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ㄱ
- 가말 압델 나세르 (이집트)
1952년 7월 23일에 자유장교단의 쿠데타를 주도하여 부패한 이집트의 파루크 왕정을 끝내고 수에즈 운하의 국유화와 아랍민족주의, 아랍사회주의 등을 제창하면서 비동맹운동을 설립하는 등 영국 제국주의를 청산하고 주체적인 외교를 이끌었으나 동시대 대부분 최빈국 및 개발도상국의 독재자들처럼 대통령 집권기에 야당을 심하게 탄압하고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강력한 이집트 군부독재의 씨앗을 심었다.
2. ㄴ
-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프랑스)
코르시카의 하급 귀족으로 태어나 프랑스 왕국 군인으로 커리어를 쌓고, 프랑스 제1공화국의 제1통령이자 종신통령을 거쳐 스스로 프랑스 제1제국의 황제로 즉위한 입지전적인 인물. 그러나 약 10여년의 집권기 내내 전 유럽을 상대로 이길 수 없는 전쟁을 벌인 끝에 결국 세인트 헬레나 섬에 유폐되어 일생을 마무리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함께 이 방면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이기도 하다. 오늘날까지도 평가가 극도로 갈리는 인물인데 쉽게 요약하자면 프랑스 혁명의 정신을 일부 퇴보시켰을지언정 나름대로의 진취적 업적을 남겼고, 혁명가도 혁명의 동조자도 아니었지만 당대 유럽의 반동주의와 복고주의에 맞서 혁명의 유산을 지켜낸 인물이었기 때문이다.[1] 당대에도 이는 크게 다르지 않아서, 철학자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은 나폴레옹을 두고 "저기 절대정신이 간다"고 소리치는가 하면, 작곡가 루트비히 판 베토벤은 나폴레옹의 초창기 행적에 반해 3번 교향곡을 '보나파르트'라는 제목으로 헌사하려다가 그의 황제 즉위 소식을 듣고 실망하여 제목을 바꿔 버리기도 했다.
- 네 윈 (미얀마)
본래는 미얀마의 독립영웅이었으나, 이후 군부 독재자로 전락해 무능한 경제정책으로 나라를 한동안 세계 최악의 최빈국 중 하나로 만들었다. 참고로 네 윈이 어느 정도로 무능했냐면, 그가 집권한 26년 동안 미얀마는 1인당 GDP가 50$를 넘긴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을 정도였다.[2] 다만 네 윈이 멀쩡했던 미얀마의 경제를 완전히 파탄낸 것은 절대 아니다. 사실 네 윈이 집권하기 전에도 미얀마는 당시 빈곤했던 대한민국과도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가난했던 세계 최악의 최빈국 중 하나였다. 네 윈이 워낙 형편없는 정책을 펼쳐 경제 수준이 계속 뒷걸음질쳤을 뿐이지.
- 노로돔 시아누크 (캄보디아)
캄보디아의 독립영웅이었으나, 론 놀의 쿠데타에 이어 크메르 루주의 킬링필드로 캄보디아가 큰 피해를 입는 데에 일조하였다. 내전 뒤에 다시 왕정 복고를 이뤘지만, 끝내 훈 센의 독재와 입헌군주제 체제 하에서의 실권 없는 왕으로 만족해야 했다.
3. ㄷ, ㄹ
- 다니엘 오르테가 (니카라과)
산디니스타 반군을 이끌고 소모사 가문의 독재정권을 끝장낸 혁명가였으나, 권력욕을 절제하지 못하고 현재까지도 부정선거를 동원해 계속하여 집권을 하려는 야욕을 보여 주고 있다. 자신의 사상 역시 잊어버린 지 오래로 사회주의 혁명을 이끌었던 과거는 온데간데 없고 자본가, 종교계와 야합하는 모습만을 게속해서 보여주는 한편 지신의 친족들을 통해 재계를 장악하려는 모습도 보이고 있다.
-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튀르키예)
정의개발당을 이끌고 튀르키예 경제를 부흥시킨 인물로 평가받았으나, 2013년 튀르키예 시위를 폭압적으로 진압한 데 이어서 군부의 쿠데타 시도마저 진압하면서 독재자의 반열에 올랐다.
- 로버트 무가베 (짐바브웨)
독재자가 된 영웅의 대명사격으로 꼽히는 인물이다. 집권 초반까지는 로디지아 백인 정권에 맞서 조국을 해방시켜 넬슨 만델라조차 존경했을 정도의 독립영웅이었지만 권력을 잡으면서 민간인 학살과 부정부패, 초인플레이션으로 대표되는 경제 파탄으로 나라를 파탄내며 김정일도 능가하고, 흑인들조차 흑인들을 탄압하던 이언 스미스보다 못하는 평가까지 받을 정도로 타락하며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최악의 독재자가 되었고, 2017년에 군부 쿠데타로 인해 축출된 후 2019년에 망명지 싱가포르에서 쓸쓸히 사망했다.
- 루홀라 호메이니 (이란)
대체로 세속적이고 개방적이었다고 평가받지만 억압적인 일면도 있었던 팔라비 왕조를 대체하여 이란의 새로운 지도자가 되었으나 세속주의 국가였던 팔라비 왕조보다도 더 억압적인 신정국가를 세워 여성, 세속주의자, 공산주의자를 극도로 탄압했고 무수한 사람들을 처형했고 반대파들에게 백색 테러를 했다. 통치는 10년에 지나지 않았지만 지극히 억압적이라 세계 각국의 자유주의자와 인권단체의 비판을 샀고 그의 후계자 하메네이도 신정 국가를 유지한다
4. ㅁ
- 마오쩌둥 (중국)
당시 국민당에 비해 매우 적은 군사를 가지고도 국공내전에서 국민당군을 물리쳤다. 부패한 국민당을 타도하고 사회주의 혁명과 느슨한 군벌들의 연합이라는 국민당식 북벌을 넘어 확고한 중국 통일을 이룩했으나, 집권 이후 대약진운동이라는 초대형 삽질로 중국을 경제적 후진국으로 전락시키고 자신의 정치깡패 세력인 홍위병을 동원, 문화대혁명을 일으켜 수 많은 중화 문명의 유산을 파괴하고 지식인/문인들을 탄압하여 문화 후진국으로까지 만들며 중국에 매우 큰 피해를 입혔다. 이로 인해 현재의 중국에서도 '공칠과삼'이라는 의견과 마오쩌둥 집권기에 대한 비판이 어느 정도 용인되고 있다.
-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 (튀르키예)
제1차 세계 대전에서 갈리폴리 전투 등으로 큰 공을 세웠을 뿐더러 전쟁 뒤 열강과 숙적 그리스에게 찢길 뻔한 나라를 지켜냈고, 튀르키예의 근대화와 산업화를 위해 많은 공을 세웠다. 죽기 전까지 권력을 잡았으니 독재자지만 튀르키예 국민들은 그가 사망한지 80년이 훨씬 지났는데도 여전히 그를 진심으로 존경하고 사랑한다. 자기 사후 자기 자식들이 자신의 인기로 높은 자리에 올라가리라 걱정해 자식도 없었다. 현재 근대적 세속주의와 이슬람 원리주의 사이에서 갈등을 겪는 주변 이슬람 국가들의 상황에 비춰봤을 때, 어찌 보면 긍정적인 면모가 있다. 튀르키예인들에게는 영웅으로 시작해 영웅으로 죽은 사람이다. 그러므로 튀르키예에서나 튀르키예인 앞에서 독재자라고 하면 영 나쁜 꼴을 볼 가능성이 크다. 단, 튀르키예 정부조차 독재자임은 인정한다.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이 장기집권에 성공한 데에는 케말이 수립한 세속주의 정권의 지나친 탈종교적 정책에 역으로 염증을 느낀 것이 한 원인이 됐을 정도이기도 하고. 독재의 사전적 뜻은 민주적 절차를 무시하고 절대권력을 유지하는 행위로, 아타튀르크도 약 15년 동안 대통령 직에 있었다.[3] 물론 헌법과 민주적 절차에 따라서 선출한다면 대통령을 오래 해도 독재자는 아닐 것이지만 당시 튀르키예는 일당제 국가여서 현대에 말하는 민주적 국가라고 보기는 힘든 상황이었다. 다만 아타튀르크는 대통령 임기 말년에는 2인자였던 총리 이스메트 이뇌뉘에게 주요 국정을 맡기고 본인은 전체적인 방향만 잡아주는 상징적 국가원수에 가까운 역할을 하기는 했다. 그리고 독재자의 여부는 뒷날 대다수의 국민들이 그 인물을 그리워하거나 영웅시한다는 것과는 무관하다. 때로는 히틀러처럼 당시에 국민 대다수의 지지를 형식적으로 받았지만 독재자일 수도 있으니... 애초에 블라디미르 레닌이나 스탈린, 마오쩌둥, 시몬 볼리바르, 줄리어스 니에레레, 피델 카스트로, 요시프 브로즈 티토처럼 당시나 현재에 높은 인기가 있고,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들도 많고, 엄연히 그 나라의 국부로 대접받는 사람도 있으니 이런 경우에는 가급적 관련 화제는 피하는 것이 좋다. 이슬람주의자와 쿠르드족 분리주의자를 제외하면 이 문서에 기재되어 있는 타 독재자들 중에서 가장 높은 평가를 받는 인물이다.
- 무아마르 카다피 (리비아)
말년에 맛이 간 행적을 보여줘서 그렇지 쿠데타를 주도하여 부패한 리비아 왕정을 끝내고 석유기업들을 국영화한뒤 오일머니를 이용해 국민들을 위한 복지제도를 도입하고, 인프라를 건설하여 리비아를 크게 발전시킨 인물이었다. 카다피 사후 리비아가 내전으로 아무리 막장이 되었다고 한들 아직 북아프리카에서는 잘 사는 곳이다.
- 무함마드 무르시 (이집트)
교수 출신의 정치인으로서 혁명으로 30년 가까이 집권한 독재자 호스니 무바라크를 축출하고 이집트가 공화국이 된 이래 최초로 민의에 의해서 선출된 민선 대통령 자리에 오르면서 많은 기대를 받았다. 그러나 파라오법과 이슬람주의 정책[4]으로 민심이 이반되었고, 여전히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던 군부세력에 의해서 대통령직에서 다시 쫓겨났고 옥중에서 죽었다. 게다가 자국의 군사기밀을 하마스, 카타르 등지에 넘겨준 매국노였다는 것까지 밝혀져 평가가 나락으로 떨어졌다.
5. ㅂ
-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국민보수주의, 권위주의, 민족주의 우파 성향을 강하게 띠며, 집권 초기 완전히 망조가 들어버린 국가를 살리며 좋은 평을 받았다가 장기집권하며 완전한 독재자로 나아간 케이스. 소련 붕괴의 여파와 보리스 옐친의 실정으로 빈곤과 분리주의에 시달리던 러시아를 떠맡아 올리가르히를 청산하고 경제를 정상궤도에 올려놓았으며 체첸이나 조지아에서 국익을 수호하는 단호한 대처로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집권이 장기화되면서 산업역량 확충에 대한 중장기적인 비전 없이 천연자원 수출로만 연명하던 경제는 한계에 부딪쳤고, 부패는 과거와 별 다를 바 없이 일상화되었다. 게다가 방사능 홍차로 대표되는 반대파에 대한 꾸준한 정치적인 탄압과 암살 시도, 그리고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처럼 자국의 역량을 상회하는 무리한 팽창주의로 서구와 대립하면서 그나마 있던 평가마저 깎아먹는 중이다. 그나마 이때까지만 해도 러시아의 박정희 정도로 평가받았으나,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러시아의 외교관계를 완전히 초토화시켰고, 각종 전쟁범죄를 저질러 전쟁범죄자라는 낙인이 국제적으로 단단히 찍혀버린 상황이다. 게다가 반대파에 대한 탄압도 완전하게 성공한 것도 아니라 파벨 그루지닌 등 자신의 권좌를 위협할 수도 있는 신세대 정치인들에게 강력한 도전을 받고 있는 터라 푸틴의 미래는 어떻게 될지 모른다. 물론 2024년 대선에서는 87% 득표율로 압승했는데 이마저도 인터넷 투표, 공개투표 등 선거 원칙이 지켜지지 않은 투표로 진행되어 비난받았다.
- 블레즈 콩파오레 (부르키나파소)
아프리카의 위대한 개혁가 토마 상카라의 혁명을 도운 영웅 중 한 명이었으나, 이후 권력에 눈이 멀어 상카라를 직접 죽이고 최악의 독재자가 되고는 상카라의 정책들을 모조리 뒤엎어 버렸다. 그 결과 부르키파나소는 현재 아프리카의 최빈국 중 하나가 되었다.
6. ㅅ
- 살리 베리샤 (알바니아)
북한과 동급의 억압적인 학정을 벌이던 엔베르 호자의 후예이던 알바니아 노동당으로부터 알바니아를 해방시킨 민주화 영웅에 알바니아를 세계적 기준으로도 최빈국이었던 열악한 환경에서도 순조롭게 경제성장을 이뤄간 유능한 지도자로서 임기 중 치러진 총선에서 의석의 90%를 차지할 정도였지만, 집권 후 점차 권위주의적 성향을 보이더니 전술한 경제성장도 정부가 사기꾼들과 결탁하며 벌인 폰지사기[5]였음이 밝혀졌고[6] 결국 알바니아는 내전에 접어들면서 베리샤는 지지를 잃고 공산당의 후예이던 알바니아 사회당에게 정권을 넘겨주게 되었다.[7]
- 살바 키르 마야르디트 (남수단)
남수단 독립에 기여하며 초대 대통령이 되었으나, 부정축재를 일삼고 부족 차별 및 경제적 무능에 이어 남수단 내전을 벌이면서 남수단을 소말리아 이상의 파탄국가로 만들어 버렸다.
- 셰이크 하시나 (방글라데시)
방글라데시의 독립을 주도한 독립영웅 셰이크 무지부르 라흐만의 딸로 온 가족이[8] 군사 쿠데타로 살해당한 아픔을 무릅쓰며 군부독재정권에 목숨 걸고 항거한 민주화 영웅이었고, 집권 후에도 이런 초심이 남아 방글라데시의 경제 개발을 이끌어 방글라데시를 최빈국에서 벗어나게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언론&야당 탄압 등 독재의 기미가 보이다가 독립유공자 자녀 공무원 할당제에 항의하는 대규모 시위에 발포를 명령해 공식 수치로만 무려 1000명 이상[9]을 학살, 천안문 학살 이래 최악의 비전시 학살을 저지른 빼도 박도 못하는 독재자로 전락했다. 결국 하시나는 시위 본격화로부터 한 달도 채 안 되어 사임을 선언하고 인도로 도피했고, 아버지의 동상과 기념관까지 분노한 시위대에 의해 파괴되었다. 사실상 김대중이 집권 말미에 전두환이 된 격이다.
- 시몬 볼리바르 (그란 콜롬비아)
남아메리카 독립운동의 영웅으로 '남미의 조지 워싱턴'이란 별명까지 얻었다. 하지만 독립 뒤 종신 대통령으로 독재를 펼치다가 혼란한 정계를 제어하는데 실패해 쓸쓸하게 은퇴했다. 다만 시몬 볼리바르는 독재자였음에도 부정부패나 정적들에 대한 정치적인 보복을 삼갔으며, 당대 남아메리카의 지도자들과는 달리 인종 차별에도 반대했다. 당대 그란 콜롬비아는 남아메리카의 강력한 통일국가 형성을 바라지 않던 미국과 유럽 열강들의 공작으로 인해 내분에 시달리던 상황이었으며, 시몬 볼리바르는 자신만이 그러한 내분을 제어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고 믿었고, 실제로 연방이 그의 사후 콜롬비아·에콰도르·파나마·베네수엘라 등으로 사분오열된 것을 보면 어느 정도 사실이기도 했다. 때문에 오늘날 남미 각국에서 볼리바르의 이름은 남아메리카 통합을 꿈꿨던 선구자로서 존경받으며, 볼리비아의 국명에도 남아 있다.
- 수카르노 (인도네시아)
인도네시아의 독립영웅이었으나 독립 뒤 내부 혼란을 수습한다는 명목으로 '교도 민주주의'를 주장하며, 종신 독재를 펼쳤다. 다만 수카르노를 몰아내고 집권한 후대 지도자 수하르토의 악명이 워낙 커서 상대적으로 묻힌 감이 있다.
- 수하르토 (인도네시아)
인도네시아 독립전쟁에서 수카르노 휘하에서 큰 전공을 세워 인도네시아 독립에도 공헌한 독립영웅이었지만 쿠데타를 일으켜 수카르노를 사실상 몰아내고 집권 과정에서 반년도 안 되어 50~120만 명을 학살한 데다가 집권 후에도 막 독립한 동티모르를 침공해 10~20만 명 가까이 학살한 반공권 최악의 학살자로 전락했다.
- 쑤파누웡 (라오스)
왕가의 핏줄임에도 공산주의를 받아들여 라오스의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국 체제를 수립했지만 초대 주석에 오르고 나서 정적에 대한 탄압 등에 행보를 보여 이에 대해 비판을 받는다. 다만 크메르 민족주의에 입각한 새로운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하겠다는 명목으로 옆 나라 베트남을 침공하고, 불명확한 명분을 내세워 수많은 사람들을 학살한 크메르 루주의 폴 포트와는 다르게 제 발로 사퇴한 면이 있어서 그런지 상대적으로 비판은 적게 받는 편이다.
7. ㅇ
- 알렉산드르 루카센코 (벨라루스)
소련 붕괴 후 혼란기를 수습하고, 경제개혁기간에 망가진 복지정책을 다시 부활시켰으며, 범죄를 척결하고, 러시아어를 금지하려는 극단적인 민족주의에게서 지켜냈지만, 어느새 폭압적인 통치와 각종 부정선거로 약 30년간 독재를 펼친 독재자가 되어 있었다. 심지어 벨라루스를 러시아에 합병시키려는 정황까지 나올 정도다.
- 아메드 세쿠 투레 (기니)
기니의 독립운동을 주도하고 "노예로서 부유하게 살아가는 것보다 자유민으로서 빈곤하게 사는 것이 낫다."라는 말을 남기며 기니를 프랑스령 서아프리카 국가 중 최초의 독립국가로 만든 독립운동가였으나, 집권 후에는 자국민 5만 명을 학살한 폭압정치는 기본이고 프랑스가 독립에 대한 보복 차원으로 파괴한 인프라를 되살린답시고 실시한 사회주의 경제 정책의 실패로 경제까지 악화되면서 악명 높은 독재자가 되었다.
- 안와르 사다트 (이집트)
가말 압델 나세르와 압델 하킴 아메르 등의 동지들과 자유장교단 쿠데타에 참여하여 부패한 이집트의 파루크 왕정을 끝내고 가말 압델 나세르가 주도하는 개혁정책을 이끄는 주요 정치인으로서 활약하였다. 가말 압델 나세르의 사후에 이집트 대통령에 취임해서는 제4차 중동전쟁에서 강국이스라엘을 위기로 몰아넣고 이후 이스라엘과 평화협정을 체결하는 등 업적들을 남겼으나, 여전히 강력한 군부독재체제를 유지하여 반대파를 처형하는 등 많은 철권통치를 휘둘렀다.
- 안토니우 드 올리베이라 살라자르 (포르투갈)
경제학자 출신으로, 포르투갈을 대공황에서 구해낸 공로가 있지만 타고난 정치, 경제적 감각과 대중적 인기를 등에 업고서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군인들마저 무력화시키고 종신 독재를 펼쳤다. 동시대 프란시스코 프랑코의 폭정에 시달렸던 스페인의 참혹했던 실상에 비하면야 정치, 경제, 외교 모든 면에서 훨씬 안정적이긴 했지만, 국민 문맹 정책·미개발 정책 등에서 드러나듯 국가발전에 대한 의지보다 개인의 정권 유지를 우선시했다는 점에서 결코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기는 힘든 독재자이다. 그의 독재의 영향으로 포르투갈은 1990년대에야 겨우 선진국에 진입했는데도 이렇다 할 진흥 없이 대한민국[10]은커녕 구소련권 국가들에게도 1인당 GDP를 추월당하며 30여 년이라는 장구한 세월 동안 '선진국의 최소'에만 머무르는 나라로 전락했다.
- 압둘 라작 (말레이시아)
한때는 말레이시아를 영국으로부터 독립시키기 위하여 투쟁하였으나, 권좌에 오른 뒤에는 인종차별 정책을 일삼고 반대파를 탄압한 독재자가 되었다. 그리고 이 인간은 스스로의 치적을 과장하여 우상화를 처음으로 주도한 장본인이다.
- 알리 압둘라 살레 (예멘)
남예멘과 북예멘으로 분단돼 있던 자국을 하나의 예멘으로 통일시켰으나, 통일 이후 타락하여 본격적으로 독재자가 되었다. 게다가 통일 이전에도 혼란스럽던 나라는 통일 이후에도 여전히 혼란스러웠고, 결과적으로 이 인간의 독재로 인하여 현재 예멘은 서아시아에서도 아프가니스탄급의 헬게이트+최빈국으로 더 추락한 상태이다. 그 뒤 아랍의 봄 및 예멘 민주화 운동으로 완전히 물러났지만, 물러난 이후에도 뻑하면 다시 독재자가 되려는 수상한 행동을 하는 것으로 의심을 받았고, 이후 자국에서 줄타기를 하다가 후티 반군에 의해 살해되면서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 앙리 크리스토프 (아이티)
스페인 제국의 식민 지배에 대항하여 독립전쟁을 일으키며 아이티를 독립으로 이끈 사람이며, 재위 초반엔 남 아이티 공화국보다 강력하고, 지지받는 나름 좋다고 할수 있는 국왕이였지만 각종 정책의 실패, 권력에 맞들린 앙리 1세, 탈출하는 국민들 및 정부의 부패가 더욱 심해져서 날날이 두 국가의 국력차이는 심해졌고, 결국 왕국 선포가 10년이 지나고 조금 되던날 국왕은 자살하였다. 그 이후 국왕이 살던 궁은 20년 넘게 버려지다가 1850년대 대지진으로 붕괴된 이후 아무도 재건축을 하지 않았다. 앙리 1세가 민심을 얼마나 버렸는지 알려주는 부분이다.
- 에밀리오 아기날도 (필리핀)
스페인 제국의 식민 지배에 저항하여 필리핀 제1공화국을 수립한 초대 대통령이었지만, 카티푸난 등의 반대파들을 폭력적으로 탄압하고 처형한[11] 행적이 있어서 비판을 받는다.
- 엔베르 호자 (알바니아)
제2차 세계 대전 때 알바니아를 점령한 나치 독일군에 맞서 싸운 공산 게릴라의 지도자였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뒤 권력을 잡으면서 극단적인 쇄국과 종교 탄압 정책, 반대파에 대한 잔혹한 탄압과 우상화로 문자 그대로 유럽의 김일성으로 전락했다. 다만, 당시 알바니아는 통치 체제만 북한급으로 막장이었지 국가의 전반적인 경제 상황이나 인프라는 북한과 비교하기 미안할 정도로 안정적이고 우수했다. 그가 유럽의 김일성으로 평가받는 것은 극단적인 독재 체제를 수립하고 고립주의와 무신론 국가를 천명하여 국제적인 비판 대상이 된 것 때문이라고 보는 것에 가깝다.
- 오르반 빅토르 (헝가리)
민주화 운동가로서 명성을 얻었으나 현재는 권위주의적 통치를 펼치며 사실상의 독재자로 전락하였다. 타 독재국가에 비해 민주주의 지수와 세계의 자유, 언론자유지수가 상당히 높은 편이라 독재자가 아니라는 시선도 있지만 그가 장기집권하면서 헝가리의 자유가 후퇴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 오마르 알리 사이푸딘 3세 (브루나이)
브루나이인들에게 있어 사이푸딘은 한마디로 국민적 영웅이자 브루나이의 국부이다. 탁월한 리더십을 발휘하였다는 점은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되는데, 생전 브루나이의 독립을 위해 헌신했으며, 말라야로의 합방을 권유하는 주변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이를 끝까지 거부하고 조국의 자주적 독립을 이룩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석유를 통해 어마어마한 돈을 벌어들였고, 그 돈으로 인민들을 먹여살리기 위해 온 몸을 다했다. 인민들에게 다양한 혜택을 부여하고 복지에 큰 신경을 썼으며, 오늘날 브루나이가 세계적인 부국이 되는데 큰 기여를 했다. 뿐만 아니라 적들의 반란에도 어김없이 즉각 대처하는 등 그의 뛰어난 리더십을 발휘했다. 하지만 1962년 아자하리의 난을 진압한 이후로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했으며, 즉각 의회를 해산하고 반대파들을 무자비하게 숙청했다. 인민들에게 복지혜택을 제공하는 대신 표현의 자유를 철저하게 탄압했으며, 만에 하나 정부에 반대하기라도 하면 그 사람은 즉각 코렁탕 원샷이었다. 석유를 통한 막대한 부의 이면에는 그가 쌓은 치적들이 문제였는데, 인민들을 먹여살리는 대신 스스로를 신격화했다. 그를 향한 인민들의 충성과 찬양은 사실상 인민의 의무였으며, 이 때문에 윗동네 못지않은 살벌한 분위기를 깔아놓았다. 오마르 알리 사이푸딘 3세 모스크를 크게 짓는 선이 아니라 내부를 아주 순금으로 치장하는 등 유례없는 사치를 벌였으면서도, 두바이처럼 현대화를 위한 개발에는 관심조차 없어서, 이에 대한 비판은 존재할 수밖에 없다. 옆동네처럼 인종차별 정책을 강행했는데, 이는 악명높은 옆동네의 부미푸트라 정책보다 한술 더 떠서 종종 문제가 된다. 말레이·이슬람사상을 보존하는 전제로 중국인과 같은 소수민족에 대한 탄압을 대대적으로 가했으며, 현재 이들은 국적조차 받을 수 없으며 차이나타운도 금지되어 있다. 기독교와 같은 이른바 적성종교에 대한 탄압도 큰 논란거리인데, 크리스마스를 금지시키고 툭하면 교회를 폐쇄시키는 정책은 각계의 큰 비판을 받고 있다. 종교법인 샤리아가 도를 넘어서 문제인데, 저게 신앙심을 지키고 범죄척결에나 사용되면 모를까, 개개인의 사생활까지 탄압해 지금까지도 문제가 되고 있다.
- 올리버 크롬웰 (영국)
청교도 혁명의 주인공. 중상층에서 찰스 1세를 폐위해 민중들의 환호를 받았지만, 청교도 교리에 입각한 지나친 금욕주의적 생활을 강요하는 독재자였으며 사후 다시 왕정복고가 되는 원인을 제공하였다. 그의 시신은 이후 왕에 즉위한 찰스 2세가 무덤을 파해쳐 부관참시 해버렸다. 그래도 여전히 영국 공화파의 상징이며 국회의사당 앞에 동상이 있다거나 그의 이름을 딴 병기가 있는등 국가적으로 악당화되지는 않았다.
- 요웨리 무세베니 (우간다)
우간다민족해방전선(UNLF)에 참가하여 이디 아민을 몰아내고 생지옥이던 우간다를 구하는데 큰 공을 세운 영웅. 그러나 1986년부터 이은 장기집권과 부정선거, 동성애자를 사형에 처하는 세계 최악의 반동성애법 등으로 그 역시 폭압적 독재자의 길을 걷게 된다. 집권 기간은 이디 아민과도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긴 데다가 온갖 비리와 실정도 많이 저질렀지만 그가 몰아낸 이디 아민의 학정이 세계구급으로 악명을 펼쳤기 때문에 인지도가 상대적으로 떨어진다.
- 요시프 브로즈 티토 (유고슬라비아)
나치의 침공으로부터 게릴라전을 통해 조국을 구한 영웅이었으나, 집권 후 독재자가 되었다.
-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정치 진영만 좌파로 다를 뿐 위의 푸틴이나 박정희와 유사한 사례이다.[12] 집권 방식은 아돌프 히틀러와 유사하다. 육군 중령이었던 우고 차베스는 베네수엘라의 빈부격차와 군 내 부패 문제를 비판하며 내부 정화 운동을 펼쳤던 인물이었다. 1989년 경제위기와 IMF 구제금융 과정에서의 극심한 물가 상승으로 인해 발생한 폭동을 유혈 진압하여 수천명이 사망하는 사태가 벌어졌고(이른바 '카라카소') 이로 인하여 차베스는 쿠데타를 결심하게 된다. 결국 1992년 우고 차베스는 페레스 대통령과 측근들의 부패를 명분으로 쿠데타를 시도했으나 실패하게 된다. 다만 당시 투항하는 조건으로 방송연설을 할 기회를 얻어 자신의 동료들을 처벌하지 말라며 “지금은 목표를 이루지 못했지만 언젠가는 이룰 것이다. 모든 책임은 내가 지겠다"라는 내용의 연설을 해 베네수엘라 국민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으며, 이후 2년간 감옥에서 복역하다 사면된 후 연설 당시 국민들에게 남긴 깊은 인상을 바탕으로 그 1998년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되어 정권을 쥐게 된다. 그러나 취임 후 국민을 통합시키지 못하고 성급한 개혁정책을 펼치며 지지층이 이탈하기 시작하면서 2002년 군사 쿠데타, 2004년 국민소환까지 당하는 등 집권 초반기 혼란이 있었고, 이후 좌파 포퓰리즘 정치를 통해 정권을 연장하게 된다. 2009년에 이르러서는 대통령 연임 제한까지 폐지시키며 본격적인 독재에 시동을 걸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발병한 암으로 인해 2013년 사망하고 만다. 차베스는 베네수엘라의 개혁을 외치며 15년이나 집권했지만 빈민들에 대한 지원을 하였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베네수엘라 경제를 전혀 강화하지 못했다. 오히려 집권기 고유가로 인하여 쌓일 수 있던 부를 포퓰리즘으로 낭비하며 오히려 사망 후 저유가가 찾아오자 끔찍한 경제 위기가 닥쳐오는 원인을 제공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가 남긴 분열이라는 정치적 유산은 사후에 문제를 크게 일으켜 2019년 베네수엘라 정치 위기를 촉발한 원인이 되었다.
- 유제프 피우수트스키 (폴란드)
폴란드의 옛 귀족 출신 독립영웅. 러시아 제국령 리투아니아 지역에서 태어났지만,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폴란드 독립군을 이끌고 군공을 세웠음은 물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독일 제국, 연합국을 뛰어다니며 정치적 수완을 발휘하여 폴란드 제2공화국의 독립을 이끌었다. 또한 우크라이나와 벨로루시의 무주지를 두고 벌어진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에서도 조국을 승전으로 이끌며 소련의 팽창을 저지하였다. 그러나 이후 1935년 사망할 때까지 종신 독재를 하였고, 집권기 동안 나치 독일의 위협을 과소평가하고 폴란드군의 기계화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며 정적들을 탄압하는 등 여러 실책들을 저지르기도 했다. 그의 사후 불과 4년 만에 폴란드 제2공화국이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하였기 때문에 그에 대한 평가도 다소 엇갈리는데, 구체적인 내용은 문서 참고.
- 율리우스 카이사르 (고대 로마)
모든 독재자들의 롤모델이자 원조. 독재자라는 단어부터가 로마의 독재관에서 유래하였으며, 사실상 이 방면에서 가장 유명한 사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로마 공화정의 정치가이자 전쟁 영웅이었으나, 민중파의 상징적인 위치에 오르면서 원로원과의 갈등이 격화되었고, 오랜 정복 활동으로 군권이 집중되면서 공화정에도 위협적인 인물이 되었다. 결국 공화주의자들의 암살로 생을 마감한다. 다만 카이사르는 생전에 적극적으로 공화정을 부정하거나 전복시키려는 움직임을 보인 적은 없으며, 합법적인 직책을 바탕으로 국정을 이끌었다. 그리고 카이사르를 암살한 인물들은 공화정이라는 체제보다는 귀족 공화제의 기득권만을 지키려 했다는 평가도 받는다. 때문에 비슷한 인물들과 마찬가지로 당대에나 오늘날에나 평가가 엇갈린다. 자세한 것은 율리우스 카이사르 문서 참고.
- 이사이아스 아페웨르키 (에리트레아)
에티오피아의 멩기스투 하일레 마리암 공산정권의 학정에 저항하여 에리트레아의 독립운동을 주도하던 데다가 군인들의 처우와 기강 확립에도 손을 놓지 않은[13] 독립영웅이었으나 대통령 자리에 오른 뒤 자신이 해방한 국민들에게 멩기스투 시절은 물론 북한에 비견되는 학정을 펼치며 아프리카의 김일성으로 불리고, 30년 가까이 집권하며 에리트레아군의 군인 대우는 조선인민군 못지않게 열악하게 만들어버리는 등 이전의 모든 업적을 다 물거품으로 만들어버린다.
- 이승만 (대한민국)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을 맡았으며 특히 외교를 통한 독립운동을 주장하는 등 저명한 독립운동가였기에 20세기 대한민국의 보수 진영에서 김구와 함께 독립운동의 양대 거두였고 토지개혁, 한미동맹을 성사시키는 등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그러나 대통령이 된 후 독선에 빠져 발췌 개헌, 사사오입 개헌을 통해 세 번 대통령에 올랐으며 결론적으로 3.15 부정선거로 인해 4.19 혁명이 촉발되어 하야했다.
8. ㅈ, ㅋ, ㅌ
- 장제스 (중화민국)
군벌 시대로 분열된 중국을 북벌을 감행하여 통일을 했다. 연합국 수뇌부의 일원으로, 일본 제국의 침략을 물리치고 제2차 세계 대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세계와 중국을 일본 제국의 손아귀에서 구했지만, 중화민국 통치시절 내내 독재정치를 펼쳤고, 측근 인사들의 부정부패 척결에 소홀하게 임했다. 그 때문에 중국공산당에 일격을 받아 섬으로 쫓겨나고 만다. 파란만장한 근현대 중국사의 한 축을 담당한 만큼 평가가 좀 복잡한데, 자세한 것은 장제스/평가 문서 참조.
- 콰메 은크루마 (가나)
가나의 독립 영웅이자 아프리카 해방 운동의 선도자였으나, 한편으로 자신의 카리스마를 바탕으로 일당 독재와 무소불위의 종신 집권 체제를 구축했다. 끝내 1966년 방중 중에 쿠데타로 실각했다.
테오도로 오비앙 응게마 음바소고(적도 기니)
현 시점에서는 45년간 장기집권한 것은 물론 적도 기니를 자원의 저주의 숨겨진 끝판왕으로 만든 부패한 독재자였지만, 집권 극초반에는 인류 역사상 최악의 독재자 프란시스코 마시아스 응게마[14]를 축출, 처형시키며 적도 기니를 구해낸 영웅이었다. 다만 오비앙은 원래 삼촌인 응게마 정권에서 정치범수용소 소장을 역임하며 반대파 탄압에 앞장섰던 인물이기 때문에[15] 취소선 처리.
- 토도르 지프코프(불가리아)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모국을 점령한 나치 독일군에 맞서 게릴라 전을 주도하던 공산당 게릴라의 지휘관이었으나 1945년 나치가 패망하고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뒤 불가리아에 공산당 독재 정권이 수립되자 제1대 주석인 디미트로프와 제2대 주석 체르벤코프의 뒤를 이어 독재자가 되었다.
9. ㅍ
- 펠릭스 우푸에부아니 (코트디부아르)
코트디부아르 독립에 기여한 영웅이지만 무려 33년에 이르는 장기 집권으로 결국 독재자로 변모했다. 중반기까지 그럭저럭 아프리카 나라에서는 제법 안정적으로 나라를 잘 다스렸으나[16] 결국 나중에는 말아먹었고 그럼에도 고향인 야무스크로에 대형 건물을 무리하게 지으면서 돈낭비를 해버리다가 천수를 누리고 갔다.
- 포르피리오 디아스 (멕시코)
프랑스 원정군을 물리치고 멕시코 제2제정을 무너뜨리는 데 공헌한 성공한 군인이었다. 대통령에 취임한 뒤 독재자로 바뀌었다. 현지에서 그가 멕시코의 인프라를 구축해서 유능한 인물로는 평가받지만 좋은 사람이라고는 국민들이 생각하지 않는다. 끝내 멕시코 혁명으로 쫓겨났다.
- 폴 포트 (캄보디아)
놀랍게도 직권 직후 한정으로 부패한 론 놀 정부를 몰아내고 캄보디아 내전을 종식시킨 영웅이었다. 물론 인류 역사에 영원히 남을 대악행 중의 대악행 킬링필드로 전면 무효화되었지만.
- 프란시스코 프랑코 (스페인)
리프 전쟁 당시 스페인 군 최연소 소령 등을 먹고 결혼식에서는 국왕이 주례를 서는 등 전설적인 전쟁영웅이었다. 그러나 스페인 내전 뒤로는 툭하면 정적들을 탄압한 독재자였다. 심지어 아돌프 히틀러까지는 몰라도 원조 파시스트인 베니토 무솔리니보다 그 죄질이 더 사악하다고 할 지경이다.
- 프랑수아 뒤발리에 (아이티)
해당 부류에서 가장 극단적인 사례로 꼽힌다. 집권 이전에는 의사로써 열대성 피부병의 확진을 막기 위해 온 힘을 쓰고 심지어 재산 축재마저 완전히 포기하며 환자들을 돌보기 위해 인생을 바친 의사로 파파독(Papa Doc)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아이티 내에서는 사실상 위인으로 평가받았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1957년 대통령 선거에서 부정 없이 당선된 뒤부터는 김일성이나 아돌프 히틀러에 비견될 정도로, 가히 중앙아메리카 역사상 최악의 독재자로 전락하였는데, 일단 취임 직후부터 멋대로 사람들을 구금하는 등 권위주의적인 통치를 시작하더니 1958년 쿠데타 시도가 적발되자 완전히 독재자로 흑화하여 폭정을 시작한다. 1961년에는 임기가 2년이나 남았는데도 헌법의 재선 금지 조항을 어기고서는 단일 후보로 출마하여 기권 0표에 득표율 100%를 달성하였으며, 그의 친위대인 통통 마쿠트는 무려 나치 독일의 슈츠슈타펠이나 게슈타포에 비견되거나, 그 이상의 악행을 저지른 인류 역사상 최악의 친위대 중 하나로 불린다. 1964년에는 대통령직 종신화 찬반투표를 하였는데 역시 찬성률 99.9%에 반대한 약 3000명은 통통 마쿠트에게 처형당하거나 고문당했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게다가 아이티 국민들에게 출국 금지 지시까지 내리며 멋대로 국가를 탈출한 국민들에게 북한의 정치범수용소에 비견되는 수용소에다 가둬놓고 온갖 고문을 가했으며, 하다하다 중앙아프리카 제국의 보카사 1세마냥 어린아이를 직접 살해하는 악행까지 저질렀다. 의사 시절에는 하지도 않던 부정부패를 극심하게 저질러 아이티를 카리브해 최악의 빈곤국가로 전락시켰으며, 뒤발리에를 신으로 우상화시키는 우상화까지 자행되었다. 심지어 프랑수아 뒤발리에 본인은 이에 대한 그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고 죽었으며 아들인 장 클로드 뒤발리에에게 세습까지 성공했다. 이 뒤발리에 가문 독재체제는 30년 가까이 이어지게 된다. 특히나 프랑수아 뒤발리에의 사례는 그 국가를 대표하는 위인 중 한 명에서 인류 역사상 최악의 독재자 중 한 명으로, 장기려 박사 같은 사람이 김정은 급의 독재자로 전락한 수준이라서 독재자가 된 영웅의 극단적 사례로 반드시 언급된다.
- 피델 카스트로 (쿠바)
독재자 풀헨시오 바티스타에게 맞써 싸웠으나, 권력을 잡고 독재자에 올랐다. 다만 쿠바 국민들의 지지는 높은 편. 최장 집권기록을 가진 독재자지만 스스로 자리에서 사임하고, 친동생 라울 카스트로에게 넘긴 정권도 결국 평화롭게 이양했다.
10. ㅎ
- 호스니 무바라크 (이집트)
본래는 제4차 중동전쟁에서 이집트 공군을 지휘하여 이스라엘을 위기로 몰아넣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전쟁영웅이었고, 이러한 공로를 바탕으로 안와르 사다트에 의해 부통령으로 발탁되어 안와르 사다트의 암살 이후 대통령직에 올랐으나, 끝내 독재자가 되어 30년 가까이 집권하다가 이집트 혁명으로 권력을 잃고 퇴진했다.
- 호찌민 (베트남)
한참 베트남 전쟁이 발발하던 시절과 주석직에 집권한 후에 농민, 지주들, 가톨릭 교도들 등 반대파들, 주로 남베트남인을 앞뒤 가리지 않고 학살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북베트남의 국가원수이자 베트남 공산당의 당수로서 책임을 면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당시의 호찌민은 고령의 나이로 인해서 베트남 공산당의 상징적인 지도자역할과 외교부문에서 제한적인 역할을 했을 뿐이었고 실무는 레주언,보응우옌잡 등이 맡고 있기는 했다. 그래서 다소 억울한 부분이 없는 편은 아니다. 자세한 것은 항목 참조. 본인은 평생을 베트남에 헌신한 독립영웅이자 통일의 기초까지 다져냈으며 공산권 지도자들 중에서 손에 꼽을 정도로 훌륭한 인품을 가졌으나 공산권 특유의 개인 숭배까지 시너지를 이루어 유언이 무시당했을 정도이다.
- 훈 센 (캄보디아)
캄보디아 내전에서 나라를 구한 영웅이었으나 38년간의 독재와 장남 훈 마넷으로의 권력 세습, 야당에 대한 탄압 발언 등으로 비판을 받는다. 물론 그 이전에 있던 독재자가 인류 역사상 최악의 독재자 중 한 명인 폴 포트이기에 상대적으로 비판 여론은 적은 편. 사실 집권까지의 행적만 놓고 보면 '몰아낸 지도자가 폴 포트'였다는 것을 빼고 보면 매국노의 극한이라 봐도 할 말이 없는 수준이라 아주 영웅이라고 보기에도 애매하다. 그럼에도 폴 포트를 몰아낸 것이 이 모든 약점을 상쇄할 정도이니, 폴 포트가 얼마나 나라를 초토화시켰는지 간접적으로나마 알 수 있는 부분이다.
[1] 공화주의와 민주주의를 원했던 프랑스 혁명의 정신에 비추어 보면 제국과 황제를 선포한 나폴레옹은 결코 혁명정신에 어울리는 인물은 아니었다. 그러나 혁명의 이면에는 국민주의, 즉 프랑스가 더 이상 귀족들의 국가가 아니라 시민들의 국가라는 의식이 있었고, 나폴레옹과 그의 군대는 그러한 국민국가주의의 상징적인 존재였다. 게다가 나폴레옹은 혁명을 없던 일로 치부하고자 했던 전 유럽의 반동주의에 맞서 10년 동안 버텨냈고, 그 와중에 근대적인 성문법과 국민주의 체계를 정비했다. 나폴레옹 개인은 혁명에 미온적이었을지 모르지만, 당대 프랑스에서 전 유럽의 도전에 맞서 혁명의 불꽃을 지켜낼 만한 군사적 재능을 갖고 있었던 사람이 그리 흔치는 않았을 것이다.[2] 심지어 1988년 기준 1인당 GDP가 40달러 미만이었다. 그나마 이건 실질환율로 환산해서 저 꼴로 나왔을 가능성이 더 높긴 하다.[3] 튀르키예 헌법상 대통령은 국내를 대표하고 총리가 의회를 담당하게 되어 있지만, 아타튀르크 시절에는 대통령이 총리에게 상당한 영향을 행사할 수 있었다. 그의 임기 동안 총리는 아타튀르크 사후 터키의 2대 대통령이 되는 이스멧 이뇌뉘와 알리 페트히 오키야르(Ali Fethi Okyar), 마찬가지로 훗날 튀르키예의 5대 대통령이 되는 젤랄 바야르(Celal Bayar)였다. 무엇보다도 1945년, 이뇌뉘 대통령이 복수정당제를 시행하기 전까지 튀르키예의 정치는 공화인민당(Cumhuriyet Halk Partisi) 일당체제였다.[4] 무르시는 무슬림 형제단 소속이었다.[5] 참고로 정부가 폰지사기에 가담한 이유도 가관인 게 경제성장을 하려고 했더니 나라에 경제 전문가가 없어서 사기꾼에게 넘어간 거였다고 한다.(...) 사실 공산정권 시절 후대를 대비해서 키운 경제 전문가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베리샤가 공산잔재 청산이랍시고 죄다 쫓아냈기에 그나마 있던 전문가도 사라졌다.[6] 참고로 전술한 총선 대승도 부정선거였다.[7] 그나마 공산당으로부터 알바니아를 해방시킨 민주화영웅이라는 업적도 컸기에 2005년부터 2013년까지 총리 2연임에 성공하며 어느 정도 체면치레는 했다.[8] 오직 하시나와 여동생만이 쿠데타 당시 외국에 유학을 가 있어서 화를 면했다.[9] 심지어 현지에서는 2000명에서 5000명이 죽었다는 주장도 나왔다.[10] 90~2000년대에는 포르투갈과 1인당 GDP가 동급이었지만, 오늘날에는 1인당 GDP가 스페인, 일본과 동급이거나 그 이상인 메이저급 선진국으로 자리잡은 것과 대조적이다.[11] 이로 인한 대표적인 희생자가 안드레스 보니파시오.[12] 다만, 결과적으로 국가를 개발시켜 자국 현대사에서 가장 뛰어난 정치가 중 한 명으로 꼽는 시각도 있는 박정희, 우크라이나 침공 이전 푸틴과 달리 차베스는 베네수엘라 국민들과 극좌 세력을 제외하면 현재 극빈국이자 북한을 능가하는 파탄국가가 되어버린 베네수엘라의 주요 책임자로써 엄청난 혹평과 비판을 받는다.[13] 어느 정도였냐고 하면 에티오피아군 포로들을 학대하기는커녕 오히려 직업과 기술까지 가르쳐줬을 정도였다고 한다.[14] 그의 폭정이 얼마나 가혹했는지 전란 하나 없이 단 10년 만에 적도 기니 인구의 절반(!!!)이 없어질 정도였다.[15] 쿠데타 사유도 적도 기니의 민주화가 아닌 자신의 막내동생을 처형한 삼촌에 대한 복수였다.[16] 어느 정도였냐면 1인당 GDP와 성장 수준도 한국 대비 크게 뒤쳐지지 않아 전성기에는 코트디부아르가 선진국이 되는 게 아니냐는 말까지 나왔을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