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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지옹 도뇌르 훈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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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f><colcolor=#002395> 레지옹 도뇌르 훈장
Ordre National de la Légion d’honneur
National Order of the Legion of Honour
파일:Commandeur--légion_d'honneur.png
코망되르(3급) 훈장
Honneur et patrie
(명예와 조국)
제정일 1805년 5월 19일
국가
[[프랑스|]][[틀:국기|]][[틀:국기|]]
종류 무공 및 공민훈장[1]
수훈 대상 프랑스 군인, 민간인 및 외국인
수여 횟수[2] 그랑크루아(1급): 67회
그랑도피시에(2급): 314회
코망되르(3급): 3,009회
오피시에(4급): 17,032회
슈발리에(5급): 74,834회
상위 등급 없음
하위 등급 해방 훈장 (1946년 폐지)

1. 개요2. 역사3. 등급4. 수훈자
4.1. 그랑크루아4.2. 그랑도피시에4.3. 코망되르4.4. 오피시에4.5. 슈발리에
5. 기타6.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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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레지옹 도뇌르 훈장(Ordre National de la Légion d’honneur)은 프랑스훈장 가운데 최고위의 훈장으로, '명예 군단 훈장' 등으로 의역되기도 한다. 그랑크루아, 그랑도피시에, 코망되르, 오피시에, 슈발리에의 5개 등급으로 나뉜다.

1802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 의해 제정된 이래 뛰어난 무공을 세운 군인이나 프랑스의 정치, 경제, 사회, 학문 또는 문화예술의 각 분야에서 뚜렷한 공로가 인정되는 민간인에게 수여되며, 프랑스인뿐만 아니라 외국인에게도 수여된다. 훈장은 대개 대통령이 서훈하며, 이외에 다른 정부고관에 의해서도 서훈될 수 있다.

2. 역사

1799년 쿠데타로 프랑스 제1공화국의 통령(consul)에 올랐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황제로 등극하기 전인 1802년프랑스 공화국군을 대상으로 사기를 증진하고 충성심을 고양시키려는 목적으로 제정했다. 당시 프랑스는 혁명의 정치적 혼란과 불안정한 정국이 나폴레옹의 이름 아래 정리되고 있었으며, 그는 통합된 공화국의 군대가 전근대적인 신분이나 혈통적 요소가 아니라 개인의 능력, 성취나 국가에 대한 헌신, 공동체에 대한 봉사에 따라 평가, 보상받을 것이라는 점을 시민들에게 강조하고 싶어했다. 레지옹 도뇌르는 그러한 명예를 위한 제도의 일환으로서 고안되었고, 곧 그의 의도대로 프랑스의 애국의 상징이 되었다.

레지옹 도뇌르(Légion d’honneur)는 풀이하면 '명예 군단(Legion of Honor)'이라는 뜻으로, '레지옹'은 고대 로마군단을 가리키는 레기온(Legion)에서 유래한 말이다. 이는 본래 이 훈장이 공적을 세운 군인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기 때문에 붙은 이름으로, 후에 수훈 대상이 민간으로까지 확대된 것이다.

당시에는 무공 훈장이었으므로 초기에 이 훈장을 받은 사람 상당수는 남성 군인이었다. 퇴역하면 끝인 당시의 군인들 중 수훈자를 명목상의 부대에 편입함으로서 연금을 받게 하는 노후 대책으로서의 목적도 있었다고 한다. 훈장의 이름대로 '명예 군단' 소속 장병으로 등재하는데, 서류상으로만 존재하는 부대이니 복무하지는 않으나 군인이니 월급을 지급한다는 개념이다. 이것이 공화국군에 대한 보훈 제도의 시작이 되었다.

다만 그는 "남자들은 이런 거에 목맨다. 이제 이 장난감으로 사람들을 현혹시킬수 있다."며 반쯤 시니컬한 대답을 하기도 했는데, 프로파간다적 목적도 있었다. 미국의 명예 훈장(Medal of Honor) 역시 레지옹 도뇌르의 영향을 받아 남북 전쟁 직전 애국주의를 고취할 목적으로 제정되었다. 다만, 미국의 명예 훈장은 최고위 훈장이라는 점에서는 같으나 오늘날에도 무공 훈장으로만 남아 있고, 미군에게만 수여된다는 점이 다르다.

3. 등급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700px-L%C3%A9giond'HonneurGrades.png
파일:레지옹 도뇌르 슈발리에 약장.svg 파일:레지옹 도뇌르 오피시에 약장.svg 파일:레지옹 도뇌르 코망되르 약장.svg 파일:레지옹 도뇌르 그랑도피시에 약장.svg 파일:레지옹 도뇌르 그랑크루아 약장.svg
좌측부터 슈발리에, 오피시에, 코망되르, 그랑도피시에, 그랑크루아
  • 1등 훈장 그랑크루아(Légion d'Honneur Grand-Croix)
    가장 높은 등급의 훈장으로, '대십자장(Grand Cross)'으로 번역된다. 오른쪽 어깨에서 왼쪽 허리로 내려오는 대수(大綬, 크고 긴 훈장 끈)를 착용하고, 왼쪽 가슴에 부장(副章, 수 없이 정장과 함께 다는 플레이크)을 패용한다. 그랑크루아는 프랑스 대통령이 새로 취임하면 받는 훈장이기도 하다.
  • 2등 훈장 그랑도피시에(Légion d'Honneur Grand Officier)
    두 번째로 높은 등급의 훈장으로, '대장군장(Grand Officer)'으로 번역된다. 왼쪽 가슴에 소수(小綬, 가장 작은 크기의 훈장 끈)로 패용하고, 오른쪽 가슴 아래에 부장을 패용한다.
  • 3등 훈장 코망되르(Légion d'Honneur Commandeur)
    세 번째로 높은 등급의 훈장으로, '사령관장(Commander)'으로 번역된다. 목에 중수(中綬, 중간 크기의 훈장 끈)로 패용한다.
  • 4등 훈장 오피시에(Légion d'Honneur Officier)
    네 번째로 높은 등급의 훈장으로, '장교장(Officer)'으로 번역된다. 왼쪽 가슴에 소수로 패용하고 그 위에 장미 모양의 코케이드로 치장한다.
  • 5등 훈장 슈발리에(Légion d'Honneur Chevalier)
    마지막 등급의 훈장으로, '기사장(Cavalry)'으로 번역된다. 왼쪽 가슴에 소수로 패용한다.

4. 수훈자

4.1. 그랑크루아

4.2. 그랑도피시에

4.3. 코망되르

4.4. 오피시에

4.5. 슈발리에

5. 기타

  • 각 국의 최고위 훈장들과 마찬가지로 등급 별 정원이 정해져 있어서, 정원을 초과해서 받을 수는 없고 사후에도 추서되는 일이 거의 없다. 수상자가 사망한 후에야 정원이 비기 때문에 그 분야에서 괄목할 업적을 남긴 이들도 생전에 상급 훈장의 정원이 꽉 차서 4등급이나 5등급에 머무른 이들이 의외로 많다.
  • 최고위 훈장이지만 정치적인 이유 혹은 여타 문제로 수훈을 거부한 이들도 있다. 화가 귀스타브 쿠르베, 물리학자 마리 퀴리피에르 퀴리, 작곡가 모리스 라벨문학가 알베르 카뮈, 철학자/문학가 장폴 사르트르, 배우 소피 마르소 등이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 여느 국가 최고위 훈장들처럼 수훈에 부조리가 종종 있다는 비판도 받는다. 특히 최고 등급인 그랑크루아는 대체로 국내외 고위 정치인이나 왕족, 프랑스와 커넥션이 있는 대기업 CEO 등에게 립서비스 식으로 수여하는 경우가 많아 구설수에 오르곤 한다. 프랑스 대통령이 됐다고 공적 안 따지고 무작정 준다는 점은 대한민국무궁화대훈장과 마찬가지로 꾸준히 지적되고 있다. 사실 이는 타 국가 최고 등급 훈장 대부분이 갖고 있는 공통점이다.

6. 관련 문서


[1] 처음에는 무공훈장으로 제정됐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정치, 경제, 사회, 학문, 문화예술의 각 분야의 공로가 인정되는 민간인에게도 수여된다.[2] 2010년 7월 기준이며, 훈장 자체의 역사도 긴 데다 수여 횟수도 방대해서 2024년 현재 기준으로 정확한 수여 횟수를 파악하기 어렵다.[3] 본인이 황제 즉위시 수여한 셀프훈장이다.[4] 수훈 박탈[5] 1922년 슈발리에 수훈, 1925년 오피시에로 승격했다가 1967년 그랑크루아로 2차 승격.[6] 그가 대한항공 회장이었던 시절 A300을 대량 발주하고 성공적으로 운영하며 에어버스파산 문턱에서 살려냈다. 즉 잘못하면 진즉에 망해버렸을 에어버스를 미국 보잉과 더불어 서방제 민항기 시장의 투톱으로 올려놓은 공로로 받은 것이다.[7] 조중훈 회장의 장남이자 전 한진그룹 회장.[8] 아마 이런 점으로 봤을 때 중복 수훈(예시로 5급 2개, 4급 1개 이런 식)은 안 되고 아마 승급 형식으로 이뤄지는 듯 하다.[9] 데샹은 1998년에 우승 선수단으로서 이미 슈발리에를 받은 상태라서 4급인 오피시에로 승급되었다.[10] 하지만 안타깝게도 국내 무공훈장 수여자만 현충원 안장이 가능하다는 이유로 위의 박동하 하사와 함께 현충원 안장을 거부당했다.# 그나마 나중에 박동하 하사는 사후 충무무공훈장을 수여받아 현충원에 안장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