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05-13 18:18:13

삼성 라이온즈/사건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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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단 기본 정보 삼성그룹 | 삼성스포츠 | 삼성 라이온즈 | 삼성 라이온즈 2군
선수단 명단 선수단 리스트
등번호 선수단 등번호
유니폼 선수단 유니폼
구장 1군 대구 삼성 라이온즈 파크 | 포항 야구장
2군 삼성 라이온즈 볼파크
주요 역사 우승 시즌 1985 통합우승 | 02 한국시리즈 | 05 한국시리즈 | 06 한국시리즈
11 한국시리즈 | 12 한국시리즈 | 13 한국시리즈 | 14 한국시리즈
현재 시즌 2019년 시즌
사건 사고 사건 및 사고
팬덤 관련 정보 응원가 | 삼성 라이온즈 갤러리 | LIONS TV | 사자 사랑방 | 사자후
주요 지역 연고 경북고등학교 | 대구고등학교 | 대구상원고등학교 | 포항제철고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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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라이온즈의 관련 사건 사고 모음. 야구에 관한 공통분모로 꼴리검대구아재와도 일정 부분 연관이 있다.

삼성 라이온즈 공식 홈페이지에 있는 관련 자료[1]

1. 개요2. 경기 관련
2.1. 1984년 삼성-OB 선수단 마찰2.2. 1984년 고의로 롯데에 져주기 논란2.3. 1984년 이만수 타격왕 만들어주기 논란2.4. 1986년 한국시리즈 버스 방화사건2.5. 1989년 빙그레-삼성 선수단 집단 난투극 및 관중 오물 투척 사건2.6. 1990년 잠실구장 삼성-OB 집단 난투극2.7. 1996년 현대와 빈볼 시비2.8. 1997년 부정배트 의혹2.9. 2010년 한국시리즈 내야 라이트 소등 사건2.10. 2011년 대구구장 정전 사건2.11. 2011년 전광판 화재사건2.12. 2015년 경기장 소등 사건
3. 선수 관련
3.1. 2001년 갈베스 잠적 사건3.2. 2002년 진갑용 약물복용 사건3.3. 2003년 임창용 간통사건3.4. 2008년 선수단 도박 사건3.5. 2010년 강봉규 퇴장사건3.6. 2014년 정형식 음주운전 사고3.7. 2015년 삼성 라이온즈 원정 도박 사건3.8. 2016년 안지만 도박사이트 개설 연루혐의 사건3.9. 2017년 최경철 도핑 사건
4. 팬 관련
4.1. 1982년 OB전 관중 난동 및 오물 투척 사건 (김영덕 OB 감독 부상)4.2. 1982년 OB전 관중 난동 사건 (대구구장 시설 및 OB 구단 버스 파손)4.3. 1984년 OB전 오물 투척 사건 (OB 구천서 부상)4.4. 1986년 해태 타이거즈 구단 버스 방화 사건4.5. 1986년 한국시리즈 4차전 관중 난동 사건4.6. 1988년 플레이오프 3차전 관중 난동 사건4.7. 1989년 대구구장 관중 난동 사건4.8. 1989년 빙그레-삼성 선수단 집단 난투극 및 관중 오물 투척 사건4.9. 1990년 해태전 관중 난동, 자동차 타이어 펑크4.10. 1990년 태평양전 오물 투척 사건4.11. 1990년 OB전 관중 난동4.12. 1990년 김종석 새총 저격 사건4.13. 1990년 이만수 깡통투척 사건 (관중석 방화 및 의자 700여석 파손)4.14. 1992년 빙그레전 관중 난동 사건 (방화 및 기물 파손)4.15. 1992년 김성근 퇴진 시위4.16. 1996년 관중 난동 사건4.17. 1997년 관중 난동 사건4.18. 1998년 플레이오프 관중 난동 사건4.19. 1999년 플레이오프 대구 관중 난동 사건 (호세 퇴장사건)
4.19.1. 경기 중 난동 - 호세 퇴장 사건4.19.2. 경기 종료 후 난동4.19.3. 사건 후
4.20. 2003년 관중 난동 사건4.21. 2010 플레이오프 관중 난입 사건4.22. 2011년 삼리건 난입 사건4.23. 2015년 삼리건 난입 사건4.24. 2015년 포항 야구장 오물 투척 사건4.25. 2016년 포항 야구장 관중 난입 사건4.26. 2016년 관중에 의한 최형우 타구 판정 번복 사건4.27. 2016년 포항 야구장 오물 투척 사건
5. 구단 관련
5.1. 1983년 구단과 서영무 감독의 갈등5.2. 1984년 OB와의 악연5.3. 1987년 김성길 편법 영입 논란5.4. 1993년 양준혁 편법 입단 파문5.5. 1995년 최창양 편법 입단 파문5.6. 장효조 트레이드 및 홀대 논란5.7. 이만수 홀대, 은퇴 강요 논란5.8. TV중계 뒷거래 의혹5.9. 2014년 정현석 FA 보상선수 재지명 문의 논란5.10. 2016년 팬 현수막 설치 제지 및 시위사건5.11. 최규순 게이트5.12. 응원가 저작권 침해 집단소송

1. 개요

2. 경기 관련

2.1. 1984년 삼성-OB 선수단 마찰

원년부터 이어오던 삼성과 OB의 라이벌리는 1984시즌을 앞두고 김영덕이 OB 감독에서 삼성 감독으로 옮겨지면서 선수단 차원의 감정 싸움으로 확대되었다. 84시즌 동안 삼성과 OB 간에 여러 차례 집단 난투극, 빈볼 사건 등이 벌어졌다.

1984년 5월 2일, OB 홈구장인 대전 경기에서 OB 조종규가 삼성 김일융이 던진 빈볼을 얻어맞고 마운드로 달려가 주먹질을 했다. OB 김성근, 삼성 김영덕 두 감독이 ‘선수통제 불충분, 구장 질서 문란’ 이유로 한국야구위원회(KBO)로부터 나란히 경고처분을 받았다.

6월 2일, OB 이홍범이 대전구장에서 고의적으로 삼성 유격수 오대석의 허벅지를 차면서 슬라이딩했고, 허벅지 부상을 입은 오대석은 그 해 시즌을 접었다.

84시즌 중 OB 포수 배원영이 삼성 덕아웃을 향해 “변태, 변태”를 소리쳤다가 김영덕 감독한테 따귀를 얻어맞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2.2. 1984년 고의로 롯데에 져주기 논란

1984년 프로야구는 전기리그와 후기리그로 나누어 100경기를 치렀다. 그래서 한국시리즈는 전기리그 우승 팀과 후기리그 우승 팀이 맞붙어 승부를 겨뤘다. 당시 전기리그에서 우승한 삼성은 후기리그까지 제패, 한국시리즈를 무산시킬 계획이었다. 그러나 후기리그 들어 우승할 길이 멀어지자 파트너 선택으로 머리를 돌렸다. 한국시리즈에 대비해 전력을 비축하는 한편 코칭스태프에서는 후기리그 1위로 어떤 팀을 밀어줄 것인가로 회의를 하며 손 쉽게 이길 수 있는 팀 탐색에 들어갔다. 코치들의 의견은 확실한 에이스가 없는 해태 타이거즈OB 베어스였으나, 김영덕 감독은 롯데를 선택했다.

이래서 선택된 팀이 전기리그에서 4위를 차지했던 롯데였다. 삼성은 전기리그 때 롯데에게 9승 1패로 압도적인 우위를 보였고, 시즌 중 롯데 자이언츠의 에이스 최동원을 이긴 적이 있다는 것이 김영덕 감독이 롯데를 고른 이유. 그러나 롯데에서 감독으로 있었던 박영길 타격코치는 완투가 가능한 최동원이 페이스까지 조절하면 상대할 수 없다고 반대했다. 하지만 코치가 감독의 뜻을 꺾을 수는 없었으니 롯데가 한국시리즈 상대로 정해졌다.

한국시리즈 진출권이 걸린 후기리그 우승의 향방은 롯데와 OB가 각각 2게임을 남겨 놓은 상태에서도 오리무중이었다. 9월 20일 현재 롯데는 27승1무20패로 1위를 달리고 있었고 OB는 1게임 뒤진 26승1무21패로 롯데를 추격하고 있었다.

재미있는 것은 이들 두 팀이 우승과는 거리가 먼 삼성과 해태와 각각 2게임을 치러야 하는 점이었다. 그것도 같은 날(9월 22~23일) 롯데는 홈인 부산에서 삼성과, OB는 제주에서 해태와 2게임을 치러야 했다.

그러나 관심은 온통 부산에서 치를 삼성-롯데전(9월 22~23일 구덕구장)에 쏠려 있었다. 삼성이 롯데를 얼마만큼 봐주느냐에 따라 우승의 향방이 결정되는 갈림 길이었기 때문이다. OB가 제주경기에서 2승을 건져도 삼성이 롯데에 2게임 모두 져주면 만사는 끝이었다. OB는 삼성이 최소한 1게임 만이라도 잡아주길 간절히 바랬다. 그러나 김영덕 감독 입장에서 보면 어림없는 소리였다. 김감독은 그만큼 OB를 싫어했다.
OB와는 안팎으로 악연이 많았다. 이런 팀을 파트너로 선택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또 롯데는 최동원을 빼면 모든 면에서 삼성에 뒤졌다. 후기리그에서 우승한 것은 롯데의 힘이 아니었다. 기적이었다. 나는 중위권만 들어도 다행이라고 생각했었다.
ㅡ 당시 언론에 밝힌 김영덕 감독의 인터뷰.

그 뿐만이 아니었다. OB에서 사퇴해 삼성으로 오면서 그 때문에 1984년 전기리그에서 양쪽 선수들이 사소한 문제로 주먹 다짐을 벌이는 일이 예사였다. 이러니 김영덕 감독 입장에서는 OB의 한국시리즈 진출을 결사적으로 막을 수밖에 없었다.

삼성의 김영덕 감독은 9월 22일 부산게임을 갖기 전 "고육지책으로 롯데를 택할 수밖에 없었다. OB와 한국시리즈에서 만나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 어떤 방법을 쓰던 롯데를 밀어주어 한국시리즈에 함께 가겠다"고 밝혀 여차하며 '져주기 게임'도 감행한다는 언질을 주었다. 그러나 져준 방법이 문제였다. 큰 점수 차로 이기다가 어거지로 패해[2] 많은 팬들의 분노를 샀다.

9월 24일자 동아일보 체육 면을 보면 "프로야구 오명의 ‘84"라는 제목으로 프로야구를 질타하는 기사가 가득 채워져 있다. 경향신문도 "야구냐 야바위냐"란 제목으로 절반 이상을 채우고 있다.

1984년 9월 23일 프로야구 후기리그 우승은 롯데에게 돌아갔다. 삼성을 등에 업은 롯데가 OB를 1게임 차로 따돌리고 정상에 올랐지만 찝찝한 기분은 버리지 못했다.

그리고 그렇게 선택된 롯데는 한국 시리즈에서 삼성을 4승3패로 물리치고 우승한다.

야구냐 야바위냐 연이틀 팬 우롱한 져주기 졸전(당시 기사 -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2.3. 1984년 이만수 타격왕 만들어주기 논란

1984년 삼성의 이만수는 홈런과 타점에서 1등을 질주하며 타격부분을 두고 롯데의 홍문종과 마지막까지 엎치락 뒤치락하며 트리플 크라운을 노렸다.

당시 제일동포 출신으로 한국프로에 뛰어든 롯데 홍문종은 간발의 차이로 이만수(.340)에 이어 타격 2위(.339)를 기록했다. 단 한 개의 안타면 순위가 뒤바뀔 상황이었지만, 삼성은 정정당당한 승부를 거부했다.

정규시즌 타격부분 1위를 결정짓는 9월 22일부터 23일까지의 롯데 vs 삼성 마지막 2연전. 야구 팬들은 여기서 세기의 대결이 펼쳐질 것으로 예상하였지만,

9연타석 고의사구라는 진기록이 탄생하였다. 기네스북에 오른 세계 신기록.

홍문종은 9월 22일 경기에서 5번의 고의사구를 당했으며, 이에 야유가 쏟아지는 등 분위기가 좋아지지 않자 23일 경기에서는 대놓고 포수가 일어서는 고의사구는 하지 않았지만 볼을 계속해서 밖으로 빼는, 사실상의 고의사구를 4번 했다. 이 작전에 따라 이만수는 덕아웃에서 가만히 앉아있기만 하면 됐다. 덕분에 홍문종은 삼성의 치밀한 작전 덕택에 10연타석 출루기록을 세웠다.

문제는 2차전에서 이 때문에 홍문종이 장효조의 출루율을 추월할 지경이 되었다는 점. 장효조의 출루율도 포기할 수 없었던 김영덕 감독은 결국 롯데에 져주는 대신 홍문종을 엔트리에서 빼자고 했고, 롯데가 이를 받아들임으로써 7회 수비에서 홍문종은 결국 교체되었고, 이만수와 장효조의 타이틀은 지켜질(?) 수 있었다.

이만수는 이 해 타격 3관왕을 차지했지만 결국 MVP를 수상하지 못하였다. 이만수는 당시를 회고하며 이렇게 밝히고 있다. “1984년만 해도 나는 팀의 막내였다. 감독의 명령을 따르는 것이 선수의 의무라고 생각했다. 지금 같으면 타격3관왕을 못하더라도 정정당당한 승부를 했을 것이다.”

역사는 돌고 도는 것인지, 이 때의 수혜자 중 한 명이었던 장효조는 1991년 시즌에서 역시 고의사구로 1리 차이로 타격왕을 빼앗겼다.[3] 그리고 이것과 거의 똑같은 장면이 25년후 2009년 박용택 - 홍성흔의 타격왕 다툼에서 똑같이 재현된다. 참고로 세 명의 2위가 전부 롯데소속이었다.

2.4. 1986년 한국시리즈 버스 방화사건

해태 버스방화 사건 참조.

2.5. 1989년 빙그레-삼성 선수단 집단 난투극 및 관중 오물 투척 사건

1989년 8월 18일 대구구장에서 열린 빙그레-삼성전에서 빙그레가 10-1로 크게 앞서던 9회초, 삼성의 바뀐 투수 오명록이 던진 공이 빙그레 유승안의 몸쪽으로 날아들었다. 유승안은 빈볼로 판단해 달려나갔고 오명록은 로 유승안의 를 까 날렸다. 이에 양팀 선수들이 몰려나와 집단 난투극을 벌이며 경기장이 아수라장이 됐다.

경기를 관전하던 대구구장의 삼성 관중들은 그라운드에 빈병과 깡통 등 각종 오물을 투척했다.

삼성 VS 한화의 난투극 역사 항목 참고

2.6. 1990년 잠실구장 삼성-OB 집단 난투극

1990년 6월 5일 잠실(삼성-OB전)

집단 패싸움의 발단은 OB의 5번째 투수로 등판한 김진규가 7회초 삼성의 선두타자 강기웅에게 빈볼에 가까운 초구를 던지면서 시작됐다. 강기웅이 “무슨 놈의 야구를 이 따위로 하느냐”고 중얼대자 이를 들은 OB 포수 조범현이 "선배에게 무슨 말버릇이냐?"고 발끈했다. OB는 1주일쯤 전인 5월 31일 대구경기에서 3-20으로 삼성에게 대패한 뒤 이날 경기에서도 4-9로 끌려가고 있어 모두들 신경이 곤두서 있는 상태였다. 주심이 양측 선수들에게 즉시 '경고' 조치를 내렸지만, 곧이어 김진규가 던진 2구가 강기웅의 왼쪽 허벅지에 맞았다. 이에 분노한 강기웅이 배트를 움켜쥔 채 김진규에게 달려갔고 양 팀 벤치의 선수들이 벌떼처럼 몰려 나가 집단 난투극을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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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팀 선수들이 일제히 그라운드로 뛰쳐나와 10분간 치고받고 발길질을 하는 등 그라운드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이 난투극으로 삼성 투수 박용준은 이가 부러지고 얼굴이 찢어지는 등 크게 부상 당했고 싸움을 말리던 김동앙 주심도 갈비뼈가 부러져 각각 병원으로 후송됐다.

경기는 22분 가량 중단됐다. 삼성 선수들 가운데 강기웅을 비롯한 김종갑, 박정환이 퇴장을 당했고 OB에서는 김진규, 조범현, 김태형이 쫓겨났다. 그러나 이 패싸움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한국야구위원회는 상벌위원회를 소집, 싸움의 원인 제공자인 강기웅과 김진규에게는 10경기 출전 금지에 제재금 100만원, 싸움에 가담한 박정환, 김종갑 및 OB의 조범현, 김태형에게는 30만원씩 벌금을 물렸다. 여담이지만 강기웅과 조범현은 1년 뒤 같은 유니폼을 입었다.

2.7. 1996년 현대와 빈볼 시비

6월 2일 인천 현대 유니콘스와의 경기에서 빈볼 시비가 있었다. 당시 현대가 주말 3연전 중 앞선 두 경기를 이겼고, 이날 경기도 7대1로 리드하고 있었다. 그런데 삼성의 우완투수 이상훈이 6-7-8회 연속으로 현대 타자 3명을 상대로 몸에 맞는 공을 던졌다. 당시 이상훈은 전혀 사과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현대 타자들에게 '뭘봐, 불만있어?'란 투의 표정을 지어 현대 선수단의 심기를 건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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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9회초 현대의 마무리 투수 정명원이 등판하였는데,[4] 나오자마자 양준혁에게 빈볼성 공을 던졌다. 이때는 별일 없이 잠잠했는데, 이어 정명원은 이승엽의 옆구리를 맞췄다.[5] 이에 삼성 선수들은 마운드로 뛰어나왔고, 현대 선수들도 따라나와 5분간 40여 명 선수들이 주먹다짐을 벌였다. 주심이 정명원을 퇴장시켰지만 이승엽은 호흡곤란 증세로 한동안 그라운드에 쓰러져 있었다.

이후 6월 17일 프로야구 사상 처음으로 빈볼 시비로 따로 화해의 자리가 마련되었다. 양팀의 백인천 감독과 김재박 감독, 양팀 주장인 이종두김경기, 빈볼 시비의 당사자인 정명원과 이승엽과 양준혁이 만나 앙금을 풀었다.

2.8. 1997년 부정배트 의혹

1997년 5월 3, 4, 5일 3일간 대구구장에서 삼성과 LG3연전이 열렸는데… 문제는 점수였다. 3일간 삼성은 절정의 타격감을 보여주며 17개의 홈런을 포함해 49점을 내버렸다. 특히 5월 4일에는 LG를 27:5라는 말도 안 되는 스코어로 이겨버렸다. 이에 LG 포수 김동수는 우리 투수들의 공이 좋지는 않았지만 배트에 공이 맞는 소리가 다르다 주장했고, 천보성 당시 LG 감독이 삼성 타자들의 배트가 이상한 게 아니냐며 심판실을 찾아 항의하다 백인천 당시 삼성 감독과 부딪혀 논란이 커졌다. 이에 KBO는 현장에서 배트 두 자루를 수거해 목공소에 절단을 의뢰해 문제 없음을 확인했지만 뜬금없이 당시 쌍방울 레이더스의 감독이었던 김성근이 KBO에 공식적으로 이의를 제기하여 사태는 더욱 커져 배트 제작사인 미즈노, MLB사무국, 브라운대학 등에 배트를 보내 검사를 받게 했고 6월 중순이 되어서 이상없음이 밝혀졌다. 물론 각 구단들은 동일한 배트를 구하기 바빴고 천보성 감독도 배트가 마음에 들었던지 '배트에 이상이 있는 것 같다고 했지 압축 배트라고 한 적은 없다. 8개 구단이 다 쓰면 모를까 삼성만 이 배트를 사용하는 것은 부당하다'며 배트를 수소문했다. 천보성 감독의 항의를 모두 징징거림으로 치부할 수 없는 것이 당시 경기 전 심판이 타자들의 배트를 검사해 불도장을 찍게 하던 규정이 사문화되어 있던 상태였다. 이에 KBO는 규칙위원회를 소집해 KBO와 JBO(일본야구기구) 공인마크가 없는 배트는 사용할 수 없게 하여 기나긴 감정싸움은 끝........난 게 아니라 6월 중순 당시 박종환 KBO 총재가 구단주들과 골프모임을 갖던 중 구본무 LG구단주와 이 사건으로 인해 부딪힘이 있었고, 98시즌 전 옷을 벗었다. 한편 2011년엔 기아 안치홍이 NPB 공인마크가 찍혀있던 배트를 써도 되냐 문의했다 안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는데, 이 규정도 은근슬쩍 바뀐 모양.

그런데 이 사건이 상관도 없었던 쌍방울 당시 감독 김성근이 사주한 것으로 보인다는 설이 기사를 통해 제기되었다. 압축배트인지 확인해달라는 공문은 LG측이 아닌 쌍방울 레이더스에서 나온 것으로 보아 거의 그런것 같다.#

여담으로 이런 의혹이 나올 정도 97년 삼성의 빠따는 미쳐있었다. 하지만 이런 빠따에도 불구하고 투수진이 빈약해서 우승에 다가가지 못했고, 결국 여러 투수를 영입하기 시작했다.

2.9. 2010년 한국시리즈 내야 라이트 소등 사건

SK가 4연승으로 우승 직후, SK 와이번스 선수단들이 김성근 감독을 행가레 하는 도중 불이 꺼져버렸다. SK 구단과 기자들은 잔치상을 엎어버린 느낌이라고 삼성 구단과 구장 관계자를 깠다.

2.10. 2011년 대구구장 정전 사건

아 이 망할 야구장!
강명구

파일:external/image.pressian.com/60110417163035.jpg
여기는 불꺼진 대구구장입니다

2011년 4월 16일 두산vs삼성의 경기 도중 7시 25분 경에 정전이 되면서 모든 전등이 나가버렸다. 60년된 구장의 위엄 아 이 망할 야구장!

두산이 3:2로 앞서 있던 8회 초에 정수빈이 번트를 대고 1루로 향하던 순간 불이 꺼진 것. 사실 정수빈의 타구는 타이밍상 거의 내야안타성이었는데, 갑작스런 정전으로 판정이 불가능해진 탓에 안타 하나를 잃게 되었다.

이후 일부 조명탑과 전광판은 복구되었지만 좌익수 쪽 조명탑은 불이 켜지지 않아 결국 심판진의 합의 끝에 서스펜디드 게임이 선언되었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삼성의 새 홈구장 건설은 더욱 가속화 될 것으로 보인다.

이 경기 덕에 시에서 10년 가까이[6] 외면했던 대구시가 다시 시민운동장 문제점을 보게 되었고, 새 야구장축구장[7]이 지어질 명분을 제공하여 시설 개선이 되었다.

2.11. 2011년 전광판 화재사건

2011년 8월 12일, 삼성 라이온즈의 수호신이자 국가대표 소방관 오승환이 세계 최연소, 최단경기 200세이브 기록을 세우는 역사적인 사건이 있었다. 구장에서는 오승환의 이러한 세계기록 달성을 축하하기 위해 전광판에 대형 현수막을 폈고 그 전광판 주위에서는 화려한 불꽃놀이가 펼쳐졌다.
그렇게 선수와 관중들 모두가 불꽃쇼를 관람하고 오승환이 본격적으로 SBS중계진과 인터뷰를 하는데 순간 카메라에 전광판 정면 좌측 윗 부분에서 미칠듯한 불꽃이 치솟았고 불은 걷잡을 수 없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8] 인터뷰 도중에 오승환도 신경이 쓰였는지 계속 뒤를 돌아봤고, 결국 경기장안에 진짜 소방관들과 소방차가 출동해서 물을 뿌리기 시작, 화재는 겨우 진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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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데없이 출동한 소방차를 보고, 일부 팬들은 오승환의 200세이브 달성을 축하하기 위한 세레머니인 줄 알았다는 후문이... 그러나 실제상황

최훈카툰#, 불암콩콩코믹스#, 2011 한국프로야구만화 팬북 삼성라이온즈 등등 수많은 카툰과 삼갤 등의 야구 커뮤니티 사이트에서는 오승환의 세이브와 함께 소방차 세이브 드립(...)이 나왔다. 세계 최초 한 경기 2세이브#

2.12. 2015년 경기장 소등 사건

616 대첩 참고. 경기가 끝나고 관중, 선수들이 다 빠지지도 않았고, 두산 수훈선수 인터뷰를 방송사에서 진행하는 도중에 불을 꺼버렸다.

3. 선수 관련

3.1. 2001년 갈베스 잠적 사건

2001년 8월 중순 외국인투수 발비노 갈베스가 모친의 병환으로 출국했다. 그러나 복귀 예정일이 되었는데도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처음에 갈베스는 '위독한 모친을 고국에서 미국으로 옮기는데 절차가 복잡해 시간이 많이 걸린다'고 얘기했지만 나중에는 '개인적으로 피로가 누적된 것도 있고 어깨도 안 좋아서 다시 몸 만드는데 시간이 걸린다' 등의 핑계만 대면서 소속팀 복귀를 미뤘다. 구단에서는 통역직원을 현지에도 보냈는데도 돌아오지 않았다.

갈베스의 복귀가 늦어지자 어깨 부상으로 치료차 늦는다는 구단측의 공식 발표에도 불구하고 '포스트시즌 옵션을 두고 구단과 마찰이 있어 안 오는 것'이라는 그럴듯한 추측 외에 '같은 팀의 외국인 선수 카를로스 바에르가가 무서워서 안 오는 것이다'라는 이상한 추측도 돌았다[9].

갈베스는 7번이나 소속팀 복귀를 미루다가 결국 김재하 당시 삼성 단장이 직접 찾아가서 데리고 왔다.(…) 1달 반만의 복귀.

관련 기사

3.2. 2002년 진갑용 약물복용 사건

진갑용 참고

3.3. 2003년 임창용 간통사건

2002년 겨울 부인과 이혼한 임창용은 2003년 5월 4일 대구 북부경찰서에 간통 혐의로 피소되면서 부적절했던 사생활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커다란 충격을 줬다. 이로 인해 삼성 라이온즈는 2003년 5월 9일 간통 피소와 이혼파동 등으로 구단의 이미지를 실추시킨 투수 임창용에 대해 벌금 380만원을 물렸다. 이 날 당사자의 합의 하에 고소가 취하되었던 점을 감안한 벌이라 삼성 구단은 설명했다. 그러나 당시 조치는 2003년 4월 폭행사건에 휘말린 투수 김진우를 1군 엔트리에서 제외했던 기아의 엄중징계와 대조적이라는 평가를 받았고, 결국 KBO에서는 5월 14일 상벌위원회를 열어 추가 징계를 논의했다.

그러나 정작 심판을 우롱했다는 이유로 현대 용병 마이크 프랭클린은 벌금 300만원과 5경기 정지 판정을 받은 반면 임창용의 경우 아무런 추가 징계 없이 단순히 추후 처벌 규정을 보완한다는 이야기만 한채 위원회는 마무리지었다.

관련기사
삼성 라이온즈 자체 징계
KBO 추가 징계 논의
상벌위원회 결과

3.4. 2008년 선수단 도박 사건

2008년 프로야구 도박 사건, 채태인 참고

3.5. 2010년 강봉규 퇴장사건

2010년 3월 31일 등 발생.

2010시즌 KBO는 경기시간을 단축시키는 방안으로 스트라이크존을 확대하여 공격적인 야구를 유도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충분한 준비기간없이 중요한 규칙을 변경하다보니 심판과 선수들 모두 혼란에 빠져 오심과 그에 따른 항의가 속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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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건으로 인해 온라인 오프라인 상으로 큰 반향이 있었는데 온라인 상으로는 일부 야구팬들 사이에서 일부 심판이 기아 타이거즈에 유리한 편파 판정을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오프라인상으로는 이와 같은 사례가 속출하자 KBO는 2010시즌 후반기 스트라이크존 확대를 철회하고 이전의 스트라이크존을 쓰기로 결정, 발표하지는 않고 각 구단들에 공문을 보냈다.

3.6. 2014년 정형식 음주운전 사고

2014년 8월 18일 음주운전이 적발되었다. 그리하여 다음달인 9월 4일 도로교통법 위반으로 입건되었다. 음주운전이 적발됐을 당시에는 2군에 있었는데, 정형식은 이러한 사실을 숨겼고 9월 2일 1군에 올라왔다. 음주운전에 적발된 사실을 숨긴 것에 대한 괘씸죄가 적용돼 같은 날 임의탈퇴 조치되었다. 참고로 삼성 프런트는 2011년 신인 김 모 선수가 음주운전에 적발되어 바로 임의탈퇴를 시킨 전적이 있다.

3.7. 2015년 삼성 라이온즈 원정 도박 사건

2010년 이 후 삼성에 닥친 가장 큰 악재. 이 사건은 단순히 선수 몇명이 도박한 것을 넘어 모 기업이 야구단에 지원을 끊고 해외에 스포츠단을 통째로 매각할 수 있는 "직접적인 명분"을 제공했다. 그리고 2년 후에... 자세한건 항목 참고.

3.8. 2016년 안지만 도박사이트 개설 연루혐의 사건

2016년 7월 20일 안지만이 도박사이트 개설 연루혐의로 검찰 조사를 받았다는 기사가 나와 팬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이미 안지만은 원정도박에 연루되어 물의를 빚고 징계도 어정쩡하게 넘겨 팬들의 여론이 안 좋은 상황에서 선수들의 승부조작 사건과 연타로 터져 만약 사실로 판명되면 야구판을 떠나야 할지 모른다.

21일 오후 해외 원정도박과 국내 인터넷 도박을 한 혐의(상습도박)로 안지만을 불구속 입건해 기소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했다.

그리고 삼성 구단은 안지만과의 계약을 해지했다.#

3.9. 2017년 최경철 도핑 사건

기사

4월 6일 한국도핑방지위원회(KADA)에서 최경철이 2월 스프링캠프에서 실시한 도핑 검사를 통과하지 못했다.

4. 팬 관련

4.1. 1982년 OB전 관중 난동 및 오물 투척 사건 (김영덕 OB 감독 부상)

프로야구 원년인 1982년 당시 재능있는 선수들을 대거 영입하여 강력한 선수층은 구축한 삼성 라이온즈 야구단은 전기리그 우승을 놓고 OB 베어스와 치열한 순위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전기리그 순위 싸움의 열기가 한창 고조되던 5월 22일과 23일 양 팀은 대구구장에서 맞대결을 펼치게 되었다. 그러나 원정팀인 OB 베어스가 2연전을 모두 승리하며 전기리그 우승에 절대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게 된다. 이미 경기가 진행되는 동안에도 빈 술병과 빈깡통을 운동장에 투척하던 삼성 팬들은 리그 우승을 놓고 벌어진 홈2연전이 연패로 끝나며 우승 실패가 확실시되자 흥분하여 소주병 등 빈병과 빈깡통을 운동장에 투척하며 난동을 벌였다. 이 때 관중들이 던진 빈병 중 하나가 정통으로 김영덕 OB 베어스 감독의 머리에 맞아 부상을 입는 불상사가 발생했다. 관중들의 소요로 인해 이긴 OB 선수단이나 진 삼성 선수단 모두 경기장을 빠져 나가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전경이 출동하여 관중을 통제하고 선수단을 안전 귀가시켰다. 참고로 프로야구가 출범한 후 야구장에 전경이 출동한 것은 이것이 최초의 일이었다. #

경기가 끝나고도 삼성 팬들은 분을 삭이지 못했고 다음날 날이 밝자 "구단을 해체하라"는 삼성 팬들의 항의 전화로 삼성 구단은 업무가 마비될 지경에 이르렀다.

4.2. 1982년 OB전 관중 난동 사건 (대구구장 시설 및 OB 구단 버스 파손)

1982년 전기리그는 결국 OB 베어스의 우승으로 막을 내렸고, 삼성 라이온즈는 준우승에 그치고 말았다. 이어 후기리그가 시작된지 얼마되지 않은 8월 12일 대구구장에서 삼성과 OB의 경기가 열렸다. 전날 경기에서 롯데에 패하여 심기 불편했던 삼성 관중들은 이날도 경기가 기울어 7:4로 삼성의 패색이 짙어진 채 9회말 2아웃 상황에 이르자 흥분하여 돌과 병을 경기장으로 마구 던지기 시작했다. 이에 경기가 중단되었고, 자제해달라는 안내방송이 나왔지만 관중들은 계속 병을 던졌다.

주심은 관중이 경기 속행을 방해하는 행동을 할 경우 홈팀에게 패배를 선언할 수 있도록 한 규정에 근거하여 마지막 한 타석 남은 경기를 속행시켜 삼성 타자에게 고의 삼진을 선언하고 경기를 종료하고 말았다. 이에 삼성 관중들은 더욱 흥분했다. 경기가 끝난 후에도 관중들은 분을 삭이지 못하고 대구구장 시설과 사무실 기물을 파괴했으며, OB 구단 버스로 달려가 유리창을 부수는 등 구단 버스를 파손했다.

OB 구단은 조범현 등 세 명의 선수가 부상을 당했고, OB 구단 버스가 파괴되어 기차를 이용하여 대전으로 이동해야 했다.

삼성 선수단은 관중들이 "대구의 체면을 실추시켰다"고 흥분하며 난동을 일으킨 탓에 2시간여나 운동장을 빠져나오지 못했다.

OB 구단은 KBO가 특단의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남은 대구구장에서의 경기를 거부하겠다는 강경입장를 밝혔다.

KBO는 대구구장 관중 난동 및 9회말 2사후 고의삼진을 준 심판의 경기운영 미숙 문제를 놓고 대책회의를 가지기로 했다. #

4.3. 1984년 OB전 오물 투척 사건 (OB 구천서 부상)

5월 14일 대구구장에서 열린 삼성-OB전에서 OB 구천서가 대구구장에서 관중이 던진 소주병 빈병에 머리를 얻어맞아 부상을 당했다. #

0-2로 뒤지고 있던 OB가 6회 말 1사 2, 3루 때 김경문의 3루 견제구를 3루수 양세종이 주자 천보성의 머리에 태그, 시비가 일어난 것이 빌미가 됐다. OB의 7회 초 공격을 앞두고 덕아웃 앞에 선수들이 모여 있는 사이, 흥분한 관중들이 각종 오물을 투척했고, 결국 구천서가 소주병에 맞았다. 구천서는 유리 파편에 코 부위가 찢기고 이마가 부어오르는 부상을 당했다.

이에 김성근 OB 감독은 심판에게 ‘몰수게임’을 요구하며 경기 속행 거부했다. 그 바람에 경기가 1시간 24분이나 중단됐다. 사고 보고를 받은 서종철 KBO 총재가 “OB가 경기속행에 불응하면 게임을 몰수하고, 관중 소란이 또 일어나면 삼성에 몰수게임 패를 선언하라”고 지시하여 사태를 겨우 수습했다.

4.4. 1986년 해태 타이거즈 구단 버스 방화 사건

1986년 10월 22일 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에서 열린 해태 타이거즈삼성 라이온즈의 한국시리즈 3차전에서 삼성이 선제점을 뽑고도 5-6으로 역전패하자 흥분한 관중들이 야구장에 오물을 투척하는 등 갖은 난동을 부린 끝에 급기야는 해태 타이거즈 구단 버스를 파손한 뒤 불을 지른 사건.

1990년 잠실구장 집단 난동 사건과 더불어 프로야구 사상 최악의 관중 폭력 사건으로 꼽힌다.

해태 구단 버스 방화 사건 문서 참조.

4.5. 1986년 한국시리즈 4차전 관중 난동 사건

프로야구 사상 최악의 관중 난동 사건인 해태 구단 버스 방화 사건은 국민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정치계와 언론에서는 다음날 예정된 대구에서의 한국시리즈 4차전을 취소하고 서울에서 4차전을 치르라는 주장이 거셌다. 그러나 4차전을 서울에서 치를 경우 향후 프로야구 존립에 큰 위기를 초래할 수 있다고 판단한 KBO 수뇌부는 대구시와 대구 경찰당국의 협조를 구해 대구에서의 4차전을 강행했다.

4차전은 무려 500여명의 전경이 동원된 삼엄한 경비 속에서 진행되었다. 경찰은 관중들의 소지품을 엄격하게 검사했다. 관중석 곳곳에는 사복 경찰이 배치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삼엄한 경비에도 불구하고 4차전에서 삼성이 또다시 패하자 성난 관중들이 또다시 난동을 일으켰다. 1만2천명의 입장 관객 중에서 약3000여명의 관중들은 난동에 참여했다. 경기가 끝나자 관중들은 양팀 선수단에게 오물을 투척했다. 양팀 선수단은 덕아웃에서 추위에 떨며 11시반까지 갇혀 있어야만 했다.

500명의 전경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늘 경기를 취소하라"고 외치는 관중들의 난동이 30여분째 지속되자 경찰은 최루탄을 발사하여 강제 해산에 나섰다. 그러나 관중들의 난동은 한시간 가까이 더 지속되고야 완전히 해산되었다.

그러나 관중들의 상당수는 최루탄은 피해 태평로로 나왔지만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돌과 병을 던지며 경찰이 최루탄을 던진 것에 대해 항의했다.

경찰은 현장에서 난동을 부린 5명을 연행하여 조사했다. #

4.6. 1988년 플레이오프 3차전 관중 난동 사건

삼성 라이온즈가 플레이오프 3차전에서 빙그레에 3연패를 당하며 무기력하게 탈락하자 흥분한 대구 관중들이 난동을 일으켰다.

이날 패배로 삼성은 해태 구단 버스 방화 사건으로 유명한 1986년 한국시리즈 3차전 이후 포스트시즌에서 내리 10연패를 당하는 진기록을 수립했다. 86년 해태와의 한국시리즈 3연패, 87년 해태와의 한국시리즈 4연패에 이어 88년 플레이오프에서 빙그레에 3연패를 당하여 포스트시즌 10연패를 이어가며 삼성이 큰 경기에 약하다는 이미지를 더욱 고착시켰다.

경기가 기운 9회말 2아웃 후 관중석에서 대형 플라스틱 휴지통 10여개를 비롯해 각종 유리병, 깡통, 음료수 박스 등의 오물이 장내로 투척되어 그라운드가 난장판이 되었다. 경기 종료 후 흥분한 관중들은 대구시민운동장 정문 앞에 설치되어 있는 대형 호돌이 아치를 파손하여 쓰러뜨리기 직전의 상태로 만드는 등 폭력사태를 저질렀다. 결국 경찰이 사과탄을 발사하고 나서야 뿔뿔이 흩어졌다. #

4.7. 1989년 대구구장 관중 난동 사건

1989년 7월 20일 대구구장에서 열린 삼성-빙그레전에서 삼성이 7대3으로 패하자 계속된 연패에 분노한 삼성 홈 관중들이 최근의 부진에 거세게 항의하며 그라운드에 난입하는 등 난동을 일으켰다. #

4.8. 1989년 빙그레-삼성 선수단 집단 난투극 및 관중 오물 투척 사건

1989년 8월 18일 대구구장에서 빙그레-삼성전이 열렸다. 빙그레가 10-1로 크게 앞서던 9회초. 삼성의 바뀐 투수 오명록이 던진 공이 빙그레 유승안의 몸쪽으로 날아들었다. 유승안은 빈볼로 판단해 달려나갔고 이에 오명록은 로 유승안의 를 까 날렸다. 결국 양팀 선수들이 몰려나와 집단 난투극을 벌이며 경기장은 아수라장이 됐다.

삼성 오명록의 위협구로 인해 유발된 사태였음에도 불구하고 대구구장의 삼성 관중들은 그라운드에 빈병과 깡통 등 각종 오물을 투척했다.

삼성 VS 한화의 난투극 역사 항목 참고.

4.9. 1990년 해태전 관중 난동, 자동차 타이어 펑크

1990년 4월 17일 대구구장에서 열린 삼성라이온즈와 해태타이거즈와의 경기에서 하오 9시 30분께 삼성이 패하자 흥분한 관중들이 난동을 부려 대구구장 주변에 세워둔 40여대의 차량이 났고 야구장 주변 공중전화박스 유리창 5장이 깨졌다. #

4.10. 1990년 태평양전 오물 투척 사건

1990년 4월 23일 대구구장에서 열린 태평양-삼성 전에서 연장전까지 이어진 10회초 태평양의 무사만루 기회에서 대타로 들어선 태평양의 원원근이 만루홈런을 날리자 삼성을 응원하던 2000여명의 대구 관중들이 일제히 일어나 빈병과 깡통 등 오물 300여개를 투척하여 경기가 중단되는 불상사가 발생했다.

4.11. 1990년 OB전 관중 난동

1990년 4월 27일 대구구장에서 열린 삼성과 OB와의 경기에서 삼성이 두산에게 역전패당하자 1.3루관중석에 있던 2천여명의 극렬팬들이 "삼성구단은 반성하라"는 등의 구호와 욕설을 하며 대형쓰레기통 20여개와 깡통 등 2백여개를 운동장내에 마구 던져 20여분간 소란을 피웠다. #

4.12. 1990년 김종석 새총 저격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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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5월 16일(수요일) 대구구장에서 열린 롯데-삼성전에서 삼성의 한 관중이 롯데 투수 김종석의 이마를 새총으로 저격한 사건이 발생했다.

롯데가 6-5로 앞선 상황에서 삼성의 마지막 공격인 9회말 무사 1루 상황에서 롯데 투수 김종석이 삼성 이현택을 상대로 볼카운트 2-2에서 공을 던지려는 순간 어디선가 10원짜리 동전이 날아와 김종석의 이미를 강타했다. 김종석은 바닥에 주저 앉았고 롯데 덕아웃에서 곽기수 트레이너가 황급하게 달려 나가 김종석의 이마부위를 살폈다. 김종석이 넘어진 자리 부근에서 10원짜리 동전이 발견되었다. 이로 인해 경기가 중단되었고 결국 롯데 김진영 감독은 안창완으로 투수를 교체했다. #

4.13. 1990년 이만수 깡통투척 사건 (관중석 방화 및 의자 700여석 파손)

1990년 5월 29일 대구구장, 삼성이 해태에 연이어 패해 대구 관중들의 심기가 몹시 안 좋았다. 특히 이 날 경기에서도 일방적으로 끌려다니자 관중들은 해태가 득점할 때마다 깡통을 던지며 야유를 했다. 그러던 중 이만수가 병살타를 치자 분노한 한 대구 관중이 이만수가 돌아서는데 빈 깡통을 던져 이만수의 등에 맞췄다. 분노한 이만수가 그 빈 깡통을 도로 관중석으로 던지자,[10] 흥분한 관중들이 난동이 일어났다. 당시 대구 관중들은 액체가 가득한 술병 등 각종 이물질을 그라운드에 투척했는데, 이중에는 경기장에 비치된 대형 쓰레기통 20여 개가 포함되어 있었다. 당시 이만수의 증언에 따르면 자기가 맥주 캔을 도로 던지자 관중들이 자기들 주변에 있는 모든 것들을 다 집어던졌다고 ... 또 관중들은 경기장 10여군데에서 쓰레기를 모아 불을 지르기도 했다. 이때문에 경기가 20여분 중단되었다. #

경기가 끝난 후에 정동진 감독이 이만수와 함께 그라운드로 나와 관중들에게 사과했다.

그러나 경기가 끝난 뒤에도 300여 명은 스탠드에 남아 관중석 의자 700여 석을 파손해 불태우면서 오물을 투척했다. 난동이 계속되자 경찰병력 1백여 명이 경기장내에 들어와 1.3루 관중석을 향해 최루탄 20여발을 쏴 강제 해산시켰다.

다음날 이만수는 관중의 난동을 일으킨 행동에 책임을 물어 구단 차원에서 무기한 출전 정지[11]와 벌금 100만원의 중징계를 받았다.

이만수는 후에 무릎팍도사에 출연하여 당시 얘기를 회상하며 당시 그 사건으로 공개사과를 하고 톱 뉴스에도 나온 사연을 전하며 "사건 이후, 사람들이 보는 눈초리가 다르다. 무식한 놈으로 보더라. 또 그날은 큰 아이가 담임 선생님과 함께 구경 온 날이기도 했다. 그 날 아이가 날 보지도 않더라. 상처를 준 것이다. 후회한다."고 고백했다.

이 사건의 여파로 체육부는 김용균(金容鈞) 차관 주재로 프로종목관계자를 불러 대책회의를 열어 '경기장폭력 대책'을 마련할 것을 엄중 지시했고, 관중 난동 등 폭력 사태에 대해 '강력대처방침'을 밝혔다.

4.14. 1992년 빙그레전 관중 난동 사건 (방화 및 기물 파손)

1992년 5월 15일 대구구장에서 열린 빙그레와의 더블헤더 2차전에서 홈팀 삼성이 두 경기 모두 역전패하자 흥분한 1000여명의 관중들이 대형휴지통 10여개를 그라운드에 투척하고 40여개의 의자를 부수고 관중석에 불을 지르는 난동을 부렸다. #

4.15. 1992년 김성근 퇴진 시위

1991시즌 김성근 감독이 취임했다. 그러나 김성근의 번트와 수비 위주의 스몰볼 야구는 대구 팬들의 정서와 맞지 않았고, 팀 성적 하락 등이 겹치며 시즌 종료 후 1년만에 김성근 감독 경질설이 대대적으로 언론에 보도되었다. 그러나 언론의 예상과 달리 삼성 구단은 이듬해인 1992시즌에도 김성근을 유임했다. 그러자 삼성 팬들은 김성근 퇴진을 위한 집단 행동에 들어갔다. 김성근 퇴진 시위는 1992시즌 내내 이어졌는데 야구장 안팍에서 "김성근은 물러가라"고 외치는 농성은 기본이고, 구단 버스를 가로 막거나 아예 버스를 점거하며 농성을 벌인 적도 수차례 있었다. 그러나 과거처럼 타구단 버스를 불태우는 불상사는 벌어지지 않았다.

4.16. 1996년 관중 난동 사건

1996년 4월 16일 대구에서 열린 해태-삼성전에서 해태 이건열의 타구에 대해 심판이 홈런 판정을 내리자 삼성 백인천 감독이 펜스를 맞고 운동장 안으로 들어왔다고 항의했다. 이에 관중들도 깡통과 빈병 등을 그라운드로 투척하며 난동을 벌였다. 이에 경기가 10여분간 중단되었다. #

4.17. 1997년 관중 난동 사건

1997년 8월 26일 대구구장에서 열린 현대-삼성의 시즌 14차전에서 현대가 19-4로 무려 15점이나 앞서 있던 8회 말에 4번째 투수 안병원이 삼성 타자 이승엽을 고의 볼넷으로 거르자 대구 관중들이 물병이나 깡통, 휴지 뭉치 따위를 가리지 않고 그라운드로 마구 집어던졌다. #

4.18. 1998년 플레이오프 관중 난동 사건

1998년 10월 15일 열린 LG와 삼성의 플레이오프 1차전에서 1만3천석의 대구야구장을 가득 메운 관중들은 삼성이 3대 5로 뒤진 9회초에 2점 홈런을 맞아 패색이 짙어지자 물병과 쓰레기통을 던지는 등 난동을 피워 경기가 30여분간 중단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

4.19. 1999년 플레이오프 대구 관중 난동 사건 (호세 퇴장사건)

4.19.1. 경기 중 난동 - 호세 퇴장 사건

1999년 10월 20일 대구구장에서 열린 롯데 자이언츠 VS 삼성 라이온즈 플레이오프 7차전에서 삼성이 2:0으로 앞서나가고 있던 6회초 롯데 펠릭스 호세가 홈런을 치자 흥분한 다수의 삼성 관중들이 컵라면을 비롯한 여러 가지 이물질을 그라운드로 마구 투척했다. 이중 계란이 날아와 호세의 고간(…)을 맞추었고 라면용기에 담겨있던 국물이 호세의 머리에 맞았다고 한다.
그래도 롯데측 코칭스태프가 말려서 호세 선수가 참고 들어가려는데, 관중들이 상황파악을 못하고 거기에다가 또 쓰레기를 투척했다. 이에 열받은 호세는 야구방망이를 관중석으로 대구관중들에게 던졌다. 그러자 관중 난동은 겉잡을 수 없이 과열되었다. 호세의 방망이 투척 후 약 20여분 동안 각종 이물질 투척이 계속되며 그라운드 주변은 온갖 쓰레기와 오물로 뒤덮였다.

일부 삼성 관중들은 롯데 원정 관중들에게 폭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삼성 팬들은 1000여 명의 롯데 응원단을 에워싼 가운데 물병 등을 날리며 롯데팬들을 위협했다. 이에 롯데팬들도 물병 등을 날리며 대응하였고, 이어 관중들간의 난투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관중들의 싸움이 확대되려던 찰라 경찰 1개 중대가 급히 스탠드에 추가 투입되면서 가까스로 난동을 방지했다.

당시 대구구장에는 경기 과열을 우려하여 경찰 병력 2개 중대가 배치돼 있었지만 대구 관중들 전체가 거의 집단 광기에 가까운 모습을 보였기 때문에 경찰 병력도 속수 무책이었다.

경기가 중단된 상황에서 6명의 심판원들이 긴급 회동, 6심 합의 끝에 임채섭 주심은 오후 8시 8분 호세에게 퇴장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박정태를 비롯한 롯데 선수단은 “원인 제공을 한 관중들이나 관리책임이 있는 홈팀 삼성에는 아무런 제재도 하지 않고 우리 선수만 퇴장시킨 것은 균형에 어긋난다”며 “선수들의 안전이 위협받는 상황에서 경기를 할 수 없다”고 장비를 꾸려 퇴장했다. 그러자 1루 쪽 관중석에서는 퇴장하는 롯데 선수들을 향해서 다시 오물을 마구 던져댔다.

이후 김명성 롯데 감독이 "경기를 포기하는 것은 프로야구에 커다란 오점을 남기게 된다."면서 다음에 또 관중 폭력사태가 발생하면 심판에게 몰수게임을 강력하게 요청하겠다고 말하자 결국 롯데 선수들은 다시 경기장으로 돌아왔다. 롯데 선수들이 다시 돌아오자 심판진은 관중 난동이 지속되면 삼성의 몰수패를 선언하겠다고 공식 발표했고 그제야 1시간 여만에 관중들 난동은 진정되고 다시 경기가 재개되었다. 호세는 퇴장당했지만 이후 롯데는 연장전까지 가는 접전끝에 삼성을 쓰러뜨리고 한국 시리즈에 진출했다.[12]

4.19.2. 경기 종료 후 난동

연장 11회말에서 삼성이 6대 5로 삼성이 패하자 이후 더 큰 난동 상황이 발생했다. 10시 35분경 경기가 끝나자 대구 관중 1천여명이 1시간 30여분동안 경기장 안팎에 남아 퇴장하지 않고 극도의 난동을 벌였다. #

삼성의 패배에 격분한 3루측 삼성응원석 관중 1천여명은 경기가 끝난 후에도 40여분간 경기장에서 퇴장하지 않고, 운동장 안에 각종 오물을 던지기 시작했다. 흥분한 관중들은 물통과 맥주병, 대형 쓰레기통 등을 닥치는 대로 경기장 안으로 던져 넣었으며 심지어 관중석 의자를 뜯어 집어던졌다.

일부 관중은 삼성구단의 응원깃발에 불을 질러 오물과 함께 방송사 중계석 위 그물로 던져 아래에 있던 중계팀과 관중 3-4명이 난투극을 벌이기도 했다. 한편 롯데 선수단은 경기가 끝난 뒤 관중들의 소란이 계속되자 덕아웃에서 40여분간 퇴장을 못한채 대기하다 경찰의 호위를 받으며 후문쪽으로 빠져 나갔다.

40여분후 경기장 밖 주차장으로 몰려나간 관중 5백여명은 소란을 저지하던 전경 2개 중대간에 몸싸움을 벌였고, 5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2명이 경찰에 연행됐다.

이와 동시에 경기장 뒷문쪽에서는 관중 1백여명이 롯데의 원정 응원팀이 탄 부산지역 번호판이 달린 봉고차량을 에워싸고 유리창을 부수며 운행을 저지했다. 이 때문에 경기장 인근 주차장에 50여대의 차량을 주차한 부산, 경남지역 롯데 응원단들이 경기종료 1시간 30여분이 지난 21일 오전 0시까지 승용차를 타지 못한채 피신하는 등 불안과 공포에 떨었다. 또 정문쪽에서는 흥분한 일부 관중이 롯데 응원단의 깃발을 불태우기도 했다.

경기장 안팎에서 소란을 계속 피우던 관중들은 21일 0시 이후 경찰의 유도로 경기장 주위를 모두 떠났으나 술에 취한채 흥분이 가라앉지 않은 50여명의 관중들은 밤늦게까지 운동장 주변을 배회하며 소동을 부렸다. #

4.19.3. 사건 후

이날 사건은 근 10년만의 최악의 관중 폭력 사태로 기록되면서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 #

한국야구위원회(KBO)는 20일 대구구장에서 발생한 관중 폭력사태와 관련해 21일 오후 4시 야구회관에서 상벌위원회를 개최했다. 사태의 심각성을 감안해 중징계가 내려졌다. 롯데의 용병 펠릭스 호세에게 10경기 출장금지와 벌금 300만원을 부과했다. 또 선수들을 이끌고 경기를 거부하려 했던 롯데 주장 박정태에게는 벌금 50만원이 부과되었으며, 관중난동을 예방하지 못한 삼성구단에게는 벌금 100만원을 징계했다. #

호세의 방망이 투척이 과격한 것은 분명히 사실이었지만 쓰레기 던지고 욕하고 각종 폭력을 행사했던 관중들은 그 문제에 대해 전혀 할말이 없다.

연말 시상식에서 MVP를 차지한 이승엽은 소감을 발표하는 자리에서 플레이오프 7차전 때 대구 관중의 난동 사건과 관련해 "대구시민으로서 죄송하게 생각하며, 팬들도 우리 야구가 선진국으로 갈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사과 및 당부의 말을 전했다. #

4.20. 2003년 관중 난동 사건

2003년 9월 28일 대구구장에서 열린 SK와 삼성의 경기에서 9회말 이승엽이 볼넷으로 나가자 관중들이 경기장으로 물병을 던지는 등 난동을 부려 경기가 10여분 동안 중단됐다. # 이날 대구 관중들의 난동이 예상되어 경찰 병력 4개 중대가 배치된 상황이었다. #

4.21. 2010 플레이오프 관중 난입 사건

2010년 플레이오프 5차전이 끝나고 관중이 그라운드에 난입. #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융화되는 모습이 인상적, 사진에는 안 보이지만 한 명이 아니다. 선수단은 코치인 줄 알았다 카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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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입 후 승리를 자축하는 선동열 감독과 쿨하게 하이파이브를 나눴다. 사실 뭐 딱히 행패를 부린 건 아니고 그냥 경기장에 뜬금없이 난입해서 선수들과 기쁨을 같이 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이 삼리건 아저씨에게 쿨하게 미소를 보인 선동열은 쿨동열이라는 별명을 이 날 한정으로 받았다.

선동열은 갑자기 빨간 모자가 나타나서 당황했었다고 그 때를 회상했다.

대구에도 이런 사람들이 있었구나라고 놀란 사람들이 많았지만 원래 대구아재들은 마산아재들과도 어깨를 겨루던 무시무시하신 분들이다.(…) 2017년 현 시점에서 도원전사들이 보면 코웃음 치겠지만.[13]

4.22. 2011년 삼리건 난입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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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포즈[14]

2011년 6월 24일 넥센 히어로즈와의 홈경기 도중 어떤 삼리건이 좌익수 수비를 보던 최형우의 앞으로 나왔다. 그 삼리건은 무릎을 꿇고 공을 달라고 하였다. 그러다가 안전요원에 의해 끌려나갔다.

4.23. 2015년 삼리건 난입 사건



2015년 7월 4일 LG 트윈스와의 홈경기 도중 이지영이 2점 홈런을 쳤을 때, 박석민의 이름이 새겨진 유니폼을 입은 한 삼리건이 이지영이 친 홈런볼을 들고 홈까지 뛰어와 홈플레이트에 슬라이딩을 하고 안전요원에 의해 끌려나갔다. 이지영 의문의 쓰리런 이지영이 친 홈런볼이 관중석을 맞고 그라운드로 들어갔는데 상대팀에서 수비보던 좌익수 박용택이 홈런볼을 그냥 두어 관중이 주우러 간 것으로 보인다. 그 선수에 그 팬 이라더니 (짤에서도 보이다시피 박석민의 유니폼을 입고 있다.) # #

4.24. 2015년 포항 야구장 오물 투척 사건

MLBPARK 링크

2015년 8월 15일 광복절포항 야구장에서 한화 이글스와의 홈경기가 벌어졌다. 경기 종료 후 외야석에 있던 관객이 경기장 안으로 플라스틱 쓰레기통을 투척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당초에는 경기에서 패한 한화팬이 한 짓이 아니겠느냐는 글들이 커뮤니티에 올라오면서 한화팬에 대한 무차별적인 비난이 있었으나 추후 술에 취한 팬이 난동을 벌인 것으로 제보가 올라와 한화팬에 대한 비난은 사그라들었으며 포항구장의 안전관리 미흡이라는 문제를 거론하였다 . 관련글 링크 “포항구장 쓰레기통 던진 아재, 한화 팬 아닙니다” 사진 공개

이 사건은 올바른 상황판단없이 의심만으로 한화팬들에게 비난여론에 대해 문제를 단적으로 드러낸 사건이었다. 또한 야구장의 안전관리 미흡에 대한 문제를 상기시켰다. 이후 MLBPARK 에서는 광주-KIA 챔피언스 필드에서 이용규선수에 대한 물병투척 사건에 대해 인증샷을 요구하는 등 정확한 판단을 위한 자료를 얻길 원하며 원색적인 비난을 경계하였다. 포항구장 사건에 대해서도 신중한 태도를 취했어야 한다는 의견이다.

4.25. 2016년 포항 야구장 관중 난입 사건

관련 기사

2016년 5월 19일 삼성- 한화 경기 7회말 삼성공격에서 취객으로 보이는 포항아재 남성관중이 외야에 난입했다. 난입한 관중은 외야에서 현란한 춤사위를 선보이는 등 소동을 벌였지만 보안요원에 의해 퇴장되었다.

한편 중계를 맡았던 KBSN스포츠는 관중 난입부터 퇴장까지 상세히 중계하는것도 모자라 현란한 춤사위를 느린 그림슬로우모션 리플레이으로 보여주는 등 또다른 관중난입을 장려하는 듯한 스탠스를 취해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15]

4.26. 2016년 관중에 의한 최형우 타구 판정 번복 사건

관련 기사

2016년 6월 25일 삼성-kt 경기 3회말 2사 1루에서 최형우의 타구가 펜스까지 멀리 나가며 1타점 3루타를 때려났다. 그런데 이대형이 심판에게 사인을 보내 비디오로 다시 확인해보니 외야의 한 관중이 글러브로 공을 건드렸다가 그라운드로 떨어진 정황이 포착되었다. 1타점 3루타는 정정되어 인정 2루타가 되었고 공을 잡으려던 관중은 즉시 퇴장당했다.

4.27. 2016년 포항 야구장 오물 투척 사건

MLBPARK 링크

2016년 7월 14일 포항 야구장에서 롯데 자이언츠와의 홈경기에서 10회말, 발디리스가 1사 만루 찬스에서 병살타를 쳐버리고, 11회초, 안지만이 황재균에게 역전 투런을 허용하자 외야석에 있던 관객이 화난 나머지 경기장 안으로 플라스틱 쓰레기통을 투척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잘 보면 쓰레기통을 수거하는 도중 왼쪽에서 관객이 또 무언가를 던진다.

5. 구단 관련

5.1. 1983년 구단과 서영무 감독의 갈등

1982년 창단 첫해 막강한 전력에도 준우승에 그치자, 구단에서는 1982년 11월에는 미국 연수를 빌미로 임신근 코치를 해임하고 한큐 브레이브스에서 수비코치를 하고 있던 재일교포 이충남조감독이란 직책으로 영입했다. 일개 코치직으로 두기엔 워낙 유명하고 유능했기에 조감독이란 직책을 만들어 서영무 감독을 보좌하고자 함이었으나 실질적으로는 서영무 감독을 견제하면서 언젠가 자리에서 끌어내리려는 속셈이었다.

서영무 감독도 이에 맞서 이충남이 한큐에 있던 시절 팀 선배였던 김호중 서울고 감독을 투수코치로 영입했다. 어차피 이충남이 투수코치가 아니기에 투수코치가 필요하다는 게 그 명목.

시즌 초반 팀이 부진하자 구단에서 이런저런 간섭을 하면서 참다 못한 김호중이 그에 대해 일갈해, 구단에서는 성적 부진의 책임을 물어 시즌 시작 보름만에 김호중 해임시켰다. 그로부터 한 달 후에는 서영무 감독을 총감독이란 직책으로 승진시켜 그의 감독 권한을 뺏고, 이충남을 감독대행으로 승진시켜 실질적인 감독으로 기용했다.

5.2. 1984년 OB와의 악연

1984년 삼성과 OB의 사이는 최악이었다. OB와 김영덕 감독의 악연은 1983년 10월 성적부진과 박철순의 부상에 도의적인 책임을 지고 감독을 사퇴하면서 시작됐다. 김 감독은 사퇴 후 거취문제에 대해 "자신의 야구이론을 정리한 뒤 일본 유학"을 밝혔었다. 그러나 OB 감독을 사퇴한 11일 뒤에 삼성 감독으로 입단 계약을 마쳐 OB가 "배신자"라는 낙인을 찍었다[16].

OB 선수들도 김영덕 감독에게 서운한 감정을 갖고 있었기에 유독 1984년 전기리그에는 OB 선수들과 충돌이 잦았다.

4월 10일 OB와 첫 3연전 때 OB 선수들은 김영덕 감독을 보고도 본채 만채 했고 다음 날에도 OB 선수들은 김영덕 감독을 무시했다. 12일에야 OB 선수들이 김영덕 감독을 찾아와 인사했는데, 이번에는 김영덕 감독이 선수들의 인사를 무시했다. 그러자 OB 선수들은 그날 경기 내내 김영덕 감독을 험담하며 야유를 보냈다. OB의 감독이던 김성근 감독이 만류했지만 선수들은 도저히 듣지 않았다. 그러다 문제가 터졌으니, 선수 중 유독 배원영이 큰 소리로 김영덕 감독에게 야유를 보냈는데 배원영은 신인이라 김영덕 감독에 대해 서운한 감정이 있을 수가 없었다[17]. 경기 후 김성근 감독의 권유로 OB 선수들은 김영덕 감독을 찾아가 사죄를 구했지만, 김영덕 감독은 배원영의 뺨을 때리며 "니들이 그러고도 프로냐!"하며 도리어 야단을 쳤다. 주위에서 말리는 바람에 다행히 큰일 없이 거기서 일이 끝났다. 김성근 감독의 자서전에서는 이때 상당히 불쾌했었다고 한다. 김영덕은 김성근에게 재일교포 출신 선배였고 실업야구시절부터 인연이 있었고 바로 전년도인 1983년에는 감독과 코치였지만, 이때 완전히 돌아서게 됐다고 한다.

5월 2일 대전 OB와의 경기에서는 빈볼 사태가 벌어졌다. 1회초 OB의 계형철이 삼성의 김근석의 몸을 맞췄고, 삼성에서 항의를 했으나 심판의 제지로 큰일 없이 넘어갔다. 삼성이 11대4로 크게 앞서있던 8회말에 이번에는 삼성의 김일융이 던진 공에 조종규가 맞자 OB 선수들이 마운드를 향해 달려왔다. 삼성 선수들 역시 달려나가 난투극이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OB 선수들에게 얻어맞은 김근석은 심하게 다쳐 병원으로 후송되었고, 이 때문에 몇몇 OB 선수들은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는 불미스러운 일이 되고 말았다.

5월 12일 대구에서도 충돌이 있었다. 6회말 삼성의 공격 때 OB의 3루수 양세종이 포수 김경문의 견제 송구를 받아 3루 주자 천보성의 머리쪽으로 태그를 한 것. 삼성 선수들이 이에 흥분했으나 다행히 별 소동 없이 무마되었다. 그러나 흥분한 관중이 내던진 빈 병이 OB 1루수 구천서의 머리에 강타해 구천서의 이마가 찢어졌다.

6월 2일 대전에서 또 충돌이 있었다. 2회말 내야수 실책으로 출루한 OB의 이홍범이 타자 조범현의 번트 타구에 병살을 막기 위해, 2루로 달려오던 삼성의 유격수 오대석의 허벅지를 걷어찬 것. 이홍범은 5경기 출전 정지로 끝났지만 오대석은 커리어 내내 허벅지 부상에 시달렸다.

5.3. 1987년 김성길 편법 영입 논란

일본 한큐 브레이브스에서 활동하고 있던 재일교포 김성길을 영입하려고 1986년 국내 몇몇 팀이 영입 경쟁을 벌였고 결국 1987시즌 개막을 앞두고 삼성이 김성길을 영입하는데 성공했다.

그런데 당시 KBO 규정에 따르면 당해 2월 28일을 넘기면 군제대 선수와 트레이드된 선수 외에는 추가등록이 불가능했다. 따라서 규정대로라면 김성길은 1987시즌은 선수로 뛸 수 없었고, 1988시즌에야 선수로 등록될 수 있었다. 그런데 삼성에서는 김성길을 트레이드한 것으로 등록했고 KBO가 이것을 승인하자 논란이 발생했다.

당시 김성길 영입 경쟁에 나섰다가 실패한 해태 타이거즈 등이 이에 항의했다. 김성길이 한큐에서 임의탈퇴 처리된 상태인데다가 선수계약 양도협정서도 없기에 전혀 트레이드가 아니며, 따라서 김성길은 1987시즌에 선수등록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자 KBO는 관례상 선수계약동의서를 양도협정서로 간주할 수 있으며(?), 임의탈퇴 선수는 한국에는 규정이 없지만, 일본 규정에 따르면 해당 구단 소속 선수로 보기에 김성길 영입 트레이드에는 문제가 없다고 밝혔다.

5.4. 1993년 양준혁 편법 입단 파문

양준혁은 고교 시절 드래프트에서 쌍방울 레이더스의 2차 1순위 지명을 받았다. 그러나 양준혁은 쌍방울의 지명을 거부하고 군입대를 했고, 제대 후 쌍방울이 아닌 삼성 라이온즈에 입단하여 큰 파문이 일었다. 양준혁의 삼성 입단은 KBO의 신인 드래프트 제도 근간을 뒤흔던 역대급 사건이었다. 훗날 양준혁의 군복무 기간 동안 삼성은 양준혁에게 용돈 명목으로 매월 100만원이라는 거액을 지급한 사실도 밝혀지기도 했다.

결국 양준혁 사례와 같은 편법 입단을 막기 위해 KBO 신인선수 지명권 보유기간이 1년에서 3년으로 연장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양준혁 문서 참조.

5.5. 1995년 최창양 편법 입단 파문

1995년 12월 삼성이 최창양을 편법적으로 영입하면서 큰 파문이 일었다.

마산고와 중앙대 출신의 최창양은 위력적인 빠른 공으로 고교시절과 대학시절 큰 주목을 받았고 대학 졸업 후 연고 구단인 롯데 자이언츠에 지명될 것이 유력시되던 선수였다. 그런데 최창양은 중앙대 시절인 1994년말 돌연 미국 진출을 선언하고 필라델피아 필리스와 헐값에 계약하고 미국에 진출했다.

최창양은 국내에서는 유망주였지만 애초에 미국에 진출할 만큼 뛰어난 선수는 아니었다. 필라델피아와의 계약금은 불과 4만 달러(3167만원[18])로 120만 달러를 받은 박찬호의 1/30밖에 안되었고, 1년 후 삼성에서 받은 계약금 5억원의 1/15도 안되는 헐값이었다. 최창양은 1년간의 마이너리그 싱글A 시절을 거쳐 1년만 1995년 12월 국내로 유턴하여 삼성 라이온즈에 신인으로는 역대 최고액인 계약금 5억과 연봉 4천만원을 받으며 입단했다. 이와 별도로 삼성은 필라델피아에 1억 6천만원의 현금 트레이드 비를 지불했다.

그러자 삼성이 타구단 연고지 출신의 유망주를 가로채기 위해 미국에 진출시킨 후 복귀시켜 영입한 것이라는 의혹이 일며 파문이 일었다. 당시 스포츠신문과 주간지 등에서 이를 대대적으로 포도하며 큰 파장이 일었다.

논란이 발생한 후 최창양의 연고 구단인 롯데 자이언츠가 법정 대응을 시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에는 이런 사태를 생각지도 못했었기 때문에 관련된 규정 자체가 아예 KBO에 없었다. 때문에 최창양의 편법적인 영입을 제재할 수단은 전무했다. 결국 최창양 사태 직후 미지명된 해외진출 선수는 국내 복귀시 신인 지명 절차를 거쳐야 한다고 KBO 규정이 바뀌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자인 최창양은 이 규정의 적용을 받지 않았다.

삼성은 최창양을 영입하는데만 이적료를 포함해 총 7억 원을 들였을 뿐만 아니라, 입단 당시 이같은 편법 논란에 휩싸이면서 삼성 구단의 이미지까지 실추시키는 홍역을 치뤘지만, 최창양은 구속이 빠르지만 제구가 안되는 투수는 성공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입증하며 삼성 스카우트의 흑역사로 남고 말았다.

5.6. 장효조 트레이드 및 홀대 논란

장효조는 80년대 삼성 라이온즈의 간판 타자로, 삼성 라이온즈 선수 가운데 가장 최초로 레전드라 불릴만한 선수였다. 공교롭게도 그는 한국시리즈 때 자주 부진한 모습을 보였다. 이때문에 김시진과 더불어 삼성이 우승을 하지 못하는 원흉으로 꼽혔다. 게다가 장효조는 매시즌 연봉 협상 때마다 삼성 구단과 상당한 마찰을 일으켰다. 1988년 선수협 파동까지 일자 삼성은 팀의 레전드인 장효조와 김시진을 롯데의 최동원, 김용철과 맞트레이드한다.

장효조가 은퇴한 후에도 팀 레전드인 장효조에 대한 삼성 구단의 홀대와 외면은 이어졌다. 장효조는 삼성 구단에서 부름을 받지 못했고, 롯데 등에서 계속 코치 생활을 했다. 2000년 장효조가 삼성의 타격코치가 되었으나, 이는 장효조와 절친했던 김용희 감독이 장효조를 타격코치로 써야겠다고 강하게 주장했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김용희는 김응용을 영입하기 전 땜빵 감독이었기 때문에 장효조도 1년 쓰다가 버릴 계획으로 영입한 것에 불과했다. 실제로 2000시즌 후 김용희와 장효조는 같이 경질되었고, 삼성 구단은 김응용 사단으로 재편된다. 이후 삼성팬들은 팀 최초의 레전드인 장효조를 코칭스태프로 기용해달라고 끊임없이 구단에 목소리를 높였지만 구단은 10년간이나 그를 다시 코치로 기용하지 않으면서 이를 외면했다. 2000년대 전반 장효조는 부산 지역 신문에 야구해설위원으로 위촉된 것으로 겨우 야구와의 끈을 이어갈 수 있었다.

2004년 부산일보의 장효조 인터뷰가 나가며 당시 사실상 쉬고 있는 장효조의 근황이 알려진 후 여론의 따가운 시선을 의식한 삼성은 2005년 장효조를 스카우트로 영입했다. 그러나 삼성은 끝내 그를 코치로 기용하지는 않았다. 이에 대해 삼성은 언론 기자들에게 장효조가 워낙 성격이 모난 사람이기 때문에 코치로는 부적합하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스카우트 시절 장효조는 삼성 경기가 있을 때 마다 기자실에서 기자들에게 경기 해설을 하며 현장 복귀 의지를 나타내곤 했다. 심지어 장효조는 2008년경 한 신문 인터뷰에서 자신의 성격이 모나다는 구단의 지적을 의식해서인지, 최근 성격을 고치려고 많이 노력 중이라면서 다시 코칭 스태프로 기용될 실낫같은 가능성에 대한 의지를 엿보이기도 했다...

시간이 흘러 야구계의 문화가 각 팀의 레전드를 대우해주는 분위기로 흘러가자 삼성은 압박을 받았다. 삼성은 장효조 뿐만 아니라 다른 팀 레전드인 이만수, 김시진과도 껄끄로운 관계였다. 당시 삼성은 팀의 레전드로 류중일을 밀어주고 있었으나, 커리어가 커리어인지라 한계가 있었다. 최초의 팀 레전드인 장효조에 대한 처우에 대한 여론의 따가운 시선을 받던 삼성은 결국 2010년에야 장효조를 2군 코치로 기용했다. 그러나 불과 1년여 후에 장효조는 유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5.7. 이만수 홀대, 은퇴 강요 논란

1997년 이만수 선수가 40살까지 뛰고 싶다고 삼성구단에 요청했으나 삼성에서는 37살 때 미국 코치연수 보장을 조건으로 이만수 선수의 은퇴를 종용했다. 하지만 이만수 선수는 팬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다음해에도 선수로 뛰었다. 이때부터 삼성에서 미운 털이 박히기 시작했다.

결국 후보선수로 앉혀놓기만 하는 등 반강제로 은퇴를 종용하는 구단의 압박에 은퇴를 결심한 이만수는 유학에 관련된 일체의 경비도 지원받지 못하고 혼자서 미국행을 결심한다.

대한민국 최고의 인기 야구선수를 삼성에서는 영구결번은 커녕, 은퇴식 한 번 치르지 않고 이만수와 결별을 하였다.

이만수는 무릎팍 도사에 나와 당시를 회고하면서 “95년부터 벤치 생활을 하면서 젊은 세대와의 교체를 위해 구단에서 은퇴를 종용했다. 좋은 조건으로 미국에 공부하러 가라는 조건도 제시했다. 하지만 나는 나이 30만 넘으면 노장이 되고, 35이면 퇴물취급 받는 국내 야구계 풍토를 바꾸고 싶었다. 40이 되어도 야구를 할 수 있는 풍토로 바꾸기 위해 계속 (선수 생활을) 하다보니 구단과 마찰이 있었다."고 말했다.

이어 “벤치 생활을 하다 1997년 은퇴를 했다. 하지만 구단과 사전합의가 안 된 것이었다. 한 마디로 짤린 것이다. 나쁘게 말하면 방출, 좋게 말하면 명예퇴직이다.”고 밝혔다.

또 이만수는“너무 충격이 컸고 준비를 못한 상태였다. 한국에 있는 것이 창피하더라. 팬들 보기도 부끄럽고 16년간 한 팀이었던 구단에 서운함 감정도 있었다. 힘들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그는“정상에서 낭떠러지로 떨어진 기분을 견딜 수 없었고, 가족들도 상처를 받았다. 나도 오랜기간 구단생활을 했던 만큼 가족들을 불러 멋지게 은퇴식을 하고 싶었는데…. 결국 도망가다시피 미국을 갔다. 그런데 (미국생활이) 죽기보다 싫더라.”고 말했다.

송진우, 장종훈 등등 레전드를 대접하는 한화와 달리 삼성, 롯데, 해태 등등은 각각 이만수, 최동원, 김봉연 등등 자기 팀들의 레전드들을 홀대하는 일이 잦았다.[19]

물론 이만수의 성적이 이미 1군 기용이 어려울 정도로 하락세에 있었다는 반론도 존재하지만, 삼성 팬들에게 그런게 먹힐 리가….

여기서 끝이 아니다. 2003년 시즌을 마친 삼성 구단은 당시 시카고 화이트삭스 보조코치였던 이만수의 국내 복귀를 타진하였다. 미국 메이저리그에서 간신히 자리를 잡았던 이만수는, 주저없이 화이트삭스와의 재계약을 포기하고 삼성과 접촉하였으나, 삼성이 일방적으로 계약을 파기하는 바람에 오갈 데가 없어졌다.

이만수에게 다시 손을 내민 쪽은 화이트삭스. 계약관계에 냉정한 미국 사회에서는 이례적인 일이라고 한다. 이로서 이만수는 2007년까지 화이트삭스에 몸담으면서 2005년 월드시리즈 우승도 맛봤다.

한편 이만수는 자신의 홈페이지에 "이제는 삼성라이온즈에 대한 마음을 좋았던 추억으로 마음속에 접고 싶습니다. 프렌차이즈 스타이기 때문에 불러야 하고, 가야하는 그런 부담스러운 관계가 되어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삼성라이온즈가 한국프로야구를 선도할 진정한 명문구단이 되기를 먼곳에서 성원하는 것으로 제 마음을 표현합니다." 라며 삼성 구단에 대한 아쉬움을 에둘러 표현했다. 그리고 2010년 가을….

5.8. TV중계 뒷거래 의혹

2005시즌 당시 KBO리그를 중계하던 MBC스포츠플러스, KBSn스포츠, SBS스포츠 등에서 삼성 등 특정 구단의 프로야구 경기가 빈번하게 중계되던 반면 비인기 팀이었던 현대, SK의 경기는 거의 중계되지 못했다. 지금처럼 한 경기당 하나의 채널이 확보되지도 않은 환경하에서 당시 삼성 라이온즈의 중복 중계는 심각한 수준이었는데, 당시 신생 채널이었던 엑스포츠는 MLB만 중계하던 상황에서 삼성 경기 중계율은 100%를 초과했다. 반면 상대적 비인기 구단인 현대, SK(당시 중계율 7, 8위)는 최하위의 중계율을 기록하면서 많은 피해를 보았다.

이에 2005년 KBS 1TV ‘미디어 포커스’에서 삼성이 방송사에 돈을 주면서 자팀 위주로 중계방송을 편성하도록 압력을 행사했다는 의혹을 보도했다. # '미디어 포커스'는 스포츠 방송사들과 삼성 구단과의 계약(= 몇 경기 이상 중계하는 조건으로 돈 얼마를 받는 조건)이 있었다는 주장을 보도했다. 당시 KBS ‘미디어 포커스’는 이러한 의혹을 보도하면서 삼성 라이온즈 구단과 전화 인터뷰를 시도했는데, 삼성 구단 관계자는 이를 부인하면서 “잘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구단이 돈이 없잖아요.”라는 명드립을 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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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삼성 라이온즈는 모그룹으로부터 풍부한 자금을 지원받아 아낌없이 돈을 쓰면서 돈성이라고 불리던 시절이었다. 2004년 기준으로 삼성 라이온즈는 8개 구단 중 가장 많은 연간 300억원에 가까운 운영비를 쓰고 있는 구단이었다. #

2000년대 중반까지 삼성은 FA와 현금 트레이드로 수많은 우수한 선수들을 영입해 왔다. 이미 김성근 감독 시절부터 KBO 리그에서 현금 트레이드의 큰 손[20]이었던 삼성은 90년대말 재정이 넉넉치 못했던 쌍방울과 해태의 주축선수들을 대거 현금 트레이드로 영입했다. 임창용, 조계현, 김기태, 김현욱 등이 그들이다. 2000년 FA 제도가 도입되자 삼성은 이강철(해태)과 김동수(LG)를 영입한 것을 시작으로 2002년에는 양준혁(LG)를 재영입 2004년에는 박종호(현대)를, 2005년에는 가장 임팩트가 큰 박진만심정수(현대)를 FA로 영입했다. 이외에 해태에서 방출된 이순철을 영입하거나 선수협 파동으로 소속 팀과 갈등을 빚은 마해영을 트레이드해 데려오는 등 우승만을 위해서 외부 자원들을 마구 영입하고 있었다.

이렇게 많은 투자를 했으나 삼성은 2004년 한국시리즈에서 모기업이 거덜난 가난한 현대 유니콘즈에게 정상을 빼앗기는 굴욕을 당했고, 이에 삼성은 2004시즌 종료 직후 100억원을 들여 현대의 주축선수였던 심정수, 박진만을 FA로 영입하면서 야구팬들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이처럼 돈성의 절정에 있던 당시 삼성 구단의 "잘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구단이 돈이 없잖아요" 발언은 야구팬들의 실소를 자아냈고, 이후 수년간 개그 소재로 사용되며 두고두고 회자되었다. 다만 사람들의 관심이 이 드립에 너무 쏠리면서 정작 중계권 뒷거래 의혹 자체는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5.9. 2014년 정현석 FA 보상선수 재지명 문의 논란

2014년 12월 15일, 한화 이글스로 FA 이적한 배영수의 보상선수로 정현석을 지명했다. 좌타일색이며 주전 3인방 빼고는 군대와 임탈 등의 문제로 백업이 빈약한 편인 삼성 외야진을 생각하면 꽤 괜찮은 픽이라는 평가를 받았으나, 17일 뜬금없이 정현석 위암 투병 소식과 함께 보상선수 건강에 문제가 있으니 FA 보상선수 재지명을 알아보고 있다는 기사가 나왔다.

처음에는 "한화가 위암 투병에 대해 아무 설명도 없었다"는 식으로 기사가 나와 한화 프런트가 지탄을 받았다. 그러나 후속 기사로 밝혀진 실상은, 지명 마감일 5시 10분에야 삼성에서 정현석 지명에 대해 한화측에 문의했고, 한화측은 정현석의 위암 수술 사실과 재활기간까지 모두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5시 45분에 삼성에서 인수인계 계약서가 날아와 모든 걸 감수하고 정현석을 영입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다는 것.[21]

결국 다 알고 데려갔으면서도 단순 변심으로 재지명 안 되냐고 기웃거린 셈이다. 아마 윗선에 깨졌겠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정현석 본인의 프라이버시는 산산히 박살이 났다. 그러면서 삼성 프런트는 선수 보호가 최우선이라고 개드립쳤다.

결국 12월 17일 오후, 정현석은 현금 트레이드 형식으로 한화 이글스로 복귀하고, 삼성은 재지명 대신 배영수의 연봉 300%를 받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이 건으로 안현호 단장을 위시한 삼성 프런트는 삼성 라이온즈 이미지에 '먹칠을 떠나 똥칠'을 하고 있다고 매우 까였다.

5.10. 2016년 팬 현수막 설치 제지 및 시위사건

2016년 삼성 라이온즈 팬 현수막 제지 및 시위사건 참조

5.11. 최규순 게이트

KBO 리그 심판 최규순 금전요구 사건항목 참조.

5.12. 응원가 저작권 침해 집단소송

윤일상, 김도훈 등 유명 작사 작곡가 21명이 삼성 라이온즈를 상대로 저작 인격권 침해에 따른 4억 5000여만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이들은 “삼성라이온즈가 원곡 저작자들의 동의 없이 응원가로 수년째 사용하고 있다”며 지난 달 서울중앙지방법원에 공동 소장을 접수했다. #

응원가 저작권 침해와 관련해 작곡가들이 집단으로 소송을 제기한 것은 삼성 라이온즈가 첫 사례가 되었다. 응원곡 저작권 문제 때문에 여러 구단이 응원가를 자작곡으로 바꾸느라 홍역을 치루고 있는 가운데, 삼성 라이온즈 구단만이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저작권에 문제가 있는 응원곡을 계속 사용해오다가 이같은 집단 소송에 휘말리게 되었다.

서울중앙지법은 1심에서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법원피셜

[1] 2002년 한국시리즈 첫 우승 후 발간된 삼성 라이온즈의 사사(社史)인 '삼성 라이온즈 21'에서 발췌한 내용이다.[2] 처음에는 지기 위해서 실력이 다소 떨어지는 신인급 선수를 기용했으나 이 선수들은 김영덕 감독의 의중도 모르고(…) 감독 눈에 띄려고 죽자살자 덤벼드는 탓에 큰 점수차로 압도해 갔고, 결국 감독의 뜻을 잘 아는(…) 베테랑을 투입해 일부러 실책을 연발했다.[3] 당시 장효조는 빙그레 이정훈과 타격왕 경쟁 중이었는데, 아이러니 하게도 1984년에 자신의 타격왕을 지켜주었던 김영덕 감독이 이제는 빙그레 감독으로서 장효조의 타격왕 경쟁 기회를 빼았는 일이 발생했다.[4] 현대가 큰 점수차로 이기고 있었는데, 굳이 등판한 것은 처음부터 보복성 빈볼을 던질 의도로 나온 것임을 뜻했다.[5] 당시 정명원의 투구 릴리즈 포인트, 착지 각도는 이승엽이 타석에 섰던 왼쪽에 치우쳐 있었고, 이 점에서 명백한 고의 빈볼이었다.[6] 이미 2000년대부터 낡았다는 지적이 있었다.[7] 엄밀히는 조광래 대표이사가 밀어붙였다지만, 이 경기 정전 원인이 시민운동장 시설 문제라는 걸 보면 명분이 안 될 이유가 없었다.[8] 전광판 상단에 우천시에 사용하는 중계카메라 방수비닐 등을 보관하고 있었는데 폭죽 불티가 이 비닐에 튀면서 발화했던 것으로 보인다.[9] 그런데 실제로 갈베스는 같은 외국인선수임에도 바에르가와는 식사도 안 하고 그를 피해 다녔다고 한다.[10] 당시 이만수가 도로 던진 깡통은 한 초등학생 관객이 쓰고 있던 안경테를 부러뜨렸다.[11] 실제로는 10경기 출전 정지였다. 잘못은 했다지만 주전 포수인 이만수를 뺀다는 것도 큰 리스크이기도 했으니.[12] 호세 본인은 이후 인터뷰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라고 회상했다.[13] 여기는 잔류 확정되자마자 우수수 튀어나왔다.[14] 출처는 이우의 야구수첩. 위의 정전사건과 정말 절묘하게 섞었다. 좀 오류인 것이 최형우는 전라도에서 나고 자란 토박이라서 경상도 사투리를 안 쓴다.[15] FIFA 월드컵대회를 비롯 챔스언스리그 등 축구의 경우 관중이 난입을 할 경우 중계 중에 즉시 카메라를 아예 돌려버려 외면하고 있다.[16] 이 때문에 삼성이 짜고 감독 빼돌리기를 했다는 말도 있었지만 애초에 삼성에서는 김진영 감독과 계약을 눈 앞에 두고 있었다. 갑작스레 김영덕 감독이 OB를 나오면서 김영덕 감독쪽으로 선회한 것.[17] 특히 배원영은 김영덕 감독이 제일 싫어했던 별명인 변태도 외쳤다.[18] 1994년 12월 기준환율 791.86원[19] 한화도 구대성, 정민철, 송지만의 대우는 박했다. 그야말로 구단 안 가리고 팀 프랜차이즈 스타로 살기 힘들던 시대.[20] 일례로 1991년 김성근 감독 취임 당시 현금 트레이드로만 7명의 간판급 선수들(OB 윤석환, 조범현, 신경식, 태평양 이광길, LG 최일언, 최홍석, 롯데 허규옥)을 영입한 바 있다. 때문에 삼성은 7명을 영입하면서도 선수 유출은 전혀 없었다.[21] 참고로 보상선수 지명은 6시까지였고, 계약서를 보내기 전에 한화가 정현석에 대한 상태를 알렸기 때문에 삼성은 다른 선수를 선택할 수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