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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체르케스와 카바르다 디아스포라 상징기. 현재 색상을 연하게 하여 아디게야 공화국의 국기로도 쓰이고 있다.[1] |
체르케스 무슬림 여성들은 여러 러시아 문학가들의 소설에서 매력적인 미인으로 묘사되기도 했다. |
체르케스인과 관련성이 있는 민족으로는 카바르다인, 아바자인과 압하스인이 있다.
2. 명칭 및 분류
'체르케스인(Черкесы)' 또는 '체르카스인(Черкасы)'이라는 표현은 주변의 튀르크인이나 러시아인들이 부르던 타칭이며 튀르크어로 '머리 자르는 사람' 또는 '전사 살해자'란 의미에서 유래했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다.[5] 스스로는 '바닷가 높은 지역에 사는 사람'이란 뜻의 아더가(Адыгэ)라고 칭했다.오늘날의 러시아에서는 체르케스인을 통칭하여 아디그인(Адыги)이라 칭하며 이들이 사는 곳을 크게 4개로 나누어 각자 다른 명칭으로 부르는데 다음과 같다.
- 아디게야 공화국의 체르케스인에 대해서는 아디게인(Адыгейцы).
- 카라차예보-체르케시야 공화국의 체르케스인은 지명과 같이 체르케스인(Черкесы).
- 카바르디노-발카리야 공화국의 체르케스인은 카바르다인(Кабардинцы).
- 흑해 연안의 체르케스인은 샵수그인(Шапсуги).
3. 역사
3.1. 전근대
1896년 타만 반도에서 발견된 신드족 전사 석상. 현재 크림 공화국에 위치한 케르치 고고학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
서기 3~5세기 사이 동로마 제국의 영향으로 체르케스인들은 여타 캅카스 민족들처럼 기독교를 받아들였으나 이웃나라인 조지아나 아르메니아와 다르게 기독교가 깊이 뿌리내리지는 못하고 토속 신앙과 기독교가 공존하는 봉건제 사회를 유지하였다. 정치적으로 제대로 통합되지 않은 채 여러 개의 부족국가들로 나뉘었던 체르케스는 하자르와 뒤이어 하자르로부터 독립한 오세트인들이 세운 국가 알라니아의 지배를 받아야 했다.
서기 10세기경 북서캅카스의 체르케스인 부족연맹이 크림 반도와 인접한 타만 반도에서부터 오늘날의 투압세(Туапсе) 시와 인접한 네쳅수호(Нечепсухо) 강에 이르는 지역을 장악했다. 부족연맹은 흑해 동부 연안의 샤차(Шъачэ)를 수도로 삼아서 아더가 하쿠(Адыгэ Хэку) 또는 체르케시야(Черкесия)라는 국가 형태로 발전했다.
특히 체르케스인들 중에는 미인이 많은 것으로 알려져 오스만 제국과 페르시아의 하렘에도 체르케스 여성들이 많이 들어갔지만 체르케스인들은 이집트 맘루크 왕조의 맘루크로 더 유명했다. 크림 타타르인이 형성되기 전부터 크림 타타르인의 선조인 쿠만족들이 이들을 계속 습격하고 약탈하여 많은 체르케스인들이 중동에 노예로 팔려가 노예 군인인 맘루크가 되었다. 흑해 연안과 캅카스 출신 맘루크들은 역사적인 아인 잘루트 전투에서 몽골 서정군을 대패시켰으며 아크레와 야파의 십자군 잔여 세력을 전멸시켰고 체르케스 맘루크들은 이집트에서 바흐리 맘루크 왕조의 뒤를 이어 부르지 맘루크 왕조를 세우기도 했다.
약 15세기부터 이웃한 킵차크 칸국의 분파 크림 칸국의 약탈과 노예 사냥에 오랫동안 시달렸던 체르케스인들은 이를 막을 목적으로 17세기 무렵에 기독교에서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오스만 제국의 술탄에게 지속적으로 공물을 바쳤으나 크림 타타르인은 이를 무시하고 계속 체르케시야의 중심부까지 침략했으며 체르케스 신민을 보호할 의무가 있었던 오스만 제국은 오히려 이를 방치해 버려 많은 체르케스인들이 노예가 되는 데 일조했다.[9]
16세기 경 카바르다의 대공 템류크 이다르는 오스만 제국의 지원을 받던 크림 칸국의 위협에서 벗어나고자 자신의 딸 마리야 템류코브나를 루스 차르국의 '뇌제' 이반 4세의 두번째 황후로 시집을 보내 당시 러시아와 결혼 동맹을 맺고 타타르인들과 전쟁을 벌였다. 이때 체르케스인들은 카잔 칸국과 아스트라한 칸국을 공격하던 루스 차르국에 지원군을 보내 이 지역들이 러시아에 병합되는 데 기여했다.
당시 템류크 이다르는 다게스탄의 샴할(Шамхал)[10]들이 다스리던 타르키 샴할국(Таргъу Шавхаллыкъ)에 대항하기 위해 1557년 러시아에 도움을 요청하였고 이반 4세는 러시아의 남진을 위한 요충지 확보를 목적으로 여러 카바르다 족장의 아들들을 볼모삼아 교육시키는 등 서서히 북캅카스 지역으로 영향력을 확대하였으나 이반 4세가 세상을 떠나고 표도르 1세를 대신해 보리스 고두노프가 실세가 되어 권력을 잡아 카바르다 측과 연합하여 다게스탄 지역을 공격하다가 도리어 3천 명이 전사하고 군 전체가 와해되는 대패를 겪고 당시 다게스탄의 뒷배였던 사파비 제국의 중재 아래 북캅카스에서 발을 뺐으며 러시아는 오랜 시간이 흐른 18세기 초반이 되어서야 북캅카스 지역에 다시 발을 내딛었다.
3.2. 근현대
1838년 독일의 화가 하인리히 암브로스 에케르트(Heinrich Ambros Eckert)가 그린 카자크와 체르케스 기병대의 전투 묘사화[12] |
나폴레옹 전쟁 종전 후 북캅카스로 파견된 알렉세이 예르몰로프[13]는 체르케스인들은 절대 러시아에 항복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하여 눈에 보이는 동부 체르케시야에 속한 카바르디아의 요새와 아울(Аул)[14]들을 마구잡이로 파괴하고 사람들을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무자비하게 학살하기 시작했다.[15][16] 이런 러시아군의 피비린내나는 학살극에 경악한 체르케스인들은 수세기 동안 이어진 피의 불화를 내려놓고 거세게 러시아에 저항하였다. 이에 러시아는 게릴라전을 펼치던 체르케스 저항군에게 몰래 식량과 무기를 대주는 마을과 사람들을 색출해내 모조리 초토화시키고 처형하는 것으로 대응했고 결국 1822년 동부 카바르디아 지역은 완전히 러시아군의 수중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이후 학살과 강제이주, 19세기 초반부터 시작된 전염병으로 공백지가 된 카바르디아에는 러시아군 소속으로 카바르다인과 맞서싸운 쿠반 카자크 인구가 터잡게 되었다.[17]
1848년에 오늘날 체첸과 다게스탄의 여러 부족들을 이슬람 아래 하나로 뭉치게 한 다게스탄의 김리 출신 이맘 샤밀(Имам Шамиль/Imam Shamil, 1797–1871)의 나이브(Наиб)[18] 무함마드 아민은 체르케시야도 캅카스 이맘국의 일부로 통합시키고자 한 샤밀의 뜻에 따라 압자흐 부족의 영토로 파견되었다. 이후 샤리아에 근거한 통치가 잘 먹혔는지 압자흐를 뒤이어 예게루콰이, 쳄구이, 마호쉬 부족이 그에게 충성을 맹세했으며 샵수그 부족은 그와 동맹을 맺고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약속했지만 아민의 부상을 달갑게 여기지 않은 러시아 제국은 그의 통치로 인해 권력을 잃어버린 체르케스 귀족들에게 무기와 재정을 지원하고 예전과 같은 지위를 회복시켜 줄 것을 약속하는 식으로 무함마드 아민의 체르케시야 통치를 간접적으로 방해했으나 크림 전쟁 발발로 인해 러시아의 눈길이 잠깐 다른 곳으로 향하는 동안 무함마드 아민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제대로 통제가 되지 않던 일부 체르케시야 지역을 재점령하고 통치력을 더욱 강화시켰다. 더 나아가 1853년에 여러 부족들로 구성된 체르케스군을 이끌고 러시아군 요새에 대한 공격을 계획했지만 이미 1828년부로 러시아에게 충성을 맹세한 카라차이인들의 공격으로 인해 해당 계획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한편 무함마드 아민을 체르케시야의 통치자로 인정하지 않던 오스만 제국은 체르케스의 권익을 위해 오스만에서 특사로 활동하면서 파샤라는 칭호까지 얻은 세페르비 자네코(Занэкъо Сэфэрбий, 1798–1860)를 체르케시야의 정식 지도자로 임명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아민은 오스만 제국 대재상에게 편지를 보내 이에 관해 항의하였으나 오스만 측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고 결국 아민이 직접 이스탄불까지 가서 술탄에게 체르케시야가 오스만 제국의 속국이 되는 조건하에 파샤로 임명되었는데 2명의 지도자를 동시에 맞이하게 된 체르케시야는 혼란에 빠져 두 개의 파벌로 갈라져 서로 전투를 벌였고 양측에서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기까지에 이르렀다. 1857년 5월 이스탄불로 다시 온 아민은 러시아 대사의 요청에 따라 체포되어 다마스쿠스로 추방되었고 그로부터 약 4개월 뒤에 탈출을 감행하여 체르케시야로 돌아와 재기를 노렸으나 이마저도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렇게 압자흐 지역은 러시아 제국에 빠르게 합병되었지만 러시아 제국은 압자흐 귀족들과 초반에 했던 약속들을 깡그리 무시해 버렸고 압자흐 부족민들을 상대로 한창 추운 겨울에 죽음의 행진을 시키는 것으로 보답했다.
코카서스 전쟁 종전 선언문을 낭독하는 러시아 제국군. 이후 북캅카스 지역 전체는 러시아령으로 완전히 합병되었다. |
러시아-체르케스 전쟁은 실제로 체르케스인들 입장에서는 매우 참혹한 재앙이었다. 1763년부터 시작된 101년의 전쟁이 결국 체르케스 측의 패배로 끝나고 1864년 북캅카스 지역이 러시아 제국령으로 완전히 합병되면서 상당수의 체르케스인들이 체르케시야에서 추방되어 살아남기 위해 무하지르 신분으로 흑해를 건너는 동안 배가 침몰하거나 그 안에서 전염병이 돈 탓에 수많은 이가 목숨을 잃고 말았다.[21] 오스만 제국에서는 새로 유입된 체르케스인들의 전투력이 우수하다는 점을 고려하여 아랍인들이나 발칸반도의 기독교도들이 봉기할 만한 지역 곳곳에 이들을 배치했으나 레반트 또는 쿠르디스탄에 정착한 체르케스인들은 정부에서 엄연한 주인이 있는 토지를 할당받아 정착했기 때문에 토착민들과 자주 유혈충돌을 일으켰다. 때문에 제국의 무슬림이나 기독교도 모두 체르케스인들을 "질병이나 퍼뜨리고 다니는 야만족 거지 내지 산적놈들"로 취급하고 거주지 인근에 체르케스인들이 정착한다는 소문이 들리면 집단적으로 항의와 불만을 표출했다. 대표적인 사례로 체르케스인들은 카이세리와 시바스 사이에 터잡고 살던 쿠르드족들을 무력으로 몰아내고 정착한 탓에 그곳에 뿌리를 둔 쿠르드 주민들의 민요에서 양가죽 모자를 쓴 잔학무도한 금발벽안의 사람들로 언급된다. 더불어 많은 체르케스인들이 재정착하는 과정에서 제대로 된 국가의 지원을 받지 못했으며 특히 10만 명의 크림 타타르 난민을 수용하기도 했던 오스만령 바르나에서는 약 8만 명의 체르케스인들이 주변 환경에 적응하지 못한 데다 도시 외곽에 위치한 수용소에 정착해 질병과 기아에 시달리다 비참하게 죽어갔다.[22] 어찌나 상황이 참혹했던지 군에서 체르케스인들의 시신을 제대로 매장하지 못해 죄수들을 모집해야 했을 정도다.
비극적이게도 해당 정책은 학살과 보복의 역사로 돌고 도는 일이 되었다. 과거에 기독교인이랑 사이좋게 지낸 편인데도 불구하고 억울하게 러시아 제국의 잔인한 침략을 당한 것에 한을 품은 체르케스인들은 처음에는 불가리아 주민들로부터 정착하는 데 여러모로 도움을 받아 서로 사이가 좋은 편이었으나[23] 1877-1878년 사이 불가리아에서 러시아의 지원을 받은 독립 항쟁이 일어나자 과거에 러시아군이 자신들에게 했던 것처럼 불가리아인들을 상대로 똑같이 학살과 약탈을 벌였고 끝내 패배하여 그토록 증오하던 러시아군에 의해 또 추방당해야 했다.[24] 이를 잊지 않은 불가리아인들도 발칸 전쟁 당시 포마크인들을 비롯한 무슬림들을 대상으로 학살과 약탈을 행했는데 포마크인들도 분노하여 오스만으로 들어와 살면서 기독교인에 대한 증오로 미쳐 버렸고 이들이 분풀이로 마구 학살하여 벌어진 것이 바로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이었다.[25]
4. 현황
체르케스인 학살과 강제추방에 대한 추모 행사를 벌이는 튀르키예의 체르케스인들. |
이라크 등에 거주하던 체르케스인들은 오늘날 독일 등으로 망명하는 편이라고 한다. 원래 북캅카스 산지 지역에서 부족 단위로 나뉘어 살고 있다가 17세기 이후에는 오스만 제국의 간접적인 지배를 받았고 18~19세기에 러시아 제국이 오랜 전쟁을 거쳐 체르케시야 지역을 정복한 후 이 지역에 거주하던 대부분의 체르케스인들은 튀르키예로 추방당하거나 학살당했다. 2021년 통계 기준으로 크라스노다르 지방의 체르케스인 인구는 0.3%에 불과하고 아디게야(25.7%)나 카라차이-체르케시야(12.7%)에서도 소수민족이다. 다만 카바르디노-발카리야(60.1%)에서는 체르케스인이 주류를 점하고 있다.[27]
4.1. 이스라엘의 체르케스인
자세한 내용은 이스라엘 무슬림 문서 참고하십시오.4.2. 아랍권의 체르케스인
1921년 4월에 촬영된 트란스요르단의 체르케스 승마술. |
이렇게 아랍권에 정착한 체르케스인들은 아랍권 각국이 독립한 후 각기 다른 운명을 맞이했다. 요르단의 체르케스인들은 요르단 왕국의 하심 왕실 근위대로 고용되어 나름 평온하게 살게 되었으나 골란 고원의 체르케스인들은 6일 전쟁 이후 시리아 각지로 흩어졌으며 시리아 내전 이후 대부분 난민이 되어 흩어졌다.[28] 이들은 이라크 북부에 주둔했던 여타 오스만 체르케스인들과 마찬가지로 튀르키예 혹은 서방 국가 각지로 망명했다.
5. 체르케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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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토[32] | ||
??? ~ 1864년 | ||
표어 | Псэм ипэ напэ[라틴문자] 삶 이전에 명예 | |
위치[34] | 크라스노다르 남부 아디게야 공화국 카라차예보-체르케시야 공화국 카바르디노-발카리야 공화국 스타브로폴 지방 북오세티야-알라니야 공화국 | |
면적 | 82,000km² | |
인구 | 1,625,000명 86,655명 (체르케스 대학살 이후) | |
수도 | 샤차 (1860~1864) | |
정치체제 | 봉건제 | |
국가원수 | 대공[35] | |
주요 군주 | 이날 대공 (1427~1453) | |
언어 | 아디게어 카바르다어 우비흐어 | |
종족 | 체르케스인 우비흐인 압하스인 카라차이인 발카르인 아바자인 노가이인 | |
종교 | 하브제교 → 정교회 → 수니파 이슬람 | |
성립 이전 | 지치아[36] | |
멸망 이후 | 러시아 제국 |
정확히 언제 설립되었는지는 자체적인 기록이 없어 현재로써 알 수 없으나 스키타이계 부족 신드족이 건국한 신디카(Синдика)를 통해 기원전 5세기부터 원시적인 국가의 틀을 잡았던 것으로 보인다. 동유럽과 중앙아시아 사이에 위치한 흑해 북동쪽 해안 인근에 위치했으며 러시아가 북캅카스를 정복하기 이전까지 해당 지역은 완전히 비옥한 고원과 캅카스의 북서쪽 스텝 지대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고대부터 수많은 이민족들의 침략에 시달렸다. 이러한 역사 때문에 체르케스인들은 주변국에서 굉장히 악명높은 기마전사들로 유명했다.
6. 문화
체르케스인들의 전통 의상. |
전통적으로는 아더가 하브자(Адыгэ Хабзэ)라고 하는 종교를 믿었으나 오늘날에는 수니파 이슬람을 믿는 무슬림이 대다수다. 동방 정교회 국가였던 러시아 제국과 국가 무신론 체제의 소련 치하를 거치다 보니 이란이나 사우디아라비아처럼 종교적이지 않아 여성에게 히잡이나 니캅을 강요하지 않으며 여성들은 대부분 서구적으로 산다. 그러나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이 없는 건 아니어서 아더가 하브자[39]를 부활시키려는 신이교주의자들이 박해를 당하기도 한다.
체르케스인은 무슬림식 인명을 쓰지만 체르케스어 고유 어휘를 인명으로 쓰기도 했다. 대표적인 사례로 샵수그인인 '터궈저콰 커즈바치'(Тыгъужъыкъо Къызбэч [təʁʷəʐəqʷa qəzbatʃ], Тугужуко Кызбэч, 1777년 ~ 1840년)가 있으며 요르단 출신으로 체르케스인 민속 문학에 대해 연구한 '자머화 암자드'(Жэмыхъуэ Амджэд, Амджад Джаймуха, 1962년 5월 1일 ~ 2017년 10월 7일)는 자신의 아들에게 《산잘레이 서사시》에서 유래한 '산잘레이'(Сэнджэлей)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했다.
체르케스인의 전통 중에는 접대의 관습이 있어 손님이나 방문객들에게 음식을 항상 후하게 베푸는 걸로 유명했는데 타인이 적일지라도 음식을 베풀어 준다든지, 체르케스인들이 사는 지역은 돈 없이 다니더라도 절대 굶으며 여행하지 않는다는 이야기 등이 남아 있다. 이들의 요리는 러시아 요리보다는 튀르키예 요리와 흡사하다고 한다.
다른 북캅카스 민족들과 마찬가지로 일종의 벤데타 문화가 있었다.[40] 중세 유럽처럼 결투 문화도 존재했는데 이는 심한 모욕을 당하여 자신의 명예가 훼손될 시 이루어졌다.
7. 부족
체르케스어 범위에 속한 체르케스어 방언들은 15세기에 여러 소국과 부족으로 나뉘어졌던 체르케스 민족을 하나로 통합한 아더가 하쿠(체르케시야)의 이날 대공이 사망한 후 다시 지역별로 부족들이 나뉘면서 차이점이 생기기 시작했고 부족 간의 교류가 어려워짐에 따라 각 부족이 서로 조금씩 고립되어 각자의 방언을 형성하였다.- 서부 체르케스
- 압자흐(Абдзэх)
- 브제두그(Бжъэдыгъу)
- 하투콰이(Хьэтыкъуай)
- 맘헤그(Мэмхэгъ)
- 나투하이(Натыхъуай)
- 쳄구이(КIэмгуй)
- 예게루콰이(Еджэрыкъуай)
- 자네(Жанэ)
- 샵수그(Шэпсыгъ)
- 동부 체르케스
- 카바르데이(Къэбэрдэй)
- 베슬레네이(Беслъэней)
- 우비흐(Пэху)[41]
[1] 녹색은 자연과 이슬람, 금색은 평화로 가득찬 밝은 미래와 곡물의 풍부한 수확, 12개의 별은 체르케스인을 구성하는 전통적인 12개 부족을 의미한다. 별들 밑의 세 화살은 체르케스 고유의 도덕규범 아더가 하브자에서 "당신이 내 친구라면 평화를, 당신이 내 적이라면 전쟁을"이란 의미를 담고 있다.[2] 당시 체르케스 인구의 80~97%가 러시아 제국군과 쿠반 카자크의 손에 학살당하거나 추방된 해당 사건의 참혹성과는 별개로 국제적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당연히 가해자에 속한 러시아는 '체르케스 이주(Черкесское мухаджирство)' 정도로 사건을 축소하며 체르케스 애도의 날인 5월 21일을 북캅카스 정복 기념일로 삼고 있다. 이를 학살로 인정하는 국가는 조지아뿐이며 인정한 것도 오래되지 않은 2011년이다. 아무래도 나라 없는 민족인지라 다른 학살들에 비해서 인지도가 떨어지는 편이다.[3] 이러한 인구 구조는 주변국으로부터 극심한 탄압과 박해에 시달린 역사가 있는 아일랜드 및 아르메니아와도 유사하다.[4] 러시아-체르케스 전쟁이 끝난 1864년에서 한참 후인 2021년 기준으로 압하스인과 아바자인을 제외한 러시아 북서캅카스의 총 인구수는 751,486명으로 똑같이 러시아의 침략을 받은 동북캅카스 지역의 터줏대감 체첸인과 아바르인보다 적은 수이며 동시에 체르케스 대학살이 일어나기 전의 인구수를 아직까지 회복하지 못한 수이기도 하다.[5] 해당 명칭의 기원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가설이 있는데 고대 그리스에서 이들을 부르던 고전 그리스어 명칭 시라케스(Σίρακες / Sirakes) 또는 몽골어로 '길을 막는 자들'을 의미하는 제르케스(Jerkes)에서 기원했다는 설이 대표적이다.[6] 아디게어로 МыутIэхэр. 이들은 체르케스인과 압하스인, 아바자인의 공통 조상격 되는 민족이다.[7] 히타이트의 명칭이 이들에게서 유래했다. 히타이트인은 원시 인도유럽인의 분파가 캅카스를 거쳐 아나톨리아 반도에 유입되면서 현지의 하티인들을 정복하고 동화시키면서 성립된 민족이다.[8] 아디게어로 하티의 아들, 하티의 남자를 뜻한다.[9] 체르케시야 동부에 위치한 카바르다 측은 이에 분노해 크림의 칸과 오스만 술탄에게 더는 경의를 표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으며 1708년 칸잘 전쟁에서 카바르다로 침략을 가한 2-3만 명 규모의 크림-오스만 연합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기까지 했다. 해당 전쟁은 체르케스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 중 하나로 언급된다.[10] 쿠미크어로 Шаухал/Şawhal. 서기 8~19세기 사이 다게스탄과 북동캅카스 지역의 실세격 민족 쿠미크인 통치자들을 일컫는 칭호.[11] 우비흐어로 체르케스 대학살을 "tsʼətsʼakʷʼən"라고 지칭하는데 이는 "tsʼətsʼa"와 "kʷʼə-"가 조합된 것에서 유래했다. 일설에 따르면 해당 단어는 체르케스인들을 학살하는 데 일조한 파벨 치치아노프의 성씨에서 유래했다지만 이는 민간어원으로 보인다.[12] 러시아 카자크들의 상징 중 하나인 쿠반카를 쓴 왼쪽의 이들이 카자크, 사슬 갑옷으로 중무장한 오른쪽의 이들이 체르케스군이다.[13] 대프랑스 전선에서 싸웠던 장군. 아우스터리츠 전투와 보로디노 전투, 그리고 라이프치히 전투에도 종군했다. 오늘날 체첸 공화국의 수도 그로즈니로 이어지는 그로즈나야 요새를 세웠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체첸인들이 체르케스인과 마찬가지로 그의 초토화 전술에 의해 목숨을 잃고 말았다.[14] 캅카스와 중앙아시아 등지의 요새화된 마을. 자주 부족간의 전투가 발발하던 캅카스에선 적의 침입을 막고자 주로 능선이나 절벽 위에 지어진 탓에 19세기의 러시아도 주로 기습하는 식으로 이곳을 공격하였으며 마을 구조도 상당히 엇갈리게 해 놔서 점거하는 데 있어 꽤나 애를 먹었다.[15] 이러한 예르몰로프의 초토화 전술은 체르케스를 상대로 한 러시아군과 카자크의 표준조치로써 채택되었다.[16] 훗날 체르케스를 상대로 초토화 전술을 시도한 수많은 러시아 지휘관들 중 독일계 러시아인이었던 그리고리 자스는 독보적으로 잔인했는데 체르케스 전사들의 참수한 머리를 자신의 천막 근처 긴 장대에 꽂아 걸어 두는 것은 기본에 체르케스 남자들을 산 채로 불태워 버리거나 병사들에게 총검으로 임산부의 배를 갈라 적출된 태아들을 가지고 놀게 하고 어린이들을 윤간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체르케스인의 절단한 머리나 사지 부위를 자신의 침대 밑 상자에 보관해 두고 그 머리를 베를린에 있는 자신의 친구 교수들에게 해부학 연구자료로 보내기까지 했다. 그의 활동 기간 동안 동부 체르케스 인구의 70%가 그의 손에 처참하게 살해당했으며 상부에 올린 보고서나 편지 등에 이런 끔직하고 잔인한 행동들을 자랑스럽게 여기거나 미화하는 내용들을 작성한 탓에 결국 1842년에 코카서스 전쟁에서 제외되었다. 이런 유혈낭자한 심리전 탓에 당대 체르케스인들에겐 살아있는 공포 그 자체였으며 지금도 체르케스인 사이에서 인두겁을 쓴 사탄 내지 악마로 여겨진다.[17] 오늘날 카바르디아에 거주하는 러시아인의 상당수는 이러한 전과를 인정받아 해당 지역에 정착한 쿠반 카자크의 후손이라고 한다.[18] 아랍어로 نائب. 본래 중세 이슬람권에서 마을의 장로, 성직자의 대리인 또는 보좌관을 가리키는 호칭이나 캅카스 이맘국에서 특정 지역 내의 군사적 권한을 행사하고 무프티(مفتي, 샤리아 법관)를 임명할 수 있으며 지역민들이 샤리아를 준수하는지 감시 및 감독할 수 있는 샤밀의 대리인을 의미한다.[19] 오늘날 크라스노다르 지역의 크라스나야폴랴나 일대.[20] 다만 밀류틴이 원수로 진급한 것은 명예직이었다. 1881년에 알렉산드르 2세가 암살당하면서 그의 지위는 위태로워져 군직에서 사임했고 1898년에 알렉산드르 2세 황제 탄신 80주년 기념식에서 러시아 제국 역사상 최후의 육군 원수로 진급했지만 노령인 82살에 명예직으로 준 것이었고 이미 나이가 많아 퇴임했기 때문에 실권은 없었다.[21] 이 때문에 오늘날 체르케스인들은 흑해에서 난 생선은 절대 입에도 대지 않는다고 한다.[22] 체르케스인들이 굶주림을 버티지 못해 빵을 구걸할 때 오스만군은 질병에 감염될까 두려워 오히려 그들을 쫓아냈다.[23] 물론 불가리아에 처음 도착했을 때 불가리아인들이 러시아인들처럼 정교회를 믿고 러시아어와 상당히 유사한 불가리아어를 구사한다는 점으로 인해 애꿎은 불가리아 마을 주민들을 러시아인으로 착각하고 공격하기도 했다.[24] 이 과정에서 또다시 체르케스 여성과 어린이들이 러시아군에게 강간당하는 비극이 일어났으며 이때 피해자 소녀들은 친척들에 의해 하렘으로 팔려나가는 신세가 되었다.[25] 물론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은 이들만 저지른 게 아니라 오스만 제국의 명령에 의한 계획적 학살이었지만 적어도 이들은 같은 무슬림은 봐 줘서 이슬람으로 개종한 아르메니아인들은 못본 체하고 풀어주기도 했다. 그래서 오스만 제국이 당시에 저지른 아랍인 및 다른 무슬림 학살에 대해서도 포마크인들이나 이들 체르케스인들은 불쾌하게 여겨 끼어들지 않으려 했다. 때문에 이런 학살은 오스만군이 직접 벌이거나 쿠르드족 민병대를 주로 동원했다고 한다.[26] 체르케스인과 체르케스 혈통을 지닌 튀르키예인들을 포함하면 약 200~300만 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추측된다.[27] 정확히는 체르케스인이 약 52만 9천명, 카바르다인이 약 50만 2천명 정도이다.[28] 6일 전쟁 이후 시리아에서 체르케스인 디아스포라 규모가 가장 컸던 도시가 라카였다.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29] 카바르다어: Хэкужъ[30] 카바르다어: Xəkujz[31] 체르케스 연맹의 지도자이자 오스만 제국의 체르케스 특사였던 세페르비 자네코가 1830년대에 처음 만든 상징기이며 1860년 체르케스 마질리스에서 정식 국기로 쓰였지만 1864년 5월 21일 체르케시야가 러시아 제국령으로 완전히 합병된 후 쓰이지 않게 되었다.[32] 1860년 체르케스 마질리스를 통해 지정된 영토.[라틴문자] Psəm yipə napə[34] 전성기 기준[35] 각 부족의 영향력 있는 유력자들을 통해 카바르디아의 이날 대공의 후손들 중에서 선출되었다.[36] 체르케시야의 전신이 되는 중세 왕국.[37] 또는 우즈덴(Uzden)[38] 다만 12개 체르케스 부족에 속한 나투하이와 샵수그, 압자흐 부족은 다른 부족들과 달리 민주제를 운영했다. 체르케스 상징기에서 9개의 별 아래에 있는 나머지 3개의 별이 민주제를 운영했던 세 부족을 상징한다.[39] 카라차이-체르케시야에서는 인구의 12%, 카바르디노-발카리야에서는 인구의 3%가 이 종교 신자다.[40] 아디게어로 tlish'ezhen. 체르케스 고유의 도덕 규범인 아더가 하브자에는 3가지 신조가 있었는데 첫번째가 여성과 장로에 대한 존중, 두번째가 외부인에 대한 접대, 세번째가 피에 대한 복수였지만 세번째 신조는 체르케스 대학살의 여파로 인한 것인지 오늘날엔 거의 사라졌다고 한다.[41] 오늘날 소치 일대에 거주하던 이들도 체르케스인에 포함되었지만 이들은 러시아인들에 의해 캅카스 지방에서 추방되어 대부분 튀르키예인에 동화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