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문서: 연고지 이전/외국
1. 개요2. KBO 리그3. K리그4. WK리그5. 한국프로농구
5.1. 고양 데이원 점퍼스5.2. 대구 한국가스공사 페가수스5.3. 부산 KCC 이지스5.4. 서울 SK 나이츠5.5. 서울 삼성 썬더스5.6. 수원 KT 소닉붐5.7. 울산 현대모비스 피버스
6. 한국여자프로농구7. V-리그7.1. GS칼텍스 서울 KIXX7.2. 김천 한국도로공사 하이패스7.3. 서울 우리카드 우리WON (임시 연고 이전)7.4. 수원 한국전력 빅스톰·수원 현대건설 힐스테이트7.5. 인천 흥국생명 핑크스파이더스7.6. 의정부 KB손해보험 스타즈
8. 아시아리그 아이스하키[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의 연고지 이전에 대해 서술한 문서.2. KBO 리그
제21조 [연고지역의 변경] ① 연고지역은 그 연고지역에 대한 연고권을 가진 구단의 의사에 반하여 변경 또는 합병할 수 없다. 다만, KBO 규약에 따로 정하는 경우에는 그러하지 아니하다.
② 연고지역을 변경하고자 하는 구단은 전년도 10월 31일까지 총재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KBO 정관 제 4장 연고권
② 연고지역을 변경하고자 하는 구단은 전년도 10월 31일까지 총재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KBO 정관 제 4장 연고권
KBO 리그는 최초 창설 과정은 물론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해당지역에서 성장한 향토기업이나[1] 지역 출신 오너가 운영하는 기업[2][3]을 구단 운영 주체로 선정하는 등 강력한 지역 연고제 정착을 리그 탄생의 기반으로 했던 덕분에 연고지 팀에 대한 지역민들의 충성도가 국내 프로스포츠 중에서 가장 강력하다. 물론 2000년대 이후에는 팀을 창단하고 연고지를 결정하는 상황에서 이러한 요건을 따지지 않고 있다.[4]
따라서 다른 종목과 달리 연고지 이전이 쉽지 않다. 100만 이상이라는 매우 높은 연고지 인구 제한과, 덜컥 옮기려고 해도 둥지를 틀 만한 야구장이 없다시피한[5] 현실적인 이유도 있으나 거짓말 조금 보태서 연고지를 옮긴다고 하면 동네 민심이 해당 기업에 매우 험악해진다.[6] 따라서 구단 오너 측이 자의적으로 연고지를 옮긴 사례는 2000년 현대 유니콘스가 사실상 유일하다. 후술하겠지만 OB 베어스의 연고지 이전은 최초 서울을 연고로 창단하려던 계획을 KBO의 중재로 충청 연고 구단 창단으로 변환한 것에서 시작된다. 3년간 임시 연고지로 충청지역을 썼다가 KBO와의 약속대로 연고지를 옮긴 것이기 때문에 현대 유니콘스의 사례와는 다르다.
NC 다이노스의 경우도 초창기에 홈구장 부지 선정 문제로 연고지 이전을 할 뻔한 적이 있다. 다만 이 역시 당시 다이노스가 창단된 지 얼마 안 된 신생팀으로서 아직 창원 연고가 완전히 자리잡지 않았던 과도기적 해프닝이었고, 새 야구장이 완공되고 지역 연고 마케팅이 자리잡은 2021년 현재는 연고지를 옮길 가능성은 절대로 없다.
2.1. OB 베어스
한국프로야구 출범 당시 충청도 연고 구단의 1순위 후보는 충청도 출신에 야구에 관심이 많았던 김종희 회장의 한화였는데 출범 직전인 1981년에 김 회장이 갑작스럽게 사망하고 김 회장의 두 아들인 김승연과 김호연이 그룹의 소유권을 놓고 다투면서 프로야구에 참여할 형편이 안 되게 되었다. 그래서 2순위 후보였던 두산에게 충청도 연고 구단이 돌아가게 되었는데, 문제는 두산은 충청도 연고 대신 서울 연고를 원했다는 것[7]이었다. 그러나 이미 서울을 선점한 MBC 청룡의 반발과 충청도에도 야구단이 있어야 한다는 지역 안배로 어쩔 수 없이 대전 한밭종합운동장 야구장을 홈구장으로 쓰게 되었는데, 한국야구위원회와 이용일 사무총장이 "리그 출범 시에는 충청도를 연고지로 하되 3년 후에는 서울로 연고지를 옮기게 해주겠다"며 두산을 달랬다. 그리하여 OB 베어스는 충청도를 연고로 하게되었는데, 프로아구 원년인 1982년 한국시리즈 우승도 하고 3년 정도 연고지를 삼아 경기했던 향수가 남았는지 지금도 충청도는 1986년 충청도를 연고로 창단된 빙그레 이글스를 이어받은 한화 이글스를 제외하면 두산 팬들이 꽤 있는 편이다.
약속대로 3년 후인 1985년 OB는 "이제 약속 지켜!"라며 서울로 연고지를 이전, 동대문야구장을 홈으로 썼으나 아마야구계의 반발이 심했고, 이때문에 1985년부터 1988년까지 임시로 잠실야구장을 같이 쓴다는 조건으로 MBC 청룡이 홈구장으로 사용하던 잠실야구장으로 구장 이전(?)을 시도했다. 그러면서 기회만 되면 동대문야구장으로 들어가려고 했지만, 1988년 후에도 아마야구의 텃세등 여러가지 사정으로 인해 동대문야구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잠실야구장에 눌러 앉게 되었고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역사 때문에 잠실 라이벌인 LG 트윈스 팬들과 두산 베어스 팬들은 사이가 영 좋지 못하다. 잠실을 2개 구단이 이용하면서 잠실에서는 사실상 매일 경기가 열리는 상황이라 KBO와 일반 팬들 입장에서는 좋지만, 구장 내 공간 활용에 있어 제약이 많고, 특히 원정 팀의 경우 공간 문제로 별도의 원정 라커룸이 없는 등으로 인해 더욱 불편을 겪고 있는 상황이다. 이는 새로 지어지는 잠실 돔구장에서도 이어질 전망이다.
리그 초창기 어쩔 수 없이 잠시 충청도 연고를 했던 3년의 시간으로 인해 지금까지도 두산 베어스는 끊임없이 강성 안티팬들로부터 연고지 이전을 강경히 부정하며 충청두, 충청 베어스, 야구판 패륜, 야구판 북패라는 멸칭을 듣곤 한다. 원년부터 서울을 썼던 MBC 청룡의 후신인 라이벌 LG 트윈스가 응원가에 끊임없이 '서울 마케팅'을 하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두산의 서울 마케팅은 상대적으로 매우 약한 편. 그렇기에 잠실 돔구장 건립으로 인해 잠실야구장을 6년간 비워야 하는 두산과 LG 모두 대체구장을 사용하기 위해 서울에서 떠나는 것에 극구 반대하는 원인이 되고 있다. 어쩔 수 없이 3년 떠나있어도 이렇게 후폭풍이 있는데 6년 떠나있으면 문제가 더 커지는 것은 뻔하다.
자세한 내용은 서울종합운동장 야구장 문서 참고하십시오.
자세한 내용은 잠실시리즈 문서 참고하십시오.
자세한 내용은 잠실 돔구장 문서 참고하십시오.
2.2. 현대 유니콘스[8]
멀쩡하게 운영되던 팀이었지만, 원래 연고지였던 인천에서 모기업의 기대만큼의 인기가 없었고[10] 서울특별시 지역을 원했던 현대그룹의 지시로 2000 시즌부터 대뜸 서울로 연고지 이전을 선언했다. 하지만 이런저런 사정 속에 결국 서울 입성은 미뤄졌는데 결정적인 사유가 돈 때문이였다. 당시 현대그룹은 SK로부터 인천광역시/경기도/강원특별자치도 연고권 이전에 대한 대가로 54억 원을 받고 이 돈을 서울 연고지 분할에 대한 권리금 형식으로 27억 원씩 기존 서울팀들인 LG 트윈스와 두산 베어스에 넘겨줬어야 했다. 그러나 유니콘스 구단의 모기업인 현대전자는 자금난에 있다는 이유로 기존 서울팀들에게 줘야 할 54억 원을 본인들의 경영 자금으로 다 써버리고 말았다. 제대로 된 보상금도 받지 못한 상황에서 기존의 서울팀들이 현대에게 공짜로 서울을 허락할 리가 만무했고, 오갈 곳이 없어진 현대는 결국 어쩔 수 없이 수원시에 잠시 머무르며 서울행을 도모하고자 했다. 그러나 해체되는 순간까지 서울행은 실현되지 못했고, 해체 이후 우리 히어로즈로 목동야구장에서 재창단될 때까지 수원시를 임시 연고지로 삼으며 수원 야구장에서 홈경기를 치렀다.
그러나 현대 유니콘스가 수원시에 있는 동안 수원시민들은 수원을 서울 연고지 진출의 간이역처럼 생각하던 현대 구단의 행태에 무관심으로 대응했고[11] 이는 결국 흥행 대참패로 이어졌다. 실제로 인천에 있던 시절에는 그래도 시즌 홈 관중 누적치가 최소 20만명을 넘겼지만, 수원에서 홈경기를 치른 8시즌 중 시즌 홈 관중 누적치가 20만명을 넘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수원에서 홈경기를 치르던 시절 중 가장 많은 관중이 온 해는 3번째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던 2003년의 174,915명(경기당 평균 관중 2,611명)이었다. 참고로 과거의 인천팀과 새로운 인천팀이 맞붙은 그 해 한국시리즈는 단 한 경기도 매진시키지 못한 흥행 참패 시리즈였다. 1998년, 2000년, 2003년, 2004년 한국시리즈 네 번의 우승과 2002년 준플레이오프에 진출하는 강팀이었으나 상술된 이유로 흥행에는 완전히 실패했다.
게다가 이미 2000년부터 모그룹 SK하이닉스(당시 현대전자)는 야구단에 전혀 지원을 하지 않았고, 이 때문에 소위 돈성인 삼성 라이온즈에 FA를 죄다 뺏겼으며, 자기들이 대금을 받고 팔아버린 연고지에 아직도 눌러앉아 있는, 다시 말해 남의 연고지를 무단으로 점유하고 있는 상황 때문에 연고지 기반인 1차 지명도 하지 못해 서서히 가세가 기울기 시작해 2005년에는 포스트시즌에 탈락했다. 그러나 왕조는 왕조인지라 저력을 발휘해 2006년 플레이오프에 진출했으며 2007년에는 구단 타율 1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수원에 있는 동안에는 연고권을 행사할 수 없었으므로, 1차 지명권이 소멸되어 KBO 리그 신인드래프트에서 2003년부터 구단이 해체될 때까지 1차 지명을 하지 못했다. 이후 서울 연고지 입성권은 현대 유니콘스를 인수한 팀에게 주기로 했고 현대 유니콘스 해체 후 재창단 방식으로 이장석의 센테니얼 인베스트먼트가 히어로즈를 창단하고 우리 히어로즈로 재창단되면서 서울 연고지 입성권은 히어로즈가 차지하였다. 이후 수원에서는 2015년 홈구장을 연고로 하는 kt wiz가 창단되었다.
더 자세한 것은 현대 유니콘스/연고이전도 참조해 볼 것.
3. K리그
3.1. FC 서울
K리그 초창기인 슈퍼리그 시절, 광역연고제에 의해 충청도를 연고지로 하는 럭키금성 황소 축구단으로 출범하였다.[12] 그 후 1987년 광역연고제에 이어 1990년 도시지역연고제가 도입되면서 서울 동대문운동장으로 이전, 일화, 유공과 함께 동대문 3대 구단으로 자리매김하였다. 그러나 6년만인 1996년 프로축구연맹과 정부가 월드컵 유치를 위한 지방 축구열기 활성화라는 명목으로 서울 연고지에서 강제 축출하면서 LG전선(現 LS전선) 공장이 있는 안양으로 연고지를 이전했다.
당시 프로연맹이 내건 구실은 서울 구단들의 홈경기 소화율이 너무 낮아 지역연고 확립을 저해한다는 것. 하지만 당시 서울 동대문운동장은 지금처럼 양잔디가 아니기 때문에 5월 이전에는 사용이 금지되었고, 특히 서울은 3개 구단이 한 구장을 사용하고 지방 구단들 역시 잔디 보호와 운동장 대관 사정 등으로 지방에서 홈경기를 개최할 수밖에 없는 상태였다. 그렇다고 서울만 딱히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 당시 실제 연고지에서의 홈경기 비율을 보면 LG, 일화, 유공 서울 연고 구단들이 대략 75%, 대우, 포철, 현대 지방 구단들이 85% 정도를 소화했다. 즉 서울 3개 구단이 단일 경기장을 사용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오히려 엄청난 홈경기 소화 비율을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지방 순회 경기가 완전히 사라지게 된 계기는 2002 월드컵 이후 전용구장 비롯 4철잔디와 라이트 시설 등 축구장 인프라가 완비되면서부터 거의 없어진 것이지 지역명을 붙이기 시작한 1996년부터 뚝딱 시행된게 아니다. 1995년까지는 서울이 아닌 타도시에서도 홈경기를 가졌기 때문에 서울에서 안양으로 연고이전에 문제가 없다는 논리가 말이 안 되는 것이 안양 LG 역시 출범 첫 해인 1996년은 계속 동대문에서 홈경기를 가지고 그 외에 창원, 진주, 구미 등에서 홈경기를 가졌고 부천 SK는 부천에 프로경기를 치를 경기장이 없어 2000년까지 목동에서 홈경기를 가졌다. 지방 구단들 또한 울산이 1997년에 경주, 포항이 2000년에 안동, 부산이 2000년에 창원에서 2경기를 했었다. 2002 월드컵 개최 이전까지 당시 경기장 인프라 사정 때문에 비연고지에서 홈경기 개최가 심심찮게 있었던 것처럼 1990년에서 1995년 사이에도 똑같이 경기장 인프라 때문에 지방순회경기를 했던 것이다. 1990년과 1995년 서울 동대문 시절에 비연고지에서 홈경기를 했기 때문에 서울에서 안양 연고이전이 문제가 없는 것이라면 안양 LG 시절에도 비연고지에서 홈경기를 했기 때문에 2004년 안양에서 서울로 연고복귀도 문제가 없다는 논리에 도달할 수 있다.
LG, 일화, SK 모두 옮길 생각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쫓겨났고 이는 훗날 더 큰 논란을 불러온다. 그 후 2000년 연맹이 주최한 서울 연고지 가치 평가회에 참가하는 등 다시 서울로 연고지 복귀를 위한 움직임을 보였으며, 2003년 후반기부터 언론을 통해 서울로 연고 복귀를 기정사실화 하는 듯한 기사가 나왔다. 안양 LG는 2003년에도 LG전자 공장이 있는 창원에서 홈경기를 가졌다. 심지어 2003년 가을에 안양 홈경기를 킥오프 5분 전에 우천취소시켜버리는 초유의 사태도 있었는데 애초에 자의로 이전한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안양 연고에 정착할 생각이 없었다. 2003년 말 서울 연고 신생팀을 창단하려던 축구협회와 프로축구연맹의 계획이 유치 작업을 했던 대기업들에게 모두 거절당하고 또한 시민구단 창설에 부정적인 서울시의 태도로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이른다. 따라서 프로축구연맹은 신생팀으로 서울 연고팀을 만들려던 계획을 철회하고 기존 구단의 연고복귀를 통해 서울 연고팀을 만들기로 결정하고 전 구단에 서울로 연고지 이전 신청을 받는다. 이에 안양 LG는 가장 먼저 연고이전 의사를 내비쳤고 역시 서울로 연고이전을 희망했던 부산 아이파크가 신청 철회를 하자 단독 후보가 되어 한국프로축구연맹 이사회에서 만장일치로 연고이전 승인을 받고 다시 서울로 연고복귀를 하였다. 일련의 과정들은 서울 연고 공동화 정책과 북패 문서를 참조. 그 과정에서 안양 축구팬들이 자기가 쓰던 LG 제품들을 삼성 제품으로 바꾼 거 역시 사실이며, 기존에 쓰던 제품들은 박스 채로 담아 불태우며 연고지 이전에 항의했다.
3.2. 경찰 축구단
K리그 챌린지 첫해인 2013년에는 연고지가 없어서 전 경기를 원정으로 치렀다. 2023년까지 의무경찰 폐지 결정에 따라 해체가 예정되어 있었으나 시민구단 전환으로 결정되었다. 이전 연고지인 안산에도 안산 그리너스 FC가 창단하여 안산 축구의 명맥을 잇고 있다.다만 K리그 연맹에선 안산 무궁화와 아산 무궁화는 별개의 구단으로 구별함으로 상무 축구단처럼 연고지 이전은 아니다.
3.3. 고양 자이크로 FC
충주 험멜과 마찬가지로 실업 리그 시절 줄창 연고지를 옮겨다닌 사례. 2003 시즌은 익산 원불교 신자들의 항의로 전기리그만 치르고 떠났다.[13] 2004년에는 김포로 옮겨갔지만, 역시 3년간의 연고 협약 기간 이후 연장에 실패, 신축한 안산와~스타디움을 마냥 놀리고만 싶지 않았던 안산시의 러브콜에 응하여 안산으로 보금자리를 옮겼다.
당시만 해도 할렐루야는 아슬아슬하게 우승에 실패하는 등 가능성이 있는 성적을 보여주고 있었기에 안산은 이런 할렐루야를 유치하여 빠른 시일 내에 연고 프로 구단을 만들려고 했다. 근데 이렇게 안산시가 너무 계산적인 자세로 나와버리다 보니 할렐루야의 성적과 인기는 나날이 시들해짐에 따라 자연히 지원과 투자 또한 줄어들었고, 게다가 2011년에 연고 협약 연장 문제로 잡음까지 빚으며 관계도 파토나버렸다.
2013 시즌을 앞두고 마침 고양 KB국민은행의 해체로 연고 축구단을 잃어버린 고양으로 옮겨갔으나, 과한 종교색 등으로 인해 환영은 받지 못하는 상황. 또한 구단 사정도 그닥 좋지는 않다.
결국 2016년 11월 28일, 프로축구연맹에 탈퇴서를 제출했고 구단 해체 수순에 들어갔다. # 이쪽도 충주 험멜과 마찬가지로 프로팀을 운영할 규모도 안 되는 주제에 여기는 아예 작정하고 프런트가 한탕 해먹고 튀려고 프로에 참가한 것이다.
3.4. 상무 축구단
상기한 연고이전 사례들과는 다른 경우로, 10년간의 연고지 계약을 맺고 10년마다 지역을 옮겨다니는 형태로 운영되고 있다.[14] 기존에는 별도의 연고지 설정없이 존재하다가 2002년 광주광역시에 처음 연고를 가졌으며, 2011년부터는 국군체육부대가 위치한 문경시 인근의 도시에서만 연고를 트고 있다. 상무의 경우 해당 지역의 프로 구단 창단 유치를 목적으로 연고지를 이전하는데 광주에는 프로 구단을 창단했으나 상주에서는 실패하고 김천으로 옮겼다.
3.5. 성남 FC
K리그 최초로 서울을 연고로 하는 일화 천마 축구단으로 창단하였지만 유공과 LG가 잇따라 서울로 연고이전을 하면서 서울 연고를 세 팀이서 나눠쓰게 된다. 1996년 지방 축구 열기 활성화라는 명목하에 선문대학교가 위치한 천안으로 연고지를 이전한다. 그 후 천안시에서 천안오룡경기장의 부실한 시설 때문에 1998년 11월경부터 성남시와 접촉을 시작했고 2000년 마침내 연고지 유치 제안을 받아들여 연고지를 이전했다. 처음부터 연고이전 생각하고 움직인건 제주, 서울과 똑같은데 마침 성남시 시설이 개판이고 팬 수도 적어 묻어가는데 성공한 케이스. 동대문에 있던 일화, 유공, LG가 각각 천안, 부천, 안양으로 밀려나는 과정은 서울 연고 공동화 정책 문서, 일화가 천안에서 성남으로 옮긴 과정은 중패 문서 참고.
3.6. 울산 HD FC
광역지역연고제를 도입했던 초기에는 인천과 경기도를 홈으로 하고 있었으나 1987년에[15] 강원특별자치도로 연고지를 이전했다. 이후 1990년 현대그룹의 본거지라고 할 수 있는[16] 울산으로 연고를 이전해 지금까지 이르고 있다. 유니폼에 기업명 대신 지역명을 크게 찍은 것도 최초로 시도했다. 가슴에 현대를 빼고 '울산' 두 글자를 크게 넣었던 것. 그러나 팀명을 기업명에서 지역명으로 바꾼 조치가 내려지자 가슴엔 다시 현대가 새겨졌다.
3.7. 제주 유나이티드 FC
- 서울특별시, 인천광역시, 경기도: 1983 (1년)
- 서울특별시: 1984~1986 (3년), 1991~1995 (5년)
- 인천광역시, 경기도: 1987~1990 (4년)
- 경기도 부천시: 1996~2005 (10년)[17]
- 제주특별자치도: 2006~
창단 후 K리그 초창기에는 서울, 인천, 경기 지역을 연고로 하는 유공 코끼리 축구단으로 창단하여 1987년 광역연고제가 시행되면서 인천, 경기 연고 구단으로 사실상 인천 단독 연고 구단이 되었다. 그 후 1991년에 서울로 연고지를 이전하였다. 서울로의 연고지 이전 후에도 인천, 경기 연고 시절 전력 때문인지 수원시 등 경기도 각지에서 순회경기를 치르곤 했다. 그러나 서울 연고 시절은 잠시였고 서울 연고 공동화 정책 때문에 5년 만에 서울을 떠나 경기도 부천시로 연고지를 다시 옮기게 된다. 동대문에 있던 유공이 부천으로 밀려나는 과정은 서울 연고 공동화 정책 문서 참고.
그러나 부천시에는 프로축구 경기를 치를만한 경기장이 없었기에 부천종합운동장이 지어지기 전까지 목동운동장에서 한동안 홈경기를 치러야 했다. 이 때가 이른바 '목동 시대'. 2001년에야 부천종합운동장에서 홈경기를 치르기 시작했다. 목동 시절엔 윤정환을 필두로 한 리그 최상급 미드필더 진으로 좋은 경기력을 보였으나, 발레리 니폼니시 감독과 윤정환이 떠나고 모기업 투자가 점점 줄어든 부천 홈경기 개최 시절부터 구단 성적이 급전직하 했다.
당시 축구단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SK 때문에 입지가 위태위태한 상황에서 제주특별자치도가 프로축구단을 유치하고자 제주월드컵경기장 인근 부지를 클럽 하우스로 쓸 수 있도록 무상 제공하겠다며 SK에 접촉해 왔고 결국 이 제안을 수긍한 SK가 2006년에 축구단의 연고지를 제주특별자치도로 이전했다. 이 과정에서 부천지역 축구 팬들은 물론 붉은악마까지도 강하게 반발했는데 이 당시 상황은 남패 문서에 자세히 언급돼 있다. 이후 부천지역 축구 팬들의 힘으로 축구단을 스스로 만들었는데 이 팀이 부천 FC 1995다.
3.8. 충주 험멜
단기 연고 협약을 맺었던 의정부와 이천 두 곳 모두 지자체에서 연고 협약 연장을 원치 않았기에 2008년에 노원구[18]로 이전했지만 노원구에서 홈구장으로 쓰던 마들 스타디움이 인조잔디 구장에 시설도 열악했고, 설상가상으로 2010년 실업축구연맹이 인조잔디를 금지하자 시측에서 적극적인 지원 의지를 보여온 충주로 옮겨가게 된다. 기업구단임에도 규모가 워낙 영세하다보니 지자체에게 갑의 횡포를 당한 격인 데다가, 연고지를 옮겨다니던 게 실업리그 시절이라 그렇게 빡쳐하는 팬도 몇 없었다.
2015년부터 연고 이전설이 나돌더니 2016년을 마지막으로 해체했다. 모기업인 대원이노스는 불황과 충주시의 지원 미비를 이유로 2016년을 마지막으로 축구단에서 손을 떼기로 하고 2016년이 지나도록 인수하겠다는 지자체도 나타나지 않아 해체했다. 애초에 프로팀을 운영할만한 기업이 아닌 곳에서 무리하게 프로팀으로 올린게 문제였다.
4. WK리그
4.1. 상무 여자 축구단
4.2. 세종 스포츠토토
4.3. 이천 대교
4.4. 충남 일화 천마
4.5. 화천 KSPO
5. 한국프로농구
5.1. 고양 데이원 점퍼스
프로농구 출범 직전에 창단한 동양제과 실업 농구단은 1997년 KBL 출범 당시 프로팀으로 전환하면서 구단 모기업의 역사와는 큰 연관이 없는 대구로 연고지를 결정했다. 그나마 연관 관계를 찾자면 담철곤 구단주의 출생지가 대구였다는 점, 과거 대구에서 오리온 공장을 돌렸다는 점이다. 대구 동양은 공장이 떠나간 박탈감을 달래준다는 의미도 있다.
동양 오리온스 시절 대구 팬들은 32연패라는 치욕적 성적을 거두던 때는 물론 김승현-마르커스 힉스 콤비의 맹활약으로 우승을 차지했을 때도 대구실내체육관을 가득 메워주며 열렬한 응원을 보내줬지만 정작 오리온스 농구단 측은 대구 연고 정착 의지가 부족했다. 이 당시 숙소와 훈련시설은 경기도 용인시에 있었고 구단 프런트 사무국은 서울특별시 용산구에 위치해 있었다. 그야말로 대구에는 홈경기 때만 내려왔다가 경기가 끝나면 다시 용인으로 올라가는 셈이었다.
그나마 용인시의 훈련시설을 사용하지 못하게 되자 2010년 9월에 대구로 훈련장과 숙소를 이전했는데 1년 후에 연고지 이전을 감행했다. 2011년 모기업인 오리온이 검찰 수사를 받으면서 연고지 이전에 대한 이야기가 지속적으로 나오기 시작했고 때마침 농구 인기가 하락하면서 대구체육관의 홈 관중 수도 줄어들면서 결국 대구에서 고양으로 연고지를 이전했다. 이 때문에 대경권에 남자 농구단은 하나도 없어 연고 공백 상태가 되었으며, 2017년부터는 구미 KB손해보험도 의정부로 떠나는 바람에 5년여간 남자 프로스포츠가 없는 겨울을 보내야 했다.[19] 이 연고지 이전으로 인해 대구·경북 사람들은 여전히 오리온을 금지어 취급하고 있다.
그랬던 오리온이 2021년부터 다시 대구로 찾아올 일이 생겼는데 전자랜드 농구단이 대구에 본사를 둔 한국가스공사에 인수돼 대구 한국가스공사 페가수스로 팀명을 바꾸고 연고지를 인천에서 대구로 변경하면서 10년 만에 원정 구단 신분으로 대구에 오게 됐다. 오리온의 고양 도주 이후 10년간 이를 바득바득 갈던 대구·경북 사람들은 오리온스가 대구에 오는 날만 기다리며 벼르고 있었다. 가스공사와 오리온의 대구 더비는 10월 16일 고양에서 열렸고 11월 17일에는 무려 10년 6개월 만에 오리온의 대구 경기가 열렸다.
대구 연고 농구단 부활 1년 만에 오리온은 데이원자산운용에게 구단을 매각하여 고양 캐롯 점퍼스로 재탄생했으나, 점퍼스는 부실 운영으로 한 시즌만에 제명 처분을 받으며 공중분해되었다. 이후 대명소노그룹이 고양 소노 스카이거너스로 재창단하면서 선수단과 프런트를 고용승계했다.
5.2. 대구 한국가스공사 페가수스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와 같은 경우처럼 팀이 팔려가면서 연고지까지 옮겨진 케이스 중 하나. 이후 나올 현대→KCC와 KIA→모비스랑 비슷하다.
프로농구 출범 직전에 창단한 대우증권 실업 농구단은 1997년 KBL 출범 당시 프로팀으로 전환하면서 인천을 연고지로 삼았다. 비슷한 시기에 팀을 만든 동양제과가 구단 모기업과 큰 연관이 없는 대구를 연고지로 정한 것과 달리 대우는 모기업의 핵심 계열사인 대우자동차와 대우중공업 공장이 인천 청천동과 화수동에 있었고 그룹 차원에서도 인천을 미래의 본사 소재지로 검토할 만큼 중요한 도시로 삼았기에 모기업과 연고지의 연관성이 깊었던 팀 중 하나다. 더구나 KBL 초창기 4년간 서울특별시에 대한 연고권이 공동화됐던 만큼 서울에서 가장 가깝고 인구가 가장 많은 도시가 인천이기에 대우 입장에서는 최적의 선택이었다고 볼 수 있다.
대우 제우스 이후 신세기 빅스-SK 빅스-전자랜드 블랙슬래머를 거쳐 전자랜드 엘리펀츠로 이어지기까지 인천 연고 농구단은 인천과 부천 등 수도권 서부지역 팬들의 충성도가 남달랐고 지역 연고 밀착도 꽤 잘 됐던 팀이었다. 특히 대우 제우스와 전자랜드 블랙슬래머 시절인 1997-98 시즌부터 2006-07 시즌 초반까지는 연고지인 인천에 제대로 된 체육관이 없어서 바로 옆 도시 경기장인 부천실내체육관에서 홈경기를 치렀음에도[20] 이때도 서류상 연고지는 인천이었고 구단의 홍보 문구에서도 "인천·부천시민과 함께 뛰는 농구단"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걸기도 했다. 이후 2006년에 인천삼산월드체육관이 문을 열어서 홈구장이 그 곳으로 옮겨졌다.
그러나, 농구단의 모기업인 전자랜드가 경영난을 이기지 못하고 2020-21 시즌을 끝으로 농구단 운영 포기 선언을 하자 KBL에 의해 구단이 공개 매각됐다. 결국 대구에 본사를 둔 한국가스공사가 구단의 새 주인이 되면서 구단 역사상 처음으로 연고지를 옮기게 됐다. 오랫동안 인천에서 흥행에 성공했던 팀이지만 구단 생존의 문제가 연결된 탓에[21] 다른 사례들과는 달리 어쩔 수 없이 보내줘야 한다는 의견이 더 많으나 대우 제우스 시절부터 응원해왔던 골수 인천 팬들의 좋지 않은 시선 또한 어쩔 수 없이 존재한다.[22] 이후 인수를 했으나 가스공사 구단에서는 전자랜드 시절의 역사를 승계하기보다 창단형태로 대구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5.3. 부산 KCC 이지스
2001년 현대전자가 운영했던 대전 현대 걸리버스를 KCC가 인수하면서 구단명을 변경하고 연고지를 대전광역시에서 전북특별자치도 전주시로 옮겼다. 연고지 학교였던 대전고등학교에서 프로농구 선수를 배출하지 못하게 되는 시기와 맞물린다. 사유는 대전의 농구 흥행 저조 때문이었다. 우승권의 전력을 갖춘 강팀이었고 이상민, 조성원, 추승균 등 당대의 전국구 인기 스타들이 있었음에도 흥행이 저조했던 것은 대전지역의 시장성이 부진했기 때문이라고 판단한 셈. 결국 새 모기업인 KCC의 공장이 있는 전주시로 농구단 연고지를 옮기기로 했다. 현대 농구단의 연고지 이전 소식이 전해지자 대전지역에서 반발했으나 연고지 이전을 막지는 못했다.
KCC 농구단은 전주로 연고지를 옮긴 이후 확실한 흥행 성과를 나타냈다. 그러나 이 흥행 성과를 좀먹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낡고 좁은 전주실내체육관이었다. 4300석의 전주체육관은 KCC 팬들의 수요를 담아내는데 버거웠고 경기 당일 정전 사고가 심심찮게 일어나는 등 시설 수준 또한 좋은 것은 아니라서 번듯한 체육관이 필요했다. 그래서 KCC 농구단 측이 전주시를 만날 때마다 체육관을 새로 지어달라는 요청을 숱하게 했다. 실제로 김완주 전 전북특별자치도지사는 전주시장 재임 당시 "KCC가 우승하면 NBA급 실내체육관을 전주에 지어주겠다"고 약속을 했다. 그러나 KCC가 우승 트로피를 전주에 들고 왔음에도 체육관 신축 계획은 나오지 않았다. 결국 김완주의 공언은 공수표에 불과했다.
KCC는 2016년에 경기도 수원시로 연고지를 옮길 뻔한 일이 있었는데[23] 연고지를 옮기려는 이유는 오로지 딱 하나 '낡은 체육관' 때문이었다. KCC가 전주를 떠나겠다는 뜻을 밝히자 김승수 전주시장이 "새 체육관을 지어주겠다"는 약속을 하면서 겨우 붙잡아놨다.[24] 결국 2024년까지 전주월드컵경기장 부근에 새로운 체육관을 건립하려고 했으나 시장이 바뀌고 시내 체육시설 신축 우선순위에서 체육관이 육상경기장·야구장에 밀리면서 체육관 건립이 무산될 위기에 빠졌다.
결국 10여년간 이어진 전주시의 거짓 약속과 홀대에 지친 KCC는 타 지역으로의 연고지 이전을 적극 검토할 예정이라고 밝혔고 2023년 8월 30일 kt가 떠난 이후 농구단 유치에 적극적이었던 부산광역시로 이전하기로 결정하면서 22년간의 전주 생활을 마감했다.[25] 오클랜드에서 라스베이거스로 간 라스베이거스 레이더스, 애슬레틱스(2025년부터)와 같은 케이스.
5.4. 서울 SK 나이츠
1997년 프로농구 출범 당시 연고지는 청주시였다. 그러다 2000-01시즌이 끝난 후 KBL에서 서울특별시를 연고지로 사용할 수 있게 하자[A], 청주시의 지원 미비를 이유로 들어서[27] 당시 수원을 홈으로 사용하던 수원 삼성 썬더스와 함께 서울 입성금을 지불하고 서울로 연고지 이전을 단행하며 서울 SK 나이츠가 되었다.
청주가 농구 인기가 높은 도시라 반발이 상당히 많았던 연고이전이다. 현재 청주에는 청주 KB 스타즈 여자농구단이 자리잡아 빈자리를 채우고 있다. 서울 SK 나이츠는 2018년에 2번째 우승에 성공하게 된다.[28] 그리고 이듬해에는 청주 KB 스타즈도 우승했으며, 2022년에는 SK 나이츠와 KB 스타즈가 둘 다 우승을 차지했다.
5.5. 서울 삼성 썬더스
1997년 프로농구 출범 당시 연고지는 모기업 삼성전자의 본사가 위치한 경기도 수원시였다. 그러나 2000-01시즌이 끝난 후 KBL에서 서울특별시를 연고지로 사용할 수 있게 하자[A], 당시 청주를 홈으로 사용하던 청주 SK 나이츠와 함께 서울 입성금을 지불하고 서울로 연고지 이전을 단행하며 서울 삼성 썬더스가 되었다. 축구팀이 수원에 잔류해서 그런지, 서울 입성 동지가 된 SK 나이츠가 옛 연고지 청주에서 상당한 항의를 받은 것과 달리 삼성의 서울 입성 과정에서는 이렇다 할 팬들의 항의가 없었다.
수원에서 삼성 썬더스 경기를 보러 가려면, 지하철을 타거나 수원 버스 3000(강남역)이나 777번, 7770번, 7780번, 7800번(사당역)을 타고 2호선으로 갈아타면 된다.
2021년 6월 9일 kt 소닉붐이 수원으로 연고지를 이전해서, 한 시즌에 세 번씩 수원 원정을 오게 되었다.
5.6. 수원 KT 소닉붐
나산그룹은 1961년에 창단됐다가 프로농구 출범 준비 과정에서 사실상 해체된 중소기업은행 실업 농구단을 인수한 뒤 1997년 광주광역시를 연고지로 하고 염주종합체육관을 홈구장로 사용하는 광주 나산 플라망스라는 이름의 농구단을 창단했다. 나산이 광주를 연고지로 삼은 것은 그룹의 창립자인 안병균 회장의 고향이 광주[31]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산그룹이 IMF 외환위기의 여파로 1999년에 부도나면서 골드뱅크에 농구단을 팔았고 염주체육관도 농구 경기를 치르기 부적합하다는 결론에 이르면서 2000년쯤에 연고지가 여수시로 옮겨졌다. 그러나 골드뱅크-코리아텐더도 썩 좋은 사정의 팀이 아니라 더 나은 인수 기업을 찾기 위해 좀 더 큰 연고지로 이전하는 방안이 추진되었고, 2002-03 시즌이 끝난 후 부산광역시로 연고지를 이전했다.
수많은 연고지 이전 사례 중 이전 과정에서 잡음이 없었던 사례 중 하나인데, 코리아텐더 구단 측이 "농구 밖에 모르는 선수들의 생존을 위해 여수를 떠납니다. 집안의 미래를 위해 가난한 딸을 부잣집에 시집 보낸다고 생각해주십시오. 그래야만 친정이 있는 서쪽 여수의 하늘이라도 바라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라고 시민들에게 눈물로 호소했고, 여수시민들도 "아쉽지만 이왕 큰 도시 가서 잘 되길 바랍니다!"고 환송하며 훈훈하게 마무리한 바 있다. 결국 코리아텐더는 부산으로 연고지를 옮긴 뒤 초대형 무선 통신기업이었던 KT프리텔에 인수돼 안정적 생존 기반을 갖추게 됐다. 이 당시의 인연으로 당시 부산 KTF 매직윙스는 2007-2008 시즌 마지막 홈 경기를 코리아텐더 시절 연고지였던 여수시에 있는 진남체육관에서 개최해 승리했다. 감동적인 당시 경기 관련 기사.
2003년 부산에 처음 왔을 때는 부산금정체육관에서 홈경기를 했고 연습은 경기도 용인시의 시설을 임대해서 생활했다. 하지만 홈구장 위치가 부산 외곽에 있어서 흥행에 어려움을 겪었고 선수들도 용인과 부산을 오가는 것에 대해 큰 불편을 호소하면서 결국 기아 엔터프라이즈의 옛 홈구장인 사직실내체육관으로 2006년부터 홈경기장을 옮겼다. 아울러 홈구장 인근인 사직동에서 자취를 하고 사직체육관에서 연습도 하면서 부산지역 팬들과 직접 호흡하기도 했다. 이 시절에 부산 팬들과 함께 거둔 성과가 바로 창단 첫 KBL 파이널 진출인 2006-07 KBL 챔피언결정전이다.
그러나 2009년에 전창진 감독이 부임하면서 부산에 호의적이던 kt의 분위기가 180도 바뀌게 된다. 전창진 감독 영입을 주도한 이석채 회장은 전창진 감독에게 필요한 사안을 물었는데 바로 연습체육관이었다. 그런데 연습체육관을 만든 장소는 연고지 부산이 아닌 수원이었다. 그것도 북수원 전화국 내 올레 kt빅토리움이다. 부산시내에도 유휴 전화국 부지가 있었을 것이고 충분히 이를 활용했다면 부산에도 연습체육관을 만들 수 있었겠지만 kt는 이를 검토 조차 하지 않았다.[32] 실제로 전창진 감독은 kt 감독 시절 부산 사직체육관의 냉난방 및 출입구 문제까지 지적할 정도로 사직체육관에 대해 불만이 많았다.
사실 kt 농구단이 부산을 외면한다는 이야기는 2010년대 중반부터 흘러나온 이야기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kt의 부산 홀대와 부산시의 후진적 행정이 겹쳐졌다고 볼 수 있다. 창단 첫 정규리그 우승을 했던 2010-2011 시즌 이후 4년 뒤 2014-2015 시즌 부산지역 언론사를 통해 부산시의 사직체육관 대관료 징수 내역이 공개되었는데 kt가 부산시에 낸 사직체육관 연관 대관료는 서울 잠실실내체육관-잠실학생체육관 대관료에 버금가는 수준으로 비쌌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비싼 돈을 냈으면 시설을 제대로 활용할 수 있어야 했지만 사직체육관의 시설은 비싼 대관료에 비해 심각하게 낙후된 수준이었다.
더구나 바로 이웃 동네 농구단인 창원 LG 세이커스도 부산과 비슷한 수준의 체육관 대관료를 지불하는 부당 대우를 받아가면서도 구단 프런트 오피스와 선수단의 거처를 모두 창원으로 이전하는 등 연고지 정착에 노력하는 상황에서[33] kt는 부산 정착을 위해 어떠한 노력을 하지 않았기에 부산 팬들이 느끼는 불안감이 상당했다. 이 때문에 부산의 농빠들은 이 당시부터 '언제든 kt가 부산을 떠날 수도 있다'는 불안감에 시달렸다. 실제로 kt가 부산을 떠날 것이라는 기사가 나올 때마다 농구단 측은 부인했고 부산시민들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 연고지 이전 논의가 진행되지 못했다. 그렇게 kt는 2021년까지 꾸준히 부산에서 홈경기를 치렀다.
전창진 감독이 떠난 이후 다시 연고지 이전 루머가 또 나오게 되는데 이번에는 같은 그룹 형제 야구단이 연고지 이전의 불씨가 됐다. 2017년 1월 경 구단 공식 연습체육관과 kt 스포츠단 본사인 수원 케이티 위즈 파크가 있는 경기도 수원시로의[34] 연고 이전 떡밥이 있었으나 부산 팬들의 반발에 부딪혀 무산됐다.
다시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던 수원 연고지 이전설은 2021년 5월 경에 또다시 불거졌다. 2023년부터 KBL이 연고지 정착을 위해 구단 사무실과 훈련장을 모두 구단의 연고지 안에 둬야 한다는 규정을 만들었는데, kt는 부산 사직수영장 내 생활체육관을 리모델링해 구단 전용 훈련장으로 쓰길 희망했다. 그러나 부산광역시가 이에 난색을 표하면서 사이가 틀어졌다.
다만 kt의 행동에도 문제가 있다는 주장도 있는데, 연고지 정착에 힘쓴 다른 구단들과 달리 그 동안 부산 연고지 정착을 위해 이렇다 할 행동과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는 지적이 있다. 대표적으로 서울종합운동장 야구장과 이천 LG 챔피언스 파크를 뒤로하고 창원까지 내려온 LG 세이커스였다.[35]
결국 kt 스포츠단[36] 측에서 부산을 떠나 연고지를 수원으로 옮기겠다는 뜻을 KBL에 정식으로 전했다. 그러자 부산광역시가 부산 아이파크의 클럽하우스가 있는 강서체육공원이나 부산 도심에서 멀리 떨어진 기장체육관 등을 제공하겠다는 계획을 뒤늦게 밝혔지만[37] 이미 수원으로 가고자 하는 kt의 마음은 이미 10년 전부터 완강한 상태였다. 부산은 이미 kt 소닉붐 농구단 이하 kt 스포츠단의 본사가 형제 야구단인 kt wiz가 있는 수원 위즈파크인 걸 눈치를 채지 못했고 요구 사항을 놓쳤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부산시와 kt의 막판 협상에서 극적인 반전은 없었고, KBL이 kt의 연고지 수원 이전을 승인함에 따라 이제 2021-2022 시즌부터 kt의 홈경기는 수원에서 치러지게 됐다. 이 때문에 앞으로는 부산에서 남자 프로농구 경기가 또 열리지 않게 되었다. 반대로 수원에서는 2001년 삼성이 떠난 후 20년 만에 다시 남자 프로농구 경기가 열리게 됐다. kt가 떠난 부산 사직체육관은 WKBL 구단 중 하나인 부산 BNK 썸이 대신 맡게 되었다. 공교롭게도 kt와 OK-BNK간의 남녀농구 맞트레이드라는 충격도 배가 되었다. 부산은 여자농구라도 볼 수 있게 되었지만, 흥행에서는 이미 WKBL과 KBL은 엄청난 격차가 있는지라 큰 타격을 받게 되었다.[38]
이로 인해 kt 스포츠단은 사상 처음으로 농구와 야구에서 동일 연고 프로팀을 보유한 첫번째 스포츠단이 되었다. kt 스포츠단은 kt 소닉붐의 수원 이전 확정 이후 수원시민들의 환호를 받았으며 수원 팬들은 이제 농구와 야구에서 모두 kt를 응원하게 되었다. kt 위즈 야구 팬 출신이 kt 소닉붐 농구 팬으로 유입되는 효과까지 누렸다. 추가로 kt 소닉붐 농구단은 수원의 아마추어 연고지인 삼일중학교와 삼일고등학교와의 연고 제휴까지 하면서 부산 농빠들에 대한 kt의 평가는 적대적으로까지 변질하게 되었다.
일부 농구 팬들은 kt의 경우 오리온처럼 매각이 아닌 대놓고 농구와 야구에서 수원 kt라는 점에서도 처음부터 부산 정착이 아닌 수원 장악이라며 불쾌감을 표시하기도 했으며 kt 스포츠단에 질책을 했다.
한편 현재 kt 구단 홈페이지에는 합병이전인 전신 KTF 시절이 사라진 뒤 kt로 이름이 바뀐 시점부터만 표기하고 과거는 모두 지워버린 상태. 결과적으로 2003년 여름부터 광주-전남에서는 정신적으로 묶어줄 구단이 없기 때문에 농구 공백 상태라 할 수 있다. 2006-2007 KBL 파이널 역사까지 사라지면서 또 하나의 공백을 만들었다.
부산 농구 팬들은 과거 부산 연고 시절 응원했던 선수로 인해 응원하지만 언제까지 갈지는 장담을 못하게 된 상황까지 놓였다. 하지만, 2년뒤 부산 KCC 이지스가 오면서 더 일찍 그만둘 뻔 했던 위기를 가까스로 넘기게 되었다.
5.7. 울산 현대모비스 피버스
과거 부산 기아 엔터프라이즈[39]는 농구대잔치 시절부터 프로농구 시대에 이르기까지 손에 꼽힐 명문구단이었으나 2001년 해태 타이거즈를 기아가 인수하면서 현대차그룹의 1사 1단 정책에 따라 현대모비스로 운영 주체가 변경되어(인수 대금이 들어가기는 했지만) 연고지를 울산광역시로 옮겼다. 울산은 현대모비스 공장과 사원 기숙사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현재 울산 현대모비스 농구단은 시즌 중 울산 홈경기가 있을 때 이 숙소에서 머무른다.
이 연고지 이전은 바로 옆도시로 옮긴 것이기 때문에 그나마 논란은 적었다. 하지만 그후 구단에서 농구대잔치의 역사를 포함한 기아자동차의 색채를 지워버리려고 시도하는 바람에 농구 팬들로부터 큰 비난을 받았다. 기아 시절부터 뛰었던 주축 선수들 상당수가 다른 팀으로 트레이드 되는 와중에도 기아 엔터프라이즈의 1997년 KBL 원년 우승은 버리지 않고 팀의 우승 횟수에 포함시켰기 때문에 많은 농구 팬들의 빈축을 샀다.[40] 2020년대 이후 다시 연고지 이전 떡밥이 강하게 돌고있는 구단인데 이유는 관중동원 실패와 울산 지역의 침체, 그리고 여전히 클럽 하우스가 울산이 아닌 용인에 있다는 점이다.
기아 시절 홈구장이었던 사직실내체육관은 모비스가 울산으로 떠난 후 한동안 비어있었으나 2006년부터 KTF 매직윙스-kt 소닉붐 농구단이 홈구장으로 사용했다. kt 소닉붐마저 2020-21 시즌이 끝나고 수원으로 연고지를 이전하면서, 사직실내체육관은 2021-22 시즌부터 WKBL 부산 BNK 썸의 홈구장이 되었고 2023-24 시즌부터는 전주에서 부산으로 연고지를 이전한 부산 KCC 이지스가 홈구장으로 쓰게 되었다.
6. 한국여자프로농구
6.1. OK저축은행 읏샷
과거 금호생명 팰컨스 시절에는 인천도원체육관에서 홈경기를 치렀는데 너무 시설이 낙후되었다는 이유로 경기도 구리시로 연고를 이전했다.[41] 게다가 현재의 구리체육관은 여자부 최악의 관중 동원력을 자랑한다.[42] 결국 공중분해 직전까지 갔고, WKBL이 수습해서 OK저축은행이 임시로 스폰서를 맡아 1년 동안 수원시를 임시 연고로 했었다. 임시 연고였기에 팀명에는 공식적으로 수원이 붙지 않았다. 시즌 종료 후 BNK가 인수하였으나 부산 BNK 썸 구단은 전신 팀들의 역사를 잇지 않기로 했고 WKBL 또한 단절을 공인하며 결국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6.2. 부천 신세계 쿨캣
연고지가 멀리 있다 보니 이동 거리가 너무 길어서 홈, 원정 할 것 없이 선수들이 매우 힘들어했고 그래서 결국 버티다 못해 비어 있던 부천으로 가버린 경우다.[43] 더욱이 광주 연고 시절 홈구장이었던 구동체육관[44]의 시설도 상당히 낙후된 데다 광주광역시의 지원 미비로 인한 설도 있다.
이후 신세계그룹이 구단 해체를 선언하고 하나금융지주를 통해 별개의 구단이 출범한 이후에도 부천을 연고로 계속 쓰고 있다. 다만 클럽 하우스는 부천에 없는 대신 이와 가까운 인천 청라국제도시에 두고 있다.
6.3. 아산 우리은행 우리WON
이유는 춘천호반체육관의 난방 문제. 2011년에 한파로 인해 시설이 동파되어 당시 홈 구단 우리은행과 용인시 연고 원정 구단 삼성생명의 경기가 엉뚱하게도 당시 안산시 연고를 쓰던 신한은행의 홈 구장인 안산와동체육관 경기로 변경된 적이 있다. # 몇몇 언론사에서는 우리은행이 위성우 감독 부임 이후 거의 매 시즌 우승한 데 비해 관중 동원이 아쉬웠다는 점을 이전의 이유로 들기도 했고, 구단 측은 아산시의 스포츠단 지원이 타 지자체들보다 확실히 좋은 편[45]이라는 이유를 대기도 했다. 우리은행의 아산 이전으로 인해 WKBL 모든 구단들이 한 번 이상씩 연고지 이전을 하게 되었다.
6.4. 용인 삼성생명 블루밍스
삼성생명이 WKBL 초기에 홈구장으로 쓰던 수원실내체육관이[46] WKBL 흥행 수준에 비해 너무 커서[47] 운영 효율성이 떨어진다고 판단해 연고지를 옮겼다. 더구나 WKBL의 흥행력이 미미했던 시절이라 연고지를 옮긴다고 해서 팬들이 강하게 반발한 일도 없어 조용히 묻힌 사례. 수원의 바로 이웃 지역인 용인시에 적당한 크기의 체육관과 클럽하우스가 있어 구단 입장에서도 흔쾌히 용인으로 연고지를 옮겼다. 참고로 삼성생명이 용인에 터를 잡으면서 용인시 역사상 처음으로 프로 스포츠단을 유치하게 됐다.
6.5. 인천 신한은행 에스버드
여기는 다른 구단과는 다르게 주민들에 의해 쫓겨난 경우다. 2004년부터 쓰고 있던 안산 와동체육관은 원래 지역민을 위한 생활 체육용으로 지은 체육관이라[48] 프로 농구단이 쓰기엔 규모도 작고 관중석의 배치도 불편하며 교통도 안좋은 곳이었다. 그래서 지역주민들이 체육관을 본래 목적대로 사용하게 해 달라고 지속적으로 민원을 제기했고 결국 한계에 부딪혀 인천으로 옮기게 된 것이다.
6.6. 청주 KB 스타즈
연고지 때문에 속을 많이 썩힌 구단이다. 원래 연고지는 성남시였지만, 곧바로 천안시로 옮겼다. 국민은행 연수원을 연습장으로 쓰고 있기 때문에 내린 조치였다. 그런데 천안시에서 남자 배구단만 밀어주면서 체육관 대관을 해 주지 않으면서 울며 겨자 먹기로 연고지 이전을 단행하게 되었다. 그 사이에 연습구장인 KB인재개발원을 임시 경기장으로 사용하였다.[49] 청주시와 2년간의 협상 끝에 2011년 1월부터 청주에서 경기를 치르게 되었다. 천덕꾸리기 신세였던 천안과 달리 청주 첫 경기에서 매진을 기록하면서 성공적으로 연고 이전을 했다. 당시에 충청북도에 프로스포츠 팀이 없었던 것도 이유겠지만, SK 나이츠의 청주 시절에 늘 만원사례를 이뤘을 정도로 농구 인기가 있다는 것도 이유다. 그런데 2022-23 시즌 현재도 꾸준한 인기를 얻고 있는 듯 하다. 청주실내체육관은 부천 하나원큐의 부천실내체육관, 인천 신한은행 에스버드의 도원체육관, 아산 우리은행 위비의 이순신체육관과 더불어 WKBL에서 수용 인원이 3,000명 이상인 구장이다.
7. V-리그
7.1. GS칼텍스 서울 KIXX
인천 대한항공 점보스와 체육관을 같이 쓰면서도 구단 운영에 아무런 문제도 없었고 인기도 많아서 관중도 많이 들어오고 심지어 인천 시절에 우승까지 했는데 서울로 연고지를 옮긴 이유는 그냥 GS그룹의 서울 사랑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장충체육관 리모델링 공사 기간이던 2012년부터 2015년까지는 경상북도 구미시 박정희체육관에서 2012~2013 시즌을 치른 뒤에 경기도 평택시에서 2013년 가을부터 2015년 1월 3일까지 경기했다.[50]
7.2. 김천 한국도로공사 하이패스
경북에서 수도권으로 갔다가 다시 경상북도로 유턴한 케이스. 공기업 특성상 연고 이전이 본사의 이동과 맞물린다. 이 팀이 김천으로 연고지를 이전해서 현재 성남시에는 프로팀이 K리그2 구단 중 하나인 성남 FC 한 팀밖에 안 남았다. 한국도로공사 본사가 김천의 혁신도시인 경북드림밸리으로 이전했고, 이 청사를 지으면서 본사 건물 바로 옆에 연습 체육관까지 같이 지어서 이전한 뒤 기존의 판교 부지는 매각된 관계로 한국도로공사 연고지 역시 김천이 되었다.
7.3. 서울 우리카드 우리WON (임시 연고 이전)
장충체육관 공사로 인해서 GS칼텍스처럼 임시연고지 시절을 거쳤다. 아산시 연고이전 전에 우리캐피탈이 팀을 포기했고, KOVO가 임시로 운영 중이었고, 아산 연고 동안 러시앤캐시 스폰서 시절을 거쳐 2013년 우리카드가 팀을 인수했다.팀명에서 연고지명만을 빼고서 시즌을 치렀던 GS칼텍스와는 달리 러시앤캐시/우리카드는 아산 연고를 팀명에 표기했었고, 아산시에 머무를 것도 논의가 된 모양이지만 충청권에 팀이 3개나 되어버리기 때문인지[51] 결국 서울 복귀를 선택했다.
우리카드 배구단이 떠난 이후 아산이순신체육관은 우리은행 여자농구단이 연고이전을 해왔고 이후 창단된 아산 FC도 우리은행이 스폰서를 서는 등 우리금융과 아산시 스포츠는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아산 연고시절 당시 2012-2013 시즌은 언더독으로서 좋은 모습을 보여준 시즌이고 2014-2015 시즌은 3승 33패로 흑역사를 썼다.
7.4. 수원 한국전력 빅스톰·수원 현대건설 힐스테이트
KOVO 초대 총재가 김혁규였다. 경상남도지사를 역임한 인물이라 그분의 압력(?)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초창기에 아직 프로가 정착되지 않았던 시절에 일정도 제멋대로였던 상황에서 구 마산 연고지를 쓰다보니 이동 거리가 너무 길어서 홈, 원정 할 것 없이 선수들이 매우 힘들어했는데다가 당시엔 옆동네인 구 창원의 LG 세이커스라는 큰 산이 있던 점과 결합 되면서 결국 버티다 못해 수원으로 가버린 케이스다.[52]
한국전력은 모기업 본사가 전라남도 나주시에 있는 점을 들어 광주광역시 측에서 2019년에 광주로의 연고지 이전을 제안했으나[53] 선수들을 중심으로 광주로의 연고지 이전을 거부하면서 한전 배구단의 연고지 이전은 무산됐다. 한전은 수원시에 잔류하여 여전히 현대건설과 같은 체육관을 쓰게 됐고 한전 배구단을 놓친 광주광역시는 2년 뒤인 2021년 페퍼저축은행 여자배구단을 유치했다.
7.5. 인천 흥국생명 핑크스파이더스
위의 WKBL KB 스타즈처럼 현대캐피탈 스카이워커스의 등쌀에 밀린 케이스다. 초창기에는 현대와 공동 연고를 쓰고 있었으나, 현대캐피탈에서 각종 개념찬 행동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평범하게 운영하고 싶었던 흥국생명과 계속 부딪히게 되었다.[54][55] 그래서 서로 불편해 하던 와중에 천안시 측에서 현대캐피탈의 손을 들어주면서 내쫒기게 되었다. 마침 서울에 우리캐피탈 드림식스가 창단하면서 자매 구단으로 GS칼텍스가 베팅하였고, 이참에 비게 된 대한항공 점보스의 짝으로 갈아타서 인천으로 옮기게 되었다.[56]
이 연고지 이전이 지금봐도 경악스러운 이유는 당시 흥국생명에는 김연경과 황연주라는 여자배구 역대 최고의 스타들이 있었으며 우승도 4년새 3번이나 한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번째 우승을 한 다음 시즌에 바로 쫓겨났다. 그리고 이 벌이었는지 몰라도 현대캐피탈은 삼성화재에게 처절하게 준우승을 당하는 세월을 10년 동안 보내게 된다.
7.6. 의정부 KB손해보험 스타즈
LG화재 - LIG그룹 시절에는 공장도 있었고 모기업이 구미에 애착이 있어서 정착이 잘 되었으나 손해보험사가 KB금융그룹으로 넘어가자 지점이 2개밖에 없는 구미에 남을 이유가 없어졌다. 구단은 계약 기간이 끝나자마자 구미를 떠나냐는 말에 떠난다고 답했으며, 여러 군데를 놓고 보다 경기도 의정부시로 연고지를 옮겼다. 참고로 새로 사용하게 된 의정부실내체육관은 안양 KGC인삼공사 팀이 SBS 시절 초창기에 안양시에 체육관이 없어서 1년간 홈구장으로 몇 경기를 치렀던 전력이 있다.
이로써 경상도는 경기도에 배구단을 또 빼앗겼으며, 대경권 남자 추춘제 스포츠는 2021년 KBL의 대구 한국가스공사 페가수스 입성 전까지 공백 상태가 되었고, 경상도 남자 배구단도 명맥이 끊겼다.
8. 아시아리그 아이스하키
8.1. 대명 킬러웨일즈
[1] 삼성 라이온즈는 삼성그룹이 대구에서 탄생한 기업이여서, 해태 타이거즈/KIA 타이거즈는 해태제과식품과 기아 공장이 모두 광주에 위치해있어서, 쌍방울 레이더스는 창업지와 본사가 전북 익산에 있었기 때문에 연고지를 각각 대구광역시, 광주광역시, 전북특별자치도로 정한 것이다.[2] 빙그레 이글스가 대표적 사례. 당시 제7구단 운영 주체가 된 한화그룹 자체가 충청지역 향토기업이었고 창단 당시부터 구단주를 맡고 있는 김승연 회장도 충청남도 출신이다.[3] 롯데 자이언츠의 경우에도 모그룹과 구단측에서는 서울특별시를 연고로 하고 싶었으나 당시 프로야구기획팀에서 울산광역시 출신인 신격호가 있다는 이유로 부산에 강제로 앉혔다. 그 외에 프로야구 초기 기획안에서 부산은 롯데와 더불어 창업주가 경남에 연고를 두고있던 럭키그룹에게 넘기고자 했고 강원도 연고 구단 창설과 관련해 현대그룹에 접촉한 것도 정주영 회장이 강원특별자치도 출신이었기 때문이었다.[4] 2000년 SK 와이번스가 인천을 연고로 창단했지만 범SK가의 출신지는 경기도 수원시이고 SK와 인천의 연관 관계는 딱히 없었다. 2021년 SK 구단을 인수한 SSG 랜더스의 오너인 신세계그룹 역시 서울에서 출발한 기업이고 인천에서는 오히려 경쟁업체에 사업장을 뺏긴 아픈 기억이 있다. SSG 랜더스는 SK 와이번스의 역사를 완전승계하기 때문에 연고지도 그대로 유지한 것뿐이다. 이밖에도 2011년 NC 다이노스가 창원을 연고로, 2013년 kt wiz가 수원을 연고로 창단했지만 두 팀의 모기업인 엔씨소프트와 KT 모두 창원, 수원과는 직접적 연고 관계가 없다.[5] 축구는 종합운동장 하나라도 있으면 경기 개최가 가능하고, 농구나 배구도 실내 체육관 하나 있으면 가능하다. 그러나 야구는 전용구장이 필수이며 수천 명의 관객을 받을 만한 야구장은 매우 드문 편이다.[6] 장기 불매운동은 기본이요, 상품 파괴 인증도 줄이을 게 뻔하다. 비교적 인기가 덜한 축구나 농구에서도 상품을 파괴하고, 구단 모기업에 대한 불매운동이 일어났는데, 하물며 야구는 인기도 더 많은데 무사한 게 더 이상할 정도다. 비교를 해서 오리온스의 야반도주랑 삼성의 야반도주랑 비교한다면 어느 쪽이 더 후폭풍이 셀까? 당연 후자다. 삼성 라이온즈가 대구를 버리고 떠난다면 대구 시민들이 삼성 제품 불매운동에 나서고, 라이온즈 유니폼 찢어버리기를 넘어서 빈 구장에 떠난 구단에 대한 분노와 슬픔이 섞인 낙서나 전단지가 이어지고, 새 연고지에서 경기할 때 대구에서 올라온 성난 팬들이 구단을 조롱하는 구호를 외치거나, 애먼 축구장이나 농구장 관중석에서도 삼성 스포츠 구단이 왔을 때 같은 기업 소속이라는 이유로 삼성그룹을 비하하는 피켓이 솟아나 있을 수도 있다. 삼패[7] 두산의 모태는 서울 토박이인 박승직이 세운 박승직상점이고 당시 두산 사옥도 동대문야구장이 있는 중구에 있었다.[8] 삼미 슈퍼스타즈 - 청보 핀토스 - 태평양 돌핀스의 역사도 포함[9] 후술되어 있지만 정식 연고지가 아닌 임시 연고지였다.[10] 1998년 한국시리즈 우승을 거둔 이후 첫 경기인 1999 시즌 개막전이 매진되지 못한 것이 연고지 이전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다만 인천 나름대로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는데, 인천에는 대우그룹의 주요 계열사와 협력사들이 위치해 있어 1999년 대우그룹의 부도는 인천 경제에 타격이 매우 컸기 때문이다. 게다가 평소 숭의야구장의 시설이 낙후됐던데다 팀의 모기업이 너무 자주 바뀌었고, 성적도 만년 꼴찌였다. 심지어 부산광역시를 연고로 하는 롯데 자이언츠도 암흑기에는 사직 야구장 관중석이 텅텅 빈 적이 있다. 인천은 도원전사로 대표되는 강성 팬덤을 갖췄고, 우리나라에서 야구를 처음으로 받아들인 도시인 만큼 야구 자체에 대한 열기는 충분한 지역이었다. 자세한 내막은 삼청태현 문서 참조.[11] 이 당시 프로야구의 인기도가 유독 낮기도 했었고, 수원은 결정적으로 옛부터 축구도시의 이미지가 더 강했던데다가 현대가 오기 전인 1995년에 창단하여 1998년과 1999년 2년 연속우승을 차지하는 등으로 인해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와 K리그1 트로이카 중 한 명인 고종수의 인기와 이로 인한 K리그 르네상스 시대가 열렸고, 한일 월드컵 개최 열기 등으로 인해 수원 삼성 블루윙즈의 인기가 가히 압도적이었다. 거기다 현대는 언제 서울로 갈지 모르니 정을 줘봐야 떠난다는 인식이 강해서 응원할 이유도 없었기도 했다. 그래서 수원 사람들에게 수원 야구의 적통을 묻게 되면, 대부분 현대가 아니라 (애초에 수원을 연고로 창단한) kt라고 한다.[12] 청주시에 모기업인 럭키금성 공장이 있었다. 현재도 LG전자, LG화학, LG생활건강, LG이노텍과 LG그룹에서 분리된 LS산전, LX하우시스 등의 공장이 SK그룹과 함께 청주산단을 양분하고 있다.[13] 이 과정에서 인천광역시가 본인들의 지역 내에 있는 축구장 인천문학경기장 주경기장 활용을 위하여 축구단 신규 창단과 할렐루야 축구단의 유치를 놓고 고민하다가 축구단 신규 창단을 결심하고 인천 유나이티드 FC라는 이름의 시민 구단을 창단했고, 자연히 할렐루야 축구단의 인천 입성은 무산되었다.[14] 정확히는 기존 연고지 구단은 해체하고 새 연고지에서 새로 창단하는 형식이라 엄밀히 말하면 연고이전은 아니다. 즉 상무가 연고지 계약을 연장하지 않는 이상 상무 연고지 마지막 시즌에 K리그1에 잔류해도 타 연고지에서 재창단할 경우 자동 강등되어 시민 구단으로 전환된 기존 구단과 함께 K리그2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15] 이 해 홈 앤드 어웨이 체제로 전환했다. 따라서 울산 HD가 인천 경기 연고 시절에는 단 한 번도 홈경기를 가져 본 적이 없다.[16] 당시 현대 축구단의 운영 주체는 현대자동차였는데 현대차의 본거지가 울산이었다. 훗날 현대자동차로부터 구단 운영권을 넘겨 받는 HD현대중공업 역시 울산에 본사가 있다.[17] 참고로 1996년부터 2000년까지는 명목상으로는 "부천시"를 연고로 하고 있지만 홈구장은 목동운동장으로 사실상 서울 연고 구단이었다. 2001년 부천종합운동장이 완공되면서 부천에서 홈경기를 치르면서 실질적인 부천 연고팀이 되었다.[18] 기존의 연고지는 도, 시, 군이었는데 최초로 구로 연고지를 잡은 것 때문에 어디까지 내려가야 하느냐면서 논란이 되었다. 다만, 인구수에서 의정부시 46만 명, 이천시 22만 명인데 노원구 48만으로 더 많을뿐더러 프로팀도 아니여서 연고지가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19] 여자까지 합치면 김천 한국도로공사 하이패스가 있다. 하지만 이 팀도 원래 구미를 연고로 하다가 성남으로 옮긴 바 있다. 2015년에 김천으로 유턴을 했다.[20] 대우증권(2017년에 미래에셋증권과 합병.) 제우스는 원년 시즌인 1997 시즌 인천도원체육관을 홈으로 썼으나 심각하게 좁고 낡은 경기장 시설에 학을 떼버렸다. 결국 대우 농구단 측이 새 홈구장을 물색했고 공교롭게도 따끈따끈하게 문을 연 부천체육관이 있어서 그리로 옮기게 됐다. 부천체육관의 위치가 인천과 매우 가까워서 큰 논란으로 번지지 않았다.[21] 사실 인천은 KBL 연고지 중에서 빅마켓으로 꼽히는 흥행 지역이다. 인천, 부천, 김포, 시흥 등 수도권 서부지역의 팬덤이 굳건하고 지하철로 접근 가능한 삼산월드체육관의 시설 수준도 리그에서 상급에 꼽히는 만큼 농구단 인수를 원하는 기업 입장에서도 꽤 만족스러운 곳으로 볼 수 있다. 그럼에도 인천 전자랜드 농구단의 모든 권리를 그대로 인수하겠다고 나선 민간기업이 한 곳도 없었고 공기업인 한국가스공사가 별 수 없이 인수하게 됐다. 애초에 전자랜드 농구단이 해체 위기까지 갔고 빅마켓인 인천 대신 대구로 이사를 가야했던 것은 그만큼 농구의 인기가 많이 사그라들었고 코로나19로 인해 프로스포츠 시장 환경이 악화돼서 발생한 일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가스공사가 선택한 새 연고지 대구는 인천보다는 시장성이 조금 더 나은 곳으로 평가되며, 대구·경북 시도민의 스포츠 관심도는 꽤 높다. 1980년대부터 인기 구단으로 사랑을 받은 삼성 라이온즈와 K리그 시민구단 중에서 관중 동원력이 가장 뛰어난 대구 FC는 대구와 경북 주민들이 열렬히 환호를 해주고 있다. 단순 수치만 보면 수도권이 대경권보다 인구가 많은건 당연하지만, 대경권의 인구도 충분히 많은데다가 오리온의 야반도주 이후 팬들의 열망과 응원을 고려하면 이쪽도 나쁜 선택이라 하기는 힘들다.[22] 모기업의 사정이 어찌됐든 연고지 이전 자체가 기존 연고지 팬들에겐 달갑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23] KCC가 쓸 것이라고 다들 예측했던 서수원칠보체육관은 2021년 부산에서 온 kt 농구단이 쓰게 됐다.[24] 사실 김완주, 송하진 등등의 전임 시장들도 한결같이 전주시내에 새 체육관을 지어주겠다고 약속했지만 지키지 않았다.[25] 다만 하술할 kt 소닉붐 문단에서도 볼 수 있듯이 부산시도 kt를 홀대 했던 전적이 있어서 부산으로의 이전이 성공할까라는 의구심도 있는 상황이다.[A] [27] 청주체육관 지붕에 불이 난 적이 있다.[28] 우연히도 이 시즌은 SK 호크스 남자핸드볼팀이 청주를 연고지로 삼겠다고 발표하여 SK 나이츠가 떠나고 청주에 18년만에 SK팀이 생긴 해였다.[A] 당시 서울 연고권 취득 조건으로 'KBL 출범 이후 우승 경험이 있는 팀'으로 한정했다. 고로 이 당시 연고지 이전 권한을 갖고 있던 팀은 부산 기아(1997 원년리그 우승), 대전 현대(1997~1998, 1998~1999 우승), 청주 SK(1999~2000 우승), 수원 삼성(2000~2001 우승)만이 갖고 있었다. 이 중 SK와 삼성이 연고지 이전을 택했다.[30] 단, 1998~1999, 1999-2000 시즌 중 일부 경기는 군산월명체육관에서 진행됐다. 또 목포체육관과 여수 흥국체육관에서도 일부 경기가 진행되었다. 사실상 호남 광역 연고였던 셈.[31] 정확히는 광주 인근 함평군이다. 기업명도 창업주의 고향인 함평군 나산면에서 유래.[32] 물론 부산시는 당연히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33] 이렇게까지 정착에 공을 들인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창원에 정착을 한 이유부터가 LG전자의 생산공장이 있는 창원시의 공장 노동자를 팬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였다.[34] kt빅토리움은 정자동에, 수원 케이티 위즈 파크는 조원동에 있다. 두 장소 간의 직선거리는 2km로 매우 가깝다.[35] 창원 LG 세이커스의 경우 2020-2021 시즌 개막 이전 창원시에서 임대료 삭감을 제안하면서 구단 사무실을 서울 잠실야구장에서 아예 홈구장 안으로 들어왔고, 홈구장 내 보조경기장을 연습장으로 쓰고 있으며, 선수들도 창원시내에 각자의 거처를 마련하는 등 연고지 정착의 모범 사례를 만들었다. 이같은 행동은 연고지 지자체의 지원보다도 구단의 움직임이 먼저 있었다면 일사천리로 진행됐을 일이다. 부산시 또한 kt 구단에 대한 지원이 없었던 걸로 알려졌다. 구단 사무실이 필요했다면 사직실내체육관의 일부를 개조하거나 하다못해 부산지역 kt 지사 건물 일부를 빌려서라도 쓸 수 있었겠지만, 어느 쪽으로도 kt 구단은 움직이지 않았다. 더구나 kt는 부산시 측에 연습 체육관 후보지를 알아봐달라는 요청도 제대로 하지 않았고, 부산 측은 "시에서 땅을 줄테니 체육관은 kt 돈으로 알아서 지어라!"라고 말한 바가 알려지면서 부산과 kt 양쪽 모두가 잘못했다는 의견이 있다.[36] 본사가 형제 야구인 kt wiz 홈 그라운드인 수원 위즈파크이며 kt 소닉붐 농구 직원도 입주해있다.[37] 문제는 두 지역 모두 부산의 외곽지역이기 때문에 관중동원력이 매우 안 좋다는 점이다. 그나마 강서체육공원인 경우는 명지오션시티가 확장되고 가덕도신공항이 들어온다면 그나마 낫지만 기장체육관인 경우는 부산시에서 개발하고 있는 일광신도시나 정관신도시 모두와 거리가 있었다.[38] BNK 썸은 그래도 연고지 정착 면에선 부산 연고 시절의 kt보다 훨씬 좋은 평가를 받는 편이다. 훈련과 숙식은 수원에서 하고 홈경기만 부산에서 했던 kt와는 달리 BNK는 홈경기 뿐만 아니라 숙소도 부산 기장에 있는 BNK 연수원에 자리잡고 있어서 훈련과 숙식까지 모두 연고지에서 해결하기 때문이다.[39] 현대모비스에 인수되기 직전 부산광역시의 비협조로 홈구장은 부산에서 울산으로 옮긴 상태였다.[40] 2020-21 시즌 기준으로 기아의 원년 우승을 제외해도 현대모비스가 KBL 최다 우승팀이라서 이 논란은 어느 정도 사그라들었지만, 여전히 빈축을 사고 있다.[41] 금호생명이 도원체육관을 쓸 때만 해도 이 체육관의 사정은 진짜 심각했다. 도원체육관의 장점은 전철역이 체육관 바로 앞에 있다는 점 빼고는 없었는데 관중석 의자는 작고 등받이도 없어서 관중들이 말그대로 다닥다닥 붙어서 앉아야 했고 그마저도 관중 수용 규모가 턱없이 부족해서 조금만 관중이 들어차면 입석으로 관중석 뒤쪽이 띠를 이룰 정도였다. 선수들이 쓰는 공간 역시 낙후된 점은 말할 것도 없었다. 오죽하면 KBL 원년에 이 체육관을 홈으로 썼던 인천 대우증권 제우스가 딱 1시즌만 이 경기장을 쓰다가 부천실내체육관으로 홈구장을 옮겨버렸고 인천 대한항공 점보스가 2005년 V-리그 출범과 함께 도원체육관을 홈으로 쓰면서 인천시에 매년 징징댄 덕에 조금씩 수리가 되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2014 인천 아시안 게임 때문에 전면 리모델링을 거쳐서 좀 괜찮아진게 지금의 체육관이다. 그래도 규모가 작은건 해결이 불가능해서 대한항공과 흥국생명은 새로 문을 연 계양체육관으로 홈구장을 옮겼고 그나마 흥행 파워가 약한 WKBL의 인천 신한은행 에스버드가 도원에 들어가게 된 거다.[42] 이는 구리체육관의 턱없이 적은 수용 인원도 한 몫 했다.[43] 수도권 몰빵의 핑계 중 자주 나오는 것이 바로 수도권에 몰린 숙소와 이동 거리, 그리고 수도권과 지방 간 시장 크기 차이다. 거기다 지방에 숙소와 연습장을 옮길 의지가 있는 지방 연고 구단도 드물다.[44] 현재는 철거하고 그 자리에 빛고을 시민문화관이 들어서 있다.[45] 연고 스포츠단 지원 조례가 따로 있고 아산시가 우리은행 농구단의 아산이순신체육관 연간 임대료를 이순신 장군의 초상화가 그려진 일금 100원으로 책정하는 등(상징적으로 금액을 정했을 뿐 무료대관이나 다름없다는 소리다.) 스포츠팀에 대한 혜택이 많다.[46] 공교롭게도 삼성생명 여자농구단이 오기 전까지는 같은 그룹 남자 농구단인 삼성 썬더스가 수원체육관을 홈으로 썼다.[47] 국내 주요 프로스포츠 리그를 통틀어 현장 직관 관중 비율이 가장 낮은 리그가 WKBL이다. 그것도 지금이 그나마 나아진 것이며 2000년대 초반에는 그야말로 체육관이 텅텅 비어있거나 모기업 사원들을 동원하는 방식으로 관중석을 채워야 했다.[48] 공교롭게도 안산 OK금융그룹 읏맨이 홈구장으로 쓰는 상록수체육관도 생활체육용 공간이다. 물론 그나마 와동체육관보다는 상황이 나아서 V-리그 경기가 성황리에 열리고 있다.[49] 잘 알려져있듯, 이건 여자배구에서도 인기팀으로 잡아가던 흥국생명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흥국생명은 아예 충청도를 떠나 인천광역시로 이전.[50] 평택 임시 홈경기의 혜택을 누린 사람이 있는데 평택 출신으로 평택에서 은퇴식을 치른 이숙자다.[51] 대전 삼성화재, 천안 현대캐피탈[52] 정확히는 당시까지는 한국전력이 프로팀이 아닌 아마 초청팀이었기 때문에 현대건설이 이전한 것이었고, 한전은 그냥 따라 간거다. 물론 어차피 한전의 경우에도 연습체육관이 수원에서 가까운 경기도 의왕시에 있으니 땡큐이긴 했지만.[53] 같은 공기업 팀인 한국도로공사 여자배구단의 연고지가 본사 소재지 이전에 따라 성남에서 김천으로 옮겨진 것이 영향을 미쳤다.[54] 대표적인 예를 하나만 들자면, 현대캐피탈에서 정태영 부회장이 구단주인 나도 외국처럼 관중석에서 일반 관중과 같이 볼테니 권위를 타파하자고 나서면서, 2007년에 목 좋은 자리에 이른바 VIP들이 폼잡고 앉아 보라고 만든 본부석을 싹 없애버리고 거기를 팬들이 앉는 가족석으로 만들어버렸다. 그러니 흥국생명 역시 어쩔 수 없이 VIP들이 그냥 일반 지정석에서 봐야 되었는데, 흥국 프런트의 높으신 분들에선 당연히 그걸 불편해할 수 밖에 없었다.[55] 평범하게 운영하고 싶었던 당시 막장 흥국 프런트는 김연경 이적 사태와 13-14시즌 류화석 감독 선임으로 침몰하던 팀이 완전히 망가지자 14-15시즌 박미희 감독 선임과 함께 사라졌다, 그래서 그런지 홈구장을 계양으로 이전한 이후에는 도원시절에는 체육관의 노후화와 구조문제로 하지 못했던 이벤트석을 만들고 17-18시즌에는 같은 연고지 야구장의 스카이박스와 비슷한 단체석인 “핑크하우스”를 제작하는등 여러가지 시도를 하고 있다.[56] 오히려 인천으로 이전한 것이 역사적 의미가 있는것이 1991년에 태광산업 배구단의 운영권이 흥국생명으로 이전되어 지금에 이르기 전, 태광산업 배구단의 전신이라고 할수 있는 1963년에 창단된 동일방직 배구단의 운영체인 동일방직이 바로 인천 동구에 있었다, 즉 흥국이 인천으로 이전한 2009년을 기준으로 잡으면 46년만에 원 연고지로 돌아온 것이다. 물론 흥국에서는 모기업이 동일방직 배구단을 인수한 1971년을 시작으로 보고있다. 18-19시즌 우승 티셔츠 뒷면에 Since 1971이라는 문구가 인쇄되어 있는 점이 증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