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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송 大宋 | ||
960년 ~ 1127년 | ||
성립 이전 | 정강의 변 이후 | |
후주 | 금나라 | |
남송 | ||
별칭 | 북송(北宋), 송조(宋朝) | |
위치 | 중국 | |
수도 | 동경개봉부 | |
정치 체제 | 전제군주제 | |
국가원수 | 황제(皇帝)(천자) | |
국성 | 조(趙) | |
주요 황제 | ||
주요 재상 | 범중엄, 사마광, 왕안석 | |
언어 | 중세 중국어 | |
문자 | 한자 | |
종교 | 유교, 대승 불교, 도교 | |
종족 | 객가, 한족 | |
면적 | 1,050,000km² (962년 기준) 3,100,000km² (980년 기준)[1] 2,800,000km² (1111년 기준) | |
통화 | 동전(송전)[2], 철전[3], 교자(지폐) | |
주요 사건 |
| |
접경국 | 요(~1125) → 금(1125~) 탕구트[10] 고창회골 대리 자기(1100~)[11] 티베트 분열기 안남(~965) → 대월(968~) 여진 | |
현재 국가 | [[중국| ]][[틀:국기| ]][[틀:국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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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北宋. 960년 오대십국시대 후주(後周)의 무신 조광윤이 후주의 공제 시종훈으로부터 선양을 받아 건국한 중국의 한족 통일 왕조. 수도는 개봉(카이펑)이었다. 조광윤이 송주에서 절도사로 부임했기 때문에 나라 이름을 대송, 연호를 '건륭'으로 정했다. 보통 북송은 960~1127년까지 존속한 167년의 역사를 말하나, 이후 남송도 1127~1279년까지 152년을 더 존속했으므로 송이라 하면 보통 960~1279년까지 총 319년간 존속했다고 여긴다.2. 역사
송 태조 조광윤은 육조시대 유송(공교롭게도 이름이 똑같이 宋이다) 이래로 계속되던 전 황제에게 선양을 받고 그 일족을 멸족하던 관행을 중지하고, 후주의 황족인 시씨 일족을 보전하며[12] 우대하는 등, 상당히 인도적인 방식으로 나라를 세웠다. 시씨 가문에 대한 은전은 태조 조광윤의 <석각유훈>에 따라 계속 유지되었으며 애산 해전으로 남송이 멸망하는 그날까지 다수의 시씨가 송 황실과 마지막을 함께 했다. <석각유훈>에 더해서 조광윤이 시씨 가문을 우대하겠다는 증거로 내려준 것이 바로 단서철권이다.[13]애초에 후주 자체가 단명 왕조이기도 했지만, 후한의 유지원 - 후주 태조 곽위 - 후주 세종 시영처럼 찬탈과 양자 상속을 거듭해 대를 이어왔던 상황이었다. 따라서 조광윤은 곽위에 비해서 매우 온건한 계승을 한 셈이었다.
태조는 장수 시절부터 거란족을 물리치고 후주의 북조 전역을 완수하는 1등 공신이었으며 후촉, 남평, 광주의 남한과 남부 최대의 국가인 남당을 멸망시켜 중국의 대부분을 차지했으나, 자기 대에 통일을 완수하진 못했다. 제2대 황제는 조광윤의 동생인 태종 조광의로 사서에 따르면, 태조 조광윤이 조광의에게 선양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조광의가 방에 들어간 다음 갑자기 조광윤이 급사하고 다음 황제가 되었다는 촉영부성의 일화는 아무리 봐도 황위 승계 과정에서 심상치 않은 일이 있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다만, 촉영부성 그 자체가 조광의를 비난하는 이들의 주장이란 말도 있다. 어쨌든 송 태종은 오월과 북한을 멸망시키고 천하통일을 완수했다.
그러나 통일 이후부터 송나라는 약한 군사력에 발목을 잡히는데, 태조 조광윤과 태종 조광의 시절에는 통일 전쟁을 완수한 고참병과 유능한 지휘관들이 많아 군사력이 우수했으나, 2차에 걸친 대요 북벌이 실패하고 요나라와의 일전에서 대패를 거듭해 군사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그리고 송의 군사적 약체화를 간파한 요는 200,000명이 넘는 대군을 동원, 요성종이 직접 친정해 파죽지세로 전주까지 밀고 내려왔다. 송 조정은 대군의 남하에 기겁하여 금릉(난징)과 성도(청두)로 천도해야 한다는 천도론이 대세가 될 지경까지 몰렸다. 당시 황제이던 태종의 아들 진종은 심성이 여린 군주로 유명하나, 구준의 진언을 받아들여 전주에 친정하고 요 성종의 기세를 꺾는데 성공했다. 이후 전황이 소강 상태가 되자, 송과 요는 전연의 맹(澶淵之盟)을 맺게 되었고 요군은 철퇴했다.
조약을 체결하기 직전의 송은 대단히 분위기가 좋았는데, 황제가 금군을 이끌고 친정해 분위기를 전환시키는데 성공하고 국경 방위군으로 하여금 요군의 퇴로를 끊으려 했다. 또한 요군의 실질적인 총사령관인 소달름[14]을 저격해 전사시키기까지 해서 해볼만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별다른 피해 없이 황하까지 밀고 내려온 요의 20만 기마 군단은 상당한 부담이 되는 상대였기에 송과 요는 강화를 맺었다.
전연의 맹의 주요 조항은 송과 요는 형제 관계가 되며 송은 요에게 비단 20만필과 은 10만냥을 세폐로 지급한다는 것으로 요가 강력히 요구하는 영토 할양 대신에 재화를 지불하는 조건으로 평화를 구매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후, 꾸준히 성장해 나가던 송에 새로운 대적이 생겼으니, 탕구트계 민족이 세운 서하였다. 원래 송과 서하는 여러 차례 충돌하긴 했지만, 온건파인 서평왕 이덕명의 재위 기간 동안은 평화를 유지했다. 그러나, 이원호가 즉위한 뒤부터 상황이 반전해 송은 호수천 전투를 비롯해 크고 작은 전투에서 패전을 거듭하고 최고위급 인사인 범중엄과[15] 한기를 투입해 소모전과 지연전, 청야 전술을 펼친 끝에 간신히 전선을 유지했다. 반대로 서하는 고작 10만의 병력으로 60만 이상을 전선에 투입한 송을 몰아붙였지만, 아버지 이덕명이 받던 세폐와 조공 무역이 끊겨 수많은 도시를 약탈하고도 물자 부족에 허덕이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래서 송의 인종과 서하의 경종 이원호는 불편한 타협을 받아들이고 세폐와 조공 무역을 부활하는 것으로 전쟁을 마무리지었다.
송의 군사적 약세는 최고 지휘관 대부분이 군대를 전혀 모르는 문관 출신인데다[16] 작전에서 장군들의 말을 안 듣고 제멋대로 하는 일이 많아[17] 패전을 자초하는 경향이 있었다. 또한 전쟁이 언제 일어날지 모른다는 불확실성 문제로 계속 병력을 증강해 군사비 문제가 대두하고 세폐 지급으로 평화가 유지됨에 따라 전투 경험이 부족한 병력이 양산되어 송군은 강병을 자랑하는 요와 서하에 비해 크게 부족한 약군으로 전락했다.
결국 1127년에 일어난 정강의 변으로 휘종과 흠종이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 태종의 포로가 되는 치욕을 당하고, 남은 세력은 항주로 천도하게 되었는데 이후의 시기를 남송, 그 전은 북송이라 일컫는다. 사실상 당나라 시절까지의 북중국의 한족은 북방민족 계열이 많았으며, 문화가 가까운 요나라 및 금나라에 전부 편입되었지만 북송의 황제는 선비족 계열 지배층에서 벗어난 한(漢)나라의 직통이자 전통적인 혈연의 한족 귀족으로 그만큼 한자에 탁월했고, 오랜시간 지난 한나라와 조위 전통의 한족 문화를 펼쳤다. 하지만 한나라 직통이라고 부르던 북송 황제의 혈연들이 여진족의 기방에 보내지는 것은 한족들에게는 매우 치욕스러운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북송 스스로 자초한 측면도 있었다. 북송은 요나라를 제압하고 연운 16주를 되찾기 위해 금나라와 결탁했는데, 요나라의 암군 천조제와 비밀리에 관계를 맺는 등의 신의없는 외교를 단행하여 금 태종의 침공을 불러 일으켰기 때문이다.
3. 정치
북송의 수도인 개봉을 그린 <청명상하도>(清明上河圖)[18] 부분 |
조광윤은 당나라의 멸망 이후 거의 60년에 가까운 전란을 수습하고, 이 혼란이 나라 각지에 군벌(절도사)들이 할거하여 생긴 것이라는 판단 아래 모든 절도사를 해체하고 전군을 황제의 휘하에 두면서 금군을 설치하는 등 중앙집권제를 완성하였고, 과거제로 관료를 발탁해 그들을 수족처럼 부릴 수 있는 군주제를 완성했다. 원래 과거 제도가 시행된 시기는 수나라 때지만, 진정한 관료 발탁의 용도로 사용되기 시작한 때는 송대부터라고 볼 수 있다.[19]
청나라의 학자 조익(趙翼)이 송나라의 관리에 대해 평하기를, 송나라가 사대부를 대우하기를 매우 두텁게 하였고 재물의 하사가 실로 풍족했기에, 관직에 오른 자들은 일신의 걱정에 매달릴 필요가 없이 각자 직무에만 몰두하면 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되니 어진 신하들이 대로 나왔고 관리들의 품행과 치적이 뛰어났으나, 재물을 베푸는 것이 너무 지나쳤기에 나라의 곳간을 흔들리게 만들었으므로 송나라의 제도는 법으로 삼을 것이 못 된다고 했다.[20]
3.1. 행정구역
송나라의 행정구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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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송은 당나라의 제도를 답습하여 강력한 중앙집권제를 도모하고자 기존의 주현제에서 더욱 효율적인 행정단위를 설치했는데 그것이 바로 로(路)이며, 역할은 오늘날 성과 비슷했다. 북송의 행정구역 체제는 로(路)-주(州)-현(縣)으로 구성되었으며, 로의 산하에 부주군감(府州軍監)이 있었다. 또한 부(府)로 승격시키거나 현을 군(軍)으로 승격시키기도 했으며, 동전 주조나 소금 생산, 제철을 담당하는 감(監)이 존재했다. 주가 부로 승격되는 경우는 황제가 즉위하기 이전 책봉을 받았거나 임관한 장소에 연유하여 승격되는 경우가 많았다.
3.2. 왕안석의 신법(新法)
송(북송)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신법이다. 인종 당시부터 송은 재정상 큰 문제점을 갖고 있었다. 비대해진 관료제와 군대, 지주들의 토지 겸병, 대상인의 독점 행위, 세폐 문제 등이 재정 적자를 초래하여 이에 대한 해결이 필요했다.보통 이 당시 북송의 멸망을 이야기 하며 대표적으로 꼽는 이론이 '3가지 불필요(冗)', 이른바 3용의 폐단이다.
- 용병(冗兵)의 폐단: 황권강화를 추진하기 위해 표방한 문치주의 정책과 북방왕조에 대항하기 위해 억지로 군대를 증강한 것은 국방력 약화를 초래했다. 송나라는 기본적으로 모병제에 천재지변이 일어나면 빈민구제를 목적으로 모병하기도 했다. 군대는 그 질에 비해 양만 비정상적으로 팽창했으며 이런 군대의 사기와 실력은 약할 수 밖에 없다. 이렇듯 넘쳐나지만 무능한 병사들은 송나라가 북방 왕조들에 의해 굴복당하는 직접적인 원인이 된다.
- 용관(冗官)의 폐단: 정형화된 과거제도에 따라 지속적으로 관리들이 늘어나지만 관직 수요는 점차 줄면서 필요 이상의 관리들이 넘쳐난다.
- 용비(冗費)의 폐단: 마지막으로 용관과 용병의 문제에 기인한 재정소모이다. 송나라는 대외적으로 북방 왕조들에게 세폐(歲幣)를 바치며 화친을 추구하면서 재정의 위기를 겪고 모병한 군인들의 식량과 물자를 국가에서 부담했고 재정 소모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며 넘쳐나는 관리들에게 지급되는 녹봉의 액수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으며 이런 재정 소모는 국가에 위기를 가져온다.
이 3가지의 행정적 문란을 3용의 폐단이라고 하는데 특히나 용병의 폐단은 군사력의 약화나 비합리적인 군사제도로 인해 발생한 것으로 북송 군대의 질적 저하를 가져왔다. 더구나 중앙군이라고 할수 있는 금군의 경우 북방왕조와 대립하는 과정에서 4배나 그 숫자가 증가하는데 이 숫자의 증가가 단기간에 이루어진 터라 군대의 질이 매우 떨어지는 상황이었다.
송나라 군제의 가장 큰 문제는 의병이 가장 쓸만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경술법과 같이 군지휘관을 1년에 한번씩 교체하는 제도나 통수부의 분할로 군사 지휘권의 혼동이 이런 상황을 조장했다. 그러니까 국경이 아니라 수도 인근에 전군의 상당수가 모여있었는데 이들은 물론이고 전국의 각 부대들을 지휘하는 장군들은 자기 부대가 소속이 누가 될지 아무도 몰랐다는 것이다. 이게 농담이 아니라 정말 장군들은 전장에 나가기 직전까지 자신이 지휘할 병사들이 누구이고 누구랑 호흡을 맞춰야 하는지 몰랐다. 즉 장군 자신이 직접 모집한 의병들이 가장 믿음직한 이들이었다는 것인데, 여기에 더하여 송군은 비정규군과 민병들은 성을 지키고 보병 위주로 편제된 정규군은 나가서 기병을 상대한다는 비효율적인 전술을 고집했다. 이후에 남송에서 벌인 우주방어, 수성전을 보면 결코 질이 나쁜 것은 아닌데 이래저래 위정자들의 인식이 아쉽기 그지없는 일이다.
이렇게 약체화된 군대는 싸움을 위한 것에 앞서 사회 복지적인 측면에서 극빈층을 구휼하는 제도로 변질된다, 그러다 보니 이게 무슨 국가에 대한 충성도나 소위 말하는 멸사봉공의 정신, 이런 것과 사뭇 거리가 멀게 될 수밖에 없었고 대우도 그리 좋지 못하였다. 이렇게 비효율적인 병력만 무차별적으로 늘리다 보니 제때 봉급이 지급되지 못하기도 하는 등, 군대는 송나라의 재정에 있어 암적인 존재로 발전했다. 가령 거란과의 전쟁 당시 송의 인구는 1억 남짓 정도 되었는데, 군사가 90만을 찍고 있었다. 기록이 다소 부정확한 측면이 있기는 하지만 어쨌거나 병력이 충만하기는 했는데, 문제는 막대한 재정을 투입하는데도 보급이 제대로 안 되고 월급도 잘 안 나오니 군대가 제대로 돌아가긴 커녕 도적떼로 돌변해 군사 반란이나 일으키지 않으면 다행일 지경이 되버렸다. 특히 북송 말기에는 탈주병과 도적화 되어 버린 병사들이 끊임없이 치안을 위협하는 일이 일상다반사였고 수호전의 도적집단 양산박이 바로 이에 해당된다. 반란을 진압하러 간 부대가 반란에 가담할 정도이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21]
여기에 관료제의 문제인 용관의 폐단은 관료수의 비정상적인 증가와 그에 따른 관료조직의 무능화와 가렴주구의 증가, 마지막으로 황제에 종속된 관료조직으로 인한 융통성과 상황대처능력의 상실을 가져왔다. 한마디로 중앙에서부터 지방까지 모든 관료조직이 재원을 대책없이 빨아먹으면서 무능화 되어버린 상황인 것이다. 이렇게 비대한 행정조직과 군대를 운용하고 거란과 서하에 정기적으로 바치는 세폐에 송 중앙재정의 80~90%가 대책없이 빨려들어가고 있었다.
이런 때 왕안석은 신종의 신임을 얻어 신법을 시행했다. 신법은 부국책과 강병책의 두 종류로 나뉘는데 부국책으로는 청묘법과 시역법, 모역법, 균수법이 시행되었고 강병책으로는 보갑법과 보마법이 시행되었다.
그 중에서도 청묘법은 20%라는 싼 이자로 농민들에게 자금을 대출해주어 자연 재해로 인한 농민들의 피해를 구제함과 동시에 대지주들의 토지 겸병을 막음으로서 제국의 재정을 충실히 하려는 의도였다. 송대에는 호구를 따질 때 주호와 객호로 따졌다. 그 중 주호가 주 납세층이었는데 주호 또한 5개 등급으로 나뉘었다(1, 2등급이 대지주, 3, 4등급이 대부분의 보통 농민, 5등급이 영세 농민). 그러나 대지주는 토지 장부를 위조해 은닉하기 일쑤여서 세금을 내지 않는 경우가 많았고, 5등급의 영세 농민은 납세할 능력이 없다 보니 자연스레 3, 4등급의 농민이 1, 2등급의 대지주의 세금까지 떠맡게 되었고, 이들마저도 몰락하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이러한 폐단을 막고 대지주의 성장을 막기 위해 실행된 청묘법은 안정된 세수 확보를 위해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와 비슷한 맥락으로 시역법을 실시해 중소 상인들을 보호했다.
무엇보다도 왕안석이 가장 심려를 기울인 신법은 모역법이었다. 당 덕종 때 양세법이 시행되어 원칙상 양세를 제외한 잡세는 폐지되었지만 현실은 달랐다. 송대에도 여전히 양세법 하에 여러 잡세들이 많았다. 그 중 백성들을 괴롭힌게 '역'이었다. 일반 농민 뿐 아니라 지역의 유지들도 역을 져야 했다. 돈많은 지주야 거주지를 도시로 옮겨 역의 부담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일반 농민들은 그렇지 못해 자살하는 사례까지 있었다. 따라서 왕안석은 광범위한 여론조사와 시범 운영을 통해 모역법을 시행하게 된다. 모역법은 납세층을 재산에 따라 5등급으로 나눈 후 각 등급에 맞게 세금을 거두고, 국가는 거두어진 세금으로 역을 수행할 사람을 고용하는 제도였다. 철종 즉위 이후 사마광 등의 구법당이 신법을 폐지할 때 모역법을 폐지했다는 소식을 듣자 왕안석이 탄식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아무튼 왕안석의 신법은 전체적으로는 적절한 개혁이었지만 문제는 현실에 맞지 않는 부분도 있었고, 관리들이 실적만 노리며 부실 운영하는 등 많은 부작용을 낳아 결국 철종 때 구법당이 세력을 잡자 폐지되었다. 그 후 다시 신법당이 등장하지만 이때가 되면 개혁의 의지는 사라지고 오로지 정쟁을 위해 신법을 이용하게 된다. 결국 구법당과 신법당의 당쟁 심화에 영향을 미치게 되어, 백성의 실생활에는 별 도움이 되지 않는 결과로 그치고 말았다. 결국 3용의 폐단은 암군 송휘종의 난정에 의해 극히 악화되어 북송을 멸망시키고야 만다.
4. 경제와 문화
▲ 북송의 수도인 개봉을 그린 <청명상하도>(清明上河圖) 부분[22] |
▲ 수력을 이용하는 물레방아간 |
당나라 시대에 내전이 심심하면 발발하자, 송나라는 반대로 문치주의를 주장하며 군사력을 통제하기에 이르렀다. 이 때문인지 우연인지 군사, 외교적으로는 그닥 좋지 못한 행보를 보였으나, 경제, 문화적인 면에서 송나라는 중국 역대 왕조 중 후대 포함 최고로 꼽는 학자도 많을만큼 융성했다. 과거 중국 대륙은 오랜 대전쟁으로 피폐해졌으나, 송나라 시대에 전 세계 무역의 선두주자가 되면서 그 폐허를 극복하고 부활하는데 성공했고, 더 나아가 진화까지 했다. 송나라는 전성기였던 인종 시기 농업세와 상업세의 비율만 무려 3:7이었을 정도로 확실한 상업 사회에 진입했고, 상업 수도였던 개봉은 당시에만 인구가 무려 130만여명, 남송 수도 임안은 100만여명이었으며 중국의 산수화나 성리학도 이 때 기틀이 서기 시작했다.[23]
이러한 경제력의 근원은 송나라가 당시만 해도 촌동네에 불과했던 강남을 대대적으로 개발하기 시작한 것과 연관이 있다. 《삼국지연의》에선 이런 이미지를 반영하여 오나라가 '비옥한 강남의 토지'를 끼었다고도 표현하는데, 《삼국지연의》가 쓰여진 시기가 강남 개발이 진행된 명나라 초기였기 때문에 당시 기준으로 그렇게 묘사한 것이지 실제로는 고증 오류다. 후한 말 남양에서 강성한 세력을 지닌 군벌이었던 원술이 비어있는거나 다름없는 강남을 놔두고 중원에서 피터지게 싸우다 망한 것도 그만큼 강남이 별로 매력적이지 못했다는 반증이다. 강남에 자리를 잡은 손책과 그 뒤를 이은 손권 역시 지방 군벌로 끝났거나 독자적으로 제위에 올랐지만, 당시 한(漢)의 천하에 군사적이거나 경제적, 정치적으로 심대한 영향은 주지 못했다.[24] 강남이 발전하기 시작한 것은 육조시대 이후로, 그것도 강북을 능가한 것은 남송 이후의 이야기이다.
송나라 대의 농경 발전 |
북송대 드디어 강남을 개발할 수 있게 된 이유는 쌀에서 찾을 수 있다. 송 이전에 쌀은 주식이 아닐 뿐더러 강북에서는 자라기 힘든 작물이었다. 그러나 가뭄에 강하며 성장이 빠른 ‘점성도'(占城稻) 품종이 동남아시아에서 들어와 강남 전역에 쌀 농사가 확대되었다. 이에 따라 쌀 농사에서 중요한 물 때문에 수차가 개발되어 계단식 논 또한 생겼다. 게다가 이앙법의 도입으로 2모작이 가능해졌다. 이런 연유로 백성들의 경제적 부가 늘어나자 상업이 발전하였고 운송업도 같이 발달했다. 그에 따라 숙박 시설이나 여관 수리업 등 서비스업도 발전했다. 또한 수나라 시절부터 개발한 대운하를 통해 정치 중심지 화북과 경제 중심지 강남의 교통상 연계성이 강화되었기 때문에 송은 이전 시대에 비해 강남 개발의 효과를 톡톡히 누릴 수 있었다.
<colbgcolor=#C5AA65> 송나라 동전들 |
상업 발달의 산물인 상인 동업 조합(행, 작)도 번성했다. 도자기 기술도 발전을 거듭했으며 차 문화가 발달해서 농민들은 차를 상업적인 목적으로 재배하기 시작했고 찻집 같은 곳도 생겨났다. 예식을 대신 준비해주는 (요즘으로 말하면) '출장 뷔페 서비스'(!)가 있었고 기계식 물시계가 등장했으며 시중에는 음식점 숫자가 너무 많아서 맛을 넘어서 공연이나 냉난방, 배달 서비스 같은 마케팅으로 경쟁했다. 도시 내에는 수천명을 수용할 수 있는 간이 극장이 존재했고, 각 가정에서는 석탄을 가정연료로 썼다.
송나라 대의 무역 |
또한 해상 실크로드를 따라 도자기가 본격적으로 수출품으로 자리잡기 시작한 시점도 이 시점으로, 도자기의 도시 경덕진이 본격적으로 융성하기 시작했다. 외국 무역과 수출입 관리, 출입품 검사와 징세는 당나라때 설치된 시박사에서 담당하였다. 송대에는 광주를 비롯해 항주, 명주(영파), 천주, 밀주(칭다오), 화정 등 8곳에 시박사가 설치되었다. 고려와의 무역은 주로 명주 시박사에서 관리했다고 한다.
당시 사람들의 성품이나 인심 역시 후했다는 기록이 있다.
외지에서 새로 이사 와 옆집에 살게 되면 서로 도구들을 빌려주고, 뜨거운 탕과 마실 것을 갖다 주었으며, 물건을 사고 파는 일 등에 관한 정보를 알려줬다. … 어떤 집에 경사나 흉사가 생기면 사람들이 모두 몰려가 그 집을 가득 메웠다. -《동경몽화록》(東京夢華錄)-[27]
서구권 학자들 역시 송나라의 경제력을 높게 평가하는데, 영국의 경제사학자 앵거스 매디슨(Angus Maddison, 1926-2010)은 1인당 GDP를 450달러로 추산해 당시 송나라가 세계 전체 GDP 비율 중 23%을 차지한다고 추산했고,[28] 더 최근의 연구 결과에선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 경제사 교수 스티븐 브로드베리(Stephen Broadberry, 1956-)가 1인당 GDP가 1,200~1,500달러 사이였다고 추산했다.[29] 참고로 산업혁명 초인 1750년 영국의 1인당 GDP가 1,710 달러, 1800년엔 2,080 달러였다. 다만 이렇게 송나라의 경제력에 대한 찬사가 많다보니 이게 좀 과하게 올려치는 경우도 있는데, 학문적으론 팩트 체크가 먼저 필요한 부분으로 주의할 필요는 있다.
4.1. 근대화 가능성 고찰
일각에서는 상기된 풍성한 경제력과 문화력을 바탕으로 송대에 이미 동양판 산업 혁명의 기반이 있었던 것 아니냔 주장을 개진하기도 한다. 이는 송의 발달된 기술력, 그리고 산업 혁명 시기 영국과 비슷한 석탄 사용량과 제철 능력 때문에 나온 말이다. 그러나 산업 혁명이 단순히 석탄 사용과 제철 능력에서 비롯되었다는 단순화는 삼갈 필요가 있다. 애초에 흔히 주장하는 산업 혁명 떡밥이라는 것이 송의 석탄 사용량을 주요 근거로 삼는 경우가 많은데, 이것은 중국의 인구가 예나 지금이나 아주 많아서 그런 것이다. 석탄을 취사, 난방용으로 이용하는 것은 이슬람과 지중해 세계에서도 옛날부터 존재해 왔다. 심지어 중국과 비견되도 지지 않을 인구와 국가규모를 지닌 로마 제국에서도 근세에 들어서 관찰할 수 있는 이산화탄소량이 한때 배출되기도 했다. 특히 북송은 그리 길게 유지된 국가도 아니며, 당장 방랍의 난만 해도 송휘종 치세 북송 조정의 가혹한 착취와 부정부패로 백성의 고달픈 삶이 원인이 된 것이다.게다가 중국이 이후에 산업혁명을 진행할 수 있었다기에는 이런 송나라식 성세는 오래가지 못했다. 당장 원말명초 중국의 경제력은 급격하게 위축되었다. 예컨대 화북 지방의 철강 생산량은 송대에는 35,000톤이었지만 원대에는 8,000톤으로 격감했다. 이는 철강과 석탄이 고갈되었기 때문이 아니다. 잦은 전란과 전염병으로 인구가 격감하고 기존의 사회구조가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북송 초기 송 전역의 인구가 5,000만 명이었고, 이후 정강의 변으로 화북을 점령한 금나라 후기의 인구가 여기에 조금 못 미치는 수준이었다. 그런데 이 인구가 몽골의 침공과 흑사병을 겪으면서 1,000만 명까지 격감한다. 당연하지만, 거의 4,000만 명에 달하는 인구가 모두 죽은 것은 아니다. 그 중 상당수는 전란과 피난으로 통계에서 누락되었다. 그래도 잔혹한 전쟁과 전염병으로 정말로 죽은 인구도 엄청 많았으리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또한 중국의 수력 방적기[30]는 유럽에서 산업 혁명 과정에 쓰인 방적기와 큰 관련이 없는 데다가 실제 사용 여부에 대해서도 어떻게 사용한 것인지 논란이 있고 애초에 남은 자료만 봐도 동시기 유럽의 깡촌인 아일랜드에서 사용하던 수력 방적기랑 비슷한 수준의 기술력이라고 평가 받는다. 결정적으로 송대의 중국은 근대 서유럽처럼 산업 발전에 필요한 제대로 된 증기기관이나 외연/내연기관의 발명도 없었고,[31] 기관을 대량 생산에 응용하려는 시도 또한 부재했다.
제도적으로도 문제가 있었는데 서양이 근대화에 성공한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사적재산권의 보호였다. 군주라고 할지라도 개인의 동의를 구하지 않고 사유재산을 처분하면, 저항권이 발동되어 목이 달아날 수 있다는 원칙이 성립한 것이다. 이것이 많은 사람이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혁신과 연구를 거듭하도록 유도한 동력 중 하나로 보인다. 한편, 송나라는 기록에 의하면 흉년 때 관청에서 부유한 사람에게 강제로 곡식을 팔라고 하는 등 정부가 개인의 재산권을 당사자의 동의 없이 처분한 경우가 가끔씩 보인다. 이는 곧 동양이 서양처럼 산업 자본주의 문명을 탄생시키지 못한 결정적인 원인 중 하나로 간주된다는 주장. 다만 이 글만 보면 근거 사례가 너무 부족하긴 하다.
오히려 송이 그 가능성을 가지고도 결국 근대화 되지 못한 이유를 고찰하자면, 역으로 도시 부르주아와 지식인 등이 정치적 영향력을 가지고 영국처럼 왕이랑 맞다이를 까서라도 시민 권리를 신장시키던지, 프랑스처럼 모가지를 날리던지 했어야 했는데 문치주의 풍토와 강한 황제권이 역설적으로 이를 방해했다. 중앙집권화의 모순이기도 한데, 지방 분권의 역사 속에서 자본을 장기간 축적할 수 있었던 유럽과 가장 큰 차이가 보이는 부분이기도 하다. 때문에 화약이나 종이, 나침반같은 실용적인 기술들이 당시만 해도 서양보다 중화권에서 먼저 나올 정도였으나, 제도가 받쳐주지 못하니 결국 과학과 수학도 서양만큼 정교화 되지 못하면서 결국 산업혁명을 일으킬 정도의 기술 발전은 이루지 못한다.
결론적으로 송나라가 중국 전근대사 제일의 성세는 맞긴 하고, 전세계 최고의 부국 중 하나였던 것은 사실이지만 후대 서구권의 산업혁명 이후 성세랑 비교하면 곤란하다는 것이다. 애초에 송나라는 이런 저런 진보와 발전이 있었어도 엄연히 중세 국가라, 18~19세기 이후 근대 국가들이랑 본격적으로 비교하는 것 자체가 어찌보면 북송의 성세를 말해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또한 동양학자들의 정치적인 목적을 위시로 한 '송나라 산업 혁명론' 자체가 동양도 서양에 뒤쳐지지 않고 산업혁명이 가능했다는 자본주의 맹아론에 근거한 점도 있다. 실제로 마오쩌둥 시절 정치성 이론으로 만들어진 중공식 자본주의 맹아론 역사관은 애초에 학술적인 연구나 고찰이 아니라 정치적 목적에서 파생된 이론이었다는 한계도 지적된다. 이게 나쁜 방향으로 움직인 게 바로 중세 기술로도 근대의 철강 산업을 따라 갈 수 있다는 발상으로 진행한 토법고로이다. 경제사적으로 산업혁명은 일단 영국에서만 자생적으로 가능했던 현상이라고 정의되고 있기 때문에 이른바 송나라 산업혁명론은 21세기 시점에서는 얘깃거리 정도에 머무르는 한물간 이론에 불과하다.
어쨌거나 남송시대를 북송의 후계 구도로 보지 않고 남북조시대의 재현으로 간주할 경우, 제1차 남북조시대가 호한체제(胡漢體制)로 이어진 것과 달리 이 제2차 남북조시대는 오히려 강남인들의 선민의식으로 이어진 원인을 북송의 높은 경제력에서 찾기도 한다. 남쪽의 한족 입장에서 사마씨 진나라 정도의 나라가 파괴당한 것은 어느 정도 극복이 가능했었지만, 북송이 파괴당한 일은 정신적으로 매우 큰 여파를 미쳤기 때문이다. 이는 먼 훗날 아이러니하게도 청나라, 중화민국 그리고 중화인민공화국 정부가 다민족국가로서의 길을 공언한 뒤에야 어느 정도 해소된다.[32]
5. 사회와 계급제도
기존 봉건적 세습과 인맥 등으로 이루어지던 관료층들이 모든 계층이 응시 가능한 과거제로 완벽히 대체되었다. 과거제 자체는 후한 시기에 개념이 제시되었고, 수나라 시기에 처음 실행되어서 당나라 시기에 제한적•국소적으로 운영된 과거 선발 관료제가 실행되었지만, 절대 다수의 관료 기득권층은 귀족 계급에 세습되었다.당나라 시기에 한국에서 흔히 상상하는 완벽한 선발 관료제가 정착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으나, 실제로는 전혀 아니었다. 일례로 655년 한해 동안 꼴랑 44명만 과거에 합격했으며, 이후 측천무후가 실권을 잡기 이전인 7년 동안 연간 평균은 매년 58명 정도 밖에 안 되었다. 물론 측천무후 이후부터 활성화되어서 매년 수백, 수천명의 과거 합격자가 나왔으나 거의 대부분은 진사 자격만 받고 지역에서 명사로 대접받는 걸로 끝이었다. 실제 관료로 임명되는 것은 1~2%에 불과했다. 잘못 적은게 아니다.[33] 측천무후 사후의 평균 과거제 관료 발탁은 연평균 23명에 불과했다.출처 특히 황소의 난 이후 절도사의 흥기로 정부가 마비되면서 과거제가 유명무실해진 시기까지 합해서 측천무후 시기 이전보다 합격자가 적어졌다. 하지만 당나라는 정상적으로 정부가 기능할 때도 몇십명 중반대 수준의 발탁에 그쳤다. 그래서 당나라 시절의 과거 제도는 어디까지나 귀찮은 인재 발탁을 보조하기 위한 것이었지, 실제로 관직에 임명시키는 것은 과거 시험과 완전히 별개로 황제 개인의 호오와 높으신 문벌귀족들이 잡일을 처리할 사람을 찾는 데 달려 있었다.
이런 당나라 시대의 과거제와 송나라 시대의 선발 관료제는 사실상 완전히 별개의 것이었고, 일반적으로 시험 합격자가 관직을 얻도록 정착시킨 것은 엄청난 개혁이자 급진적인 사회 발달이었다. 선발 관료제는 전 국민에게서 지원자를 모집하는 시험제도이다. 이를 통해 능력이 높은 관료를 선발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수의 희망자가 일상적으로 시험공부를 할 수 있는 시스템이 전제되어야 한다. 구체적으로는 시험과목을 공부할 수 있도록 교과서 · 참고서의 대량 인쇄가 가능해야 하고, 또 그것을 쉽게 구할 수 있도록 광범위한 유통망도 필요하다. 의욕과 재능이 있는 자라면 누구나 사전에 공부에 열중할 수 있는 환경, 즉 지적·인적·사회문화적 인프라가 만들어져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관료의 세습을 폐지하고 지금부터는 시험의 상위합격자를 채용합니다.”라고 하더라도 ‘공부하지 않은 바보’가 ‘더 공부하지 않은 바보’를 누르고 상위에 합격할 뿐이다. 그러면 국가는 파탄나고 만다. 과거제의 전면적인 도입을 가능하게 할 정도로 풍부한 종이와 진보된 인쇄술을 완비한 것은 당시의 출판 최선진국이었던 송나라뿐이었다. 이러한 혁신의 결과 수•당 시기에 지속적으로 약화되어온 관롱집단을 와해시켰으며, 중국의 부르주아인 신사층으로 대체되었다.
송나라 이후에 들어선 명나라 때부터 악호(樂戶), 타민(惰民), 세부(世仆), 반당(伴當), 단민(蛋民) 같은 세습 천민들이 생겨났다. 이들이 생겨나게 된 유래는 원나라가 절강을 점령한 이후 남송 백성들을 징벌하여 육지에서 살지 못하게 했다는 것이나 아니면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이 자신의 적수인 장사성의 부하들에게 대대로 타민이 되어 배 위에서 살아가라는 벌을 내린 것이라고 한다. 이들 중에서 악호는 원래 명나라 초기 영락제가 조카인 건문제로부터 황제 자리를 빼앗기 위해 정난의 변을 일으켰을 때, 건문제 편에 섰던 관리의 후손들인데 영락제가 승리하자 그들의 자녀들이 교방사로 끌려가 악호나 기생이 되었다고 한다. 또한 타민들은 나중에 육지에 사는 것을 허락받기는 했지만 옷차림과 가옥 등에서 모두 엄격한 규제를 받았고, 규모가 작은 수공업에 종사하거나 노동에만 종사할 수 있을 뿐, 지식인이나 농민이나 장사꾼이 될 수 없었다. 더욱이 타민은 글을 읽지도 과거에 응시할 수도 없었으며, 양인과 결혼하지도 못했다. (출처: 《중국을 말한다》 14권 248~250쪽)
사회구조 자체를 재편하였다. 노예 매매를 불법화하고, 자유인이 자기 자신을 노예로 팔거나 스스로 노비로 전락한다는 노예 무역의 눈가리고 아웅하는 실태를 법적으로 완전히 금지시켰다. 오직 범죄로 인한 노예화만이 인정되었으며[34], 그러한 케이스도 노예 거래가 불법이니, 관아의 재판 기록으로 멀쩡한 사람을 범죄자라고 위조하는 행위가 상당히 힘들어졌고, 송나라 이전 시기나 원나라 등 이후 시기에 보통 노예였던 종과 머슴도 금전 고용 거래 관계가 일반적 관행으로 정착하게 되었다.
수-당대에는 균전제로 대표되는 정부의 가혹한 무급 강제노역과 동원을 위해 양인조차도 엄격하게 토지에 인신을 묶는 구속을 당했고, 비단 일상적인 노역과 징병 외에도 농지에 인신이 묶여 대대로 태어난 땅에서 농사가 강제되고, 농지가 정부에 철저히 통제된 상황인만큼 소출마저 손쉽게 정부가 파악해서 빈번한 추가세금으로 갈취당하던 상황이였다. 실상 당나라 양민은 국가의 농노, 심하게 표현하면 공노비였다. 이러다 보니 말기에 가면 갈수록 심해지는 노역과 세금을 견딜 수 없었던 농민이 토지를 버리고 도주하는 일이 흔하게 발생했었다.
균전제를 폐지하여 구 천민과 노비부터 토지에 묶였던 양민까지 예외없이 국경내에서의 자유로운 이동이 가능해졌다. 운신의 자유뿐만이 아니라 그동안 무시되어왔던 직업선택의 자유 및 재산권의 보장이 실질적으로 이루어졌다.
다만 송나라 시대의 사유재산권은, 근현대적인 개념에서의 사유재산권과는 거리가 다소 멀었다. 요컨대 근현대식의 사유재산권이란, 개인이 자신의 물건에 대한 극도의 배타성을 가지고 그것을 사고 팔 수 있는 전권을 행사하도록 허락하는 것이다. 그런데 송대에는 소작제도에 따른 경작권이 통용되었다. 사실 근현대 사회에서 경작권이라는 개념은 말이 안 된다. 왜냐하면 근대 국가에서는 토지의 소유권과 사용권이 명확히 분리되기에, 일물일주(一物一主)의 원칙에 따라 토지의 이중매매를 용납하지 않는 게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송나라 때에도 사유권이 엄연히 존재하고 법률을 통해 보장되었지만, 그것이 근현대식 개념의 재산권과 같다고 보기는 힘들다. 따라서 중화제국의 토지 소유 제도는 송대를 지나 명대의 일조편법, 청대의 지정은제, 그리고 개항 이후 각종 서구화 개혁을 거치며 점점 근대적인 성질을 갖추어갔다고 할 수 있다.
물류와 상업과 공업의 급진적인 발전을 불러왔고, 농업조차 탁장행정식 모순인 균전제식 농지분할로 인한 비효율이 사라지고 미개간지 개간이 급속도로 이뤄지면서, 추정인구수 9세기 당나라 5~6천만명이 12세기 송나라 1억2천만으로 2배 폭증했다.
전한기 인구수추정치가 5,700만명이 다수설이니, 당나라까지의 800년 동안 인구수가 정체 퇴보했다. 북위~당나라기 균전제가 그만큼 농업에 해로웠다.[35][36] 육조시대에 한족 난민의 유입으로 급작스럽게 개발이 이뤄졌으나 수~당 시기 균전에 북중국의 인력이 묶여서 농토개발이 지지부진해진 강남(중국)이[37], 균전제가 붕괴해 난민이 쏟아지던 오대십국과 인력이동이 자유로워진 송에 다시 급진적인 개발이 이루어지면서 강북지역의 경제력을 능가하였다. 연운16주와 서량-오르도스를 각각 요나라-서하에 빼앗기고, 자연방어선이 없어 성채-인공호수 도배 무인지대 설정으로 북중국의 국토사용이 제한되었음에도, 도리어 당나라에 비해 송나라기 강북인구가 증가했다. 군대는 징병제에서 모병제로 전환했고, 강제동원 무급노역은 자발적 유급 고용제로 변했다. 급진적인 민권신장만이 아니라, 폭발적인 민간경제의 활황을 불러왔다.
단 유급고용은 신법으로 인한 것이다. 왕안석 실각 후 구법당에 의해 강제노역 제도가 부활한다. 그렇다고, 노역은 당이나 송이나 거기서 거기가 절대 아니다. 당나라의 균전제는 행정 국방 경제 등 사회 전반에 걸친 제도의 전제조건이자 바탕이었다. 그 탓에 안사의 난으로 균전제가 와해되기 시작하자 국가의 조세 및 인력 동원 제도가 급격히 쇠퇴하여 마침내 붕괴에 이르렀다. 동원을 극대화하기 위한 당나라의 국체에 따라서 강제노역은 만연하고 일상적인 일이였다. 강력한 대외 팽창의 화려한 모습 이면에, 양민에 대한 징용과 징병으로 노동력을 효율적으로 쥐어짜는 어둠이 있었다.
하지만 균전제는 미성숙한 수당기 관료제의 한계에서 행정력을 효율적으로 뽑아내는 묘책이기도 하다. 중원은 자연방벽 없이 광활한 유라시안 스텝에 둘러싸여 있어, 지구상의 어느 지역보다 기마민족의 압력이 심대하다. 영국이나 일본 같은 섬나라이거나, 고대말-중세초를 제외하면 기마민족으로부터 자유롭던 서유럽, 하다못해 대초원과 닿는 면적이 좁고 무수한 자연방어선이 겹겹히 쌓여져있으며 자연방어선을 넘을때마다 정주화-현지문명 수용도가 높아지는 거름망으로 기능해온 중동~동유럽이라면 몰라도, 당 왕조에게 제민지배란 생존을 위해 필수로 갖춰야 하는 요소였다. 자연국경선도 없이 수천 km로 활짝 열린 국경선을 근대의 전차군단에 비견되는 기동력을 가진 기마민족으로부터 지키려면 최소한의 조건이 있었다. 그것은 수십만 명의 장정을 상비군으로 유지하고, 유사시에 수십만명을 추가로 징집할 동원력이었다. 그래서 유럽이나 서아시아 및 인도, 혹은 일본처럼 소수 정예 엘리트 군사집단에 포커스를 둘 수 없었다. 기마 민족 입장에서는 한 줌의 정예병을 무시해버리고 후방으로 침투해서 파죽지세로 국토를 점령해버리면, 중국의 정예병들은 유지비용을 지불할 물자공급에 차질이 생겨서, 오합지졸로 전락하여 와해되기 마련이었다.
균전제는 경제 및 기술의 발전을 깎아먹는 동시에 당장의 동원력과 세수를 몇 배로 뻥튀기하는, 부작용 대비 효과가 좋은 방책이었다. 당장 힘이 없어 국경을 못 지키면, 단순히 사회발전을 깎아먹는 이상의 오호십육국식 문명 후퇴를 한꺼번에 맞을 수 있다. 실제로 당나라는 그 무력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서 초원에서는 강대한 돌궐을 멸망시키고 일시적으로나마 몽골고원을 장악해 총독부를 세웠다. 또한, 예상 불가능하게 등장한 강력한 외적인 토번을 (안사의 난 이전까지는) 역으로 밀어붙였다. 이처럼 당나라는 중화제국 역대 왕조 중 외적의 압박에 가장 성공적으로 대처해냈다. 부병제에 기반한 군사력으로 타림 분지를 넘고, 트란스옥시아나까지 넘어서. 박트리아까지 진출해 실크로드를 쥐는 데 이르렀다. 나아가 무역으로 인한 경제적 이득과 서역 학문과 기술과 문화를 받아들이는 등, 균전제로 희생된 발전을 어느정도 만회할 수 있었다. 물론 안사의 난 이후에는 도호부든 실크로드든 모두 물거품이 되긴 한다.
송나라는 유교가 국본이라 노역에 부정적이었고, 행정관료의 견제와 감시를 받아 노역의 빈도가 확연히 줄었다. 균전제를 포기한 만큼 제민지배능력이 떨어졌기 때문에 당나라급 동원력은 나오지 않았다. 아무리 송나라가 진일보한 관료제를 거느렸다고 해도, 광활한 중국대륙을 자유롭게 이동하는 인구를 균전제처럼 통제할 수는 없었다. 즉 당나라처럼 만연한 노역을 부리려고 해도 역량이 부족했다. 일본의 교토학파가 괜히 남북조-수-당을 중세로, 송나라를 근세로 보는 게 아니다.
여기까지만 해도 상당히 탈봉건적이나, 송나라에서는 유가 정치철학을 제대로 구현하여 일부 위험 분자의 사상이 아닌 송나라 성리학자들의 이상적인 사회상이 모두의 천하이고 모두가 함께 다스린다는 "공천하" "공치"의 이념이 주류를 이뤘다.
어사 유불은
"천하의 일은 천하가 함께 해야 한다. 군주가 개인적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어사 방정실은 송 고종의 면전 앞에서 "천하는 중국의 천하입니다. 조종의 천하입니다. 군신, 백성, 삼군의 천하입니다. 폐하의 천하가 아닙니다."
재상 두범은 "천하로서 천하를 삼고, 개인으로서 천하를 삼지 않는 것이 만세를 지나도 바뀌지 않을 수 있다"
성리학자 서의는 송효종에게 상서를 올려"만일 군주가 성인이면 신하는 멍청이다. 폐하는 누구와 공명을 함께 하시겠습니까?"
성리학자 정희도 황제의 면전에서 "천하를 잘 다스리고 못 다스리고는 재상에게 달려 있으니, 군주의 덕으로 성취를 경연에서 꾸짖으십시오"
라고 말하는 등 일부 위험 분자의 사상이 아닌 송나라 성리학자들의 이상적인 사회상이 모두의 천하이고 모두가 함께 다스린다는 "공천하", "공치"의 이념이 주류를 이뤘다.비록 이러한 구조를 명백하게 법률로서 못 박아 놓은 것은 아니지만, 전체적으로 불문율에 따른 권력의 분화와 견제, 관습법적 틀에 입각한 합의에 의해서 운용되는 체제였다. 이를테면, 송 인종이 인사권을 행사하려고 조서를 독단적으로 내린 적이 여러 번 있었다. 하지만, 재상이 손수 반려함으로써 한 가지도 실행되지 않았다..[38]
더 나아가 송나라는 중서성이 행정부, 재상이 정부수반(총리), 황제가 입헌군주제의 군주 또는 의원내각제의 대통령 역할을 담당하는 매우 근대적인 정부를 구성했다. 다만 송나라의 시스템을 공화주의적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왕안석의 신법당과 사마광의 구법당의 정치적인 대립에서 보여지듯, 송나라의 정치는 황제를 보필하는 유학자들이 주도했으며, 근현대의 유럽처럼 유산 시민계급의 참여는 보이지 않는다. 물론 유학을 공부해서 과거에 급제한 관료 중 유산시민계층에 해당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들 모두가 대농지를 거느리고 인신을 구속하는 봉건 사회의 지방 유력자라는 것은 편견이다.
따라서 송나라의 정치제도는 임금과 사대부가 주도하는 조선 시대 내지 소수의 원로가 이끄는 메이지 시대의 일본 제국과 유사하다. 융커와 군부의 전횡이 판치던 독일 제국, 신분제 사회에서 완전히 탈피하지 못한 빅토리아 여왕 시기 대영제국과 비교해서 나은 점이 많다고 평가할 수도 있겠지만 이런 엘리트주의적인 집단지도체제는 기원전의 로마 공화국에서도 찾아볼 수 있었기 때문에, 송대의 문치가 근대 유럽보다 우수하다는 주장은 지나친 수정주의적 시각이다.
6. 건축
푸저우에 있는 화린사 금당. 964년의 건물로, 남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이다.
카이펑의 철탑. 북송의 수도 변경 개봉부 시절인 1049년에 건설
항저우에 있는 육화탑. 남송의 수도 항주 임안부 시절인 1165년에 건설
정저우 서쪽 50km 지점에는 송황릉이 있다. 원대에 파괴되었다가 최근 들어 관광지로 정비 되고는 있지만, 여전히 봉분은 방치되어 있다.
송의 건축 양식은 중세 ~ 근세 일본의 건축 양식에 큰 영향을 주었다. 한국에서도 고려 말의 건물들을 보면 일부 영향을 받은 것이 보인다. 특히 불교미술의 전성기로, 중국에 현존하는 수많은 목조/석조 탑들이 대부분 송대에 세워진 것들이다. 7층 이상의 다층이 대부분이고 처마 등의 장식이 매우 화려한 것이 특징이다. 또한 명대에 유행한 벽돌 성벽도 이미 송대에 정립된 양식이니, 근세 동아시아 건축에 지대한 영향을 남겼다고 평할 수 있다.
7. 군사
7.1. 부실한 군사력
송나라군 병과를 묘사한 그림송은 뛰어난 관료제와 중앙집권화 성공, 풍성한 경제력, 꽤 넓은 국토, 많은 인구에도 불구하고 군사력이 이상하리만치 실속이 떨어졌다.# 실제 송의 국방력은 마냥 소홀했다고 보기엔 그 규모가 꽤나 방대했는데, 송나라 후기의 병력은 무려 126만명에 달할 정도였다. 물론 이 병력은 송 인종 시기에 서류상의 병력이었고 실제 병력은 이보다 더 적다고 여겨지긴 하나, 그래도 결코 적은 규모는 아니란 것을 알 수 있다.[39] 허나 현실은 이런 규모가 무색하게 실제 전투에서 송군이 승리한 횟수는 생각보다 많지 않았고, 특히 정복왕조와의 전쟁에서는 상당수가 개박살이 났다.[40]
이러한 문제가 생긴 원인 중 하나는 송 조정이 당나라 이래로 무인(절도사)의 힘이 강해져서 통제를 잃어버리고 심지어 반란까지 일으켜 왕조를 갈아치우는 사태를 경험했기 때문에[41] 이를 방지하기 위해 무관 대신 문관을 사령관으로 임명했지만 문제는 이 문관들이 전투 경험이 없고 군대를 잘모르는 경우가 많았다는 점이 크게 기여했다[42]. 지휘관과 병사들이 서로를 잘 모르는데다 의견도 일치되지 않아 군대의 단합이 도무지 안되었던 것. 한 예가 바로 동관[43]과 서희[44]이다. 반면 한·당은 이세적, 이정 같이 사령관을 무관으로 임명하거나 군대를 잘 아는 문관을 임명했기에 흉노, 돌궐과의 전쟁에서 충분한 대응을 할 수 있었다.
반대로 무인들의 지위는 전대 왕조들보다 격하되었는데, 이를 보여주는 사례가 몇몇이 있다.
- 북송의 명장이었던 적청의 옛 부하인 초용이라는 자가 부하들의 고발로 한기에게 처형당할 위기에 놓이자 적청은 한기를 찾아 용서를 빌려고 했는데, 정작 한기는 만나주지도 않았다. 하여 적청은 한기의 처소 밖에서 '초용은 전공을 많이 세운 호남아입니다'라고 빌었지만, 한기는 '과거시험 진사 급제도 못한 놈이 무슨 자격으로 호남아 소리를 듣는가'하며 쪽을 준 뒤, 초용을 처형했다. 이렇게 무관을 대놓고 무시하는데도 적청은 꼼짝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이 '총관(당시 적청의 직위)께서는 너무 오래 계셨습니다'라고 알려줘서야 자리를 뜰 수 있었다. 한기에게 처벌받을까봐 두려워서였다.[45]
- 진종 대에 이광보라는 자가 진사에 급제했는데 검술에 능하다는 이유로 황제에 의해 진사 자격을 박탈당했다. 백성들이 검술을 좋아하게 된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송군이 오합지졸이었음을 증명해주는 극단적인 사례를 하나 들자면, 1126년 음력 2월 송의 지방관 중 한 명이 무슨 배짱인지 공을 세우겠답시고 애먼 지나가던 금나라 사신단을 공격했는데, 이때 송의 보병이 무려 2,000명이나 동원되었다. 그렇게 송나라 장군 이간과 보병 2,000명은 금나라 사신 일행을 공격했지만 황당하게도 이 사신 일행은 기병, 궁기병이긴 했지만 오히려 송군이 금나라 호위무사 17명에게 가볍게 와해되었고, 금의 사신은 그대로 제 갈 길 갔다. 심지어 이때 금나라 호위 무사 17명은 중앙에 7명, 양익에 5명씩 배치하는 진을 정비하였다. 송군이 진을 제대로 완성한 뒤, 금군의 공세를 버티며 수적 우세를 통해 공격했으면 송군이 승리할 가능성이 높았지만 송군은 애초에 진을 짜기는 커녕 금 기병들이 양익에서 궁시를 날리고 중기병 7명이 대열을 짓밟자 장창으로 버티기는 커녕 자신들끼리 밟고 도망가며 와해되어 버렸다. 싸우다가 죽은 게 아니다. 총 사상자가 1,000명인데 그 중 금군과의 직접적인 전투로 발생한 사상자는 100명이 안 된다는 점에서 그 수준을 알 수 있다.[46][47] 게다가 해당 기록은 금나라도 아니고 송나라 사람 서몽신이 쓴 《삼조북맹회편》(三朝北盟會編)[48]의 권36, 정강(靖康) 원년 2월에 나오는 기록으로 승리자가 멋대로 부풀린 이야기가 절대 아니다. 게다가 이걸로 끝이 아닌 게 금은 이 전투를 계기로 송군의 상태가 영 아니라는 걸 확신하고 다음해 대군을 동원해 바로 수도 카이펑을 공격하고 휘종과 흠종을 포로로 잡는 정강의 변을 일으키게 된다.
다만 이와 별개로 군사비가 재정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상당히 높았는데 정1품 재상의 식비 보조금은 매월 300관인데 반해 장군인 정2품 절도사의 식비 보조금은 400관이었다. 장군들의 녹봉도 등급에 따라 매월 3,000관 내지 10,000관을 받았다. 군인들의 정치, 사회적인 지위가 낮은 대신에 많은 봉급이라는 반대 급부를 주었던 것이다. 송 태조가 일부 개국공신들을 쳐낼 때 피비린내 나는 숙청 대신 휘하 번진 절도사들에게 많은 재산을 줘서 권력 대신 고향에서 개인의 행복을 누리며 살게 한 것과 비슷한 이치였다.
하지만 북송 시절에는 이미 "좋은 철은 못으로 쓰지 않고, 훌륭한 인재는 군인으로 만들지 않는다"라는 말까지 있었고, 이 때문에 질 나쁜 범죄자들이 주로 병사가 되었기에 규율이 잘 서지 않았다.[49] 그 외 송의 군사력이 약했던 원인 몇가지와 재평가할 부분을 거론하자면 다음과 같다.
7.1.1. 보병 위주의 송군
송의 주력 부대는 보병이었다. 그리고 이런 보병 중심의 편제는 당시 기병 그것도 세계구급 기병 전력을 가지고 있었던[50] 거란족이나 여진족, 몽골족 같은 유목민족과의[51] 전투에서 매우 불리한 요인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는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었던 것이 송은 주요 목초지인 서량-오르도스와, 운남, 요서-요동을 당 말기와 5대 10국 시대에 서하와 대리국과 요나라에 빼앗기면서 목초지가 부족해졌고 이에 따라 기병을 양성하기가 매우 힘들었다. 게다가 송의 주적이자 잠재적 적국인 요나라는 송의 '기마병 부족 현상'을 계속 유지시키기 위해 군마 수출을 제한하고 서하와 여진을 협박해 이들이 송에 군마를 수출하지 못하게 막았다. 이때문에 송은 내부는 물론, 외부에서도 군마를 구하기가 어려워진 것이다.이렇게 말이 부족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서 송은 요의 감시를 피해 서하와 여진으로부터 군마를 수입하려 했다. 서하와 여진이 요의 보복이라는 위험 부담을 감수하고 자신에게 군마를 판매하게 만들기 위해 송은 이들이 판매하는 군마를 전부 비싼 값으로 사들였다. 말 한 필에 비단 수십 필을 내어주고 시세가 오르면 그에 맞춰서 비단을 더 내어 주었기에[52] 서하와 여진은 비단을 확보하려고 요의 압박을 받음에도 몰래 송에 군마를 팔았다. 어찌 보면 손해 보는 장사같지만, 송 조정은 자신들이 그 비단의 산지를 장악하고 있는 만큼 매년 수천만 필의 비단을 수취할 수 있어서 언제든 생산 할 수 있는 비단보다는 군마가 더 귀중했다.
그러나 이렇게 몰래몰래 사들여도 군마가 부족해서 왕안석이 군마 부족을 타개하기 위한 방책으로 보마법을 시행했다. 호구마다 말을 기르게 하여 농사짓는데 이용하고 전쟁시엔 징발한 말을 기병으로 활용하자는 것이다. 들어보면 그럴 듯 한데 문제는 현실이 그렇지 않았다. 왜냐하면 송은 목초지가 심각하게 부족해서 말을 기를 여건이 안되는데다 농사 짓는 말과 기병의 말은 요구되는 스펙이 다르다. 농사용 말은 소처럼 느리더라도 덩치가 크고 튼튼하며, 근력과 지구력만 좋으면 그만이지만, 군마는 덩치가 작아도 빠르고 민첩해야 한다. 그래서 보마법으로 사육한 말들을 군 부대에 보냈더니 군마로는 부적합하고 짐말로 사용해야 하는 말이라 군부에서 애로 사항을 토로하기도 했다. 현대로 치환하면 농사용 트랙터를 징발해 탱크로 개조해 쓰는 수준이다. 특히 왕안석은 송나라의 영토에 평지는 많았지만, 목초지로 쓸 평지는 부족하다는 점을 간과하고 정책을 실시했기 때문에 보마법은 필연적으로 실패하게 되었다. 그래서 요, 금의 강력한 기마 군단 앞에서 송군은 열세를 면치 못했다.[53]
다만 보병이 기병에 비해 야전에서 흔히 불리하다고 하지만 항상 보병이 불리한 건 아닌데, 예를 들면 평지에서의 대규모 야전은 보병대가 장창 등으로 진형을 구성하고 버티기 시작하면 기병대가 역으로 화력에 눌릴 가능성이 높다. 또한 제대로 자리잡은 궁병이나 총병이 사격하면 충분히 기병을 상대할 수 있다. 나당전쟁 당시 기병이 주축이던 당나라군을 상대하던 신라군의 주력 병력은 장창병이었으며 나당전쟁에서 승리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들을 이용한 전술이었다.[54]
하지만 그렇다고 지나치게 보병 위주로 전력을 짜면 문제가 되는 가장 큰 이유는 기동력 때문이다. 보병은 기병에 비해 기동성에서 불리하기 때문에 기동성이 우수한 기병이 불리한 장소에서의 회전에 응하지 않고 유리한 장소에서 싸우면 그만이라 보병쪽이 수동적이 될 수 밖에 없다. 기병 입장에선 보병이 대응을 잘해서 만만치 않다면 진형을 우회해서 보병대와의 싸움을 피하고 대신 이들의 거점을 직접 타격해 전쟁 수행 능력을 떨어트린다는 옵션을 선택 가능하다. 즉, 보병이 대응을 위해 이동하여 도착할 무렵 기병대는 이미 상황을 끝내고 다른 곳으로 가버리는 상황이 연출되고 그렇게 거점을 하나하나 잃어가면 보병대는 버틸 수가 없게 된다. 특히 전략적으로 로마처럼 바다를 끼고 있거나 이탈리아와 같이 본토의 입구 경계가 생각보다 좁거나 하는 등의 지리적인 배경이 없으면 기병에 비해 보병은 매우 불리하다. 보병을 중시하고 잘 육성하던 로마 역시 기병을 망치와 모루 같은 전술, 전략에서 핵심으로 사용하기도 했고 보병보다 높은 전력으로 두었던 것이 사실인만큼, 보병도 기병을 막을 수 있다 정도로 생각을 해야 지 진형만 잘짜면 보병이 기병을 무조건 이긴다!로 생각해선 안된다. 대전차 보병/창병이 전차/기병을 상대로 대승하거나 선전하는 사례가 있다고 항상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바보짓이며 동서고금 할거없이 보통은 선제공격권의 차이 때문에 기병이 선전하는 경우가 많았다.[55]
요와 서하 같은 잠재적 적국들이 장성을 차지한 데다[56], 송은 국토가 크고 자연적인 장애물도 없어서[57] 적의 침공을 막기가 불리했다. 그래서 국경 지역에 여러 개의 성곽을 쌓고 방어선을 구축하긴 했지만, 기동력을 갖춘 기마 군단으로 방어선을 우회해 후방을 공격하기도 해서 적의 침공을 완전히 방어해내지는 못했다. 심지어 멀쩡히 잘 싸우던 장군을 불러다 숙청하거나 견제하기도 했다. 북송 시기 오로벌하 때 외척 출신인 고준유가 경원로의 군대를 이끌고 서하의 군대와 싸워 이길 뻔하였던 유창조를 시기해 그를 견제한 것, 남송 시기 주전론자였던 악비를 처형한 것, 몽송전쟁 시기 맹공의 지나친 군권 확대로 인해 범용길의 투항을 거부하였던 것이 그것이다.
7.1.2. 비효율적인 용병술
총병력의 절반 가량인 60만명을 수도 방위를 위해 개봉에 배치했다. 당나라 시대에 절도사의 번진들이 지나치게 막강해 안록산의 난이 터지고 이후로도 번진들이 황제에게 대항했던 것을 방지하기 위한 조치인데, 문제는 이로 인해 국경의 수비력이 약화되고 말았다.[58] 국경의 방어선이 무너지면 어쩔 수 없이 중앙군을 보내야만 했는데, 자원과 시간 낭비도 있었을뿐더러 중앙군은 변방의 지리와 기후를 자세히 알기 힘들었다. 지방군의 협조가 이루어진다면 개선될 수도 있었지만 문제가 변방이 근본적으로 오합지졸 투성이였다. 이는 조선이 쓴 진관 체제와 제승방략과도 어느 정도 겹치는 문제이기도 하다. 시간낭비, 지휘관이 현지 사정을 잘 모름 등.또한 군 통수권은 황제가 행사하고 추밀원으로 군대를 통제했기에 각 군의 사령관들은 자의적으로 군을 이동하거나 공세를 펼치지 못하고 추밀원의 명이 있어야 군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게다가 송은 경술법을 실시해 군대에 정기적으로 인사 이동을 단행하여 지휘관과 사병과의 관계를 약화시켜 당대 절도사들의 전횡을 방지했다.
이러한 제도는 군사 반란을 막는 데는 매우 탁월했으나, 진짜 위협인 외세의 침공에 허술한 약점을 노출했다. 게다가 수내안외국경 지대에 배치하는 군사는 서류상으로는 수만 대군이었으나 실제 배치 병력은...[59][60] 게다가 앞서 말했듯 장수들의 반란을 견제하기 위해 장수 직속 부하들을 대폭 줄여 상하 교류를 적게 만들어 버렸는데, 이로 인해 장수들은 외세가 침공해오면 잘 적응하지 못한 환경에서 완전히 통제하지 못한 군대로 싸워야 했다.
이런 사태는 조선의 임진왜란 때 제승방략 체제가 보인 단점으로 재현되기도 한다. 그나마 조선에서는 군사 지휘권이 현지의 장군들에게 있어 이순신이나 권율, 김시민, 박진 같은 장수들이 이 지휘권을 기반으로 활약할 수 있었던지라 송나라 같은 비극은 피할 수 있었다.[61]
마지막으로 송의 군대는 병사들의 연령대도 높았다. 당시 송은 군대가 철밥통이다보니 병사들이 군대에 오래 남아있는 경우가 많았다. 군대에 들어오는 자들은 위에서 언급된 대로 소위 '질 나쁜 놈들'이었고, 그들은 결국 군대 밖 사회 양지에 발 붙일 곳이 없다는 말이니 오래 남아있으려고 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송나라 조정 입장에서는 이 '질 나쁜 놈들'이라도 있어야 했기에 군대를 철밥통으로 만들 수 밖에. 결국 이로 인해 자연스럽게 평균 연령은 높아지고 병사들이 죽은 다음에야 충원이 가능했기 때문에 병력의 약체화를 초래했다.
송의 약한 군사력에 대해 중국의 웹사이트인 바이두에서도 관련 게시물이 올라왔는데, 북송 군대를 제1차 십자군 원정 때 출정한 십자군과 비교하면서 "송군보다 십자군이 여러 면에서 군사적 능력이 더 뛰어났다."라고 평가할 정도였다번역.
7.2. 재평가할 부분
그렇다고 송나라군이 마치 동네북처럼 매번 털리지는 않았다. 초기에는 요를 상당히 몰아붙였고,[62] 서하 및 금나라와 몽골 제국의 침략을 막아내고 심지어는 고토를 일부 회복하는 경향도 있었다. 물론 그 이전 시대인 한 · 당이나 이후의 명처럼 유목민족과 소수민족을 정벌하고 주변국들의 내정에 간섭하며 주변국을 공격하는 수준이 되지 못한 것은 사실이지만,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저질 군대와 달랐다. 그리고 화약 무기가 본격적으로 쓰인 것도 이때였다.또한 북, 남송 합쳐 직계 왕조로 300여년을 유지한 것도 결코 쉽게 볼 수만은 없는 부분이다. 특히 중국의 통일 왕조들 중에서 300년 이상을 유지한 건 한과 송 뿐이다.[63] 명 또한 남명을 포함하면 294년 가량 존속했지만 사실 남명 정권은 합치기에는 뭣한 게 여러 지방에서 우후죽순으로 등장한 명나라 후신을 자처한 세력들을 하나로 묶어서 본 개념으로, 단일 왕조가 아니었다. 때문에 망한 후 남쪽으로 이동한 다른 정권인 동진, 남송과 같은 선에서 비교하기가 어렵다. 남송은 1127년~1279년 152년이나 존속했다. 심지어 그 때문에 혼란스런 동진마저 사직을 그래도 100년 넘게 보존했는데 남명은 20년도 못갔다. 남명은 1644년~1662년 겨우 18년을 갔을 뿐이다. 한마디로 재위한 황제들의 기간을 다 합쳐도 20년이 안되는 것이다. 청의 경우에도 후금 시절까지 포함하면 296년 존속했지만 초반에는 만주에만 머물렀을 뿐이고 중원에서는 그보다 부족한 268년 동안 이어졌다.
실제 남송은 금나라에 바로 망하지 않고 금나라를 포함한 수십여 국가를 멸망시킨, 당대 세계최강 몽골 제국에게 망했다. 그것도 한방에 폭삭 무너진 게 아니라 장장 40여년에 걸친 항전으로 몽골제국이 고생한 끝에 멸망시킬 수 있었다. 실제 몽골제국이 전력을 다해 정복전쟁을 벌인 국가들 중 이만큼 버틴 국가는 송이 거의 유일하다.[64]
전한, 당나라, 명나라처럼 경제력 + 군사력으로 주변국에 패권을 행사하는 강대국은 아니었어도, 송나라는 적어도 경제력으로 자주 국방을 300여년간 유지할 수준이 되었다. 송대가 문치주의였던 건 맞지만, 그것을 부정적인 의미로 이해하는 것은 피상적인 견해이다.
그리고 북송이 가지고 있던 지리적인 약점도 있었다. 바로 연운 16주의 상실이었다. 거란이 이 연운 16주의 생산력을 기반으로 송과 전면 대결을 할 수 있는 국가 세력으로 성장한 부분도 무시할 수 없지만, 무엇보다 연운 16주는 송 이전 한족 왕조들의 북방 방어선 중에서도 특히 중요한 요충지였다. 그런데 이 요충지를 송 건국 이전에 이미 거란이 몽땅 차지해버린 것. 연운 16주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연운 16주 이남에는 딱히 지리적으로 진격에 방해가 되는 지형이 없으며 화북과 강남의 평야 지대로 직행할 수 있는 루트이다. 즉 북송은 처음부터 방어상의 불리함을 안고 싸워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다.[65] 반면 남송 때는 국토가 쪼그라들고 장강, 회수, 사천의 산맥 등 험준한 지형을 국경으로 삼게 되면서 오히려 방어에 유리해졌다.
또한 왕안석의 신법 시기 당시에도 송은 서북방으로 영토를 적극 확장하기도 했다. 왕안석의 신법이 시행되던 시기였던 1068년에는 왕소가 "평융책"을 송 신종에게 제시하였고, 왕안석과 송 신종의 적극적인 지지하에 하황 지역[66]을 수복하게 되었다.(희하개변) 그러나 이후 서하와의 전쟁에서 패하고[67] 왕안석 실각 및 송 신종 사후 사마광을 위시한 구법당이 득세하자 하황지역을 다시 토번에 넘겨주게 되었다. 그러나 이후 송 휘종 재위 시 동관이 하황지역을 차지하고 있었던 토번 군사들을 궤멸시킴으로써 송 신종 때 개척하였던 영토를 다시 되찾았고, 황두회흘까지 점령함으로써 농우도호부가 설립되는 데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사실 졸전 중 송의 사례가 많이 알려져있다보니 편향적 시선을 많이 받아 그렇지, 무경총요 같은 걸 보면 이론적으로는 군사학 진보도 상당히 이룬 시대였다. 그러나 그런 것들의 실사용자인 전문적인 군인들이 문제라 상당한 잠재력에도 불구하고 좌절을 많이 겪었다. 이점은 지나친 문치주의의 폐해라고 볼 수 있다.
또는 조금 다른 방향으로 접근해 볼 수도 있다. 송나라를 '약체' 취급하는 관점 자체에 대해서도 의문을 던질 여지가 있는 것이다. 상기된 바와 같이 중국 역대 통일왕조의 존속기간을 비교해보면 거의 320년에 달하는 송나라의 존속기간은 한나라의 뒤를 이은 2위에 해당한다. <살아남은 자가 강한 것이다> 식의 사고방식으로 접근해보면 약하기는 커녕 오히려 명백히 강자그룹에 속하는 것이다. 물론 이 기간 동안 송나라가 주변국에서 군사적으로 강맹한 위세를 거의 보여주지 못한 것은 부정하기 힘든 사실이다. 이런 면에서 송나라를 '군사적 약체'였다고 취급하는 관점이 틀리지는 않다. 하지만 송나라의 '유지력'은 충분히 강력했고, 국가의 유지력에 있어서 자국을 지킬 수 있는 군사력은 필수적 요소다. 즉 송나라의 군사력은 대외적 영향력을 과시하기에는 부족했지만 자국에 대한 유지력을 지탱할 수준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송의 군사력을 ①'국내의 안정성'과 ②'정주제국의 유목민 대책' 이라는 두 측면에서 다시 살펴볼 수도 있다. 먼저 국내 안정성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송나라의 문치주의는 <군벌의 발호를 막고 중앙집권을 확립하기 위해 군사력의 강화를 포기>한 정책이라 볼 수 있다. 따라서 문치주의로 인해 송나라의 군사력이 약화되었다는 것은 분명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무조건 '문치주의가 문제다' 라는 분석은 부당하다. 왜냐하면 송나라는 <군사력의 약화를 대가로 중앙집권의 확립과 군벌의 탄생 방지, 국내의 번영이라는 결과를 얻어내는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다른 장수 통일왕조인 한, 명, 당나라의 사례와 비교하면 이 점은 명백하다. 한나라와 당나라는 결국 군웅(군벌), 절도사의 발호로 멸망했고, 명나라의 멸망에도 오삼계와 같은 군벌이 큰 역할을 담당했다. 하지만 송나라는 강력한 외적의 공격으로 멸망하는 그 순간까지 어쨌건 지방 군사력의 반란이나 배신 문제에서는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었다. 문치주의의 결과를 군사력의 약화라는 대가를 확실하게 치른 대신, 군대에 대한 통제력과 정국 안정성이라는 성과도 확실하게 얻은 것. 송나라의 군사제도를 흔히 <반란의 위협을 막는데는 효과적이었지만 진짜 위협인 외세의 침공을 막는데는 허술했다> 식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지만 이는 지나치게 근대 이후 고도화된 국가를 기준으로 본 해석일수도 있다. 전근대 왕조국가의 입장에서 지방 군사력의 반란은 외세의 침공 못지 않게 진짜 위협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특히 중국 통일왕조 정도의 규모가 되면, 지방 군사력의 위협이 어지간한 외세의 위협보다 더 심한 경우도 많았다.
송 멸망의 특수성은 여기서 시작된다. 송 이전 통일왕조들은 전부 내부적인 요인으로 멸망했다. 주나라 역시 봉건 왕국들의 군벌화로 멸망했고 한나라 역시 호족들의 군벌화로 멸망했다. 진나라 역시 팔왕의 난으로 대표되는 내부적 요인이 멸망을 일으켰으며 수와 당 역시 내부적 요인이 원인이다. 그런데 송부터는 통일 왕조가 외부적 요인으로 멸망하게 되는데, 송은 몽골의 침입으로 멸망했고, 마지막 한족 왕조인 명나라도 만주족에 의해 멸망했다. 이처럼 송나라는 유목 민족이 정복왕조로 발전하는 시기에 세워진 왕조였던데다가 전례를 피하고자 내부 안정성을 도모한 대가로 이렇게 된 것이다. 이를 무조건적으로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결과론적인 관점으로 역사를 바라보는 것이다.
무엇보다 송나라 바로 이전의 당나라가 안록산의 난을 시작으로 지방 군벌, 특히 절도사들에게 권력을 몰빵한 결과 사회의 혼란과 왕조의 몰락으로 갔었기 때문에 송 입장에서도 쉽사리 지방군을 강화하는 선택지를 고르기 어려웠을 것이다. 송이 요, 서하, 금, 원 등 외세에 시달렸기 때문에 중앙군 대신 지방군을 강화했어야 한다는 주장은 지극히 결과론적인 해석일 뿐 당의 몰락 과정을 지켜본 송 조정에서는 달리 선택지가 없었다고 보는게 맞다. 모든 정책은 항상 양날의 검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다만 송이 진짜 비판받아야 하는 부분은 군의 편제 따위가 아니라 대전략이 부재했다는 점에 있다. 북송 시절 요나라에 대한 복수심 때문에 금나라와 손잡고 요를 쳤으나 그 이후의 대응에 대해서는 깊게 고찰하지 못했고 결국 섣불리 금을 쳤다가 결과로 돌아온 것은 정강의 변으로 대표되는 카이펑 조정의 함락, 즉 북송의 멸망이였다. 그런데 남송 시절에도 금나라와 몽골 제국 사이에서 이와 같은 선택이 되풀이되고 다들 결과는 잘 안다. 송은 복수심에 상대(요, 금)를 무너뜨리는데만 혈안이 되었을 뿐 향후 또 다른 상대(금, 원)에 대한 대응 방안이 부재하거나 두루뭉실하였다. 물론 북송 시절과 달리 남송은 몽골을 상대로 40여년간 항쟁하였기에 일반화하긴 어렵겠지만 이미 만주와 내몽골, 화북 대부분을 잃고 샌드위치 신세로 축소된 금나라를 감정을 앞세워 몽골과 협공할 필요가 있었나 싶은 생각이 드는건 사실이다. 이 역시 결과론적일 수 있지만 금의 세력 축소와 몽골의 발흥이라는 형세 및 지난 역사에 대해 송이 자세히 고찰했더라면 금나라와 협력하거나 대몽골 동맹을 맺지는 않을지언정 금을 협공하지 않고 최대한 버티게끔 놔두고 이를 방어막 삼아 내실을 강화하는 방책도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초반에는 금이 남송을 선공했다는 사실은 감안해야하지만 막판에는 오히려 금나라 사신이 송에게 빌었기 때문에 더욱 유연한 선택의 기회가 있기는 했다. 다만 남송은 금의 멸망 즈음에 몽골과의 전쟁을 고려하여 장강라인 방어선을 강화하였고, 이는 44년에 육박하는 방어의 기초가 되었다. 북송과 달리 참작의 여지는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앞의 대전략 측면에서 고려해 보아야 할건 송에게 금은 말 그대로 철천지원수였다. 21세기 대한민국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자. 1950년 북한의 선공으로 시작된 한국전쟁의 기억이 가시지 않았고, 앙금이 사라지지 않은 상황에서 제3국을 견제하기 위해 북한을 지원해야 한다고 주장하면 받아들일 수 있는가? 설령 실리적으로 그것이 이득이라도 섣불리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 송나라 입장에서 몽골은 잠재적 위협이고, 금은 실제로 북송을 멸망시킨 위협이었다. 우리는 송나라의 멸망이라는 결과를 알고 있으니 금을 지원하거나 최소한 방치했어야 이득이라는 것을 알지만, 당대 송나라인에게 그것을 바라는 것은 과도하게 결과론적인 처사이다. 하다못해 금나라가 몽골의 공격을 견디기 어려움을 느끼고 바로 송나라와 손을 잡으려 시도라도 했으면 협력의 가능성이 좀 더 높았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실제 역사에서 금나라는 그나마 여력이 있을 때 송나라부터 쳐서 국력을 회복하려다 결국 막판까지 몰리고 나서야 비로소 손을 잡자고 부랴부랴 제안한다. 그러므로 송나라 입장에서는 '금과 협력하는 것이 이익이 되기는 하겠으나, 협력관계의 유지가 가능할만큼 신뢰할 수 있는 상대라고 볼 수 없다'라고 판단하는 게 이상한 일이 아니다. 역사의 진행과 결과를 모두 알고 있는 후대인의 관점에서야, "그 상황에서는 협력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방치해두는 것이 더 나았다."고 판단할지도 모르지만, 당장 제한적인 정보만을 가지고 있는 당대인에게 그만큼 객관적이고 결과론적인 판단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사실 이는 결국 전근대 국가에서 '국내 안정성'과 '군사력 강화'라는 두 목표가 사실상 서로 상충되는 것이었음에서 기인한다. 당시의 기술적, 제도적 한계에서 군대를 강화시키려면 반독립적인 군사세력의 탄생을 허용해야 하고, 이 반독립적 군사력은 중앙정부를 위협하여 정국의 안정성을 저해한다. 하지만 정국을 안정시키기 위해 군사력에 대한 통제를 강화할수록 군대의 유지와 운영에서 비효율적인 면모가 나타날 수 밖에 없다. 봉건제 문서에서도 다뤄진 내용이지만 기술적, 제도적 기반이 갖춰진 현대를 기준으로 '강력한 군대를 양성하면서도 중앙정부의 통제력을 유지하면 된다'고 접근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그러다보니 이 선택지에서 송나라의 선택은 '안정성'에 아주 높은 우선순위를 둔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에 대한 평가는 과연 이것이 최선의 선택이었는지, 아니면 다른 선택, 예컨데 안정성을 조금 포기하더라도 군사력을 좀 더 강화시키는 등의 선택이 더 좋은 선택이었을지에 대해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이 경우 물론 역사적으로 '가지 않은 길'의 결과는 아무도 알 수 없으니 이 질문의 정답이 무엇인지도 아무도 답할 수 없겠지만... 송나라의 번영과 존속기간이라는 결과를 기준으로 보면 나쁜 선택이었다고 단정하기는 쉽지 않다. 어쨌건 송나라는 이 선택의 결과로써 (보다 군사력에 우선순위를 둔) 다른 왕조들에 비해 오랜 기간 역사의 시련을 견디고 살아남은 것이다. 물론 무조건 오래 살아남았으니 더 강하다고 보는 것도 균형을 잃은 관점이겠지만 연운 16주를 잃은 상태로 왕조 초기부터 이미 결집된 상태의 유목제국을 상대해야 했다는 불리함에도 불구하고 다른 왕조보다 오래 견뎌낸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두번째, 정주 제국의 유목민 대책이라는 측면에서 볼 수 있다. 흔히 <문약한 송나라는 북방 유목민들의 침탈에 시달리며 돈과 외교로 평화를 사려고 했지만 결국 견디지 못하고 멸망했다>는 이미지가 소비되지만, 이 역시 공정하게 따지면 역대 중국 통일왕조 중에서 북방 유목민의 침탈에 안 시달린 왕조는 없다. 당장 역대 중국 왕조 중 비교적 장수한 왕조들의 사례를 보더라도 명나라의 멸망에는 북방 유목민(여진족)이 큰 영향을 끼쳤고[68] 한나라의 경우 한나라 자체의 멸망은 유목민과 무관했지만 한나라의 체제를 계승한 서진이 영가의 난으로 무너지고 중원을 상실함으로써 한나라가 400년에 걸쳐 구축한 체제 자체를 무너트린 것은 유목민이었던 것이다. 정주 제국에게 있어 유목민은 언제나 두려운 적이었으니 유목민에게 시달렸다는 것 자체가 곧 그 나라가 약체였다는 근거는 아닌 셈.
또한 군사력으로 유목민을 막아낼 힘이 없어 돈과 외교로 평화를 사려 했고 이 과정에서 박쥐같은 행태로 신뢰를 잃고 적을 만들었다고 하는 말 역시, 따지고 보면 원래 이이제이 정책으로 모든 정주제국의 대 유목민 대책에 있어 가장 핵심적인 요소였다. 송나라가 특별히 한심해서 유목제국을 정면으로 상대하지 못하고 다른 유목제국의 손을 빌린 것이 아니라, 원래 정주제국의 입장에서는 강력한 유목세력과 정면으로 맞부딪히는 것 보다는 다른 유목민을 끌어들여 상대하게 하는 쪽이 더 효율적인 선택지였던 것. 한 세력과 손을 잡고 다른 세력을 친 후 손 잡았던 세력을 배신하여 신뢰를 상실했다는 것 역시, 원래 이이제이는 그렇게 하는 것이 맞다. 상대적으로 약소한 여진족과 손을 잡고 강성한 거란족을 친 후, 그 결과로 거란족이 무너지는 대신 여진족이 성장하면 동맹을 끊고 이번엔 몽골에게 힘을 실어줌으로써 여진족을 견재하는 패턴을 계속 반복하는 것이 이이제이의 기본이다.
하지만 이 전략의 실행하자니 송나라의 연약한 군사력이 심각한 장애요소가 되었다는 사실 자체는 부정할 수 없다. 원래 이이제이란 시행하는 측이 명백한 우위에 있을 때 최고의 효과를 낼 수 있는 전략인데 송나라는 군사력 부족으로 인해 전략적 주도권과 정국 통제력을 상실하고 오히려 자신들이 휘둘려버린 결과 역으로 유목민들의 공격을 받아 심각한 타격을 입는 상황을 자주 겪었다. 그러나 그 원인이 전적으로 송나라의 문치주의에 있다고 보기는 또 애매한 것이, 일단 송나라가 처해있던 상황 상태가 심각하게 불리했다. 본래 대 유목민 방어의 핵심 거점이어야 할 연운 16주는 석경당에 의해 요나라로 넘어가 오히려 유목민의 남진 교두보이자 전략적 거점이 되어버렸고 건국 초기부터 (이이제이가 쉽게 통하는) 부족 단위로 분열된 상태가 아니라 국가 수준으로 결집한 유목민 세력을 상대해야 했던 것. 즉, 문치주의를 포기하고 군사력 확충에 중점을 두었다 하더라도 송이 과연 유목 세력을 상대로 우위를 확실하게 차지할 수 있었을지 의문이 들 만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이 역시 결과적으로 본다면 '다른 경우보다 불리한 상황' 에서 '결과적으로 더 오래 버티는데 성공' 한 송나라의 선택이 반드시 잘못된 선택이었다, 더 좋은 다른 해결책이 있었다라고 단정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정리하자면, 송은 당과 오대십국의 멸망 사례를 참고하다가 지나친 문치주의가 되어버려 송나라의 군사적인 잠재력이 국력에 비해 미약해졌고, 이때문에 대외관계에서 지속적으로 약한 모습을 보이며 군사적 방위력보다는 외교적, 경제적 수단에 의존하여 자국의 안전을 확보해야 했다는 것 자체가 부정하기 힘든 사실이다. 그러나 송이 선택한 외교적 수단은 과정만 놓고 보면 나름의 합리성과 효과를 가지고 있었고, 어떤 면에서 보면 이런 전략 덕분에 오히려 역대 다른 통일왕조에 비해 더 불리한 상황에서도 장기간 국가를 존속시키기까지 했다고 재평가할 여지도 일부 있다. '항상 얻어터지고 털리기만 했던 약체 송나라'라는 이미지는 일면 정확하지만 다른 일면에서는 과장되거나 편협한 관점으로써 역으로 지나친 군사력 지상주의에 기반하고 있거나, 평가의 기본인 '비교'를 무시하고 선입견에 부합하는 부분만을 취사선택하여 만들어진 것이라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따지고 보면 송나라뿐만 아니라 후대왕조인 원나라, 명나라, 청나라도 군사적으로 영 좋지 않은 모습을 보여줬는데 송나라만 문약했다고 까이는 건 부당한 면이 있다. 원나라는 금나라와 남송을 멸망시킬 당시에는 그야말로 엄청난 강대국이었지만 쿠빌라이 칸의 죽음을 기점으로 혼란에 빠졌으며 결국 이러한 혼란을 수습하지 못하고 홍건적의 난으로 중원을 상실하여 몽골 제국 초기 수준의 모습으로 퇴보했다. 명나라의 경우 홍무제, 영락제, 선덕제 시절에만 강력한 모습을 보여주었지 선덕제 시절부터 식민지로 만든 베트남에게 패하여 독립을 막지 못했으며 몽골한테 처참하게 패한 토목보의 변을 시작으로 점점 국력이 약해지더니 1550년의 경술의 변에서 몽골군에게 싸우지도 못한 채 국토가 유린당했다. 1555년에는 정규군도 아닌 왜구들을 제대로 진압하지 못하고 국토가 유린당한 적이 있다.[69] 심지어 말기에는 국력에서 매우 열세인 청나라에 약탈당하고 국토까지 유린당했으며 나중에는 반란군조차 진압하지 못해 나라가 반란군에게 망하고 만다. 또한 청나라도 17~18세기까지는 강한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19세기 아편전쟁, 청프전쟁, 청일전쟁, 태평천국 운동, 의화단 운동 때 보여준 모습은 줄루 전쟁 당시 19세기에 창과 방패들고 싸우던 줄루족보다도 형편없었으며 조선(대한제국)에도 대놓고 무시당하여 하마터면 간도를 빼앗길 뻔한 굴욕을 겪는다.
더 변명하자면 본래 송이 비록 군사력이 약화되기는 했어도 정강의 변처럼 수도까지 털리고 황제가 두 명이나 인질로 끌려갈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북송은 휘종의 실정으로 국가재정이 고갈되고 곳곳에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느라 군사력까지 약화된 상태에서 제대로 된 방비책도 없이 금나라의 뒤통수를 2번이나 쳤다. 남송의 애산전투 당시 황족부터 일개 이름없는 병사들까지 목숨을 걸고 몽골제국을 고전시킨 것과 달리, 정강의 변 때 북송은 황제의 실정으로 재정이 파탄나고 민심도 잃어버린 상태였기에 아무도 조국을 지켜야 할 이유가 없었던 탓이다. 휘종을 검색하면 그의 치세가 얼마나 막장이었는지 알 수 있다.
8. 외교
8.1. 고려와의 관계
자세한 내용은 고려-북송 관계 문서 참고하십시오.8.2. 근시안 외교 정책
부실한 국방력에 가려진 송나라의 본질적인 문제. 부실한 국방력을 메꾸기 위해 문인들이 외교로 사태를 수습하려고 했다. 이러한 방법은 한참 잘못되었다. 그래서 외교책이랍시고 수를 내놓을 때마다 나라를 절반씩 말아먹었다.[70]처음에는 연운 16주를 차지한 요나라를 해결하기 위해 금나라에 구원을 요청했다. 이 사실을 안 고려에서는 사신을 보내 여진은 믿을만한 족속이 아니라고 설득했지만 송은 듣지 않았다. 그리고 송금 연합군이 요를 무너뜨렸을 때, 양국간의 이해 문제와 외교적 불협화음이 심화되었다. 송은 약속한대로 요를 공격했지만, 요의 잔당에게 패전했다. 결국 송은 자신들이 차지하기로 한 연운 지역의 공략을 금군에게 '의뢰'하고 그 대가로 물자와 재화를 제공하기로 했다.
금은 의뢰를 성실히 이행해주었지만, 점령지의 인력과 물자를 죄다 챙겨가고 송에게는 빈 껍데기만 가져다 주었다. 그리고 송에게 외교적인 양보를 강요하고 장난질을 쳤으며 계속해서 물자를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반대로 송은 금의 행위에 분노하여 요와 비밀리에 접촉하고 금에 반기를 든 요의 잔여 세력을 수용하는 등의 행위를 하여 금의 수뇌부를 불편하게 했다. 이렇게 양국은 서로 신의 없는 외교를 지속했고, 결국 금이 선제 공격을 가했다. 송이 요나라 잔당을 제압하지 못하는것에서 송의 군사적 약세를 확인한 금군은 하북을 유린했고 끝내는 개봉을 함락시켰다. 송은 수도가 함락되고 황제는 포로가 되는 치욕을 당하며 나라 반쪽을 잃었다. 그러나 송은 멸망하지 않고 남천하여 회수와 사천 일대를 사수했다.
그런데, 그 전략을 남송 때 썼다가 이번엔 아예 멸망까지 당했다. 다만 이 경우는 참작의 여지가 있는 것이, 남송 문서에서도 보듯 금나라가 먼저 남송을 공략해 몽골에 대항하려 했다. 즉, 남송으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초기에는 금나라에 세폐를 끊는 정도에서 대응하던 남송은 결국 금의 멸망이 분명해지자 몽골에 대항하기 위해서라도 금나라를 공격하기로 마음먹었고, 그 전략으로 벌충한 시간을 통해 양양 공방을 우주방어로 30년간 지연하며 막을 수 있었다.
문제는 단평의 입락인데 단평의 입락은 명분이 워낙 없었다(...) 이 일은 금나라 멸망 겨우 두 달 만에 벌어졌는데 그 동안 특별히 몽골이 북벌의 빌미를 준 것도 아닌데 그저 고토회복이라는 명분으로 내부의 반대도 씹어버린 채[71] 진행했다. 당연하지만 단평의 입락은 개희북벌처럼 실패했고 되레 몽골이 송나라를 공격하는 명분만 제공했다.
8.3. 베트남과의 관계
자세한 내용은 송나라-베트남 관계 문서 참고하십시오.9. 평가
송나라는 역사가의 관점에 따라 다양하게 평가할 수 있는 나라다. 경제적으로 융성했으며, 사회도 개방적인 분위기였고[72] 이를 기반으로 각종 문화가 무르익은 시대였다. 서민 문화가 발달하여, 송대를 배경으로 한 창작물이 많다. 수호전, 금병매가 대표적이다. 건축적으로도 이전 시대에 비해서 구조가 복잡한 누각이 많이 출현하고, 의장이 풍부해졌다. 당송팔대가라는 표현에서 볼 수 있듯 문학도 융성하였다.정치적으로도 중앙집권화가 이뤄지고 꽤 안정되어 유교적 이상에 상대적으로 가까웠던 시대였다는 것은 특별히 부정할 이유가 없어 보인다. 그냥 대충 봐도 정치적으로 뭔가 문제가 크게 꼬여서 사단이 난 경우는 별로 없었다. 일단 권력을 전횡하는 환관도 별로 없었고, 황제의 힘을 넘보는 황후도 없었다. 물론 아예 없는 건 아니라 휘종 때 동관(童貫)이라는 환관이 방랍의 난을 초래하기는 했다. 당나라 시절 국토를 어지럽혔던 절도사와 같은 지방관의 난도 거의 없었다.
특히 송은 잔혹한 혹형이 이전, 이후 시대보다도 오히려 훨씬 적었다는 것은 큰 특징이다. 송 이전인 위진남북조시대, 수당시대, 오대십국시대의 막장 행각을 보고, 송나라의 뒤를 이은 원나라·명나라·청나라의 피비린내 나는 사태들을 생각해보자.[73] 물론 정적 제거나 당쟁 같은 게 없진 않았지만, 그래도 상대적으로 피비린내는 훨씬 덜 나던 시대였다. 송태조의 석각 유훈에도 '사대부와 상소하는 사람을 죽이지 말라'는 내용이 있었다.
그리고 남송 문서에도 나오듯이, 국가가 멸망하는 그 순간까지도 전조의 황족(후주의 시씨 가문), 사대부, 장수, 병사, 평민이 모두 끝까지 조정의 뜻을 받들어 몽골의 침입에 맞서 싸우다 애산 전투에서 최후를 맞이할 정도로 체제가 안정되고 단합력이 끈끈했다.
이전의 왕조들 중 송나라와 비교할 법한 왕조는 당나라이다. 문무에 고르게 편승된 과거 제도도 본시 수나라를 거쳐 당나라가 확립했으며, 당나라 말기 지주전호제와 유사한 토지 제도의 영향이 송나라에 꽤 나타난다. 뿐만 아니라, 지공거 체제와 빈공과 역시 당나라와 송나라가 비슷하다. 하지만 당나라의 경우 정복 전쟁을 활발하게 벌였지만[74], 송나라는 그 기세가 다소 주춤했다는 점이 다르고[75], 반란의 빈도는 오히려 군사력이 강했던 당나라가 훨씬 심각했다는 점도 다르다. 반란을 줄이려고 시행했던 여러 조치가 오히려 송나라의 군사력 약화를 가져왔으니 이 또한 아이러니.
애초에 송나라는 그 이전 당나라까지의 중국과는 완전히 다른 시스템을 도입한, 글자 그대로 '획기적'인 왕조였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위진남북조시대를 거쳐 수당시대에 강고한 기득권을 형성한 귀족제를 타파하고 어찌보면 진정한 황제 정치를 시작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심지어 송대에 들어 유교 경전에 기초한 관료채용 시험인 과거제가 전면적으로 채용되고, 당나라 때까지 남아있던 귀족에 의한 세습정치가 완전히 폐지된다. 나아가 '전시'라고 불린, 황제 직속으로 시험 감독을 시행하는 최종 공무원 임용시험이 자리잡는다. 이것은 시험 합격자에게 황제에 의한 은의를 느끼게 하고, 모든 관료를 황제 개인의 자식과 동일하게 취급하여 중앙집권제를 철저히 하기 위한 방책이었다. 바로 이것을 통해 지금까지 관리들 사이에서 사적인 당파를 만들어 자신의 파벌을 유지해 온 문벌귀족의 힘을 제거할 수 있었다.[76]
더욱이 채용된 관료는 자신의 출신지에는 부임하지 못하고 수년마다 다음 부임지로 순회하는 '군현제' 하에서 경력을 쌓기 때문에 고향에서 다진 기반으로 황제에게 반란을 일으킬 염려가 없어졌다. 이렇게 하여 정치적인 귀족 계층의 '해고'가 완료되었다. 경제적으로도 귀족에 불리한 정책이 실시되었다. 개혁파 재상이라고 알려진 왕안석의 청묘법(정부가 농민에게 저리로 융자해 주고 변제 때는 수확물을 화폐로 바꾸어서 갚는 것을 의무화한 입법)은 국가 융자를 통해 농민에게 화폐사용이 전파되도록 한 정책이다. 모든 백성이 전통적인 물납(수확한 작물을 그대로 납입하는 것)이 아니라 농작물을 시장에서 판매하여 정부에 변제하였다. 이처럼 청묘법은 일반 서민이 상업에 눈을 뜨고 돈의 의미를 깨닫도록 고안된 것이다. 화폐는 농작물과 달리 부패하지 않기 때문에 보존하기 좋고, 급할 때는 다른 곳으로 쉽게 가지고 갈 수도 있다. 그렇다면 열심히 일하고, 비싸게 팔고, 지금보다 더 많이 벌 수 있는 직업으로 전직하고, 현재 거주하는 곳보다 더 쾌적한 지역으로 이주하는 식으로 시장경제가 발전하면서, 백성을 옥죄어 노역에 종사시키던 자급자족적 장원 경영은 망하고 귀족의 경제적 기반이 붕괴하고 만다. 게다가 남자라면 누구나 응시 가능했던 과거제를 통해, 북송은 신분질서는 있지만 어찌보면 거의 세계 최초로 이동·영업·직업 선택의 자유가 보장된 사회였다고 보는 의견도 있다.
물론 송나라의 허약한 군사력은 아쉬운 부분이긴 하다. 그래도 북송에 비해 남송은 몽골을 상대로 멸망하긴 했지만 첫 침공을 받은 후 40년 동안 상당히 선전했다.[77] 두 번째 침입 때는 몽골의 몽케 칸이 직접 나섰으나 도중에 병사했다. 몽골 주력 부대의 침공을 받고도 이처럼 오래 버틴 나라는 매우 드물었다는 점에서, 어찌보면 송나라의 군사력이 부족한 부분도 물론 있겠지만 반대로 당시 북방 민족들의 전투력이 너무 강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또한 송나라의 군사력을 마냥 저평가할 수 만은 없는게, 세계 최초로 화약무기를 본격적으로 운용한 군대가 송군이라는 점은 분명히 큰 의미가 있다. 다만 이때의 화약무기는 흔히 생각하는 대포와 소총 같은 것은 아니었다.
중화권에서는 중국 역사상 마지막 한족 통일 왕조였던 명(明)이 막장 황제들로 인해 중기와 말기에 실망스러운 행보를 꽤 보였기 때문인지, 한족 왕조 중 송나라를 은근히 더 쳐주는 분위기가 있다.[78] 현대 중국 인민은 송의 경제력이나 문화력 등을 높이 평가하는 분위기지만, 정강의 변이나 몽골 제국에게 치욕을 당한 것 때문인지 특히 한족주의자에겐 저평가 받는 부분도 있다. 오히려 대만 지역에서 문화 부흥 운동으로 송나라를 높게 쳐주는 편. 판관 포청천 관련 작품이 송나라의 치세를 가장 잘 살린 매체로 알려져 있다. 중국 본토 매체는 보통 송나라의 영웅이 찌질한 황제에게 탄압받는 모습으로 묘사하곤 하지만, 포청천의 경우 성군과 충신이 둘 다 맞물려 신임을 두텁게 받는 것으로 나오곤 한다.
이 시기에는 법의학과 수학 등의 학문이 발달했고, 기계공학도 발달해서 소송(蘇頌)이 거대한 자동물시계를 만들었는데 톱니바퀴(물레)를 사용한 것이어서 자명종과 유사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조금씩 잊혀졌다. 급기야 몽골족의 원나라에 이르러 송대의 혁신은 법의학만 남고 수학은 쇠퇴했다.
한편, 송은 명나라와 더불어[79] 조선 왕조에 많은 영향을 주었던 나라이기도 했다. 실제로 이 시기에 편찬된 대학연의가 조선 왕조에서 본격적으로 도입되었고, 과거제도 송나라의 과거 제도를 조선 왕조가 완성시켰다. 주자학과 강목체 역시 조선 왕조에서 본격적으로 도입되어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형법 역시 송나라의 제도를 많이 참고하였다.
사실 여러모로 아쉬운 시대인 게 가장 큰 문제였던 국방의 경우도 상술했듯 석경당이 팔아먹은 연운 16주의 부재에서 비롯된 점이 컸다. 내치가 뛰어났던 송이 후대의 명처럼 만리장성을 방어막 삼을 수만 있었다면 동양사가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갔을지 궁금증이 남는 대목이다.
10. 역대 황제
황제 재위 기간에 연호가 여러 차례 바뀐 관계로 명이나 청처럼 연호를 붙여서 "XX제" 형식으로 부르지는 않는다.송나라만의 특징으로 황제를 지칭할 때 폐하는 격식을 최대한 차릴때 사용하고, 일상적으로는 '관가(官家)'라고 돌려말하곤 하였다.[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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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ece5b6> 초대 | 제2대 | 제3대 | 제4대 | 제5대 | |
고종 | 효종 | 광종 | 영종 | 이종 | |
<rowcolor=#ece5b6> 제6대 | 제7대 | 제8대 | 제9대 | ||
도종 | 공제 | 단종 | 소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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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수 | 묘호 | 이름 | 연호 | 즉위년일 | 퇴위년일 | 재위 기간 | 능호 |
01 | 태조(太祖) | 조광윤 (趙匡胤) | 건륭(建隆, 960년 ~ 963년 11월) 건덕(乾德, 963년 11월 ~ 968년 11월) 개보(開寶, 968년 11월 ~ 976년 12월) | 960년 2월 4일 | 976년 11월 14일 | 16년 284일 | 영창릉(永昌陵) |
02 | 태종(太宗) | 조경(趙炅) [81] | 태평흥국(太平興國, 976년 12월 ~ 984년 11월) 옹희(雍熙, 984년 11월 ~ 987년) 단공(端拱, 988년 ~ 989년) 순화(淳化, 990년 ~ 994년) 지도(至道, 995년 ~ 997년) | 976년 11월 15일 | 997년 5월 8일 | 20년 174일 | 영희릉(永熙陵) |
03 | 진종(眞宗) | 조항(趙恒) | 함평(咸平, 998년 ~ 1003년) 경덕(景德, 1004년 ~ 1007년) 대중상부(大中祥符, 1008년 ~ 1016년) 천희(天禧, 1017년 ~ 1021년) 건흥(乾興, 1022년) | 997년 5월 8일 | 1022년 3월 23일 | 24년 319일 | 영정릉(永定陵) |
04 | 인종(仁宗) | 조정(趙禎) | 천성(天聖, 1023년 ~ 1032년 11월) 명도(明道, 1032년 11월 ~ 1033년) 경우(景祐, 1034년 ~ 1038년 11월) 보원(寶元, 1038년 11월 ~ 1040년 2월) 강정(康定, 1040년 2월 ~ 1041년 11월) 경력(慶曆, 1041년 11월 ~ 1048년) 황우(皇祐, 1049년 ~ 1054년 3월) 지화(至和, 1054년 3월 ~ 1056년 9월) 가우(嘉祐, 1056년 9월 ~ 1063년) | 1022년 3월 24일 | 1063년 4월 30일 | 41년 37일 | 영소릉(永昭陵) |
05 | 영종(英宗) | 조서(趙曙) | 치평(治平, 1064년 ~ 1067년) | 1063년 3월 1일 | 1067년 1월 25일 | 3년 331일 | 영후릉(永厚陵) |
06 | 신종(神宗) | 조욱(趙頊) | 희녕(熙寧, 1068년 ~ 1077년) 원풍(元豊, 1078년 ~ 1085년) | 1067년 1월 25일 | 1085년 4월 1일 | 18년 66일 | 영유릉(永裕陵) |
07 | 철종(哲宗) | 조후(趙煦) | 원우(元祐, 1086년 ~ 1094년 4월) 소성(紹聖, 1094년 4월 ~ 1098년 5월) 원부(元符, 1098년 6월) | 1085년 4월 1일 | 1100년 2월 23일 | 14년 331일 | 영태릉(永泰陵) |
08 | 휘종(徽宗) | 조길(趙佶) | 건중정국(建中靖國, 1101년) 숭녕(崇寧, 1102년 ~ 1106년) 대관(大觀, 1107년 ~ 1110년) 정화(政和, 1111년 ~ 1118년 10월) 중화(重和, 1118년 11월 ~ 1119년 2월) 선화(宣和, 1119년 2월 ~ 1125년) | 1100년 2월 23일 | 1125년 1월 18일 | 25년 329일 | 영우릉(永祐陵) |
09 | 흠종(欽宗) | 조환(趙桓) | 정강(靖康, 1126년 ~ 1127년 4월) | 1125년 1월 19일 | 1127년 1월 9일 | 1년 355일 | 영헌릉(永獻陵) |
11. 계보
추존 황제 성조 조현랑 | ||||||||
(계보 불명) | ||||||||
추존 황제 희조 조조 | ||||||||
추존 황제 순조 조정 | ||||||||
추존 황제 익조 조경 | ||||||||
추존 황제 선조 조홍은 | ||||||||
1. 태조 | 2. 태종 | |||||||
조덕소 | 조덕방 | 3. 진종 | 조원분 | |||||
조유길 | 조유헌 | 4. 인종 | 조윤양 | |||||
조수탁 | 조종욱 | 5. 영종 | ||||||
조세괄 | 조세장 | 6. 신종 | ||||||
조영가 | 조영회 | 7. 철종 | 8. 휘종 | |||||
조자석 | 조자칭 | 9. 흠종 | 10. 고종 | |||||
조백오 | 11. 효종 | 조부 | ||||||
조사치 | 12. 광종 | |||||||
조희로 | 13. 영종 | |||||||
14. 이종 | 조여예 | |||||||
15. 도종 | ||||||||
17. 단종 | 16. 공종 | 18. 소제 |
12. 추존 황제
묘호 | 시호 | 이름 | 비고 | 능호 |
성조(聖祖) | 상령고도구천사명보생천존대제 (上靈高道九天司命保生天尊大帝) | 조현랑(趙玄朗) | 진종 추숭, 도교의 신 | - |
희조(僖祖) | 입도조기적덕기공의문헌무예화지효황제 (立道肇基積德起功懿文憲武睿和至孝皇帝) | 조조(趙朓) | 태조 추숭, 태조의 고조부 | 흠릉(欽陵) |
순조(順祖) | 혜원예명황제 (惠元睿明皇帝) | 조정(趙珽) | 태조 추숭, 태조의 증조부 | 강릉(康陵) |
익조(翼祖) | 간공예덕황제 (簡恭睿德皇帝) | 조경(趙敬) | 태조 추숭, 태조의 조부 | 정릉(靖陵) |
선조(宣祖) | 소무예성황제 (昭武睿聖皇帝) | 조홍은(趙弘殷) | 태조 추숭, 태조의 부친 | 영안릉(永安陵) |
- | 복안의황 (濮安懿皇) | 조윤양(趙允譲) | 영종 추숭, 영종의 생부 | - |
13. 비황족 제호 추존자
묘호 | 시호 | 휘 | 비고 | 능호 |
- | 태상노군혼원상덕황제 (太上老君混元上德皇帝) | 이이(李耳) | 진종 추숭, 비 황족 | - |
14. 여담
- 기동전사 건담에 등장하는 지온 소속인 마 쿠베의 도자기 소장품 중 그것은 좋은 것이다라는 대사와 함께 가장 대표적인 애장품의 출처로 등장한다. 이 도자기는 실존하는 북송 시대의 정병과 상당히 유사하게 그려졌지만, 색이 복송 양식이 아니라서 위조품 논란이 있다. 항목 참조.
[1] Taagepera, Rein (1997), "Expansion and Contraction Patterns of Large Polities: Context for Russia", International Studies Quarterly, 41 (3): 475–504.#[2] 태조대의 송원통보(宋元通寶) 등 수많은 동전이 발행되었다. 동전명의 앞부분은 주로 각 황제의 연호가 붙으며 ~원보(元寶), ~통보(通寶), ~중보(重寶)로 끝난다.[3] 사천 지방에서는 주로 철로 된 주화를 주조해 유통하였다.[4] 술자리에서 공신 장수들의 병권 회수.[5] 두태후의 유언으로 형제 세습 약조.[6] 왕소가 유용가 부족 등 20만 명을 귀순시킨 후 원정.[7] 소식의 촉당, 정이의 낙당, 유지의 삭당.[8] 철종, 장돈, 채변.[9] 하지만 막대한 재원 및 정병 소모로 인해 후에 정강의 변으로 멸망하는 원인이 된다.[10] 서하는 1032년에 건국됐다. 그 전까지 탕구트족이다.[11] 대리국으로부터 독립.[12] 설정인지 진짜인진 모르겠으나 《수호전》의 등장인물 중 하나인 소선풍(小旋風) 시진(柴進)이 이 후손들 중 하나로 작중에서도 그 사실이 언급된다.[13] 앞서 말한 수호전의 시진 역시 단서철권을 가지고 있다.[14] 야율사진의 밑에 있을 때 양업을 생포한 요의 장수이다.[15] 범중엄은 서하의 군대를 여러 차례 격파하고 송의 통치를 받는 티벳계 민족들을 잘 위무해 명성이 높았다.[16] 대표적인 예시로 영락성 전투에서 서하군과의 난전 중 전사한 서희. 부장 곡진의 말을 무시하고 전투에 나섰다가 서희 본인은 물론 북송군 대부분이 몰살당했다. 허나 문관이라고 꼭 전투를 못하는 것도 아니다. 당장 고려의 강감찬도 문관 출신이었다.[17] 오로벌하 때 지휘 체계가 통일되지 않았는데, 이는 패전의 주 요인 중 하나가 되었다.[18] 후에 이를 모티브로 한 청명상하원이 건설되었고, 이 곳에서 <대송동경몽화>가 공연된다.[19] 송대의 관료군은 황제에게만 충성하는 일종의 제자이다. 전시를 거쳐서 탄생한 황제의 소생이 바로 사대부이기 때문이다. 이는 귀족이 황제와 권력을 공유한 당나라 이전의 황제권과 성격이 다르다. 당나라 때까지는 황제권이 법률적으로 보장되지는 않았다. 일개 황제들의 개인적인 카리스마를 통해 절대 권력을 획득한 예외적인 사례는 있었을지 모르나, 기본적으로 당나라 때 완성된 3성 6부제로부터도 알 수 있듯 황제권이 제도적으로 보장되지 않았다. 중서성에서 법률을 만들어 문하성에 보내면, 문하성에서 심의하고, 결정되면 상서성에 최종적으로 인계한다. 한마디로 황제가 정책의 초안을 잡아 놓았다고 해도, 문하성이 심의한 후 반려해버리면 법안이 통과될 수 없었다. 귀족들이 이런 식으로 봉박권을 행사한다. 이러한 정치 관행 때문에 황제권의 제약이 분명했다. 그러다 당송변혁기에 장원에 기반한 귀족층이 소멸하고, 송대에 들어 황제와 신하의 권한이 법적으로 보장된다.[20] 《이십이사차기》 권 25 <송사>.[21] 한 예로 인종 재위 당시 북송의 대신 문언박(文彦博)과 추밀사 방적(龐籍)은 병력과 장수 합계 8만명을 감소시키는 방안을 마련했다. 이에 대하여 대신들은 감군후에 이들이 모여서 도적이 되는 것이 아니냐고 우려했다. 인종도 망설이며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문언박은 "지금 재정에 문제가 있는 것은 병사들이 너무 많아서입니다. 만일 그들을 줄인 후에 난리를 일으킨다면 제가 목숨을 걸고 나서서 평정하겠습니다."라고 진언한 후 감군을 단행했으며, 계획이 실행된 후에 우려했던 일은 나타나지 않았다. 이 일화는 이미 송인종때부터 송나라 군대에 불필요한 병력들이 너무나 많았음을 보여주는 일화이다.[22] 길이만 5m에 달하는 <청명상하도>(淸明上河圖)는 북송 시기 한림학사였던 장택단(張擇端)이 그린 그림으로서, 당시 상업이 발전하여 '불야성'(不夜城)이라고도 불린 송의 수도 개봉(카이펑)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대학수학능력시험 사회탐구영역 세계사 문제에서 자주 출제되기로 유명한 그림 중 하나다. 송나라 관련 기출 문제 중에서 그림으로는 단연 1위다.[23] 다만, 성리학이 본격적으로 집대성되어 관학화되기 시작한 것은 남송의 주자때의 일이다.[24] 실제 지도상으로는 삼국시대의 위나라와 오나라의 영역이 비슷비슷해 보이지만 당시 강남은 화북에 비해 개발이 더뎠고 오의 지방 행정력이 약했기 때문에 위의 국력을 통상적으로 오의 2~3배로 본다.[25] 다만 행정력의 한계로 실제 송나라가 파악한 호적상의 인구는 46,734,784명에 불과했다. 물론 파악된 숫자만 해도 동시대 다른 국가들을 아득히 초월한다.[26] 왕안석이 재상이었던 때에는 한 해마다 무려 동전 약 60억 개와 철전 10억 개씩을 찍어냈다![27] 물론 항상 이런 건 아니었다. 송나라 말기로 갈수록 누적된 부정부패와 막대한 국방비 및 외세에 바치는 세폐, 이로 인한 세금의 증가와 빈부격차로 거지나 도둑이 생기거나 부자의 자녀를 납치해 몸값을 받거나 하는 문제도 있었다. 《수호전》의 배경도 북송 말기이다.[28] https://en.wikipedia.org/w/index.php?title=List_of_regions_by_past_GDP_(PPP)&oldid=272230369.[29] http://www.nuffield.ox.ac.uk/users/broadberry/China8.pdf. 양측 자료 모두 1990년 달러가 기준이다.[30] 《왕정농서》에 14세기 수력 방적기가 실려 있다.[31] 당대 기술로는 실용적인 증기기관을 어느 나라도 제작할 능력이 없었다. 강철의 질이 낮아서 크게 지을 수 없었기 때문.[32] 다만 명나라도 영락제 시기 호한일통을 노리고 초원과 중원의 경계에 위치한 북경에 수도를 두었다는 해석이 있다. 물론 이후 황제들이 무리하게 몽골족 등 북방민족 치려다 토목의 변 등을 당하면서 개망신을 자초하기도 했지만. 그리고 결과적으론 명나라도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에 먹힌다.[33] 다만 이것만으로는 근거로 제시하기에 어렵다. 그렇게 따지면 조선도 과거제가 이상하게 돌아간 나라라고 말해야 한다. 왜냐하면 여기에서도 과거에 합격해봤자 진사나 생원 칭호만 받고 끝나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선의 경우는 워낙 과거 급제자가 많아서 수용 한계를 넘어섰기에 명예만 주고 돌려보낸 케이스가 대부분이다. 따라서 당나라처럼 관직 대부분을 관롱집단 귀족층의 세습으로 내주느라, 남은 짜투리 하급직이나 실속 없는 계륵을 과거 급제자에게 던져준 것과는 완전히 다르다.[34] 다만, 오늘날에도 범죄자의 강제노역 즉, 징역은 전세계 보편 사항이니 이걸 노예라고 함은 애매하다. 애초에 당시에도 이들을 노예라고 부르지 않고, 노비라 일컬었다. 근데 노비나 노예나 어감은 비슷..[35] 오-동진-유송-남제-양-진의 육조시대부터 수~당 육백 년 동안 상전벽해에 가까울 만큼 강남(중국) 개발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대부분의 균전이 정부의 행정력 투사가 용이한 북중국, 다시 말해 강북지역에 설치되어서 북부가 그 폐해를 크게 입었기 때문에 상쇄되었다.[36] 물론 그 사이에 황건적-군벌난립-삼국-위진-오호십육국의 개판이 있었으니 관대하게 이 시기를 빼면 600년이긴 하나, 그런식으로 따지면 안사의 난과 황소의 난, 오대십국으로 송나라도 할 말이 많다.[37] 그래도 수양제의 대운하와 해상실크로드로 인한 물류-상업의 발달로, 수당기 지지부진한 강남 농지개발과 달리 물류요지를 따라 강남의 도시는 발전했다.[38] 영국 국왕 역시 성문법대로만 하면 대헌장과 권리청원 및 권리장전에 명시된 금지 사항들을 제외하고 여전히 중세~절대왕정 시절 가졌던 왕권을 보유하고 있다. 따라서 명목상으로는 아직까지도 군대 통수할 수 있고 국회 해산할 수 있고 총리 지명할 수 있고 법률안 거부할 수 있다. 그렇지만 오랜 시간 동안 정착된 의회민주주의적 관습법에 따라 왕권을 반강제적으로 남발하지 않고 있다. 마찬가지로 송나라 천자의 정치적 역할 또한 신료들과의 묘한 타협에 의해 관습적으로 규정되어온 결과물이다.[39] 이게 대단한 이유는 당장에 수나라도 100만 대군을 진짜로 운용했다가 망했기 때문이다. 송의 경제가 매우 강력했으니 100만을 운영할 수 있었다. 물론 차이점이 있다면 수나라는 무리한 원정을 일삼던 군대인 반면 송은 대체로 수비적인 입장이었다.[40] 송나라만의 특징은 아니다. 유목민족들은 강력한 전투력으로 한족 국가나 중국 통일왕조, 한반도 왕조를 터는 일이 매우 빈번했다.[41] 당장 송나라 태조인 조광윤부터가 이런 방식으로 정권을 잡았다. 그리고 송나라 건국 초기에도 절도사가 반란을 일으킨 사례가 있었다.[42] 이에 반에 고려는 문신이 병법을 공부해야해서 무신정변전까지 군권은 문신이 가졌다[43] 다른 환관들과는 달리, 이헌을 따라 서북방을 자주 드나들었는데, 이후 청당(칭하이 지역)을 개척하고 서하, 강족 및 토번과의 전쟁을 주도하는 등 군사적인 능력이 뛰어났다.[44] 왕안석의 신법파였고 1082년 서하와의 접경 지역에 영락성을 쌓을 것을 주장한다. 그러나 병법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고 이듬해 서하군의 역공을 받아 난전 중 전사했다.[45] 다만 초용의 죄목이 군량 착복에 군수물자 횡령이라는 중죄이니 한기는 잘못이 없고 초용과 적청의 잘못이라는 지적도 있지만, 이는 기본적으로 핀트에 어긋나는 주장이다. 전근대의 중국은 엄격한 법치주의 국가도 아니었고, 과거에 세운 전공 등을 감안해서 처벌을 면하거나 경감하는 것도 보편적으로 인정되는 분위기였다. 한기 또한 법치주의적 관점에서 적청을 반박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한기의 말대로라면 '진사 급제한 호남아'는 똑같은 죄를 지어도 처벌을 면하거나 경감할 수 있다는 뜻이 된다. 설령 현대 법치주의적 관점을 적용해서 초용, 적청이 잘못했다 쳐도, 한기가 한 말은 '공로를 세워도 가방끈이 짧으면 유공자로 인정받을 수 없다'는 문인우월주의 및 무인경시사상이 내포된 막말이라고 볼 여지가 있다. 무신정변을 보면 알겠지만 이 역시도 무인에 대한 천대로 벌어진 일임을 감안해 보면 송나라판 무신정변이 일어나도 할 말이 없다.[46] 굳이 변명하자면 이때 투입된 병력은 그나마 전투력이라는 걸 갖고 있기라도 한 중앙군도, 변방수비군도 아닌 그냥 밭을 갈다가 끌려나온 민병들이기는 했다.[47] 다만 기관총이 등장하는 19세기 중엽 이전까지 대부분의 전투에서 기병은 보병보다 우위를 차지했다. 심지어 대포와 화약을 지닌 네덜란드 독립군 2만 5천 명이 불과 1200명의 스페인 기병대가 돌격하자 놀라서 도망치다 무려 8천~1만 명이 죽는 바람에 어처구니없이 패배했던 젬블루 전투(1578년)도 있었다. 이 젬블루 전투에서 승리한 스페인군의 사상자는 고작 20명에 불과했다#.[48] 송과 금 양국간의 전쟁 및 평화교섭을 기록한 책[49] 다만 이러한 점은 비단 북송 시절에만 그랬던 것이 아니라, 역대 중국 왕조들도 대부분 비슷했다. 그래서 명나라의 장군인 척계광이나 청나라의 장군인 증국번이 거느린 군대가 정예로 유명했던 것은 엄격한 군율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군대에는 순박한 농촌 청년들만 병사로 모집을 했고, 도시의 불량배나 범죄자들을 병사로 받지 않아서 군기가 엄정했기 때문이었다. 이는 근대 유럽, 특히 영국, 프랑스, 프로이센에서도 마찬가지로, 사병 지원자들 중에 범죄자의 비율이 높아(해군의 경우는 감형을 조건으로 끌어오는 경우도 있었다) 군기가 엄격했고 태형 등 체벌이 성행했다. 현대에도 나름 명예로운 경력으로 취급받는 미군이나 중국 인민해방군조차 신체는 건강할지언정 사회적 지위가 높다고 할 수 없는 청년들로 채워지고 있고 자위대는 그냥 설명이 필요하지 않은 수준이다.[50] 당장 송과 비슷하게 문관 우대 정책을 펼친 고려만 해도 결코 기병이 약한 나라는 아니었으나, 유목민족과 비교하면 당연히 상대평가에서 밀릴 수 밖에 없다 보니 여요전쟁처럼 상대 기병과의 야전은 최대한 피하고 산성에서 버티다 추격할 때 기병을 운용하는 전법을 주로 구사했다.[51] 사실 여진족은 완전한 유목민족이라고 보긴 좀 애매하긴 하다. 농사를 짓고 어업을 하는 정착 생활도 했기 때문. 심지어 이들은 해적질도 했었다. 굳이 분류하자면 半 유목 半 농경 민족 정도 된다. 물론 이러한 경제체제 덕분에 유목경험에서 나오는 강력한 기병 전력은 물론이고, 보병, 공성과 수성, 수군 전투까지 수행가능한 완전체 군대에 가까워진다. 여진인 1만명이 모이면 그 잠재력이 겉잡을 수 없이 커지니 절대 모이게 하지말라는 말이 나름의 이유는 있던 셈. 참고로 이 말은 농경민족도 아니고 역시나 유목민족으로서 한 전투력 했으며 여진족도 밑에 두었던 거란족에게서 나온 말이다.[52] 당시 서하와 여진에는 비단이 생산되지 않기에 비단은 고급 옷감이었다.[53] 군마와 농사용 말의 요구되는 신체 스팩 차이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또 있다. 바로 그 말을 타고 전장에 투입되어야 할 기병의 숙련도 문제다. 말은 단순히 등자 얹고 올라타면 기병이 되는게 절대 아니다. 기수의 기마술도 중요하고, 말 역시도 여러가지 종류의 스텝을 익혀야 한다. 그것도 수년 간 말이다. 그런 장기간의 훈련과 기수와 말의 교감이 이루어져야 완전한 기병 전력이 탄생하는 것으로 아예 승마가 일상 필수요소인 유목민족이 아닌 정주국가에게 기병은 양성에 시간과 비용이 상당히 요구되는 병종이다.[54] 비슷하게 스코틀랜드 왕국도 보병 중심이기에 강력한 기병을 보유한 잉글랜드 왕국에 맞서 싸우려고 장창병을 이용한 전술을 자주 사용했다.[55] 애당초 이런 대승했다고 선전을 한다는 것도 생각해야 하는게 선전이라는 건 보통 어떤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 하는건데 이는 곧 지극히 당연한 사실은 선전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즉, 보병이 기병을 이기는 건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실제로 기병은 기관총, 전투기, 전차, 철조망등이 모두 발명된 한국전쟁 시기까지도 현역으로 전장에 나섰으며 21세기에 벌어진 미국-아프간 전쟁에서도 쓰이는 등 아직까지도 전장에서 쓰이고 있다.[56] 연운 16주는 거란족의 요가 차지하였고, 하서주랑은 탕구트족의 서하가 차지했다.[57] 장애물의 중요성을 몸소 보여주는 사례가 명나라인데 명나라는 국가가 멸망할 때까지 산해관에 주둔한 군대로 청군이 중원에 들어오지 못하게 막아내는데 성공했다. 그 누르하치와 홍타이지조차도 산해관을 넘지 못했고 명나라가 이자성에게 멸망하고 산해관을 지키던 오삼계가 투항하고 나서야 청군은 산해관을 넘어 중원에 진입할 수 있었다. 즉, 장애물이 이렇게 중요한데 송나라 때는 석경당이라는 매국노 때문에 연운 16주를 잃어서 그 만리장성과 산해관이 없었던지라 보병만으로 도저히 요나 금의 기병을 막을 길이 없었다.[58] 통념(+중화제국 황제들의 허세)과는 달리 통일 중화제국일지라도 수십만의 병력을 수시로 일으키지는 못했다. 막대한 물자와 인구를 자랑하는 중국일지라도 수십만의 병력은 그들도 경제적, 정치적으로 최선을 다한 결과다.[59] 사실 자원이 한정되어 있으니 외침을 막으면 내란에, 내란을 막으면 외침에 취약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후한 말의 삼국시대야 중원 왕조의 압도적인 국력 덕분에 변방의 유목민족들이 침공할 엄두를 못내었고 삼국이 서로의 주력을 내전에 투입하면서 변방군으로 유목민족을 막기에 충분했다. 이시기 유목민족들은 답돈의 오환 통합, 선비족 출신 독발수기능의 난 등과 같이 중원을 위협하긴 했지만 어쨌든 중원 왕조한테 다 컷당하고 말았다.(특히 답돈은 아직 원씨 세력을 미쳐 토벌 못해서 힘이 풀상태가 아니었던, 즉 우리가 아는 위왕으로서의 모습이 아닌 지역 군웅이었던 조조에게 털렸다...) 그러나 삼국을 통일한 서진 시기가 되면 팔왕의 난으로 대표되는 초특급 내란에 시달리느라 외부 방어에 소홀해져 대오각성한 유목민족들에게 속수무책으로 털린 채 남쪽으로 밀려났다.[60] 후한~삼국시대의 경우 한 조정과 지역 군웅들의 유목민 견제, 포섭 정책도 있었지만 흉노 이후 오호의 흥기전까지 유목민족들이 정치적 공동체를 크게 성장시키지 못한 탓도 있었다.[61] 물론 명나라라는 외세의 지원도 있긴 했지만 그래도 조선군이 위에서 말한 사실을 기반으로 나름 일본군 저지에 성공했기에 명의 지원이 가능했던 것이기도 하다.[62] 사실 요나라 시절부터 송이 북방 민족에 시달렸다는 대중적인 인식과 달리 요는 200여년간 송의 영토를 정복한 역사가 거의 없다. 전연의 맹의 경우에도 내용에서 보듯 송의 황제가 형이고 요의 황제가 아우이듯 그렇게 굴욕적인 화친 조약 수준은 아니다. 사실 후대의 금나라, 원나라와 달리 요나라의 경우 연운 16주외에는 중국 영토를 점령하지 못하고 북방 초원지대만 차지하고 있었고 이 때문에 인구와 생산력 면에서 송나라에 절대 열세였다.[63] 물론 북송과 달리 남송의 경우 정통 왕조일지언정 통일 왕조로 보기는 어렵다.[64] 이미 저 멀리 동유럽, 중동 원정은 송 멸망 훨씬 이전인 1250년대에 거진 마무리되었음을 상기하면 코앞의 남송이 오래 버틴 게 대단한 것이다. 이러한 남송 원정에서의 국력 소진 및 늦은 통일은 단기적으로는 원의 일본, 베트남 원정 실패의 원인 중 하나이며 장기적으로는 원나라가 중국 통일 직후 기준으로 훗날의 청나라보다 훨씬 빨리 멸망한 원인 중 하나이기도 하다.[65] 이 때문에 연운 16주를 넘겨준 후진의 시조 석경당의 평가는 지금까지도 중국에서 매우 나쁘며 아예 그를 한간으로 간주하고 있다. 그나마 장안과 낙양은 수비에 유리한 지형이지만 북송의 수도 개봉은 말그대로 개활지 한복판이라 기병을 가진 대 유목민족 방어에 몹시 취약했다.[66] 오늘날 칭하이 호 일대로, 안사의 난 이래 토번국에 점령당했으나 당 선종 때 회복하였다. 그러나 장의조 사후 다시 토번에 점령당했다.[67] 1081년 이헌. 충악. 왕중정, 고준유, 유창조를 필두로 5로를 통해 서하를 정복하고자 했으나 지휘 체계가 통일되지 않고 군량 문제가 심각하여 실패했고 1083년에는 영락성을 신축하여 서하를 정복하고자 하였으나 서하군의 역공을 받아 실패했다.[68] 명나라를 직접적으로 멸망시킨 것은 이자성의 난이지만 숭정제 당시 명나라가 농민반란을 변변히 진압하지 못한 데에는 명청전쟁으로 인하여 주력 정예군과 유능한 지휘관들이 요동의 대청전선에 묶여있던 영향이 컸다. 즉 명나라에 최후의 일격을 가한 것이 여진족은 아니지만, 그 마지막 타격을 받고 쓰러지기 직전까지의 상황에 몰아넣은데에는 여진족의 영향이 막대했던 것. 명나라가 이자성의 난에 의해 멸망하는 그 순간까지 청나라는 산해관을 넘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자주 나오지만 산해관은 수도 북경에서 불과 300km 남짓밖에 떨어지지 않은 요동 방어선의 핵심이자 사실상의 최종 방어선이라, 만약 뚫린다면 그 자체가 사실상 국가 멸망 일보직전 상태 돌입이다. 즉, 돌파당하지는 않았더라도 지속적으로 산해관에 공격이 가해진다는것 자체가 명말의 위기상황을 보여주는 한 지표라는 것. 게다가 꼭 여진족의 예가 아니더라도 토목의 변과 같은 대 몽골 전선의 상황에서도 알 수 있듯, 한족 계열 통일왕조로써 꽤 강성한 편이었던 명나라 입장에서도 북방 유목민은 그리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69] 출처[70] 특히 여요전쟁 때 요나라의 침략을 당한 고려가 송나라에 군사적 지원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하다못해 고려는 송에 물자지원이라도 해달라고 요청했으나 송나라가 그것마저 거절했던 것이다. 당연히 고려에서는 이 일로 인해 송나라를 신뢰할 수 없는 국가로 보게 되었다. 나중에 송나라는 고려를 돕지 않은 대가를 제대로 치르는데, 금나라에 국토의 절반을 빼앗겨 남송으로 전락했을 때 고려에 지원을 요청했지만, 바로 거절당했다. 금이나 고려나 서로랑 전쟁을 피하고 싶었기 때문에 이해관계가 일치했다.[71] 당장 맹공 같은 사람이 반대했다.[72] 이 부분은 비슷하게 왕조치곤 개방적이었다고 평가받는 당나라에 비해서도 우위를 점한다. 당나라의 경우 반란을 걱정해 야간통금 등 생각보다 수도 장안성의 통제가 꽤 심했다. (다만 당의 통금은 당나라 후기로 갈수록 유명무실해진다.) 반면 송나라의 카이펑은 그러한 제약이 거의 없었고 덕분에 한밤중에도 시민들이 시장통에서 불야성을 이루었다.[73] 특히 명나라와 청나라는 말기까지도 잔혹한 고문과 형벌이 폐지되지 않고 그대로 실시되었다. 명나라를 본받기 좋아하던 조선조차 명나라의 잔혹한 형벌을 싫어하여 형벌만은 본받지 않고 웬만하면 잔혹한 혹형을 시행하지 않았다.[74] 다만 당나라도 나중에 가면 국력이 약화되면서 정복전쟁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75] 사실 송나라도 적국인 서하에 내란이 일어난 틈을 타서 서하를 정복하려 무려 31만 명의 대군을 보내 공격했었을 만큼, 정복 전쟁에 꽤나 적극적이었다. 다만 당나라보다 군사력이 약해서 그런 시도가 모두 실패했다는 것이 문제이지만. 링크.[76] 한반도의 경우 고려에서 조선으로 넘어오면서 유사한 현상이 발생한다.[77] 다만 명목상 40년이고 실제 교전이 있었던 시간은 오고타이 칸 시기에 6년(1235-1241), 몽케 칸 시기에 3년(1256-1259), 쿠빌라이 칸 시기에 12년(1267-1279) 이렇게 총합 20년 좌우였다. 게다가 교전이 없는 기간에 송나라는 따로 전쟁이 없어서 전력을 가다듬을 시간을 벌 수 있었지만 몽골은 그동안에도 서부 원정, 그리고 후계자 문제로 인한 내전 등을 벌여야 했다. 그런데도 기어코 남송까지 정벌한다.(...)[78] 물론 명나라도 암군들 때문에 과소평가받는 점이 있는데, 국력 자체는 상당했던 나라이다. 당장 16세기 후반 인구가 무려 1억 5천만 명을 돌파했을 정도였다.[79] 당장 조선의 용포와 관복은 명나라 용포와 관복의 영향을 많이 받아 상당히 비슷하게 생겼으며, 경국대전 역시 명나라의 대명률을 많이 참고했고, 군사면에서도 조선군은 임진왜란을 거쳐 원앙진 같은 명나라의 전법과 낭선, 당파 같은 명나라의 무기를 적극적으로 도입했다.[80] 고대 이집트에서 파라오라는 호칭이 원래는 '궁전에 계신 분'이라는 뜻으로 왕을 돌려말하던 용어였던 것과 비슷하다.[81] 초명은 광의(匡義)였으나 형의 이름을 피휘해 광의(光義)로 바꿨다가 즉위 후 경(炅)으로 고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