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6-29 02:25:24

텔아비브

תל אביב에서 넘어옴
아시아의 국가별 수도
{{{#!wiki style="margin: -0px -10px -5px;word-break:keep-all"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5px -1px -11px"
동아시아
[[대한민국|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 대한민국
[[일본|
파일:일본 국기.svg
]] 일본
[[중국|
파일:중국 국기.svg
]] 중국
서울특별시 도쿄도 베이징시
[[북한|
파일:북한 국기.svg
]] 북한
[[대만|
파일:대만 국기.svg
]] 대만
[[몽골|
파일:몽골 국기.svg
]] 몽골
평양시 타이베이시 울란바토르
동남아시아
[[인도네시아|
파일:인도네시아 국기.svg
]] 인도네시아
[[태국|
파일:태국 국기.svg
]] 태국
[[필리핀|
파일:필리핀 국기.svg
]] 필리핀
자카르타 방콕 마닐라시
[[말레이시아|
파일:말레이시아 국기.svg
]]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파일:싱가포르 국기.svg
]] 싱가포르
[[베트남|
파일:베트남 국기.svg
]] 베트남
쿠알라룸푸르
푸트라자야
싱가포르 하노이시
[[미얀마|
파일:미얀마 국기.svg
]] 미얀마
[[캄보디아|
파일:캄보디아 국기.svg
]] 캄보디아
[[라오스|
파일:라오스 국기.svg
]] 라오스
네피도 프놈펜 비엔티안
[[브루나이|
파일:브루나이 국기.svg
]] 브루나이
[[동티모르|
파일:동티모르 국기.svg
]] 동티모르
반다르스리브가완 딜리
남아시아
[[인도|
파일:인도 국기.svg
]] 인도
[[아프가니스탄|
파일:아프가니스탄 국기.svg
]] 아프가니스탄
[[방글라데시|
파일:방글라데시 국기.svg
]] 방글라데시
델리 연방 수도구역 카불 다카
[[파키스탄|
파일:파키스탄 국기.svg
]] 파키스탄
[[네팔|
파일:네팔 국기.svg
]] 네팔
[[스리랑카|
파일:스리랑카 국기.svg
]] 스리랑카
이슬라마바드 카트만두 스리자야​와르데네​푸라코테
[[몰디브|
파일:몰디브 국기.svg
]] 몰디브
[[부탄|
파일:부탄 국기.svg
]] 부탄
말레 팀부
서아시아
[[레바논|
파일:레바논 국기.svg
]] 레바논
[[바레인|
파일:바레인 국기.svg
]] 바레인
[[튀르키예|
파일:튀르키예 국기.svg
]] 튀르키예
베이루트 마나마 앙카라
[[이라크|
파일:이라크 국기.svg
]] 이라크
[[사우디아라비아|
파일:사우디아라비아 국기.svg
]] 사우디아라비아
[[요르단|
파일:요르단 국기.svg
]] 요르단
바그다드 리야드 암만
[[아제르바이잔|
파일:아제르바이잔 국기.svg
]] 아제르바이잔
[[카타르|
파일:카타르 국기.svg
]] 카타르
[[예멘|
파일:예멘 국기.svg
]] 예멘
바쿠 도하 사나
[[이스라엘|
파일:이스라엘 국기.svg
]] 이스라엘
[[이란|
파일:이란 국기.svg
]] 이란
[[아르메니아|
파일:아르메니아 국기.svg
]] 아르메니아
예루살렘
정치

텔아비브
경제
테헤란 예레반
[[쿠웨이트|
파일:쿠웨이트 국기.svg
]] 쿠웨이트
[[조지아|
파일:조지아 국기.svg
]] 조지아
[[키프로스|
파일:키프로스 국기.svg
]] 키프로스
쿠웨이트 트빌리시 니코시아
[[오만|
파일:오만 국기.svg
]] 오만
[[시리아|
파일:시리아 국기.svg
]] 시리아
[[아랍에미리트|
파일:아랍에미리트 국기.svg
]] 아랍에미리트
무스카트 다마스쿠스 아부다비
[[팔레스타인|
파일:팔레스타인 국기.svg
]] 팔레스타인
[[압하지야|
파일:압하지야 국기.svg
]] 압하지야
[[남오세티야|
파일:남오세티야 국기.svg
]] 남오세티야
라말라 수후미 츠힌발리
[[북키프로스|
파일:북키프로스 국기.svg
]] 북키프로스
레프코샤
중앙아시아
[[우즈베키스탄|
파일:우즈베키스탄 국기.svg
]]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파일:카자흐스탄 국기.svg
]]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파일:키르기스스탄 국기.svg
]] 키르기스스탄
타슈켄트 아스타나 비슈케크
[[타지키스탄|
파일:타지키스탄 국기.svg
]] 타지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파일:투르크메니스탄 국기.svg
]] 투르크메니스탄
두샨베 아시가바트
아메리카의 수도 | 아프리카의 수도 | 오세아니아의 수도 | 유럽의 수도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word-break:keep-all"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예루살렘 관구 하이파 관구 텔아비브 관구
북부 관구 중부 관구 남부 관구
유대아 사마리아 특구 }}}}}}}}}


[[이스라엘|]][[틀:국기|]][[틀:국기|]] 이스라엘최대도시
{{{#!wiki style="margin: -5px 0; display: inline-table"
<tablebordercolor=#fff,#1f2023>
파일:텔아비브.svg
텔아비브
תֵּל־אָבִיב
Tel Aviv
}}}
파일:텔아비브깃발.png 파일:텔아비브문장.png
<rowcolor=#000> 시기(市旗) 시장(市章)
<colbgcolor=#00bfff><colcolor=#000> 지역
[[이스라엘|]][[틀:국기|]][[틀:국기|]] 텔아비브 관구
건립 1909년 4월 11일
면적 176km2(텔아비브 관구)
인구 약 148만 명(텔아비브 관구)
시장 론 훌다이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 파일:페이스북 아이콘.svg |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 파일:X Corp 아이콘(블랙).svg파일:X Corp 아이콘(화이트).svg | 파일:틱톡 아이콘.svg | 파일:텔레그램 아이콘.svg
파일:야파 2.jpg
옛 야파 항구와 시가지

1. 개요2. 예루살렘과의 연계3. 역사
3.1. 상고대3.2. 고대3.3. 중세3.4. 오스만 제국3.5. 근대3.6. 텔아비브 건설3.7. 현대
4. 관광5. 사진6. 여담7.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지중해 바닷가에 위치한 이스라엘최대도시.[1] 십자군 전쟁기 Jaffa 로 유명한 옛 항구 야파 인근에 20세기 들어 세워진 도시로, 1948년부터 1977년까지 이스라엘의 임시수도였다. 또한 1968 텔아비브 장애인 올림픽이 개최된 도시이다.

2. 예루살렘과의 연계

6일 전쟁에서 승리하여 예루살렘 전역을 점령한 이스라엘 정부는 예루살렘을 재건하는 도시계획에 착수하여 1968년부터 1992년까지 국회의사당정부종합청사대법원공안부경찰청[2] 문화복지부처들, 이스라엘방송공단이스라엘은행을 차례로 이전했으니, 1977년에 이르러 텔아비브와 예루살렘은 중국상하이베이징 또는 브라질상파울루브라질리아, 나이지리아라고스아부자, 이탈리아밀라노로마, 인도뭄바이뉴델리, 파키스탄카라치이슬라마바드처럼 경제중심과 정치중심으로 상호간의 역할을 분담하게 되었다. 그러나 국내외의 정세가 불안하기 때문에 가까운 미래의 총력전에 대비하여 방위기관(국방부와 참모본부, 육해공군청과 국군사령부들), 정보기관 본부(모사드, 신 베트, 아만), 경제산업부처들, 국유기업들과 증권거래소, 대사관과 공사관과 영사관을 비롯한 각종 정부기관들은 여전히 텔 아비브 관구에 있다.

이외 주요 수교국들의 외교공관 역시 텔아비브에 위치한 경우가 많은데, 이는 6일 전쟁 이후 이스라엘이 점령한 구 요르단령 동예루살렘은 국제적으로 여전히 이스라엘 영토로 인정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3] 국제 사회의 주권국가들 가운데 친미, 친이스라엘 성향의 약 50여 개국을 제외한 나머지 대다수는 예루살렘이 이스라엘의 수도임을 인정하지 않고 있으며, 이런 국가들 중 이스라엘의 수교국은 예루살렘 관구에 상주하는 대사급 외교공관들의 철수를 요구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안 478호에 근거하여 예루살렘이 아닌 텔아비브에 주 이스라엘 대사관을 두고 있다. 여기에는 대한민국 역시 포함되어 현재 주 이스라엘 대한민국 대사관도 텔아비브에 위치하고 있다.[4]
파일:israel_telaviv_district.jpg
텔아비브 관구의 도시철도 기능을 대행하고 있는 이스라엘철도공사(רכבת ישראל בע"מ)의 광역철도를 타거나 시외버스를 타고 벤 구리온 국제공항예루살렘에 갈 수가 있으며, 텔아비브 경전철시내버스통근관광에 매우 큰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 예루살렘에 비해 인지도가 낮지만, 벤 구리온 국제공항을 통해서 이스라엘에 입국한 관광객들과 사업가들과 종교인들이 1순위로 들르는 곳이다. 게다가 예루살렘은 물류 네트워크에 불리하기 때문에 이스라엘 법인들의 본사와 외국 법인들의 지사들은 대부분 텔아비브에 자리잡고 있다. 이스라엘 중앙통계국의 2022년도 이스라엘 통계초록(Statistical Abstract of Israel 2022)에 따르면, 텔아비브 관구의 인구는 약 148만 명이다.

3. 역사

{{{#!wiki style="margin: 0 -10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bottom: -15px;"
문화유산
1981년

예루살렘 구시가지와 성벽
העיר העתיקה בירושלים וחומותיה
2001년

마사다
מצדה
2001년

고대 도시 아크레
העיר העתיקה בעכו
2003년

텔 아비브 화이트 시티
- 모더니즘 운동

"העיר הלבנה" של תל אביב, בזכות ריכוז של מאות מבנים בסגנון האדריכלות הבינלאומית במרכז העיר
2005년

성서 텔
: 메기도, 하솔, 베르셰바

תלים מקראיים - שהם דוגמה להתיישבות בארץ ישראל מתקופת הברונזה ומתקופת הברזל: תל באר שבע, תל חצור ותל מגידו
2005년

향교 교역로
- 네게브 지역의 사막 도시
דרך הבשמים - הערים הנבטיות: עבדת, ממשית, חלוצה ושבטה ומספר מצודות וחאנים בנגב
2008년

하이파와 갈릴리 서부 지역의 바하이교 성지
המקומות הבהאים הקדושים בחיפה ובגליל המערבי
2012년

카르멜 산 인류 진화의 유적지:
나할 메아롯 동굴 ・ 와디 엘 무그하라 동굴
אתרי ההתפתחות האנושית על הר הכרמל: מערות נחל מערות
2014년

유대 저지대의
마레샤와 벧구브린 동굴군
- 동굴 세계의 소우주
מערות בית גוברין ומרשה בגבעות יהודה
2015년

베이트 셰아림의 네크로폴리스
: "유대인의 부활"에 관한 기념비
הנקרופוליס בבית שערים: ציון דרך בהתחדשות יהודית
† : 유네스코에는 이스라엘의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어 있지 않다. 요르단이 등재 신청을 했고, 유네스코는 별다른 국가 분류 없이 '예루살렘'이라고만 표기한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파일:유네스코 세계유산 로고(흰 배경).svg
이름 한국어 텔-아비브 화이트시티[5]
영어 White City of Tel-Aviv[6]
아랍어 مدينة تل أبيب البيضاء[7]
프랑스어 Ville blanche de Tel-Aviv[8]
국가·위치 이스라엘 텔아비브 관구
등재유형 문화유산
등재연도 2004년
등재기준 (ii)[9], (iv)[10]
지정번호 1096
파일:야파 오스만 술레이만.jpg
19세기 팔레스타인의 호족 술레이만 파샤가 세운 사빌 (음수대)
파일:자파 사라이 오스만.jpg
오스만 시기 건설된 사라이(관아)[11]

원래는 이 근처에 있는 야파(Jaffa)[12]라는 고대 이래의 항구도시가 있었다. 전설에 따르면 대홍수 후, 노아 (누흐)의 아들들 중 하나인 야페트 (Japheth)가 세운 도시라 한다. 한편 헬레니즘기에는 그리스 신화를 차용, 안드로메다의 모친인 카시오페이아 혹은 이오페이아에서 지명이 유래했다는 설명도 있었다. 로마 시기에는 바람의 신 아엘로스의 딸 이오파와 연관 짓기도 했다.

지금도 어항으로 남아있는 야파의 항구는 기원전 3천년 경부터 활용된, 세계 최고의 항구 중 하나로 구약성경에서 야포 (욥바)로 언급될 정도로 역사가 유구하다. 고대 이집트의 아마르나 서신에서는 야푸로 기록되는 등 야파는 세계에서 가장 오랫동안 단일 지명을 유지한 도시 중 하나이기도 하다. 쿠르카르라 불리는 40m 높이의 퇴적-사암 언덕 (텔) 위에 형성된 도시는 군사적 요충지였고, 최소 기원전 1800년 경부터 도시가 형성되었다.

3.1. 상고대

기원전 15세기경 야파는 이집트 신왕국령이었고, 잠깐 독립했으나 투트모세 3세의 장군 제후티 (투티)가 재점령했다. 이때의 이야기가 파피루스 고문서에 전해지는데, 제후티가 후퇴를 가장하며 조공으로 위장한 포대를 가축에 실어 성으로 보냈고 그 속에 숨어있던 이집트 군이 도시를 장악했다는 서사이다. 이는 호메로스에 나오는 트로이목마 이야기를 2세기 이상 앞선 서사적 원형으로 여겨져 주목을 받았다.

바다민족 침공 후 기원전 1200년 무렵 야파는 팔레스타인 (필라스틴)의 어원인 블레셋 (필라스티아)의 최북단 도시가 되었다.[출처] 구약성서 여호수아서에도 야파는 12지파 중 단 지파와 접경한 블레셋 도시로 나오며, 이스라엘 왕국은 결코 야파를 수중에 넣지 못했다. 다만 워낙 예루살렘과 가까운 항구였기에 열왕기하 밎 에스라서에 의하면 솔로몬이 성전을 지을 때에 쓰인 레바논 백향목이 야파 항을 통해 유대 로 들어왔다고 한다. 요나서에 의하면 요나가 타르쉬로 출항한 곳이라 하는 등 야파는 성경에서 자주 언급되었다.

3.2. 고대

기원전 8세기, 아시리아 제국의 센나케립이 아슈켈론의 필라스티아 왕으로부터 야파를 점령했다. 그후 야파는 신바빌로니아 (칼데아), 아케메네스 제국 (페르시아) 등을 거치며 티레에 기반한 페니키아 인들의 지배를 받았다. 페니키아 도시들에 밀려 야파는 알렉산드로스 3세의 원정기에 언급도 되지 않는 등 중요성이 하락했다. 기원전 315년, 안티고노스 1세가 야파를 점령했고 3년 후에는 프톨레마이오스 1세가 함락해 파괴하였다. 다만 곧 재건된 야파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하에서 기원전 3세기에 화폐 주조소가 설치되고 인장이 찍힌 암포라 (술독) 손잡이가 다수 생산되는 등 중요한 도시로 거듭났다. 기원전 198년, 안티오코스 3세의 판니온 전투 후 야파는 셀레우코스 왕조령이 되었다.

마카베오 전쟁기인 기원전 163-62년, 아퍄 주민들은 인근 유대인들을 선상으로 초대한 후 그 선박을 침몰시켜 수백명을 익사시켰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유다 마카비는 야파를 공격, 항구와 선박들에 방화하고 주민들을 학살했다. 다만 야파를 직접 지배하지는 않았고, 기원전 147-46년 그의 동생 요나단 압푸스 역시 야파의 데메트리오스 2세 휘하 셀레우코스 수비대를 축출했지만 도시를 병합하지는 않았다. 그러다 기원전 143년, 시몬 타시가 야파에 수비대를 두고 셀레우코스측 지휘관 트리폰과 내통할 것을 우려해 비유대 주민들을 축출했다. 이로써 야파는 하스몬 왕조령이 되었고, 뒤이어 안티오코스 7세가 남하하여 야파 양도를 요구하자 시몬 타시는 소액의 연공을 바치는 것으로 무마했다. 야파 점령은 마카베오서에서 전략적 승리로 묘사되어 있다.

하스몬 왕조기 야파는 요새화되었고, 가자와 함께 유대 지방의 주요 항구로써 중시되었다. 이는 기원전 1세기의 성벽, 무덤 유적 밒 동전 유물들로 확인된다. 다만 요세푸스, 디오도로스, 스트라본 등은 기원전 60년대 들어 아리스토불로스 2세의 후원으로 야파가 해적 소굴이 되었다고 기록했다. 뒤이어 기원전 63년, 로마 장군 폼페이우스가 일대를 정복했고 기원전 47년 하스몬 왕조의 실권이 부활했지만 기원전 39년에 로마-헤로데 연합군이 하스몬-파르티아 동맹으로부터 야파를 점령했다. 이후 야파는 헤롯 왕국령이 되었고, 헤롯이 북쪽에 새 항구인 카이사레아를 건설하며 야파는 점차 그에 가려져 쇠퇴했다. 다만 요세푸스에 의하면 도시 지위를 얻었다 한다. 헤롯의 사후, 일대는 장남 헤로데 아르켈라오스의 영토가 되었으나 서기 6년 그가 폐위되며 로마 제국령 유대 속주가 되었다.

서기 1세기, 스트라보는 야파가 예루살렘이 보이는 그 외항이라 묘사했다. 당시 주민 대부분은 유대인이었고, 시가지는 서서히 확장되었다. 야파 항에서는 로마 시대의 고급 적색 토기, 빵/치즈 도장, 동전 등이 발굴되었다. 1차 유대 반란 시기 세스티우스 갈루스 휘하의 로마군은 야파에 상륙해 도시를 파괴하고, 닥치는 대로 살육하여 (요세푸스 추산) 8천 4백의 주민을 학살했다. 그후 인근 유대인들이 정착, 재차 이집트와 시리아간 교역항으로 복구되었다. 하지만 얼마 후, 베스파시아누스 휘하 로마군이 접근하자 이들은 해상으로 도주했으나 폭풍을 만나 4천여명이 사망하였고 해안에 밀려온 이들도 로마군에게 학살되었다. 야파는 재차 파괴되었고, 해적 기지화를 막기 위해 수비대가 배치되었다. 그후 야파는 플라비우스 왕조를 가리는 플라비아 로페 (Flavia Ioppe)로 개칭되어 중소 도시로 근근이 이어졌다.

2차 유대 반란 당시 시가지가 전소되는 등 파괴가 있었음에도 예루살렘과 달리 야파의 유대인 공동체는 이어졌고, 초기 기독교 기록에 야파는 중소 도시로 묘사되었다. 신약성서사도행전에서 야파 (욥바)는 베드로가 과부 도르카스를 소생시키고, 그에게 동물이 담긴 그릇과 함께 성령의 말씀이 내려왔다는 장소로 등장한다. 예루살렘 탈무드에서도 4-5세기 야파는 아카바르 카니나, 핀차스 벤 야이르 등의 랍비가 활동하는 등 유대 학문의 거점으로 묘사되었다. 기타 탈무드 본들에도 레브 앗다 데민, 라브 나츠만, 타춤 등의 학자들이 언급되어 있다. 이러한 학자들의 이름들은 근래 들어 야파 벼룩시장 쪽의 도로명에 적용되었다. 한편, 야파는 5세기 초에야 주교구가 설치되는 등 팔레스타인 지역 치고 기독교화가 늦었다. 동로마 제국기 라파는 안정을 유지했다.

3.3. 중세

636년, 이슬람 제국군이 야파를 점령했다. 우마이야 왕조 이래로 야파는 팔레스타인의 새 총독부인 라믈라의 외항이 되었고, 쇠락한 카이사레아 대신 팔레스타인 지역의 중심 항구로 성장했다. 압바스 왕조, 툴룬 왕조, 익시드 왕조를 거쳐 10세기 말엽 야파는 파티마 왕조령이 되었다. 10세기 후반의 지리가 알 무캇다시는 야파가 작은 도시이지만 항구 문까지 모든 성문이 철문인 강력한 성벽으로 둘러져 있고, 바닷가의 모스크가 멋지며 항구가 훌륭하다고 기록하였다.

3.3.1. 십자군 전쟁

1099년 6월, 1차 십자군이 야파를 점령했다. 정확히는 십자군 본대가 북쪽의 아르수프에서 내륙으로 향하여 예루살렘 공방전을 치르고 있을 때에, 6척의 제노바 함대가 야파에 입항한 것이다. 비록 인근 파티마 함대에게 한척 외에 나포되었으나, 레몽 드 필레의 십자군이 라믈라 부근에 매목하던 파티마 군을 격파한 후 파티마 측은 야파의 성벽을 허물고 철수했다. 1100년 1월, 예루살렘 왕국고드프루아가 야파에 당도하여 성벽을 재건했다. 뒤이어 아르수프를 점령한 그는 베네치아 함대를 맞이하려 야파로 돌아왔다가 와병, 회복 후 재차 북상해 아크레를 포위했으나 도중 사망했다.
3.3.1.1. VS 파티마 왕조
1101년 4월, 신임 교황 특사 마르코 모리스가 제노바 함대와 야파에 당도했고 이듬달 보두앵 1세는 야파에 머물다가 카이사레아를 점령했다. 한편, 아스칼론에 집결한 파티마 군대는 9월에 야파를 공격했으나 보두앵이 보낸 원군에 격퇴되었다. 뒤이어 벌어진 1차 라믈라 전투에서 갈릴리공 위그가 야파로 도주하기도 했으나 결국 십자군이 승리, 다음날 보두앵은 야파에 개선했다. 다만 1102년 5월의 2차 라믈라 전투 때에는 보두앵이 대패하여 밤을 틈타 잉글랜드인 고드릭의 배에 올라 야파로 도주했고, 라믈라를 점령한 파티마 군이 수륙 양면으로 도시를 포위했다. 성내에는 백명 미만의 기사들만 있었으나, 야파의 성직자가 예루살렘에 소식을 전한 후 3일만에 90여 기사들이 참십자가와 함께 포위를 뚫고 합류하여 상황이 나아졌다. 다시 3일 후에는 잉글랜드, 프랑스, 독일의 무장 순례단이 해상 봉쇄를 뚫고 야파에 당도했다. 그 다음날, 보두앵은 전 병력과 함께 반격했고 파티마 군이 아슈켈론으로 철수하자 그 진영을 약탈했다.

1106년에는 갈릴리를 공격한 다마스쿠스 군대와 함께 파티마 군이 야파를 습격, 십자군을 격파하고 무장 순례단을 학살했다. 다만 도시를 점령하지는 못했다. 십자군에게 자페 (Jafeh)로 불린 야파는 예루살렘과 직결되는 위치 덕에 이탈리아 해양 도시들로부터의 인적, 물적 보급항이 되었다. 동시에 예루살렘 왕국 남부의 주요 거점으로써 파티마령 아스칼론을 견제하는 군사적 요충지였고, 1110년 보두앵 1세는 야파 백작령을 두어 중시하였다. 야파 백국은 명목상 에데사 백국, 트리폴리 백국과 동급이었고 갈릴리 공국과 함께 왕국 내 양대 제후령이었다. 첫 야파 백작은 보두앵 2세의 사촌이자 루이 6세에게 영지를 압수당한 후 순례차 체류 중이던 위그 1세 (드 퓌세)였다. 1113년 8월, 산나브라에서 승리한 모술 총독 마우두드가 야파와 예루살렘 일대를 약탈한 후 회군했다. 다만 2차 공격을 준미하던 그는 다마스쿠스에서 암살되었다. 1115년, 파티마 군이 재차 야파 점령을 시도했으나 역시 격퇴되었다. 1118년, 위그 1세가 사망한 후 섭정기를 거쳐 아들 위그 2세가 백작에 올랐다. (1122년)

1123년 4월, 예루살렘 국왕 보두앵 2세아르투크 왕조에게 사로잡히자 이듬달 와지르 알 바타이히가 이끄는 파티마 군대가 수륙 양면으로 야파 점령을 시도했다. 하지만 예루살렘 섭정 외스타슈가 참십자가를 대동, 이브네 전투에서 파티마 군대를 격파하고 적진을 약탈했다. 그해 6월, 외스타슈가 사망하자 야파 백작 위그 2세가 그 과부인 엠마와 결혼하고 의붓아들들을 대신해 카이사레아 및 시돈의 섭정이 되며 예루살렘 왕국의 권신이 되었다. 1131년, 보두앵 2세가 사망하고 사위 풀크가 계승하자 위그 2세는 반발했다. 마침 그는 풀크의 부인인 여왕 멜리장드와의 염문설까지 있었다. 1132-34년, 의붓아들들의 모함에 반역자로 몰린 위그는 아슈켈론의 파티마 군대와 연대해 반란을 일으켰으나 이벨린 영주 바리장의 이탈로 진압되었다. 이후 야파는 왕령지로 귀속되었고, 1151년에야 보두앵 3세가 동생 아모리를 봉하며 백작령아로 부활했다. 1152년, 멜리장드와 보두앵 3세 간의 모자 갈등 시에 아모리는 전자 편을 들다 결국 후자에 복속했다. 이듬해 보두앵은 긴 공방전 끝에 아스칼론을 점령했고, 아모리에게 주어 야파-아스칼론 백작령이 설립되었다.
3.3.1.2. VS 아이유브 왕조
1123년 이후 야파는 이집트측 침공에서 벗어났고, 1153년 아슈켈론 점령으로 완전히 안정을 찾았다. 한편, 예루살렘 왕국의 중심 항구 지위는 점차 북쪽의 아크레로 옮겨지게 되었다. 1157년, 백작 아모리는 8촌 아그네스와 결혼해 두 자녀를 두었다. 다만 1163년, 아모리가 왕위에 오르며 이혼당한 아그네스는 백작부인 명목으로 야파-아스칼론 세금의 일부를 연금으로 받았다. 한편 아모리의 즉위 후 재차 왕령지가 되었던 야파-아스칼론 백국은 1176년, 그의 딸 시빌라가 굴리에모 델 몬페라토[14]와 결혼할 때에 지참금으로 주어지며 부활했다. 1180년, 시빌라가 기 드 뤼지냥과 재혼하며 후자가 야파-아스칼론 백작이 되었다. 1184년, 보두앵 4세는 시빌라와 굴리에모 사이의 아들 보두앵 5세를 후계자로 봉했다. 이에 기가 반발하자 보두앵 4세는 귀족회의 통해 그의 영지 중 야파를 압수했다. 다만 기는 아슈켈론에서 버티며 무슬림들을 공격하는 등 횡포를 부렸고, 1186년 그가 왕위에 오르며 야파-아스칼론은 다시 왕령지가 되었다.

1187년, 하틴 전투 이후 살라흐 앗 딘 유수프 (살라딘)의 동생 알 아딜이 야파를 공격하여 격전 끝에 점령했다. 저항의 대가로 주민들은 노예가 되었고, 도시는 아이유브 왕조령이 되었다. 한편, 실권을 잃어가던 기는 1191년 7월에 아크레를 수복하자 형 지오프리를 명목상의 야파-아스칼론 백작에 봉했다. 그무렵, 3차 십자군의 당도에 살라딘은 적에게 이용되는 것을 막기 위해 야파 등지[15]의 성벽을 허물었다. 1191년 9월, 아르수프 전투에서 승리한 리처드 1세는 3일 후 야파를 무혈 점령했다. 다만 도시는 폐허 상태였기에 성밖 올리브 숲에서 숙영했고, 라믈라의 살라딘과 두 차례 휴전 협상을 했으나 결렬되었다. 그후 리처드는 아크레로 향했다가, 함대와 함께 돌아와 예루살렘 수복의 거점으로써 야파를 재건했다. 리처드는 한동안 야파 및 라믈라에 머물며 살라딘과 휴전을 논의했고, 근처 성채들을 복구했다.

1192-93년의 겨울과 1193년 6월, 리처드는 두 차례 예루살렘 근교까지 진격했으나 살라딘이 직접 수비에 나서자 결국 7월에 야파로 회군했다. 얼마후 리처드가 베이루트를 노리며 아크레로 떠나자 살라딘은 야파를 포위했고, 3일만에 점령했다. 시타델의 수비대 역시 항복했다. 살라딘은 튀르크 기병대의 약탈과 학살을 막기 위해 시타델의 수비대 주둔을 허용했다. 하지만 다음날, 리처드는 기병대 및 50척의 함대와 돌아왔고 (비록 실패했지만) 공격을 가하자, 수비대가 항복을 철회했다. 8월 1일, 시내의 사제가 헤엄쳐 와서 시타델에 수비대가 남아있음을 알리자 리처드는 함대와 함께 야파 항에 접근했다. 이에 수비대가 시내로 나서 반격했으나, 패배하고 재차 항복 의사를 밝혔다. 그때 리처드가 2천 5백여 병력[16]으로 돌격해오자 지쳐있던 아이유브 군대는 수적으로 우세했음에도 성밖으로 밀려났다. 군대의 사기가 저하되자 살라딘은 그대로 철수했다.

야파 수복 후 리처드는 살라딘에게 야파와 아스칼론을 그의 제후로써 십자군이 통치한다는 제안과 함께 아크레의 앙리 1세에게 원군을 청했다. 4일 후, 살라딘은 원군이 오기 전에 야파의 십자군 진영을 기습했다. 리처드는 2천여 병력[17]과 급조한 말뚝 방어선 뒤애 창병과 쇠뇌병을 배치해 아이유브 기병대를 격퇴하였다. 한편 살라딘은 별동대와 크게 우회해 야파 수비를 맡은 제노바 인들을 압도하고 도시에 입성했는데, 리처드가 쉴틈도 없이 돌아와 격퇴해내었다. 뒤이어 벌어진 양측 기병대 간의 일전도 리처드가 궁수들로 기선을 제압한 후 직접 돌격하자 십자군의 승리로 귀결되었고, 살라딘은 밤중에 예루살렘으로 철수했다. 야파 전투에서의 대활약 후 리처드는 와병하였고, 1192년 9월 현상 유지의 5년 휴전을 명시한 야파 (라믈라) 협정을 맺은 후 성지를 떠났다.[18] 이로써 야파는 복원된 십자군 영토의 최남단 도시가 되었고, 1193년 명목상의 백작 지오프리 역시 유럽으로 돌아가며 기의 또다른 형 애므리 드 뤼지냥이 계승했다.

1197년 9월, 독일 십자군 선발대의 갈릴리 진격을 격퇴한 알 아딜은 야파를 기습해 점령했다. 이에 앙리 1세가 야파로 남하하려 군대를 모았으나 급사하였고, 막 키프로스 국왕이 오른 애므리가 독일 십자군 본대와 함께 아크레로 당도하여 새 예루살렘 국왕이 되었다. 독일 십자군은 예정되었던 야파 공격 대신 레바논 방면을 공격하다가 돌아갔다. 1204년 9월, 알 아딜은 4차 십자군을 피하기 위해 6년 간의 휴전을 체결하며 야파 및 라믈라와 나사렛 등을 할양하였다. 1228년, 6차 십자군을 이끌고 온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2세는 야파를 재차 요새화하였다. 이때 성벽에 라틴어 및 아랍어로 '주 예수 메시아 부활 후 1229년, 로마 황제 프리드리히'란 명문이 새겨졌다. 뒤이어 술탄 알 카밀과 협상에 나선 그는 1229년 2월, 예루살렘 대여 및 10년의 휴전을 명시한 2차 야파 조약을 맺었다.[19] 이듬달 예루살렘을 참배한 프리드리히는 야파를 거쳐 아크레를 통해 본국으로 돌아갔다.

1235년, 장 드 브리엔은 조카 고티에 드 브리엔을 야파-아스칼론 백작에 봉하였다. 그는 애므리의 손녀이자 레텔-앙주 왕가 및 이벨린 가문의 혈통도 이어받은 마리와 결혼하여 정통성을 확보했다. 고티에는 무슬림들을 적대하지 않았고, 1237년 템플기사단이 아틀리트의 무슬림 목동들 습격을 말리기도 했다. 1239년 9월, 귀족 십자군은 야파를 거쳐 남하했지만 베이트 하눈 전투에서 아이유브 군에게 대패하였다. 전투 도중 고티에는 사구에 숨어있던 적의 궁수들에게 위치가 노출되자 철수를 주장했으나, 수용되지 않자 도주하였다. 1242년에는 케라크의 영주 앗 나시르 다우드[20]가 이집트 술탄 앗 살리흐 아이유브에게 부탁해 얻어낸 샴스 앗 딘 시라순쿠르 휘하 2천 기병대와 야파를 포위했다. 다만 포위가 장기화되자 술탄은 후퇴를 명했고, 앗 나시르 역시 회군했다.[21] 다만 이후로도 앗 나시르는 해안과 예루살렘 간의 교통을 차단, 순례단에게 통과세를 걷거나 공격했다.

1244년 8월, 이집트-호라즘 군대가 예루살렘을 점령하자 도시의 라틴인들은 야파로 철수했다. 다만 도중 도적떼의 습격으로 실제 야파에 당도한 인원은 3백여 뿐이었다. 그해 10월에는 고티에가 시리아-십자군 연합군과 함께 포르비에 (히르비야) 전투에서 이집트-호라즘 군에 맞섰으나 패하여 포로가 되었다. 1246년, 고티에가 카이로에서 옥사하자 실권자인 키프로스 국왕 앙리 1세는 발리앙 디블랭의 손자인 장 드 이벨린 (장 디벨링)을 새 야파-아스칼론 백작으로 봉했다. 장은 1249년 루이 9세의 7차 십자군에 종군, 다미에타 함락을 도왔다. 실패한 이집트 원정 후, 1252년 5월 루이는 야파에서 아사신 및 이집트의 맘루크 정권과 동맹을 맺었다.[22] 다만 기대했던 맘루크-아이유브 전쟁이 벌어지지 않자 동맹은 흐지부지되었고, 루이는 야파에 1년여간 머물며 도시를 요새화하였다. 그러던 1253년 5월의 성 요한 축일에 다마스쿠스로 회군하던 아이유브 군주 앗 나시르 유수프는 철수 도중 야파 성밖의 루이 진영을 도발해 십자군 궁병과 전초전을 벌였다. 다만 승부가 나지 않자, 그대로 북상해 시돈을 기습 점령하고 떠났다. 이에 이듬달, 루이는 시돈으로 향하여 그곳 역시 요새화한 후 이듬해 성지를 떠났다.[23]
3.3.1.3. 바이바르스의 점령 (1268년)
루이의 요새화 덕에 아크레, 시돈, 야파, 카이사레아 등은 견고한 수비력울 자랑하며 안정을 누렸다. 1254년, 야파-아스칼론 백작 장은 정식 국왕이 부재한 예루살렘 왕국의 실권자인 바일리가 되었다. 그는 1256년, 갈릴리 약탈전을 이끌고 맘루크측 반격을 격퇴하는 등 능력을 보였다. 같은해 벌어진 베네치아-제노바 전쟁에서는 아르수프 영주인 사촌 장과 함께 베네치아 & 피사 편에 서서 제노바 및 티레 영주 필리프 드 몽포르에 맞섰다. 1258년 아크레 시가전에서 장은 제노바 측 석궁병에 사살될뻔한 위기를 넘겼다. 한편 맘루크 술탄 바이바르스는 1260년 아인잘루트 전투의 승리 후에도 한동안 대몽 항쟁에 치중하다 1263년 초엽 들어 십자군에 대한 공세에 나섰다. 그러자 장은 무슬림 포로 석방을 대가로 휴전을 제안하했는데, 기사단의 불이행으로 결렬되고 말았다. 1264년 여름, 임시 휴전이 끝나기도 전에 십자군이 야파에 집결했다는 첩보가 들리자 바이바르스는 카이사레아와 아틀리트의 습격을 지시해 맞섰다.

1265년 봄, 바이바르스는 카이사레아와 하이파를 기습 점령하고 아르수프를 포위했다. 수비대가 안전 철수를 대가로 항복하자, 바이바르스는 약속을 어기고 이들을 동원해 성벽을 허문 후 카이로로 압송했다. 다만 부상자들은 야파로 돌려보내 주었다. 바이바르스의 활약으로 이제 아크레 이남의 십자군 거점은 야파가 유일했다. 그나마 장이 바이바르스와 좋은 관계를 유지한 것이 다행이었다. 1266년 7월, 바이바르스는 야파와 아크레를 포함한 십자군 해안 도시들의 휴전 제의를 모두 거절했다. 뒤이어 사페드 등을 점령한 그는 장이 어부로 위장한 습격대로 시나이 반도의 카트야 일대를 약탈하자 분노했다. 그해 말엽, 장의 사후 백작위를 계승한 아들 자크는 카스티용 휘하 사절단을 보냈으나 휴전을 연장하지 못했다. 1267년, 야파 주민들이 협정을 어기고 바이바르스가 공격한 아크레에 식량을 제공했으며 무슬림 여성이 시중 드는 술집 열었다는 소문도 그를 자극했다.

십자군의 내분이 계속되던 1268년 2월, 바이바르스는 몽골과 싸우기 위해 알레포로 북상한다는 선포와 함께 카이로에서 출정했다. 이때 진짜로 몽골군이 알레포를 습격했기에 십자군 측은 대비하지 않았고, 3월 초엽 맘루크 군이 성 앞에 나타나자 자크는 카스티용 등을 사절로 보냈다. 하지만 그들은 구금되어 혐의 조사 후 석방되었고, 자크가 뒤늦게 항복 협상에 나섰으나 바이바르스는 총공격에 나섰다. 준비되어 있지 않았던 도시는 주요 십자군 거점이라는 명성에 걸맞지 않게 하루만에 함락되었고, 바이바르스는 장과의 옛 정을 고려했는지 수비대를 아크레로 보내주는 관용을 베풀었다. 이후 성벽이 허물어졌고, 모스크가 세워졌다. 또한 바이바르스는 라믈라의 백색 모스크를 중수하며 야파 수복을 기념하는 명문을 남겼다. 예루살렘 왕국의 남부를 평정한 바이바르스는 뒤이어 안티오크까지 함락하며 십자군을 남북으로 압박했다. 한편, 같은해 야파에 공을 들였던 프리드리히 2세의 손자이자 명목상의 예루살렘 국왕 콘라딘가 루이 9세의 동생 처형되며 호엔슈타우펜 왕가 역시 종언을 맞았다.[24]

3.3.2. 맘루크 왕조

야파 함락 후에도 야파-아스칼론 백작위는 명목상으로 무려 16세기 말까지 이어지지만, 사실상으로는 1268년에 소멸하였다. 그나마 1276년 백작 자크 드 이벨린이 사망한 후 계승한 동생 기 드 이벨린이 1299년 제노바 함대로 일시적으로 비블로스를 점령하고, 1301년 2월에 쿠틀루그샤 휘하 일 칸국군이 알레포 일대를 약탈할 때에 참가한 것이 성지에서의 마지막 존재감이었다. 이때 회군하며 군대를 남겨둔 루아드 섬 역시 1302년에 섬멸된다. 장 드 이벨린의 직계 가문 역시 1367년에 끊긴다. 한편, 바이바르스는 1272년 십자군과 휴전을 맺은 이후로 일 칸국의 침공 대비에 치중했다. 1272년 8월, 몽골군의 남하 소식에 그는 이집트의 모든 기병들에 동원령을 내리고 야파에서 집결시켰다. 다만 생각보다 침공 규모가 크지 않자 카이로로 회군하며 베두인 부대만을 보냈고, 바이바르스가 친정한 것으로 착각한 몽골군은 철수했다. 1291년 아크레 함락 후 야파는 완전히 평화를 찾았다.

하마 영주 겸 역사가 아불 피다 이스마일은 1321년에 야파를 필라스틴 (팔레스타인)의 작지만 쾌적한 도시로, 좋은 항구라고 묘사했다. 또한 잘 요새화되었고 시장이 정기적으로 열리며, 많은 상인들이 왕래한다고 덧붙였다. 넓은 항구에 대해서는 팔레스타인 전역에서 선박이 왕래하고, 세계 각지로 항해하며 라믈라와 8km 정도 거리라고 기록했다. 하지만 14세기 중반 이래로 야파는 키프로스 왕국구호기사단의 해적질에 대응하기 위해 맘루크 측이 주민들을 내륙으로 소개시키며 점차 버려졌다. 전략적으로도 더이상 중요하지 않았기에 성벽 역시 방치되었다. 1432년, 베르트랑돈 델라 브로키에레는 순례객들에 있어 성지에서의 사면이 시작되는 야파가 순례객들이 햇빛을 피하는 몇몇 천막만이 남은 폐허라고 기록했다. 또한 돌풍 때문에 오래 머물면 위험하며, 순례객이 도착하면 술탄의 통역관 및 관리들이 와서 인원 파악 및 관세를 걷고 가이드를 해준다고 덧븥였다.

3.4. 오스만 제국

1516년, 셀림 1세에 의해 야파 일대는 오스만 제국령이 되었다. 1596년 기준 야파는 가자 리와 (군) 산하 라믈라 나히야 (읍)에 속해 있었고, 15가구의 무슬림 주민이 있었다. 그들은 수입의 1/3을 세금으로 바쳤고, 이는 연간 7,520 악체에 해당했다. 다만 유럽 여행가들은 지속적으로 야파가 폐허 상태라 묘사했고, 17세기 들어서야 기독교 순례객들을 위한 교회 및 여관 등이 세워지는 등 도시화가 재개되었다. 대표적으로 1654년, 성 베드로 성당이 세워졌다. 다만 18세기 들어서는 해적의 출몰로 주민들이 해안 초소의 경고 때마다 종종 라믈라나 룻드로 피신해야 했다. 항구 시설 역시 좋지 않아 큰 선박에서 화물을 내리려면 조각배들이 와서 분산 운송해야 했다. 야파의 열악한 상황은 18세기 후반, 팔레스타인의 호족 자히르 알 우마르가 질서를 회복하며 개선되었다.

3.5. 근대

야파는 1799년 나폴레옹의 팔레스타인 원정 당시 크게 파괴되었다.

술레이만 파샤 시기에 재건된 도시는 1837년 지진으로 재차 파괴되었고, 견고하던 성벽은 1878-88년에 걸쳐 시가지가 확장되며 철거되었다. 이후 구도심 동쪽으로 오스만 행정 치소인 사라이 (세레일) 등 관공서들이 이동했고, 구도심은 문화적 중심지로 남았다. 한편 야파에선 19세기 후반 들어 그리스 정교회 등 기독교도 인구가 크게 늘었고, 경제적 및 학문적으로 주류가 되었다. 다만 1930년대 말엽 팔레스타인 대봉기 시에 영국군이 구도심을 한달간 봉쇄한 후 수백채의 건물을 철거하며 6천여 아랍 주민들이 난민이 되는 등 야파의 수난기가 시작되었다.

3.6. 텔아비브 건설

아랍인 도시인 야파를 대신하기 위해 유대인들이 1906년부터 시작한 가정(Ahuzat Bayit) 운동이 기반이 되어, 1909년에 유대인 66가구가 조개 껍데기를 가지고 자그마한 마을을 건설한 것이 텔아비브의 시작이다. 1910년까지 도로망과 상하수도, 유대인 학교, 집 66가구 등을 지으며 '텔아비브'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후 각지에서 유대인 인구가 몰려들면서, 제1차 세계 대전 중에는 텔아비브와 야파 일대의 유대인들에게 오스만 제국 정부의 추방령이 내려지기도 했으나, 오스만 제국의 패망-멸망으로 곧 철회되었고 팔레스타인 지역이 영국 지배에 놓이게 되었다. 이때 팔레스타인 지역에 유대인 인구가 급증하면서 아랍인과 갈등이 고조되었으며, 1921년 1차 야파 사태가 일어나자 유대 인구의 상당수가 텔아비브로 모여들면서, 2천여 명(1920)의 마을이 단 5년 만에 3만 4천 명(1925)의 도시로 바뀌었다.

본래 근처 도시인 야파의 항구를 통해 경제적 활동을 하던 이 도시는 1936년 팔레스타인 대반란 이후 유대인들과 아랍인들의 사이가 극악에 치닫으면서 유대인들은 자체적인 항구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1948년 봄에 이스라엘 임시정부가 텔아비브 시내에서 정식으로 출범했다. 텔아비브와 야포의 경계 분쟁이 계속되자 아예 1950년에는 텔아비브에 야포를 합쳐 텔아비브라 불렀다. 이후 야포의 역사성을 살리기 위해 텔아비브-야포로 개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3.7. 현대

양차 세계 대전, 중동전쟁 등을 통해 이스라엘 전역이 불안정한 와중에도 텔아비브만큼은 직접적인 공격을 잘 받지 않았고,[25] 덕분에 초고층 빌딩을 연속으로 건설했으니, 이스라엘 국민들도 대부분이 경제 활동을 위해 모이는 등 번성하는 곳이 되었다. 하지만 2016년 1월에 이스라엘 아랍인총기 난사로 3명이 사망하고 7명이 다치는 사태가 터졌다. 6월에도 팔레스타인인의 총기 난사가 또 벌어져 4명이 사망하고 6명이 부상했으니, 텔아비브 시내도 분위기가 좋지 못한 형편이다. 특히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개전 이후 하마스가 걸핏하면 쏘아대는 까삼 로켓이 틈만 나면 떨어지다 보니 대피령도 자주 내리는 판국이다.

4. 관광

파일:야파 1.webp
<rowcolor=#000> 야파 항구 전경
야파가 역사가 유구한 항구임에도 불구하고 볼 만한 역사 유적은 생각보다 별로 없다. 십자군 시대의 기독교 유적이나 이슬람 시대 건물들이 유대인 입장에선 절대 즐거운 기억이 아니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방치하거나 밀어버리고 그 위에 새 건물을 지은 게 많아서 그렇다. 그나마 남아있는 유적은 항구의 석축과 마흐무디야 모스크, 오스만 시기의 하맘 (목욕탕) 및 시계탑 정도이다.

5. 사진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Tel_Aviv_Skyline_(night)_-_2.jpg
파일:external/2015.icimeeting.com/Beach-1.jpg
파일:external/asset-tilburg.nl/TELAVIV.jpg
파일:external/www.armapartners.com/banner-telaviv-sm.jpg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Flickr_-_Israel_Defense_Forces_-_IAF_Flight_for_Israel's_63rd_Independence_Day.jpg
파일:external/cmxhub.com/Tel-aviv-Gibor-Sport-005.jpg
파일:external/wikitravel.org/Tel_Aviv_banner.jpg
파일:external/d3n8a8pro7vhmx.cloudfront.net/tel_aviv_16x9.jpg

6. 여담

  • 지명의 유래는 에제키엘 3:15에 나오는 '텔아비브'(델아빕)이다. 그러나 이름만 같고 위치는 서로 전혀 다르다. 델아빕은 이라크시리아쯤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 특이하게 지중해성 기후 지역임에도 가장 더운 달이 7월이 아닌 8월이며,[26] 바닷가에 바짝 붙어 있다는 특성상 강수량이 적은 7, 8월에도 습도가 꽤 되는 편이다. 또 6월보다 9월이 더 더운 편이다.
  • 이스라엘이 물가가 비싼 나라인 만큼 텔아비브도 세계에서 물가가 비싼 도시에 속한다. 다만 숙박비는 생각만큼 비싸지 않다. 여행 경비를 절약하고 싶으면 텔아비브 해변의 숙소 위주로 돌아다니고[27] 식사나 쇼핑은 러시아계 유대인 거주 구역에서 해결하는 것을 권한다. 물가가 비교적 싸면서도 안전하고 깨끗하다. 영어가 잘 안 통해서 답답하긴 하지만 음식을 사고 쇼핑하는 정도는 가능하다. 한국인 관광객에게 대체로 친절한 편으로, 하레딤이나 휴가 나와서 술에 취한 이스라엘군 말년병장(...) 정도만 조심하면 된다.
  • 현재 동성애에 대해 극단적으로 폐쇄적인 중동 지방에서 성소수자에 대해서 가장 개방적인 도시이다. 이스라엘 내 다른 도시인 예루살렘이나 하이파보다 훨씬 더 개방적인 문화를 가진 도시이기도 하다. 2012년 조사에서는 게이 문화로 유명한 암스테르담샌프란시스코를 제치고 게이 필수 여행지 1위로 뽑히기도 했으며, 매년 중동 및 이스라엘 최대의 게이 프라이드 퍼레이드가 열리고 있다. 다만 이에 대해 LGBT 운동 중 일부 및 서구 좌파 진영에서는 이스라엘 정부가 이슬람 사회의 성소수자 혐오를 부각시켜 팔레스타인 강제점령을 정당화하는 효과를 얻고자 성소수자 운동을 이용하는 것이라는 비판이 있다. 이에 대해서는 핑크워싱 문서 참조.

7. 둘러보기




[1] 동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일부로 포함시키면 예루살렘이 인구가 가장 많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텔아비브가 인구가 가장 많다.[2] 소방청은 중부 관구리숀 레치욘 에 있고, 교도청은 중부 관구의 람라 시에 있다.[3] 정확하게는 UN 총회 결의안상으로는 예루살렘 전역을 어느 국가의 영토로도 인정하지 않으며, 서예루살렘을 실질적인 이스라엘의 영토로 인정하는 국가들 중에서도 대부분은 이스라엘의 동예루살렘에 대한 영유권을 인정하지 않는다.[4] 정확히는 텔아비브의 위성도시인 헤르츨리야. 한국은 대표적 친미 및 친이스라엘 국가로 꼽히나 외교적, 경제적으로 UAE, 사우디아라비아 등의 아랍 국가와도 밀접하고, 이런 이유로 분쟁을 피하기 위해 일방적으로 이스라엘의 편을 들지 않고 있다. 반대로 팔레스타인 UN 옵저버 회원국 승인 투표 당시에도 한국은 기권을 선택했다.[5] - 모더니즘 운동[6] – the Modern Movement[7] – الحركة العصرية[8] – le mouvement moderne[9] 오랜 세월에 걸쳐 또는 세계의 일정 문화권 내에서 건축이나 기술 발전, 기념물 제작, 도시 계획이나 조경 디자인에 있어 인간 가치의 중요한 교환을 반영[10] 인류 역사에 있어 중요 단계를 예증하는 건물, 건축이나 기술의 총체, 경관 유형의 대표적 사례일 것[11] 이스라엘 건국 후 파괴되어 현재는 그 터를 알리는 기둥 열주만이 남아 있다.[12] 가톨릭 성경에서는 야포로, 개신교 성경에서는 '욥바'라고 부른다. 구약성서 여호수아, 십자군 시대, 대항해시대 등에 나오는 야파가 이 도시이다.[출처] Anson F. Rainey (February 2001). "Herodotus' Description of the East Mediterranean Coast". Bulletin of the American Schools of Oriental Research (321).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on behalf of The American Schools of Oriental Research: 58–59. doi:10.2307/1357657. JSTOR 1357657. S2CID 163534665[14] 콘라드 1세의 형[15] 카이사레아, 가자, 아스칼론[16] 기사 80명, 궁수 4백, 이탈리아 보병 2천[17] 기사 54명, 보병 2천여[18] 한편 분쟁지이던 아스칼론은 그냥 파괴되었다[19] 그외에 토론, 베들레헴, 나사렛 등 할양됨[20] 1239년 일시적으로 예루살렘을 함락한 그 인물[21] 이때 앗 나시르가 이집트의 카팁에게 보낸 항의 편지가 현존한다.[22] 아사신은 선물, 맘루크 측은 십자군 포로들을 제공함[23] 떠나기 전 유수프와 2년 6개월 40일의 휴전을 맺었다. 같은해 이집트의 아이바크는 아이유브 왕가의 술탄을 완전 폐하고 재차 스스로 술탄에 올랐다.[24] 여러모로 1268년은 한 시대가 저무는 해였다. 이때부터 십자군 국가들의 종말은 확정되어 있었다.[25] 100% 안전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예루살렘에 비해서 텔아비브는 그나마 안전했다.[26] 일반적으로 동아시아를 제외하면 태양남중 고도 특성상 북반구에서 가장 덥거나 따뜻한 달은 7월이다.[27] 시설이 엉망진창인 대신에 가격이 저렴하고 밤거리도 안전하다.

분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