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27 12:23:47

세월호 7시간

세월호 7시간 30분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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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세월호-7시간.jpg
세월호 7시간의 대표적인 인물인 박근혜[1]최순실[2]
1. 개요2. 7시간? 7시간 30분?3. 타임라인4. 의혹 발생
4.1. 2014년 4월 16일 (참사 당일)4.2. 2014년 7월 7일 국회 운영위원회 업무 보고
5. 의혹의 경과
5.1. 산케이 신문 가토 다쓰야 지국장의 기사5.2. 각 단체의 정보공개 청구5.3. 언론의 의혹 제기5.4.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이후 청와대의 대응5.5.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이후 진행 상황5.6. 탄핵소추 가결 이후5.7. 박근혜 대통령의 공식 해명(2017년 1월 1일)5.8. 윤전추 행정관 증언에 따른 박근혜 대통령의 행적5.9. 2017년 1월 10일 탄핵심판 3차 변론기일에 제출된 대통령의 행적5.10. 2017년 10월 31일 국정감사에서 추가로 밝혀진 행적5.11. 2018년 3월 28일 서울중앙지검 수사결과 발표
5.11.1. 관련 언론 보도5.11.2. 자유한국당 반응
5.12. 김기춘·김장수·김관진·윤전추의 형사재판
6. 박근혜 정부가 침묵했던 이유7. 7시간 규명에 대한 반대 의견과 반론
7.1. 대통령세월호 참사의 주범은 아니다?7.2. 어차피 구조는 못 했을 것이다?7.3. 대통령에게 교통사고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7.4. 7시간 규명 요구는 국가 전복 세력의 트집이다?
7.4.1. 7시간 이후의 대통령 행보의 문제
8. 7시간 관련 가설 및 음모론
8.1. 직무유기
8.1.1. 최순실 조종설
8.2. 북한 개입설8.3. 최태민 추모굿8.4. 고의 침몰설
8.4.1. 인신공양설
8.5. 고의 방치설
8.5.1. 잠수함 사고 은폐설
8.6. 미용 시술설 (필러 수술)8.7. 결론
9. 유사 사례와 비교10. 기타

1. 개요

파일:채널A 로고 컬러 화이트.svg
동앵과☆ 뉴스터디
그날 청와대 상황병은 왜 관저로 뛰어갔나
(채널A / 2023년 7월 8일 공개분)
대규모 재난과 같은 국가위기 상황에서 대통령이 그 상황을 지휘하고 통솔하는 것은 실질적인 효과뿐만 아니라 상징적인 효과까지 갖는다. (중략) 앞으로도 국민 다수의 지지로 당선된 대통령들이 그 직책을 수행할 것이다. 국가 최고지도자가 국가위기 상황에서 직무를 불성실하게 수행하여도 무방하다는 그릇된 인식이 우리의 유산으로 남겨져서는 안 된다. 대통령의 불성실 때문에 수많은 국민의 생명이 상실되고 안전이 위협받아 이 나라의 앞날과 국민의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불행한 일이 반복되어서는 안 되므로 우리는 피청구인의 성실한 직책수행의무 위반을 지적하는 것이다.
2016헌나1 결정문(탄핵 심판 결정문), 재판관 김이수, 재판관 이진성의 보충의견[3]
세월호 7시간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 당일(2014년 4월 16일) 박근혜 대통령이 사고 관련 지시를 내렸다고 알려진 시각인 10시 15분부터 중대본을 방문한 오후 5시 15분까지 박근혜 대통령의 행적이 불분명한 7시간을 말한다. 이후 조사 과정에서 지시를 내린 시각이나 서면보고를 받은 시각 등이 이때가 아니었다고 밝혀졌다.

2. 7시간? 7시간 30분?

세간에는 세월호 7시간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후 정확하게 비는 시간을 따져보면 7시간 30분에 가깝다고 밝혀졌다. 상술했다시피 세월호 참사는 2014년 4월 16일에 일어났는데 행적이 묘연한 시간이 7시간 30분이라는 것이 밝혀진 것은 2017년 10월 12일로 약 3년 이상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월호에 관련된 내용을 다루는 다른 많은 문서에서도 7시간으로 많이 쓰고 있고 이를 전부 바꾸지도 못했다. 비단 나무위키만 그런 게 아니라 언론 등에서도 대부분 '세월호 7시간'으로 표현했다. 따라서 이 문서 제목은 도로 세월호 7시간으로 돌아갔고 7시간 30분은 이 문서로 연결된다.

그런데 이후 이것 역시 조작된 것으로 밝혀졌다. 즉, 첫 서면 보고를 받은 시각이 9시 30분이 아니라 10시 20분이었다. 검찰에 따르면 "9시 30분 → 9시 50분 → 10시 등 3회에 걸친 조작이 있었다"고 한다. 따라서 도로 7시간으로 바뀐 셈이 되었다. 다만 이게 더 심각한 문제인 것이 조작이 3번이나 있었다는 것도 웃기지만 보고가 10시 20분에 있었던 이유도 박근혜가 그제야 출근했기 때문이다. 그것도 안봉근이 급히 관저에 들어가 박근혜를 침실에서 나오게 했기 때문에 그나마 10시 20분에라도 침실 밖으로 나온 것이었다.

3. 타임라인

▲ 의혹의 시작부터 검찰 수사 결과까지 정리한 영상
(비디오머그 / 2018년 3월 29일)

밑줄: 사실로 밝혀진 행적 | 취소선: 조작 | 물음표(?): 불분명
2014년 4월 16일
시간대 시각 박근혜 대통령 공식 행적 위치 검찰 수사 결과·언론 보도·관계자 증언 세월호
08시 <colcolor=black> 08:48 <colcolor=black> ? 관저[4] 급격한 변침[5]
08:52 최초 조난 신고
08:55 제주 VTS 교신
09시 09:19 최초 속보 (YTN 뉴스 특보)
09:30 첫 서면 보고[6] 조작으로 판명[7]
09:35 ? 세월호 52.9도 전복
09:37 진도 VTS 교신[8]
09:39 선원 7명 탈출
09:50 첫 서면 보고 다시 10:00로 조작해 대외 발표
09:54 ? 좌현 완전 침수
10시 10:00 첫 서면 보고[9] 집무실에 있었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음[10] 중대본, 1차 공식 브리핑
10:15 첫 번째 유선 지시[11] 조작으로 판명[12]
10:17 ? 세월호 108.1도 전복
골든타임 종료[13]
10:20 첫 서면 보고[14][15]
10:22 첫 번째 유선 지시[16][17] 마지막 구조[18]
10:30 두 번째 유선 지시[19] 지시 시간은 사실이나 다른 점이 있음
10:32 ? 청와대, 보고 영상 독촉
10:37 세월호 완전 침몰[20]
11시 11:00 중대본, 147명 구조 발표
11:06 오보: 전원 구조 통보[21]
11:18 선수만 남긴 채 침몰
11:34 유선 보고를 받음(세월호와 무관한 사안)[22]
11:43 유선 보고를 받음(세월호와 무관한 사안)[23]
12시 12:00 혼자 관저에서 점심 식사를 함[24]
12:50 유선 보고를 받음(세월호와 무관한 사안)[25] 희생자 2구 발견
13시 13:00 희생자 1구 발견
14시 14:00 관저에서 정호성의 보고를 받음[26]
14:15 최순실·문고리 3인방과 회의[27]
15시 15:22 전속 미용사 2명이 청와대 관저로 들어옴[28]
16시 16:37 전속 미용사 2명이 청와대를 나감[29]
17시 17:15 중대본 방문[30] 중대본 희생자 1구 발견
당초 알려진 바에 의하면 당시 박근혜는 당일 오전 10시 참사 관련 첫 보고를 받았고 15분과 30분 2차례 구조 지시를 내렸다. 그 후 대통령의 행적이나 지시 사항이 전혀 알려지지 않다가 7시간 후인 오후 5시 15분 중대본을 방문함으로써 참사 후 비로소 공식 석상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참고로 참사가 뉴스 특보로 처음 YTN에 보도된 때가 오전 9시 19분이고 세월호가 선수만 남긴 채 완전 침몰한 것이 오전 11시 18분이다. 세월호 참사 72시간 타임라인 보기.

조사가 진행됨에 따라 박 대통령의 행적이 묘연한 시간은 오히려 7시간보다 늘었다. 10시 15분과 30분에 유선으로 2번의 지시를 했다는 청와대 측 주장을 뒷받침할 근거가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박범계 의원은 이에 대해 해명을 요구하는 트윗을 올리기도 했다. 기사.

그런데 2017년 10월 12일, 문재인 정부 청와대에 의해 최초 보고 시점으로 알려진 오전 10시라는 시각마저 조작된 것이 밝혀졌다. 2018년 6월 22일 진행된 김기춘·김장수·김관진·윤전추의 관련 형사재판 첫 공판기일에서 공개된 박준우 전 청와대 정무수석의 검찰 제출 문건 2014년 5월 22일자 '세월호 사고 관련 상황 일지' 문건과 '4·16 골든타임 상황일지' 등에 따르면 9시 50분이 첫 보고 시간으로 설정되어 있었다. 검찰은 박준우가 제출한 서면을 공개하면서 "첫 보고 시간을 9시 30분으로 고치려다가 청와대 위기관리상황센터와 해양경찰청의 통화 녹취록과 맞지 않는 모순이 발견돼, '9시 50분에 보고됐다'고 기재했다"며 "국가안보실이 대통령에 대한 첫 보고시간을 최대한 당기기 위해 의식적으로 노력했지만 '9시 50분 설정'도 앞뒤가 맞지 않게 됐다"고 설명했다. 또한, 그 '앞뒤가 맞지 않게 된 이유'로는 "9시 50분에 작성된 보고서에 9시 57분에 발생한 상황이 적시됐기 때문"이라는 것을 들며 "이것이 사건이 시작된 계기"라고 설명했다. 2018년 7월 25일,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재판/김기춘·김장수·김관진·윤전추 증인으로 출석한 이 모 전 정무수석실 행정관은 해당 문건의 작성자였다. 이 모는 "09:50은 국가안보실에서 통보한 시간이었다"는 취지의 증언을 남겼다. # 기사에 따르면 세월호 당일 첫 보고 시각이 오전 9시 30분인 것으로 나타났는데 이러면 문제는 더욱 심각해진다. 오전 9시 30분과 첫 유선 보고를 한 시간으로 추정되는 오전 10시 15분 사이의 45분간의 행적이 불분명해지고 어떤 일을 했기에 최초 보고 시점까지 조작하여 행적을 은폐하려 했는가 의심을 가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다른 시간도 아니고 이 45분은 세월호가 본격적으로 침몰하고 구조 작업이 시작된 그 시간, 바로 골든타임이었다.
그러니까 오늘부터는 세월호 7시간 의혹이 아니라 세월호 7시간 반의 의혹으로 고쳐 불러야 하게 됐습니다. 대통령 보고 시각을 조작해서 검찰과 법원, 심지어 탄핵심판에까지 이용하고, 무엇보다 세월호 희생자 가족과 국민 모두를 속였습니다. 광장에서 외쳤던 '이게 나라냐'라는 외침이 또다시 참담한 정당성을 찾게 되는 순간입니다.
손석희 앵커, 2017년 10월 12일[31] JTBC 뉴스룸 원문
심지어 이 보고서의 시각뿐만 아니라 핵심 내용마저 조작된 것이라는 정황이 드러났다. 한겨레.

이것만으로도 충격적인데 10시 15분에 첫 지시를 내렸다는 것 자체도 불분명하다. 10시 15분에 박근혜가 처음으로 지시를 내렸다는 사실을 입증할 만한 증거가 단 하나도 시원하게 밝혀진 게 없기 때문이다. 먼저 우리는 2016년 12월에 있었던 청문회의 내용을 잠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정유섭(당시 새누리당 의원): 10시 15분에 대통령이 안보실장께 지시하셨다고 돼 있어요. 지시 사항 기억 안 나시죠?
김장수(당시 국가안보실장): 청와대 홈페이지에 나와 있는, 세월호와 관련해서 '이것이 팩트다'라는 게 있습니다. 그것을 제가 보고 제가 기억을 더듬어서 말씀 드리는데...
즉, 당시 국가안보실장이었던 김장수는 정말로 10시 15분에 박근혜가 지시를 했는지 아닌지도 기억하지 못하는 상태였고 당시 관저에 있었다고 했던 전 행정관 윤전추 또한 '대통령이 관저 집무실에 있었기 때문에 통화 여부에 대해서 알 수가 없다.'라고 진술했다. 아래에 자세하게 말하겠지만 관저 집무실이라는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10시 15분에 정말로 박근혜가 이러한 지시를 내렸는지는 통화 기록으로 확인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2017년 초에 헌법재판소에서는 박근혜 대통령 탄핵 심판 당시에 대통령 대리인단에게 박 전 대통령과 김장수 국가안보실장의 통화 기록을 제출하라고 했다. 하지만 한 달 뒤에 돌아온 대리인단의 대답은 '못 찾겠다.'였다. 오래된 통화 기록은 없다는 것이다.[32] 기사 참조.

만일 10시 15분의 첫 지시 사항마저도 거짓말로 밝혀질 경우 세월호 참사 당일 박근혜는 그 날 오전 9시 30분부터 중대본에 나타난 17시 15분까지 7시간이 아닌 8시간의 행적이 비어 버린다는 것이고, 참사가 일어났다는 보고를 받았으면서도 천하태평으로 아무런 지시도 하지 않고 국민들이 죽어가는 것을 방임했다고 볼 수밖에 없게 된다.

그리고 세월호 7시간 30분과 직접 연관된 사항은 아니지만 더 놀라운 사실이 드러났는데, 국가안보실에서 발견된 문건에 기록된 세월호 사고 시각은 08시 35분으로 기록되어 있어 정부가 발표한 사고 시각인 08시 48분과 13분의 차이가 나는 것이다. 미디어오늘. 이 사안도 매우 심각한 것이, 당시 청와대가 이 시간대의 세월호의 상태를 처음부터 인지하지 못할 만큼 무능했거나 모종의 이유로 정부의 발표 시각과 실제 문건에 기록된 시간의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더욱 충격적인 사실은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가 국회에서 가결된 후 청와대 서버가 무더기로 폐기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 이 서버 안에 어떤 것들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현재로서는 알 수 없지만 당시 특검이 청와대를 압수수색하려 했으나 청와대의 거부로 성사되지 못했다는 것을 생각해 본다면 어떠한 증거를 은폐하기 위해 서버를 폐기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2018년 3월 28일, 참으로 경천동지할 사실이 밝혀졌다. 검찰 조사 결과 최초 서면 보고 시각은 당초 박근혜 정부에서 주장했던 10시도 아니었고 2017년 10월에 문재인 정부에서 청와대 캐비닛에서 발견된 문건을 토대로 밝혀낸 9시 30분도 아닌 10시 20분이었던 것이다. 즉, 이미 골든타임이 다 지난 뒤에야 첫 서면 보고를 올렸고 그 사실을 감추기 위해 처음엔 마치 사고 직후에 곧바로 보고를 올린 것처럼 꾸미려고 9시 30분으로 조작했다가 최초 보고 시각과 박근혜의 첫 지시 시각의 간극이 너무 많이 벌어지니 그걸 줄이기 위해 다시 10시로 조작한 것이다. 즉, 조작이 2번 있었던 것이다. 또 10시 15분에 박근혜의 첫 번째 지시가 있었다는 것 또한 조작된 것임이 밝혀졌다. 실제 박근혜의 최초 지시 시각은 10시 22분이었다. 다시 말해서 최초 보고 시각과 최초 지시 시각 모두 조작된 것이었음이 드러난 것이다. 기사 참조.

또한, 2018년 6월 22일 진행된 김기춘·김장수·김관진·윤전추의 첫 공판기일에서 공개된 박준우가 검찰에 제출한 2014년 5월 22일자 '세월호 사고 관련 상황 일지' 문건과 '4·16 골든타임 상황일지' 등 문건에는 첫 보고 시간이 9시 50분으로 적혀 있었다. 즉, 9시 30분 → 9시 50분 → 10시 등 3회에 걸친 조작이 있었던 것이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그 세월호 참사 당일에 최순실이 있었다는 것과 박근혜는 국민들이 물 속에서 사투를 벌이던 그 순간에 잠을 자고 있었던 것이다. 즉, 박근혜는 10시 넘어서까지 골든 타임이 다 지나간 사이 늦잠을 자느라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박근혜는 최초 서면 보고를 받은 10시 20분 이후에도 다른 업무 전화를 받고 점심을 먹는 등의 행위를 한 후 오후 1시부터 약 90분 동안 올림머리를 하다가 오후 2시 15분에 최순실이 청와대에 들어와서 보고를 받고 박근혜에게 중대본에 갈 것을 지시하자 그제야 3시 22분부터 16시 37분까지 머리 손질을 하고 5시 15분에 중대본으로 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박근혜는 직무유기를 했고 비선실세 최순실이 이미 그때부터 국정 깊숙이 개입하고 있었다는 것이 4년 가까이 봉인되어 왔던 세월호 7시간의 비밀이다.

4. 의혹 발생

4.1. 2014년 4월 16일 (참사 당일)

참사 당일인 2014년 4월 16일 박근혜 대통령은 중대본에 나타나기까지 7시간 동안 단 2차례 지시를 내렸던 것으로 알려졌다. 세월호 참사 국민대책회의는 아래와 같이 각 지시가 부적절한 것이었다고 분석했고, 대통령이 사고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적절한 지시를 내리기 위해 필요한 보고와 보좌를 국가안보실과 대통령비서실이 충실히 했는지 여부에 의문을 제기했다.

본 항목 위의 내용에서 이미 밝힌 바와 같이 이 앞의 두 차례의 지시가 실제로 있었는지도 불분명하다. 그 중 첫번째 지시는 조작으로 판명되었다.
  • 오전 10시 15분 - 첫 번째 지시: "단 한 명의 인명피해도 발생하지 않도록 할 것, 선내 객실 등을 철저히 확인하여 누락되는 인원이 없도록 할 것."[33] - 조작으로 판명됨
  • 오전 10시 30분 - 두 번째 지시: "해경특공대를 투입해서라도 현장 인원 구조에 최선을 다할 것." - 이 시간에 지시를 내린건 맞지만 실제 지시 내용과는 다른 점이 있음[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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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원수인 대통령이 장장 7시간 만에 정적을 깨고 3번째로 반응을 보인 것은 오후 5시 15분이었다. 그러나 이때 세월호는 이미 빠져나오지 못한 304명의 실종자와 함께 선수만 내놓은 채 완전히 침몰한 상태였다. 그런데도 이때 박근혜 대통령은 뜬금없이 구명 조끼를 운운하는 등 세월호 사건의 진행 상황을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박근혜 대통령은 특별한 지시 없이 몇 가지 엉뚱한 이야기나 질문만 하다가 중대본을 떠났으며 이후에도 세월호 당일에는 보고만 받고 특별한 지시를 내리거나 반응을 보이지 않은 것으로 확인되었다.
박근혜 대통령: 다 그렇게 구명조끼를, 학생들은 입었다고 하는데 그렇게 발견하기가 힘듭니까?
안전행정부 2차관: 갇혀있기 때문에 구명 조끼가 의미가 크게 없는 것 같습니다.
박근혜 대통령: 갇혀있어요?[35]
안전행정부 2차관: 예.
이러한 발언은 사실 세월호 사고에 관한 보고를 지속적으로 받았더라면 나올 수 없는 말이었다. 그러나 참사 당일에는 온 국민이 너무나 경황이 없었기 때문에 이 발언이 문제가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게다가 당연히 대통령은 집무실에서 업무를 보고 있었을 것이라고 다들 생각하고 의문을 가질 생각도 하지 않았다.

4.2. 2014년 7월 7일 국회 운영위원회 업무 보고

2014년 7월 7일 열린 청와대 비서실의 국회 운영위원회 업무 보고에서 새정치민주연합 박영선 원내대표김기춘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에게 참사 당일 박근혜 대통령의 행적을 물었는데 김 실장은 "모른다"는 답변과 "집무실에 없었던 것은 아니다"라는 상호 모순되는 답변을 하면서 의혹이 불거지기 시작했다.

상식적으로 대통령이 집무실에 있었다면 비서실장이 그걸 모를 수가 없고, 비서실장이 7시간 동안이나 대통령의 행방을 몰랐다면 대통령이 집무실 대신 비서실장도 모르는 비밀스러운 곳에 있었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그마저도 아니라면 당시에 김기춘 비서실장도 완전히 직무유기를 하고 어디에서 놀고 있었다는 이야기밖에 안 된다. 아래는 당일 국회 속기록 일부 그리고 영상. 김기춘의 교활한 면모가 잘 드러나는 답변으로, 기자 출신인 박영선 의원마저 말려들 정도로 애매하게 말을 빙빙 돌리고 있다. 결론은 '당일 서면 보고를 하긴 했는데, 대통령이 집무실에 있었는지 있지 않았는지는 모른다.'
박영선: 김기춘 비서실장님, '대통령께 세월호 참사가 있던 날 서면보고로 10시에 했다'라는 답변이 있었지요?
김기춘: 예.
박영선: 지금 이것이 문제가 되고 있는데요. 이때 대통령께서는 어디에 계셨습니까?
김기춘: 그것은 제가 정확하게 알지 못하고 국가안보실에서 1보를 보고를 드린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박영선: 그러니까 대통령께서 어디에 계셨는데 서면 보고를 합니까?
김기춘: 대통령께 서면 보고하는 경우는 많이 있습니다.
박영선: "많이 있습니다."... 지금 이 상황이 긴박한 상황이라는 것을 청와대가 인지하지 못했나요?
김기춘: 그렇지 않습니다.
박영선: 그런데 왜 서면 보고를 하지요?
김기춘: 아마 정확한 사항을 보고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으로 압니다.
박영선: 그럼 대통령께서 집무실에 계셨습니까?
김기춘: 그 위치에 대해서는 제가 알지 못합니다.
박영선: 비서실장님이 모르시면 누가 아십니까?
김기춘: 비서실장이 일일이 일거수일투족을 다 아는 것은 아닙니다.
박영선: 대통령이 이 날 일정이 없었던 것으로 저희가 알고 있는데요. 집무실에 안 계셨다는 얘기지요, 지금?
김기춘: 그렇지 않습니다.[36]
박영선: 그렇지 않은데, 집무실에 계신데 왜 서면 보고를 하나요?
김기춘: 집무실도 좀 떨어져 있기 때문에 저희들이 서면으로 많이 올립니다.
이처럼 세월호 당일 대통령의 행적을 숨기고 말 돌리기로 일관하는 김기춘 실장의 발언이 국민들에게 의혹과 분노를 불러 일으키면서 '대통령의 숨겨진 7시간' 의혹이 본격적으로 점화되었다. 대통령의 행적을 감추려는 시도가 반대로 의혹을 키운 셈인데, 아래 내용을 보면 알겠지만 김기춘 비서실장뿐만 아니라 정부가 7시간 의혹을 감추고 관심을 돌리려고 할 때마다 오히려 7시간에 대한 의혹과 관심이 더 커지는 기현상을 낳았다. 어설프게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를 시전하려는 모양새가 '어디 이상한 데 있었는데 뻥을 칠 수는 없으니 어떻게 얼버무려 보자'라는 것으로밖에 안 보이기 때문인 듯.

5. 의혹의 경과

박근혜 대통령의 '사라진 7시간의 비밀'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는 웹상의 한 소스.

전술한 것처럼 청와대와 대통령 주변 인물들이 참사 당일 확인되지 않은 대통령의 7시간 행적에 대해 제대로 밝히지 않고 숨기기에 급급한 모습을 보이자, 유가족을 비롯한 각 시민단체와 국민들이 이에 대한 해명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이에 정부와 여당은 한 목소리로 '대통령의 행적은 국가 기밀 사항이다. 다른 나라에서도 대통령의 행적은 밝히지 않는다', '정상적인 집무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딱히 밝힐 것이 없다' 등의 이유를 들면서 해명하라는 요구를 묵살해 버렸다. 물론 이런 주장들은 모두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이라는 반박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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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구의 이 주장은 전혀 이치에 맞지 않는다. 미국의 경우 대통령의 행적은 홈페이지를 통해 분 단위로 공개된다고 하나 실제로는 분 단위는 아니고 하루 두세 번에서 며칠의 간격이 있다. 프랑스의 경우 미국과 비슷한 수준일 것으로 보이며, 홈페이지는 물론 페이스북을 통해 대통령의 1주일 일정에 대해 국민들에게 의견이나 비판을 듣기도 한다. 가까운 나라 일본[37] 또한 마찬가지로 총리의 일정을 분 단위로 나눠 기록하는 수상동정(首相動静)을 공개하고 있다. 이렇게 제대로 돌아가는 나라의 정치 지도자들은 모두 철저하게 자신의 행적을 공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선진국이 대통령 행적 문제에 얼마나 예민한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를 살펴보면 조지 W. 부시 전 미 대통령은 9.11 테러 당시 행사의 일환으로 유치원에서 동화책을 읽어주고 있었는데[38], 보좌관의 귓속말로 테러에 대해 최초 보고를 받은 뒤 약 7분 동안 계속 책을 읽다가 7분이 지나서야 자리를 떴다. 여기까지는 국민들의 대혼란 방지를 위함이었다고 참작해 줄 수 있으니 괜찮았는데[39], 백악관이 보도 자료를 내며 '대통령이 보고를 받은 즉시 자리를 떴다'고 하는 바람에 이후 국회에서 강한 비난을 받아야 했던 것.

5.1. 산케이 신문 가토 다쓰야 지국장의 기사

2014년 7월 18일 조선일보는 최보식 칼럼을 통해 세간에 사라진 7시간이 정윤회박근혜의 사생활과 연관이 있다는 루머가 있다는 것을 지적하며 이에 대한 해명을 요구하는 기사를 내보냈다. #

이에 일본 산케이 신문의 가토 다쓰야 지국장은 조선일보 칼럼을 인용해 행방불명... 누굴 만났는가?라는 기사를 8월 3일 게재했다. 여기서 가토 지국장은 "박근혜 대통령이 7시간 동안 정윤회를 만나고 있었고, 이 사람은 박근혜가 젊은 시절부터 긴밀한 사이이다"라는 주장을 했다. 청와대는 이에 강력히 반발하면서 가토 지국장을 고소했다. 여기에 대해 "대통령의 일정만 밝히면 끝나는 문제를 왜 이렇게 복잡하게 국제 문제로 끌고 가려고 하는가?"라는 비판이 있었다. 청와대 외에도 한국의 몇 보수 시민 단체들이 8월 6, 7일 가토 다쓰야 지국장을 명예훼손 혐의로 서울중앙지검에 고발했다.

2015년 12월 17일 서울중앙지법 형사30부는 이 건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해당 기사가 허위사실을 직시했다고 봤지만 면책 사유가 성립한다고 판단했다. 그 이유는 해당 사안이 공인인 박 대통령에 대한 것으로 일본인들에게 공공의 이익을 위해 알릴 가치가 있는 사안이었으며, 공인에 대한 기사는 허위 사실이라고 해도 작정하고 비방의 목적을 가진 것이 증명되지 않은 이상 기본적으로 면책 사유가 되며 기사 내용도 한일 양국 시민 사회의 사회적 판단에 맡겨야지 범죄가 성립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가토가 한 행동 자체가 반드시 올바르다고 할 수 없다고 덧붙었다. 5일 뒤 검찰도 항소를 포기함으로써 무죄가 확정되었다.[40]

이 재판에서 검찰은 정윤회를 소환해 사건 당일 자신은 롯데호텔 서울도 아니고 청와대도 아니고 강북 지역에서 알고 지내던 역술가 이세민(가명)을 만나고 있었다는 진술을 받았다.[41] 검찰과 재판부는 이를 그대로 받아들여 산케이신문의 보도가 허위라고 결론 지었다. 하지만 이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중요한 것은 정윤회의 행적이 아니라 대통령의 동선이라는 점에 대한 의문은 변함이 없어서 그저 산케이 신문의 보도가 허위라는 결론을 내기 위한 조사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42]

비록 박근혜 대통령의 7시간 행적을 밝히지는 못했지만 가토 지국장 고소 사건은 7시간 이슈가 대중들에게 널리 전파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또한 이 사건 이후 산케이신문은 완전히 반 박근혜 정부 성향으로 돌아섰고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졌을 때 일본 언론 가운데 이를 가장 적극적으로 보도하여 일본에서도 대서특필되도록 하는 1등 공신 역할을 했다.

여담이지만 가토 지국장은 그 후 형사보상 청구를 하여 일부 인용 결정[43]을 받았다. #

이후 양승태 대법원 사법농단 의혹 사건이 터지면서 당시 재판 거래에 대해서 진상이 밝혀졌다. 임성근 문서와 양승태 대법원 사법농단 의혹 사건 문서 참조.

5.2. 각 단체의 정보공개 청구

녹색당은 4월 16일 청와대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관한 기록과 세월호 참사 관련 기록 전반에 대해 정보공개 청구를 진행했고, # 청와대가 비공개 원칙을 고수하자 결국 10월 8일 서울행정법원에 청와대의 정보 공개 거부 처분을 취소할 것을 요청하는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하지만 2016년 3월 23일 대통령비서실과 국가안보실이 대통령에게 서면보고한 자료는 비공개 대상이라는 판결이 나왔다.[44]

세월호 특별법을 통해 조직된 세월호 특별조사위원회(특조위)에서 박 대통령의 사라진 7시간에 대해 해명하라고 요구했으나, 청와대는 이 요구를 거부하였다. 청와대 "세월호 특조위 '박 대통령 7시간' 조사는 위헌적 발상".

5.3. 언론의 의혹 제기

세월호국민대책회의의 박래군 공동운영위원장은 2015년 6월 22일 마약, 보톡스 등 의혹을 제기했고 2015년 8월 3일 명예훼손 혐의로 기소됐다. 이와 관해서 2016년 11월 5일에 공개된 이박사와 이작가의 이이제이의 240회 프린세스 메이커 특집 2 (with 이상호) 편에서 이상호 기자가 합리적인 의심을 가져 자신이 취재 중이며 연예인 보톡스를 위해 프로포폴 등을 맞고 있었던 것이 아니냐 하는 의문을 다시 제기했다.

프레시안 강양구 기자가 박근혜 대통령이 '불면증' 때문에 고생한다는 얘기를 여러 경로로 들었다는 한 측근의 제보를 토대로 참사 당일 수면제를 먹고 잔 게 아니냐는 가설을 제기했다. #국민의당 이상돈 의원이 창간 15주년 기념행사에서 한 말을 토대로 참사 당일 박근혜 대통령의 행적을 추측하는 기사를 썼다. 강 기자는 불면증 등 다양한 건강 이상이 박 대통령 세월호 7시간의 '진실'에 가깝다고 주장했다. 관련 기사.

5.4.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이후 청와대의 대응

산케이 신문의 가토 지국장의 기사 논란이 정리된 후 한동안 7시간 의혹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고 세월호 유족들이나 시민단체 및 일부 언론들이 간간히 7시간에 대한 해명을 요구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2016년 10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본격화되면서 다시 이 의혹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최순실에 의해 국정이 운영되었다는 믿을 수 없는 일이 사실로 드러나자 이 사건에 대한 상상 이상의 각종 의혹과 음모론이 수면 위로 드러났다. 하단 음모론 항목 참고. 물론 청와대는 "사실이 아니다"라는 원론적인 답만 계속 하면서 의혹 확인을 거부했다. 그런데 대통령이 길라임이라는 가명을 쓴 사실과, 특정 병원과 긴밀한 관계라는 정황과 청와대로 의구심이 드는 약품을 다량 반입했다는 자료로 인해 상황은 뒤집어졌다.

이는 청와대의 적극적인 해명을 이끌어냈다. 이를 해명한다고 '이것이 팩트입니다'라는 게시판을 급하게 만들었는데, 청와대의 해명이 거듭될수록 의혹이 가라앉기는커녕 오히려 더 의혹을 크게 만들었고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역효과를 불렀다. 이 7시간에 대한 청와대의 해명도 결코 예외가 아니었다.

최순실과 박근혜가 차움 병원에서 미용 시술을 자주 받았고, 정식으로 임명된 주치의가 아니라 비선 의사들을 동원해서 미용 시술을 받았다는 의혹이 제기되자 문제의 7시간 동안 미용 시술을 받고 있었거나 약물에 취한 상태라 보고를 받지 못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2016년 11월 19일 SBS그것이 알고싶다 코너에서 '세월호의 7시간과 대통령의 비밀을 푼다'는 방송을 보도하겠다고 발표하자, 청와대는 '이것이 팩트입니다' 홈페이지를 통해 미용 시술 또는 약물 주사에 대한 해명을 시도했다. 청와대의 해명(삭제됨) 그러나 언론에서는 이러한 해명이 기존의 감사원 자료를 비롯해서 다른 자료와도 부합하지 않는 거짓말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다. 해당 기사.

이때 청와대에서 세월호 7시간 동안 대통령은 관저 집무실에서 업무 지시를 하고 있었다고 해명하였다. 관저 집무실이라는 표현은 매우 기만적인 표현이다. 관저는 일종의 대통령의 숙소로서 관저에는 따로 집무실이 없을 뿐더러 업무 시간 동안 집무실이 아닌 관저에서 집무를 한다는 것도 매우 이상한 이야기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직접 관저에 가 본 유시민이 썰전에서 지적한 바 있다. 참고로 대통령 관저가 어떻게 생겼나 보고 싶은 사람은 이 영상이 영상을 통해 보면 된다. 전자는 노무현 대통령이 오전에 출근 전 비서관들과 일정 관련하여 회의를 갖는 모습이, 후자는 이명박 대통령이 아침 7시 30분경에 출근하는 모습이 잡혀 있다. 아무튼 청와대의 해명이 진실에 부합하는지 여부와 별도로 일단 대통령이 세월호 참사 당일 집무실에 없었다는 사실은 역설적으로 확인시켜 주었으며, 이에 김기춘이 대통령의 최측근인 비서실장인데도 대통령이 관저에 있는지도 몰랐냐는 조롱을 받았다. 야당 측에서는 왜 비상 상황에서 출근조차 하지 않고 관저에 있었냐는 비판을 가하기도 했다.

또 청와대는 언론이 전원 구조했다는 오보를 보도한 탓에 승객이 모두 구조된 줄 알고 혼란에 빠졌다는 해명을 했으며 문고리 3인방 중의 1인인 정호성 전 청와대 부속비서관도 검찰에서 "세월호 침몰 사건이 전원 구조로 정리된 줄 알았다가 나중에 상황을 파악했다"고 진술했다. #

그런데 이런 해명은 대한민국 최고의 정보력을 갖고 있어야 할 정부기관에서 그 긴박한 상황 판단을 언론 보도에 의존하고 있었다는 뜻이 된다. 정부가 스스로 세월호 참사와 같은 국가적 재난에 대한 해결 능력이 전혀 없다는 것을 시인하는 자폭성 해명이며 그나마 이 해명은 나중에 새빨간 거짓말로 밝혀졌다. 청와대 '7시간 거짓말'... 세월호 전원 구조 오보, 오전부터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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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청와대7시간.jpg
▲ 출처: 세월호 7시간, 대통령은 어디서 뭘 했는가? - 이것이 팩트 입니다.
청와대에서 제작한 7시간 타임라인 표

잇따른 해명에도 의혹과 비난의 목소리가 겉잡을 수 없이 커지자 청와대에서는 홈페이지에 7시간에 일어났던 일을 상단 표로 만들어 올리면서 상황을 진화하려 했다. 그런데 이 표 역시 의혹을 해소하기는커녕 더 키웠다. 일단 진짜로 그 시간에 서면 보고와 유선 보고라도 제대로 받았다면 그걸 2년 반 동안이나 감출 이유가 있었을까? 설령 참사를 막지 못했어도 대통령이 일상적으로 보고 받고 지시를 내렸다면 굳이 그걸 감출 이유가 전혀 없었을 것이다.

백 번 양보해서 저 표대로 7시간이 진행되었다고 해도 문제가 심각하다. 저 표에 의하면 박근혜는 단 한 번의 대면 보고 없이 서면과 전화로만 보고를 받고, 계속 보고를 받으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며, 보고를 받고도 상황에 대해서 전혀 파악하지 못했다는 결론이 나온다. 해상 사고 등의 대재난에 대해 아무런 대응 능력이 없다는 것을 고백하는 수준을 넘어 대한민국 최고의 엘리트 집단이 정상적인 사람 수준의 판단력조차 갖지 못하고 있었다는 뜻이 된다. 결국 저 표는 자신들이 국정 수행 능력이 없다고 광고를 하고 있는 셈이다.

물론 애초에 이 표를 액면 그대로 믿는 사람 자체가 없었고, 실제로도 여러 가지 정황을 통해 이 표가 거짓말로 가득 차 있다는 지적들이 쏟아져나왔다. 관련 기사. 저 표에 있는 내용이 맞는다고 해도 부실 대응으로 비난 받을 여지가 수두룩한데, 실제로는 저 표에 있는 수준의 대응조차도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결국 청와대의 이런 거짓말 퍼레이드는 오히려 7시간에 대한 여러 가지 가설과 음모론만 부추기는 결과를 초래했다. 음모론의 내용은 아래 문단 참고. 이처럼 해명이 전혀 먹혀들지 않자 청와대는 저 표를 제시한 이후부터는 공식 해명을 포기하고, 대신 음모론이 나올 때마다 이를 부인하는 식으로 소극적인 대응을 했다. 어떤 의혹이 제기되면 '그런 적 없다', '말도 안 되는 주장이다' 이렇게 대응하는 방식. 문제는 시중에 떠도는 음모론에 대해 반박만 했을 뿐 정작 중요한 7시간 동안 무엇을 했는지 해명은 좀처럼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이미 신뢰가 떨어질 대로 떨어진 상황에서 정부가 계속 이런 식으로 대응을 하자 각종 음모론에 대한 관심은 오히려 점점 늘어나는 기현상이 벌어졌다.

5.5.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이후 진행 상황


2016년 11월 21일, JTBC 뉴스룸은 차움병원 출신인 녹십자아이매드의 김상만 원장의 진료 기록을 확보하여 김상만이 최소한 2014년 3월까지 최순실에게 대리 처방을 해줬다는 의혹을 제기하였다. 그리고 2014년 4~5월 사이에 최순실 자매를 치료한 다른 2명의 의사가 있으며, 이 의사들에게 "사고 당일에 대통령을 진료했느냐?"라고 묻자 "기억이 나지 않는다"[45]고 답변했다면서 검찰이 이 3명의 의사들을 조사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보도하였다.

11월 28일 언론은 국방부 관계자의 말을 빌어 세월호 사건 시기에 청와대에 2명의 간호장교(신보라, 조여옥)가 근무하고 있었으며, 언론 보도 시점에 신보라는 전역하여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근무하고 있고 조여옥미국 텍사스에 연수 중이라고 보도하였다. 그러나 신보라조여옥은 모두 세월호 당일 대통령이 의료 시술을 받았다는 사실을 부인하였는데, 중요한 부분에 대해서는 답을 할 수 없다고 발뺌하거나 말을 흐리는 바람에 의혹을 증폭시켰다.

김기춘 전 비서질장이 세월호 7시간에 대해 의도적으로 은폐하려고 한 것이 밝혀졌다. # 정호성 전 청와대 부속비서관[46]과 같이 박근혜 정부의 최순실 등 민간인에 의한 국정농단 의혹 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국정조사의 증인으로 채택이 예정되어 있기에 세월호 7시간이 풀릴지도 모른다는 전망이 나왔다.

2016년 12월 6일 한겨레 신문에서 "드디어 비밀의 7시간 중 일부 시간에 있었던 일을 확인하였다"고 보도하였다. 한겨레 신문은 세월호 참사 당일 1시부터 90분 가량 청담동에서 미용실을 운영하고 있는 단골 미용사를 불러 올림머리를 하고 있었다는 기사를 내보냈다. 한편 SBS에서는 5시 15분 구조본부에 나타날 때 일부러 흐트러진 머리를 연출하기 위해 또 다른 시간을 할애했다는 방송을 내보냈다.

다음날인 12월 7일, JTBC 뉴스룸에서는 세월호 참사 당일 오후 3시 22분에 박근혜 대통령의 단골 미용사 2명이 청와대 관저에 출입하였으며, 75분 후인 4시 37분에 청와대를 떠난 것으로 확인되었다고 보도했다. 이 두 미용사는 자매 관계로 1명은 평소 박근혜 대통령의 머리 손질을 담당하고 다른 1명은 화장을 담당했기 때문에 세월호 당일에도 청와대에서 같은 작업을 했을 것으로 보았다. 관련 기사.

이에 대해 청와대는 그동안 2014년 4월 16일에는 청와대를 방문한 외부인이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가 갑자기 말을 바꾸면서 해명(?)을 내놓았는데, "4월 16일 출입 기록에 따르면 (이들은) 오후 3시 20분경부터 약 1시간가량 청와대에 머문 것으로 확인되며, 당사자들에게 확인한 결과 머리 손질에 소요된 시간은 20여 분"이라고 밝혔다. 시간을 대폭 줄이기는 했지만 일단 머리 손질을 받은 것 자체는 인정했으며, 그간 거짓말을 했다는 것도 간접적으로 시인한 셈이다.

2016년 12월 14일에는 머리 세팅에 대한 다른 증언도 나왔다. 세월호 참사가 발생하던 동안 시술 시간에만 3시간이 걸리는 아이롱 파마를 해주었다는 증언이다. # 청와대는 3시간 아이롱 파마 자체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반박했지만 # 지금까지 청와대가 세월호 7시간 동안의 행적에 대해 말 바꾸기를 밥 먹듯 해왔기 때문에 청와대의 반박은 신빙성이 떨어진다.

한편 노컷뉴스는 머리를 손질한 시각이 너무 늦은 것에 대한 의혹을 제기했다. 전직 대통령들이 업무를 시작하기 전인 오전 7~8시에 아침 식사, 세면과 함께 머리 손질을 했기 때문에 세월호 참사 당시 박근혜가 오후 3시가 넘어서 머리를 손질했다는 것은 통상적이지 않은 상황이다. 게다가 박근혜 대통령도 평소에는 오전에 머리를 손질한 것으로 알려져 있어서 이에 대한 의혹이 더욱 증폭되었다.

5.6. 탄핵소추 가결 이후

2016년 12월 18일에 공개된 탄핵 답변서에서는 세월호 사건 때 청와대에서 정상 근무를 하였다고 해명하였다. #[47] 그리고 한 술 더 떠서 세월호 당일에 대통령이 신속하게 현장 지휘를 했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해 12월 22일 헌법재판소의 이진성 재판관은 문제의 7시간에 대해 시각별로 해명하라고 요구하였다.

문고리 3인방 중 한 명인 정호성 전 비서관이 오후 2시 넘어서 관저에서 박근혜 대통령을 처음 봤으며 # 그때 사태의 심각함을 전했다고 한다. #[48] 그렇다고 그 전에 박근혜 대통령이 심각함을 몰랐다는 의미인지는 확실치 않다. 정호성의 보고 사항은 청와대가 공개한 7시간에 없는 내용이며, 탄핵 답변서에 정면으로 반박했다. 윤전추이영선이 관저에서 대기하였다고 한다. #

2016년 12월 30일 박근혜 대리인단이 박근혜가 세월호 7시간 동안 뭘 했는지 잘 기억하지 못하고 있으며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밝혔다. # 지금까지 그날 뭘 했는지 그렇게 지겹도록 추궁을 당했으면 기억하기 싫어도 기억이 날 법 한데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변명을 한 셈이다. 만약 박근혜가 세월호 7시간의 행적을 진짜로 기억하지 못한다면 그동안 청와대가 '이것이 팩트입니다' 등을 통해 해왔던 해명들은 다 거짓말이 된다. 이미 여론은 대부분 안 믿었기 때문에 놀라울 일도 아니긴 하지만 팩트라고 표까지 만들면서 잘 알지도 못하는 것을 사실인 양 거짓말을 했다는 것을 스스로 자백한 셈이다. 그게 아니면 전두환 시절 청문회에서부터 지금 국정 감사까지 많은 정치인들이 수없이 써먹었던 마법의 단어 '모릅니다',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를 써먹은 것이거나. 게다가 주장대로 정상 근무를 하였다면 기억이 없을 수는 있어도 기록은 있어야 한다.

2017년 1월 9일, 청와대가 세월호 당일을 'VIP 기록'으로 지정하여 30년간 봉인을 시도한 것으로 드러났다. #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을 중심으로 참사 당일 기록물을 애초부터 비공개 처리하고 비밀 문서로 지정하려던 단서가 JTBC에 의해 포착되었다. 대통령이 물러나면서 지정 기록물로 넘긴다면 최대 30년간 박 대통령 말고는 아무도 볼 수 없게 된다고 한다.

5.7. 박근혜 대통령의 공식 해명(2017년 1월 1일)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박근혜의 해명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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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박통7시간해명.jpg
작년인가, 재작년인가요?[49][50][51] 그때 세월호 참사가 벌어졌는데... 대통령으로서 제가 할 것은 다 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밀회를 했다'고, 이런 식으로 나오니까 얼마나 기가 막히던지...
박근혜 대통령, 2017년 1월 1일 청와대 출입기자단 신년인사회
세월호 참사로부터 992일이 흐른 뒤인 2017년 1월 1일, 박근혜 대통령은 청와대 상춘재에서 열린 출입기자단 신년인사회에서 공식 답변을 내놓았다. 요약하면 '나는 열심히 일했는데 논란이 일어나는 상황이 황당하고 어이없다.' 각종 의혹에 대해서는 '상식적으로 그럴 리 없다'는 답변으로 일관했으며 사태에 핵심적인 부분에서는 수사적인 표현으로 말을 흐리며 제대로 대답하지 않았다. 여러 모로 답변이 상당히 애매하지만, 결론적으로 세월호 7시간에 대한 박근혜 대통령의 공식적인 답변'경호에는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답변을 종합해서 조금 더 자세하게 서술하면 다음과 같다.
  • 박근혜 대통령은 세월호 참사 당일인 2014년 4월 16일, 공식적인 업무 장소가 아닌 자신의 관저에서 재택근무를 하고 있었는데, 세월호 보고를 받고 구조 지시를 내렸고, 전원 구조 오보를 받고 기뻐했다. 그러나 11시경 이것이 오보로 밝혀진 뒤 중대본에 빨리 가려고 했지만, 경호에 필수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마음대로 갈 수 없었고, 중대본에 무슨 상황이 생겨서 당장 출발할 수 없었고, 7시간이 지난 뒤 중대본으로 달려갔다.
  • 박 대통령이 7시간 동안 당일 본관 집무실로 출근하지 않고 관저에 있었던 이유현장이 중요하고, 현장에서 잘 하는 게 최선이기 때문이다. 또한 박근혜 대통령은 경호에 걸리는 필수 시간이자 중대본에 생긴 무슨 상황이 해결되는데 걸린 7시간 동안 자신의 관저에 있었는데, 큰일이 터지고 학생들을 구하는 데 온 생각이 집중되어 다른 일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세월호 7시간에 대해)
  • 저는 그날 사건이 터졌다는 것을 정상적으로 계속 보고 받으면서 체크하고 있었다.
  • 마침 그날 일정이 없어서 관저에서 일을 챙기고 있었다. 일정이 없는 날은 관저에서 밀렸던 업무를 한다. 그 날도 일하고 있었는데 보고가 와서 '특공대도 보내고 다 보내고, 한 사람도 빠짐없이 구조하라'고 했다. 해경 상황을 챙기면서 각 수석실 보고도 받고 있다가 전원 구조됐다고 해서 너무 기뻐 안심했는데 시간이 지나니 오보였다고 해서 너무 놀랐다.
  • 그래서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중대본)에 빨리 가려고 하니까 경호실에서 경호에는 필수 시간이 필요하다고 해 마음대로 제가 못 움직였다. 거기에 중대본도 무슨 상황이 생겨서 바로 떠나지 못했고, 다 준비됐다고 한 뒤 달려갔다.
(사건에 대한 본인 심경)
  • 대통령으로서 제가 할 것은 다 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밀회를 했다'고, 이런 식으로 나오니까 얼마나 기가 막히던지...
  • 헌법재판소가 그에 대해 상세한 내용을 제출해달라고 해 대리인단을 통해 다 정리하고 추가해서 지금 만들고 있다. 제출하면 헌법재판소에서 재판하게 될 텐데 이번만큼은 그런 허위가 완전히 걷혔으면 생각한다.
('세월호 7시간 밀회설'을 비롯한 각종 소문에 대해)
  • 말도 안 되고 입에도 담기 민망한 이야기를 했다. 대통령이 어떻게 밀회를 하겠나. 시간이 지나니 '굿을 했다'는 이야기가 기정사실화됐다. 너무 어이가 없었는데 이번에는 성형수술 의혹도 떠올랐다. 법원에서 7시간 의혹은 전혀 사실무근이라고 판결이 나서 정리가 되나 보다라고 생각했는데 다시 또 똑같은 이야기가 버전이 달라져서 시작된 것. 미용시술 건은 전혀 아니다. 그게 어떻게 가능하겠나. 상식적으로도 있을 수가 없는 일.
(참사 당일 외부인 출입에 관해서)
  • 그날 기억을 더듬어보니 머리를 만져주기 위해서 오고, 목에 필요한 약을 들고 온 것 외에는 아무도 없다.
  • 큰일이 터지고 학생들을 구하는 데 온 생각이 집중되는 상황에서 누가 다른 일을 어떻게 상상할 수 있겠나. 정말 상상할 수 없는 일. 사실이 아니라는 해명은 귓등으로 흘려버리는 상황.
(당일 본관 집무실로 가지 않은 이유에 대해)
  • 사실 현장이 중요하다. 앉아서 회의를 해도, 보고를 받고, 지시를 받아도 현장에서 잘하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딱 봐도 앞뒤가 다른 데다 알아먹기 힘들다.

게다가 경호·의전 문제 때문에 7시간이나 걸렸다는 것 자체가 국민들의 생명은 안중에도 없었고, 자신의 안위만 철저하게 신경을 썼다는 것을 인증한 것이니 국민들은 그저 기가 막힐 뿐이다.

5.8. 윤전추 행정관 증언에 따른 박근혜 대통령의 행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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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전 7시~7시 30분 = 윤전추 행정관 청와대 본관 출근

▲ 8시 30분 = 윤 행정관 인터폰으로 박 대통령 호출 받고 관저로 이동, 이후 박 대통령과 함께 개인적인 업무 처리(무슨 업무인지는 기억이 안 난다).

▲ 9시 = 윤 행정관, 박 대통령이 관저 집무실에 들어가는 것 목격. "박 대통령 머리·화장 상태는 단정했다. 관저 외부로 나갈 수 있는 상태였다", "분위기가 안정적이었다."(이때는 세월호 사고를 아직 몰랐을 것이라는 의미)

▲ 10시 = '급한 서류'가 와서 박 대통령에게 전달. "박 대통령이 문을 나와서 서류를 받아갔다."

▲ 서류 전달 후 점심 전 = 안봉근 당시 청와대 제2부속비서관이 박 대통령 관저 집무실에 들어갔다. 박 대통령에게 가글 전달(안봉근의 박 대통령 방문과의 선후 관계 기억 불명확)

▲ 정오 이후 = 박 대통령이 관저에 있는 식당에서 식사. "평소에는 정오 무렵에 식사하러 가지만 이 날은 평소보다 늦게 가고 빨리 마쳤다"

▲ 오후 = 머리·화장 담당 미용사 2명 청와대 방문, 윤 행정관이 마중 나가서 데리고 옴.

▲ 오후 = 화장, 머리 손질 마친 후 박 대통령에 민방위복을 챙겨줬다.

▲ 오후 = 윤 행정관이 미용사가 나갈 때 동행해 배웅.

▲ 오후 = 정호성 당시 청와대 제1부속비서관이 '급하게' 관저로 와서 박 대통령을 만남(머리 손질과의 선후 관계 불명확, 정호성은 국회 최순실 게이트가 구치소에서 연 청문회 때 "오후 2시 말미에 사태가 심각해진 것을 인지하고 관저로 갔다"고 진술함)

5.9. 2017년 1월 10일 탄핵심판 3차 변론기일에 제출된 대통령의 행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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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0. 2017년 10월 31일 국정감사에서 추가로 밝혀진 행적

대통령의 행적은 아니나, 국정감사에서 알려진 내용이 다음과 같다. #
  • 9시 1분: MBC 생활 날씨 기사에 세월호 관련 정보 입력 #
  • 9시 19분: 국정조사에서 김기춘 실장이 기존에 밝힌 인지 시간 (방송 보도 청취)
  • 9시 20분: 청와대에서 해경상황실로 전화 통화, 침몰 사실 및 인원 확인
  • 9시 25분: 119 소방상황실, 8시 30분 침몰 추정
  • 9시 30분: 해경 → 청와대로 상황보고서 발송
  • 9시 30분: 국가안보실, 세월호 침수 1보 보고서 제작, 보고.

5.11. 2018년 3월 28일 서울중앙지검 수사결과 발표[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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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청, 세월호 사고 보고 시각 조작 및 대통령훈령 불법 변개 등 사건 수사 결과 발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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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중앙지방검찰청(지검장 윤석열, 팀장 한동훈) 특수1부(부장검사 신자용)의 수사 결과에 의하면 청와대 위기관리센터는 언론사를 통해 9시 19분에 사고 사실을 인지하고 관련 사항과 구조 인원을 파악한 상황 보고서 1보가 9시 57분에 완성되어 오전 10시 김장수 당시 국가안보실장에게 전달되었다.

김장수는 박 전 대통령에게 전화를 하였지만 받지 않자 안봉근 전 비서관에게 대통령이 전화를 받지 않는다고 연락하고, 다시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았다. 이에 김장수는 신 전 센터장에게 이 상황보고서 1보를 전달하라고 지시하였고, 신 전 센터장은 10시 12~13분 사이에 상황병에게 보고서 전달을 지시하였다.

상황병은 직접 서류를 들고 뛰어가서 10시 19분쯤 관저에 도착하였고 보고서가 관저 경호관을 거쳐 내실 담당자에게 전달되었다. 담당자는 당시 청와대의 음식을 담당했던 요리연구가 김막업. 김막업씨는 평소와 같이 별도의 구두 전달 없이 대통령 침실 앞 탁자 위에 보고서를 올려둔 것으로 밝혀졌다. 안봉근은 전화를 받은 후 오전 10시 20분쯤 관저로 들어갔다. 안봉근이 침실 앞에서 수 차례 대통령을 부르자 박근혜는 그제서야 침실 밖으로 나왔고, 안봉근이 국가안보실장이 급한 통화를 원한다고 보고하자 박근혜는 다시 침실로 들어가 10시 22분 김 전 실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락가락하던 최초 보고 시간은 9시 30분도 10시도 아닌 오전 10시 20분 이후였다. 그리고 김장수에게 처음으로 지시 사항을 전달한 시간은 10시 15분이 아닌 22분. 검찰은 청와대에서 골든타임 10시 17분 이전에 대통령 보고와 지시가 있었음을 가장하기 위해 조작한 것으로 결론 내렸다.

즉, 보고 시간을 30분 늦춰서 박근혜의 지시가 늦었음을 감추려는 것이 아니라, 박근혜는 아무 이유 없이 연락이 안 되었고 애초에 보고와 지시가 이미 늦었음을 감추려고 보고 시간을 처음엔 사고 시각과 가까운 9시 30분으로 50분 빠르게 조작했다가 박근혜의 지시 시각과 간극이 너무 벌어지게 되니 다시 10시로 조작해 간극을 줄인 것이다.

또한, 2018년 6월 22일 진행된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재판/김기춘·김장수·김관진·윤전추 첫 공판기일에서 공개된, 박준우가 검찰에 제출한 2014년 5월 22일자 '세월호 사고 관련 상황 일지' 문건과 '4·16 골든타임 상황일지' 등 문건에는 첫 보고 시간이 9시 50분으로 적혀 있었다. 즉, 9시 30분 → 9시 50분 → 10시 등 3회에 걸친 조작이 있었던 것이다.

최순실은 청와대에 있었다. 최순실은 당일 이영선 전 행정관의 차를 타고 2시 15분경 A급 보안손님으로 관저를 방문했다. 박근혜는 최순실이 오기 전까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있다가 최순실이 온 뒤에 관저에서 박근혜와 최순실, 문고리 3인방의 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에서 박근혜의 중대본 방문이 결정된 것으로 조사되었다. 그리고 회의 이후에 미용사를 불러 머리와 미용을 마친 뒤 5시 15분 중대본에 박근혜가 도착했다.

요약하면 오전에는 그냥 뒹굴고 있었고 오후에는 최순실을 기다리느라 아무것도 안 하다가 중대본 방문이 결정되자 그제야 미용을 했는데, 청와대가 이걸 은폐하느라 보고서를 조작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아래에 열거한 가설 중 '그냥 관저에 있기만 했다'와 '최순실 조종설'이 가장 근접하다.

그러나 검찰의 조사로도 여전히 비는 시간대가 있다. 박근혜와 국가안보실, 해양경찰청이 의사소통을 한 이후부터 최순실이 관저에 오기까지 시간에 대한 정보는 여전히 불충분하다. 이전에 관저 주방 근무자가 당일 박근혜가 점심 식사를 관저 내 침실에서 식사를 했다고 증언한 바가 있기에 아마도 저 4시간 가량은 침실 내에서 계속 머물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 4시간 동안 침실 내에는 오로지 박근혜만 있었기 때문에 당사자가 스스로 무엇을 했는지 밝히기 전에는 이 나머지 4시간의 진실은 영원히 풀리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5.11.1. 관련 언론 보도

모든 언론이 박근혜의 행적에 대해 비판하는 내용을 실었으나, 조선일보만이 옹호적인 기사를 내보냈다.

5.11.2. 자유한국당 반응

2018년 3월 29일, 자유한국당은 홍지만 대변인의 논평을 통해 "세월호 7시간 원망하며 촛불 든 사람들 석고대죄해야"라는 발언을 하며 모든 이들의 공분을 샀다. 애초에 촛불을 든 이유는 그것만이 아니었음에도 자유한국당은 촛불 시위에 나온 시민들을 "세월호 음모론"에 심취한 이들로 단정해 버린 셈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 보수 커뮤니티에서도 소수지만 '저건 좀 아니지 않나' 하는 반응이 나왔을 정도였다. 그 음모론이 나온 배경이 당시 청와대 및 박근혜 정부, 그리고 자유한국당의 전신인 새누리당이 세월호 7시간 당시 박근혜의 행적을 은폐했기 때문인 걸 생각해 보면, 원인을 제공한 주제에 자기들의 책임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없이 하는 헛소리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 리 없다.

이 논평이 얼마나 어이가 없었는지, 김성태 원내대표가 "박 전 대통령이 불행한 사고가 났을 때 집무실에 있지 않고 침실에 있었다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국민들은 납득하고 이해하지 못한다"며 "잘못했습니다"라고 공식으로 사과하면서 "한국당의 입장이 최종적으로 조율되지 못한 부분이 있었다. 공식 논평이라고 확정 짓기는 어렵다"는 해명을 내놓았다. 대변인 성명은 당이 공식으로 내놓는 소견이기에 원내대표가 이렇게 해명을 한다는 것 자체가 당이 얼마나 막장 상태였는지 보여주었다. 그리고 자신들에 대한 여론이 최악이었는데도 여러 사안에 대해 뻔뻔하게 변명과 거짓으로 일관하던 자유한국당이 공식 사과를 했다는 것은 이들도 최소한의 위기 의식은 느낄 정도로 여론이 좋지 않았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에 정의당 대변인은 자유한국당에게 "대변(代辯)인이 아니라 대변(大便)인", "입으로 대변(大便)을 배설[53]하고 있으니 항문외과에 가서 본인들의 구강을 보여주고 정밀 검진을 받기를 바란다"고 다소 원색적인 수위로 맹렬하게 비난했다. #

5.12. 김기춘·김장수·김관진·윤전추의 형사재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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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중 위증죄로 기소된 윤전추를 제외하고는 모두 무죄 판결을 확정 받았다.

6. 박근혜 정부가 침묵했던 이유

결론부터 말하자면 2018년 3월 28일에 검찰의 수사에 의해 박근혜늦잠을 자느라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는 것최순실이라는 비선의 존재를 감추기 위해 정권에서 노력했다는 것이 밝혀졌다.

2016년 11월 28일, 새누리당을 탈당한 정두언 전 의원은 세월호 참사 당시 '박근혜 대통령 7시간'을 두고 "지금까지 (청와대가) 이유를 대지 못한 것은 폭동이 일어날 것 같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

세월호 참사에서 현장에 가장 먼저 도착했던 정부 측 관계자는 해경 123정이다. 그러나 이 해경 123정 정장은 이후 "충분히 구조해서 인명을 구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소극적이고 매우 미숙하게 대처하는 바람에 사상자를 발생시켰다"대법원의 판단으로 과실치사 혐의 유죄(징역 3년)가 확정되었다. 따라서 지휘 계통에 있는 해양경찰청 청장-해양수산부 장관-청와대박근혜정치적으로는 과실치사 책임이 있는 것이다.

2016년 12월까지 7시간 의혹에 대한 상황을 종합해 보면 청와대는 이 7시간 동안 박 대통령이 구조 관련 활동이 아닌 다른 일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 밝혀질 경우 국민들의 분노가 걷잡을 수 없이 터져나올 것을 몹시 두려워하고 있었던 듯하다. 그래서 이 문제를 '대한민국 국민들의 역린'이라고 표현하는 사람들도 있다. 특히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발발 후 이 문제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은 엄청나게 높아졌는데, 처음 음모론이 제기되었을 때 포털 사이트 검색어에 등장한 '세월호 7시간'이나 JTBC가 입수한 태블릿 PC에 세월호 7시간 관련 문서가 들어 있었다는 소문이 확산되었을 때 손석희의 대처[54]를 보면 이 문제가 국민들에게 얼마나 심각하게 받아들여졌는지 알 수 있다.

결과적인 이야기지만 차라리 이 7시간에 대한 의혹이 처음 제기되었을 때 이에 대해 솔직하게 해명하고 대국민 사과 및 세월호 유족들에 대한 철저한 사후 지원을 약속했다면 당시에 큰 비난과 질타는 받았겠지만 이처럼 참사 2년 반이 지난 후에도 국민의 의혹과 분노를 증폭시키고 있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사고 직후 바로 대처하여 노력한 끝에 사망자가 발생했다면 그 규모도 1~2자리수 단위로 훨씬 적었을 것이고 이들에 대한 보상도 보다 쉬웠을 거라는 게 중론이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는 해명의 골든타임을 놓친 후 계속 모호한 답변과 해명 거부로 시간을 끌었으며, 유족들에 대한 처우 결정과 재발 방지에 대한 대책을 세우는 대신 보수단체를 동원하여 유족들을 모욕하고 언론에 재갈을 물리는 등의 각종 정치공작을 통해 세월호 이슈를 진화시키는 데에만 힘을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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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간에 뭐 했는지 경호일지를 밝히면 끝날 문제"
이런 와중에 박근혜 탄핵 정국이 다가오면서 온 국민이 이 7시간의 의혹에 집중하게 되자 정부는 더 이상 출구가 없는 상황에 빠지고 말았다. 2016년 11월 30일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수사를 위해 임명된 박영수 특검이 이 7시간 문제를 본격적으로 수사하겠다고 천명하였으므로 7시간의 규명은 시간 문제가 될 수도 있었는데... 늘 하던 짓거리 그대로 청와대가 특검의 압수수색 요구를 거부함으로써 무산되었다. 이후 정권이 교체된 2018년 3월 28일에 겨우 진상이 규명되었다.

청와대의 이런 웃지 못할 행보를 이해하기 위해 "왜 7시간의 행적을 공개하지 않을까"라는 질문 대신 "왜 7시간의 행적을 공개하지 못할 수밖에 없을까"라는 질문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처럼 처절하게 행적을 은폐해야만 할 이유가 있다면 결국 그 7시간 동안 박근혜 대통령의 행보가 결코 정상이 아니었으며, 이것이 알려질 경우 국민들에게 큰 충격을 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즉 청와대가 암묵적으로는 그 7시간을 대통령이 인명 구조가 아닌 딴 데다 허비하고 있었다는 걸 드러내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숨길 필요가 없는 일을 하고 있었다면 감출 필요도 없을 테니까.

애초에 이 의혹은 '대통령이 일을 했다면 그 증거가 남는다'라는 명제의 대우 '증거가 없다면 대통령이 일을 하지 않은 것이다'와 '유리한 증거가 있다면 그를 제시하는 것이 정상이다'의 대우 '증거가 있는데도 그 증거를 제시하지 않으면 그 증거는 불리한 것이다' 라는 2가지가 근거인 주장이다. 7시간 반 간의 행적에 대한 정보가 공개되지 않는 시점에서 증거를 제시하지 못한 거면 박근혜가 정상적으로 일하지 않았다는 증거밖에 없는 것이고 증거가 진짜로 없는 거면 박근혜가 일을 하지 않아서 제시할 증거가 없는 것이다. 유죄추정 아니냐고 할 수 있는데, 대통령은 일거수일투족이 다 증거로 남으므로 '있어야 할 증거가 없다' 자체가 증거가 되는 것이다.

2018년 3월 28일 당시를 조사한 검찰의 발표에서 오전에는 사실상 아무 일도 하지 않았고 오후에야 최순실과 회의 이후에 중대본에 가기로 했다고 발표하였다. 당시는 정윤회 문건 개입 파동도 일어나기 전이라 최순실이란 존재가 드러나지 않았을 때다. 만약 이 사실이 당시에 드러났다면 모든 언론이 최순실이란 존재에 대해 취재를 시작했을 것이다. 일개 민간인이 일과 시간에 청와대 행정관과 같이 대통령과 회의를 하였고 그 후에야 대통령이 중대본에 갔다는 사실은 도저히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는 기이한 일이기 때문이다. 취재 과정에서 최태민, 정윤회, 정유라[55]와 엮여서 줄줄이 박근혜의 비정상적인 과거가 드러났을 것이다.

박근혜의 태도도 문제였지만 청와대 최고위직들도 책임에 자유로울 순 없다. 김장수 전 안보실장, 김기춘 전 비서실장은 당시 사태의 심각성을 대통령에게 어떤 수를 써서라도 전달해야 했지만 그러지 못하였다. 왜 전달하지 못 했는지를 캐다 보면 문고리 3인방이 이 문제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다는 사실도 드러났을 것이다. 김장수 안보실장이 이후 사퇴하긴 하였지만 김기춘, 문고리 3인방도 무사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밝혀졌을 때 국민들의 의문점을 정리하면
  • 박근혜 대통령은 왜 일과 시간인데도 오전 10시까지 침실에 있었나?
  • 박근혜 대통령은 왜 안보실장의 전화를 받지 않았나? 혹은 못 했나?
  • 다른 청와대 직원들은 오전에 왜 사건의 심각성을 박근혜 대통령에게 알리지 않았나?
  • 최순실이란 민간인은 대체 누구길래 박근혜 대통령과 회의를 하였나?
  • 오후 2시 넘어서 중대본 가기로 결정했는데, 그 후 3시간 이상 지체한 후 중대본에 간 것이 진짜 미용 때문이었나?

2014년 당시 그것이 밝혀졌다는 이유만으로 탄핵이 되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었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 심판 당시 헌법재판소 재판관들이 "박근혜의 신의 성실 의무를 위반했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그것만으로 탄핵하기는 어렵다."고 판단했다는 것을 들었다. 그러나 이는 본질을 잘못 이해한 것이다. 박근혜가 탄핵된 이후에도 한동안 설마 세월호 참사 당시에도 최순실이 국정에 개입했을 것이라고는 전혀 몰랐다. 헌법재판소 재판관들도 "구조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탄핵하기 어렵다."고 했지 "민간인이 국정에 개입해도 괜찮다."고 한 적은 없다. 그런데 이 사건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서 불거져 나온 것과 마찬가지로 무자격 민간인인 최순실이 국정에 개입한 사건이므로 역시 대의민주주의를 훼손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사실이 밝혀졌다면 이미 2014년에 비선실세의 국정농단 사실이 밝혀져 박근혜는 탄핵되었을 가능성이 크며, 설령 새누리당의 반발로 탄핵 소추 단계에서 무산됐어도[56] 극심한 레임덕에 시달렸을 것이다.

7. 7시간 규명에 대한 반대 의견과 반론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이후 많이 수그러들기는 했지만, 그간 7시간 규명에 반대하는 주장도 꽤 있었다. 지금도 존재는 한다.

이런 주장들은 주로 자유한국당과 공직자, 보수단체, 우파 성향의 일반 시민들을 중심으로 제기되었으며 이런 반대 의견을 표출하는 과정에서 각종 막말과 거친 언사로 세월호 유족들에게 심각한 모욕과 상처를 줬다.

우파들의 이런 주장은 거의 모두 대통령이 어떠한 직책인지를 알지 못하거나 세월호 참사의 본질을 망각해서 나온 궤변일 뿐이다. 단순히 '상대적으로 다른 의견이다'라고 치부할 문제가 아니다. 한편으로는 '도대체 그 7시간을 소비해서 대통령이 무슨 행동을 했길래 이렇게 결사적으로 규명을 반대하는가?' 하는 궁금증을 유발시키면서 오히려 규명에 대한 관심을 더 높이는 역할을 했다.

7.1. 대통령세월호 참사의 주범은 아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세월호 참사를 일으킨 것이 아닌데 이를 간접적인 살인으로 에둘러 간주하여 사건 당일 알리바이를 요구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7시간 규명을 요구하는 것은 해난 사고의 구조와 수습의 책임을 해경이 아닌 대통령으로써 진 살인죄가 포함된 직무유기 여부를 판단하려고 하는 것이지, 대통령이 세월호 사건의 직접적인 가해자이기 때문이 아니다. 경찰이 범죄 신고를 받고 늑장 대처를 해서 상황이 악화되었다면, 경찰이 사건을 일으킨 사람이 아니지만 여론의 질타를 받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세월호 사건의 가해자가 세월호의 선장과 그와 같이 도망친 선원들이라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가해의 책임을 지게 되는 사람은 가해자와 달라질 수 있다. 실제로 이물질 혼입이나 제품 불량 등으로 인해 발생하는 소비자 불만이나 클레임에 대해서 CEO 선에서 대처할 일이 많은 기업체들에서는 이미 이를 잘 인식하고 있으며 《Journal of Business Ethics》 같은 저널들에서도 진작 관련 연구들이 출판되어 왔다. 이는 정부의 경우에도 예외는 아니라서 어떤 대규모의 참사, 특히 인재(人災)가 벌어졌을 때 그 최종적인 책임을 질 누군가를 국민들이 원하는 경향에서 벗어날 수 없다.

당장 《Law and Human Behavior》에 2003년에 기고된 한 문헌에서는 9.11 테러 사건의 가해자가 항공기 돌진과 함께 이미 죽었음에도, 심지어 조지 W. 부시아프가니스탄에 군을 파병하여 진짜 주범빈 라덴을 잡도록 하는 대처를 취했음에도 여전히 그가 테러 희생자들에게 충분한 책임을 지지 않았다는 비판 여론이 나타났음을 지적하고 있다.[57][58] 다만 부시는 이외의 정치적 실책이 존재하여 비난 여론이 들끓는 경향이 있고 이 영향으로 여러 가지 책임론이 올라온다. 이처럼 어떤 참사의 주범이 아니라고 해서 비난을 받지 않을 줄 안다면 오산이라는 주장이다.

해당 사고가 어떤 유형의 사고인지는 불문하고 기업 CEO들이 까마득한 말단 직원의 잘못으로 인해 카메라 앞에서 허리 숙여 사죄하게 되듯이 대한민국 대통령은 임기 중의 인재에 대해서 최종적인 책임을, 심지어는 간접적인 살인 행위마저도 지게 되는[59] 것이다.

7.2. 어차피 구조는 못 했을 것이다?

대통령이 열심히 구조를 지시했어도 어차피 희생은 못 막았을 거라는 주장이다. 1분 1초를 다퉈 탈출해야 하는 침몰 상황에서 예외가 되는 선장 선원이 가장 먼저 탈출하고 승객들에게는 갑판 집결이나 탈출이 아닌 선내 대기라는 치명적인 방송을 한 시점에서 전체 구조는 불가능했을 거라는 주장 자체는 완전히 일리가 없지는 않다. 여기에 더해 해경 등도 탈출하라는 방송을 하지 않고 스스로 나오는 사람만 구조한 것도 대규모 참사가 된 큰 원인이 된다. 박근혜의 중대본에서의 행보[60] 등 정부의 행보도 무능함 그 자체였으나 총체적 난국 상황에서 '이 모든 게 박근혜 탓'이라고 딱 잘라 말하긴 힘들긴 하다.

그러나 박근혜가 7시간 동안 열심히 세월호 구조를 지시했을 경우 구조가 가능했을지 불가능했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고, 박근혜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대통령으로서 마땅히 다해야 할 책임을 방기했다는 점이다. 지금으로서 '팩트'는 박근혜가 국민들이 납득할 만큼 책임 있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며, 오히려 박근혜가 그 무렵에 "에이 어차피 해봤자 안 돼" 하면서 손가락만 빨고 있었다면 그건 그것대로 문제가 된다.

과거 정권에서도 이러한 종류의 비극적인 사건은 많았으며, 문민정부 때는 사고가 정말 한 달 걸러 하나씩 터질 정도여서 김영삼이 운이 지나치게 없었다고 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많았었다. 하지만 당시 벌어진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서해훼리호 침몰 사고, 성수대교 붕괴 사고와 이후 김대중, 노무현 정권 당시[61] 사실상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이후로도 민주당계가 TK 민심을 잡지 못하는 원흉으로 꼽히는 대구 지하철 참사 역시 이를 사전에 막지 못한 정부에 책임을 묻긴 했어도 사건 이후의 행적에 대해서 비난이 쏟아진 경우는 없었다. 역대 대통령들은 정치적인 견해 차이로 비난을 받거나 대비 또는 대처가 미흡했다고 비판 받을지언정, 이러한 종류의 책임을 지는 데는 물러섬이 없었다. 다들 최대한 빠르게 현장이나 중대본에 등장했고, 이후 나름의 대응책을 지시했다.

이와 같은 사후설명적, 결과중심적 반응은 '박근혜는 잘못이 없다'는 결론을 정한 후 그 결론을 뒷받침할 이유를 억지로 찾으려다 보니 발생한다.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즉 박근혜가 구조에 열심을 다하지 않았다는 것까지는 양보하겠다는 것인데, 박근혜가 잘못이 없다는 억지 결론을 빼고 다시 생각해 보면 대통령으로서 국민을 구하는 데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그것만으로도 구조의 성패와 무관하게 타격을 입을 일이다.

그걸 정당화하려다 보니 "어차피 해봤자 안 됐을 일이다, 따라서 박근혜도 잘못이 없다" 같은 옹호가 되는 것이다. 이런 소리는 같은 신념을 공유하는, 다시 말해 박근혜가 세월호에 관해 잘못이 없다고 믿는 사람들 한정으로 설득력이 있을 뿐이다. 더 냉소적으로 말한다면, 박근혜가 잘못한 게 없다는 자신만의 신념이 흔들리는 것이 두려워진 일부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세뇌시켜서 안정을 되찾기에는 꽤 좋은 전략이라고 할 수 있겠다.

확인은 불가능하지만 세월호 전복 직후 박근혜가 관심을 갖고 직접 상황 보고를 받고 적절한 지시를 내렸다면 희생자들의 구조 여부와 별도로 최소한 납득할 수 없는 구조 작업이 벌어졌던 것은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참사 초반에 국민 여론과 언론을 실망시킨 것은 정부의 믿을 수 없는 재난 관리 역량이었다. 이 무렵에 흔히 나오던 기사는 다름 아닌 "컨트롤 타워가 없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한 박근혜의 책임은 넓게 잡아보면 심지어 참사 이전으로까지 확장될 수도 있다. 취임 당시 박근혜는 행정안전부를 안전행정부로 직접 개명하면서 공식적으로 국가 위기 관리 컨트롤 타워를 수립했기 때문이다. 참사 초기에 중대본과 정부 부처들이 우왕좌왕하던 이유를 풀어내는 데에는 박근혜가 그때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나 짚어보는 것이 필요하다.

학문적으로 보더라도, 사회과학자들은 상대방에게 실제로 이익이나 혜택을 주었는가 여부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러한 이익이나 혜택을 주려는 의지가 있었는가의 여부임을 지적하고 있다. 실제로 상대방에 대한 진심 어린 사죄의 차원에서 "제가 지금 아무것도 드릴 것이 없습니다. 면목 없습니다만 괜찮으시다면 이 복권이라도 받아 주십시오" 라고 했을 때, 그 복권이 당첨되었는가 아닌가 여부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음을 입증해 보인 연구가 있다(Okimoto, 2008). 복권이 꽝이더라도 어차피 상대방의 참회의 의지를 읽은 사람들은 마음이 누그러진다는 얘기다. 세월호의 경우에도, 박근혜가 무슨 원더우먼처럼 날아와서 여객선을 바다에서 쑥 끄집어내지 못했다고 비난하는 것이 아니다. 박근혜에게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 국가 수반으로서 행정부를 지휘할 마음이 처음부터 있기나 했느냐'를 따지고 있는 것이다.

한편, 다르게 생각해 보면 이 주장은 "박근혜는 7시간 동안 정상적으로 근무하고 있었다"는 청와대의 입장 표명과 상충될 여지가 있다. 청와대는 박근혜가 구조에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는 사실도 인정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당시 대통령이 자기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지휘했더라도 구조 가능성은 상당히 낮았을 수 있다. 대통령은 어디까지나 비전문가이고 구조 현장에서 효과적인 지시를 하기에는 어려웠을 것이며, 현장의 판단이 대통령의 판단보다 정확할 수 있다. 구조 가능성에 대해서는 7시간의 의지 문제와는 별개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러나 재차 언급하듯이 국민들은 박근혜가 원더우먼처럼 구조하지 못한 것 자체를 비난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객관적 구조 가능성이 낮았을 것이라는 걸 근거로 추정해서 7시간 행적을 규명할 필요성 자체가 없다는 주장을 펼칠 수는 없다.

7.3. 대통령에게 교통사고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

세월호는 교통사고일 뿐인데 왜 대통령이 책임을 져야 하냐는 주장도 있다. 물론 보험 등의 체계가 잘 되어 있고 피해 규모가 적은 도로 교통의 경우는 사고가 나도 민간 차원에서 충분히 해결할 수 있다. 하지만 항공기나 선박의 경우에는 일단 사고가 나면 필연적으로 막대한 인명피해와 재산 손실이 발생하게 되기 때문에 국가의 상시 관리와 감시가 반드시 필요하며, 일단 사고가 났을 경우에는 반드시 국가가 적극적으로 수습과 대책에 개입해야 한다. 여기에 세월호 사건 직후에는 (구조 활동이 막장이기는 했지만) 해경만 참여한 게 아니라 소방청, 해군 같은 기관뿐만 아니라 미군에 인근 어민들까지 구조를 시도했다. 그리고 이들을 관리하는 기관은 모두 제각각인데 이렇게 해수부, 안행부, 국방부, 외교부, 지방자치단체를 총괄적으로 관리하기 위해서는 대통령이 직접 나서거나 그 권한이 필요한 상황이다. 다시 말하자면 이런 상황에서 대통령의 책임은 도의적 책임이 아니라 반드시 필요한 책임이었다.

실제 청와대의 비서진들도 이런 사실을 파악하고 9시 반에 대통령 박근혜에게 서면 보고를 하였다. 청와대의 우리나라 최고위직 공직자들도 대통령의 국가적인 개입이 필요한 사건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런데 참사 당시 세월호는 안전 점검도 제대로 받지 않은 데다 과적까지 한 상태였기 때문에 언제 사고가 나도 이상하지 않은 수준이었다. 이처럼 세월호 사고는 불가항력적인 천재지변이 아니라 인재(人災)에 가까운 사고이기 때문에, 반드시 책임자가 규명되고 재발 방지 대책이 마련되어야 한다. 구조 작업이 논란을 불러 일으킬 만큼 미숙했고, 대통령은 사건 발생 당시부터 계속 이 사건의 수습과 책임을 피하려고만 할 뿐 해결에 대한 어떠한 성의나 의지도 보이지 않고 있다. 7시간 부재는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상징적인 이슈다.
김선일 피랍 사건 당시 참여정부를 비판하는 박근혜
말이 필요 없다. 이것은 정부와 아무런 연관도 없이 여행자제국에 입국했다가 변을 당한 김선일 피랍 사건 당시 박근혜의 발언 영상으로, 직접적인 관계 여하와 무관하게 자국민의 생명이 걸린 국가적 사안의 책임은 대통령에게 있음을 박근혜 본인의 입으로 들을 수 있다.

7.4. 7시간 규명 요구는 국가 전복 세력의 트집이다?

이런 주장은 대대로 보수 정부에 불리한 이슈가 터질 때(2015년 한일 위안부 문제 협상 합의, 박근혜 대통령 탄핵 등)에는 항상 나타났던 주장이다.

세월호 참사 당시에도, 또 이후에도 박근혜 대통령은 세월호 책임 규명에 매우 소극적이었고 오히려 각종 정치 공작과 언론 플레이로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계속 차일피일 미루면서 이 지경까지 오게 만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그 7시간 규명이 저 위의 세월호 참사 책임 규명과 최소한 연결고리가 있을 것이라는 점에서 아예 상관 없지는 않을 것이다.

세월호 7시간 이슈가 잠재적인 뇌관이 될지도 모르는 까닭은 또 나온다. 그것이 박근혜의 무능한 모습이 아닌 비정한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박근혜가 최순실에게 의지하는 모습을 보고 시민들은 '대통령 박근혜'가 무능하다고 판별했지만 세월호 7시간은 얘기가 다르다. 사람들이 박근혜를 '인간 박근혜' 레벨에서 싫어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심리적으로 무능하지만 따뜻한 인물은 동정심을 일으키지만 무능함과 비정함으로 똘똘 뭉친 인물은 즉각 혐오와 경멸을 동반하는 반응을 불러온다. 실제로 정치심리학자들은 정치인들의 이미지를 결정하는 가장 핵심적인 특성이 다름 아닌 따뜻함(warmth)임을 지적하고 있다. 즉, 박근혜가 무능하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알지만, 시민들이 "무능하니까 끌어내려라"를 외치는 동안 박사모는 "무능하니까 얼마나 안 쓰럽냐"를 외칠 수 있는 것이다. 이 상황에서 박근혜가 냉랭한 사람이었다는 내용이 공식적으로 탄로나면 박사모는 그것을 인정할 것 같진 않지만, 적어도 96%의 국민들은 민감하게 반응할 가능성이 높다. 상당히 정치적인 접근일지도 모르는데, 세월호 7시간은 그 자체로도 파급력이 높다. 밝혀지는 바에 따라서는 오히려 잠재적인 시한폭탄이 될 수도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대통령의 가장 중요한 책무 중의 하나가 바로 국민을 보호하는 것이다. 중요한 사안이 어쩌고 해봤자 세월호 사고가 발생했던 그 순간만큼은 세월호 사고가 대한민국에서 최고로 중요한 사안이 된다.[62] 국민의 목숨을 구하는 게 국가가 하는 일의 최우선 순위이며 국가는 그러라고 만들어진 집단이다. 7시간 규명보다 중요한 사안이 많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국가 및 국가 지도자가 존재하는 진짜 이유를 부정하는 것이다.

7.4.1. 7시간 이후의 대통령 행보의 문제

이 사건에서 지속적으로 7시간 동안의 행보에 대한 의문이 제기된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바로 그 7시간이 지난 뒤 처음으로 중대본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했던 "다 그렇게 구명조끼를, 학생들은 입었다고 하는데 그렇게 발견하기가 힘듭니까?"라는 발언이다. 개요를 봐도 알 수 있듯 이 때는 이미 배가 완전히 침몰한 상황이었고 구조하지 못한 희생자들은 배 안에 갇혀 있는 상황이었다. 만약 대통령이 7시간 만에 모습을 드러냈더라도 이 때 상황에 대하여 알고 있는 듯한 모습을 보였더라면, 설령 행적이 지금처럼 불분명하였더라도 '세월호 7시간'은 그렇게까지 논란이 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박근혜 대통령은 "구명조끼를 입고 있는데 그렇게 발견하기 힘드냐"고 묻고, 안전행정부 차관이 "갇혀있어서 구명조끼가 큰 의미가 없는 것 같다"고 하자 "갇혀있어요?" 하고 반문하기까지 했다. 대다수 국민들이 박근혜 대통령이 7시간 동안 아예 사고에 대해서 모르고 있었거나 대략적인 사실만 알고 있었다고 추정하는 가장 큰 이유다.

추가적으로 세월호 사건에 대해서는 7시간 규명에만 국민들의 관심사가 쏠렸지만 박근혜 대통령이 그 이후에 사태 수습과 관련하여 아무런 일을 하지 않았다는 것도 만만찮게 심각한 사안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5시 15분에 중대본에 나타난 후 잠깐 머물다 다시 관저로 돌아가서 당일 일정을 종료해 버렸는데 5시 15분에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했다면 그제서라도 중대본에서 보고를 받고 지시를 내리든지, 아니면 최소한 국민을 달래기 위해 상황실에서 관계자들과 같이 모니터링이라도 하는 성의를 보였어야 했다. 결국 박근혜 대통령은 7시간 동안만 아무 일을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그 날 하루 종일 아무 일도 하지 않았던 것인데, 이는 대통령이 국가적 재난이었던 세월호 사건에 얼마나 관심이 없었는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8. 7시간 관련 가설 및 음모론

박근혜 정부가 워낙 비공개 방침을 고수하자 민간에서는 정말 별의별 설이 난무했다. 상기했든 제대로 밝히기만 하면 그래도 끝낼 문제를 너무 열심히 숨기고 있기 때문에 그 정도로 무시무시한 진실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커져서 이러한 상황이 일어난 것이다.

일단 여기 서술된 내용들은 2018년 이후 확실한 근거를 가지게 된 직무유기설을 제외하곤 어디까지 대중들 사이에 돌아다니는 확인되지 않은 추측이자 의혹일 뿐이다. 걸러서 듣자.

8.1. 직무유기

말 그대로 어처구니없게도 일국의 대통령이라는 사람이 비상사태가 터졌음에도 청와대로 출근하지 않고 아무런 스케줄도 없이 그냥 관저몇 시간이고 틀어박혀 있었다는 주장이다. 이는 전 청와대 조리장의 증언에 따르면 매우 유력한 설이었다. 언론들도 이 가설을 유력하게 보기 시작하였다. 심지어 청문회에선 비선 주치의가 대통령 스스로 주사제를 투약하도록 가르쳐 줬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이 설에 더욱 힘이 실렸다.

가장 유력한 정황은 이후에 박근혜는 수요일을 무조건 쉬는 날로 보냈다는 증언이 나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필 세월호 참사 당일인 2014년 4월 16일이 수요일이었다. 정호성도 "그 날은 일정이 잡혀 있지 않았다"고 하였다. 다른 음모론들에 비해 이 가설을 믿는 사람이 많은 이유다.[63] 그 어느 누구에게도 미용전 모습을 보이지 않는 것과 그날 오후에 미용사를 불렀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더욱 가능성이 높아진다.

아래의 미용시술설과 공통점이 있는데, 박근혜가 출근하지 않고 청와대 관저에 머무르면서 미용과 같은 개인 일만 했다는 점이다. 차이점이라면 미용시술설은 리프팅 시술 등 시술을 하느라 시간이 걸려서 집무실에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이고, 이 가설은 머리 손질과 같은 미용 작업을 하긴 했으나 여기에 들어간 시간은 큰 의미가 없고, 처음부터 박근혜 본인이 집무실에 갈 생각이 없었다는 내용이다.

한때 박근혜의 최측근이었던 이혜훈 의원은 "박 대통령은 후보 시절부터, 저녁 8시부터는 아무 일정도 잡지 않고 TV만 보았다"고 언론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이 때문에 저녁 모임은커녕 다음 날 조찬 모임까지 없었다고 한다. 대통령이 된 이후에는 저녁 6시부터 일정이 없었다는 증언들도 있다. 전직 청와대 조리장은 인터뷰에서 "박근혜가 평소 TV를 매우 좋아한다"고 밝혔다. 이미 가명 길라임을 통해 비슷한 추측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에 대한 증언이 되는 셈.

주말 빼고 평일 5일 중에 2일 정도 일정이 없었을 때도 있었다. 2차 청문회에서 김기춘 비서실장은 "박근혜를 일주일에 한 번도 안 만난 적도 있었다"고 하였다. 대신 일이 많으면 일주일에 2번도 만났다고...[64] 이어 청와대 전직 조리장은 "전에 모셨던 이명박 대통령은 공과 사를 분명히 구분해 항상 출퇴근 시간을 정확히 지켰으나, 박근혜는 출퇴근 개념 자체가 없다시피 하였고 심지어 평일에도 정해진 외부 일정이 없으면 집무실보다 관저에서 머물렀다"고 한다.

일요일에는 아예 출근하지도 않고 밥도 항상 혼자서 TV를 보면서 먹었다고 한다. 나가기만 하면 지지도가 치솟아 오르던 외국 순방 때도 항상 별다른 일정 없이 TV를 보며 혼자서 밥을 먹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최순실이 사실상 박근혜를 대신해서 문고리 3인방과의 회의를 주재하였다고 말했다. #, # 그리고 "박 대통령이 세월호 참사 당일 문제가 된 '7시간' 때도 관저에 있었다"면서 "관저 내부에서 TV를 봤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

당일 박근혜가 오후 5시까지 출근 안 했다는 것이 문제가 되기 시작하자, 청와대에서는 "박 대통령은 '관저 집무실'에서 집무했다"고 해명하였다. 그러나 전직 대통령 보좌관들의 말에 의하면 "집무실은 본관에 있는 것이고, 관저에는 침실이 있을 뿐이지 집무실이 없다"며 "'관저 집무실'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겠다"고 하였다. 김대중 대통령의 보좌관 말로는 "혹시 관저의 '서재'를 지칭하는 게 아닌가?" 하였고, 썰전에서 유시민은 "노무현 대통령 때 가본 경험에 의하면 관저는 직사각형 구조로 좌측은 회의실, 우측은 침실이며, 가운데 있는 좁은 복도 뒤에 작은 방이 하나 있을 뿐이고 따로 '집무실'이 없었다"고 하였다.

하루 중 대부분의 시간을 관저에서 보내는 박근혜의 특성상, 관저에 정말 집무실을 만들어 놓았을 가능성이 없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 집무실이라는 곳은 청와대 수석 비서관들이나 정부 장관들도 들어올 수 없는 개인 공간에 불과하다. 실제로 문고리 3인방이나 최순실 외에는 관저에 가본 적이 없을 정도로 사적인 영역이다. 노무현의 소울메이트인 유시민도 딱 한 번 가봤다고 한다.[65]

이와 같은 사실을 근거로 '7시간' 당시 처음 세월호 사건 보고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사태의 심각성을 알지 못하거나 혹은 무시한 채 비서 및 보좌관들에겐 어떤 일이 일어나도 자신을 방해하지 말도록 명령을 내리고,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관저에서 그냥 드라마를 보는 등 쉬고 있었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좀 더 자세히 서술하면 다음과 같다. 박근혜 대통령은 오전에는 서면보고 및 언론의 오보만 듣고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 했다. 점심 시간쯤에서야 어떤 경위를 통하여 심각함을 깨닫고, 중대본에 가기 전에 미용사를 부른다. # 오후 3시쯤에 온다는 연락을 받고 그제서야 "중대본에 가니 준비를 하라"고 지시한다. 여기서 알 수 있는 점은, "오전에 미용사가 들어가지 않았다"는 청와대 발표로 미루어 보았을 때 최소한 오전 중에는 정말 관저에서 쉬면서 외부 접촉을 차단, 혹은 무시했다는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서 집무실로 출근도 하지 않은 채 미용 세팅도 안 하고 아마 씻지도 않은 상태에서 뒤늦게 그 준비를 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미용사는 그보다 20분 후에 도착하고, 4시 반에 미용 작업이 끝나며 5시가 넘어서 중대본에 나타났다는 시나리오다.

얼핏 보면 다른 음모론이나 가설에 비해 이게 나은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이건 미용시술설보다도 심각한 문제다. 미용시술설은 "사전에 정해 놓은 미용 스케줄 때문에 갑작스러운 사고의 발생에 대해 제대로 대응을 못했다"라는 게 되는데, '국가적 참사가 났는데 미용이나 하고 있었다'라고 생각하면 분노할 수도 있지만 대통령이라는 직업의 특성을 생각하면 말도 안되는 변명은 아니다. 대통령은 외모 등 외적인 이미지 관리에도 상당한 신경을 써야 하며, 리프팅 시술과 같은 일부 시술은 수면 마취도 병행할 정도로 시간이 제법 걸린다. 때문에 만약 미리 예정된 미용 시술 중이어서 그런 것이었다면, 이후 대처가 어떻느냐는 별개의 문제고 이 자체는 그냥 하필 불운하게 참사와 시간대가 겹친 것 정도로 보고 넘어갈 수도 있었던 것이다. 이에 비해 직무유기설이 맞다면, 박근혜는 국가적인 대사건도 별 거 아닌 걸로 여길 정도로 현실 인식이 부족하거나 아예 생각할 능력도 없는 무능력한 인간이라는 뜻이 되어버리고, 무엇보다도 사고 수습을 '못' 한 게 아니라 '안' 한 게 된다.

당연하지만 이는 심각한 직무유기이자 명백한 탄핵 사유다. 국정 컨트롤을 해야 할 대통령임을 망각하고, 일반 백수들처럼 TV나 보며 놀다가 비서관들이 찾아오고 설득하니 그제서야 임무를 알았다는 뜻이다. 건강 악화와 같은 합당한 이유로 인해 집무가 불가능한 상황이라고 가정해도, 여객선 침몰 사고라는 중대사가 발생하면 최소한의 지시를 내리고 집무가 가능할 때까지 국무총리 등에게 대응을 잠시 위임하는 등의 방책을 일단 세우는 게 정상이다. 이 과정을 낱낱이 공개해서 국민들에게 양해를 얻어야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그조차 아니고 아무런 대응도 없이 관저에 계속 머물렀다는 것은 대통령의 의무를 망각한 셈이다. 그리고 2018년 3월 28일 검찰의 수사에서 이 가설이 가장 사실에 가까웠음이 확인되었다.

8.1.1. 최순실 조종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본격화되면서 기존의 대한민국 정치판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들이 계속 드러나자 한동안 수면에 가라앉아 있던 7시간 관련 음모론들도 본격적으로 제기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2018년 진짜로 최순실이 A급 손님으로 청와대에 갔음이 훗날 밝혀졌다. 당시 최순실(최서원)은 차움 의원 내에 있는 피트니스센터에서 운동 중에 세월호 침몰 뉴스를 보고 황급히 사라진다. 그리고 그 날 이영선 행정관의 차를 타고 청와대로 온 14시 15분 청와대에서 박근혜와 접촉한다. 그 뒤 10시 30분부터 4시간 넘게 움직이지 않던 박근혜는 최순실과 이재만, 정호성, 안봉근과 회의 후 단 30분 만에 나가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박근혜가 머리 손질을 준비하고 2시간 동안 머리 준비를 한 뒤(...) 17시 15분이 되어서야 중대본에 얼굴을 들이민다. 당시 최순실은 청와대에서 A급 손님으로 분류했기 때문에 출입 기록에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66] 결국 최소한 앞의 4시간 동안 왜 관저에서 계속 머물러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본격적인 행동을 하기 위해선 최순실 지시가 필요했던 건 확실해진 셈.

원래 최순실 조종설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당시 최순실이 독일로 도주 중이었다는 점에서 시작한 반 농담조의 음모론이었다. 즉 세월호 사고가 발생 시각이 대략 9시쯤이고 이때 비선실세 최순실이 있는 독일은 한국보다 7시간 느린 새벽 2시이니[67], 최순실이 자고 있다가 7시간 후인 독일 현지 시각 9시쯤에 깨어나 대통령에게 지침을 하달했다는 농담성이 강한 주장이었다. 그러나 추후 밝혀진 사실은 독일에 있었다는 내용만 빼면 진짜 최순실 기다린다고 아까운 4시간을 날려먹은 것이기에 최순실에 개입되어 있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는 맞아 떨어진 가설이다.

8.2. 북한 개입설

북한이 침몰시켰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이 음모론은 이 문서에 있는 다른 음모론과 달리 극우 보수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제기한 것으로, 말 그대로 북한이 대한민국의 혼란을 노리고 세월호를 침몰시켰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국민들의 반응은 인용한 기사에 잘 나와 있으니 참조하기 바란다. 그리고 박근혜 정부의 지지도가 떨어져 가는 마당에 굳이 정치적으로 이용을 안 했을 리가 없다. 무엇보다 만에 하나 이것이 사실일 경우 북한이 우리나라 배, 그것도 민간 선박을 공격했는데 아무것도 안 한 정부가 되기에 정말 지금까지 차원이 다른 수준의 문제가 된다.

뭐, 만에 하나 북한의 소행이라고 가정하면, 북한이 세월호를 침몰시키는 방법은 북한의 지령을 받은 개인이나 단체가 남한 내부에 침투해서 세월호 참사를 일으키거나, 잠수함으로 어뢰를 공격하는 것밖에 없다. 전자는 우리나라의 방첩망이 뻥 뚫렸다는 걸 의미하고, 후자는 남서해에 있는 진도 앞바다까지 북한 잠수함이 침투해서 민간 여객선을 공격한 뒤, 들키지 않고 유유히 빠져나갔다라는 판타지 같은 결론이 나온다. 전자도 무마하기 힘들지만, 후자는 정말 옹호할 거리가 없다. 이 경우 제2함대제3함대, 그리고 해병 2사단해병 6여단 관할 구역 부대원들은 경계 실패 책임을 물어 문책 그 이상의 처벌을 받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대한민국의 안보는 없었다는 거나 마찬가지라는 소리가 되기 때문이다. 이런 말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김대중-노무현 두 전 대통령으로 인해 안보가 이미 다 무너져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것은 그저 흔한 종북몰이일 뿐이다. 애초에 당시 세월호 사태는 박근혜 대통령 임기 중에 터졌고 그 이전에 이명박 대통령의 임기도 있었다. 특히 이명박 대통령의 임기 중에 북한의 도발이 없었으면 모를까 연평도 포격전, 천안함 피격 사건, 금강산 관광객 피살 사건 등 군필자들은 정훈교육 때 질리도록 듣는 내용이고 일반인이라도 알 법한 굵직한 도발이 한 번도 아닌 여러 번 터졌던 때이기도 했다. 반대로 뒤집어 말하면 저런 일이 있었는데도 집권여당은 안보에 신경 쓰기는커녕 아무것도 안 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8.3. 최태민 추모굿

세월호 참사 당일 최태민 추모 굿판을 벌이느라 7시간이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는 의혹도 제기되었다. 4월 16일이 최태민의 실제 사망일이므로 이때 최태민의 추모제를 벌였다는 것인데, 역시 날짜 끼워 맞추기 이상의 정황은 없다.[68] 그런데 이 굿판에 대한 의혹은 국회에서도 제기되었고, 청와대의 이원종 비서실장은 당연히 이에 대해 말도 안 되는 주장이라고 부인하였다. 한편 박근혜 대통령도 2차 담화문에서 "심지어 제가 사이비 종교에 빠졌다거나 청와대에서 굿을 했다는 이야기까지 나오는데, 이는 결코 사실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말씀 드립니다"라고 밝히면서 이 의혹을 부인하였다. 다만 2차 담화문 자체가 분노한 국민들에겐 매우 부정적으로 받아들여졌고, 지지율이 더 떨어지는 양상을 보여서 안 믿는 사람들만 더 많아졌을 뿐.

이에 관하여 인신공양설 관련 자료를 정리한 글이 있다. # 어디까지나 추측들을 모아 놓고 정보들을 나열해 놓은 수준이니 섣부른 판단은 금물이다.

8.4. 고의 침몰설

정부가 고의로 세월호를 침몰시켰다는 끔찍한 음모론도 계속 제기되고 있다. 세월호 침몰 자체가 정부의 계획이었기 때문에 일부러 승객을 구출하지 않고 방치했다는 기존의 음모론들과는 차원이 다른 극단적인 설이다.

고의 침몰설을 주장하는 것은 주로 극좌 측인데[69] 보통 한국이 천안함을 고의로 침몰시켰다는 음모론은 기본적으로 믿고, 여기에 더해서 제2의 천안함 피격 사건을 일으켜 똑같은 북풍 공작을 하기 위해 국정원이 기획했다고[70] 주장한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폭로되고 알자회나 통일대박론에서 볼 때 대북 선제공격을 위한 명분 쌓기 공작이었다는 소리도 한다.

이 외에 보험금을 타기 위해 배를 일부러 가라앉혔는데 사람들까지 빠져나오지 못했다는 주장, 아니면 그저 고의든 실수든 구축함이 그 주변 해상에서 세월호를 향해 어뢰를 쏘았다는 주장 등이 있다.

이들은 2014년 10월 13일, 세월호 조타수에 의해서 작성된 양심편지를 세월호 고의 침몰설과 결부시키기도 하지만 증언의 내용은 세월호 침몰 원인이라기 보단 세월호가 사고 났을 때 급침몰한 사유 중에 하나라고 보는 게 맞다.

이 주장은 다른 음모론과 비교해서도 침몰 원인에 관한 음모론과 더불어 근거가 빈약하므로 합리적인 추론의 결과가 아니라 정부에 대한 반감에서 나온 망상에 가깝다.[71]

8.4.1. 인신공양설

앞서 최태민의 기일에 굿판을 벌였다는 음모론의 확장 버전인데, 박근혜가 세월호 사건 희생자들에 대해 '고귀한 희생'이라고 언급한 점을 관련시켜서 세월호 사건은 최태민이나 박정희를 환생시키기 위해 영세교와 박근혜가 계획한 일종의 인신공양 의식이라고 주장하는 설이다.

이 설에 의하면 최순실이 영세교 교주인 셈인데, 보통 사이비 종교의 교주는 돈을 노리고 종교를 이용하여 신도들의 재산을 빼앗는 것이 목표이므로 사이비 교주들 본인은 정작 광신자가 아닌 경우가 많다. 물론 교주부터가 광신자인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최순실은 철저한 속물 성향을 가진 인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세월호 참사와 같이 돈과 직접 관련되지 않은 대형 사건을 기획하여 위험을 자초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한, 무엇보다도 샤머니즘의 인신공양에서는 신에게 공양하는 제물(祭物)이 빼돌려지거나 누락되는 일은 신에 대한 모독으로 여겨진다. 이는 바친 사람 뿐만 아니라 제사장까지도 처벌 받을 수 있는 중대한 신성모독이다. 이는 인신 제물을 많이 바치던 몰렉 성전도 그러했고, 실제로 꽃전쟁을 통한 인신공양을 한 아즈텍조차도 철저한 계획하며 정확한 시간에 정확한 양의 제물을 바치는 것이 원칙으로 지켜져야 했었다.[72] 만일 세월호가 인신공양이라면, 탈출한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그들은 그들의 신에게 신성모독을 한 셈이 되는 것이다. 최순실이 이만큼 큰 종교적, 규율적 리스크를 아무렇지도 않게 감수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즉 리스크에 비해 실익이 너무 없다. 사이비 종교라고 하면 모든 설명 불가능한 정황도 '사이비 종교니까 그럴 수 있다'라는 말로 우길 수 있기 때문에 나온 음모론이라고 볼 수 있다. 계획 및 실행의 어려움도 있는데, 세월호 정도의 배를 그냥 기뢰로 폭파 시키는 것도 아니고 불가항력으로 보이게 침몰시키려면,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실행에 옮기기까지 수많은 사람의 머리와 힘을 빌려야 한다. 이 정도의 일을 그것도 종교적인 이유로 실행하려면 계획하고 실행에 관여하는 사람 전원이 광신자이거나, 최소한 그에 동조하고도 아무렇지도 않은 사이코패스여야만 한다.

그러나 최순실 일당은 외국인도, 몰렉, 아즈텍 신자도 아니기에 위의 예는 근거가 없고 한국 샤머니즘 예에도 적절하지 않다. 국정농단 초기 보도에서 최순실, 최태민 부녀를 교주, 후계자, 무당이라는 용어를 썼던 임팩트 때문에 최순실이 종교 교주나 무당이라는 이미지가 박혔지만 정작 최씨가 교주나 무당이라는 정황도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교회에 나가 거액의 헌금을 하거나 점집을 찾아다니며 의존하는 기복신앙적인 행각을 보여주기도 했다.

8.5. 고의 방치설

우선 고의 침몰설, 인신공양설, 고의 '방치'설 등을 혼용하는 경우가 있는데, 엄연히 별개의 주장이므로 구분될 필요가 있다. 고의 방치설은 고의로 침몰시킨 건 아니지만 사건 발생 후 모종의 이유[73]로 일부러 구조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다는 주장이다.

이는 참사 당시 해경의 대처와 구조 활동이 상식적이지 않은 부분이 너무 많고, 결과를 떠나 일단 구조하려는 노력이라도 했는지조차 확신할 수 없는 수준이기 때문이다. 자세한 것은 세월호 구조 및 수습 문서 참조. 2016년 12월 4일 '거지갑' 박주민 의원과 이재명 성남시장의 라이브 대담에서도 두 사람은 참사 당일의 해경 구조 활동에 너무 말이 안 되는 것들이 많아서 미필적 고의로 의심이 될 정도라고 말하였다. 이들뿐 아니라 "진실을 인양하라"는 문구와 함께 박근혜 탄핵 촛불 시위에 참여한 민주당 지지자 상당수가 이 음모론을 믿어 언론에 자주 오르내렸다.

8.5.1. 잠수함 사고 은폐설


고의 방치설의 하위의견으로, 잠항 중이던 잠수함이 세월호와 충돌하여 기울어지게 되어 침몰했는데 잠수함 측에서 이를 은폐하고 현장을 이탈했다는 주장이다. 고의 침몰설과 다른 점은 잠수함이 일부러 세월호와 부딪치거나 잡아당겨서 침몰시킨 것은 아니고, 사건 자체는 우연한 사고인데 군의 명예를 위해 잠수함의 존재를 은폐했다는 것이다.

다른 음모론들과 달리 몇몇 저명 인사들까지 나서서 미는 바람에 상당히 퍼져나갔던 음모론이지만 상식적으로 세월호 정도의 체급의 배를 잠수함이 전복시킨뒤 무사히 잠항해서 도주했다는건데, 세월호 체급의 배와 부딪히면 보통 잠수함도 격침되고 운좋게 격침을 피하더라도 어디가 고장나서 잠항이 불가서한 상태가 되어 바로 들킬 위험이 크다.[74]
무엇보다도 맹골수도 해역은 수심이 30미터 정도로 잠수함이 잠항해서 돌아다니기는 매우 위험한 곳이다.


와중에 마침 도크에 들어간 배가 있었던 러시아의 아쿨라 급이 2개의 압력 선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주워 들은 누군가가 한쪽 압력 선체만 파손된 상태로 반대쪽만 이용해서 지구를 한 바퀴 일주하는 거리를 지나 러시아로 돌아갔다는 주장을 진지하게 하기도 했다. 당연하지만 결코 불가능한 일이다.

8.6. 미용 시술설 (필러 수술)

박근혜 대통령이 세월호 참사 당일에 피부 리프팅 등 성형수술, 시술을 받았다는 의혹이 있었다. 이 의혹은 7시간 의혹이 처음 제기되었던 시절부터 있었는데, 한동안은 다른 음모론과 마찬가지로 근거가 없다는 이유로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본격화된 후 대통령이 최순실을 통해 연결된 비선 의료진들로부터 지속적으로 미용 시술을 받아왔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이 미용 시술 의혹은 여론에게 단순한 음모론 수준을 넘어 상당한 정황과 가능성을 인정 받게 되었다. 이 때문에 안민석 의원 같은 정치권 인사들과 여러 언론에서 이 의혹에 대해 계속 추적했었다. 추가로 미용 시술을 받을 당시 프로포폴 등의 향정신성 약물을 투여 받았는지, 투여 받았다면 위법성은 없었는지 등의 여부도 7시간 의혹과 맞물려서 계속 확인 중이다.

JTBC 뉴스룸을 통해 전해진 소식에 의하면 세월호 사고 당일이나 이후의 수습 기간 중에도 박근혜 대통령의 입 주변에는 리프팅 시술 흔적이나 주사 바늘 자국으로 전문가들은 추측하는 흔적이 확인되고 있기에, 사고 당일이나 수습 기간 중에도 미용 시술을 받았다면 그야말로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 되기에 반드시 밝혀져야 할 부분이다.

한편 전술한 것처럼 2016년 12월 6일에 한겨레 신문은 7시간 중 1시간 반 가량의 시간 동안 박근혜 대통령이 머리를 손질하고 있었다는 기사를 내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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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1. 롯데호텔 서울 방문설

2016년 12월 22일, 미용 시술설의 일환으로 박근혜는 세월호 참사 당일 오전 롯데호텔 36층 VIP룸에서 김영재 의원한테 시술을 받았다는 제보가 보도됐다. 호텔측 CCTV자료도 있다고 한다. 선데이 저널 2016년 12월 22일 보도 관련 보도 추가. 이 말이 맞다면 미용사, 간호장교 등의 진실 공방은 오히려 진실을 감추기 위한 책략이며, 수백 명을 태운 배가 전복되고 수백의 사상자를 낸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대한민국 대통령청와대마저 비운 것이다.

구체적으로 2014년 4월 16일, 오전 8시 30분경 김영재박근혜는 같이 롯데호텔 서울 36층 VIP룸에 머무르며 미용 시술(필러 수술)을 준비한다. 그 와중에 참사 사고를 듣고, 하지 않으려다가 모두 무마됐다는 보고를 들은 뒤에 시술(약 1시간 소요)을 강행한다. 그 후 1.4km 떨어진 거리에 위치한 청와대로 이동해 휴식을 취하다가 의료용 가글[75]을 가져오라고 한다. 이에 간호장교 신보라 대위가 의료용 가글을 전달한다. 이상이 롯데호텔 시술설의 전말이다.

그러나 특검의 조사 결과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커졌다. 문제의 36층에는 VIP룸이 아닌 단순 연회장 '벨뷰스위트'만 존재하고, 당직자 진술이나 출입 기록에도 박근혜가 출입했다는 증거를 찾지 못하였다고 한다. 중앙일보.

8.7. 결론

이와 같은 주장들에는 합리적 의심과 음모론이 뒤섞여 있다. 하지만 사실 제 아무리 그럴 듯한 가설도 보통 확실한 물증이 없고 거의 정황 증거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의문의 진원지는 결국 대통령과 청와대다. 당시의 업무와 일정을 투명하게 공개하지 않고 사후 해명조차 제대로 하지 않는 태도가 각종 의혹과 음모론을 키우는 원인이 되고 말았다.

이렇게까지 의혹이 커진 가운데 많은 국민들은 정말 7시간 동안 상상을 초월한 비밀이 숨겨져 있는 것이 아닌지 불안해했지만, 정부는 박근혜 대통령이 무능과 범죄 혐의로 탄핵을 당하게 된 상황에서도 국민의 7시간 해명 요구를 묵살하였다. 게다가 황교안 권한대행 체제의 대통령기록물 봉인 처리로 인해 진실을 밝히는 데 큰 어려움이 생겼다.

하지만 2017년 12월 15일 검찰에서 세월호 7시간에 대한 수사를 위해 세종시 국가기록원 대통령기록관을 압수수색한 사실이 확인되었고 # 2018년 3월 28일 검찰의 발표로 마침내 세월호 7시간의 진실이 어느 정도는 밝혀지게 되었다. #

9. 유사 사례와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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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워커 부시의 7분
9.11 테러가 발생한 시점에서 부시는 플로리다 주의 한 초등학교 수업을 참관하며 어린이들에게 동화책을 읽어주고 있었다. 세계무역센터가 2차 공격[76]을 당한 후 부시는 보좌관에게서 "미국이 공격 받고 있다"는 첩보를 들었지만 약 7분 동안 가만히 앉아 있었다. 부시는 이후 국정 조사에서 왜 이 시간 동안 어떠한 행동도 취하지 않았는지 상세하게 해명을 해야만 했다. 그리고 청문회에서 관계자들은 그냥 탈탈탈 털렸다.

부시의 해명을 요약하면 '당시 학생들과 이후 언론을 통해서 자신의 행동을 볼 국민들이 당황하지 않도록 침착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다소 지체했다'이다. 또한 '당시 부시는 너무 충격적인 소식을 듣고 머릿속을 가다듬을 시간이 필요했다'라는 증언도 있다.

적어도 조지 부시는 공식 일정을 소화 중이었고 부시의 해명처럼 자신의 행동이 방송으로 중계되고 있는 시점에서 갑작스러운 행동을 보이면 국민들에게 더 큰 충격을 줄 수 있었기 때문에 상황 정리를 할 필요도 있었다.[77] 장소가 학교였던 것도 한 몫 했다. 부시가 당황했다면 현장에 있던 어린이들과 학교에서 일하는 교사 및 관심을 가졌던 학부모와 언론인들에게 곧바로 그 충격이 전달될 수 있었다.

또한 미국은 전 세계에 영향을 끼치는 초강대국이기에 미국의 대통령이 당황하여 허둥대는 모습을 보인다면 세계 정세도 더 심각하게 움직일 우려가 있었다. 당장 9.11 테러 사건 때 이라크를 제외한 거의 모든 나라들이 과거 미국과의 사이가 어땠든 간에 (심지어 북한마저도) 미국에 조의를 표하면서 사실상 "나는 범인이 아니다! 다른 놈들이 의심스럽다!"고 발뺌하고 필사적으로 항변하면서 앞다투어 밀고했을 정도였다. 그만큼 미국에게 알아서 기던 모습을 생각해 보자.

그리고 무엇보다 부시의 7분은 지도자로서는 비판의 여지가 있지만 옳고 그름을 떠나서 사람으로서는 충분히 이해할 만한 여지가 있는 행동이다. 일단 조국과 국민들이 공격 받아 수천 명이 죽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격에 빠질 만한 일이고, 상황에 따라서 더 많은 사람 혹은 인류 자체가 전멸할 수도 있다는 사실은[78] 어지간해서는 충격에 빠져 온몸이 굳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실제로도 당시 자료를 보면 보좌관의 말을 듣자마자 부시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진다. 충격과 공포에 빠진 것은 국민들뿐만이 아니었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이 7분에 대해서조차 추궁을 받는다. 그리고 이 일은 부시 본인이 논란을 자초한 면도 있다. 테러 직후 부시는 당시 상황에 대해 설명하면서 '테러가 발생했다는 보고를 받고 곧바로 학교를 떠났다'라고 과장했다가 거짓말이라는 게 들통나서 7분의 공백에 대한 논란이 더욱 커졌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솔직하게 말했다면 가벼운 지적만 받고 넘어갈 수 있는 일을 굳이 감추려다가 일을 키운 셈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보고 후의 행동은 9.11의 부시와 비교 자체가 안 될 정도로 대한민국이 미흡했다. 미국의 경우 이 7분 이후부터 컨트롤타워가 상당히 진행되었지만, 세월호 때는 너무 미비했고 그 이후로도 박근혜가 탄핵될 때까지 대한민국에서 컨트롤타워 역할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3년 뒤 영국 런던에서 영국 총리라는 사람자국에서는 일어나서는 안 되는 유형의 대형 화재 사건이 벌어진 지 10시간이 지난 뒤에야 성명을 발표하고, 24시간이 지난 시점에서야 사건 현장에 어슬렁 나타나 비난을 받고 있다. 박근혜의 행동과 전혀 다를 바 없는 행동이다. 그리고 이 영국 총리는 2019년 6월 사퇴한다고 밝혔다.

그리고 일본 아베 신조 총리는 2018년 7월 일본 호우로 사람들이 수백 명이 죽어나가는 와중에 무려 66시간이라는 경이로운 기록을 달성했다. 선거에 이기겠다고 비 때문에 난리인데 한창 술 마시고 인증샷이나 올리고 있었다. 하지만 나중에 뒷수습을 했기 때문에 별 일 없이 넘어갔다. 만약에 한국이나 미국에서 66시간 동안 없어졌다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그리고 그 총리는 1년 후에도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2019년 4월 고성 및 속초강릉 및 동해, 인제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산불이 발생한 일에 대해서 '문재인 5시간'이란 주장이 나오기도 했다. # 화재가 일어나기 직전 문재인 대통령은 주요 언론사 인사들과 함께 '신문의 날' 행사에 참석했는데 이를 두고 당시 보수 유튜버들이 문 대통령이 약 5시간 동안 술에 취해 화재가 난 상황을 방기했다는 주장을 펴고 자유한국당바른미래당이 이를 바탕으로 비판을 가하며 박근혜에게 그랬던 것처럼 10분 단위로 행적을 공개하라고 요구한 것이다. # 하지만 이를 분석한 JTBC 뉴스 등을 보면 알겠지만 저 주장에선 문재인이 산불 5시간 후 행사장을 떴다고 했는데, 실제론 산불이 나기도 전에 행사가 끝났고 자리를 뜬 걸 왜곡한 것이었다. 게다가 마셨다는 술은 기념의 의미로 든 샴페인이었고, 당장 그 행사가 조선일보 방상훈 사장 등 주요 언론사 인사들이 참석한 자리였기에 언론이 의혹을 제기하지도 않았다. 가장 중요한 건 문 대통령은 공식적인 일정에 따라 움직이고 있었던 반면 박 대통령은 공무도 아닌 사적인 일에만 치중한 것으로 모자라 어떤 사적 일을 했는지조차 밝히지 않았다는 것이다. 결국 가짜뉴스라는 비난만 받고 사그라들었다. 더 자세한 내용은 2019년 고성-속초 산불 문서 참조.

10. 기타

세월호 참사에서 있었던 대응에 유가족들을 중심으로 국민 여론이 악화되는 것을 겪은 이후 정부와 청와대는 메르스 사태백남기 씨 사망 사건에서 보다 적극적인 여론 통제에 나서게 되었고 이로 인해 대한민국은 더 많은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MBN, JTBC.

2017년 3월 박근혜의 탄핵소추안이 헌법재판소에서 인용되면서 대통령직에서 파면당한 이후 삼성동 자택으로 귀가하면서 이런 말을 남겼다. 참고로 그것조차도 본인이 직접 말하지도 않고 과거 자신의 대변인을 지냈던 민경욱에게 대독시켰다. #
제게 주어졌던 대통령으로서의 소명을 끝까지 마무리하지 못해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저를 믿고 성원해주신 국민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이 모든 결과에 대해서는 제가 안고 가겠습니다. 시간이 걸리겠지만 진실은 반드시 밝혀진다고 믿고 있습니다.

박근혜가 "시간이 걸리겠지만 진실은 반드시 밝혀진다고 믿고 있습니다"라는 말을 하는 바람에 시민들은 "헛소리 하지 말고 세월호 7시간의 진실이나 밝혀라"라고 격노하였다.

이어 2017년 10월 박근혜가 법정구속된 이후 구속 기간이 연장되면서 박근혜는 법정에서 또 다시 이런 말을 남겼다.
향후 재판은 재판부의 뜻에 맡기겠습니다. 더 어렵고 힘든 과정을 겪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겠습니다. 절 믿고 지지해주시는 분들이 있고, 언젠가 반드시 진실이 밝혀질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법치에 이름을 빌린 정치 보복은 저에게서 마침표가 찍어졌으면 합니다.

문제는 이 말을 하기 바로 며칠 전에 문재인 정부 청와대에서 세월호 최초 보고 시간이 실제보다 30분 늦춰졌다는 사실이 드러난 직후인지라 더욱 거센 비난을 받게 되었다는 거다.

한편 박근혜의 세월호 7시간 30분 국정공백 사태가 불거진 이후 대한민국에서도 다른 선진국들처럼 국가원수들의 일정을 투명하게 공개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게 되었고, 결국 문재인 정부는 24시간 일정 공개를 하기로 하였지만 박근혜 정부와 비슷하게 반나절 정도만 대통령의 일정을 청와대 홈페이지에서 공개했다. #, 실제 청와대 홈페이지의 대통령 일정표.

세월호 보고 시각 조작 사건에 대한 검찰 수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 때문에 이 과정에서 세월호 7시간 30분의 비밀이 조금 더 밝혀질 가능성이 있었다.

2017년 12월 15일, 검찰에서 '세월호 조작 사건' 수사를 위해 세종시 국가기록원 대통령기록관 압수수색을 한 사실이 확인되었다. #

2021년 박근혜 측이 석방 하루 전 펴낸 옥중 서간집 <그리움은 아무에게나 생기지 않습니다>를 통해 해당 의혹에 대해 말한 대목이 나오는데 당시 사고 당일 건강 이상으로 관저에서 보고를 받았고, 관련 의혹이 세간에 퍼져도 본인 입장에서 진실이 나오리라 믿었기에 침묵했다고 주장했다. #


[1] 대한민국의 제18대 대통령(2013년 2월 25일 ~ 2017년 3월 10일).[2] 대한민국의 정치범이자 간신.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일으킨 공범이다.[3] 전문은 박근혜 대통령 탄핵 심판/결정문 3.3.12. 재판관 김이수, 재판관 이진성의 보충의견 참조.[4] 김기춘을 비롯한 다양한 박 전 대통령 측 증인들이 '관저 집무실'이나 '관저에서 업무를 했다'는 표현을 사용했으나 이는 그 자체로 기만이다. 청와대는 대통령의 업무 공간인 동시에 생활 공간이며, 관저는 소수의 측근을 제외하면 철저히 경호 받는 대통령의 주거 공간이다. 우연히 회사 바로 옆에 집을 얻게 된 직장인의 예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즉 관저면 관저고 집무실이면 집무실이지 '관저 집무실'이란 건 청와대에 존재하지 않는다.[5] 하지만 국가안보실 첫 보고 문건에는 08시 35분에 사고가 발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정부가 발표한 시각과 실제 사고 발생 시각 사이에 13분의 차이가 나는 것이다. #[6] 2017년 10월 12일 최초 서면 보고가 10시가 아니라 9시 30분이었음이 밝혀졌으나 2018년 3월 28일 검찰 조사 결과 이 역시도 조작으로 밝혀졌다. 기사. 다시 말해 처음엔 9시 30분으로 조작했다가 무슨 이유에서인지 10시로 다시 고친 것이다. 즉, 첫 서면 보고 시각에 조작이 2번 있었다. 참고로 중앙부처 보고용 문서는 5분 단위로 기재하는 것이 관례다.[7] 2018년 3월 28일 검찰 조사 결과 밝혀진 사실이다. 기사 참조.[8] 침몰 전 최후의 교신이다. "선장이 상황을 판단해서 승객을 탈출시키라(진도 VTS)", "승객이 탈출하면 구조가 바로 되겠느냐(세월호)".[9] 원래는 10시에 최초 서면 보고가 있었다고 발표되었으나 문재인 정부 청와대에서 나온 문건을 보면 9시 30분에 최초 서면 보고가 있었다. 10시 최초 서면 보고는 박근혜 정부의 시간 조작인 것으로 확인되었다.[10] 김기춘의 말이다. 정리하면 "서면 보고를 했기 때문에 집무실에 있었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이며, 바로 다음 질문에서는 "집무실에 없었던 것은 아니다"라는 기상천외한 답변을 내놓은 것이다. 이해가 가지 않는다면 정상이다. 책임 회피를 위해 일부러 말을 빙빙 돌린 것이다.[11] "단 한 명의 인명피해도 발생하지 않도록 할 것, 선내 객실 등을 철저히 확인하여 누락되는 인원이 없도록 할 것."[12] 기사. 청와대는 박근혜 대통령이 10시에서 11시 사이에 2번 유선으로 구조를 지시했다는 증거를 내놓지 못했으며, 박범계 의원은 이에 대해 해명을 요구하는 트윗을 올리기도 했다. 기사.[13] 김기춘김장수2019년 3월 13일 진행된 관련 형사재판에서 10시 17분은 골든타임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특히 김장수는 "이준석이 구조된 9시 30분이 진짜 골든타임"이라는 등 구체적인 주장을 했다.[14] 2018년 3월 28일 검찰 수사 결과 실제 최초 서면 보고 시간은 이때였음이 밝혀졌다.[15] 검찰의 수사 결과 발표에 따르면 안봉근김장수로부터 "대통령과 전화 통화 연결이 안 된다"는 말을 들은 뒤 이영선에게 차량 대기를 지시했다. 안봉근은 10시 12분 이영선이 운전하는 차량을 타고 청와대 본관을 나섰고, 10시 19~20분 관저 내실에 들어가 박근혜를 침실 밖으로 나오게 해 김장수와의 통화를 주선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10시 22분에 박근혜의 첫 유선 지시가 나온 것이다.[16] 위에 조작된 (박근혜 정부가 주장한) 첫 번째 유전 지시 내용과 거의 똑같다. 내용은 검찰 수사 결과 기준 "단 한 명의 인명 피해도 발생하지 않도록 하라. 여객선 내 객실, 엔진실 등을 철저히 수색하여 누락되는 인원이 없도록 하라". 수사 결과가 밝혀지기 전까지는 박근혜가 이 시간(10시 22분)에 김장수에게 다시 전화해 '샅샅이 뒤져서 철저히 구조하라'고 지시를 내렸다고 주장했다.[17] 실질적으로는 이 시간에 유선 보고를 받으면서 사건에 대해 처음 인지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것도 보고 받은 것일 뿐, 사고 대처에 대한 지시를 내렸다는 증거는 전혀 나오지 않았다.[18] 10시 21분경 박준혁 군. 스스로 탈출한 인원을 구조한 것이다.[19] "해경특공대를 투입해서라도 현장 인원 구조에 최선을 다할 것"이라는 지시가 있었다고 주장했으나 국정조사 특별위원회 5차 청문회에서는 거짓이라고 주장했다. # 이후 2018년 3월 28일 검찰에서는 박근혜가 김석균 해경청장에게 전화 걸어 "특공대를 투입해 철저히 수색해 한 명의 인명 피해도 없게 하라" 취지 지시를 했다고 밝혔다.[20] 즉, 최초 변침 시점부터 완전 침몰까지 불과 109분밖에 걸리지 않았다는 뜻이다. 이렇게 큰 배가 불과 109분 만에 완전히 침몰한 이유로는 평형수 부족과 격실의 폐쇄 미조치 등이 꼽힌다.[21] 물론 오보이며, 세월호 유가족들의 뒤통수를 친 사건들 중 하나가 되었다.[22] 인도네시아 대통령 방한 시기 조정 관련 사안. JTBC 기사.[23] 자율형 사립고 관련 사안에 대해 유선 보고. JTBC 기사.[24] 당시 청와대 조리장의 증언(채널A 보도).[25] 기초연금법 국회 협상 진행 상황에 대해 최용원 고용복지수석과 통화.[26] 기사.[27] 기사.[28] JTBC 보도. 파면된 이후에도 삼성동 사저에 들어왔던 정송주, 정매주 자매이다.[29] JTBC 보도.[30] 여기서 그 유명한 "다 그렇게 구명조끼를, 학생들은 입었다고 하는데 그렇게 발견하기가 힘듭니까?"라는 망언을 했다.[31] 세월호 첫 서면 보고 시점이 조작되었다는 사실이 공개된 날이다.[32] 통상 통화 내역의 보관 연한은 1년이다. 그러므로 2014년 4월 16일 당시의 통화 기록은 폐기되었을 가능성이 크다.[33] 이 시간에 이미 세월호는 입구와 갑판이 침수되어 진입이 불가능했다.[34] 박근혜가 주장했던 "해경특공대를 투입해서라도 현장 인원 구조에 최선을 다할 것"이 아닌 "(해경)특공대를 투입해 철저히 수색해 한 명의 인명 피해도 없게 하라"는 내용이였다. 참고로 검찰의 판단하에 이 지시는 원론적인 수준에 불과했다는 점이다.[35] 선장 및 7명의 선박 승무원들이 학생들과 일반인들을 버리고 탈출해서 벌어진 상황이다.[36] 바로 위에 집무실에 위치해 있었는지 알지 못한다고 발언하였다. 다만 모른다는 뜻이 집무실에 없다는 뜻이 아니라는 의미의 답변일 수도 있다. 물론 '대통령이 집무실에 있다면 비서실장이 그걸 모를 수가 없다.'는 명제가 거짓이라는 전제 하에...[37] 2016년 구마모토 지진 당시 지진 발생 34분만에 NHK에 모습을 보였다.[38]공식적인 행보였다. 심지어 부시가 책을 읽는 모습은 생중계까지 됐다![39] 특히 어린이들이 있다 보니 자칫 잘못하면 동심 파괴가 일어날 수 있었다![40] 이 기사를 번역한 사람도 입건을 검토한 바 있으니 해당 기사는 번역을 해서 공개하지도, 부탁하지도 않는 것이 좋다. 단, 정윤회, 최태민 등의 실명이 언급됐으나 세간에 알려진 것과 같은 롯데호텔 서울 등 장소에 대한 언급은 없다.[41] 애초에 정윤회는 집에 있었다고 진술했으나, 검찰이 위치 추적 자료를 보여주자 그제서야 번복하고 이세민을 만났다고 진술했다.[42] 이세민은 대구 역술가로 박정희 대통령 시절부터 거의 모든 대통령들의 (이명박 제외) 사주를 직접 봐준 것으로 알려져 있고, 정·재계에 두루 걸친 인연이 있다. 특히 이희호 여사(김대중 대통령 부인)와도 인연이 있는 것으로도 알려졌다. 한 때 사기 사건에 연루되었을 때 여당 중진 의원이 탄원을 해 주기도 했다.[43] 재판 출석에 든 항공료, 변호사 비용 등[44] 해당 판결에서 대통령과 청와대도 정보공개 의무가 있는 기관이라고 인정한 점은 주목할 만한 성과이나, 재판 과정에서 재판부가 청와대를 의식하는 것인지 너무 소극적이라는 평가도 있었다.[45] 다른 사람도 아니고 대통령을 진료한 기억이 없다는 것이다. 한두 번 진료한 게 아니라면 그럴 수 있지만 그 날이 날이다 보니 설득력이 떨어진다.[46] 당시 박근혜 대통령이 관저에 있다고 증언을 하였다. #[47] 최순실 국정조사 이후에 박근혜 대통령이 청와대에 있었다고 믿는 사람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정호성도 그 당시 관저에 있었다고 하였다.[48] 이렇게 자세히 진술하였는데, 2시 이전 상황은 언급이 안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정호성도 자세한 상황은 알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49] 세월호 참사는 3년 전, 즉 2014년이었다.[50] 대한민국 전체를 충격에 빠뜨린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정작 대통령 본인은 세월호 참사가 언제 일어났는지도 모른다는 뜻이라고 볼 수 있다.[51] 1월 1일이라는 특성상 년도를 헷갈릴 여지가 있기는 하지만 당시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평가가 아주 나빴기 때문에 대형 참사가 일어난 년도도 모른다면서 많은 비판을 받았다.[52] '세월호 사고 보고 시각 조작 및 대통령훈령 불법 변개 등 사건' 수사 결과 발표.[53] 사실 배설이란 표현은 소변에만 사용한다. 대변은 배출이라고 해야 옳다.[54] 뉴스룸에서 '아직 해당 사건에 관해서는 확실히 밝혀낸 것이 없다'고 해명했다. 단순 루머로 취급하고 넘어가도 괜찮았으리라는 것을 생각하면 이런 대처는 극히 이례적이다.[55] 정유라는 이때 아직 미성년자로, 아시안 게임과 이대 입학 전이라서 주목을 그렇게 끌지 못했을 것이다. 그냥 자식으로 1녀가 있다 수준으로 존재 정도만 알려졌을 확률이 높다.[56] 당시 새누리당은 과반인 152석을 차지하고 있었다.[57] Tyler & Thorisdottir, 2003.[58] 심지어 미국은 '자드로가 법'이라고 해서 현장에서 숨진 경찰관 제임스 자드로가의 이름을 딴 희생자 보상 법안을 통과시켰다. 게다가 한 번 더 개정을 거쳐서 첫 보상 범위에서 누락되었던 7,800명의 부상자를 포함한 63,000명의 공무원과 민간인들에게 아낌 없는 보상을 지급하기까지 했다.[59] 여기서 '책임을 져야 하는'이 아닌, '책임을 지게 되는'으로 굳이 적힌 것에 유의할 것.[60] "다 그렇게 구명 조끼를, 학생들은 입었다고 하는데 그렇게 발견하기가 힘듭니까?", '갇혀있어요?'[61] 노무현 후보 당선 후 국민의 정부의 인수인계 및 직무 양도 직전의 시기.[62] 이걸 무시했기에, 국가가 국민을 위해 움직이지 않았다는 사실이 국제적으로 알려지는 바람에 제대로 국가 망신을 사고 말았다. 한 예시로, 영국에서 런던 그렌펠 타워 화재사고가 발생했을 때 영국의 언론들이 든 예시가 바로 세월호 참사였다.[63] 그리고 이 음모론을 믿지는 않더라도 이와 별개로 저 직무유기 자체에 분노한 사람도 매우 많았다. 결국 직무유기라는 추측은 더더욱 퍼지게 되었다.[64] 비서실장이 대통령을 가장 가까이서 보좌하는 자리라는 것을 생각해 보자. 둘 중 누군가 휴가를 간 것이 아닌 이상 출근 일에는 빠짐 없이 보는 것이 정상이고, 일이 많거나 비상사태일 경우에는 대통령 옆에 붙어서 계속해서 지시를 받고 있어야 정상이다. 즉, 저 말은 "우리 일 안 했어요"라는 말밖에 안 된다(...)[65] 2017년 1월 2일 뉴스룸 신년 토론에서 다시 언급되었다.[66] 실제로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졌을 때 101경비단이 최순실의 청와대 출입을 모르쇠로 일관했다는 사실이 들통났다.[67] 독일은 GMT+1, 한국은 GMT+9로 8시간의 차이라는 주장도 있으나, 엄밀히 따지자면 2014년 3월 30일부터 10월 26일까지 독일에서는 서머타임을 시행했으므로 7시간 차이가 맞다.[68] 일단 최태민은 사망한 지 꽤 지나서 사망 신고를 했기 때문에 정확한 사망일은 알려지지 않았다. 대충 5월 경이라고는 하는데 사실은 1월에 사망했다는 말도 있다. 이 때문에 실제 사망일이 4월 16일일 가능성이 있기는 한데 딱히 근거는 없다.[69] 그러나 14.8 프로젝트 같은 극우측의 음모론 집단 중에도 세월호 고의 침몰을 주장하는 경우가 있다. 미국의 주류 음모론이 이라크전 참전에 반대하던 극좌의 9.11 조작설에서 극우의 QAnon으로 옮겨간 것처럼 음모론은 반드시 좌우 구분이 들어맞는 것은 아니다.[70] 즉 북한 잠수함의 공격으로 세월호가 침몰한 것으로 꾸미려 했는데, 소수이지만 탈출한 승객들이 있어서 북한 잠수함 주장은 못하고 단순 사고로 발표했다는 주장.[71] 침몰 시킨 방법이 고속 항주 중에 닻을 내렸다가 가라앉기 전에 올렸다는 등의 주장인데, 그런 상황에 닻을 착수시키면 그걸 고정하고 조종하는 윈드라스 스테이션이 통째로 뜯겨나간다. 게다가 이 윈드라스는 전기를 이용해서 가동되는데 침몰이 확정될 정도로 배가 기운 상황에서는 발전기의 안전장치가 가동되기 때문에 맨손으로 닻을 끌어올리기라도 한 게 아니고서야 증거 인멸하겠다고 닻을 올리는 것은 결코 불가능하다.[72] 트로이 전쟁에서 아르테미스에게 바쳐진 사슴을 죽였다고 돌림병으로 고생한 그리스 군만 봐도 그 대가가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다.[73] 세간에 알려지면 안 되는 것이 배에 남아 있어 이를 먼저 처리할 시간이 필요했다거나.[74] 이에 관해 이곳 나무위키를 포함해 여러 커뮤니티에서 극심한 논쟁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선박 갤러리는 관련 종사자가 있다는 이유로 답정너 분탕을 심하게 당하기도 하는 등 커뮤니티간 분쟁으로 까지 번져버렸다.[75] 통상적으로 의료용 가글은 필러 시술을 한 경우에 사용한다.[76] 1차 공격, 즉 북쪽 1번 건물의 충돌도 바로 부시에게 첩보가 갔지만, 부시는 물론이고 보좌관들도 단순한 충돌 '사고' 정도로 여기고 참관 행사를 계속 진행하기로 했다.[77] 비슷하게 두기는 어렵지만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연설 전 목을 풀면서 핵전쟁을 언급했다가 소련에서 핵미사일을 준비했다는 일화가 있다. 즉 이런 거물 정치인의 말 한 마디나 행동 한 동작에도 의미를 두고 받아들이는데, 사상 초유의 사태가 터졌을 때 생방송 상황에서 부산하게 움직이거나 당황한 모습을 보인다면 국민적 동요는 물론이고 이후 정치적으로도 나약하거나 대처 능력이 부족한 대통령으로 각인되어 안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다.[78] 코소보 전쟁으로 중국에서는 반미 운동이 심화되었고 러시아에서는 옐친의 실정으로 공산당과 군부의 반감이 강해진 상황이었다. 만약 이 테러에 중국이나 러시아가 관여되어 있었다면 진짜 핵전쟁을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설령 저게 중국이나 러시아의 테러가 아니더라도 미국이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서 세계 정세 및 경제가 어떻게든 흔들릴 건 분명했기에, 미국의 지도자인 부시가 7분밖에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은 것도 달리 생각해 보면 대단한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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