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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메이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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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목록
2.1. 실존인물
2.1.1. 한국
2.1.1.1. 대한민국
2.1.2. 외국
2.2. 가상인물 및 매체
3.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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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Kingmaker

을 만드는 사람. 한 나라가 세워지고 새로운 권력자가 탄생하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한 인물을 말한다. 왕좌지재와는 뉘앙스가 많이 다르다. 왕좌지재는 단순히 왕을 보좌할 혹은 즉위시킬 능력이 있는 인재라는 긍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반면 킹 메이커는 (본인이 왕이 될수는 없지만) 누가 왕이 될 지 결정할 수 있는 권력을 가진 사람을 의미한다. 즉 왕의 입장에선 순수하게 도움이 되는 능력을 넘어, 위협이 되는 존재로, 역사적으로 볼 때 킹메이커라 불린 인물들은 대체로 토사구팽당하는 결말을 맺는다. 중화권 문화에서 왕좌지재에 해당하는 "소하장량 같은 사람입니다."라는 말은 순수한 칭찬이지만, 킹 메이커에 해당하는 "이윤이나 곽광같은 사람입니다."라는 말은 (이들이 나름 충신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반역죄로 처단당하기 딱 좋은 말이다.

킹메이커의 개념 자체는 오래 전부터 있었으나, 역사적으로 'Kingmaker'라 불린 최초의 인물은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이다. 그는 중세 잉글랜드에서 벌어진 장미전쟁 당시 요크파에 속하여 막대한 재산과 봉신들을 바탕으로 랭커스터파 왕이었던 헨리 6세를 몰아내고 에드워드 4세를 즉위시키는 데 혁혁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후 에드워드 4세와 불화를 겪자 그를 쫓아내고 다시 헨리 6세를 왕으로 즉위시켰으나 에드워드 4세측의 반격으로 전사했다. 그는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킹메이커라고 불리게 됐다.

일반적으로는 왕좌를 차지할만한 권력이나 실력은 있으나, 직접 왕위에 오르기엔 혈통이나 정당성에서 결격이 있는 사람들이 이 역할을 한다. 비록 공식적으로는 왕이 아니지만, 왕보다 강한 권력으로 정치를 좌지우지해서 실익을 챙기는 경우가 많다.

현대에는 국가주석, 대통령, 총리 등 최상위 권력자를 탄생시키는데에 결정적 역할을 하는 핵심 참모를 킹메이커라고 칭한다. 또한 꼭 대통령이나 수상같은 권력자가 아니라도, 사회에서 최고 권력자를 옹립하고 선출하는 데에 지대한 공헌을 하는 전략가를 지칭하기도 한다. 다시 말해 일정한 캠페인의 핵심 전략가, 핵심 참모를 지칭하는 의미로 킹메이커라는 말을 쓰는 것, 미국에서는 전문적으로 선거 전략만을 짜는 전략가를 지칭할 때 '스핀 닥터(Spin Doctor)'라는 용어를 쓰기도 한다. 때때로 결정적 공헌을 한 파트너를 두고 킹메이커라고 지칭하기도 하는데, 선거에 러닝메이트로 출마하여 동반자를 최고 직위직에 밀어올리는 부 책임자, 헌신적인 내조와 뒷바라지로 남편의 출세를 뒷받침해 준 아내, 제자를 어드바이스하는 멘토 등을 지칭할 때도 있다. 같은 논리로 본인의 사회적 지위를 통해서 아내를 사모님, 귀부인의 자리로 밀어올리는 남편을 퀸메이커라고 하거나 아들과 딸의 출세를 후원하는 부모를 프린스 메이커, 프린세스 메이커라고 하는 등 여러 방면에서 사용되고 있다.

게임 등의 용어로의 킹메이커는 현 뜻과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보통, 게임 내에 해야 할 일은 모두 다 했는데, 승리를 다른 사람에게 넘기는 경우, 이 사람을 킹메이커라고 부른다. 한 마디로 죽 쒀서 개 준 꼴.

2. 목록

※ '킹 메이커 - 왕이 된 사람' 형식으로 나열되었다.

다만 아래 목록에는 진짜 킹메이커가 아니라 평범한 부하 ㅡ 우두머리 관계인데 올라가있는 인물들이 많다는 점을 유의하자. 원 의미의 킹메이커는 단순히 왕을 추대한 사람이나 휘하에서 공을 세운 사람이 아니라, 왕을 '만들어낸' 사람이다. 사람을 대상으로 쓰기에는 불편한 느낌을 가진 'Maker'라는 단어가 붙은 데에는 이유가 있다.

2.1. 실존인물

2.1.1. 한국

2.1.1.1. 대한민국
  • 김종필 - 박정희
    킹메이커로서의 성과로 치자면 5.16 군사정변을 통해 박정희를 대통령으로 옹립한 사례를 꼽을 수 있다.[3] 이 공으로 김종필은 박정희 정부에서 초대 중앙정보부장, 제11대 국무총리, 민주공화당 총재 등 최고의 요직을 거치며 내내 권력의 핵심부에 있게 된다. 한편 김영삼, 김대중의 대통령 당선의 경우, 당시 김종필은 독립된 거대 세력의 수장으로서 3당 합당DJP연합 등을 통해 특정한 정부 탄생에 협조한 주요 주주에 가까운 포지션일 뿐, 킹메이커 역할로 보기는 힘들다.
  • 김윤환 - 노태우, 김영삼, 노무현
    원래 대한민국 정계에서 원조 킹메이커라 하면 이 사람을 지칭했다. 노태우의 오랜 친구로서 전두환 정부 내내 청와대 핵심 참모로서 현재 권력인 전두환과 미래 권력을 꿈꾸던 노태우 사이의 가교 역할을 했으며, 민정당 내의 세력을 꾸준히 규합하여 그를 대통령으로 당선시켰다. 3당 합당 후 김영삼이 민자당 내 민정계와 권력투쟁을 할 때도 김영삼을 지지했으며, 결국 세력을 모아 김영삼을 대통령으로 만든다. 이후엔 영남후보론을 최초로 구상하고 기획, 노무현의 대선 승리에 일조하게 된다.
  • 박철언 - 노태우
    전두환 정권 동안 청와대, 법무부, 안기부 내의 요직을 거치며 노태우의 정치적 미래를 위해 일했으며, 1987년 대선 때는 엄청난 규모의 전국 사조직인 '월계수회'를 이끌며 노태우의 당선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노태우의 집권 후에는 6공의 황태자라는 별명이 붙었을 만큼 노태우의 총애를 받으며 승승장구했다. 이후에는 차기 대통령 자리를 두고 민주자유당 내에서 사실상 민정계의 대표격으로 상도동계를 이끌고 있던 김영삼과 치열한 권력 투쟁을 했는데, 후보 경쟁에서 밀려난 후에는 정치적으로 내리막길을 걷게 된다.
  • 김종인[4] - 박근혜[5], 문재인[6], 윤석열[7][8]
    2012년 제19대 총선18대 대선 때 새누리당의 비대위원 및 박근혜 대통령 선거 캠프에서 활동하며 박근혜를 대통령으로 당선시켰다. 2016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 때는 더불어민주당의 비상대책위원장을 맡아 더불어민주당이 원내 1당이 되도록 도왔는데, 이는 1년 뒤 문재인 후보의 대통령 당선에 간접적인 밑거름이 되기도 했다.[9] 2021년 재보궐선거에선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을 맡아 더불어민주당을 상대로 서울시장과 부산시장을 비롯해 압승을 거두며 다 죽어가던 보수정당을 살려놓기도 했다. 이것은 2021년 이준석 신드롬과 함께 보수에 신선한 새 바람을 불어넣었고, 2022년 윤석열 대통령 당선의 기반이 되었다. 다만 본인의 출마에서는 유일하게 지역구로 출마했던 1988년 제13대 총선 때 서울 관악구 을 지역구에서 이해찬에 밀려 낙선하였는데, 이후 다시는 지역구에 출마하지 않았다. 놀랍게도 전국구 비례대표로만 무려 5선으로 당선된 것이 전부다.[10] 김종인의 정치 행보에서 한가지 흥미로운 지점이라면, 진영이나 세력을 넘나들며 적극적으로 자신의 정치적 성공을 도모했으며, 또한 자신이 직접 대통령, 혹은 대통령제에서의 전권을 가진 국무총리, 또는 의원내각제에서의 총리가 되고싶은 야심을 숨기지 않았다는 점, 그리고 이런 자신의 정치적 야심 때문에 스스로 복무했던 세력이나 인물과는 선거 이후 큰 불화를 겪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그리고 김종인이 대선 직전의 대형선거에서 승리를 거두면, 반드시 그 다음번 치러지는 대선에서는 김종인이 속했던 정당이 승리를 거두게 되는 일종의 법칙이 생겨나게 되었다.[11]
  • 이해찬 -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
    무려 세 명의 민주당계 대통령을 만들어 낸 선거 전략가로 꼽힌다. 이는 한국 정치계의 원조 킹메이커로 불리던 김윤환을 능가하는 성과이다. 과거 평민당 시절부터 김대중 총재의 책사 역할을 맡아서 활동하면서 선거 전략가로 불리우기 시작했다. 민주화 이후 선거에서 이해찬이 만들어 낸 대표적 성공작 중 하나가 바로 '서울 포청천'이라는 대대적 이미지 메이킹을 통해 제1회 지방선거조순을 서울시장으로 당선시킨 선거였는데, 이 전략은 한국의 선거 역사에서 본격적으로 체계적인 미디어 통합 선거 기획을 성공시킨 최초의 사례로 꼽힌다.[12] 1997년 대선 때는 DJP연합 등의 전략을 통해 김대중을 대통령으로 당선시키며 최초의 수평적 정권교체를 성공시켰으며, 2002년 대선 때는 선대위 기획본부장으로서 선거 전략를 총괄하며 노무현의 대선 승리를 일구어 냈다. 또한 정치에 뜻이 없던 문재인을 집요하게 설득하여 정계로 진출시킨 뒤, 2017년 대선 때 결국 대통령에 당선시킨 것도 이해찬이었다. 이런 성과 덕에 김대중 정부노무현 정부 때는 행정부와 당에서 요직을 거치며 관료로서도, 선출직 정치인으로서도 승승장구했다. 심지어 정계 은퇴 직전의 마지막 과제였던 2020년 제2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더불어민주당 대표를 맡아 선거를 총지휘하면서 180석의 거대 여당을 만들어 내, 대선 뿐만이 아니라 총선에서도 최고의 성적을 냈다. 한편 이해찬은 평생동안 민주당계 정당을 떠나지 않으면서,[13] 당직 선거와 지역구 선거를 포함하여 자신이 출마한 모든 선거에서 단 한번도 낙선하지 않고 모조리 당선된 진기한 기록을 가지고 있는데, 대부분의 선거 전략가들이 남의 선거는 성공시켜도 정작 본인의 선거나 정치 경력에서는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매우 놀라운 부분이다.

2.1.2. 외국

2.2. 가상인물 및 매체

3. 관련 문서



[1] 사실 정도전은 킹메이커라기엔 고려 시절때 존재감이 조준에게 압도적으로 밀렸다. 정도전이 존재감을 드러내는건 고려 시대보다는 조선이 건국된 이후의 일이다.[2] 최명길은 인조의 진짜 인재이지만 인조 옹립에는 큰 공이 없었다.[3] 5.16은 처음 아이디어부터 실행까지 전적으로 김종필의 작품이라는게 정설이다.[4] 김윤환이 정계를 은퇴하고, 이상득이재오가 정치적 영향력을 상실한 2010년대 이후의 대한민국 정계에서 킹메이커라 하면 보통 김종인과 이해찬 두 사람을 꼽는다. 2017년 대선 직전에 민주당을 탈당하여 대선 2주 전에 안철수를 지지한 것 때문에 문재인 집권과는 관계가 없다는 주장도 있으나, 보통 킹메이커의 역할은 선대위원장의 역할이 아니라 아젠다 설정이나 정계개편이나 정계구도와 관련한 그랜드 플랜을 기획하고 만드는 역할이라는 면에서 킹메이커가 맞다. 그런 뜻에서 언론에서는 박근혜와 문재인의 킹메이커 김종인이라 부르는 것이다.[5] 대통령이 된 박근혜, 문재인, 윤석열과의 관계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인데 선거 중간에 그리고 선거 이후에 불화가 커져서 결별하게 된다는 것이다. 김종인은 새누리당 박근혜 비대위의 좌장으로서 경제민주화라는 아젠다를 제시하여 2012년 총선 승리에 큰 기여를 했으나, 대통령 선거 중에 박근혜 선대위의 공동선대위원장직을 사퇴했다. 김종인은 박근혜와 등을 지게된다. 이후 문재인과의 관계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전개된다.[6] 호남지역 국회의원들의 연속탈당으로 문재인이 큰 위기에 빠져있던 2016년 초, 김종인은 더불어민주당의 비대위원장으로 영입되어 총선을 진두지휘했다. 100석도 어렵다던 선거에서 원내 제1당, 123석의 깜짝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총선 중에 전개된 이해찬 공천배제로 대표되는 친노 학살을 주도하여 문재인과 불화가 생기기 시작했고 결국, 문재인과 결별하고야 말았다. 문재인은 2017년 5월, 박근혜 대통령 탄핵으로 만들어진 소위 '탄핵 대선'에서 승리하여 대통령이 되었다. 김종인이 만든 총선 승리가 없었다면 문재인은 대권주자의 자리를 지킬 수 없었고, 극단적인 경우 총선패배의 책임을 지고 정계은퇴할 수도 있었다.[7] 김종인은 2020년 총선의 처참한 패배로 비관론에 빠져있던 미래통합당의 비대위원장으로 취임하였다. 미래통합당의 이름을 국민의힘으로 바꾸고, 여러가지 쇄신과 혁신을 이루어 냈으며, 더불어민주당이 180석의 거대 의석에 자만하여 잘못된 방향으로 독주하도록 유도했다. 무엇보다 국민의 힘이 2016년부터 4연속 패배한 이유는 당의 중심과 기강을 잡을 인물이 없었기 때문인데, 김종인은 노련한 정치력을 발휘하여 당의 중심을 잡고, 국민의 힘을 안정적으로 운영했다. 그 결과, 2021년 재보궐선거에서 압승을 거두며 보수 부활의 전기를 마련한다. 이는 국민의 힘이 22년 대선에서 승리를 거두는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8] 김종인은 박근혜, 문재인과의 관계가 파국으로 끝났기 때문에 이를 반면교사로 삼아서 윤석열과의 관계에서는 이를 되풀이 하지 않을 것이란 관측이 많았으나, 결과적으로 윤석열과의 세번째 관계도 불행한 결말로 끝났다. 윤석열 검찰총장이 별의 순간을 잡았다고 말하면서 정치권으로 진입할 수 있는 변곡점을 제공해 주었고, 같은 해 진행된 국민의 힘 대통령 경선에서 윤석열 후보를 공공연하게 지원하여 윤석열이 대세론을 형성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이어 윤석열 선대위의 총괄선대위원장으로 취임했으나 22년 1월 초순, 지지율이 크게는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에게 10%이상 밀리는 상황에서 전격적으로 선대위를 해체시켰다. 당시 '쿠데타'라는 말까지 돌며 윤석열과 그 측근들을 격노케 하였고, 결국 윤석열은 김종인을 해임하고 선대위 조직을 실무형 선대본부로 재출범시킨다. 그러나 윤석열 지지율 하락의 주범이던 페미니스트들을 깔끔하게 버리는 그림을 만들어냈고, 이준석을 비롯한 지도부와 윤석열, 친윤 사이에서 벌어진 갈등도 김종인의 전격적인 선대위 해체를 기점으로 줄어들었고, 이준석과의 갈등봉합을 거쳐 윤석열의 지지율은 급반등하기 시작했다. 결국, 윤석열은 22년 3월 9일 치러진 대선에서 당선된다. 윤석열은 당선 후, 그동안의 도움에 대해 감사를 표시하며 앞으로도 많은 조언을 구하겠다고 했으나,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 김종인계는 거의 등용되지 못했다.[9] 물론 총선 직후에는 두 사람이 완전히 갈라섰고, 심지어 2017년 대선 때는 본인이 대선 후보 출마 선언을 한 후 얼마 가지 않아 사퇴했다. 그 후 안철수 후보를 지지하였다. 그러나 대선을 불과 2주도 남기지 않은 시점에서의 지지였고, 별다른 결과물도 내놓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 안철수는 지지율상의 별다른 이득을 못 보고 무난하게 패배했다. 3년 후, 비슷한 상황이 다시 재연되는데 총선을 불과 2주 남겨 놓은 시점에서 미래통합당의 총괄선대위원장으로 합류했으나, 패배를 막지는 못했다. 선거 유세 외에는 별다른 주요 결정을 하지 못했고, 미래통합당은 110석도 안되는 역대급 참패를 하고 말았다.[10] 전두환 정부 시절 민주정의당 전국구 의원 당선을 시작으로 연속으로 3선을 지냈으며, 2004년 제17대 총선새천년민주당 비례대표로 다시 당선됐고, 2016년 제20대 총선더불어민주당 비례대표로 당선된지 1년이 못 되어 의원직을 사퇴하고 탈당했다.[11] 2012년 총선에서 김종인은 새누리당 비대위의 좌장으로 승리를 거두었고, 2012년 대선은 김종인이 속했던 새누리당의 박근혜 후보가 당선되었다. 2016년 총선에서는 더불어민주당의 비대위원장으로 승리를 거두었고, 2017년 대선은 김종인이 속했던 더불어민주당의 문재인 후보가 당선되었다. 2021년 재보궐선거에서는 국민의힘의 비대위원장으로 승리를 거두었고, 2022년 대선은 김종인이 속했던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가 당선되었다.[12] 그 이전까지의 선거는 구도, 조직, 돈, 후보의 명성을 통해 굴러가는 지극히 전통적인 방식이었다. 그러나 당시 조순 후보의 선거 캠페인은 90년대의 대중 문화 부흥과 영상 매체의 발달을 이용하는 한편, 포청천이라는 당대의 히트 드라마의 코드를 차용하여, 후보의 이미지를 완전히 새롭고 친근하게 구축하는 것에 성공한 첫 사례였다.[13] 2016년 총선에서 비대위원장 김종인이 자신을 아무 이유 없이 공천 탈락시키자, 이에 불복하고 무소속으로 세종시에 출마하여 당선된 뒤 복당하긴 했다. 당시 호사가들은 1988년 총선 때부터 이어져 온 이해찬과 김종인의 오랜 악연이라고 평가하기도.[14] 허나 조조는 가후에게 위해를 가하지 않았다지만 이건 가후가 기본적으로 처신을 조심하게 한 점도 있다. 그리고 조조에게는 민간인 학살이라는 확실한 치부가 있으며, 순욱, 최염, 모개 등이 입바른 소리를 하고 자신의 심기를 건드렸다며 결국 죽였고, 자신은 사람의 인성이 아닌 능력만 본다면서 공융은 불효했다는 구실로 일가족을 몰살시켰다. 다른 인물을 보자면 가후가 특이한 케이스이기는 하다.[15] 유비의 책사 겸 조직의 총무였다.[16] 미축과 함께 유비를 서주목으로 추대했고 외교공작을 통해 유비 생존에 지대한 공을 세웠다.[17] 미축은 유비가 서주목이 되는데 공헌을 하였고 유비의 자금줄 노릇을 했다.[18] 유비의 익주평정을 도우면서 을 세울 터전을 마련하고 한중공방전에서 군사참모로 큰 공을 세워 한중왕 선언을 하는데 큰 공헌을 했다. 일찍 죽지 않았다면 이엄이 아니라 법정이 제갈량과 같이 탁고를 맡았을 가능성이 높다.[19] 괴철의 천하삼분지계는 나름 한신의 명성을 생각한다면 일리가 있지만 문제는 반란으로 인해 반드시 대립각을 세우는 유방의 결속력은 한신 하나 빠진다고 해서 흔들릴 결속력이 아니었으며 인재가 충분한 유방에 비해서 한신 옆 모사는 괴철 하나뿐이었다.[20] 이쪽은 관도대전 이후 원소에게 살해당했다.[21] 킹메이커가 4명이나 되었지만 제어를 못했다. 단합이 되었던 조조군과 다르게 서로 파벌질을 했다. 이 파벌질은 후일 원소의 후계자들이 내분이 일어나 분열되는 이유중 하나가 되었다.[22] 단, 자기가 모신 군주에게 토사구팽 되었다.[23] 순욱은 위왕 선언에 반대하다 눈 밖에 나버렸지만, 조카 순유는 위공 등극을 지지하는 정반대 행보를 보였다. 다만 위왕 선언은 순욱의 말대로 해가 될 뻔해서 자칫 잘못했으면 유비의 기세가 너무 커질 뻔했다.[24] 당시 조나라에 인질로 잡혀온 장양왕은 첩 소생의 서자여서 수많은 이복형제들에게 왕위계승권이 한참 밀리는 방계일 뿐이었는데, 오직 여불위만이 이를 기회로 삼아 전재산을 투자하여 장양왕을 귀국시키고 안국군의 후계자로 삼게 했으며 결국 진나라의 국왕으로까지 만들었다.[25] 조비에게 계책을 내놓고 후계자가 되는데 큰 공헌을 했다. 하지만 이를 믿고 기고만장하게 굴어서 적이 많았으며, 사후 받은 시호가 대놓고 "추한 놈"이라고 까는 추후(醜候)다.[26] 다만 동양의 킹메이커로 알려진 여불위처럼 리처드 네빌도 왕권을 강화하려는 에드워드 4세의 견제를 받았고, 자신의 반대에도 에드워드 4세가 평민 출신인 엘리자베스 우드빌과 결혼하면서 제대로 대립하게 된다. 결국 에드워드를 버리고 요크 왕조에서 랭커스터 왕조로 갈아탔다가 전사했다.[27] 손권이 스스로 황제가 되기까지 가장 큰 도움을 준 신하들로 언급한 이들이다. 다만 앞의 세명은 병에 걸려서 천수를 다 누리지 못하고 죽었고 육손의 경우도 말년은 허무할 정도로 비참했다.[28] 총리 겸 보수당 대표 경선에서 존슨의 선거캠프 의장을 맡았다.[29] 그러나 손호는 그들에게 대하는 대접은...[30] 이후 눈밖에 나 숙청되었다.[31] 여기엔 괴철의 계략으로 성 30개나 점거하는 쾌거가 있었고 이것이 무신의 자만을 불렀다.[32] 아이너리한것은 장이와 진여는 진승이 진승·오광의 난을 일으키고 세력을 만들자 진승은 왕이 되려고 했고 장이와 진여는 '왕이 되는 일을 미루고 진나라의 수도를 먼저 공격하라'고 했지만 진승은 이를 무시하고 왕이 되어버린다. 그 후에 장이와 진여가 무신을 꼬드겨서 조나라 왕으로 만드니...[33] 아이러니하게 나루토가 암살(사실은 이차원으로 실종)당하자 다음 8대 호카게는 시카마루가 취임하게 된다.[34] 호무라,코하루와 같은 원로이나 3대부터 사실상 반동분자로 3대부터 나오던 호카게들과 대립했다.[35] 사실 3대 사망 이후 원로인 코하루,호무라가 다음 호카게로 지라이야로 정했으나 지라이야 스스로 거절하고 츠나데를 추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