즉 창군 이전의 역사는 배제하겠다는 주장도 매우 설득력이 떨어진다. 대한민국 국군한국광복군을 계승했다는 것은 대한민국 역사상 한 번도 부정된 적이 없는 공식 입장이다. 게다가 육군사관학교이회영이 건립한 신흥무관학교의 후신임을 주장했던 전례가 있으며#, 국방부 홈페이지는 홍범도 장군과 김좌진 장군의 봉오동 & 청산리 대첩을 1920년대 국군의 역사로 기록한 바 있다. 게다가 군은 홍범도 장군의 유해 봉환 당시 전투기와 수송기를 보내 유해를 호위하고 "최고의 예우를 다하겠다"고 하고선 불과 2년 만에 이를 뒤집은 것이다. #

심지어 배제된 인물들의 면면을 보면 국방부가 자신들이 세운 그 원칙을 엄밀하게 지켰다고 보기도 어렵다. 예컨대 이범석이승만 정부의 초대 국방부장관이었으며, 자연히 대한민국 국군의 건군기에도 막대한 공을 세운 인물이다. 지청천 역시 한국광복군의 총사령관이었을 뿐 아니라 제헌국회부터 사망 전까지 두 차례 국회의원으로 의정활동에 참여한 정치인이기도 하며, 소련군정과 북한의 적화 야욕이 가시화되는 상황에서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돕고 대한민국 국군의 전쟁준비태세를 강조하는 등 소위 "창군 이후의 역사" 바로 그 기간의 군사(軍史)에 큰 족적을 남겼다. 나머지 세 사람도 해방 이후에 무슨 북한에 동조했다거나 하는 죄과가 있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광복을 보지 못하고 사망했을 뿐이다.

나아가 이런 기준에서는 지난 2015년 육군사관학교에 세운 안중근 의사 동상도 철거 대상에 해당한다.[17] 물론 안중근 의사는 앞서 언급한 다섯 명과는 활동 시대도 다르고, 공산주의 등 이념이 본격적으로 세를 떨치기 전에 세상을 떠나 관련 시비에 휘말릴 이유도 없으며, 당장 대한민국 국군의 표어인 '위국헌신 군인본분'을 남긴 당사자일 만큼 국군 내에서 영향력도 큰 인물이기는 하다. 그러나 어찌 되었건 제시된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누구는 남기고 누구는 철거한다는 것은, 그 기준이 그다지 논리적이지도 일관적이지도 않으며 오히려 정치논리가 기저에 깔려 있을 수도 있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꼴이나 다름없다. "해군사관학교는 창군 이전 인물인 충무공 이순신 동상을 철거해야 하느냐"는 비아냥은 덤이다.

더욱이 육군사관학교는 이범석 장군이 국방부장관이 되어 독립군 출신 장교들을 학교장으로 임명하면서 창군 초기 일본군과 만주군이 많아 미약했던 국군의 정통성과 정체성을 확립할 수 있었다. 9대 교장 안춘생이 대표적으로, 안춘생 장군은 당시 계급이 교장에 맞지 않는 준장이었지만, 이승만 대통령이 안중근 의사의 조카로서 독립 운동에 기여한 사람이 육사 교장을 하여 안중근 같은 후대를 길러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던 것이다. 창군 원로인 이들은 임시정부의 광복군을 계승한 대한민국 국군조선인민군보다 정통성 면에서 더 우위에 있다는 것을 보증하는 중요한 근거이며 육군사관학교가 더욱 기려야 할 선배들이다.

사실 육군사관학교는 이미 홍범도, 김좌진, 지청천에게 명예졸업장을 수여한 바가 있다. 학교가 학교를 빛낸 선배들과 설립자의 동상을 지키기는커녕 없애면서 정체성과 설립취지를 운운하는 코미디가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같은 사실이 알려지자 홍범도에 대한 명예졸업장도 회수할 것이냐는 조롱 섞인 문의가 빗발쳤고, 이에 육군은 명예졸업장 회수는 검토하지 않다는 입장을 밝히면서 갈팡질팡하고 있다. #

더불어민주당 김병주 의원도 국방부장관과의 질의에서 '홍범도 장군조차도 공산당에 물론 가입했지만 1943년에 서거를 했고 박정희 대통령 당시 1962년도에 이미 건국훈장을 줬었다'고 지적했다. # 또 홍범도는 전술된 것처럼 대한민국 건국훈장을 수여받은 독립유공자이자, 대한민국 해군 잠수함#에 이름이 수록된 국군의 상징적 인물이기도 하다.[18] 심지어 현재 국방부합동참모본부 공동 청사에도 홍범도 장군 흉상이 설치되어 있을 정도다. # #[19]

더욱이 홍범도의 유해 봉환 과정에는 카자흐스탄 정부의 협력과 섭섭해하는 현지 고려인 사회에 대한 설득이 필요했는데, 정작 이랬던 한국 정부와 군이 정권이 바뀌자마자 공산주의자 운운하는 태도에 고려인 사회는 실망감을 표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1, #2 # 즉 홍범도의 유해 봉환과 국가적 예우야말로 남북 체제경쟁의 완전한 승리를 알리는 상징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는데, 체제경쟁 강화를 외치는 진영에서 오히려 이런 성과를 스스로 걷어차버리는 웃지 못할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 외에도 박민식 국가보훈부장관은 홍범도는 여운형과 함께 건국훈장을 중복 서훈을 받았단 비방을 했으나, 서로 다른 공적[20]으로 건국훈장을 받았단 것이 밝혀졌으며, 여기에 유관순의 중복 서훈은 걸고 넘어지지 않았던 점을 지적받았다. #

급기야 국회에서 신원식 국민의힘 의원과 기자회견을 했던 김일권 국가원로회의 사무총장과 김영교 제대군인자유노동조합 공동대표라는 사람들의 입에서 "공산주의자 홍범도는 독립기념관에도 가면 안 되고, "아주 파묘해서 북으로 보내야 한다"막말까지 나오기에 이르고 말았다.[21]

사실, 김원봉처럼 해방 이후의 행적 때문에 논란이 많은 인물들, 혹은 동시기에 논란이 되었던 정율성처럼 아예 한국전쟁기 적성국에 부역했던 매국노들과는 달리, 저 다섯 명은 그 시대 한반도 부근에서 직접적인 투쟁을 전개했던 인물들[22] 치고는 오히려 드물게도 북한조선인민군과 전혀 접점이 없는 인물들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지청천이범석은 공산주의와 북한을 혐오했던 우파 민족주의자였고, 홍범도소련 중앙아시아에 강제 이주당해 살기는 했으나 오히려 그 덕분에 김일성 세력이나 북한군의 뿌리가 된 중공 팔로군과의 접점은 전혀 없었다. 김좌진은 아예 고려공산당 출신 공산주의자에게 암살당했고, 이회영 선생은 활동시기가 남북한의 대립이나 공산주의와 연관짓기에는 너무 이전이다.[23]

쉽게 말해, 저 자리에 서 있는 독립유공자들은 단순히 일본의 제국주의에만 맞서 싸운 것이 아니라 실제로 대한민국 국군과 직·간접적으로 얽혀 있는 인물들로, 따지고 보면 독립운동가들 가운데서도 국군의 뿌리를 상징하는 저 자리에 설 자격이 충분하기로는 손에 꼽힐 사람들이다.

3. 홍범도자유시 참변 관련 역사 왜곡

파일:홍범도 국가보훈처.jpg
2021년 8월 16일, 홍범도의 유해 귀환을 기념하여 국가보훈처(현 국가보훈부) 공식 블로그에서 올린 카드뉴스. 홍범도의 정신을 기억하겠다던 정부는 고작 2년 뒤 정권바뀌자 그에 대한 평가를 뒤집었다.
국방부, 구체적 근거 없이 "홍범도 자유시 참변 연관" 주장 | 2023.8.29. JTBC 뉴스룸
◇세계일보: (흉상) 이전 검토를 하게 되다면 거기에는 역사학계, 특히 독립운동사를 연구한 외부 전문가들이나 혹은 보훈부와 함께 논의가 이루어질 예정인가요?

◆국방부 대변인: 방향이 결정돼서 (이전) 장소가 보훈부와 연계된 부분이라면 보훈부와 협의할 사항이 생길 텐데 그렇지 않다면 그건 필요 없는 부분이 될 것이고... 군 내부적으로 판단해서 어떤 결론이 내려질 수 있으면 굳이 외부의 학계나 또는 이런 합의는 필요 없을 수도 있을 것 같고... 군 내에도 역사나 또 전사[24]를 연구하시는 교수, 학자, 또 연구기관도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

◇서울신문: 근데 국방부에서 어제 저녁에 추가로 배포하신 입장문 같은 경우에도 자유시 참변에 홍범도 장군이 개입했다거나 마치 우리 독립군을 소탕한 주범처럼 읽혀지도록 되어 있던데 이러한 것은 역사학계에서도 매우 논쟁이 많은 분야고 권위 있는 학자들의 공론화 과정이 없으면 권위를 매우 잃을 수도 있다고 판단되어지는데 그런 절차를 아무래도 밟아야 되는 것 아닌지.

◆국방부 대변인: 지금까지 알려진 군 내외 자료 또 확인된 내용들을 토대로 입장을 정리해서 (어제) 알려드린 것입니다.

◇JTBC: 어제 3페이지짜리 입장문... 이게 주장을 계속 열거해놓은 식인데 문자 그대로 그냥 읽어드릴게요. '러시아 공산당 극동공화국 군대가 자유시에 있던 독립군을 몰살시켰던 자유시 참변과 연관되어 있다는 의혹이 있음' 이렇게 명시적으로 써놨던데 공식 자료에는 자유시 참변에 가담했다는 기록 자체가 없다는 게 공식적인 학계의 입장이잖아요. 이 부분 혹시 확인했는지와 그리고 이 의혹, 이 의혹이라는 게 사실... 이게 국방부 공식 입장으로 자료도 없는데 의혹이라고 단정적으로 낼 만한 내용인지 판단 근거가 궁금합니다.

◆국방부 대변인: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알려진 군 애외 자료, 또 확인된 사실을 가지고 말씀드렸던 것이고요. 자유시 참변 연관성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학계에서 의견이 있는 걸로 알고 있고 또 여러 가지 문서에 따르면 소련 정부로부터 연금을 받기 위해서든지 그렇게 해서 작성된 이력서에 관련 내용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JTBC: 지금 말씀하신 거는 소련에 냈던 문서에 이런 말이 있다는 건가요?

◆국방부 대변인: 그렇죠

◇JTBC: 자유시 참변에 참가를 했던 홍범도 장군이 직접 기술했다, 이런...

◆국방부 대변인: 네, 이력서 내용이 있다는 것입니다.

◇JTBC: 아 그러면 홍범도 장군이 자유시 참변에 자신이 가담했다, 라는 내용을 소련에 말을 했다? 이 자료를 확보했다, 이 말씀이신 거죠?

◆국방부 대변인: 네, 그런 문서들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홍범도함 질문)
◇SBS: ...그리고 대변인, 아까 JTBC 기자 질문에 홍범도 장군이 자유시 참변에 직접 참여했다, 라고 말씀을 하신 거예요

◆국방부 대변인: 그러니까 연관성 등 의혹에 대한 역사적 자료 이런 것도 있다, 라고 말씀드린...

◇SBS: 다시 한번 클립을 돌려보면 아까 김 기자가 분명히 재차 질문한 게 (홍범도 장군이) 자유시 참변에 직접 가담을 했느냐, 라고 물어봤어요. (대변인 말씀은) 홍범도 장군이 자유시 참변에서 우리 독립군을 살해하는 데 가담했다는 내용이 되거든요

◆국방부 대변인: 그런 뜻으로 말씀드린 건 아닙니다 만약에 그렇게 말씀드렸다면 제가 잘못 드린 것 같고...

◇SBS: 그렇게 얘기해서 깜짝 놀랐어요 이게 그러니까 자유시 참변에 직접 가담한 게 아니라 이후에 사후 정리 과정에 홍범도 장군이 개입했을 수 있다는 의혹이잖아요

◆국방부 대변인: 네 맞습니다.

◇SBS: 자유시 참변에 이분은 절대 안 들어갔어요.

◆국방부 대변인: 그건 제가 그렇게 말씀드렸다면 잘못된...

◇SBS: 그런데 그렇게 읽히게 지금 그걸 써놨어요, 이분들이 이거 누가 만든 자료죠?

◆국방부 대변인: 어떤 자료...?

◇SBS: 이 자료, 국방부 입장문 이거

◆국방부 대변인: 국방부 입장 관련 부서와 저희가 논의해서 만든 자료입니다

◇SBS: 그런데 그렇게 읽히게 지금 그걸 써놨어요, 이분들이 이거 누가 만든 자료죠? 우리 근현대사 아니면 독립운동사 전공한 분이 있었어요, 거기에?

◆국방부 대변인: 아... 그 부분은 제가 확인을 해봤야 되겠습니다

◇SBS: 이거 되게 중요한 부분이에요. 그러니까 역사 논쟁에 뛰어든다는 거예요, 이제 국방부가...

◆국방부 대변인: 예, 물론 이제 여기 입장문에 여러 가지 역사적인 사실들이 나열돼 있어서 여러 가지 논란이나 의문이 있으실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아까 제가 말씀드렸듯이 이 입장은 여러 가지 배경에 대한 질문이 있으셔서 우리가 검토하게 된 이유 등을 설명드린 것입니다.

◇SBS: 자 보세요, '독립운동 업적은 업적대로 평가하되'라고 써놓고 독립운동 업적은 한 줄도 안 썼어요. 다음에, 홍범도 장군이 활약했던 1920년대는 레닌의 공산당이고 북한군이 사주해서 6.25 남침을 한 공산당은 그건 스탈린의 공산당이에요. 레닌의 공산당하고 스탈린의 공산당은 아주 다릅니다. 문재인 정부와 윤석열 정부의 차이보다는 더 커요. 근데 그것을 같은 공산당이라고 봐버리면 어떡하냐? 이것 되게 논쟁적인 부분인데 이걸 단정해서 레닌의 공산당과 스탈린의 공산당을 같은 걸로 봐버리면 이게 문제 있죠.[25] 국방부에서 공문서로 이렇게 내서 기자한테 줘버린다는 것은 이건 문제 있죠. 역사 논쟁에 끼어드는 건 좋은데 역사 논쟁 이렇게 하는 것 아니에요. 치열하게 하는 거고 정확하게 하는 거거든요. 그리고 빨치산에 가입된 상태에서 봉오동하고 청산리에 참가했으니 문제가 있다? 1920년대, 1919년대 빨치산하고 김일성하고 스탈린하고 아무 관계 없습니다. 김일성 그때 몇 살이었어요? 김일성이 1912년 태어난 사람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지금 1919년부터 1922년까지[26] 빨치산 자격으로 전투에 참가했다고 이게 문제가 된다? 왜 문제가 됩니까?

◆국방부 대변인: 그러니까 저희가 입장을 드린 거에 여러 가지 의견을 가지실 수는 있는데 저희가 저희 입장을 정리해서 드린 것으로 이해해주시면 좋겠습니다.

◇SBS: 이거 공문서라니까요? 국민을 향해서 만들어낸 공문서예요.

◆국방부 대변인: 저희가 입장을 드린 겁니다.

◇SBS: 이렇게 어설프게 역사적 식견도 없이...
◇기자: ... 어저께 입장문은 이게 참 국방부 출입기자로서... '우리 국방부 인문학적 소양이나 수준이 이 정도 밖에 안 되나?'라는, 무척 좀 안타깝더라고요. 아까 대변인께서 말씀 바꾸셨지만 자유시 참변 같은 경우는 그런데 여기 보내신 것 보면 '의혹 있다' 의혹 있다고만 두 군데 나오고 '평가인' 이렇게 하고 다 인용문식으로 하고 있는데 이게 어떻게 하고 다 인용문식으로 하고 있는데 이게 어떻게 국방부에서, 정부기관에서 이걸 갖다 공식적인 입장이라고 낼 수 있는지 참 안타깝더라고요. 전반적으로 재검토가 필요하고, 나중에 상당히 문제가 될 만한 입장문인 것 같습니다. 빨치산 같은 경우도 partisan(파르티잔)에서 넘어온 말이잖아요. 이거 비정규군이에요. 이 당시에 우리나라 군대도 없고 국가도 없는데 이 당시 독립운동한 사람들 다 빨치산이잖아요 다 비정규군인데 이걸 갖다가 6.25 전쟁, 김일성 태어나기 전에 그때 활동한 걸 빨치산이라고 하면 이게 얼마나 참 부끄럽고 천박합니까? 이런 거, 이것 좀 다시 한번 검토를 해보셨으면 좋겠어요. '홍범도 장군이 소련 공산당 군정의회를 중심으로 하는 독립군 통합을 지지했고' 이 문장 쓰셨잖아요. 그 위에는 '공산주의 이력이 문제된다' 이렇게 쓰셨고 홍범도 장군이 소련 공산당 군정의회를 중심으로 하는 독립군 통합을 지지했다, 이게 잘못됐다는 뜻이죠?

◆국방부 대변인: 그 내용, 그 문구 그대로 이해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JTBC: 이 당시 대한의용군, 고려군, 코민테른과 러시아 공산당 지지받았던 것 아시죠? 알고 쓰신 것이죠, 이것?

◆국방부 대변인: 무슨 질문이신지 아는데요... 하여튼 저희가 필요한 여러 가지 확인된 사실 그것을 토대로 입장문을 정리해서 드린 것이니까... 지금 역사적인 사실관계에 대한 입증 또는 학문적인 어떤 논의, 검토 이런 것에서 드린 것은 아니니까 그렇게 이해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JTBC: 제가 브리핑 때 의견 말한 적 한 번도 없는데 이것 한 번만 말씀드릴게요 이 문장을 보면... '소련 공산당 군정의회를 중심으로 한 독립군 통합을 지지했고' 이것만 따로 떼어놓고 보면 공산당, 공산주의를 지지하는 독립군이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독립군이 억지로 통합했다, 이렇게 읽혀요. 이 당시에... 이게 맥락이... 확인을 하고 쓰신 거예요, 도대체 이게? 그런데 자유시 참변에 홍범도 장군이 참여했다고 하시고...

◆국방부 대변인: 그것은 제가 질문을 잘못 이해해서 드린 말씀이니까 그 답변은 잘못된 답변으로 이해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JTBC: 제가 그런데 그것을 두 번을 연달아 드렸잖아요, 그 질문을

◆국방부 대변인: 제가 질문을 정확히 답변 듣지 못했습니다.

◇JTBC: 김태훈 선배가 지적하니까 바꾸신 것이잖아요

◆국방부 대변인: 제가 지금 그 질문을 답변,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던 부분은 양해 말씀드립니다.

◇JTBC: 그런데 제가 어렵게 질문은 드린 게 아니잖아요 한 번 더 풀어서 설명드렸고 맞다고 말씀하셨잖아요. 그런데 갑자기 바꾸면 어떻게 해요, 이 자리에서.

◆국방부 대변인: 제가 이해를 잘못했습니다, 그 부분은

◇SBS: 우리 지금 8월 한 달 내내 힘들잖아요 국방부도 힘들고 기자도 힘들고 그런데 해병대 건도 보면 사단장 빼기 위해서 8명 다 재검토하는 그런 모양이고 지금은 홍범도 빼기 위해서 또 이런저런 어른들 흉상 다 같이 올려놓고 하는 이런 모양이... 이게 동일인의 수법이거든요. 이런 수법을 쓰니까, 이런 방식으로 하니까 지금 논란이 계속 벌어지는 것 같은데 정공법으로 하면 어떨까 싶어요. 원하는 것 있으면 그것 그냥 밀어 붙이세요, 그냥.

◆국방부 대변인: 무슨 말씀이신지 정확히 잘 모르겠는데 알겠습니다, 하여튼.
8월 28일 오후, 국방부는 기자단에 보낸 입장문에서 보수계에서 홍범도에게 덮어씌우던 자유시 참변의 누명을 그대로 반복하는 오류를 범했다. # 국방부의 주장은 실제 사실관계나 사건의 맥락에 배치되는 것이 매우 많다. 또한 이미 2021년에 논파된 것들이기도 하다. # 국민의힘 대변인 측 역시 홍범도 장군이 자유시 참변에 책임이 있다는 논조의 발언[27]을 했으나. # 학계에선 전혀 확인되지 않은 얘기다. #
특히 최근 일부 언론이나 인사들이 제기한 홍범도의 ‘자유시사변(1921년 6월 28일)’ 가담설이나 ‘자유시 학살’ 개입설, ‘한국독립군 대학살’, ‘독립군 학살 공모’ 등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장세윤, "‘독립전쟁의 영웅’ 홍범도의 귀환, 그 시사점과 과제", 역사와 현실 121, 2021, 15쪽. #
소위 고려혁명군이죠, 그쪽에서 진압할 때에 한인 군대들은, 병사들은 동원되지 않았어요. (무장해제가) 6월 28일에 이제 결정이 되어 가지고 (자유시 참변이) 진행이 됐을 때는 홍범도 장군이 전혀 관여한 바가 없다는 얘기죠.
반병률 한국외국어대학교 사학과 명예교수 #

3.1. 홍범도 장군이 가담했거나 책임이 있다?

자유시 참변의 원인
독립군들은 청산리전쟁 이후 만주에는 접촉할 곳이 없다. 왜들은 만주를 자유로 출몰하는 판이지라 동포들을 무분별 학살, 온갖 만행을 하는 판이라 어찌할 수 없이 러시아 땅으로 들어온 것이다. 동영현에 집결한 독립군을 통합하여 독립군 총사령부를 설정하고 홍범도 씨를 총사령관으로, 이청천 씨를 부사령관으로 선출하여 독립군을 통솔하였다.(중략)각 단체의 수령들은 배척을 당하고 군인들은 자유시로 들어가게 되었는데 박일리야는 홍범도, 이청천도 배제하려고 한다. 홍범도 씨와 이청천 씨는 책임상 자유시까지 따라올 수밖에 없다. 그러나 감시 인물이 되었던 것이다. 그럼으로 홍범도, 이청천은 탈출하여 오하묵 부대가 있는 자유시로 갔다.(중략)박일리야는 합하는 날이 되면 온 세력을 넘겨주게 된다. 그럼으로 합하지 않으려고 버티고 있으나 1천여 명 군대에 군수물자를 보급받지 못하니 농촌으로 돌아다니다 보니 농민의 원성이 자자할 뿐만 아니라 농촌도 양식이 다 떨어진 형편이다.[28]
"청산리대첩 참가자 이우석 친필 수기", 48-51면(51-54), 독립기념관 (자료번호 1-014724-000) #
우선 일련의 과정에서 홍범도는 아무런 역할을 한 바 없다. 홍범도 장군의 자유시 참변 시기 행적은 겨우 '남의 나라에서 무기를 들고 다녀서는 안 된다' 는 정상적인 요구에 수용한 것뿐이다. # 홍범도 장군은 안무, 최진동, 이청천(지청천) 등 다른 대부분 간도독립군과 함께 이미 자유시 참변의 현장인 수라젭카에 없었다.[29]

홍범도가 수용하고 지지한 것은 "소련공산당 군정의회를 중심으로 하는 독립군 통합"이 아니라,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이 조직한 고려혁명군정의회 주도의 독립군 통합이었다. 또한 자유시 참변에서 무장해제당한 쪽도 같은 사회주의 계열의 상해파 고려공산당이었으며, 오히려 이 상해파가 러시아공산당 극동국의 후원을 받았던 단체다.[30] 애초에 이 당시는 1921년이므로 소련은 수립되지도 않았었다. 아마 이르쿠츠크파가 코민테른 극동비서부의 후원을 받은 것을 두고 소련공산당이라고 주장한 것으로 보이나, 정작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 중 모스크바와 가까웠던 것은 상해파였다.[31]

홍범도가 아르쿠츠크파 주도의 독립군 통합에 찬성한 이유는 간단한데, 그것이 러시아 당국의 공식 방침이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상해파 주도의 독립군 통합이 공식 방침이었으나, 통합 도중 러시아의 극동사업 권한이 코민테른 극동비서부로 이관되면서 이르쿠츠크파가 독립군을 통합하는 것으로 방침이 번복되었다.[32] 홍범도는 이에 따라 처음에는 상해파 측에 갔다가 이후 이르쿠츠크파 측으로 이동한 것뿐이다. 홍범도만 이렇게 이동한 것도 아니며 간도에서 같이 온 지청천, 안무, 최진동 장군 등도 모두 상해파에 있다가 이르쿠츠쿠파로 이동하였다.[33] 이들 모두 독립군 통합의 필요성과 이르쿠츠크파가 보유한 명분을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34]

또 홍범도는 이르쿠츠크파 주도의 독립군 통합에 찬성하기는 하였으나, 자유시 참변이 일어나자 큰 충격을 받고 휘하 장교들과 인근 솔밭에 모여 땅을 치며 통곡했었다. # 또한 이후 홍범도가 재판위원으로 참여하기는 하였으나, 이는 "병사들이 피해를 보지 않고 공정한 판결이 나올 수 있도록 하기 위해"[35] 결정한 것이었다. 실제로 당시 재판에 회부된 50명 중 42명은 방면되거나 집행유예를 받았고, 나머지는 반란죄를 적용받았음에도 겨우 1~2년의 징역형만 받았다.[36]

그리고 국방부는 홍범도가 1922년 "'극동민족혁명단체 대표대회에 한인대표 52명의 일원으로 참석"한 것이 큰 문제인 것처럼 말하고 있으나, 해당 대회에는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이념을 떠나 참여하였으며 # 대표적인 우익 민족주의 인사인 김규식도 당시 한인대표 의장단으로 참석하였다. 또한 홍범도는 이 대회에서 자유시 참변의 주동자들을 거세게 비판했으며, 자유시 참변을 목도한 본인의 비통한 심정을 토로하기까지 했다.[37] 이 대회에 참여한 사실은 오히려 홍범도가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에 내심 협조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근거로 보아야 한다.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원동민족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모스크바로 간 홍범도최진동은 1922년 2월 (러시아)공화국 군사혁명위원회 참모총장과 국제공산당 집행위원회에 「조선유격운동에 대한 보고서」를 제출하였다. 목적은 원동에서의 이르쿠츠크파와 러시아 정책담당자들의 범죄를 밝히기 위함이라 적고 있다. 보고서에는 슈미야츠키, 최고려, 김하석, 오하묵, 김철훈을 ‘4천년 조선의 역사 안에서 전례 없는 범죄’를 저지르고 있는 살인자로 규정하였다. 이들의 조속한 퇴진을 촉구하고 있다. 작은 패배들과 승리의 기쁨을 나누었던 동지들에게 배신자로 되고 경멸을 받기보다는 죽는 것이 낫다는 심정을 토로하였다.
주미희, "자유시참변 1주년 논쟁에 대한 고찰", 역사연구 43, 2022, 215쪽. #
마지막으로 국방부는 홍범도가 블라디미르 레닌을 만나 "권총"과 "상금"을 받은 것이 마치 부역행위인 것처럼 서술하고 있으나, 당시 러시아와 교섭하고 지원을 기대한 것은 좌우파 모두 마찬가지였다. 예를 들면 1920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국무회의를 통해 한형권을 외교원으로 파견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 승인, 무기 및 장비지원, 사관학교 설립 그리고 혁명자금 지원 등을 요청하였다.[38] 그리고 이것이 성공하여 소비에트 러시아 정부가 1920년 말부터 1921년 초까지 막대한 자금을 제공하였다.[39] 이후에는 철두철미한 반공주의자 이승만조차 1921년에 안공근 등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표단을 소비에트 정부에 파견한 일이 있었다.[40] 1923년의 국민대표회의가 모스크바에서 받은 자금으로 치러진 대표적인 행사이다.[41]

국방부의 29일 공식 입장을 보면 기존 입장을 고수할 것으로 보인다. 한편 전하규 국방부 대변인은 당일 밝혔던 '군 내부에 전쟁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있어 외부의 검증을 받을 필요 없다'는 입장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기자단과의 질의응답에서 "내부적으로 확인해보겠다"는 어이없는 답을 하기도 했다.[42]

8월 31일 정례브리핑에서는 국방부 산하 군사편찬연구소에서 2017년 발간한 "독립군과 광복군 그리고 국군"이라는 책에 기재된 자유시 참변 관련 서술이 국방부의 공식 입장과 명백히 차이가 남에도 국방부 대변인은 본인들의 공식 입장을 철회하지 않았다. 동시에 '군 내부의 저술'과 입장문의 차이점에 대한 질문에는 본인들의 주장에 대한 출처를 다시 한번 확인해보고 답변하겠다고 밝혔다. 영상

3.2. 독립군이 무장해제 거부로 자유시 참변을 당했다?

"홍범도 장군은 볼셰비키의 무장해제를 받아들입니다. 반면에 김좌진 장군이나 이런 독립군들은 우리가 소련에 온 것은 일본과 싸우기 위해서 온 것이다. 무장해제를 거부하고 자유시에서 참변을 당하고 끝끝내 만주에 들어와 싸운 사람도 있습니다"는 뜬소문까지 있다. #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하바롭스크 시
1921년 1월 3일

1
남쪽에서부터 중립지대를 거쳐 왔거나 중국 영토로부터 왔거나 제2아무르군 관할지역에 온 모든 한인부대를 즉각 무장해제할 것을 명령한다. 이 경우 무력이라는 가장 단호한 수단도 동원 가능하다. 무장해제는 완벽히 이루어져야 한다. 어떠한 경우에도 총포류나 도검류를 하나라도 남기지 않는다.

2
한인 무장부대를 무장해제한 후에 구역 책임자들은 한인들이 자유시민의 완전한 권리를 향유하는 정치적 이민자로서 갖는 일반 권리에 의거해 스스로 자신의 거주 장소로 선택한 먼 후방으로 이동시키기 위한 차량이나 마차들을 즉각 요청한다.

3
무장해제를 실행하는 책임자들은 즉각 모든 무기를 목록화 하여 각 사단이나 제2군의 포병보급 부서로 보낸다.

제2군 사령관 쇼리쉐프
정치위원 멜니코프
군참모장 임시 직무대리 뷔로프
원본 확인: 작전관리국장

이완종, 2014, 『러시아문서 번역집 14』,선인, 52~53
원본과 번역본 사진
하바롭스크 시
1921년 3월 9일

1
한인부대들이 무기 양도를 거부할 경우 무력을 동원해서라도 그들을 즉각 무장해제하라는 금년 1월 3일자 제2아무르군 각 부대에 대한 명령18호를 반드시 집행할 것을 확인한다. 만약 한인부대들이 무기 양도를 단호히 거부한다면 군사활동을 개시하여 길을 차단하여 그들이 우리 쪽으로 넘어오는 것을 용인하지 말라. 반대의 경우, 그들에게 우리 군의 영향권에서 완전히 떠나라고 제안하라.

2
아무르 국경지대에 출현한 무장 홍후즈 부대들이 우리 쪽으로 넘어오지 못하도록 무력 동원을 포함한 가장 단호한 조치를 취하라. 한인 부대들에게 대해서도 그 지도부에 동일한 조치를 취하라. 우리 영토로 이주하고 싶다는 그들의 간절한 바람이 있을 경우, 범죄분자들이 유입되지 않도록 통행 허가에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 각 경우에 관해 군사령부에 즉각 알려야 한다.

제2군사령관 파블로프
군정치위원 멜니코프
군참모장 쉬콜린
원본 확인: 작전관리국장
이완종, 2014, 『러시아문서 번역집 14』,선인, 54~55
원본 번역본 사진
이만에서 자유시로 이동할때 홍범도, 이청천, 김승빈 등 500여 독립군은 앞서 최진동, 안무 부대가 그랬듯이 절차대로 이동 후(1921. 3월 중순) 무기를 되돌려 받았다. 그러나 북로군정서계 서일, 김좌진, 이범석, 나중소 부대는 무장해제에 반대하여 만주로 되돌아갔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독립군과 광복군 그리고 국군, 서울: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17, 95-96쪽 #
간도 독립군이 극동공화국에 들어갔을 때 극동공화국은 이미 무장해제를 거부할거면 지역을 떠나라고 요구했었고, 북로군정서계 서일, 김좌진, 이범석, 나중소 부대는 자유시 참변을 당하지 않고 지역을 떠났다.

3.3. 독립군이 몰살당했다?

자유시에 있던 독립군들이 몰살당했다는 국방부의 주장도 사실과 다르다.

독립군은 무장해제를 당한 것이지 몰살당한 것이 아니다. # 게다가 그 무장해제도 상해파가 모아놓은 병력들이 이르쿠츠크파 산하로 들어가는 것을 거부하자 강제로 통합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것이다.[43] 원래는 무장해제도 없이 그냥 통합하고 그간의 잡음들은 불문에 부치기로 했으나,[44] 상해파가 계속 이의를 제기하고 급기야 무장 상태로 현장을 이탈하려고까지 했기 때문에 타협이 결렬되어 무장해제가 강행되었다.[45] 따라서 기본적인 취지가 독립군 통합이었기 때문에 굳이 크게 피해를 낼 까닭이 없었다. 실제로, 참변이 발생한 6월 28일에는 상해파가 이미 포위된 상태임에도 7시간 동안이나 무장충돌을 막기 위한 교섭과 회의가 진행되었다.[46] 그런데도 끝내 협상이 실패하여 충돌이 빚어진 것이다. 국방부의 주장처럼 "몰살"이 목적이었다면 포위 상태에서 저 정도로 오래 기다릴 이유가 존재하지 않는다.

이 사건이 독립군에 궤멸적인 피해를 주었다는 주장은 홍범도의 참여 여부와 관계 없이 전혀 사실이 아니다. # 당시 사망자로 확실한 것은 36명이며[47] 현장을 목격한 계봉우[48] 역시 36명이 죽었다고 저술하였다.[49] 또다른 목격자인 김승빈의 경우에도 단 33명의 사망을 증언한다.[50] 국방부가 주장하는 400~600명 사망설은 오로지 상해파 고려공산당 측 인사들의 선전에서만 발견되는 수치이며, 그마저도 대다수의 선전에서는 '수십 명'이라 되어 있으나 일부 선전에서만 '수백 명'이라 되어 있다.[51] 현재 학계에서는 자유시 참변의 사상자를 수십 명으로 추정하고 있다.
사망 36명 포로 964명 병자로 불참한자가 19명 박 일리야가 데리고 도망한자 34명 기외 59명 행방불명이었다. 무장해제를 집행한 군대는 사자1명 29연대 사자 1명이었다.
권희영, 자유시 사변 연구, 한인 사회주의 운동연구, 서울: 국학자료원, 1999, 208~209쪽
한편, 극동공화국 정치안보국 본부는 1921년 7월 16-19 일 이 사변을 보고하면서, 한인의 피해는 현저히 적었다고 전했다: “스보보드넨스키 지역에서 사령관의 무장해제 명령에 따르지 않은 사할린부대와의 충돌이 발생했다. 명령은 부대 내에 반형멱적인 요소가 있었기 때문에 내려진 것이었다. 충돌로 인해 부대 총 인원 1026명 중 830 명이 항복했고, 나머지 일부는 죽거나, 부상을 입었고, 또 일부는 도주했다.”(56: 6 러시아사회정치사문서보관소. F. 372. Op. 1. D. 114. L. 68) 극동공화국 인민혁명군 정보에 따르면, 비상위원회 정보와 마찬가지로 한인 36명이 사망하고, 60명은 제야강에서 익사했으며, 실종자는 60명, 무장해제된 자는 860명에 달했다. (57: 토루쿠노프 A.V. 한국사(새로운 관점). M., 2003. P. 303-304) '실종자' 중에는 도망자들이 우세했다(박은 70 명의 병사와 함께 만주로 도주해 그곳에서 홍호자들과 함께 유격대원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공식 보고서는 사령관들이 제 5 군 군사재판소에서 조사를 받았던 이미 무장해제된 한인들에 대해 징벌을 가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고려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아무르사변’은 한국해방운동에서 깊고 오래된 분열을 더 악화시켰다.
A.G. 테플랴코프, 「네스토르 칼란다리시빌리(Nestor Kalandarishvili)(1876-1922)의 초상화: 형사범이자 모험가, 파르티잔, 붉은군대사령관 」,[52]
DOI: 10.31518/2618-9100-2018-1-4
УДК: 63.3(571.51/.55/.621)94(47)
그마저도 언어 문제로 인한 불상사로 파악한다.
전사자들은 러시아 말을 몰라 ‘서라!’ 해도 서지 않았고, ‘손들어!’ 해도 손을 들지 않았으니 희생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에 비해 전투현장인 ‘산병선’ 양쪽에서는 사망자가 발견되지 않았다고 한다. 이는 쌍방의 조선인 대원들이 서로를 적으로 보지 않고 진정으로 싸우지 않았음을 말한다.
신주백, "독립전쟁과 1921년 6월의 자유시 참변", 지식의 지평 31, 2021, 107쪽. #
군정의회측 또한 살상을 통해 무장해제를 하려고 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희생자는 거의 자유시수비대 29연대 병력들이 수행한 작전지역에서 발생했다. 간도에서 온 독립군들이 러시아어를 이해하지 못했던 점도 피해를 키운 한 원인이었다고 생각된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피해자의 대부분은 허재욱의 의군부 부대원들이었다.
윤상원, "러시아지역 한인의 항일무장투쟁 연구 : 1918-1922", 고려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10, 218쪽. #

3.4. 일본과의 밀약?

자유시 참변의 무장해제는 일본과의 밀약에 의해 개시됐고, 홍범도가 그 사태에 관여됐다는 소문이 있다.[53] 이것은 내부 문서가 공개되기 전까지 일부 학자도 주장하던 학설이었다. 한국경제, 연합뉴스(일본 사주설 부정)

하지만 소비에트와 극동 공화국 내부 문서가 공개된 후 이런 소문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졌다. 1920년 가을, 코민테른 극동사무국장(이르쿠츠크파) 슈먀츠키는 매우 모험적인 계획을 완성한다. 그것은 칼란다리시빌리의 지휘관으로 임명해 이르쿠츠크에서 4천여명의 한국인 유격대원들을 훈련하고 시베리아에서 만주를 거쳐 한국으로 전승 행군한다는 계획이었다. 코민테른 극동사무국(이르쿠츠크파)의 계획을 극동공화국은 뒤늦게야 알아채는데, 이 작전이 개시되면 현지인의 대량의 희생이 발생하기 때문에 이에 반대하여 분노했다.

한국에선 흔히 자유시 참변을 독립군과 공산당의 대립, 또는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의 대립으로만 오해한다. 하지만 극동 공화국의 현지인들에게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 러시아 공산당 코민테른과 한인 독립군 모두가 목숨과 치안을 위협하는 존재였고, 그들을 지원하던 레닌에게 항의하며 호소했다.
곧이어 칼란다리시빌리는 특히 심했던 국제 갈등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1920년 가을, 일본의 식민지개척자들과 전투를 벌였던 4 천여명의 한인 유격대원들이 북만주에서 아무르주로 넘어갈 무렵, 코민테른 극동사무국장 슈먀츠키는 이르쿠츠크에서 조선혁명군을 훈련하고, 만주를 통해 시베리아에서 한국으로 향하는 전승 행군을 조직하는 모험적인 계획을 완성했다. 그는 칼란다리시빌리의 지휘 하에 조선혁명운동의 거점을 이르쿠츠크에 구축하는데 착수했다.(중략)
세계 혁명의 화염을 불식시키기 위해 한국으로 갈 생각을 진지하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할아버지'의 공적은 무정부주의 사할린부대가 해산되는 것으로 그치고 말았다. 그러나 극동공화국 정부는 소비에트 러시아 정부에 호소함으로써 슈먀츠키의 모험을 제지할 수 있었다. 극동공화국 크라스노쇼코프 대통령은 극동공화국 인명혁명군 라핀 총사령관의 의견을 듣고 (61: 라핀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내가 아는 한, 한국 조차도 동족이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것에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 이 일은 한국으로 향하는 이르쿠츠크의 한인 공산당 사절단이 할 수 있는 것이다. 칼란다리시빌리 세력이 한국 국경에 성공적으로 도달할 지에 대해서는 부정적으로 생각한다. ” (러시아군사문서보관소. F.221. Op.1. D.376. L.86,89) ) 일본의 도발을 두려워하며, 1921년 6월 치체린과 레닌에게 계획된 모험에 항의하는 전보를 보냈다: “…. 한인들에 대한 슈마츠키의 계획, 일본의 도발을 유도하게 될 계획에 절대적으로 반대한다. 특히 그는 한국으로 진군하면서 한인들을 지휘하기 위해 나폴레옹의 모습과 잡음을 일으키며 극동공화국 전역을 훑고 지나갔던, 나이가 들어 의식이 흐릿한 동방 전역에서 유명한 유격대원인 칼란다리시빌리를 수장에 세웠다. 끔찍한 사실은, 1) 4,000 명이 한인들이 블라고베쉔스크의 일본인들 앞에 집결해 약탈, 강간 등 끔찍한 만행을 자행하고 있으며, 자기 측에서 선출된 지휘부에만 복종하고 있다….. 노인네(칼란다리시빌리)가 2 천노리의 한국 진군을 위해 한인들과 중국 영토로 이동한 것은 좀 부드럽게 말하자면, 시인의 머리에서 나온 것일 수도 있으나, 삼국협약의 눈앞에서 완전히 정당화된 일본의 공격을 유발할 수 있다.” 외교인민위원회는 이에 대한 답변으로 이 '모험을 가능한 한 조속히 중단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62: B. D. 소비에트 러시아의 한인들…….. p.73-91 )』

A.G. 테플랴코프, 「네스토르 칼란다리시빌리(Nestor Kalandarishvili)(1876-1922)의 초상화: 형사범이자 모험가, 파르티잔, 붉은군대사령관 」,[54]
DOI: 10.31518/2618-9100-2018-1-4
УДК: 63.3(571.51/.55/.621)94(47)

3.5. 무장해제된 부대의 실체

자유시 참변에 대해 유념할 점은, 당시 사살된 사할린 부대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대가 아니라는 사실이다.[55]
자유대대측에서는 사할린부대와 전한군사위원회가 상해임정을 추종하는 세력이라고 몰아세웠다.이는 자유시사변 이후 군정의회와 자유대대 측으로부터 나온 각종 문서와 회고록에서도 계속해서 주장되고 있다.그러나 이러한 비판 역시 타당하지 않다.자유시로 집결한 무장부대들은 상해임정과의 관계 속에서 이동해 온 것이 아니라 이동휘를 위시한 한인사회당과의 관계 속에서 이동했다. 더구나 전한군사위원회가 조직되고 무장부대 통합운동이 실질적으로 전개되고 있을 때에는 이미 이동휘가 국무총리직을 사임한 상태였다. 607)하지만 군정의회와 자유대대 측에서는 사할린부대를 상해임정과 연결시키려 했으며 심지어는 위임통치 문제로 논란을 일으키고 있던 이승만과 연계시키기까지 했다. 예를 들면 최고려는 자서전에서 이동휘가 “이승만의 승낙을 받아 ‘한인공산당’을 제꺽 만들어” 냈으며, “이 상해공산당의 사상적 고무자들은 일제와 미제의 이름난 주구들인 장덕수, 송진우, 김성수, 이승만 및 기타”라고 왜곡했다. 608)이상 자유대대의 공격은 상해임정이 조선의 독립과 무장부대 통합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에 대해 고려하지 않은 채 상해임정이 부르주아지들의 반혁명기관이라는 근거없는 전체 하의 비방이었다.

흥미로운 점은 군정의회와 자유대대 측이 일반 군인들에게 발표한 거의 모든 문서에는 상해임정에 대한 성토가 있는데 반해 609)코민테른과 소비에트러시아 정부에 보고한 보고문에는 사할린부대와 임시정부의 관계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610)사할린부대와 상해임정의 관계는 군정의회 상층부에서도 부인하고 있었으며, 일반 군인들에 대한 선전용으로만 이용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무장충돌의 가능성까지 있던 상황에서 상호 비난은 일반 군인들에게 별다른 검증없이 받아들여졌던 것으로 보인다.일반 군인들은 급박한 정세 속에서 이러한 비판들을 냉정하게 판단하고 선별적으로 수용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윤상원, 러시아지역 한인의 항일무장투쟁 연구: 1918-1922, 학위논문(박사)-- 高麗大學校 大學院: 韓國史專攻 2010. 2, 207-208
사살된 사할린부대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대라는 건 당시에 떠돈 유언비어이다.

2017년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가 편찬한 독립군과 광복군 그리고 국군에서도 상해 임시정부 봉대날짜를 1921년 3월까지를 한계로 보고 있다.[56]

또, 근본적으로는 국방부가 피해자처럼 묘사한 '독립군' 부대의 실체도 이미 학계에서 실체가 까발려진지 오래됐다. 자유시 참변의 '피해자'라는 사할린 부대야말로 과격 극좌 성향 볼셰비키 및 친볼셰비키 부대였으며 반볼셰비키 민간인을 학살하는 등 전범 행위를 자행한 바 있었다.[57] 홍범도와 이청천은 박일리야의 사할린 부대에게 위협을 받아서 탈출한 것이다.[58]

이정식 교수[59]가 집필해 '2008 문화체육관광부 우수 학술도서'로 선정된 서적에선 자유시 참변에 무장해제된 '독립군'의 실체에 대해 아래와 같이 주목한다.
일본에게 있어서 한국독립군은 어느 곳에 있거나 말살되어야 할 존재였지만 '자유시'에 집결한 독립군을 특별히 증오한 이유가 있었다. 이들 중에는 1920년 4-5월에 니콜라예브스크에서 일본인들을 학살한 부대가 끼어있었기 때문이다. 니항사건이라고 알려진 이 사건은 너무나 잔인무도한 것...니항이라고 알려진 니콜라예브스크는 흑룡강의 어귀, 즉 흑룡강이 오크츠해(바다)를 만나는 곳에 있는 마을인데 이곳을 점령한 야코부 트리아피친이 이끄는 공산 게릴라들은 반동파 숙청이라는 명목하에 약 6천 명의 주민을 참혹하게 학살하였는데 그중에는 약 700명의 일본거주민들이 있었고 일본영사도 포함되어 있었다. 23세의 트리아피친은 볼셰비키혁명이 성공한 후에는 한국독립을 위해 도울 것이라는 약속뿐만 아니라 그런 뜻의 합의서까지 서명하여 수백명의 한국청년들을 동원했었는데 이들은 트리아피친의 명령을 충실히 시행함으로써 학살의 주역이 된 것이었다....[한국인 부대]부대장은 박이라는 교사였는데 그가 한국청년들의 애국심을 선동하여 부대를 확장했다고 한다. 그가 말한 박이라는 교사는 김홍일이 말한 박 일리아일 것이다.
이정식, 여운형 : 시대와 사상을 초월한 융화주의자, 서울 : 서울대학교출판부, 2008, pp 314~316.
즉, 자유시 참변에서 공격당한 부대는 수천명의 민간인을 학살한 니콜라옙스크 학살에서 주역을 맡은 한국인 부대이며, 이것이 자유시 참변의 주요 원인이라 지목한 것이다.

또 러시아 학자인 알렉세이 게오르기예비치 테플랴코프 박사[60]도 논문에서 이들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까발리고 있다. 테플랴코프 교수가 게재한 네스토르 칼란다리시빌리의 범죄 행위에 대한 논문[61]에서 상해파 부대를 행적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곧이어 칼란다리시빌리는 특히 심했던 국제 갈등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1920년 가을, 일본의 식민지개척자들과 전투를 벌였던 4 천여명의 한인 유격대원들이 북만주에서 아무르주로 넘어갈 무렵, 코민테른 극동사무국장 슈먀츠키는 이르쿠츠크에서 조선혁명군을 훈련하고, 만주를 통해 시베리아에서 한국으로 향하는 전승 행군을 조직하는 모험적인 계획을 완성했다. 그는 칼란다리시빌리의 지휘 하에 조선혁명운동의 거점을 이르쿠츠크에 구축하는데 착수했다. 러시아로 건너온 폭동의 한인 상당수는 이르쿠츠크로, 나머지는 상해 혁명파로 방향을 잡았다. 반면, 사할린 유격부대의 다른 경향을 갖는 '상해파' 유격대 지도자들은 아나키스트 트랴피씬이 이끄는 테러군의 핵심 돌격대가 되어, 1919-1920 년 니콜라옙스크-나-아무레와 사할린주 민간인 학살에 적극 참여했다. 1920년 여름 일본군의 맹공격으로 아무르강 하류를 떠나 블라고베쉔스크 인근에 정착한 그들은 언제나 그렇듯 무기를 이용해 공급 문제와 사적인 갈등을 해결했다. 1920 년 7 월 말, 인민혁명군 에이헤 총사령관과 그의 정치조력자 비샤린은 병사와 군간부들 중에 '직무상 범죄자나 정치사범이 많은' 한중연대를 정리할 것을 명했다. (44:러시아군사문서보관소. F.185. Op.6. D.24. L.601 ) 그러나 이러한 조치는 효과를 보지 못했다. 소비에트 군대와 정당이 교류한 서신에 따르면, 한인들을 통제하려는 시도는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에이헤 총사령관은 1921년 1월 러시아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원회 극동국 한인부 부대원이자 조선공산당 아무르지역위원회 위원장 이반 다닐로비치 박찬은에게 조선 유격대의 군사문제를 해결하고자 2 월 치타 또는 하바롭스크에서 유격대 회의를 소집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위 문제를 해결하는데 방해가 되는 사람들은 모두 구속하고', 부대 사령관들을 해임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 (45: 상동. F.221. Op.1. D.376. L.4 ) 당시 극동국 한인부의 모든 부대원들과 사할린 부대 사령관인 김 인노켄티와 박 일리아는 '당내 활동에서 규율을 준수하지 않아'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극동사무국 결정에 따라 권한을 박탈당했으며, 김과 박은 국가안보국 아무르지역지부의 조사를 받았다.(박은 '모험가인 트랴피씬'의 열성적 옹호자이자 콜차크의 방첩활동 첩보원이라는 혐의를 받았고, 러시아 군대 준위였던 김은 인민혁명군 복무를 회피한 혐의로 1920 년 이르쿠츠크에서 제 5 군대 특별부에 체포된 후 보석금을 내고 석방되었다. ) (46:러시아군사문서보관소. F.221. Op.1. D.376. L.41 )

최관윤을 의장으로 하고, 김관 강동유격대장 등이 참여한 가운데 1921년 3월 11일 치타에서 개최된 조선군사비상회의는 특별사할린유격부대 김 사령관과 박 군사인민위원을 파면하고, '연대 해산'을 위해 그들을 전지임시군사법원에 넘겨주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분리주의를 니콜라옙스크 중대에 도입하고, 일반병사들과 연대 지휘권 논쟁을 야기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었다. 그들은 ‘니콜라예프파 유격대원들이 행한 니콜라옙스크 한인부대 박 바실리 전 사령관의 사형을 저지하지 않았다’. 부대를 이끌고 자유시(스보보드니시)에서 시골로 이동하면서 김과 박은 ‘사격수들이 평화로운 러시아 농민들에게 약탈과 폭력을 저지르도록 허용했다’. 분노한 농민들은 한인 유격대의 무장해제와 한인들에 대항할 수 있도록 농민들을 무장시켜 줄 것을 요구했다. 또한 김과 박은 ‘니콜라예프파로 구성된 무책임한 테러리스트 단체를 만들어 병사들과 조선독립보병연대 지휘부에 패닉을 야기했다’. (47: 상동. L.51)

무정부 상태는 결국 트랴피씬의 독재 하에 민간인 약탈과 학살을 일삼은 파르티잔의 규율을 무너뜨렸다. 1921 년 4 월 23 일 에이헤가 슈먀츠키에게 보낸 전보를 통해 인민혁명군 총사령관은 사할린 부대가 식량 부족과 ‘부대장의 부재’로 지역 주민들의 반감을 사 “농민들과 한인들 간에 공개적인 충돌을 야기할 것”이라고 전했다. 부대는 인접 지역 중 한 곳으로 옮겨질 계획이었다. 에이헤는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칼란다리시빌리에게 출발을 서두를 것을 요구했다. (48: 상동. L.62 ) 그러나 ‘할아버지’는 한달이 지나서야 출발할 수 있었다. 한편, 1921 년 5 월 8 일 사할린 부대 군간부는 한인부대 사령관으로 임명된 오하묵이 한때 대대사령관으로 ‘인민군을 휩쓸었던’ 사람이라 그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인민혁명군 총사령관에게 전했다. 요청서에 서명한 그리고리예프 부대장(전 장교, 무소속), 김 부대장 보조, 박 군사위원(전 니콜라옙스크 부대장), 최 참모총장(제 2 비행대 전 참모총장), 림 제 1 대대장, 아무 제 2 대대장, 헤자욱 제 3 대대장 및 많은 사령관들은 오하묵에 불복할 것을 선언했다. (49: 상동. L.69 )
A.G. 테플랴코프, 「네스토르 칼란다리시빌리(Nestor Kalandarishvili)(1876-1922)의 초상화: 형사범이자 모험가, 파르티잔, 붉은군대사령관 」,[62]
DOI: 10.31518/2618-9100-2018-1-4
УДК: 63.3(571.51/.55/.621)94(47)
국방부가 (실제로 몰살도 아니지만) '몰살된 독립군'이라고 지칭한 부대는, 바로 잔인무도한 학살과 약탈로 극동공화국과 일본 모두에게 악명이 높았던 사할린 부대였다.

뉴데일리에선 "이때 레닌으로부터 하사받은 권총으로 홍범도는 생사고락을 함께했을 독립운동지사 2명을 사살했다. 참변의 생존자이자 사할린부대 출신인 김창수·김오남이 1923년 8월 하바롭스크에서 홍범도에게 참변의 책임을 추궁하기 위해 불시에 공격하자 홍범도는 이들을 사살했다."는 근거로 "사할린부대 출신 김창수·김오남이 그를 죽이려 했다는 사실 등은 홍범도가 참변의 책임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방증한다"#고 주장했고, 동아일보의 송평인도 " 강제 무장해제된 사할린 부대원 2명에게 암살될 뻔한 사건은 그를 향한 원한이 팽배했음을 보여준다."도 주장했으나, 그 '홍범도 암살미수' 가해자들이야말로 학살과 약탈을 일삼아서 악명이 자자했던 사할린 부대원들이다. 예전부터 사적 갈등을 무기로 해결하던 집단이었는데, 이런 범죄집단이 홍범도를 공격한 것을 근거로 삼아 홍범도에게 책임을 뒤집어 씌우는 것은 궤변이다.

결국 국방부와 뉴라이트 성향의 극우들은 겨우 홍범도를 공격하겠다는 이유만으로 반볼셰비키 민간인들을 학살한 극좌적인 친소비에트 성향의 적군 빨치산들을 피해자라고 미화하는 선전활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현실의 맨츄리안 켄디데이트다. 이런 식의 활동은 2021년에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 주목되는데 # 여기서도 니콜라옙스크 사건은 절대 언급하지 않고 있다.

4. 뉴라이트의 개입

한겨레신문은 흉상 철거 논란이 시작되자 2021년 홍범도 장군 유해봉환식을 전후하여 홍범도는 공산주의자이고 자유시 참변 당시 소련군 소속으로 조선 독립운동가들을 죽였다거나 항일독립운동과는 관련이 없다고 말한 김문수, 강규형, 전광훈뉴라이트 인사들을 조명했다. 이중에 윤석열 정부에서 감투를 받은 사람들도 더러 있었다. #

9월 5일 홍범도 장군 등 독립운동가 5인의 흉상 철거를 주도했던 육군사관학교 '기념물 재배치 위원회'[63] 실무 총괄자가 나종남 육사 군사사학과 교수였다는 것이 밝혀졌다.

나종남은 뉴라이트 성향으로 평가받는 한국현대사학회 창립준비위원[64] 출신으로 박근혜 정부 당시 국정교과서 현대사 집필진이었는데 소련공산당 가입 이력을 문제 삼아 홍 장군 흉상 철거를 결정하면서 친일 전력이 있는 백선엽 장군의 웹툰은 복원시키는 등 독립운동사 지우기에 나선 배경에 뉴라이트 세력이 있다는 정황이 드러났다. 독립운동가 흉상 철거 논란이 일어난 뒤 재배치 위원회 인사 명단이 확인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

그동안 실체가 불분명했던 기념물 철거 절차를 주도했던 인물이 뉴라이트 사관 역사학자였다는 것이 드러나면서, 한덕수 총리가 9월 5일 당일 대정부질문 시간에 "윤석열 정부가 극우 뉴라이트적 시각을 가지고 있다는 시각에는 동의하지 않는다"고 언급한 일은 신빙성이 의심스럽게 되었다.

5. 국방부의 이중잣대

5.1. 박정희

"박정희도 남로당원 아니었나?" 대통령실에 '흉상 철거' 묻자.. | 2023.8.28. MBCNews

박정희 전 대통령은 지난 1962년 홍범도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수여한 당사자다.[65] 게다가 박정희는 남조선로동당에서 군사총책으로 활동하며 사형 선고까지 받은 이력이 있다.[66][67] 그리고 육군사관학교 경내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쓴 "내 생명 조국을 위해"라는 휘호가 있는 호국비와 마찬가지로 박 전 대통령이 남긴 "호국간성(護國干成)의 도장(道場)"이라는 휘호가 있다.

이처럼 박정희는 현재 강행되는 독립운동가 흉상 철거의 부당함을 입증하는 강력한 반증 사례인 것이다. 지금 정부가 내세우는 기준대로면, 육사에 세워진 박정희 관련 기념물들도 철거되어야 마땅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러한 지적들에 대해 국방부는 박정희가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한 분이라며 궁색한 변명으로 일관하고 있다. 이 정도면 변명이 아니라, 역사왜곡 수준의 궤변에 지나지 않는다.[68]

5.2. 백선엽

게다가 독립운동가들의 흉상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간도특설대 경력과 자서전에 서술된 구체적인 친일반민족행위 정황으로 인해 대한민국 정부에 의해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된 백선엽의 흉상을 그 자리에 세우기 위한 계획이 검토 중이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25일, 한겨레 신문은 군 소식통을 인용해 '육군사관학교에 백선엽 장군의 흉상 설치가 검토되고 있다'는 내용을 보도했다. # 이종섭 장관은 독립운동이 아닌 군사적 분야에 한해 흉상을 비치하는 것이 적절하다면서 기존에 설치된 흉상의 위치가 적절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철거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문제는 그렇게 철거한다면서 해당 자리에 백선엽의 흉상이 세워진다면 본인들의 주장에 앞뒤가 안 맞는 모순에 빠진다는 점이다.

특히나 국방부와 육사에 따르면 홍범도는 소련공산당 활동을 비롯한 논란이 있어 육사에서 기념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는 논리를 내세우고 있는데, 홍범도의 공산당 가입 이력을 따위로 만들 정도인 백선엽의 간도특설대 활동은 철저히 무시한 채 홍범도를 공산주의자로 폄훼하고 있어 이중잣대라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당연하지만 홍범도가 공산당에 가입하는 것은 독립냉전, 나아가 한국전쟁이 터지기 전이었던 당시 기준으로는 매국적 행위도 아니었다. 당시의 독립운동가들이 모두 우파였던 것은 아니며[69] 좌익 계열의 독립 투사들도 많았고 그를 친일 전력과 동급에 가까운 종북 전력으로 매도할 근거는 사실상 없다.

특히 일제 치하에서 독립운동을 진행하며 항일운동을 벌였고 해방 이후 한국전쟁 당시 군사적 분야에서 백선엽 못지않게 두드러진 활약을 보인 김홍일도 충분히 거론될 수 있음에도[70] 굳이 독립운동가 출신 흉상들을 모조리 철거하고 그 자리에 백선엽이 거론된다는 것은 굉장한 의문점이 남는 부분이다. 다만 이범석, 지청천 등도 김홍일과 매우 유사한 루트를 밟았으며 초대 국방부장관까지 역임한 이범석의 흉상이 철거되는 시점에서 독립운동을 한 김홍일로 교체될 이유가 없긴 하다. 즉, 독립운동 자체를, 그리고 독립운동을 한 육군 영웅들을 지우려 하는 게 아니냐는 것.

물론 백선엽이 한국전쟁 당시 주요 전투에서 세운 공은 크다. 중요한 다부동 전투 외에도 평양을 최초로 점령하고 중공군의 공세를 저지해 강원도를 지켰으며 부수적인 피해를 최소화하며 빨치산 토벌전을 마무리했다. 따라서 그의 군사적 성과는 군사학이자 전사로서 가르쳐야 하며 이는 다수가 동의하는 바이다. 그러나 간도특설대 복무라는 원죄의 무게 또한 이에 못지않게 크며, 쉽사리 덮일 수 없다. 간도특설대 복무는 단순한 식민 지배자에 대한 부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가 최초로 임관하여 자대 배치를 받았던 시기는 제2차 세계대전 중이었으므로 백선엽은 반인륜적 전체주의 사상과 군국주의적 호전성을 침략전쟁으로 표출하였던 집단인 추축국 일본 제국의 괴뢰 집단인 만주군에 부역한 것이다.

일각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정녕 백선엽 대장이 일본 제국에 사상적으로 감화되어 적극적인 친일 활동에 나섰는지, 또는 실제로 독립군을 본인의 손으로 토벌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반론과 논란이 있다. 하지만 그가 적극적인 부역자가 아니었다 한들, 그가 일본 제국의 파르티잔 토벌 특무조직에 가담하여 묵묵히 임무를 수행했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그가 일본 제국에 사상적으로 감화되었든 아니든, 세계대전기 일본 제국군의 일원으로써 그는 직간접적으로 추축국의 침략에 기여했다. 이는 당사자인 백선엽 본인부터가 여러 저서에서 건조한 어투로 인정한 바이다. 그는 이에 대해 적극적인 반성의 입장도 보이지 않고 그저 유감이었고 과거의 좀 부끄러운 일이었다 정도로만 기술하고 있다.

대한민국 국군은 제2차 세계대전 연합군의 일원으로써 국제 평화와 조국의 독립을 위해 어렵사리 노력했던 한국광복군을 계승하고 있다. 그렇기에 간도특설대 복무라는 이 경력은 대한민국 국군을 상징하는 국방부와 군인정신을 교육하는 육군사관학교의 얼굴로써는 명백한 결격사유이다. 이 중에서도 특히 사관학교는 단순히 군사적 분야의 교육만이 아니라 국가의 자주성을 지킬 수 있는 수호자로서의 올바른 국가관과 정통성을 확립하는 곳이다. 이 곳에서 식민제국이자 추축국이었고 독립 이전 주적이던 국가에 부역한 경력이 있으며 이에 대해 제대로 된 반성조차 하지 않았던 인물을 단순한 전사연구의 대상이 아니라 상징으로까지 추켜세우는 행위는, 곧 자신들의 정신과 뿌리를 부정하는 행위와 같다. 때문에 백선엽이 사망한 2021년에도 그의 현충원 안장 자격에 대해 격한 논쟁이 오고 갔었다.

결정적으로, 임정과 독립군 출신자들이 신생 대한민국 국군의 역사적인 근간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친일파 출신들조차 이미 건군 시기에 군말없이 인정한 내용이다. 가령 일본육군사관학교 출신으로서 일제강점기 내내 일본군에 복무했던 이응준 중장은[71][72] 해방 후 미군정의 고문으로서 창군에 참여한 후 여러 독립운동가들을 찾아가 설득하고 주요 자리에 천거하며 국군 정통성을 최대한 바로세우는 데에 나섰다. 광복군 참모총장 유동열을 설득하여 통위부장[73]으로 추천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 당시 이응준 중장은 "임시정부 요인들께서 말씀하시는 법통을 우리나라 군대로 하여금 계승하는 일이 숭고한 사명이라고 생각해달라"고 말하며 그를 설득해 건군에 참여시켰다. 이응준이 추천 대상으로 고려했던 이들 중에는 유동열 외에도 지금 흉상 이전으로 논란이 되는 지청천[74]이범석도 있었다.

또다른 친일파 출신 군 원로들인 김석원 소장[75], 그리고 이종찬 중장[76] 역시 건군 당시 자신들의 일제 부역 이력을 통감하며 한동안 근신했다. 이종찬의 경우에는 이응준이 그랬듯 건군에 참여한 후에도 독립군 인사들을 주요 요직에 추천하였다. 광복군 출신인 안춘생 준장을 4년제 정규 육사의 첫 교장으로 임명했던 것도 이종찬인데, 적어도 육사만큼은 광복군 출신 장군이 초대 교장을 맡아야 육사의 정통성이 수립될 수 있다는 그의 지론에 따른 것이었다. 친일파 출신의 거두들조차도 자신의 과거사를 통렬하게 반성하고 국군의 역사적 정통성을 바로세우는 데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는데, 현 국방부는 그만도 못한 결정을 내린 셈이다.

사실 백선엽을 중심으로 한 유사한 논란은 이미 10년 전에도 있었다. 2009년 벌어졌던 그에 대한 명예 원수 계급 수여 논란이 바로 그것. 당시 집권 여당이었던 한나라당국방부의 일부 인사들이 주도하였는데, 당시에도 많은 반발 끝에 취소되었다.[77] 대표적인 인물이 한국전쟁 참전 용사이자 베트남 전쟁 당시 파월 한국군 사령관이기도 했던 채명신 예비역 중장(2013년 별세)이다. 채 중장은 친분이 있는 박경석 예비역 준장과의 대화에서 "건국 이후의 첫 명예원수 추대는 역사적 의미와 상징성이 매우 중요하다. 만약 일본군, 만주군 출신에다 독립군 토벌작전의 지휘관 경력자가 명예원수로 추대된다면 우리나라 건국사와 국군사는 하루아침에 북한 역사관에 종속될 것"이라며 백선엽에 대한 원수 수여를 반대했다. "대체 우리 나라 사람들은 왜 이렇게 역사의식이 이렇게 희박한 건지 모르겠다"는 탄식은 덤이다. 박경석 준장도 한국전쟁베트남 전쟁 참전용사이며, 이후 백선엽 관련 질문이 올 때마다 비판하기도 했다.

이 둘 뿐만 아니라 상당수 창군 원로들이 백선엽 대장의 원수 추대에 반대했다. 심지어는 창군원로 여럿이 당시 이명박 대통령 당시 이희원 청와대 안보특보실에 수십 통의 서한을 보내 백선엽의 명예원수 추대에 대한 부당성을 지적했으며, 이명박 대통령에게 보고된 일부 창군 원로의 편지에는 "백장군의 비열한 과거까지 폭로하겠다"는 극단적인 표현까지 들어 있었다. #[단독] 군 원로들이 백선엽 예비역 대장의 명예원수 추대를 좌절시켰다

이번에 새로 불거진 논란 또한 채명신 중장의 주장과 같은 맥락으로 비판이 가능하다. '레드 컴플렉스'로 인한 국방부의 대응이 오히려 대한민국과 국군의 역사적 정통성을 훼손하고 북한의 역사적 위상을 띄워 주는 행동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국외의 사례로는 현대 독일 연방군과거사 문제가 있다. 세계대전 이후 연방군의 수립과 발전에는 아돌프 호이징거 대장이나 한스 슈파이델 대장 같은 구 나치 독일 국방군 출신자들의 기여가 적지 않았다. 그리고 백선엽에 대한 논쟁처럼, 2차 대전 당시 나치 독일 정부에 직간접적으로 부역했던 그들의 과거사와 책임에 대해서는 수십 년간의 논쟁이 있어 왔다. 국방군 시절 육군참모총장이었던 호이징거 대장의 경우 전체주의적인 나치 치하에서 복종하며 보편적인 윤리를 저버렸던 독일군 장병들의 심리적인 딜레마를 정당화했다. 그리고 독일 사회의 많은 이들은 대부분의 국방군 출신자들이 단순가담자(Mitläufer)일 뿐이라며 그들의 과거사를 옹호했다. 나치와 독일 군인은 별개이며 군인들은 그저 국가를 위해 자발적으로, 또는 어쩔 수 없이 복무한 비정치적 수호자였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책임을 묻는 목소리는 여전히 많았다. 가령 NATO 유럽지상군 사령관까지 지냈던 슈파이델 대장의 경우, 그 자신은 2차대전 당시 국방군의 전쟁 범죄와 별 관련이 없었다. 그럼에도 프랑스 점령지역에서 근무했던 경력을 문제 삼은 샤를 드 골 프랑스 대통령[78]의 반대로 인해 1963년에 NATO 지상군 사령관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 그리고 현대 독일 사회와 학계에서는 국방군의 부역 책임이 있음을 대부분 인정한다. 오늘날의 독일 연방군 역시 국방군 출신 장성들이 전후 연방군의 발전에 기여한 사실을 긍정하지만 그들을 자신들의 정신적인 기원으로 여기고 있지는 않으며, 그들이 대전기에 벌인 과오도 동시에 인정하고 있다. 가령 독일 연방군 대령이자 독일 군사사연구소 연구원인 게하르트 그로스는 그의 저서 "독일군의 신화와 진실"에서 전쟁 당시 독일군의 나치 가담을 인정한 바 있다.

독일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 추축국에 대한 가담은 단순가담이라 할지라도 정통성을 심각하게 훼손하는 역사적 무게감을 지닌다. 그렇기에 백선엽의 간도특설대 경력을 쉽게 일축하곤 독립운동가들의 역사적 위상을 백선엽으로 대체하려는 국방부의 행동은, 독일과 달리 시대를 역행하는 결정이며 비판받아 마땅하다. 이는 한국판 깨끗한 국방군 신화나 다름없다.

5.2.1. 주장 번복과 영상 비공개

100년 만에 고국 품으로 돌아온 [홍범도 장군] 인생 풀스토리! | 2018.8.29. 국방TV
흉상 이어 '홍범도 유튜브' 지우기? | 2023.09.01. MBC뉴스

국방부는 이미 5년 전에 홍범도공산주의자가 아니고 이는 오해라며 봉오동 전투, 청산리 전투의 영웅이라는 내용의 영상을 올렸다. 영상의 내용은 김선덕 국방TV PD가 학계의 자료를 인용하며 홍범도의 의병, 유년기 등을 다루는 내용이었다. 심지어 해당 영상에서는 이후 국방부가 기자들과 학계에 비판 받은 자유시 참변 부분 역시 “고려공산당이 독립군의 통수권을 놓고 벌인 싸움”이라며 “서로군정서와 홍범도 부대가 수백 명 희생당한 일”로 학계의 자료를 인용해 발언했다. 그런데 이제 와서 그때의 주장과는 상반되는 행보를 보인 것이다.

상기한 영상에 그 내용이 담긴 것으로 확인되나#, 해당 영상이 9월 1일에 비공개 처리가 되었다.[79] 이데일리 보도에 따르면 비공개 전환 전 영상 댓글에서는 “국방부는 왜 이랬다 저랬다 하느냐”, “이 영상 없어지면 민원을 넣겠다”는 등 반응을 보였는데 실제로 영상이 사라진 것이다. # 과거의 주장과 상반된 행보를 보인 것이 커뮤니티에서 화제가 되며 비판받자 대뜸 영상을 비공개로 전환시킨 것으로, 각종 언론에서 이를 비판하는 보도를 냈다. 국방부 공식 유튜브 “홍범도 공산주의자는 오해” 영상 비공개 전환, 세계일보# 2021년 국방뉴스 채널에 올라왔던 홍범도 장군에 대한 다른 영상도 비공개시켰다.

5.3. 육군사관학교의 설립 목적

◇기자: 홍범도 장군이 육사 명예 졸업생인 건 알고 계시죠?

◆국방부 대변인: 그런 증서를 받은 게 오늘 기사에 나온 것을 저도 봤습니다.

◇기자: 그런데 육사의 명예졸업생이 육사 건물에 흉상이 있는게 어색하신가요?

◆국방부 대변인: 그것과는 다른 관점인 것 같습니다

◇기자: 혹시 그러면 명예졸업장도 취소하실 생각이 있으신가요?

◆국방부 대변인: 그것을 제가 답변드릴 사안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이종섭 국방부장관은 "육사는 공산 세력과 맞서 싸울 간부를 양성하는 곳"이라고 말했는데, 이는 조선로동당은 물론 중국공산당/베트남 공산당/쿠바 공산당/라오 인민혁명당/일본공산당 등 현존 모든 공산당과 맞서싸울 간부를 양성하는 데 육군사관학교의 존재의의가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윤석열 정부는 2022년 국군의 날 행사에서 공산국가 대표를 의식해 '멸공의 횃불'을 '승리의 횃불'로 개사하는 비굴한 모습마저 보였다. 또한 2023년 3월의 육군사관학교 83기 입학식에서는 베트남 인민군 소속의 수탁생도[80]가 입학하였다. # 장관의 말대로라면, 베트남군 수탁생도에게 고급 지식을 전수하고 친교를 쌓는 것 모두 육군사관학교의 설립 목적에 정면으로 어긋나는 것이다.

6. 기타 쟁점

6.1. 창군 이후 인물 관련

국방부는 '창군 이후'의 인물을 기념하고자 한다고 했는데, 해군사관학교에는 이순신 동상이 있으며 국립외교원에는 고려-거란 전쟁에서의 외교 담판으로 유명한 서희의 동상이 있다. 육군사관학도들에 대한 교육적 목적에 부합한다면 꼭 창군 이후의 인물만 기념할 필요는 없다는 지적도 있다. 그리고 이들이 제거하려는 이범석은 창군 이후 초대 국방부 장관을 지낸 인물이므로 이들의 논리대로라면 없던 흉상도 만들어 비치해야 할 인물인데 있던 것도 없애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6.2. 빨치산 활동 관련

전술되어있는 국방부의 8월 28일 입장문에는 '봉오동과 청산리 전투에도 빨치산으로서 참가했다는 의혹'이 있다고 했는데, 국방부가 빨치산의 개념조차 모르는 게 아닌지 의심스럽다. 그 근거가 소련측 정부문서인데, 소련에서 비정규 무장부대를 지칭하는 말이 바로 '빨치산(파르티잔)'이므로 '빨치산'이라 기록한 것은 지극히 상식적인 일이다. 게다가 6.25 전쟁 당시 대한민국을 위해 싸운 비정규부대[81]도 빨치산이라 불리기도 했다.
"유격전과 비슷한 용어로 빨치산전 혹은 게릴라전이 흔히 사용되고 있다. 러시아에서 나폴레옹의 모스크바 원정군과 싸우면서 등장한 빨치산이라는 용어는 싸우는 사람 혹은 그 단체를 뜻하고, 스페인 산간지역에서 프랑스군과 투쟁하면서 사용된 게릴라전은 소규모 전투행위를 의미한다. 이처럼 각 국의 역사적 배경에 따라 빨치산전 혹은 게릴라전이라고 구분하기도 하지만, 6.25 전쟁 당시 국군과 미군은 게릴라전, 혹은 빨치산전을 혼용하였다. 1952년 11월 유격대 간부들의 훈장을 상신할 때 게릴라대원이라는 표현을 썼으나, 백령도 레오파드기지사령부에서 발행한 동키 제13부대[82]의 대원 신분증에는 ‘애국 빨치산부대의 일원’이라고 했다. 1952년 11월 미 극동군사령부 예하 한국인 유격부대를 주한 유엔군 유격부대(UNPFK)에서 보듯이 파르티잔(partisan)이라고 했다."
조성훈, 한국전쟁의 유격전사,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03, 4~5쪽

6.3. 홍범도함 함명 변경

현재까지 대한민국 해군이 특정 함명을 개정한 사례는 포항급 초계함 PCC-768 舊이리함을 해당 도시의 도농통합으로 인한 명칭 변경에 따라 1999년 익산함으로 개칭한 사례와 강경급 기뢰탐색함 MHC-567 舊금화함을 해당 지자체의 요청에 따라 2018년 현재 불리는 지명인 김화함으로 변경한 사례뿐이다.[83] 거기에 함명에 대한 권한은 전적으로 해군이 가지고 있는데, 해군본부 산하 기획관리참모부장이 주관해 함명을 결정 보고하며, 해군참모총장이 승인하여 확정된다. 해군의 권한을 국방부가 침해하는 것으로 비춰질 수도 있고, 이러한 사실이 국방부-해군 간 조율이 되지 않았음을 시시하는 바이기도 하다.
  • 이런 사정과 별개로 한번 정해진 함명을 바꾸는 것은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사유가 아니라면 좀처럼 받아들이기 어렵고, 특히 그동안 함명 결정에 대해 나름의 오랜 전통을 갖고 있는 해군 입장에서는 더욱 그렇다. 현행 규정상 함명 부여에 대한 절차와 과정은 있으나, 함명을 교체하는 절차는 별도로 규정된 바가 없는데 그 이유는 당연히 함명을 교체하는 일이 흔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래의 사례들은 보통 국가가 망하거나 잘못된 역사적 사실을 바로잡기 위한 목적으로 이루어진 사례들인데, 흔한 일이 아니다.[84]
  • 나치 독일도이칠란트급 장갑함의 1번함은 도이칠란트함이었으나 국가 이름인 "도이칠란트"라는 함명을 가진 배가 침몰할 경우 국민들에게 끼칠 악영향을 감안해서 뤼초(Lützow)로 개명했다.
  • 소련 해군슬라바급 미사일순양함 1번함 '슬라바'가 소련 해체로 인해 함명을 '모스크바'로 변경[85]했고, 이외에도 구 소련 해체 이후 여러 군함들의 함명이 변경되었다.
  • 미 해군은 2023년에 타이콘데로가급 순양함 16번함 CG-62 USS 챈슬러스빌의 함명을 USS 로버트 스몰스(Robert Smalls)[86]로, 해양조사선 USNS '머리'[87]를 USNS '마리 타프'[88]로 변경했다. 이는 2020년 회계연도 국방수권법에 의한 것이었다. 여기엔 남부연합을 기리는 미군 시설 및 장비들의 명칭을 다른 것으로 교체하라는 내용이 포함된다. 미 해군의 설명 참조. 노예제를 옹호하던 남부연합 자체에 인종차별적 요소도 있거니와 무엇보다 남부연합은 미국 입장에서 그냥 반란군이므로 그것을 기리는 게 이상한 일이었다. 참고로 이 2020년도 국방수권법은 바로 이 조항, 남부연합 출신을 기리는 연방군 시설 및 장비명을 다른 것으로 교체하라는 문구 때문에[89] 도널드 트럼프 당시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했는데#트럼프, '남부연합' 장군 딴 기지명칭 변경 반대하며 줄곧 거부 방침 공언 그럼에도 미 하원과 상원의 공화당마저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를 무효화하기로 합의하면서 통과되었다. 위의 두 함정의 함명 변경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7. 여론을 무시한 강행

육사 흉상 철거는 여론을 일방적으로 무시한 윤석열 정부의 강행 조치였다. 당장 다수의 여론조사에서도 일방적인 추진에 대한 반대가 훨씬 더 많았다. #1 #2 #3 심지어 여당인 국민의힘 내에서도 일부는 왜 과거사에 얽매여 민생문제도 아닌 이념전쟁을 벌이냐는 부정적 반응을 보였지만[90], 당시 정부에선 이 모든 여론을 무시하고 그냥 추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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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특히 극우 반공 성향 언론인인 조갑제조차 홍범도는 그렇다치더라도 다른 독립운동가 흉상들은 홍범도 흉상만 철거하면 찔리니까 같이 철거하는 거 아니냐며 진짜로 그러면 국방부는 정부 부처도 아니라고 극렬하게 비난했다. #[2] 장세윤, "‘독립전쟁의 영웅’ 홍범도의 귀환, 그 시사점과 과제", 역사와 현실 121, 2021, 20-21쪽. #[3] 같은 독립운동을 했어도 북한 정권 창립 및 남침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 김원봉이 재평가에도 건국훈장을 수여받지 못한 것과 희비가 엇갈린 지점이다.[4] 반병률, "홍범도(1868-1943)의 항일무장투쟁에 대한 재해석", 국제한국사학 1, 2013, 110쪽. #[5] 반병률, "홍범도 장군의 항일무장투쟁과 고려인 사회", 한국근현대사연구 67, 2013, 634쪽. #[6] 집단농장 근무나 강제이주 이력에서 알 수 있듯이 오히려 홍범도 장군은 소련에서 고초를 겪었지 공산주의니 뭐니하며 이념 투쟁을 한 적이 없다.[7] 실제로 카이로 회담에서 스탈린루즈벨트도 별 생각 없고 심지어 처칠은 강하게 반대했던 한국독립을 밀어붙여 관철시킨 것은 장제스였다.[8] 지청천의 경우 해당 이유로 중국에서도 인정받는 군인이다.[9] 실제로 40년대 만주~화북에서 공산당 활동을 했던 사람들은 대부분 임정을 적대하고 팔로군 등에서 중화민국의 항일전쟁수행을 방해했으며, 죽지 않았으면 거의 어김없이 북한으로 가서 전범이 되었다. 반면 홍범도처럼 앞선 시기에 활동했던 사람들은 대체로 공산주의의 영향을 받았더라도 임정의 영향력을 인정했으며, 해방 이후엔 대한민국으로 귀국해서 정부수립을 돕거나 좌우연정을 시도한 경우가 많다.[10] 장쭤린황고둔 사건으로 일본에 의해 암살당하긴 했지만, 그 직전까지도 일본 제국과 밀약을 맺어 만주에서 일본의 치안활동, 즉 한인 독립운동가 체포나 구금에 협조했다. 물론 그러면서도 암묵적으로 한인 독립운동을 눈감아주거나 정보를 제공하지 않음으로써 일본을 견제하기도 했지만. 오늘날 중국 동북 지역이 북한에 그다지 우호적이진 않으면서도 북한이탈주민들은 체포하고 북한 독재정권에 넘기곤 하는 것과 비슷한 느낌.[11] 대표적으로 몽골의 로만 폰 운게른슈테른베르크가 있다.[12] 예컨대 중화민국.[13] 특히 김일성은 홍범도의 별세 당시에는 독립운동을 하기는커녕 소련으로 도망쳐 소련군 대위로 비교적 편하게 지냈다.[14] 위부터 박정희, 노태우, 박근혜, 문재인 전 대통령이다. 즉 좌우파나 당을 가리지 않았다는 의미. 자료 화면으로는 보도되지 않았지만 김영삼 전 대통령 역시 유해 봉환을 시도했었다. # 여기에 없는 이승만, 윤보선, 최규하, 전두환, 김대중, 노무현의 경우는 불명.[15] 이후의 발언 맥락을 보면, 해당 기자는 자유민주주의의 가치 자체를 부정하기보다는, 역사적으로 자유민주주의를 핑계삼아 권위주의적 반공주의를 오용해왔던 부분을 지적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16] 엄밀히 말하면, 대한민국을 비롯한 자유민주주의 선진국들은 대의제 민주주의와 민주적 정권교체를 인정하는 개혁적 사회주의 분파들만을 자유민주주의의 일원으로 간주한다. 북한식 사회주의는 물론 마르크스-레닌주의에 기초한 동구권의 현실사회주의는 모두 부정한다.[17] 안중근도 '창군 이전' 인물이기 때문이다. 육군은 안중근의 순국 100주기인 2010년부터 안중근을 '장군'으로 호칭하고 있다. 실제로도 대한의군 참모중장 신분이었으니 '장군'이라는 칭호가 적합하고.[18] 참고로 상술했지만 건국훈장 수여는 국가재건최고회의 시절, 홍범도함 건조는 박근혜 정부 시절에 이루어졌다. 이로써 보수에게 상징적인 부녀 대통령들인 박정희 - 박근혜 정권 시기에도 홍범도가 인정받았음을 알 수 있다. 게다가 이종섭은 그 '공산주의자'의 이름이 새겨진 잠수함에 격려차 승선했던 적도 있다. #[19] 국방부와 합참은 서로 별개의 청사를 사용했으나 윤석열 정권이 임기 초 집무실 이전을 강행한 뒤로 공동으로 건물을 사용하게 됐다. 그래서인지 이 흉상 역시 이전이 추진되고 있다. #[20] 여운형의 경우 해방 이전의 공적과 해방 이후의 건국 및 민족통일을 위해 헌신한 공적으로, 홍범도는 독립군을 지휘해 혁혁한 공적을 올렸으며, 항일무장투쟁의 상징으로 국민통합과 민족정기 선양, 고려인의 민족정체성 형성, 카자흐스탄과의 우호 증진 기여의 공적이 있다.[21] 이들 단체들은 신원식이 자주 접했던 시민단체이고, 실질적인 군인 단체(재향군인회 등)은 아직까지 이 논란과 관련해 언급을 피하고 있다. 다만 신원식은 저 두 사람이 발언하기 전에 "독립기념관에라도 이전하자"라는 얘기를 해 최소한 독립운동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다.[22] 즉, 이승만이나 서재필처럼 아예 미주 등지에 있어 중국·소련의 영향력에서 자유롭게 독립운동을 수행할 수 있었던 예가 아닌 인물들.[23] 북한과의 접점을 억지로 찾자면 이회영이 세운 신흥무관학교에서 김원봉 등 북한 내각에 참여한 인물들이 있었던 것 정도인데, 당연한 얘기지만 신흥무관학교는 독립운동하라고 만든 것이지 공산당 활동을 하라고 만든 것이 아니고, 실제로 유명한 독립운동가들을 수없이 배출해내 그 역할을 완수한 만큼 억지 짜맞추기에 가깝다.[24] 전쟁의 역사[25] 홍범도 장군 흉상 논란과는 별개로 오해를 부를 수 있는 비유다. 레닌 공산당이나 스탈린 공산당이나 패권주의를 이용한 공산주의 확산이라는 대외 정책은 같은 맥락을 공유하기 때문. 러시아 혁명 당시 러시아 제국이 소비에트 혁명 세력과 싸우느라 제국 내 타 민족들에 대한 지배력을 상실했을 때 동유럽의 많은 민족들이 독립을 선언하고 자신들의 민족 국가를 건설했다. 그러나 소비에트는 이런 국가들을 북한의 남침과 다를 바 없이 침략하여 우크라이나, 벨라루스를 병합하고 핀란드, 발트 3국, 폴란드, 몰도바, 루마니아를 공격하였다. 그리고 당시의 지도자는 분명히 스탈린이 아니라 레닌이었다. 또한 레닌 스스로도 저서 <제국주의론>에서 식민지 국가들의 독립을 지원하는 것은 제국주의를 몰아내어 공산주의로 이끌기 위함이라고 밝혔다. 최소한 '공산화가 아니라 순수한 의도로 조선 독립을 지원한 착한 레닌' vs. '한반도 공산화를 위해 북한을 도운 나쁜 스탈린'의 구도로는 볼 수 없는 이유다.[26] 이때는 김일성이 만으로 7~10세. 요즘으로 치면 초등학교 1~4학년 다닐 나이이다. 이때의 홍범도 무장투쟁과 김일성이 관련이 있을래야 있을 수가 없다.[27] 해당 발언은 일부 극우 유튜버들만 주장하는 수준의 흑색선전이다. 과거 윤서인이 비슷한 문제로 공익 소송까지 가기도 했다. #[28] 홍범도와 이청전이 상해파를 배신한 것이 아니라 상해파의 박일리야가 먼저 위협을 했기 때문에 탈출했다고 증언하는 것이다.[29] 윤상원, 러시아지역 한인의 항일무장투쟁 연구: 1918-1922, 학위논문(박사)-- 高麗大學校 大學院: 韓國史專攻 2010. 2, 200~202[30] 반병률, "홍범도(1868-1943)의 항일무장투쟁에 대한 재해석", 국제한국사학 1, 2013, 102-103쪽. #[31] 신주백, "독립전쟁과 1921년 6월의 자유시 참변", 지식의 지평 31, 2021, 103쪽. #[32] 오세호, "소비에트 러시아의 동아시아 정책과 초기 한인사회주의 세력의 갈등(1919~1921)", 한국독립운동사연구 71, 2020, 154쪽. #[33] 윤상원, "홍범도의 러시아 적군 활동과 자유시사변", 한국사연구 178, 2017, 249쪽. #[34] 장세윤, "‘독립전쟁의 영웅’ 홍범도의 귀환, 그 시사점과 과제", 역사와 현실 121, 2021, 17쪽. #[35] 윤상원, "홍범도의 러시아 적군 활동과 자유시사변", 한국사연구 178, 2017, 257쪽. #[36] 윤상원, "러시아지역 한인의 항일무장투쟁 연구 : 1918-1922", 고려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10, 220-223쪽. #[37] 주미희, "자유시참변 1주년 논쟁에 대한 고찰", 역사연구 43, 2022, 215쪽. #[38] 심헌용,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소비에트러시아 외교관계의 형성과 독립외교 전개 그리고 ‘비밀군사협정’", 재외한인연구 54, 2021, 20쪽. #[39] 신주백, "독립전쟁과 1921년 6월의 자유시 참변", 지식의 지평 31, 2021, 101쪽. #[40] 반병률, "러시아(소련)의 대한민국임시정부 인식", 역사문화연구 35, 2010, 512쪽. #[41] 심헌용,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소비에트러시아 외교관계의 형성과 독립외교 전개 그리고 ‘비밀군사협정’", 재외한인연구 54, 2021, 20쪽. #[42] 이때 SBS김태훈을 비롯한 기자들이 전하규 대변인의 레닌 시절 소련 공산당스탈린 이후 공산당의 차이와 빨치산의 어원인 파르티잔(partisan) 등을 언급하며 국방부의 주장을 반박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영상[43] 반병률, "홍범도(1868-1943)의 항일무장투쟁에 대한 재해석", 국제한국사학 1, 2013, 105쪽. #[44] 윤상원, "홍범도의 러시아 적군 활동과 자유시사변", 한국사연구 178, 2017, 252쪽. #[45] 윤상원, "러시아지역 한인의 항일무장투쟁 연구 : 1918-1922", 고려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10, 217쪽. #[46] 윤상원, "러시아지역 한인의 항일무장투쟁 연구 : 1918-1922", 고려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10, 213쪽. #[47] 권희영, "한인 사회주의운동 연구", 서울: 국학자료원, 1999, 208-209쪽.[48] 역사학자이자 독립운동가. 당시 상해파로 자유시 참변에서는 피해자였다.[49] 계봉우, 『조선역사』 권3, 133-134쪽.[50] 신주백, "독립전쟁과 1921년 6월의 자유시 참변", 지식의 지평 31, 2021, 107쪽. #[51] 윤상원, "러시아지역 한인의 항일무장투쟁 연구 : 1918-1922", 고려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10, 217쪽. #[52] Тепляков Алексей Георгиевич, 2018,「К ПОРТРЕТУ НЕСТОРА КАЛАНДАРИШВИЛИ (1876-1922): УГОЛОВНИК-АВАНТЮРИСТ, ПАРТИЗАН И КРАСНЫЙ КОМАНДИР」, Текст научной статьи по специальности «История и археология», 47~51쪽 https://cyberleninka.ru/article/n/k-portretu-nestora-kalandarishvili-1876-1922-ugolovnik-avantyurist-partizan-i-krasnyy-komandir 번역 재인용[53] 즉 홍범도가 친일반민족행위자에 준한다는 뜬소문이다.[54] Тепляков Алексей Георгиевич, 2018,「К ПОРТРЕТУ НЕСТОРА КАЛАНДАРИШВИЛИ (1876-1922): УГОЛОВНИК-АВАНТЮРИСТ, ПАРТИЗАН И КРАСНЫЙ КОМАНДИР」, Текст научной статьи по специальности «История и археология», 47~51쪽 https://cyberleninka.ru/article/n/k-portretu-nestora-kalandarishvili-1876-1922-ugolovnik-avantyurist-partizan-i-krasnyy-komandir 번역 재인용[55] 윤상원, 러시아 지역 한인의 항일무장투쟁 연구: 1918-1922, 학위논문(박사)-- 高麗大學校 大學院: 韓國史專攻 2010. 2, 207-208[56]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독립군과 광복군 그리고 국군, 서울: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17, 98쪽[57] 이는 현대 대한민국 군형법에도 금지되어 있고, 이를 저지를 경우 엄하게 처벌받는 것이다. 단순 약탈도 무기 또는 3년 이상 징역에 처하고, 이 과정에서 살인까지 저지를 경우 사형까지도 가능하다.[58] "청산리대첩 참가자 이우석 친필 수기", 48-51면(51-54), 독립기념관 (자료번호 1-014724-000) #[59] 1961년 UC버클리대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은 후 콜로라도대, 다트머스대를 거쳐 1963년부터 펜실베이니아대 정치학과에 재직하면서 로버트 스칼라피노 UC버클리대 교수와 함께 쓴 ‘한국공산주의운동사’을 1973년 미국에서 출간해 이듬해 미국 정치학회가 주는 최고 저작상인 우드로 윌슨 재단상을 받은 후 세계학계에서 한국 현대사 연구자로 인정받으며, 한국 공산주의운동사' 연구의 권위자로 한국에선 국내에서는 위암 장지연상(1990년))과 경암상(2012), 인촌상(2018년)을 받은 '한국 공산주의사'1세대 연구의 권위자이다. #[60] «노보시비르스크 지역의 정치적 억압 희생자들에 대한 기억» 편집위원회(소련에서 희생된 피해자들에 대한 연구회) 위원이자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시베리아지부 역사연구소 선임연구원이다. 푸틴의 독재정부, 소련에 대한 미화, 러시아의 폐쇄적인 민족주의, 공산주의, 반서방주의를 직접적으로 비판하는 인물이기도 하다.[61] 연구의 주제가 된 네스토르 칼란다리시빌리은 자유시 참변을 지휘한 당사자이므로 자유시 참변과 직접적으로 연관된다.[62] Тепляков Алексей Георгиевич, 2018,「К ПОРТРЕТУ НЕСТОРА КАЛАНДАРИШВИЛИ (1876-1922): УГОЛОВНИК-АВАНТЮРИСТ, ПАРТИЗАН И КРАСНЫЙ КОМАНДИР」, Текст научной статьи по специальности «История и археология», 47~51쪽 https://cyberleninka.ru/article/n/k-portretu-nestora-kalandarishvili-1876-1922-ugolovnik-avantyurist-partizan-i-krasnyy-komandir 번역 재인용[63] 위원회장은 김순수 교수부장.[64] 참고로 이 학회는 명칭만 보면 국내를 대표하는 현대사학회쯤으로 착각하기 쉬운데, 실상은 학회이름만 그럴싸하고 정작 구성원이나 활동은 주류학계와 한참 동떨어져 있다.[65] 여기에 노태우 정부 또한 유해 봉환을 추진했고 박근혜 정부는 손원일급 잠수함에 홍범도의 이름을 따와 '홍범도함'이라고 명명하는 등 기존 보수 정권에서도 홍범도에게 높은 대우를 했던 바가 있다.[66] 심지어 이보다 훨씬 덜한 행적을 보였던 이관술은 억울하게 옥에 갇혀 대전형무소 학살 사건에서 희생당하고 만다.[67] 박정희여순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었고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나 백선엽을 대표로 한 같은 만주국 선배들의 구명과 박정희 본인의 적극적인 협조, 엉망진창이었던 숙군 작업을 통해 지속적인 감형이 이뤄져 예비역 예편이 되는 수준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68] 박정희는 군사정변, 10월 유신을 통한 영구 집권 획책 등 민주주의와 거리가 먼 행보를 보인 독재자였다. 당장 김영삼을 국회에서 제명시키는 것 등 정적 정치인이나 민주화운동가들을 탄압하고, 심지어 여당인 민주공화당 인사조차 박정희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대공분실에 끌고 가 고문한 적도 있다. 자유민주주의를 단순히 반공의 동의어 정도로 여기는 무식한 수준의 구시대적 인식을 드러낸 셈이다.[69] 도리어 해방 전후 시기에 독립운동에 참여했었던 조선공산당, 조선건국동맹 등의 사회주의 성향의 세력들이 최대규모 정치세력으로 존재했다는 점과 상당수의 독립운동 단체가 사회주의 계열(중국 공산당, 소련 공산당 등. 심지어 중국 국민당도 국부천대 이전에는 사회주의적 성향이 있었다.)과 연대했다는 점과 이런 친사회주의적 성향은 당시 한반도뿐만 아니라 제3세계의 해방운동 전반에서 나타난다는 점을 보면 독립운동가들 사이에는 오히려 좌파 계열이 다수였다고 보는 게 일반적이다.[70] 특히나 대한민국 최초의 명예원수를 추대하는 데 있어서 각종 의견이 오고갔을 때도 본인의 유명세와 별개로 간도특설대 복무 경력이 큰 걸림돌이 된 백선엽과 다르게 김홍일은 그야말로 흠잡을 곳이 없는 일생을 살아왔기 때문에 명예원수를 추대한다면 백선엽이 아닌 김홍일이 되어야 한다는 의견이 매우 많았다.[71] 대한제국군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했다가 경술국치 직후 일본 육사에 편입되었다. 일본군에서의 최종 계급은 대좌(대령)으로, 조선인 일본군 중에서는 홍사익 중장과 일부 왕공족을 제외하면 최고참이었다.[72] 사실 이응준도 처음부터 창군에 참여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응준은 과거 자신이 친일 군인이었다는 사실이 부끄러워 스스로 근신하고 창군 협조 요청도 고사했었다. 그러나 미군정이 "일본에 충성했던 사람이 진짜 조국에는 충성 못할 이유가 어디 있나"라고 참여를 종용하여 받아들인 것이었다.[73] 현 국방부장관 격 관직.[74] 지청천은 이응준과 무관학교 및 일본 육사 시절 동기이기도 했다.[75] 일본군에서 최종 계급은 역시 대좌(대령).[76] 일본군에서의 최종 계급은 소좌(소령).[77] 사실 결정적인 취소 사유는 이듬해 벌어진 천안함 피격 사건연평도 포격전이다. 북한의 잇달은 도발로 인해 논의 자체가 흐지부지된 것이다.[78] 드골은 프랑스 대통령이기에 앞서 대전기 자유 프랑스의 지도자로서 나치 독일에 맞서 싸운 인물이며, 항상 '위대한 프랑스'를 외칠 만큼 열렬한 프랑스 민족주의자였다. 때문에 나치 점령군으로서 프랑스에서 복무한 이력이 있던 슈파이델이 나토 지상군 사령관의 자격으로 프랑스군을 지휘하는 일을 용납하지 못한 것이다.[79] MBC의 보도에 따르면 페이스북에 업로드된 영상은 확인하지 못했는지 9월 1일 14시 기준으로도 공개되어 있었으나, 17시쯤 비공개되었다.[80] 베트남군은 당군이기 때문에 베트남 공산당 당원일 가능성이 높다. 당원이 아니더라도 고도의 공산주의 사상교육을 받은 예비당원일 것임은 확실하다.[81] 그 중에는 후퇴에 실패해 고립된 육군사관학교 생도가 결성한 불암산 호랑이 유격대도 있다.[82] 1.4 후퇴 당시 서해 5도로 피난온 황해도민들로 구성된 부대. 규모는 약 5,000~8,000명이었다. 백령도를 비롯한 서해 5도를 중심으로 황해도 지역에서 투입되었으며 종전까지 적군 4,000명을 사살하였다.[83] 이와 달리 PCC-777 대천함은 해당 도시보령시로 통폐합되었음에도 함명을 개정하지 않고 있다. 사실 이리시가 익산군과 통합되고 이리함이 익산함으로 바뀐 이유는 이리역 폭발 사고에 대한 트라우마가 가장 크다. 그 외에는 인명을 붙이지 않은 옛 기러기급 고속정의 급 명칭을 참수리급으로 바꾼 정도다. 함급 이하 정급에는 따로 함명이 붙지 않으며, 선체번호만 부여한다. 대한민국 해군은 아무런 기반도 없던 나라에서 가장 먼저 창군을 시작한 손원일 제독과 그 일가의 독립운동 경력 및 인사들의 깨끗한 출신을 자부심으로 여기고 정훈교육에 적극적으로 활용 중이다. 국가의 최전선에서 작전을 하는 특성상 주변국과의 접점이 잦아 일본 해상초계기 저공위협 비행 사건과 같이 3군 중 일본과의 충돌도 가장 많이 겪는 입장이므로 항일 운동에 대한 폄하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행위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특히 손원일 제독은 강력한 반공주의자였음에도 전시 단순 부역자에 대한 억울한 처벌을 방지하기 위해 노력했던 인물이었다.[84] 후술하겠지만 미 해군의 함명 변경은 역사적으로는 20회 이상 있었는데,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의 지난 70여 년 동안에는 한 번뿐이었다.[85]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초기에 격침되었다.[86] 남부 사우스캐롤라이나 출신의 흑인 노예로, 남북전쟁 당시 남부 해군의 CSS 플랜터를 이끌고 북부로 투항한 인물이다.[87] 남부 해군을 이끌던 해군 장교이자, 현대 해양학의 창시자로 간주되는 매튜 폰테인 머리(Matthew Fontaine Maury)의 이름을 따왔다.[88] 미국의 여성 해양학자 겸 지질학자인 마리 타프(Marie Tharp)의 이름을 따왔다.[89] 이 이외에도 해외 주둔 미군을 자의적으로 철수시키지 못하는 조항도 거부권 행사의 원인이었다. 대표적으로 방위비분담금을 명분으로 한 주한미군 철군.[90] 다만 당시 친윤 지도부는 옹호하거나 침묵하는 반응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