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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돌프 히틀러/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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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white> Adolf Hitler: Leader of the Third Reich
아돌프 히틀러: 제3제국의 지도자
(2016년 4월 12일)

1. 어린 시절2. 화가 지망생 히틀러3. 제1차 세계 대전4. 나치당 입당 과정5. 히틀러의 연설 능력6. 뮌헨 폭동과 수감생활7. 나치당의 집권8. 전운이 밀려오다9. 제2차 세계 대전과 몰락
9.1. 전쟁범죄 혐의들
9.1.1. 장애인 학살 명령9.1.2. '유대인 멸종' 발언9.1.3. 요제프 괴벨스의 일기에 담긴 히틀러의 명령들9.1.4. 가해자들의 발언들9.1.5. 게르슈타인 보고서9.1.6. 코헤어 보고서9.1.7. 레벤스라움 및 '절멸 전쟁'9.1.8. '특공대 명령'9.1.9. '나흐트 운트 네벨' 명령9.1.10. 네로 명령9.1.11. '패배주의자' 즉결 처형 명령
10. 자살, 그 뒷이야기
10.1. 권총자살? 음독자살?

1. 어린 시절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Bundesarchiv_Bild_183-1989-0322-506%2C_Adolf_Hitler%2C_Kinderbild_retouched.jpg
갓난아기 시절의 아돌프 히틀러

아돌프 히틀러는 1889년 4월 20일, 독일오스트리아의 접경도시인 브라우나우암인에서 아버지 알로이스 히틀러와 어머니 클라라 히틀러의 넷째로 태어났다. 위로는 이복형들과 3명의 친형이 있었지만, 친형들은 아돌프가 태어나기도 전에 모두 사망했다. 히틀러가 태어나고 얼마 뒤 도나우 강변의 린츠로 이사하여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아돌프 히틀러가 태어나기 전 30여년간 가출한 채 바깥에 있었던 알로이스의 아버지 요한 게오르크 히들러는 히틀러(Hitler)라는 성을 가지고 가족들에게 나타났다. 가족들은 모두 할머니의 성인 시클그루버를 버리고 히틀러로 성을 바꿨고, 아돌프도 정식으로 아돌프 히틀러가 된다. 아돌프 히틀러는 새로운 성을 매우 마음에 들어했다. 왜냐하면 시클그루버라는 성은 촌스러운 축에 속했기 때문이었다. 이를 갖고 연합군들은 "니네 총통이란 양반, 오스트리아 페인트공 출신으로 원래 성씨는 '시클그루버'랜다."라며 전쟁 말년까지 독일군을 조롱했다.[1]

어린 시절 히틀러가는 지방 세무서장인 부친 덕에 엄청난 부잣집까지는 아니더라도 자신의 아들을 귀족들이 많이 다니는 학교에 보낼 만큼 중산층 중에서도 잘 사는 편이었다. 그런데 이 아버지는 가족을 홀대하며 걸핏하면 아내와 자식을 때리고 폭언을 일삼는 난폭한 가장이었다. 이 때문에 아돌프의 이복형 알로이스는 가출을 했고, 제2차 세계 대전 쯤에 영국에 정착해 버린다.[2] 또한 그 와중에 아돌프 히틀러는 장래희망 문제로도 아버지와 자주 갈등을 빚었는데, 아버지는 난폭하고 권위주의적이었지만 그래도 아버지인지라 자식들이 힘든 삶을 살기를 원치는 않았다고 한다. 그는 예술가가 되고 싶어 하는 아들에게 공무원이 되기를 강요하면서 폭력까지 일삼은 탓에 아들과의 사이가 좋을 수가 없었다.

단, 아돌프의 아버지 알로이스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가족들에게 가난한 삶만큼은 물려주지 않았다. 죽을 무렵 그는 연 2,420크로넨의 연금을 받고 있었는데, 당시 초등학교 교장의 연봉보다도 많은 금액이었다고 한다. 미망인에게는 연금의 반과 함께 4년치 연금의 1/4이 한꺼번에 지급되었다. 여기에 자녀 1인당 연 230크로넨의 연금으로 나왔다. 만 24세가 되거나 더 이른 나이라도 자립하는 시기에 종료된다는 조건이었다고 한다.[3]

히틀러는 공무원이 되기 싫었던 이유로 자유가 없음을 들었다. 자유가 없는 인간으로서 항상 사무실에만 앉아 있어야 하고 자기 시간을 가질 수가 없을 뿐 아니라 모든 생활의 내용을 서식용지에 일일이 써넣는 일을 강요당해야만 한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지루하고 식상하고 하품이 나올 만큼 싫었던 것. 이는 히틀러가 나의 투쟁이라는 책에서 주장한 바이다.

히틀러는 어릴 때부터 학업 포기 수준에 이르렀었다. 흔히 수학만 못 한 것처럼 알려져 있지만, 수학이 유독 전체 꼴찌 수준으로 지나치게 못 한 것이었을 뿐이지 다른 과목들도 잘 하는 거라곤 하나도 없었을 정도로 공부라면 아주 질색팔색하는 성격이었다. 중학교 시절 동안 문과 계열 과목 성적들도 다 하위권이었다. 명문 중학교를 다녔긴 했지만, 고등학교 들어가기도 버겁고 애초에 공부를 죽도록 싫어하는 최하위권 학생이 이런 학교를 다니는 건 의미가 없었다. 한 번은 시험 때 하위권 성적표를 받고 화가 나서 같이 공부 못 하는 애들과 어울려 학교 근처 양조장에서 돈을 내고 밤에 폭음 수준으로 맥주를 퍼마시다가 걸려서 학교 기숙사 사감에게 큰 벌점을 맞았던 적도 있다.

반대로 어머니는 아돌프가 태어나기 전 자식을 여러 번 잃어서 그를 유독 애지중지했다고 한다.[4] 자식의 잦은 사망은 근친관계로 인한 건강 이상이었을 가능성이 있고, 결국엔 아돌프와 동복여동생 파울라만 생존한다. 이 때문인지 동복 여동생 파울라만큼은 오빠가 잘 챙겨주었다.[5]

아버지 알로이스가 전형적인 권위주의적 가장인 탓에 히틀러는 아버지를 '쉽게 다가갈 수 없는 존재'로 여겼다. 『나의 투쟁』에서도 아버지의 대한 회상을 일부 볼 수 있는데, 알로이스가 뇌일혈로 사망했을 당시의 반응을 보면 마냥 아돌프가 아버지를 미워하고 원망하기만 했다고 보기 힘들다. 요약하자면, "자식으로서 아버지를 존경하긴 했으나 사랑을 느낀 기억은 거의 없다."라고 해석될 수 있다. 반면 인자한 성격의 어머니 클라라는 몹시 좋아했고, 어머니가 자식들을 아끼고 사랑한 터라 어머니와의 관계만큼은 반대로 각별했다. 실제로 어머니 클라라가 사망했을 때 아돌프는 크게 슬퍼했고, 히틀러 가문의 주치의 에드바르트 블로흐가 "아돌프만큼 어머니를 잃은 슬픔 때문에 그렇게 기진맥진해 있는 사람을 본 적은 없었다."고 증언했을 정도다.

일각에서는 아돌프 히틀러의 인종차별적인 행동이 아버지에 대한 반감에서 온 것이라 주장하기도 한다. 알로이스는 전형적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관료로서 제국이 표방하는 다민족, 다문화적 그 가치관을 자식들에게 주장했고 특히 알로이스의 근무지 린츠는 체코인과 오스트리아인의 접경지라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민족적인 가치관을 가졌고 결혼을 통한 혼혈도 많은 지역이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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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의 히틀러[6]
히틀러는 초등학교는 비교적 우수한 성적으로 마치고 실업학교에 들어갔지만, 이내 학업에 흥미를 잃어버렸다. 실업학교 중등 과정까지는 이수했으나, 고등 과정은 유급 당하다가 결국 자퇴한다. 중등과정 당시 히틀러는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과 같은 반이었지만 딱히 친분이라는 것은 없었는지 서로를 언급한 적은 없었다. 나중에 어머니의 간청으로 전학을 가서 재진학해 보지만, 결국 또다시 자퇴를 하게 된다. 한편 이 시기에 아버지 알로이스 히틀러가 사망했는데, 아돌프 히틀러가 13살 즈음이 되었던 때였다. 알로이스 히틀러는 공무원 생활에서 은퇴하고 동네 술집에서 을 마시다 평소에 앓고 있던 지병이 악화되어 급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때 아버지가 평소에 그렇게 밉고 싫었어도 막상 죽었을 때만큼은 크게 슬퍼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가족들에게 유산과 연금을 많이 남겼기 때문에 남은 가족들의 생활엔 별 다른 타격이 없었다고 한다.

히틀러가 쓴 나의 투쟁에 따르면 히틀러는 자신이 반유대주의, 독일민족주의에 입각한 레오폴드 푀슈라는 역사교사의 수업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회상하고 있으며, 비교적 주위에 그러한 이야기를 많이 했다고 한다. 그런데 나의 투쟁에는 히틀러가 정치적인 선전을 위해서 쑤셔넣은 내용들이 들어가 있다는 주장이 많으며, 히틀러는 유년기에는 역사 시험에서 낙제를 면하지 못할 정도의 형편없는 실력이었다. 히틀러가 정치에 입문하고 나서부터는 역사에 관한 조예가 꽤 깊어졌는데, 한때 측근이었던 에른스트 한프슈탱글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역사에 대한 관심이 많았고, 미술에 관한 책들과 더불어 독일 근현대 역사책들을 즐겨 읽었다고 한다.[7] 총통이 되고 난 뒤에도 식사 자리에서 종종 세계사 이야기를 한 것을 보면 편견과 달리 역사에 대한 지식이 상당히 해박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 화가 지망생 히틀러

히틀러의 그림들
파일:Hitler_Watercolor_-_Munich_Royal_Hofbräuhaus.jpg
뮌헨 로얄 호프브뢰 하우스
파일:Adolf_Hitler_-_Die_Karlskirche_im_Winter_(1912).jpg 파일:Adolf_Hitler_-_Schloss_Neuschwanstein.jpg
겨울의 칼스키르헤 교회 노이슈반슈타인 성

1905년, 열여섯의 나이로 히틀러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수도였던 으로 무작정 올라왔는데, 아버지가 사망해서인지 갑작스러운 상경에도 다른 가족들의 반대는 없었다. 갓 수도로 올라온 시골뜨기에게는 웅장한 건물들과 예술의 향기로 가득 찼던 빈은 신세계였고, 히틀러는 예술가를 꿈꾸며 국립 미술 아카데미에 지원하지만 낙방하였다. 그래서 재수하였지만 이듬해에도 떨어졌다.[8] 이에 히틀러는 직접 교장에게 찾아가 항의를 했고, 공교롭게도 유대인이었던 교장은 "자네의 그림은 예술보다도 건축에 가깝네. 건축 학교로 가는 게 어떤가?"라며 건축을 권유했다. 훗날 히틀러는 이에 굉장한 모욕감을 느꼈다고 후일 저서에 회고했다. 이러한 '화가 히틀러'의 행적은 당대부터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던 매우 유명한 일화로,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연합국 프로파간다부터 현재까지도 미디어에서 히틀러를 희화화할 때 자주 묘사된다.[9]

그러나 이 말은 그런 의도가 아닌데 히틀러 본인이 그렇게 느낀 것뿐이라는 설이 있다. 당시 입시는 지정된 상징적·성경적 장면들 중 두 가지를 그리는 실기 시험과 포트폴리오 심사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히틀러의 작품은 인물이 적다(few heads)는 점을 지적받아 통과되지 못했다고 한다. # 사실 위 그림을 보면 알듯이 히틀러가 원근법 실수가 조금 있지만[10] 미술사적 의의가 없을 뿐 그림 자체는 잘 그린 게 맞으며, 무엇보다도 그림을 팔아서 생계 유지가 가능했다는 점에서 상업 일러스트레이터 기준으로는 분명 재능이 있는 사람이었다.[11] 하지만 자신 있는 건축물 그림과는 달리 인물의 감정을 표현하거나 인물과 배경을 조화시키는 것에는 미숙했는데, 학교 측에서는 바로 그 부분을 평가했기에 불합격시킬 수밖에 없었다.

당시 유럽 예술의 기조는 초현실주의였다. 히틀러는 그림을 팔아서 밥벌이를 한 엄연한 프로 일러스트레이터였으나, 예술을 하는 사람이라면 기본적으로 가져야 할 본인을 작품에 투영해 메시지를 전달하는 소질이 적었다. 위대한 예술 작품으로 불리는 작품들 중에서는 단순히 엄청나게 잘 그린 것으로만 유명한 것도 분명 존재하지만, 사진이 등장한 이후의 그림, 예술은 현실의 단순한 모사를 넘어서 창작자가 추구하는 신념이나 고뇌를 담는 것으로 패러다임이 전환되었다. 하지만 히틀러의 작품은 빈센트 반 고흐파블로 피카소처럼 아이덴티티, 즉 화풍이 독창적인 것도 아니었으며, 신념이나 주제라고 할 만한 것이 담겨있지 않은 평범한 그림이었다. 현실의 완벽한 모사를 추구한 그림이라기에도 어긋난 원근법이 곳곳에서 발견되며, 색감 또한 단조로운 편이다. 어느 시선으로 보나 히틀러의 그림은 일반인들이 보기 좋은 정도의 감상을 느끼고 방에 인테리어 소품으로 걸어놓기 위해 구입할 정도는 되지만, 평론가들 입장에서는 아무런 상상력이나 느낌도 없이 기계적으로 건축물을 그린, 비평할 가치나 매력을 느낄 수 없는 평범한 그림들이다.[12]

이렇게 히틀러의 미술적 재능이 있었다는 의견과 없었다는 의견이 혼재하는 이유는 '재능이 있다'의 기준을 어떻게 잡느냐의 문제이다. 예술적 가치로 본다면 히틀러는 주목할 만한 부분은 전혀 없는 그냥 그림쟁이였으나, 상업 일러스트레이터의 기준으로 본다면 히틀러는 재능 있는 그림쟁이라 할 수 있으며 둘 다 맞는 말이다. 비유하자면 그림 실력으로 게임회사 아트팀에 취직한 사람도 '재능이 있는가'라고 하면 상업 일러스트레이터들과 미대 교수의 대답은 다를 것이다. 이를 종합하자면 결론적으로 히틀러의 미술적 능력은 "그림으로 자기 밥벌이는 가능하지만 미술사에 이름을 남길 수는 없는 상업 일러스트레이터" 수준이라고 볼 수 있다. 만일 히틀러가 평화로운 시대에 태어났다면 역사에 이름을 남기지 않은 채 그저 조금 극단적인 정치 성향을 가졌을 뿐인 일러스트레이터로 조용히 살다 갔을지도 모른다. 따라서 건축학과를 가보라는 교장의 말은 그림을 못 그린다고 흠잡는 것일 수도 있지만 적성을 살리는 길을 권했다 볼 수 있는 것이다.

물론 히틀러는 건축학과를 가라는 제안을 도저히 이행할 수 없었다. 당시 오스트리아에서 건축 학교에 입학하려면 먼저 실업 학교를 졸업해야 했는데, 히틀러는 실업 학교를 중등 과정만 마치고 중퇴하여 고등학교 졸업장조차 없었다. 또한 다른 교육들이라도 대신 받으려고 해도 능력이 안 되었던 나머지 받을 수가 없어 좌절하고 만다. 특히 건축학과는 예나 지금이나 수학을 잘해야 되는데, 히틀러는 수학 성적은 낙제였으니 건축학을 이수할 수 없었다. 결국 히틀러는 학업을 완전히 접어야 했고, 이런 좌절은 히틀러에게 삶에 대한 희망을 앗아가 버렸다.

당시 히틀러는 고향 친구였던 쿠비체크(August Kubizek)[13]를 빈에 오도록 꼬셔서 룸메이트로 지내고 있었는데, 쿠비체크에게는 미술 아카데미에 떨어진 것은 철저히 숨겼다. 그도 그럴 것이 자기 덕에 빈에 오게 된 친구는 음대에 떡하니 붙었는데 자신은 미대에 떨어지고 말았으니 자기현시욕이 강한 히틀러로서는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결국 쿠비체크가 추궁하자 히틀러는 떨어진 것을 실토하며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사회와 미술계 탓을 하면서 자신은 위대한 건축가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쿠비체크는 히틀러가 건축 입시를 위해 뭔가를 준비하는 것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고 회고했다.

중졸로 사회에 나오게 된 히틀러는 이때부터 방황하면서 어떠한 목표 없이 백수짓을 전전했다. 위의 동아일보 기사나 연합군의 비아냥에서 언급한 것처럼 빈 유학 생활 동안 페인트집에서 일했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나의 투쟁의 내용과는 달리 히틀러는 빈에서 살던 백수 시절에도 처음부터 밑바닥 생활을 전전하지는 않았다. 세무서장 출신 아버지가 물려준 재산과 독신이라 남편도 자식도 전혀 없는 고모들이 물려준 재산을 쓰고 다녔다. 또한 어머니도 생전에 히틀러한테 용돈을 두둑하게 주었다. 요아힘 페스트의 히틀러 평전에서는 그가 부업삼아 그리던 그림 엽서가 잘 팔리면서 금전적으로는 별로 곤란을 겪진 않았다고 적고 있다. 또한 주기적으로 남편과 자식이 없는 고모나 외가 쪽 이모들에게 피아노를 산다거나, 레슨을 받는다거나, 그림 도구를 산다는 명목으로 나중에 물려줄 유산도 가불해서 썼을 뿐더러, 이런 용돈들로 옷을 사고 바그너의 오페라 등을 보러 다니며 연주회와 전시회에 다니면서 할 일 없이 놀았다고 한다. 때문에 그의 수중에 있는 돈은 상당히 많았고, 연금과 유산 상속 등으로 받은 재산을 '아껴만 쓴다면' 얼마든지 일을 안 하고도 충분히 일상생활은 가능했다.

히틀러가 독신자 숙소를 전전하며 삶을 이어갔던 세월은 고작 1~2년에 불과했고, 빈 시절 초기 그가 받은 한 달 연금은 당시 초임 배석판사의 월급보다 많았다고 한다. 연금을 여러 개 수령해서 여동생 파울라한테 수령을 양보할 정도였다니 그의 물려받은 재력이 상상이 간다. 하지만 히틀러에게는 경제 관념 따위는 없었고, 배석판사만큼 받는 돈으로도 부족해서 고모나 어머니에게 다시 손벌리기 일쑤였다. 먹고 사는 문제 따위는 별 관심이 없었으며, 집권 후에도 경제에 대해 무식했던 히틀러는 추종자들에게 경제 같은 건 의지에 달렸다고 하거나 아예 경제 전문가들한테 맡겼다.[14] 이를 보면 히틀러의 재산 자체가 아주 모자란 것까지는 아니었으나, 취미가 고급 예술 감상이었기 때문에 고정 지출이 많이 나갔고 그에 반해 수입이 안정적이지 않아 실생활은 상당히 쪼들리는 편이었고 이 때문에 알바도 하고 노숙자로도 살고 다양한 경험을 해보기는 했다는 것이 정확하다.

빈에서의 실패 이후에도 미술가를 계속 꿈꾼 히틀러는 심약한 어머니를 설득해 파리로 간다.[15] 하지만 야수파, 인상주의, 입체주의, 초현실주의 등의 혁신적인 화풍들이 인기를 끌던 당시 미술계의 흐름을 파악하지 못하고 자신의 딱딱한 화풍과 건축물 그림만을 너무 선호한 나머지 그저 그런 미술학도 수준에서 그치고 만다. 전기 작가들의 기록에 따르면 그의 그림 실력은 정말 '미술가 지망생' 수준이었다고 한다. 훗날 그가 정치가로 출세한 후에 예전의 그 그림들이 엄청난 고가로 거래되자, 스스로 주제 파악은 할 줄 알았는지 그런 그림들은 그만한 값을 치르고 살 만한 가치가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림들 대부분도 건축물에 대한 단순한 모사(模寫)화이다.

여하튼 꿈에 그리던 화가도 되지 못했을 뿐더러 건축대학에도 입학하지 못한 히틀러는 한동안 빈에서 그림 엽서 등을 그리며 생계를 꾸려갔는데, 본인은 매우 불우했다는 식으로 이야기했지만 실제로는 수 개월에서 1년 사이 정도의 기간을 제외하고는 먹고사는 데 큰 문제는 없을 정도로 돈을 벌었다. 빈에서 시작한 그림 엽서 화가 인생은 제1차 세계 대전이 터지기 1년 전부터는 장사가 더 잘 되는 뮌헨으로 옮겨서 전쟁 직전까지 계속되었다. 뮌헨에서 히틀러는 상업광고에까지도 손을 대서 찌라시용[16] 그림들도 그리기 시작하였는데, 그런 그림들이 그리긴 더 쉽고 벌이도 그림 엽서보다 훨씬 좋은 데다가 평도 나쁘지 않아서 전쟁만 터지지 않았더라면 이쪽으로 쭈욱 눌러앉았을 수도 있었다.

흔히 현대 들어 히틀러의 화가 지망생 시절을 이야기할 때 예술대학에 낙방한 것을 가지고 '무명의 창작자'나 '안 팔리는 비운의 예술가' 같은 이야기를 곁들이는 경우가 많은데, 위 일화에서 보듯이 히틀러는 그림으로 꽤 돈을 많이 벌었다. 단지 히틀러 자신이 도전한 등용문 자체가 너무 험난한 높은 벽이었던데다, 히틀러 본인이 소위 '입시미술'에 대한 교육을 전혀 받지 못했으며 제대로 학업에 도전할 끈기가 없었기 때문에 번번히 탈락한 것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일반인 수준보다는 그림을 잘 그렸기 때문에 일반 대중을 상대로 한 상업예술로는 꽤 잘 나갔다. 현대로 따지면 유명 미대에는 합격하지 못했고 실력도 고평가를 받을 여지는 없더라도, 개인 커미션도 받고 프리랜서로 이런저런 프로젝트 외주도 조금씩 받으면서 상업예술로 먹고사는 데는 지장 없는 정도였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미대 입시에 낙방했다는 점과 히틀러의 라이벌들이 예술 취미에서 히틀러보다 더 나은 수준을 보여준 점[17] 때문에 히틀러의 미술적 재능이 평가절하되기도 한다. 그러나 히틀러가 미술에 재능이 없다는 건 예술가로서 '비엔나 아카데미'라는 상당한 수준의 학교를 가고 싶어했을 때의 이야기이며, 대중적으로는 꽤 '팔리는 창작가'였다. 심도있는 예술 교육을 받지 못했음에도 단순 그림엽서와 간판 그림만으로 웬만한 은행원 수준의 수익을 얻을 정도의 실력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실제로 꽤 짭짤하게 벌었던 것으로 보아, 그 한계가 명확했던 것일 뿐 예술적 재능은 확실히 일반인 이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별다른 미술 교육을 받지 않았다면 그림의 모작조차도 못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고, 학원에서 돈 주고 미술을 배운다 쳐도 재능이 평범한 수준이거나 그보다 못한 사람의 경우는 히틀러 정도의 '그림으로 돈을 벌어 먹는 수준'에 도달하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18]

만약 제1차 세계 대전만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히틀러는 역사에 이름을 남을 유명한 예술가까지는 못 되었더라도, 적당히 그림 그려가며 돈 벌어 먹고사는 상업 화가로는 충분히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이 되었다.[19] 사후 예술성을 인정받았지만, 생전에는 그림이 도무지 팔리지 않아 매우 비참한 생을 살았던 빈센트 반 고흐아메데오 모딜리아니 같은 화가와 비교하면 히틀러는 그림 실력은 인정받지 못했어도 생전에 훨씬 더 많은 자신의 그림을 팔았고 그걸로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3. 제1차 세계 대전

파일:육군 복무 시절 히틀러와 동료들 1.jpg 파일:육군 복무 시절 히틀러와 동료들.jpg
<rowcolor=#fff> 육군 복무 시절 동료들과 자신의 애견 '푹슬'과 찍은 사진[20][21] 동료들의 또 다른 모습[22]
뮌헨에 와서도 무위도식하며 지내던 히틀러는 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독일군에 자원 입대한다. 히틀러는 연락병으로 복무하면서 몇 차례의 죽을 고비를 넘기고 큰 공을 세워 철십자 훈장을 받았다. 히틀러에게 전쟁은 신이 내린 선물이었다. 히틀러에게 군대는 바로 집이었다. 그는 “내 인생에서 가장 찬란하고 가장 잊을 수 없는 시간”이었다고 말했다.

히틀러를 살린 것은 1차 세계대전이었다. 전쟁을 겪지 않았더라면, 패전의 굴욕과 혁명의 격변을 맛보지 않았더라면, 실패한 예술가, 사회 낙오자는 정치에 뛰어들어 선전가로서, 또 맥주홀에서 좌중을 휘어잡는 선동가로서 뛰어난 재능을 찾아내 그것을 업으로 삼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전쟁과 패전, 혁명의 상처가 없었더라면, 이런 상처로 말미암아 독일 사회가 정치적으로 급진화되지 않았더라면, 선동가는 악에 받치고 증오에 찬 말을 들어줄 청중을 찾아내지 못했을 것이다. 패전의 후유증으로 히틀러의 길과 독일 민족의 길이 만날 수 있는 조건이 무르익었다. 전쟁이 없었더라면 비스마르크가 앉았던 총리 자리를 차지한다는 것은 생각도 못할 일이었다.
1권 3장 전선의 연락병(133쪽)
이렇게 거리 화가라는 평범한 삶을 보내던 히틀러의 인생이 여러 의미로 극적으로 전환되는 계기가 찾아왔다. 그것은 바로 제1차 세계 대전의 발발이었다. 독일 통일을 이룬 뒤 제국이 선포된 이래 황제독일 제국은 불패를 자랑하는 강력한 국가였다. 적어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 1914년 당시에는 거의 전 독일인이 조국의 승리를 의심하지 않았다. 따라서 독일 국민들은 전쟁을 환영했는데, 환호하는 군중들 사이에서 기뻐하는 히틀러(추정)의 모습이 발견되기도 했다. 해당 사진[23]

원래 히틀러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육군에선 복무 부적합 판정을 받았었다. 신체적 결함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오스트리아 육군 복무 부적합은 엄밀하게 말해서 병역기피 행위에 기인한 것이었다. 요아힘 C. 페스트는 《히틀러 평전》에서 "당시 히틀러는 군대의 시스템을 억압적인 학교와 비슷하게 느꼈고, 그로 인해 계획적으로 뮌헨으로 도주하였다."라고 설명했다. 어쨌든 히틀러는 이후 오스트리아 법에 따라 병역기피로 재판에 회부되었으나 심신미약과 재정적 기반 없음 등의 이유로 면제 처리를 받았다. 오스트리아 군정 당국이 심신미약으로 처리한 이유는 군대가 무서워서 도망칠 정도의 겁쟁이는 필요없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틀러는 제1차 세계 대전이 터지자 독일 제국 정부에 청원까지 하여 바이에른 왕국군에 자진입대했다.[24] 당시 바이에른 왕국은 독일 제국의 제후국으로서 독자적인 군대를 가지는 게 가능했다. 히틀러가 자진 입대한 이유는 의외로 간단했다. 군대는 신체적 구속이었지만, 전쟁은 일상으로부터의 탈출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굳이 옆나라인 독일 육군에 입대한 이유는 당시 오헝제국군이 손가락으로 세다가 모자라서 발가락까지 동원해야 헤아려야 할 만큼 다양한 민족으로 구성된 다민족 국가라[25] 자신이 혐오하는 슬라브 병사들과 같이 싸울 수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히틀러의 청원이 공식적으로 받아들여져서 바이에른 왕국군에 입대할 수 있었을 가능성은 낮다. 전후 바이마르 공화국 당국의 조사에 따르면 어떻게 히틀러가 바이에른 왕국군에 입대할 수 있었는지 그 과정을 알 수 없었다고 한다. 히틀러가 청원서를 보내고, 그 청원서를 윗선에서 검토한 뒤 오스트리아 국적인 히틀러에게 바이에른 군의 입대를 공식 허락한다는 과정을 증명할 증거가 없었다는 이야기이다. 게다가 개전 직후인 그 혼란한 상황에서, 히틀러의 진술대로 고작 하루 만에(1914년 8월 3일에 청원서를 보냄) 이 청원서가 받아들여졌다는 건 당시 행정 처리 수준으로는 불가능하므로 납득하기 어렵다. 히틀러는 아마도 청원서를 개인적으로 보냈겠지만, 그 당시의 혼란 상황 때문에 업무 착오로 숱한 바이에른의 지원자들과 함께 입대할 수 있었고 늦게 도착한 청원서는 어차피 이미 입대해버린 사람을 쫒아낼 이유가 없으니 사후승인되었을 가능성이 더 크다.

어쨌든 그는 바이에른 왕국 육군에서 복무했는데, 리스트 연대에서 연락병으로 활동했다. 히틀러의 연락병 복무를 두고 일설에는 전방에서 근무한 같은 연대의 동료들이 히틀러처럼 전선에서 벗어난 후방부대원과 사령부에서 펜대나 굴리는 참모 장교들을 두고 '저 후방의 돼지(Etappenschweine)들은 총검으로 통조림을 열지 못해 통조림 공장에서 굶어 죽을 것'이라고 조롱했다는 말이 있는데, 히틀러가 후방 출신이라는 선전은 1930년대 정적들의 루머로 신빙성이 낮다.[출처] 실제로 연락병은 참호를 나와 전선까지 가야 했기에 상당히 위험한 보직이었다. 전방이든 후방이든 전시라서 저격수들이 득실대는데다, 참호를 벗어나면 박격포곡사포의 표적이 되었으며, 통신수단이 미비했던 당시에는 포격 후에 병력을 돌격시키다가 전령 투입이 늦어서 시간차 파악이 잘못될 경우 아군의 오폭으로 죽을 수도 있었다. 이 당시 연락병이 어떻게 임무를 수행했는지 보고 싶다면 영화 1917을 보면 된다. 이처럼 당시 연락병들은 적진의 참호를 넘나들면서 죽을 고비를 넘기는 게 예삿일이었는데, 땡보는 커녕 아주 위험도가 높은 최전방 보직이라고 볼 수 있다.

1914년 히틀러는 이프르에 첫 배치를 받았고, 10월부터 격전이 시작되자 2달 만에 소속 연대의 3,600명 중 연대장까지 포함해서 3,000명이 전사[27]하는 생사를 오고가는 격전을 치렀다. 어떤 날은 히틀러가 연대사령부를 막 나간 지 몇 분 만에 프랑스군의 포탄이 강타하여 안에 있던 사람들 대부분이 사망하였던 사건도 있었다. 게다가 연대에 속해있던 연락병 60명들 중에서 훈장을 수여받은 병사는 히틀러를 포함하여 4명밖에 없었다고 한다. 2급 철십자 훈장을 받았을 때 히틀러가 뮌헨에 있는 몇 없던 친구에게 보냈던 편지에선 1914년 말에 2급 철십자 훈장을 받았던 사람들 중에서 거의 자신만이 유일하게 살아남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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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에른 왕국군 시절의 히틀러
주위 전우들의 말을 들어보면 일반적인 병사들의 사고관과는 조금 다르게, 언제나 독일의 국가적인 운명과 미래를 생각하는 등 현실 감각이 결여되어 있는 몽상가적인 경향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다른 동료들의 증언에 따르면 단 1통의 편지나 소포도 받지 못했고 ·담배도 안 했으며(매음굴에 가는 데는 관심도 없었고), 남는 시간에 가끔씩 그림을 그릴 뿐이었다고 한다. 사회에 나와서도 그런 모습은 여전해서 히틀러의 측근이었던 그레고어 슈트라서가 "술도 안 해, 담배도 안 해, 여자도 안 만나. 도대체 뭘 가지고 사람들과 친해질 수 있나?"라고 생각했다.

1914년 11월 1일 히틀러는 상병으로 진급했고, 이것이 히틀러의 마지막 진급이었다. 부사관 막스 아만과 연대 인사주임은 히틀러를 부사관으로 진급시킬 것을 고려했으나, 히틀러는 다른 부대로 전출되는 것이 싫어서 진급 대상자로 지명되기를 거부했다고 한다. 인사기록으론 히틀러가 부사관으로 진급하기엔 인간관계나 통솔력에 문제가 있다고 남아있다. 이렇게 괴짜 취급은 받았지만 상사나 동료들에게 받은 평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히틀러를 하사로 추천했던 소속부대 주임상사 아만은 후에 나치당 중앙기관지의 출판사장이 되었고, 불우한 연대 출신 전우들을 나치당 하급 지도자로 채용하거나 돈 몇 푼 씩 쥐어주면서 나름 챙겨주었다고 한다. 간단히 말해 당시 히틀러는 전우들과 속 깊은 교류는 하지 않았으나 나쁘지도 않은 무난한 관계였고 시키는 임무는 충실히 수행해내는 병사였다.

1916년 10월 9일, 히틀러는 부상을 입는다. 소문에는 이때 혹은 맥주홀 폭동고환 하나를 잃었다는 소문이 돌아서 연합군이 놀렸는데, 후술하겠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되려 뮌헨 폭동 당시 정말 고환에 부상을 입은 인물은 히틀러의 측근인 헤르만 괴링이었는데 이것이 와전된 듯하다. 어찌됐든 히틀러는 2달 가까이를 베를린 부근 벨리츠에 있던 적십자병원에서 보냈다. 이때 히틀러는 사기가 저하된 군인들, 히틀러가 보기에 각종 꾀병을 부려서 병원으로 이송되어 온 환자[28]들, 후방에서 반전 운동을 벌이는 사회주의자들과 파업을 일삼는 노동조합 등을 보고 크게 경악한다. 이러한 경험은 그가 훗날 배후중상설을 신봉하게 되는 계기가 되며, 이를 모두 유대인의 음모로 보았다. 특히 히틀러는 후방 부대 서기병들에 유대인이 많은 것에 굉장히 불만을 품었는데, 나의 투쟁에 '서기병들은 대개 유대인이었고 거의 모든 유대인들은 서기병이었다. 나는 이 선민종족 중에서 수많은 전사가 군에 들어왔다는 사실과 이들이 최전방에는 거의 배치되지 않았다는 것에 놀랐다.'라고 적었다.

1917년 3월 1일, 히틀러는 본인이 원래 복무했던 16연대로 복귀하였다. 이후 히틀러는 파스샹달 전투에 참여하였고 8월 임무 교대를 하여 알자스 지방에서 휴식을 취했다. 이 시기 히틀러는 전장에서 함께한 폭슬을 잃게 된다. 한 철도 공무원이 푹슬의 애교에 반해 200마르크를 제안하며 팔라고 했지만, 히틀러는 20만 마르크를 줘도 안 판다고 거절했다고 한다. 이후 부대가 이동하려고 할 때 그 폭슬은 사라진 상태였다. 히틀러는 부대가 이동 중이었기 때문에 이동해야 했지만 매우 분노했다. 히틀러는 '절망적이었다. 못된 인간, 그가 나에게 뭔 짓을 했는지 모른다'라고 적었다. 또한 비슷한 시기 히틀러의 군인 배낭을 누군가 뒤져 그의 미술 도구를 훔쳐가는 일이 발생했다.

1918년 6월 전쟁 말기에 히틀러는 1급 철십자 훈장을 받았는데, 훈장을 추천받은 이유는 기록이 말소되어 정확하겐 알 수 없다. 영국군 15명을 홀로 포로로 잡아서 받았다거나 영국군이 아닌 프랑스군을 포로로 잡았다는 소문이 있었지만, 히틀러가 소속되어있던 리스트 연대 기록이 말소되어 이를 확인할 방도가 없다. 기록이 말소된 사유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은데, 유대인 장교인 후고 구트만 육군 중위[29]가 추천해서 없앴는지는 원본 기록이 없으니 알 수 없다.

1급 철십자 훈장은 특별한 소수만 받을 수 있었고, 병 출신이면서 받은 건 대단히 용맹한 병사였다는 증명이 되므로 히틀러가 정치적으로 출세하는 데도 큰 자산이 되었다. 혹자는 히틀러가 구트만 중위와 친해서 받은 거라고 까지만, 독일 제국군 훈장 서훈은 매우 엄격해서 단순히 간부들과 친하다고 해서 받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구트만 중위가 적극 추천한다 가정해도 중위 나부랭이 수준의 추천은 그냥 참고 사항일 뿐이다. 그냥 4년 동안 열심히 전선에서 열심히 복무한 대가로 받았다고 보는 게 일반적이다.[출처] 또는 히틀러는 사령부 소속 연락병이었기 때문에 그다지 빼어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훈공이 인정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히틀러의 전공에도 불구하고 계급은 상등병에 머물렀고, 히틀러는 몇 년 동안 승진이 되지 않았는데 이는 당시 독일군이 우수한 하사관과 베테랑 병사들이 대거 전사하자 사령부에선 전령으로 우수한 히틀러를 사지로 보내지 않기 위해 계급을 머무르게 했다는 이야기도 있고, 당시 자기 주장이 강해야만 승진이 고려되었던 점을 감안하면 히틀러는 상관에게 자신의 주장을 쉽게 자화자찬하는 성격이 아니었기 때문에 승진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종전이 가까워졌을 무렵에 히틀러는 전투 중에 독가스를 들이마시고 일시적으로 시력을 상실하여 후방으로 이송되었다. 독가스의 특성에 의해서 뇌 신경의 일부가 손상된 히틀러는 히스테리 증상을 진단받고 군의관의 치료를 받았다. 또 독가스에 의해서 기관지를 손상당했기에 목소리가 변하였는데, 이로 인해서 훗날 특유의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연설할 수 있게 되었다.[31]

그러나 정말로 히틀러가 독가스 피해를 원인으로 병원으로 후송된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심하는 주장이 많다. 전쟁 말기에 히틀러는 독가스 공격으로 인해서 일시적으로 시력을 잃고 야전병원에 있었다고 하는데, 최근 연구 결과에 따르면 독가스가 아닌 장기간 동안에 겪었던 최전선에서의 전투로 인한 PTSD 증세였을 수도 있다고 한다. 히틀러가 차마 "난 전장에 대한 공포 때문에 실려갔다"고는 말하지 못하겠으니, 당시 흔하게 벌어질 수 있었던 독가스 중독이라고 둘러댔다는 것이다. 어쨌든 히틀러는 이후 병원에 입원해 있으면서 후방에서 느껴지는 전쟁에 대한 회의적인 정서들에 대해서 반감을 가졌고, 아직 입원해 있던 중에 결국 전쟁이 패배로 끝났다는 소식을 듣게 되자 자신의 꿈과 희망이 처절히 짓밟혔다는 듯이 크게 울분을 터트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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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텐디(Henry Tandey)

1914년 연락병으로 근무하던 중 부상을 입은 히틀러는 당시 영국 육군 이등병이었던 헨리 텐디와 조우했는데, 핸리 탠디는 결국 그를 쏘지 않았다는 도시전설이 있다. 헨리 텐디 위키 기사

4. 나치당 입당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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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의 독일 노동자당 입당서
히틀러의 이념의 틀을 잡은 것은 1919년 군대에서였다. 무엇보다도 군대는 1919년이라는 특별한 상황에서 히틀러를 연설가로, 그 시대가 낳은 가장 뛰어난 대중 선동가로 변모시켰다. 마음먹고 선택한 길은 아니었지만 주어진 상황을 잘 활용하면서 히틀러는 정치에 발을 내디뎠다. 의지보다는 기회주의와 약간의 행운이 더 크게 작용했다.
히틀러 1권 179페이지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뒤, 독일 제국군베르사유 조약으로 사실상 해체되었다. 결국 히틀러는 종전 이후 참전 전에 자신이 생활했던 뮌헨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당시 뮌헨은 공산주의자들이 바이마르 공화국을 부정하며 소련볼셰비즘 정권을 수립한 상태였다.

히틀러는 자신을 받아주고 대접해준 곳인 군대에 계속 남아있기 위해 노력하였고, 히틀러는 제2보병연대 산하 제1예비대대 제7중대로 배속되었다. 그리고 전역 대대에서 하달된 지시는 히틀러를 중대 대의원으로 임명하는 것이었다. 즉 히틀러는 볼셰비즘 정권을 타도하는데 힘을 쓰기는커녕 그 휘하 대대의 대의원으로 활동한 것이었다. 비록 이 시절 볼셰비즘 정권 휘하의 대대에서 대의원으로 활동하면서 기회주의적이고 시류에 영합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는 했어도, 혁명 좌파에 반감을 품었다는 사실은 병영에서 같이 지낸 사람들에게 뇌리에 남은 듯 하다. 이 시기의 기록은 히틀러 본인은 물론이거니와 나치당이 총통을 신격화하고자 대부분 훼손하였으나, 요아힘 C. 페스트를 비롯한 여러 학자들의 노력으로 상당한 부분이 밝혀졌다. 이 시기의 우유부단한 행적은 히틀러의 집권 전까지 나치당을 비롯한 우파 진영에서 두고두고 까였다.

일부에서는 히틀러가 당시 활동할 수 있던 군사 단체가 뮌헨의 볼셰비즘 군대밖에 없었다고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실제로 뮌헨 밖에서는 각종 우익 집단이나 의용군 등이 활동 중이었다. 즉 히틀러는 정치적 이념에 의해 볼셰비즘 군사 활동에 참여했다기보다는, 단지 제대하지 않고 가능한 한 군에 오래 남고 싶다는 이유로 기회주의적인 입장을 취했다고 추측할 수 있다. 사실 이것은 히틀러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갑작스레 끝나버린 전쟁에 갈 곳을 찾지 못한 상당수의 군인들은 실업자라도 면하기 위해 가까운 지역의 군 집단에 지원하였고, 그마저도 실패하면 전후의 불안정한 정국에서 남아도는 무기로 정치깡패나 용병 집단을 조직하기도 했다.

히틀러는 여기서 인생의 방향이 바뀔 경험을 하게 된다. 하나는 공산주의 국가로 탈바꿈한 러시아에 대한 독일인들의 공포와 질서에 대한 갈망이었다. 히틀러가 뮌헨에서 좌파 군대에 몸을 담고 있을 때 뮌헨은 여러모로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안일한 행정에 힘입어 극좌 공산주의자들은 뮌헨에 프롤레타리아 독재 정권을 선언하였고, 그 과정에서 좌우 쌍방의 무차별 테러와 재산 압류, 정치적 숙청 등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혼란은 독일 국민으로 하여금 혁명이란 야만적이고 자신들의 전통적인 삶과 아름다운 것을 파괴하는 것이라는 인식을 가지게 하였다. 그리고 히틀러 역시 이러한 인식을 가지고 독일 국민들이 원하는 것에 대해 나름대로의 정확한 파악을 하게 된다.

또 하나의 경험은 바로 선전과 구호의 힘이었다.[32] 히틀러는 스스로 자신이 "카를 마르크스에게 많이 배웠다."라고 인정했는데, 그것은 고루한 정치적 이념이 아닌 정치적 이념을 이룩하기 위한 선전 효과였다. 광장마다 모이는 사람들 가운데서 연설하는 사람, 확성기에서 울려퍼지는 자극적인 선전 문구, 수많은 젊은이들이 팔에 붉은 완장을 차고 행진하는 모습에서 히틀러는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그것은 과거 독일 제국군에서는 볼 수 없는 모습이었고, 그것과는 상이하게 다른 강한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히틀러는 이것을 언젠가 자신의 것으로 이용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뮌헨의 사회주의 혁명정부가 무너지자 히틀러는 부대원들의 보안 행적을 조사하는 뮌헨 심문에서 동료 대의원 두 명을 고발했다. 일설에 따르면 히틀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우리는 이곳에 굴러들어 온 유대인을 지키는 혁명군이 아니라면서 코앞에 닥친 싸움에서 부대가 중립을 지킬 것을 역설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후 일주일도 채 지나기 전에 히틀러는 제2보병연대 예비대대원들이 소비에트 공화국에 열심히 가담했는지의 여부를 조사하라는 명령을 받게 된다. 이를 통해 히틀러가 좌익 정부의 대대 대의원에 속해있으면서도 오히려 볼셰비즘 정권에 대해 강한 반감을 품은 인사로 알려져 있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1919년 5월 11일, 소비에트 공화국을 무너뜨리는데 관여한 바이에른 군대를 모태로 하여 폰 묄 소장의 지시로 바이에른 제국군 제4집단사령부가 창설되었다. 뮌헨 볼셰비즘 정권 붕괴 후 의용군과 같은 군집단에 의해서 뮌헨 행정이 복구되기 시작하면서 히틀러 역시 해당 군집단에서 활동을 하게 되었다. 히틀러는 군대의 조직을 동경해서 어떻게든 군대에 남으려고 했다. 당시 뮌헨은 혼란했으므로 새로운 민족주의와 반볼셰비즘 이론을 군대에 교육하는 일이 시급했다. 이는 히틀러를 지켜본 상관에 의해 이 역할을 받게 되었고, 이때 동료들 앞에서 시국에 대해 연설하면서 이 방면의 전문가로 인정받는다. 히틀러는 자신의 연설에 대한 재능을 자각하게 되었다. 그 전까지는 자기가 자랑할 능력이 없다는 것에 절망하던 상태였으므로, 재능을 자각한 순간 나름대로 그 방면으로 발전하려고 노력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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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 의용군에서 독일 내 소수정치단체 조사와 관련하여 정무적인 업무를 하고 있던 중 히틀러는 한 소수정당을 조사하라는 명령을 받게 되었다. 명령을 받고 간 곳은 '독일 노동자당(Deutsche Arbeiterpartei)'이었는데, 이 독일 노동자당은 이후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즉 나치당이 된다. 독일 노동자당은 당시만 해도 제대로 된 정치 활동은 커녕 노동자나 고만고만한 서민들끼리 모여 불평불만을 늘어놓는 게 전부인 보잘것없는 조무래기 정당에 불과했다.

허름한 창고를 빌려 열린 당 토론회에 지루하게 앉아있던 히틀러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던 고트프리트 페더의 연설이 끝나고 떠나려던 무렵, 초청받은 바우만 교수가 페더의 연설에 바이에른 분리주의를 옹호하는 발언을 하자 이에 빡친 히틀러는 바우만 교수를 몰아붙였고 교수는 당혹스러워하며 자리를 떠났다. 그러거나 말거나 히틀러는 열변을 토해냈다. 당시 당 의장이던 안톤 드렉슬러는 이 연설에 엄청난 감명을 받았고, 히틀러에게 자기가 직접 쓴 책자를 건네며 정치 운동에 참가할 마음이 있다면 찾아오라고 권유했다. 히틀러는 처음엔 코웃음만 쳤지만[33], 이내 심경에 변화가 생겨 이에 응하고 당원번호 555번을 받게 된다. 나치당 당원 번호는 501번부터 시작이므로 55번째 당원이다.[34]

참고로 나치라는 단어는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Nationalsozialistische Deutsche Arbeiterpartei)에서 National의 Na와 sozialistische의 zi를 합쳐 불렸다고 흔히 이야기되지만, 실제로는 나치당의 반대파들이 국가사회주의의 두음인 나찌(Nati-)를 영어로 음차해서 부르던 멸칭이었다. 현재는 워낙 대중화되어 일반인이든 네오나치든간에 모두 나치라고 부르지만, 히틀러 무리들은 자신들을 NSDAP, 국가사회당 정도로 약칭했다.[35] 그리고 히틀러가 입당했을 시절에는 국가사회주의(Nationalsozialistische)라는 이름은 없었고 그냥 독일 노동자당이었다.

자물쇠 수리공인 드렉슬러가 친구들을 모아 결성한 정치 모임에 가까웠지만, 히틀러가 여기서 주도적으로 일을 벌이고 주도권을 잡음에 따라 점차 히틀러 개인의 사당으로 변하고 1921년 중반에 히틀러는 당에서 절대적인 권위를 굳힌다. 드렉슬러는 히틀러를 뒤늦게나마 견제해보려고 그를 비난하는 책자를 배포했지만, 되려 명예훼손으로 고소당하는 역습을 당해 당대표에서 명예회장으로 물러나 이름뿐인 지도자가 된다. 그래도 명색이 당수라서 나름 대접받았을 뿐만 아니라 다른 극우 세력과 교섭, 그리고 당 세력 확장에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하지만 나치당이 맥주홀 폭동 이후 재건되면서 히틀러의 절대 권위에 도전하다가 실패하고, 1925년 당에서 자진 탈당했다가 1933년 재입당하였다.

영국 애버딘대학교 토머스 웨버 역사학 교수가 1919년에 새로 설립된 독일사회당(German Socialist party) 창당발기인 대표인 한스게오르그 그라징거의 증언에 기반해 작성된 미공개 문서에서 발견되었는데, 내용은 히틀러가 독일사회당 기관지 사무실에 찾아와 그라징거에게 기관지 기자로 일하고 당에 합류해 일하고 싶다고 말했다. 당시 돈이 한 푼도 없던 히틀러는 그라징거에게 돈을 빌려달라고도 했다. 하지만 그들은(독일사회당) 기관지에는 일할 자리가 없고 당원으로 받아들이는 것도 원하지 않는다고 히틀러에게 대답했다는 글이다.#

5. 히틀러의 연설 능력

히틀러의 탁월한 연설 능력과 천부적인 선전선동 능력에 기반하여 나치당은 무수한 극단주의 군소정당의 하나에서 점차 세를 늘려가기 시작했다. 빈의 부랑아 시절에 숙소에서 동료들에게 잡설을 늘어놓으며 연마한 웅변술과 오스트리아의 정치 지형을 분석하면서 보유하게 된 히틀러의 정치적 안목은 나치당 입당 이후 히틀러에게 큰 자산이 되었다. 그는 기존까지 공산주의자들의 전매특허라는 인식 때문에 보수파 정치인들이 눈여겨보지 않았던 연설 능력과 선동 능력을 매우 중시했으며, 전속 사진가인 하인리히 호프만의 스튜디오에서 여러 제스처를 찍고 이를 분석하여 자신의 연설과 맞는 제스처를 효과적으로 선별하여 사용, 열광적인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런 히틀러의 역동적인 제스처는 히틀러를 모델로 한 가상의 인물에도 쓰이면서도 히틀러를 우스꽝스럽게 풍자할 때도 요긴하게 쓰였다.

호프만과 만나게 된 계기도 골때리는데, 당시 인기가 많던 정치인인 히틀러는 신비주의인지 사진에 찍히는 걸 극도로 꺼려 그의 사진이 품귀 현상을 빚었고 호프만은 한 미국 언론사에서 1000달러를 약속받고 몰카를 시도하다가 들켜서 돌격대원들한테 구타당하며 끌려가게 된다. 그런데 이 광경을 목격한 히틀러는 흥미가 동했는지 그와 대화를 나눴고, 호프만에게 자신의 사진 독점권을 주는 대신 사진 인세 수입의 10%를 가져가기로 합의해 그를 전속 사진사로 채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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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인리히 호프만의 스튜디오에서 찍은 히틀러의 제스처 중 하나를 컬러로 복원한 사진.
사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의 패전과 혁명 같은 독일인들이 굴욕감을 느낄 상황 변화가 없었더라면 히틀러는 그냥 별 볼 일 없는 사람으로 남았을 것이다. 그러나 히틀러는 1919년의 경험을 통해 자신의 능력이 무엇인지를 깨달았다. 그것은 어수선한 시대와 상황에서 연설 능력과 강한 표현력, 고정관념에 기댄 파괴력으로 독일이 궁지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바로 자신이 제시하는 길이며, 이는 독일이 회생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방안이라는 확신을 전달함으로써 자기와 정치적으로 비슷한 생각을 지닌 청중을 휘어잡는 능력이었다. 하지만 시대가 다르고 장소가 달랐다면 그런 메시지는 잘 먹혀들지 않았을 것이고 말 같지 않은 소리로 들렸을 가능성도 있었다. 실제로 히틀러를 잘 몰랐고 또 안다고 해도 툭하면 핏대나 올려대는 바이에른의 선동가 정도로나 알았던 일반 독일 국민은 말할 나위도 없고, 뮌헨 시민의 압도적 다수도 1920년대 초반에는 그런 의견에는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렇지만 시간과 장소가 딱 맞아떨어졌을 때 히틀러의 메시지는 뮌헨의 술집에 모인 떠들썩한 사람들의 억눌릴 대로 억눌린 노여움과 두려움, 좌절, 울분, 적개심을 정확히 건드렸다. 다분히 충동적이었던 히틀러의 연설이 먹혀들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연설자가 워낙 확신에 차있었던 데다가, 독일의 문제에 대해 내린 진단과 처방이 모두 단순 명쾌했기 때문이었다.

히틀러는 처음에 남다른 혹은 독특한 정치 사상을 지닌 논객이 아니라 선동가로서 두각을 나타냈다. 히틀러가 뮌헨의 맥주홀에서 퍼뜨린 생각은 새롭거나 색다르지도, 남다르지도, 독창적이지도 않았다. 이런저런 민족주의 진영이나 정파에서 익히 알려진 내용이었고, 또 전쟁 전에 이미 범게르만주의 진영에서 그 핵심을 상당한 수준까지 끌어올린 내용이었다. 그러나 히틀러는 이러한 내용들을 남들이 흉내내지 못하는 방식으로 공포심과 편견과 적개심을 끌어내고 부추겼다.

히틀러는 독창적이지 않은 생각을 독창적으로 선전했다. 다른 사람들도 똑같은 내용을 말할 수는 있었겠지만 별 효과는 없었다. 중요한 것은 히틀러가 무엇을 말했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말했는가 하는 점이었다. 히틀러는 발표하는 요령을 만들어 나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고, 연설을 통해 인상을 남기는 법을 의식적으로 배웠다. 효율적으로 선전을 하고 희생양을 만들어서 선동 효과를 극대화하는 방법도 배웠다. 실제로 자신이 대중을 동원하는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자 대중 동원술은 히틀러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는 유일무이한 수단이 되었다. 다른 길은 없고 오직 자기 방법으로만 성공할 수 있다고 스스로를 믿게 만드는 능력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확신을 줄 수 있는 밑바탕이 되었다. 맥주홀에 모인 사람들, 나중에 집회에 참가한 군중들이 보인 반응은 다른 자리에서는 기대할 수 없었던 확신과 자신감, 뿌듯함을 히틀러에게 안겨주었다.

당시 독일 민족은 남다르고 문화적으로 우월하다는 의식은 특히 지식인들 사이에서 강했는데 정도가 훨씬 심하기는 했지만, 히틀러의 국수주의는 바로 그런 토양에서 자랄 수 있었다. 히틀러는 독일의 서민들이 느끼는 공포와 울분과 고정관념을 당대의 어느 정치인보다도 잘 대변했고, 더 나은 새로운 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어느 정치인보다도 잘 심어주었다. 더구나 그 사회는 진정한 독일의 가치가 살아 있는, 독일 국민에게 더없이 편하게 다가오는 그런 사회였다. 히틀러에게 사람들이 빨려든 또 하나의 이유는 미래를 제시했을 뿐 아니라 과거를 규탄했기 때문이다.

한편 당시 유대인이 세계를 지배하려는 계획이 있다는 내용의 시온장로회 수칙이라는 위서가 나돌아서 반유대주의 진영에서 널리 읽혔는데, 그 책도 히틀러가 러시아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 중 하나였을 것이다. 이런 생각들은 히틀러의 세계관 안에서 반유대주의와 반마르크스주의를 하나로 묶는 촉매제 역할을 했고, 이렇게 해서 한번 만들어진 고정 관념은 그 뒤로 두 번 다시 없어지지 않았다. 분열과 불화를 막으려면 모든 정열을 하나에 쏟아 붓고 오직 하나의 적만 물고 늘어져야 한다고 히틀러는 노골적으로 말했다. 자고로 위대한 지도자는 대중의 관심을 오직 하나의 적에 묶어 둘 줄 아는 사람"이라고 히틀러는 선언했다. 당시 독일 내에서 유대교를 믿는 사람은 1933년 기준으로 독일에 0.76%밖에 없었다. 세상이 각박할 때는 이렇게 얼마 안되는 소수 집단이 기업과 예술, 전문직 분야를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그들에 대한 시기심과 적개심을 부추기기가 너무나도 쉬웠다.

히틀러 연설의 핵심은 단순과 반복이었다. 군중의 민족 의식을 일깨운다, 1918년의 엄청난 배신을 뒤엎는다, 독일 내부의 적과 특히 유대인을 제거한다, 독일 영토 밖에서 힘을 겨루어 세계 열강의 지위를 차지하기 위한 전제 조건으로 물질적 정신적 기반을 새롭게 다진다는 내용의 이야기를 끊임없이 주장했다. 1919년과 1920년에 히틀러의 연설을 들으러 몰려든 군중둘은 세련된 이론을 듣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다. 그들에게는 분노와 원한, 증오의 불길을 피울 수 있는 간단한 구호만 있으면 충분했다.

이 즈음의 히틀러는 스스로를 영웅을 위한 선동가라고 생각했고, 심지어 의회에서 어느 정도의 세력을 얻은 뒤에도 선전·선동에만 집중하며 다른 부분은 크게 신경쓰지 않거나 회피하곤 했다. 그러나 이후 나치당의 성공을 보며 서서히 과대망상에 빠지면서 권력욕에 눈을 뜨게 되고, 자신이 곧 독일을 구할 영웅이라고 믿게 된다. 히틀러는 나치당의 초기 당 재정이 빈약할 때는 자기의 연설을 들으러 오는 청중들에게 광고를 하는 방법으로 생계를 꾸렸다. 그러니까 한창 신나게 자기의 정견을 늘어놓은 다음에 상품 홍보 활동이나 광고를 하고 업체의 돈을 받은 것이다.
나는 한 방 얻어맞은 것처럼 충격을 받았다. 그때까지 집회에서 들어온 연설과는 너무나 달랐다. 그의 연설은 아주 간단명료했다. 베르사유 조약처럼 당시 사람 들이 압도적으로 많은 관심을 기울였던 주제를 잡아서 온갖 질문을 던지는 것이었다. 이제 독일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나? 현실의 참모습은 무엇인가? 유일한 활로는 무엇인가? 사이사이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를 받으면서 두 시간 반을 내리 연설했지만 더 길게 해도 얼마든지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구구절절 가슴에서 우러나온 말이라 우리의 심금을 울렸다. 그는 아무것도 숨기지 않았다. 독일이 직면한 공포도, 고통도, 절망도 남김없이 드러냈다. 그뿐이 아니었다. 망가진 민족에게 유일하게 남은 활로가 무엇인지를 역사에서 찾아 보여주었다. 그것은 용기, 믿음, 행동력, 근면성, 위대하고 찬란한 공동의 목표에 헌신하는 자세를 통해서 가장 깊은 나락에서 벗어나고야 말겠다는 비장한 새 출발의 다짐이었다. 그날 저녁 이후로, 비록 당원은 아니었지만, 나는 독일의 운명을 휘어잡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히틀러뿐이라고 확신했다.
히틀러 1권 5장 맥주홀 선동가(239~240쪽), 한스 프랑크의 증언
히틀러는 누가 뭐래도 일급 배우였다. 청중이 빽빽이 들어찬 집회장에 일부러 늦게 나타나는 것이나 철저하게 계산된 연설, 다채로운 어휘 선택, 화려한 손짓과 몸짓까지 이 모두가 관객의 반응을 염두에 둔 행동이었다. 갈고 닦은 연기력은 타고난 말솜씨를 더욱 돋보이게 만들었다. 처음에는 잠시 뜸을 들이면서 긴장을 고조시키다가, 낮은 소리로, 머뭇거리듯이 입을 열었다. 히틀러의 연설은 감미롭지는 않았지만 변화와 리듬이 있었고 생동감과 박진감이 넘쳤다. 문장을 스타카토처럼 딱딱 끊다가는 적당한 대목에서 속도를 줄이면서 핵심을 강조했다. 연설이 점점 달아오르면 손동작도 활발해졌고 적에 대한 신랄한 야유도 터져 나왔다. 1927년과 1929년에 뉘른베르크에서 열린 전당대회를 준비하면서 아주 세부적인 데까지 신경을 쓰면서까지 히틀러는 청중에게 깊은 인상과 감동을 주는 데 집착했다. 옷도 그때그때 모임의 성격에 맞게 입었다. 열성 지지자들이 모여드는 대규모 당 행사나 집회장에서는 하켄크로이츠 무늬가 팔뚝에 새겨진 연고동색 제복에 오른쪽 어깨에서 비스듬하게 가로지르면서 내려오는 가죽띠를 매고 무릎가지 올라오는 가죽 군화를 신었다. 일반 청중을 상대할 때는 전투적이라는 인상을 지우고 점잖은 느낌을 주기 위해 검은 양복에 흰 셔츠를 입고 단정하게 넥타이를 매고 나타났다.
히틀러 1권 (p. 412~414)
실제로 히틀러의 연설은 청중을 사로잡는 힘이 있었다고 한다. 히틀러의 득세 이후 정세가 불안해지자 영국이 독일에 스파이를 심었는데, 그 스파이가 '그의 연설은 마치 마법과도 같았다.'고 보고한 일도 있었다. 또한 1922년 11월 미국에서 뮌헨에 준동하기 시작한 국가사회주의 세력에 대해 파악하는 동시에 바이마르 공화국에 대해 불만이 많은 바이에른 주정부가 반기를 들 가능성이 있는지, 그리고 뮌헨에 주둔 중인 국가 방위군 7사단이 향후 소요사태가 벌어졌을 때 바이마르 공화국 정부의 편에 서서 진압에 나설지 아님 반란 세력에 동참할지 알아보기 위해 트루먼 스미스 대위를 파견하였다. 11월 20일, 스미스 대위는 히틀러를 만났다. 아래는 히틀러를 면담한 스미스 대위가 적은 그에 대한 인물평이다
그는 경이로운 선동가였다. 그렇게 광신적이고 논리적인 사람을 본 적이 없다. 군중을 휘어잡는 힘이 대단할 것 같다. 히틀러는 육체노동자와 두뇌노동자들이 힘을 합쳐 마르크스 주의에 반대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미국이 독일의 민족주의를 돕지 않으면 볼셰비키즘이 독일을 집어삼킬 것이며 러시아와 독일의 볼셰비키즘이 생존 본능 차원에서 서구 국가들을 공격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반유대주의에 대해 유대인의 시민권을 박탈하고 공직에서 추방하는 선에서 그칠 것이라고 답했다.
트루먼 스미스 대위의 1922년 11월 20일 히틀러 면담 보고서 (아돌프 히틀러 결정판 P 232)
이후 스미스는 22일 히틀러의 연설에 초대받았으나, 베를린 미국 대사관에서 소환되면서 에른스트 한프슈탱글에게 자신을 대신하여 참여하려고 지시했다. 뮌헨 킨들캔들 맥주홀에서 열린 나치당 집회에 참여한 한프슈탱글은 그의 눈에는 정직과 성실이 있었고 고통의 흔적이 서렸으며 품위 있고 말없는 애원의 마음이 였보였으며, 맥주를 마시는 것도 잊고 그의 한 마디 한 마디를 경청하느라 정신이 나가있었다고 평가했다. 스미스의 안부를 전한다며 히틀러를 만난 한프슈탱글은 히틀러에게 그의 노골적인 반유대주의에 찬성할 수 없다고 우려를 전하자, 히틀러는 "나는 나머지 이상한 5%를 놓고 싸워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답했다. 한프슈탱글은 22일 밤 히틀러 집회에 다녀오고서도 그 여운이 남았다고 회고했다.
내 마음은 여전히 그날 밤의 감동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보수주의 정치인과 연사들은 일반 대중과 접촉을 엄두도 못내는 상황에서 자수성가한 히틀러는 우리가 지원을 필요로 하는 바로 그들에게 반공산주의 강령을 성공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한프슈탱글의 회고, 아돌프 히틀러 결정판 P236
이후 이를 기반으로 12월 5일 독일 주재 미국 대사관 자문관은 국무부 부장관에게 다음과 같은 보고서를 제출하였다.
바이에른 정치 집단을 살펴보면 조만간 심각한 일이 터질 것이라는 진단을 내릴 수 있다. 오스트리아 출신으로 참전한 하사관인 히틀러라는 젊은이가 지금은 회색 셔츠단이라고 알려진 파시스트 운동을 벌이며 천천히 움직이고 있다. 하지만 무솔리니가 갔던 길을 따라 효율적으로 이동하고 있다. 그곳으로 우리 사람 1명을 보내 살펴보았는데 그에 따르면 히틀러는 탁월한 연설가이고 도덕심이 최고 수준은 아니지만 대중의 지도자임에는 틀림없다. 그는 무솔리니가 그랬던 것 처럼 제조업을 하는 기업인들에게 많은 자금을 지원받고 있는데 느리게 진행하고 있다. 히틀러는 그곳을 방문했던 부무관 스미스 대위에 다음 달, 아마 2달 내에는 커다란 정치 운동을 벌일 의사가 없다고 말했으며 지금은 자금과 장비를 모으고 있는데 순조롭다고 말했다.
1922년 12월 5일 베를린 주재 미국 대사관 자문관의 보고서 (아돌프 히틀러 결정판 P237)
하지만 오스트리아 사투리(오스트로바이에른어)가 워낙 심해서 목소리만 놓고 보면 별로 듣기 좋은 편은 아니었다고. 실제로는 연설 이전에 행해지는 다양한 효과들에 의해 히틀러의 연설 효과가 극대화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 외에도 히틀러 본인도 제스처나 그런 것들을 연구해서 활용하기도 했다. 청중을 사로잡았다던 히틀러의 연설은 대부분 이런 행사들의 마지막에 이루어졌다.

히틀러가 선동가로서의 명성을 가지게 하는데 가장 큰 기여를 한 사람이 레니 리펜슈탈이다. 레니 리펜슈탈은 영화제작자/감독으로 히틀러의 연설 영상을 편집하여 배포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한편 이 히틀러의 연설은 전후 비독일어권 사람들의 독일어에 대한 편견을 쌓는데 크게 기여했다. 히틀러의 연설이 매스미디어를 통해 전 세계로 퍼지게 되면서 자연히 히틀러의 억양과 발음 등이 사람들의 뇌리에 자리잡게 되었다. 이 때문에 독일어는 매우 딱딱하고 강한 발음의 언어란 인식을 가지게 되었다.[36] 지금은 히틀러가 연설을 하던 시대(1927-1929)에서 100년 가까이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히틀러 악센트는 농담으로 쓰인다.

6. 뮌헨 폭동과 수감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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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년의 히틀러[37]
제1차 세계 대전 패전 직후인 1920년대 초, 배상금의 여파와 초인플레이션이 겹친 불황으로 인해 바이마르 공화국에서는 극우극좌 세력의 무장 난동이 빈번했다. 이 시류를 타 히틀러는 1923년 11월 일명 '맥주홀 폭동'을 일으켜 화려한 반등을 꾀하게 된다.[38] 그러나 이 폭동은 베니토 무솔리니파시스트 당의 로마 진군에 영향을 받은 히틀러의 즉흥적인 결정이었으며, 사전 계획도 엉성했다. 군대의 확실한 지지 선언도 없었고, 세밀한 계획도 없었으며, 정작 바이에른의 주요 권력자라고 할 수 있는 주(州) 총리와 야전군 사령관, 경찰청장을 맥주홀에서 잡아놓고는 자신들에게 협력하겠다는 구두 약속 하나만 받고 히틀러가 잠시 다른 곳에 간 사이에 그냥 풀어주는 멍청한 짓까지 저질렀다. 이 무모한 폭동은 히틀러의 바로 옆에서 가두시위를 하던 측근이 진압군의 총탄에 맞아 죽는 등 완전한 실패로 끝났다.

물론 군대와 주 정부의 지지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 시기 바이에른은 우익 민족주의자들의 성지였고, 뮌헨은 그 심장 노릇을 하고 있었다. 뮌헨 시장을 비롯한 정부 인사들은 공공연하게 베를린과 바이마르 공화국을 빨갱이들의 왕국이라며 공격했고, 종종 바이에른이 베를린으로부터 독립될 것임을 암시하곤 했다. 나치를 비롯한 우익 정당과 정치 모임, 그리고 의용군들의 활동에 힘입어 이 지역의 반공화국 정서는 언제 폭발해도 이상할 게 없을 상태였다. 더군다나 맥주홀 폭동 이전에 뮌헨 시장과 방위군, 에리히 루덴도르프는 히틀러와의 합의를 통해 바이에른에 민족주의 혁명을 선언하고 베를린으로 행진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여기에 히틀러는 무솔리니처럼 합법적으로 인정된 쿠데타를 주장하여 주지사를 비롯한 주 정부의 주요 인사들에게 암묵적인 허가를 받을 계획이었고, 뮌헨 시장 이하 쿠데타의 협력자들도 전적으로 동의했다.

문제는 이들이 서로의 이해타산으로 이루어진 동맹이었다는 점에서 기인한다. 뮌헨 시장은 사실 베를린의 전복보다는 베를린으로부터의 독립을 원했고[39], 루덴도르프는 베를린 전복 후의 구 제정 복고를 꿈꾸었으며, 히틀러는 베를린을 전복시킨 뒤에 민족주의 혁명 국가를 세울 생각이었다. 그리고 이런 생각들이 마치 경쟁하듯 뻗쳐나가게 되었다. 히틀러는 이 상황에서 자신이 누구보다 먼저 베를린에 입성해야 한다는 강박증에 시달렸다. 그 와중에 뮌헨 시장을 비롯한 인사들과 방위군 인사들이 11월 8일 저녁에 맥주홀에서 선언을 한다는 정보를 얻게 되었고, 이들에게 혁명의 주도권을 뺏기는 게 두려운 나머지 11월 10~19일 사이로 잡혀있던 쿠데타 계획을 아무 계획 없이 11월 8일 당일로 당겨서 시작해버렸다. 이 과정에서 뮌헨 시장과 히틀러는 서로가 서로에게 약속을 깨뜨렸다고 소리질렀고, 뮌헨 시장은 홀에서 다시 시청으로 돌아간 뒤에 히틀러와의 공조는 없고 쿠데타도 없을 것이라고 선언해 버렸다.

결국 11월 8일, 히틀러와 극우 패거리들은 뷔르거브로이켈러(Bürgerbräukeller)의 맥주홀에 모인 뮌헨 고위 인사들을 억류하고 자신들의 쿠데타에 강제로 합류시켰다.[40] 하지만 같이 쿠데타를 이끌던 루덴도르프가 기껏 잡은 뮌헨 고관들을 풀어주는 행위를 벌이고, 급조된 쿠데타 세력이 주요 병영과 경찰서, 그리고 통신망을 재빨리 장악하지 않은 시점에서부터 폭망은 예정되어 있었다. 다음 날 아침 뒤늦게 상황 파악을 한 히틀러는 뮌헨 중심가로 2,000명의 당원과 함께 요란한 가두행진을 시작했지만, 얼마 안 가 경찰들에게 저지됐다. 얼마 후 총격이 시작되면서 난리가 벌어졌고, 히틀러와 어깨동무한 당원이 총에 맞아 철퍼덕 쓰러지면서 어깨 탈골상을 당했다. 완전히 멘탈이 나간 히틀러는 혼란을 틈타서 샛길로 빤스런한 다음 돌격대원의 차에 탑승하고 줄행랑을 쳤다.[41] 이후 히틀러는 거지꼴로 후원자인 한프슈탱글 부부의 저택에 숨었다. 사흘 뒤인 11월 11일 5시경에 경찰이 자신을 곧 잡으러 온다는 소식을 들은 히틀러는 모든 것이 끝났다며 아연실색하고, 자신이 가진 리볼버를 가지고 자살 시도를 하지만 부인이 제지해서 이는 촌극으로 끝나게 된다. 얼마 후 히틀러는 잠옷 바람 + 모든 것을 체념한 표정으로 체포된다.[42]

란츠베르크 감옥에서 수감된 히틀러는 처음에는 단식 투쟁을 시도했다. 이는 정치적인 목적을 노리고 한 행위가 아니라 그저 모든 것이 끝났다는 생각으로 자살 시도를 한 것이었다. 하지만 얼마 안 가 실패했고, 그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폐인이 된 채로 병상에 누워있으면서 모든 게 끝났고, 죽고 싶다고 끊임없이 되뇌는 것밖에 없었다. 이후 히틀러가 제정신으로 돌아올 때까지는 한참 걸렸다고 한다. 맥주홀 폭동에서 보인 히틀러의 모습은 매우 한심하고 코미디 같지만, 훗날 히틀러가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보이는 모습들을 예고했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극단적인 감정 기복차, 정세가 불리할 때 보이는 비이성적인 행동들, 그리고 몰락했다고 생각했을 때 나타나는 자기파괴적인 행동들이 전부 이 사건에서 드러났고 훗날 더 거대하고 끔찍하게 반복된다.

맥주홀 폭동은 허술한 계획에서 시작되어 멍청하게 끝나버렸지만, 히틀러가 바이에른의 일개 지역 인사에서 독일 전역의 유명 인사로 자리매김하는 계기가 되며 훗날 히틀러의 정치적 출세에 있어 큰 자산이 되었다. 우선 히틀러의 체포 이후 이루어진 (히틀러 외 5인에 대한 형량을 심판하는)[43] 재판은 코미디나 다름없었다. 자신들의 봉기는 좌파들의 폭동과 달리 애국심의 발로였다는 히틀러의 주장에 방청객들은 물론 판사들마저 감동하면서 히틀러 선생님 소리를 들었다. 당시 재판관이었던 게오르크 나이트하르트는 "아니, 히틀러 선생 같은 애국자가 있다니!"라며 재판 일정의 2/3을 히틀러의 장광설에 할애하는 등 무제한적 변론을 보장해 주었다.[44] 또한 이 과정에서 히틀러의 이름은 전국의 신문지에 오르내리며 인지도가 오르게 되고, 그 결과 사회 불만 세력에게 있어 '이 문제 많은 체제를 끝장내 줄 지도자'라는 인식을 박아주게 된다.[45] 여기에 반대파에게 있어 악명이 높아진 건 덤. 결과적으로 (많은 죄목이 누락된 판결문과 함께) 히틀러는 금고 5년형을 선고받고 13개월 만에 특사로 풀려나게 된다. 당시 바이마르 공화국의 법에 의거하면 그의 죄목은 최소 징역 15년형이었으나, 약식 재판소인 바이에른 인민재판소에서 해당 사건을 라이프치히 국가대법원으로 송고하지 않기 위해 대놓고 봐주는 짓을 저지른 결과였다.[46]

수감된 란츠베르크 요새에서 히틀러는 온갖 특혜를 누리며 유명 인사로 살았다. 히틀러의 어머니를 자처한 '여사님'들의 무제한 접견이 허용되었고, 나치당 추종자들은 히틀러에게 충성심을 인정받고자 매일 얼굴도장을 찍으러 왔다. 팬들은 가구와 꽃으로 히틀러의 감방을 장식했으며, 간수들은 '애국자' 히틀러 '선생'에게 매우 공손하게 대했다.[47] 교도소 안에서 마음대로 돌아다니며 산책 및 운동을 할 권리도 부여되었고, 타자기와 책상의 반입 또한 허용되었다. 교도소 측은 그의 옆방에 히틀러의 일편단심 바라미 루돌프 헤스를 넣어주었고, 헤스는 히틀러가 훗날 나치즘의 성경이 된 '나의 투쟁'을 구술하면서 이를 받아적게 된다. 결국 히틀러는 수감되었지만 이것이 전화위복이 되어서 오히려 그의 이름을 독일 국민에게 확실히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이 시기를 전후로 히틀러는 기기묘묘한 애국자로 입소문에 오르게 된다. 동아일보에도 이를 다룬 기사가 실릴 정도였다. 국적도 없는 애국자, 독일의 히틀러씨[48]

히틀러는 교도소에 수감되면서 건강 검진도 같이 받았는데, 여기서 오른쪽 고환잠복고환인 사실이 밝혀진다. 요제프 브룬 슈타이너 당시 란츠베르크 교도소 의사가 쓴 히틀러의 검사 기록에는 "아돌프 히틀러, 예술가이며 최근에는 저술가이다. 이 자는 매우 건강하다. 그러나 잠복고환이 오른쪽 고환에 있다."라고 기록했다.## 즉 히틀러의 잠복고환은 사고나 부상으로 후천적으로 발생한 것이 아니라 선천적인 것이었다.[49]

수감 6개월이 지난 후부터 석방 때까지 나치당 조직이 사실상 와해되었다고 판단한 주 정부에서는 검찰과 경찰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히틀러를 석방해 버리고 말았다. 정확한 출소일은 1924년 12월 20일. 이러한 주 정부의 판단은 당시 바이에른 주가 상대적으로 좌파 진영의 세가 강한 베를린에 맞서는 보수 진영의 중심지가 된 당시의 정세가 상당한 영향을 미쳤는데, 바이에른 주의 보수적 지식인 계층을 중심으로 "언제까지 이런 애국자를 사소한 법 위반으로 가둬둘 거냐"라는 질타가 상당했다. 역사가들은 이때 히틀러가 반역죄에 상응하는 형량을 제대로 살았다면 히틀러가 정권을 잡기는 매우 어려웠을 것이라는 예측을 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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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무솔리니와 같은 차를 탄 히틀러
한편 히틀러가 출소하고 얼마 뒤, 바이에른 정부는 범죄를 저지른 외국인에 대한 추방 법률을 근거로 히틀러의 추방을 검토했다. 이에 히틀러는 위협을 느껴 오스트리아에 자신의 국적 포기를 정식으로 신청하게 되고, 오스트리아가 이를 수용함에 따라 히틀러는 무국적자가 된다.

히틀러는 출소 이후 정치 노선을 바꾼다. 원래 히틀러는 롤모델로 이탈리아의 베니토 무솔리니를 선택했고, 무솔리니가 했던 것처럼 쿠데타로 정권 탈취를 시도한 게 뮌헨 폭동이었다. 그러나 무솔리니와 달리 히틀러는 실패했고, 이후 무솔리니식의 폭력적인 쿠데타보다는 합법적으로 권력을 거머쥐는 의회주의 노선을 채택하게 되었다.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표면적인 합법일 뿐 뒤로는 온갖 정치 공작, 돌격대를 이용한 폭력과 각종 비리를 일삼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출소 직후 히틀러와 나치당은 와해 위기에 몰릴 정도로 어려움을 겪었는데, 히틀러가 체포되면서 당의 중심이 사라져 극우 진영이 온갖 내분에 휩싸이고, 이들이 자라날 수 있는 토양이 되었던 전후의 경제적 비관주의가 독일의 경제 회복과 함께 점차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히틀러 수감 시절 극우 진영의 극심한 내분과 부진은 극우파들 사이에서 "히틀러가 아니면 정권을 잡을 수 없다."라는 일종의 신화적 관념을 심어주게 되었으며, 보수 진영에서 히틀러의 입지가 크게 올라가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던 와중 히틀러와 나치당에는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으니, 바로 대공황이 터져버린 것이다.

7. 나치당의 집권

파일:Hitler portrait.jpg 파일:Es_Lebe_Deutschland.jpg
<rowcolor=#fff> 히틀러의 초상화 Es Lebe Deutschland!
독일 만세!
[50]
<nopad>
히스토리 채널에서 만든 아돌프 히틀러의 집권 인트로
Unsere letzte Hoffnung: HITLER
우리의 마지막 희망, 히틀러
1932년 독일 대통령 선거의 포스터 문구.
"오늘로 히틀러는 독일의 전부가 되었다." 8월 4일자 신문 머리기사 제목은 그렇게 나갔다. …… 8월 초에 히틀러가 일으킨 조용한 쿠데타는 8월 19일에 관례로 치러진 국민투표에서 승인을 받았다. 공식 집계에 따르면 투표자의 89.9퍼센트가 히틀러에게 국가 수반, 정부 수반, 당 지도자, 군 통수권자로서 무제한에 가까운 권리를 헌법으로 보장하는 데 찬성했다. …… 룀 사건에서 힌덴부르크의 죽음으로 이어지는 몇 주 동안 히틀러는 자신의 권력 기반을 흔들 수 있는 모든 위협 요인을 남김없이 제거했다. 마침내 지도자국가가 확립되었다. 독일은 독재 권력을 만들어주고는 거기에 손발이 묶여버렸다.
히틀러 평전 1권 12장 절대 권력(730쪽)
히틀러의 총리 취임은 나치 신화에서 '민족 봉기일'로 당장 미화되었다. 프랑스 혁명을 일으킨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새로운 세상이 이제부터 열린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심지어 달력을 바꿀 생각까지 했다고 나중에 히틀러는 주장했다. 히틀러는 또 '권력 장악'이라는 말을 쓰면 쿠테타를 연상시킨다면서 합법적 경로를 거쳐서 정권을 잡았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권력 인수'라는 말을 쓰기 시작했고 나치 대변인들도 그런 식으로 용어를 바꾸어 썼다. 사실 히틀러가 권력을 장악한 것은 아니었고 대통령이 전임 총리를 임명했던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히틀러에게 권력을 넘겨주었다고 말하는 것이 옳다. 그렇지만 약속이나 한 듯이 여기저기서 열렬한 박수 갈채를 받으면서 히틀러와 나치당 간부들은 날아갈 듯이 기뻤고 그것은 이번의 권력 이양이 여느 때와는 다르다는 것을 말해주었다. 이날 벌어진 일이 얼마나 의미심장한 것인가를 오해하거나 오판한 사람은 하루도 못 가서 뼈저리게 자신의 잘못을 깨달을 것이다. 1933년 1월 30일 이후로 독일은 예전의 독일이 아니었다.

그 역사적인 날은 종말이면서 출발이었다. 아무도 슬퍼해주는 사람은 없었지만 바이마르 공화국이 시효를 다한 날이었고 바이마르 공화국을 무너뜨린 총체적 국가 위기가 절정에 이른 날이었다. 그런가 하면 히틀러의 총리 취임은 전쟁과 대량 학살의 파국으로 치달으면서 독일이라는 민족국가를 망가뜨리는 과정의 시발점이기도 했다. 비인간적인 행위를 억누르는 제동 장치를 하루아침에 훌훌 벗어던지고 아우슈비츠, 트레블링카, 소비보르, 마이다네크 같은 강제수용소로 대단원의 막을 내린 나치의 끔찍한 살육이 막 시동을 건 날이었다.
히틀러 평전 1권 (p. 611~612)
대공황과 막대한 전쟁 배상금으로 바이마르 공화국의 건국을 주도했던 중도좌파중도우파들은 정치적 위기에 몰리게 되었고, 독일 국민들의 지지는 점차 좌우의 양극단에 위치한 정치 세력에 몰리기 시작했다.[51] 이러한 과정에서 히틀러의 나치당은 기존 중도우파 유권자들의 표를 대거 흡수하며 극좌 공산당에 대항하는 극우 민족주의의 대표 정당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지지율도 1928년 총선의 2.6%에서, 대공황 언저리의 1930년 총선에서 18.3%로 급격하게 상승하여 독일 사회민주당에 이어 제2당으로 도약하기에 이르었다.

이 자신감으로 히틀러는 1932년에는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다. 본래 히틀러는 더러운 바이마르 공화국과 영합하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출마할 생각이 없었으나, 파울 요제프 괴벨스가 설득해 출마했다고 한다. 이때 히틀러는 오스트리아 출신으로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오스트리아 국적을 포기했으나 정작 독일 국적은 바로 취득하지 못해 사실상 무국적자나 다름없어서, 1932년에 나치당이 연정으로 참여한 브라운슈바이크 지방정부의 공무원으로 취직하는 꼼수로 독일 국적을 취득한다.[52] 그렇게 출마한 대통령 선거에서는 전쟁 영웅 파울 폰 힌덴부르크의 지지율이 압도적이어서 대통령이 될 가능성은 낮았지만 36.7%의 득표율로 2위를 기록하여 파란을 일으켰다.[53]

한편 의회 지지 없이 대통령 신임으로만 유지되던 하인리히 브뤼닝 내각은 1932년 5월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신임을 거두면서 붕괴했다. 그 뒤로 총리가 된 인물은 프란츠 폰 파펜으로, 잘하는 것이라고는 오로지 힌덴부르크 대통령에게 아첨하는 것밖에 없는 한심한 인간이었으나 정치 군인 쿠르트 폰 슐라이허가 배후에서 조종할 목적으로 총리로 추천되었고 그대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파펜은 반공화국 왕당파 반동주의자로써 총리가 되고 나서부터 온갖 실책을 저질렀고, 자기 정당인 독일 중앙당과도 대립한 끝에 쫓겨나는 굴욕을 당해 의회 내 지지 세력이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파펜은 파펜 내각에 대해 유일하게 모호한 태도를 보였던 나치당과 히틀러에게 지지를 호소했고, 히틀러는 사방에서 욕을 먹는 파펜을 거부하는 대신 돌격대 활동 금지 명령 해제와 의회 해산(총선거)을 조건으로 파펜 내각을 지지해주기로 했다. 나치당 내부에서는 파펜 따위에게 협조하면 안 된다며 반발했지만, 히틀러는 도박을 벌였다.

그렇게 열린 1932년 7월 총선에서 나치당은 37.4%로 230석으로 원내 1당으로 등극했다. 히틀러는 총선 전 약속을 뒤집고 파펜에게 총리직을 요구하지만 파펜과 힌덴부르크에게 거부당했고, 나치당은 공산당이 발의한 파펜 내각 불신임안에 다른 정당과 함께 찬성해 복수한다. 이로 인해 벌어진 의회 재해산으로 인한 11월 총선에서 33.1%로 지지율은 내려갔지만 196석으로 원내 1당은 유지한다. 그러자 보수파에서는 히틀러를 끌어들여 대보수연합정부를 구성하려고 계속 시도하지만, 총리 자리를 요구하는 히틀러와 히틀러의 총리 부임을 반대하는 힌덴부르크 대통령의 의견 대립으로 인해 지연되었다.

일단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히틀러는 거부하고 파펜의 경질에 큰 역할을 한 슐라이허 장군을 대통령 내각[54]의 총리로 임명했다. 그러나 파펜, 마이스너 등이 히틀러를 총리로 임명해야 한다고 힌덴부르크를 설득해 히틀러가 총리, 파펜이 부총리, 그 외 독일 국가인민당의 내각 참여를 골자로 한 내각 구성 합의를 이루었다. 이렇게 되니 의회 지지 세력 없이 대통령 신임으로만 유지된 슐라이허 내각은 무너졌고, 히틀러는 1933년 1월 30일에 정권을 합법적으로 얻어낸다. 히틀러의 집권을 알리는 1933년 1월 31일자 동아일보 집권 과정은 히틀러와 나치당뿐만 아니라 독일 정치권의 무수한 병림픽이 난무했는데, 구체적인 과정과 비하인드 스토리는 파울 폰 힌덴부르크, 프란츠 폰 파펜, 파울 요제프 괴벨스 항목 참조.

히틀러가 집권하고 절대 권력을 구축한 건 히틀러 특유의 직관적 정치력과 벼랑 끝 전술도 한 몫 했지만, 좌우파를 막론하고 나치당과 히틀러를 견제해야 할 경쟁 정파들이 히틀러와 나치당의 잠재력을 지나치게 과소평가했기 때문이었다. 예컨대 히틀러가 이끄는 나치당이 1930년 총선에서 제2당으로 급격히 성장하자 사회민주당의 일부 논객들은 히틀러의 집권은 보수 진영의 무능을 드러내 사회주의 독일로의 역사 이행을 한층 더 앞당길 것이라고 전망했다. 공산당도 비슷하게 생각한 건 매한가지라서 사회민주당을 견제하며 지지 기반을 흡수하는데 집중했다. 결국 공산당과 사회민주당은 나치당에 대항하는 단일 전선을 짜는데 실패하여 권력을 나치당에게 넘겨준 결정적인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당시 주류였던 독일의 중도우파 역시 나치당과 히틀러를 과소평가하였다. 보수파는 국민의 지지가 높은 나치당을 끌어들여 자신들의 방패로 삼고, 히틀러는 잘 달랠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모두 일장춘몽에 불과하였다.

1933년 1월이 아니라 그 전에라도 히틀러를 막을 수 있는 기회는 여러 번 있었다. 1923년 쿠테타를 일으켰을 때 중형을 선고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그만 놓쳐버렸고, 그나마도 몇 달도 안 돼 가석방으로 석방되어 히틀러는 다시 정치를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1930년대 초반 치솟는 지지율과는 대조되게 당시 나치당은 거듭된 선거로 돈이 부족했는데, 1932년 11월 총선에서 득표율 상승세가 꺾이자 위기 의식은 한층 더 커졌다. 나치당의 40만 돌격대를 먹여살리려면 한 주에 나치당에서 250만 마르크씩 빠져나가는데, 돈이 없어서 돌격대 대원들이 앵벌이를 하고 다니는 지경이었다. 나치당을 지지하는 독일인들도 이때는 "체제 절멸하라고 표 줬더니 자리 다툼이나 한다"라며 나치당에 불만을 보였다. 역사가들은 이때가 나치당의 독재를 막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는 평가를 하고는 한다. 하지만 바이마르 공화국의 헌정질서를 공공연히 거부하거나, 묵인할 뿐 마음에 들지 않는 정치인들의 합의로 히틀러는 총리가 되었다. 히틀러와 나치당의 집권은 사회민주당 등 바이마르 공화국을 지키려는 자들의 히틀러에 대한 과소평가와, 바이마르 공화국을 지키려는 최소한의 노력도 하기를 거부한 정치 집단의 계산 착오가 만들어낸 합작품이었다.

1933년 3월,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새 내각에 힘을 실어주려고 의회 해산권을 행사해 새로운 총선이 예정되어 있었다. 때마침 독일 국회의사당 방화 사건이 일어났다. 히틀러 정부가 마음에 들었던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그가 제안한 기본권 제한에 동의했고, 이를 통해 공산당을 무력으로 때려잡고 선거에는 관권을 동원해 공산당의 참여를 방해했다. 그럼에도 총선에선 44% 득표로 단독 과반수 확보엔 실패했다. 히틀러는 나치당만으로 과반 의석을 달성하지 못하자, 의회 내 비나치당 우파와 타협해 입법권을 행정부에 수여하는 수권법을 만들었다. 이 순간이 바이마르 공화국 민주주의의 최후였고, 세계 역사상 유례없는 독재자가 독일에서 탄생했다.[55] 이후 히틀러는 지방 의회를 해산하고, 바이마르 공화국의 여당이었던 사회민주당은 불법 정당으로 규정했다. 그리고 각종 단체와 조합들은 나치당의 하부 조직으로 바뀌었다. 이렇게 독일 제3제국이 시작되었다.

8. 전운이 밀려오다

추종자들은 당신은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을 1920년대 초반부터 히틀러의 머리 속에 심어 놓았다. 히틀러는 그렇게 만들어진 이미지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렇지 않아도 과대망상이 심했는데 거기에 불을 지핀 격이었다. 그때부터 특히 1933년 이후로 내치도 그렇고 외교 정책이 눈부신 성공을 거두자 지도자의 인기가 하늘을 찔렀고 그런 증세는 더욱 심해졌다. 히틀러는 끝 모를 숭배를 그대로 받아들였다. 지도자를 누구보다도 숭배한 사람은 히틀러 자신이었다. 재앙을 불러일으키는 오만은 그렇게 해서 굳어졌다. 그리고 1936년부터 벌어지는 일은 오만에 대한 복수였다.

독일은 히틀러에게 점령당했다. 그뿐 아니었다. 독일은 팽창을 원했다. 세계 평화는 조만간 위협받을 수밖에 없었다. 모든 것이 내가 예견한 대로 굴러간다고 히틀러는 생각했다. 히틀러는 스스로를 신의 섭리가 운명 지은 사람으로 여기게 되었다. "나는 신이 나를 위해 깔아놓은 길을 잠결에 걸어가는 사람처럼 확신에 차 있다."고 3월 14일 뮌헨 집회에서 히틀러는 기염을 토했다. 체제 안에서 크고 작은 권력을 행사하던 모든 집단이 이제 죄다 히틀러 밑으로 들어왔다. 히틀러의 권위는 아무도 흔들 수 없었다. 인기가 하늘을 찔렀다. 신이 깔아놓은 길이 나락으로 이어지는 길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만한 통찰력이 있었던 사람은 그 무렵에는 많지 않았다.
히틀러 평전 1권 마지막 부분
일단 권력을 거머쥐자 나치당은 매우 빠르게 행동하기 시작하여, 히틀러가 총통에 오른지 불과 2년 만에 모든 야당은 사라졌고 당내 좌파는 박멸되었으며[56] 반대 세력은 죽거나 도망쳤고, 유대인은 비국민이 되었으며 독일은 재무장을 향해 달려갔다.

히틀러와 나치당은 절대 권력을 얻고는 나치당 내부의 권력 재편에 착수했다. 1934년 6월 30일 이른바 장검의 밤 사건으로 돌격대 지휘관인 에른스트 룀을 제거하고 쿠르트 폰 슐라이허 장군, 프란츠 폰 파펜과 같은 위험 요소들을 제거하고 위협함으로써 자신의 경쟁자를 모두 해치우는 데 성공했고, 이 일로 히틀러는 절대 권력을 다지게 된다. 1934년 8월 2일에는 파울 폰 힌덴부르크가 사망하면서 그의 자리까지 차지하여 퓌러라는 절대자의 자리에 오른다.

재미있게도 히틀러는 초반에는 독일-폴란드 무역 전쟁을 해결하고 독일-폴란드 불가침조약을 맺는 등 폴란드 제2공화국에 유화적이었다. 물론 이것은 폴란드가 예뻐서가 아니고 히틀러 집권 당시에는 독일이 재무장도 안 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 후 독일 국방군은 나치당에 흡수되어버렸고, 이러한 권력 인수와 더불어 명실상부한 독일의 독재자가 된 히틀러는 민주공화제 시대에 비축되었던 국력을 이용해서 제3제국의 발전을 시도했다. 그리고 외교계, 경제계, 군부 요인들의 협력을 얻어 외교상의 성공을 거두었고 경제의 재건과 번영을 이루었으며, 군비를 확장하여 독일을 유럽에서 최강국으로 발전시켰기 때문에 국민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얻게 되었다. 그러다가 하인리히 힘러헤르만 괴링이 군을 장악하기 위해 벌어진 이른바 블롬베르크-프뤼치 사건이 발생하자 히틀러는 군 최고통수권자가 되었고, 유럽에는 전운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의 유럽 정세를 규정한 베르사유 조약과 관계를 규정한 로카르노 조약은 휴지조각이 되었고, 나치당 내부의 여러 가지 반대 의견들조차 깡그리 무시하고 모험적으로 강행한 라인란트 재무장에서도 영국과 프랑스는 미온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에 도취된 히틀러는 소위 '게르만족의 생존공간'을 확보한다는 미명하에 침략의 고삐를 바짝 당겼다.

이처럼 상식을 저버린 모험의 연이은 성공은 히틀러의 도박에 정당성을 부여했다. 히틀러의 베르사유 조약 파기와 라인란트 재무장, 영독 해군 조약과 오스트리아 병합 등 연이은 외교적 성공으로 히틀러의 인기는 하늘을 찌르게 되었으며, 독일 대중들은 열광적으로 히틀러를 지지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히틀러 주변 인물들의 견제와 조언은 무시당하곤 했다. 히틀러는 계속 자신이 죽기 전에 모든 일을 처리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혔다. 폴란드 침공도 독일군이 다 준비되기를 기다리면 5년이 더 필요했는데[57], 그러면 정복의 길을 걷기에는 너무 나이가 많이 든다는 이유가 언급될 정도였다.[58]

이 시기 히틀러와 나치 독일1936 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 동계올림픽1936 베를린 올림픽을 치렀다. 히틀러는 두 올림픽을 나치 독일의 홍보 목적으로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한편 아우토반 등 나치 독일 정부의 업적들조차 대부분은 보헤미안 기질이 넘쳤던 히틀러 개인의 즉흥적인 결정 내지는 나치 권력자들의 명예욕에 의한 것이었으며, 제대로 된 토의와 명령 하달 체계에 따라 실행된 경우는 거의 없었다. 일부 경기 부양책은 하인리히 브뤼닝과 슐라이허 재임 시 기획되고 효과가 히틀러 때 나타난 것이기도 했다. 심지어는 스페인 내전 참전조차 히틀러가 오페라를 보다가 즉흥적으로 "도와주지 뭐!"라고 한 게 화근이 되었다는 설이 있다. 물론 이후에 폰 블롬베르크를 비롯한 여러 군인들과 관료들이 달라붙어 스페인에서 삥뜯을 거 잘 뜯고 했다지만, 히틀러 개인은 내전 과정에서 포켓전함 어드미럴 그라프쉬페 호가 공화정부 측 폭격기에 피격되자 미친 듯이 날뛰면서 스페인에 선전포고를 하겠다고 하는 등 치밀한 계획과는 거리가 멀었다고 한다.[59]

이렇게 독일의 여력을 생각하지 않고 저지른 일들이 하나 둘씩 쌓이다 보니, 생활 여건 유지와 계속된 재무장을 위한 자원 확보라는 측면에서도 침략을 멈출 수 없는 상황에 도달하고 말았다.[60] 제2차 세계 대전 개전을 즈음해서는 나치당 내부에서조차 히틀러 특유의 막가파식 폭주를 멈추면 정권이 뒤집힌다는 위기 의식까지 있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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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뮌헨 협정[61]
이후 1938년 3월 오스트리아 연방국합병하고, 체코의 독일인 다수 거주 지역인 주데텐란트에 대한 야욕을 보이며 주테텐란트를 내놓으라며 체코슬로바키아에게 시비를 걸었다. 그리고 결국 영국과 프랑스의 개입을 통한 1938년 9월 29일, 뮌헨 협정으로 체코슬로바키아가 주데텐란트의 영유권을 독일에게 할양하게 된다. 나치 독일은 거기까지 만족하는 선으로서 평화는 계속되는 듯 했으나, 가진 것 없이 도박판에서 돈을 따면 점점 큰 판으로 넘어가듯 얼마 지나지도 않아 1939년 초에 체코를 병합하고 슬로바키아를 보호국으로 만드는 등 확장에 대한 야욕을 더욱 드러냈다. 설마 하던 영국과 프랑스도 이때부터 독일과의 전쟁이 단지 시간의 문제일 뿐 피할 수 없음을 인지하고, 그간 나치 독일에 대해 펼쳤던 유화 정책을 제고하며 군비를 비축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1938년 오스트리아 합병 이후 수정의 밤 사건이 발생했다. 독일에 있는 유대인들에게는 절망의 밤이었다. 경찰들이 파괴와 구타의 현장을 목격하고 있었다. 베를린 경찰의 부총수는 한 경찰관이 약탈된 신발 가게 앞에서 울고 있는 것을 보았다.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 임무였으나 자신의 가치를 저버리고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못한 것이다. 공식 집계에 의하면 814개의 상점과 171개의 가옥이 파괴되고, 191개의 유대교 회당이 불에 탔다. 36명의 유대인이 살해되고 36명이 중상을 입었다. 하이드리히는 실제 피해가 훨씬 더 컸을 것이라고 시인했다. 이와 더불어 합병된 오스트리아에서는 히틀러 찬양 노래가 학교에서 불러졌다.
아돌프 히틀러는 우리의 구세주이자 영웅이시다.
이 세상 모든 곳에 가장 고귀한 분이시다.
우리는 히틀러를 위해 살고
히틀러를 위해 죽는다.
우리의 히틀러는 우리의 주이시며
용감하게 신세계를 다스리신다.
아돌프 히틀러 결정판 2 p.398

오스트리아와 체코슬로바키아를 병합한 히틀러의 다음 타깃은 폴란드였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상실하게 된 동프로이센으로의 단치히 회랑과 단치히 자유시의 할양을 요구 조건으로 걸고 폴란드에게 협박을 하였으나, 폴란드는 이 지역을 상실하면 바다로의 출구가 막히는 등의 이유로 그리 쉽게 넘어오지 않았다. 폴란드가 영국과의 군사방위조약을 맺으면서 강경하게 저항하자, 히틀러는 결국 창당 초기부터 이념적으로 대립했으면서도 소비에트-폴란드 전쟁 당시 폴란드에게 우크라이나벨라루스 서부 지역의 영토들을 잃어 폴란드에 대한 불만이 가득했던 소련독소 불가침조약을 체결, 비밀리에 폴란드 및 동유럽 전체의 분할을 약속한다.[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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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하트마 간디가 히틀러에게 보낸 편지[63]
결국 1939년 9월, 나치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함으로서 제2차 세계 대전의 막이 오르게 된다. 막상 히틀러는 폴란드를 침공할 때까지만 해도 영국과 프랑스가 참전하지 않을 거라 믿고 있었다고 한다. 애초에 폴란드만 잡고 끝내버릴 작정이였다. 그러나 이는 영국과 프랑스가 보여준 미온적인 대응과 태도 때문이지, 히틀러가 결코 영국과 프랑스와의 전쟁을 생각하지 않았다고 보기에는 힘들다. 히틀러와 당시 독일 국방군 수뇌부의 판단 착오를 마치 영국과 프랑스가 선전포고를 하는 바람에 전쟁이 더 커졌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설령 폴란드가 요구를 수용하였다 하더라도 동유럽권을 침략하는 목적 자체가 소련 및 서방과의 전쟁을 대비한 것이었으니 결과는 전혀 달라지지 않았을 공산이 높다.

다만 위의 주장이 간과하는 것이 있는데, 히틀러의 대외 정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소련의 멸망과 레벤스라움 확보였다. 지금 보면 아이러니하지만, 1939년 초까지만 하더라도 히틀러는 폴란드와 동맹을 진지하게 고려하고 있었다. 독일의 폴란드 침공 구실이 된 단치히 회랑 반환 요구는 아이러니하게도 히틀러의 폴란드가 반공 전선이라는 명분하에 수용할 것이라고 진지한 믿음이기도 했던 것이다. 반폴란드 정서가 극심했던 당시 독일 여론을 무시하면서까지 이걸 고려한 이유가 단순히 폴란드와의 동맹이 소련과의 전쟁에 크게 도움을 될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정복한 소련 영토를 폴란드와 분할할 것을 제안했을 정도로 히틀러에게 압도적으로 중요한 관심사는 소련 침공과 멸망이었다.

그에 비하면 다른 외교/영토 문제는 히틀러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히틀러는 독일을 한 차례 패배시킨 영국과 프랑스와의 충돌을 어떻게든 피하고 싶어했다. 폴란드 침공 당시에도 독일군의 제 1목표는 신속한 폴란드 함락인 동시에 최대한 영국과 프랑스에 대해서는 적대적 행동을 최소화하여 독일이 이들과 전면전을 치룰 의사가 전혀 없다는 것을 표방하는 것이었고, 영국과 프랑스에 대해 선전포고를 한 것도 이들로부터 선전포고를 받고 난 이후인 9월 27일이었다. 히틀러가 선전포고를 한 9월 27일은 이전인 9월 7일에는 이미 프랑스군이 마지노선을 넘어 자르 공세를 펼쳤다가 17일 격퇴되고 한 이후의 일이었다. 즉 만약에 독일-폴란드 동맹이 실현되어 폴란드를 추축군 세력에 편입시켰거나, 영국-프랑스가 폴란드 침공에 개입하지 않았으면 최소한 잠시나마 서유럽에 평화가 지속될 가능성이 높았다고 볼 수 있다.

이와는 별개로 히틀러는 베를린 외곽에 대규모 공사를 지시했는데, 그 이유는 히틀러가 세계정복을 하고 난 뒤에 세계의 수도를 건설하기 위해서였다. 히틀러는 이미 세계를 정복하려는 의지가 강력했으며 그래서 그 세계의 수도가 될 도시 이름을 '게르마니아'로 짓고 측근 알베르트 슈페어에게 인구 1억명이 거주할 수 있는 시설을 만들도록 지시했으며 곧 공사가 진행되었다. 특히 18만명을 한꺼번에 수용할 수 있는 국민회관의 초대형 돔이 압권이었다.[64]

그러나 이 공사가 진행되는 동안 나치 독일이 패망하는 바람에 공사는 전격 중단되었고, 도시는 미완성 상태로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만 잔뜩 풍기고 있었다. 이 도시를 계획한 건축가부터가 이미 나치 전범이었다.[65] 히틀러는 이 계획을 구상할 때 "당신들은 12년 후의 베를린을 알아볼 수 없을 것이다."며 자부했는데, 그가 이 말을 했을 때가 1933년. 12년 후인 1945년소련군베를린을 초토화시키고 점령했으니 의도야 어떻든 그 말은 사실이 돼 버렸다.

9. 제2차 세계 대전과 몰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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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 최고 지휘관 히틀러의 초상화
1939년,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자,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다. 실제 히틀러는 1938년 오스트리아에 대한 합병과 뮌헨 협정 때 체코의 수테텐란트 지역을 합병한 것과 마찬가지로 폴란드에 대한 침공 역시 영국과 프랑스가 묵인하거나 말로만 항의하고 넘어갈 것으로 판단했으나, 예상을 깨고 프랑스와 영국이 독일과의 전쟁을 선포하자 히틀러는 무척 당황했다.

그러나 정작 영국은 파견할 지상병력이 부족했고, 프랑스는 독일이 공격해오기 전 까지 선제공격을 가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프랑스는 독일 국경 내로 수십 킬로미터를 진군해오나 싶더니 회군해서 마지노선에 틀어박혀 버렸다.[66] 독일은 이런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약 100만여 명에 달하는 폴란드군을 넘어 공세 종말점에 다다르기 직전 한 달여 만에 가까스로 폴란드를 제압하는 데에 성공한다.

1939년, 폴란드 침공으로 신속하게 폴란드를 제압한 직후, 히틀러는 프랑스를 빠른시일 내에 정복하기로 결정하고 작전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프랑스가 식민지와 본토에서 어마어마한 양의 지상군을 동원해 손쓸 수 없는 상황이 되기 전에 되도록 빠르게 프랑스를 공격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문제는 폴란드 침공에서도 드러났듯이 독일군은 프랑스와 결전을 벌일 만큼 강하지도 않았고 예비 물자도 매우 부족했다는 거다. 이후 알 수 없는 이유로 히틀러는 1939년 내에 프랑스를 공격하겠다는 계획을 접고 전쟁은 1940년으로 이어졌다.

1940년이 되자 히틀러는 이번에야말로 프랑스를 공격하기로 하고 작전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독일의 초기 작전안은 "황색 상황"이라는 1차 대전의 슐리펜 계획과 거의 동일한 계획이었는데, 군사적으로 무능한 히틀러조차도 슐리펜 계획을 한 번 당해본 프랑스가 또 당할 리가 없다며 화를 낼 정도였다.[67] 설상가상으로 황색 작전의 초안이 연합국의 손에 들어가면서 작전을 한 번 뒤엎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되어버린다. 이런 상황에서 에리히 폰 만슈타인이 구상한 이른바 "낫질 작전"을 보고받게 된 히틀러는 이를 프랑스 침공의 정식 작전으로 채택하고 침공을 준비하게 되었다.

1940년 5월 10일 개시된 낫질 작전은 프랑스와 벨기에 사이의 허점을 정확하게 관통해 아르덴을 지나 연합국의 주력군을 벨기에와 프랑스 북부에서 포위하는 데에 성공한다.[68] 그런데 히틀러는 1차 대전 때의 마른 전투로 인한 독일의 패전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당시 독일군은 파리 인근까지 진격해 남하한 뒤 알자스-로렌으로 진격중인 프랑스 주력부대를 포위해 섬멸하기 직전에 다다랐다. 그러나 우익을 비워두었던 바람에 우익으로 치고 들어온 프랑스군의 반격에 공세가 돈좌되었고, 이는 결국 패전의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 이번 침공도 그렇게 실패하여 패전할 것을 두려워하던 히틀러는 사실상 가능성이 없는 남측에서의 반격을 경계해 철수하는 연합군의 섬멸을 주저하였고, 이는 됭케르크 철수작전으로 이어져 상당수의 연합군이 영국으로 무사히 빠져나가게 된다.

어찌 되었든 프랑스군의 주력은 사실상 무력화되었고, 프랑스의 수뇌부는 쇼크에 빠져 마비되었다. 벨기에에서 연합국을 몰아낸 독일군은 이어 프랑스 북부에 배치되어 남쪽을 향해 총공세를 가했고, 프랑스는 각지에 흐르는 강을 방어선으로 삼아 전쟁을 지속하려 하였으나 독일군 기갑부대의 계속되는 돌파로 포위섬멸되기에 이르렀다. 결국 6월 22일, 독일은 작전개시 6주만에 프랑스를 굴복시키는 데에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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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프랑스 파리점령 후 기념사진을 찍은 히틀러
이렇게 단기 결전으로 프랑스를 격파한 독일은 두 번째 대전의 승자가 되어가는 듯 했고, 세계는 혼란에 빠졌으며, 히틀러는 전 독일의 열광을 받으며 개선했다. 히틀러는 마치 신과 같은 존재가 되어 전 독일 국민의 충성과 존경을 받는 존재가 되었으며, 이 때가 히틀러의 인생 최고 전성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 개전 초중반에는 에르빈 롬멜, 하인츠 구데리안 등등 독일의 유능한 지휘관들과 독일을 얕잡아 본 영국, 프랑스로 구성된 연합군 측의 삽질 덕에 그야말로 유럽을 '쓸어담는' 수준의 정복자가 되었으나, 이후 연합군 측이 체제를 정비하고 진주만 습격으로 참전한 미국의 개입, 소련의 반격 등등 반격에 나선 데다 본인이 명목상의 최고사령관 뿐만 아니라, 직접 육군 최고사령관까지 겸직하는 등의 무모한 겸직러쉬가 독일군의 몰락을 한순간에 가속화시켰다.

다만 이 결정이 어느 정도는 어쩔 수 없었던 게 당시 독일 군부가 히틀러의 명령에 사사건건 불복종하는 것은 물론 정권을 뒤엎을 계획도 수없이 짜는 등 문민통제가 전혀 안 됐기 때문이다.[69] 문제는 히틀러가 원래 소싯적부터 니트 생활에 익숙해서 생활 리듬이 일반인과 다른데다가 뭔가 복잡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결재도 안 하고 냅다 넘겨버리는 버릇 때문에 총리 시절부터 업무에 막대한 지장을 주었다는 것.[70]

아무튼 1941년 전까지는 중립국을 제외한 전 유럽을 점령해 나아가던 상황이었다. 히틀러는 철저한 공산주의 혐오자였고, 스탈린의 피의 숙청으로 인한 겨울전쟁에서의 소련군의 졸전을 보고 소련도 이젠 별거 아니라고 판단 및 얕잡아 본 뒤 소련을 공격한 게 화근이었다. 하지만 알아두어야 할 것은 1941년의 소련 공격이 흔히 알려진 것처럼 비합리적인 결정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비록 이때 당시 영국 본토와 식민지에 걸쳐 전쟁 중이었고 소련과 불가침 조약을 맺고 있었지만, 겨울전쟁발트 3국 점령에서 볼 수 있듯이 불가침 조약을 휴지조각으로 보는 것은 어차피 스탈린이나 히틀러나 똑같았다. 다만 스탈린과 히틀러의 차이점은 (스탈린은) 외교에 있어서는 아주 철저한 강약약강이었기 때문에 상대방이 강한 이상 무모한 도발을 철저하게 자제하였다는 거다.[71] 그리고 이를 반대로 해석하면 혹시라도 나치 독일이 서방 연합국한테 밀리기 시작해서 소련보다 약해지는 순간 동방에서 수백만 대군에게 침공 당하는 최악의 상황에 도달할 가능성이 높았다. 즉, 당시 독일 입장에서는 소련과의 전쟁은 위험을 미리 제거해버리고자 하는 예방전쟁의 느낌과 비슷했다. 거기다 1941년의 소련은 대숙청의 영향으로 전쟁에 제대로 사전 대비도 못했기 때문에 소련의 잠재력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72] 소련 공격이라는 선택지는 매우 매력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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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네르헤임과 히틀러
어쨌든 독일군은 히틀러의 명령을 받아 선전포고도 없이 1941년 6월 바르바로사 작전을 발동하여 소련을 공격, 독소전쟁이 발발한다. 유능한 지휘관들이 숙청되었고 전쟁 대비가 덜 된 소련은 속수무책으로 밀리고 모스크바 앞까지 몰려왔으나 동장군 덕에 구사일생하였고 이후 독일군은 재진격하여 스탈린그라드 앞까지 진군했으나 소련군이 그야말로 인력을 갈아넣으며 처절하게 방어해냈고 동맹국의 군대를 천대시한 독일군의 약점을 찌른 천왕성 작전이라는 반격으로 대참패를 당하며 전세가 뒤집어지게 된다. 결국 히틀러는 발터 폰 브라우히치를 해임하고 스스로 육군최고사령관에 취임한다. 거기다 동맹 일본 제국진주만 공습 이후 미국에 선전포고까지 해서 스스로 무덤을 파는 멍청한 짓거리를 행하고 만다. 물론 그 이후의 독일의 전황과 작전 상황은 안 봐도 개판 5분 전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전쟁을 이어나갈 당시 히틀러는 몸과 정신이 쇠락해져 있는 상황이었다.
  • 히틀러가 전쟁을 일으킨 때의 나이가 딱 50세. 권력의 정점에 올랐을 때는 이미 지천명을 넘어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여서 나이로 인한 노환 문제도 좀 있었다. 생모 클라라 푈츨이 위암으로 47세의 젊은 나이에 숨진데다 불규칙했던 평소 생활습관으로 자신의 소화 능력도 크게 떨어졌기 때문에 히틀러가 50이 넘어서자 자신의 건강에 대해서 크게 염려했는데, 시도 때도 없이 복통에 시달렸고 그로 인해 가족력을 의심하여 설사약을 복용하는 일도 잦았다.
  • 히틀러는 암살 위기도 여러번 겨우 넘겼기 때문에 정신이 말이 아니었다고 한다. 내셔널 지오그래픽에서 만든 다큐멘터리에 따르면 무려 43번이나 암살이 시도되었고, 암살 시도 방법도 평범했던 목수까지 폭탄을 만들어 그를 암살하려 들거나, 부하장교들이나 여러 사람들이 그를 증오하여 죽이려고 별별 시도를 했던 게 드러냈다. 몇번은 성공할 뻔 했으나 그야말로 운이 좋게 암살을 모면[73]했다. 하지만 이런 히틀러 암살계획이 생길수록 그의 정신 상태는 더더욱 맛이 가게 됐다. 절정은 1944년 말에 벌어진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으로, 이때 당시 폭발로 큰 쇼크를 받은 상태라 그 이후로는 반신마비 증세가 좀 생겼고, 손이 떨리는 등 좀 제정신이 아닌 경향이 있었다고 한다. 히틀러의 비서였던 트라우들 융에의 증언을 보면 이 사건 이후로 왼손을 자주 떨어서 연설이나 공식 자리엔 왼손을 안 보이며 다녔다고 한다.[74]
  • 전간기 시절엔 그래도 연극영화 등을 감상[75]하며 취미생활도 즐겼고 자신의 부관들에게 농담도 던지는 여유를 부렸지만 전쟁이 터지고 나서 하루 종일 전쟁 지휘벙커에서 참모들과 하는 작전회의에만 매달렸고 당연히 그의 정신건강도 피폐해졌고 경직되어갔다. 몇몇 그의 측근들은 전쟁 이전과 전쟁 이후의 히틀러가 아예 다른 사람으로 보인다고 평가할 정도다.[76]
  • 1943년 이후로는 신경성 불면증까지 찾아와서 모르핀 성분의 안약 없이는 잠을 자지도 못했다. 게다가 주치의 테오도어 모렐 박사는 약간 돌팔이로, 마약 성분이 함유된 약을 제멋대로 과하게 많이 처방해서 히틀러에게 마음을 진정시키는 데 좋다고 수시로 먹이기까지 했다.[77] 알다시피 마약 먹고 잘 된 지도자는 없다. 처음에는 이틀에 한번 맞고 가끔 숙면에 도움이 되는 정도였지만 1945년 몰락 직전엔 하루 4번 이상 맞고도 신경쇠약과 불면증에 시달렸다.[78] 결국 이게 그러잖아도 병세가 악화됐던 히틀러의 상태를 더 악화시키게 된다. 말년의 기록이나 영상을 보면 다리를 저는가 하면 제대로 물건을 쥐지 못하는 등 혹시 파킨슨병에 걸린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도 가지고 있다. 영화 몰락에서 대머리 군의관인 친위대 대령 에른스트 귄터 솅크도 히틀러가 파킨슨병을 확실히 앓았다고 주장했다. 일각에선 독일의 패전이 히틀러의 파킨슨병 때문이었다고도 주장한다. 뇌 신경세포 손상으로 인하여 상황판단 능력이 떨어진 히틀러가 전쟁에서 번번이 오판을 거듭했다는 것. 이와 관련하여 영국의 역사학자 데이비드 어빙[79]은 히틀러는 약쟁이였으며, 주치의 모렐에게 스트리크닌과 암페타민을 처방받아서 복용했고, 그밖에도 필로폰과 코카인 등을 처방했다고 한다. 이러한 중독성 약물의 특성상 시간이 지나면 점점 더 약을 강하게 써야 하기 때문에 심할 때는 하루에 히틀러가 먹었던 약물은 하루 28가지로 1년에 90가지에 이르렀다고 주장했다. 아울러 히틀러는 죽을 때까지 자신이 중증 마약중독자였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고 한다.[80]

이렇게 히틀러의 건강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점점 이상해지기 시작하자 그의 개인비서 겸 나치당 의장을 맡고 있던 마르틴 보어만의 권력과 위상이 점점 강해지기 시작했다. 보어만은 문서작업을 극히 싫어하는 히틀러 대신 문서를 도맡아 하면서 호가호위를 했지만, 점점 히틀러의 이름을 빌려가며 자신의 명령을 내리기 시작했다. 어떤 역사가들은 1943년 이후로 독일의 실질적인 실세는 보어만이라고 했을 정도. 히틀러가 군사작전에 관심을 갖는 동안 내정은 거의 보어만의 몫이었으며, 그리하여 1900년 생인 보어만은 나치 정권 말기로 가면 갈수록 하인리히 힘러헤르만 괴링보다도 더 큰 권력을 손에 쥐게 되었고, 그와 함께 히틀러 후계자군에 들게 되었다.
스탈린그라드 이후 몇 달 동안, 히틀러의 몸에 밴 낯익은 특징적 성격은 더욱 강해졌다. 때때로 최측근들과 함께 있는 자리에서는 어처구니 없는 낙관주의가 아직 유지되고 있는 편이었다. 불굴의 의지력도 여전히 드러냈다. 현실과 동떨어진 망상은 새로운 차원으로 올라섰다. 그러나 가면이 이따금 벗겨지면서 심한 우울증과 숙명론을 툭툭 내뱉기도 했다. 그것은 히틀러의 내면에서는 이미 분명했던 인식, 다시 말해서 자기는 주도권을 영영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한때나마 시인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그런 사실을 시인할 수밖에 없을 때는 새삼 분통을 터뜨렸는데, 그럴 때는 대개 군 쥐휘관들이 있는 대로 욕을 얻어먹었다. 당신들은 거짓말쟁이고, 충성심이 부족하고, 국가사회주의를 거역하고, 반동적이고, 문화를 보는 안목이 없다고 히틀러는 몰아세웠다. 마음 같아서는 더는 상대하기도 싫다고 말했다. 히틀러의 비난 대상은 나중에는 독일 국민으로 바뀌었다. 독일 국민은 위대한 투쟁에 자기와 함께 나서기에는 너무 나약하다고 히틀러는 보았다. 패퇴를 거듭할수록 사방으로 포위당한 지도자는 무자비한 보복과 앙갚음의 유혹에 쉽게 넘어갔다. 복수의 대상은 한편으로는 외부의 적이었고, 그 배후에는 언제나 유대인이라는 악마가 버티고 있었다. 내부의 적은 '배신'자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감히 패배주의를 드러내는 사람이었다. 히틀러의 근본적인 잔인함을 옆에서 완화할 만한 인물은 없었다. 수백만의 우상이었던 사람이 (자기 말로는) 에바 브라운과 애견 블론디 말고는 말벗이 없었다.
히틀러 평전 2권 (p. 692~693)
특히 전쟁에서 패색이 짙어지자 히틀러는 극도의 불안감을 드러냈으며 점점 판단력을 잃어갔다. 알베르트 슈페어가 회고록에서 밝히기로는 히틀러는 적의 정보기관이 실제 목표 지점에서 엉뚱한 곳에 병력을 배치하도록 의도적으로 잘못된 정보를 흘리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슈페어가 시찰을 돌며 찍어온 피난민 행렬 사진에 대해서도 히틀러는 모르쇠로 일관했으며, 패배한 군인은 “피 흘리며 죽어가 전멸하는 것이 마땅하다.”고까지 말하곤 했다. 그러면서도 히틀러는 패배를 두려워한 나머지 상황에 대한 정확한 보고조차 들으려 하지도 않았다. 그 와중에 자신이 몰락하는 이유가 바로 유대인 때문이라면서 광적인 증오심을 드러내며 유대인 학살에 더욱 더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특히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이후에는 망상증과 잔인성이 증가되었고 사람에 대한 불신감이 더더욱 커져 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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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트리히 폰 콜티츠
히틀러는 1944년 전쟁 초기에 자신이 예술가로서 아름답다고 호평하던 프랑스의 수도 파리를 다시 연합군한테 빼앗기느니 차라리 모조리 불바다로 만들라는 명령을 당시 프랑스에 주둔 중이던 독일군 지휘부에게 내리고 만다. 그러나 프랑스 군정 총사령관 디트리히 폰 콜티츠(Dietrich von Choltitz) 보병대장은 고민 끝에 파리를 불바다로 만들라는 히틀러의 명령을 거절하고 당시 파리로 진군하던 필립 르클레르 자유 프랑스군 장군에게 전면 항복한다.[81] 이때 히틀러는 9번씩이나 직접 전화를 걸어 "파리는 불타고 있는가(Paris brûle-t-il? / Is Paris Burning)?"라는 말을 했다 한다.

전쟁 말기에 히틀러는 이미 자신의 몰락을 알고 있었지만 패배에 버럭하거나 발작을 일으키며 미친듯이 화를 내는 버릇이 생겨버렸다. 그러자 히틀러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주요 인사들은 패배로 소멸한 부대에 대한 보고를 누락시켰고, 이는 결국 수십 개에 달했다 한다.[82] 이를 모르는 히틀러는 이미 소멸한 부대에 대해 "공세에 참가하라.", "뚫린 곳을 막으라."는 등의 명령을 내리게 된다. 전쟁 말기처럼 정보 하나, 부대 하나가 소중한 시점에 아무것도 모르면서 잘못된 판단을 내릴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결국 히틀러는 전쟁 마지막 순간까지 (이미 소멸한) 지원 올 '마지막 부대'에 대한 말이나 읊조리고 있어야 했다.

더 나아가 1945년 1월 히틀러가 서부전선에서 가했던 마지막 반격 벌지 전투도 영미 연합군의 승리로 끝났다. 동부와 서부 양측에서 전선이 완벽히 밀리고 있었던 것이다. 아래 존 톨랜드의 저서 《아돌프 히틀러 결정판 2》를 보자
1945년 1월 17일 히틀러에게는 전혀 위안이 전해지지 않았다. 만토이펠의 군대가 완전 철수 대열에 합류했다. 너무 어리거나 나이 들거나 아니면 용도가 폐기된 소수의 보병들이 후방에 남았다. 이들은 외로운 절망감 속에서도 용감하게 후퇴 병력의 후미를 지켰다. 14~15세의 소년병들이 총을 쥔 채로 얼어 죽어 있었다. 50대 병사들은 지하실에서 발이 새까만 채 부패되어 있었다. 후퇴하는 부대 행렬은 비행기와 대포의 포격에 괴롭힘을 당했다.


생존한 사람들은 그 누구도 압도적인 미군의 포병 공격을 잊지 못할 것이다. 미군은 트럭, 전차, 자주포들이 눈발이 쌓여 언 도로와 오솔길을 따라 굉음을 내면서 독일 본토로 향하고 있었다. 긴 보병 행렬도 혹독한 날씨와 후퇴하는 적군들과 씨름해가며 눈 속에서 행진했다.


벌지 대전투는 끝났다. 파괴된 집과 농장, 죽은 소 등이 널브러진 황폐화된 작은 두 나라에 7만 5천 명 이상의 죽은 영혼이 남아 있었다.
아돌프 히틀러 결정판 2 p.593~5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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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마지막 지휘소였던 퓌러붕커
1945년 1월 16일 히틀러가 베를린으로 돌아왔을 때 거리는 30억 제곱피트의 건물 잔해와 파편으로 가득했다. 낮에는 미 육군 항공대의 공습이, 밤에는 영국 공군의 무자비한 공습이 어어졌으며 공습의 강도가 거세어지자, 히틀러는 퓌러붕커로 이동하기로 결정했고 이 지하 벙커가 그의 13번째이자 마지막 사령부가 되었다.
  • 2층으로 이루어진 이 퓌러붕커는 땅속 55피트(16.7m) 아래 있었고, 외벽의 두께는 6피트(1.8m)나 되었다. 지면으로부터 30피트(9.1m) 아래에 8피트(2.4m) 두께의 콘크리트 덮개가 상부를 덮고 있었고, 천장이 낮고 비좁은 방들이 중앙 복도 양편에 모여 있었으며 이곳에서 매일 회의가 열렸다. 외부와 연락할 수 있는 수단이라고는 베를린에서 남쪽으로 24km 떨어진 초센의 국방군 최고사령부와 연결된 전화 교환대와 무전송신기, 무전기 각 1대씩이 전부였다. 전후에 소련군의 폭탄이 총리관저의 벽을 철저하게 파괴하고 그 아래에 있는 벙커를 유독가스로 채웠기 때문에 땀이 나고 공기가 부족해져서 퓌러붕커의 환경은 점점 더 열악해졌다.
히틀러는 이곳에서 뒤통수를 여러 번 크게 맞았는데, 바로 헤르만 괴링알베르트 슈페어, 하인리히 힘러의 배신이었다.[83] 벙커에서 히틀러의 반응을 본 사람 중에서는 여성 비행사 한나 라이치(Hanna Reitsch)가 있었다. 광적인 나치주의자였던 그녀는 마지막으로 벙커를 방문한 사람들 중 한 명이었기 때문에, 전후에 아주 중요한 증인이 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히틀러에게 가장 충격을 준 것은 하인리히 힘러의 배신이었다. 히틀러는 헤르만 괴링이야 원래 기회주의적이고 부패한 사람이라고 여겼고 그의 배신은 일찍이 예상했기 때문에 그렇게까지 실망이 크지 않았고, 알베르트 슈페어는 다른 세상에 붕 떠있는 예측 불가능한 예술가여서 그럴 만하다고 생각했지만, 가장 충성스러웠고 청렴했던 하인리히 힘러의 배신에 대해서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며 "최악의 반역이자 배반이다!"라고 할 정도로 엄청나게 화를 냈다. 한나 라이치가 훗날 증언한 내용에 따르면 "그는 미친 사람처럼 미쳐 날뛰었다. 얼굴이 새빨갛게 되어 거의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전에 있던 발작들과는 다르게 힘이 많이 빠져있던 상태였기 때문에 곧 발작은 가라앉았고 그는 괴벨스, 보어만과 함께 문을 닫고 자기들끼리만 회의를 했다.

결국 최후의 순간에는 베를린을 연합군이 폭격으로 폐허를 만든 후 소련군이 쑥대밭으로 만든 것도 모자라 구석구석까지 들쑤시고 다닌 덕택에 총통벙커 근처까지도 초토화된 상태였으며, 그제서야 더 이상의 탁상놀음은 소용없다고 깨달았는지 자살했다.[84] 당시 히틀러를 위해 일하던 사람들은 그의 끔찍한 몰골을 보아야 했다. 증언에 의하면 "히틀러는 힘들어서 몹시 무겁게 상체를 앞으로 굽히면서 다리를 질질 끌고 벙커의 회의실로 나왔다. 균형감각이 없었고 히틀러는 잠깐 걷고 나면(20에서 30m 정도) 이런 경우를 위해서 여기저기 마련되어 있는 의자에 주저앉거나 아니면 옆사람에게 기댔다. 눈은 충혈되어 있었다. 그를 위한 서류들은 모두 3배 크기로 확대된 문자로 특별한 '총통 타자기'로 타자된 것이었는데도 그는 돋보기를 사용해야만 읽을 수가 있었다. 입 가장자리에서는 자주 침이 흘러내렸다."라고 하며 등이 구부러지고 발을 질질 끌던 히틀러는 머리는 반백이고 일그러진 얼굴에 수염에는 흰 얼룩이 묻어 있었다고 한다. 당시 그는 글을 쓸 수 없었기 때문에 부관이 그의 서명을 위조했다.

새로운 임명을 전화 한 통으로도 간단히 할 수 있었지만, 상당히 어리석으면서 매우 위험하게 그는 로베르트 리터 폰 그라임(Robert ritter von Greim) 공군 원수를 벙커로 소환해서 그에게 헤르만 괴링으로부터 독일 공군 총사령관 직책을 인계 받으라고 명령했다. 중상을 입고 고립되어 있던 폰 그라임은 4월 24일 한나 라이치와 함께 베를린으로 날아가 반역자 힘러를 체포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배신자가 내 뒤를 이어 총통이 되어서는 안 되오, 그가 그렇게 되지 못하도록 최선을 다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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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와 에바 브라운
그는 결혼 예식을 위해 소회의실을 정돈하도록 명령했고, SS 대원들은 근처에 위치한 국민 돌격대로 소집되어 있던 발터 바그너라는 이름의 관구 지도자를 불러 총통과 에바 브라운의 결혼식을 주재하라는 부탁을 했다. 괴벨스와 보어만이 증인이 되었고 그들은 자기들이 순수 아리안 혈통이며 유전병이 없다고 진술하였다. 신청서들이 접수되고 결혼 예고가 "검토되고 규정에 맞는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당시 상황을 기록한 문서에 의하면 발터 바그너는 두 사람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이제 결혼 예식을 거행하려고 합니다. 위에 부른 증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나는 총통인 아돌프 히틀러에게 에바 브라운 양과의 이 결혼을 원하는지 묻겠습니다. 원한다면 '네'라고 대답하십시오. 이제 에바 브라운 양, 당신이 나의 총통인 아돌프 히틀러와의 결혼을 원하는지 묻겠습니다. 원한다면 '네'라고 대답하십시오. 이제 두 사람의 약혼자가 결혼을 하겠다고 선언하였으므로 이제 나는 이 결혼이 적법하게 맺어진 것임을 선언합니다.
이어서 참석자들은 증서에 서명했고, 에바 브라운은 너무 흥분해서 결혼 전 성으로 서명을 했다가 첫 글자인 B를 지우고 '에바 히틀러, 출생은 브라운'이라고 서명하였다. 그리고 나서 모두 개인방으로 갔다. 그곳에서는 비서들, 히틀러의 요리사인 콘스탄체 만치알리(Constanze Manzialy), 그리고 몇몇의 장교들이 기다리고 있다가 함께 간단한 음료를 마시면서 옛날을 회상하였다고 한다.

그렇게 1945년 4월 29일 이른 새벽에 히틀러는 자신에게 헌신적인 에바 브라운과 결혼했고,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의 유서와 유언장을 받아 적게 했다. 히틀러의 유언장은 두 장이다. 개인적인 유언장과 카이텔 장군에게 전해질 유언장이었다.
나는 지난 전쟁 기간 동안 결혼하는 것이 책임감 없는 행동이라고 믿었기에 지금 지상의 이력을 끝내기에 앞서 오랜 세월 우정을 나눈 다음 자유의사로 거의 완전히 포위된 도시로 들어와서 나의 운명을 함께 나누려는 이 아가씨를 아내로 맞아들이기로 결심하였다. 그녀는 자신의 소원에 따라 내 아내로서 나와 함께 죽게 될 것이다. 죽음은 민족에 봉사해야 하는 나의 일이 우리 두 사람에게서 빼앗아간 것을 우리에게 보상해줄 것이다. 내가 가진 것은 당의 소유가 된다. 당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국가 소유이고, 국가마저 파괴된다면 내가 내린 결정은 아무 소용도 없을 것이다. 나는 여러 해 동안 사들인 그림들을 개인적인 목적을 위해서 모았던 것이 아니고 언제나 내 고향 도시 도나우 강변의 린츠에 회랑을 건설하기 위해서 모았다. 이것이 이루어지는 것은 가장 귀한 소망이다. 유언장 집행인으로는 가장 충실한 당 동지 마르틴 보어만을 임명한다. 그는 모든 결정을 최종적으로 내릴 권한을 가진다. 개인적인 추억의 가치를 가진 것이나 시민적인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나의 형제자매들과 내 아내의 어머니, 그리고 그도 잘 알고 있는 충실한 직원들에게, 특히 여러 해 동안이나 업무에서 나를 도와준 나이든 남녀 비서들과 빈터 부인에게 나누어줄 권한을 가진다. 나 자신과 내 아내는 파면이나 항복의 수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죽음을 택한다. 지난 12년 동안 민족에게 봉사하면서 내 일상의 업무 대부분을 처리한 이곳에서 즉시 불태워진다는 것이 우리의 의지다.
히틀러의 유언장
두 장의 유언장은 4월 29일 새벽 4시에 서명되었다. 세 장의 사본이 만들어졌고, 그날 하루 동안 여러 방법을 통해 벙커에서 밖으로 알려졌다. 심부름꾼 중 한 사람은 히틀러의 공군 부관 폰 벨로브 대령이였다. 히틀러는 힘러괴링을 모든 공직에서 쫓아냈고 그들을 반역자로 체포하라고 지시했다. 히틀러는 자신의 또다른 유언장을 벨로브 대령에게 주어 빌헬름 카이텔에게 메시지를 전하라고 명령했다. 이것은 히틀러가 작성한 마지막 문서였다.
"민족과 방위군은 이 길고도 힘든 싸움에서 모든 것을 마지막까지 바쳤다. 희생은 엄청난 것이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나의 신뢰를 악용했다. 전쟁을 치르는 도처에서 불충과 배신이 저항의 힘을 갉아먹었다. 이제 나는 국민을 승리로 이끌 수 없다. 육군 참모본부는 제1차 세계 대전 때의 총참모본부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하다. 참모본부의 공적은 전선에서 싸우는 사람들의 공을 훨씬 능가하는 것이었다. 이 전쟁에서 도이치 민족의 노력과 희생은 너무나도 커서 나는 그러한 노력과 희생이 허사가 되었다고는 믿을 수가 없다. 앞으로도 도이치 민족을 위해 동쪽에서 공간을 얻는 것은 계속 목표가 되어야 한다."
그 뒤 히틀러는 카를 되니츠 해군 원수를 총리 겸 전쟁부 장관 겸 3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 막 결혼한 히틀러와 에바 브라운 부부는 즉석에서 피로연을 베풀었다. 히틀러는 샴페인 잔을 부딪치며 지나간 영광스러운 날들에 대해 오랫동안 이야기했고, 작별 인사를 한 뒤 부부는 그 자리를 떠났고, 잠시 후에 권총 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56세 생일을 맞은 지 열흘만에 생을 마감한 것이다. 아돌프 히틀러의 시체가 피를 흘리면서 소파를 피로 적시고 있었고, 에바 브라운은 독약을 마신 상태였다고 한다. 이들의 주검은 소련 포탄이 총리관저 정원에서 폭발하는 가운데 바깥으로 옮겨져 하인츠 링에, 오토 귄셰에 의해 화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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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4월 20일, 히틀러가 죽기 10일 전 율리우스 샤우프와 함께 있는 사진.
이 사진은 히틀러가 찍힌 마지막 사진이 되었다.[85]

9.1. 전쟁범죄 혐의들

히틀러는 자살해서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 출석하지 않았을 뿐, 그는 명백한 반인륜적 전쟁범죄를 여러 번 계획하고 명령했다.

다만, 그가 직접 행정적으로 명령한 기록은 거의 발견되지 않았으며,[86] 그의 연설과 주변 인물들의 증언을 통해 명백한 혐의를 도출해내고 있다.

9.1.1. 장애인 학살 명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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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f,#1f2023>Reichsleiter Bouhler und Dr. med. Brandt

sind unter Verantwortung beauftragt, die Befugnisse namentlich zu bestimmender Ärzte so zu erweitern, dass nach menschlichem Ermessen unheilbar Kranken bei kritischster Beurteilung ihres Krankheitszustandes der Gnadentod gewährt werden kann.

A hitler
국가지도자[87] 필리프 보울러[88]와 의사 브란트에게

치료에 가망이 없을 만큼 병세가 무겁다고 판단되는 경우, 그 환자에게 병세에 관해 엄격한 감정을 실시한 뒤에 특별히 지명한 의사에게 자비로운 죽음의 처치를 허가할 권한을 부여한다

A 히틀러
- 아돌프 히틀러가 서명한 장애인 학살 승인 서류

히틀러는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일부러 '허가할 권한을 부여한다.' 라는 표현으로 애매모호하게 기록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장애인 학살을 직접 명령하고 승인한 것이나 다름 없었다.

9.1.2. '유대인 멸종' 발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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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 독일 국회의사당에서 연설하고 있는 아돌프 히틀러[89]

1939년 1월 30일 국가의회 연설 당시 아돌프 히틀러는 유대인들에 대한 명백한 증오가 섞인 연설을 하면서 이와 같이 연설했다.
만약 유럽 내외의 유대인들의 국제 금융의 힘으로 인해 이 나라들이 다시 한 번 또 다시 세계대전에 휘말리게 된다면, 그 결과는 지구의 공산화나 유대인의 승리가 아니라 유럽에서 유대인이라는 한 민족의 멸종으로 이어질 것이다!

히틀러는 이미 그 이전에도 비공식적으로도 나치 고위 간부들이나, 이탈리아, 루마니아, 불가리아 등 구 추축국 귀빈들에게도 '유대인 집단학살'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었다고 한다. 즉, 홀로코스트는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훨씬 이전부터 철저하게 계획되었던 집단 살인이었던 것이다.

이 끔찍한 연설은 '예언 연설'로 불리우게 된다.

9.1.3. 요제프 괴벨스의 일기에 담긴 히틀러의 명령들

나치 독일의 국가선전장관 괴벨스는 자신이 겪은 사실을 꼼꼼하게 기록했고, 히틀러의 발언 역시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 일본 제국진주만 공습으로 인해 미국이 일본 제국에게 선전포고하자, 히틀러가 이에 대한 대응으로 미국에 선전포고한 다음 날인 12월 12일, 히틀러는 가우 지도자와 제국 지도자들을 소집해 "세계 대전이 시작되었으니 유대인을 몰살하는 것이 필연적인 결과여야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90]
  • 1942년 3월 27일 일기에서는 히틀러에 대해 괴벨스는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유대인 문제"에 대한 "확고한 옹호자이자 급진적인 해결책의 대변인"'

9.1.4. 가해자들의 발언들

여러 가해자들은 홀로코스트가 히틀러의 명령이라고 명백히 밝혔으며, 전후 전쟁범죄 혐의로 체포된 가해자들 역시 일관되게 자신들은 히틀러에게 직접 지시를 받았다고 증언했다.
  • 국가보안본부장이자 반제 회의를 개최했던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는 '총통 각하께서는 유대인의 물리적인 말살을 명령하셨다.', 동유럽 유대인은 볼셰비즘의 저수지이므로, 총통 각하의 뜻에 따라 절멸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와 같은 발언을 직접 남기면서, 자신의 행위가 히틀러의 명령에 의해 발생했음을 명백히 밝혔다.
  • 아우슈비츠 수용소 소장이었던 루돌프 회스는 자신의 아우슈비츠 수용소 설립부터 운영까지 히틀러에게 명령을 받았다고 증언했다. 40만 헝가리계 유대인 학살 작전인 <회스 작전>을 승인한 것도 히틀러였다고 회스는 증언했다.
  • 유대인 수송 업무에 종사했던 아돌프 아이히만 역시 자신은 히틀러에게 직접 명령을 받았으며, 히틀러의 명령대로 유대인들을 강제수용소로 수송했다고 증언했다.

9.1.5. 게르슈타인 보고서

누이가 T4 작전으로 살해당하자 분노한 쿠르트 게르슈타인은 자발적으로 SS에 가입해 유대인 절멸 작전을 폭로하기 위해 학살 작전에 깊숙히 잠입했다. 그는 오딜로 글로보츠닉이 실행중인 폴란드 총독부 유대인 절멸작전 <라인하르트 작전>의 실체에 접근할 수 있었고 아돌프 히틀러까지 개입되었다는 정보를 알게 된다.
(글로보츠닉의 발언)"귀관(게르슈타인)의 또 다른, 그리고 훨씬 더 중요한 임무는 디젤 배기가스를 사용하는 우리 가스실을 더 좋고 빠른 시스템으로 바꾸는 것이다. 특히 청산가스를 생각해 보라. 그저께 총통힘러가 여기 오셨는데, 그들의 명령에 따라 내가 직접 귀관을 그곳으로 데려가야 한다. 누구에게도 서면 증명서나 출입증을 발급해서는 안 된다!"

그러자 프파넨슈티엘[91]이 물었다. "총통께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그러자 글로보츠닉은 "빨리, 모든 조치를 더 빨리 실행해."라고 히틀러의 말을 전했다. 프파넨슈티엘의 시종인 허버트 린드너 박사가 물었다. "글로보츠닉 씨, 화장하는 대신 모든 시체를 매장하는 것이 옳고 적절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이 모든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세대가 우리 뒤에 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자 글로보츠닉이 말했다. "신사 여러분, 만약 우리 뒤에 이토록 나약하고 마음이 여린 세대가 와서 우리의 임무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국가사회주의 전체는 사실상 헛수고가 될 것입니다. 오히려 제 생각에는 우리가 이 위대하고 필수적인 일을 감당할 용기를 가졌다는 것을 기록한 청동판을 땅에 묻어 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히틀러는 "좋아, 글로보츠닉, 이건 내 의견이기도 해!"라고 말했다고 전해지며 나중에 다른 선택지가 받아들여졌다. 그 후 시체들은 레일에서 즉석으로 만든 큰 불판 위에 휘발유와 경유를 얹어 화장되었다.
게르슈타인 보고서

9.1.6. 코헤어 보고서

1943년 4월 19일, 친위대 장관 하인리히 힘러를 대신해 SS 통계학자 리하르트 코헤어가 작성한 홀로코스트 진행 상황 보고서이다. 이 보고서는 아돌프 히틀러에게도 제출되었다.

보고서에는 유대인 '추방' 진행상황을 수치로 기록한 통계가 담겨져 있었으며, 유대인 학살을 '처리'로 은유적이고 행정적으로 기술되어 있다. 직접적으로 학살이라는 표현만 등장하지 않았을 뿐, '유대인 인구 감소 상황'과 '유대인 사망률' 등의 표현은 이 보고서가 명백한 대량학살을 '효율적으로' 진행하기 위해 작성된 서류라는 점을 증명한다.

1939년 10월 부터 1942년 12월 31일 까지 127만 명 이상의 유대인이 '처리' 당했다고 보고서가 적고 있고 헤움노 절멸수용소에선 14만 명 이상의 유대인이 '처리' 당했다고 보고서는 기술한다.

9.1.7. 레벤스라움 및 '절멸 전쟁'

아돌프 히틀러는 진지하게 동유럽과 소련 지역으로 게르만 민족의 생활권을 넓혀야 한다고 여겼고, 그래서 독소전쟁을 일으켰다. 히틀러의 목표는 아르한겔스크-아스트라한 선까지 독일인의 생활권을 확장하는 것이었다.

거기다가 히틀러는 슬라브족 역시 유대인과 더불어 절멸의 대상으로 여겼기에, 국방군 장성들과 친위대 장교들 앞에서 '절멸 전쟁'을 여러차례 언급했던 사실이 증언을 통해 확인되었다.

또한, 정치장교 명령을 독소전쟁 개전 이전부터 내렸던 장본인이었다. 히틀러는 소련 정치장교와 같은 '볼셰비키'에 대해서는 헤이그 협약이 전혀 적용되지 않는다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

벨라루스 초토화 작전 역시 <총통 명령 제46호>에 의해 이루어졌다. 히틀러는 독일군에 반대하는 소련군 잔당 파르티잔들을 소탕하기 위해선 '극도로 잔혹하게 행동할 것을' 촉구했다. 또한, 히틀러는 작전에 참가하는 독일군이 그 어떤 행위를 저질렀던 기소 면제할 것을 약속했다.

9.1.8. '특공대 명령'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연합군 특공부대가 독일 아프리카 군단의 후방을 교란하고 다니자, 히틀러는 만약 연합군 특공부대를 생포할 경우 어떤 포로 대우 없이 즉결처형할 것을 명령했다. 이 명령을 하달받은 국방군최고사령부은 그대로 시행했고, 전후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서 빌헬름 카이텔알프레드 요들이 결정적으로 사형을 선고받은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92]

9.1.9. '나흐트 운트 네벨' 명령

번역하면 '밤과 안개' 명령이다. 히틀러가 반나치 활동가들을 색출해 체포한 뒤 강제수용소에 수감시키거나 처형시키라고 명령했던 것이다. 친위대 장관 하인리히 힘러와 국가보안본부장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가 이 명령을 집행했으며, 게슈타포는 반나치 활동가들을 구금해 비인도적인 고문 또는 즉결처형 또는 법적 절차 없는 초법적 강제수용소 수감을 통해 공포심을 조장했다. 현재까지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밤과 안개' 작전에 의해 실종되었는지 집계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이 명령을 하달받은 국방군최고사령부 역시 이 명령을 그대로 시행했고, 전후 빌헬름 카이텔알프레드 요들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서 결정적으로 사형을 선고받은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9.1.10. 네로 명령

1945년, 패전이 눈 앞에 다가오자 히틀러가 내린 광기의 명령. "패전한 독일민족 또한 살아남을 가치가 없다."라며 독일과 독일민족의 공멸을 꾀했고 이에 따라 (특히 루르 공업지구의) 사회 간접자본을 모조리 파괴하라는 명령을 내린 것이다. 나치 독일 군수부장관 알베르트 슈페어는 이 명령에 불복종했고 이 점이 결정적으로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서 슈페어가 사형을 면하게 된 원인이 되었다.

9.1.11. '패배주의자' 즉결 처형 명령

당시 살포된 전단지

1945년, 연합군이 독일 본토로 진주하고 소련군이 베를린 코앞까지 도달하자 많은 독일 국민들이 무저항으로 자발적으로 항복했다. 그러자 히틀러는 모든 국민들을 전투원이라고 멋대로 선언하고는 무저항으로 항복하는 독일 민간인들을 즉시 총살하라고 명령했다. 이것을 친위대 국가보안본부장 에른스트 칼텐브루너와 국방군 육군최고사령관 페르디난트 쇠르너가 집행했다. 그렇게 총살된 독일 민간인들은 나무에 교수된 채로 시신이 걸리게 되었다. 그리고 목에는 '나는 패배자입니다. 그 대가를 달게 받겠습니다.','나는 비겁한 겁쟁이어서 조국을 버리고 도망쳤습니다.' 같은 문구가 적힌 팻말이 걸려 있었다.

10. 자살, 그 뒷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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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히틀러의 죽음을 보도한 당시 미국의 신문
마지막 몇 주 동안 히틀러는 자신이 소련군에게 체포될 시 모스크바 동물원에 전시되거나 유대인이 연출한 연극에 주연으로 출연해야 할지 모른다는 걱정, 아니 망상을 여러 가지 형태로 표현하였다. 이러한 걱정들은 4월 29일 베니토 무솔리니의 최후에 대한 소식이 전해지면서 더욱 심해졌다. 히틀러는 무솔리니가 죽고 나서 로레토 광장에 있는 주유소 천장에 발이 묶인 채 거꾸로 매달렸고[시체주의],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며 무솔리니의 시체에 침을 뱉고 돌을 던졌다는 소식을 듣자 이내 자신의 최후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사실 히틀러가 일으킨 독소전쟁으로 인해 2,000만 명이 넘는 소련인들이 학살당하고 국토가 초토화되면서 나치 독일에 대한 증오로 가득찬 소련군 병사들이 점령한 구 독일령 지역인 동프로이센, 슐레지엔, 포메른 동부 지역과 현 독일령 지역인 브란덴부르크와 작센 등지에서 독일군 포로들과 독일 민간인들에게 똑같이 학살, 약탈, 겁탈 등으로 보복했던 걸 감안하면 이는 결코 단순한 망상이 아니었다. 만약 베를린 공방전 당시 히틀러 부부가 퓌러붕커에서 소련군에게 생포됐다면 당시 악의에 찬 소련군 병사들로부터 조리돌림에 집단 린치를 당했을 확률이 높다. 설사 소련군 장성들이 병사들이 히틀러 부부에게 폭행을 행사하는걸 제지했다고 해도 부인인 에바까지는 몰라도 제2차 세계대전의 주범이던 히틀러에게는 무조건 사형을 선고했을 확률이 높다.

설사 프랑스영국, 미국 같은 서방 연합국이 베를린을 함락했더라도 결과는 똑같이 서방 연합국 지도부들에 의해서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서 사형이 선고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에바 브라운의 경우야 복역 중 풀려났다 하더라도 유럽을 파괴한 전범의 마누라, 악녀라는 불명예를 안고 제2차 대전 당시 히틀러 나치 독재정권의 독일로부터 피해를 입었거나 전쟁을 치뤘던 각 유럽/서방 국가들의 정부로부터 입국금지를 당하며 다른 서방 국가들로의 해외여행 및 방문을 하지 못하는 등 불이익을 겪거나 히틀러에 대한 회고록 편찬 등으로 돈을 벌며 살다가 한 1980년대나 1990년대 즈음에 노환으로 자연사했을 가능성도 있다.

프랑스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나치 독일의 피점령 과정에서 벌어진 오라두르쉬르글란 학살 등 나치 독일이 일으킨 전쟁범죄로 큰 피해를 입었으며, 영국 또한 나치 독일 공군과의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나치 독일군의 공습에 수도 런던이 파괴되는 등 막심한 피해를 입었기에 독소전쟁 당시 나치에게 피해를 입었던 소련처럼 히틀러와 나치에 대한 증오도 만만치 않게 컸다. 유럽과 거리가 아주 먼 북아메리카의 국가였던 미국 역시 추축국들과 전쟁을 치르면서 나치 독일군이 유럽 일대에서 저지른 만행들을 소상히 잘 알고 있었기에 만약 히틀러가 생포될 시 히틀러를 처벌해야 할 적국의 지도자로 여겼다.

히틀러는 자신에게 충성을 바친 수많은 사람들 중 그와 가까운 측근인 하인 하인츠 링에, 기사인 에리히 켐프카, 그의 비행사인 한스 바우어 등에게 자신의 유해가 적의 손에 넘어가지 않도록 보살펴 달라고 부탁했다. 히틀러는 준비된 독약이 빠르고 확실하게 자신을 죽이지 못할까 봐 두려워했다. 히틀러가 아끼던 애완견인 블론디는 한밤중에 화장실로 끌려와서 히틀러의 개 조련사인 토르노브(Tornow) 상사가 억지로 입을 벌리고 있는 동안 관저 의료진 중 한 사람인 하제(Hasse) 교수가 집게를 이용해 독약 앰플을 으깨서 먹여 죽었다. 곧이어 히틀러는 블론디의 시체를 무표정하게 한참 동안 바라보았고 다른 벙커의 사람들을 회의실로 불러서 이별을 했다. 히틀러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말없이 손을 내밀었다, 몇몇 사람들은 그에게 말을 건넸으나 히틀러는 대답하지 않거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입술을 움직였다고 한다. 그리고 다음 날 회의를 하고 동거녀 에바 브라운과 함께 자살했다.

그 직후 부하들이 히틀러의 시체를 총통관저 화원으로 끌고 나와 주차된 자동차에서 무려 190리터나 되는 대량의 휘발유를 빼내어 화장했지만, 저장된 기름의 상당량을 사용했음에도 제대로 된 화장 시설에서 충분한 시간을 들여 태운 게 아니라 대충 시신을 알아보지 못하게 한 수준이었기 때문에[94] 완전히 소실시키지 못했다.[95] 화장한 직후 소련군의 포화로 시신의 상당 부분이 훼손됐지만 소련군이 치아를 대조해서 히틀러의 시신임을 확인했다고 한다.[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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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센안할트마그데부르크 근교에 위치한 비더리츠. 이곳에서 히틀러의 유해가 화장된 뒤 엘레강에 뿌려졌다.[97]
이 시체는 1년이 지난 1946년에서야 겨우 전부 수습되어 비밀리에 탄약 상자에 넣어 매장되었는데, 이오시프 스탈린은 히틀러의 추종자들이 이 시체를 찾지 못하게 하려고 보안에 상당한 애를 썼다. 결국 이 탄약 상자는 독일과 소련 각지를 떠돌며 무려 8번이나 이장되다 결국 1970년대 중반 KGB 의장 유리 안드로포프동독KGB 지부에 명령을 내려 두개골이나 이빨 등 신원 확인이 가능한 일부분만 소련으로 보내고 나머지는 화장된 뒤 작센안할트주, 마그데부르크 근교 엘레강[98]에 뿌려졌다. 이것이 냉전이 끝나고 밝혀진 공식적인 히틀러의 행방이다. 그렇게 한때 전 세계를 아리아인의 손아귀에 넣으려 했던 한 독재자의 뼛가루는 마그데부르크 근교 엘레강에 뿌려지며 최후를 맞이했다.

이후 스탈린은 아직 숨이 붙어있을지도 모르는 히틀러의 추종자들의 힘을 빼기 위해서 속임수를 쓰는데, 히틀러의 시신의 행방을 철저하게 비밀에 부치고 마치 히틀러가 살아있는 듯이 꾸며서 그의 추종자들이 그 흔적만 쫓다 힘빠지게 만들었다. 이때 KGB 요원들도 스탈린에게 남미에서 히틀러를 찾으라는 낚시성 명령을 받고 1950년대까지 상당한 고생을 해야 했다.

10.1. 권총자살? 음독자살?

히틀러가 1945년 4월 30일 베를린 퓌러 붕커에서 자살했다는 사실은 모든 역사학자들이 동의하는 이견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히틀러가 어떻게 자살했는지에 대해서 크게 권총 자살설과 청산가리 음독 자살설로 의견이 갈린다. 히틀러의 권총 자살설은 1945년 4월 30일 오후 2시에서 3시 사이 히틀러가 자살했을때 퓌러붕커에 있었던 사람들의 오른 관자놀이에 총상을 기반으로 하고 있고 음독 자살설의 경우 소련과 러시아의 공식 검안 입장을 기반으로 한다. 두 설을 혼합해 히틀러가 권총 자살에 실패할 경우를 대비해 청산가리 캡슐을 물은 동시에 권총으로 자살했다고 설명하기도 한다.[99]

전후 소련과 서방 연합국은 히틀러의 죽음을 확실히 하기 위해 히틀러의 마지막 순간을 함께 했던 나치 생존자들을 체포해 강도 높은 조사를 실시했다. 히틀러가 자살했을 당시 제일 먼저 방에 들어갔던 시종 하인츠 링에오토 귄셰는 소련에 체포되었고 1956년 석방될때까지 소련 측은 히틀러가 어떻게 자살했는지 캐물었다. 이때 소련은 링에와 귄셰가 공모하여 허위 진술을 할 것을 우려해 1948년까지 분리 수용하였다. 연합군 측은 히틀러의 운전수였던 에리히 캠프카와 히틀러 유겐트 단장이었던 아르투어 악스만을 체포해 히틀러의 죽음에 대해 캐물었다. 귄셰는 소련 측에 자신은 히틀러의 시신을 보지 못했고 히틀러를 담요로 싼 뒤에야 보았다고 진술했고 링에는 1946년 히틀러의 오른 관자놀이에 동전 크기 만한 총상이 있었고 두줄기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고 진술했다. 한편 서방 연합국에 체포된 캠프카는 자신은 히틀러의 시신을 자세히 보지 못했지만 귄셰가 입을 통해 자살했다는 암시를 하는 손짓을 보였다고 진술했고 아르투어 악스만은 미국에 히틀러의 두 관자놀이에서 피가 흘러나오는 것을 보았으며 아래턱뼈가 약간 삐뚤어진 상태였다고 진술했다. 트라우들 융에괴벨스의 아이들과 식사를 하던 중 커더란 폭음이 들렸고 헬무트 괴벨스가 '명중이다!'라고 외쳤다고 회고했다.[100]

1956년 링에와 귄셰가 풀려나자 서방 연합국은 이들을 불러 히틀러의 죽음에 대해 캐물었다. 링에는 소련에서 진술한 것과 동일하게 오른 관자놀이의 총상과 함께 바닥의 피웅덩이를 보았다고 진술했는데 귄셰는 당초 자신은 링에에게만 총상으로 히틀러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는 진술을 번복하고 오른 관자놀이의 총상과 함께 피웅덩이를 보았다고 진술했다. 한편 빌헬름 몽케요한 라텐후버는 다소 충격적인 진술을 했는데 귄셰로부터 히틀러가 자신이 음독 자살에 실패할 경우 쿠 드 그라스 즉 확인 사살을 해달라는 부탁했다고 들었다고 말했다.[101] 다만 몽케는 귄셰가 정말로 히틀러에게 쿠 드 그라스를 해주었는지는 모른다고 말했고 귄셰는 이를 부인했다. 히틀러와 에바 브라운이 죽었을 때의 자세에 대한 진술 역시 서로 갈렸다. 귄셰는 히틀러가 별도의 안락의자에서 죽어있었다고 진술했고 링에와 악스만은 히틀러와 브라운이 같은 소파에서 죽어있었다고 진술했다. 한편 로후스 미슈는 전후 인터뷰에서 벙커 내에선 총성이 들리지 않았고 히틀러 개인실 문이 열린 사이 살펴보았을 때 히틀러는 고개를 숙인채 테이블에 쓰러져있었고 총상으로 뺨에는 피가 묻어있었다고 진술했다.[102]

하지만 히틀러의 유해를 수거한 소련/ 러시아의 공식 입장은 아돌프 히틀러는 총격 자살을 한 것이 아닌 청산가리를 먹고 자살했다 이다. 소련측은 1945년 5월 8일 히틀러의 불에 탄 시신을 발견했다고 발표했는데 1945년 6월 5일 주코프의 최초 발표에선 히틀러가 시안화물로 자살했다고 명시되어있었지만 6월 9일엔 히틀러의 시신을 확인하지 못했고 도망친 것 같다고 번복했다. 이후 연합국 기자들은 히틀러의 시신을 찾았니 못찾았니 하는 각종 익명의 소련군 장교들의 증언으로 다양한 기사를 쏟아냈고 이는 히틀러 생존 음모론을 주장하는 측에서 제시하는 근거 중 하나가 되었다. 소련은 서방 연합국에 히틀러 시신 소각 장소에 대한 접근을 제한했는데 1945년 12월이 되서야 연합국 조사단이 히틀러 시신 소각 장소에 접근할 수 있었다. 소련의 자세한 히틀러 검안 보고서와 발견 정황이 서방에 공개된 것은 1968년 베를린 공방전 당시 주코프의 통역관으로 복무했던 레프 베지멘스키(1920-2007)의 'The Death of Adolf Hitler'(원 제목ㅣ Der Tod des Adolf Hitler: Unbekannte Dokumente aus Moskauer Archiven)였다.[103] 그의 저술에 따르면 소련군은 히틀러로 추정되는 시신을 1945년 5월 5일 발굴하였고 스메르시의 감독 아래 1945년 5월 8일 파우스트 슈카라프스키가 이끄는 소련군 군의관들에게 넘겨 검시하도록 하였다. 베지멘스키의 저서에 따르면 당시 넘겨 받은 히틀러로 추정되는 유해 상태는 다음과 같았다.
1. 발견당시 시신의 키는 약 165cm(5피트 5인치)였다.[104]
2. 피부는 완전히 없어졌지만 목 근육을 포함한 일부 근육의 흔적은 남아 있었다
3. 두개골의 일부가 없었고, 불에 손상된 뇌가 일부 보였으며, 경막은 온전했다.
4. 흉부, 복부, 팔은 부분적으로 온전했지만, 다리뼈는 연소로 인해 다소 부서졌다.
5. 왼쪽 발과 왼쪽 고환은 없었다.[105]
레프 베지멘스키의 'The Death of Adolf Hitler' P 44-46
5월 11일 히틀러의 치과 의사 조수였던 케테 호이저만의 신원 확인을 거친 히틀러의 검안서에는 파편과 "얇은 벽의 앰풀"이 입안에서 발견되었다고 적혀있었으며 소련측은 이를 당시 나치 독일의 고위 장교들이 자결할 때 사용한 청산가리 캡로 판단했다. 이를 기반으로 당시 히틀러의 시신을 검안했던 소련군 법의학자 파우스트 슈카라프스키는 총상의 흔적을 감지할 수 없었다. 히틀러는 독살되었다고 결론 내렸다. 또한 베지멘스키는 1946년 발견된 총상 흔적의 두개골과 나치 관계자들이 증언한 머리의 총상은 요한 라텐후버가 진술한 히틀러가 자살 전 자신이 혹시 죽지 못했을 경우를 대비해 확인 사살을 부탁했다는 것을 근거로 하여 링에 혹은 귄셰가 그 역할을 맡았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이후 2010년 5월 7일 러시아 FSB 기록보관소장 크리스토포로프 중장는 후술할 코네티컷 대학 연구진의 발표로 히틀러 사망설에 대해 논쟁이 일자 1945년 파우스트 슈카라프스키의 결론 '청산가리 자살'을 재확인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그는 "히틀러의 입안에서 으스러진 유리 캡슐이 남아있는 점과 시신에서 씁쓸한 아몬드 같은 악취가 나는 점, 사후 검시 결과 등으로 볼 때 청산가리 중독에 따른 사망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면서 의무병들이 히틀러의 시신에서 치명적인 외상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히틀러가 음독 자살을 했을 경우 크리스토포르프 중장의 인터뷰에서 살펴볼 수 있듯 단순 법의학적 죽음의 의미를 넘어 정치적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히틀러는 항상 자신을 군인이라고 주장했고 군대와 함께 죽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군인에게 있어서 총살은 명예로운 죽음이지만 그외의 죽음 특히 교수형은 불명예스러운 죽음에 해당한다. 그렇기에 수많은 나치 독일과 일본 제국의 전범들은 군인의 신분으로 총살형을 요청했었지만 연합국은 이를 모조리 기각하고 교수형으로 사형을 집행했다. 특히 나치 독일의 경우 소련측의 강력한 요구로 즉사할 수 있는 교수형이 아닌 매우 고통스럽게 숨이 막혀 죽는 교수형으로 집행되었다. 따라서 히틀러가 음독 자살을 하였을 경우, 히틀러는 자신을 군인이라 칭했고 독일 국방군의 최고 사령관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총탄에 죽기 무서워 독약으로 자살한 겁쟁이가 되는 것이다. 반대로 히틀러가 권총 자살을 했을 경우, 비록 그것이 본인의 손이었지만 히틀러는 약속대로 군인답게 총탄에 죽은 것으로 네오나치들이 히틀러의 죽음을 미화하는 소재로 작동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크리스토포르프 중장과 베지멘스키는 1945년 자신들의 검안 기록을 근거로 히틀러가 총으로 자살했다는 나치 생존자들의 증언을 히틀러의 죽음을 미화하려는 시도로 평가했다.

하지만 서방측 연구자들 중 이러한 소련/러시아 측의 주장에 대해 회의적으로 보는 학자들도 존재한다. 청산가리 자살설에 대해 비관적인 연구자들의 관건은 다음과 같다. 첫째 사격 부위나 총성, 사격 주체에 대해선 제각각이지만 벙커 생존자들은 일관되게 히틀러의 총상을 증언하고 있다. 둘째 소련 측은 전후 히틀러의 시신을 괴벨스 부부와 달리 비공개하였고 서방 연합국의 조사에 협조하지 않았다. 소련 측은 1945년 5월 히틀러의 사망을 확인했음에도 불구하고 히틀러가 죽었는지 확인하지 못했느니 하는 블러핑을 일삼았는데 이러한 소련 측의 주장에 신뢰성을 부여할 수 있는가? 셋째, 음독 자살을 사인으로 확정하기 위해선 괴벨스부부에게 그랬듯 내장과 혈액에 대한 청산가리 검출 검사를 실시해야 했는데 소련군은 이를 시행하지 않고 아몬드 냄새와 앰플만을 가지고 사인을 청산가리라고 확정지었다. 이는 1946년 소련 내무부 재조사에서도 지적한 사항이다.[106] 넷째, 히틀러가 정말로 음독 자살했다면 히틀러가 자살했다는 개인실 소파에서 발견된 혈흔과 히틀러의 두개골이라고 공개한 총상이 있는 두개골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다섯쨰, 히틀러의 시신을 소련군이 발굴했을 당시 퓌러 벙커의 현장은 심각히 오염되어 있었다. 소련군은 승리에 취해 퓌러 벙커를 약탈했고 벙커 안과 밖으로 온갖 시신들이 널려있었다. 소련군이 발견했다는 히틀러의 시신이 타인과 섞이지 않았을 가능성을 배재할 수 없다.

요아힘 스탈러는 자신의 저서 'The Last Days of Hitler'에서 소련이 히틀러의 생존설과 관련해서 펼쳤던 각종 공작을 지적하며 히틀러의 죽음에 대한 증언에 대해 교차 조사 끝에 히틀러는 독극물을 사용하지 않고 권총으로만 자살했다고 주장했다. 스탈러는 소련의 독극물 중독으로 사망했다는 검안서에 대해 그토록 방해 공작을 펼치며 3자의 검안을 허가하지 않은 소련의 주장을 받아들이기 힘들다고 보았고 당시 벙커에 있던 사람들이 총격을 가했다던 부위가 입과 관자놀이로 갈리지만 일관적으로 히틀러에게만 화약 냄새가 났다는 증언을 한 점을 들어 이들의 증언을 신뢰성이 있다고 보았다. 무엇보다 소련측이 히틀러의 사인을 음독 자살로 판단한 근거인 청산가리 특유의 쓴 아몬드 향에 대해 휘발유를 뿌려 치아로 확인해야 할 정도로 소각된 히틀러의 유해에서 나는게 불가능하다고 평가했다. 이를 기반으로 스탈러는 베지멘스키를 비롯한 소련/러시아 측의 확인사살설에 대해서 사건을 불필요하게 복잡하게 만드는 가설이라고 일갈했다. 스탈러는 히틀러가 독약의 성능을 확인하기 위해 애견 블론디를 직접 독살했던 것을 들어 히틀러가 정말 청산가리로 자살하기로 했다면 독약 성능을 확인한 히틀러에게 확인사살은 필요없었다고 보았다. 또한 히틀러 권총 자살설의 가장 강력한 의문점인 히틀러의 것으로 확인되는 두개골에서 사출구가 발견되었지만 전후 벙커 조사에서 사출된 총탄의 탄흔이 발견되지 않은 것, 그리고 사출구의 직경이 6mm 정도에 그친다는 것에 대해 1925년 7.92mm의 관통상에 대해 연구한 논문을 근거로 총알이 반대쪽 관자놀이에서 멈추었지만 산산조각이 나며 왼쪽 관자놀이에 사출구와 같은 형태의 상처를 남긴 것이라고 추정했다.[107]

스탈러는 히틀러의 시신을 완전 소각시키기 위해( 비록 실패했지만) SS에서 필사적으로 휘발유를 들이부었으며 결정적으로 5월 2일 소련군이 퓌러벙커에 진입하기 직전까지 엄청난 포격이 가해졌던 것을 고려하면 소련 측의 초기 보고서와 달리 히틀러의 유해는 상당히 백골화가 이루어진 상태에서 갈갈이 찢어졌을 것이라며 1945년 5월 소련군이 온전히 수거할 수 있던 히틀러의 유해는 히틀러의 것임이 증명된 치아뼈 뿐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스탈러의 주장에 대해 요아힘 페스트도 비슷한 맥락의 입장을 표명하며 히틀러의 죽음을 재구성하는 것이 불가능해졌지만, 오른쪽 관자놀이에 총을 쏴 자살했다는 설명이 아마도 일어났던 일에 가장 가깝다고 주장했고, 히틀러 평전의 권위자로 평가받는 이언 커쇼는 스탈러가 서술한 시신 소각 과정에 대해 가장 신뢰할 수 있고 자세한 조사라고 적으며 히틀러의 시신 상태에 대해 스탈러와 동일한 견해를 표명했다.[108][109] 영국 랭커스터 대학교 루크 그로브스 교수 역시 MI6 보고서를 근거로 한 2015년 자신의 논문[110]과 2019년 저서[111]에서 파우스트 슈카라프스키의 검안서는 '과학적 불일치가 가득하고 이념적 동기에 오염된 의심스러운 부검 보고서'라고 맹렬히 비난했다.

결정적으로 서방에 처음으로 히틀러 검안서 필사본을 공개한 베지멘스키가 자신의 책을 정면 부인했다는 점이 더욱 사안을 복잡하게 만든다. 베지멘스키는 1992년 슈피겔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히틀러의 죽음에 대해 연구하면서 "당이 인정한 진리를 무조건적으로 수용하는 정신으로 교육받았고, 더 나아가 그것을 믿었던 나는, 자료를 받느냐 마느냐를 결정하는 사람들과의 갈등을 감당할 수 없었다. 나는 몇 가지 불일치와 모순점을 발견하고 물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러자 이런 답변을 받았다. '이것에 대해서는 써도 좋지만, 저것에 대해서는 안 됩니다.'" 라고 회고하며 자신의 1968년 저술이 정확하지 않았음을 시인했다. 2003년엔 베지멘스키는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Riddles of the Dead'에 출연해 KGB가 청산가리 자살설을 유지하는 조건으로 히틀러 검안서를 열람하게 해주었다고 발언했다. 1946년 스메르시에 대한 불신 혹은 서방의 일관적인 권총 자살 주장에 스탈린은 스메르시의 경쟁자였던 NKVD 후신 내무부로 하여금 스메르시의 부검 보고서를 비롯한 히틀러의 죽음에 대해 재조사를 명령했다.[112] 내무부측 위원들은 파우스트 슈카라프스키의 부검 보고서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1. 두개골 기저부 검사 누락됨
2. 청산가리 검출을 위한 내장 기관 샘플이 채취되지 않았기 때문에 독살이라는 결론은 구강 내 앰풀 조각만으로 내린 섣부른 유추에 불가
이를 바탕으로 1946년 5월 30일 내무부측은 히틀러 벙커와 소각 장소에 대한 재조사를 실시했고 이때 히틀러의 치아가 발굴되었던 구덩이에서 현재까지 히틀러의 것으로 주장되는 총알이 사출된 흔적이 있는 두개골이 발굴되었고 히틀러가 자살한 방에서 발견된 소파 혈흔에 대해 추가 조사도 이루어졌다. 이때 조사를 담당한 내무부측 위원들은 소파 혈흔에 대해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머리 부상 후, 부상자는 의식을 잃고 한동안 오른쪽 팔걸이 쪽으로 머리를 떨군 채 움직이지 않고 있었으며, 이로 인해 연달아 흐른 듯한 핏자국의 배열과, 바닥에 떨어져 생긴 피 웅덩이로 피가 떨어지고 흐르면서 형성된 다량의 튄 자국이 설명된다.
즉 내무부측 재조사 결과에 따르면 히틀러는 자살 당시 머리를 오른쪽으로 떨군채 피를 흘리며 천천히 죽어간 것. 이는 링에와 악스만의 진술과 동일하다.[113] 이때 내무부는 스메르시 후신 국가안전부에 히틀러 추정 사체에 대한 재검안을 진행하겠다고 통보했지만 국가안전부는 이를 거부했다.

하지만 1946년 내무부가 발굴한 총상 흔적의 두개골은 히틀러 권총 자살설을 설명하기에 증거로서 분명한 논란점이 존재한다. 앞서 스탈러의 주장 부문에서 살펴보았듯 두개골에 난 사출구멍은 히틀러가 자살하는데 사용한 7.92mm 권총탄보다 작은 6mm였고 남자의 것이라고 하기엔 연약해보였으며 두개골 봉합선 역시 사망당시 히틀러 나이였던 56세보다 한참 어린 40대 이하 연령대 봉합선과 비슷했다. 2009년 미국 코네티컷 대학교 고고학자 닉 벨란토니는 러시아가 히틀러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두개골이 DNA 검사 결과 20~40세의 여성의 것이라고 발표했다. 닉 벨란토니는 모스크바 출장 중 러시아가 보관중인 두개골과 히틀러가 자살했다던 소파에서 채취된 혈흔 샘플을 입수하여 각각 DNA 검사를 한 결과 두개골의 경우 여성의 것이었으며 혈흔의 경우 남성의 것으로 밝혀졌다고 발표했다. 이 연구 결과에 따르게 된다면 소련/러시아 측은 엉뚱한 두개골을 히틀러의 것이라고 보관하고 있던 셈이 되는 것이고 채취된 혈흔이 남성의 것이라는 점을 보았을때 히틀러에게 외상이 없었다는 소련과 러시아 측의 공식 입장은 흔들리게 된다. 이에 대해 러시아 기록보관소 측은 벨란토니의 연구진에게 해당 샘플들을 제공한 적이 없다며 반박했고 2010년 크리스토포르프 중장의 음독 자살 입장 재확인 역시 이 때문에 번진 권총 자살설과 생존 음모론에 반박하기 위함이었다.

2017년 프랑스 법의학자 필립 샤를리에가 서방 학자 중 처음으로 러시아 당국으로부터 히틀러의 유해에 대한 조사를 허가 받아 히틀러의 두개골로 추정되는 머리뼈와 치아 보철에 대한 연구를 실시했다. 2018년 샤를리에는 자신의 연구 결과를 유럽 내과 저널( European Journal of Internal Medicine)에 'The remains of Adolf Hitler: A biomedical analysis and definitive identification'라는 제목으로 기고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1. 후두골과 두정골 일부로 구성된 두개골 조각엔는 좌측 두정골에 지름 6mm의 구멍이 있고 오른쪽은 상당히 파손되어 있었음. 좌측 6mm 구멍은 외부로 벌어진 형태로 총알의 사출구로 추정되며 화상 흔적(탄화)과 매장 흔적(토양 착색)이 남아 있음. 뼈의 봉합선 상태로 추정컨데 두개골의 주인은 45~75세였던 것으로 추정됨. 하지만 두개골의 심각한 파손 상태로 인해 구체적인 나이와 성별을 특정하기 어려움. 흔히 제기되는 반론인 머리뼈 봉합선의 경우 1944년 히틀러의 X 레이 기록상 봉합선이 동나이 대에 비해 열려있었으며 봉합성 폐쇄 패턴은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에 이를 기반으로 히틀러의 두개골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은 무리며 유전 검사만이 유일한 증명 수단임.

2. 상악(위턱)과 하악(아래턱)에서 총 4개 파편 확인했으며 금속 재질의 치과 보철물과 심한 치아 마모, 잇몸뼈 흡수 등 존재했으며 히틀러의 치과기록 및 X-ray와 정확히 일치하는 형태로 확인됨.

3. SEM 분석 결과 치석 표면에서 식물성 잔류물과 결정 구조 발견되었으나 육류 섬유조직은 없었음. 이는 익히 알려진 히틀러의 채식 습관과 일치. 중금속(납, 수은, 비소 등) 검출 안되었기에 입에 총을 넣고 쐈을 가능성은 없음. 시간이 지난 관계로 소련 검시관들이 확인했다던 아몬드 악취는 없었지만 푸른색 미세 침전물을 치아에서 확인함. 해당 미세 침전물은 청산가리 반응물일 가능성 있으나, 추가 화학 분석 필요

4. 1944년 히틀러의 X-ray와 대조한 결과, 두개 봉합선 상태가 일치함. 사망 당시 히틀러는 하악 절치(앞니) 4개만 자연치, 나머지는 보철이었음.

결론: 러시아가 보관 중인 히틀러의 치아와 턱뼈의 경우 히틀러의 의료 기록과 일치하기 때문에 히틀러의 유해가 맞다. 히틀러의 것으로 알려진 두개골의 경우 좌측 총알 사출구를 볼때 히틀러의 권총 자살설을 뒷받침하며 심각한 두개골 훼손 상태로 인해 구체적인 성별과 나이를 특정하기 어렵지만 45~75세 사이 성인의 유골임은 확실하다. 청산가리 음독설과 두개골과 치아의 동질성 증명을 위해 유전적 그리고 화학적 조사를 요구한다
2018년 프랑스의 법의인류학자 필리프 샤를리에의“The remains of Adolf Hitler: A biomedical analysis and definitive identification”#
샤를리에는 러시아가 보관 중인 히틀러의 턱뼈와 치아는 실제로 히틀러의 것이 맞으며 문제의 두개골의 경우 코네니컷 대학의 연구 결과와 달리 심각한 훼손 상태로 인해 구체적인 성별과 나이를 특정하는 것은 어려우며 해당 두개골의 봉합선이 동나이 대에 비해 열려있기에 젊은 사람의 것이라는 주장에 대해 두개골 봉합선 봉쇄 속도는 개인별 패턴이 다르며 실제 히틀러의 X레이 사진 상 두개골 봉합선이 열려있었다는 점을 들어 두개골의 주인이 히틀러가 아니라는 것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사용하기 어렵지만 두개골 총상은 하인츠 링에오토 귄셰가 증언한 권총 자살설과 일치한다고 보았다. 이를 기반으로 샤를리에는 만약 히틀러가 총을 사용해 자결했다면 아래턱 근처 혹은 오른쪽 관자놀이 근처에서 총알이 윗 방향으로 발사되었고 왼쪽 두정골로 사출되었다고 분석했다. 특히 샤를리에는 당시 소련 검시관들이 히틀러의 시신을 검시하는 과정에서 독극물 검사를 실시하지 않았다는 점을 들어 구체적인 히틀러의 사인을 증명하기 위해선 문제의 두개골과 히틀러의 것이 확실한 턱뼈에 대한 유전 검사와 함께 치아 일부에서 발견된 푸른색 침전물에 대한 화학적 분석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러시아측은 샤를리에에게 두개골과 치아에 대한 샘플 채취를 허가하지 않았다고 한다. 샤를리에는 인터뷰에서 권총 자살과 음독 자살을 확정 할 근거는 부족하지만 음독과 권총 자살 모두 시행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평가했다.

결론적으로 음독 자살설과 권총 자살설 모두 증거의 신뢰성에 있어서 계속해서 도전을 받고 있다. 히틀러가 총으로 자살했다고 증언한 나치 생존자들은 2013년 로후스 미슈를 마지막으로 모두 죽었고 1945년 히틀러의 유해를 검안한 소련군 군의관들 역시 모두 사망했다. 소련이 보관하던 히틀러의 유해는 신원 확인이 확실한 턱뼈와 다소 논란이 있는 두개골을 제외하고 엘레 강에 뿌려졌고 히틀러가 자살한 퓌러붕커는 1989년 동독에 의해 완전히 매립되었기 때문에 결국 히틀러가 어떻게 죽었는지에 대한 해답은 러시아 기록보관소에 잠들어 있다. 히틀러는 1945년 4월 30일 베를린 벙커에서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어떻게 죽었는지 학자들에게 끊임없이 연구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1] 연합국의 주요 지도자들은 대부분 명문가 출신이었다. 샤를 드골윈스턴 처칠은 귀족 집안이었고 프랭클린 D. 루스벨트 역시도 명문가 집안 출신이었다.[2] 이에 대해서는 6촌인 친척누나와 결혼한 아버지에 대한 환멸 탓에 갈등과 증오가 심해졌다는 설도 있다.[3] 아돌프 히틀러 결정판 1 p.43[4] 아돌프의 모친도 젊을 때부터 별로 건강이 안 좋아서 아들이 10대 후반일 때 죽었다.[5] 히틀러의 어린 시절 친구는 훗날 전쟁이 끝나고 사람들이 그에 대한 질문에서 왜 그와 친구가 되었냐고 묻자 대답한 말이 "어린 시절, 가족들과 함께 강으로 피서를 갔을 때 불쌍한 나의 어머니는 그만 깊은 물에 빠지셨다. 모두 당황했을 때 내 또래의 소년이 물에 뛰어들어 어머니를 구해줬다. 그의 이름은 아돌프 히틀러였다."이다. 파울라를 제외하고 가족들이 너무 이른시간에 사망했기에 아버지를 제외하면 가족에 대한 감정이 큰것으로 보인다.[6] 가운데에 있는 사람이 히틀러다.[7] 특히 프리드리히 대왕의 전기를 자주 읽었다고 한다. 사족이지만, 공산주의자 유대인 에두아르드 푹스가 쓴 에로 미술에 관한 책도 그의 책장에 은밀히 놓여져 있었다고 한다.[8] 크리스티안 그리펜케를(Christian Griepenkerl)이 히틀러를 낙마시켰다고 한다. 반면에 이 때 에곤 실레는 합격했다.[9] 인터넷에서도 으로 존재하는데, 북미에서는 미대를 떨어진 남자의 이후 행보로, 대한민국에선 미대 떨어지고 자살한 사람으로 다뤄진다. #[10] 그림에 따라 다르지만 몇몇 작품을 보면 소실점을 도저히 찾을 수 없을 정도로 구도가 삐뚤어져 있다. 다만 히틀러가 그림에 대한 전문 교육을 받지 않고 독학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지망생 수준에 있을 법한 정도의 실수다. 사실 그림으로 밥 벌어먹고 사는 현대의 프로 화가/만화가/일러스트레이터들도 수익과는 별개로 그림에서 실수가 발견되는 경우는 적지 않다.[11] 다만 위 작품을 포함해 현재 전해지는 히틀러의 그림들은 대부분 입시생 시절이 아니라 그림 엽서 화가 시절이나 그 이후에 취미로 그린 작품들이다.[12] 미국의 저널리스터 겸 작가였던 존 건서는 히틀러가 빈 미술 아카데미에 제출한 그림들을 보고 "그냥 건축가의 스케치다. 고통스럽고 정밀한 제도 기술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히틀러가 순수미술에선 가망이 없으니 건축 학교로 가라는 판정을 받은 건 당연하다"고 평했다. 후대에 발매된 "히틀러의 수채화"라는 화집에서는 '재미없고 하찮은 도시 풍경화만 그리는 싸구려 프로 화가'라고 평가했다. 히틀러에게 그림을 잘 그리는 기술은 있어도 미술적 가치는 낮았다는 것이다.[13] 청소년기 시절 히틀러의 유일한 친구였고, 빈에서 히틀러와 헤어진 후에는 지휘자로 활동했다. 정치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으나 히틀러가 총통이 되고 난 뒤에 연락이 닿아 나치당에 입당했다. 패전 후에는 미군에 심문당했지만 별다른 정치적인 활동은 하지 않았기에 풀려났고, 말년에 히틀러와의 우정에 대한 회고록을 남기기도 했다.[14] 사실 이런 경제 관념은 히틀러뿐만이 아니라 손쉽게 돈을 번 사람들이나 부모의 재력이 있는 자식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습성이다. 요즘 부모였다면 어느 정도 자식이 고생해서 돈을 모아보게끔 하거나 연금의 일정 금액만 주게 하여 소비 관념을 깨우치게 했겠지만, 히틀러에겐 그런 가정 상황도 시대도 아니였다. 다만 그렇다 한들 자신이 한 국가의 수장이 된 상태에서도 경제에 관해 의지 드립을 친다는 것은 상당한 문제기도 했다. 히틀러의 성격상 공부 자체를 싫어했으니 그럴 만도 하다.[15] 그리고 얼마 못 가 히틀러의 어머니는 유방암으로 사망한다. 당시 히틀러의 어머니를 진찰했던 에두아르트 블로흐는 히틀러의 가정이 가난해서 치료비를 받지 않았는데, 히틀러의 어머니가 죽은 이후 히틀러가 블로흐의 손을 잡고 "당신에게 영원히 감사하며 살아가겠습니다"라고 말했고 히틀러는 그 약속을 지켰다. 유대인이었던 블로프는 당시 히틀러 일가의 금전적 사정을 알고 돈을 받지 않는 등 선행을 베풀었기에 나치당 집권 이후에도 몸 성히 가족들과 해외로 갈 수 있었다. 1940년 블로흐는 "히틀러가 그 장면을 기억하는지 모르겠지만 그가 약속을 지킨 것을 보면 기억하는 것이 분명하다. 나는 독일이나 오스트리아의 어느 유대인에게도 주어지지 않은 특혜를 누렸던 것 같다", "의사 생활을 통틀어 수많은 죽음을 보아왔지만 아돌프 히틀러처럼 슬퍼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라고 회고했다.[16] 찌라시라고는 하지만 아직 다양한 대중매체가 발달하지 않았던 그 시절에는 이러한 상업미술가도 상당히 유망 직종이었다. 특히 극장용 간판은 1980년대까지도 제법 벌이가 되었다.[17] 윈스턴 처칠은 미술의 거장 파블로 피카소에게도 괜찮은 평가를 받았고, 이오시프 스탈린은 문학으로 20대 초반에 등단하면서 쓴 시가 얼마 뒤(당연히 정치 활동 이전 시절이므로 권력이 아닌 문학적 재능으로) 교과서에 수록될 정도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18] 재능이 있어도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위의 그림들 수준으로 그리려면 어느 정도 그림 재능이 있는 사람이 제대로 미술 교육을 받은 화가 지도로 주 2~3회 배워 2-3년은 걸려야 해낼 수 있을 정도이다. 99% 이상을 차지하는 미술 재능 없는 보통 사람은 피카소가 10년을 가르쳐도 영원히 저 수준으로 올라가지 못한다.[19] 엉뚱하게도 최근 국내 및 해외에서 이와 관련해 미대 입시 탈락을 비관해 자살한 어느 독일인(Hitler killed himself because he was rejected from art schools)이라는 드립이 간간이 보인다.[20] 왼쪽 x표시 아래 있는 사람이 히틀러다. 저 당시에는 빌헬름 2세가 했던 일명 '카이저 수염' 이 트렌드였다.[21] 앞줄 오른쪽에서 2번째는 막스 아만이다.[22] 뒷줄부터 순서대로, 슈페를, 막스 문트
게오르크 빔머, 요제프 인코퍼, 라우자머(전사자), 아돌프 히틀러
발타자르 브란트마이어.
[23] 다만 이 사진 속의 인물이 정말 히틀러인지는 논란이 있다. 왜냐하면 사진 속의 인물은 흔히 아는 중년의 히틀러와 비슷하지만 정작 당시의 히틀러는 카이저 수염 및 앞머리를 위로 넘기는 등 사진 속의 모습과 차이가 있었다.[24] 아이러니하게도 이때 바이에른 왕국군의 사령관이었던 루프레히트 왕세자는 나중에 반나치 혐의로 가족들이 다하우 강제 수용소에 갇혔다.[25] 오스트리아 대공국의 주 민족인 독일인의 비율은 24%였고, 동군연합 구성국인 헝가리 왕국의 주 민족인 헝가리인을 긁어모아 합쳐도 제국 인구의 절반도 안 되었다. 주요 민족들만 나열해도 슬로베니아인, 체코인, 폴란드인, 우크라이나인, 크로아티아인, 이탈리아인, 슬로바키아인, 루마니아인 등등 무척 많았다. 자세한 내용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참조.[출처] 이안 커쇼 <히틀러>[27] 제1차 세계 대전 초에는 참전국들이 빠르게 전쟁을 끝낼 수 있다는 환상에서 빠져 인력을 갈아넣었고, 그 결과 1914년 말에는 전사, 실종, 부상으로 충원률이 100%를 초과하는 부대가 속출했다. 특히 프랑스군은 첫 해인 1914년 전사자가 전체의 1/3을 차지한다.[28] 실제로는 PTSD 증후군 환자들일 가능성이 높다. 당시에는 PTSD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으니.[29] Hugo Gutman(1880~1962) - 후에 게슈타포한테 체포당했으나 지인들의 도움으로 석방, 벨기에와 프랑스를 거쳐 망명했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가족들과 함께 미국으로 이주해 편안하게 여생을 마쳤다.[출처] 요아힘 C. 페스트 <히틀러 평전>[31] 우리가 아는 히틀러의 목소리는 1932년 그가 오페라 가수로부터 발성 훈련을 받으면서 완성시킨 것이다.[32] 이 선동술은 에릭 얀 하누센이라는 최면술사에게 배운 것이라고 한다.[33] 히틀러는 그날 일기에 "당 기금이라고는 어린애 용돈 수준밖에 안 되는 놈들이 황송하게도 나를 받아주시겠단다."라며 비웃기 바빴다.[34] 나중에 나치당이 맥주홀 폭동 후 재건될 때 히틀러는 당번을 7번으로 바꿔서 초기부터 자신이 7번 당원이었다고 조작했다. 앞번호 54명 중 히틀러의 권력을 원치 않던 대다수는 맥주홀 폭동 때 제거되거나 그 이후 히틀러 본인이 쫓아내 버렸기 때문에 그런 조작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터무니없는 조작을 본 드렉슬러는 1940년 히틀러에게 편지를 써서 "총통 각하께서도 각하가 당원번호 555번이었다는 것은 기억하시리라 믿습니다만."이라는 편지를 보내려다가 히틀러가 무서웠는지 그만두었다.[35] 서독 유학 경험이 있는 이원복먼나라 이웃나라 독일 편에서도 이 점에 충실하여 히틀러가 나치와 함께 등장하는 장면에서 항상 Nazi가 아닌 NSDAP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36] 이는 북한의 뉴스나 선전물 등을 접한 외국인들이 한국어가 딱딱하고 강한 어조를 가진 언어라 생각하는 것과 같다.[37] 히틀러 왼쪽의 인물이 에리히 루덴도르프, 왼쪽에서 3번째가 빌헬름 프리크이다. 그 오른쪽은 헤르만 크리벨.[38] 맥주홀은 말 그대로 맥주를 파는 술집으로, 당시 독일에서 맥주홀은 종종 연설장 역할을 하기도 했기에 맥주홀에서 폭동이 시작된 것 또한 이상한 일은 아니다.[39] 유대인과 극좌파들이 베를린과 바이마르 공화국을 장악했다고 생각했다.[40] 이때 맥주홀에 있던 시민들이 나치당의 비합법적인 폭동에 분노해 "여기가 멕시코, 남아메리카냐?"라며 비난하자 헤르만 괴링은 "우리 덕에 공짜로 맥주를 얻었으니 만족하라"라고 응수, 들끓는 민심에 기름을 퍼부었다. 허나 이를 감지한 히틀러가 나타나 짧은 연설로 분위기를 극적으로 반전시키는데 성공해 쿠데타의 주도권을 잡는다.[41] 참고로 같이 행진하던 헤르만 괴링고환에 총상을 맞는 심각한 부상을 당하고 약쟁이로 전락한다. 한편 루덴도르프는 아랑곳않고 용감하게 행진을 이어가다 체포된다.[42] 공교롭게도 이때 히틀러가 수감된 방은 원래 독일 혁명 당시 반란을 일으킨 쿠르트 아이스너를 살해한 암살범이 복역하고 있었다.[43] 이때 같이 기소된 사람 중에는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의 실질적 독재자였던 루덴도르프가 있었는데, 그는 재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다만 루덴도르프는 기소 자체를 굴욕적으로 느꼈으며, 히틀러만 전국적 유명 인사가 되는 꼴과 이후 자신이 나치당의 대선 후보로 이용당하는 꼴을 두고 보다 못해 히틀러와의 관계가 악화되며 갈라지게 된다.[44] 이후 히틀러는 정권을 잡은 뒤인 1933년 나이트하르트를 바이에른 대법원장으로 임명하고, 1937년에 그가 은퇴하자 자필 헌정사를 보내는 등 자신에게 베푼 특혜에 대해 확실히 보답해 주었다. 이오시프 스탈린이 그랬듯 히틀러는 자신에게 은혜를 베풀어 준 사람에겐 어떤 방식으로든 은혜를 갚아주곤 했다.[45] 이 사회 불만 세력 중 하나였던 라인란트의 어느 실업자는 전국적 명성을 얻은 히틀러의 추종자가 되어 나치당에 입당하게 된다.[46] 의외로 히틀러는 바이마르 공화국의 라이프치히 재판소에서 재판받기를 희망했다. 자신의 쿠데타 계획에 처음에 찬동한 뮌헨 고관들을 같이 몰락시키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히틀러에 연루된 뮌헨 수뇌부들의 압력으로 인해 바이에른에서 재판을 받게 되었다.[47] 심지어 "하일 히틀러"라고 인사하는 교도관도 있었다.[48] 여기서 뿌라우나우는 브라우나우암인, 빠바리아는 바이에른이고, 유야납은 의 중국식 음차이다.[49] 그리고 이 사실은 살짝 와전되어서 히틀러가 1차 대전 때, 혹은 맥주홀 폭동 때 고환 한쪽이 날아갔다는 소문이 되어서 2차 대전 때는 영국 같은 히틀러의 적들이 히틀러를 두고 짝불알로 두고두고 조롱했고, 또 노래로도 나왔다.[50] 프로파간다 포스터.[51] 1919년 베르사유 조약 이후 독일의 경제는 그야말로 휘청거렸다. 1920년대 들어서는 상상을 초월하는 인플레이션에 시달렸는데, 전쟁 전 단 1마르크가 601만 4,300마르크로 평가절하되고, 달걀 1개의 값이 3천만 마르크가 됐고, 200조 마르크 지폐는 800달러 정도면 환전이 가능했다. 당시 바이마르 공화국은 이런 실업 문제를 점진적으로 해결해 나갔는데, 그런 노력은 1929년 미국발 경제 대공황을 맞이하면서 물거품이 되어버렸다.[52] 당시 국적법에서는 독일의 공무원이 되면 독일로 귀화한 것으로 간주한다는 법이 있었는데 이를 이용했다.[53] 힌덴부르크가 53%의 득표율을 얻었고 공산당의 에른스트 텔만은 10%였다. 1차 투표에선 히틀러 30% 힌덴부르크 49% 텔만 13%.[54] 과반수에 미달 시 헌법상 대통령 권한에 임명된 내각.[55] 사실 바이마르 공화국은 1930년부터 의회를 무시한 헌법상 대통령 비상대권인 대통령 내각 출범 때부터 이상해졌으며, 대놓고 공화국에 적대적이었던 파펜과 군 장성 슐라이허가 총리로 나올 때부터 이미 의회주의는 끝났다.[56] 나치당은 반공주의를 표방했으나 동시에 사회주의를 내세웠기 때문에 민족주의적 좌파들이 당내 좌파를 형성하고 있었다. 당 내부의 좌파들은 1928년부터 집권전까지 강령이나 당내 노선차이를 빌미로 계속 숙청되었고, 1934년 장검의 밤 사건으로 완벽히 제거된다.[57] 특히 갈려버린 해군을 재건하기 위해 에리히 레더 제독이 추진한 Z계획은 완료되는 시점이 1945년이었다. 물론 이것도 '1차' 재건 계획이였다[58] 1939년에 히틀러는 50세 생일을 맞는다. 100세 시대를 바라보는 21세기 현재에야 50살은 모든 능력치가 완숙에 접어든 팔팔한 중년이지만, 거의 100년 전인 당시의 50살은 조금 빠르면 손주를 볼 정도로 노년에 접어드는 나이대였다. 아무리 전시였다지만 그 누구보다 최고의 대우와 관리를 받았을 독재자인 히틀러가 그로부터 5년 만에 파킨슨병에 걸려 급격히 쇠약해졌던 걸 생각하면 히틀러가 조급함을 가졌던 것은 당시로서는 타당한 반응이었다.[59] 이렇게 무차별적 지원을 해준 히틀러와 상반되게 반대편 인민전선을 지원한 이오시프 스탈린은 꼼꼼하게 가격을 다 치러야 무기를 보내주고 값이 밀리면 지원을 중단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와중에 숙청도 했다고. 하지만 스탈린의 지나친 이해타산적인 행보로 인해 스페인의 인민전선은 충분한 지원을 받지 못해 완전히 몰락했다. 만약 인민전선이 스페인을 장악했더라면 독소전쟁 때 소련을 크게 도울 수 있었다는 걸 감안하면 전형적인 소탐대실인 셈이다.[60] 다만 독일의 경제적 위기 때문에 히틀러가 전쟁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 히틀러는 원래부터 다른 국가들을 침략할 생각으로 임기 초반부터 군비 확장에 열을 올렸기에 이러한 경제적 위기는 오히려 히틀러가 침략을 통해서만 경제를 회복시킬 수 있다는 확신을 가져다 주었다.[61] 왼쪽부터 영국의 수상 네빌 체임벌린, 프랑스의 총리 에두아르 달라디에, 나치 독일의 히틀러, 이탈리아 왕국의 베니토 무솔리니, 이탈리아 왕국의 외무장관 갈레아초 치아노[62] 소련은 1939년 폴란드 침공을 계기로 소폴전쟁에서의 패전으로 폴란드에게 뜯겼던 르비우와 브레스트 등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 서부 지방의 도시들의 영유권을 다시 재합병하는데 성공한다.[63] 편지의 내용은 한 마디로 "전쟁하지 마십시오"다. 이 편지에서 간디는 히틀러에게 '친구'라는 표현을 썼는데, 실제로 둘이 친구였던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이 표현은 단지 예의상의 표현으로 보인다.[64] 문제는 베를린이 늪지대 기반의 동네였는 통에 현대 기술로도 히틀러가 원한 게르마니아를 지을 수 없었다는 거다. 슈페어 역시 이런 현실을 너무 잘 알고 있었고 히틀러의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타협 가능한 선에서 현실화 시키려고 노력했다.[65] 슈페어는 2차 대전 말기 군수장관이기도 했으며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20년형을 선고받았다.[66] 다만 여기에는 빈집이라고 생각했던 자르 공세에서 수비를 맡은 독일 제1군이 프랑스군을 상대로 대단히 선전했던 영향도 컸다. 9월 7일부터 17일까지 총 10일간 진행된 프랑스군의 자르 공세에서 프랑스군은 독일군의 산발적 저항 지크프리트 선에 도달하지 못했고 10월 16일 독일군은 프랑스군에 반격을 가해 점령당한 독일 영토를 전부 회복하였다. 한달에 걸친 자르 공세에서 프랑스군은 2000명에 달하는 사상자를 낸 반면 독일군은 500명 정도의 피해를 입었다.[67] 히틀러로서는 화를 낼만도 한 것이 슐리펜 계획은 이미 실패한 계획이고 그 계획이 실패하며 의미없는 참호전으로 이어져 결국 패전했다. 개인적으로도 그 참호전에서 고생한 것도 있고. 무엇보다 프랑스도 바보는 아니었기에 참호전에 대비한 마지노선을 깔아두었기에 애초에 일이 잘 될 가능성도 낮은데 실패하면 마지노선에 걸려버려서 힘만 빼다 망하는 상황이 된다는 거다.이쯤되면 슐리펜 계획으로 한번 실패하고도 또 같은걸 내놓는게 신기하다.[68] 사실 프랑스 첩보부는 독일군의 주공을 상당히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으나, 프랑스군 상층부는 이를 무시했다.[69] 이는 독일 육군의 전통 때문인데, 프리드리히 대왕 때부터 군과 정치의 결탁을 중요시했기 때문이다. 군은 이것을 문제삼아 정치가들이 자신들을 통제하는 걸 거부해오곤 했다.[70] 그러나 히틀러의 니트스러운 생활이 한편으로는 가끔 번뜩이는 결정을 도와 나치의 집권과 전쟁 초반의 승리들에 기여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제2차 세계 대전의 규모는 개인의 요행으로 이길 수 있는 수준을 한참 넘어섰다는 게 문제였다.[71] 일본과의 전쟁도 일본이 패망하기 직전에나 했고 패망 직전에 선언한 만큼 폭풍진격을 해서 사할린, 쿠릴 열도, 만주, 한반도 북부 등 획득할대로 획득했다.[72] 바르바로사 작전이 실행되자 독일뿐만이 아니라 미국과 영국도 소련이 몇 달 못 버텨낼거라 예상했다. 그만큼 소련의 잠재력은 외부에서 가늠하기 힘들었다.[73] 그가 탄 비행기에 시한폭탄을 넣어둔 장교가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터지지 않아서 그가 무사히 착륙하고 난 다음 서둘러 비행기에 넣어둔 폭탄을 점검하니 시간장치가 고장나 있었다. 그 장교는 이대로 가다간 잡혀 죽으리라고 보고 탈영하여 목숨을 구하긴 했다.[74] 영화 다운폴에서도 그런 묘사가 나온다.[75] 막상 연극과 영화를 많이 검열했던 나치 당국의 행보와는 모순적인 행보이다. 다만 히틀러는 연극이니 영화니 나의 투쟁에서 저질 예술이라 말하긴 했어도 그래도 영화가 선동을 쉽게 한다는 걸 알고는 선전용 영화를 제작하여 국민들에게 반강제로 보게 하기는 했다. 대표적으로 의지의 승리가 이 사례에 속한다.[76] 히틀러의 방대한 사진자료가 있는 아카이브 사이트에서 년도별로 히틀러의 사진을 볼 수 있는데, 전쟁 이전과 전쟁 이후의 사진 양을 봐도 굉장히 큰 차이가 난다. 그나마 전황이 유리했던 42년도까지는 각종 행사참여나 최측근의 생일파티 참석, 전선 시찰, 훈장 수여, 장례식 참석, 무엇보다 대규모 연설에서 연출된 사진이 매우 많았으나 43년도 이후부터 급격히 줄기 시작했으며 44년도 이후에는 연설 사진은 거의 없어졌고, 44년 말 이후부터는 은둔을 하는 게 아닌가 할 정도로 찍힌 사진이 없어지기 시작한다.[77] 다만 모렐이 마냥 돌팔이는 아닌 게 모렐이 처방한 약물 대다수가 오늘날에는 돌팔이가 아닌 이상 처방할 리가 없는 물질들이지만, 그 당시에는 처방하는 일이 다반사였던 약물들이었다. 모르핀 역시도 2차대전에서는 전장의 병사들에게도 잘도 돌아다녔다. 물론 이런 마약류들이 사람들에게 하등 도움이 안 된다는 걸 알고는 전격 퇴출시켰지만, 그건 2차대전이 끝나고도 시간이 지난 후의 일이다.[78] <히틀러북> 총통부관 하인츠 링게 증언[79] 홀로코스트 부정론자. 하지만 히틀러의 건강에 관한 주장은 홀로코스트 부정론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80] 이는 귀차니즘이 강했던 히틀러가 딱히 약성분을 물어보지 않은 탓이다. 거기다 모렐도 위에 말한만큼의 돌팔이는 아니라서 그 많은 마약류를 섞어 처방하면서도 진통제와 각성제를 섞어 써서 당장에 보이는 부작용을 줄이는 등 신경을 많이 써서 처방했다. 덕분에 당시엔 똑같이 마약에 쩔어살던 괴링 같은 일부만 아니면 모렐을 의심하지 않았다.[81]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몇년 뒤 파리 시장은 파리에 대한 히틀러의 파괴 명령을 거부한 콜티츠에게 감사패와 명예시민증까지 수여했다. 콜티츠는 종전 후 전범 재판을 받을 당시 "나는 파리를 불태워 인류사의 죄인으로 기억되느니 차라리 히틀러의 배신자로 기억되고 말리라."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82] 영화 다운폴에서는 이에 대해 부하가 실제로는 없는 사단이 지도에는 수십개나 존재한다고 뒷담화하기도 했다.[83] 이들의 배신은 각각 항목을 참조.[84] 흔히 권총자살로 알려졌으나, 2010년 청산가리 음독자살이란 소련군의 판단이 공개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맨 하단 참조.[85] 왼쪽이 율리우스 샤우프, 오른쪽이 아돌프 히틀러다.[86] 이는 히틀러가 전쟁범죄 책임에 있어서 의도적으로 회피하려는 의도도 담겨있으며, 히틀러는 기본적으로 행정에 큰 관심이 없었기에 실무 부서(슈츠슈타펠, 국방군 등)들에게 학살을 맡기고 자신은 뭉뚱그려서 명령을 내리는 식이었기 때문이었다.[87] 나치당 당수인 히틀러 바로 밑의 당 최고위 간부들이다.[88] 당시 당 총통 비서실장 즉 히틀러의 당무 비서실장이다.[89] 나치당은 1933년 국회의사당 방화사건 이후 국회의사당 옆에 있던 크롤 하우스를 국회의사당으로 사용하였다.[90] 출처, 요제프 괴벨스: 일기. 2부, 2권, 498쪽[91] 나치 친위대 대령이자 의사로 요제프 멩겔레처럼 반인도적 생체실험에 가담한 전범이다.[92] 다만, 아프리카 군단 지휘관 에르빈 롬멜은 이 명령을 이행하지 않았으며, 관련 증거도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았으므로 만약 그가 자살하지 않고 종전을 맞이했다면, 무죄로 풀려났을 가능성이 높다.[시체주의] 파일:Mussolini_e_Petacci_a_Piazzale_Loreto,_1945.jpg왼쪽에서 2번째가 무솔리니이다.[94] 당시 베를린은 나치 독일군과 연합군 사이에 혈투가 벌어지던 전투 현장이었다. 생존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히틀러의 명령은 자신의 사체를 철저하게 소각할 것이었지만 불을 붙이자마자 연합군 공군의 폭격이 떨어지는 통에 모두 벙커로 도망가 버렸다고 한다.[95] 다들 알다시피 인체의 상당 부분은 로 되어있어 불태우려면 꽤 많은 자원과 시간이 필요하다. 엄청난 고열로 이루어지는 화장도 수십 분씩 소요되는 것이 이 때문이다.[96] 치아가 알아보기 쉬웠는데, 전술했듯 치아가 매우 부실해서 거의 대부분 금속으로 된 의치였다고 한다. 소련군은 히틀러를 진료하던 치과의사의 조수를 찾아내 그의 시신을 확인하는 데 성공했다.[97] #[98] Ehle. 엘베강의 지류.[99] 권총 자살을 하게 될 경우 본능적으로 몸이 방어 작용을 하여 총이 들리게 되면서 제대로 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대표적으로 프랑스 대혁명 당시 자코뱅의 리더였던 로베스피에르가 체포될 당시 턱이 날라간 이유가 턱에 권총을 대고 사격해 자결하려했지만 들렸기 때문이라는 말이 있으며 도조 히데키 역시 심장에 권총을 대고 자살을 시도하였을때 권총이 들리면서 자살 미수에 그쳤다.[100] 다운폴에서도 히틀러의 자살을 직접 묘사하진 않았고 트라우들 융에의 회고 그대로 묘사했다.[101] 라텐후버의 경우 링에를 지목했다.[102] 참고로 로후스 미슈는 전후 다운폴을 본 이후 히틀러가 고래고래 소리지르는것에 대해 벙커 내에서 모두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며 해당 장면은 할리우드 액션이라고 깠다.[103] 흥미롭게도 이 책은 소련에는 출판되지 않았다. 즉 철저히 서방을 향해 공개된 것이었다.[104] 참고로 실제 히틀러 키는 175cm였다.[105] 뮌헨 폭동으로 수감되었을 당시 기록에 따르면 히틀러는 왼쪽이 아닌 오른쪽 고환이 미하강 고환이었다.[106] 에바 브라운 역시 입에서 독약 앰플과 함께 시신에서 청산가리 특유의 아몬드향이 났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히틀러와 동일하게 청산가리 검출 검사를 실시하지 않았다. 하지만 히틀러와 달리 이는 벙커에 있던 나치 인사들의 진술과 일치했기 때문에 에바는 청산가리로 자살했다는데 서방 학자들도 여기에 대해 별다른 이견이 없다.[107] Joachimsthaler, Anton (2000) The Last Days of Hitler: The Legends, The Evidence, The Truth. Translated by Helmut Bölger. London: Cassell. ISBN 978-1-85409-465-0.[108] Fest, Joachim (2004). Inside Hitler's Bunker: The Last Days of the Third Reich. New York: Farrar, Straus and Giroux. ISBN 978-0-374-13577-5. 162-164[109] Kershaw, Ian (2008). Hitler: A Biography. New York: W. W. Norton & Company. ISBN 978-0-393-06757-6.. P955-P958[110] 'The Death of Adolf Hitler: British Intelligence, Soviet Accusations and Rumours of Survival'[111] 'Hitler's Death: The Case Against Conspiracy'[112] 결국 KGB로 합쳐지는 두 집단간 경쟁이 뭔 말인가 싶지만 1945년 스메르시 국장이자 1946년 스메르시 후신 국가안보부 장관이던 빅토르 아바쿠모프는 노골적인 권력욕을 보이며 내무부 장관이던 세르게이 크루글로프를 비롯한 내무부 인사들과 사이가 상당히 안좋았다. 2차 대전 당시 스메르시는 1943년 NKVD에서 독립해 스탈린의 직속 기구로써 소련군 내부 스파이 색출을 맡으며 소련군 내 엄청난 힘을 자랑했고 국가안전부로 개편된 이후 아바쿠모프는 이 힘을 가지고 겁도 없이 베리야말렌코프를 비롯한 정치 위원들의 뒤를 조사하다 시온주의자로 몰려 1954년 총살되었다.[113] 귄셰의 경우 히틀러가 에바와 함께 같은 소파에 있지 않았고 별도의 의자에 앉아서 머리를 떨군채 죽어있었다고 진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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