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06-20 18:14:50

해주시

해주에서 넘어옴
황해남도의 시, 군
해주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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海州市 / Haeju City / 나밋골 (고유어/지명)
해주시
海州市 / Haeju City / 나밋골
국가 북한
면적 206.93㎢
광역시도 황해남도
행정구역 26동 5리
시간대 UTC+8:30


1. 개관2. 역사3. 경제4. 통일 이후5. 문화재6. 광복 당시의 행정구역7. 이북5도위원회 기준 행정구역8. 북한 기준 행정구역9. 시설10. 여담

1. 개관

북한 황해남도의 도청 소재지. 황해도의 '해'가 바로 해주이다. 면적은 206.93㎢이다.

북쪽에는 899m의 수양산(首陽山)[1]이 있으며, 시내에는 광석천(廣石川)이 흐른다. 남쪽은 용당반도가 돌출해 있어 해주항을 이루며, 옹진반도와 바다로 수백m 떨어져 있다.

남쪽으로 황해에 맞닿은 항구도시로, 주위는 벽성군(碧城郡)으로 둘러싸여 있다. 이상하게도 38선 이남이라고 잘못 아는 사람이 많지만1945년~1950년 사이에는 38선 바로 북쪽에 위치한 도시여서, 옹진반도 등 지역에 대한 대남(對南)공작의 기지 역할을 하기도 했다.

파일:attachment/Haeju-YDH-00001.jpg
해주시 용당포(龍塘浦).

정확히 말하면 해주 전체가 모두 38선 이북에 위치한 것도 아니다. 용당포가 속한 해주항역 일부는(정도역 부근) 38선 남쪽으로 들어갔다. 이런 이유 때문에 38선 분계당시 미군정과 소련군정이 예외조항을 둬서 해주시는 북한이 모두 관할하는 것으로 합의하였다. 하지만 남쪽으로 내려가기 딱 좋은 위치라 용당반도의 남단인 용당포에서 바다를 건너 한국의 옹진반도로 탈출하는 사람이 많았다. 당장 바다는 38선 이남이어서 북측 군인들이 감시만 하고 사격하지는 못했다. 그리고 이런 이유로 인해 6.25 전쟁이 발발할 때까지 해주는 항구기능을 상실했다.

특산물로는 벼루이 있었으며, 황해청년선, 옹진선(해옹선), 50번 국도가 지나간다.

출신 인물을 살펴보자면 애국자의 땅이라고 할 수 있다. 안중근 의사가 이곳에서 태어났고, 김구 선생께서도 해주부 백운방[2]에서 태어났으며, 여기서 황해도 동학군으로 활약했다. 둘의 나이차는 겨우 3살. 김구가 수배를 피해 안중근의 집에 묵은 적도 있다고 한다.

전국노래자랑의 송해 선생은 재령평야로 유명한 재령군 출신이지만, 해주에서 음악공부를 했다.

서울에서 직선으로 약 120km[3], 철도로는 약 160km 거리에 있다.

2. 역사

고조선 이후 대방군(帶方郡)에 속하였고, 고구려 때는 내미홀군(內未忽郡), 지성(池城), 장지(長池)라고 불렸고, 신라 경덕왕(景德王) 21년(762)에 폭지(瀑池)라고 개칭하였다. 고려 태조에 이르러 바다에 임한 까닭에 해주(海州)라 명하였다. 고종 32년(1895년) 23부 실시로 해주부가 되어 16군을 관하에 두었다가 1896년 13도제(道制) 실시로 황해도의 도청 소재지가 되었다. 1954년, 북한이 점유하게 되면서 황해도를 황해남도, 황해북도로 나누게 되어 해주는 황해남도의 도청소재지가 되었다.

3. 경제

북한의 시장경제에서 해주는 매우 중요한 위치를 가지고 있다. 북한에서 비싼 의 집산지이기 때문이다. 북한 최대의 곡창지대인 연백평야가 이웃해 있으며, 장연과 옹진, 강령 등지에서는 수산물들이 해주시장으로 올라온다. 이 때문에 무수한 권력기관들이 가을이 되면 쌀을 사기 위해 해주로 내려오고 외화벌이 기관들도 해주에 여럿 사업소를 두고 있다. 또한 옹진의 금광을 기반으로 해주제련소가 설립되어 금 생산도 이뤄진다. 이런 상황 덕에 해주는 이른바 고난의 행군 시기에도 심각한 기아 사태는 면할 수 있었다. 비록 국영기업소들이 제 구실을 못하고 배급이 중단되어 노동자들의 생활이 어렵긴 했지만, 사방이 농경지에 바다이기 때문에 암시장에 식료품은 그럭저럭 공급되었기 때문이다.[4] 평야지대라는 특성상 주변 지역에서 사람과 물자가 해주로 들어오는 것도 수월했던 점이 이런 시장 형성을 촉진시켰고, 그에 수반해 자생적인 운송업이나 서비스업도 나타났다.

그런데 여기서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 해주는 제련소와 항구, 약간의 지방공업을 제외하면 전반적으로 1차산업과 행정기능을 기반으로 한 도시였고, 그 해주가 가진 것이라고는 쌀밖에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쌀을 다른 지방에 팔아 돈을 손에 쥔 것 까지는 좋은데, 그 돈으로 뭔가를 사 올 수가 없는 것이다. 우선 국내 제조업이 전면 붕괴된 상황에서 각종 공산품들은 모두 머나먼 국경을 통해 수입해와야 하는 형편인데, 북한 교통의 핵인 철도가 파탄 상태에 이르고 도로교통은 제대로 정비가 안 된 상황에서 국토 최남단인 해주까지 물자 운반은 많은 비용과 노력을 필요로 했다. 또 탄이나 화목 등은 주 생산지 중 하나인 강원도 지역이 시장경제의 발달이 미약한데다가, 석탄은 특히 정부에서 강력하게 통제하기 때문에[5] 이 역시 돈이 있다고 해서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런 상황은 다행히 2000년대 후반 들어 북한의 도로교통이 자생적으로 발전을 이루면서 일정부분 해소되었다. 그러나 쌀이라는 상품을 매개로 상당히 이른 시기부터 시장경제적 행동양태가 나타난 것에 비해 그 양적·질적 발전의 속도가 여타 지역보다 늦었던 것은 수입에 의존해야 하는 북한 시장경제의 기형적 특성을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여라간 이러한 문제점이 있기 때문에 북한내에서도 개성공단이 나름대로 쏠쏠하게 성과를 거두자 해주 일대도 남한과 협력해서 같이 개발하려는 움직임이 있었고, 실제 2007년 남북정상회담 당시에 이른바 "서해평화협력지대"를 공동선언문에 명시해서 개성에 이어서 해주, 강령 일대까지 묶어서 개발하려는 계획이 세워졌지만 이듬해부터 남북관계가 급속히 악화되며 완전히 물건너갔다. 그러다가 2010년대 중반 이후로는 북한 당국에서 해주 일대를 개방해서 개발하려고 하고있으며, 향후 대북재제가 해제되면 해주시의 발전 가능성은 높다고 할수있다.

4. 통일 이후

만약 미래에 통일이 된다면 황해남도의 도청소재지로서 황해남도의 행정적 중심지가 될 수 있겠지만 그 이상의 발전은 힘들 것으로 보인다. 주변에 큰 도시가 없기 때문에 남포, 인천처럼 외항 역할을 할 수 없고, 한반도 주요 교통축들 가운데 하나인 경부-경의 교통축에서 빗겨나 있기 때문에 크게 발전하기는 힘들 것으로 예상된다. 다만, 남포항이 부동항 지위를 상실하여 해주 이북의 서해안 항만들은 부동항이 아니기 때문에 부동항인 해주항이 주목받을 여지도 충분히 있다. 통일 뒤 경의고속철도를 서울, 개성, 해주를 거쳐 사리원, 평양, 신의주를 거치도록 건설하려는 계획이 있다. 또한 서해안고속도로를 해주까지 연장하려는 계획도 있기 때문에, 서산, 당진처럼 성장할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다. 또한 상술한 것처럼 북한의 대표적 민주화 성지가 될 것이다.

5. 문화재

  • 부용당(芙蓉堂)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500px-Haeju_Buyong_Pavilion.jpg

부용당은 1500년 해주성의 누각으로 세웠다. 임진왜란 때 조선 인조가 태어난 곳으로, 6.25전쟁 때 파괴되어 터만 남아 있었으나 2003년에 복원되었다.
  • 해주석빙고
얼음을 보관하기 위한 시설이며, 고려 초에 세워 1735년 개축했다. 높이 3~4.3m, 내부길이 30m.
  • 해주다라니석당
높이 464cm인 육각형 구조물로 고려시대에 세워졌다. '다라니석당'은 다라니경을 새겨 기둥처럼 세운 돌구조물을 말한다. 한반도의 다라니석당은 이 곳과 용천다라니석당, 두 곳이 있다.
  • 백세청풍비
1728년 세웠으며 높이 434cm이다. 백세청풍이란 백이와 숙제의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며 마침 해주 북쪽에도 수양산이 있고 해서 세웠다고 한다. 글씨는 황해도관찰사 이언경이 주자의 것을 모사해 새긴 것이다.
  • 신광사
신라 문무왕 때 원효의상에 의해 창건된 절이며, 광복 당시에는 벽성군 서석면 신광리였다. 경내에 신광사 5층탑과 무자비(無字碑)가 있다.

6. 광복 당시의 행정구역

파일:Flag_of_Hwanghae-do_little.png 황해도의 하위행정구역 (이북5도위원회)
해주시 사리원시 송림시
벽성군 연백군 금천군 평산군 신계군
장연군 송화군 은율군 안악군 신천군
재령군 황주군 봉산군 서흥군 수안군
곡산군 옹진군

광복 당시 21개 동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 중동(中洞)
  • 상동(上洞)
  • 북본동(北本洞)
  • 남본동(南本洞)
  • 북욱동(北旭洞)
  • 남욱동(南旭洞)
  • 동영동(東榮洞)
  • 서영동(西榮洞)
  • 북행동(北幸洞)
  • 남행동(南幸洞)
  • 광석동(廣石洞)
  • 청풍동(淸風洞)
  • 연하동(烟霞洞)
  • 왕신동(王神洞)
  • 석계동(石溪洞)
  • 동애동(東艾洞)
  • 용당동(龍塘洞)
  • 선산동(仙山洞)
  • 파청동(把淸洞)
  • 동양동(東陽洞)
  • 율동동(栗洞洞)

일본식 지명[6]들의 광복 후 변화를 살펴보면, 북본동은 부용동(芙蓉洞), 남본동은 태봉동(泰峯洞)[7], 북욱동은 사미동(四美洞), 남욱동은 해운동(海雲洞), 서영동은 장춘동(효자 장춘의 묘각이 있었던 데서 비롯했다고 함), 북행동은 구제동(九濟洞), 남행동을 양사동(養士洞)으로 개칭되었다고 한다. 물론 지금 북한에서 쓰고 있는 행정체계는 이것보다도 더 많이 달라졌지만.

7. 이북5도위원회 기준 행정구역

아래 행정동과 법정동은 《이북5도 명예읍·면·동장 위촉에 관한 규정》 제8조 별표2에 규정되어 있다.
행정동 법정동·리
광옥동 광석동(廣石洞)·옥계동(玉溪洞)
남양동 남천동(南川洞)·양사동(養士洞)
동양동 동양리(東陽里)
사연동 사미동(四美洞)·연하동(烟霞洞)
석계동 석계리(石溪里)
선파동 선산리(仙山里)·파청리(把淸里)
용동동 동애리(東艾里)·용당리(龍塘里)
율왕동 왕신리(王神里)·율동리(栗洞里)
장구동 구제동(九濟洞)·장춘동(長春洞)
청풍동 청풍동(淸風洞)
태부동 부용동(芙蓉洞)·태봉동(泰峯洞)
해백동 백림동(白林洞)·해운동(海雲洞)

8. 북한 기준 행정구역

황해남도의 시, 군
해주시
강령군 과일군 룡연군 배천군 벽성군
봉천군 삼천군 송화군 신원군 신천군
안악군 연안군 옹진군 은률군 은천군
장연군 재령군 청단군 태탄군 연백군

9. 시설

10. 여담

  • 2012년 봉기가 터져 사상자가 나왔다고 한다. #

[1] 해주의 별호(別號, 고을의 별명)가 '수양'이었으며, 조선 세조의 왕자 시절 군호로 유명한 '수양대군'의 '수양'도 여기서 딴 것.[2] 백운방은 1914년 청산방(靑山坊)과 합쳐져 운산면(雲山面)이 되었고, 1938년 해주군 해주읍이 부(府)로 승격됨에 따라 벽성군이 되었다. 광복 당시 행정구역으로는 벽성군 운산면인 셈인데, 운산면은 해주 시내에서 서북쪽으로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다.[3] 세종시까지의 거리와 비슷하다.[4] 고난의 행군 시기 북한의 식량난은 주로 식량 생산지인 농촌에서 피해가 덜하고 식량 공급지인 도시에서 피해가 심각했다. 이는 고난의 행군의 직접적인 원인이 이미 만성화되어 있던 식량생산량의 부족 그 자체라기보다는 식량을 비롯한 각종 자원을 공급할 국가 시스템의 전면적인 마비 및 붕괴라는 점을 보여준다. 반면 대약진 운동 당시의 대기근은 생산지인 농촌이 피해를 옴팡 뒤집어썼다. 이 쪽은 어쨌거나 식량을 수탈할 행정체계는 작동되는 상황이었기 때문.[5] 쌀도 마찬가지긴 한데, 이 쪽은 그나마 운반이 용이하기라도 하고, 시장에서 빠르게 돈으로 전환하거나 바로 사용할 수 있으니 검문하는 군부대 등에 뇌물로 바쳐서 빠져나오기도 쉽다. 설상가상으로 2010년대 들어 북한은 외화를 마련하기 위해 상당량의 석탄을 중국으로 수출중이다.나가 죽어라[6] 대한민국의 행정 체계에서는 북한지역의 지명에 대해 광복 당시의 것을 따르고 있으며, 이것은 일본식 지명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 이유는 이북 5도 항목을 참고[7] 뒤에 김일성의 동상을 세웠다고 영광동(…)으로 개칭당했다. 이뭐병도 아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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