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위 문서: 이종범
만화가 최훈이 김형준 칼럼에 투고한 일러스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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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종범의 선수 경력을 정리한 문서.2. 프로 이전
2.1. 프로 입단 전
2.1.1.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
이종범은 어릴 적부터 운동에 천재성을 가지고 있었다. 부친이 합기도 도장을 다니게 했는데, 얼마 뒤 고난이도 낙법을 잘한다고 관장님이 무술인의 진로를 부친에게 추천한 적도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종범 본인은 원래 축구선수의 꿈이 있었고 3학년때 축구부로 들어가려고 생각 중이었는데, 이미 그전에 학교 축구부가 해체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학교에 남은 운동부는 야구부와 핸드볼부뿐이었다.결국 3학년이 된 직후 이종범에게 남은 선택지는 야구부, 핸드볼부, 합기도 3가지였는데, 본인이 야구부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야구부에 들어간 선배이자 원래 절친했던 동네형인 김기태가 야구를 할때 몇 달간 같이 하교하려고 기다리다가 몇 번 재미로 같이 야구를 해봤는데 그 때도 재능있다는 소리를 들었던 관계로, 3학년때도 같이 하교하려고 야구부를 선택했다고 한다. 사실 핸드볼이나 무술은 성공해서 선수가 되어도 당시 돈을 많이 벌기 힘들어서 꺼려졌고, 야구는 당시에도 실업야구 시스템이 사회에서 어느 정도 돌아가던 관계로 야구가 그나마 제일 나아보였다고 하며, 부친도 아들이 공부는 안 될 것 같아서 야구부에 들어가라면서 추천했다고 한다. 훗날 이종범은 아들 이정후에게 "아버지는 집안이 가난해서 헝그리 정신으로 먹고 살기 위해 야구를 했다" 라고 조언을 했다.
그렇게 야구를 시작한 이종범은 서림초등학교와 충장중학교를 우승으로 이끌면서 어린 시절부터 정상급 선수로 활동하였다. 이종범, 성영재 그리고 이 둘의 1년 후배인 양회열은 충장중에서 같이 뛰었는데 이종범이 유격수를 보다가 투수를 들어가면 1년 후배 양회열이 유격수, 성영재가 3루수를 보다가 투수로 들어가면 양회열은 3루수로 들어갔다.
광주일고 3학년이던 1988년 청룡기 결승전(對 군산상고)에서 연장 11회 끝내기 역전 2루타를 때리며 모교를 39년만에 우승시켜 최우수선수에 선정되었다.[1] 이종범이 훗날 술회하기를 광주지역 예선에서 승리한 광주일고는 청룡기, 광주상고는 대통령배에 출전하는 것으로 정해졌는데 먼저 개최된 대통령배에서 광주상고가 박충식의 활약으로 우승하자 위기감을 느낀 광주일고는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야구부원들을 팬티바람으로 운동장 포복을 시키는 등 정신무장을 단단히 시켰다. 광주일고 동기생 야수로는 정영규가 있었다.
2.1.2. 대학교 시절
고등학교 졸업 이후 건국대학교 경영학과(1989학번)로 진학하였다. 현재 시점에서 보자면 고교 졸업 후 프로 1차 지명으로 직행하지 않은 게 이상한 일이겠지만, 1990년대까지는 고등학교 때 잘 하던 선수라도 대학을 거치는 게 일반적이었다. 뛰어난 재목이었던 만큼 연세대나 고려대 등지에서도 스카우트를 하려 했지만, 야구에 집중할 수 있는 여건이 갖춰지고[2] 연세대와 고려대에서는 이종범 1명만 원했으나 건국대에서는 동기 및 후배 선수들도 같이 받아주겠다고 하여 건국대를 선택했다고 한다. 스타선수를 입학시키면서 동기들도 데려가주는것은 당시엔 종종 있던 일이었다.방송에서 밝힌 건국대 입학 이야기스톡킹에서도 입학 이야기를 언급했다.
이종범의 활약은 대학교 때에도 계속되었다. 그냥 잘 한 정도가 아니라, 1학년 때부터 레벨이 다른 모습을 보였다. 1989년 대학야구를 호령하던 국가대표 에이스 박동희는 3월 봄철연맹전에서 한 타자에게 2개의 홈런을 맞는 수모를 겪었는데, 이 타자는 건국대 1학년 유격수 이종범이었다. 박동희의 고려대 동기인 이병훈 해설위원의 말에 따르면, 선동열 이후 최고의 선수라 평가받던 박동희는 그날 멘붕이 와서 술을 엄청 마셨다고 한다.
이 멀티홈런의 비결 또한 이종범은 스톡킹에서 건대 야구장을 같이 이용하던 MBC 청룡 2군 덕분이라고 했다. 아무리 2군팀에 1980년대라고는 하나 그 당시 최첨단 장비들을 건대 야구장에서 같이 쓰다보니 건대 야구부 소속이었던 이종범 역시 그 수혜를 입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배팅머신기를 140km/h에 맞춰두고 10m 거리에서 쏘게 하여 빠른 공에 적응을 한 결과의 산물이 박동희로부터의 멀티홈런 이었던 것이다.
박재벌이 전설의 타이거즈에서 술회한 바에 따르면 한을룡 건국대 감독이 당시 대한민국 국가대표팀 감독을 겸하고 있었으며 이종범을 1학년 때부터 국가대표로 선발해 국제대회 경험을 많이 쌓게 했고 이 점이 야구실력 향상에 도움이 됐다고 했다.
한국의 박동희와 일본의 노모 히데오의 맞대결로 기억되는 1989년 9월 제15회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의 MVP도 건국대 1학년 이종범 차지였다. 당시에 이종범은 일본대표팀의 '토네이도' 노모 히데오로부터 4타수 2안타 2도루를 뽑아내는 활약을 펼쳐 공동우승을 이끌어 냈다. 이종범은 이 당시 노모 히데오의 변화구 낙차를 보면서 '인공폭포에서 떨어지는 느낌'이라고 스톡킹에서 말해 정용검과 심수창을 웃게 만들었다.
1992년 대학야구 추계리그 결승전에서 고려대를 상대로 연장 11회 접전 끝에 건국대가 9-6으로 이겨 우승했다. 이종범은 타격상과 홈런상에 최우수선수까지 선정되었다. 이종범을 놓친 고려대 입장에서는 아쉬울 뿐이다.
여담으로 사실은 왼손잡이다. 우투우타가 된 것은 당시에 왼손 글러브가 없었고 타격은 좌타자보다 우타자로 치니까 잘 맞아서 치게 됐다고.[3]실제로 오른손으로 치는 당구는 300~400이지만 왼손으로 칠 때는 1000(!)이라고 한다. 야구선수 당구대회에 출전한 좌타 이종범 하지만 본인이 잘 맞든 안 맞든 좌타자가 우타자보다 땅볼을 쳤을때 내야안타가 될 가능성이 많은 것은 사실이고[4], 이종범이 현역일 당시에는 좌타자가 많지 않아서 아들에게 한 유일한 조언이 왼손으로 치라는 것이었다.[5]
3. 프로 경력
3.1. 해태 타이거즈 1기
3.1.1. 1993 ~ 1997 시즌
KBO 골든글러브 유격수 부문 수상자 (1993, 1994, 1996, 1997) |
광주일고와 건국대에서의 엄청난 활약 이후, 1993년에 1차 지명으로 연고 팀 해태 타이거즈에 계약금 7,000만원을 받고 입단하였다.[7] 이 시절 일화로는 같은 해 고려대 좌완투수 이상훈이 계약금 2억에 LG 트윈스와 계약하는 걸 보고 이종범도 해태 타이거즈와 협상하던 중 계약금 1억을 요구했는데, 당시 협상을 담당하던 해태 구단 실무자가 날린 드립이 압권이다. "광주는 서울보다 물가가 더 싸기 때문에 서울에서 1억 받는 것보다 광주에서 7,000만원 받는 게 더 낫다"는 드립을 날렸다고 한다.
데뷔 시즌부터 타율 0.280, 득점 1위, 안타, 도루 2위라는 준수한 성적을 거두고 한국시리즈에서는 한 경기 도루 3개(최다), 총 7개(한국시리즈 최다 도루 타이)를 기록하는 등 맹활약하며 한국시리즈 MVP를 수상하였다. 다만 아쉽게도, 1993년은 양준혁, 박충식, 이상훈, 구대성, 이대진 등 나중에 한국 야구를 대표하는 슈퍼스타들이 많이 나온 해로 유명했었고, 신인왕은 MVP에 근접했던 양준혁[8]이 가져가게 된다.[9] 시즌 초창기에는 쟁쟁한 선배들이 너무 많다보니 기가 죽어 있었고 자신의 기량을 펼치지 못했다. 이종범의 능력을 파악한 김성한과 한대화는 '그라운드에서 너 하고 싶은 대로 해라. 세이프 될 자신 있으면 도루도 맘껏 해라. 아무도 너한테 뭐라 안 할것이다'라고 충고해줬고 이종범은 그말을 들은 뒤부터 날아다니기 시작했다. 1993년 한국시리즈에서는 김응용 감독이 이종범에 그린라이트를 주지 않았으나 시리즈가 해태의 열세로 흘러가자 '에라 모르겠다 니 맘대로 해라 이 놈아'하면서 이종범을 자유롭게 풀어줬고 한국시리즈에서만 그것도 5, 6, 7차전에서 총 7개(7개 연속) 도루를 성공시켜 혼자서 원맨쇼를 펼친 끝에 우승을 차지했으며 한국시리즈 MVP에 선정, 부상으로 쏘나타 2 승용차를 받았다.[10]
[11] |
히스토리 22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불멸의 84도루'
그리고 1994년에는 소포모어 징크스는 개나 줘버리고 KBO 리그 역사상 최고의 우타자 시즌[12]을 기록하는데, 0.393이라는 괴물같은 타율[13]과 196안타[14][15], 84도루를 달성[16]하고 정규시즌 MVP를 수상하기에 이른다. 해당시즌은 심지어 투고타저였다. 이종범의 1994 시즌은 에릭 테임즈의 2015년[17]과 함께 보통 KBO 리그 역사상 최고의 야수 퍼포먼스 시즌으로 평가받는다.
일반적으로 4할에 도전하는 타자들의 타율 변화 양상은 시즌 초에 타율을 최대한 올려놓고 조금씩 깎아 먹으면서 시즌끝까지 버티는 모습을 보이는데 1994년 이종범은 시즌 초부터 8월 말까지 타율이 꾸준히 상승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18]
나중에 말하길 1994년 당시 4할 타율, 200안타, 100도루 3가지를 한꺼번에 달성하려고 했다고 하며 이 때 조정 OPS가 2002년 이승엽보다는 낮고, 1992년 장종훈보다 높다. wRC+를 보면 1994년 이종범은 2010년 이대호보다 높다.[19] 게다가 도루지표인 wSB은 역대 1위다. 거기다 이게 다 유격수로써 낸 성적이라는 게 놀라울 따름. 참고로 역대 타자 sWAR 기록 지표를 보면 1위 1994년 이종범(11.77), 2위 2015년 에릭 테임즈(10.87), 3위 2022년 이정후(10.25), 4위 2003년 심정수(10.19), 5위 1997년 이종범(9.70), 6위 1996년 이종범(9.52) 순이다.
'꿈의 타율' 4할을 넘나들며 한 시즌에 84개의 도루를 성공시킬 만큼 놀라웠던 주루 능력과 3루수와 유격수 사이로 완전히 빠지는 듯한 공을 낚아 내는 수비 능력[20]까지. 한마디로, 1번 타자로 나와서 안타치고 홈런치고 도루하면서 명수비까지 하는 괴물이다. 특히 84개라는 무지막지한 도루[21] 개수는 세이버매트릭스 활성화로 인한 가치하락과 부상우려로 인해 21세기 현 시점에서는 더이상 나오기 어려운 기록이라는 주장도 있다. [22] 어쨌든 한국프로야구 역사상 저 조건을 동시에 충족시키는 선수의 대표는 이종범이라 할 수 있겠다. 무릎팍도사에서 이종범은 4할 타율을 기록하지 못한 이유가 생고기를 먹고 탈이 났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때문에 한때 3할 8푼까지 떨어졌다고 한다. 하지만 본인은 경기 중 사고를 내지 않은 것으로 만족한다고 발언했다. 아는형님에서 이 당시 썰을 더 풀었는데 당시 이종범이 설사때문에 죽겠다 하자 김 감독이. "야 그냥 서 있어!"라고 했다고 하며 덕분에 이종범은 그날 화장실을 들락날락 했다 한다.
이후 28년 뒤, 같은 나이의 아들이 리그를 지배하는 시즌을 만들어 내며 이종범의 1994년이 더욱 조명받게 되었다.
1995년도에는 방위병 규정 때문에 홈경기만 뛰어서 딱 시즌의 절반만 뛰었다. 원정경기의 반만 뛰었어도 규정타석 및 유격수 골글, 각종 기록을 세웠겠지만 거기에 재갈이 물렸다.[23] 따라서 해태는 1995년도에 홈경기에서 38승1무23패, 순수 홈경기만 따지면 OB, 롯데랑 비슷한 성적을 내고도 원정경기에서 26승2무35패로 좌절하면서 역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8구단 이상 체제에서 4위를 하고도 가을야구의 좌절을 맛본다.
하지만 1994, 1997년도만큼이나 1995년도의 이종범의 기록 역시 대단한데, 홈경기만 뛰고도 이런 기록이 나올 수 있을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훌륭했다. 고작 63경기 동안 타율 .326 16홈런 32도루[24] WAR 5.03 wRC+ 181을 기록하면서 어지간한 5툴 플레이어들의 풀시즌 커리어하이급의 성적을 기록했다. 특기할 사항으로 1995시즌 홈런왕인 김상호가 25홈런을 기록했는데, 당시 이종범의 홈런 페이스였다면 홈런왕 경쟁까지 할 뻔 했다[25] 더욱이 1995시즌 WAR 1,2위였던 양준혁과 홍현우가 각각 6.68, 6.53을 기록한 것을 생각하면, 전경기 출장이 가능했다면 1994시즌 못지 않은 몬스터시즌을 보냈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을 남기는 시즌이었다. 그러나 1995년도에 체력을 비축해둔 까닭에 1996년과 1997년에도 완전히 포효할 수 있는 체력도 얻었다고도 볼 수 있는 시즌이었다.
물론 1996년 박재홍의 등장 이전까진 장타보다는 주로 도루쪽에 비중이 컸지만[26] 박재홍의 30-30 도전에 고무받아 1996년부터 장타에도 집중하고, 그 결과 1997년에는 천하의 이승엽과 홈런왕 경쟁을 펼쳤다. 8월 30일까지 이종범은 홈런 27개(당시 단독 1위)에 타율 .347(당시 단독 2위, 1위가 김기태의 .349)의 끝판왕이었다. 하지만 후반기에 체력이 떨어져서 타율도 까먹고 홈런도 9월 4일에 하나, 7일에 하나, 20일에 하나 추가하며 30-30 클럽 가입에 만족해야 했다. 결국 1997년 시즌 홈런왕은 9월에 홈런 6개를 몰아치며 총 32개를 친 이승엽이 2개 차이로 가져가게 된다. 하지만 양준혁도 30홈런을 치면서 홈런왕은 3파전 양상으로 흐르게 되었는데, 고의사구라는 함정이 있었다. 이종범은 1997시즌 KBO 역사상 한 시즌 최다 고의사구인 30개를 기록했다. 똑같은 홈런을 기록한 해당시즌 양준혁이 27개 반면 이승엽의 고의사구는 4개에 불과했다. 타석으로 따져도 이종범과 이승엽은 같은 577타석을 기록했다. 해태의 1번타자와 삼성의 3번타자가 같은 타석을 기록했으니, 이종범을 제외한 타이거즈의 타선도 아쉬울 따름...[27] 한편 이 30개라는 홈런 개수 덕인지, 1994년보다 1997년의 이종범이 더 5툴 플레이어에 가깝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세이버메트릭스 지표들을 보면 오히려 이종범의 커리어하이는 1997년이 아니라 1994년이다. 1997년은 장타를 의식한 나머지, 장타율빼고는 오히려 전년도들보다 약간 못 한 모습을 보여주며 볼삼비가 약간 오른게 보인다. 삼진은 49개를 당했다.[28] 2009년 시즌에는 4할 타자들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 자신의 1994년에 대해 견제가 심하면 안타를 치기 힘들다고 말하며 "나는 어차피 볼넷으로 출루해도 도루를 해버렸기 때문에 심한 견제는 없었다."라고 자기 입으로 밝힌 적이 있다. 이종범이 왜 무서운 선수였는지 알게 해주는 대목. 1993~97년까지 홈런 순위는 4-4-9-3-2위였고 도루 순위는 2-1-6-1-1로 홈런왕-도루왕 동시 석권을 했을 뻔한 유이한 선수이다.[29][30]
이렇게 데뷔 이후 맹활약한 이종범의 4.5년[31]은 KBO 역사상 야수 중 가장 압도적인 기간 중 하나로 자주 회자되는데, 1993년부터 1997년까지 5시즌동안의 기록은 클래식 스탯만 따져도 .332(1위) 713안타(1위) 106홈런(2위) 315타점(5위) 310도루(1위) 1170루타(2위) OPS .954(2위) 로, 사실상 야수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해내는 선수였다. 세부스탯 역시 어마어마했는데, 4.5년간 sWAR 42.15(1위), wRC+ 176.8(2위) wOBA .423(2위)를 기록했다. 특히 이 4.5년간 쌓아올린 sWAR 42.15는 2위인 양준혁과 상당한 차이가 나며[32], 여타 이름있는 선수들의 통산sWAR을 가볍게 추월하는 수치였다.[33] 심지어 19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을 지배한 이승엽조차도 임팩트로 능가하며[34] 적어도 2010년대 중반의 에릭 테임즈 정도는 되어야 임팩트로 비빌 수 있는데, 이마저도 2015년 한 시즌이 1994년 이종범과 비빌 수 있을 뿐 2014/2016년 두 시즌은 1996~1997년 이종범보다 승리기여도가 낮다. 결국 1980년대 고대 선수들을 제외하면 승리기여도상 임팩트가 가장 높은 선수라는 것.
그리고 포스트시즌에도 뛰어난 활약을 보여주었다. 앞서 이야기한 1993년 말고도 1996~97년 해태의 통합 2연패 주역 중 하나였으며, 1997년[35]에는 고비 때마다 홈런을 쳐내는 맹활약으로 2번째 한국시리즈 MVP를 수상한다. 1993년부터 1997년까지 이종범은 포스트 시즌에서 .273, 3홈런(2위) 10타점(4위) 13도루(1위) 36루타(2위) 14득점(1위) sWAR 1.19(1위)를 기록하며 존재감을 뚜렷하게 과시했다. 그의 공격 활약이 유일하게 떨어졌을 때가 1996년 한국시리즈. 그러나 그 떨어진 정도가 타출장 슬래시라인 0.227/0.393/0.318이었으며, 시리즈 내내 안풀리는 타격을 정규시즌 내내 고타율을 기록했던 무시무시한 포스를 바탕으로 사사구를 6개 얻어내고 도루는 4개를 하는 등 현대야구 시점에서 보면 그나마 선방했다고 볼 수 있으며, 그라운드볼 피처였던 조계현, 이대진 등이 팀의 주축선발이었기에, 그가 유격수로 있는 것만으로도 적지않은 공헌을 했다.
▲ 1997 한국시리즈 MVP 이종범의 활약상 모음 |
특히 이른바 이종범 시리즈로 회자되는 1997년 한국시리즈는 이러한 이종범의 활약의 화룡점정이었는데, 5경기 동안 .294 3홈런 6득점 4볼넷 2도루 OPS 1.252를 기록하며 팀의 9번째 우승의 일등 공신이었다. 실제 성적도 준수하지만, 이종범의 활약이 작위적이다 싶을정도로 시리즈의 행방에 매우 결정적인 상황에서 튀어나왔다. 1차전에서는 상대 LG 트윈스의 에이스였던 김용수를 상대로 볼넷-도루에 이은 득점, 그리고 다음 타석에서 홈런까지 작렬하며 경기에 쐐기를 박는 활약을 통해 해태는 한국시리즈에서 가장 중요하다는 1차전의 승리를 가져가게 되었다. 이후 3차전에서는 이전 경기의 패배로 자칫 흐름이 넘어갈 수도 있는 상태에서 LG의 필승조인 차명석과 이상훈에게 연이어 홈런을 때려내며 다시 흐름을 해태 타이거즈로 돌려놓았고. 5차전에서는 수비를 통해 LG의 타선을 의욕을 꺾으며 팀의 9번째 우승을 차지하게 되었다. 당연히 한국시리즈 MVP 역시 이종범의 몫이었고, 부상으로 쏘나타 3 승용차를 받은 건 덤. 이와 같이 당시 이종범은 야수 혼자서 시리즈의 행방을 결정지어 버릴 수 있는 능력이 있고, 실제로 실현해내는 선수였다.[36]
이렇게 1997년 한국시리즈에서 세번째 우승을 거머쥔 후, 자금난에 시달리던 당시 해태가 주니치에 이종범 이적을 주니치에 요청했고 이적료 4억 5천만엔이라는 높은 금액으로 주니치 드래곤즈로 떠나게 된다. [37]
[38]
참고로 해태시절의 이종범이 기록한 5시즌간의 기록은 아래와 같다.
이종범의 해태에서의 5시즌간 기록(일본 진출 이전까지) | ||||||||||||||||
경기 | 타수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타점 | 득점 | 볼넷 | 삼진 | 병살타 | 도루 | 타율 | 출루율 | 장타율 | OPS | sWAR |
551 | 2146 | 713 | 109 | 15 | 106 | 315 | 455 | 265 | 174 | 31 | 310 | 0.332 | 0.409 | 0.545 | 0.954 | 42.16 |
3.2. 주니치 드래곤즈
3.2.1. 일본 진출, 시련의 시작
세이버 스탯을 포함한 이종범의 NPB 성적일본에서의 데뷔 후 첫 달은 엄청난 맹활약을 펼치면서 일본 열도에 충격과 공포를 동시에 선사했다. 용병답지 않게 친화력이 상당히 좋았고 온 몸을 던지는 허슬플레이를 비롯한[40] 호시노 센이치 감독도 매우 좋게 보았던 팀 분위기를 끌어올렸던 투쟁심 있는 모습, 당시 일본 야구관에 있어 유격수는 내야수비의 핵으로 타격은 약해도 팀에서 가장 뛰어난 수비수라는 인식이 주류였는데 시즌 초반부터 3할을 넘나드는 타격과 부상 전 기준으로 팀내 홈런 3위, 리그 10위 이내에 드는 생각 외로 뛰어난 장타력, 거기에 특유의 빠른 발로 도루부문 리그 1위를 질주하면서 주니치 팬들 뿐 아니라 모든 일본야구 팬들에게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반면 부상 전까지 당시 팀 실책의 절반 가까이였던 11실책을 기록, 압도적으로 리그 1위를 달리며 수비쪽에서는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수비력을 선보이면서 '유격수는 뛰어난 수비수'라는 고정관념을 깨는 공포도 동시에 안겨주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판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는데. 첫째 이유는 이전의 주전 유격수 토리고에 유스케가 탈세사건에 연루되어[41] 출장 정지된 상태라[42] 이종범을 대체할 유격수가 없었고,[43] 둘째는 앞에서 언급했던 것과 같이 시즌 초의 타격지표가 상당한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보통 상위리그로 진출하는 타자들은 타격성적이 첫 해에는 급락하기 마련인데, 리그가 바뀌고 친 투수구장인 나고야 돔을 홈으로 쓰면서도 팀내 모든 부분에서 상위권을 다툴 정도로 공격력이 좋았기에 기대를 걸지 않을 수 없었다. 이를 방증하듯 부상 전 올스타전 투표에서도 유격수 부문 1위를 기록했는데, 2위와 두 배 이상 차이나는 득표를 받았을 정도였다.
하지만 흔히 말하는 '일본식 분석야구'에 공략당하면서 약점이 잡히며,[44] 6월 초 들어 잠시 극심한 슬럼프에 빠졌던 이종범은 6월 중순에 타격감을 조금씩 회복해가며 부상 직전인 22일까지 두 개의 홈런을 포함한 7게임 연속 안타를 기록하며 감을 다시 찾아가고 있었다. 특히 부상 직전 경기에서도 멀티히트를 기록하고, 올스타전 중간 투표에서도 센트럴리그 유격수 부분 1위를 차지하며 반등의 여름을 기대하게 만들었으나 1998년 6월 24일 한신 타이거스와의 경기에서 상대 투수 카와지리 테츠로[45] 투수의 몸쪽 공을 무리하게 스윙하려다 오른쪽 팔꿈치에 투구를 맞아 골절상을 당하게 된다.[46] 이로 인해 남은 시즌을 재활로 거의 날리고 시즌 막바지에야 가까스로 복귀했지만 부상 여파로 인해 유격수로 뛰지 못하고 외야수로 포지션을 변경해야 했으며, 안타깝게도 그 부상 이후 다시는 전성기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이후 KIA 타이거즈로 복귀해서 준수한 외야수의 모습을 모여줬지만 압도적인 해태의 유격수 이종범의 모습은 여기서 끝났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98년 시즌 최종성적은 67게임에 출전해 .283 10홈런 18도루 OPS .873 WAR 3.2을 기록했다. 겉으로 보기엔 용병으로서 무난한 성적으로 보이지만 실제로 파고들면 상당한 공격력을 자랑한 시즌이었다. 당장 팀의 주전 중에 타율이 이종범보다 나은 선수는 부상 직전에는 이노우에 카즈키, 부상 후에는 .285를 기록한 세키카와 코이치밖에 없었으며, 홈런 수 역시 잠시 슬럼프에 빠지기 전인 6월 2일 기준 팀내 홈런 1위를 기록하고 있었으며,, 부상 직전 6월 21일 기준으로도, 11개의 홈런을 기록한 레오 고메스에 이어 야마사키 타케시와 함께 9개로 팀내 홈런 공동 2위를 기록, 광활한 나고야 돔을 홈으로 사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리드오프가 리그 10위 이내의 홈런을 기록하고 있었다.[47] 시즌 종료 시점에서도 야마사키 타케시의 27개, 레오 고메스 26개에 이은 팀내 3위를 기록. 도루는 67경기만 뛰었음에도 98년도 센트럴리그 도루 부문 2위[48]를 기록했으며, 부상당한 시점에서는 17개로 리그 1위를 기록하고 있었다.[49] 1번타자의 최고의 덕목인 볼넷과 출루율도 부상 직전까지 각각 센트럴리그 3위, 5위를 기록하면서 공격면에서는 확실히 좋은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더욱이 세이버스탯으로 들어가면 1번타자 유격수임에도 타자의 생산력을 나타내는 wRC+가 140을 넘겼으며, 기타 세부 성적도 wOBA .390, BB/K 1.09. WAA 2.2 등을 기록. 매우 좋은 타격 성적을 기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타격 성적 때문에 이후 99년에도 호시노가 외야수로까지 컨버전시키면서, 시즌 내내 2할 5푼대를 전전하다 시즌 종료 시점에서 .238를 기록한 최악의 타격부진 속에서도 400타석 넘게 출전시킬 정도로 이종범에게 미련을 놓지 못했던 것이다.
일본 진출 2년차인 1999년부터 본격적으로 외야수로 기용되면서 시즌을 시작하게 되었다. 시범경기에서만 4개의 데드볼을 맞으며 불안한 출발을 보이더니, 정규시즌에 들어서는 시즌 내내 .250대의 타율을 기록하다 막판에 성적이 떨어지면서 결국 시즌 종료 시점에서 타율 .238/OPS .683 9홈런 33타점 24도루 WAR 0.6이라는 기록으로 리그 2위를 기록한 도루 부분[50]을 제외하면 팀내 타격 성적에선 리그 최악의 성적을 기록한 주전 포수 나카무라 타케시[51] 다음 정도의 부진한 성적에 그쳤다. 실책까지 7개를 기록하면서 외야 수비 또한 불안한 모습을 보였다.[52] 다만, 일단 출루하면 특유의 몸을 내던지는 슬라이딩과 일본에서도 인정받은 빠른 발을 이용한 주루플레이로 상대를 뒤흔드는 모습이 종종 나왔고, 이를 나타내듯 도루 성공율이 .774, Spd가 7.2를 마크하며 당시 주루 플레이에서만큼은 리그에서 손 꼽히는 활약을 펼쳤다. 또한 99년 한일 슈퍼게임에서 조성민, 선동열과 함께 일본 올스타 대표로 출전, 총 5타수 2안타를 기록했으며, 1회전에서 한국 대표팀을 상대로 홈런을(상대투수:구대성) 쳐내기도 했다.
2000년에는 전년도 부진의 여파와 시즌 시작 전부터 호시노 감독과의 마찰로 인해 개막 엔트리에 포함되지 못하고 2군에서 시즌을 시작했다. 그런데 주니치가 이 때 새로 영입한 외국인 타자가 하필 풀타임 메이저리거 출신에 전년도 메이저리그 올스타 출신인 데이브 닐슨(등록명 딩고)이었다.[53] 당연히 닐슨에게 밀려나 1군에는 아예 자리가 없을 것으로 보였으나, 정작 기대와 다르게 닐슨이 일본 야구에 전혀 적응하지 못하며 시즌 초반부터 극악의 부진을 보였고, 팀도 연패에 빠지는 등 어수선한 상황에서 2군에 있던 이종범이 바로 1군으로 콜업되었다. 1군 콜업 후 활약으로 팀이 10연승을 질주하는 데 기여했다. 호시노 감독도 이 때 만큼은 "팀 분위기를 바꿔줄 놈이 필요한 시점이었다."는 말로 이종범의 활약을 인정했을 정도. 연승이 끝난 이후 잠시 주춤할 때도 있었으나 8월 중순까지 주로 1,2,3,6번을 오가며 3할을 넘나드는 타율을 기록할 정도로 분전했고,[54] 최종 성적은 113경기에 출전해 .275의 타율과 8홈런 37타점 11도루. WAR 2.3를 기록했다. 9월 들어서 막판에 힘이 빠진 탓에 타율이 여름에 비해 뚝 떨어졌으나, 전년도에 바닥을 찍었던 타격 성적보단 어느정도 일본 리그에 적응해가는 모습을 보였다.[55]
2001시즌은 개막 엔트리에 포함되긴 했지만 새 용병 듀오인 팀 언로와 아지 티몬스에 밀려 시범경기부터 선발 출전하지 못하고 대타와 대수비 등으로만 출전했다. 출장 기회를 확보하고자 외야수는 물론, 고등학교 1학년 이후 처음으로 3루수 준비까지 했던 이종범으로서는 자존심이 상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개막 얼마 후 2군행 통보를 받고 분노가 폭발해 급기야 구단 대표와 담판을 지어 출전 기회가 보장되지 않으면 퇴단하겠다고 통보했다. 4월 24일 야쿠르트전부터 다시 1군에 복귀해 선발 3번타자 3루수로 기용되었으나, 이틀 연속으로 출루 한번 못하고 8타수 무안타를 기록해 다시 벤치멤버로 내려갔다. 이후 두 경기에서 대타, 한 경기에서 대주자로 기용된 후 다시 2군으로 강등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전 시즌까지 주니치의 붙박이 4번타자였던 용병 레오 고메스가 주니치와의 뒤늦은 재계약에 성공해 컴백하게 되자 더 이상 1군에서 이종범이 설 자리는 없었다.[56] 결국 6월 1일자로 상호 합의하에 주니치를 퇴단하였다.
일본 진출 후 20여년이 지난 후 새삼 주니치 팬덤에서 이름이 오르내리고 있는데, 다름이 아니라 2018 자카르타 아시안 게임과 2019 WBSC 프리미어 12대회에 국가대표로 출전해 좋은 성적을 올린 이정후가 이종범의 아들인데다, 2018 아시안게임 국가대표팀 감독이자 주니치의 역대급 마무리였던 선동열과 함께 코칭스태프로 다시 한번 페어를 이루었고, 19년엔 호주 국가대표팀 감독이 2000년 주니치에서 이종범과 한솥밥을 먹었던 데이비드 닐슨이었기 때문. 거기에 2019년 11월 이종범이 주니치로 코치연수를 가게 되면서 올드 팬들에게 계속해서 언급되기도 했다. 90년대의 추억의 용병으로 받아들여지는 듯 하다. ######21년의 유튜브 댓글이종범을 추억하는 21년의 기사 2024년 일본현지에서는 대부분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이정후의 아버지로 소개되고 있다.
여담으로 SK 와이번스의 일본인 투수 카도쿠라 켄과는 주니치 시절 한솥밥을 먹은 적이 있었다. 그 인연으로 카도쿠라가 원정 경기가 끝난 뒤에 이종범의 집에 방문한 적이 있다.[57] 그리고 2020년 이종범이 주니치로 코치연수를 가게되면서 마침 2군에서 투수코치를 맡고있던 카도쿠라와 잠깐이지만 다시 한솥밥을 먹게 되었다.
3.2.2. 무엇이 문제였나?
3.2.2.1. 팔꿈치 부상
이종범의 일본 진출 실패가 구체적으로 무엇이 이유였는지 분석해보자면, 그 정도가 크든 적든 부상이 부진의 결정적인 이유가 된 건 사실이다.이종범은 국내 시절부터 원래 몸쪽으로 오는 코스의 볼을 당겨치는 걸 좋아했다. 부상 전에는 이를 바탕으로 일본 투수의 몸쪽 공을 어느정도 잘 대처했지만, 앞서 언급했던 것과 같이 98년 4월 중순부터 잦아진 사구들과 더불어출처, 오른쪽 팔꿈치 부상을 당한 이후 몸쪽 공 대처가 예전만 못해지고 스윙도 예전만큼 빠르게 나오질 못하자, 그 점을 집요하게 파고든 일본투수들에게 속절없이 당하고 말았다. 특히 부상 이후 스윙 매커니즘이 바뀌어버려 몸쪽 공 대처능력이 떨어진 후에는 이전까지 강점이던 당겨치기를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게 되어 애매한 땅볼과 펜스 앞 플라이를 양산하곤 했다. 이종범과 같은 빠른 배트 스피드로 당겨치는 스타일의 우타자에게 오른쪽 팔꿈치, 그것도 안쪽 관절 부분의 골절은 치명적인 부상일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이종범은 본래 왼손잡이였음에도 우타자로 활동했다는 점도 해당 부상이 어떠한 영향을 끼쳤을지 고려해야하는 부분이다. 실제로 부상 이후 스스로 스윙 매커니즘이 완전히 변해버렸다고 말했을 정도. #
이 부상은 공격력뿐 아니라 수비력에도 악영향을 미쳤는데, 무릎팍도사에 나와서 밝히길 부상의 영향으로 인해 70m-80m를 할 수 있던 롱토스의 거리가 40m-50m로 줄어들었을 정도였다고 했다.
덧붙이자면 이종범에게 팔꿈치 골절을 입힌 가와지리의 볼이 강속구 고의 빈볼이라고 우기는 사람이 많았는데, 가와지리는 언더핸드 투수에 패스트볼의 최고구속이 120km 후반대인 투수로 당시 이종범에게 던졌던 볼은 변화구였고 헛스윙 판정에 스트라이크였다. 무엇보다 우타자의 왼쪽 팔꿈치면 모를까, 오른쪽 팔꿈치 안쪽을 노려서 빈볼을 던진다는 것 자체가 공이 유도미사일이 아닌 한 물리학적으로 불가능한 얘기. 부정적인 분위기로 선동하는 찌라시들과 부화뇌동하는 팬들 덕택에 우리나라에서 가와지리에 대한 평가가 매우 안 좋아졌는데 가와지리는 그 후에 한신 타이거스의 단장[58]과 함께 병원까지 찾아가 이종범에게 사죄까지 했다. 관련 영상 이종범이 오히려 안절부절 못할 정도의 진실한 사과였고, 박동희의 칼럼에 의하면 이 일로 인해 이종범은 처음으로 '타인을 용서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게되었다'고 한다. 링크 이종범 자신도 전혀 빈볼이라거나 일부러 맞힌 공은 아니었다고 말했다. 자꾸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았고, 일일이 설명하기도 힘들었지만 딱 잘라 말하면 자신이 치려고 나가다가 맞은 공이었다고 언급했다.
또한 앞서 주석에서 언급한 내용이지만, 당시 주니치 드래곤즈의 수석코치였던 시마노 코치의 인터뷰에서 그 날 시마노 코치는 유독 주니치에게 강했던 가와지리를 압박하기 위해 주전 모두 앞으로 나서서 홈플레이트에 바짝 붙어 타격하라는 작전을 냈다고 한다.[59] 이종범은 이를 충실히 실행하다가 부상을 당한 것. 링크
하지만 어이없게도 황금어장 무릎팍 도사에서는 이 변화구를 150km짜리 강속구로 포장했고 방송분에서는 이종범도 이에 동조하며 자신의 부진이 주변의 차별과 압박 탓인 양 돌리는 실망스런 모습을 보였다. 이 때의 반응으로 김성근이나 선동열과 비교하기도 하면서 이종범이 일본에서 배운 것도 없고 반감만 키워왔다고 하기도 하지만, 정작 이종범은 박동희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일본에서의 2군 시절동안 많은 것을 배웠다고 했고, WBC 결승타 후 일본 진출 실패에 자신의 노력이 부족한 점도 있다고 인터뷰 했다. 은퇴 후 강연에서도 본인이 당시 지나치게 현실에 안주했었다는 말도 했었다. 관련 영상 정말로 본인의 실패의 모든 것을 당시 주변의 탓으로 돌렸다면, 주니치에 자비로 직접 코치연수를 신청하고 2군에서 배워오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일본 야구 진출 후 불만을 드러낸 부분은 비단 이종범만의 특별한 사례는 아니다. 선동열도 첫해에 부진할 때는 스트라이크존에서 불만을 토로했고 국내로 복귀한 정민태, 정민철도 차별대우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실제 차별여부는 알 수 없으나, 당하는 사람은 그렇게 느낄 수도 있는게 사실이다. [60] 다만 국내 구단들의 용병에 대한 시선이나 대우를 생각해보면 사실 다른 리그로의 이적에는 용병으로써 어느정도 적응에 대한 의무감이 생기는건 어쩔 수가 없다. 해외 진출한 국내 선수들 중 성공한 케이스와 실패한 케이스로 나뉘는 척도도 보통 한국과는 다를 수 밖에 없는 리그의 사정이나 본인의 기량에 대해 얼마만큼 사색하고 노력했느냐에 따라 갈리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와는 별개로 아무래도 본인이 고생했던 만큼, 일본 야구에 대한 반감은 다소 남아있는 듯하다.
이 때의 부상과 관련해서 본인이 언급한 부분이 있는데, 당시 도루 20개에 2천만엔, 초과시 1개당 100만엔에 달하는 거액의 인센티브가 달려 있었다고 한다. 가난했던 구단인 해태 타이거즈 시절에는 만져보지 못할 거액의 인센티브였고, 무엇보다 본인이 스스로 주니치 드래곤즈에 용병으로서 돈을 벌기 위해 갔다고 했던 만큼, 이로 관련한 6월 초의 슬럼프에 대한 부담이 '몸에 맞아서라도 나가자'라는 방식의 무리한 타격을 이끌어내는 결과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
3.2.2.2. 홈구장 적응 문제
하필 주니치 드래곤즈의 홈구장인 나고야 돔이 잠실 야구장 못지 않게 외야가 넓고 펜스가 사직 야구장만큼 높기로 유명한,[61] 일본 프로야구 구장에서도 매우 투수친화적인 구장이었던 것도 몰아치는 타격에 능했던 이종범의 부진이 깊어지는데 한 몫을 했다.실제로 한국이나 일본의 다른 타자 친화적인 구장이었다면 넘어가거나 펜스를 때렸을 타구들이 여지없이 외야수의 글러브로 빨려들어가는 모습이 종종 나타났다. 한국에서는 한번 불이 붙으면 기세를 타서 플레이하던 이종범에겐 호시노의 갈굼과 함께 상당한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실제로 한국의 야구장과 비슷했던 야쿠르트의 메이지 진구구장이나 요코하마의 요코하마 스타디움에서는 활약이 좋았다.
당시 나고야 돔의 악명은 대단했는데, 90년대 초중반까지 강력한 공격력으로 승부하던 주니치 드래곤즈는 입주 첫 해 타격지표가 말 그대로 폭락해버렸다. 당장 전 시즌 타율 .332 39홈런 107타점으로 홈런왕을 차지했던 야마사키 타케시는 나고야 돔 입주 첫 해인 97시즌에 출장 경기수가 130경기로 전 시즌 127경기보다 3경기가 더 늘었음에도 불구하고 타율 .257 19홈런 54타점으로 타격 지표가 반토막이 나버렸고, 38홈런 89타점을 올린 타이호 야스아키는 12홈런 35타점으로 더욱 처참한 성적을 남겼다. 1994~1996년 3년 연속 수위타자 겸 직전해 리그 최다안타와 함께 타율 .340 14홈런을 기록했던 알론조 파웰도 타율 .253 14홈런으로 성적이 크게 떨어졌다.[62] 이러한 팀 공격력의 급격한 저하로 인해 주니치는 그 해 리그 최하위로 추락하는 굴욕을 겪었고, 이 참상을 목격한 호시노 센이치 감독이 기존까지의 공격력 중심 팀컬러를 버리고 기동력, 수비력을 중심으로 하는 팀컬러로 체질 개선을 도모하면서 주니치는 빠르게 성적 저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럼에도 과거 작은 무등 야구장을 홈구장으로 삼았던 해태 시절처럼 크게 당겨치는 스윙과 팔로스루를 부상 후에도 고집을 했었으니 99년과 같은 성적을 기록한 것은 필연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사실 이종범은 한국에서 방위복무시즌이던 95년을 제외하면 매 시즌 홈런 5위 안에 들었던 강타자였고, 일본 데뷔 첫 해에도 팀내에서 3위, 부상 직전에는 리그 10위 이내에 해당하는 제법 많은 수의 홈런을 때려냈던 만큼 당시 주니치에서 요구했던 타격방식의 변경을 쉽게 받아들이진 못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동열과 같이 변화된 상황에 맞추어 좋은 성적으로 극복해내는 모습을 보이지 못했다는 점은 역시 아쉬움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3.2.2.3. 호시노 센이치 감독과의 마찰
당시 주니치의 감독이었던 호시노 센이치와의 갈등도 이종범의 침체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는 것 역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종범 본인이 밝혔듯, 호시노와의 마찰 때문에 외야수로 강제 전향당하면서 본인 스스로도 정신적인 타격을 입은 듯하다.[63] 거기에 그치지 않고 호시노는 이종범을 구타하고 방송에서 대놓고 이종범을 폄하하기도 했다. 국내 복귀 이후에도 이종범에게는 상당한 트라우마가 되었는지, 호시노를 만나는 꿈을 꿀 때마다 경기가 안 풀리는 징크스가 있기도 했다. 2003년, 2010년 관련 기사이종범과 호시노가 마찰을 일으켰던 건 단순히 이종범의 성적이 실망스러웠기 때문인 것만은 아니었다. 근본적으로는 두 사람의 상성이 맞을 수가 없었던 게 주요 요인이다. 둘 다 야구에 관해서라면 한 고집 하는데다 야구관까지 서로 정반대인 탓에, 이종범이 호시노에게 숙이고 들어가거나 호시노가 이종범이 하고 싶어하는 야구를 하게 풀어줘야 문제가 해결될 텐데 둘 중 하나도 성립할 수가 없으니 잘 풀릴 리가 없었다.
이종범은 해태를 지휘하던 김응용 감독의 자율야구 체제에 익숙했고 또 본인도 그런 분위기를 선호했다. 그러나 호시노 감독은 일본 야구계에서도 철권통치로 유명한 강성 관리야구 스타일의 감독이었다. 이런 타입의 감독은 사람마다 호불호가 갈릴 수밖에 없는 유형인데[64] 이종범은 하필 불호에 해당했다. 실제로 김응용 감독은 주니치에서 부진을 거듭하던 이종범에 대해 "저 녀석은 냅둬야 잘 하는데..."라는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특히 김응용 감독은 이종범의 외야수 컨버전을 굉장히 부정적으로 보았다. 이종범의 장점과 기질을 모두 죽여버리는 판단으로 여겼던 것. # 이후 유튜브 인터뷰에서도 팀내 고참이었으면서 코칭스태프였던 김성한과 김종모도 이종범은 신인시절 전반기에 터치를 하니 성적이 잘 나오지 않았는데,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했더니 날아다니기 시작했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일본 내에서도 이런 부분에 대한 우려가 있었는지, 당시 일본 야구팬들도 강압적인 지도 스타일의 호시노 감독이 있는 주니치보다는 좀더 자유로운 분위기의 퍼시픽리그 쪽으로 이적했다면 더욱 활약했지 않았겠냐는 평가를 내리기도 했다. #
호시노가 이종범을 처음부터 탐탁잖게 여겼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호시노는 주니치 시절 이종범의 한국 시절 모습처럼 운동능력이 뛰어난 중장거리 호타준족 성향, 그리고 근성있는 선수를 굉장히 선호했고, 그런 모습을 기대하고 이종범을 데려왔다. 게다가 이종범의 일본 데뷔 초에는 수비능력에 대해 혹평을 한 것도 사실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족한 수비 기본기를 커버하기 위해서 빠른 발을 이용한 넓은 수비범위와 이를 이용해 타구를 포기하지 않고 몸을 내던지는 자세를 고평가하기도 했다. 99년에는 이종범이 부진한 성적을 기록해도 플래툰이나 교체요원으로 쓰지 않고 풀타임 주전으로 계속 기용했고, 시즌 종료 후 한국에 가는 대신 가을 훈련을 하자고 권유하기도 했다.
선수단 관리를 칼같이 하는 호시노 감독의 성향으로 볼 때 가을 훈련을 권유했다는 것은, 이종범이 단순히 성적 안 나오면 정리해버릴 용병이 아니라 어떻게든 키워내면 팀의 핵심적인 역할을 맡길 수 있을 만한 선수였다는 말이 된다. 즉 호시노는 이종범이 충분히 일본 프로야구에서 살아남을 자질이 있다고 봤던 것.[65] 그러나 이종범은 99년의 실망스러운 성적에도 불구하고 외국인 선수라는 이유로 가을 훈련을 거부하였다. 외국인 선수는 가을 훈련에 참가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당시 일본 프로야구계의 원칙이었으며, 당시 이종범의 부친이 건강상태가 좋지 못했기 때문에 귀국하기를 원했던 점 등, 이종범의 입장에서도 충분히 내세울 만한 거절 이유도 있었다. 그러나 좋은 뜻으로 훈련을 통해 문제점을 교정하고 일본야구에 적응시키려고 가을 훈련을 제안한 코칭 스탭이 이로 인해 불쾌해 했던 것은 필연적인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결국 서로의 의견을 굽히지 않은 이종범과 호시노의 관계가 틀어진 것은 이것이 결정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66]
또한 호시노가 이종범을 구타하긴 했지만 이는 차별대우가 아니라 자신이 일본 선수들에게 하는 것과 똑같이 대우한 것.[67] 물론 구타를 한 게 올바른 코치로써의 방침인가에 대한 도덕적 이의제기는 가능하겠지만, 적어도 일본 선수가 아니라는 이유로 차별했다는 명제에 대해서는 반박이 가능하다. 하지만 이종범의 경우 국내 복귀 후에 본인이 타이거즈의 최고참이 되자 해태시절부터 내려온 구타문화를 없애버렸을 정도로 구타에 대한 거부감이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호시노의 간섭과 구타는 그에게 역으로 작용했을 수 있다. 일개 선후배 차원에서의 구타와 감독의 구타는 받아들이는 차원이 다를 뿐더러, 특히 타국에서 건너온 용병임에도 당하는 입장에서는 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이종범의 유격수 수비력도 호시노의 기준에서는 납득할 수 없는 부분이 많았다. 일단 내야 수비의 안정성을 매우 중요시하는 호시노의 스타일과는 달리 이종범의 유격수 수비에는 실책이 상당히 많았다. 지금도 일본야구는 수비범위가 다소 좁아지더라도 정자세를 통한 안정적인 정면포구와 원바운드가 되더라도 정확하게 송구를 하는 기본기 위주의 수비를 상당히 중요하게 본다.[68] 거기다 당시 주니치는 투수친화적인 구장에서 스몰볼 위주의 야구가 자리잡기 시작했던 입장인데 상대 팀의 주자를 한 루 출루시키는 것이 승부와 직결되는 상황이 잦았던 만큼, 수비가 불안한 이종범은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이종범은 이러한 안정성 있는 수비를 해야한다는 일본야구의 풍조의 대척점에 있는 선수여서 더욱 평가가 박했다. 당시 이종범은 98시즌 중반까지 실책 11개를 기록했으며 4월엔 무려 6게임 연속 에러를 기록하기도 했다. 실제 수비 성적을 봤을 때 130경기로 환산하면 이종범은 이후 유격수 주전으로 활동한 쿠지 테루요시에 비해 10개의 자살, 75개의 보살을 더 많이 기록하고 18개의 실책을 더 기록했을 것으로 예측되는데, 이를 바탕으로 보면 아무리 런세이브나 레인지팩터, 수비득점 등의 세이버 수비지표가 쿠지에 비해 좋은 성적을 기록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수비에 아쉬운 부분이 없다고 하긴 힘들다. # 특히 이종범이 쿠지에 비해 강점을 보인 세이버 스탯이 대중화되지 않았던 당시에는 평가가 더욱 나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수비력이 중요하게 여겨지는 유격수 자리에서 이종범의 가장 고질적인 유격수 수비의 문제점으로 여겨졌던 기본기 문제는 단기간에 극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에[69] 강제 외야수 전향은 어떻게 보면 이종범을 주전으로 쓰기 위한 주니치 코칭스탭의 어쩔 수 없는 결정으로 볼 수도 있다. 다만 이종범의 실책 수는 그 전 KBO 시절에도 상당한 수였고,[70] 당시에도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수비논란이 있었기 때문에 데이터 분석으로 소문난 일본 프로야구에서 이종범의 데이터를 받은 후 리그 수준과 실책 수를 참고하지 않고 무작정 유격수에 박았을 리도 없었을 것이다. 실제로 입단 초 국내 언론에 소개된 입단 기사에서도 호시노는 처음부터 이종범을 유격수로 쓰기보다 외야수(중견수)로 전환시킬 생각이 컸었다.' ###
어찌되었건 결국 이종범은 유격수 수비에서 정면 타구와 송구의 정확도에 약점이 있다는 것을 이유로 팔꿈치 부상으로 자리를 비운 동안 동년 한신 타이거스에서 트레이드로 영입한 수비형 유격수 쿠지 테루요시[71]한테 주전 유격수 자리를 내주게 된 후 외야수로 포지션을 변경하기에 이른다.[72] 그러나 팀의 의도가 어떠했든 이종범에게는 이러한 포지션 전환이 자신의 야구관을 부정하는 것으로 다가왔던 모양이고, 이종범 본인은 '맞지 않는 옷을 입은 느낌'. '외야수 전향 이후 내 야구가 바뀌었다'라고 술회할 정도로 정도로 정신적 충격을 상당히 강하게 받은 것으로 보인다.
물론 감독과의 합이 맞지 않아 본인의 기량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는 경우가 없는 건 아니나 그걸 극복해내는 것도 결국 본인 몫이므로, 이종범이 본인의 자존심을 꺾고 일본야구에 적응하려 노력했다면 결과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도 남는다. 이종범보다 먼저 주니치로 진출했던 선동열은 첫 해 2군에 떨어졌을 때에도 본인의 노력으로 결국 그 가치를 증명해 냈으며, 팀의 마무리로 2년 밥값을 했고 호시노 감독과의 사이도 좋았다. 선동열은 호시노가 작고할 때까지 스승으로 모셨고 자기가 못한 걸 어설프게 변명하지 말라고 이종범에게 한 소리한 적도 있다. 이상훈의 경우 역시 팀원들과 원만한 사이로 지냈고, 적응면에 있어서도 문제가 없었다. 첫 해는 선발 용병으로 데려갔으나 선발 첫 7경기 동안 방어율 6.28을 기록하면서 선발에서 강판되고 WAR 음수를 기록하는 등 역시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으나, 이후 절치부심하여 1999년 불펜으로 전향한 후 95이닝동안 평균자책점 2.83을 기록하면서 메이저리그까지 진출하였다.
3.3. 국내 복귀
주니치 퇴단 후 삼성 김응용 감독에게 전화를 걸어 "감독님과 함께 야구하던 시절이 그립다. 감독님 밑에서 야구 하고 싶다."라고 의사를 밝혔으나, 김응용 감독의 설득과 주니치에 입단할 당시 해태에서 임의탈퇴가 되어 해태로밖에 복귀를 할 수 없어서 2001년 8월 1일, 해태에서 기아로 모기업이 바뀐 타이거즈에 연봉 3억 5천+엔터프라이즈 1대[73]를 받는 조건으로 복귀한다.[74]3.3.1. KIA 타이거즈 2기
3.3.1.1. 2001~2005 시즌
KBO 골든글러브 외야수 부문 수상자 (2002, 2003) |
2001년에는 유격수나 외야수가 아닌 타격에 집중하기 위해 3루수로 복귀했다가, 2002년부터는 일본 시절처럼 본격적으로 외야수로 뛰기 시작했다.
일본 진출 전 만큼은 아니였으나 2005년까지 리그 수위권 타자로써 좋은 모습을 보여줬다.
세부적으로 보면 다음과 같다.
- 2001년[75] : 45G 64안타 11홈런 7도루[76] 37타점 66득점 .340 / .401 / .601 wRC+ 154.8 WAR* 2.54
- 2002년[77] : 123G 142안타(8위) 18홈런(15위) 35도루(3위) 59타점 93득점(5위) .293(11위) / .365(13위) / .464(19위) wRC+ 124.1(16위) WAR* 5.24(9위)[78]
- 2003년[79] : 132G 165안타(2위) 20홈런(13위) 50도루(1위) 61타점(20위) 110득점(3위) .315(9위) / .389(14위) / .515(11위) wRC+ 142.8(10위) WAR* 7.11(3위)[80]
- 2004년[81] : 133G 128안타 17홈런(16위) 42도루(3위) 53타점 100득점(1위) .260 / .350 / .422 wRC+ 106.2 WAR* 4.27(16위)[82]
- 2005년 : 118G 134안타(6위) 6홈런 28도루(6위) 36타점 69득점(10위) .312(5위) / .393(7위) / .421 wRC+ 127.8(15위) WAR* 4.79(8위)[83]
주전 외야수로 활약했던 02~05 4년 동안 통산 성적은 506G 569안타(3위) 61홈런(17위) 155도루(1위) 208타점 372득점(1위) .295(18위) / .374(19위) / .458 wRC+ 125.3(20위) WAR* 21.40(2위)으로, 04~05 때 비율스탯을 많이 까먹긴 했으나[84] 누적으로는 상위권인 성적이 많고 WAR*은 심정수에 이어 2위이다.팀 내에서는 장성호와 함께 타선을 이끄는 쌍두마차였으며, 동시대의 대표적인 외야수였던 이진영, 박한이, 이병규, 박재홍 등보다도 WAR을 비롯한 타격 스탯이 좋을 정도로 굉장히 준수한 외야수였다.
하지만 후술할 노쇠화의 기미는 이 때부터 서서히 보이기 시작했다. 2002년에는 위협구에 맞아 광대뼈가 함몰되는 부상을 입고 그 여파로 한동안 일명 '검투사 헬멧'을 쓰고 타격에 나서기도 했으며[86], 2003년에는 3할-20홈런-50도루-7점대 WAR로 전성기 못지않게 순항했다. 그런데 2004년부터 배트 스피드가 점점 떨어지기 시작해 그 시즌 0.260의 낮은 타율을 기록하며 노쇠화의 기미가 보이기 시작한다.[87] 결국 시즌 종료 후 데뷔 첫 연봉 삭감이라는 수모를 당했고, 이후 배트를 짧게 쥐는 스윙으로 바꾸며 2005년에는 3할을 다시 치고 출루율은 4년 중에서는 제일 높았으나 대신 장타력이 급감해버렸고, 덕분에 OPS 역시 크게 오르지 않았다. 그래도 골든글러브를 받았던 2002~2003년에는 S급 외야수였고, 성적이 상대적으로 떨어졌다고 평가받는 2004~2005년에도 준수한 외야수라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전성기 시절처럼 80도루를 하지는 못했지만, 주루 플레이는 리그에서도 상당한 수준으로 평가받았다. 특히 수비수의 태그를 피해 들어가는 고난도의 기술을 여러차례 보여주었는데, 당시엔 이종범만이 할수 있는 독보적인 플레이라고 할 수 있었다. 다만 이런 창의적인 플레이가 상대 선수도 잘 속였는데 가끔 심판마저 속아서 태그를 피했다는 사실을 순간 인식하지 못하고 타이밍만 보고 아웃을 시켜버리는 적도 있었다(...).
2005년 시즌 후 FA 자격을 얻었고, 2년 총 18억(계약금 7억, 연봉 5억×2, 옵션 총 1억)에 KIA 타이거즈와 재계약했다.
리그에서 정상급 외야수였던 이종범은 2006년 3월,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 차출되어 타율(.400)과 안타(10개) 1위를 차지하며 대회 올스타로 선정되는 등 한국 대표팀을 이끌어 팀의 4강 진출에 큰 활약을 했으나... 이것이 이종범의 마지막 전성기였다.
3.3.1.2. 2006 시즌
문제는 2006년부터 노쇠화가 급격해지기 시작했다. 시즌 시작 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대표팀에 차출됐을 때 엄청난 활약을 보였던 것과 다르게 시즌 개막 후에는 한눈에 봐도 노쇠화가 찾아왔다는게 보여질 정도로 망가진 시즌을 보냈다. 시즌이 한창이던 7월에는 극심한 타격 부진으로 인해 데뷔 처음으로 2군행을 통보받는 등[88] 2006년에는 82안타 1홈런 10도루[89] 21타점 41득점 .244/.302/.310 wRC+ 73.0 WAR 0.79로 크게 부진했다. 그나마 팀의 포스트시즌이 걸린 9월 이후에 활약하면서 포스트시즌 진출을 이끌긴 했으나, 이종범의 이름값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활약이었다. 그래도 2006년의 모습은 이듬해인 2007년 보여준 부진한 모습보다는 나았다는 의견이 대부분이다.3.3.1.3. 2007 시즌
부상을 당한 채로 뛴 덕에 2006년보다 부진이 더 심해져서 44안타 1홈런 3도루 18타점 23득점 타율 0.174, 출루율 0.217 , 장타율 .209, wRC+ 8.0, WAR -2.04[90] 라는 끔찍한 성적을 기록했다.사실 이 정도의 성적이면 레전드고 뭐고 2군에 있는게 팀에 더 도움이 될 것이지만, 당시 KIA는 '송산이 4번 치던 시절' 내지 '김기아'로 통용되는 21세기 KBO 리그 최악의 팀 타선에, 윤석민상의 원년도 만들어낸 최악의 막장 시즌이어서[91] 200타석 넘게 나오게 된 것. 결국 이종범의 이 부진은 2007년 KIA 타이거즈가 팀 역사상 최악의 시즌 중 하나로 꼽히게 된 큰 원인 중 하나가 된다.
이 해 커리어 첫 1할 타율을 찍으면서 시즌 후 리빌딩이라는 명목으로 은퇴를 종용받은 것은 덤. 이때 그가 인터뷰에서 한 이야기가 '은퇴가 왜 명예로운가?'였다. 이후 어찌저찌 은퇴는 면했지만, 대신 연봉이 기존 5억원에서 무려 60%가 삭감된 2억원에 도장을 찍으며 연봉 삭감의 칼바람은 피할 수 없었다.[92]
그리고 2007년의 영향으로 이종범의 비율스탯도 크게 깎였는데, 2006년까지 .310/.386/.493 wRC+ 143.7 WAR* 66.89였던 선수가 2007년 하나로 .303/.378/.479 wRC+ 137.0 WAR* 64.85로 폭락할 정도. 2007년 직전까지 5000타석 넘게 나온 선수가 통산 타율이 7리나 깎일 정도로 자타공인 이종범의 커리어의 흑역사 시즌이다.
3.3.1.4. 2008 시즌
이후 2008년에는 90안타 1홈런 9도루(3실패) 38타점 38득점 .284 / .348 / .379 wRC+ 99.9 WAR 1.45로 전성기의 모습에는 많이 못 미쳤으나 2006, 2007년에 비하면 많이 나은 모습을 보여주며 명예회복에 어느 정도 성공했다. 비록 '천재'라 불리던 그 당시의 모습을 다시는 볼 수 없었지만, 한계와 싸우는 그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타이거즈 팬들은 격려와 환호를 아끼지 않았다.3.3.1.5. 2009 시즌
2008년의 활약으로 2009년 시즌에도 예비 멤버로 뛸 수 있었다.사실상 스타팅 엔트리에 들기 힘들거라고 예상되었지만, 채종범, 이용규 등 외야 쪽에서 계속 터져나오는 줄부상 때문에 KIA는 이종범이 은퇴했으면 큰일날 뻔한 상황에 직면했다.
팀의 리더격인 인물로 팀을 이끌어나가는 것은 물론이고 우익수를 보면서 간염을 앓고 있는 김원섭까지 누워버릴 때는 중견수도 도맡아 하고 시즌 중반에는 침체된 KIA 타선에서도 2할 후반대 타율을 유지하는 등 고군분투하며 팀내 수위타자로 올라서기까지 하면서 팀에는 없어서는 안될 인물로 다시 한번 자신을 각인시켰다.
5월 500도루에서 단 한 개만 남겨둔 상황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로 도루를 해 봤자 축하할 분위기도 아니고 되도록이면 장례가 끝난 뒤 하고 싶다는 발언을 했다.
결국 6월 5일 광주 삼성전에서 500도루를 달성했다. 전준호에 이은 두번째. 전준호가 그랬듯이, 500도루 성공 직후 베이스를 뽑아서 번쩍 들었다. 그리고 그 후 김상현의 볼넷에 이은 최희섭의 1루타로 '1000득점'도 달성. 장종훈, 전준호, 양준혁에 이은 역대 4번째 기록이다. 6월 28일에는 개인통산 300 2루타를 찍었다. 이것도 장종훈, 양준혁, 장성호에 이은 4번째 기록.
9월 11일 금요일 한화전에는 류현진을 상대로 통산 20호 1회초 선두타자 홈런을 터뜨렸다.[93] 특히 이 날의 선두 홈런은 에이스 오브 에이스, 이대진의 통산 100승을 이끌어주었기에 더더욱 의미 있는 홈런이었다.
10월 16일 한국시리즈 1차전에서는 3타수 2안타 3타점으로 맹활약하며 기아의 5:3 승리를 이끌었다. 특히 첫 안타는 1:2로 뒤지던 2사 만루상황에서 터진 역전 2타점 적시타였고 두 번째 안타는 3:3 동점에서 달아나는 적시타로 베테랑의 실력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2009시즌 성적은 105안타 6홈런 11도루 40타점 63득점 .273 / .346 / .379 wRC+ 82.0 WAR 0.86.
시즌 후 FA 자격을 다시 얻었지만, 신청하지는 않았고 2억 6000만원에 연봉 계약을 마쳤다.
3.3.1.6. 2010 시즌
시범경기에서 2홈런을 치기도 했다. 이용규가 부진할 때 1번타자로 나서기도 했다. 두산과의 4차전 경기에서는 팀의 대 두산전 연패를 끊는 홈런을 치기도. 이 홈런으로 광주구장 최다 홈런기록을 세웠다.심지어 이후 대 롯데전에서는 NCK포가 동반침묵하며 3번타자로도 나섰다. 체력에 대한 염려도 있고 2010년 들어서는 시범경기부터 너무 빨리 페이스를 끌어올린 탓인지 타격에서 부진이 이어지고 있고 외야 수비범위도 많이 좁아졌다. 물론 40대 선수가 아직까지 외야 수비를 보는것도 대단하고 결정적인 순간에 한 방씩 터트려주기도 하지만 달리 보면 그만큼 당시 KIA의 외야진 문제가 심각했다는 뜻이다.
그런데 5월 23일 광주 넥센전에서 9회초 13-3으로 크게 이기고 있는 와중에 안치홍을 대신해서 3년만에 2루수 대수비로 출장하며 KIA 타이거즈 갤러리를 폭발시켰다. 어차피 큰 점수차로 이기고 있는 데다가 안치홍도 쉬게 해줄 겸 광주구장 관중을 대상으로 한 팬서비스로 보인다.
6월 8일 드디어 1700안타 고지를 달성했다. 이는 역대 6번째이다.
올스타 브레이크 즈음해서는 컨디션이 좋지 않아 선발 출전하지 않았지만 선발 출전한 8월 1일 SK와의 경기에서는 결승타와 홈런 포함 2안타 3타점으로 활약, 2년만에 드디어 김광현을 상대로 승리를 따내는데 큰 활약을 했다.
8월 14일 무등경기장에서 치러진 롯데와의 경기에서 상대 선수의 타구를 잡으려다 펜스에 부딪혀 병원에 실려갔다. 구단 지정병원에서는 가벼운 타박상으로 진단을 내렸지만 재검사 결과 갈비뼈에 실금이 발견되어 시즌 아웃이 되었다.
아직 정식으로 기사가 나지는 않았지만 양준혁의 트위터에 의하면 성구회의 4번째 회원이 되었다. 성구회는 기록의 50% 이상을 KBO 리그에서 기록하면 해외 기록을 입회 조건으로 인정한다.
그리고 12월 24일, 연봉 2억 6,000만원에서 7,000만원(26.9%)이 깎인 1억 9,000만원에 재계약했다.
3.3.1.7. 2011 시즌
출발이 매우 처참했다. 타율 2할대를 못 지키고 있었으니 더 이상 설명이 필요없는 수준이다. 게다가 딱히 출루율도 좋지 않았다. 초반의 상태로서는 시즌 끝나고 KIA 쪽에서 은퇴하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듯 싶었으나 시즌이 진행될수록 살아나면서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다.6월 1일에는 LG전에서 선발 출장, 4타수 3안타 1타점을 기록하며 경기 MVP에 선정되었다. 이날 인터뷰에서는 백업이 된 고참 선수로서의 역할과 은퇴에 대한 생각을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어 팬이라면 한 번 볼만 하다. 인터뷰를 한 이순철 해설위원이 해태 시절 이야기를 꺼내자 급 공손히 손을 모으는 장면이 재미있다.
▲ 2011년 6월 2일 잠실 야구장 LG전 이종범 타석에서 울러퍼진 응원가 |
6월 2일에는 LG전에서 6-0으로 앞선 2사 1,2루 상황에서 신종길 대신 대타로 나왔다. 이때 원정 온 기아팬들이 응원가 떼창을 시전했다.[94] 이 응원가 떼창으로 이종범이 기아에서 어떤 존재인지 잘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때 한명재 캐스터가 던진 두 마디, "기아팬들이 종범신을 부릅니다."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이종범이 파울을 쳤을때"적어도 13,500명은 지금 벌떡 일어났다가 앉았을 것 같습니다"는 멘트는 기아팬들의 심금을 울렸으며 응원가 떼창은 1분 1초부터 나온다.
6월 4일 문학 SK전 5회초 1-0으로 앞서고 있는 상황에서 게리 글로버를 상대로 2-0으로 앞서나가는 홈런을 때려내며 시즌 1호 홈런을 기록했고, 다음날 경기에서도 0-1로 뒤지고 있던 7회 초에 상대 투수 고효준의 초구를 그대로 좌측 담장으로 넘겨버리는 솔로 홈런을 치며 동점을 만들었다. .
7월 8일 대 LG전에서 6회 1사 1,2루서 좌전 안타를 때렸는데 그게 결승타가 되었다! 거기에 강우 콜드게임이 선언되어 기아는 1위에 등극! 하지만 다음날인 7월 9일 LG에게 져 다시 2위를 기록했다.
8월 2일 대 두산전에서 5타수 3안타로 대활약. 2점 적시타, 안타, 삼진, 안타, 삼진으로 노장의 빛을 발했다. 기아 선수들 중 경기에서 최고 활약. 마지막 타석에서는 엎어지는 몸개그까지 선보였다. 8월 6일 SK전에서 선발 윤석민이 4실점하며 지고 있던 때 전병두를 상대로 투런 홈런을 때려내며 추격의 발판을 마련하는 듯 했지만 팀의 패배로 빛이 바랬다. 올해 3개 홈런을 때렸는데 전부 문학에서 SK를 상대로 때려냈다!
2011년 8월 8일 현재 74경기에 출전, 167타수 47안타(2루타 10개, 3루타 1개, 홈런 3개). 22득점 18타점 15볼넷 29삼진. 타율 0.281에 출루율 0.342, OPS 0.750로 42세라는 나이를 감안할때 엄청난 성적. 특히 후반기 들어 9경기 연속 선발 출장하며 타율 0.367을 찍으며 기아 공격을 이끌고 있다. 다시 말하는 그의 나이는 42세였다.
부상병동이 되어버린 타이거즈에서 2번타자의 부재로 이용규 이후 타선이 엉망이었는데 이용규가 못치는 날엔 자기가 테이블 세터 역할에 충실하고 있다.
9월 18일 시즌 LG와의 19차전 마지막 홈경기에서 3회말 2번째 타석에서 본인의 2루타에서 이어지는 김상현의 적시타로 통산 3번째 1100득점을 달성하였다. 이 전의 두명은 양준혁과 전준호 모두 성구회 멤버이다.
시즌 최종 97경기 출장하여 작년과 똑같이 97경기 출장에 65안타[95]를 때려냈지만 작년보다 다소 적은 273타석만에 쳐낸 것이며, 사사구는 작년보다 더 많은 23개를 기록하면서 타출장 슬래시라인 0.277 / 0.337 / 0.387로 기대 이상의 활약을 해냈다. wRC+도 91.7에 sWAR도 0.69로 나이를 감안한다면 더더욱 인상깊은 활약이었다.
3.3.1.7.1. 포스트 시즌
2011년 10월 9일 문학 야구장 에서 열린 준플레이오프 2차전 10회초 1사 1루에 대타로 출장해 유격수 앞 병살타로 물러났다. 2011년 10월 12일 무등 야구장 에서 열린 준플레이오프 4차전 9회 말 2사 주자 없는 상황에서 대타로 출전, 삼진으로 물러났다. 그리고 2012년 3월 31일 은퇴 의사를 밝힘으로서 이 타석이 그의 마지막 타석이 됐다. 이종범이 은퇴 경기를 따로 가지지 않고 은퇴식만 가지기로 하면서 KIA팬들은 아쉬움을 표했다.3.4. 은퇴
이종범이 떠날 시간은 이종범이 정한다. 이종범은 그럴 자격이 있다.
최의민
2012년 스프링캠프에서 좋은 훈련 성과를 보였고, 시범경기에서도 12타수 4안타를 치는 등 나름대로 활약을 해서 최고령 현역 선수로서의 활약이 기대되었지만 2012년 3월 31일, 한화 이글스와의 시범경기 종료 후 은퇴를 선언했다. 이순철 수석코치가 이종범을 불러 개막전 엔트리에 들지 못할 것이라고 밝혔고, 이에 이종범은 갑작스런 은퇴를 선언하였다. 노장임에도 현역 선수로써의 경쟁에서 밀리지 않기 위해서 준비를 많이 했던 만큼 이종범 본인도 아쉬웠던 것이다. 한때 코치진 및 구단 간의 갈등이 있기도 했지만, 이후 다시 만나서 이야기를 통해 논란의 불씨를 잠재웠다. 이후 4월 5일 은퇴 기자회견에서 공식적으로 은퇴하겠다고 밝혀 결국 현역 생활을 마감하게 되었다.최의민
일단 본인의 발언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은퇴 이야기를 처음 들은 것은 지난 2008시즌이 끝나고 나서였다. 그때부터 팀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지 않는다면 언제든 옷을 벗을 작정이었다.
- 대주자나 대수비로라도 타이거즈가 이기는데 필요로 한다면 끝까지 뛸 생각이었다. 지금에 이르러서 팀에서 더 이상 할 몫이 남아있지 않아 은퇴를 결심했다.
2번에서 보듯 그의 은퇴 선언 배경에는 '타이거즈 색이 약했던[96]' 조범현 감독 체계에서 '타이거즈의 색이 강한[97]' 선동열 감독 체계로 바뀌며 타이거즈 프랜차이즈로써의 구심점 역할을 해왔던 이종범의 역할이 없어진 것도 한몫을 한 것으로 보인다. 조범현 감독 하에서는 전성기를 한창 지난 노장임에도 팀을 결집시킬 수 있는 구심점 역할이 있었기 때문에 이종범이 중용되어 경쟁을 통해서도 선수 생활을 지속할 수 있었지만, 새로운 감독 체계에서는 더 이상 이런 역할을 이유로 남을 수 있는 명분이 약화되자 비슷한 성적을 내는 젊은 선수들을 더 출장시키려는 입장과 충돌하면서 은퇴를 선언한 것으로 보인다.
은퇴 관련해 이종범 본인의 배경과 이유가 어찌되든 선동열의 전적 및 여러 주변 정황 때문에 다수의 여론은 또 이렇게 선동열은 한 명의 레전드를 보내는구나 하고 비난했고, 불암콩콩코믹스에서도 호되게 깠다. 거기에 이종범의 은퇴식 한 달 뒤 6월 28일 기사에 따르면 선동열 감독이 이종범에게 은퇴를 권유하는 것과 달리 또 다른 노장 최향남을 영입한 것에 대해서 이종범은 야수이고 최향남은 투수이기 때문에 최향남의 복귀가 가능했던 것이라고 밝혔으니[98] 팬들 입장에서는 확인사살로 인식되었는데, 이는 2010년 양준혁의 은퇴 당시에도 확연히 드러났기 때문이다. 거기에 더해 이종범과 최향남은 불과 1살 차이다.[99][100]
2015년 12월 MBC SPORTS+ 구구절절에서 털어놓은 얘기에 따르면 2012년 2차 드래프트 보호선수 명단에서 자신이 제외되었다고 한다. 당시에 다른 팀이 데려갔으면 하는 바람도 있었으나 결국 이종범을 데리고 가는 팀은 없었고 그래서 다음에 바로 은퇴했다고 말했다.
2012 시즌이 마무리되어가는 시점에서 이종범의 은퇴를 다시 생각해 본다면, 결과적으로 이종범의 갑작스런 은퇴는 KIA의 선수단 운영에 독이 되고 말았다. 이종범의 기량은 예전같지 않았고 다른 젊은 선수들에게 밀린다고 하더라도 그가 팀 선수단에서 여전히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선수들에게 직접 조언을 해줄 수 있고 다른 선수들에게 귀감이 되는 리더형 고참 선수였던 것을 감안한다면 최희섭, 이범호의 이탈이나 젊은 선수들의 기량 저하에 대해서 조언을 해줄 수 있는 정신적 지주를 갑작스럽게 잃어버린 KIA에게는 큰 공백이 되어버렸고, 결과적으로 KIA가 가을야구에 진출하지 못하게 되는 원인이 되고 말았다. 과거 삼성에서 그래왔던 것처럼 선동열이 총대 메고 고참을 은퇴시키고 젊은 선수를 육성하겠다는 계획은 KIA에게는 오히려 독이 되었던 셈이다. 야구를 제외한 축구, 배구 같은 스포츠에서도 팀 프랜차이즈 스타이자 레전드 반열에 이미 올라서 있는 베테랑 선수를 이런 식으로 은퇴시키지는 않는다. 후배 선수들에게 조언해주고 팀의 중심을 잡아줄 수 있다면 더더욱 그러한데, KIA는 이종범의 자리를 없앰으로서 팀의 정신적 지주이자 기둥을 스스로 부숴버린 셈이다. 향간에선 이종범의 은퇴 영향으로 이정후가 서울로 전학을 가서 넥센 히어로즈의 1차 지명으로 입단하는 결과를 만든 게 아니냐는 이야기도 나오는 중.[101][102]
기자회견에서 이종범은 SK 김원형처럼 따로 은퇴 경기는 생각하고 있지 않다고 하였다. 다만 시즌 중후반 은퇴식을 가지기로 할 예정이라고 한다. 구단에서는 플레잉 코치, 코치 연수 및 연봉 보전 등을 보장하려 했지만 은퇴식과 영구결번을 제외하고 구단의 제안을 사양을 하였고, 현재는 휴식기를 가질 계획이라고 밝혔다. 다만 이후 타이거즈 유니폼을 입고 돌아올 것임을 언급하면서 지도자로써의 진로를 암시하였다. 사업가나 해설가로써의 진로는 생각하고 있지 않다고 하였다. 한편 은퇴 발표 이후 음악 전공인 딸의 뒷바라지를 위해 온 가족이 서울로 이사를 한다고 한다.
2012년 4월 30일에 나온 기사에 의하면 고양 원더스의 김성근 감독 밑으로 들어가서 지도자 수업을 받고 싶다는 의사를 피력했다고 한다. 이에 김성근 감독도 문은 열려있다고 긍정적으로 반응해 고양 원더스의 코치로 지도자 생활을 할 가능성이 커졌다. 김응용 밑에서 선수 생활을 했고 이제 김성근 밑에서 지도자 생활을 하게 되는 이종범의 차후 지도자 행보에 대한 관심도 커진 상황.
2012년 5월 26일 무등 야구장에서 LG 트윈스와의 홈경기에서 은퇴식을 치른다. 이날 은퇴식에서 시구자로 마운드에 오른다. 투수를 제외한 전 포지션 소화 경력이 있는데, 이로써 본인이나 팬들은 시구로 아쉬움을 달랠 듯 하다. 참고로 모든선수가 이종범의 등번호인 7번을 달고 뛰었고 시타는 당시 중학생이었던 이정후가 했는데, 치기 좋게 제대로 공을 못 던졌다고 아버지를 깠다고 한다(...).
▲ 2012년 5월 26일 무등 야구장에서 열린 은퇴식에서 이종범 시구 & 아들 이정후 시타 |
은퇴식을 치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이대진이 이종범의 아내에게 감사패를 전달했다는 기사가 나왔다.
2012년 7월 20일 잠실 야구장에서 열린 한일 레전드 매치에 출전하였다. 여전히 녹슬지 않은 주루플레이와 호수비 등을 보여주었으며, 이날 활약에 힘입어 MVP로 선정되었다. 경기는 한국 OB가 5:0으로 승리하였다.
2024년 텍사스 레인저스에서 지도자 연수를 받던 중 이영미 기자와 진행한 인터뷰에서는 본래는 2011시즌 종료 후 은퇴할 예정이었으나, 사실 선동열 감독이 마지막으로 같이 한 번 해보자고 붙잡아 체중도 감량하는 등 의욕적으로 시즌을 준비했다고 한다. 그러나 정작 시범경기 후 개막전 엔트리에 들지 못하고 은퇴 통보를 받았다고. 이후로도 선동열과는 선후배로서 교류하면서 잘 지낸다고 한다. #
4. 국가대표 경력
4.1. 1980년대
1989년 대륙간컵 국제야구대회 대표로 선발되면서 처음 국가대표 데뷔전을 치렀고, 이 후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 IBA 회장기 국제야구대회 대표로도 뽑히며 국가대표 주전 유격수 겸 1번타자 자리를 굳힌다.4.2. 1990년대
1990년은 야구 월드컵, 1990 베이징 아시안 게임, 세계 아마추어야구 올스타전에 출전했다.특히 1990년 야구 월드컵 멕시코전에서 1회말 첫타석에서 우중간 2루타, 두번째 타석에서 중월만루홈런을 날린뒤 5회말 좌월 3루타, 6회말 우전안타를 추가해서 한국선수로는 국제대회 사상 첫 사이클링 히트를 기록했다. 관련 기사
1991년은 IBA 국제야구대회, 대륙간컵, 아시아야구선수권 겸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 지역예선에 출전했다. 하지만 올림픽 지역예선에서 한국이 3위에 그치면서 본선 진출에 실패해 빛이 바란다.
그리고 4학년이 되던 1992년, 대한야구협회가 1996 애틀랜타 올림픽을 대비한다는 명분으로 프로 진출 예정인 4학년생들을 엔트리에서 제외하면서 국가대표에서 강제은퇴하게 된다.
1998년부터 프로 선수의 국제 야구대회 출전이 허용됐지만, 1998 방콕 아시안 게임, 2000 시드니 올림픽은 국가대표 엔트리에서 제외된다.[103]
4.3. 2002 부산 아시안 게임
외야수로 포변 후 2002 부산 아시안게임을 통해 무려 11년 만에 국가대표팀에 복귀했고, 주장 완장까지 찬다. 5경기에서 타율 0.353(17타수 6안타) 3타점 4득점 2도루로 활약하면서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의 금메달 획득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이후 아들 이정후 역시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 게임에 출전해 금메달 획득에 성공하면서 한국 야구 사상 첫 부자(父子) 금메달리스트라는 기록을 세우게 된다.4.4. 2006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2006년 3월, 제 1회 2006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서도 주장 및 외야수로 차출되었다. 이종범은 대회 도중 감기몸살에 걸리는 악재에도 불구하고 대회 내내 쾌조의 타격감을 자랑하며 타율(.400)과 안타(10개) 1위를 차지하며 대회 올스타로 선정되었다. 큰 경기에 강한 이종범의 진가가 여실히 드러났던 대회.▲ 2006년 3월 16일 에인절 스타디움에서 열린 WBC 한국-일본전 8회초 2타점 적시 2루타를 친 모습 |
특히 이 대회에서 이종범은 4강 진출의 마지막 관문에서 다시 만난 일본을 상대로 8회 1사 2, 3루에서 일본 대표팀의 마무리 후지카와 큐지를 상대로 좌중간을 가르는 2타점 2루타를 쳐내며 승리를 이끌었다. 이 때 두 팔을 번쩍든 채 포효하며 베이스 러닝을 시작하는 장면은 지금도 한국 프로야구 역사에 남을만한 명장면으로 두고두고 회자되고 있다.[104][105]
직후 상상플러스에서 이종범과 절친한 이휘재에 의하면, 2루타 치기 전에 배트 맞고 땅으로 꽂힌 파울볼에 복숭아뼈를 맞았는데, 사실은 별로 아프지 않았는데 일부러 아픈척 했다고 한다. 타격시에 앞에 딛는 발이 아프면 빠른 공을 못 치기 때문에 투수로 하여금 직구를 던지도록 유도한 것이라고. 이후 예상대로 빠른 직구가 들어왔고 결과는 깔끔하게 2루타. 예상한 수가 맞아 떨어지자 너무 기뻐서 만세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다만 이종범 본인은 WBC 대표팀 차출 직전시즌이던 2005년에 풀타임 3할을 기록했을 정도로 타격감이 나쁘지 않았으나, 차출 이후 노쇠화가 유독 두드러지게 나타나 2006년과 2007년 최악의 부진을 겪으며 은퇴위기에 몰렸으나 2008년에서야 겨우 재기하게 된다. 자신의 진가를 발휘하며 부침에 빠진 프로야구 인기를 다시 일깨운 첨병의 역할을 톡톡히 했으나 정작 자신의 커리어에 독으로 다가온 아이러니한 케이스.[106]
5. 수상 경력
5.1. KBO
이종범의 KBO 수상 경력 | |
1993 | 골든글러브 (유격수 부문) / 한국시리즈 우승 / 한국시리즈 MVP |
1994 | KBO MVP / 골든글러브 (유격수 부문) / 타율 1위 / 안타 1위 / 득점 1위 / 도루 1위 / 출루 1위 |
1996 | 골든글러브 (유격수 부문) / 도루 1위 / 한국시리즈 우승 |
1997 | 골든글러브 (유격수 부문) / 한국시리즈 우승 / 한국시리즈 MVP / 도루 1위 |
2002 | 골든글러브 (외야수 부문) |
2003 | 골든글러브 (외야수 부문) / 도루 1위 |
2009 | 한국시리즈 우승 |
5.2. 국가대표
이종범의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수상 경력 | |
2002 | 2002 부산 아시안게임 야구 종목 금메달 |
2006 | 2006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3위 |
2018 |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야구 종목 금메달(코치) |
6. 연도별 성적
개인 통산 기록 | ||||||||||||||
시즌 | 경기수 | 타수 | 타율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타점 | 득점 | 도루 | 4사구 | 장타율 | 출루율 | WAR |
20시즌 | 2017 | 7155 | .291 | 2083 | 398 | 39 | 221 | 829 | 1274 | 563 | 847 | .450 | .364 | 73.74 |
6.1. KBO
- 푸른 글씨는 KBO 최다 또는 최고, 붉은 글씨는 1위 입상 성적. 진한 글씨는 리그 5위 내 입상 성적.
역대 기록 | ||||||||||||||||
년도 | 소속팀 | 경기수 | 타수 | 타율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타점 | 득점 | 도루 | 4사구 | 장타율 | 출루율 | sWAR | |
1993 | 해태 | 126 (1위) | 475 | .280 | 133 (2위) | 16 | 4 | 16 (4위) | 53 | 85 (1위) | 73 (2위) | 38 | .432 | .331 | 6.14 (5위) | |
1994 | 124 | 499 | .393 (1위) | 196 (1위) | 27 (3위) | 5 (3위) | 19 (4위) | 77 (5위) | 113 (1위) | 84 (1위) | 57 | .581 (2위) | .452 (1위) | 11.77[107] (1위) | ||
1995 | 63 | 239 | .326 | 78 | 10 | 2 | 16 | 35 | 51 | 32 | 30 | .586 | .397 | 5.03 | ||
1996 | 113 | 449 | .332 (2위) | 149 (2위) | 28 | 1 | 25 (3위) | 76 (3위) | 94 (1위) | 57 (1위) | 74 (5위) | .566 (2위) | .425 (3위) | 9.52 (1위) | ||
1997 | 125 | 484 | .324 | 157 (2위) | 28 | 3 | 30 (2위) | 74 | 112 (1위) | 64 (1위) | 90 (3위) | .581 | .428 (4위) | 9.70 (1위) | ||
2001[108] | KIA | 45 | 188 | .340 | 64 | 14 | 1 | 11 | 37 | 45 | 7 | 21 | .601 | .401 | 2.54 | |
2002 | 123 | 485 | .293 | 142 | 25 | 2 | 18 | 59 | 93 (5위) | 35 (3위) | 56 | .464 | .365 | 5.24 | ||
2003 | 132 | 524 | .315 | 165 (2위) | 43 (1위) | 1 | 20 | 61 | 110 (3위) | 50 (1위) | 66 | .515 | .389 | 7.11 (3위) | ||
2004 | 133 (1위) | 493 | .260 | 128 | 29 (5위) | 0 | 17 | 52 | 100 (1위) | 42 (3위) | 70 | .422 | .350 | 4.27 | ||
2005 | 118 | 430 | .312 (5위) | 134 | 25 (4위) | 2 | 6 | 36 | 69 | 28 | 58 | .421 | .393 | 4.79 | ||
2006 | 93 | 339 | .242 | 82 | 18 | 1 | 1 | 21 | 41 | 10 | 29 | .310 | .302 | 0.79 | ||
2007 | 84 | 253 | .174 | 44 | 6 | 0 | 1 | 18 | 23 | 3 | 15 | .209 | .217 | -2.04 | ||
2008 | 110 | 317 | .284 | 90 | 19 | 4 | 1 | 38 | 38 | 9 | 33 | .379 | .348 | 1.45 | ||
2009 | 123 | 385 | .273 | 105 | 21 | 1 | 6 | 40 | 63 | 11 | 46 | .379 | .346 | 0.86 | ||
2010 | 97 | 265 | .245 | 65 | 16 | 1 | 4 | 29 | 36 | 2 | 18 | .358 | .293 | -0.10 | ||
2011 | 97 | 235 | .277 | 65 | 15 | 1 | 3 | 24 | 27 | 3 | 23 | .387 | .337 | 0.69 | ||
2012 | 1군 기록 없음[109] | |||||||||||||||
KBO 통산 (16시즌) | 1706 | 6060 | .297 | 1797 | 340 | 29 | 194 | 730 | 1100 | 510 (2위) | 724 | .458 | .370 | 67.74 |
6.2. NPB
역대 기록 | |||||||||||||||
년도 | 소속팀 | 경기수 | 타수 | 타율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타점 | 득점 | 도루 | 4사구 | 장타율 | 출루율 | WAR[110] |
1998 | 주니치 | 67 | 244 | .283 | 69 | 11 | 3 | 10 | 29 | 38 | 18 (2위) | 42 | .475 | .387 | 3.2 |
1999 | 123 | 424 | .238 | 101 | 20 | 5 | 9 | 33 | 76 | 24 (2위) | 45 | .373 | .310 | 0.6 | |
2000 | 113 | 414 | .275 | 114 | 26 | 2 | 8 | 37 | 58 | 11 | 36 | .406 | .332 | 2.3 | |
2001 | 8 | 13 | .154 | 2 | 1 | 0 | 0 | 0 | 2 | 0 | 0 | .231 | .154 | 0.0 | |
NPB 통산 (4시즌) | 311 | 1095 | .261 | 286 | 58 | 10 | 27 | 99 | 174 | 53 | 123 | .406 | .334 | 6.0 |
[1] 덧붙여 어린 시절부터 그와 가까이 지내며 야구도 같이 했던 동네 형들이 있는데, 그들이 바로 김기태, 염경엽. 스톡킹에서 본인 언급으로는 김기태가 옆집에 살았고 친했다고 한다.[2] 스톡킹에서 언급한 내용을 덧붙이자면, 아버지께서 먼저 탐색을 해보시니 당시 연세대 야구장의 경우 야구부가 야구에 집중하면서 사용하기에는 부족한 느낌이고, 고려대는 연대보다도 못하다고 표현했는데 실제로 1997년 6월에 송추 야구장이 신설되기 이전까지 자체 야구장이 없었다. 반면, 건국대 야구장은 MBC 청룡 2군도 같이 이용할 정도로 넓은 부지에 야구에 집중할 수 있는 여건들이 잘 마련되어 있었는 것[111]을 최종 확인한 끝에 건국대학교로 결정했다고 한다. 건국대학교 야구장과 건국대학교 학군단 부지에 현재 스타시티가 들어서있다.[3] 원래 서술은 당연히 오른손으로 던지니 오른손으로 치는게 맞다고 생각해서 오른손으로 쳤다고 서술되어 있었으나 아는 형님에서 밝히기로는 오른손이 곧 잘 맞아서 우타자로 치게 됐다고 한다.[4] 이종범의 경우 우타자라서 땅볼을 치면 간발의 차로 아웃되는 경우가 많았다.[5] 그런데 이정후의 또래 학생들도 좌타자가 많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돼서 이정후가 좌타자가 되기로 마음 먹은 시기에 또래 학생들도 싹 다 좌타자를 하게 되었다. 그래서 지금은 우타자가 더 적은 현상이 생기고 말았다. 우타자가 적어져서 우타 거포 역시 흔하지 않다.[6] 실제로 일반적인 10승 투수 WAR이 3~5 정도인데 해태 1기 이종범의 WAR은 연평균 8.4를 찍었으니 맞는 말이다.[7] 참고로 2017년 넥센 히어로즈에 1차 지명된 아들의 계약금이 2억원이다. 즉 이종범 본인의 말대로 아빠보다 1억 3,000만원을 더 받았네 수준인 셈이다.[8] 당시 MVP를 수상한 김성래보다 세이버 스탯은 양준혁이 더 좋았으나 김성래는 홈런왕 타이틀에 부상에서 재기에 성공했다는 이미지, 양준혁이 신인이라 다음 기회가 있을거라는 이유 때문에 투표에 밀려 MVP를 수상하지 못하게 된다. 근데 이 시즌이 양준혁 커리어 처음이자 마지막인 MVP 결선 투표가 된다. 양준혁은 타격의 신 수준으로 꾸준했지만 임팩트가 밀렸기 때문. 1996년 박재홍도 신인왕과 MVP 동시 수상이 가능한 성적을 냈지만 신인이 MVP 수상까지는 과하다는 의견과 투수부문 4관왕(다승, 승률, 구원, 평균자책)을 차지한 구대성에게 밀렸다.[9] 지금 시점에서 보면 2,3년전 연속 꼴찌를 하며 나락에 쳐박히던 팀을 3위로 이끌면서 마무리로 규정이닝을 채우며 평자 1.11을 기록했던 김경원이 타는게 맞다. 역대 평균자책점 4걸 중 유일하게 선동열 이외의 인물이 김경원이다. 양준혁이 괴물같은 활약을 기록했다면 김경원은 그냥 본인의 선수생명을 담보로 팀을 하드캐리했다.[10] 마지막 아웃카운트도 이종범이 땅볼을 잡아 1루수 김성한에게 던져 아웃됐다. 송구가 살짝 빗나가서 어렵게 김성한이 잡은 건 덤. 연습때였으면 얄짤없이 본인이 송구한 공을 직접 뛰어가서 주워와야 했을것이다[11] 뒤 순위표 이름은 위로부터 조계현, 이종범, 양준혁, 이상훈, 정민철, 김기태, 정명원이다.[12] 이에 비견되는 우타자 단일 시즌은 2003년의 심정수밖에 없다.[13] 백인천의 0.412에 이은 KBO 리그 역대 2위 기록이다.[14] 2014년 그의 먼 고교 후배인 서건창이 201안타로 20년만에 최다 안타 기록을 깨고 새로운 기록을 세우고 정규시즌 MVP를 수상했다.[15] 당시 타율 1위 이종범과 2위 김응국은 무려 7푼 차이가 났고, 안타 2위 서용빈은 39안타 차이가 났다.[16] 124경기에서 84도루를 달성했고 전반기에만 60개 이상을 성공했다. 후반기에는 쌍방울 코치이자 해태 선배였던 김일권이 "많이 뛰면 뭐 하냐. 돈도 안 주는데. 그리고 도루하다가 다치면 너만 손해다."라는 말을 듣고 현실자각을 하여 20개만 뛰었다고 이종범 본인이 밝혔다.[17] 이 시즌에 테임즈는 KBO 리그 역사상 최초로 40-40을 달성하였다. 참고로 40-40은 NPB에서는 아직 까지도 달성자가 없고, MLB에서도 오타니 쇼헤이 포함 6명만 나온 기록이다.[18] 육회를 먹고 설사를 해서 컨디션이 좋지 않았을때 코칭스태프에게 게임을 빼달라고 부탁했지만 그 당시 팀이 포스트시즌 진출경쟁을 하고 있어서 거절당하였다. 만약 코칭스태프가 경기출전관리만 해줬어도 4할도전을 더 오래 이어갔을 것이다.[19] 이제 메이저리그로 가서 의미가 없어졌지만, 1994년 이종범은 역대 최고의 공격형 유격수라는 2014년 강정호보다 조정 OPS, wRC+ 모두 더 높다. 물론 장타율은 40홈런을 때린 강정호가 압도적으로 더 높다. 애초에 2014년 강정호의 장타율(.739)은 파크팩터를 무시한 장타율 역대 2위다.(1위는 .740의 1982년 백인천)[20] 허나 좌우 수비범위는 넓은 편이지만 안정감이 떨어진다는 평을 받았다.[21] 우리나라에서 무관심도루라는 개념이 확립된 것은 2003년 이승엽의 도루가 최초다. 그러나 기록전이라고 해서 무관심도루를 많이 했다는 증거없이 무조건 그랬을거야 하는것은 곤란하다. 큰 점수차와 경기 후반이라는 조건이 필수고, 여기에 투수견제와 포수송구는 물론 견제구를 받으려고 주자에 붙어있는 수비도 없고, 목표 베이스로 송구 받으러 들어오는 수비까지 전혀 없어야지만 무관심도루로 기록된다. 원로 기록원의 말에 따르면 2003년 이후 몇년간 각 시즌 대표 도루선수들의 기록을 보니 무관심도루가 없다고하는데 이것은 함부로 뛰지 않는다는 뜻이다. 야구에선 상대방의 기분을 나쁘게 하면 다음 타석에 빈볼이 날아오는 특성이 있으니 대도급이면 알아서 자제하는게 아닌가 추측할수 있다. 게다가 전반기 60개 도루를 하고도 스스로 자제하던 도루를 굳이 무관심도루하면서 억지로 갯수를 늘렸을까 하는것은 의문이다. 애초에 개념이 나중에 나왔는데 나중에 많지도 않은 TV중계 화면을 전부 분석해도 영상이 없는 경기가 많다. 그러니 무관심 도루를 많이 했다는 증거는 가져올수도 없으며, 1990년대 당시를 기억해서 판단하기에는 투수 포수 내야수들의 견제상황까지 알아야하는게 이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22] 다만 베이스 크기 확대와 투구피치클락 도입, 견제 제한 등 제도변화가 생길 경우 도루 특화 선수가 노릴수 있는 수치다. 경기수 또한 당시보다 늘어난 144경기이다.[23] 더군다나 1995 시즌은 골든글러브 라이벌이었던 LG 트윈스의 류지현까지 방위병으로 복무하고 있었다 보니 유격수 골든글러브는 풀타임으로 뛴 OB 베어스의 김민호가 가져갔다. 물론 그 시즌 김민호 역시 한국시리즈 MVP에 오르는 등 훌륭한 성적을 냈다.[24] 다만 전준호가 69도루를 기록한지라 풀시즌이라도 다시 한번 경쟁이 붙을 만 했다.[25] 여기에 당시 무등구장이 잠실보다 상당히 작아 실제로 경쟁이 붙었다면 유리했을 것이다.[26] 그래도 데뷔 후 3년간의 홈런 갯수가 각각 16-19-16개로 홈런 순위 10걸 안에는 늘 들었다.[27] 다만 이것은 해태 타선이 약했다기보단 삼성 타선이 비정상적으로 강했다고 봐야 한다. 해태 타선도 그때 타율 4위, 득점 2위, OPS 3위였다 보니 전년도인 96년에 비해 타선은 오히려 더 강했다. 이종범을 뺀다고 해도 중간은 가는 타선.[28] 87/49인데 고의사구를 빼면 57/49이다. 그래도 어째튼 볼삼비가 1이 넘으니 얼마나 이종범이 괴물이었는지 볼 수 있다.[29] 다른 한 선수는 박재홍으로 96시즌 홈런1위-도루4위, 1998시즌 홈런4위-도루2위를 기록했다[30] 퓨처스 리그에서는 kt 김지열이 2014시즌 23홈런-37도루로 홈런왕-도루왕을 석권한 사례가 있다.[31] 1995년과 1996년 시즌 초반은 방위복무로 인해 홈경기만 출전. 이대진도 같은 시기에 복무했다. 방위복무 때문에 1996년 초 하와이 전지훈련에 따라가지 못했고 해태 타이거즈 하와이 항명사건과 이종범은 무관하다. 김종국에게 '하와이 전훈 할만하냐~?'하고 전화했더니 '형 여기(하와이) 지금 난리났어요'하면서 항명사건의 실상을 알았다고 한다.[32] 양준혁은 같은 기간에 34.49를 기록했다.다만 wOBA, wRC+와 같은 여타 타격부분의 세이버 수치와 홈런, 타점의 경우 시대를 양분했던 양준혁에 밀린다.[33] 이게 어느정도냐면 진갑용, 이진영, 김성한, 이용규, 마해영 등과 같이 기라성같은 선수들이 기록한 통산 sWAR보다 높다![34] 이승엽은 sWAR* 9를 찍은 적이 없다. 그런데 이종범은 5시즌 중 3시즌을 sWAR* 9를 찍었고 1994년은 아들의 커리어 하이인 2022년의 sWAR마저 능가한다.[35] 여러 기록 중 눈여겨볼 것은 데뷔 첫 30-30을 달성, 연속도루 29개 성공, 고의사구 30개(역대 한 시즌 최다)가 있다.[36] 최해식이 전설의 타이거즈에서 술회하기를 이상훈이 당시 워낙 잘나가서 해태 선수들이 '아따~ 이상훈 꼴 뵈기 싫어 죽겄네' '놔보쇼~ 내가 나가서 아주 발라블라요~'하면서 이상훈 타도 각오를 다졌고 이종범이 홈런을 기록했다고 한다.[37] 주니치는 선동열 처럼 임대를 희망했지만 해태 측에서 많은 금액을 일시적으로 받기 위해 완전 이적을 요청해 임대가 아닌 이적을 했다.[38] 당시 49억원에 달하는 이종범의 이적료를 통해 해태 구단은 1998년 선수단 연봉을 해결하게 되면서 잠깐 한숨을 돌릴 수 있게 되지만, 곧바로 모기업이 완전히 부도나버리면서 이후 길고 긴 암흑기로 접어들게 된다.[39] 그리고 이제는 본인의 아들이 이때의 자신처럼 리그를 초토화시키고 다니고 있다.[40] 특히 도루를 성공할 때마다 헬멧에 하나씩 붙이던 하얀 닌자스티커가 나름 컬트적인 인기를 끌기도 했다.[41] 탈세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토리고에 뿐만 아니라 고쿠보 히로키 등 몇몇 선수들이 연루된 사건이었다.[42] 결국 토리고에는 복귀 후에도 이종범과 쿠지 테루요시에게 밀려 출장 기회를 잡지 못했고, 끝내 1999년 시즌 도중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로 트레이드되었다. 이후 다이에에서 주전 유격수였던 이구치 타다히토의 부상으로 다시 기회를 잡아 2003년까지 주전 유격수로 활약하다 카와사키 무네노리에게 밀려나며 2006년 은퇴했다. 은퇴 후 다이에의 후신인 소프트뱅크 코치를 거쳐 현재는 치바 롯데 마린즈 2군 감독을 역임하고 있다.[43] 당시 2루수였던 타츠나미 카즈요시를 좌익수로 옮기고, 2루 자리에 쿠지 테루요시를 기용한 상태였다.[44] 4월 0.337 2홈런 14타점 10도루, 5월 0.260 5홈런 10타점 5도루, 6월 0.235 2홈런 4타점 2도루. 5월까지는 장타력을 바탕으로 구단 선정 월간 MVP에도 올랐으나, 6월에 들어서는 요미우리전 전까지 사실상 안타를 거의 치지 못했을 정도로 공략을 당했다. 다만 이는 단순히 월별로 끊었을 때 이야기이고, 전체적인 추이를 보았을 때는 6월 초에 잠시 부진이 있었고, 6월 중순부터 2개의 홈런을 포함한 7경기 연속 안타를 치며 슬럼프에서 벗어나 반등하고 있었다.[45] 1990년대 중반 한신 타이거스의 주축 선발 투수로 활약한 선수로, 이 해 5월 26일에 주니치 드래곤즈를 상대로 노히트 노런을 달성한 바 있다. 이때 같이 배터리를 짠 포수가 전년도까지 주니치에서 뛰었던 야노 아키히로. 현역 말년엔 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를 거쳐 신생팀 토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의 창단 멤버로 2005년 한 시즌을 뛴 후에 은퇴했다.[46] 이는 당시 주니치 수석코치였던 시마노 이쿠오의 작전으로, 경기 전 주전 선수 전원에게 카와지리의 몸쪽 코너웍을 어렵게 하기 위해 타석에서 스트라이크 존에 바짝 붙어서 치도록 주문했다고 한다. 이후 시마노는 그 작전을 낸 것을 후회했다고 인터뷰에서 밝혔다. 링크[47] 그 위로는 마츠이 히데키(요미우리=14개), 마에다 토모노리(히로시마=12개), 레오 고메스-타니시게 모토노부(요코하마)-에토 아키라(히로시마)가 11개, 키요하라 카즈히로(요미우리)-이케야마 타카히로(야쿠르트)가 10개로 상위에 랭크되어 있었다.[48] 이 해 센트럴리그 도루왕은 이시이 타쿠로가 39개로 수상했다. 이후 이시이는 2000년까지 3년 연속 도루왕을 수상하게 된다.[49] 하지만 도루사를 10개나 기록할정도로 성공률은 좋지 못했다.[50] 앞의 각주에서 상술했듯이 이 해 센트럴리그 도루왕도 이시이 타쿠로. 전년도와 동일한 39도루로 수상했다.[51] 타율 .200/OPS .527 6홈런 42타점. 안타를 하나라도 덜 쳤으면 1982년 요미우리의 야마쿠라 카즈히로 이래 17년만의 규정타석 1할타자가 될 뻔했다.[52] 당시 이로 인한 스트레스로 인해 원형탈모까지 생기게 되었다. 관련 영상[53] 2023년 현재 호주 야구 국가대표팀의 감독을 맡고 있는 그 데이브 닐슨 맞다. 사실 전년도까지만 해도 풀타임 메이저리거였지만 일본 리그에서 뛰게 된 사연이 꽤나 독특하다. 다름아닌 자신의 모국 호주에서 열리는 2000 시드니 올림픽에 호주 대표팀으로 뛰고 싶다는 이유로 밀워키 브루어스와 재계약을 거부하고 일본으로 와 주니치와 계약한 것. 하지만 후술하듯이 일본 리그에 적응하지 못하고 부진한 성적만 남긴 채 시즌 중 방출당한다. 이후 어찌어찌 호주 대표팀 엔트리에 들면서 자신의 소원이었던 모국에서의 올림픽 출전은 이뤄냈다.[54] 주로 1~2번 타자로 기용되었지만 당시 주니치는 클린업을 제외하면 타선이 고정된 선수가 없었기에, 그에 맞춰 간간히 타순을 옮길수 밖에 없었다. 실제로 규정타석을 채운 선수는 야마사키, 타츠나미, 고메즈, 이종범, 세키가와 뿐이었다.[55] 다만 2000년 이종범의 성적은 타율만 보면 전년도에 비해 괜찮아 진것 같지만 사실 그렇게 단정짓기는 힘들다. 전년도에 리그 하위권이었던 타율은 리그 전체 19위로 올라섰지만 리드오프 외국인 선수라는 점을 감안하면 특별히 좋다라 판단하긴 힘들었고, 출루율이나 장타율도 썩 좋다고 보기 어려운 편이었다. 장기인 주루플레이에서도 그린라이트를 완전히 뺏겼다지만 8개의 도루사를 기록하며 성공률이 57.8%로 폭락했다. 다만 주루의 경우 2000년 당시 작성된 글과 기사를 보았을 때, 6월까지는 작년에 이어 이미 두 자릿수 도루를 성공하고, 도루 성공률 9할을 기록하며 쾌조의 주루능력을 보였으나 앞서 언급했던 바와 같이 체력적 문제로 인해 그린라이트를 뺏기고 도루수가 급감하며 그만큼 주루사가 늘게 된 것으로 보인다. ###[56] 투수쪽은 지난시즌 다승왕과 구원왕인 번치와 게일러드가 붙박이였고, 고메스의 가세로 남은 2개의 용병 엔트리를 놓고 용병 넷이서 경쟁해야 하는 상황이었다.[57] 다만 이종범이 퇴단할 당시 카도쿠라는 킨테츠로 이적한 상태였으며 그해 킨테츠의 개막전 선발 투수를 맡았다. 그리고 카도쿠라는 2007년에 요미우리로 이적하면서 이승엽과도 팀메이트로 뛰게 된다.[58] 인터넷 상에는 아버지로 알려져 있었으나 스톡킹에서 본인이 밝힌 바로는 당시 한신의 단장이었다고 한다.[59] 몸쪽 공이 특기인 선수였다. 일미 올스타전 완봉승의 비결도 몸쪽 공이 주효해서 였다.[60] 이종범은 첫 해에 부상 전까지 리그 1위에 해당될 정도로 잦은 사구도 있었으며, 판정에 대한 불만이 폭발한 영상이 있을 정도였다. 관련 영상[61] 좌우 100m, 센터 122m, 펜스 높이 4.8m[62] 홈런 수는 겨우 유지했지만 타율이 급락했는데, 당시 기사를 보면 광활한 나고야돔을 과하게 의식한 배팅을 한 데다 무릎 부상의 영향으로 타격을 원활하게 할 수 없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무릎 부상 등의 여파로 나고야 돔의 드넓은 외야를 지키기엔 부족한 수비범위가 문제를 드러내어 1997년 시즌 종료 후 퇴단하고, 다음 해인 1998년에 한신 타이거스로 이적하여 재기를 노렸으나 지난 해보다 더한 부진에 시달리다 결국 퇴단했다.출처[63] 이종범은 국내로 귀국하면서 "내 속이 홍어 속이요"라는 말을 남겼다. 이종범이 일본에서 받은 스트레스가 상상 이상이었음을 알 수 있다.[64] 호시노 감독을 진심으로 따르는 제자들도 많지만, 성격이 워낙 다혈질이라 꺼리는 사람도 적지 않다. 삼성에서의 투수코치 경력으로 한국에도 이름이 알려진 오치아이 에이지가 호시노와 사이가 껄끄러웠던 예.[65] 98시즌 부상 전까지의 맹활약도 있었고, 이미 부진을 극복해 내어 리그에서 손꼽히는 클로저가 된 선동열이라는 좋은 선례도 있었다.[66] 선수 시절부터 배터리를 맞춰오던 나카오 다카요시를 감독이 되자마자 포지션 기용 문제로 다투다가 요미우리로 내쫓아버린 적이 있다.[67] 호시노의 야구관은 일단 못하는 놈은 닥치고 패고 보자다. 실제로 우노 마사루, 나카무라 타케시, 오치아이 에이지, 야마모토 마사, 타츠나미 카즈요시 등등 호시노 휘하에서 소속팀의 전성기를 이끈 선수들은 전부 호시노에게 폭행당한 경험이 여러 번 있으며 심지어 나카무라는 뼈가 부러졌을 정도다. 호시노는 감독 말년까지 선수들을 때렸는데, 말년에는 그나마 반성하고 선수들을 "남들이 안보는 곳으로 데려가서 때리는" 걸로 바꿨다. 안 때리는건 아니었다. 그나마 말년에 특별히 구타를 금하는 날은 선수 부인이나 부모가 직관 온 날 정도.[68] 여기에 호시노 본인은 한 때 자신의 팀메이트였던 우노 마사루의 지옥같은 수비를 직접 경험한 적이 많아서 이런 풍조를 더더욱 중요시 여겼다.[69] 당시 일본에서의수비장면을 보면 뚜렷하게 그 약점이 드러나는데, 좋지 못한 포구를 강한 어깨로 커버하는 방식의 수비였기에 안정성이 매우 떨어졌다.[70] KBO에서도 93, 94, 97년 20실책 이상을 3번이나 기록했으며 모두 야수 최다실책에 이름을 올렸다. 특히 일본 진출 바로 전 시즌인 97년에는 27개의 실책(...)을 기록했었다.[71] 현 한신 타이거스 1군 수비코치. 1992년 센트럴리그 신인왕. 참고로 일본 최초의 무홈런 야수 신인왕 수상자였다. 1997 시즌 종료 후 야노 아키히로 및 타이호 야스아키가 포함된 트레이드로 한신에서 이적했다.[72] 쿠지의 경우 주전 유격수 토리고에 유스케의 탈세 징계로 인한 시즌아웃으로 인해 내야수비자원이 부족해졌기 때문에 주전 2루수로 기용하기 위해 영입하였다. 다만 쿠지는 입단 첫 해엔 2루수뿐 아니라 이종범의 수비부진으로 인해 유격수로도 뛰었으며, 99년에 입단한 후쿠도메 코스케 또한 유격수 수비력에 문제를 보이자 이를 커버하기 위해 주로 유격수 포지션에서 대수비요원 및 준 레귤러로 활약하였다. 2001년 이바타 히로카즈가 유격수에 완벽히 자리를 잡게 되자 쿠지의 자리는 순식간에 줄어들었고, 결국 얼마 가지 않아 백업 멤버를 거쳐 도로 한신 타이거스로 이적해서 은퇴했다.[73] 당시 타이거즈 선수들은 기아자동차 모델 구매 시 24개월 무이자 할부 혜택이 가능했고 엔터프라이즈는 구단이 바뀐 기념으로 천만 원이나 특별할인을 해줘 뽑는 선수들도 여럿이 있었다. 최상덕도 모기업이 바뀌자마자 1대를 구매했고, 신인 강철민도 계약금 5억 원을 받자마자 1대를 장만했을 정도. 하지만 3년 뒤 할인 금액을 훌쩍 뛰어넘는 엄청난 감가를 맞고 후회하는 선수들이 많아졌다.[74] 한편 지난 1999년 말 삼성으로 FA 이적했던 이강철도 이때 같이 타이거즈로 원대복귀한다.[75] 시즌 도중에 복귀했으며 이때는 3루수로 뛰었다.[76] 단 도루실패가 5개로 좀 많았다.[77] 외야수 GG 수상.[78] 외야수 4위[79] 외야수 GG, 도루왕 수상.[80] 외야수 2위[81] 득점왕 수상. 이종범의 마지막 전성기라 불리는 01~05 시절 중에서는 가장 부진한 시즌이다. 그래도 06~11에 비하면 양반이지만[82] 외야수 8위[83] 외야수 6위[84] 그나마 2005년은 장타율만 까먹었으나 2004년에 너무 많이 까먹은 것이 컸다.[85] KBO 최초로 MVP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한 선수는 타이론 우즈다.[86] 해당 부상 후유증으로 한동안 타격감을 찾지못해 02년은 비교적 그동안의 명성에 걸맞지 못한 성적으로 시즌을 마무리하게 되었다. 사실 WAR* 5 이상을 기록했다는 것에 보이듯 굉장히 준수한 성적이긴 한데 하필 비교 대상이 해태 시절 이종범이라...[87] 그나마 2004년 기아 타선이 현대에 이어 2위급의 강타선이라 100득점을 달성하긴 했다. 출루율이 아주 막장인 것은 아니고 17홈런-42도루라는 기록에서 보이듯이 장타력과 주력은 아직 남아있었는지라..[88] 사실 상술한 2002년 안면 부상으로 2군에 간 적 있긴 하지만 이때는 부진이 아닌 부상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회복 차 잠시 엔트리에서 말소된 것이다 보니 제외한다.[89] 도루 실패가 7개였다.[90] 2007 시즌 이종범이 찍은 성적은 KBO 리그 역사를 통틀어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최악의 성적이다. 무려 그렇게 욕을 먹은 2022년 김헌곤보다도 훨씬 못했으며, 21세기 가장 낮은 단일시즌 성적이다. OPS+가 50정도 되는데, 간단히 말해서 평범한 선수의 반절을 겨우 했다. 더불어 wRC+는 무려 8.0으로 200타석 이상 선수 중 최저 5위에 해당한다. 맨 뒤에서부터 99 김영진(-16.1), 18 나종덕(-15.1), 01 강성우(-4.7), 19 나종덕(-4.2), 그리고 07 이종범(8.0) 순서이며 바로 위가 시즌 WAR 역대 최하위를 기록한 83 권두조(13.0)다. 참고로 2022년 역대급 부진을 겪었던 김헌곤, 정보근, 박경수(이쪽은 200타석이 약간 안 된다)의 wRC+조차 20을 넘는 것을 생각하면 이 해 이종범의 타격이 얼마나 끔찍했는지 알 수 있다. WAR* 역시 무려 -2.04로 86 권두조(-2.47)에 이어 뒤에서 2위다. 그마저도 권두조는 원래 유격수였는데 스탯티즈에서 1루수로 분류되어 있어서 WAR에서 손해를 본 케이스인 것을 생각하면... 이 때문에 이종범은 역대 시즌별 WAR*에서 전체 1위와 뒤에서 2위 기록을 모두 갖고 있다.[91] 2007년 KIA의 외야진 WAR은 2.33으로 당해 리그 최하위이자 KBO 역대 외야진 WAR 뒤에서 13위다. 물론 이종범이 -2나 까먹긴 했으나 이종범을 제외해도 7위 롯데와도 큰 차이로 밀리는 수준으로 당해 한화(KBO 역대 뒤에서 16위)와 함께 KBO 역대 최악의 외야진 중 하나였다. 작년 WAR 5를 찍으며 커리어하이를 보낸 이용규는 홀수해 징크스로 OPS 7할도 못 찍는 등 부진에 시달렸는데 그 이용규를 넘는 외야수가 없었다. 작년 쏠쏠하게 활약했던 김원섭은 2할 4푼대 타율로 죽을 쒔고, 외인 타자 래리 서튼은 우수한 선구안 덕에 wRC+ 130을 넘겼으나 현대 시절부터 이어진 하락세 + 폭탄급 수비가 발목을 잡았고, 조경환은 그나마 OPS는 봐줄 만 했으나 타율이 2할 2푼대까지 떨어지며 작년보다 성적이 떨어졌고 시즌 후 방출되었다. 심재학은 거의 지명타자로 나섰음에도 부진이 계속되었고, 외야 노망주 김경진은 60타석 넘게 나와서 1할을 쳤으며 작년까지 100타석 넘게 나온 김경언은 1군에서 실종되었다. 이런 상황이니 그나마 수비라도 좋은 이종범이 잘하든 못하든 나올 수밖에 없었는데, 이종범마저 거하게 삽을 푸는 바람에...[92] 당시 연봉 2억 이상인 선수의 연봉을 삭감하려면 삭감률 40%를 넘지 못하도록 되어 있었지만, 해당 선수의 동의가 있을 경우 그 이상을 넘겨 삭감할 수 있었다. 당시 이종범의 성적을 고려하면 구단의 삭감안을 거절할 수 있는 입장도 아니었을 것이다.[93] 선두타자 홈런은 1회를 통틀어서 통산 44개. 독보적이다.[94] 이 영상을 보면 작게 삼진을 외치는 LG팬들의 목소리가 들린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여긴 기아가 원정 온 것이지 기아 홈구장이 아니다. 응원가 때문에 해설진들의 목소리가 묻힐 정도면 어마어마하게 크게 떼창한것이다.[95] 2루타 15개, 3루타 1개, 홈런 3개[96] TK 출신. OB 베어스-삼성 라이온즈에서 선수 생활을 함[97] 광주 출신으로, 해태의 레전드.[98] 사실 이거저거를 떠나 선동열은 야수들에 대한 평을 박하게 하는 편이었다.[99] 거기에 대졸인 이종범에 비해 최향남은 고졸 신인 출신이라 프로 입단은 이종범보다 3년이나 빨랐다.[100] 선동열이 삼성 감독을 맡았을 때도 비슷한 사례가 있었다. 71년생 내야수인 김한수의 경우 2007년 시즌 후 FA 계약이 1년 남아있었는데도 강제로 은퇴시켰는데, 정작 비슷한 시기 김한수와 71년생 동갑내기인 투수 이상목이 롯데에서 방출되자 곧바로 영입했기 때문이다.[101] 타 권역으로 전학을 가면 1차 지명 자격이 소멸될 건데 어떻게 가능하냐는 이야기가 있지만, 당시는 1차 지명이 부활하기 이전이어서 1차 지명이 부활한 이후 폐지되었던 기간 동안 전학을 간 선수들에 대해 전학 선수 1차 지명 금지 규정을 소급 적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정후는 그대로 넥센의 1차 지명을 받는 게 가능했다. 물론 어디까지나 추측에 불과한데, 실제로 이종범의 가족이 서울로 가게 된 건 후술할 음악을 전공한 딸(이자 이정후의 여동생)의 교육 문제가 제일 컸다. 어느 분야든 마찬가지겠지만 서울과 지방의 인프라 격차는 크고, 예체능 쪽은 더하다 보니 어차피 재력이 되는 이상 서울에서 교육을 받는 게 최선의 선택일 수밖에 없다. 야구도 예외라 볼 수 없는데, 이정후가 서울로 전학을 갈 당시엔 이미 지방의 유소년 선수들이 인프라 격차로 인해 수도권 야구부로 전학을 가는 경우가 많았다. 즉 이종범이 은퇴를 하지 않거나 KIA의 코치로 남아서 혼자 광주에서 생활했더라도 위의 이유도 그렇고 중학생에 불과한 이정후가 직업 특성상 외지 출장이 잦은 아버지보단 어머니와 동생을 따라 서울로 가는 게 더 나은 선택일 수밖에 없었고 실제로도 그럴 가능성이 매우 높다. 무엇보다도 이정후의 고등학교 당시 성적은 그렇게 특출난 편은 아니었기 때문에 KIA가 그대로 유승철을 지명했을 것이다.[102] 다만 이정후가 KIA의 1차 지명을 받았더라도 키움 히어로즈에서의 활약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이정후가 데뷔한 2017시즌 당시 KIA의 외야는 최형우, 로저 버나디나로 고정된 두자리에 시즌 초 잠재력을 보인 노수광이라는 유망주가 있었고, 이후 트레이드로 온 이명기가 KIA의 주전 우익수가 되었다. 또한 시즌 초 버나디나의 극심한 부진에도 김기태 감독의 꾸준한 기용으로 결국 기량을 발휘하고 우승의 원동력이 되었던 걸 생각하면 2017시즌의 외야 구성이 타이거즈 역사에 꼽힐 정도로 빈틈없었기 때문에 데뷔 초부터 외야 전향은 꿈도 못 꿨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많다. 그렇다고 내야로 쓰기도 뭐한 게, 2루수와 유격수는 전역을 한 안치홍과 김선빈이라는 프랜차이즈 타자들이고 1루와 3루 역시 김주찬, 이범호라는 걸출한 베테랑이라 이정후가 주전을 먹을만한 곳은 전혀 없었다. 결정적으로 이정후가 첫 시즌부터 주전 외야수로 중용된 건 당시 넥센의 감독인 장정석의 영향이 컸기 때문에 쓸놈쓸 성향과 멀티 포지션 기용을 좋아하는 김기태였으면 당시 팀 상황과 맞물려 쭉 2군에 있거나 1군에서 정해진 포지션 없이 후보로 뺑뺑이만 돌았을 것이고 성장도 그만큼 더뎌졌을 가능성이 높았다. 당장 KIA에 뛰고 있는 내야수 출신인 1년 선배 최원준이 그걸 증명하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더군다나 KIA는 야수를 보는 눈도 없고, 키운 야수도 손에 꼽는 신인 야수들의 무덤으로 악명이 높다 보니 차라리 서울로 전학을 가서 키움의 프랜차이즈 타자가 된 게 이정후나 키움에겐 다행일 수밖에 없다.[103] 98 아시안 게임은 미필 원정대를 표방한 이유로 빠진 것으로 보이며, 시드니 올림픽은 이종범 뿐 아니라 박찬호, 선동열(은퇴 선언 이전),이상훈 등 주요 해외파들이 모두 소속팀 일정으로 인해 소집에서 제외되었다.[104] 다만 이 때 타격후 양팔을 벌리고 뛰는 바람에 전력질주를 못했고, 그랬으니 2루에서 멈췄어야 했으나 3루까지 가다가 태그 아웃당해 추가 득점에 실패한 한국대표팀은 이후 또다시 일본을 만나 패배하며 4강에 머물러야 했다. 훗날 라디오스타에서 밝히길 타격 시 홈런인 줄 알고 세레모니를 했다가 안타인걸 보고 부리나케 달려가다 아웃 당했다고 한다. 그 이후로도 지인들이 그 때 왜 오버런을 했냐고 까고 있다고(...)# 사실 영상을 보면 알겠지만 잘 맞은 타구는 맞는데 발사각도가 낮은 라인드라이브성 타구라서 누가봐도 홈런타구는 아니었다. 치는 순간 잘맞아서 착각한듯 하다.[105] 당시 이종범은 “타석에 들어서기 전 신께서 내 야구 인생의 마지막을 테스트하는 것 같았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무엇보다 상대가 자신이 실패하고 돌아와야 했던 일본이었기 때문에 더욱 감회가 남달랐을 것.[106] 투수 쪽에서는 후배인 서재응이 비슷한 경우. 전 시즌 맹활약을 바탕으로 WBC에 차출되면, 그 때마다 후유증으로 몇 년간 부진에 빠지는 모습을 보여주었다.[107] KBO 역대 타자 WAR 1위 기록. 2위 2015 테임즈, 3위 2003 심정수, 4위 97 이종범, 5위 96 이종범[108] 2001년 시즌 중 주니치 퇴단 후 KIA 복귀[109] 2012 시즌 계약 후 시범경기 마치고 은퇴[110]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