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wiki style="margin:0 -10px -5px" {{{#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color: #121230; margin:-6px -1px -11px" | 구단 기본 문서 | 모기업 | SK에너지 |
| 연고지 | 제주특별자치도 | ||
| 구단 | 제주 SK FC | ||
| 주요 인물 | 현재 | 김정수 감독 대행 | 선수단 | |
| 역대 | 역대 감독 | 프랜차이즈 선수 | 역대 주장 | 역대 유니폼 | ||
| 시설 관련 문서 | 홈구장 | 제주월드컵경기장 | |
| 제2 홈구장 | 제주종합경기장 | ||
| 클럽 하우스 | 서귀포 클럽하우스 | ||
| 역사 | 시기별 | 유공과 SK 시절 | 제주 SK FC | |
| 시즌별 | 시즌별 일람 | ||
| K리그1 | 1989 | ||
| K리그2 | 2020 | ||
| 현재 시즌 | 2025 | ||
| 팬덤 관련 문서 | 서포터즈 풍백 | 제주SK FC 마이너 갤러리 | ||
| 라이벌전 | |||
| 논란 | 사건·사고 | 남패 | ||
| 기타 | AFC 챔피언스 리그 | 여담 | 직관 가이드 | 경제인 | ||
1. 개요
2006년 부천시에서 제주특별자치도로 연고지를 이전한 제주 SK FC를 비하하는 용어.2. 연고 이전 이전의 상황 (유공 코끼리/부천 SK)
1970년대 이후 급격하게 사세를 키우던 선경그룹은 1983년 프로축구 슈퍼리그 출범에 맞춰 주력 계열사 유공의 이름을 딴 '유공 코끼리 축구단'을 창단하게 된다. 사실 선경이 축구단을 창단한 것은 자의적인 것이 아니었는데 프로축구 출범에 앞서서 기업인들과 만난 전두환 당시 대통령이 최종현 당시 선경그룹 회장에게 "최순영[1] 회장님이 할렐루야 축구단을 만드셨으니 선경에서 '나무아미타불 축구단'을 만드시면 되겠습니다"라고 농반진반으로 얘기했다고 한다. 대통령은 그저 웃자는 뜻에서 한 농담이었겠지만 시대 흐름상 대통령의 농담을 진짜 농담으로만 받아들이고 무시했다가는 갑자기 강제로 회사가 날아갈 수도 있는 위기를 맞을 수 있었기에 번갯불에 콩 구워먹는 심정으로 대통령의 명령에 납작 엎드려 창단한 팀이 바로 유공 코끼리였다.창단 당시부터 경인 지역을 연고지로 삼았고[2] 1991년부터는 서울특별시 연고팀으로 자리를 잡았던 유공 코끼리는 1996년 한국프로축구연맹이 시행한 서울 연고 공동화 정책의 영향으로 동대문운동장을 같이 쓰던 LG 치타스, 일화 천마와 함께 서울을 강제로 떠나야 할 상황이 됐다. 결국 LG가 LG전선 공장이 있는 안양시로, 일화는 선문대학교가 있는 천안시로 연고지를 옮겼고 유공은 당시 인천 클럽하우스에서[3] 멀지 않은 부천시로 연고지를 옮기게 된다. 다만 당시 부천에 프로축구 경기를 치를 만한 경기장이 없었기에 고육지책으로 부천에서 그나마 제일 가까운 목동운동장을 홈으로 쓰게 된다.[4]
참고로 이 시기 유공-SK는 1989년 첫 우승 이후 줄곧 중위권~중하위권의 성적을 유지하던[5] 클럽이었지만 발레리 니폼니시 감독 부임 이후 반영된 패싱 축구 기조와 남다른 기량을 뽐내던 스타 플레이어 윤정환의 영향으로 인기는 나름대로 있었던 팀이었다. 특히 한국프로축구 사상 최초의 서포터즈로 기록된 헤르메스가 처음 조직된 것도 이 시기의 일이었다.
그러나 1997년 외환 위기가 찾아오면서 SK그룹의 스포츠단 운영에도 큰 파장이 일게 되는데 당시 멀쩡하게 운영하던 스포츠단을 줄줄이 해체했고[6] 축구단은 폭풍을 피했으나 모기업의 지원금이 줄어듬과 동시에 그동안 주먹구구식으로 이루어지던 선수 연봉에 대해 새로운 고과평가제도가 실시되었다.[7] 이 시기에 부임한 강성길 단장은 축구단 운영에 매우 비관적인 입장을 취하는 인물[8]이었는데, 홍보 효과도 없는 축구단은 최소비용으로 운영하겠다는 것이 이 양반의 축구 철학이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건 단장 개인의 뜻이 아니라 모기업 수뇌부의 마음이 떠났다는 뜻이었다. 설상가상으로 2000년 초에는 당시 정부의 권유로 모그룹 SK가 축구단의 클럽하우스가 있던 인천광역시를 연고로 프로야구단도 창단하는 바람에 축구단에 추가 투자는 기대할 수 없었다. 결국 쓸만한 선수는 다 팔아먹고 있는 선수로 돌려막으면서 그냥저냥 운영하는 팀으로 전락했다. 그러는 사이 연고지 부천에 새로운 종합운동장인 부천종합운동장이 완공되면서 홈구장도 부천으로 옮기게 된다.
축구단에 대한 모그룹의 관심이 갈수록 줄어드는 상황에서 똥누는 놈 주저앉히는 계기가 된 결정적인 사건이 소버린 사태[9]#인데, 이 사태로 인해 그룹의 존망 위기까지 내몰린 SK는 축구단 매각을 검토했으며 실제로 부천시에 무상기부, 중국 스더그룹에 매각 의사를 타진하였으나 흐지부지되었다.[10] 어찌저찌 소버린 사태가 잘 수습된 후 2004년부터는 축구단 정상화를 위해 정해성 감독을 영입하고 리그에서 잔뼈가 굵은 김정수, 조준호 등을 영입하는 등 본격적인 정상화 행보를 보이기 시작했다. 실제로 팀이 정비된 2005 시즌에는 플레이오프 진출을 눈앞에 두고 탈락하기도 했으며 평균관중도 대폭 상승했다.
3. 제주로 연고 이전
2006년 2월 2일 오전 구단 공식 홈페이지에 구단 연고지를 경기도 부천시에서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로 옮긴다는 충격적인 발표를 했다. 2004년 안양 LG 치타스의 서울특별시 연고이전 이후 2년 만에 전해진 또 하나의 충격적인 연고지 이전 발표였다. 구단의 연고이전 발표가 진행된 이후 부천 서포터스 헤르메스[11]와 헤르메스에 동조하는 K리그 타 구단 서포터스 회원들이 서울 서린동 SK 본사 앞에서 시위를 벌이기도 했으며, 붉은악마도 3월 1일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앙골라와의 친선 A매치 때 검은색 옷을 입고 전반전 초반 응원을 거부하기도 했다.[12]
SK 축구단의 연고지 이전 사유는 클럽하우스 문제였다. 당시 부천 SK는 인천광역시 용현동에 위치한 SK주유소 부지[13]에 위치한 훈련장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이 부지가 재개발됨에 따라 새로운 클럽하우스를 구해야 하는 상황이었다.[14] 이에 구단은 부천시 측에 새로운 클럽하우스 건설을 위한 부지를 제공해 줄 것을 요청했으나, 부천시에서는 단칼에 거절했고 서울의 베드타운으로 나날이 늘어가는 인구 밀도와 도시화를 자랑하는 부천시에 클럽하우스 건설 부지를 구입하는 것은 비용이 한두푼 들어가는 일이 아니었다. 이 문제를 고심하던 SK는 축구단을 부천시에 유지, 제주도로 연고이전, 제3지역으로 연고지 이전이라는 세 가지 방안을 놓고 외주용역조사를 했으나 결국은 클럽하우스 부지 무상 제공을 떡밥으로 던진 서귀포시로 연고이전을 하는 것으로 결정했다.[15]
[16]
"그 따위로 축구하려면~ 그 따위로 축구하려면~ 나가 뒤져라! 나가 뒤져라! 개스케이 나가 뒤져라~!"
연고이전 이후 분노한 부천 서포터들이 부른 노래. 이 곡은 원래는 수원 삼성 블루윙즈 서포터즈의 안티콜이며 2015년 12월 5일에 부산 아이파크가 결국 강등되었을 때 분노한 부산 팬들이 부르기도 했다. 지금은 영상을 볼 수 없다.
이후 2년 전에 연고지를 이전한 FC 서울과 함께 연고지를 옮겼기(2006년 부천시→ 제주) 때문에 "남쪽 패륜아"라고 해서 남패라고 불리고 있다. 연고지 이전에 대한 입장은 두 구단이 다르다. 서울 연고 공동화 정책으로 인해 반강제로 옮긴 이전 연고지 중 하나인 서울로 돌아간 FC 서울은 이를 연고복귀로 주장하고 안양 연고 시기를 부천의 목동 시절처럼 남의 집살이 시절로 우길 여지라도 있지만, 일절 연고가 없는 제주도로 간 SK는 그런 말조차 불가능.연고이전 이후 분노한 부천 서포터들이 부른 노래. 이 곡은 원래는 수원 삼성 블루윙즈 서포터즈의 안티콜이며 2015년 12월 5일에 부산 아이파크가 결국 강등되었을 때 분노한 부산 팬들이 부르기도 했다. 지금은 영상을 볼 수 없다.
4. 연고지 이전 이후
연고지 이전에 대한 사죄의 목적인지, 기업 이미지 제고가 목적인지는 몰라도 2007년 부천 FC 1995 창단이나 프로리그 참가 준비 기간에 SK[17]는 약간의 지원을 해주었다. 또 같은 SK 계열사인 SK텔레콤에서 부천 FC 1995와 잉글랜드 7부 리그 FC 유나이티드 오브 맨체스터[18]와의 친선경기를 주선하고 비용을 부담해줬다.그리고 딱히 지은 죄는 없는 제주 팬들은 연고지 이전에 대해 부정하지 않고, 부천 팬들에게 지속적으로 "부천 팬들 여러분! 죄송합니다!" 라고 사과의 표현도 했기 때문에 적어도 FC 서울보다는 이미지가 나은 편이고 서로 악감정을 내밀면서 거론하는 것을 꺼리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온건한 부분도 있다. 그래서 부천 FC의 응원가에서도 SK 떠나가도 철새들 떠나가도 내 여자 떠나가도 나는 변치 않아라고 부르지 대놓고 남패라고 폄하하지 않는다. 26번에 있음
서포터즈 풍백[19]도 부천 팬들에게 죄송하다는 사과 걸개를 거는 등 부천 SK 서포터즈에게 사죄의 뜻을 표명해 별다른 충돌이 없고, 이후에도 연고지 이전 관련해선 발언을 극히 조심[20]하고 여타 폭력 사태에도 연루된 적이 없었다. 제주는 전력이 약해 오랫동안 중하위권을 해맨 탓에 연고지 이전 외의 일로 타 팀의 미움을 받을 일도 없었고, 지리적 요인으로 인해 팬, 특히 원정 팬 숫자도 적어서 서울만큼 까이지는 않았다. 지금은 그 정도까진 아니지만 연고지 이전 초기인 2000년대 후반까지는 육지 원정 때 진짜 1~2명이 원정 와서 응원하는 일도 있어서 타 팀 서포터들이 개인적으로 격려해주는 일도 왕왕 있었다.[21]
부천시가 축구단을 위해 2,000억 원을 들여 수용 인원 35,000명의 부천종합운동장을 지어주었는데, 얼마 쓰지도 않고 가버려서 시 재정만 축냈다는 주장은 지어낸 이야기다. 부천종합운동장은 1996년 전국체전 유치용으로 부천시에서 건설한 경기장이고 이와 별도로 SK에서는 계획이 한창이던 상동신도시 내(현 부천터미널 인근)에 축구전용구장을 건립하려고 했다. 그러다가 1997년 외환 위기로 인해 축구전용구장 계획이 전면 백지화되면서 부천종합운동장을 사용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22]
쉽게 정리하면 SK 축구단은 클럽하우스 부지 매입 비용 절감을 위해 연고지 이전을 한 것이다. 이는 보다 큰 마켓, 무주공산인 수도 서울로 연고지 이전을 한 FC 서울의 경우와는 정반대다. 거대한 수도권 마켓을 버리다시피 하는 바람에 관중 동원력이 글쎄요가 돼버렸고[23] 되려 기업과 구단 이미지만 왕창 깎아먹었다고 까이는데, 상술했듯이 당시 SK 프런트는 연고지나 구단에 대한 애착이 없었고 지금도 깊다고는 못 한다.
프런트의 지속적인 파행으로 열성 팬들 사이에서 SK의 이미지는 이미 갈 데까지 간 상태여서 더 깎아먹을 이미지도 없었던 상황이었다. 박대가 화룡점정에 치닫던 와중에 제주도에서 지원해 준대서 제주도로 간 것이다. 그러나 2017년 용인으로 연고지 이전설이 돌았고, 구단 측에서 협상 시 유리한 고지를 잡고자 연고지 이전을 거론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실제 연고지 이전으로 이어지진 않았으나 구단에서 돈 때문에 다시 연고지 이전이라는 얘기를 꺼냈다는 것 자체가 2006년 부천에서 제주로 연고지 이전을 할 당시 배운 게 전혀 없고 모기업이나 프런트에서 어떤 마인드로 구단을 운영하는지 여실히 드러낸 사건이었다.
2019년 시즌 37라운드에서 제주의 강등이 확정되면서 결국 부천과 더비 성사가 확정되었다. 부천 측은 지옥을 보여주겠다며 잔뜩 벼르고 있었다.
2020년 5월 26일 제주의 부천 원정 일정이 잡히면서 부천 팬들의 현장 반응을 기대한 사람들이 많았지만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로 인해 무관중 경기로 진행됐고 제주가 1:0으로 이겼다.
지속적이었던 코로나19의 확산 상황으로 인해 2020 시즌 제주와 부천의 경기는 모두 무관중으로 열렸으며 제주가 3전 전승을 거두었으며 제주가 다시 1부리그로 승격한 뒤에는 강등당하지 않았고 부천은 2부리그에 잔류하면서 2021 시즌 이후 양 팀은 만나지 않고 있다.
일부에서는 2020년 제주와의 홈경기는 코로나19로 모두 무관중으로 치른 것을 다행이라고도 하는데, 부천의 서포터즈 헤르메스는 상대 선수단 버스를 가로 막는 등 강성한 것으로 악명이 높은 집단인 만큼 만일 코로나 인한 무관중 경기만 아니었다면 제주전에서 분노와 흥분을 참지 못한 부천 팬들로 인해 뉴스에나 나올 법한 대형 사고가 터졌을지도 모른다.
2025년 팀명을 제주 유나이티드에서 제주 SK FC로 변경했다. 기업구단이란 정체성을 드러냄과 동시에 최소한 제주도에 계속 정착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줬다는 평을 받고 있고 한편으론 일부 부천 올드팬들은 다시 나타난 SK를 보고 이를 갈았다.
2025년 3월 23일 부천이 코리아컵 2라운드에서 여주를 이기면서 4월 16일 제주와 5년만에 더비가 열리게 되었으며, 부천이 1:0으로 승리하여 복수에 성공했다.
2025년 K리그2에서 부천은 3위팀 자격으로 하나은행 K리그2 2025 플레이오프에 진출하면서 성남 FC와 무승부를 거둔 끝에 하나은행 K리그 2025 승강 플레이오프2에 진출했고 수원 FC에게 승리하면서 승격에 성공했다. 반면 제주는 강등권에서 허덕이며 하나은행 K리그 2025 승강 플레이오프1 진출했고 수원 삼성 블루윙즈를 만나 잔류에 성공하게 되면서 2026년 K리그1에서 더비가 성사되었다.
5. 관련 문서
[1] 당시 신동아그룹 회장이자 대한축구협회 회장을 맡았다. 엄청난 축구광이자 독실한 개신교 신자로 알려져 있다.[2] 몇 차례 소소한 연고 이전이 있었으나 1996년 이전까지는 연고지 이외 지역에서도 꽤 많은 경기를 치르던 시절이었고 K리그 내부에 연고지 의식도 깊지 않았던 시절이라 구단의 역사를 깊이 알고 있는 올드팬이 아닌 이상은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어쨌든 유공-SK는 창단 당시부터 줄곧 수도권 연고팀으로 운영됐다.[3] 미추홀구 용현동에 있던 클럽하우스였다. 그러나 2005년 이 클럽하우스가 사라지게 되는데 결국 이것이 후술하게 될 연고지 이전의 단초를 제공하게 된다.[4] 이 당시 유공이 왜 인천 대신 부천을 대체 연고지로 선택했는지는 알려진 바가 없다. 당시 인천에는 프로축구단이 없었고 낡고 볼품 없기는 했지만 과거 유공이 홈경기를 치렀던 인천공설운동장도 있었으며 노후화한 공설운동장을 대체하기 위한 문학종합운동장도 착공한 상태였다. 무엇보다 클럽하우스와 홈구장 간의 거리가 멀지 않다는 장점이 있었다. 다만 인천의 축구 열기는 지역 연고 야구팀을 향한 충성도에 비하면 미미한 수준이었고 공설운동장도 조명탑이 없어서 야간경기 개최가 어려웠다는 단점이 있었다.[5] 1990년대까지 대우 로얄즈, 일화 천마, 포항제철 아톰즈, 현대 호랑이 정도가 상위권 팀이었고 LG 치타스, 유공 코끼리 등은 하위권으로 인식되었다.[6] SK증권 여자 농구단과 SK케미칼 배구단이다. SK증권은 1998년 2월에 농구대잔치 우승 다음 날 '팀 해체 통보'를 발표하며 여자 농구단의 연쇄 해체를 이끈 시발점이 됐으며, 여자 배구도 슈퍼리그 준우승을 기록할 정도로 준수한 실력을 뽐내는 팀이었으나 역시 1998년 4월에 해체됐다. 당시 두 팀의 선수들이 현재는 각각 여자 농구와 여자 배구의 레전드급 선수들이 있었고 이 때문에 SK에 대해 악감정을 가진 올드 스포츠 팬들이 많다. 게다가 외환 위기 와중에도 진로 남자 농구단을 인수해 청주 SK 나이츠를 창단시켰는데 당시 농구의 인기가 상당하기도 했고 그룹의 후계자인 최태원이 농구 마니아였기 때문에 남자 농구단 인수를 위해 여자 농구단과 여자 배구단을 해체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남자 농구는 인기에 힘입어 프로 리그를 막 출범한 상태였고 여자 농구와 여자 배구는 실업팀이었다.[7] 기본급은 줄이고 출전 수당을 대폭 늘리는 방식이었는데, 주전급 고참 선수들은 이에 반발했으며 주장 강철을 비롯한 많은 고참급 선수들이 팀을 떠나는 계기가 되었다.[8] 선수들이 전지훈련 갔을 때 열악한 숙소 문제로 하소연하자 "다음번엔 여관방으로 잡고 식사도 라면으로 때워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유명하다.[9] 2003년 당시 모나코의 소버린자산운용의 자회사인 크레스트증권이 ㈜SK 주식 14.99%를 확보하여 최대 주주로 등극하면서 SK의 경영권을 위협했던 사건이다. 다만 한국 소액주주들의 외국계 자본에 대한 반발로 인해 SK 경영진을 지지하여 실패한 후 보유 주식을 전량 매각했다.[10] 이 시즌에 단 3승만 거두는 등 최악의 한 해를 보냈다.[11] 훗날 이 서포터스를 주축으로 축구단이 만들어졌는데, 이것이 오늘날의 부천 FC 1995다.[12] 당시 붉은악마 측은 "연고지 이전이야말로 한국축구의 근간인 K리그를 죽이는 행위"라며 "한국축구가 죽었다"는 의미로 상복을 착용했다.[13] 현재 이 부지에는 인천 SK 스카이뷰 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용현동 일대에서는 가장 큰 아파트 단지 중 하나다.[14] 이 재개발 계획으로 인해 SK 축구단은 물론 인천에 연고를 둔 SK 와이번스도 졸지에 연습구장을 잃고 방황하게 되었다. 부천 SK의 클럽하우스 바로 옆에 SK 와이번스의 연습구장도 있었기 때문이다. 용현동에서 쫓겨난 와이번스가 숭의야구장과 송도 LNG 야구장 등을 떠돌다가 제대로 된 연습구장을 다시 갖게 된 것은 2015년 4월이었다.[15] 아이러니하게도 연고지 용역조사 결과는 부천시 연고 유지가 최선이라고 결과가 나왔다.[16] 참고로 이 짤에 나온 구장의 사진은 수원월드컵경기장이다.[17] 부천 FC 1995 창단을 지원한 건 SK텔레콤인데, 연고지 이전의 주체였던 SK에너지도 부천 FC 1995 창단 과정에 일부 도움을 주고 부천 FC 공식 연혁을 보면 SK에너지가 창단 과정에서 후원했다는 흔적이 있다.[18] 통칭 유맨.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의 지나친 상업화에 반발한 맨체스터 시민들이 만든 구단이다.[19] 제주 연고 이전 초창기에는 두 서포터즈 그룹 풍백과 제우스(JEUS-JEju United Supporters의 약자.)의 대립도 있었다. 풍백은 자연발생적으로 조직하고 모인 거지만, 제우스는 제주 유나이티드 구단 측에서 모으고 관리하던 어용 서포터였다. 여느 서포터와 똑같이 유럽식 연고주의를 쫒던 풍백과 달리 친구단적이었고, 연고지 이전에 대한 개념이나 문제 의식 자체가 없었다. 이 둘은 한동안 대립하다가 연고지 이전 이후 제주가 부진할 때 제우스도 인원이 줄어들더니 결국 사라지고 풍백과 새롭게 조직된 인세인 아일랜더스만 남았다.[20] 연고지 이전 관련 토론같은 게 있으면 내가 지지하는 구단이 연고이전 구단이라며 아예 말을 안 했다. 반면 성남 일화는 조명탑 사건을 들먹이면서 자기들이 반강제로 쫒겨났다고 언론플레이를 하며 당당하게 서울·제주 비난하는 데 끼어들었다. FC 서울은 연고복귀라고 주장한다.[21] 현재는 육지 사는 제주 출신들이 경기할 때마다 들리는 등의 원군도 꽤 있다.[22] 이로부터 20년이 지난 2017년에 상동신도시의 성공으로 돈도 좀 만졌겠다, 전철역도 생겨서 접근성도 괜찮아졌겠다 겸사겸사 해서 종합운동장 옆에 인조잔디 연습구장을 철거하고 소규모의 전용구장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애초에 축구단을 위해 만들어줄 거면 전용구장으로 만들어놨을 터.[23] 부천, 부평·계양 및 양천·강서라는 먹음직스러운 시장을 버렸는데 거기 사는 인구가 250만 명에 달한다. 제주월드컵경기장이 있는 서귀포시의 인구가 18만 명 안팎이고 제주도 전체 인구가 60만 명 수준인 것을 감안한다면 부천에서 어떻게든 개기는 게 시장성 면에서 최소 5배는 남을 장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