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22 19:43:41

원소(삼국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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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한의 대장군 | 자모위용(姿貌威容)
원소
袁紹
파일:attachment/f603918fa0ec08fa44cd3c6558ee3d6d54fbda26.jpg
<colbgcolor=#fecd21> 작위 업후(鄴侯)
최종직위 대장군(大將軍) 겸 기주목(冀州牧)
<colcolor=#fff> 출생 155년 이전[1]
후한 낙양[2]
사망 202년 6월 28일 (향년 47세 이상)[3]
후한 허난성 황하 일대
본관 원씨
(紹)
본초(本初)
아버지 원성[4]
원봉[5]
형제자매 사촌 동생[6] 원술
자녀 원담, 원희, 원상
재임 후한의 기주목
191년 ~ 202년 6월 28일
반동탁 연합의 맹주
190년 1월 ~ 191년 2월
후한의 발해태수
19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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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한
(영제 →
헌제)
복양장(濮陽長)낙향[7] → 대장군연(大將軍 掾) → 시어사(侍御史)사직[8] → 호분중랑장(虎奮中郞將) → 중군교위(中軍校尉) → 사례교위(司隷校尉) → 발해태수(渤海太守) → 기주목(冀州牧) → 우장군(右將軍) 겸 기주목(冀州牧)태위[9] → 대장군(大將軍) 겸 기주목(冀州牧) }}}}}}}}}}}}

1. 개요2. 상세3. 생애4. 평가: 과거5. 평가: 현대
5.1. 정치적 능력
5.1.1. 협천자가 원소 입장에서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는 주장에 대하여
5.2. 행정적 능력5.3. 군사적 능력5.4. 용인술5.5. 도덕성5.6. 외모와 쇼맨쉽
6. 오해
6.1. 조조에게 열등감을 가졌었다?6.2. 후계자 선정에서 잘못을 했나?6.3. 우유부단했는가?6.4. 투구 대신에 모자와 정장 차림
7. 가족 관계8. 조조에게 원소가 지니는 비중9. 미디어 믹스10.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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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한 말 사세삼공의 명문 원가의 양자로 들어가 엘리트 유망주로서 황건적 토벌에 큰 공을 세웠다. 반동탁연합의 맹주이며 군웅할거 시대의 최대 세력으로서 북중국에 군림했던 군벌.

그는 당대의 많은 사람들이 예상했던 천하통일의 재목이었으나, 관도대전으로 조조에게 패하고, 이때까지도 조조를 능가하는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급사한 이후 아들들이 서로 적대하면서 세력이 분열해 조조에게 멸망한다.

2. 상세

어머니가 천민이라는 신분적 약점이 있었으나 자모위용(姿貌威容)이라는 말 그대로 무척 빼어난 용모를 가졌으며,[10][11] 영제 시대의 혼란한 상황에서 일종의 근본주의유교 포퓰리즘을 통해 광범위한 지지세와 명성을 획득하며 젊은 나이에 정치적 신성으로 떠올랐다. 영제 사후 십상시의 난, 반동탁연합, 군웅할거로 이어지는 일련의 정치적 흐름들을 주도하며 야심을 드러냈고, 결국 후한의 멸망에 단단히 한몫한 인물이다.

당시 막강한 권력을 가졌던 십상시동탁과 대립해서 난세의 문을 열었고 그 공손찬을 비롯한 강력했던 군벌들을 제압하며 하북 4주[12]의 최강자로 군림하는 등 후한 말 군웅할거 시대 초반의 판도는 원소의 주도하에 있었다. 심지어 천하의 조조까지 휘하의 지부장 격으로 부릴 만큼 위세를 떨쳤으나 헌제를 옹립하며 독립한 조조가 정치적 주도권을 쥔 채 원소 자신을 점차 압박해오자 원소는 이를 타개하기 위해 조조의 불법적 위치를 비난하며 관도대전을 벌였으나 크게 패하고 돌아온 이후 병이 들어 사망했으며 후계자들은 원소의 급사로 인한 혼란과 내분 속에서 조조에게 토벌당한다.

소설 삼국지연의 속에서는 무능한 인물로 묘사되며, 한 → 위 → 진으로 이어지는 정통성 계보를 따르는 정사 삼국지에서도 위 태조 조조를 가로막는 대역적이라는 반동 포지션에 놓여 혹평을 받으나, 정통성 문제에서 비교적 자유로웠던 후한서에서는 매우 전향적인 평가를 받고 있으며, 후한서와 동시대에 편찬된 배송지의 삼국지 주석에서도 삼국지 팬들이 흔히 아는 어리석고 우유부단한 모습보다는 강인하고 거침없는 면모가 강하게 드러난다. 그러나 정사 위서 원소전에서도 원소는 정작 출병해야 할 때는 아들 핑계로 거절하다가 뒤늦게야 관도대전을 일으키고, 전풍저수의 충언보다 자신의 입맛에 맞는 곽도, 봉기의 참언만 믿고 저수의 협천자 건의, 전풍과 저수의 관도대전 당시의 지구전 건의, 관도대전 당시 순우경을 구해야 한다는 장합의 건의를 모두 무시하는 등 오만하고 우유부단한 모습을 보인다.

근대 이후 조조가 유능한 개혁가로 재조명되는 과정에서 혁신적인 뉴 리더 조조와 대비되는 구시대적 적폐 기득권의 상징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기도 했으나 인터넷의 발달로 역사적 자료들의 접근이 쉬워지고 번역과 분석이 활발하게 이루어진 2010년대 이후부터의 한국에서는 후한서의 평가를 기반으로 관도 이전까지의 수많은 군사적 승리들과 공의를 내세워 압도적인 정치적 권위를 갖고 여론을 선동해 무수한 정적들을 매장시키며 정치적 승리를 거둬 왔던 점들이 조명되면서 쇼맨쉽에 능하며 유능하고 강인하지만 마키아벨리즘에 찌든 위선적이고 비정한 정치가로서의 면모가 재평가되는 추세다.

3. 생애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원소(삼국지)/생애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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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평가: 과거

累世公卿立大名 (누세공경입대명) 집안 대대로 공경대신 배출해 큰 명성 날리고
少年意氣自縱橫 (소년의기자종횡) 젊어서 뜻 있어 천하를 주름잡았네
空招俊傑三千客 (공초준걸삼천객) 헛되이 준걸 삼천 명을 불러다가 먹이고
漫有英雄百萬兵 (만유영웅백만병) 함부로 영웅이라며 백만대군을 거느렸구나
羊質虎皮功不就 (양질호피공불취) 호랑이 가죽을 뒤집어쓴 양이라 성공하지 못했고
鳳毛雞膽事難成 (봉모계담사난성) 봉황 깃털에 닭의 배짱이니 큰일을 이루기 어려워라
更憐一種傷心處 (경련일종상심처) 가여워라 한가지 마음 아픈 것은
家難徒延兩弟兄 (가난도연량제형) 집안이 어려운데 쓸데없이 두 형제를 끌어들인 것이네
모종강본 삼국지연의에서 원소의 인생을 평한 시

일반적으로 명문의 후예로 간웅 조조와 대비되는 허세섞인 인물상으로 악평을 받는 것과는 달리 실제로는 난세에 있던 야심 많은 효웅 중 하나. 자신의 정치적 카리스마로 군웅할거의 시대를 개막한 인물로 그의 친구인 조조와 비견될 수 있는 인물이다. 그러나 그에 따른 독선적 면모로 인한 실수도 분명히 있었으며, 인격적으로도 그리 바른 인물은 아니었다.[13]

삼국지에서 원소는 동탁, 원술, 유표와 나란히 역적 열전에 올랐고, 삼국지의 저자 진수는 원소를 유표와 비슷한 부류의 인물로 평가했는데, 그 평은 다음과 같다
동탁은 사람이 비뚤어져 계통이 없고 잔인하고 포학하며 비정했으니, 문자로 역사를 기록한 이래로 이와 같은 자는 아마 없었을 것이다. 원술은 사치스럽고 방자하고 음탕하였으므로, 자신의 일생이 다할 때까지 영화를 지킬 수 없었던 것은 자업자득이다.

원소와 유표는 위엄과 무용이 있었고 도량과 식견이 있었기에 당시 명성을 떨쳤다.
유표는 한강 남쪽을 지배하고, 원소는 황하 북쪽에 세력을 구축하였으나, 그들은 모두 겉으로는 관대했지만 속으로는 질시하고, 모략을 좋아하였으며, 결단력이 없고, 인재가 있어도 등용하지 않고, 좋은 말을 듣고도 받아들일 수 없었으며, 적자를 내쫓고 서자를 세우고, 예의를 버리고 편애를 숭상했으므로, 후계자의 시대에 이르러서 고통을 당하고 사직이 엎어졌어도 결코 불행한 것이 아니다.

초나라 항우범증(范增)의 계략을 듣지 않아 왕업을 잃었는데, 원소가 전풍을 죽인 것은 항우의 실책보다 더한 것이다.
본전도 그렇지만 긍정적인 내용은 거의 없다. 그나마 도량과 식견이 있었다는 평가가 긍정적인 부분일까. 한편 후한서의 저자 범엽은 동탁과 원술의 열전을 분리하고 원소와 유표를 같은 열전에 배치했는데 그 평은 다음과 같다.
원소의 외면은 관대하고 우아했고, 재간과 도량을 모두 갖췄으며 자신의 기쁘고 슬픈 감정을 얼굴에 나타내지도 않았다.
하지만 자긍심이 강해 오만하며 스스로의 재주를 지나치게 자신하여 그의 성품엔 (절제하고 자중하며)선을 쫓는것이 부족했다. 그래서 결국 패배하기에 이른 것이다.

원소는 사람됨에 인정이 있고 정치를 잘했다. 그렇기에 백성들은 그를 일컬어 '덕' 이라 불렀다.
하북에선 점잖은 선비에 이르기부터 비천한 여인에 이르기까지 그에게 불만을 품은 자가 없었다.
(원소가 죽자)저자,거리에서는 눈물과 통곡이 끊이지 않았으며, 심지어 부모상을 치르는 자도 있을 정도였다.
원소는 본디 호협을 숭상하여 무리를 얻었으며, 마침내는 웅패할 계책을 세웠는데 당시 천하에 날랜 병사를 일으킨 사람들 중 원소의 뜻을 따르지 않는 자가 없었다.(=동탁 집권 당시 전국의 궐기를 의미)

전장에 임해서는 과감히 결단하며 맞섰기에, 용맹한 무인들이 앞다투며 목숨을 바치게 했고, 깊은 꾀와 빼어난 의론으로 지혜있는 선비들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참으로 성대하구나!

하지만 한비자에 이르길, 군주가 모질고 비뚤어져 아랫사람들과 화합하지 못하고, 강포함이 지나쳐 억지로 굴복시키기만 좋아하며, 적자를 가벼이 여기고 서자를 중하게 여기는 것은 멸망의 징조라고 한다.[14]

유표의 도리는 이를 넘어서지는 않았으나(= 원소처럼 모질고 강포하진 않았다는 의미) 단지 편하게 누워 천운을 거두길 바라고, 천하가 삼분된다 헤아렸으니 나무인형과 같은 인간이라 해야 할 것이다.

원소는 용모가 준수하고 유표 또한 학자다운 풍모가 있었다.
원소가 황하 이북에서 영웅이라 칭하고, 유표는 장강 이남을 마음대로 하니 한수의 물고기떼와 같은 것은 (형주의) 군선들이고, 구름처럼 모인 것이 기주의 군마들이라.

원소는 참위로서 왕위를 넘보았고[15] (=199년의 참칭미수사건), 유표는 하늘에 제사를 지냈는데(=동시기의 교천제), 성패는 이미 하늘께서 정하신 일이라고도 일컫지만 또한 사람이 벌이는 일이기도 하다.

원소처럼 스스로의 강인함만을 믿는 자가 성공하는 경우는 드물며, 유표같이 좌담만 즐기는 자에게선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적자와 총아를 두고 방황하니, 몸은 무너지고 사업은 망하였구나.

범엽은 원소의 재주가 매우 대단하다며 감탄하고, 또 그가 매우 정치를 잘했다고 서술하면서도[16] 한비자의 말을 인용해 원소를 비판했고, 스스로의 강인함에만 의존해서 성공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고 덧붙이는데, 범엽이 평가하는 원소는 유능하고 강인하지만 타인의 의견을 따르지 않고 자기중심적으로 사건을 이끄는 독선적인 인물이다.

하지만 원소유표열전은 긍정적인 기록이 없다시피 한 진수의 전기와 달리 긍정적인 기사와 부정적인 기사가 적당한 비율로 나오는 편이고, 사평 또한 나름대로 거물다운 무게감을 인정하는 편이다. 다만 원소와는 달리 가루가 되도록 유표의 사평은 그저 지못미다.

정사 삼국지와 후한서 모두 원소와 유표는 둘 다 미남이었고 한 지역의 강자로 오랬동안 군림해 해당 지역에서는 사실상 황제에 가까운 위세를 떨쳤다는 점, 장자를 배척한 결과 훗날 창업자의 사후 후계 분쟁으로 세력이 망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두고 비슷한 인물로 평가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진수가 두 사람의 장단점을 하나로 묶어버린데 비해서, 원소는 과단성이 있지만 비정하고, 유표는 원소처럼 모질지는 않았으나 그에 비례해 우유부단하고 결단력이 부족했다는 차이점도 강조하고 있다.

한 마디로 원소는 카리스마 있고 유능하지만 독선적인 독재자 스타일의 인물이자, 능력과 인간성이 별개인 사람의 대표주자라는 평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5. 평가: 현대

삼국지연의에서의 평가는 무척 좋지 않고, 근대 이후 역사적 기록들이 재조명되고 조조가 재평가되는 과정에서서도 조조가 어떻게 영웅적인 승리를 거뒀는가에 초점이 맞춰져 원소가 평가되었기에, 조조가 혁신적인 개혁을 단행한 지도자로 부각되면서 라이벌인 원소는 수구꼴통이나 우유부단한 찌질이 기믹을 맡게 되었다. 삼국지연의의 영향으로 원소는 어리석고 용렬한 소인배 느낌인데다, 대다수의 미디어에서 신나서 덤벼들어 되도 않는 분석이랍시고 까기에 적합한 명문가 타이틀도 지니고 있으니, 여러 가지로 찌질이로 왜곡되었다.

전통적인 삼국지 문화에서 원소는 흔히 귀족주의에 쩌들고 사람을 명성과 신분으로만 판단하며 귀가 얇고 판단력이 흐린 암군 정도로 평가되었고, 관련 창작물에서도 무능한 인물로 묘사되거나, 혹은 어느정도 유능하였으나 너무 수구주의적이며 한계가 뚜렷한 인물로 여겨져 조조, 유비 등 삼국시대 주요 네임드들과의 확연한 클래스 차이를 드러내기 위한 비교 대상으로 취급되는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군웅쟁패전 당시 조조를 위협하던 최대의 숙적이었고, 실제로 죽는 순간까지도 중국의 최강자였고, 그런 원소의 세력을 흡수함으로서 조조가 정말 큰 세력으로 발돋움 할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그렇다고 조비처럼 부모에게서 큰 세력을 물려받은 것도 아니고, 심지어 서자도 아닌 얼자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의 능력으로 중국 최대 세력으로 올라섰다는 것. 물론, 당시 중국의 노른자위 땅을 다 먹고, 중국 최대의 세력을 형성한데다 밑에 저수, 전풍이라는 특급 모사를 두고도 말 안듣고, 후계자도 제대로 안 정하고 놀다가 뜬금없이 지병으로 병사해서 세력을 말아먹었다는 큰 실수를 부인할 수는 없지만, 기존의 평가에서는 그 큰 세력을 만들어 냈다는 부분을 너무 과소평가하고 후반의 실수만 과도하게 강조하는 경우가 많았다. 때문에 한국의 삼국지 팬덤 내에서는 2010년대 전후부터 꾸준하게 재평가 논의가 나오는 추세이며, 본 위키의 해당 항목도 이런 경향에 적지 않은 영향을 받았다.

다만, 겉으로는 대의를 외치면서도 뚜렷한 정치적 소신보다는 노골적인 권력 다툼에만 매몰되어 감탄고토토사구팽을 일삼는 패권주의적이고 위선적인 면모는 이미 당대에서부터 비난받고 있었고, 이는 결과적으로도 원소 자신의 운신폭을 좁히는 한계로 작용했으며, 정치적 선동과 협잡질에 가까운 행보로 한 제국의 붕괴와 난세를 초래했으면서도 여전히 대립과 분열을 조장하던 모습은 여론에 기생하며 사회를 갉아먹는 기생충이라 비판받아도 할 말이 없는 행보라고 볼 수 있다. 현실 정치인으로서는 최악의 유형이라는 점에서 능력을 빼고 봐도 비판받을 수밖에 없다. 물론 이러한 점에서 친구이자 숙적 조조도 비슷한 평가를 받는다는 점은 재밌는 부분이라 볼 수 있다.

원소의 전통적인 해석인 '좋은 가문에서 자란 우유부단한 귀공자'라는 왜곡된 바보 이미지와는 딴판으로 '숨겨진' 냉혹한 면모와 세상의 제약과 한계를 여러 번 깨뜨린 고군분투한 원소의 진면목이 너무 상반적이고 개인사 역시 인상적이기 때문에 끊임없는 재평가를 받고 있는 추세다. 하지만 비록 원소라는 인물의 강점이 지나치게 왜곡되고 낮은 평가를 받아왔으며 원소의 유능함을 증명하는 역사적 기록들이 재조명을 받는다 해도, 명백히 존재하는 허물까지 덮을 수는 없다는 점은 주지해야 한다.

이런 모습들은 동시대 정치판 거물들과 확연히 구분되는 원소의 특성이자 그의 한계를 결정지은 단점이며 이러한 행적의 기저에는 그의 유별날 정도의 자아도취가 깔려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오히려 그 이면으로 잘생긴 외모와 '출생의 비밀', 쇼맨쉽에 능하며 대중친화적이나 본질적으로는 누구도 믿지 않는 극도로 타산적이며 유아독존적인 면모, 인간 승리의 신화처럼 집요한 자기절제력과 친어머니조차 정치적 야심의 제물로서 희생시키는 극단적인 비정함, 조조와의 우정과 관도대전 이후의 허무한 급사 같은 극적인 개인사들이 일종의 서사시적 메타포로 작용하면서, 한국의 삼국지 팬덤 내에선 재평가된 원소 상이 기존 동탁의 포지션을 대체하며 서사의 초반부를 장식할 보다 세련되고 입체적인 악역으로서의 가능성을 주목받았다.[17]

종합적으로, 탁월한 카리스마와 쇼맨십, 추진력을 가졌지만 반대로 그에 상응할 정도로 자만심과 자기애가 강하고 독선적인 인물로, 심배나 신평, 곽도 같은 예스맨을 중용하고 바른 말을 하는 부하들은 적대시하거나, 사태의 책임을 부하들에게 미루는 모습, 또한 그러한 원소의 모습을 이미 알고 일이 잘못되었을 때 후환을 두려워 하는 부하들의 행동[18] 등을 고려해 볼 때 자기애성 성격장애의 성향이 매우 강하다고 볼 수 있다.

5.1. 정치적 능력

젊은 시절의 원소를 보기 위해 몰려든 행렬로 거리가 마비되었다는 영웅기의 기록이나, 지혜있는 선비들은 원소의 계책과 의론에 매료되었으며, 용맹한 무사들은 원소의 과감성에 목숨 바치기를 서로 다퉜다는 범엽의 평, 남녀노소를 막론한 모든 계층에서 원소를 흠모했다는 헌제춘추의 기록 등을 보면 원소는 쇼맨십에 대단히 능했고, 개인적으로도 미워할 수 없는 인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6년상 등의 자기 학대에 가까운 고행으로 야권세력인 청류파의 아이돌로 군림했던 초반의 행적이 유교적 가치관에 얽매이는 보수적인 인간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하지만, 원소의 정치력과 대의명분을 통제하는 능력은 삼국지에서도 가히 독보적이며 그와 동시에 누구보다 독살스러운 정치인이었다. 원소는 서자도 아닌 노비 어머니에서 태어난 얼자다. 그런 그가 돋보일 수 있는 것은 고행으로 유명한 6년 동안의 시묘살이다. 오늘날에도 돋보이는 선행을 한 사람이 그 가치를 인정 받듯, 위선으로 보일지라도 원소는 그 시기에 합당한 일을 한 것이다.

원소는 원봉의 얼자로 이미 죽은 원성의 가문으로 입적되었으니 사실상 고아나 다름없었으나, 양부와 적모의 6년상으로 효자를 자처했고, 동탁이 자리잡은 정부의 칙사를 살해하고 반란을 부추겨 정작 친어머니와 일족 50인을 제물로 바쳤다. 이후 20년 간의 무정부상태를 초래하며 사실상 자신의 목적을 위하여 후한과 친족을 멸망시켰다. 하지만, 원소의 이런 행보는 관이 극도로 부패하던 영제 치하의 분위기 속에서 청렴한 효자로 칭송되며 정치적 거물로 인정받았고, 동탁이 아무런 명분 없이 황제와 태후의 폐위라는 전례 없는 폭거를 저지른 상황 속에서 전국적인 호응을 받고 동정표[19]까지 더해졌으며 원소는 스스로의 입지를 부패한 권력에 저항하는 소위 애국열사 로서 확고히 포장했다.

또한 청류파 인사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정치적 기반으로 삼았던 만큼, 영제 사후 십상시를 위시한 환관 세력들에 대한 원소의 공세는 그야말로 광기에 가까운 수준이었는데, 하태후십상시를 비호하는 상황에서 1.) 보정대신 하진은 직접적으로 하태후의 뜻을 거스르지 않고, 2.) 하태후는 십상시의 파직을 동의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는 목적 아래 정원을 시켜 수도의 요지인 맹진을 불살랐으며 정보를 통제해 이를 흑산적의 소행으로 위장, 영제와 십상시가 주도한 대 흑산적 유화정책을 탄핵했다.

동탁 등 지방의 장군들을 소집한 것은 '흑산적의 위협'이라는 음모론을 조작하고, 계엄령에 가까운 공포 분위기를 유지하며 정보를 통제하는 한편 십상시의 축출이 성공한 뒤 동탁 등과 합세해 흑산적에 대한 대대적인 토벌로 불만여론을 환기시키려는 포석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불행히도(?) 하진이 암살당하고 정국이 요동치면서 이는 실현되지 못했다. 훗날 공손찬이 찬표소죄상을 쓸때 이 일을 간단히 언급하며 원소를 비난한 것 외에는 의외로 비난하는 사람이 별로 없었고, 그러거나 말거나 원소의 지지층은 더욱 결집했으며, 원소 스스로도 십상시를 척결한 것을 자신의 주요 업적으로 선전했다. 그러나 이를 정치적으로 훌륭하다고 보긴 어렵다. 결과적으로 이는 동탁을 불러와 이후의 난세의 문을 연 것이기 때문이다.

원소 입장에서는 최소한의 피해와 명분 확보로 환관 세력을 결단내려던 것이겠으나, 그를 위해 동탁과 정원으로 대표되는 지방 군벌을 불러온 것이 결국은 난세를 불렀다. 하진이 암살당한 이후 정국이 몇 차례나 시소를 탄 끝에 어쩌다보니 운 좋게 황제의 신변을 확보한 동탁이 중앙군을 흡수해 권력을 잡게 되는 상황까지는 당연히 예상하지 못했겠지만, 십상시의 난 당시 환관에 비해 절대적 우세에 있던 하진 및 원소가 선택할 선택지는 확연히 아니었다. 그러나 지지기반 없이 권력만 잡은 동탁이 권력 독점을 위해 연이은 무리수를 던져 중앙이 개판이 된 바람에, 결국 이는 자신의 명망을 이용하여 엄청난 세력을 끌어 모을 수 있는 기회로 작용했다. 동탁에게 너만 칼이 있느냐고 호통치던 패기는 결코 허세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원소는 자신이 나서면 동탁의 허수아비 정부쯤은 압도할 만한 전력을 끌어모을 수 있을 것이라 자신했을 것이며 이는 어느정도 실현되었다. 그 과정에서 후한은 사실상 멸망해버렸지만.

십상시동탁한복공손찬조조로 이어지는 라이벌 구도에서 대의명분을 가지고 노는 수준으로 상대방의 정치적 약점을 정확히 파악하고 집요하게 공격하던 모습은 특기할 만하다. 여기서 조조를 제외하면 모두가 철저히 능욕당했고, 비록 원소 본인은 조조에게 패하고 세력이 사라졌으나, 유비와 동승이 만들고 관도대전 당시 원소가 확장한 '조조 = 천자를 겁박하며 국정을 농단하는 간신'의 프레임은 끈질기게 남아 유비손권이 충실히 계승한다. 이런 식의 정치적 프로파간다는 최소한 지지 세력의 결집에는 유효했고, 중앙 조정을 장악하고 있던 조조와 맞서려면 어떤 논리로 대응해야 하는 선례를 남겼다고 볼 수 있다.[20][21]

위선자라는 평가는 이미 당대에도 범람하고 있었지만, 그의 온후관대한 겉모습 때문에 당대에 원소를 추종하는 사람은 아주 많았다. 원소는 당대에 보편적인 모범으로 여겨지던 유교적 가치관에 더해 현인에게는 지식을 무인에게는 과감성을 무기로 추종되었듯 여러 계층에 따라 제각기 다른 미덕을 보이고 인정받으며 광범위한 추종자를 얻었으나, '희노의 기색을 얼굴에 드러내는 일이 없었다'고 평해지듯 진심을 보이는 일이 없었으며, 실제 행적으로도 단물이 빠지면 손바닥 뒤집듯 태도를 바꿔 자신의 이득만을 챙기는 표리부동하고 이중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코에이 삼국지 플레이어

물론 사람에 따라 다른 미덕을 보인다는 것이 말이야 쉽지만 원소가 어떤 식으로 6년상을 지내며 효자임을 인정받았는지 생각해보면 무서울 정도로 섬찟한 인간성인데,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괴물'이라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시세를 읽고 명분을 만들어 세상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었던 처세술은 삼국지 내에서 수위에 꼽을 수 있다.

그러나 바로 그 점이 원소의 최대 강점중에 하나이자 동시에 그의 약점이었다. 원소의 발목을 잡았던 복잡한 태생과 천출 배경을 이겨낼 수 있었던 이유는 6년상 고행으로 세간에 인정을 받았던 타인의 평가였다. 그는 계속해서 십상시 학살, 동탁의 협천자 옹립 반발, 군벌연합 맹주 추대, 원가 몰락 동정표 획득 등 시세를 읽고 명분을 만들어 세상을 자기 편으로 만들어냈다. 그러나 동시에 바로 명분 쌓는것에 너무 예민한 그는 만약 본인이 헌제를 옹립하면 자신의 기반[22]이 타격을 입을까봐 나서지 않았고, 결과적으로 그가 집착했던 '세간의 평가'가 자신의 수하격이었던 조조로 하여금 하루아침만에 조정의 수장이 되어 협천자 영제후를 할 수 있는 강력한 군벌로 급성장할 기회를 차지하게 만들었다.

다만 이는 어느 정도 결과론적인 측면이 있다. 물론 협천자를 했다면 어느 정도 이득을 얻긴 했겠지만 어차피 당대 이론상 강한 것은 원소였다. 정작 조조가 강력해진 이후에도 원소에 비해 절대열세였으며 조조 입장에선 생애 최대의 싸움이자 명운을 바꾼 관도대전 이후에도 원소의 세력은 조조보다 우위였다. 원소가 만약 지병으로 덜컥 죽지 않았으면, 혹은 후계자 자리를 확실하게 하고 죽었더라면 조조가 원소 세력을 멸망시키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즉, 협천자를 하냐, 안 하냐는 "황제의 명령에 따라 역적을 치는 자"의 포지션을 잡을 것이냐, "황제를 등에 업고 능멸하는 역적을 치는 자"의 포지션을 잡을 것이냐의 문제였지 (원소 입장에서는) 결정적인 요소는 아니다. 물론 조조란 거대한 적을 만드는 결과를 낳긴 했지만, 만약 협천자를 했으면 원소의 적들로부터 "안티 동탁을 자처한 원소가 넥스트 동탁이 됐다"란 프로파간다가 만들어질 수 있으니 리스크가 있었던 것.[23][24]

결론적으로, 원소에 비해 초기 절대적으로 약자였던 조조 입장에서 협천자 이후 명분을 등에 업고 그의 라이벌로 올라선 것 때문에 신의 한 수가 된 것이고, 어느정도 중원의 강자이던 원소로서는 협천자 여부가 당시 시점에서 크게 중요하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해서 큰 문제가 없다고 판단한 거지만 이게 큰 오판을 저질러 결국 스노우볼로 굴러들어가 자신의 세력이 패배한 것이다. 즉, 아무리 황제의 권위가 떨어졌어도 황제를 등업는건 매우 중요한 것이며, 조조가 재빠르게 협천자를 수행하여 권위가 높아진 점이 대단하다고 보이며, 그것이 단순히 눈앞의 이득만을 생각하는 원소의 한계점이라는 것이다.[25]

5.1.1. 협천자가 원소 입장에서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는 주장에 대하여

  • 반론: 애시당초 수백년동안 이어져 내려온 한이라는 브랜드는 그리 쉽게 무너질 것이 아니었고 당장 지방 군벌에 불과한 동탁이 그렇게 전횡을 할 수 있었던 것도 헌제를 데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당시 최강의 군벌이었던 원소가 헌제까지 데리고 있다? 그렇다면 어지간한 다른 인물들은 그냥 깨갱하고 버로우타는 것 말고는 답이 없다. 대체 무슨 명분으로 패권을 주장한단 말인가? 애시당초 당시 패권을 정말로 내세웠던 인물들은 원소, 원술, 유표 등 극소수의 인물들이었고 나머지는 그냥 간섭하지 않으니 좋구나 정도 심산이었다. 애시당초 원소계 군소 군벌이었던 조조가 그리 쉽게 헌제를 확보할 수 있었던 것도 정말로 패권에 관심이 있는 인물이 많았다면 어림도 없는 소리다. 심지어 동탁의 부하인 이각과 곽사조차 헌제를 왜 확보해야 하는 지도 몰라서 낙양으로 그냥 보내줬을 정도인데 이들은 군사력만 놓고 보면 조조를 박살냈을 정도로 강했으나 이후 그 조조가 헌제를 옹위하게 되면서 금세 죽거나 쫒기는 신세로 전락하게 된다.
  • 재반론: "원소가 협천자를 하는 것만으로 어지간한 다른 인물들은 그냥 깨갱하고 버로우타는 것 말고는 답이 없다"는 것은 당시 한황실의 브랜드를 지나치게 과대평가하는 것이다. 동탁이 당시 전횡을 일삼을 수 있었던 것은 힘이 있었기 때문이고, 한 황실은 거기에 명분을 더해줬을 뿐이다. 당연히 관도대전 이전 전성기 원소의 세력은 동탁보다 훨씬 강력했다. 그러나 유표나 조조 등 기타 세력도 반동탁 연합 당시 세력보다 더 강력했던 것은 마찬가지였다. 결국 동탁이 헌제를 끼고 있건, 원소가 헌제를 끼고 있건 상황은 별다를 바가 없다. 그리고 "무슨 명분으로 패권을 주장한단 말인가?"라고 했는데, 이 점은 조조가 헌제를 끼고 있던 시점에 유비가 그를 공격하는 상황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최강의 군벌이었던 조조가 헌제까지 데리고 있었는데" 대체 어떻게 유비가 그를 적대할 수 있었단 말인가? 저 이론대로라면 조조가 헌제를 옹립한 상태에서 원소를 이기고 하북지방을 먹은 이후 게임셋이어야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또한 조조가 헌제에게 옹립된 것은 당대 군벌들이 멍청이라서 헌제 옹립의 의미를 몰랐던 것이 아니고, 이각과 곽사가 권력을 서로 잡기 위해 경쟁하는 도중에 장안에서 탈출했으며, 이각/곽사는 낙양으로 보내준게 아니라 치열하게 추격했다. 천자가 달아나고 곽사가 그를 협박했으나 양봉이 군사를 보내 격파하고 곽사가 후퇴한 것은 연의가 아닌 정사에 나오는 내용이다. 헌제기에는 이후로도 그가 행군교위 상홍에게 업혀 배에 올라 물을 건너거나 병사들에게 비웃음 당하고 신하들이 수모를 당하고 부실한 음식을 먹은 내용 등이 나온다. 이각과 곽사가 몰락한 것은 정치력과 행정능력이 없는 이들이 단순히 이들의 군사력과 한황실의 브랜드만 믿고 기댄 얼간이들이기 때문인데, 조조와 원소 둘 다 이에 해당되는 군벌들이 아니라 헌제의 존재와 별개로 독자적인 세력을 만들고 유지하는 군벌들이었다.[26] 그리고 이런 멍청이들조차 황제 옹립의 의미를 알고 있을 정도니, 다른 군벌들이 그 의미를 몰랐다고 하는 것은 말도 안되는 억측이다. 또한 패권을 노릴만한 인물들이 (조조 외에) 원소, 원술, 유표 뿐 극소수였다는 서술도, 저들이 미개발지역이 많은 강남과 익주, 척박한 서량 등 지역을 제외한 전 중국을 지배하고 있었다고 하면 극소수이긴 커녕 '당대 가장 큰 군벌들은 모두 패권을 노리고 있었다'고 해석하는게 맞다.
    어쨌거나 조조건 원소건 황제를 옹립하지 못했다고 해서 뿔뿔히 흩어져버릴 군벌들이 결코 아니었다. 실제로 조조가 급격히 성장한 것이 협천자 이후기 때문에 '협천자=조조가 1인자로 올라선 배경,이라고 단순히 이해하기 쉬운데, 조조는 그 이전에 이미 여포와 장막의 반란을 진압하고 연주를 완전히 장악한 상태였다. 즉 황제를 등에 업었기 때문에 군벌로 일어선게 아니라, 반대로 힘이 있었기 때문에 황제를 등에 업고 쭉쭉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조조가 협천자를 하면서 얻은 것은 막강한 명분이었지, 황제의 옹립 덕분에 힘이 늘어난 것은 아니다. 조조는 이후 수춘을 얻고 서주를 손에 넣는 등 군벌로서 성장했다. 그런데 이게 그가 협천자를 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것이었을까? 전혀 아니다. 즉, '한 황실'이란 브랜드는 막강한 명분을 쥐어주지만, 명분 외에는 실질적인 힘을 주는게 아니었다.
    그렇다면 처음으로 돌아와 "어떤 명분으로 다른 군벌들이 패권을 주장하냐"고 한다면 당연히 당시 황제를 옹립하지 못했던 모든 군벌들이 내세운 명분과 같다. 바로 "역적이 황제를 농락하고 있기 때문에 황실을 구원해야한다"는 명분이다. 원소와 조조의 대립은 둘 다 야심가로서[27] 둘 다 패권을 노리던 자이다. 둘은 누가 황제를 옹립하는 것과 상관없이 결국엔 "황제를 등에 업고 황실을 능멸하는 저 역적을 처단해라!" vs "황제의 명을 받들어 저 역적을 처단해라!"는 구도가 될 수 밖에 없었다. 관도대전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보자. 당시 원소는 조조를 치고자 했으나 명분이 없었고, 동승사건의 생존자인 유비가 조조에 의해 멸망하면서 원소에게 의탁하자 업성에서 이백리 밖까지 나와 맞이하면서 환대했다. 그런데 유비는 원래 원소의 수하가 아니었다. 즉, 조조의 황제 옹립 → 유비가 여포에게 패주 → 유비가 조조에게 의탁 → 유비 탈출 직후 동승의 조조 암살 시도 사건 → 조조가 유비 격파, 이후에 원소에게 의탁하면서 명분을 준 것이다. 즉 애초에 원소가 헌제를 확보했다면 유비가 원소에게 의탁하는 일 자체가 없었을 것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원소가 헌제를 옹립했다고 해서 동승이 원소를 암살 시도하고 원소가 유비를 격파해서 망한 유비가 조조 찾아가고... 이럴 거란 얘기가 아니다. 포인트는 명분은 얼마든지 만들려면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유비 외에도 황실과 관계된 이들은 얼마든 있으며, 황제의 명이든, 황실의 후예든 뭐든 끌어들이면 가능하다. "당대의 군벌들이 명분이 없기 때문에 헌제를 옹립한 원소에게 대적하지 못하고 깨갱하는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은 난세 당시의 상황에 대해 지나치게 단순화해서 보는 시각이다. 조선 시대 같이 강력한 중앙집권형 왕조라면 왕과의 거리 = 힘이 되지만, 삼국시대처럼 중앙집권화가 약한 고대 중국에 황실의 권위와 힘이 떨어진 난세라면, 명분은 플러스 알파 요소일 뿐이고 중요한 건 우선적으로 이다.[28]
    또한 협천자가 강력한 명분을 주는 것은 맞지만, 위의 '반론'에서는 원소가 헌제를 옹립한다는 것이 가지는 자기모순과 정치적 무리수를 너무 가볍게 보고 있다는 것도 생각할 필요가 있다. 애초에 원소는 헌제를 '황제(소제)를 시해한 역적 동탁이 세운 가짜 황제', 즉 찬탈자로 취급하며 유우를 대립황제로 세우려 했던 인물이다. 그러니까 반대로 헌제의 입장에서 보면 원소는 자신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또 다른 역적으로 간주될 수 밖에 없다. 군주제의 논리로 보면 이 둘의 입장은 양립할 수 없는 것이다. 물론 왕윤이 맹활약하여 헌제의 조정 내부에서 동탁을 담궈버림으로써 정국이 급변하게 되었지만, 원소가 헌제 유협이 가지는 황제로써의 정당성 자체를 부정하고 다른 인물을 황제로 추대하려 했던 이상 그와 헌제의 관계가 쉽게 변할수는 없는 것이다.
    여기서 소위 '반론'측은 마치 원소가 협천자에 관심이 없었다는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는데,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점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유우는 오히려 조조보다 먼저, 유우를 통한 협천자를 시도한 바 있었다. 그리고 만약 이 구상이 성공했다면 유우-원소 결합체의 위력은 실제 역사에 나타난 유협(헌제)-조조 결합체의 위력보다 훨씬 강력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냥 어린아이가 알고보니 상당히 똑똑했던 것'에 불과한 유협과 달리 유우는 당대 최고의 명망과 능력이 이미 입증된 노련한 정치가였고, 협천자 시도 시점에서 군벌로써 세력 역시 조조보다 원소가 훨씬 강력했기 때문이다.[29] 하지만 이 구상은 일단 유우의 즉위 거절로 표류하게 되고, 게다가 공손찬의 미친 트롤링 덕분에 최종적으로 완전히 좌초하게 되어버린다. 말하자면 자신이 올인한 패에서 하필 전혀 생각하지도 못했던 펌블 내지는 꽝이 떠서 거기 건 판돈을 다 날리게 생긴 것인데, 그렇다고 갑자기 걸어둔 판돈을 다른 패에 옮기며 "그러면 이제부터 나는 이 패에 걸겠소" 할 수 있느냐는 것. 그런 소리를 하면 원소의 꼴이 우스워지는 것은 둘째치고, 아무도 그런 억지를 받아주지 않을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명분'이란 어디까지나 정당성이 있어야 그 가치가 있는 것이다. 물론 현실정치에는 한계가 있으니 꼭 완전무결하지는 못할수는 있다. 하지만 오류나 흠결, 모순이 너무 심하게 눈에 띄는 명분은 아무런 힘도, 가치도 없다. 왜냐하면 명분은 그 자체로 직접 힘을 주는 것이 아니라 그 명분을 내세웠을 때 다른 이들이 그것을 받아들임으로써 (또는 최소한 부정하지는 못함으로써) 간접적으로 힘을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다른 이들이 봤을 때 "그건 대체 무슨 헛소리냐" 라고 대놓고 문제점을 지적할 수 있는 수준이 되면, 그 명분은 오히려 내세우지 않는것만 못한 것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원소가 헌제를 옹립함으로써 얻게되는 명분이 딱 그런 수준의 명분이었다. 이전까지 '역적의 주구(走狗), 가짜 황제'라고 까대던 헌제를 갑자기 옆에 끼고 앉아서 "황제 폐하의 어명이다!" 라고 갑자기 태세전환을 하면 대체 누가 그 명분을 납득하겠는가? 오히려 "가짜 황제 내세워서 호가호위 하면 역적이라며? 저번에는 동탁이 역적질을 하더니 이번엔 원소 네가 역적질을 하네?" 라고 반 원소 프레임을 짜기 좋은 명분이 된다. 결국 위에서도 지적된 것처럼, 군웅할거 시기 한 황실과 협천자의 명분이란 아주 강력한 버프라고 보면 대강 들어맞는다. 명분이 있든 없든 당대의 야심가이던 군벌들은 어차피 쉽게 흩어지거나 굴복하지는 않고, 그런 각각의 군벌도 결국은 소군벌들의 연합체이니 그 내부가 쉽게 통제되지도 않는다. 하지만 협천자의 명분을 가지고 있는 이는 외부의 적인 다른 군벌을 상대할때건, 내부 세력을 통제할때건 그 명분의 효과로 강력한 보너스를 받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원소의 입장에서 '헌제 옹립'은 좀 우습게 비유하자면 '물리공격캐인데 힘, 또는 민첩에 페널티를 주는 대신 지능과 MP에 큰 보너스를 받는다'는 식으로 오히려 셀프 디버프기가 될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원소는 그가 한 황실이 주는 명분에 관심이 없었다는 단편적인 비판과는 전혀 다르게, 유우 옹립 실패+조조의 협천자로 자신의 구상이 크게 망가진 이후 다른 대안을 찾기 위해 나름 모색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세력을 완전히 말아먹고 떠돌던 유비를 수백리나 나가서 맞아들이는 퍼포먼서를 펼친 것이 그 좋은 예가 될 것이다. 정작 유비에게 도움이 필요할때는 거의 도와주지도 않았으면서 그의 명분이 필요해지니까 버선발로 뛰어나가다니 안면철판 참 복합장갑이다 싶은 거야 원소가 원래 그런 놈이니 할 수 없는 일이고, 중요한 것은 그런 퍼포먼스를 해보일 정도로 유비의 명분을 자기가 흡수하겠다는 의사를 명확히 드러냈다는 것. 요컨데 유우 옹립 실패와 조조의 헌제 협천자 이후 '한 황실의 권위' 핸드에서 패가 완전히 말리는 처지가 되자, 그 상황을 개선하기 위한 타개책을 이리저리 찾아보려 한 것은 분명하다는 것. 물론 원소 자신과 그의 세력은 이 문제를 딱히 해결하지 못하고 망했지만, 동승과 유비가 시도했던 궁정 쿠데타가 실패하고 조정이 완전히 조조의 손아귀에 들어간 이후, 그리고 할거하던 군웅들의 구도 역시 어느정도 정리된 이후 반 조조 운동을 규정한 '외곽의 군벌이 힘을 길러 황제를 겁박하는 간신 조조를 처단한다' 명분을 만들어낸 데에는 원소의 기여도 어느정도 있다고 인정해줄만한 것이다. 저 명분을 한 편의 드라마에 비유한다면, 초반 한두편에서는 원소도 주요 등장인물로 내보낼만 하다고 인정해줄만 한 것. (물론 드라마 전체의 주인공은 아마 유비겠지만.)
    이 점에서 '반론'의 한계를 지적한다면, '협천자'라는 개념 자체를 너무 단순하게 보고 있다. '누구를, 어떻게' 협천자하면 '어떤 결과'가 나오는가 자체가 고도의 정치적 행위와 그 작용임을 생각하지 않고 그저 '협천자하면 명분이 생겨서 좋은 건데 원소는 협천자를 안해서 그 효과를 못 받았다' 정도로 극히 단순화, 평면화시켜 접근하고 있다는 것.

5.2. 행정적 능력

원소는 호족과 세력가들은 숙청하면서 백성들에게는 유화적인 선전 책략을 매우 잘 썼다.

집권을 위한 정치적 능력은 만렙에 가깝지만, 강역 내에서의 실제적인 통치 능력은 특정한 정책을 펼쳤다는 기록이 없어 구체적인 상을 그리기 어렵다. 긍정적인 기사와 부정적인 기사가 혼재하는데, 부정적인 기사로는 조조가 원상을 격파하고 기주를 평정한 뒤 기주민들에게 내린 포고령에 따르면 원소의 정치는 방만해서 호족들의 발호가 심했다고 하며, 곽가전에 언급된 십승십패론에서 곽가는 한나라의 정치가 지나치게 관대해서 망했는데, 원소는 관용으로 그르쳐진 정치를 관용으로 바로잡으려 하니 답이 없고, 사나움으로 바로잡아 위아래가 제각기 분수를 아는 조조의 통치가 훌륭하다고 평했으며, 왕수전에서도 원소의 비호 아래 권세가들이 재물을 많이 축적해 심배의 재산이 억대에 달했다는 기사가 있다.

한편 긍정적인 기사로는 순유가 원소는 평소 한족과 오랑캐를 아우르며 널리 은혜를 베풀었으니 비록 (조조가) 하북을 점령했지만 진심으로 이들이 (조조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고 진언한 순유전의 기사가 있으며, 헌제춘추에서는 원소의 정치가 관후하여 크게 존경을 받았고, 원소의 통치가 미치는 하북 4주의 지체 높은 사대부로부터 비천한 아낙네에 이르기까지 모든 계층을 막론하고 원소를 흠모해 불평하는 목소리가 없었으며, 원소가 죽었을 때는 온 도시의 저자가 통곡과 비탄으로 마비되었으며 심지어 그의 죽음을 두고 부모상을 치르는 백성들까지 있었다고 한다. 한편 괴담집인 수신기에는 도삭군 신앙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는데, 이는 원소가 사후 민간에서 신격화되어 숭배받던 흔적으로 보인다.

긍정적으로 보는 쪽이든 비판적으로 보는 쪽이든 관용과 은혜로 다스린다는 평가는 일관되게 나타나고 있는데, 여러 정황을 봤을 때 협천자라는 강력한 권위를 통해 중앙집권적인 정책을 추진했던 조조와 비교해 상대적으로 토호들과의 느슨한 연립체계에 가까웠고, 그만큼 권력이 분산되어 효율적인 중앙집권 체제를 만들진 못했던 것이 사실에 가까워 보이지만, 호평을 받은 기록을 감안한다면 그래도 큰 문제는 없이 그럭저럭 운용되었고, 명색이 은혜와 관용을 내세웠던 다른 군웅들보다 도드라지는 관용의 정치를 펼처 백성들의 지지를 얻은 것은 맞는 듯하다.

물론 은혜와 관용을 내걸었다곤 하나 이것도 연이은 군사적 성공으로 안정적인 강역을 확보해 여유가 생긴 뒤에나 그랬던 것으로 보이고, 궁핍했던 초반에는 잘만 약탈하고 다녔다.[30][31]

또한 196년의 협천자 논의부터 시작해 관도대전에서 정점을 찍은 원소와 호족 출신인 저수, 전풍 등과의 격렬한 대립과 곽도를 필두로 하는 예주 출신 인사들의 대두는 어리석은 암군 원소와 현명한 충신 저수, 전풍. 간신 곽도, 봉기의 구도로 보는 것이 전통적인 해석이었으나 최근에는 원소의 권력 강화에 따른 토호세력 숙청과 일족, 친위 파벌 육성을 통한 정치체계 개편으로 보는 해석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문제는, 역사 상 뛰어난 군주들은 그 누구도 과업이 완수되지 않았는데 원소처럼 섣부르게 공신 숙청을 단행하지 않았다는 것. 공신 숙청으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유방이나 주원장을 보면 바로 알 수 있다. 그럼에도 호족 세력 약화를 위해 전풍과 저수 같은 중요 대신을, 그것도 전쟁이 한창 진행 중인데 숙청한다는 것은 그 어떤 기준으로 봐도 어리석은 결정이라고 볼 수 밖에 없으며, 원소 재평가론에서 말하는 객관적인 이유만으로 숙청이 이루어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5.3. 군사적 능력

원소의 세력이 강했을 때는 조차도 마음이 흔들렸다. 내가 그랬을진대 하물며 다른 이들은 어땠겠느냐.
조조[32]
원소는 후한 말 군벌 중 가장 강력한 세력을 구축했다. 비록 초기에 기주를 얻는 과정이나 공손찬을 기만하는 것으로 보면 병법이나 용병술보다는 정략과 모략으로 이룬 승리이지만 말이다.

원소는 군사적 성과는 동시대 군벌들 중 뛰어난 편이다. 원소는 불리한 정세에서 극적인 승리를 여러 차례 보인 인물이며, 관도대전 이전까지의 활약상은 조조와 비견될 만하다. 4개 주에 영향력을 떨치던 공손찬을 오히려 불리한 전황에서도 수차례 무찔렀고, 관도대전에서도 오소 이전까지 확실한 우위를 점하며 전략적으로 조조를 완전히 몰아넣었다. 다만 사람들이 관도대전의 오소 습격 이후의 모습만을 기억해서 문제다. 거기에 원소와 그의 세력들은 관도의 대패에도 불구하고 반란세력을 제압하는 등 여전히 강대한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원소의 191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전적은 다음과 같다.
  • 191년, 공손찬과의 계교 전투 승리
    • 같은 해, 흑산적 두장과의 업 전투 승리
    • 같은 해, 흑산적 우독과의 척구전투 승리
  • 192년, 업 근처에 주둔중인, 흑산적 유석군을 대파.
    • 같은 해, 광천에서 공손찬군을 대파.
  • 193년, 조조와의 연합. 발간에서 도겸군을 격파.
    • 같은 해, 흑산적 장연과의 흑산전투 승리
    • 같은 해, 여포와의 연합. 상산에서 장연군을 대파.
    • 같은 해, 우독에게 본거지 업을 내주나 다시 싸워 승리.
  • 195년, 포구에서 공손찬군을 대파.
  • 196년, 동군에서 장홍군을 격파.
  • 197년 ~ 198년, 공손찬군을 대파하며 연승.
  • 199년, 역경에서 흑산적 장연군을 대파.
    • 같은 해, 역경에서 공손찬군을 전멸.
  • 200년, 중원의 패권을 두고 싸운 관도대전 발발.
    • 같은 해, 안량 · 문추, 조조와의 백마, 연진전투 패배
    • 같은 해, 관도에서 조조군을 상대로 대패.
  • 201년, 기주 근처의 반란 세력 진압.
    • 같은 해, 창정에서 원소군 잔당이 대패.
  • 202년, 원소 병사

전적만으로 보면 그의 군사적 능력이 꽤나 준수했음을 알 수 있다.

반동탁연합 해산 시점까지 원소의 입지는 군사력이 아닌 여론의 지지뿐이었다. 즉, 명성만큼은 높았으나 실제 세력은 미약해 자력으로 군세를 유지할 역량조차 없이 한복의 지원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었다. 초기에는 독자적인 군벌로 보기에도 애매한 군사력만 있었다는 소리였다. 이렇게 군사력이 부족했던 원소를 지원했던 한복은 동탁에게서 원소에 대한 통제, 감시역으로 임명되었던 인물이다. 그가 원소를 후원한 동기는 여론이 원소에게 있으니 그를 후원하는 것이 얻을 것이 많겠다는 판단에서였다. 원소가 반동탁연합의 맹주로 추대된 것도 연합의 성격을 규정하기 위한 상징적인 의미였다. 그런데 반동탁 연합군은 소득 없이 해산되었고, 이 시점에서 한복과의 관계는 파탄이 났다.

이때, 원소는 공손찬을 끌어들여 한복을 대파하고 그를 협상 테이블로 끌어들인다. 이런 상황에서 원소는 한복과 공손찬을 싸움 붙여서, 한복의 주력이 공손찬에게로 향한 사이, 장양과 어부라 등 다른 기주 군벌들을 신속히 격파, 병합하여 군세를 크게 확장시켰다. 물론 애초에 군세의 자력 유지가 불가능하던 상황에서 더욱 수를 늘렸으니 일단은 허장성세에 가까운 오합지졸이었다.

당황한 한복의 측근들은 원소를 열흘 안에 격파할 수 있다고 호언했지만, 한복으로서는 얕보던 원소가 당장 저리 커버렸으니 원소에게 전력을 집중했을 때, 공손찬이 남하할 경우 결국 동귀어진이 되는 것이 문제가 될 수 있었다. 덕분에 원소는 한복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와서, 기주목의 자리를 양도받을 수 있게 되었다. 이 상황에 대해서는 흔히 원소가 지닌 계략의 주도면밀함만이 강조되는 경향이 강하나, 기본적으로 장양, 어부라의 신속한 격파, 병합이라는 군사적 능력까지 뒷받침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후 원소는 계교전투에서 공손찬을 격파한다. 공손찬도 당대 중국 최강의 세력이었기에, 금방 세력을 수습하여 재공세로 전황이 장기화됐다. 하지만 원소는 용주에서 또다시 공손찬을 대파해 기주에서 쫓아내는 데 성공했다.

이어진 장연과의 대결에서는 아예 근거지를 완전히 함락당하는 상황에 놓였다. 심지어 장연이 장안 조정의 관리를 통해 지배 공고화에 들어간 상황에서, 원소는 공손찬과의 전쟁을 막 마친 군세를 이끌고 귀환해, 성을 끼고 항거하는 우독의 1만 군세를 5일 만에 전멸시켰으며, 다시 산을 타고 넘어가면서 험요지에 주둔한 군세를 상대로 공격을 거듭해 이들을 연이어 패퇴시키고는, 상산으로 쭉 올라가 장연의 본대까지 털어버렸고, 패주하는 장연을 추격하는 시점에서야 군사들이 퍼져서 물러났다.

이런 원소의 군사적인 업적들은 한복-공손찬-장연으로 연달아 벌어지는 불리한 대립구도에서 달성한 군사적 성공이다.

이후 원소의 대규모 군사 운용은 198년의 역경 공략 이전까지 확연히 줄어드는데, 이미 구 한복계는 저수를 제외하고 모조리 숙청되었으며, 공손찬은 용주에서의 패배 이후 유우를 격파하고 세력을 만회하려 했지만 유화를 앞세운 원소의 공작과 유우 잔당들의 봉기로 내상을 심하게 입어 그 자신은 역경루에 틀어박힌 채 각지에 파견된 자사들이 원소의 수하들에게 각개격파당했고, 장연은 패하여 그 많던 무리가 와해되었다는 기록뿐이지만, 수십 개에 이르는 연립세력의 맹주라는 특성상 장연 본대의 참패로 극심한 내부 분열을 피하기 어려웠을 점을 감안한다면, 이 시점의 원소는 직접 대규모 거병에 나서 현장을 통제할 필요 자체가 없었다.

기주는 그나마 안정되어 있어 다른 주들과 다르다는 저수의 발언(《후한서》 〈원소전〉), 원소 세력의 압도적인 물량 이미지 역시 결국은 초반의 연이은 군사적 대성공을 통해 통령체계를 빠르게 설립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공손찬이나 원술 같은 인물들이 다스리던 영역에서 백성들이 굶어죽다 못해 인육이 횡행하는데도 더더욱 수탈에 열을 올렸던 것은, 그들이 특별히 부도덕해서가 아니라, 싸울 때마다 전쟁에 지고 대내외적으로 위기에 몰린 상황에서, 역설적이게도 단지 군사력의 증강만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이자 그들 자신의 생명줄이 되어 선택지를 강요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나친 도덕적 옹호라고 여길 수 있지만, 원술은 서중응의 일화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자신의 말로가 좋지 못할 것임을 이미 한참 전에 정확히 예견했으면서도 끝까지 학정을 멈추지 않았다. 당시 원술이 주색과 향략에 빠져 있던 것은 차라리 현실도피에 가깝다고 봐야 할 것이며, 공손찬 역시 정신병적인 편집증 증세를 보였는데, 원술과는 방향성이 다르게 나타났지만 근본적인 동기 자체는 비슷할 것이다.

계교에서 공손찬을 격파하고 상산에서 장연을 격파할 당시 부장으로 종군하던 국의와 여포의 활약상이 부각되지만, 계교전투 당시 국의의 병력은 800명[33], 상산전투 당시 여포의 병력은 기병 수십 기로, 기록에 나타난 이들의 역할을 살펴보면 공손찬의 기병을 유인해 무력화시거나, 연속적인 기동으로 장연군의 전열을 교란하는 보조적인 활약에 그쳤다. 물론 국의와 여포가 회전에서 본대 싸움이 벌어지기 전 상황을 유리하게 이끈 것은 맞지만, 이들을 기용하고 포진한 것 역시 지휘관의 능력이고, 애초에 회전에서 전세 자체를 결정짓는 것은 여포와 국의가 아니라 결국 원소가 이끄는 본대의 역할이다.

사실 관도대전의 패배는 일반적인 전황이라면 절대 패배할 수 없는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평소 그의 제왕적, 유아독존적 태도로 인해 유발되던 불합리와 휘하 인물들의 충성심 저하 등의 고질적인 문제가 오소 사건을 기점으로 선을 넘으면서 한 번에 터져나온 정치적인 문제가 크다. 군사적 능력 자체는 우수한 편에 속하지만 최소한 관도대전 당시에는 성질 급한 모습을 곧잘 보여주고 주의력이 부족했던 측면이 있다.[34]

일례로 원소는 연진으로 향한 조조의 의군에 낚여 본대의 도하 장소를 연진으로 설정하며 안량 등을 고립시켰는데, 원소가 왜 이런 판단을 내렸는지에 대해 기록에서 명시되어 있진 않으나, 당시 선봉의 포진은 안량, 곽도, 순우경 등의 정예 멤버로 구성되어 있었고 숫자상으로도 1만 이상의 대군이었으며, 지도를 살펴보면 연진에서 백마로 향하면서 조조를 포위하는 것이 가능했다.

이를 살펴보면 원소의 구상은 안량 등의 선봉대가 쉽게 무너질 가능성은 전혀 없으니, 그 사이 연진을 확실히 점거함으로서 혹시 모르는 배후 공략의 가능성을 원천봉쇄하고, 백마의 안량과 합류하며 안량을 치러 들어간 조조를 역포위할 수 있으니 오히려 조조의 의도에 낚여주는 척 일거양득을 노린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대장인 안량이 관우와의 일기토에 져서 참살당하고 관우로 인해 원소군 장수들이 모두 물러남으로 인해 물거품.

관도대전의 명운을 가른 오소전투 당시에도 비슷한 모습을 보여주는데, 오소가 넘어갈 경우 보급에 치명타를 받는 게 뻔한 상황임에도 오히려 승리를 확신하고 본진의 공세를 강화했으며 오소의 원군으로는 기병대만을 파견했다. 이 역시 기동성을 중시한 포진으로 조조가 순우경과 싸우는 사이 조조 본대의 후열을 박살내고 주력군이 빠진 조조군 본진도 정리하는 일타쌍피를 노린 전략으로 볼 수 있고, 이번에도 조조가 순우경군을 먼저 박살내면서 결과는 시궁창. 그나마 순우경의 경우 쓸데없이 전방에서 지휘하다 원턴킬 났던 안량과 달리 조조 본인까지 피칠갑을 하는 처절한 싸움 끝에 간발의 차로 지긴 했다.

이런 행보에 대해서는 정규군 10만을 동원한 장거리 원정이라는 군벌시대 당시로서는 유례 없던 일을 벌였던 데다, 내부적으로는 전풍, 저수 등 반대파들을 모조리 숙청시키는 초강수를 두며 거창하게 원정을 시작했던 만큼 전쟁이 길어질수록 초조해지는 상황이었다는 분석이 있는데, 이에 따르면 전선을 끝까지 지켜내며 변화를 기다리자는 순욱의 진언은 원소군 지휘부의 내분 요소를 순욱이 정확히 간파한 것이다.

사실 계교 전투에서도 본대와 떨어져서 앞서나가다가 다 이긴 판을 공손찬군의 역습으로 죽을 뻔한 전력이 있다. 공손찬 상대로는 특유의 뚝심과 과감한 역습으로 위기를 헤쳐나왔지만 관도에서는 그렇게 되지 못했고 결국 패전으로 이어졌다. 사실 조조가 오소를 공격하는 상황은 계교전투 때처럼 정면돌파 해서 기세로 밀고 나가는 것 말고는 난관을 파해할 방법이 없는 상황이 아니라, 조조의 오소 습격만 확실하게 막아내고 전세만 유지했어도 무조건 이기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오히려 대역전을 당할 수도 있는 본진 공격을 성급하게 지시하면서 사태가 완전히 꼬이기 시작했고 여기에 세력 내부의 인사, 정치적인 문제가 터지면서 1선 사령관들의 배반으로 이어진다. 자아도취가 강한 원소의 성격상 화려한 승리를 얻고 싶었던 것일 가능성이 엿보인다.

유비서주에서 조조의 공격을 받고 있을 때, 원소가 아들의 병을 핑계로 지원을 늦게 해주는 바람에 유비가 패망했다는 점을 들어서 고작 가족의 병 때문에 거병하지 않은[35] 원소의 전략적 안목이 부족하다고 비판하는 의견도 있다. 반박하는 측면의 의견으로는 원소가 서주와 유비의 지원에 그리 크게 연연할 필요는 없다는 게 요지이다. 원소는 기주, 유주, 병주, 청주의 4개 주를 차지하고 있었고, 조조 세력은 연주와 예주, 사예 일부를 가지고 있었다. 유비는 서주를 보유하고 있고, 후방에는 형주의 유표도 있다. 즉, 원소(4), 조조(2.5), 유비(1), 유표(1) 이라는 세력비다. 전력비를 보면 원소의 우위는 거의 절대적이다. 게다가 설사 조조가 유비를 물리치고 서주를 차지한다고 해도, 이미 조조는 서주대학살을 벌인 전력이 있어 서주에서 조조의 지배가 확고하게 굳어지려면 시간이 걸릴 것이다. 조조에게 패망한 유비는 겨우 몸만 도망쳐 나와서 원소에게 '명분'을 가져다 바치는 존재로 전락했다. 원소는 수백리 앞에서 유비를 마중했다고 하는데, 유비가 필요할 때는 거의 도와주지도 않던 인물이 정작 망하고 오니까 이러는 걸 보면 안면 철판도 대단한 수준. 유비 역시 이런 원소의 의도를 모를 리는 없었기에 원소의 객장으로 있으면서 은근히 세력을 모으고 자주 여남 쪽으로 이런저런 이유를 대 가며 이동하면서 결국 원소에게서 벗어나 버렸다.[36]

한편으로 따지고 보면 한복의 기주목 양도를 위해 장양과 어부라를 격파, 병합해 세를 늘렸지만 장양,어부라의 병합은 물리적인 격파 자체보다는 교섭이 주된 이유였고, 그조차도 역시 실질적인 전력증강에는 일절 도움이 안 되는 한복과의 협상용 패였으며, 업성 탈환 역시 전과 자체로는 어마어마한 포스를 보이긴 했지만 결국 도승으로 대표되는 흑산적 두령들 사이의 내부분열과 이를 이용한 각개격파에 가깝고, 후기 공손찬과의 전투 역시 대대적인 선전공작을 통해 싸그리 털어먹은 뒤 역경루에 틀어박힌 공손찬을 형세의 우위를 통해 소모전으로 압살했는데, 어떤 의미로는 조조처럼 전투 자체에 강한 장군이라기보다는 정치, 전략적 개념의 연장으로 전쟁을 접하는 정치가에 가깝다고 볼 수도 있다.

원소 자신은 자신이 참전한 모든 전투 중 계교전투를 가장 기적적인 대승[37]으로 평가하고 있는데, 모략을 좋아하며 과감성이 없다는 평가는 이런 측면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비록 국지적인 과감성은 보였을지 몰라도, 형세 자체가 극도로 열세해 사실상 회전을 강제당한 계교전투나 절묘한 판짜기로 조조를 한계까지 몰아붙였음에도 생각 외로 전선이 고착되면서 조급증이 극에 달한 관도대전 후반의 모습 정도를 제외하면 전투 자체를 통해 형세를 결정짓기보단 대체로 모략을 통한 형세의 우위로 이미 짜여진 각본 안에서 날로 먹는 전개를 선호했기 때문.[38]

곽가는 원소를 평가하면서 일은 많이 벌여놓는데 요령이 없고, 결단이 늦어 후수를 두고, 허장성세를 좋아해 용병의 요체를 모른다며 극딜했는데, 아마 이런 성향의 단점일 것이다. 잘 풀리면 치밀한 모략으로 상대를 옭아매어 이미 싸우기도 전에 승패를 결정지은 뒤 압도적으로 확인사살하는 전개가 나오지만, 안 풀리면 살을 주고 뼈를 깎는 군사적 결단으로 간단히 처리할 수 있는 일을 잃는 것 하나 없이 잔꾀로 해결하려다 결국 문제만 더 크고 복잡해지는 전개가 되기 때문. 십상시의 난이 가장 대표적인 케이스인데, 애꿎은 양민들이 원소에게 학살당하고 하씨일족과 십상시 등 엮인 사람들까지 싸그리 죽는 수준을 넘어 결과적으론 나라 전체가 풍비박산났다. 원소 본인이야 그 와중에서도 이런저런 잔꾀를 부려 가문이 멸족당하고 나라가 망하든 말든 개의치 않고 오히려 명분과 여론의 지지라는 정치적 자산만 잔뜩 챙겨서 최대의 실력자로 자리잡았으니 궁극적으로는 손해라고 여기지도 않았겠지만.

그런데 희한하게도 후대에 이런 원소의 군사적 능력에 대해 평가한 사가가 별로 없다. 그나마 있는 것이 자치통감에서 관도전투 직후에 서술된 사마광의 평인데, 전술한 바와 같이 원소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5.4. 용인술

원소 자신의 직속 측근이 법령을 어기자 이를 처형한 뒤 보고한 견초를 문책하지 않고 기특하게 여기며 높게 평가했다는 일화가 견초전에 남아있기도 한데, 이런 일화로 공명정대하고 대인배스러운 인상을 받을 수도 있다. 다만 이런 일화성 기록을 배제하고[39] 전반적인 행적에서 용인술과 인사 관리 측면을 살펴봤을 때 기주 입성 이후부터의 원소는 혈족 중시[40] + 자신의 정치적 명성과 권력에 모여든 구름같은 무리들 중 적당한 인물을 필요한 곳에 뽑아 쓰다가 이용가치가 떨어지면 곧바로 숙청하고 다른 적당한 인물을 뽑는 식의 인사를 반복한다는 인상이 유난히 두드러지는데, 권력자의 혈족 중시 경향이야 조씨, 하후씨의 요직 독점까지 갈 것도 없이 만국공통이지만, 숙청의 경우 그렇게 괴멸적으로 기록이 적은 가운데 사서에 이름이 남은 네임드만 주한, 장도, 유훈, 동소, 여포, 장홍, 국의, 경포, 전풍, 저수 등 측근으로 활약하다 숙청당하는 기록이 남은 인물들이 어마어마하게 많고, 심지어 장합, 고람처럼 잘못이 없는데도 억울하게 숙청당할 것이 두려워 전장에서 배신하는 상황이 발생할 정도로 당대 군벌들 중 도무지 비슷한 사례를 찾기 힘들 정도다.

즉, 혈족 중시 경향, 무수한 친정을 통한 군사적 권위 확보, 열사 이미지를 통한 정치적 권위 확보, 폭넓은 인사 임용을 함과 동시에 한편으로는 자신의 권위를 위협하는 내부 인사에 대한 가차없는 숙청과 견제, 지속적인 측근 교체와 충성 경쟁 유도 등, 궁극적인 목적이 본인 1인으로의 권력 집중 / 강화라는 측면이 있었다.

충성 경쟁을 조장하기 쉬운 이런 인사는 조직을 경직되고 비효율적으로 만들지만, 그만큼 우두머리의 권력은 천하무적이 된다는 이점이 있었고[41][42], 원소 자신도 이를 의도한 것으로 보이나 관도대전 패배를 결정지은 허유, 장합의 배신이나 관도 패배 이후 세력 내의 전국적인 반란에서 보이듯이, 외부적 요소 때문에 자신의 카리스마가 무너진다면 내분으로 헬게이트를 열 가능성이 높았고, 이것은 원소의 사망 이후에 실현된다. 원소 자신은 군사, 정치적인 노회함으로 번번히 위기를 극복했고, 관도 패전 이후에도 무수한 반란을 가혹히 진압하면서 오히려 신격화에 이를 정도로 세력기반 내에서의 권력을 확고히 했으나, 원소가 죽고난 뒤 후계자가 이런 카리스마를 대체하기는 어려웠고, 여기에 원소가 병사했다는 것, 원상의 나이가 어렸다는 것, 폐출된 원담이 후계에 도전했다는 것, 원상의 후견인으로 권력을 잡은 인물이 하필이면 전략적 식견도 포용력도 전무한 심배였다는[43] 것, 당연하게도 이를 틈탄 조조가 쳐들어오는 등의 몇 가지 요소가 맞물리면서 최악으로 흘러가 사실상 패망의 원인이 되었다.

종합해 보면 권모술수에 능하고 위선적이며 부하들을 소모품 취급하는 전형적인 독재자형 용인술인데, 동탁, 공손찬, 여포, 원술, 유표 등이 특정 계파를 지나치게 무시해 반발을 사거나 혹은 지나치게 중시하다가 오히려 휘둘리거나 통수를 맞는 것과 비교하면 조직관리의 측면에선 확실히 낫다고 볼 수 있고[44], 기존의 질서나 가치관 따위는 신경쓰지 않고 자신의 권력에만 몰두했던 만큼 인재를 보는 기준은 도적떼의 무리조차 거리낌없이 임용한다고 비판받았듯 권력에 도움이 되냐 아니냐의 합리적(?)인 관점이지, 신분과 명성으로 사람을 판단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용하고 버리긴 했을지언정.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인재를 버릴 시점이 아닌데 자신의 체면 치례나 책임 회피를 위해 능력 있는 부하들을 아무 거리낌 없이 숙청해 버린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또한, 숙청과는 별개로 옳은 의견은 수용한다면 크게 문제가 없었을 텐데 자기애가 강한 원소는 그것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사실 이것이 진짜 가장 중요한 점일 수 있는데, 단적으로 말해 숙청은 하더라도 전풍과 저수의 조언 중 핵심적인 몇 가지만 취사 선택해서 들었다면 애초에 관도대전에서 질 일도 없었을 뿐더러, 설혹 졌다 하더라도 그뒤로 그렇게 호족들 반란에 어려움을 겪지도, 사후 후계 문제로 제풀에 무너지지도 않았을 것이었다. 그 즈음의 원소는 아직 젊은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저수, 전풍이 제시하는 옳은 선택을 모조리 거절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것이 원소가 그 즈음 곽도, 신평 등의 간신들에게 둘러싸여 오만해졌기 때문인지, 저수, 전풍을 숙청하기 위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지병 때문에 판단력이 흐려졌기 때문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어쨌거나 관도대전 즈음의 원소는 항상 좋은 선택지를 앞에 두고도 오판에 오판을 거듭하는 실책을 보여주었고, 그것이 원소군을 멸망으로 이끈것 만은 틀림없다.

5.5. 도덕성

한마디로 조조 못잖은 간웅.

기존의 해석(연의의 영향)으로는 냉혈한 개혁가 조조와 대비되는 우유부단하고 온건한 인물로 여겨졌다. 원소는 정치적으로 관후하여 백성들에게 칭송받고 조조의 하북 평정 이후로도 원소의 정치를 그리워하는 백성들이 있었다는 기록 때문에 동탁, 원술, 공손찬 같이 대놓고 막장 통치를 하던 군벌적인 효율성만을 추구해 가혹한 정치를 편 조조와 비교해 나름대로 도덕군자였다는 막연한 이미지가 있었지만, 사실은 원소는 십상시를 몰아내기 위해 맹진항 사건을 꾸며 관청과 가옥을 방화하고, 6년상으로 효자 코스프레를 해놓고선 기회가 되자 낙양의 일족들을 저버리고 반동탁연합의 수장이 되어 냑양의 일족들이 동탁에게 멸족당하게 내버려두는 등 위선적인 면을 보인다.

후한말 군벌난립기에 온갖 다양한 막장 인간군상이 있었지만 동탁, 원술, 공손찬, 여포는 그저 탐욕만 추구하던 악당이고 간웅이라는 조조는 오히려 직설적이고 솔직한 인물로 보일 지경이다. 후한말의 풍운아로 막장스러운 시대에 출현한 막장스러운 세기말 정치가. 말 그대로 시대가 만들어낸 압도적인 정치 괴물[45]이라는 평이 적절할 것이다.

영웅주의 사관의 영향이 강한 삼국지 팬덤에서 흔히 '시대를 선도하는 영웅'과 대비되는 '무엇 하나 제대로 하는 일도 없으면서 불평만 많은 지식인' 포지션 쯤으로 취급되던 공융 같은 인물이 재조명된 것도 당시 원빠들의 영향. 공융 항목에서 그 잔해를 확인할 수 있다.

원소는 삼국지의 부정적인 기록을 부풀리고 재해석한 삼국지연의의 묘사에 다시 이런저런 살이 붙으며 수구꼴통 혹은 암군 이미지로 폄하되었다. 하지만 이를 걷어내고 보더라도 기회주의적이고 부패한 정치인의 표상과도 같고, 어떤 의미로는 경지에 달한 통찰력과 카리스마로 정치, 외교, 행정, 군사 등 다방면에 뛰어난 역량을 보인 걸물이기도 했던, 명암이 극단적으로 갈리는 여러 가지 의미로 도덕 따윈 초월해버린 문제적인 책략가. 현대의 인물상에 비유하자면, 공도 있지만 과 역시 너무 뚜렷해서 평가가 극명히 갈리는 능력있지만 냉혹한 독재자 스타일의 인물이 원소다.

이미 후한 시대에 유교적 관습등은 그 중심이 되는 마음은 잃어버린채 일종의 껍데기만 남아 작동하는 면이 많았다. 이에 대한 반발로 건안문학을 기치로 자기 감정에 솔직하자, 는 식의 행동이 위진남북조의 초창기 사상에 영향을 미쳐 나중에는 이게 반대로 감정에 솔직하다못해 도덕성과 윤리성이 나락으로 떨어져 안그래도 막장이었던 위진남북조의 분위기를 더 혼탁하게 하기도 했지만 말이다. 그러나 원소는 3년 상 두 번을 비롯해서, 이미 유교적 관습등이 껍데기만 남은 시점에서도 당대의 기본적 관습과 사회 분위기를 철저하게 이용해 자신을 효자, 동탁에 맞서는 전중국의 영웅 등으로 자리매김 했지만, 정작 일가친적이 몰살 당했을 때는 이것을 자신의 정치적 기회로 삼았고 업성의 가족이 위험할 때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보통 미디어매체에서 조조를 시대를 초월한[46] 기존 관습을 타파한 영웅이라는 식으로 묘사하지만, 실제의 원소는 시대의 영웅처럼 보이면서도 정작 그 어떤 누구보다 그 시대를 조롱하는 듯한 인물이었다.

정치적 곡예에 가까운 기만과 술수들은 후한 말 정치판의 거물들 중에서도 유독 두드러지는 원소의 특징이었으나 원소는 뚜렷한 정치적 철학이나 소신보다는 자신의 정치적 야심만을 중요시했다. 천하를 다스리고 나라의 질서를 세운다는 측면에서 이런 약삭빠름은 지극히 근시안적이고 이기적인 태도라고 볼 수 있고, 결과적으로 원소가 초래한 30년간의 난세와 후한의 멸망은 원소 자신까지도 삼켜버렸다.

어떻게 보면 조조가 지닌 간웅이라는 인물상도 잘 어울린다. 하지만 크고 아름다운 수컷을 의미하는 웅자는 확실히 들어맞되, 원소의 우악스러운 카리스마를 덮기에는 부족하다. 표독스러움을 강조한다면 효웅이 들어맞는 표현이겠지만, 哮라는 글자에는 맹렬하고, 거칠고 사나운 정도의 의미가 강해 특유의 표리부동하고 음험한 위선성을 나타내기는 부족하다. 굳이 원소의 인물상에 딱 들어맞는 글자를 찾자면 간(奸)이나 효(梟) 보다는 '거스름, 일그러짐, 사악함, 혼란스럽게 함, (본질을) 감춤, 갑자기 나타나다.' 등의 뜻을 가진 패(悖)라는 글자가 가장 어울릴 것이다. 패왕 할 때 쓰이는 패(覇-으뜸 패) 와는 다른 글자인데,[47] 이 悖는 보통 패륜, 패악, 패역, 행패 등 간이나 효가 무색해질 정도로 정말 안 좋은 의미의 극단을 나타낼때 쓰이며 사실상 간과 효를 포괄하는 개념. 근데 의외로 딱 들어맞는다.

전체적으로 보아, 위의 평가 요약부분에 적힌 대로 자기애성 성격장애의 성향을 매우 강하게 보이며, 이러한 성격적, 윤리적 결함에서 비롯된 극단적인 이기주의와 위선이 처음에는 큰 이득을 가져다 주었지만, 결국에는 부메랑이 되어 돌아와 멸망의 원인이 되었다고 하겠다.

5.6. 외모와 쇼맨쉽

삼국지와 후한서에 남겨진 원소열전 첫머리부터 언급되듯 대단한 미남이었다고 하며, 신분과 교육수준, 성격, 성별, 나이를 막론하고 타인의 환심을 사는 것에 극도로 능숙했던 것은 특유의 쇼맨쉽 덕분이었다. 물론, 여기에는 외모지상주의에서 오는 이익 또한 엄청나게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48]

6년상과 낙양에서의 재야 활동 / 맹진 초토화와 원씨 일족 몰살이라는 사례를 제외하고 봐도 정치 쇼를 자주 벌였는데, 동탁과 대판 싸우고 낙양을 떠날 때는 낙양성 동문에 관인과 부절을 보란듯이 걸어놓고 나가면서 동탁 집권의 정당성을 대놓고 공개적으로 부정하는 퍼포먼스를 벌였고[49], 한복의 자택에 찾아와서 그 아들에게 테러를 벌인 주한을 붙잡아 참수했으면서도, 전풍과 심배, 주한을 기용하여 대놓고 충성경쟁을 시키듯 구 한복파에 대한 백색테러를 조장[50]했던 것이나, 경포를 시켜 칭제를 건의하도록 하다가 여론이 나쁘자 경포를 죽여 입막음해버린 사건도 교묘한 느낌을 주기는 마찬가지. 여포의 경우는 세력 내부의 여론이 나쁜 것을 감지하자 여포 스스로 원소에게 자신이 낙양으로 떠나겠다고 건의했는데, 사례교위직을 여포에게 양도하며 환송식까지 거하게 벌여놓고 뒤로는 자객을 보냈다. 물론 정치쇼 벌이던 군벌들은 조조, 유비, 손권 포함해 한둘이 아니지만 유독 두드러지는 편.

겉으로는 관후하나 시의심이 많다는 평가는 이런 측면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이나 쇼맨쉽이 꼭 이렇게 더러운 쪽으로만 나타난 건 아니라서, 공손찬과의 전투에서 포위되자 도망은커녕 관모를 집어던지며 선두에서 분전해 포위를 풀거나 장연의 업성 전복 소식으로 멘붕에 빠진 참모진을 태연자약하게 하드캐리하는 폭풍간지의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51]

정태는 동탁에게 아첨하면서 원소를 수도에서 나고 자라 외모만 반듯한 멀대 같은 인간이며 한주먹거리도 안될 겁쟁이로 평가했다. 정작 정태는 원소와 내통하고 있었으며 동탁의 호의를 사 군사를 얻으면 함께 동탁의 뒷통수를 후려갈길 계획을 세우고 있었기에 본심이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본디 원소가 관료로서의 뚜렷한 군사,행정적 업적이나 기반은 거의 전무한 채 재야에서의 반정권 퍼포먼스와 여론몰이 등 명분 자체는 그럴듯하지만 나쁘게 보면 정치적 선동에 가까운 방식으로 거물로 성장했던 점을 볼때 나름대로 뼈가 있는 평가. 물론 겁쟁이라는 평가는 절대로 사실이 아니다. 각종 암살 위협이 빈번한 마도가 된 낙양을 내부에서 뒤엎겠다는 배짱으로 볼 때는.[52]

한편 겉으로는 온후관대하나 희노의 감정을 얼굴에 나타낸 적이 없었다는 후한서의 평을 볼 때, 정작 스스로는 감정적으로 극히 절제된 채 매사에 주위 사람들의 감정을 읽고 계산적으로 행동하는 무척 피곤한 삶을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중노동에 가까운 삼년상을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그것도 연이어 지냈던 걸 보면 기본적인 체력이 어지간히도 좋았다고 할 수 있지만, 이런 자기학대에 가까웠던 생활양식은 스트레스가 쌓이기 매우 쉽고 또 실제로도 결코 장수한 편은 아니다. 때문에, 체력이 쇠퇴하는 중장년에 접어들면서 사망했을 가능성이 크다. 조조가 보신을 위해 음식 섭취에 신경을 썼다는 설이 있고, 손권이 술로 오명이 있었다는 것으로 볼 때, 군주의 건강 관리도 중요한 부분이므로, 원소의 보신 부분은 결점이라고 할 수 있다.[53]

친구였던 조조의 경우는 종종 호방하다 못해 찌질하다고 여겨질 정도로 그 시대 기준에서 자기 감정의 희노애락에 굉장히 충실한 사람이었고, 이것이 건안문학의 기풍이 되기도 했다. 기뻐할 때 기뻐하고 슬퍼할 때 슬퍼하고 두려워할 때는 두려워 하며 감정을 내보였던 조조는 여러 번의 난국에서 거의 패망에 가까운 피해를 입어도 부드러운 나뭇가지처럼 넘기면서 멘탈을 추스리며 다시 회복했지만, 자기 세력의 본거지인 동시에 가족이 있는 업성이 함락되어도 눈하나 깜빡도 하지 않을 정도로 감정을 내보이는것을 피하며 늘 지독하게 강하게 버티는것을 선호했던 원소는 일생 최대의 실패로 인해 한번 부러지고 그걸로 생을 끝마쳤다. 이러한 인간상의 대비도 재밌는 부분.

6. 오해

6.1. 조조에게 열등감을 가졌었다?

익히 알려져 있듯 조조와는 어린 시절부터 친구였는데,[54][55] 이 때문에 라이벌 플래그를 만드는 매체들이 많다. 대부분의 삼국지 창작물에서 원소는 어린 시절부터 일방적으로 조조에게 열폭하는 모습을 보이나, 원소에 대한 기록이나 원소 자신이 남긴 글을 보면 원소는 조조에게 그다지 경쟁심을 가지지 않았다. 원소는 동탁, 원술, 공손찬 등을 의식했던 기록들이 있는데, 이들은 원소보다 강한 군사력을 지녔거나 원소보다 높은 이름값을 가졌다. 그에 비하면 조조는 이 시기 쯤엔 어느 쪽에도 해당되지 않는다.

오히려, 조조 측에서 원소를 의식했던 인상적인 기록들이 많다. 조조가 젊은 시절의 원소를 보며 장차 역적의 우두머리가 될 자라고 욕했다든가(황보밀 일사전), 원소의 편지 한 통에 흥분해 히스테리 증세를 보였다든가(삼국지 순욱전), 조조의 책사들이 원소를 의식하는 조조에게 양자의 재능의 차이를 비교하며 조조를 격려하는 등의 기록이 수두룩하다. 군웅할거 초반에 조조는 거의 원소에게 종속된 적도 있었고 원소의 도움을 받아 살아난 적도 있었다. 즉, 현대 삼국지에서 원소와 조조의 묘사는 정반대인 셈. 그가 본격적으로 이런 갑을 관계를 청산하게 된 것은 헌제를 받아들여 협천자를 하게 된 이후의 일이다.

훗날의 대립구도와 개혁가 조조vs수꼴 원소의 이미지 때문인지 서로를 경멸하는 관계로 묘사하는 경우가 많으나,[56] 실제로는 원소는 조조를 잘 대접했다. 삼국지 원소전 첫머리부터 조조와 유년기부터의 교분이 언급되어 있고, 숙청을 밥먹듯이 벌였던 시절에도 원소는 조조를 동군태수로 삼았으며, 조조가 협천자로 원소의 뒤통수를 치기 전까지 원소는 조조를 꾸준히 후원했다.

이 점에서는 같은 세대에 속하는 두 사람 중에서 먼저 정치적으로 두각을 드러낸 것이 원소라는 점 역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얼자 출신이라는 불리함[57]에도 불구하고 조조보다 훨씬 먼저 정치적으로 두각을 드러내고 독자적인 세력을 갖춘 것. 구체적으로 보면, 조조와 원소 모두 황제 직속군 지휘관인 서원팔교위로 뽑히면서 같은 시기에 중앙 정부에서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둘중에서 훨신 빨리 성장한 것은 원소로, 청류파[58]의 아이돌격인 입지를 이용해 정치적 1인자로 자리잡은 하진의 정치적 파트너로 위상을 다졌고, 십상시의 난으로 하진이 암살당한 이후에는 환관 주살을 주도했으며 동탁 집권 이후에는 반동탁 연합에서 맹주의 위상까지 차지했던 것.[59] 그리고 이러한 정치적 두각을 통해 군웅할거 시대에는 하북에 거대한 세력[60]을 구축하는 데에 이른 것이다. 반면 이 시기까지 조조의 세력은 아직 무수한 군벌 중 하나 정도로, 도저히 원소의 세력을 따를 수준이 되지 못했다. 현대 정치에 비교하자면 같은 시기 첫 공천을 받아 당선된 두 청년 정치인이 2선이나 3선 의원이 된 시점 정도에서 한 사람은 아직 보통 국회의원 중 한 사람으로 상임위원장 정도를 노리고 있는데 다른 한 사람은 주요 당직을 차지하고 자기 계파까지 꾸린 채 장관이나 총리 후보, 대권주자등으로 물망에 오르고 자기 당 정권에서 주요 구성원 역할까지 담당하고 있는 격이다.

군웅할거 초기 조조를 후원하던 원소의 태도나 원소에 대한 컴플렉스에 시달리던 조조의 모습 역시 이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다. 원소 입장에서는 어릴때부터 친구였고, 성향이나 성격도 비슷하고, 능력도 있는 조조를 자기 사람으로 여기고 후원해주는 것인데, 자기애와 자부심이 강한 조조 입장에서는 "대체 내가 원소만 못한게 뭐가 있다고 이러고 있어야 하는 거냐!" 열폭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인 것이다. 그리고 결국 협천자를 통해 독립적인 세력 기반을 확보하고 원소를 쓰러트리기에 이른 것.

조조와 원소는 성격 상 서로 유사한 점이 많은 편이었는데[61] 조조와 유비가 아치 에너미로 대극을 이루면서도 서로의 능력과 성격을 간파했다면 이 둘은 동류로서 서로를 이해하고 친근함을 느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조조는 원소가 죽고 하북을 손에 넣은 뒤에 사람이 좀 맛이 가는 모습을 보이는데, 원소의 존재는 조조에게 있어 그가 가장 힘을 발휘할 수 있는 동기부여를 줬다고도 할 수 있다. 유비의 경우에도 마지막의 적으로서 오래전부터 인식하고 있었지만, 이미 조조가 좀 맛이 간 뒤였다.[62]

조조 역시 하북을 평정한 뒤 원소의 무덤에서 장례를 지내며 곡을 한 사건을 보면 정말로 친했을 것이다.[63] 조조가 원소의 무덤에서 곡을 했던 일화는 하북 현지에서의 여론을 의식했다고 볼 수도 있지만, 조조 세력의 공식적인 입장은 어디까지나 조정의 수장으로서 황실을 능멸하는 역적 원소를 토벌한다는 것이었다. 즉, 이것은 자신의 세력이 내세운 정치적 명분을 조조의 개인적인 이유로 완전히 뒤엎은 행동이라 삼국시대가 종결된 이후 후대에조차 자기 말을 뒤집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조조가 흔히 알려진 것과 달리 무척이나 감정적인 사람이라는 것과 죽기 직전에 보인 태도를 보면 원소의 오랜 친구로서 감정이 북받쳐 올라 진심으로 슬퍼서 울었을 가능성이 크다.

조조는 죽기 전에 쓴 유촉에서 원소를 언급하는데, 개인적으로는 원소를 미워하는 감정이 전혀 없으며, 단지 원소가 워낙 편협하고 이기적이라 같이 왕실과 조정을 돕기로 했던 맹세[64]를 어긴 것이 안타까울 뿐이라 덧붙였다. 스스로를 충신이라 자칭하는 것을 빼면 정치권력 문제 때문에 갈라지고 서로 싸우고 결국 원소의 세력과 집안을 파멸시키기도 했지만 원소에 대한 우정은 죽을 때까지 남아 있었고, 원소의 최후에 대해서도 개인적으로는 안타까움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원소가 독선적인 것은 사실이기도 하고.

이런 걸 보면 조조의 입장에서 원소는 군웅으로서 평생을 넘어서야 했던 숙적이었지만, 그걸 제외하면 정말 소중했던 친구가 맞았던 것으로 보인다.

6.2. 후계자 선정에서 잘못을 했나?

삼국지를 다루는 매체 중에는 가끔 '원소는 우유부단해서 장자인 원담과 총애하는 원상 중 어느 쪽도 확실하게 후계자로 정하질 못해 이후 세력 분열을 유도했다'라고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틀리다. 우선 원소의 후계자 문제로 인하여 세력이 분열되고 결국 멸망한 것 자체는 사실이다. 하지만 원소가 둘 중 누구를 후계자로 할지 정하지 못했다는 건 사실이 아니다. 삼국지와 후한서 모두 원소가 원상을 후계자로 지정했다는 기록이 명백하게 존재하며, 그에 따라 원담을 아예 가문에서 폐출시켜 원소의 혈육이 다 마르지 않는 이상 원담측에서 승작하지 못하도록 차단해놨다. 원소의 문제는 어디까지나 원담을 가문에서 폐출해놓고도 정치/군사적인 면에서 완전히 배제하지를 않았다는 점이다.

우선 원소가 원담을 폐출한다는 극단적인 행보까지 보일 정도로 사이가 멀어지게 된 직접적인 계기에 대해서 사서상의 기록은 없다. 《후한서》에선 여양전투 직후 곽도와 신평이 원담을 부추기며 심배가 원소와 원담의 사이를 이간질했기 때문에 원담이 폐출되었다는 발언을 하고, 원담은 이를 그럴듯하다고 여기며 원상을 습격하는 구절이 있는데, 심배는 원상을 옹립하며 사실상 섭정역을 맡았지만 애초에 원상파였다기보다는 원담과 오래전부터 앙숙이었고 원소 사후 원담의 승계를 차단하기 위한 명분으로 원상을 옹립한 것에 가깝다. 때문에 원상의 총애와 별개로 원담 폐출의 직접적인 계기 또한 최소한 하나 이상은 있었을 것이다. 이에 대해 제일 지지받는 추정은 원담이 청주를 통치할 때 엉망인 모습을 보여서 원소가 크게 실망하여 후계자에서 배제하기로 마음먹었다는 설이다.

한편 원상을 굳이 후계자로 지목해 사후의 후계구도에 풍파를 일으킨 것에 대해 삼국지와 후한서는 모두 원상의 미모를 기이하게 여겼기 때문이라 적고 있고, 삼국지 강의의 저자 이중텐은 이에 대해 '멋쟁이의 후계자는 당연히 젊은 멋쟁이가 되어야 한다'고 해석했다. 하지만 미모만으로 후계자가 됐다는 사서들과는 달리, 원소 사후 권력기반이 극도로 불안정했을 때 이래저래 안좋은 모습을 보여준 원담과 달리 원상은 나이가 어림에도 상당히 분투하며 유능한 모습을 보였기에, 결과론적으로 미모만으로 후계자를 삼았다는 서술은 지나친 비약이라는 재평가 여론도 있다. 원소가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위엄이 있는 타입이라는 묘사를 볼 때, 굳이 아랫것들에게 후계자 선정의 이유를 설명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 참고로, 자신만의 이유로 자식 중 한 아이를 편애하는 것은 자기애성 성격장애에서 매우 흔하게 보이는 모습인데, 이 또한 자기애성 성격장애로 강하게 의심되는 원소와 부합된다.

어쨌든 그래서 원소는 후계자로 원담보다 원상에 더 무게를 둔 것은 확실해 보이는데, 문제는 앞서 말했듯 원담의 권력을 완전히 빼놓지 않았다는 것이다. 원담은 비록 원소의 실망을 사서 폐출당했지만, 군을 이끄는 지휘관, 장군으로서는 나름대로 능력이 있었다. 그래서 가문에서 폐출된 이후에도 중역으로 계속 남아있었다. 문제는 비단 삼국지 뿐만 아니라 역사의 어느 시대를 봐도 재능과 명분, 세력을 두루갖춘 장자가 왕위를 갖지 못하자 왕위계승자로 지정되었던 혈연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하려는 사례는 차고 넘친다는 것이다. 원소가 뭘 믿고 그랬는지 모르지만 진짜 안전하게 원상에게 모든걸 물려주고자 했다면 원담(+원희)의 권력을 완전히 무로 만들어놨어야 했으며, 좀 비정하지만 그 상태로 어딘가에 유폐시키던가 아예 죽여버렸어야 했다.

요약하자면 후계자 선정은 시대상 장자에 대한 권위, 그렇게 숙청을 잘하던 인물이 정작 후계자에서 배제한 아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점, 그 결과로 그 후계자의 기반을 위협할 세력을 조장시켰고 그 정리가 명확치 않은 상태에서 생을 마감함으로써 일을 크게 만들게 되었다고 정리할 수 있다.

사실 자신의 가문마저 일종의 장기말로 철저히 남들을 악용했던 냉혹한 원소가 원담을 숙청하지 않고 남겨두어 후계구도를 사실상 방치한 이유는 선뜻 이해하기 어렵지만 그 뿌리를 바로 원소의 특유 단물 빨아들이고 버리는 전형적인 독재자 스타일 용인술로 해석하면 이해가 가는 부분도 있다. 즉, 원소의 입장에서는 스스로 일인 독재 체재를 완성하기 위해 후계자 또한 잠재적 경쟁자로 봤을 가능성이 높으며, 그러므로 원담은 나이가 차고 군공도 있으니 잠재력 경쟁자로 봤고 늦둥이 아들은 비교적 컨트롤하기 쉬우니 바로 이런 차원에서 막내를 밀어줬을 수도 있다고 분석할 수 있다. 한편 이 관점에서 보면 동시에 영악한 원소는 원담을 폐출해도 끈끈한 원가 페밀리 테두리 안에 원담을 충성스러운 사냥개로 부려먹을 수 있다는 계산하에 숙청을 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이런 근시적인 태도의 문제는 사냥개는 주인이 없으면 주변인들을 문다는 점이다. 콘스탄티누스 1세도 비슷하게 군재가 뛰어난 장자를 앞세워서 로마를 통일했는데 원소와의 차이점이라면 그는 장자가 위험요소라고 판단되자 바로 숙청했다.[65] 어쨌든 이는 원소의 부족한 배려심 때문으로 볼 수 있으며, 이 뚜렷한 한계가 결국엔 본인의 가문을 철저히 멸망시키게 되는 요소가 되고야 만다.

또다른 이유로는 상술되었다시피 원소에게는 핵심 인재의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해서 그랬던 것도 있다. 원씨 일족은 동탁의 손에 죽었거나 원술 편에 붙었거나 둘 중 하나인 이상 원담을 당장 죽이느니 써먹는 편이 더 나았을 것이다.

추측의 영역이지만, 원소도 나름대로 생각이 있어서 언젠가 원담의 날개를 꺾어놓고 원상을 후계자로 굳히려 했지만 급사하는 바람에 계획이 꼬여버렸을지도 모른다. 우선 원소가 생각보다 이른 나이에 죽은 것은 사실이다. 원소가 벼슬생활을 한 시기나 아들들의 나이, 6년상 시기, 조조와 어린시절부터 친구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의 나이는 끽해야 조조보다 몇살 많은 정도라고 보는 게 타당하다. 낮게 잡으면 40대 후반 정도도 볼 수 있다. 즉, 죽을 당시 아무리 많아야 50대 초반이었을 것이다. 이 나이는 당시 기준으로 봐도 군주로서는 한참 활동할 나이이며, 죽을 걸 대비해 후사를 급하게 준비해야 할 나이는 아니었다.[66]

실제로 조조의 경우를 보더라도 그가 살아있을 때는 조식을 총애해 후계자 자리를 놓고 고민하고 있다가 조조가 60대 초반 나이에 위왕에 오른 다음에야 조비를 확실한 후계자로 밀어주었다. 조조가 원소 나이 때 후계자 선정을 놓고 누굴 결정했다는 기록은 없으며, 오히려 직전까지 조식을 총애하다가 가후의 설득 덕분에 조비로 결정했다는 얘기는 유명하다. 또 원소가 원담을 완전히 배제하지 않았던 것 처럼 조조 역시 조창의 군권을 빼앗지 않아서 조조가 죽은 후 조비는 조창을 의식해 절차를 생략하고 즉위 하루만에 처리했으며, 조창은 이에 포기하지 않고 조식을 찾아가 반란을 부추기기도 했다. 즉, 조조가 운 나쁘게 원소처럼 일찍 죽었다면 마찬가지로 후계자 자리를 확실히 하지 못했을 것이다.

유비의 경우도 마찬가지. 원담이 원소의 친자였으나 호적상으로는 아들이 아니었다면 유봉은 반대로 유비의 친자는 아니나 호적상으로는 아들이었다. 친자가 아니었기에 정통성이 떨어지긴 하나 유선 또한 적자가 아닌 서자였기에[67] 충분히 후계를 노려볼 위치에 있었다. 또한 유봉은 원담과 마찬가지로 어린 동생이 아직 공을 세우기 전부터 군을 지휘하며 능력을 입증했고 형주공방전 이전까지는 큰 실책도 없었다. 만약 유비가 5년만 일찍 죽었다면 능력이 검증되지 못한 열한 살짜리 어린아이인 유선보단 군사적 성과를 보여준 유봉을 지지하는 사람도 나타났을 것이다. 허나 유비가 죽었을 때는 유봉은 이미 처형된 후였고 유선도 장성하여 후계 문제가 번지지 않았다.

즉, '원담을 제대로 정리하지 못해 원상을 후계자로 밀어주지 못했다'는 것은 원소가 곧 죽는다는 것을 아는 후대인들 시선에서 본 것이지, 아직 한창인 원소 입장에서 굳이 장남을 처리하는, 군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부담이 큰 결정을 할 이유가 없다. 당시 원소와 조조는 전쟁을 막 마친 참이었고, 조조에게 뜻밖의 패배를 당한 입장이었다. 아직 원소의 세력이 월등하더라도 조조의 부상은 분명 부담이 갈 수 밖에 없다.

원담은 원소의 장남이지만 당시 군사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부하이기도 했다. 조조가 부담스럽게 목을 죄어오는 상황에서 명분 면에서 장남을 급하게 처분해버리는 무리수를 둘 이유도, 중요한 장수를 별 이유없이 처분할 이유도 없었다.[68] 그가 곧 죽을 노인이라면 몰라도 원소는 분명 한창 나이였고, 조조나 유비도 그 나이에 급하게 후사를 준비하진 않았다.

만약 원소가 유비(향년 63세)만큼이라도 살았다고 쳐보자. 원상은 후계자로 임명된 시기부터 넉넉잡아 10년도 넘는 세월을 아버지의 후광 아래에서 입지를 키웠을 것이다. 그러면 실제 역사상에서처럼 10대 중반 정도로 추정되는 나이에 급하게 지위를 계승하는게 아니라, 20대 중반의 나이로 충분한 입지와 실적을 쌓은 상태에서 즉위하게 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세력의 절대자인 원소의 비호 아래 명분과 실적을 쌓은 후계자라면, 단순히 장남이란 이유로 어떻게 해볼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물론 꼭 이렇게 흘러갔으리란 보장은 없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원소가 조금만 더 오래 살았더라면 원상의 후계자 구도가 훨씬 더 탄탄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다.

원소가 한 실수는 "자신이 병으로 일찍 죽을지 모르고 승계 작업을 마무리하지 못했다" 정도인데, 이건 미래를 보지 않는 이상 알 수 없는 것이므로 그가 어리석었다고 보긴 힘들다. 위에 언급된대로 조조도 그 나이, 아니 그보다 더 늦은 나이까지 승계작업을 마무리하지 못했다. 한 마디로 위에서 언급된 것처럼 예상 못하게 급사한 것 때문에 모든 게 엇나가게 됐을 뿐이다.

참고로, 원소가 맘만 먹었으면 충분히 후계자 문제를 정리할 시간이 있었다는 주장도 있긴 하다. 보통 원소가 관도대전에서 조조에게 참패하고 그 홧병으로 쓰러져 골골대다가 사망했다고 하는데, 사실 관도대전 패배에서 원소 사망까지는 약 2년 정도(200년 4월~202년 5월) 시간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다만 앞서 말했듯 원소는 아직 한창 활동할 나이였기에 그 기간 동안 정말로 몸의 이상을 느꼈는데도 억지로 후계자 문제를 무시하거나 내버려둔 것이라고 단정짓기는 힘들다. 그리고 원소가 죽기 직전일 때는 진짜 말 한 마디도 제대로 못할 정도로 몸이 안좋았다. 그러니 원소가 자신이 갈 때가 됐다고 느끼기도 전에 병세가 순식간에 악화되어버려서 뒷처리를 제대로 하지 못했을 가능성도 있다.

6.3. 우유부단했는가?

원소는 우유부단하여 결단력 있는 조조에게 밀렸다는 평가가 널리 퍼져 있으며, 나관중의 삼국연의에도 그렇게 묘사되어 있다.

하지만 재야 시절의 행보나 십상시의 난, 동탁과의 대립, 장연, 공손찬과의 싸움에서 원소는 개인적으로 강인하고 거침없는 면모를 보였고, 정치적으로도 급진적이고 과감한 행보를 보였다.

그러나 그의 지나친 약삭빠름은 스스로의 발목을 잡았다. 협천자라는 중대한 정치적 결단의 기로에서 과거의 행적을 의식해 결단을 회피하게 만들었고, 결과적으로 조조에게 정치적 패권을 빼앗기게 되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원소는 내부 파벌싸움을 조장하고, 경포를 시켜 칭제 여론을 떠보다가 반응이 나쁘자 경포를 죽이는 등의 행위를 했다. 이런 모습은 우유부단하고 졸렬한 인물이라는 오명을 주었다.

이러한 타산적 면모는 원소의 정치적 행보에 대한 불신을 만들었다. 원술과 공손찬이 원소를 맹렬히 비난한 것 외에도, 장막이 원소를 비판하며 멀어지고, 포신이 원소를 동탁과 다를 바 없다고 욕하거나, 순욱이 원소를 떠나 조조에게 간 사건 역시 원소에 대한 비판적 여론의 영향을 받았다.

동탁의 집권과 조조의 협천자 사건에서도 원소의 이해득실에 민감하고 타산적인 성격이 드러났다. 예상 밖의 변수가 발생하면 정면돌파보다는 꼼수를 부리거나 타협하거나 상황을 간보다가 회피하는 대응을 했다. 작은 일들은 신속히 처리했지만, 중요한 일들에는 주저하며 쉽게 결정하지 못했다. 이러한 모습이 극대화되어 '우유부단의 상징'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동탁의 집권 당시 원소뿐만 아니라 당시 주요 인사들 모두 동탁의 기만전술에 속았다. 동탁은 중앙정치에 기반이 없었기 때문에 협조적으로 나올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변호의 여지가 있지만[69][70], 후계자 선정 과정에서의 결정 역시 단호하지 못했다. 원소는 원가를 제물로 삼아 명분을 세우고 하북의 대군벌로 자리 잡았지만, 지나친 약삭빠름으로 인해 충성심을 보장할 수 있는 친족 세력을 스스로 제거하는 꼴이 되었다. 결국 원담에게 군권을 맡겨야 했고, 이는 후일 내전으로 확대되었다.

개인적 처신에서는 우유부단함과 거리가 멀었고 오히려 거침없는 성격이었다. 정치가로서도 그런 성격에 걸맞은 행보를 이어갔다. 그러나 야심 많고 타산적인 측면과 여론에 기생하며 기만적 이득을 취한 행적들이 원소를 우유부단하게 만들었다. 특히 자식 문제에서는 명백히 우유부단했다고 할 수 있다.

원소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 중 "사나워 보이지만 실은 담이 작다."와 "작은 이익에는 몸을 사리지 않으나 오히려 큰일을 할 때에는 몸을 사린다."는 이러한 면모에 기반한 것으로 보인다.

6.4. 투구 대신에 모자와 정장 차림

《부자(傅子)》의 기록에 따르면, 멋을 부리는 경향도 있었는지 전투에 나설 때도 항상 투구를 쓰지 않았다. 대신에 점잖은 패션아이템 정도였던 모자나 두건 따위를 썼다. 이는 원소뿐만이 아니라 부하들도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이런 의미에서 삼국지 8진삼국무쌍 3이래 노란색 투구 캐릭으로 변신한, 심지어 삼국지 영걸전 시리즈에서도 시종일관 투구를 씌워 놓은 KOEI의 작화는 고증의 에러 측면이 있다. 공개된 일러스트를 보면 최신작인 삼국지 14에서도 이 에러는 여전하며, 오히려 코에이가 직접 만들지 않고 판권을 판매한 삼국지 조조전 온라인에서 드디어 투구를 벗고 나오며 대사마저도 "전장에서 투구는 필요없다"며 본가를 까버리는 것이 일품. 삼국지톡에서도 비슷하게 투구를 거절하는 장면이 있다. 근데 크리에이티브 어셈블리가 만든 토탈 워 시리즈토탈 워: 삼국에서는 투구를 쓰고 나온다.

원소전에 공손찬에게 쫓길 때 "전풍이 원소를 끼고서 퇴각하여 빈 담 속으로 들어가려 했으나 원소가 '''두무를 땅에 벗어두고 말하길 “대장부가 적 앞에 당하여 죽게 되어서 담장 틈으로 들어왔으니, 어찌 살아날 수 있겠소?” 라 했다."는 구절이 있어, 부자의 주석과 달리 투구를 쓴 것 아니냐는 말도 있으나, 이 뜻은 본래 "가마"라는 뜻을 가지고 있어 투구 외에도 관이나 두건의 윗 부분으로도 볼 수 있다. 당장 두무의 두(兜}가 두건의 두다. 고로 원소가 투구를 썼다는 근거가 정사에 있다는 해석은 분명치 않다.

현대로 따지면 전쟁터 한복판에 제왕 같은 외모의 지도자가 전투복 대신 정복을 입고 강림해서 시크하게 폭풍간지를 날려대는 격이다. 잘 상상이 안간다면 전쟁터에서도 번쩍이게 광을 낸 철모에 불룩한 승마바지를 입고 쌍권총을 차고 다닌 조지 S. 패튼을 상상해보자. 다만 당대 최고의 미남이었던 원소와 달리 패튼은 젊었을 때도 딱히 미남은 아니고 늙어서는 트럼프 닮은 할아버지가 되었기 때문에, 이미지로 치면 정복을 입고 있으며 냉혹하고 말 없는 군인 캐릭터인 철권 시리즈의 세르게이 드라그노프가 더 가깝다.

7. 가족 관계


다른 집안의 뒤를 잇는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 소(紹)라는 이름이나 적모상의 대상이 원술의 어머니였다는 황보밀의 기록을 보아 친부는 원봉이었다는 것이 사실에 가까워 보이지만 상술된 바와 같이 정확한 여부는 불분명. 상술했듯 어머니는 노비였으며, 원술과 공손찬 측의 일방적인 주장이지만 원씨의 핏줄이 아닌 사생아라는 설이 있었다.

원봉의 자식이 맞다면 원봉의 세 아들 중 차남이나 얼자였고, 원성의 뒤를 잇는다는 명목으로 종가에서 폐출된 것으로 보인다. 정작 원소 본인이 똑같은 방법으로 장남인 원담을 폐출시켰다는 것이 역사의 아이러니.

음침하게 보일 수 있는 출생 배경이나 이름과 달리 정작 본초(本初)라는 자는 정반대로 근본, 시초라는 의미이기에 아주 의미심장하다. 떡밥일 수도 있겠지만 실제로 여남 원씨 일족은 원소에 의해 멸족된 것이나 다름없다.

한편 후한서에 따르면 원소 사후 심배, 봉기와 함께 원상을 옹립한 주축인 원소의 부인 유부인은 후처라고 한다. 유부인의 출신이나 원상의 생모가 맞는지의 여부는 확실하지 않지만, 원소가 원상을 후계자로 삼은 이유가 황족 출신인 유부인의 소생이라 외가 쪽으로는 황실의 피가 흐르기 때문에 본인이 아니더라도 차대에 원상을 통해 원씨 왕조를 세우려 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떡밥이 있었다.

원소 사후 유부인이 총첩 5인을 살해했다는 전론의 기록을 봤을 때 상당히 많은 첩을 들인 것으로 보인다. 대외적으로 젠틀한 이미지를 표방했지만 이쪽도 여자 밝히기로는 친구인 조조 못지 않았던 듯.[72][73] 삼국지와 후한서는 일관되게 원소의 아들이 원담, 원희, 원상 셋 뿐이라 적고 있다.[74]

원소가 죽고 조조가 원소의 후계자 원상을 격파하여 업을 함락했을 때, 조조와 조씨 일족은 많은 원소의 딸과 며느리들을 범했다고 한다. 대표적인 예로, 조조의 아들인 조비가 원희의 부인이었던 견씨를 빼앗아 강제로 처로 삼은 것이다. 공융은 조조에게 보낸 편지에서 "무왕은 주왕을 정벌한 후에 달기를 주공(周公)에게 주었습니다."라고 말했다. 이는 조조와 조씨 일가를 조롱하는 말이었는데 세간의 비난을 두려워하던 조조는 공융이 워낙 박식했기 때문에 자기를 비웃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하고 오히려 공융이 경전을 인용해 자신을 두둔한다고 착각했다. 하지만, 아무리 책을 찾아봐도 그런 고사를 찾지 못했기에 나중에 공융을 만났을 때 그 이야기를 어떤 책에서 발췌했냐고 물어봤는데 공융은 "지금의 일을 살펴보니 과거에도 당연히 그랬을 것 같다."고 대답했다. 즉 거짓임을 돌려서 말한 것이다. 그제서야 조조는 공융이 자신의 행동을 비꼬는 정도를 넘어서 역사와 고전도 모르는 무식쟁이라고 까댄 것을 알게 되었다. 결국, 조조는 이외에도 조정의 야당으로 불리는 공융과 여러가지로 사사건건 갈등을 빚게 되었고 눈엣가시였던 공융을 숙청해버린다.

8. 조조에게 원소가 지니는 비중

원소의 세력이 강했을 때는 나조차도 마음이 흔들렸다. 내가 그러했는데, 하물며 다른 이들은 어떠했겠는가?
이문열의 삼국지 中 조조[75]
유비가 조조에게 있어 서로 대비되는 속성을 가진 가장 까다롭고 치열한 적이었다면, 원소는 소꿉친구이면서도 조조에게 있어 가장 강력하고 무서운 적이었다. 흔히들 삼국시대의 막을 열었다고 볼 수 있는 적벽대전의 유명세에 이끌리기에 쉽지만, 역사적으로는 조조와 원소가 맞붙고 조조가 천하의 주도권을 잡는 관도대전 역시 그 못지 않게 중요한 전투이며 조조 생애에 있어서 최대의 난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한때는 조조조차 그에게 투항하려던 적이 있었을 정도였고, 심지어 원소는 관도대전에서 대패한 이후에도 넘사벽의 세력비를 유지하여 중국의 최강자로서 죽었다. 조조는 원소가 살아있을 때까지 싸움은커녕 수비하기도 급급한 지경이었고, 원소 사후 후계를 둘러싸고 내분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관도대전 이후 7년이나 걸려서야 마침내 원소 일가를 멸망시킬 수 있었다. 그야말로 최종보스. 삼국이 정립이 된 후에도 조조의 위나라가 다른 두 세력을 합친 것보다도 훨씬 거대할 정도의 막강한 세력을 갖추게 된 것은 모두 원소를 쓰러트리고 나서 얻은 성과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위의 오해 항목에서도 나오지만, 애초에 원소는 협천자 논쟁으로 뒤통수를 맞기 이전까지는 조조를 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둘의 인연은 어린 시절부터 시작됐고, 원소는 자신의 처지가 약소했던 시절부터 조조를 꾸준히 지원했으며, 오히려 조조 측에서 원소에 대한 경외심을 보인 기록이 많다. 그 잔인했던 조조가 원소의 무덤에서 곡을 하고 죄책감을 기록으로 남긴 것도 이런 관계 때문이었다.

삼국지 무제기에서는 원소의 가족에 관련된 서술이 거의 절반에 달하는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며 특히 관도대전은 매우 세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보기에 따라서는 원소전보다 무제기에 실린 내용이 더 풍부하다. 조조의 일대기 자체가 조조 vs 원소라고 봐도 과언이 아닐 정도. 무제기의 인물평[76]에도 유일하게 이름을 올리는 등 여러가지로 라이벌 구도를 형성하고 있다. 훗날의 촉한오나라 역시 강한 세력이었으나 각각 산맥과 이라는 지형적인 장벽을 두고 오지에 자리잡고 있었다. 반면 원소는 황하를 두고 허도의 바로 북쪽에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에 조조의 생존 자체를 결정할 수 있었다. 심지어 무제기는 유비손권보다도 원소의 후계자들과의 싸움원상, 원담에게 더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고, 위서 유이열전에서는 오와 촉의 신하들은 원소 시대 기주의 병사들에 미치지 못하고, 손권과 유비 역시 원소에게 미치지 못한다고 평가했다.

이 면에서 보면, 조조의 인생에서 원소는 일종의 최종보스 역할을 담당했다고 볼 수 있다. 그와는 별개로 조조가 살아가면서 죽기 전까지 언급했던 원소에 대한 말과 행동들을 보면, 단순히 쓰러트려야 하는 막강한 숙적 정도를 넘어서 정말 복잡한 관계였다고 할 수 있다. 조조의 일대기에 자기 열전만큼 기록이 많다는 점만 보더라도, 조조의 인생에서 적으로든 친구로든 가장 깊은 관계를 맺은 인물이었다.

9. 미디어 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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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권 「제하후조전(諸夏侯曹傳)」 10권 「순욱순유가후전(荀彧荀攸賈詡傳)」
하후돈 ,하후무 한호 사환, · 하후연 ,하후패, · 조인 ,조순, · 조홍 · 조휴 ,조조(肇),
조진 ,조상 이승 환범 하안, · 하후상 ,하후현 이풍 허윤,
순욱 ,순의 예형, · 순유 · 가후
11권 「원장양국전왕병관전(袁張凉國田王邴管傳)」 12권 「최모서하형포사마전(崔毛徐何邢鮑司馬傳)」 13권 「종요화흠왕랑전(鍾繇華歆王朗傳)」
원환 · 장범 ,장승, · 양무 · 국연
전주 · 왕수 · 병원 · 관녕 ,왕렬 장천 호소,
최염 ,공융 허유 누규, · 모개 · 서혁
하기 · 형옹 · 포훈 · 사마지
종요 ,종육, · 화흠 · 왕랑 ,왕숙,
14권 「정곽동류장류전(程郭董劉蔣劉傳)」 15권 「유사마량장온가전(劉司馬梁張溫賈傳)」 16권 「임소두정창전(任蘇杜鄭倉傳)」
정욱 ,정효, · 곽가 · 동소
유엽 ,유도, · 장제 · 유방 ,손자,
유복 ,유정, · 사마랑 · 양습 ,왕사,
장기 ,유초 장집, · 온회 ,맹건, · 가규 ,가충,
임준 · 소칙 · 두기(畿) ,두서 악상,
정혼 ,정태, · 창자 ,안비 영호소,
17권 「장악우장서전(張樂于張徐傳)」 18권 「이이장문여허전이방염전(二李藏文呂許典二龐閻傳)」
장료 · 악진 · 우금 · 장합 · 서황 ,주령, 이전 · 이통 · 장패 ,손관, · 문빙 · 여건 ,왕상,
허저 · 전위 · 방덕 ·방육 ,조아, · 염온
19권 「임성진소왕전(任城陳蕭王傳)」 20권 「무문세왕공전(武文世王公傳)」
조창 · 조식 ,양수 정의 정이, · 조웅 조앙 · 조삭 · 조충 ·조거 · 조우 ·조림(林) · 조곤 · 조현 ·조간 ·조표 ·조정 ·조림(霖)
21권 「왕위이유부전(王衛二劉傳)」 22권 「환이진서위노전(桓二陳徐衛盧傳)」 23권 「화상양두조배전(和常楊杜趙裴傳)」
왕찬 ,진림 완우 유정, · 위기 · 유이 · 유소 · 부하 환계 · 진군 ,진태, · 진교 · 서선 · 위진 · 노육 화흡 · 상림 ,시묘, · 양준 ·두습 · 조엄 · 배잠 ,배수,
24권 「한최고손왕전(韓崔高孫王傳)」 25권 「신비양부고당륭전(辛毗楊阜高堂隆傳)」 26권 「만전견곽전(滿田牽郭傳)」
한기 · 최림 · 고유 · 손례 · 왕관 신비 ,신헌영, · 양부 ,왕이, · 고당륭 ,잔잠, 만총 · 전예 · 견초 · 곽회
27권 「서호이왕전(徐胡二王傳)」 28권 「왕관구제갈등종전(王毌丘諸葛鄧鍾傳)」
서막 · 호질 ,호위, · 왕창 · 왕기 왕릉 ,선고 영호우, · 관구검 ,문흠, · 제갈탄 ,당자, · 등애 ,주태, · 종회 ,장창포 왕필,
29권 「방기전(方技傳)」
화타 · 두기(夔) ,마균, · 주건평 · 주선 · 관로
30권 「오환선비동이전(烏丸鮮卑東夷傳)」
오환 · 선비 ,가비능, · 부여 ·고구려 · · 읍루 · 예맥 · 동옥저 · 마한 · 진한 · 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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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 대장군(大將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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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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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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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대

등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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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보
10대

양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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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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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원술의 사촌형이니 원술보단 나이가 많다. 그래서 삼국지 각종 매체에서는 조조, 원소가 친구 사이로도 묘사되지만 여러 매체에서는 조조가 원소를 형으로 부르거나 본초형님 등으로 높여부른다.[2] 여남군 여양현이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후한의 수도 낙양이 고향인 것으로 보인다.[3] 음력 5월 21일.[4] 호적상의 아버지.[5] 원소를 키운 양아버지 혹은 원성이 아버지가 아닐 경우 친아버지로 추정된다.[6] 이복형제 였던 것으로 추정.[7] 모친상 때문에 낙향했다.[8] 사이 나쁜 원술이 직장 상사여서 사직했다.[9] 거부했다.[10] 하지만 삼국지와 관련된 2차 창작물에서는 열에 아홉은 조조보다 못생기게 표현되며 위 그림 속 원소의 모습도 연의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모습이며, 옆에는 대놓고 원소를 조롱하는 한시가 적혀 있다. 이는 이러한 창작물 대부분이 정사보다는 연의를 따라 인물들의 외모를 만들기 때문이다.[11] 물론 미디어 믹스 중 일부는 미남이라는 정사의 외모서술을 반영해 제법 미남으로 그려주기도 한다. 예시로 가후전의 원소는 상당히 준수한 외모의 미남으로 나왔고, 삼국지톡원소는 아예 대놓고 작중 최고의 미남 중 한 명으로 그려놨다. 삼국전투기에서는 처음에는 미남이었지만 나중에 스트레스성 폭식으로 포동포동하게 살찐 모습으로 나온다. 코에이 삼국지에서는 10까지 다소 비열한 인상으로 나왔지만, 11부터는 카리스마 있는 모습으로 나오고 있다.[12] 기주, 병주, 청주, 유주[13] 대체로 우리가 알고 있는 조조의 이미지를 살짝 뻥튀기하면 원소의 대체적인 모습이 그려진다.[14] 한비자 망징편의 말로 원소는 여기에 딱 들어맞기에 실패했다는 뜻.[15] 해당 구절의 원문인 闚圖訊鼎을 직역하면 큰 그림빅픽쳐(圖)을 엿보며(闚) 솥에 대해 물었다.(訊鼎) 정도로 풀이된다. 초장왕이 선진시대 이전 왕실의 신성함을 상징하는 솥인 구정의 무게를 물어봄으로서 자신이 솥의 주인이 되어 주나라 대신 패권을 차지하겠다는 속내를 드러냈다는 고사에서 유래된 것인데, 범엽은 초장왕의 고사를 빗대어 원소의 참칭미수사건을 논평한 것. 물론 진짜 의미를 파보면 범엽도 원소가 참위설을 퍼뜨려 왕위를 넘봤던 것을 꼬집은 게 맞고, 솥 운운한건 알 사람만 알아들을 일종의 드립에 가깝기 때문에, 번역자가 모르고 오역한 것은 아니고 직관적인 이해를 위해 의역이 들어간 것 같다.[16] 특히 정치에는 빵점이라고 할 수 있는 숙적 공손찬이나 장연과 비교하면 더욱 그랬을것이다.[17] 재미있게도 삼국지연의부터 기존 삼국지 관련 창작물에서 이런 식의 "악당이지만 주인공조차 압도할 만한 카리스마를 지닌 매력적인 악역 포지션"이던 사람은 바로 조조였다. 위에부터 계속 조조와 비교되는 이유가 있는 것. 물론 포지션상 그렇다는 것이지 둘은 매우 다르다. 냉혹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상당히 감정적인 조조와 실제로 냉혹함은 온몸으로 보여줬던 원소, 외모 면에서도 비교적 작은 덩치였던 조조와 당당한 풍채의 원소 등.[18] 오소에서의 패배 후 장합, 고람의 배신, 관도대전 패배 전후 저수, 전풍의 자조적인 말 등.[19] 원술에게 쓴 서신에서 보이듯 스스로를 은근히 오자서에 비유하면서 그 행보를 포장했다.[20] 다만 이런 프로파간다를 처음 만든 이들은 유비와 동승이고 원소는 패배한 유비를 맞이하여 이들의 논리에 얻어탔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이런 프로파간다를 확대하는데는 원소의 힘도 작용했다고도 할 수 있지만 말이다.[21] 사실 원소는 동탁이 마음대로 즉위시킨 헌제에 대하여서 황제로 인정하지 않았다. 당장에 동탁이 장안으로 도망간 이후에 당대에 명망 높던 황족인 유우를 황제로 제멋대로 추대하였고, 이후 헌제가 이각과 곽사를 피해서 동쪽으로 도망왔을 때에도 전풍이 군사를 보내서 헌제를 모시자는 의견을 묵살하였다. 이후에 헌제를 모시게 된 조조가 강력한 세력을 가진 원소에게 대장군직을 추천하자 어쩔수 없다는 듯이 받기는 하였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자리가 필요해서 받은 것일 뿐 정작 헌제를 황제로써 대우하는 모습은 없었다. 역적 동탁이 세운 황제라는 것이 그의 명분이었다.[22] 동탁이 진류왕을 옹립했을 때 반발함으로 얻은 정치적 명분.[23] 만약에 조조가 협천자를 하지 못했다면 '원소와 조조의 건곤일척'인 관도대전은 없었겠지만 조조가 '니가 제일 쎈데 천자까지 등에 업었으니 다 헤먹어라'하고 알아서 길 리가 만무하다. 원소의 독주를 아니꼽게 보는 이들은 천하에 널렸으니 반(反) 동탁 연합처럼 반(反) 원소 연합이 만들어졌을 수도 있고 이들은 어쨌든 원소를 역적으로 몰았을 것이다. 당시는 군벌들이 패권을 위해 싸우던 시기인만큼 1인자인 원소는 어떤 형태로든 견제를 받았을 것이다. 그것이 강력한 라이벌 한 명과 전쟁이건, 다른 라이벌들의 연합 구도이건.[24] 아마도 원소가 헌제를 확보하지 않은 것은 헌제가 난리통에 어디선가 죽고 후한 자체가 완전히 내려앉기를 바란 것이 아닌가 싶다. 즉, 원래 원술이 했던 짓(= 황제 즉위)을 사실 원소 또한 하고 싶었으나 그래도 원소는 시세를 원술보다 더 읽을 줄 알아서 기다렸는데 어느 샌가 조조가 냉큼 헌제를 살려서 옹위했던 것이고 그래도 당장 치지 않았던 것은 명분도 없었거니와 (후에 그 명분을 제공한 사람이 바로 유비다.) 조조가 한동안 원소에게 저자세를 취하기도 해서 치기가 꽤나 난감했기 때문이었다. 아직 북방에는 중국 최강의 군벌이었던 숙적 공손찬이 건재했던 이유도 있었고.[25] 다만, 원소는 이미 공손찬을 무난하게 정리할 수 있던 흐름인 반면, 조조의 경우 협천자 당시에 회남의 원술과 서주의 여포가 꽤 위협적인 세력으로 존재했기 때문에 조조가 협천자를 하더라도 (일반적인 시각으로는) 원술과 여포를 단시간에 정리할거라고 예상하기는 힘들었다. 설마 이런 상황에서 원술이 난데없이 천자를 참칭하거나 여포가 조조와 손잡고 원술을 치면서 순망치한의 고사를 재현해버리는 상황은 원소로서도 전혀 예측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26] 이런 대표적인 케이스가 유표가 있다. 유표는 한황실과 미세하게 혈연이 닿아있는 것 외에 지지기반이 거의 없었으나 형주의 호족들과 연대, 원씨 형제와 차례로 한 외교, 원술이 보낸 손견의 격파 등 군사적 성과 등으로 사실상 황제와 다름없는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다.[27] 원소는 칭제까지 염두에 두고 있던 인물이다. 실제로 배송지의 주석에는 당시 원소가 경포를 시켜 칭제를 권하도록 했다가 부하들의 여론이 안 좋자 죽였다고 나와있다.[28] 명분이 강력한 무기란 점, 한 황실이 강력한 브랜드란 점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힘이 우선적인 요소란 것이다.[29] 다만 조조의 위세앞에 무력했던 헌제 유협과는 달리 노련한 정치가에 자기 세력을 가진 명망가였던 유우는 원소가 멋대로 다룰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었으므로, 만약 유우-원소 결합체가 탄생했다면 그것은 실제 역사의 유협(헌제)-조조 결합체만큼 권신이 멋대로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결합체 내부의 문제이고, 외부에 투사할 수 있는 영향력은 훨씬 강력했을 가능성이 높았을 것이라 짐작된다는 것.[30] 계교전투 무렵 공손찬이 발표한 찬표소죄상에서 이런 원소의 행태를 비판했는데. 원소는 아예 날을 정해 번갈아가며 군현을 노략질했으며 상납을 거부하는 호족들은 명망이 높든 전에 고관을 지냈든 상관없이 감금, 고문하며 돈을 뜯어냈다.[31] 물론 유비를 제외하곤 삼국지 주요 군웅들 중 약탈을 안했다고 볼 수 있는 인물들은 없으니, 딱히 원소만의 허물이라곤 볼 수 없지만 말이다.[32] 관도대전 승리 후 조조 휘하의 관리들이 원소와 내통했던 밀서를 보고 이들을 전부 잡아들여야 한다는 간언에 대한 대답. 난세의 간웅이라 불리고 젊은 시절의 라이벌이자 자신과 비교했을 때 전혀 꿀릴 게 없던 강적을 꺾은 조조도 원소가 죽기 전까진 늘 원소를 두려워 했음을 알 수 있는 대답으로 직후 조조는 그 문서를 모두 태워버리라 명령하고 이 일을 두 번 다시 거론하지 않았다.[33] 단 국의는 한복 소속의 장군이었고 강족 전술에 능하다는 기술, 그리고 공손찬의 선발 기병대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전열을 유지하다 한 순간에 돌진해서 기병대를 역으로 헤집는 것을 보면 이 800은 단순한 800명의 징집병이 아니라 전문성을 갖춘 정예 부대였을 가능성이 굉장히 높다. 고대 군대에서 대개 이런 집단은 강력한 유대의식이 있는 경우가 많고 이 군대는 국의가 개인적으로 인솔하는 친위부대였을 가능성이 높은데, 고대에서 이런 군대는 정말 머릿수에 비해 엄청난 힘을 발휘할 수 있다. 원소가 한 거 없이 국의가 혼자 다 싸운 것은 아니지만 공손찬과의 대결에서 가장 크게 활약한 것은 국의였다.[34] 사실 원소는 조조나 유비 등 라이벌로 분류되는 인물들 중에 가장 나이가 많은 것으로 추정되는데, 조조나 유비 역시 말년에 거대한 전쟁을 유리한 위치에서 패한 적이 있다.(적벽대전, 이릉대전) 물론 관도대전 당시 원소의 나이는 저때 둘에 비해 훨씬 젊었지만, 건강 문제로 인해 사실상 말년이었다. 조조나 유비가 말년에 유리한 전쟁 크게 말아먹었다고 능력을 폄훼할 수 없듯이, 원소도 말년에 관도대전 말아먹었다고 그전까지 보여준 능력을 폄훼할 수 없는 건 마찬가지다. 그리고 관도대전 이후 원소세력이 조조에 비해 열세가 된 것도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본인이 죽고 후계자 다툼 과정에서 망한 것. 또한 조조나 유비가 패한 전투도 본인의 실책 외에 상대(유비+손권, 손권)가 워낙 뛰어났던 것처럼 관도대전 당시 원소의 상대는 다름아닌 조조였다.[35] 완전히 손 놓고 있었던 것은 아니고 소규모 부대를 동원해서 황하 건너의 교두보 확보를 시도해 보긴 했다. 그런데 우금이 워낙 잘싸워서 역관광...[36] 물론 겉으로 유비가 원소를 떠날 명분이 없는 건 아니었다. 유벽, 공도와 함께 유표의 지원을 받아가며 조조의 후방을 노리고 사보타주를 벌였지만 이게 망하는 바람에 유표에게 몸을 의탁하게 되었던 것이니까, 원소도 어차피 명분만 취하면 유비에게 더 볼 일도 없었을 테니 가능했던 일이긴 했다. 뭐, 이유야 어쨌건 유비가 먼저 원소를 은밀히 떠나고자 했던건 사서에도 나오는 사실이다. 관우가 조조 휘하에서 안량을 참한 것도 있어서 떠나고 싶었을 테고. 무엇보다 한 황실의 중흥을 원소에게서는 절대로 바랄 수 없다는 점을 봤을 때 그 시점에서 빠지는 것이 정답이었다.[37] 원소가 직접 쓴 것으로 알려진 글은 196년에 헌제에게 쓴 상소문과, 197년에 공손찬에게 보낸 편지인데, 두 글 모두에서 자신이 참전한 수많은 전투중에서도 계교전투가 가장 기적적이고 값진 승리라 언급하고 있다.[38] 문제는 상대방이 그 짜여진 각본대로 춤을 춰 준다는 보장이 없고, 또 상대방이 각본대로 움직이지 않았을 경우 그에 대한 대비가 소홀했다. 게다가 날먹 각이 안잡힌다고 반대하던 전풍과 저수는 숙청해버렸으니 날먹이 될 리가(...).[39] 사실 이런 류의 세세한 일화는 견초의 일화를 제외하면 남아있지도 않다. 훗날 위 왕조에 종사하며 전기가 남을 정도의 활약을 펼친 견초의 인생 전반부에서 중요 사건이라 기록이 남았을 뿐, 진수가 딱히 원소에 관심이 있어서 기록한 게 아니기 때문.[40] 물론 이들은 원씨 일족을 의미하는 건 아니고 주로 자기 아들들이나 사위 등을 말한다.[41] 결과적으로 원소 자신의 권력을 강화했지만 부하들끼리 서로 경쟁하게 만들고, 견제하여 서로들 파벌을 만들어 적이 되었고 일시적 뿐이지만 결국 곪고 곪았던 문제가 하필이면 가장 중요했던 관도에서 한번에 터지게된다.[42] 반대로 보면 전쟁이야말로 이런 갈등이 터지기에 가장 좋은 환경이라고 할 수 있다.[43]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원소 식의 인사에선 심배 같은 부류의 예스맨이 권력 핵심에 남기 쉽다.[44] 현재만 바라본다면 낫다고 볼 수 있지만 천하를 노리는 군웅으로서 자기 대에서 이것이 끝나지 않기를 바란다면 실패한 조직 관리다. 자신의 후계자가 자신과 똑같이 해줄거라는 보장이 없으니까, 그리고 곪은 부위는 언젠간 터지기 마련이다.[45] 좋은 의미와 나쁜 의미가 공존한다.[46] 다만 실제역사에서도 조조는 초세지걸의 영웅이란 평가를 받았다[47] 패권주의 할 때 보이듯 覇라는 글자 자체도 별로 도덕적으로 좋은 의미는 아니다.[48] 외모지상주의는 현대사회에도 심하지만 당시에는 실제 사료에까지 외모가 출중했다거나 외모가 못해서 까이거나 하는 기록이 남아있을 정도로 사람의 외모를 중요시여겼던 것으로 보인다. 정사 상에는 조조가 원래 청하공주의 사위로 추천하려고 했던 정의에 대해 조비가 '사팔뜨기라서 안된다'고 하후무를 추천하기도 하고, 저런 식으로 외모가 혼담에 영향을 미친 것도 아닌 맹달이나 제갈량 같은 인물들도 외모가 출중했다는 기록이 있다. 맹달이 위/진 측이건 촉한 측이건 굳이 미화할 이유가 없는 인물임을 감안하면, 당시엔 인물평에서 외모가 차지하는 비중이 적지 않았음을 추정해볼 수 있다. 특히나 원소는 명망, 이미지의 덕을 많이 봤고 본인도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한 인물인만큼, 당대 사람들이 원소를 평할 때 그 훌륭한 외모가 특히나 크게 작용했을 가능성이 높다.[49] 상술했듯, 발해태수직을 받아들였음에도 사례교위직을 자칭한 것 역시 동탁과 그가 추대한 헌제 정권의 정당성을 부정하는 퍼포먼스였다.[50] 전풍은 경무와 민순을 죽였고, 주한이 테러하기 전에도 한복은 항상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51] 애초에 원소가 당대 최고의 명망을 지녔단 것은 그의 음험한 면모와 쇼맨십이 효과적이었단 얘기다. 당연히 적들이야 그의 음험함과 이중적인 면모를 비꼬겠지만 어쨌든 겉보기엔 그가 당대 사람들의 추앙을 받을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로 여겨졌기 때문.[52] 불리한 전투에서 오히려 투구까지 벗고 선두에서 활약하거나, 온갖 정치적 음모를 선두에 나서서 꾸미거나 한 것을 보면 어떻게 봐도 원소의 배포는 엄청나다.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것까지 보면 원소의 정신력은 만렙이라고 봐야한다.[53] 삼국지를 현대식으로 재해석한 만화 삼국지톡에서는 이러한 점에 대해 그의 성격적 결함과 이미지 중시를 결부시켜, 인간성이 부족하고 누구도 믿지 않았던 원소가 수하들을 통제하기 위한 완벽한 이미지를 깨뜨리지 않기 위해 6년상 당시 생긴 지병을 일부러 거의 치료하지 않고 악으로 버텼던 것으로 묘사했다. 물론 원소가 실제로 치료를 받지 않았을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6년상은 말할 것도 없고 항상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는 것같은 행동은 신체적/정신적으로 스스로를 갉아먹는 것이긴 하다.[54] 조조는 그 외에도 허유원술과도 어린 시절에 친구였다고 한다. 허유는 오만함 때문에 죽었고, 원술은 언급 자체가 잘 안 된다.[55] 조조나 원소의 어린 시절은 아직 한나라 조정의 권위가 살아였던 시대였으므로, 중앙정계에서 세력있던 명문가 자제들의 우정+인맥정도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후 한나라 조정의 권위가 땅속으로 쳐박히고 군웅할거시대가 열리면서 세력을 가진 이들 명문가 자제들이 군벌(군웅)로 등장하게 된 것.[56] 그러나 조조가 개혁가라고 하기에는 미묘한 부분이 많으며, ?: "개혁가? 내가 개혁가라고 포장했던가? 나는 무너진 법을 다시 세워서 엄격한 법집행을 시행했을 뿐인데?" 원소는 수꼴보다는 동탁에 의해 옹립된 헌제를 인정하지 않으며, 다른 황족을 추대하려고 시도하거나 자신이 그 자리에 앉으려는 모습을 보였다.[57] 물론 얼자라고는 해도 명문가 출신이라는 유리함은 가졌지만, 출세에 인맥의 영향력이 절대적이던 당대 상황에서 보면 어차피 중앙정계에서 출세하는 사람들은 쟁쟁한 명문가의 자제들이었고, 그들의 리그에서 원소의 입장은 비교적 불리한 편이었다고 볼 수 있다. 초기 이력부터 수도의 유력자들과 교분을 쌓고 중앙정계에서 활동할 수 있었던 것 자체는 사세삼공의 명문가인 원씨 일족의 일원이었기에 가능했던 것이 맞다. 하지만 중앙정부에서건 군벌로서건 가문의 지원과 후광은 당연히 적자에게 집중되는 것인데, 적자인 원술을 제치고 압도적인 세력을 구축한 것은 원소 자신의 역량이었던 것. 그리고 스스로의 역량으로 '원가의 대표주자'가 될만함을 입증하고 나서야 원씨 집안의 힘을 제대로 활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58] 호족, 사대부[59] 반면 조조는, 반동탁 연합 시기에는 주요 제후가 아니라 '그 외 참여자들' 그룹에 속해있던 것으로 추정된다.[60] 사실상, 당시 중국 최대의 세력[61] 둘 다 자기애성 성향이 매우 강하다.[62] 원소를 의식한 측면이나 적벽대전 이후 손권을 애취급하면서 유비를 의식한 모습등을 보면 조조는 하고 다니는 행동에 비하면 다정다감하고(감정적이고), 특히 자기 인생의 최대 난관이었던 군웅할거시대의 라이벌들을 강하게 의식하는 성격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점에서 보면 조조가 의식하는 원소는 <한때 자신보다 훨씬 앞서나가던 라이벌이지만, 결국 최종적으로는 자신이 극복하고 쓰러트린 최강의 라이벌>에 가까웠을 것이며, 따라서 <자신보다 훨씬 불리한 상황에서 출발하여 훨씬 험난한 고난속을 해쳐나왔지만, 죽여도 죽여도 죽지 않고 끝까지 살아남아 마지막 적수가 된 라이벌>인 유비와는 다른 의미에서 조조에게 상당한 의미를 가졌으리라 추정할할 수 있다.[63] 원희의 처였던 견씨를 조비와 혼인시킨 것도 전혀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 당시 조비는 부인이 없었기에 결혼을 한다면 견씨가 정처가 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조비는 (조앙 사후였으므로) 후계자 서열 1순위라 봐도 무방한 상태였기에 별다른 이변이 없는 한 조조 사후에 세력의 주인이 될 테고, 조비와 견씨의 아들은 조비 사후에 세력을 거느리게 되는 상황이다. 실제로 조비가 후계 자리를 이었고.[64] 아마 젊은 시절 동탁 토벌전을 비롯해 같이 한의 부흥을 위해 싸웠던 시절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보인다.[65] 물론 콘스탄티누스의 장자는 뛰어난 군략으로 로마통일전쟁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운 지닌 유능한 차기 후계자였고, 그 반면 원담은 1주조차 제대로 다스리지 못한 무능력자이니 콘스틴티누스가 큰아들을 숙청한 것이 마이너스가 된 셈이 되었고 (특히 뒤를 이은 늦둥이 삼형제를 보면) 반대로 원소는 원담을 제때 숙청시키지 않아서 원씨 사이에 내전기가 들어서게 되었다.[66] 유비는 60대에 이릉대전을 지휘했으며, 조조도 60대 중반에 죽었고 손권은 70을 훌쩍 넘겼다.[67] 유선의 어머니인 감씨는 정실이 아니라 첩이었고, 유봉이 죽은 후에야 부인으로 추증되었다.[68] 당시 원담은 원소가 지배하고 있던 네 개 주 중 하나인 청주를 담당하고 있었다. 애초에 청주자사로 부임 당시 소수에 불과했던 원소 세력을 이끌고 공손찬의 부하 전해를 격파, 청주를 점령한 일등공신이 바로 원담이다. 딴 사람도 아니고 조조랑 대치하는 와중에 이렇게 중요한 부하를 숙청한다? 지나치게 무리한 선택이며, 끽해야 50대 초반인 원소가 이런 선택을 할 이유는 없었다.[69] 동탁의 소제 폐위는 후한 정치판의 룰을 뒤집은 행동이었으며, 반동탁 연합군의 성립과 동탁의 권위 부정 사례들은 이런 규칙 위반에 대한 징벌의 성격을 띤다.[70] 원소는 동탁을 얕봤지만 동탁의 무력에 뒤통수를 맞았고, 이후 원소도 다른 황족을 옹립하려 했지만 이 전력이 원소의 발목을 평생 잡게 되었다.[71] 실질적으로는 이복형제로 추정하는 경우가 많다.[72] 조조가 유독 여자 문제로 곤욕을 겪는 일화가 많지만 조조와 동세대 인물들 중 이 분야의 레전드로는 첩 수백명을 들인 원술채모가 있다. 이들과 비교하면 조조는 차라리 얌전했던(?) 편.[73] 사실 당시 기준으로는 군주가 첩을 여럿 들이는 것은 그다지 흠이 되지 못했다. 조조가 여자 문제로 고생한 것은 여자를 밝혀서라기보단, 건드리지 말아야 여자를 건드려서 일이 틀어진 적이 많았기 때문이다. 적장 장수의 숙모를 괜히 건드려서 처참한 패배를 겪거나, 진의록의 처 두씨를 약속까지 어겨가며 취해서 관우를 서운하게 하거나.[74] 오서에 따르면 원매라는 인물이 원소의 사남이라는 설이 있는데, 삼국지와 후한서 모두 원상이 막내아들이라 일관되게 밝히고 있기에 실존성 자체가 의심되고 있으며, 원매가 등장하는 유이한 기록인 조만전에서는 원매가 원상의 동생이 아닌 원상의 형의 아들(=조카)이라고 적혀있어 기록이 엇갈린다.[75] 관도대전 이후 조조의 부하들이 원소와 내통한 상소들을 보며. 하후돈은 이들을 모두 엄벌에 처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조조는 위와 같이 말하고는 "이 일은 두 번 다시 입 밖에 꺼내지 말라." 고 엄명을 내리며 내통한 상소들을 모두 불태웠다.[76] 타인의 기전의 인물평에 이름을 올리는 경우는 상당히 드문 케이스다. 또 하나의 예는 유비의 인물평에 언급된 조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