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9 14:52:25

니키타 흐루쇼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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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에트 연방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2대 제1서기
소비에트 연방 제7대 장관회의 주석
니키타 흐루쇼프
Ники́та Хрущёв | Nikita Khrushchev
파일:니키타 흐루쇼프_컬러.jpg
<colcolor=#ffe400,#ffe300> 본명 니키타 세르게예비치 흐루쇼프
Ники́та Серге́евич Хрущёв
Nikita Sergeyevich Khrushchev
출생 1894년 4월 15일
러시아 제국 쿠르스크현 드미트리예프군 칼리놉카
(現 러시아 중앙 연방관구 쿠르스크주 호무톱카군 칼리놉카)
사망 1971년 9월 11일 (향년 77세)
소련 러시아 SFSR 모스크바
(現 러시아 중앙 연방관구 모스크바 연방시)
묘소 노보데비치 묘지
재임기간 제2대 제1서기
1953년 9월 14일 ~ 1964년 10월 14일
제7대 장관회의 주석
1958년 3월 27일 ~ 1964년 10월 14일
서명 파일:니키타 흐루쇼프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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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d0000><colcolor=#ffe400,#ffe300> 부모 아버지 세르게이 니카노로비치 흐루쇼프
어머니 크세니야 이바노브나 흐루쇼바
형제자매 여동생 이리나 흐루쇼바
배우자 예프로시니야 흐루쇼바[1] (사별)
니나 흐루쇼바[2] (재혼)
자녀 아들 레오니트,[3] 세르게이[4]
딸 나데즈다,[5] 율리야, 라다, 엘레나
학력 없음[6]
종교 러시아 정교회무종교 (무신론)
신장 160cm
소속 정당
[[소련 공산당|]]
주요 서훈 소비에트 연방 영웅
사회주의노력영웅 (3회)
노력적기훈장
레닌훈장 (7회)
수보로프 훈장 1, 2등급
카를 마르크스 훈장
쿠투조프 훈장 1등급
복무 노농적군
1918년 ~ 1921년
1939년 ~ 1945년
최종 계급 중장 (노농적군)
주요 참전 러시아 내전
독소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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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이름3. 생애4. 가족5. 여담6. 평가
6.1. 중국에서의 평가6.2. 북한에서의 평가6.3. 우크라이나에서의 평가6.4. 서방권에서의 평가6.5. 구(舊) 동구권에서의 평가6.6. 쿠바에서의 평가
7. 대중매체에서
7.1. 영화7.2. 게임7.3. 기타
8.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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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636307049013884238-Nikita-Khrushchev.webp
유엔에서 연설하는 흐루쇼프

소련정치인. 1953년부터 1964년까지 소비에트 연방 제3대 최고지도자를 지냈으며, 이오시프 스탈린 사후 소련 공산당 제1서기[7]소련 장관회의 주석직을 역임한 인물이다. 이후 레오니트 브레즈네프에 의해 실각하여 여생을 보내다 1971년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

스푸트니크 쇼크를 비롯하여 유리 가가린, 알렉세이 레오노프 등으로 대표되는, 미국과의 우주 경쟁에 있어서 소련전성기를 장식한 인물이다.

2. 이름

영어권에서 키릴 문자 표기인 Хрущёв를 라틴 문자 Khrushchev로 전사한 표기가 한국에 전해지면서 키릴 문자를 사용하는 러시아어의 발음과 동떨어진 '크루시체프(크루슈체프)'로 널리 알려졌다.[8] 냉전시기 러시아통이 전무했던 대한민국에서는 일본어 표기인 '후루시초후(フルシチョフ)'의 영향으로 '흐루시초프'라는 표기가 사용되기도 하였다. 특히 영문번역일 경우에는 'Khrushchev'의 영어 발음 /ˈkrʊʃtʃɛf/에서 비롯된 '크루시체프'로 표기되기도 하였다.

영어권 출판물에서 주로 쓰이는 러시아어의 라틴 문자 전사방식인 ALA-LC 방식과 BGN/PCGN 방식에서는 일괄적으로 키릴 문자 щ에 대해서 'shch'로 옮겨적기 때문에, 이를 답습해서 일본어에서는 '후루시초후(フルシチョフ)', 한국어에서는 '크루시체프' 내지 '흐루시초프'로 쓰게 된 것이다. 국립국어원러시아어 표기법 상에서 щ는 '시'로 표기하되, 뒤따르는 모음과 결합할 때에는 합쳐서 한 음절로 적는다. 이에 따라 Хрущёв([xrʊˈɕːɵf])는 '흐루쇼프'로 표기된다.

3. 생애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니키타 흐루쇼프/생애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4. 가족

결혼을 세 번 했다. 첫번째 부인인 예프로시니야 피사레바(? ~ 1920)는 흐루쇼프의 동향 마을의 여성으로 20세가 되던 해인 1914년 결혼했으나 1차 대전 이후 기근과 티푸스가 유행할 때 요절했다. 예프로시니야와는 1녀(율리아) 1남(레오니트)을 낳았는데, 레오니트는 2차 대전 당시 소련군 파일럿으로 참전했다가 전사했다. 레오니트의 딸(율리아 흐루쇼바, 1940 ~ 2017)은 흐루쇼프가 키웠으며, 기자로 일했다.

두번째 부인은 혼인신고 없는 사실혼 관계였으며, 성도 알려지지 않았는데 곧 헤어졌다고 한다.

세번째 부인은 니나 쿠하르추크(1900 ~ 1984)이며, 현재 폴란드령에서 태어난 서부 우크라이나인이었다. 학창시절부터 러시아어와 우크라이나어는 물론, 영어, 프랑스어, 폴란드어 등의 5개 국어를 구사할 정도로 매우 지적이었으며, 공산주의에 경도되었기 때문에 볼셰비키에서 우수요원으로 선발해서 모스크바에서 교육받았다. 1922년, 니나는 도네츠크에서 당시 광산책임자로 있던 흐루쇼프를 만났고, 그때부터 사실혼에 들어갔다. 그리하여 싱글인 흐루쇼프의 두 자녀를 맡아 키웠을 뿐만 아니라, 다시 1남 2녀를 낳았다. 혼인신고는 되어 있지 않았지만, 모두는 그녀를 흐루쇼프의 부인으로 인식했으며, 흐루쇼프가 최고권력자로 등극한 다음에도 퍼스트 레이디로 활동했다. 1965년 흐루쇼프가 하야하고 나서야 혼인신고를 했다. 사망 이후에는 흐루쇼프와 합장되었다.

니나가 낳은 흐루쇼프의 차녀인 라다(1929 ~ 2016)는 과학저널 <나우카 이 지즈니>(과학과 생명) 편집장으로 일했다. 이 잡지는 소련-러시아 최고의 과학잡지였다.

차남인 세르게이(1935 ~ 2020)는 과학자로 모스크바 전력공학원에서 전기공학을 전공하고 소련의 로켓-우주개발 연구에 종사했다. 공학에 재능이 있었는지, 20대에 로켓 대가인 블라디미르 첼로메이의 아래서 일하며 함께 레닌상을 수상하기도 했고, 브레즈네프 시대에도 계속 승진하여 소련의 과학계통에서 고위직을 역임했다. 이후 1991년 소련이 붕괴하자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 대학에서 국제정치학을 강의했으며, 미국 시민으로 귀화러시아계 미국인이 되었다. 그러나 2020년 권총으로 자살했다.

증손녀인 니나 흐루쇼바는 뉴욕 시 뉴스쿨의 국제문제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5. 여담

  • 은둔생활 후 회고록 작성에 착수한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회고록을 위한 구술녹음자료[9]를 만들었는데 모종의 사정으로 복사본이 유출돼서 서방에 흘러들어가게 된다. KGB에서는 녹취자료를 관리 중인 흐루쇼프의 아들에게 압력을 가해서 그 원본을 입수, 보관하게 되고 이 원본은 소련 붕괴 전후에 공개된다. 서방에서 유출된 회고록이 출판되자 소련 정부에서는 공식적으로 그것은 CIA의 작품임을 언명하고 흐루쇼프도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서 회고록의 내용을 부정한다. 사실 이 라디오 방송 출연은 실각 후 그가 유일하게 공식 석상에 나온 때다. 당연히 회고록이 조작이라는 것 자체가 강요된 거짓말이다. 하지만 CIA가 여러모로 개입한 것은 맞으며, 특히, 번역과정에서 의도적인 오역으로 소련 체제의 명예를 실추시키려고 한 사실도 있다. 여하튼 자세한 내막을 알 수 없었던 서방에서는 흐루쇼프 회고록의 진위 여부를 두고 대단한 논란이 벌어졌으며 1971년에 한국에 번역된 흐루쇼프 회고록[10]은 역자 서문에서 이 부분을 짚고 시작하고 있다. 흐루쇼프 회고록은 격동의 소련 현대사의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특히 그가 겪은 스탈린 시대의 불합리성 및 높으신 분들에 대한 비판은 당시로서도 충격적인 내용이었으며,[11] 쿠바 미사일 위기 등의 사건에서 소련이 보인 반응에 대한 훌륭한 연구 자료로 평가받는다. 특히 주목할 것은 당시에도 논쟁 중이던 한국 전쟁의 기원에 대해서 김일성이 스탈린을 방문해서 남침에 대한 강력한 의지와 확답을 받았다는 증언인데, 종래의 내전설, 남침 유도설, 소련 명령설[12]을 완전히 부정하는 자료였다.
파일:1959_07_Nixon_and_khrushchev.jpg
1959년 7월 리처드 닉슨 부통령과 니키타 흐루쇼프 제1서기
  • 옥수수와 관련된 일화가 많다.[13] 본인이 공산진영 지도자답지 않게 팝콘도 즐겨 먹는 등 옥수수를 좋아했으며 1959년 방미 시에 본 아이오와 주의 옥수수 대농장에 감명을 받았다. 하지만 흐루쇼프 시절에 그렇게 보급을 하려고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소련의 영역에서 몰도바 빼고는 옥수수는 보급되지 못했다.[14] 2020년대 기준으로는 전 세계 옥수수 수출의 19%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에서 이루어지고 있지만 기존에 심던 밀이나 해바라기씨만큼은 아니다. 옥수수는 어차피 국제 시장에서는 브라질산 혹은 미국산 옥수수가 원체 저렴한 가격에 유통되기 때문에 심어도 남는 게 없기 때문이다. 동유럽 및 중앙아시아 국가들 입장에서는 옥수수보다는 밀이나 해바라기, 메밀, 목화 등을 재배하는 게 훨씬 남는 장사다. 우크라이나가 세계 옥수수 생산량의 3.22%, 러시아는 그보다도 적을 정도로 다른 작물에 비해서 생산비율이 적다.
  • "소련에서 어떤 사람이 길거리에서 '흐루쇼프는 바보다!'를 외치다가 체포돼서 징역 23년형을 선고받았는데 서기장 모독죄로 3년에, 국가 기밀 누설죄로 20년을 더한 것이라더라"는 농담이 한때 미국에서 돌았는데, 이 농담을 만든 사람이 '흐루쇼프' 본인이라는 이야기가 있다.[15][16]
  • 흐루쇼프와 관련되어 돌던 농담이 있다. 흐루쇼프가 협동농장을 찾았다. 농장에 들어가자 돼지들이 "흐루..흐루.."거리며 울고 있었다. 이를 본 흐루쇼프가 말했다. "돼지들이 발음을 똑바로 할 수 있도록 교육을 잘 시키시오"[17]
  • 익스플로러 1호를 보고 고작 5kg라는걸 알고 작은 오렌지만 하군!하고 놀렸다. 참고로 저 말은 미국을 놀려먹는 의도였다.
  • 펩시를 세계 굴지의 음료회사로 만든 주역(?)이기도 하다. 1959년 모스크바 엑스포 당시 미국에서 펩시콜라 담당자도 소련으로 왔는데 펩시콜라 담당자가 느닷없이 흐루쇼프에게 콜라를 권하자 흐루쇼프는 기꺼이 받아마셨고, 닉슨과 같이 건배도 했다. 그리고 흐루쇼프가 기꺼이 콜라를 받아마신 사진이 세계 각 언론을 통해 전파되면서 펩시콜라의 판매량은 급속하게 늘어나 세계적인 회사로 발돋움하게 되고, 브레즈네프 시기에 펩시가 소련에 진출하면서 1986년에 코카콜라가 소련에 진출하기 이전까지 소련의 콜라시장을 독점하면서 막대한 이득을 보기도 하였다.
  • 리처드 닉슨 대통령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 휘하에서 부통령으로 재직하던 시절인 1959년 유명한 이른바 '주방 논쟁'(kitchen debate)을 벌이기도 했다. "당신들을 묻어버리겠다"라는 발언으로도 화제가 되었다.
  • "정치인들이란 다 똑같다. 개울도 없는데 다리를 놔주겠다고 공약을 하니 말이다."라는 뼈아픈 일침을 남기기도 했다.
  • 1960년대 흐루쇼프를 취재하던 이집트 기자 무함마드 하이칼[18]시가를 피우자 흐루쇼프는 시가를 빼앗아 재떨이에 문질러 꺼버렸다. 이에 기자가 의문을 표하자 흐루쇼프는 "이건 자본주의의 상징이오. 당신은 나세르의 친구이니 시가를 피울 수 없소"라고 강하게 호통을 쳤다고 한다. 몇 년이 지나 쿠바 혁명이 일어난 후 하이칼이 다시 흐루쇼프와 만나게 되었는데, 이번엔 흐루쇼프가 웃으면서 하이칼에게 시가 한 상자를 선물로 주었다. 하이칼이 놀라서 "놀랍습니다, 각하. 지난번 저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십니까?"라고 하자 흐루쇼프가 "물론이오. 그러나 카스트로 동지가 혁명을 이룩한 이후로 이 시가는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시가가 되었다오."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19]
  • 서적 "냉전의 역사"에 따르면 마오쩌둥과 회담 중 "베를린은 서방의 아킬레스건이오. 그것은 '물집이 생겨 통증을 주는, 유럽에 놓인 미국의 발'이었소." 및 베를린은 서방의 고환이다. 서방세계가 아파서 소리지르게 하고 싶을 때마다 나는 베를린을 꽉 움켜쥔다.라는 발언을 했다고 한다.
  • 스탈린 사후 국제혁명의 노선 문제와 당 지도자에 대한 개인숭배 문제의 입장 차이로 중국 공산당과 소련 공산당 사이에서 분쟁이 벌어졌을 때 이 갈등을 봉합하고 형제 사회주의 국가의 연대와 우애를 유지하기 위한 회담이 모스크바에서 열렸다. 이때 중국대표로 회담에 참여한 사람은 저우언라이였다. 한참 동안 격렬한 논쟁을 벌어졌지만 양국의 의견 차이는 좁혀지지 않았고, 결국 열받은 흐루쇼프는 저우언라이에게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부르주아 지식인 계급 출신인 당신이 노동자 계급 출신인 나에게 그렇게 말할 수는 없소!" 하지만 저우언라이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유들유들하게 대꾸했다. "물론, 우리 두 사람은 모두 심각한 계급적 문제를 가지고 있지요. 자신의 출신계급을 배반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도 회담이 끝난 후,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서 흐루쇼프는 손님인 저우언라이에게 행렬의 선두 자리를 양보했고, 서겠느냐는 저우언라이의 사양에 대해 "당신을 내 뒤에 두면 그 지팡이로 내 머리를 후려칠까봐 무섭소."라고 대답함으로써 복수했다.
  • 한 번 꽂힌 유머는 주변 사람들이 질리도록 반복하는 습관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 중 하나가 아데나워에 관한 농담이었다고 한다. 그는 독일의 문제는 아데나워의 알몸으로 표현이 가능하다고 했는데, 그 이유는 뒤쪽은 좌우로 갈라져 있고, 앞쪽은 못 일어서기 때문이라고. 흐루쇼프 치하만 해도 서독은 전쟁의 참화로 개발살이 났기 때문에 했던 말이다.
  • 생전에 소련에 대한 비판을 거침없이 쏟아내 사이가 좋지 않았던 시인 예브게니 옙투셴코에게 1971년 죽기 일주일 전 본인이 먼저 전화를 걸어 사저로 불러서 "나는 당신이 옳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랬기 때문에 당신을 탄압할 수 밖에 없었다. 당신은 운이 좋은 사람이다. 시인이라서 진실을 말할 수 있었다. 그런데 나는 정치가였다. 정치가라는 것이 얼마나 역겨운 직업인지 당신은 모를 거다. 정치가는 쫓겨나지 않으려고, 그저 소리지르는 수밖에 없는 자리다"라며 옙투셴코에 대한 탄압을 사과했고, 옙투셴코는 흐루쇼프의 장례식에 참석하기도 했다.
  • 닉슨과 통화를 하면서 "쿠지카의 어머니를 보여주겠다(Показать кузькину мать)"[20]라고 엄포를 여러 번 놓았는데, 미국 측에서 "쿠지마와 그 어머니가 대체 어떤 인간들이기에 그걸 보여주겠다는 건가"하고 어리둥절했다는 이색 에피소드가 있다.[21][22] 이 말은 "혼쭐을 내 주겠다(teach someone a lesson)"라는 러시아어 숙어인데 당시 미국에 이런 숙어를 이해할 정도로 러시아어를 잘 하는 사람이 많이 없었기에 일어난 촌극이었다.
  • 1970년 12월, 에드거 스노와 다시 만난 마오쩌둥은 그를 배웅하면서 "화상타산 무발무천(和尙打傘 無髮無天)"이라고 하였으나, 중국계 미국인 2세였던 통역가 낸시 탕은 그 뜻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마오쩌둥이 "자신을 비가 새는 우산을 쓰고 다니는 외로운 스님이라고 생각한다"고 직역해버렸지만, 사실 마오쩌둥이 하고 싶었던 말은 자신은 인간의 법이든 하늘의 법칙이든 구애받지 않고 살아왔다고 한 것이었다. 또한 1995년 11월 당시 일본 총무청 장관이 일제 강점기를 미화하는 망언을 하자 당시 대통령이었던 김영삼이 "일본 놈들의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겠다!"며 화를 냈는데 이 때 일본 내 웬만한 지한파나 한국통들도 '버르장머리'란 단어를 해석하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 1959년 미국 방문 당시 안전상의 이유로 디즈니랜드 방문이 거절되자 TV에서 대놓고 난 디즈니랜드에 가고 싶은데 왜 못 가느냐며 떼를 쓴 적이 있다. 디즈니랜드는 당시 기준 불과 몇 년 전인 1955년에 개장되었으므로, 꽤나 호기심을 자극했던 모양이다.
  • 중국을 방문하였을 때 달라이 라마 14세와 만난 적도 있는데, 달라이 라마는 나중에 오리아나 팔라치와의 인터뷰에서 흐루쇼프는 말하는 것도 행동하는 것도 마치 돼지같았지만 똑똑했다면서 저우언라이같은 인간과는 친구가 될 수 없지만 흐루쇼프와는 친구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조금 더 긍정적으로 평가했다.[23]
파일:5bbc720a15e9f9796d67a9fe.jpg
  • UN 회의장에서 연설할 때 구두를 벗어 연단을 치면서 연설했다는 사진이 있으나, 나중에 당시의 사진을 분석해 본 결과 흐루쇼프는 양쪽 발 모두 구두를 신고 있었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합성 사진이었음이 드러났다.[24] 하지만 사건 자체는 일어났다고 하며, 필리핀의 UN 대변인인 로렌조 스믈로그가 소련을 비방하는 연설을 하자 그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구두를 벗어 자신이 앉아있던 책상을 내려찍었다고 한다. 다만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어서 소리나 사진자료 등은 남아있지 않으며, 정확히 어느 타이밍에 일어났는지도 증언이 엇갈리고 있다. 우리 상식에서는 납득이 안 되는 괴상한 행동이지만, 러시아 일부 지역에서는 흔히 사용하는 제스처라는 의견도 있다. 소수의견이지만, 미리 구두 한짝 준비해뒀다는 설도 있다. 사실 과도한 흥분이나 제스처를 미리 준비해두는 경우는 흔하다.
파일:external/img.hani.co.kr/117911124965_20070515.jpg
  • 한창 잘 나가던 때의 흐루쇼프. 관료들끼리 우샨카에 눈을 담으며 놀다가 찍힌 사진이다.

6. 평가

"그는 스탈린이 가장 신뢰한 졸개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의 팔꿈치까지 피를 묻히며 충성할 정도로. 그럼에도 그는 스탈린주의, 소련 시스템, 그리고 세계 공산주의 운동에 회복이 불가능한 치명상을 입혔다. 그는 헝가리 혁명을 잔인하게 진압했다. 그럼에도 그는 강제수용소 문을 열어 수백만 명을 풀어주었고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의 출판을 허가했다. 그는 베를린 장벽을 쌓아올리고 쿠바에 미사일을 배치했지만 소련의 재래식 병력을 일방적으로 감축했으며, 미국과의 화해 시대를 주도적으로 열었다. 그는 잔인하고, 독선적이었으며, 무자비하였지만, 너그러웠고 대중적이었으며 용서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뉴욕 타임스에 실린 레몽 아롱의 평가.
스탈린주의자인 동시에 반(反) 스탈린주의자였고, 공산주의자인 동시에 냉소주의자이었고, 자화자찬하는 떠벌이인 동시에 신경질적인 박애주의자였고, 트러블메이커인 동시에 피스메이커였고, 믿음직한 동료인 동시에 압제적인 꼰대였고, 대정치인인 동시에 무식한 정치꾼이었다.
로버트 서비스, 영국의 역사학자

흐루쇼프가 남긴 말들 중 "내가 한 일들 중 의미있는 일이 있다면, 내가 사형당하지 않고 그저 유배되게 소련을 변화시킨 일이다"라는 말이 있다. 그는 탈(脫) 스탈린화 정책을 펼쳤고, 재임 기간 내내 수많은 유머러스하거나 탈 권위적인 일화를 다수 남김으로써 소련을 말 한번 잘못했거나 태업했다[25]하면 굴라크로 끌려가거나 시베리아에서 강제노동을 하면서 고생을 해야 하는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사회 분위기를 지닌 나라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분위기를 지닌 국가로 변화시켰다. 또한 스탈린 시절 누명을 쓰고 처벌받은 사람들을 석방하거나 복권시켰다.

본인도 물론 독재자라는 평가지만, 적어도 소련을 전체주의 국가로 분류하던 서방 학계의 정의에 혼란을 줄 정도로 사회 억압을 풀고 광신적인 지도자 숭배를 완화했으며 피의 숙청이 난무하던 정치 문화를 온건화했고 모든 잉여생산물을 철저히 수탈해 공업화에만 쏟아붓던 스탈린 식 경제 정책을 완화, 민생 경제를 향상시킨 업적을 이뤘다. 결국 스탈린은 군사력과 경제개발계획에만 집중하여 국가적인 국력 증대에만 몰두한 반면에 흐루쇼프는 경제성장을 통한 민생에 더 신경쓴 것이다.

흐루쇼프가 시행했던 정책 중 상당수는 브레즈네프 시기에도 폐지되지 않고 시행되었고, 스탈린 시대에는 소련이 성장을 하는 과정에서도 인민들이 여전히 궁핍한 삶을 면치 못했는데 나름대로의 자유를 주면서도 생활 수준을 크게 향상했다는 점은 높게 평가할 만하며, 이런 점에 있어 흐루쇼프가 소련에 남긴 유산은 크다.

피가 피를 부르던 소련 정치를 순화한 인물이기도 했다. 스탈린 시절만 해도 권력 투쟁에서 패한 경우는 대부분 처형되었는데, 흐루쇼프는 베리야를 제외한[26] 다른 정적들(말렌코프, 몰로토프, 카가노비치 등)을 당에서 추방만 했을 뿐, 처형이나 감금 같은 물리적인 탄압을 가하지는 않았다. 정적들은 비록 권력을 잃고 야인이 되었으나, 모스크바에서 고액을 받는 연금생활자로 지내거나 혹은 지방의 한적한 기관으로 좌천되었을 뿐이었다. 이런 방침은 후임 서기장인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시절에 와서도 마찬가지였고, 흐루쇼프 자신도 그 길을 따라 야인이 된 후에도 고액 연금수령자로서 수혜를 입었다.[27]

스탈린을 격렬하게 비판해서 스탈린 체제의 억압성을 수정하려 한 것이 높게 평가받는데, 이것이 그의 권력 기반을 약화시켜 실각하게 되는 단초가 된 것은 아이러니한 부분. 흐루쇼프의 시기에 교육을 받은 세대는 나중에 글라스노스트/페레스트로이카(개혁-개방 정책)의 주축이 되었다. 대표적으로 미하일 고르바초프.

현대의 러시아에서는 평가가 엇갈리는 편으로, 긍정과 부정이 거의 비슷한 비율로 평가가 접전을 이룬다. 러시아 민족주의자들은 크림반도를 우크라이나에 넘겨주었다는 점 때문에 역적이라 비난하고 아들인 세르게이 흐루쇼프를 낙하산으로 공업 관리직에 앉히며 혈연주의와 노멘클라투라의 출연을 가속화했다는 비판과 정교회에 유화정책을 펼친 스탈린이나 브레즈네프에 비해 러시아 정교회를 탄압한 것을 안좋게 본다. 그러나 고르바초프는 개혁개방 정책을 폈다가 결국 소련해체와 경제파국으로 이어져서 러시아 현지에서의 평가가 매우 나쁘지만, 흐루쇼프는 농업정책만 빼면 경제정책을 잘 펼쳐 빈곤이 퇴치되어 생활수준이 크게 올랐고, 스탈린 시절의 억압적인 정책을 폐기하면서도 우주진출 등 소련의 위상을 올리는 업적을 남긴 것이 긍정적으로 평가받는다. 리버럴한 러시아인들은 그가 스탈린주의적 통치를 끝장낸 공을 인정하는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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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중국에서의 평가

처음엔 마오쩌둥도 그의 1957년 자유화 정책을 좋게 보아서 백화제방 백가쟁명 운동을 펼친다. 이것은 흐루쇼프의 자유화를 모방하여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운동이 마오쩌둥 까지 비판하는데 이르자 마오쩌둥은 이를 바로 취소하고 반우파투쟁을 벌여 자신에 대한 비판자들을 탄압하기 시작한다. 결과적 으로 스탈린 격하 운동을 벌인 탓에 본의 아니게 중국공산당에서의 평가가 나쁘며 이런 탓에 중소결렬이라는 결과가 나왔다고 비판하고 있다. 이는 마오쩌둥 사후 덩샤오핑이 집권한 후에도 유지되었는데, 오리아나 팔라치와의 인터뷰에서 덩샤오핑은 스탈린은 중국에 나쁜 짓도 많이 했지만 좋은 일도 많이 했으니 중국 공산당으로써는 그를 비판하는 것이 쉽지 않다고 여전히 스탈린을 옹호했으나 흐루쇼프에 대해서는 욕만 퍼부었다. 이에 흐루쇼프를 탈스탈린화를 추진한 영웅으로 생각하는 팔라치가 언쟁을 벌였으나 서로 좋을대로 생각하자고 마무리되었다.

6.2. 북한에서의 평가

북한의 경우 현재까지도 흐루쇼프에 대해 수정주의자로써, 혁명을 후퇴시키고 미제국주의와 평화공존을 추구한 인물로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즉, 흐루쇼프의 스탈린 격하 운동을 포함한 수정주의 노선은 사회주의 배신자들의 노선이었고, 결과적으로 사회주의를 변질시켰으며 사회주의 체제의 붕괴로 이끌었다고 평가한다.

6.3. 우크라이나에서의 평가

우크라이나 민족주의(분리주의)는 철저히 탄압했지만, 우크라이나에 정치적 기반이 있었던 만큼, 우크라이나의 이익을 소련 연방정부에 강하게 주장해 관철시켰고 , 우크라이나 지역인사들을 소련 고위직에 대거 끌어들여 브레즈네프 시대에는 우크라이나 사단이 소련 고위직을 점유한 역사가 있기 때문에 우크라이나에서는 긍정적인 평가가 강하다.[28] 심지어 소련시절을 흑역사로 보는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조차도 대개는 흐루쇼프에 비판적이지만 우크라이나 최초의 공화국인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의 초대 총리인 볼로디미르 빈니첸코를 존경했다면서 흐루쇼프에 대해서는 중립적이거나 조금은 우호적인 시각도 더러 있다. # 다만 그가 크림반도를 내주어 러시아가 폭주하는 결과를 낳았고 러우전쟁의 원흉이 되어 나비효과를 만들었다고 보고 있는 시선도 있다.

6.4. 서방권에서의 평가

쿠바 미사일 위기라는 문제를 제공했었기에 그 부분에 대해서는 평가가 나쁘지만, 서방과 지속적으로 교류와 대화를 시도했고, 전임자인 스탈린에 비하면 비교적 온건했기 때문에 비교적 좋은 쪽으로 평가된다. 특히 브레즈네프 시절에 "흐루쇼프 해빙"이 모두 되돌려졌다는 냉전적인 견해가 있었고, 고르바초프 시절에도 서방권에는 이런 견해가 널리 펴져 있어서 브레즈네프를 소련 붕괴의 원인을 만든 암군으로 보는 시각이 있었지만, 현재는 흐루쇼프 시절의 여러 자유화 조치가 브레즈네프 시절에도 상당수 이어졌다고 보는 것이 정설이다. 로버트 서비스 같은 서방의 보수적인 역사학자들도 브레즈네프가 흐루쇼프의 여러 조치들을 과거로 되돌리기는 했지만, 흐루쇼프를 본받아 스탈린식의 공포정치나 국가 폭력은 자제했다고 본다. 그런 면에서 브레즈네프는 흐루쇼프를 축출하고, 기록말살형 수준으로 그의 업적을 무시했지만, 흐루쇼프가 추구한 자유화를 좋게 평가했다고 볼 수 있다.

6.5. 구(舊) 동구권에서의 평가

그와 별개로 과거 동구권 영향권이였다가 현재 서방권으로 편입된 헝가리, 폴란드 에서는 1956년 포즈난 시위, 1956년 헝가리 혁명을 탄압한 전적 때문에 아예 원수로 취급한다.

6.6. 쿠바에서의 평가

피델 카스트로체 게바라 등 당시 쿠바 지도부는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미국에 꼬리 내린 것에 반발했다. 이는 미국이 쿠바를 군사적으로 계속 위협하는데도 소련이 쿠바의 안보를 보장한 당초의 약속을 어겼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흐루쇼프 집권 기간 동안 어느정도 소련-쿠바 관계는 냉각되었고, 게바라는 언론과의 기자회견에서 소련 지도부를 맹비난했다.

실제로 미국 CIA는 피델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의 암살시도를 계속 했고 본인들이야 어쨌든간에 미국의 위협을 계속 받았기 때문에 소련이 자신들을 내팽개친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결국 게바라는 결국 CIA의 사주를 받은 볼리비아군에 잡혀 처형되었고, 카스트로도 여러번의 암살시도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는다. 나중에 소련이 붕괴되면서 흐루쇼프 회고록이 진품으로 밝혀진 후, 소련 시절에 유출되지 않은 더 신랄한 원고가 출간되었는데, 그중에 카스트로가 핵전쟁 그까짓거 저질러버리자고 미친 요구를 소련에 해댄 것이 적나라하게 다 밝혀졌기 때문에 엄청나게 당황한 카스트로는 흐루쇼프가 자신을 음해한 것이라면서 기관지 그란마에 기밀문서를 일부 공개하는 강수까지 두면서 자신은 핵전쟁을 일으키려 한 적이 없다고 변명했다. 하지만 당시 핵전쟁 무서운 줄 몰랐던 카스트로가 소련 측에 터무니없는 요구를 해댄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7. 대중매체에서

7.1. 영화

  • 더 스파이: 미국을 성토하는 연설 장면으로 짤막하게 등장한다. 러시아의 배우 블라디미르 추프리코프가 흐루쇼프 역을 맡았다. 흐루쇼프는 실제로는 핵전쟁이 일어날까봐 매우 두려워했으며 처음에 핵무기의 위력에 대해서 보고받고 나서 우울증으로 한동안 축 늘어질 정도로 핵무기의 위험성에 대해서 절감하고 있는 인물이었지만 영화에서는 극적인 표현을 위해서 핵무기 쓰는데 환장한 정신병자처럼 묘사해놨다.
  • 스탈린이 죽었다![29]: 진주인공 포지션. 말라깽이로 나오며 스티브 부세미가 명연기를 보였다. 영화에서 흐루쇼프는 실제로 스탈린 밑에서는 어떻게든 잘 보이기 위해 환심을 사다가도,[30] 스탈린이 죽고 권력 공백이 생기자 능수능란하게 일을 처리하고 계략을 내 정적을 냉정하게 숙청하는 실제 역사의 흐루쇼프를 잘 묘사했다. 원수 베리야를 숙청하고 권력을 드디어 잡지만, 자기도 브레즈네프에 실각될 것이라는 암시[31]를 주며 영화는 막을 내린다.
  • Гагарин: Первый в космосе(가가린: 처음으로 우주에 간 이): 러시아의 2013년 다큐멘터리 영화로 국내에서는 개봉하지 않았다. 영미권에서는 'Gagarin: First in Space'이라는 제목으로 개봉했다. 더 스파이에서 흐루쇼프 역을 맡은 블라디미르 추프리코프가 흐루쇼프 역을 맡았다.

7.2. 게임

  • 메탈기어 솔리드 3: 카메오(?) 출연한다. 더 보스의 망명으로 소련 영토가 데이비 크로켓으로 핵공격을 받는 사태가 벌어지자 군부 강경파를 진정시킬 겸 위장망명이 아니라는 증명을 위해 미국이 더 보스를 제거하는 김에 덤으로 자국내에서 세력을 확장하고 있는 볼긴 대령을 암살해줄 것을 미국 쪽에 은근히 요구하는 역할이다. 스네이크제로 소령과 무전연락을 할 수 있는 것도 서기장 권한으로 위성채널을 빌려줬기 때문이며, 작전지역 내에 조력자를 심어둔 것도 그의 밀명이다. 어떤 의미로는 스네이크의 스폰서 되시겠다. 성우는 전작인 메탈기어 솔리드 2에서 팻맨 역을 맡았던 시오야 코조(일)/David Thomas(영).
  • Hearts of Iron IV: 소련 장관진으로 등장하며 공산주의 지지도를 높여주고 지휘력과 정치력 5%를 늘려준다. 또한 해방 국가 우크라이나의 공산주의 지도자로 등장은 하나 장관진과 달리 고유 초상화가 없다...
  • SD세계대전: 영웅유닛으로 등장한다.

7.3. 기타

  • 헬보이에서 소련 초자연현상 연구기관의 요원이 언급하기를 스탈린과는 달리 바바라를 신뢰하고 있지 않다고 한다. 나중에 바바라가 겪을 일을 생각하면, 흐루쇼프 내지는 브레즈네프가 바바라를 봉인시킨 걸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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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5f5f5,#2d2f34><colcolor=#cc0000>생애<colbgcolor=#fff,#1f2023>생애
가족 아버지 세르게이 니카노로비치 흐루쇼프 · 어머니 크세니야 이바노브나 흐루쇼바 · 여동생 이리나 흐루쇼바 · 아내 예프로시니야 흐루쇼바,(사별), · 아내 마루샤 흐루쇼바,(이혼), · 아내 니나 흐루쇼바,(재혼),
사건 · 사고 쿠바 미사일 위기
관련 전쟁 키예프 전투,(1941.8.17~1941.9.26), · 바르바로사 작전,(1941.6.22~1941.12.5), · 제2차 하르코프 공방전,(1942.5.12~1942.5.28),
관련 정치인 이오시프 스탈린 · 미하일 고르바초프
평가 평가
기타 스푸트니크 쇼크 · 처녀지 개간 운동 · 당신들을 묻어버리겠다
파일:낫과 망치.svg 공산주의 }}}}}}}}}


[1] 혼전성은 '피사레바(Писарева)'.[2] 혼전성은 '쿠하르추크(Кухарчук)'.[3] 1917.~1943.[4] 1935.~2020.[5] 요절함.[6] 초등학교 중퇴[7] 제2대 서기장[8] 이 표기는 키릴 문자 ё의 쌍점을 누락시키고, 비슷한 형태의 라틴 문자 e로 전사한 잘못된 라틴 문자 표기에서 비롯된다. 키릴 문자 ё는 1783년에 러시아어에서 최초로 사용되었는데, ё 문서에 서술된 근대 러시아어의 е에 대한 발음 규칙이 현대로 넘어오며 예외가 숱하게 발생했고, [je\]로 읽던 е와 구분하기 위해 항상 강세가 오는 іо[jɵ\]를 ё로 표기하기로 정했다. 하지만 러시아인들은 스탈린 사후 조판 및 입력의 불편함으로 인해 ё의 쌍점을 누락했고, 이는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또한 щ의 발음상의 변화에서도 잘못된 표기의 원인을 찾을 수 있다. щ는 10–15세기에 쓰인 고대 동슬라브어에서는 [ʃtʃ\](시치)로 발음되었지만, 이후 분화된 러시아어에서는 [ɕː\](시)로 변화되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어에서는 여전히 [ʃtʃ\]로 발음하며, 러시아어에서 щ를 라틴 문자로 전사할 때 ш[ʃ\](sh)와 혼동을 피하기 위해 역사적인 표기인 shch로 표기하기 때문에 러시아어 발음과는 다르게 인식된다.[9] 생애의 젊은 시절 항목에서 이미 설명됐지만 흐루쇼프는 사실상 반문맹 상태였다. 글을 읽을 순 있었지만 자신이 직접 글을 쓰진 못했으며 기껏해야 자신의 이름을 적는 수준에 그쳤다.[10] 당시 제목은 흐루시초프 비록[11] 물론 회고록의 특성상 자신이 관여한 여러 범죄나 사건들은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12] 냉전 시기에는 김일성은 반대하거나 소극적이었지만 스탈린이 강력하게 명령을 내려서 남침했다는 설이 유행하기도 했다.[13] 흐루쇼프 본인이 강력하게 밀어붙였던 처녀지 개간 운동 때문에 그렇다. 주 개간 후 재배 작물이 옥수수였기 때문이다.[14] 여담으로 소련이 해체된지 20년 정도 지난 2011년에 우크라이나 흑토 지역에서 옥수수 생산량이 급증했지만 흐루쇼프가 세운 계획은 “밀을 심지 못하는 척박한 땅에 적은 양의 물을 투입하여 옥수수를 생산한다”였으므로 원래 비옥한 우크라이나에서 옥수수 생산 늘어난 거 가지고 농담으로나마 흐루쇼프의 꿈이 이루어졌다고 보기 힘들다.[15] 상당히 유명한 공산주의 블랙 유머로, 브레즈네프부터 옐친까지 상당히 많은 바리에이션이 있다.[16] 단순 유머로도 볼 수 있지만, 소련 사회의 개방을 상당히 진척시킨 흐루쇼프의 업적을 담았다고 볼 수 있다. 스탈린 시절에 저런 유머를 입 밖으로 내거나 편지에 적어 보냈다면 본인은 물론이요 왕조 시절마냥 3족이 전부 굴라크로 끌려가거나 몰래 총살당했을 것이다. 자기 발을 밟은 공산당원에게 욕설을 했다고 내란죄로 루비얀카에 끌려가고, 스탈린의 업적을 찬양하는 의미에서 박수를 치기 시작했는데 (10분이 넘는 눈치싸움 끝에) 가장 먼저 박수를 멈추고 자리에 앉은 자가 그날 밤 비밀경찰에 체포되어 굴라크에 끌려가던 게 스탈린 시절의 일상적인 사회 풍경이었다.[17] 한국어의 "꿀꿀"에 해당하는 러시아어 의성어가 "흐루"(хру)인데, 이를 본인의 이름(Хрущёв)와 섞은 농담이다.[18] 훗날 내무부 장관, 교육부 장관 등을 역임하였다.[19] 큐브릭 감독의 영화 닥터 스트레인지러브에서 이와 유사한 장면이 등장한다. 졸지에 3차 대전의 위기에 처한 상황을 해결해 보고자 긴급히 소련 대사를 펜타곤 전시상황실에 소환하는데, 이때 대사가 하바나산 시가를 좀 가져다 달라고 하자 옆에 있던 미해군 제독이 "자메이카산 시가도 꽤 괜찮은데 한 번 피워 보시겠소?"라고 묻자 대사 왈, "고맙지만, 사양하겠소. 제국주의자들 돗대는 영 내키지 않아서 말이지."라고 하자 제독이 "오. 빨갱이들 꽁초만 피우시겠다?"라고 하며 서로 맞디스를 하는 장면이 있다.[20] 러시아어 및 영어판 위키피디아에 항목이 존재한다. 러시아어판에서는 '쿠지카'로 되어 있고 영어판에서는 '쿠지마(Kuzma)'로 되어 있는데, '쿠지카'가 '쿠지마'의 애칭(diminutive) 정도 되므로 별 차이는 없다. 흐루쇼프의 영향 때문인지, 영어판 문서가 러시아어판보다 더 길고 자세하다.[21] 흐루쇼프와 코시긴의 통역가였던 빅토르 수호드레프(Viktor Sukhodrev)가 증언하기를, 흐루쇼프가 미국인들에게 처음으로 이 말을 꺼낸 것은 그 유명한 주방 논쟁 때였다고 한다.[22] 쿠지카/쿠지마는 러시아 속담에 등장하는 사악한 인물의 이름이기도 하고, 딱정벌레 종류의 해충 이름이기도 하고, 집에서 애들 때릴 때 쓰는 채찍을 가리키는 단어였다. 이 외에 상황에 따라 악마를 지칭하기도 한다. 전반적으로 좋지 않은 의미의 단어이며, 그런 쿠지카/쿠지마의 어머니 되는 사람을 꺼냈다는 것은 그보다 더 나쁘다는 의미였다.[23] 사실 달라이 라마 14세의 경우 저우언라이에 대한 평가는 유독 박한 편이었고, 저우언라이와 마오쩌둥을 비교할때도 마오를 높게 평가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달라이 라마 14세의 성격이 행동거지가 거칠고 투박해도 직설적인 사람을 더 선호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신사적이라는 평판을 받더라도 노회하고 속을 알기 어려운 사람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이 아닌지 짐작해 볼 수 있다. 하기야 4세에 달라이 라마의 직위에 올라 10대 초중반의 어린 나이부터 온갖 정치계의 괴수들과 상대해야 했던 달라이 라마 텐진 갸초의 입장에서 보면 속내를 알기 힘든 노회한 인물에 비해 그나마 솔직한 인물이 상대하기에 덜 괴로웠을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24] 이 에피소드는 EBS 인터넷수능 영어 지문에 "흐루쇼프가 서양 사람들이 정치적 논쟁을 매우 좋아해서 그들이 원하는 걸 연설에서 보여주기 위해 일부러 이런 행위를 했다."고 나오나 사실 여부는 확인되지 않았다.[25] 태업(怠業): 노동쟁의 행위의 하나. 겉으로는 일을 하지만 의도적으로 일을 게을리함으로써 사용자에게 손해를 주는 방법이다. 물론 저건 사전 상의 정의로, 열심히 일해도 그에 따른 인센티브가 없으니 설렁설렁 일한다는 공산주의의 한계와, 스탈린이 본격적으로 숙청의 칼을 꺼내들기 이전 개막장스러운 인간들이 지방 공산당원입네 설치며 무단 태업과 결근을 일삼던 역사적 사례로 인해 소련에서 태업죄는 단순히 "너 해고" 정도로 끝나는 죄가 아니었다. 스탈린 시절 "할당량만큼 사람을 잡아들일 수가 없어 전진긍긍하던 지역 엔카베데가 아침 시간 출근하던 통근 버스를 붙잡아 시간을 끈 뒤 출근 시간이 지나자 태업을 기도했다며 승객들을 모조리 잡아다 굴라크에 던져버리는" 웃을 수 없는 촌극도 왕왕 일어나서 문제지. 이 "할당량" 문제가 원체 심각했던지라 엔카베데와 경찰은 굴라크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 체포를 남발했는데, 수용소 군도를 보면 굴라크에 끌려간 이웃집의 갓난아기를 어떻게 하냐며 동네 주부가 경찰서에 찾아오자 아이고 감사합니다 하면서 그 주부와 아기까지 전부 잡아들여 굴라크로 끌고간 사례, 집시 한 무리가 나타나 주인 없는 벌판에 텐트를 치자 지역 경찰서장이 기회다 싶어 모조리 체포해버린 막장 사례들이 드물지 않게 등장한다.[26]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베리야는 살인과 고문, 강간을 밥 먹듯 즐기고 스탈린을 제외한 모든 인원들과 척을 맺는 등 성격이고 인간 관계고 할 것 없이 개차반 중의 개차반이었던지라 자신이 수장이었던 NVKD 빼고는 전부 베리야를 죽일 기회만을 노리고 있었다. 실제로 스탈린 사망 이후 흐루쇼프, 몰로토프, 주코프, 코네프 등 정치국원 및 고위 정치원들은 전원 베리야의 모가지를 따버려야 한다는 점에는 동의하엿고, 결국 베리야는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저 인원들 중에서는 주코프와 코네프 등 서로 원수지간인 사람들도 있었지만, 이들조차 베리야의 숙청에는 서로 협력할 지경이었다.[27] 재밌는 건, 흐루쇼프가 숙청하면서 죽이지 않고 좌천시킨 정적들은 클리멘트 보로실로프만 빼면 전원 흐루쇼프보다 오래 살았다. 살벌한 권모술수가 난무했던 중앙정치에서 벗어나 현실에 체념하고 유유자적 살아서인지 스트레스를 덜 받은 듯하다. 정작 흐루쇼프도 만 77세에 죽었으니 단명과는 거리가 멀었는데, 1964년 실각하고 7년 뒤에야 죽었으니 그의 정적들과 똑같은 말년을 보낸 셈이다.[28] 당장 후임자인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역시 우크라이나 출신이다. 생전 육성을 들어보면 러시아어에 우크라이나 억양이 상당히 강하고 우크라이나어 육성을 남기기도 했다.[29] 영국에서 제작한 블랙코미디 영화[30] 스탈린이 쓰러진 날 아침에도 그런 모습이 보인다. 전날 연회장에서 실컷 어릿광대 놀음을 하면서 술에 취한 상태였지만 흐루쇼프는 집에 와선 아내에게 자기가 그날 스탈린 앞에서 한 농담과 스탈린의 반응을 모조리 받아쓰게 해서 정리했고, 그걸 다음 날 아침에 다시 복기하고 있었다.[31] 음악회장에서 피아노 연주를 감상하는 정치국원들을 보여주면서 끝나는데, 나중에 흐루쇼프가 브레즈네프에게 실각당할 것이란 자막이 뜨는 와중에 흐루쇼프 윗줄을 보면 웬 송충이 눈썹이 흐루쇼프 정수리를 꼬라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