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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Black American, African-American[1]미국 흑인은 현재까지 미국에서 살아가고 있는 흑인 집단을 일컫는 단어다. 2020년 기준 인구는 약 4,693만 명 정도로 미국 인구의 14.2%를 차지한다.[2] 미국에서 살고 있는 흑인은 아프리카 거주 흑인들 다음으로 숫자가 많다.[3]
2. 구성
현재 미국 흑인들의 거의 대부분은 미국이 영국 식민지 시절이었을 때 노예 신분으로 서아프리카에서 아메리카 대륙으로 유입된 흑인들을 조상으로 삼고 있다. 물론 다분화된 미국 사회 특성상 모든 미국 흑인이 서아프리카 노예 출신은 아니다.왜냐하면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조상처럼 미국의 노예제도 폐지 이후에 생계나 유학 등의 이유 때문에 자발적으로 이주해온 흑인들도 많기 때문이다.[4] 자발적 이주자들은 대체로 동부, 중부, 남부 등 지리적으로 아메리카 대륙에서 먼 쪽에서 온 경우가 많다. 간혹 영국 흑인이 다시 미국으로 이주해온 경우도 있고, 미국 내 프랑스어권 지역인 루이지애나의 경우에는 아이티인이나 프랑스 흑인 같은 프랑스어권 흑인 혈통 주민들도 많으며, 플로리다 지역등은 아이티 뿐 아니라 캐러비안 다른 나라 출신 국가 흑인도 많다. 대표적으로 리한나의 경우 미국 국적이지만 바베이도스에서 이주해온 케이스다. 캘리포니아나 플로리다, 텍사스 같이 라틴아메리카계 인구가 많은 곳은 라틴아메리카에서 이주한 흑인들도 많고, 남아프리카 공화국이나 나미비아, 보츠와나, 탄자니아, 케냐, 우간다 같은 남동아프리카 국가들에서 미국으로 이민 온 남동아프리카 출신 흑인들도 있다.
사실 피부가 검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미국 흑인들을 한 그룹으로 묶기에도 무리가 있긴 하다. 일단 미국 출생 흑인은 백인, 아시아인 등과 몇세대를 걸쳐 피가 섞인 경우가 많아 아프리카 본토 흑인보다는 피부색이 비교적 밝은 편에 속하는 경우가 많다. 게다가 한국인과 일본인, 중국인 사이에서도 유전적 차이가 있는데, 유럽보다도 훨씬 더 거대한 전체 아프리카 대륙의 동부, 서부, 중부, 남부 지역에서 모인 아프리카 흑인들 간에 유전적 차이가 없다는 것은 전혀 말이 되지 않는다. 아프리카는 인류의 발상지로서 유전적 다양성이 다른 곳보다도 더 크기 때문에 사실은 지역에 따라서 같은 아프리카인 사이에서도 백인과 동양인 만큼의 유전적 차이가 존재한다.[5]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미국 흑인들은 하나의 인종적 그룹으로 묶이며, 같은 인종의식을 공유하고 있다. 왜냐면 첫째로 대부분 잔혹한 노예 무역의 결과로 이주당했기에 정확한 뿌리를 찾기가 힘들기 때문이며, 둘째로 뿌리를 찾는다 하더라도 주된 고향이 될 아프리카 국가들이 미국 흑인들과 문화적인 유대감을 가질 만한 소프트 파워가 없는 빈곤국이 다수를 차지하기 때문이다.[6] 그리고 무엇보다 모든 흑인들은 백인 기득권에 의해 열등한 인종으로 싸잡혀 인종차별당했던 아주 공통적인 역사경험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누가 흑인인지를 분류함에 있어서는 순혈주의, 인종차별, 제노포비아 등의 어두운 사상의 영향이 컸다. 대표적으로 미국 남부 정부기관에서 시행한 one drop rule이 있다. 이 룰은 흑인 피가 단 한 방울이라도 있으면 흑인이라고 뭉뚱그려 분류하고 거기에서부터 '순수한 백인'을 분리해내려고 했던 인종차별적인 인종 구별 방법이다.
미국 흑인은 타 인종과 지속적인 통혼을 통해 유전적인 교류를 겪었으며 지금은 아프리카 본토의 흑인과는 생각보다 생김새의 차이가 크다. 역사학자 헨리 게이트 주니어(Henry Louis Gates Jr.)는 흑인의 혈연 관계를 다음과 같이 구분한다. 현재 미국 흑인 인구가 약 4,700만명에 미국 인구의 13.5%에 달하는데 미국 흑인 중 중 58%는 12.5%의 유럽 혈연(증조부모 중 한 명이 백인)이며 19.6%는 25%의 유럽 혈연(조부모 한 명이 백인)이며 5%가 미국 원주민, 단 1%가 아버지나 어머니가 유럽 혈연이다. 따라서 현재 미국 흑인은 대다수가 혼혈이며, 혼혈인의 경우에는 자기가 느끼는 정체성에 따라 백인인지 흑인인지를 스스로 택하기 때문에 대한민국에서 보기에는 백인처럼 보여도[7] 자신을 흑인으로 인식하는 사람들도 있다.[8] 이는 미국 사회 특유의 one drop rule 영향이 생각보다 크기에 미국에서는 여전히 순수 백인 아니면 백인으로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그 one drop rule을 백인들에게도 공평하게 적용해보면 또 순수 백인이라는 것도 없다. 미국인들은 그냥 백인 처럼 생기면 백인이라고 여기고 백인 처럼 생겨도 본인이 흑인이라면 흑인이라 생각해준다. 단일민족국가인 한국과는 달리 미국에서는 인종 구분을 크게 비중높게 보지 않는다.
파푸아뉴기니, 솔로몬 제도, 바누아투, 피지 등 오세아니아에서 온 멜라네시아인들도 피부가 검지만 이들은 아프리카계 혈통인 대다수 미국 흑인들과 달리 오스트레일리아 인종이며, 네그리토계열이 가장 적으며 미국 내 분류에서 흑인이 아니라 '태평양 섬 주민'으로 따로 분류된다.
3. 용어
20세기초까지는 흑인을 그저 단순히 유색인종(Colored) 또는 흑인과 히스패닉계 백인 사이의 혼혈의 경우 물라토(Mulatto)라고 불렀다. 이후에 니그로(Negro)라고 불리던 시절도 있었으며[9], 시대가 지나면서 사람들의 의식이 진보할수록 명칭 또한 존중의 의미를 담는 쪽으로 변해갔다. 블랙에서 아프로 어메리칸, 아프로 어메리칸에서 에프리칸-어메리칸으로. 1997년부터 미국 정부는 공식적으로 미국 흑인(Black American) 또는 아프리카계 미국인(African-American)을 미국 흑인을 일컫기 위해 사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내가 검은색인데 왜 아프리칸-아메리칸 같은 말로 나를 지칭해야 하냐?"라며 블랙을 더 좋아하는 흑인들도 꽤 있다. 실제로 2010년대 초에 NBC와 월스트리트 저널에서 흑인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블랙을 선호하는 사람들(42%)이 아프리칸 아메리칸을 선호하는 사람들(35%)보다 더 많은 걸로 집계되었다. 일반적으로 흑인을 의미할 때는 Black, African Descent라는 용어가 일반적이지만 해당 용어는 흑인에 대한 포괄적인 용어이지 미국 흑인만 지칭하는 의미는 아니다. 따라서 미국 흑인만 언급하고 싶다면 African-American이나 Black-American이 일반적이다.상기했듯이 아프리카계 미국인은 미국 흑인을 일컫기 위해 사용되는 단어이므로, 북아프리카 출신의 아랍인이나 남아프리카의 백인 계통 미국인은 이론적으로는 '아프리카계'+'미국인'이 맞긴 하지만 African-American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반대로 카리브해 국가 출신 흑인들은 1차적인 출신지만 따졌을 때는 African-American이 아니지만[10] 아프리카계 미국인이라는 말은 미국 흑인과 동의어이기에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범주에 넣어도 된다. 또한 라틴 아메리카 출신의 아프리카 혈통을 지닌 사람들을 Afro-Latinx이라고 부른다.
일각에서는 아예 아프리카계 미국인이란 표현이 더욱 모욕적이라는 주장도 있다. 대표적 인사가 모건 프리먼. 백인 이민자는 아일랜드계 미국인, 이탈리아계 미국인 등 출신 국가를 기준으로 부르면서, 왜 흑인은 대륙인 아프리카로 묶어서 부르냐는 것이다. 물론 그 이유는 아프리카 출신 미국 이민자는 과거 노예무역 문제로 인해 출신 국가나 민족의 기원을 정확히 파악하기 어렵다는 현실적 문제가 있다.[11] 미국에 거주하는 흑인들 중에는 본인을 "American"으로 정체화하고 특정 아프리카 유산을 강조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그들은 이미 여러 세대에 걸쳐서 미국 본토에서 생활했기 때문이다. 또한 카리브해나 라틴 아메리카 출신의 흑인들은 아프리카가 자신들의 문화적 배경을 반영하지 못하기 때문에 선호하지 않는다.[12] 대상을 어떻게 정체화 하는지를 확인하고 적절한 용어를 사용하면 된다.
4. 역사
4.1. 개요
미국 흑인은 미국인을 이루는 이주민 그룹이 아니라, 미국 역사의 초창기부터 깊숙이 뿌리내린 '올드커머' 미국인으로 인정된다. 그들의 존재는 미국 건국 이전의 아메리카 대륙 식민지 시대 시점부터 시작되었고, 사회적·경제적 구조와 문화에 중요한 영향을 미쳐 왔다. 1526년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초기 아프리카인 정착 시도와 1619년 버지니아 식민지에 도착한 아프리카 노예들은 북미 대륙에서 아프리카인들이 존재하게 된 중요한 기점이 된다. 이 초기 아프리카인들은 미국의 농업 경제와 노동력을 뒷받침했으며, 특히 남부에서는 주요 경제 기반을 형성하는 데 필수적인 역할을 했다.| |
| USCT(United States Colored Troops) 북부 연방 모병 포스터 |
남북전쟁(American Civil War) 및 독립전쟁에서 대규모 흑인 연대 참전 같은 역사는 이들이 노예제에 의한 인구 유입과 사회의 하부 구조로 시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궁극적으로는 미국의 건국과 독립, 자유, 번영에 이바지하는 중요한 미사회의 구성원임이었음을 거짓없이 보여준다. 이후 헌법 수정과 민권 운동을 통해 이들은 법적 권리를 쟁취하고 미국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확대해 왔으며, 특히 문화·예술 분야에서 매우 활약하며 미국이 대중음악, 엔터테인먼트 등 소프트 파워적으로도 초강대국으로 발전하는데 전적인 기여를 하였다. 전세계가 힙합 이라는 미국 음악을 듣고 브레이킹이라는 미국 춤을 따라 추게 만든 주역이라고 볼 수 있다.
결론적으로 미국 흑인은 올드커머로서 미국 백인과 마찬가지로 진정한 미국인으로 인정되며 오랜 역사를 공유해 왔다. 따라서 미국 사회의 역사와 문화 형성에 있어 중요한 인종으로 자리 잡았다.
4.2. 식민지 시대
1526년, 최초의 흑인 노예 약 100명이 현재의 사우스캐롤라이나 지역에 있었던 스페인 식민지 산 미겔 데 과달루페(San Miguel de Gualdape)에 유입되면서 식민지 노예 역사가 시작되었다. 당시 아메리카 대륙은 대서양 항해에서 생존한 극소수의 인원들이 남아 식민지 개척이 한창이었으며 토착 아메리카 원주민들과 다른 유럽 국가들 간의 분쟁으로 매우 혼란스러웠기에, 노예들은 종종 그 틈을 타 반란을 일으키거나 도망치곤 했다. 이후, 1619년에 흑인 노예들이 현재의 버지니아 지역에 위치한 영국 식민지로 추가적으로 대량 유입되었다. 초기에는 식민지 건설을 위한 계약제 노동자로 시작되었으나, 1620년 이후 본격적인 노예제가 도입되었다. 가혹한 노동 환경으로 많은 노예가 사망하자, 아프리카에서 대규모로 노예가 유입되었다. 이에 관해서는 노예무역 문서를 참고하면 좋다.다른 유럽 국가들 역시 흑인을 매수하거나 경매에 붙이는 등 반인륜적으로 취급했으나, 특히 대영제국 식민지가 가장 악명이 높았다. 루이 14세 시절 시행된 "흑인법" Code Noir[13]에 따라, 흑인 노예들은 임금 없이 보통 4~7년간 담배밭에서 강제 노동을 해야 했다. 노예가 죽으면 그저 버려지며, 복무 기간이 끝나거나 평생 노동을 통해 스스로를 매수하면 노예 신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다만, 자녀에게는 신분 상속이 없었으며, 자녀가 자유를 얻으려면 직접 자신을 매수하거나 강제 노동을 마쳐야 했다. 영국 식민지였던 현재의 매사추세츠 지역은 최초로 노예제를 법제화한 곳이기도 하다.
1641년, 매사추세츠에서 노예제가 합법화된 이후 1640~1650년대에는 노예에서 해방된 흑인들이 자신만의 농장을 가지거나, 다른 유럽 정착민과 결혼하기도 했다. 특히, 스페인 제국은 현재의 플로리다 지역도 담당하고 있었으며, 대영제국과 경쟁 중이었다. 스페인 제국은 노예들이 플로리다로 오면 가톨릭으로 개종하는 대가로 자유를 주기도 했다. 이들의 후손은 스페인 제국 정착민과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었으며, 그 후손들이 혼혈인 메스티소 및 물라토[14]가 되었다.
1699년, 버지니아 식민지 의회는 자유 흑인의 수가 증가하자 모든 자유 흑인을 추방하는 법률[15]을 제정했다. 이는 사실상 아메리카 식민지에 있는 모든 흑인을 노예로 규정한 것이다. 다만, 스페인 제국은 여전히 자신을 매수해 자유를 얻는 것을 허용했다. 1775년까지 아프리카계 식민지 인구는 전체 인구의 20%를 차지하며, 영국인 다음으로 가장 큰 민족이 되었다.
4.3. 미국 독립 전쟁~19세기
4.3.1. 미국 독립 전쟁
1776년 미국 독립 전쟁 초기 대부분의 주에서는 흑인 노예에게 군복무의 기회를 주지 못하도록 하는 관행적 장벽이 존재했다. 독립군 총사령관인 조지 워싱턴 역시 초반에는 흑인의 군 복무를 허용하지 않았으나,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병력이 부족해지자 미국 측은 점차 자유를 조건으로 흑인 노예들을 모집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 결과 정규군과 민병대, 기타 해군 및 지원 병력을 모두 합쳐 미국 편에 선 흑인 병력은 약 9,000명 정도로 전체 독립군 약 20만명 가운데 대략 3~4%에 해당하는 수치이다. 18세기 당시 13개 식민지에서 흑인 인구 비중이 약 20%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단순 인원 비중만으로는 많다고 보긴 어렵지만 흑인 병사들이 백인보다 훨씬 긴 기간 복무한 사례가 많았다는 점을 감안할 때 실제 전쟁 수행에서의 기여도는 숫자 이상으로 컸다고 평가된다.로드아일랜드 주의 1st Rhode Island Regiment에서는 1778년 재편 시점에 9개 중대(companies) 중 2개가 아프리카계 및 아메리카 원주민 병사들로만 구성되었으며 이 연대 소속 병사들은 보스턴 포위전, 벙커힐 전투, 롱 아일랜드 전투, 레드뱅크 전투, 요크타운 전투 등 주요 전투에서 활약하였다.
마찬가지로 대영제국령 버지니아 주 총독 던모어도 노예들에게 대영제국 편에서 싸우면 자유를 주겠다고 말하며 노예들을 대거 사들이기 시작했다. 당시 노예 해방이라는 기대감에 탈출한 노예들도 아주 많았다. 노예를 비싼 값에 쳐줄테니 대영제국 군대에 팔아 넘기도록 농장주들을 장려하기도 했다. 노예 1명당 약 950달러 정도의 가치가 있었고 농장주는 많은 이득을 챙겼다. 수 만명의 노예들이 영국군에 합류했지만 던모어가 사망하자 그 약속은 사라지고 만다. 이 시기에 흩어져 있던 흑인들이 전쟁하겠다고 한 자리에 모일 수 있었기 때문에 커뮤니티가 많이 발전했고 가스펠 음악도 많이 발전할 수 있었다.
미국 독립군 측의 흑인 군인들은 당시 백인 군인들과 같은 급여를 받았지만 승전 후 1818년, 1832년 연금법을 통해 군인연금이 승인되었음에도 당시 만연한 인종차별로 인하여 일부 흑인 퇴역 군인들은 급여가 거부되거나 지연되는 등 차별을 받았다. 이러한 정보는 널리 알려지지 않았으며 자세한 정보는 미국 혁명 박물관에서 확인할 수 있다.
4.3.2. 미국 독립 이후
1783년 전쟁이 끝나고도 미국 독립군, 영국군에서 복무했던 그들중 일부만이 자유를 얻을 수 있었다. 특히 대영제국은 패전 이후 그들이 매수한 흑인들을 본인들 식민지에 다시 끌고 가서 강제 노역을 시켰다. 그리고 그들이 현재 영국 흑인 중 일부가 되었다(영국 흑인에 대해서는 해당 문서 참고).독립 이후, 당시 미국에서는 투표에 있어 흑인 노예들을 어떻게 봐야 할 것인지에 대한 논쟁이 있었다. 미국 헌법 제정 당시 미국의 주는 14개였다. 2년에 한번씩 뽑는 하원과 각 주에서 2명을 뽑는 상원이 있는데 하원의 경우에는 인구수가 많은 쪽이 유리하기 때문에 북부보다 인구도 적고 노예 비중이 높은 남부 측의 입장이 고려되어, 미국 흑인 노예들에게는 3/5 타협을 적용했다. 이는 흑인 5명이 백인 3명과 똑같다는 것으로, 남북 전쟁 때 에이브러햄 링컨이 1863년 1월 1일 노예 해방 선언(Emancipation Proclamation)을 하고 남북 전쟁 이후 미국 수정 헌법 제 13조가 비준됨으로서 3/5타협도 심의되었다.
4.3.3. 노예 해방 선언
물론 그 노예 해방 선언이란, 노예제도 때문에 생기는 미합중국의 분열 즉, 남부와 북부의 갈등으로 인한 대립 때문에 타협(Compromise) 본 것으로 인간 대 인간의 입장에서 노예 해방은 아니었다.- 원래 남북전쟁 전부터 공화당은 노예 철폐의 움직임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급진 공화당 세력이라고 불리는 (자기들이 그렇게 이름을 붙였다.) 공화당 상원 의원 몇몇이 노예 철폐와, 넘어서는 인종 차별 철폐까지 강력히 주장했다. 이들은 실제로 흑인들의 인권을 생각하고, 흑인도 우리와 같은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 깨어 있는 인물들이었으며 1850년대부터 이런 주장을 하기 시작하며 1865년 노예 해방이 될 때까지 열심히 노력한 사람들이다.
- 1850년대에 이들의 이런 의견이 처음 나왔을 때만 해도 공화당에서도 이건 좀 너무 급진적이라고 했지만 남북 전쟁, 즉 미국 내전이 벌어지고 이들의 의견이 수용되었지만 인종차별 철폐는 이 시대 미국 백인들의 인식상 하지 못했다. 연방법으로의 인종차별 철폐는 노예제가 연방법으로 폐지된 지 딱 99년 만인 1964년 1964년 미국 연방 민권법로 연방 전체에서 이루어지게 된다. 물론 이 연방법으로 흑인뿐만 아니라 아시아계와 히스패닉에 대한 인종차별도 법적으로 사라졌고 이에 따라 1970년대부터 히스패닉계와 아시아계의 이민이 대거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어쨌든 남북 전쟁 직후 1865년부터 1877년까지의 "재건기"(Reconstruction Era)라는 시기에는 미군이 구 남부연합 지역에 주둔하여 노예해방을 감독하였고 흑인들의 정치참여도 증가하여 흑인 상원의원들도 나올 정도였다.
4.3.4. 미국 남부 흑인들의 지옥같은 일상
그러나 재건기가 끝나고 미군도 철수하자 남부는 짐 크로우법을 도입하여 흑인들의 투표권을 제도적으로 봉쇄하고 당시 범죄자들을 강제노역에 사용할 수 있다는 법을 악용하여 흑인들을 여전히 준노예로 부리고, 또 린치를 가했는데 매일매일 많은 흑인들이 린치당했으며 린치를 가한 백인들은 이걸 기록으로 남겼다.웃지 못할 일이지만 현재 린치 행위에 희생된 미국 흑인의 기록이 많이 남아 있고, 우리가 이를 쉽게 확인할 수 있는 이유는 당시 미국 백인들은 흑인들에게 린치를 가하는 걸 추억으로 생각했고 이에 린치당해 죽은 흑인들을 자랑스러운 "기록" 으로 남겼기 때문이다. 사진의 대중화 이후에는 아예 사진으로 기록을 남겼다.[16] 자신이 흑인 몇 명을 죽였고 그래서 나는 애국자라는 기록도 있다. 결국 이런 참혹한 일상으로 인해, 1916년에 흑인 대이동이 시작되었다.
이 당시 미국 정계는 공화당이 주류였지만 흑인들이 공화당의 텃밭이었음에도 공화당에서는 군정 종식 이후로 남부에서 의석을 내기 힘들다는 이유 때문에 이러한 상황을 방치하다시피 했다.
4.4. 20세기 초중반
4.4.1. 흑인 대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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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미국 흑인 민권 운동#|]] 부분을 참고하십시오.4.5. 20세기 후반
위의 미국 흑인 민권 운동이 결실을 맺고 1964년 미국 연방 민권법 등이 통과되며 미국 흑인들도 법적으로 동등한 지위를 얻었다.[17] 허나 50년대부터 전국적으로 시작되었던 미국 백인들의 교외 이주로 인하여 많은 흑인 동네들이 게토화되기 시작하였고 60년대 미국 흑인 사회를 이끌었던 두 리더 마틴 루터 킹과 맬컴 엑스가 암살당하면서 리더의 부재 현상을 겪게 되었다.일상적인 차별은 크게 사라지게 되는데 스포츠계의 무하마드 알리, 빌 러셀, 마이클 조던, 마이크 타이슨, 매직 존슨, 샤킬 오닐, 대중음악계의 스티비 원더, 다이애나 로스, 마이클 잭슨, 프린스, 라이오넬 리치, 휘트니 휴스턴, 영화/TV 방송계의 시드니 푸아티에이, 빌 코스비, 에디 머피, 모건 프리먼, 덴젤 워싱턴, 오프라 윈프리, 아세니오 홀, 할리 베리 등으로 인해 미국 흑인에 대한 일상적인 인종차별은 크게 완화되었다.
허나 레이건 시대 들어 발생한 대량 투옥 사태와 마약과의 전쟁 등으로 미국 흑인 저소득층들의 삶이 피폐해지고 갱 활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레이건 시대의 의도적인 대량 투옥 사태로 인하여 많은 미국 흑인 저소득층들이 전과자 딱지가 붙어 정상적인 취업이 불가능하게 되어 살기 위해서는 갱 활동 등 생계형 범죄를 저질러야만 하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18]
4.6. 오늘날(21세기)
21세기에는 2001년의 로버트 루이스 존슨[19]을 시작으로 10억 달러가 넘는 재산을 보유한 미국 흑인 억만장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흑인들도 정치, 스포츠, 문화예술계에서 유명한 인물들이 나타나면서 권리도 어느 정도 높아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인의 차별적인 행동으로 인한 사건사고는 끊임없이 나오고 있다. 물론 지금도 흑인 빈민층 문제가 해결되지도 못했다. 여전히 범죄에 노출되어 있으며 여전히 해결할 수단이 없는 상황이다.예나 지금이나 백인 기득권의 총알 받이 역할을 하며 온갖 수모를 당하면서도 공권력 남용의 주된 피해자들인데, 백인 경찰들이 저항하지 않는 흑인을 과잉진압하는 것도 모자라 무릎으로 목을 눌러 사망하게 한 조지 플로이드 사망 사건을 비롯해서, 일부 백인들이 흑인을 위험시하고 허위 신고 등 괴롭힘 행위가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20] 이는 흑인 남성의 높은 범죄율 때문에 마땅한 대응이라는 주장도 있으나 흑인 남성의 범죄율은 최근보다는 갱 활동이 활발하였던 이전이 훨씬 더 높았기 때문에 근거가 부족하고 학계에서는 도널드 트럼프의 집권과 대안우파의 결집으로 인한 온라인에서의 무차별 인신공격과 혐오 발언이 오프라인으로 이어지는 것이라고 보는 시각이 주류다.##
2024년 기준 2,30대가 되는 신세대 흑인들의 경우, 8~90년대 보다는 갱스터 등 범죄조직 활동에 종사하는 케이스가 대폭 줄었으며 오히려 일본 애니메이션과 매우 긴밀해졌다. 그들이 어린 시절 주로 투나미[21]를 통해 일본 애니메이션 등을 접하게 되는데, 특히 나루토는 그들의 불행한 어린 시절을 잘 투영하기 때문에 많은 인기를 끌었다.[22] 물론 나루토 뿐 아니라 드래곤볼도 매우 인기있다. 그러한 일본 애니메이션에 영향받아 래퍼 Wu-Tang Clan이 탄생하거나 일본 아티스트와 미국 흑인 래퍼들이 연계한 A BATHING APE, 스트리트 패션[23] 등이 탄생하였다. 물론 미국 백인 신세대 경우에도 흑인 신세대와 구분의 의미가 없을 정도로 개방적으로 일본 애니메이션을 받아 들이고 있다.
5. 헤어스타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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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흑인 헤어스타일은 아프리칸 고유의 헤어스타일로서 인종차별과 백인 주류 문화에 대한 저항을 표출하는 수단이 되었다. 미국 흑인은 아프리카 전역에 걸쳐 노예로 잡혀왔기 때문에 신체 유형과 머리카락의 색, 모발 또한 곱슬머리부터 부드러운 머리까지 다양하다. 곱슬머리의 경우 강한 햇빛으로부터 머리를 보호하는데 도움을 준다고 말한다. 미국 흑인의 75%는 곱슬머리가 아주 심하며 15%는 부드러운 곱슬이다. 머리가 이러한 미국 흑인들은 주로 에티오피아, 누비아, 소말리아 등 습한 지역과 사하라, 수단에서 발견되며 흑인들 대부분의 헤어는 검은색이나 브라운이지만 블론드, 레드 톤도 있다.
고대 흑인 문명에서는 헤어스타일을 관리하는 스타일러들은 높은 지위를 누려왔으며 헤어 드레싱은 클렌징, 오일링, 다양한 브레이즈(Braids), 랩(Wraps), 트위스트(Twists) 그리고 다양한 헤어 악세서리로 스타일링 하는 것을 다 포함하는 아주 복잡하고도 고도의 기술이다. 1602년 네덜란드 탐험가인 피터 드마리가 본인 저서에서 아프리카인들은 16가지의 헤어 스타일이 있다고 언급한 바와 같이 미국 흑인들도 헤어 스타일링에 많은 시간과 관심을 기울인다. 대한민국에서는 단순히 레게머리라고 부르지만 크게 드레드락(Dread lock), 콘로우(Cornrow), 아프로(Afro) 등이 미국 흑인들이 주로 하는 헤어스타일이다.
드레드락은 드레드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헝클어진 머리를 대충 꼬아서 만드는 스타일이다. 일반적인 락스(Locs)[24]와는 구분되어야 한다. 드레드락은 캐러비안의 헤어 스타일이며 사실 용어자체는 15세기 경 노예선에 묶여 몇 달을 씻지도 못하며 시간을 보내 자라난 머리를 보고 백인들이 끔찍하다(Dreadful)고 말한 것에서 유래한다. 사실 드레드락은 고대 이집트나 고대 아시아 일부 및 미국 인디언에서도 발견되는 헤어스타일로 그 역사가 매우 길다. 한국 사람들이 소위 레게머리라고 부르는 그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레게머리는 드레드락이라기 보다는 사실 그냥 락스에 가깝다.
콘로우는 다른 말로는 캐인로우(Canerow)라고도 한다. 콘로우는 머리를 땋아 만드는 브레이즈 스타일이다. 브레이드이란 말 자체는 줄을 땋듯이 헤어를 땋은 것을 의미한다. 특히 콘로우라는 말은 옥수수(corn) 모양과 비슷하다고 해서 지어진 이름이며 고대 아프리카에서는 농업을 의미하기도 했고 예술로서 받아들여졌다. 그도 그럴게 콘로우 머리를 만드는데는 엄청난 비용과 수고가 들어가기 때문이다. 노예가 된 아프리카 출신이 미국에 정착하면서도 그 헤어스타일을 고수했고 현대까지 전수되었고 전 세계에 알려진 계기가 된 것은 2000년 파리패션쇼[25]에서 런웨이 모델들에 의해서다.
아프로는 아프로 아메리칸에서 나온 말이지만 사실 내추럴(Natural)로 잘 알려져 있다. 미국 사람들에게 아프로 헤어라고 하는 것은 헤어에 어떤 처리를 안하고 그냥 자연스럽게 기른 머리를 말하기 때문에 내추럴이라고 하면 알아 듣는다. 지미 헨드릭스의 헤어로 생각하면 된다. 아프로는 항목이 있으니 해당 항목 참조.
노예제가 있을 당시 미국 흑인들은 가꾸지 못했고 자기 주인에 의해서 어떤 주어진 일에 따라서 헤어스타일이 결정되었다. 아니면 더럽다는 이유로 마치 강아지 털을 밀듯 주인이 다 밀어버리거나. 야외 농장이나 밭에서 일하는 흑인들은 흘러내리지 않고 관리가 쉬운 콘로우를 즐겨 했고 집안일을 하는 노예들은 머리를 다 밀어버리고 백인 머리를 흉내낸 가발을 착용했다. 가발은 실제로 꽤 비싼 물건이었기 때문에 가발을 구하지 못하면 최대한 백인 처럼 스타일링 했다. 식민지 미국에서 이상적인 헤어스타일은 스트레이트 또는 적당한 웨이브 헤어 였기 때문에 모질이 그들과 달랐던 흑인들은 슬프게도 스스로 자책하거나 미개하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백인의 헤어를 모방하는 것이 생존에 유리하다고 여겼다. 왜냐하면 그때 당시에는 최대한 백인처럼 보여야만 했다. 다만 소수의 흑인들은 아프리카 고유의 헤어스타일을 지키고자 했다. 이와 같이 노예제 시기에 흑인 헤어스타일은 지배 이데올로기인 식민주의 저항을 표출함을 알 수 있다.
다행스럽게도 현재 미국 흑인들의 그 특유 헤어 스타일은 미국 흑인 선조들이 아프리칸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지켜온 고유 문화이며 현재는 다양한 레게, R&B 및 힙합 뮤지션들에 의해서 전 세계로 빠르게 전파되었다.
6. 정치
최초의 흑인 연방상원의원은 하이럼 리블스(Hiram Rhodes Revels, 1827-1901)이다. 공화당 출신으로 미시시피 주 연방상원의원을 지냈다.[26]리블스는 1869년부터 1871년까지 연방상원의원으로 재직했으며 연방상원에서 유일한 흑인이었다. 1875년에는 미시시피에서 블랜치 브루스(Blanche Kelso Bruce, 1841-1898)가 연방상원에 올라 1881년까지 재직했다.
1877년 미국 연방이 남부에서 북부군을 철수시키자 남부 주들이 13년 동안 유지되었던 흑인들의 선거권을 박탈하고 시민권 외의 다른 권리를 거의 박탈해 버리면서 그 후에는 상원에 흑인이 없다가[27] 1967년 공화당의 에드워드 브룩(Edward William Brooke, III, 1919-2015)가 매사추세츠에서 연방상원의원으로 당선됐다. 그는 1979년까지 연방 상원으로 재직했다. 1979년부터 1993년까지 흑인 상원의원이 없다가 다시 1993년에 첫 민주당 출신의 흑인 상원의원인 캐럴 브라운(Carol Moseley Braun, 1947-)이 나왔다. 그녀는 일리노이에서 당선됐으며 1999년까지 재직했다. 그리고 2005년에 버락 오바마가 일리노이에서 연방상원의원으로 당선된다. 미국 대통령이 되면서 2009년에 사퇴하고 로널드 버리스(Roland W. Burris, 1937-)가 일리노이에서 새로 연방상원의원이 된다. 이렇게 해서 2012년까지 미국 역사상 흑인 상원의원은 여섯 명이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도 혼혈흑인이다. 2013년 113기 상원의원에는 흑인 상원의원이 세명 나왔다. 미국 인구 중에 흑인 인구가 14퍼센트에 달하는 것을 감안하면 인구에 비해 숫자가 적은 것이다.
- 팀 스콧 (Tim Scott), 1965년생, 공화당, 사우스캐롤라이나
- 모 코언(Mo Cowan),1967년생, 민주당, 매사추세츠
- 코리 부커(Cory Booker), 1969년생, 민주당, 뉴저지. 흑백 혼혈.
6.1. 미국 흑인들의 정치 성향
1960년대부터 지금까지 강력한 민주당 지지 성향이다. 그러나 버락 오바마 이후에 결집되었던 흑인들의 민주당 지지 성향은 도널드 트럼프를 거치며 조금씩 떨어지고 있으며, 공화당은 1980년대 수준의 지지 수준을 회복해가고 있다.흑인들의 정치적 성향은 민주당을 지지하지만, 그것이 민주당의 사회자유주의 태도와 차이가 있기도 하다. 2012년 연구에 따르면 동성애자가 자녀를 가질 권리 등을 묻는 질문에서 흑인들의 긍정 비율은 2004년부터 2012년까지 여러 조사에서 백인보다 10-15% 정도 낮았다. 흑인과 백인의 민주당 지지 비율을[28] 고려하면, 흑인 민주당 지지자 중 상당수는 민주당이 주장하는 가치에 공감하지 않음에도[29] 미국 흑인 유권자는 단순히 민주당이 좋아서 혹은 미국 흑인들이 아무래도 민주당을 지지하니까 덩달아서 나도 지지한다기보다는 공화당이 너무 싫어서 대안인 민주당을 지지하는 행동을 보인다는 점이다. 그리고 도널드 트럼프는 이를 간파하여 어느 정도 흑인 득표를 회복하였다.[30]
6.1.1. 1970년대 이전
출구 조사란 개념이 1967년에 등장한 만큼, 그 이전의 인종별 투표 비중을 정확히 추론하기는 어렵다. 일부 연구 사례를 참고하는 정도가 고작이나 이를 첨부한다. 이 자료에 따르면 1932년 미국 대선 당시 미국 흑인 커뮤니티는 프랭클린 D. 루스벨트의 뉴욕 주지사 시절을 문제 삼아 그에게 거의 기대하지 않았다. 여러 흑인 지도자들이 FDR과 민주당 지지를 호소하였으나, 시카고에서 민주당이 지역의 흑인들에게 얻은 표는 21%에 그쳤다. 민주당이 점차 진보적으로 이동해오고 있었지만, 미국 백인 서민들을 위한 진보란 인식이 여전히 강할 때였다.[31]사실 흑인들이 참정권을 처음 가졌을 때부터 1920년대까지는 공화당 지지성향이 매우 강했고 흑인집단내에서 공화당 득표율이 80%는 기본이었다. 애초에 공화당 자체가 휘그당이 노예제 폐지에 미온적이라고 반발한 당원들이 탈당해서 만들어진 정당이라 노예제 폐지를 적극적으로 주장하던 정당이었고 노예해방선언을 한 링컨 대통령도 공화당 소속이었기에 흑인들도 자연히 공화당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더군다나 이때는 미국 남부에서 민주당의 지지가 강했는데 미국 남부지역의 인종차별주의자들도 상당수가 민주당 소속으로 정치활동을 하고, 이들이 미국 남부에서 흑인들의 참정권을 실질적으로 박탈하는 데 큰 영향을 끼쳤기 때문에[32] 민주당에 대한 반감이 거세질 수밖에 없기도 했다. (딕시크랫이라고 부른다.)
1924년까지 민주당 전당대회에는 흑인이 입후보가 허용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렇게 공화당을 열성적으로 지지해주었어도 공화당 정부에서 인종문제에 대해서 무관심하거나 손을 놓는 경우가 대다수였고, 이러한 상황속에서 1929년 대공황 이후 경제난으로 대다수의 흑인들이 피해를 봤다. 이후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뉴딜 정책을 펼쳤고, 많은 흑인들이 뉴딜정책의 수혜를 입은것을 계기로 대다수의 흑인들이 민주당을 지지하기 시작하여 공화당에 대한 지지율이 급감했고, 민주당이 우세해졌다. 흑인 빈곤율이 매우 높았던 상황에서 공화당을 열성적으로 지지해도 해결안된 빈곤문제를 어느 정도나마 해결했고, 루스벨트도 남부 인종주의자들의 불만을 무시하면서 흑인에 대한 의무고용조항을 집어넣는등 흑인들에게 신경을 썼는데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사망했을때 많은 흑인들이 애도했을 정도였다. 물론 흑인들의 주머니 사정이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그럼에도 인종차별주의자들이 민주당에 남아있었을때라서 흑인에 대한 배제는 여전했으며, 아직 공화당을 지지하는 성향의 흑인들도 적지 않게 남아있었고, 마틴 루터 킹 목사도 공화당 당원이었지만, 1960년대 민권운동 시기 공화당에서 민권운동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고 민주당에서 존 F. 케네디 대통령과 린든 B. 존슨 대통령대 들어서 흑인들의 권리향상을 약속하자 공화당 지지성향의 흑인들 대다수도 민주당 지지로 돌아서며 민주당 지지가 절대적인 수준에 이르게 된 것이다. 1970년대 이후로는 절대 다수의 흑인들은 민주당을 지지하며 진보적 성향을 갖고있다. 더군다나 로널드 레이건 정부 이후로 공화당이 복지정책 축소를 지지하는만큼 공화당 정부가 들어서면 흑인들에 대한 복지예산을 깍아내는 경향이 있는데다가 인종차별주의자적인 당원들도 상당수있고 심지어 공화당 우세지역에서 흑인들의 참정행위를 방해하니[33] 흑인들 입장에서 공화당에 대한 반감이 강한 것은 당연하다.
자료1, 자료2에 따르면 뉴딜 정책 이후 흑인들은 대거 민주당 지지 성향으로 선회하였다고 한다. 1936년 대선에서 루즈벨트는 흑인 표의 71%를 얻었고, 공화당은 28%를 얻었다. 1936년 루즈벨트는 남부에서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필라델피아의 민주당 전당대회에 흑인들을 선거인단으로 입후보시켰고, 이로 인해 흑인 사회에게 높은 지지를 받았다.
루즈벨트의 3선과 4선으로 인해, 흑인들의 민주당 지지는 줄어들고 공화당 지지가 늘어났으나 여전히 더블 스코어 수준이었다.
이후 1948년 대선에서 해리 트루먼은 미군 내 인종 통합 정책 등을 바탕으로 더 높은 흑인 지지를 얻었다. 그가 얻은 흑인 표는 약 77% 수준으로, 1936년 FDR의 지지 71%를 뛰어넘었다.
1952년 대선에선 아이젠하워가 공화당에서 나왔으나 흑인 득표율은 약간 늘어나는 데 그쳤다. 1956년 대선에서 아이젠하워는 FDR이 가져간 흑인 표를 가장 많이 회복했다. 아이젠하워는 흑인 표를 39%를 얻었고, 그를 이은 닉슨도 1960년 대선에서 32%의 흑인 표를 얻었다.
그러던 것이 민권 운동을 거치며 공화당이 이에 미온적으로 대응하자 1964년 대선에서 흑인들은 린든 존슨에게 압도적인 지지를 보냈다. 존슨은 흑인 표의 94%를 얻은 것으로 추정되며, 이는 흑인이었던 버락 오바마가 얻은 득표율과 비슷하다. 배리 골드워터가 개인적으로 인종차별에 반대한 것과 달리, 민권 문제에서 각 주의 소관[34]이라는 태도를 보인 데 흑인 공화당원들이 많이 실망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1968년 대선에서 닉슨은 1964년에 골드워터가 흑인들에게 얻었던 득표율보다 더 많은 표[35]를 얻었다. 약 15% 내외였다. 닉슨이 1960년 대선에선 32%의 흑인 표를 얻은 걸 감안하면, 오늘날 미국의 흑인의 투표 성향은 1960년대에 그 구조가 고착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6.1.2. 1970년대
1972년 대선에서 닉슨이 얻은 흑인 표의 비율은 대략 15% 내외였다.1976년 대선에서 흑인은 83%가 지미 카터에게 투표했고, 17%는 공화당의 제럴드 포드에게 투표했다. #
6.1.3. 1980년대
1980년 대선에서 흑인은 83%가 지미 카터에게, 14%는 로널드 레이건에게 투표했다. #1984년 대선에선 흑인의 91%가 월터 먼데일에게, 9%가 로널드 레이건에게 투표했다. #
1988년 대선에선 흑인의 89%가 마이클 두카키스에게, 11%는 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에게 투표했다. #
1990년대에는 빌 클린턴 정부가 출범하며, 흑인 유권자들의 민주당 지지가 더욱 공고해졌다. 클린턴은 흑인 커뮤니티와의 적극적인 소통을 시도했고, 최초의 흑인 여성 보건복지부 장관 등을 임명하며 상징적인 조치를 취했다. 다만 클린턴이 추진한 범죄법(1994 Crime Bill)은 흑인 사회에 장기 수감과 경찰권 강화라는 부작용을 남겼다는 비판도 있으며, 이후 논란이 지속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92년과 1996년 대선에서 클린턴은 흑인 유권자의 약 83~84%의 지지를 얻었다.
6.1.4. 1990년대
1992년 대선에선 흑인의 83%가 빌 클린턴, 10%는 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 7%는 로스 페로에게 투표했다. #1996년 대선에선 흑인의 84%가 빌 클린턴, 12%는 밥 돌에게 투표했다. #
6.1.5. 2000년대
2000년 대선에선 흑인의 90%가 앨 고어, 9%가 조지 워커 부시에게 투표했다. #2004년 대선에선 흑인의 88%가 존 케리, 11%가 조지 워커 부시에게 투표했다. #
2008년 미국 대선 당시 폭스 뉴스의 코믹한 실험은 아직도 유명한데, 당시 공화당 후보였던 존 매케인의 공약을 민주당 후보였던 버락 오바마의 공약이라고 속인 뒤 길거리의 흑인 행인들을 붙잡고 공약에 대한 생각을 물어보았는데, 하나같이 "역시 오바마!"라고 하였다(...).[36] 한마디로 민주당/흑인 정치인들을 맹목적으로 지지한다.[37]
실제로도 2008년 대선에서는 흑인들의 95%가, 2012년에는 93%가 민주당의 오바마 후보에 투표했다. 민주당 후보군 중에서는 민주당의 적자, 주류후보에게 지지를 많이 보내주는 성향으로 인식된다. 민주당 내에서는 오바마의 후계자로 인식되는 힐러리가 흑인들에게 압도적으로 지지를 받고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슈퍼 화요일 경선에 이르기까지 클린턴가에 대한 애정과 민주당에 대한 충성심으로 힐러리의 매우 효율적인 방화벽 역할을 해주었다. 힐러리가 민주당 경선 참여 백인종들에게는 42%대 58%로 샌더스에게 밀렸지만 흑인층에서는 82%대 17%로 발라버렸다. 앨라배마나 조지아 등지에서는 93%의 흑인이 힐러리로 갔으며 흑인 여성에 한정하면 96%가 힐러리를 지지했다. 20대 백인 남성도 이만큼 샌더스를 지지하지는 않았을걸로 파악되는 현실에서 보면 단순히 지지를 넘는 열렬한 팬심이 작용한다는 것을 볼 수 있다.
2008년 대선에선 흑인의 95%가 버락 오바마, 4%가 존 매케인에게 투표했다. #
6.1.6. 2010년대
2012년 대선에선 흑인의 93%가 버락 오바마, 6%가 밋 롬니에게 투표했다. #2016년 기준으로 미국 흑인의 대략 87%~92%가 힐러리 클린턴을 지지하고 있다고 파악되고 있으며 현재의 오바마를 향한 배타적 지지와 마찬가지로 힐러리를 향한 열정적인 지지를 보내고 있다. 그렇다고 도널드 트럼프를 지지한 흑인이 아예 없던 것은 아니다. 흑인도 인구가 매우 많은 만큼 여러 가지 성향을 가지고 있으며 그 중에는 자신의 이해관계, 신념 혹은 정치 이데올로기에 따라, 아니면 힐러리를 입으로만 자신들을 위하는 위선자로 보는 시각 등등 여러 가지 이유로 의외로 트럼프를 지지한 흑인들도 있다. 하긴 트럼프가 멕시코 불법이민들을 추방하겠다고 으름장을 놓는데도 "그래야 자기같은 합법 이민자들의 지위가 올라간다"라면서 트럼프의 정책을 지지하는 히스패닉도 있을 정도니.[38] 당장 위에 언급된 팀 스콧 상원의원은 물론 본인의 소속당이라는 측면도 있지만 도널드 트럼프의 백인우월주의 성향 문제로 한창 시끄럽던 와중에도 당당하게 트럼프 지지 연설을 하기도 했다. 도널드 트럼프가 공화당 내에서도 비주류에 가까운 존재이고 기존 공화당 주류 백인 정치인[39] 중에서 같은 당 소속임에도 노골적으로 트럼프에 대해서 반감을 표시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 중 일부는 트럼프에게 표를 주느니 차라리 민주당 후보를 찍겠다는 극단적인 발언을 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을 생각하면 본인의 주장의 옳고 그름을 떠나 트럼프를 지지하는 흑인들도 분명히 있다는 충분한 증거라 할 수 있겠다.
2016년 대선에선 흑인의 89%가 힐러리 클린턴, 8%가 도널드 트럼프에게 투표했다. #
2016년 미국 대통령 선거의 출구 조사 결과, 흑인 남성의 80%는 클린턴, 13%는 트럼프에 투표하였고, 흑인 여성의 94%가 클린턴, 4%가 트럼프에 투표하였다.
2010년대는 미국 흑인 정치사의 전환점이자 성찰의 시기였다. 2008년 버락 오바마가 미국 역사상 최초의 흑인 대통령으로 당선된 데 이어, 2012년 재선에 성공하면서 흑인 커뮤니티는 그 어느 때보다 정치적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특히 2012년 대선에서 흑인의 투표율은 66.2%로, 백인의 64.1%를 넘어서는 역사적인 결과를 기록했다. 이는 미국 정치사에서 흑인 유권자들의 정치적 에너지가 정점에 달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었다.[40] 2012년 대선에서 오바마는 흑인 유권자의 93%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고, 이는 미국 내 인종 간 정치성향의 극명한 차이를 다시 한번 드러낸 수치였다.출처
하지만 오바마 행정부 시기에도 흑인 사회가 겪는 구조적 문제는 여전했다. 대표적으로 경찰의 과잉진압과 인종적 편견에 의한 흑인 사망 사건들이 반복적으로 발생하며, 흑인 커뮤니티 내에서는 "우리가 대통령을 가졌는데도, 왜 우리의 아들들이 거리에서 죽어나가는가?"라는 회의론이 퍼지기 시작했다. 2012년 트레이본 마틴 사건을 시작으로, 2014년 에릭 가너, 마이클 브라운 등의 죽음은 흑인 커뮤니티에 깊은 분노를 일으켰고, 이는 곧 [Black Lives Matter] 운동의 출범으로 이어졌다. BLM은 단순한 인권운동을 넘어 흑인의 생존, 안전, 정의에 대한 전면적인 정치적 요구를 조직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처럼 오바마 행정부가 실질적인 흑인 삶의 개선에 있어 제한적이었고, 오히려 일부 진보적 기대와는 거리감이 있었기 때문에, 2016년 대선에서는 흑인 유권자의 정치적 정서에 복합적인 변화가 나타났다. 힐러리 클린턴은 민주당 후보로서 흑인 커뮤니티의 전통적 지지를 받았고, 전체 흑인의 약 89%가 그녀를 지지했다.출처 그러나 오바마 시절만큼 강한 열광을 이끌어내지는 못했다. 이는 클린턴 부부가 1990년대에 추진했던 범죄법(1994 Crime Bill)에 대한 기억, 즉 흑인 청년의 대량 수감에 책임이 있다는 비판이 일정 부분 작용한 결과로 볼 수 있다.
또한 클린턴이 ‘정치적으로는 흑인을 위하는 척하지만 실질적으로는 백인 중산층을 의식하는 정치인’이라는 인식도 적지 않았다. 일부 흑인 유권자들은 클린턴을 ‘말뿐인 우호 세력’으로 인식했고, 이러한 회의감은 젊은 흑인층 사이에서 더욱 강하게 나타났다. BLM 운동과 더불어 흑인 진보주의자들은 민주당 내부의 구조적 보수성, 현실적 타협주의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보였으며, 이는 향후 민주당 내 좌파 세력의 성장과도 연결된다.
반면 도널드 트럼프에 대한 흑인의 지지는 전체적으로 낮았지만, 흑인 사회 내부에도 분명히 트럼프를 지지하는 유권자층이 존재했다. 2016년 대선에서 흑인 남성의 13%, 흑인 여성의 4%가 트럼프를 지지했고, 전체 흑인 유권자의 약 8%가 트럼프에게 표를 던졌다. 이는 주로 다음과 같은 세 집단으로 구성되었다: (1) 민주당에 대한 환멸을 느낀 보수적 흑인 유권자, (2) 경제적 자립을 강조하는 흑인 기업인 계층, (3) 힐러리에 대한 불신이 극심했던 무당파 유권자들. 이들 중 일부는 ‘불법 이민 규제’나 ‘경제 활성화’라는 트럼프의 정책이 흑인 커뮤니티 내 일자리를 보호해줄 수 있다는 기대를 가지고 있었으며, “불법 이민을 막아야 합법 이민자나 시민권자 흑인들이 보호받을 수 있다”는 주장도 존재했다.[41]
또한 공화당 내 흑인 정치인인 팀 스콧 상원의원은 트럼프 집권기 동안 소속당의 공식 입장에 발맞춰 트럼프를 공개 지지하기도 했으며, 이는 흑인 정치인 내부에서도 이념적 다양성과 정치적 실용주의가 존재함을 보여주는 사례로 볼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지지는 흑인 커뮤니티 전체의 입장을 대변한다고 보기는 어렵고, 오히려 소수 사례에 가깝다.
전체적으로 볼 때 2010년대 흑인 정치의 주요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오바마 시대를 통해 정치 참여율이 대폭 확대되었으며, 둘째, BLM 등 풀뿌리 운동의 부상으로 정치적 의식이 구조적 평등과 사법 정의로 확대되었고, 셋째, 민주당에 대한 전통적 지지는 유지되었지만 세대 내 비판적 시각도 함께 성장했다는 점이다. 특히 2016년 대선을 기점으로, 흑인 유권자 중 일부는 ‘기계적인 민주당 지지’에서 탈피해 보다 비판적으로 정치판을 분석하고, 사회정의와 인종정책을 핵심 의제로 삼는 후보를 선호하는 경향을 보였다.
이는 이후 2020년 미국 대선에서 버니 샌더스, 엘리자베스 워런 등 진보 성향 후보들이 흑인 유권자 사이에서 일정 지지를 확보한 배경이 되기도 하며, 동시에 조 바이든이 오바마 행정부 부통령 경력과 오랜 정치 이력을 바탕으로 흑인 유권자의 신뢰를 되찾는 데 주력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2010년대는 단지 오바마의 등장과 BLM의 확산이라는 두 상징만이 아니라, 흑인 유권자 내부의 분화, 성찰, 새로운 전략 모색의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6.1.7. 2020년대
오바마 정부의 부통령 이었던 조 바이든에 대한 지지 역시 엄청난 수준으로 민주당 경선 초반 흔들리는 조 바이든 이었으나 흑인 유권자가 절반이 넘는 사우스 캐롤라이나에서의 대승 이후 승승장구 하며 조 바이든을 후보로 당선시키게 도와줬다. 당연하지만 대선 여론조사에서도 압도적인 지지를 보내주고 있다.2020년 대선에선 흑인의 87%가 조 바이든, 12%가 도널드 트럼프에게 투표했다. # 성별로 나누면 흑인 남성은 79%가 바이든에게, 19%는 트럼프에게 투표했다. 흑인 여성은 90%가 바이든에게, 9%는 트럼프에게 투표하였다. # 연령별로 보면 18세에서 29세의 흑인은 바이든에게 89%, 트럼프에게 10% 투표하였다. 30세에서 44세의 흑인은 78%가 바이든에게, 19%는 트럼프에게 투표했다. 45세에서 59세의 흑인은 바이든에게 89%, 트럼프에게 10%를 투표하였다. 60세 이상의 흑인은 바이든에게 90%, 트럼프에게 7% 투표하였다. 비교적 소득세 인하가 중요하게 적용될 생애 주기에서 트럼프 지지율이 상대적으로 높았음을 알 수 있다.
6.1.8. 정치 성향에 따른 구분
6.1.8.1. 흑인 자유주의자, 진보주의자
버락 오바마, 카멀라 해리스 등 민주당에서 활동하는 흑인 정치인은 상당수가 현대자유주의, 진보주의 성향이다.6.1.8.2. 흑인 보수주의자
그렇다고 보수 성향의 흑인이 없는 것은 아니다. 몇몇 예를 들자면 허먼 케인, 토머스 소웰, 클래런스 토머스, 콘돌리자 라이스, 카니예 웨스트, 콜린 파월[42] 등이 유명하다. 공화당도 노예 해방의 역사가 있음은 부정하기 어려워서인지(오히려 상술했듯 존 매케인 같은 온건파들도 많다.) 흑인을 아예 무시하는 건 아니다.[43]1960년대 민권 운동 시기 이전까지만 해도 공화당을 지지하는 흑인들이 많았다. 당장 마틴 루터 킹이 공화당원이었으며[44], 재키 로빈슨, 제임스 브라운 등의 당대 유명 흑인들도 공화당을 지지했다. 왜냐면 당시 공화당은 인종차별을 철폐하려고 했고 민주당은 인종차별을 유지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1950년대까지는 공화당과 민주당의 스탠스는 지금의 정반대였다. 19세기 중반과 20세기 초반에 이르기까지 민주당이 남부 백인들의 입장을 대변했고 공화당이 북부 백인과 흑인의 입장을 대변했었다. 비록, 공화당이 장기집권하면서 보수화되었고, 민주당이 뉴딜정책으로 진보적인 정책을 펼치며, 흑인들의 다수가 민주당 지지로 이동했다고는 하지만, 민주당 내에서도 북부 개혁주의자와 남부 보수주의자들이 불편한 동거를 했었고, 흑인들에 대한 차별이 집중적으로 이루어졌을때 남부 흑인들이 심정적으로 공화당을 지지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던지라 미국 남부의 흑인들이 투표권을 다시 얻으면 공화당에게 득이 되었으면 되었지 실이 되는 상황이 아니었던것이었다. 애초에 흑인차별 철폐의 길을 연 아이젠하워도 공화당 소속이었다. 그러나 배리 골드워터 때부터 공화당이 남부 백인에게 지지를 얻고 리처드 닉슨이 공화당과 민주당의 지지기반을 아예 바꾸어 버렸다. 이후 남부에서 지지를 얻은 민주당 후보는 남부 출신인 지미 카터 정도. 정작 골드워터와 카터는 인종차별주의자가 아니었는데, 닉슨은 사적인 자리에서 레이건과 전화 통화할 때 아프리카인을 원숭이라고 부르는 농담을 한 적이 있다 골드워터는 흑인 차별을 반대하긴 했으나 자유지상주의자였기 때문에 법적으로 흑인 차별을 막는 것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견해를 가졌다.[45]
흑인 보수주의의 골자는 개인의 선택, 사회경제적 상태에 대한 책임감, 제도적 인종주의(systematic racism)이다.
위키백과에 따르면 흑인 보수주의자들의 주장은 대략 이렇다. 이 이론은 공화당원이자 보수주의자였던 부커 T. 워싱턴에 의해 정리되었다.
- 교육과 직업적 성취가 사회 내에서 흑인의 지위 향상에 도움이 된다
- 또한 정치는 사회적 차별의 피해자로서 범죄자들을 보는 대신에, 사회의 안전성과 보안을 유지해야 한다
- 연방 정부의 지원을 받기 보다는 자유로운 기업 활동으로 지역의 경제 발전을 이뤄야 한다
2004년 조사에 따르면 미국 흑인의 14%는 자신이 보수적이거나 강경 보수라 봤고, 다른 14%는 자신을 상대적으로 보수적이라 봤다. 그러나 공화당을 지지하는 비율은 10%가 되지 않았다. 2007년 퓨 리서치 센터의 조사에 따르면 19%의 미국 흑인이 자신을 종교적 우파라고 봤으나, 공화당 지지자라 밝힌 비율은 7%였다.[46]
미국에서 흑인 보수주의자에 속하는 인물은 다음과 같다.
경제적인 계층으로 보자면 중산층 이상의 흑인들에서 잘 보이는 편이다. 대표적인 흑인 보수주의 셀럽 칸예 웨스트는 대학 교수의 자녀로 경제적으로도 중산층에 해당되었다.
- 래리 엘더: 보수 성향의 라디오 진행자. 개빈 뉴섬의 주지사 주민 소환을 주도했다. #
- 벤 카슨
- 칸예 웨스트
- 캔디스 오웬스
- 콘돌리자 라이스
- 콜린 파월
- 클래런스 토머스
- 토머스 소웰
- 팀 스콧
- 허먼 케인
7. 문화
7.1. 종교
미국 흑인의 커뮤니티는 남부 위주로 기독교 인구가 많아, 흑인교회가 발달하였다.흑인 인구 사회는 개신교 인구가 71%, 천주교 5%, 여호와의 증인 2%, 이슬람교 2%로 압도적인 개신교 강세에다가 가톨릭 인구는 5% 정도에 불과하다. 미국의 가톨릭계는 남북 전쟁 이후인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반 유럽에서 아일랜드계, 이탈리아계, 폴란드계 가톨릭 신도들이 대거 유입되면서 팽창하기 시작했고, 유럽에서 가톨릭 신도들이 유입되어 가톨릭 차별 철폐를 주장할 당시 미국 흑인들은 주로 미국 남동부를 중심으로 몰려 살아서 서로 그다지 접점이 없던 상태였다. 루이지애나로 유입된 흑인 인구는 프랑스인들을 따라 가톨릭을 믿기는 했으나 비율 상으로 소수에 불과했다. 최근 들어서는 젊은 흑인들은 교회에 출석하는 경우가 줄고 있으며 비종교인이 되거나 신흥 종교에 관심을 가지기도 한다.
19세기 미국 남북 전쟁 이전 미국 남부의 개신교 교회들이 백인 신자들을 상대로 흑인을 노예로 부리는 것은 정당한 것이라는 설교가 흔했다면, 다른 한편으로는 마틴 루터 킹의 사례에서 보듯 흑인 지식인들 및 흑인 인권운동가들 사이에서도 성경에 언급된 자유와 평등을 근거로 흑인 차별 철폐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이러한 연유에서인지 흑인 중산층, 상류층 사이에서 독실한 개신교 신자들이 유달리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 다른 한편으로 흑인 인권 개혁 운동가들 중 급진파는 개신교를 미국 백인들의 종교로 간주하고 톰 아저씨의 오두막에 나온 것 같은 기독교의 박애 정신에 입각한 소극적인 인권 운동으로는 흑인의 해방을 이룰 수 없다고 보고 여호와의 증인 같은 신흥 종교나 이슬람교 같은 미국 사회 기준 소수 종교로 개종하는 경우도 드물지는 않았다. 미국으로 유입된 흑인 중 상당수는 서아프리카 출신이었고, 이들에게 서아프리카의 이슬람 문화와 역사는 백인들과 자신들을 차별화할 매력적인 대안으로 보였다. 그 결과 탄생한 것이 한 때 맬컴 X나 무하마드 알리가 가입했었던 네이션 오브 이슬람이다.[47] 사실 이슬람교도 서아프리카인들의 입장에서는 북쪽에서 내려온 백인들에 의해 전파된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라는 점에서 기독교와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그래도 서아프리카 내에서는 기독교에 비해 역사가 긴 종교였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거부감이 덜했던 게 크다.
부두교와 후두가 흑인 문화에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7.2. 음악
가장 먼저 언급되어야 할 장르는 블루스다. 블루스는 19세기 후반 남부 지역, 특히 미시시피 델타에서 태동했으며, 노예제 폐지 이후 흑인들이 겪은 경제적 빈곤, 인종차별, 고립감 등의 감정을 음악으로 승화시킨 장르이다. 단순한 구조와 애절한 가사 속에는 집단적 트라우마와 회복력이 함께 담겨 있었고, 이 장르는 흑인들의 심리적 생존을 가능케 한 수단이었다. 흑인들은 블루스를 통해 고통을 노래하며 치유했고, 동시에 자신들의 존재를 세상에 증명했다. 블루스가 없었다면 이후 재즈, 록앤롤, R&B, 힙합 등 수많은 현대 대중음악 장르가 존재할 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블루스의 연장선에서 태어난 재즈는 20세기 초 뉴올리언스에서 흑인과 크리올 음악가들에 의해 집단적 협업으로 탄생했다. 재즈는 미국 흑인 음악이 단순한 생존 수단에서 예술로서의 위상을 획득한 최초의 사례라 할 수 있다. 루이 암스트롱, 듀크 엘링턴, 찰리 파커 등은 재즈를 통해 백인 음악계의 장벽을 뚫고 국제적 명성을 얻었으며, 이들의 음악은 단순한 오락이 아닌 지적, 창의적 혁명으로 간주되었다. 특히 재즈의 ‘즉흥 연주’ 문화는 단순한 음악 기술을 넘어 흑인의 자유에 대한 선언이었고, 기존 백인 중심 음악 이론을 전복하는 혁신적 장르로 작용했다.
1940~50년대에는 R&B와 소울이 등장하였다. R&B는 블루스의 감성과 리듬을 유지하면서도 대중적인 비트와 구조를 갖춘 장르였고, 이는 라디오와 음반 산업을 통해 전국적으로 퍼져나갔다. 레이 찰스, 샘 쿡, 아레사 프랭클린은 단순히 ‘가수’가 아니라 흑인 공동체의 정체성과 자존심을 상징하는 인물들이었다. 이들은 각자의 음악을 통해 흑인들이 겪는 현실을 노래했고, 이를 통해 사회적 연대를 형성했다. 흑인들의 소울 음악은 단순한 감정 표현을 넘어서 인권운동의 사운드트랙으로 기능했다. 마틴 루터 킹이 거리에서 연설할 때, 흑인 커뮤니티가 시위할 때 항상 함께 울려 퍼졌던 것이 바로 그들의 음악이었다.
1950년대 말~60년대 초반, 록앤롤은 블루스, R&B, 컨트리, 가스펠의 요소를 결합하여 형성되었다. 이 장르의 기반을 다진 것은 분명 흑인 아티스트들이었다. 척 베리, 리틀 리처드, 보 디들리 등은 오늘날까지도 록의 시조로 불린다. 그러나 백인 가수 엘비스 프레슬리가 흑인 스타일을 차용해 폭발적인 인기를 얻으면서, 흑인 아티스트들은 상업적으로 소외되었고, ‘백인이 부른 흑인 음악’이 시장을 장악하게 되었다. 이는 음악 산업 내 구조적 인종차별의 대표적인 사례이며, 오늘날까지도 ‘문화적 전유(Cultural Appropriation)’ 논쟁의 핵심에 자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흑인 음악가들은 침묵하지 않았고, 그들의 음악은 계속해서 백인 중심의 산업 질서를 흔들어 놓았다.
1970년대에는 뉴욕 브롱스의 빈민가에서 힙합이라는 새로운 장르가 탄생했다. 힙합은 단순한 음악 장르가 아니라, 흑인 청년들이 구조적 차별 속에서 자신들의 삶과 불만을 드러내는 문화적 저항이었다. DJ와 MC 문화, 비트박스, 브레이크댄스 등으로 구성된 힙합은 당시 언론과 정치가 외면하던 흑인 커뮤니티의 목소리를 대변했다. 그랜드마스터 플래시, KRS-One, 퍼블릭 에너미는 랩을 통해 가난, 경찰폭력, 마약, 교육 격차 같은 문제를 전면적으로 제기하였고, 이를 통해 힙합은 사회운동과 결합한 가장 정치적인 대중음악으로 진화했다.
1980년대는 마이클 잭슨의 시대였다. 그는 단순한 ‘팝스타’를 넘어, 흑인 아티스트로서 MTV의 인종 장벽을 최초로 허물고 전 세계 대중음악계를 장악한 인물이었다. ‘Thriller’, ‘Billie Jean’, ‘Beat It’ 등은 백인 중심이었던 대중문화 소비 시장에 흑인 음악을 각인시킨 대표작들이며, 이를 통해 미국 음악 산업 내 흑인 시장의 상업성이 본격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이후 프린스, 휘트니 휴스턴도 그 흐름을 이어받아 흑인 음악의 미학과 상업적 성공이 양립할 수 있음을 입증했다.
현대에 들어 비욘세, 제이지, 켄드릭 라마, 릴 나스 엑스, 타일러 더 크리에이터 등은 단순히 스타를 넘어 흑인의 문화적 리더로 자리 잡았다. 이들은 음악에서 인종, 젠더, 계급, 정치 문제를 노골적으로 다루며 흑인 음악의 진정성을 확장하고 있다. 특히 켄드릭 라마는 퓰리처상을 수상하며, 흑인 랩 음악이 고급 문화로도 인정받을 수 있다는 선례를 만들었다. 이들은 단순히 음악을 팔지 않고, 자신의 정체성을 상품화하는 데에서 멈추지 않고, 흑인의 역사를 재구성하고, 현재를 비판하며, 미래를 제시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미국 음악 산업은 흑인 없이는 설명 자체가 불가능하다. 미국 흑인들은 음악을 통해 생존했고, 산업을 키웠으며, 미국 문화를 이끌었다. 그들은 끊임없이 음악을 통해 투쟁했고, 이를 통해 존엄을 지켰다. 미국 음악 산업이 전세계를 선도하며 K-POP과 같은 파생 장르를 생성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이름 없이 린치당해 희생된 수많은 흑인 뮤지션들의 노력과, 그 진정성 위에 세워진 창조성이 있었다. 오늘날 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음악 장르 대부분이 흑인 커뮤니티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은, 미국 내 흑인의 음악적 진심과 역사적 기여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증거다.
이러한 흑인 음악의 폭발적인 창조성과 전파력은 단순히 문화적 다양성을 풍부하게 만든 데서 끝나지 않고, 미국 전체 사회와 경제에 실질적이고 막대한 이익을 가져다주었다. 먼저 음악 산업 차원에서 흑인 아티스트들은 미국 음반 산업의 수익 구조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블루스와 재즈, R&B, 힙합 등 흑인 장르가 주도권을 잡으면서 미국 음반사는 글로벌 음악 시장을 선점할 수 있었고, 특히 1980년대 이후 MTV의 세계적 보급과 함께 미국산 흑인 음악이 전 세계 팝 시장을 장악했다. 이는 미국이 단순한 문화 소비국을 넘어서 문화 생산의 중심국가가 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7.2.1. 냉전과 미국 흑인 음악
정치 외교적으로도 미국은 흑인 음악을 민주주의, 표현의 자유, 다양성 존중 등의 자유 서방 체제의 가치를 선전하는 수단으로 적극 활용하였다. 이는 단순한 문화의 흐름이 아닌, 냉전이라는 글로벌 전쟁 구도 속에서 전개된 전략적 문화외교였다. 소련과의 체제 경쟁 속에서 미국은 자신들의 우월한 체제 가치를 알리기 위해 음악과 문화를 전략적으로 활용하였는데 이때 흑인 음악은 핵심적인 외교 자산이었다.| |
루이 암스트롱, 듀크 엘링턴, 디지 길레스피 같은 흑인 재즈 거장들은 국무부의 후원을 받아 ‘재즈 대사(Jazz Ambassadors)’라는 명칭 아래 유럽, 중동, 아프리카, 아시아 등 제3세계 국가를 순회하며 미국식 자유의 이미지를 선전하였다. 이들은 단순한 공연자가 아닌, 미국의 자유주의 체제와 표현의 자유를 몸소 보여주며 미국이 소련보다 더 우월하다는 점을 선전하는데에 있어 '살아 있는 증거'로 여겨졌다. 냉전 시기 미국 흑인 음악은 단순한 대중문화의 차원을 넘어, 체제 간 이데올로기 경쟁의 문화적 전선에서 실질적인 전략 자산으로 기능했던 것이다. 미국은 흑인 음악을 통해 자신들이 내세우는 자유, 창의성, 다양성의 가치를 전 세계에 체험적으로 전달할 수 있었으며, 이는 소련이 주장하던 ‘미국은 위선적인 인종차별국가’라는 프레임에 맞서는 효과적인 반박 수단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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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이클이 처음으로 문워크를 선보인 1983년 모타운 25주년 기념 Billie Jean 공연의 한 장면. |
이 과정은 단순한 음악 유행을 넘어 냉전기 남북한의 체제 경쟁과도 연결되었다. 대한민국이 미국식 대중문화를 폭넓게 받아들이는 모습은 표현의 자유와 개방적 사회라는 이미지를 강화하는 효과를 가져왔고, 이는 당시 문화공보부와 방송사의 국제화, 다원화 기조와 맞물려 자유주의 체제의 매력을 강조하는 문화적 수단으로 작용했다. 같은 시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서구 대중음악을 자본주의 퇴폐문화로 규정하며 금지했고, 특히 미국 흑인 음악은 사회주의 체제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되어 철저히 차단되었다. 동일한 음악이 남한에서는 자유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지고 북한에서는 통제 대상으로 배척된 점은 양 체제의 문화적 대응방식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미국 흑인 음악은 미국 내부에서도 복잡한 의미를 지녔다. 미국 정부는 냉전기 흑인 재즈와 블루스 연주자들을 해외에 파견하여 미국의 문화적 다양성과 창조성을 선전하는 문화외교를 펼쳤다. 루이 암스트롱과 디지 길레스피 같은 뮤지션들은 중동, 아프리카, 아시아, 동유럽 등을 방문하며 미국의 문화적 영향력을 확장했지만, 이들은 본국에서 여전히 분리 정책과 숙박 배제, 투표권 차별 같은 현실을 겪어야 했다. 루이 암스트롱이 1957년 리틀록 고교 통학 사건 당시 미국 정부의 소극적 대응을 비판하며 소련 공연을 거절한 사건은 이 모순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 흑인 음악은 결과적으로 냉전 문화전선에서 매우 강력한 효과를 발휘했다. 재즈, 소울, 힙합, 브레이크댄스는 공산주의 국가들이 따라하거나 터치할 수 없는 수준의 표현의 자유를 세계에 보여주었고 이는 이념 선전이나 군사력으로 대응할 수 없는 문화적 파급력을 만들어냈다. 당연히 소련과 동유럽의 젊은 세대는 미국식 대중문화에 점점 더 매료될 수 밖에 없었고 이는 공산주의 체제가 강조하던 이념적 정당성을 서서히 약화시키는 실질적인 압력으로 작용했다. 총과 탱크가 아니라 음악과 춤이 공산주의 체제를 잠식한 것이다.
대한민국 또한 이러한 문화 흐름을 수용하면서 자유주의 체제의 매력을 더욱 강화할 수 있었고, 이는 남북한 사이에서 문화적 우위를 확보하는 데 중요한 자산이 되었다. 북쪽으로 서태지 같은 음악을 쏴올렸고 젊은 북한 병사들이 그러한 것들을 못듣게 하였다. 미국식 음악은 한국 사회에서는 자유롭고 개방된 사회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졌고, 북한에서는 차단해야 할 위험 요소로 규정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대비는 냉전기 미국 흑인 음악이 단순한 오락을 넘어 자유주의 체제를 확산시키고 공산주의를 약화시키는 데 실질적으로 기여한 문화적 무기였음을 보여준다. 결론적으로 미국 흑인 음악은 대한민국에서는 자유주의 사회의 문화를 확립하는 데 도움을 주었고, 공산주의권에서는 통제할 수 없는 문화적 균열을 일으켰으며, 세계적으로는 미국이 냉전에서 공산주의를 압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문화적 힘이었다.
7.3. 스포츠
4대 프로 스포츠를 기준으로 미국 흑인들이 가장 많이 하는 스포츠는 농구이다. 실제로 NBA 농구 경기를 보면 흑인 선수가 가장 많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무려 74% 가량의 선수들이 흑인이다. 힙합으로 성공한 랩스타와 더불어 가장 먼저 떠오르는 흑인의 출세 루트로 흔히 생각된다.[48] 또 미국 내 최고 흥행력을 자랑하는 미식축구도 농구 못지 않게 많이 하며 NFL 선수 중 흑인의 비중이 59% 수준이다.반면 아이스하키는 인기가 없는 편이다. 아이스하키의 종주국은 미국이 아닌 캐나다인데, 캐나다는 흑인 인구가 상대적으로 적은 국가이기도 한데다[49] 워낙 오래 전부터 백인들이 즐기던 스포츠이고 인프라와 장비 투자가 필요하다 보니 농구, 미식축구와는 출발부터 달랐다. 물론 NHL 내에도 흑인 선수는 역사적으로 꽤 있었고 지금도 그렇지만 백인 선수들과 비교하면 여전히 적다. NHL은 흑인 팬층을 공략하기 위해 흑인 인구가 과반을 넘는 애틀랜타에 두 번이나 하키팀을 유치하였으나, 모두 저조한 인기를 극복하지 못하고 결국 연고지를 이전한 바 있다.
7.4. 서브컬처
인종간의 문화가 옅어지기 시작하는 Z세대부터는 흑인 특유의 문화가 옅어지고 있다. Z세대 흑인들의 독특한 특징이라면 어렸을때 드래곤볼, 나루토를 접한 사람들이 많아 일본 애니 덕후의 비율이 굉장히 높은 특이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50] 또한 폐쇄적이었던 앞선 세대와 달리 타 인종과 같이 어울리는 일이 많고, 소수자 문제에 개방적이며, 문화적으로 보수적인 면이 많이 옅어졌다. 최근에는 한국에 관심을 가지는 흑인들도 많이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힙합만 봐도 이전과 달리 폭력적인 면이 많이 옅어졌고, 예전 같으면 상상도 못할 오타쿠 래퍼라던지, 게이 래퍼라던지 여러 다양하고 개성 있는 래퍼들이 등장해 힙합씬을 휘젓고 있다.8. 사회
흑인들의 사회는 현재에 들어서는 매우 분화, 다양화하였고, 개인주의적으로 변했다. 흑인들의 향상된 사회적 지위 덕에 흑인들은 다양한 혜택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흑인들의 삶은 여전히 향상되지 않은 면이 있다. 미국 남부에서 플랜테이션 농업에서 대규모 농업기업 식으로 바뀐 후, 흑인들은 대규모로 미 북부, 동부, 서부 대도시에 이주했다.[51] 그들은 흑인 경제학자 토머스 소웰이 말하던 문화를 가지고 왔다. 결과 미 남부에서 백인이 보여주던 행위를 그대로 흑인들이 따라하게 되었다.미국 흑인은 출산율이 미국 내에서 비교적 높은 집단 중 하나다. 미국 백인들의 출산율이 1970년대 이래로 1명대 후반을 유지하는 동안 흑인들은 2010년대 초반까지도 2명대를 꾸준히 유지했다. 그리고 인구 증가 지역 분포도에서 대부분 미국 남부에서 강세를 보이고 있다.[52] 다만 인구가 폭증했다는 것도 1980년대까지의 얘기지, 1990년대 와서는 미국 평균보다 약간 높은 수준이 되었고, 2010년대 이후로 흑인도 출산율이 인구대체선 아래로 떨어진지라 인구가 폭증한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지금은 피임률이 높아지면서 덜했지만 미국이 높은 청소년 임신으로 한창 골머리를 앓았을 1980년대에 백인과 함께 청소년 임신률에 기여하는 집단으로 손꼽혔다.
미국 흑인들의 주요 명절로는 콴자(Kwanzaa)가 있다. 흑인이라고 다 콴자를 챙기는 것은 아니고 출신 경로가 매우 다양한 미국 흑인 특성상 주로 자기 부모가 어떤 아프리카 국가 출신인지 모르는 미국 흑인들만 챙긴다. 아프리카 고유 명절도 아니고 단순히 미국 흑인들이 만든 기념일과 같다. 그래서 주로 카리브 흑인들, 이주 흑인들은 콴자를 따로 챙기지 않고 뭔지도 모르는 경우가 많다.
흑인들은 미국 사회에서 상대적으로 열악한 지위에 있지만, 그럼에도 미사회의 진정한 일원으로 받아들여진다. 거의 어떤 경우에도 절대적으로 미국인이라 인식된다. 어지간한 극렬 백인우월주의자들조차도 흑인에게 교육열이 떨어지고 범죄율이 타인종보다 높다 뭐라 하지 대다수는 아프리카로 돌아가라는 발언까지는 하지 않는다.[53] 이는 흑인들 대다수가 자발적으로 이민 온 것이 아니라 끌려온 사람들의 후손이니 당연한 것이다. 따라서 아시아인이나 히스패닉처럼 '너네 나라로 돌아가라' 식의, 법적으로 엄연히 미국인임에도 외부자로 인식되는 인종차별에 마주칠 가능성은 낮다.
8.1. 빈곤율과 흑인 소유 사업
미국 흑인들의 빈곤율은 2019년 18.8%, 2020년 19.5%로 Great Migration을 통해 1940년 70%였던 빈곤율이 1959년 50%대 초중반, 1966년 ~ 1967년 40% 밑까지 내려오며 흑인 중산층과 부유층이 많이 형성되었다. # 흑인들의 80% 정도는 빈곤하지 않다는 말인데 그렇다 해도 20%가 넘는 흑인들이 빈곤층이며 이들의 많은 경우가 이러한 게토에 사는 것은 심각한 사회 문제다. 백인의 빈곤율이 2020년 기준 8.2%며, 아시아계는 전체 아시아계 미국인 중 2020년 기준 8.1%가 빈곤하다. #
상대적으로 흑인들이 많이 사는 지역은[54] 백인들이 많은 지역과 비교해봤을 때 대체적으로 가난한 편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는 인종차별이 아니라 실제로 미국에서 살아본 외국인들과 미국인들이 직접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게 흑인들은 19세기 중반까지 일부 자유인을 제외하면 노예신분으로 살아왔고 지속적으로 행해진 차별 정책과 린치[55], 백인 폭동 때문에 백인들과 비교해봤을 때 부를 축적할 수 없었다. 털사 인종 학살이 대표적인 예로 백인 폭도들은 1921년 당시 미국에서 가장 부유한 흑인 동네 중 하나였던 털사의 그린우드를 방화, 약탈했다. 190개의 흑인 소유 사업이 파괴되었고 10,000명의 흑인 주민들이 살고 있던 집을 잃었다. #
수준 낮은 교육 환경을 악습으로 대를 이어서 작용했다. 물론 모두 다 대를 이은 건 아니고, 흑인의 빈곤율은 1940년 70% 이상에서 1966년 ~ 1967년 40% 밑으로 떨어졌다. 하지만 1980년대부터의 대량 투옥 사태의 영향으로 흑인들의 빈곤율이 1960년대 중후반보다는 느린 속도로 떨어지고 있지만 1990년대 중후반에 크게 감소했고 2000년대 초중반에는 이 근처를 유지하다 대침체로 2014년까지 증가하다가 2010년대 중후반에 크게 감소해 2019년에는 18.8%를 기록하게 되었다. 이들 빈곤층이 가난을 대물림하는 것. 물론 이중에서 자수성가한 사람도 일부 있지만 대부분의 흑인 빈곤층이 가난을 대물림한다. 이건 흑인 뿐만 아니라 미국 내의 모든 인종 빈곤층들의 문제다.
미국 흑인 소유 사업 (Black-Owned Business)도 미국 흑인 사회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데 20세기 초반에는 털사 인종 학살 이전의 그린우드처럼 인종 분리(Segregation)라는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사업을 했다. #
20세기에 큰 성공을 거둔 흑인 소유 사업으로는 노스 캐롤라이나 뮤츄얼 라이프 인슈런스 컴퍼니,[56] 모타운,[57] BET[58] 등이 있다. 21세기에는 2001년의 로버트 루이스 존슨을 시작으로 10억 달러가 넘는 재산을 보유한 미국 흑인 억만장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2020년대에는 미국 흑인들의 사업이 증가하고 있는데 팬데믹 이전에도 미국 흑인들의 사업 소유가 늘어나고 있었지만 2020년대 들어서 크게 증가했다. 현재 미국에는 200만 개가 넘는 흑인 소유 소기업이 있다. #
2023년 3월에는 미국 흑인 실업률이 5%를 기록했고 이는 역대 최저다. 미국 흑인과 미국 백인의 실업률 차이도 1.8%로, 역대 최저를 기록했다. #
백인들은 현재까지는 미국의 주류 인종이다. 현재는 부유층 흑인[59]도 있고 빈민층 백인들[60]도 있긴 하지만 평균적으로 봤을 때 부자라고 하면 보통 백인을 떠올리지 흑인을 떠올리지 않으며 실제로 많은 부자들도 백인이다. 흑인들의 지능이 떨어진다거나 게으름, 유전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고[61][62] 일반 백인들은 또 백인이 딱히 우수해서라기 보다는 노예제 시절과 그 뒤에 99년간 법적으로 존속된 흑인에 대한 제도적, 사회적 차별 때문에 격차가 벌어지는 것이다.[63]
심지어 미국에는 1930년대에 뉴딜 정책의 일환으로 연방주택국이 흑인과 백인을 분리하는 시스템을 만들었다. Redlining 이라고 하는데 흑인이 밀집한 빈곤층 거주 지역을 경계 지역으로 설정하고 대출, 보험, 신용카드 발급 등 금융서비스 등을 거부하거나 높은 대출 금리를 요구하는 등의 차별을 두는 것이다. 흑인이 사는 곳에는 부동산 지도에서 빨강색으로 선을 그은 것에서 유래했다. 문제가 되는 부분이 뭐냐면 그 지역에 살고 있는 백인에겐 차별이 없었다는 것이다. 당연히 은행이라면 소득을 감안해서 대출 상품을 주는 것이 맞는데 피부색이 관여되어서 문제가 된 케이스다. 이로 인해 흑인은 아무리 자본력이 충분하고 돈이 많아도 백인과 달리 부동산 투기를 쉽게 할 수가 없었다. 부동산 투기를 할 수 없어 당연히 재산을 늘리는 방법에도 한계가 있었다. 그러니 대부분의 흑인들은 가난을 대물림하게 되었으며 설령 부자 흑인들이라 해도 백인들만큼 재산을 불려나가진 못했다.
이러한 노골적인 범국가적 인종차별은 1968년 공정 주택 거래법(Fair Housing Act)에 의해 불법으로 지정됐음에도 아직까지도 유지되고 있으며 흑인으로 태어난 이상 여러 가지 페널티를 앉고 살아야 한다. 쉽게 말해 흑인은 재산을 불리는 것조차도 마음대로 못한다. 대출이 가능해도 불리한 대출 조건을 적용받는 등의 불이익도 한몫한다. # 따라서 미국에 고속도로, 고가도로, 큰 나들목이 위치한 지역이 대부분 흑인 동네인 이유가 이것 때문이다. 젠트리피케이션이라고 하는데 가치가 높은 땅은 모두 백인에게 넘어갔으며 흑인들은 가장 인기가 없는 지역으로 쫓겨난 셈이다. 심지어 부를 쌓으며 발전하던 흑인 동네들의 중심지에다 고의적으로 고속도로를 건설한 사례도 많다. # 그리고 그러한 만행들은 최근에서야 드러나는 경우가 많으며 이전에는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흑인 사회의 가장 큰 문제점은 가난의 대물림이라고 볼 수 있다. 미국 비영리기관인 진취성개발조합(CFED)과 정책연구원(IPS)보고서에 따르면 백인 가구의 평균 부는 2013년 기준 65만 6,000달러(약7억 2,000)에 달하지만 흑인 가구의 평균 자산은 약 85,000달러(9,300)에 불과하다.[64] 부와 가난의 대물림 속에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만큼 교육도 못받으니 트러블도 많이 발생하고 그런 이미지가 미디어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
또한 빈곤한 흑인들의 경우, 자식을 낳으면 그 자식들이 어려서부터 범죄에 익숙해지거나 또 이로인해 약쟁이로 자라는 경우도 많다. 노숙자 문서에도 나와있지만, 미국 노숙자들중 주류는 흑인들인데다 이들은 약쟁이인 경우가 많고 또한 강간을 비롯한 범죄도 많이 저지른다. 또한 빈민가에서 자란 흑인들중 변호사, 의사, 교수, 사업가 등 자수성가에 성공한 인물들의 경우도 보면 어린시절 범죄에 익숙한 환경에서 자란 경우가 많이 있다.
8.2. 비만 문제
미국 흑인 사회의 평균적인 빈곤은 평균적으로 높은 비만율로도 이어진다.# 여러 통계에서 미국 내 여러 인종 중에서 흑인들의 비만율이 독보적으로 높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흑인이 가난하니까 결국 신선한 야채나 과일, 생선, 생수 같은 제품들을 소비하지 못하고 하루종일 버터와 오일, 혹은 당분과 나트륨에 칠갑된 싸구려 정크푸드나 먹으니 비만율이 오를 수 밖에 없는 것.# 이는 이른바 식품 사막 이론하고도 맥락이 닿는다. 다만 빈곤 문제 외에도 유전적인 영향도 있다.[65] 그나마 수박이나 감자, 옥수수는 저렴해서 빈곤한 흑인들도 쉽게 소비한다. 빈곤층 흑인들이 야채, 과일을 소비하기 어려운건 교도소 죄수들보다도 나을게 없는데, 죄수들은 비록 품질이 낮을지언정 깍둑썰기를 한 몇가지 종류의 채소라던가 샐러드 및 오렌지, 사과 등의 과일을 배식 받는다.8.3. 교육
2019년 기준 25세 이상 미국 흑인들의 87.9%가 고졸 이상이며,[66] 25세 이상 미국 흑인들의 26.1%가 대졸 이상이다.[67]2018년 기준 18세 이상 24세 이하 미국 흑인들의 고등학교 중퇴율은 4.9%로, 18세 이상 24세 이하 미국인들의 평균 고등학교 중퇴율 5.7%보다 낮았다. #
9. 범죄
We as black people are never going to be successful, not because of you white people, but because of other black people. When you are black, you have to deal with so much crap in your life from other black people.
우리 흑인들은 절대 성공할 수 없을 겁니다. 그 이유는 백인이 아니라, 바로 같은 흑인들 때문입니다. 흑인으로 살아가다 보면, 다른 흑인들이 쏟아내는 온갖 비난과 방해에 시달리게 됩니다.
For some reason we are brainwashed to think, if you're not a thug or an idiot, you're not black enough. If you go to school, make good grades, speak intelligent, and don't break the law, you're not a good black person. It's a dirty, dark secret in the black community.
어째서인지 우리는 이상한 관념에 세뇌되어 있습니다. 네가 깡패도 아니고 멍청하지도 않으면, 흑인답지 않다는 식입니다. 학교에 잘 다니고, 성적이 좋고, 똑똑하게 말하며, 법을 지키면 오히려 ‘진짜 흑인’이 아니라는 인식이 존재하죠. 이것은 흑인 커뮤니티 내부의 더럽고 어두운 비밀입니다.[68][69]
There are a lot of black people who are unintelligent, who don't have success. It's best to knock a successful black person down because they're intelligent, they speak well, they do well in school, and they're successful. It's just typical BS that goes on when you're black, man.
배우지 못하고 성공하지 못한 흑인들도 많습니다. 그런데 그런 이들 중 일부는, 똑똑하고, 말 잘하고, 공부 잘하고, 성공할 가능성이 보이는 흑인들을 끌어내리는 데 힘을 쏟습니다. 흑인으로 살아갈 때 흔히 마주치는 아주 전형적인 현실이죠.
- 찰스 바클리(전 NBA 선수이자 방송 해설자) (인터뷰 출처)
우리 흑인들은 절대 성공할 수 없을 겁니다. 그 이유는 백인이 아니라, 바로 같은 흑인들 때문입니다. 흑인으로 살아가다 보면, 다른 흑인들이 쏟아내는 온갖 비난과 방해에 시달리게 됩니다.
For some reason we are brainwashed to think, if you're not a thug or an idiot, you're not black enough. If you go to school, make good grades, speak intelligent, and don't break the law, you're not a good black person. It's a dirty, dark secret in the black community.
어째서인지 우리는 이상한 관념에 세뇌되어 있습니다. 네가 깡패도 아니고 멍청하지도 않으면, 흑인답지 않다는 식입니다. 학교에 잘 다니고, 성적이 좋고, 똑똑하게 말하며, 법을 지키면 오히려 ‘진짜 흑인’이 아니라는 인식이 존재하죠. 이것은 흑인 커뮤니티 내부의 더럽고 어두운 비밀입니다.[68][69]
There are a lot of black people who are unintelligent, who don't have success. It's best to knock a successful black person down because they're intelligent, they speak well, they do well in school, and they're successful. It's just typical BS that goes on when you're black, man.
배우지 못하고 성공하지 못한 흑인들도 많습니다. 그런데 그런 이들 중 일부는, 똑똑하고, 말 잘하고, 공부 잘하고, 성공할 가능성이 보이는 흑인들을 끌어내리는 데 힘을 쏟습니다. 흑인으로 살아갈 때 흔히 마주치는 아주 전형적인 현실이죠.
- 찰스 바클리(전 NBA 선수이자 방송 해설자) (인터뷰 출처)
흑인 사회에서 범죄 문제는 여전히 중요한 이슈 중 하나다. 흑인 커뮤니티 내부에서도 범죄율에 대한 반성과 자성의 목소리가 꾸준히 제기되고 있으며, 이는 흑인 사회가 내부적으로 양분화되어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사례로 해석될 수 있다. 미국 전체 인구에서 흑인이 차지하는 비율은 약 13%에 불과하지만, 교도소 수감자의 상당수가 흑인이라는 점은 수치적으로도 확인된다. 예를 들어, 흑인 남성은 미국 전체 인구의 6~7% 정도에 불과함에도 불구하고, 전체 교도소 수감자의 약 33%를 차지하며, 강력범죄 범죄자 중 약 21.6%가 흑인 남성으로 구성된다.출처: 미국 법무부 범죄통계 보고서(2018).
이러한 통계는 다른 인종에 비해 흑인이 형사 사법 시스템 내에서 훨씬 높은 비율로 수감되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물론 이 수치는 흑인 전체를 범죄자로 간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전제로 해석되어야 한다. 대부분의 흑인은 당연히 법을 지키며 살아가고 있으며, 통계상 높은 범죄율은 특정 계층이나 지역의 구조적 문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러나 범죄율이 높다는 현실은 선량하게 살아가는 흑인들에게도 사회적 낙인으로 작용하며, 흑인이라는 인종 전반에 대한 편견 형성에 영향을 준다는 점에서 중대한 문제다. 실제로 일부 백인들이 흑인을 경계하거나 혐오하는 주요 이유로 '범죄율'을 언급하는 경우가 많으며, 이는 언론 보도, 정치적 담론, 사회적 상호작용에도 영향을 끼친다. 그렇다고 해서 이 문제를 단순히 '흑인은 본질적으로 폭력적이다', '흑인은 열등하다'와 같은 인종주의적 편견으로 환원시키는 것은 위계를 목적으로 하는 극단적인 오류다.
오늘날 흑인 사회가 직면한 범죄율 문제는 단순한 개인의 도덕성 문제나 인종적 특질 때문이 아니라, 노예제와 인종차별, 주거 분리, 교육 격차, 경제적 배제, 차별적 수사 관행 등 미국 사회역사 속 구조적 문제들이 복합적으로 누적된 결과다. 흑인이 다른 인종보다 유독 많이 수감된 것은 단지 범죄 발생률 때문만이 아니라, 수사·기소·재판 단계에서의 인종적 편향, 공공 서비스 접근성, 경제적 불평등 등 다양한 요인이 결합된 결과인 것이다. 이러한 배경에 대한 충분한 이해 없이 미국 흑인 집단 전체를 단정하는 것은 위험하며, 미국 내 인종 갈등의 악순환을 반복시키는 원인이 될 수 있다. 이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분석은 다음 단락에서 이어진다.
범죄 이슈가 발생한 이유는 흑인 가정의 빈곤과 관련이 깊다. 많은 흑인 청소년들이 문화적 자원이 부족한 가정에서 자라며, 사회보수주의 성향이 강한 미국에서는 흑인 편부모 가정이 높다는 사실을 흑인 범죄율과 연관시키는 경우가 많다. 영화 보이즈 앤 후드는 이러한 현실을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실제로 랩 가사에서도 자주 나타나듯, 흑인 가정의 아버지가 감옥에 수감된 경우가 많다. 또한 많은 흑인들이 갱 활동에 참여하는 이유는 생계수단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흑인 갱스터들은 경찰차만 오면 도망쳐야 하는 삶을 피하고 싶다고 호소한다.
흑인 빈곤율은 1940년부터 1970년까지 70%대에서 40% 이하로 감소했지만, 이후 '마약과의 전쟁' 여파로 인해 많은 흑인 빈곤층이 빈곤에서 벗어날 방법을 찾지 못했고, 결국 갱 활동을 선택하게 되었다. 크립스나 블러드 같은 갱단은 1970년대에 창단되었지만, 흑인 빈곤층의 갱 활동이 본격적으로 증가한 시기는 1980년대였다. 이러한 현상은 로널드 레이건 시대의 신자유주의 정책의 그림자라고 할 수 있다.
갱단의 구성은 흑인뿐만 아니라 히스패닉 갱이 절반을 차지하고, 아시아계 갱도 어느 정도 존재한다. 즉 인종 자체의 문제는 아니라는 것이다. 대개 생존형 범죄는 경제력과 연루된다. 예를 들어 China mac은 대표적인 아시아계 갱 멤버였으며, 아시아계 내에서도 빈부 격차가 커지고 빈곤층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미국 내 한인들 중에는 성공하여 잘 사는 사람들도 있지만, 빚에 쫓겨 어려운 삶을 사는 이들도 적지 않다.
사실 이 빈부 격차는 미국 전체의 문제이다. 빈곤율은 백인이 10%로 제일 낮고 아시아계가 15%로 그 다음, 흑인이 19%, 히스패닉계는 흑인보다 높은 빈곤율을 기록하고있다.[70][71] 거기다 흑인 가정의 자녀들은 제대로 된 교육의 기회 자체를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 큰데, 알다시피 미국 공교육은 거의 파탄 상태로 백인 학부모들은 약이나 빨고 학교폭력 문제도 심한 공립학교에 애들을 잘 안 보내고 싶어한다. 학군이 좋으면 몰라도 학군 안 좋은 가난한 동네들은 더 그렇다.
미국 특유의 반지성주의와 적은 교육 예산으로인해 공립학교는 파탄 상태인 만큼 교육이 정상적으로 될 리 없고, 백인들이 가기를 기피하는 공립학교는 상대적으로 가난한 흑인이 그 자리를 채운다. 선생들도 박봉에 열악한 여건 때문에 의욕적으로 가르치려고 하지 않으니 뭘 배우고 싶어도 못 배운다. 그 결과 흑인 빈곤층 사회가 일종의 갈라파고스화되어 미국 평균사회와 너무 유리되어 버렸다. 교육 부재로 인해 도덕성이 낮아 거리낌 없이 범죄를 저지르고, 갈라파고스화 된 흑인 빈곤층 사회는[72] 아무도 신경 안 써서 부모가 자식에게 도둑질을 가르치든 10대 비행청소년이 갱스터에 가입하든 아무도 신경 안 쓰게 되었고 이것의 결과물이 흑인의 범죄율이다. 흑인들 사이에서 쉽게 돈 벌이 할 수 있는 마약이나 폭력단(갱스터)가 퍼져 큰 문제이다. 그들은 대도시에서 뿌리를 내리고 마약을 퍼트려 흑인 사회를 병들게 만들었다. 1980년대 중후반 크랙이라는 코카인의 변종인 마약이 퍼져 흑인 사회가 괴멸적인 타격을 입었다. 이를 크랙 에피데믹이라고 하는데, 크랙을 통해 흑인의 진학률과 소득은 급격히 감소했다. 대도시의 흑인들은 삶에 대한 희망을 잃고 크랙에 의지를 하게 되었다. 물론 "대도시의 흑인들"은 빈곤층이 많다. 그러니까 흑인 빈곤층이 19%인데 White flight으로 인해 백인들이 어반 지역을 떠나 근교인 Suburban으로 떠났는데 이에 도시의 어반 지역은 백인이 없어서 아무도 신경을 써주지 않았고 결국 게토화 되었다. 이 흑인 게토는 1970년대까지만 해도 밝고 활기찬 모습이었지만 마약과의 전쟁과 크랙 에피데믹으로 인해 밝고 희망차던, 그러니까 빈곤을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던 흑인 게토 사회가 망가져 버렸다. 힙합 문화가 흑인 사회를 중심으로 1980년대에 퍼진 것도, 망가진 게토 사회의 청소년들은 힙합을 들으며 자신을 위로해보고자 했고[73] 갱스터 랩이 생긴 이유도, 이러한 흑인 게토 빈곤층의 저항을 대표하기 위한 음악이었다. 다만 90년대 당시 힙합은 이미 대중화되어서 유행에 민감한 백인들은 가사 뜻도 제대로 이해하지 않고 스눕 독이나 투팍등의 노래를 마구 틀었다.
물론 암암리에 남아있는 인종차별도 문제가 된다. 대체로 미국 경찰들은 흑인이라면 화이트칼라일지라도 의심하며#, 그저 화이트칼라가 아니라고 눈에 쌍심지를 켜고 지켜보며 사소한 일로도 체포하는 경찰의 인종차별과 폭력성도 문제이다. 마약 관련해서도 그러했으나 2010년 공정한 처벌법의 발효로 코카인이나 크랙이나 둘다 미국 연방지정 2급 마약류로 처벌 기준은 똑같다. 아무튼 그러다보니 흑인 사회에서 미국 경찰에 대한 인식은 대단히 나쁘다.
물론 흑인들의 Race Riot (인종 폭동)[74] 중 백인 경찰이나 흑인 경찰이나 흑인 용의자를 쏴죽이는 비율에 차이가 없다는 연구 결과도 있으나 # 저 연구에서도 결국 흑인이 죽을 확률이 높음을 인정하고 있으며 물론 흑인을 보면 발사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암암리에 흑인을 의심하는 인종차별은 남아있지만 다시 말해서 백인 경찰이 무슨 악마도 아니고 단순히 흑인을 싫어해서 쏴죽인다는 것은 아니지만[75] 오히려 비율로만 따지면 유색인종 경찰들은 같은 유색인들이 사는 동네에 파견되는 경우가 많아서 같은 인종인 범죄자를 쏘는 경우가 더 많았다고 한다.
사실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이 경찰이 시민을 얼마나 많이 죽였느냐보다는 '왜 죽였냐'가 더 중요하다. 미국 경찰이 흑인을 총기로 사살하는 사건은 단순히 수치의 문제가 아니라, 사망에 이른 정황과 경위가 비상식적인 경우가 많다. 제3자의 시각에서 보더라도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목숨을 잃는 사례들이 반복되고 있으며, 이는 미국 흑인 사회가 공권력에 저항하는 근본적인 배경이기도 하다. 실제로 별다른 위협을 가하지 않았음에도 단지 피부색 때문에 의심을 받고, 총에 맞아 숨지거나 체포되는 사건은 꾸준히 발생해왔다.
예를 들어, 편의점에서 간식을 사고 귀가하던 중 '수상하다'는 신고를 받고 백인 자경단에 의해 사살당한 트레이본 마틴 사건[76]은 전국적 분노를 불러일으킨 대표적 사례다. 또한 단순히 집에서 비디오 게임을 하고 있었을 뿐인데, 집 문이 열려 있다는 이웃의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에게 사살된 사건도 존재한다. 이 사건의 희생자는 28세 흑인 여성 Atatiana Jefferson으로, 조명조차 켜지지 않은 방 안에서 조카와 함께 놀고 있다가 창문을 통해 총에 맞았다. 해당 경찰은 결국 기소되어 유죄 판결을 받았지만, 이처럼 단순한 이웃 신고로 인한 과잉 대응은 공권력 남용의 전형적인 사례로 평가받는다.
이는 일회성 사고가 아니라 오랜 기간 누적되어온 공권력 남용의 사례로, 미국 사회 내부에서도 자성의 목소리가 꾸준히 나오고 있는 주제다. 실제로 2014년 퍼거슨 소요 이후, 미국 연방정부는 경찰의 체계적 인종차별을 줄이기 위해 각종 개혁안을 발표했으나, 지역 경찰의 독립성과 경찰 노조의 반발, 연방 차원의 통제력 부족으로 인해 실효성 있는 변화는 여전히 요원하다는 지적이 많다.
흑인 남성의 범죄율에 대해 말할 때 자주 인용되는 수치는 교도소 수감자 통계다. 실제로 흑인 인구는 미국 전체 인구의 약 13%에 불과하지만, 전체 수감자의 약 33%를 차지하고 있다(Bureau of Justice Statistics 기준). 이는 범죄율이 높은 측면도 있으나, 동시에 경찰의 표적 수사, 체포 빈도, 불심검문 등 수사 절차 자체에서의 편향도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로 해석된다. 뉴욕시의 "Stop and Frisk" 정책의 통계만 보더라도, 흑인과 라틴계 시민이 압도적으로 높은 비율로 단속 대상이 되었으며, 실제 범죄 연루율은 백인과 큰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
흑인이 모두 위험한 인종이라는 식의 일반화는 명백한 인종차별이며, 미국도 법치 국가인 이상 공권력의 남용과 사인은 명백히 불법이다. 흑인이 공격적으로 행동했다는 이유만으로 치명적인 무력을 사용하는 것은 정당화될 수 없으며, 이러한 논리는 극우 백인우월주의 단체에서나 나올 법한 주장이다. 법적 정의는 행위의 맥락과 비례 원칙에 따라 이루어져야 하며, 미국 수정헌법 제4조[77]는 과도한 수색 및 압수로부터 시민을 보호할 권리를 명시하고 있다. 즉, 흑인이니까 위험하다는 이유만으로 과잉 대응을 하는 것은 헌법이 보장하는 기본권을 침해하는 행위이다. 저러한 데이터에 근거하여 흑인에 대한 일반화를 하는 것이 잘못된 이유는 단순히 도덕적 문제를 넘어서 사실관계와 논리 구조 자체가 틀려 있기 때문이다. 범죄율 통계는 인종이 아니라 사회적 환경에 따라 달라지며 이를 인종적 본질로 연결하는 것은 통계학에서 말하는 상관관계와 인과관계의 오류다. 즉 쉽게 말해 생물학적으로 흑인이라서가 아니라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이다. 편견은 개인의 행위를 집단의 특성으로 단순화시켜 판단하게 만들어 실제로는 범죄와 무관한 대다수의 일반인에게 낙인을 찍는다. 이는 사회적 신뢰를 훼손하고, 오히려 범죄를 재생산하는 악순환을 만든다. 그리고 특정 인종에 대한 편견과 여론은 공권력의 판단을 왜곡시켜 정당한 법집행 대신 인종적 프로파일링(racial profiling) 같은 포퓰리즘스럽고 차별적 관행으로 이어지도록 하기 때문이다. 편견은 단순히 기분 나쁜 발언이 아니라 특정 인종에 대한 사회적 불평등을 강화하고 법의 공정성을 무너뜨리는 활동에 불과하다.
또한 경찰과 흑인 사회 간의 불신과 감정의 골도 상당하다. 미국 경찰의 과잉진압 문제는 인종을 가리지 않고 제기되고 있지만, 특히 흑인 사회에서는 일상 속 공포로 작용하고 있다. 예를 들어, 단순히 승강장에서 샌드위치를 먹었다는 이유로 체포된 사례도 있다#[78].
운전 중 방향지시등을 켜지 않았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수감 중 사망한 사례도 있다[79]. 이처럼 사소한 위반 사항도 흑인이라는 이유로 중범죄 취급을 받는 일이 많고, 대다수는 경찰의 행위가 '정당 방위'로 종결되어 제대로 된 법적 처벌조차 받지 않는다. 언론 보도나 시민 항의가 동반되지 않는 한, 경징계에 그치거나 사건 자체가 은폐되는 경우도 많다.
한국인의 시각에서 보면 '경찰'이라는 이름이 주는 기대와 실제 미국 경찰의 행동 사이에는 큰 괴리가 있으며, 이를 동일선상에서 비교하는 것은 무리다. 한국 경찰은 대체로 준법적이며, 시민과의 물리적 충돌보다는 협상과 조율을 우선시하는 경향이 강하다. 반면 미국 경찰은 군사화된 장비와 전술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고, 체포 과정에서의 실탄 사용 비율도 높다.
결론적으로, 흑인 사회 내부의 자구적 노력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미국의 공교육 수준이 지역과 계층에 따라 크게 차이가 나는 이상, 단순히 교육을 강조하는 것만으로는 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반론도 존재한다. 실제로 도심 내 저소득층 밀집 지역의 공립학교는 교육 재정이 열악하며, 교사 확보도 쉽지 않아 교육 기회의 격차가 발생하고 있다. 이는 결과적으로 장기적인 빈곤과 범죄 연루 가능성을 높이는 구조적 악순환으로 이어진다.
덧붙여, 흑인이 피해자이고 백인이 가해자인 사건보다, 반대의 경우에 사형 선고율이 훨씬 높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Death Penalty Information Center의 자료에 따르면, 백인 피해자 살인사건에서 흑인 피고인이 사형을 선고받을 확률은 다른 조합보다 현저히 높다. 실제로 살인 범죄와 관련하여 무고하게 복역한 사례를 분석한 연구에 따르면, 무고한 흑인이 무고한 백인보다 감옥에 갈 확률이 7배 이상 높다는 통계가 존재한다#. 이 통계는 전체 범죄율에서 흑인 범죄율이 높다는 사실만으로는 설명되지 않으며, 제도 내 차별이 수사 및 재판 결과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방증이다.
다만, 동일한 범죄를 저질렀을 경우 흑인에 대한 형량이 높은 이유로는 흑인의 재범률이 타 인종보다 높은 경향도 영향을 준다는 분석이 있다. 미국 Sentencing Commission의 보고서에 따르면 흑인 남성은 다른 인종에 비해 평균적으로 더 긴 형량을 선고받고 있으며, 그 배경에는 재범 가능성뿐 아니라 유죄 협상에서 불리한 조건을 수용할 가능성이 높다는 구조적 문제도 있다. 이는 대부분 국가의 사법체계에서 재범에 대해 더 강한 처벌을 내리는 일반적인 원칙을 반영한 것으로, 형량 차이를 무조건 차별로만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시각도 존재한다. 다만 이 역시 재범률의 원인이 경제적·사회적 구조 문제와 무관하지 않다는 점에서, 단순히 개인의 책임만으로 치부할 수 없는 문제다.
9.1. 백인 경찰 혐오, 흑인 범죄자 옹호 현상
연행 도중 도주하는 흑인 용의자를 발포해 제압시킨 뒤 체포하자 백인 경찰에게 위협을 가하며 욕을 하는 흑인들(6분 8초 가량 성인인증 필요)[80]간단히 말하면, 주로 빈민층 흑인 동네에서 흑인 범죄자가 경찰에게 체포 당하면, 범죄자가 어떤 범죄를 저질렀던 간에 이를 무시하고 일단 체포하는 경찰들을 욕하고 위협하고 인종차별이라고 몰아가는 반면, 흑인 범죄자를 감싸는 현상이다. 이들은 경찰한테 시비거는 건 물론이고 위협적으로 몰려오는 등 아주 악명이 높다. # 같은 흑인 경찰은 물론이거니와 체포하는 경찰이 백인일 경우 공격성은 배로 강해진다.[81]
이는 상기된 빈민층 흑인 사회에서의 미국 경찰에 대한 인식이 나빠서 발생하는 문제가 큰 원인으로 분석된다. 예를 들어, 유튜브 같은 곳에서 미국의 용의자 체포 장면을 보여주는 동영상을 보면 댓글은 자신의 얼굴을 프로필 사진으로 한 흑인들이 "인종차별 경찰", "이게 경찰국가다."라는 등의 댓글을 다는 게 보이기도 하고,[82] 흑인 용의자가 흑인 동네에서 체포됐을 때 너나 할 거 없이 우르르 나와서 체포하는 경찰들에게 폭언을 퍼붓거나 위협을 가하는 영상을 볼 수 있다.[83][84] 그리고 인종차별로 무조건 몰고 가는 건 언제나 비슷비슷하기 때문에 흑인 이미지에 큰 타격을 주는 경우도 있다.
그러한 이유로 빈민층 흑인들의 이중성 때문에 미국 웹 커뮤니티에선 이를 비판하는 밈이 생겼는데 바로 dindu-nuffin.[85] 해석하면 "나(혹은 그, 그녀)는 아무 짓도 안 했다."쯤으로 해석되며 흑인 용의자가 경찰에 의해 체포되거나 상기한 구경 나온 마을 주민들이 체포 과정에서 경찰에게 자주 하는 말이며 명백하게 용의자가 잘못이 있거나 혹은 경찰에게 발포를 했다는 그 사실을 명백히 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시치미 뚝 떼고 인종차별이라 몰아 세우며[86] 자신 혹은 용의자에게 아무 잘못이 없다 하거나 더욱 심한 경우에는 마을 주민이 용의자에게 다가와[87] 감싸주는 말이나 동정하기도 한다. 이를 비판한 그림의 예시(잔인함 주의)[88]
위 Dindu Nuffins 밈과 비슷하게 Martin Looter King#이라는 멸칭도 있는데, 이는 퍼거슨 폭동 등의 사건에서 흑인 폭도들의 무차별적 약탈(Loot) 행위를 비꼬는 것이다. 무슨 이유에서든 제3자인 상인들의 재물을 손괴하고 절취하는 행위는 정당화될 수 없음에도 2021년 현재까지도 미국 리버럴 진영에서는 흑인 폭동 및 약탈을 미화하려는 시도가 심심찮게 발견된다. 그렇다고 해서 백인이 약탈을 하지 않은 것은 또 아니어서 결국 흑인이나 백인이나 같지만 욕은 흑인들만 먹고 있다고 비꼬기도 한다. 사실 예로부터 흑인은 백인들의 훌륭한 총알 받이 역할을 해오고는 있다.
모든 경찰이 백인인 것도 아니다. 경찰이라면 같은 흑인에게도 똑같은 일이 발생한다. 경찰이 백인이냐 흑인이냐와 같은 인종적인 문제는 아닌 이유가 뭐냐면 흑인 경찰의 비중은 2019년 기준 12.4% 수준으로 미국의 인구에서 흑인이 차지하는 비율[89]과 비슷하다. # 흑인들이 특별히 직업으로서 경찰에 거부감을 느끼지는 않는 셈이다.[90]
10. 미군
2017년 자료에 따르면 미군의 민족 구성은 다음과 같다. 백인이 57%를 차지하며, 흑인과 히스패닉이 각각 16%를 차지한다. 4%는 아시아계 미국인이며, 6%는 다른 민족이나 미응답했다. 실제 인구 비율은 2019년 기준 백인이 60.3%, 히스패닉이 18.5%, 흑인이 13.4%, 아시아계가 5.9%를 차지하는 점을 감안하면 흑인들은 실제 인구에 비해 다른 민족 집단에 비해 군인으로 복무할 확률이 높다.2019년 자료에 따르면, 현역 군인 132만 6,200명 중, 미국 흑인은 22만 7,736명으로 17.2%에 달한다. 사병을 기준으로 하면 18.9%에 달한다. 반면 장교에서는 흑인의 비율이 8.9%로 낮다.
미국 육군은 사병의 23.6%, 장교의 12.2%가 흑인이다. 미국 해군은 사병의 19.1%, 장교의 7.9%가 흑인이다. 미국 해병대는 사병의 11%, 장교의 5.7%가 흑인이다. 미국 공군은 사병의 16.8%, 장교의 6.2%가 흑인이다. 같은 지상군이지만 흑인들은 해병대보다는 육군을 선호한다. [91]
11. 소수 집단 우대정책
영어로 어퍼머티브 액션이라고 부른다. 흑인과 히스패닉은 여러 가지 혜택을 얻을 수 있다. 소수 집단 우대정책은 진보-보수 양 측간의 논란 대상이다. 보수측은 기회의 평등을 중시한다. 그래서 어퍼머티브 액션같은 결과적 평등을 위한 정책 폐기를 주장한다. 미 진보 측은 결과적 평등을 위해 소수 집단 우대정책을 찬성한다.일단 흑인 사회에서는 진보 측의 입장을 지지한다. 그러나 클래런스 토머스[92] 같은 흑인 보수주의자들은 이런 움직임에 반대한다. 그는 이렇게 발언했다. "소수 집단 우대정책은 흑인들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그들의 학력만 더 낮아질 뿐이다." 어퍼머티브 액션에 반감을 가지는 흑인들도 물론 있다. 왜냐면 이 어퍼머티브 액션이라는거 자체가 1960년대 흑인 민권이 높아짐에 따라서 흑인들 차별하지 않고 대학교 보내야 줘야 된다고 해서 만든거라, 그때 당시에는 도움이 됐을지 몰라도 2020년 아직까지 남아 있다는 점이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다만 흑인들이 공부를 잘해도 너무 빈곤해서 등록금을 내지 못해서 중도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
소수 집단 우대정책의 가장 큰 피해자는 주로 아시아인이다. 대학/대학원 진학시 흑인학생보다 월등한 스펙을 갖추고도 단지 중국계/인도계 혹은 한국계라는 이유만으로 성적이 낮은 흑인 학생은 붙고 아시아계 학생은 떨어지면서 핑계로 “럭비를 안 하는 걸 보니 리더십이 낮은가보군”이라는 피드백을 받는 등 어처구니 없는 차별 사태가 일어난다. 아시안은 흑인보다 더 높은 성적을 요구 받기 때문에 차별의 목소리가 높다.# 경제적인 형편이 좋지않거나 학업능력이 뛰어나지 않은 아시안은 아시안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유복한 집안에서 자란 흑인 학생보다 더 높은 성적을 요구받기 때문에 차별의 가장 큰 피해자로 지목된다.
주의해야 할 것은 아시안은 아시안끼리 경쟁한다는 점이다. 백인은 백인 학생 끼리 경쟁한다. 즉, 입학에서 같은 민족끼리 경쟁하는 시스템이다. 아시안들이 한국이든 중국이든 싱가포르든 전 세계에서 미국 내에서 경쟁하는 시스템이니 싸움이 되겠는가? 아시안들은 아시안들끼리의 상당한 경쟁을 뚫고 입학해야 되므로 상대적 박탈감이 심한 것. 그렇다고 해도 공부 하나도 안한 돌머리가 흑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명문대에 간다는 그런 케이스는 드물다. 아시안 보단 입학 성적이 상당히 낮은 건 사실이지만 어차피 명문대에 가려면 공부를 잘해야한다.
흑인 학생들은 타 인종보다 Athlete student (운동 특기)로 입학 하는 비율이 많이 높아서 상대적으로 입학시 학업성적이 떨어져 보이는 것도 있다는 것이다. 아시안들은 학구열이 엄청나게 높기 때문에 또 그만큼 부모님들이 많이 지원하고 경쟁자도 아주 많은 이유도 있다. 물론 흑인, 히스패닉의 커뮤니티에서는 상대적으로 교육열 및 경쟁 수준이 낮고, 그렇기에 부유층인 흑인과 히스패닉은 어퍼머티브 액션의 제도로 인해 많은 이익을 보는 것도 사실이다. 어퍼머티브 액션이 시대에 뒤떨어진 정책이라는 것도 이런 불평등 때문에 주장되는 것이다.
가장 유명한 예는 1978년에 일어났던 바키 대 캘리포니아대학교 사건이다. 요약하자면, 앨런 바키(Allan Bakke)라는 백인 대학생이 UC 데이비스 의과전문대학원에 낙방했는데, 소수인종 지원자들이 자신보다 낮은 학업 점수로 입학 한 것을 발견한 바키는 곧바로 대법원에 헌법 위반 (Title IV) 위반이라며 제소했고 결국 승소하여 UC 데이비스 의전으로의 입학이 허가되었다. 이후 UC 데이비스는 소송비를 내는걸 계속 거부하다가 바키에게 고소를 당하고 결국 1980년 2월에 18만 달러 가까이 물어줘야했다. 후에 앨런 바키는 UC 데이비스 의전을 정상적으로 졸업하고 메이오 대학병원에서 의사 경력을 이어나갔다고 한다.
또한 이 제도의 헛점을 이용한 사건도 있는데 인도인 비제이 초칼-잉엄이 미국 의대 입학이 불허되자 일부러 속눈섭을 자르고 대학의 흑인 단체에 흑인 친구의 도움을 받고 가입하고서 머리를 민 흑인처럼 보이게 프로필을 바꾸고 지원하니 합격이 됐다는 이야기다. 그것도 GPA는 그다지 높지 않은 3.1이었는데다가 부모가 중산층이라는 건 숨기지도 않았는데도. 물론 꼭 이득만 본건 아니라 흑인으로 오해받고서는 경찰이 '당신이 어떻게 이렇게 비싼 차를 모는겁니까'라는 질문을 받고 가게 주인이 도둑질했다고 누명을 씌우는 등 차별을 받았다고 한다.
어퍼머티브 액션 없이 운영되는 음악계, 스포츠계에서 흑인들이 아시아계에 비해 훨씬 더 두각을 나타내는데,[93] 아시아계 미국인들이 여기에 대해 인종차별 운운하지 않는다. 음악계, 스포츠계와 대학이 수입을 내는 매커니즘이 다르기 때문이다. 스포츠, 음악에서는 실력이 수입과 연관되지만 대학 입장에서는 학생의 실력보다는 학생의 출신 배경[94]이 대학 수입과 더 직결된다. 즉 대학 입장에서는 어퍼머티브 액션으로 인도계 학생들의 입학을 제한할 이유가 충분하지만, 방송가에서는 흑인 대신 아시아계 배우들을 굳이 방송에 들여보내야 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가난한 출신의 아시아계 학생들도 아시아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어퍼머티브 액션에 의해 대입을 할때 불이익을 받는 경우가 많고 부유한 흑인이 흑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수혜를 보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어퍼머티브 액션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도 높다. 극단적인 예시를 든다면, 자산이 수십억 달러에 이르는 제이지-비욘세 부부의 아이들이 하루하루 막일로 겨우 먹고사는 아시아계 불법이민자 가정의 아이보다 대학입시에서 압도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있다.
12. 유명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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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미국 흑인/유명 인물#s-|]]번 문단을#!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의 [[미국 흑인/유명 인물#|]] 부분을 참고하십시오.13. 관련 문서
- 미국 흑인 민권 운동
- 흑인 대이동
- 털사 인종 학살
- Black Lives Matter
- 시카고 인종 폭동
- 붉은 여름
- 마틴 루터 킹
- 맬컴 엑스
- 미국 흑인 영어
- White flight
- 인종 폭동
- 브라질 흑인
- 프랑스 흑인
- 블루스
- 흑표당
- 부두교
- 후두
- 흑인교회
- 흑인대학
- 흑형
- 아프리카
- 영국 흑인
- BBC(동음이의어)
- 갱스터 랩
- 후드
- 미국-아프리카 관계
- 아프로센트리즘
[1] 미국 흑인, 아프리카계 미국인[2] https://www.census.gov/library/visualizations/interactive/race-and-ethnicity-in-the-united-state-2010-and-2020-census.html[3] 인종 혹은 민족의식이 아니라 흑인 혈통을 가진 사람(혼혈)까지 포함하면 브라질 흑인 후손이 미국보다 훨씬 더 많다고 볼 수 있다.[4] 오바마는 케냐에서 유학을 온 흑인 아버지 버락 오바마 시니어와 캔자스주 출신 백인 어머니 앤 던햄 사이에서 태어난 흑백 혼혈이다.[5] 한국인 - 일본/중국/몽골/베트남의 차이가 아니라 한국 - 슬라브/게르만 정도의 차이가 난다.[6] 물론 아프리카에서도 나이지리아처럼 영화 많이 만드는 나라나 아프리카에서 유래한 음악으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장르인 아프로비츠가 존재하는 등 나름대로의 소프트 파워가 있는 나라들은 존재하며, 동시에 아프리카 각 국가들도 대중문화에 있어서 미국 흑인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는 했지만 경제적인 여유가 없다. 미국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라이베리아도 상황은 마찬가지다.[7] 단 단일민족국가에 가까운 한국인들은 기본적으로 인종간의 피부색의 구분을 하는 것이 좀 어려운 측면이 있다는 건 고려해야 한다. 반대로 미국이나 유럽 사람들도 동양인을 잘 구분하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8] 예를 들어서 머라이어 캐리의 경우 한국인의 눈으로 보면 백인처럼 보이지만 흑인 혼혈이며 본인의 정체성은 흑인이라고 여긴다. 유년기 심각한 인종차별을 겪었다고 한다. 즉, one drop rule이라는 나쁜 관습(이전에는 법)에 의해 순수 백인이 아니라면 인종차별 공격의 대상이 된다.[9] 현재는 흑인을 비하하는 용어로 간주된다.[10] 이들은 아메리카에 유입된 이후 독자적으로 문화를 이끌고 카리브해에서 살았기 때문에 세분하자면 "Afro-Caribbean people" 이라고 한다.[11] 참고로 모건 프리먼은 인종차별을 없애려면 애써 인종을 구분하려 하지도 말고, 관련된 표현(흑인, 백인 등) 또한 쓰지 말아야 한다는 입장이다. 즉 아프리카계 미국인도, 흑인도 아닌 그냥 미국인이라는 것이다.[12] 이런 이유로 중남미 흑인 출신들은 아프리카계 히스패닉으로 분류되는 걸 선호한다.[13] 예를 들어, 제 38조에서는 도망간 노예가 한 달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으면 귀를 자르고, 두 달이 되면 햄스트링을 잘라야 하며, 또다시 도망가면 처형하도록 규정했다.[14] 이 표현은 현대에 사용되지 않는다.[15] "An Act for the more speedy prosecution of slaves committing capital crimes; for the better government of negroes, mulattoes, and Indians, bond or free"[16] 구글에서 이 당시 린치당한 흑인들의 사진들을 볼 수 있다.[17] 이때 미국 흑인만 동등한 지위를 얻은 것이 아니라 히스패닉, 아시아계, 미국 원주민 등등 모든 인종이 법적으로 동등한 지위, 법적으로 완전한 평등을 얻게 되었다.[18] 애초에 전세계적으로도 전과자들의 재범률이 높은게 바로 범죄자 딱지가 붙기 때문이다. 그래서 살기 위해 절도죄를 저질러 감옥을 다시 가는 경우도 많다.[19] BET의 공동 설립자[20] 단순히 흑인이 편의점에 먹을 것 사러 집 밖에 나가도 백인이 장난삼아 신고하면 범죄자로 오인되어 경찰한테 폭압적인 조사를 받아야 할 정도다.[21] 한국으로 치면 투니버스 정도 된다.[22] 나루토는 누구에게나 인정받지 못하며, 대우받고 관심을 끌기 위해 장난을 치는 등의 구조적 행동장애에 직면하는 등 흑인 입장에서의 불행한 현실과 닮아있다.[23] 한국에는 미국에서 일본을 거쳐, 일본에서 한국으로 전파되었다.[24] Locs에서 k 아니고 c 라고 쓰는게 맞다. Locks는 자물쇠를 의미한다. 드레드락 보다 더 깔끔하게 묶어 버리고 머리가 자랄 때마다 정리해둔다.[25] 오트쿠튀르에서 시작된 그것.[26] 후술하겠지만 이 무렵의 공화당은 흑인의 이권을 대변했다. 지금은 포지션이 바뀌어서 흑인들은 주로 민주당을 지지하고 있다.[27] 그 당시에는 미국 흑인의 95%가 미국 남부에 거주했는데 1877년 이후 40여 년 간 매일같은 백인들의 린치에 시달리다 1916년부터 흑인 대이동을 시작한 것이다. 흑인 대이동 이후에도 털사 인종 학살으로 대표되는 백인 폭동이 계속되었고 같은 시기 인종 분리 정책이 시작되면서 미국 흑인들은 백인들과 동등한 교육을 받을 수가 없었다. 레드라이닝 같은 경제적 차별으로 인해 흑인들에게는 부를 쌓을 기회도 주어지지 않았다.[28] 흑인의 경우 민주당9:1공화당, 백인의 경우 민주당4:6공화당 정도.[29] 사회적 보수주의 태도를 갖는다거나. 현대 미국 흑인들은 백인들보다 기독교를 독실하게 믿는 비율이 높다. 물론 민주당 내에도 사회보수주의 성향의 분파들이 있긴 하나 2020년대 들어서 소수파에 그친다.[30] 단 이는 그 본인이 흑인이었던 오바마로 인해 결집됐던 흑인들의 민주당 지지도가 오바마의 퇴임으로 다소 완화된 측면도 있음은 고려해야 한다.[31] 트러스트를 해체하던 공화당은 20세기 초반을 거쳐 점차 경제적 자유주의 성향을 굳혀 오고 있었고 그로 인해 부자와 엘리트 정당이란 이미지가 강했다. 반면에 민주당은 농민과 노동자 등 서민을 위한 정당이란 이미지를 갖고 있었는데, 여기서 서민은 아직 백인을 중심으로 했다.[32] 물론 1890년대 이후로 민주당이 인민당의 노선을 일정부분 받아들이면서 나름대로 진보적인 색채를 받아들이게 되었고, 윌리엄 J. 브라이언이나 우드로 윌슨 등 당대에 나름대로 진보적인 스탠스였던 정치인들이 민주당 소속으로 활동하고 있었기는 했지만 동시에 상당수 인종차별주의적인 보수주의자들이 민주당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이들은 진보적인 대통령의 대명사로 손꼽히는 프랭클린 루스벨트와 존 F. 케네디때까지도 민주당에 잔류해있다가 1960년대 중반 이후로 민주당이 진보적인 색패를 확 띄게 되면서 공화당으로 빠져나오게 된다.[33] 물론 1960년대 이전 남부처럼 대놓고는 아니고 주의회 차원에서 은근슬쩍 투표시간을 단축한다거나 투표소를 흑인 밀집지역에서 멀리 떨어트린다거나 하는 식이다.[34] 미국에서 민권 문제가 각 주의 소관이라는 태도는, 곧 남부 각 주가 시행했던 흑인 억압 조치들을 인정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35] 약 2-2.5배로 추정된다.[36] 물론 매케인이 어떻게 보면 흑인한테 불리하게 돌아갈 수 있는 공약도 내걸어서 그렇지, 매케인이 흑인을 혐오하는 인물이라는 건 절대 아니다. 공화당에서 온건파 보수주의자로 유명했고 대선 패배 승복 연설 때 오바마와 첫 아프리카계 미국인 대통령 탄생을 높게 평가했으며, 애초에 그의 자식 중에 막내딸이 입양한 것이긴 하지만 남아시아계이며 며느리 중 한 명이 흑인이다.[37] 대한민국으로 치면 제18대 대통령 선거에서 박근혜의 선거 공약(ex. 경제민주화, 기초연금)을 문재인의 공약이라고 속인 뒤 호남 지역의 행인들을 붙잡고 공약에 대한 생각을 물어봤을 때 "역시 문재인!"이라고 하는 것과 비슷하다.[38] 트럼프가 흑인, 히스페닉 등 마이너리티 인종에 대처하는 형식적 레퍼토리이기도 하다. 불법 이민자 빗장 닫아버리면 결국 주류는 아닐지언정 시민권 가진 너희가 이득이라는 논리.[39] 대표적으로 부시 가문, 존 매케인 전 상원의원 등[40] U.S. Census Bureau, Voting and Registration in the Election of November 2012[41] 이는 트럼프의 공화당 전략 중 하나로, 마이너리티 내부를 분할시키는 소수자 간 경쟁 구도를 유도한 측면이 있다.[42] 그러나 파월은 2008년 선거에서 오바마를 지지하였고, 2016년 선거에서도 클린턴을 지지하였다. 2017년에도 뉴욕타임스에 트럼프의 외교 예산 감축 등을 우려한 컬럼 등을 실었는데 합참의장 시절의 경험보다는 국무장관 시절의 경험에 더 입각하여 글을 쓰고 있다. 다만 이것은 콜린 파월 개인이 보수에서 진보로 전환했다기 보다는 어떤 것이 미국을 위한 길인가에 대한 본인의 신념과 주관이 확고하고 그에 부합하는 후보를 지지하기 때문으로 보인다.[43] 상당수의 흑인 법 집행관들은 공화당을 지지하는 경향이 있다.[44] 자식들은 민주당원.[45] 물론 법적으로 흑인을 차별하는 것에 대해서도 부정적이였다.[46] 이는 전라도 지역 노인들이 문화적 보수주의 성향을 보이면서 민주당계 정당을 지지하거나 심지어 진보정당을 지지하는 것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47] 네이션 오브 이슬람은 흑인 문화에 끼친 영향이 작지 않지만 본질적으로 이단 혹은 사이비 종교에 가깝기 때문에 맬컴 X와 무하마드 알리 모두 나중에는 정통 수니파 이슬람으로 개종하였다.[48] 역사상 최고의 농구 선수들 역시 마이클 조던, 르브론 제임스, 코비 브라이언트, 빌 러셀 등 흑인이 대부분이다.[49] 미국 인구 중 흑인 비율은 12.2%인 반면, 캐나다 인구 중 흑인 비율은 3.6%로 원주민(5.4%)보다도 적다.[50] 사실 이것 또한 미국 흑인들의 특징으로 홍콩영화(쿵푸), 일본애니에 기이할 정도로 미쳐있는 사람이 많은데 대부분 어렸을 때 TV로 일본애니를 접하고 싸구려 중국 음식을 자주 먹었기 때문이다.[51] 사실 이는 일자리 문제보다 남부에서 매일매일 일어나던 백인에 의한 흑인 린치 때문이었다. 자세한 내용은 Great Migration 참조[52] 미국 흑인들의 50% 정도가 미국 남부에 살고 있다.[53] 어떤 의미냐면, 아시아인이나 히스패닉은 몇 세대 이상 살아왔더라도 금기 따위를 신경쓰지 않는 극심한 인종차별주의자에게는 '너네 나라로 돌아가라'는 말을 듣지만 흑인에게는 이런 사람에게조차도 어딘가로 '돌아가라'는 사고방식으로조차도 흐르지 않을만큼 절대적으로 원래부터 미국에 살던 부류로 인식된다는 의미이다.[54] 흑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지역이지 흑인들이 "주로" 사는 지역이 아니다.[55] 백인이 흑인을 대상으로 가했던 혐오성 범죄, 살인, 강간, 방화 등 모든 것을 총칭한다.[56] 보험[57] 음악[58] 방송[59] 래퍼나 스포츠 선수, 코미디언 등을 제외하고도 많은 성공한 흑인 사업가, 재벌들이 있다.[60] 백인 빈곤층이 전체 백인의 10%를 차지한다만, 빈곤율이 15%인 아시아계, 빈곤율이 21%인 흑인, 빈곤율이 40%를 넘는 히스패닉계와 비교했을 때 백인들의 빈곤층 비율이 제일 낮다.[61] 이게 백인 정치인이 노예제를 유지하던 동안, 또 인종차별을 유지하는 동안 일반 및 저소득층 백인들을 선동한 방법이었다. 20세기 초중반 까지만 해도 대다수 백인들은 백인 정치인과 부자들의 꾐에 넘어가 흑인은 원래 열등하고 게으르고 멍청하다고 생각했다. 정치인 문제 뿐만이 아니라 그 당시 영화나 코미디에서도 흑인을 그렇게 표현하니 대부분의 일반 백인들이 이에 선동당하기 더 쉬웠던 것이다. 국가의 탄생이 그런 영화의 대표이고 짐 크로우와 Blackface가 그런 코미디 (백인을 위한 코미디)의 대표라 할 수 있겠다. 애초에 Blackface가 금기시 되는 제일 큰 이유가, 블랙페이스는 당시 백인 "코미디언"들이 백인 앞에서 흑인처럼 분장하고, 흑인들을 게으르고 열등하고 멍청하게 표현함으로서 일반 백인들의 우월 의식을 상기하며 우리는 흑인과는 다르다 라는 인종차별을 더 키웠기 때문이다. 물론 노예제 시절부터 흑인들을 그렇게 표현한 이유는, 백인 저소득층 및 중산층들의 불만이 백인 정치인들과 부자들 자신에게 오는 것을 막기 위해, 당시 운영되던 노예제에 인종차별 의식을 더해, 저소득층 및 일반 백인들의 불만을 흑인 자유인과 흑인 노예로 돌리기 위함이었다.[62] 기성시대 아시아계 미국인들 대부분이 흑인을 게으르고 유전적으로 문제가 있는 인종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심하다. 이는 기성시대 아시아계가 백인 우월주의 성향이 강하다는 점도 한몫한다. 그나마 젊은 세대는 다양한 인종들과 부딪혀가며 성장해온 덕에 그렇지 않지만, 기성시대 아시아계 미국인들 사이에서는 아직도 이런 뿌리깊은 편견이 자리잡고 있다.[63] 고졸 학력인 미국 백인 가장의 가정이 같은 고졸의 미국 흑인 가장의 가정보다 재산이 거의 10배 더 많고, 석사 혹은 박사 학위를 취득한 미국 흑인 가장의 가정이 고졸의 미국 백인 가장의 가정보다 재산이 적다. #[64] 사실 이는 흑인 빈곤층의 영향이 크다. 왜냐하면 미국에도 중산층 이상 흑인이 과반수를 넘는데, 이들은 중산층의 인생을 살지만 19%나 되는 빈곤층은 당장 내일 먹고 살 돈이 없어서 오늘 벌고 오늘 쓰는 수준으로 대부분 산다. 흑인들의 갱 활동이 높은 이유는, 이 빈곤층들 때문이다. 흑인 갱스터의 거의 대부분은 이 흑인 빈곤층으로, 갱 활동을 통해 매일 번 돈을 그 날에 쓰는 것이다. 물론 이게 거의 대부분의 흑인 빈곤층이 갱스터란 얘긴 아니고, 흑인 빈곤층 중에서도 갱 활동 안하고 돈 버는 사람들도 많다. 그런데 흑인 갱스터의 대부분이 이 빈곤층이니 이게 사회적 문제가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65] 미국 흑인은 대체로 서아프리카 지역 출신인데, 이들은 동아프리카 흑인에 비하여 체구가 크고 땅딸막한 체형인 경우가 많다. 흔히 매체에서 나오는 키가 크고 마른 체형인 흑인들은 동아프리카 출신이 많다.[66] 25세 이상 미국인들의 90.1%가 고졸 이상이다.[67] 25세 이상 미국인들의 36.0%가 대졸 이상이다.[68] 해당 발언은 전 NBA 선수 찰스 바클리(Charles Barkley)가 TNT 방송 및 다수 인터뷰에서 반복적으로 언급한 내용으로, 흑인 커뮤니티 내부의 자기 파괴적 문화에 대한 비판적 문제의식을 담고 있다. 아래 각주에 보듯, 이와 유사한 발언은 그의 2014년 TNT 방송 인터뷰 및 2005년 Fox News 인터뷰 등에서 확인된다.[69] 또한 이는 《Grand Theft Auto V》의 후드 사파리 미션에서도 풍자된다. 프랭클린이 더 이상 갱단 활동에 연루되지 않으려 하자, 그의 이모 데니스 클린턴은 “배신자!”라며 “늙은 남자들과 어울리고 친구들은 내쳤다”며 비난한다. 이 대사는 흑인 사회 내부에서 흔히 발생하는 ‘성공하려는 자에 대한 내부 비난’ 문화를 꼬집고 있다. 이러한 맥락을 모르면, 일부 비북미권 플레이어들은 그저 정신 나간 NPC의 헛소리로만 받아들일 수 있다.[70] 이 빈곤율에 대한 정보는 미국 연구 기관들이 출처이다. 참고로 한국에서 말하는 빈곤과 미국에서 말하는 빈곤이 다를 수 있다. 빈곤층은 점점 더 빈곤해지고, 중산층 역시 조금씩 밑으로 내려가고 있으며 위로 갈수록 더 위로 올라간다.[71] 이것 외에도 린든 B. 존슨이 미혼모에게 제공하는 정부보조금의 양을 대폭 늘린 것도 역효과를 가져온 것도 컸다. 정부보조금의 혜택만 노리고 무턱대고 애를 낳은 후 방치하는 경우가 많아서 이런 무책임한 폐급 부모들# 밑에서 자란 아이들은 범죄나 정신병, 가난 등에 노출될 가능성이 정상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보다 넘사벽으로 높다.[72] 이 흑인 사회는 흑인 게토 사회, 즉 흑인 빈곤층 사회를 얘기하는 것이다. 이 당시 중산층 이상의 흑인들은 이미 게토를 떠나 백인들이 사는 Suburban 등으로 이주해 있었다. 그러나 그때 그 빈곤층의 상당수가 아직도 그 자리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고 그 이유는 80년대 마약과의 전쟁, 크랙 에피데믹 등으로 게토 사회가 빈곤층을 벗어나기는 힘들게 되었는데 현재까지도 자수성가한 빈곤층 흑인들을 제외하면 빈곤층을 벗어나기 힘든 경우가 많다. 우리가 유명 래퍼에 대해 얘기할 때 이 래퍼는 길거리에서 마약 팔던 시절이 있었다 뭐 이런 얘기를 하는데, 그 이유는 그런 래퍼들이 살았던 삶이 흑인 빈곤층의 삶이었기 때문이다. 살기 위해 마약을 팔고 갱 활동을 해야 했으며, 그들에게 돌파구는 랩 음악이었는데 그걸로 성공한 것이다. 물론 래퍼들 중에도 중산층 이상의 흑인 가정에서 온 래퍼들도 많다. 윌 스미스나 카녜 웨스트 등이 대표적이고 이 외에도 많다.[73] 알다시피 갱스터 랩은 1988년에 대중화된다. 사실 그 유명한 NWA가 젊은 층에서 득세한 이유도 NWA가 그 당시 인종차별과 흑인 사회에 문제를 야기한 정치인들에 대한 반발, 경찰의 공권력 남용 등에 대해 신랄하고 논리적으로 깠기 때문이었다. 그 전의 힙합은 Run DMC같이 희망차거나 사회적인 문제를 다뤄도 갱스터 랩은 하지 않은 퍼블릭 에너미, 그리고 심지어 백인 힙합 그룹이었던 비스티 보이즈까지 힙합 음악은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었지만 NWA의 Straight Outta Compton으로 힙합 문화가 바뀌게 된다. 그 앨범의 영향력은 아직까지 사라지지 않았다.[74] 인종차별이 극심했을 때는 털사 인종 참사등의 백인 폭동이 많이 발생했다. 흑인들이 자기 밥그릇 빼았는다는 이유가 대부분이다. 자세한 이유는 Great Migration 문서 참조. 참고로 털사 인종 학살은 일자리 다툼이 아니라, 백인들이 잘 살던 흑인들을 질투해서 벌어진 사태이다. 자세한 사항은 털사 인종 학살 문서 참조.[75] 물론 단순히 흑인을 평소 개인적 감정으로 혐오해서 쏴죽이는 백인 경찰도 있다.[76] 트레이본 마틴 살인 사건[77] The right of the people to be secure in their persons, houses, papers, and effects, against unreasonable searches and seizures, shall not be violated, and no Warrants shall issue, but upon probable cause, supported by Oath or affirmation, and particularly describing the place to be searched, and the persons or things to be seized. 국민은 신체, 주거, 문서 및 소지품에 대해 부당한 수색과 압수로부터 보호받을 권리를 가지며, 이 권리는 침해되어서는 아니 된다. 또한 영장은 상당한 이유가 있을 때에만 발부될 수 있으며, 선서나 진술로 그 이유가 뒷받침되어야 하고, 수색할 장소와 압수할 사람이나 물건이 구체적으로 명시되어야 한다.[78] 해당 남성은 잠시 구금 후 벌금 250달러를 부과받고 훈방되었다. 비록 취식 금지 규정은 존재하나, 실제로는 대부분 사문화되어 단속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는 규정이었다. 이 사건 이후 시민들이 항의 시위를 벌이며 단체로 햄버거와 샌드위치를 먹는 퍼포먼스를 벌이기도 했다.[79] 해당 사례는 흑인 여성 Sandra Bland의 사건으로, 단순한 교통위반임에도 불구하고 구금 중 사망한 점에서 미국 내에서 큰 파장을 일으켰다. 경찰의 폭언, 위협, 부당한 구금 조치 등이 동반되었으며 인종차별 논란이 촉발되었다.[80] 해당 용의자는 병원으로 이송되었지만 사망하였다.[81] 미국 흑인 하층민 사회에서, 흑인이 경찰이 되면 암묵적으로 '백인 집단(경찰)에게 붙어먹은 배신자' 취급을 받는다. 그래서 흑인들 사이에서 흑인 경찰의 이미지도 좋지 않다.[82] 문제는 영상에서 총 맞은 흑인이 경찰의 지시를 거부하고 먼저 총을 꺼냈기 때문에 시작된 총격전 같은 경우도 무조건 경찰만 욕하는 경우가 많다.[83] 흑인이 바닥에 머리라도 박히는 일이 생긴다면 여기저기에서 탄식과 비명 혹은 욕설이 날아온다. 물론 경찰이 총이라도 쏜다면 어느새 다 도망가있다.[84] 물론 경찰들도 자기 일은 해야하기 때문에 이런 곳을 Bad Neighborhood 라고 부르며 특별 관리하고, 과속 등 사소한 교통단속에도 무조건 지원을 요청하는 등으로 대응한다.[85] Didn't do nothing을 흑인식 발음으로 그대로 쓴 것.[86] 해당 영상의 용의자는 체포 도중 경찰에게 침을 뱉어서 제압당했는데 관중들이 봤음에도 불구하고 인종차별이라 몰아세우는 상황.[87] 물론 체포 중에 경찰이 물러서라고 말하지만 이도 듣지 않는다.[88] 못 보는 사람들을 위해 설명하자면 피범벅이 된 가게에서 백인 경찰에 의해 체포된 흑인이 '손목이 너무 아프다.'라고 하면서 나오자 흑인 구경꾼들이 '잔혹한 체포'라고 하면서 비판한다. 정작 구경꾼들에게는 피범벅이 된 가게 안이 보이지 않는 상황이다.[89] 흑인의 노동인구는 미국 전체 노동인구의 11.8%를 차지한다.[90] 반면 소방수의 경우에는 백인의 비중이 79.9%로 높고 흑인들은 6.9% 수준으로 낮다. 백인이나 히스패닉의 비중이 실제보다 적은 군대와는 반대이다. #[91] 사실 굳이 흑인들 뿐만이 아니라 해병대 자체가 입대 선호도가 바닥을 긴다.[92] 매우 보수적인 몇 안 되는 흑인. 그는 백인 경찰관이 흑인을 구타한 사건에서도 이렇게 말했다. "일단 판결은 판결이다. 그가 내린 집행은 합당했다." 타 흑인들은 그에 이런 발언에 대해 강력히 반발했고 그를 "배신자", "백인의 꼭두각시", "백인의 노예" 로 취급했다.[93] 미국 현대 음악 역사 자체가 흑인 음악 아니면 설명이 되지 않는다.[94] 부유한 집안 출신일수록, 혹은 이민자 가정이 아닌 미국 토박이일수록 기부금을 많이 낼 확률이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