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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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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f1400><colcolor=#ffd400>
조선 제16대 국왕
인조 | 仁祖
파일:파주 장릉_능침(궁능유적본부)-min.jpg
장릉 능침
출생 1595년 12월 7일
(음력 선조 28년 11월 7일)
황해도 해주목 해주행궁[1]
(現 황해남도 해주시)
즉위 1623년 4월 13일 (27세)
(음력 광해군 15년/인조 1년 3월 14일)
한성부 경운궁 즉조당 정전
(現 서울특별시 중구 세종대로 99)
사망 1649년 6월 17일 (향년 53세)
(음력 인조 27년 5월 8일)
한성부 창덕궁 대조전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99)
능묘 장릉(長陵)[2]
재위기간 조선 제16대 국왕
1623년 4월 13일 ~ 1649년 6월 17일
(음력 인조 1년 3월 14일 ~ 인조 27년 5월 8일)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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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f1400><colcolor=#ffd400> 본관 전주 이씨[3]
종(倧)
부모 부왕 원종(정원군)[4]
모후 인헌왕후
형제자매 4남[5] 중 장남
배우자 인열왕후 (1610년 혼인 / 1636년 사망)
장렬왕후 (1639년 혼인)
후궁 귀인 조씨, 귀인 장씨, 숙의 나씨
숙의 박씨, 상궁 이씨, 궁인 이씨
자녀 6남[6] 1녀[7]
종교 유교 (성리학)
천윤(天胤) / 화백(和伯)
봉호 능양군(綾陽君)
전호 영사전(永思殿)
묘호 인조(仁祖)
존호 개천조운정기선덕
(開天肇運正紀宣德)
시호 조선: 헌문정무인명순효대왕
(憲文定武仁明純孝大王)
→ 헌문열무명숙순효대왕
(憲文烈武明肅純孝大王)
: 장목(莊穆)
}}}}}}}}}
파일:attachment/UploadedFiles/naver_com_20101219_131947.jpg
인조의 어필(御筆)

1. 개요2. 묘호 "인조"3. 생애4. 치세와 정책의 영향5. 평가6. 가계
6.1. 친가(전주 이씨)6.2. 조상6.3. 배우자/자녀6.4. 고모 정명공주와의 관계
7. 기타8. 인조가 등장한 대중매체9. 관련 문서10. 둘러보기

1. 개요

조선의 제16대 국왕.

중종반정에 이어 조선의 두 번째 반정인 인조반정으로 백부 광해군과 지지세력인 북인 일파를 대거 축출하여 왕위에 올랐다. 아버지는 선조와 후궁 인빈 김씨의 5남인 원종(정원군)이며, 어머니는 인헌왕후 구씨다.[8] 정원군의 장남으로, 능양군으로 책봉되었다.[9]

반정을 통한 인조의 집권은 실질적인 조선 제2왕조의 창건 및 조선 왕조의 중시조로 평가된다.[10] 조선 후기 300년 간 진행된 제도개혁의 논의는 인조 시대에 모두 시작되었으며, 왕통상으로도 인조 이후 즉위한 조선의 임금은 마지막 군주인 순종까지 모두 인조의 직계후손들이다. 혈통상으로 순종의 아버지 고종은 인조의 3남 인평대군의 직계 8대손이다.[11]

전술하듯 광해군은 물론 그 아들인 세자(폐세자 이지)까지 장성한 상황에서 능양군의 왕위 계승 순위는 거의 없다시피 했으나 쿠데타(정변)라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서 추대되어 왕이 되었다. 이에 상당수의 실무자와 중립세력들이 협력(혹은 최소한 방조)한 것이 특징적이다. 정권 안정성이 높은 조선사에서, 인조반정이 군주를 교체한 조선 최후의 정변이 된 것은 이런 배경 때문이었다.

처음으로 청나라에서 시호를 받은 임금이지만 조선 조정은 청나라에서 내린 시호를 받기만 하고 청나라와의 외교 이외에는 사용하지 않았다.[12]

2. 묘호 "인조"

묘호시법에서 덕을 지켜 업을 높였음을 일컫는 '열(烈)'에다가 나라에 큰 공이 있는 군주라는 이유에서 조(祖)를 붙여 열조(烈祖)로 이미 결정되어 있었으나,
"오대십국시대 남당의 임금 서지고가 이 호칭을 사용하였으므로 지금 대행(大行)[13]에게 이 글자를 쓰는 것은 합당하지 않을 듯하다고 하였습니다."
이라는 비판에 의해 수정되었다. 실록에서는 의논한 신하들 가운데 문제를 제기한 인물이 있어 갑론을박을 하며 재논의를 한 것으로 묘사되어 있으나, 실제로 묘호의 최종결재권은 임금이 가지고 있었으므로 결국 효종이 직접적으로 불만을 드러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또 아뢰기를,
"열조(烈祖) 두 글자는 《시경(詩經)》과 《서경(書經)》에서 칭한 바와 한소열(漢昭烈) 묘호의 자의(字義)를 취한 것으로 진실로 대행 대왕(大行大王)의 공덕(恭德)에 부합됩니다. 그러나 말하는 자들은 남당(南唐)이 참람(慘濫)한 묘호를 사용하여 국운(國運)을 재촉했기 때문에 지금 이 시호(諡號)를 쓸 수 없다고 합니다. 생각건대 '인(仁)'자가 대행 대왕(인조)의 묘호로 가장 합당합니다. 삼가 《통전(通典)》을 상고(祥考)하건대 역대 제왕의 시호에 부자(父子)가 호칭이 같은 이도 간혹 있었으니, 우리 나라 세종(世宗)과 세조(世祖)의 호칭도 어찌 이에서 근본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명나라 제도를 상고(祥考)하건대 이미 인조(仁祖)가 있는데 또 인종(仁宗)이 있었습니다. 근거할 만한 고금(古今)의 전례(典禮)가 이미 이와 같을뿐더러 주공(周公)의 군부(君父)와 같은 시호를 쓴다고 한 것이 더욱 후세의 본보기가 될 만하니, 이로써 결단하여 의논하건대 오늘의 묘호로는 이 '인(仁)'자를 버리고는 달리 쓸 글자가 없으니 '인(仁)' 자로 고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효종실록 1권, 효종 즉위년 5월 23일 신사 1번째기사
마지막 걸림돌은, 이미 인종(仁宗)이란 묘호가 있으므로 또다시 '인(仁)'자를 묘호로 올리는 문제였다. 하지만 이미 예종 때 묘호를 정하면서 세종이 있음에도 세조를 붙여준 선례가 있었고, 명나라에도 인종(홍희제)과 인조(주세진)를 같이 쓰는 좋은 핑계거리가 있었기에 묘호가 그대로 인조로 확정됐다.

"열조"는 시법(詩法)에서 모두 3가지 뜻으로 해석될 수 있는데, 신하들이 해석한 것은 "덕(德)을 지켜 업(業)을 높였다"이다. 실록에서는 한소열 유비의 사례를 봤을 때 열조란 묘호가 인조의 공덕(恭德)에 부합된다고 적었다.[14]

시법에서 '인(仁)'은 유학에서 추앙하는 최고/최상의 덕으로, "인조"라는 묘호는 성군 중의 성군에게나 주어질 수 있는 엄청, 매우 명예로운 묘호였다. 예를 들어 성종 사후 인종(仁宗)과 성종(成宗) 중 뭘 묘호로 정할 지 논쟁할 때, "제왕의 묘호는 '仁'만 한 것이 없으니 '成'이라는 글자로는 대행 대왕의 지극하신 덕을 다 표현할 수 없다."는 얘기까지 나올 정도로[15] 이후 양반 사대부들에게 세종에 버금가는 성군으로 받들어질 만큼 높은 평가를 받았지만, 결국 仁宗이 되지 못했다.[16]

그리고 '조(祖)'는 보통 재조[17]의 공과 같이 큰 공을 세운 임금에게 올리는 영예로운 묘호이다. 관례적으로 '조(祖)'는 왕가를 연 시조와 중시조로 대우받는 왕에게 올리는 묘호이며 종은 공덕과 무관하게 왕가라는 종가를 계승한 왕들에게 일괄적으로 쓰였다. 시법을 근거로 '조(祖)'와 '종(宗)'은 공이냐 덕이냐의 차이이지 어느 쪽이 좋고 나쁜 것은 아니라고도 하지만, 왕이기만 하면 받을 수 있는 종에 비해 더 까다로운 조건이 필요한 조를 더 높게 쳤던 것이 현실이었다.

그런데 조선시대에는 찬탈 등의 결격사유가 있는 부왕을 둔 후계자들이, 취약한 정통성과 도전받는 왕권을 포장하기 위해 거꾸로 아버지에게 '조'를 바치는 추숭사업을 강행했다. 왕이 된 어린 조카 단종에게 반란을 일으켜 왕위를 찬탈한 수양대군의 아들 예종은 아버지에게 '세조'를, 임란 내내 추태를 보여 왕가의 권위를 나락으로 떨어뜨린 하성군의 아들 광해군은 제 아버지에게 '선조'를, 세조의 경우처럼 쿠데타를 통해 집권했고 양란과 강빈 사사 등으로 이미지 깨나 까먹은 능양군의 아들 효종은 제 아버지에게 '인조'를 묘호로 선사하며 영구 결번 급 귀한 묘호를 남발했던 것이다. 강화도령 출신으로 정통성이 약했던 철종 역시 홍경래의 난세도정치로 얼룩진 치세를 보낸 양아버지 순종을 '순조'로 다시 추숭하였다.[18] 이러한 '조'들이 과연 세조의 전례를 들어 다른 왕들을 제치고 왕가의 중시조 대우를 받을 자격과 업적을 가진 왕들인가를 진지하게 생각해 보면...

결국 인조(仁祖)라는 묘호는 정말 글자 뜻으로만 보면 성군이자 명군에, 거의 요순급의 이상적인 초월 군주에게나 주어질 법한, 조선왕조를 넘어 2천년이 넘어가는 한국사 여러 왕조를 통틀어 현종이나 세종 정도만이 어울릴 만한 그 정도의 묘호라는 얘기다. 즉, 본 문서에서 다루는 능양군 이종과 같은 암군은 절대로 쓸 수 없고 써서도 안 되는 그런 수준의 영예로운 묘호다.[19] 이 때문인지 능양군에 대한 부정적 평가가 다대한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는, 현대 한국인 중 일부는 아예 능양군이라고 깎아내려서 부르기도 한다.

이외에 인조라는 묘호를 받은 사람은 명 태조 주원장의 아버지 주세진. 입지전적한 창건자의 아버지니 명예로서의 추숭으로 본다면 차라리 합리성이 있다.

3.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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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치세와 정책의 영향

조정은 병자호란으로 기존에 세웠던 집권 명분(정통성)이 약해지고, 삼전도의 굴욕으로 왕의 권위가 땅바닥에까지 떨어지자, 내부에서부터 정권이 붕괴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가졌고, 이에 기존에 상당히 느슨하게 적용되던 성리학적 종법 질서를 급격하게 강화해 내부의 불온한 움직임을 미연에 방지하려 했다. 때문에 성리학이 급격하게 교조화되었고, 수많은 여성들이 열녀(烈女)라는 이름 아래 목숨을 잃거나 평생 수절해야 했다. 환향녀를 비롯한 환속 문제는 인조도 딱하게 여겼는지 환속 금액 상한 제한과 이혼 금지로 막으려고 하긴 했으나, 대부분의 사대부들은 지키려 하지 않았다. 사실 인조 본인부터가 불탄 한양과 굶주린 백성들을 보고 눈물을 흘릴지언정 문제를 인식하고 바꿀 생각은 안하고 후안무치한 인간인지라... 설사 인조가 정말로 백성을 위하는 정책(민생근본 정책)을 시행하고자 하더라도 병자호란으로 인해 왕권이 맨틀을 뚫고 들어간 각자도생의 상황인지라, 사직하거나 반대하는 신하들 때문에 제대로 정책을 시행할 수도 없었다.

당시 인조의 왕권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예로 들자면, 삼전도의 굴욕 이후 한양으로 귀환하는 과정에서 신하들이 자기가 먼저 배를 타겠다고 인조를 밀치면서 탈 정도였다. 당연하지만, 정상적인 상황이었다면 임금을 밀치고 자기가 먼저 배를 탄다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대역죄였다. 추락한 왕권이 다시 회복된 것은 효종 - 현종기를 거치면서였다. 그러나 위의 예시처럼, 할 수 있는 선에서는 상식적인 정책을 시행하려는 시도는 했다.

이후 소현세자를 남 대하듯 철저히 박대하고, 급기야 아예 후계를 원손 석철이 아닌 봉림대군으로 바꿔버리면서 왕권의 정통성이 약해지게 된다. 당장 인조의 뒤를 이은 효종은 즉위 후에도 한동안 정통성 문제에 시달렸고, 이후로도 신하들에게 책 잡힐 행동은 하지 못했으며, 죽은 다음에도 예송논쟁에서 보듯 계속 시비에 시달렸다. 정통성 문제에서 그나마 자유로워진 현종도 클 대로 큰 산당을 제어하는 데 고생을 했고, 결국 숙종 대에 가서야 왕권이 다시 강력해졌다.

인조 초반에는 모문룡이 죽을 때까지 가도에 보낸 군량미가 매년 3만 석이며, 이마저도 모자라면 모문룡이 가도 주변 조선인들을 약탈한지라, 병자호란 시기까지 인조 정권에서 낭비한 세수는 26만 8천 7백여 석(= 약 5만 톤가량)으로, 당시 조선의 세수를 생각하면 터무니없는 양을 모문룡에게 갖다 바친 것이다. 다만 이 부분은 무조건 욕하긴 힘든 게, 모문룡이 명 조정을 뒷배경으로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때문인지, 병자호란 직후 조선이 제일 먼저 한 일이 바로 가도에 주둔한 명군(정규군이 아닌 모문룡 부역자들과 잔당)을 전부 쓸어버렸던 일이다. 이 때만큼은 조선도 악에 받혀 정말 쌓인게 많아서인지 확실하게 쓸어버렸다.

인조의 치적으로 꼽히는 것으로는 1. 갑술양전(甲戌量田)의 실시[20][21][22] 2. 기존 경대동의 문제점 파악[23]삼도대동사목(三道大同事目)[24]과 같은 추후 시행책 논의 3. 즉위 직후 강원도로 대동법(江原大同法) 확대[25] 그리고 4. 인조 말기 흉년기의 임시방편적 구휼제도를 시행 등이 있다. 그러나 왕권이 약하여 즉위 직후 시행한 삼도대동법(三道大同法) 시행 과정에서도 그는 소극적인 움직임을 보인 데다가 삼도대동법 자체도 적잖이 한계가 있었다.[26] 비록 곡창지대호남영남에 대동법을 시행해보았다는 점에서는 의미가 있었으나, 이 지역은 주요 곡창 지대여서 흉년에 따른 리스크가 훨씬 컸고, 지주들의 반발도 거세서 삼남 중에서도 특히 호남 산군 지역 지주층들이 격심하게 반발했다. 양전이 미비하여 토지파악이 제대로 되지 않았고, 여기에 방납업자 등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혔다. 삼도대동법의 시행 자체에도 문제가 있었던 탓에 결국 주도자였던 이원익 스스로 삼도대동법의 철폐를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다만 강원도에선 대동법 체제에 일반 백성들이 환영하고 반대 세도 크지 않아서 그대로 시행되었다.[27] 그렇기에 여론의 악평과는 달리 실제로는 통치 안정기 이후에는 조선의 경제력이 다시 회복하고 국력이 그럭저럭 신장되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역사적인 의의는 있다.

다만, 교과서상에는 '대동법을 시작했다'는 타이틀만 달고 있는 광해군에, 학자들 사이에선 '진정한 대동법의 시행'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효종(정확히는 이때 정국을 주도해 대동법을 정착시킨 김육)과 '대동법의 확대와 정착기'인 현종에 관심이 집중되는 상황. 조도사를 뜯어고친 것도 반정으로 싸늘해진 민심 수습을 위해 내세운 것이었으며, 양전사업을 실시했다지만 이건 사실 법적으로 20년마다 하도록 규정된 것이라 어차피 해야 했던 일이다. 이걸 하지 않았던 광해군이 지나치게 무책임한 괴짜였던 것이고, 인조는 그냥 적당한 수준으로 되돌렸더니 국고가 살아나는 평범한 왕 수준으로 볼 수 있다. 아무일도 없었던 평화기 한정으로는 유교 탈레반 수준의 북인, 대북들이 설쳐서 귀중한 평화시대의 국력증진 시간을 말아먹은 전대 북인정권보다는 낫다는 평가.

인조 대 새로 실시된 '영정법'(영정 과율법)은 비판이 있다는 기물이 있었는데, 영정법은 전세 징수에 있어 관행화된 지 오래였던 걸 법제화하며 정리한 것으로, 당연히 거기에 추가 징수 따위는 없었다. 무엇보다 원래 조세 수입의 대부분은 공납이었고, 영정법이 규정한 전세 따위는 공납과 군포, 나중에 등장하는 환곡 등에 비하면 원래부터 아무 것도 아니었으며, 나중에도 마찬가지 라는 것이다. 그걸 소작농에게는 별 소용이 없었다고 트집 잡고, 후대의 왕들이 다스리던 시기에 늘어난 대동법으로 징수된 대동미와 군포 수입을 보충하기 위한 결작 등 공납과 군포 대신 받는 쌀들을 영정법과 상관이 있는 것처럼 주장하는건 단순히 인조를 까기위한 기만적인 역사왜곡이라는 것이다.

사실 인조 때부터 회복세에 들어선 조선 경제는 경신대기근이라는 전지구적 대재앙이 발생하기 전 수십년간 잘 나갔다. '요즘 백성들이 사치를 과시할 수단으로 실생활에 불편할 정도로 옷자락이 길게 늘리고 아무리 열심히 절약을 강조해도 비싼 것만 소비하는 풍조가 줄어들지 않는다'고 툴툴거릴 정도. 그런데 이런 사치이야기는 그토록 까는 광해군 때나, 심지어 병자호란 직후나 경신대기근 도중에도 나오는 이야기들이라 헌강왕 이야기처럼 에누리해서 들어야 한다.

세종이 설치한 조선시대의 소방서인 '금화도감'을 폐지했다. 필요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사실 이후 별다른 기록이 나오지 않으며 인조가 즉위 초중반의 삽질 이후에는, 그래도 인조의 통치가 안정기에 접어든 이후부터 조선의 경제 회복이 워낙에 가파르게 이뤄진터라 별로 신경쓰는 사람이 없다.

인조 16년인 1638년전라도경상도에 우역(구제역)이 발생하였을때, 소를 수입해서라도 종자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여 비변사 낭청 성익을 몽골까지 보내 소 181마리를 사오게 하였다. 이때 수입한 소를 번식시키는데 성공하여 한반도에서 소의 멸종을 막을 수 있었다. 인조 16년 6월 9일

5.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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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가계

선조는 또 다른 후궁 공빈 김씨에게서 임해군광해군을 낳았고, 늦게 맞이한 계비 인목왕후에게서 정명공주영창대군을 낳았다. 따라서 임해군, 광해군, 영창대군은 인조의 삼촌, 정명공주는 인조의 고모가 된다.[28]

왕비는 두 명으로, 능양군(綾陽君) 시절부터 함께 지내온 인열왕후(仁烈王后)와, 그녀가 1635년 왕자[29]를 낳다가 산욕(産褥)으로 사망하고 3년 후인 1638년에 계비에 간택된 장렬왕후(莊烈王后)이다. 장렬왕후는 인조가 사망한 뒤에 대비로서 자의대비(慈懿大妃)로 불렸는데, 간택 당시 나이가 겨우 14세(1624년생)로, 명목상 자식인 효종(1619년생)보다도 5살 더 어렸다. 효종이 사망한 뒤 그녀의 입장을 두고 조선에서 그 유명한 정치 격론이 벌어지는데, 이것을 예송논쟁이라고 한다.

6.1. 친가(전주 이씨)

6.2. 조상

본인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인조
(仁祖)
<colbgcolor=#fff3e4,#331c00> 원종
(元宗)
<colbgcolor=#ffffe4,#323300> 선조
(宣祖)
덕흥대원군
(德興大院君)
하동부대부인 정씨
(河東府大夫人 鄭氏)
인빈 김씨
(仁嬪 金氏)
김한우
(金漢佑)
전주 이씨
(全州 李氏)
인헌왕후
(仁獻王后)
능안부원군 구사맹
(綾安府院君 具思孟)
구순
(具淳 또는 具諄)
전주 이씨
(全州 李氏)
평산부부인 신지향
(平山府夫人 申芝香)
신화국
(申華國)
파평 윤씨
(坡平 尹氏)

6.3. 배우자/자녀

6.4. 고모 정명공주와의 관계

할아버지 선조(宣祖)의 유일한 적녀 정명공주와는 고모-조카 관계이지만, 정명공주가 워낙에 늦둥이였던지라 나이는 조카인 인조가 8살 더 많다. MBC 드라마 "화정"에서는 인조와 정명공주는 서로 매우 대립하는 관계로 묘사된다. 하지만 실제 역사에서 광해군의 치세 때 인목왕후와 정명공주 모녀는 유폐되어있었기 때문에, 살벌한 광해군의 공안정국 치세 속에서는 애초에 인조와 만나는 것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게다가 인목왕후와 정명공주를 폐위하고 서궁에 유폐시킨 뒤 죽이려고까지 한 건 이이첨을 비롯한 대북파이며, 그런 대북파를 지원한 사람이 바로 광해군이였다. 계축옥사에서 정명공주의 동복 남동생인 영창대군을 역적의 수괴로 지목해 폐서인하여 유배시킨 뒤, 결국 유배지에서 비참하게 요절하게 만든 근본적인 원흉 역시 광해군이였다. 기록에는 이이첨의 소행으로 되어 있지만 광해군이 분위기 조성까지 다 해놓고, 슬쩍 빠지는 술수를 썼던만큼 사실상 광해군이 죽인 것이나 다름없다. 이와 대비되게 인조반정 이후 인목왕후와 정명공주 모녀를 바로 궁궐로 복위시키고, 막대한 전답을 내려준 사람이 바로 인조였다. 만약 광해군의 치세가 계속됐다면 정명공주 모녀는 그대로 계속 서궁에 갇혀 비참하게 살았을 것이다. 그만큼 정명공주에게 있어 인조는 조카이기 이전에 인생을 구원해 준 은인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둘이 결코 좋은 관계가 아니었던 건 사실이다. 인조는 즉위 이후에 할머니 인목왕후(소성대비)와 고모 정명공주를 후하게 대우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들 모녀를 지속적으로 감시했다. 그 원인은 인목왕후가 정치적 식견이나 처세에 능숙하지 못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여러모로 소시민적인 인물이었던 그녀는 유일하게 살아남은 딸 정명공주와 하나뿐인 사위 홍주원에게 줄 땅과 재물을 지속적으로 요구했고, 국왕만이 탈 수 있는 어구마를 사위에게 내려주며 인조의 권위를 슬슬 긁어대기 시작했다. 광해군 폐위의 명분 중 하나가 폐모살제이고 인조의 왕위를 인정해 준 사람으로 일단 숙여야 하는 입장이다보니, 겉으로는 늘 인목왕후를 우대했지만, 인조라고 그런 행동들이 기꺼울 리가 없었다. 결국 소성대비 사후에 정명공주에게 화살이 날아가게 된다.[33]

1632년(인조 10년)에 소성대비가 죽은 지 얼마 뒤, 인조는 가벼운 병에 걸렸다. 그런데 이때 "정명공주가 저주 굿으로 왕을 저주하고 있다"는 소문이 퍼졌고, 그날부터 정명공주에 대한 감시와 경계가 강화되었다. 옛날 사람이라 미신을 잘 믿었다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기물 몇 개 묻는 걸로 간단히 조작할 수 있는 굿과 저주는 왕실의 여인들을 역모에 엮어 넣을 때 가장 손쉽게 쓰이는 방법이다. 광해군 시기 대북이 칠서의 옥을 꾸몄을 때 그러했고, 뒷날 인조가 맏며느리 민회빈 강씨를 제거할 때도 그랬다.

인조는 자신의 병의 원인으로 정명공주로 지목했으나, 최명길 등은 "(인조)반정의 명분을 위해서라도 정명공주를 처벌해서 안 된다"고 주장해서 일단 정명공주는 위기를 넘겼다. 그러나 그녀는 인조가 죽을 때까지 감시를 받아야 했다. 그래서 더 이상 글을 쓰지 않고, 여염집 여인들처럼 바느질에만 몰두하며 숙이고 숨죽은 듯이 지냈다.

이 숨 막히는 감시는 1649년(인조 27년), 인조가 죽으면서 비로소 풀어졌으나 완전히 풀리지는 않았다. 인조의 아들 효종도 정명공주를 견제했고, 심지어 그녀의 궁녀를 죽이기까지 했다. 정명공주가 위협 없이 온전히 어른으로 대접 받은 것은 정통성으로는 누구도 비길 바가 없었던 숙종대에 이르러서 였다. 정명공주가 시집간 풍산 홍씨 가문은 홍봉한, 혜경궁 홍씨, 홍국영영조정조 때 권력의 실세가 된다.

7. 기타

  • 인조의 능은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에 위치한 장릉(長陵)이다. 인조의 아버지인 정원군의 능도 장릉(章陵)인데 경기도 김포시 풍무동에 있고 첫 왕비 인열왕후 한씨와 함께 묻힌 합장릉이며 한자가 다르니 주의할 것. 삼전도비 테러범이 다음 표적으로 타겟팅한 물망에 오른 곳들 중 하나이기도 한데 안장된 이후 조선 역대 왕 중 유일하게 엄청난 수난을 당했다.
    파일:Jangneung_Joseon_Royal_Tomb_Article_01.jpg
  • 실록에서는 탄강할 때 붉은 광채가 빛나고 이상한 향내가 진동하였으며 그 외모가 비범하고 오른쪽 넓적다리에 검은 점이 무수히 많았다고 한다. # 과연 제2왕조 창건자에 걸맞은 탄생 설화 분칠 재위 초반에는 옥체가 점점 수척해지고 용안이 검게 변하는 증상이 나타나자 신하들이 걱정하는 부분이 언급되는데 인조는 자기 자신은 아무런 질병이 없다고 발뺌한다. # 재위 후반에 들어서는 인조의 배가 크게 부푼 증상이 일어났다. # 실록에서 인조 외모 묘사에 대해 언급한 부분은 위 내용이 전부이며 재위 초반에 들어서 수척해지고 얼굴이 검게 변하는 증상이 나타났고 후반에 들어서는 배가 부푸는 증상까지 나타났었다는 점에서 외모가 많이 망가졌을 것으로 보인다.[34][35] 위에서 기록한 승정원일기의 기록으로 보건데 간장 건강이 몹시 나빴을 공산이 있다.
  • 야사에 따르면 우리 왕은 외모 밖에 볼게 없다 라면서 잘생긴 외모가 유일한 장점 등 백성들에게 뒷말이 떠돌았다는 것과 인조의 외모 유전자가 후대의 영향을 끼치면서 미의 기준이 바뀌었고 이로써 획기적인 미남이었다는 둥 또는 오랑캐들과 청나라 사신들이 인조 외모에 감탄했다는 일화가 떠돌고 있다. 다만 이 일화들은 모두 현대에 전해지는 출처 미상의 사실 무근으로 보인다. 실록에서는 1줄이라도 저런 내용에 관해서 언급된 내용을 전혀 찾아볼 수 없고 청나라 사서에서는 외모에 관해서 아예 언급조차 된 적도 없으며 여러 주요 야사책에서도 기록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위 내용들은 커뮤니티 등 미디어를 통해 네티즌들에 의해서 알려진 잘못된 정보들이다. 참고로 선조의 아들이자 인조의 아버지 원종은 당시에 외모가 뛰어난 것으로 유명했으며 인조와 달리 초상화가 남아있다.
  •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 중인 어필로 행서체로 적혀 있다. 대대로 필체가 반듯한 조선 왕가의 특질은 계승된 듯.[36] 다만 필체를 남기는 것 자체를 싫어해 상소에 대한 비답도 내시들에게 베끼게 하여 전달했다고 한다.
    파일:attachment/UploadedFiles/naver_com_20101219_131947.jpg
  • 서울특별시 송파구 오금동송파도서관에 세워진 일종의 미담 동상으로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피신할 때 인조를 업고 피신한 나무꾼 서흔남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서흔남은 실록에서도 등장하는 실존 인물로 대장장이나무꾼일을 하는 낮은 신분이었지만 포위된 상황에서 남한산성 외부의 근왕군과 연락하는 역할을 맡았고 그 공로로 양반이 되고 벼슬까지 제수받았다. 인조를 업고 직접 피신시켰다는 전설이 가장 유명하며 인조가 피난 당시 입던 곤룡포를 하사했다는 전설도 있다.
    파일:attachment/1171-A-07641_01.jpg 파일:조선 인조.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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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특별시 송파구 송파도서관의 서흔남 동상
  • 홍타이지는 조선 초 이성계를 따르던 아이신기오로 먼터무의 7대손이다, 먼터무는 이성계를 큰 어르신이라 부르며 고려말부터 조선 건국 때까지 그를 따랐으며 용비어천가에도 이성계를 따른 여진족 족장들 중 가장 첫 번째로 이름이 올려져 있다, 먼터무에게 큰 절을 받던 이성계와 홍타이지에게 머리를 박는 인조를 비교하면 참 아이러니하다.
  • 인조/평가 문서에서 알 수 있듯 조선 최악의 시기를 장식한 암군이라고 평가받는지라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도 온갖 부정적인 별명으로 불린다. '인조'가 아닌 '능양군'으로 불리는 것은 그나마 양반이고, '인좆'이라는 매우 과격한 별명이나 '런도못한조'[37]라고 불리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 중 런도못한조는 아예 이 문서로 리다이렉트가 걸려 있다.

8. 인조가 등장한 대중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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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이라는 사상 초유의 국치를 야기한 국왕이라는 불명예와 더불어 갖은 실정과 떨어지는 인간성까지 더하여 인조는 조선의 폭군으로 유명한 연산군과 할아버지인 선조와 더불어 대한민국 매체에서 부정적으로 묘사되는 편이다. 그래서인지 Why? 한국사 만화에서도 대부분 심술궂고 못된 얼굴을 지닌다.

9.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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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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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제15대
광해군
원종 흥안군
 
 
폐세자 이지 제16대
인조
 
 
 
제17대
효종
 
 
경안군 제18대
현종
복녕군
 
 
임창군 제19대
숙종
의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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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종
제21대
영조
안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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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대
정조 선황제
은언군 이병원
 
 
 
 
 
 
제23대
순조 숙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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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조 익황제 제25대
철종 장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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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대
헌종 성황제
제26대
고종 태황제
 
 
 
 
제27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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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례] 실제 혈통 기준 · 세로선(│): 부자 관계 · 가로선(─): 형제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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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당시는 왜란 도중에 급하게 피신 중이라 왕실 거처가 모두 황해도 해주목(海州)에 있었다. 그래서 이곳에서 정정옹주가 태어나기도 하였다.[2] 인조의 장릉과 더불어 장릉이란 명칭은 3곳으로, (1)경기도 파주시의 인조/인열왕후의 장릉(陵), (2)경기도 김포시원종/인헌왕후 장릉(陵) 그리고 (3)강원도 영월군의 단종의 장릉(陵)이 있다. 한자만 다르고 발음은 똑같으니 유의해서 확인할 것.[3] 시조 31세, 태조 10대손[4] 인조반정으로 왕위를 이은 인조는 반정에 대한 정통성과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선조의 왕통이 정원군을 거쳐 자신(인조)로 이어진다는 논리를 들어 정원군을 왕으로 추존했다. 하지만 이미 반정의 정당성이 확보된 상황이었으며, 정원군이 세자로 있던 적이 없었기에 왕으로의 추존은 부적절하다는 반대가 많았으나(실제 조선의 추존왕들 중 정원군은 유일하게 세자 경력이 없다.) 인조는 정원군 또한 선조의 아들이기에 충분히 가능하다는 논리로 추존을 강행했다.[5] 인조, 능풍군, 능원대군, 능창대군.[6] 소현세자, 효종, 인평대군, 용성대군, 숭선군, 낙선군.[7] 효명옹주.[8] 태어난 순서로만 보면 장남이자 적자는 인조이고 차남이자 서자는 능풍군이며 3남이자 적자는 능원대군 그리고 그 다음이 4남이자 적자인 능창대군이다.[9] 작호는 친어머니의 본관인 전라남도 화순군의 옛 고을인 '능주(綾州, 현 능주면 등 화순군 서남부)'에서 유래했다. 형제들도 역시 마찬가지.[10] 《모후의 반역》을 쓴 계승범 교수는 미국 박사 학위 논문으로 인조 반정의 직전 시대 광해군대의 폐모 논쟁을 다뤘다. 폐모와 그에 따른 인조의 정변이 조선사, 나아가 세계사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11] 일단 형식적인 법적양자 관계로 고종은 문조(효명세자)의 아들이니 전주 이씨 계보를 늘여 본다면야 법적으로는 효종의 후손이다. 순서는 효종→현종숙종영조→장조(사도세자)→정조순조문조고종 순이다.[12] 예시로 《조선왕조실록》의 표제를 살펴 보면 《선조실록》까지는 《태조실록》, 《태종실록》, 《세종실록》, 《문종실록》, 《세조실록》, 《예종실록》, 《성종실록》, 《선조실록》처럼 조선 왕의 묘호 뒤에 명의 시호를 같이 붙이는 방식으로 사용해 왔지만 《인조실록》부터는 일말의 자존심이 있던 건지 아니면 오랑캐, 청나라에 당한 치욕을 갚기 위한 건지 잘 모르겠지만, 청의 시호를 빼고 '인조대왕실록'과 같은 형식으로 조선 왕의 묘호만 제목에서 쓰게 된다.명나라의 시호를 받았지만 청나라에 완전히 복속한 후 숙종대에 와서야 묘호가 정식으로 주어진 《정종실록》도 앞표지에 '정종공정대왕실록'이라 안 쓰이고 '정종대왕실록'으로 쓰였으며, 역시 숙종대에 신원 복권된 《단종실록》도 앞표지에 '단종대왕실록'으로 기록되었다.[13] 승하 후 아직 시호(묘호)가 정해지지 않은 군주의 신주를 종묘 세실에 모시기 전에 임시로 불러 칭하는 호칭.[14] 여기서 유비가 한나라의 명맥을 이은 '계한'의 창시자였다는 점을 고려해보자. 묘호가 정해질 시점엔 사실 알 수 없는 것이었으나, 결과적으로 인조 역시 조선 제2왕조의 실질적 창건자가 되었으니 유비와 넘사벽 급 차이가 나는 업적과는 별도로 이 정도의 묘호를 얻을 수 있는 최소한의 명분은 있었다. "열조"까지는. 많은 왕조의 태조들이라고 무조건 그에 걸맞은 인성과 업적을 갖추는 건 아닌 것처럼 말이다.[15] 굳이 성종으로 하자면 大자를 붙여서 대성종(大成宗)으로 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다. #[16] 다만, 이때는 명나라에도 인종이라는 황제가 있었기 때문에 눈치를 봐서 성종으로 정해졌으며, 연산군이 자치통감에 나온 중국 송나라송인종을 들어 성종이라는 묘호가 더 낫다고 주장하기도 했다.[17] 여기서 말하는 재조는 나라를 다시 재건, 세운다는 뜻의 사자성어 재조지은을 말하는 것이다.[18] 영조-정조-문조(효명세자)의 경우 대한제국 창업에 따라 고종 태황제의 5대조를 대한제국의 5대 시조로 모시는 추숭사업 차원에서 진행된 것으로 남발과는 무관하다.[19] 현종은 태묘악장이나 기타 서적에 성조(聖祖) 열조(烈祖)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묘호에서 알 수 있듯이 업적과 덕이 정말 높았다. 왕이 되기 전 불우한 인생을 보냈고, 왕이 되어서는 인조와 같은, 아니 더 어려운 난관들을 겪었지만 모두 이겨내고 전성기의 토대를 닦았다. 실제로도 이미 당대에 요순에 비유되며 주변 국가 군주들에게도 인정 받을 정도로 훌륭한 군주였다. 세종은 4군 6진의 개척을 이유로 세(世)를 묘호로 하였다. 둘 다 왜 조가 아니라 종이었냐면 개국을 한 태조 외에 (예컨대 세조, 즉 광무제 유수처럼 재창업급 중흥군주가 아니면서) 조 자를 쓴 예가 이전까지 없었으므로.[20] 경상좌도 양전사(量田使) 신득연(申得淵)이 치계하였다. "본도의 평시 원장부에 올라 있는 전결은 16만 9천 5백 75결인데, 계묘년 양전 때에는 시기전(時起田)·잡탈전(雜頉田)을 합쳐서 6만 8천 5백 60결이었고, 금년에 새로 측량한 것은 진기전(陳起田)·잡탈전을 합쳐서 모두 15만 9천 5백 75결이며, 시기전은 10만 1천 4백여 결입니다." (인조 13년 2월 28일)[21] 전라좌도 양전사(量田使) 박황(朴潢)이 치계하였다. "신이 관장하고 있는 좌도 25개 고을의 타량(打量) 총수는 묵는 토지나 경작하는 토지를 모두 합쳐서 도합 12만 3천 2백 60결로서, 평상시의 총수에는 3만 7천 40여 결이 모자라고, 계묘년 양전 때의 총수보다는 5만 3천 2백 20여 결이 더 많은데, 여기에서 면세전 5천 결을 제하고 나면 조세를 받을 수 있는 실수(實數)는 7만 6천여 결입니다." (인조 13년 3월 7일)[22] 하삼도(下三道)의 전지를 다시 측량하였다. 전라좌도는 12만 4천 2백 62결 21부로 경작하고 있는 것은 8만 2천 5백 1결 28부 7속이고 그 나머지는 황폐된 전지이며, 전라우도는 21만 1천 43결 28부 3속으로 경작하고 있는 것은 11만 9천 9백 27결 92부 9속이고 그 나머지는 황폐된 전지이며, 경상좌도는 15만 9천 1백 80결 65부 3속으로 경작하고 있는 것은 10만 1천 8백 48결 82부 7속이고 그 나머지는 황폐된 전지이며, 경상우도는 14만 2천 5백 44결 71부로 경작하고 있는 것은 10만 5천 6백 76결 22부 7속이고 그 나머지는 황폐된 전지이며, 공청좌도(公淸左道)는 11만 7천 7백 34결 13부 3속으로 경작하고 있는 것은 5만 8천 7백 69결 1부 2속이고 그 나머지는 황폐된 전지이며, 공청우도는 14만 7백 26결 65부 2속으로, 경작하고 있는 것은 7만 2천 2백 39결 3부 6속이고 그 나머지는 황폐된 전지이다. (인조 13년 7월 24일)[23] 인조 2년 8월 29일[24] 인조 1년 9월 3일, 인조 1년 9월 23일, 인조 2년 1월 12일, 인조 2년 1월 21일, 인조 2년 3월 8일, 인조 2년 3월 8일[25] 인조 2년 12월 6일, 인조 2년 12월 17일, 인조 3년 1월 3일[26] 인조 2년 11월 2일, 인조 2년 11월 3일, 인조 3년 1월 13일[27] 인조 3년 2월 7일[28] 다만 선조와 인목왕후의 나이 차이가 하도 많아서(32년), 고모 정명공주와 삼촌 영창대군은 조카 능양군보다 더 어렸다. 그리고 명목상 할머니인 인목왕후는 능양군보다 고작 11살 위였다.[29] 이 왕자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다.[30] 인조의 3남 인평대군의 장남인 복녕군은 추후, 훗날에 즉위하는 고종의 혈통상 직계 조상(7대손)이다. 1849년 헌종의 죽음과 함께 정조계가, 1863년 철종의 죽음과 함께 효종계의 모든 왕통이 단절이 되었다. 고종이 즉위하기 전에 인평대군 6대손이자 복녕군의 5대손이었던 고종의 친할아버지 남연군 이채중/이구가 영조의 2남 사도세자의 서자인 은신군의 가계에 양자로 입적되면서 남연군의 후손은 왕위 계승권에 매우 가까워질 수 있었고, 철종 사후 당시 흥선군조대비사이의 밀약으로 다시 한번 흥선대원군의 2남 명복이 효종-정조계에 있던 문조(효명세자)의 아들로 양자 입적하면서 고종은 선왕이었던 철종과 무려 17촌이나 차이나는데도 여러 절차를 걸쳐서 즉위할 수 있게 된다.[31] 조귀인 무고사건으로 사사됨,[32] 인렬왕후의 미움을 받아 쫒겨난 뒤 구오의 첩이 됨.[33] 조선의 법도에서 인목왕후는 선조의 정실 계비이자 대비였고, 정명공주는 그녀의 딸로 선조의 유일한 적녀(嫡女)였다. 조선시대에 공주는 왕위계승권이 없긴 했지만 정명공주 역시 인조 반정 명분 중 한명이었기 때문에 인조로서는 그녀 역시 견제할 이유는 충분했다[34] 후대의 인물 영조같이 대놓고 건강관리를 하지 않는 이상, 정치판의 스트레스와 격무 등으로 인해 건강이 많이 상하고 그에 따라 외모도 망가지는 것은 현대에도 충분히 볼 수 있는 광경이다.[35] 언급된 내용으로 보면 전형적인 말기 간질환의 증상이다.[36] 영조의 경우는 필체가 파격적이라는 평가도 받는다.[37] 선조런조라 불리는 것에 빗댄 것. 선조는 왜군을 피해 도망치는데 성공이라도 했는데 인조는 청군을 상대로 도망도 못 쳤다는 의미다.[38] 선조 : 임진왜란, 인조 : 정묘호란-병자호란.[39] 선조 : 덕흥대원군, 인조 : 정원대원군.[40] 선조 : 인종-명종, 인조 : 광해군.[41] 선조는 공 과가 확실하게 나뉘지만, 인조는 과가 너무 커서 그나마 말년의 공도 묻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