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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gold> 작위 | 왕후(王后) 왕태후(王太后) |
국왕 | 고국천왕(故國川王) 산상왕(山上王) |
부족 | 연나부(椽那部)[1] |
이름 | 미상 |
아버지 | 우소(于素) |
생몰연도 | ?[2] ~ 2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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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KBS 한국사전 - 고구려 우씨, 두번 왕후가 되다 |
고구려의 제9대 고국천왕과 제10대 산상왕의 왕후.
형사취수제를 통해 한국사에서 보기 드문 왕후의 자리를 2대 동안 유지하고 권력을 이어간 것으로 알려진 여성이다.
2. 생애
2.1. 고국천왕 시기(180년~197년)
고국천왕의 비로 있다가 재위 2년 2월에 왕후가 되었다. 절노부(絶奴部)[3] 출신 우소(于素)의 딸이었다고 한다. 다만 아직 성씨의 사용이 보편화된 시대가 아니었기 때문에 '우'가 성씨였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말들이 나온다. 다만 혼자만 달랑 있었다면 성씨가 아니었을 가능성이 더 높지만, 또 다른 인물로 제13대 서천왕의 왕후 우씨가 우수(于漱)의 딸이었던 사례가 있기 때문에 일단은 성씨로 보고 있다.[4] 한편, 우씨는 선우(鮮于)씨가 축약된 형태라는 가설도 있다.이후 고국천왕 12년 9월에 왕후의 친척인 외척 어비류와 좌가려가 권력을 남용하는 것을 왕이 제지하려 하자 두 사람이 이에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여기서 말하는 왕후가 선대 신대왕의 왕후를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고국천왕의 왕후인 우씨를 말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정설은 없으나, 맥락상으론 후자가 좀 더 자연스럽긴 하다. 만약 후자일 경우, 왕후 우씨도 자의든 타의든 상당한 권력 상실이 있었을 것으로 예상된다. 그 사실을 반증하듯 귀족 출신들이 권력에서 배제되었고, 안류와 을파소 등 재야 출신의 근왕 세력이 권력을 잡으면서 선정을 베풀게 된다.
2.2. 발기 및 연우와의 만남
그러다가 197년 5월 고국천왕이 후사없이 승하하자 우씨는 왕의 서거 소식을 숨긴 채 왕제인 발기를 찾아가 후사를 논하려고 했다. 그러나 자신을 후계자로 낙관하고 있었던 것인지 발기는 야밤에 찾아온 형수를 시큰둥하게 외면했고, 이에 우씨는 다른 동생인 연우를 찾아갔다. 발기와는 달리 연우가 예를 갖추고 우씨를 맞이하자, 연우의 행동이 마음에 들었는지 우씨는 발기를 모함하는 한편 그에게 자신의 호위를 부탁했다.《삼국사기》<고구려본기>에서는
이 와중에 우씨를 대접하던 연우가 고기를 썰다가 칼에 베이자 우씨가 치마끈을 풀어 상처를 감싸주었으며, 두 사람이 손을 잡고 왕궁에 돌아왔다.
고 언급했다.이를 두고 일각에선 이미 왕후 우씨와 고연우의 정치적 합의가 어느정도 있었던 상태 아니냐는 추론도 내놓는데, 우선 왕후 우씨는 일단 삼국사기상으론 발기에겐 고국천왕의 승하 사실을 언급하지 않았다.[5] 이러니 당연히 발기의 입장에서는 차기 후계자에 대한 언급 자체가 자기 목숨을 거는 행위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상식적으로 왕의 후계자에 대한 발언을 왕후 우씨가 왜 하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왕조 시절엔 왕에 대해 함부로 언급하는 것 자체가 자기 목숨 뿐 아니라, 집안 자체를 걸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때문에 우씨는 거절당할 것을 알고도 일단 발기를 찾아간 것이라고 봐야 한다. 차기 왕으로 가장 유력한 인물이 고국천왕의 바로 아랫동생인 고발기였기에 나중에 딴소리 안 나오게 명분 쌓기용으로 먼저 찾아갔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고발기에게서 한 소리 듣고 집에서 나온 왕후 우씨가 고연우에게 찾아갔을 땐 고국천왕이 승하했다는 사실을 알렸다. 그것도 어느 정도 얘기를 진행하면서 이 사람을 차기 왕으로 삼아야겠다고 판단된 시점에서 말한 것이 아니라, 집에 찾아가자마자 바로 알렸다.[6]
왕후가 말하기를 “대왕이 돌아가셨으나 아들이 없으므로, 발기가 연장자로서 마땅히 뒤를 이어야 하겠으나, 첩에게 다른 마음이 있다고 하면서 난폭하고 거만하며 무례하여 당신을 보러 온 것입니다.”
ㅡ《삼국사기》<고구려본기>
연우 스스로가 왕위에 대해 야심이 있었기에, 고국천왕 생전 왕후 우씨와 어느 정도 연계를 구축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주장. 실제 연우는 예의상이라도 몇번은 거절하기 마련인 왕위를, 물론 긴박한 상황이긴 했지만, 왕후 우씨가 제안하자마자 넙죽 받아들인다.ㅡ《삼국사기》<고구려본기>
그 외 여러 추론을 내놓아보자면, 단순히 인간적 혹은 외모적으로 고연우가 고발기보다 평소 우씨 왕후한테 더 맘에 들었을 수도 있고[7], 아니면 2024년 드라마 우씨왕후에서 설정한 것처럼 고발기가 진짜 싸이코패스급이라 왕을 맡을 재목이 안된다고 봤을 수도 있다.[8] 아니면 기록에는 없지만 애초에 고국천왕이 발기보단 연우를 잠재적 후계자로 낙점했을 지도 모를 일이다.
하여간 덕분에 고발기가 유력했던 고구려의 왕위는 고연우에게 돌아가게 되었고, 그가 바로 고구려의 제10대 왕인 산상왕이었다. 얼마 안가 이 사실을 알고 분노한 발기는 왕 자리를 되찾겠답시고 소노부와 연합해 궁궐을 포위하지만 사람들이 따르지 않자 동연으로 도망쳐 그곳의 수장이었던 공손도에게 지원을 요청했고, 이에 30,000명에 달하는 병력을 빌려 외적과 함께 고구려에 쳐들어왔다.
허나 산상왕의 막내동생이었던 고계수가 이를 막고 진압했다. 이후 계수는 도망가다 거의 붙잡힌 형 발기가 "네가 늙은 형을 죽이려 하냐?"고 일갈하자 그를 놓아주는 대신 잘못을 꾸짖었고, 이에 본인의 욕심과 한으로 왕실과 나라에 큰 위기를 몰고 왔다는 죄책감에 현타가 왔는지 발기는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2.3. 산상왕 즉위 이후
왕위에 오른 산상왕은 사실상 우씨 덕에 왕위를 얻은지라 다시 장가를 들지 않고 그대로 형수인 우씨를 왕후로 맞아들였다.[9] 그러나 우씨는 산상왕과의 사이에서 아들을 낳지 못했고[10], 후사 문제를 고민하던 왕은 산천에 기도를 하다가 꿈에 작은 왕후를 통해 아들을 얻을 것이라는 예언을 듣게 되었다. 우씨의 눈치를 보느라 다른 왕후를 들일 엄두도 못냈던 왕은 신하들에게 이 사실을 말했고, 을파소는 기다렸다는 듯이 왕에게 하늘의 뜻을 기다리라고 조언했다.몇년 후 나라의 제사에 쓸 돼지가 도망쳐서 어느 마을에 이르렀는데 관노부 주통촌 출신의 처녀인 후녀의 도움으로 잡게 되었다. 그 사실을 산상왕에게 알리자 왕은 그 마을을 방문해 후녀와 관계를 가지게 되었는데, 후녀는 왕의 명을 감히 피할 수 없으나 만약 다행히 임신하면 자신을 버리지 말라고 했고 왕은 버리지 않겠다고 약조한다. 그리고 실제 후녀는 임신을 한다. 그리고 몇달 후 이 사실을 알게 된 왕후 우씨는 질투심에 눈이 돌아가(...) 병사를 보내 후녀를 죽이려고 했다. 이때 후녀는 자신이 임산부라는 사실을 병사들에게 알리고, 자신을 죽이면 왕의 자식도 죽이는 셈이 되는데 그 결과는 처형이라는 것을 적극적으로 이용했다. 이렇게 후녀의 기지로 왕후 우씨는 뜻을 이루지 못했고, 되려 임신 사실을 병사들이 산상왕에게 알려서 정식으로 후녀를 작은 왕후로 맞이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11]
그 후 작은 왕후가 된 후녀는 아들을 낳았고, 그 아들이 훗날 제11대 동천왕이 되었다. 왕후 우씨는 이들 모자를 싫어했는지 지속적으로 위협을 가해, 왕태자로의 책봉도 동천왕이 태어난지 4년 후에서나 가능했다. 동천왕이 태자였을 때 때렸다는 설도 있다.(...)
산상왕 28년에는 왕손 연불, 즉 제12대 중천왕이 태어났다. 이후 227년 5월 산상왕이 승하하고 동천왕이 19세의 나이로 즉위하자 228년 3월 우씨는 왕태후(王太后)에 봉해졌다.
2.4. 말년과 사망
228년 3월 왕태후로 봉해진 왕후 우씨는 사망하기 전까지 동천왕한테 알게 모르게 히스테리를 부리며(...) 지낸다.《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어느 날 태후가 동천왕의 심성을 시험해보고자 왕이 외출했을 때 사람을 시켜 왕이 타는 말의 갈기를 자르게 했는데, 동천왕은 돌아와 "말이 갈기가 없으니 가련하구나."라고 말하며 대충 넘겼다고 한다. 동천왕에게 수라를 올릴 때도 태후 우씨가 시종에게 일부러 동천왕의 옷에 국을 엎지르라고 명령했는데, 동천왕은 화를 내지 않고 이를 넘긴다. 훗날 동천왕은 자신에게 행했던 모든 일의 배후에 우태후가 있음을 알게 되었음에도, 오히려 왕태후의 예로 모셨다고 한다.
그러다 태후 우씨는 234년 9월 사망한다. 죽기 전에 유언하기를
"살아서 한 짓을 돌이켜 보니 국양(고국천왕)을 볼 면목이 없어 고국천왕릉에는 묻힐 수 없고, 산상왕의 능에 장사지내 달라."
고 했다. 그러나 무당이 와서,"국양왕(고국천왕)께서 아내가 동생(산상왕)과 합장되는 걸 보고 대노하셨고,[12] 세상 사람들 보기 부끄러우니 자기 무덤을 가려달라고 하셨습니다."
라고 전했다. 이에 고국천왕의 능 주위에 소나무를 일곱 겹으로 심어 능을 가렸다.[13]우씨가 동천왕에게 오랫동안 히스테리를 부렸음에도 동천왕이 우씨의 유언대로 산상왕 옆에 장사지내준 것을 보면 동천왕은 우씨에게 복수할 만큼의 악감정은 갖지 않았던 것 같다. 동천왕이 매우 관대한 성격이었다는 기록을 고려하면 우씨의 히스테리를 이해하고 넘어간 걸 수도 있고, 동천왕의 어머니 후녀가 별 볼 일 없는 출신으로 여겨지는 걸 고려하면 우씨에게 관대한 모습을 보여 신민의 지지를 받고자 했을 수도 있다. 동천왕이 죽기 고작 2년 전에 위나라에게 선빵 쳤다가 나라가 망하기 직전까지 갔음에도 불구하고 동천왕이 죽자 많은 신민들이 따라 죽을 정도로 신민들의 지지를 받았다는 걸 고려하면 후자일 가능성이 높아 보이나, 그걸 감수하고서라도 복수를 우선시한 왕들이 역사적으로 많았다는 것을 고려하면 동천왕이 우씨의 히스테리를 그러려니 하고 넘긴 건 연기가 아니라 진심이었던 것 같다.
3. 평가
한국사에서 두 명의 왕을 남편으로 둔 유일한 왕비였고, 심지어 그 왕들 중 한 명은 사실상 자신이 직접 세운지라 과거의 사서에도 그 일화가 제법 남은 얼마 안되는 여성들 중 한 명이 되었다.평가는 갈리는 편인데, 일단 성리학 중심 사회였던 조선에서는 인륜을 어긴 악녀라는 비난을 받았다. 굳이 형사취수 관련 문제가 아니더라도 후녀나 동천왕한테 한 짓을 보면 확실히 인격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임은 분명하다.
반면 자신의 욕망을 위해 능동적으로 행동한 여성이라는 평가도 있다. 어찌됐든 그녀는 두 왕의 왕후가 되었고, 하늘과 연이 닿지 않아 아들을 놓지 못한게 천추의 한이 되었지만 아들만 낳았어도 자기 자손한테 쭉 고구려 왕을 시킬 수도 있었다. 후녀한테 한 짓도 자기가 왕까지 시켜줬는데 아들 못 놓는다고 자길 배신한 산상왕에 대한 분노와 질투심에 눈이 먼 드센 여자의 한 서린 행위로 보면 그나마 조금은 이해할 여지가 있다.[14]
한편, 고구려에는 형사취수의 문화가 남아있었기에 왕후가 시동생과 재혼한 것 자체는 비윤리적인 행위가 아니었다는 평가도 있다. 그러나 단순히 그렇게 설명한다면 그녀 입으로 남긴 유언에서 왜 선왕에 대해 부끄럽다고 하는지를 설명할 수 없으며, 오히려 이 유언이야말로 정절의 개념이 조선만큼은 아닐지언정 당대에도 있었고, 그녀는 그 개념을 어겼던 것에 대한 사회적 비난 가능성을 인식하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15]
거기다 고국천왕이 사망하자 정당한 왕위계승자인 발기를 속이고 연우를 옹립해서 국가권력을 사실상 탈취해 내전까지 벌어지게 만든 사실은 비난받을만하다. 물론 이후 발기가 폭주기관차가 되어준 덕분에 아이러니하게도 연우의 왕위계승 명분이 확보되었지만 말이다.[16]
4. 대중매체에서
- 2013년, 루리웹에 한 네티즌이 관련 일화를 대충 그린(...) 만화를 올렸다.#
- 2019년 왕후 우씨 관련한 웹툰이 네이버 베스트도전에 올라왔는데, 작화와 고증이 호평받았다. # 그러다 해당 웹툰은 2020년 6월 1일부터 2022년 4월 18일까지 버프툰에서 정식연재되었다. 《왕후의 제국》 문서 참고.
- 영상화에 대한 요구가 사극 매니아들 사이에서 제법 있었지만, 형사취수제 문화나 고발기의 이름(...) 등으로 인해 공영방송이 중심인 공중파에서는 제작이 쉽지 않을 것 같다는 의견이 있었는데[17], 매니지먼트 회사인 앤드마크에서 <우씨왕후>라는 제목으로 드라마 제작을 준비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오리지널 각본으로 시나리오는 영화 <상의원>의 각본을 쓴 이병학 작가가, 연출은 <최종병기 활>의 조연출 출신으로 영화 <오! 문희>로 연출 입봉을 한 정세교 감독이 맡았다. 두 사람 모두 사극 경력자이며 총 8부작에 OTT 플랫폼을 통해 방송할 것으로 보인다. 사극의 경우 워낙 제작비가 많이 들다보니 기획-시나리오 단계에서 투자를 받지 못해 엎어지는 경우가 많은데, 2023년 2월 현재 액터스 길드 등에 오디션 후기들이 올라오는 것으로 보아 투자에 성공해 곧 크랭크인을 할 것으로 예상된다. 2023년 2월 16일 앤드마크의 권오현 대표가 한 인터뷰에 따르면 300억대 OTT 시리즈로 현재 캐스팅보드[18]가 거의 완성되었으며 2023년 하반기에 촬영을 크랭크인 할 예정이고, 방영은 TVING 오리지널 드라마로 편성되었다. 2024년 8월 29일 공개가 되었는데, 실제 역사를 온전히 따르기보다는 역사 인물과 큰 줄거리만 따온 픽션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기타 자세한건 우씨왕후 항목 참조.
5. 기타
상당히 장수한 인물이다. 고국천왕과 혼인한 180년을 기준으로 생년을 추측하자면 160년~165년 사이인데 234년에 사망했으니 60대 후반~70대 중반까지 장수해 동천왕의 재위 초반 때까지 생존해있었다. 시대를 감안하면 상당히 장수했다.[19][1] 북부(北部).[2] 생년은 확실하지 않으나 고국천왕 재위 2년인 180년에 혼인했기 때문에 160년~165년 전후로 출생했을 가능성이 크다.[3] =제나부(提那部). 연나부 혹은 연내부라고도 한다. 방위명으론 북부(北部)로 왕후를 대대로 배출한 부족이었다. 참고로 계루부 이전의 왕족으로 추정되는 소노부는 연노부로도 불렸는데, 방위명으로는 서부였다. 간혹 절노부의 이칭인 연나부와 소노부의 이칭인 연노부를 헷갈리는데, 서로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4] 근데 이쪽은 절노부가 아닌 연노부(=소노부, 서부) 소속이었다.[5] 《삼국사기 》권16, <고구려본기>4 -산상왕조- "고국천왕이 돌아가셨을 때, 왕후 우씨(于氏)는 임금의 죽음을 비밀로 하여 밝히지 않고...(이하 생략)"[6] 다만 삼국사기 자체가 이때부터 거의 천년 후에 쓰여진 기록임을 감안하면 선후관계 정도는 얼마든지 바뀔 여지도 있긴 하다. 애초에 두 사람만 아는 대화를 당대 사람이라고 어떻게 정확히 알겠는가?[7] 실제 후술된 왕후 우씨의 질투력을 감안하면 우씨는 아무리 권력이 좋아도 자기가 싫어하는 인물과 결혼할 여자 같진 않다. 아니면 자기가 권력을 누리려면 발기보다 연우가 더 적합한 인물이여서 그랬을 지도 모른다.[8] 싸이코패스까진 아니더라도, 실제 발기는 민심을 얻지 못해 내전에서도 패하고 동연으로 달아난다. 아마 동생의 처자식을 다 잡아 몰살시킨 일이 민심 악화의 결정타로 작용한 듯하다.[9] 참고로 산상왕 연우의 원래 처자식들은 형인 고발기의 반란 때 모두 살해당했다.[10] 참고로 고국천왕도 10년이라는 제법 긴 시간 동안 자식이 없었다. 상기된 어비류, 좌가려의 난을 고려하면 왕후 우씨의 뒷배경인 연나부도 숙청했을 가능성이 있기에 단순히 우씨 눈치가 보여 후사를 못 들인 건 아닐 것이다.[11] 헌데 이 이야기는 좀 의아한 부분이, 왕후가 여인을 죽이라고 했는데 당연히 극비리에 이뤄졌을 일이 역사서에 기록될 정도로 발설된 것도 이상하고, 반대로 그렇게 알려졌음에도 왕후 우씨가 아무런 탈 없이 지낸 것도 이상하다. 그나마 이래저래 절충해보면 후녀는 이 사실을 알았고 주변인들에게도 알렸지만 왕에겐 이 일을 알리지 않았다고 볼 수도 있는데(혹은 산상왕이 알았더라도 걍 눈감아줬거나), 또 동천왕 때까지도 왕후 우씨는 살아서 꽤나 패악질을 해댔으니 이 모자가 거의 성인급 인성이라 그녀의 히스테리를 이해하고 감당한건가 싶기도 하다. 실제 동천왕은 성격이 매우 관대했다고 전해진다.[12] 심지어는 둘이 싸웠다는 이야기도 있다. 물론 고국천왕이 산상왕에게 따지는 식이었겠지만..[13] 《삼국사기》 권17, <고구려본기>5 -동천왕조- 8년 가을 9월, 태후 우씨가 돌아가셨다. 태후는 임종에 다음과 같이 유언했다. “내가 행실이 바르지 않았으니 무슨 면목으로 지하에서 국양(國壤, 고국천왕)을 보겠는가? 만약 여러 신하들이 차마 내 시신을 도랑이나 구덩이에 버리지 못하겠거든, 나를 산상왕릉 곁에 묻어 달라.” 마침내 태후의 유언대로 장사를 지냈다. 무당(巫者)이 말했다. “국양왕이 나에게 내려와서 ‘어제 우씨가 산상왕에게 가는 것을 보고는, 분함을 참을 수 없어서 마침내 우씨와 싸웠다. 내가 돌아와서 생각해보니 낯이 아무리 두껍다 해도 차마 나라 사람들을 볼 수 없도다. 네가 조정에 알려 나의 무덤을 물건으로 가리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때문에 국양왕의 능 앞에 일곱 겹으로 소나무를 심었다.[14] 게다가 아들 없다고 왕실 문 닫아야 되는 것도 아닌게, 당시 고구려는 형제계승이 일반화된 상태였던지라 혹여 산상왕한테 무슨 변고가 생겨도 차기 후계자로 고계수가 있었다.[15] 애초에 형사취수 문화의 저변에는 형제가 죽었을시 그 가족들을 남은 형제가 부양하는 형태의 또 다른 윤리상이 반영되었기에 허용되는 측면도 있었다. 즉, 먹고 사는데 큰 지장 없는 왕후 신분이 할만한 행위는 아니었고 이미 사장되고 있었기에 우씨가 더 부끄러워 한 것일지도.[16] 단, 고구려가 고려나 조선과 달리 족연합체라는 점을 생각하면 이상할 것도 없다. 신라도 박씨, 석씨, 김씨가 번갈아 가며 왕위를 이었고, 백제도 왕비 부족이 따로 있었다가 한성백제 멸망 후 다른 씨족이 왕비가 되었다. 그리고 내전까지는 몰라도 이후 외적을 끌어들이는 매국 행위는 발기가 주도했고 민심도 얻지 못했다.[17] 그 외에도 사실 대하드라마로 만들기엔 분량이 그리 많지가 있다. 남아있는 고대사 기록 자체가 적기 때문이다. 즉, 만들거면 퓨전사극화 될 수 밖에 없는 운명. 그 외 심심하면 조선시대 배경 사극만 만드는 것도 조선이 기록덕후국가라 소재가 풍부한 편이기 때문도 있다.[18] 보드판에 배역별 캐스팅 현황이 정리한 것.[19] 우씨의 출생 시기로 추정되는 160~165년 사이에 태어난 《삼국지》 의 등장인물은 촉한의 소열제 유비(161년생)와 조조의 책사였던 순욱(163년생)이 있는데 두 사람은 우씨보다 10년, 20년씩 일찍 죽었다. 그리고 우씨와 같은 해인 234년에 사망한 사람으로 제갈량과 헌제 유협이 있는데 두 사람 모두 181년생으로 우씨에겐 자식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