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7 14:51:30

가만히 있으라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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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배경3. 과정
3.1. 이유3.2. 추태
4. 결과5. 여담6.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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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가만히 있으라 용혜인.jpg
기다리래. 6835톤 배뒤집히는 동안, 뒤집힌 배가 선수 일부분만 남기고 가라앉는 동안, 기다리라는 방송만 되풀이하고 선장과 선원들이 빠져나가는 동안, 움직이면 위험하니까 꼼짝 말고 기다리래. 해경은 침몰하는 배 주위를 빙빙 돌기만 하고 급히 구조하러 온 UDT 대원들과 민간 잠수사들을 막고 있지만, 텔레비전은 열심히 구조하고 있으니까 안심하고 기다리래. 오지 않는 구조대를 기다리다 지친 컴컴한 바닷물이 먼저 밀려들어 울음과 비명을 틀어막고 발버둥을 옥죄어도, 벗겨지는 손톱과 부러지는 손가락들이 닥치는 대로 아무거나 잡아당겨도, 질문하지 말고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래. 바닷물이 카카오톡을 삼키고, 기다리래를 삼키고, 기다리래를 친 손가락을 삼켜도, 아직 사망이 확인되지 않았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기다리래. 엄마 아빠가 발 동동 구르며 울부짖어도, 구조된 교감 선생님이 터지는 가슴에다 목을 매어도, 유언비어에 절대로 속지 말고 안내 방송에만 귀 기울이며 기다리래. 죽음이 퉁퉁 불어 옷을 찢고 터져 나와도, 얼굴이 부풀어 흐물흐물해져도, 학생증엔 앳된 얼굴이 고스란히 남아 있으니 손아귀에 그 얼굴을 꼭 쥐고서 기다리래.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맹골수도 물속에서 기다리래.
김기택, <기다리래>[원주](<우리 모두가 세월호였다>[2] 수록)
세월호 참사 당시 일부 선원들이 승객들에게, 교감과 일부 교사가 학생들에게 한 말[3]이자 이후에 당시 대학생이었던 용혜인[4]이 시작한 사회 운동의 이름.

2. 배경

2014년 4월 16일 일어난 세월호 참사는 단순한 천재지변도 아니며 완전한 불가항력도 아니었다.[5] 이 사고는 직무유기 등으로 빚어진 엄연한 인재였을 뿐만 아니라 충분히 수많은 사람들을 구해낼 수 있었던 참사였다. 당시 배가 침몰한다는 사실을 맨 처음 최덕하 군[6]이 신고하여 구조 작업이 이루어졌고 그렇게 172명이라도 구조할 수 있었지만 선장 및 선원들의 지시가 제대로 되어 있었기만 했다면, 아니 해경이라도 제대로 일을 했다면 훨씬 더 많은 대부분의 인명들이 구조될 수 있었을 것이다.

허나 승객들에게 들려온 건 아래와 같은 방송들이었다. 후술할 움직이지 말라는 말을 세어보면 23번이나 했다.
2014년 4월 16일 오전 8시 52~54분

“승객 여러분께 잠시 안내 말씀 드리겠습니다. 현재 자리에서 움직이지 마시고 안전봉을 잡고 대기해주시기 바랍니다. 안전봉을 잡고 대기해주시기 바랍니다. 이동을 하시면 지금 위험하오니 안전봉을 잡고 대기해주시기 바랍니다.”

“선내 승객 여러분들께 다시 한번 안내 말씀 드리겠습니다. 현재 있는 자리에서 이동하지 마시고~ 바랍니다. 현재 있는 자리에서 움직이지 마시고 안전봉을 잡고….”

현재 계신 자리에서 이동하지 마시고~ 현재 위치에서 움직이지 마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번 승객 여러분들께 안내 말씀 드립니다. 현재 계신 위치에서~ 현재 계신 위치에서~ 현재 자리에서 이동하시면 위험하오니~.”
8시56분

현재 계신 장소에서 움직이지 마시고 주변에 잡을 수 있는 봉이나 물건을 잡고 대기해주시기 바랍니다. ~안내 말씀 드립니다~ 절대 움직이지 마시기 바랍니다.”
9시6분

“선내 단원고 학생 여러분 및 승객 여러분께 안내 말씀 드립니다. 현재 위치에서 절대 이동하지 마시고 대기하여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절대 이동하지 마시고~ 승객분들께서는~ 다시 한번 안내 말씀 드립니다. 구명동의가 착용 가능하신 승객 여러분들께서는 구명동의를 착용하여주시고~ 승객 여러분들께서는 현재 위치에서 절대 이동하지 마시고 대기하여주시기 바랍니다.”
9시7분

“선내 다시 한번 안내 말씀 드립니다. 구명동의가 손에 닿으시는 분들께서는 다른 승객들께 전달 전달하셔가지고 입으실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주시고 현재 위치에서 절대 이동하지 마시고 대기해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번 안내 말씀 드립니다. 현재 위치에서 절대 이동하지 마시고 구명동의가~ 한 곳에 있으신 분들께서는 전달, 다른 승객분들께 구명동의를 전달하셔서 다른 분께도 구명동의를 착용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현재 위치에서 절대 이동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9시14분

현재 위치에서 절대 움직이지 마세요. 움직이지 마세요. 움직이면 더 위험하니까 움직이지 마세요.”
9시26분

“선내 승객 여러분께 안내 말씀 드립니다. 해경 구조정 및 어선 접근 중, 10분 후 도착 예정입니다. ~하시고, ~서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9시28분

선실이 더 안전하겠습니다.

단원고등학교 학생들에게 다시 한번 말씀드리겠습니다.”
9시29~30분

“~소리를 질러~ 권○○ 어린이! 권○○ 어린이 지금 3층에서~ 움직이지 마시고 기다려주시기 바랍니다.”

“지금 현재 위치에서~ 어선들이 접근 중에~ 현재 위치에서 이동하지 마세요.”

현재 위치에서 안전하게 안전하게 기다려주시기 바랍니다. 현재 해경 헬기가 본선 접근 중입니다. ~기다려주시기 바랍니다.”
9시35분경

“해경이 오고 있으니 현재 위치에서 움직이지 말라.”
9시37분

“선내 안내 말씀 드리겠습니다. 현재 구명동의를 착용하신 승객분들께서는 구명동의에 매여 있는 끈이 제대로 묶여 있는지 다시 한번 확인하셔서 잘 묶으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번 안내 말씀 드리겠습니다. 구명동의를 착용하시고 계신 승객분들께서는 구명동의에 매여 있는 끈이 잘 묶여 있는지 확인을 다시 한번 하시기 바랍니다.”
9시42분

현재 위치에서 이동하지 마시고 안전하게 대기하시기 바랍니다.”

현재 위치에서 안전하게 기다리시고, 더 이상 밖으로 나오지 마시기 바랍니다. 현재 위치에서 안전하게 기다리시고 더 이상 밖으로 나오지 마시기 바랍니다."

3. 과정

파일:2014053000000000000207321.jpg

당시 배가 완전히 침몰할 때까지 구할 수 있었던 시간이 1시간 35분이나 남아 있었다. 시뮬레이션 결과 이때 제대로 된 탈출 명령을 내렸다면, 승객 전원이 무사히 구조될 수 있었다고 한다. 박형주 가천대 교수의 보고서에 따르면 세월호가 기울기 시작한 8시 50분에 이준석 선장이 퇴선을 명령하면 5분 만에 전원 해상탈출이 가능했다. 4층까지 침수가 진행된 9시 50분에도 퇴선 명령만 있었다면 전원 탈출에 6분 17초밖에 걸리지 않는다. 2014년 4월 16일 아침 진도 앞바다의 수온은 12.6도였다. 구명보트에 타지 않고 맨몸이라도, 구명조끼를 입고 떠 있으면 최대 6시간까지 버틸 수 있는 온도다.[7]
주변 어민: 사람이 나와야 뭐 건질 거 아니어요 다 나왔어 안 나왔냐요 몇 백 명 실었다한디 막 사람이 어여 나와야된디 뭐 사람이 안 나와요 사람이 왜 안 나오냐고 아이, 지금 저 물속에 다 반은 반도 넘게 잼겼것소. 배가 반 들어갔는디 반 더 들어갔는디 물속에 지금 선실에 다 갇혀있지.

진도 VTS: 지금 말씀하시는 국 어디십니까?

주변 어민: 현장이라고 사고현장

진도 VTS: 사고 현장에 그 승객들이 안 나와있습니까? 바다로 혹시 이탈한 사람들 없습니까?

주변 어민: 와 있어. 옆에 와 있는데 헬기로만 구조하고 사람이 안 따라와

주변 어민 2: 배가 좌현으로 넘어가는데 사람이 왜 안 나오지

주변 어민: 사람 몇 명 구하고 말겄소. 저, 형님. 저저, 나올 수가 없지 저렇게 되면. 다 들어갔는디 완전 잠수했는디 어디로 해서 나오겄어. 배가 다 들어갔는디 사람들이 지금 하나도 안 나오고 있어. 지금. 사람이 나와야지 지미 씨발 배가 다 들어가부렀는디 사람이 뭐 사백 명인디 뭐 사람 몇명 나오도 않고 어찌라고. 못 나오고 있은께 깝깝하네. 배는 다 들어갔구만. 이제 저기서 어쩌케, 저 뭐냐 ○○○ 짤러갔고 들어가가지고 구조해내기 전에는 틀렸재.
주변 어민 2: 넘어가분다. 넘어가부러여. 넘어가부러.

진도 VTS: 선장님, 선장님. 그 사항에 대해서 사진으로 사진으로 쫌 찍어주십시오.

주변 어민: 알았소
가까이 가지마 배 들어가분다. 들어가부러. 손쓸 길 없이 쏙 들어가. 배 들어가분다 뒤에서부터 들어가분께 가까이 가지 말라고.

진도 VTS: 진도 코스탈 VTS 페신저쉽 페신저쉽 세월 나우 싱킹
(해석: 여기는 진도 관제 센터, 여객선 세월 지금 침몰 중)

주변 어민: 사람 몇 명 구하도 못하고 저 큰 배가 쏙 물에 잠수해버리네요. 음마,음마. 이거 큰일 났구만 이거. 더 이상 안 가라앉겄소 완정히 들어가겄소요. 아, 니미 들어가부러, 들어가부러. 사람이 안 나와부네. 이거 뭐 다 죽게 생겼..
사람 거 헬기로 몇 명 구하고 나머지 싹 들어갔어. 요거 어치케 살아나오겄어요. 아이고메. 죽겄구만, 에이고. 순식간에 아이, 요 구조도 못하고 들어가고만 잉. 배가 기울어 있으면 구명조끼 입혀서 딱 사람을 빠쳐머려야지, 물로다가. 선장뭐하는 것이여. 옴마옴마 다 죽고 한 사람도 못 구하네. 들어가분다. 들어가부러. (중략) 한 사람도 구조..., 옴마옴마
한 오백 명 죽어, 오백 명. 몇명 구하고 다 죽네. 들어가부러, 들어가부러
10:07 - 10:26 사이 세월호 침몰현장 주변 어민 교신 음성. 배 밖으로 나와야 구조를 하든 어쩌든 행동을 하는데 가만히 있으라는 말 하나 때문에 몇 백 명이 배째로 수장되는 걸 손쓸 방법이 없으니 그저 지켜만 보면서 한탄하는 모습이다.

그러나 당시 세월호의 선원들은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고 정말이지 무책임하고 한심한 모습을 보였다. 3등 항해사는 우느라 사고 경위를 선장에게 설명하지도 못했고 기관장은 가타부타 뛰쳐나가 버렸다. 선장 이준석은 몇 마디 지시를 엉겁결에 던진 것을 끝으로 조타실 뒤편 해도대 옆에 멍하니 쪼그리고 앉아 버렸다. 선장이 이런 상황이면 다음 서열인 1등 항해사, 2등 항해사라도 선장이 사리 판단을 하게끔 보좌하든지, 선장을 대신해 지휘를 했어야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8]

결국 그들은 모조리 오히려 앞장서서 도망쳤다. 선장 이하 기관부와 조타실 선원들도 마찬가지로 승객은 전혀 신경쓰지 않고 일찌감치 배를 이탈했다. 배에 남은 여객부 승무원인 강혜성은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도 못했으면서 안내 방송을 통해 그 유명한 "승객 여러분은 현재 위치에서 움직이지 마시고 가만히 계시길 바랍니다"라는 말을 반복했다. 바로 옆에 있던 승객들이 그거 말고 나가라는 말을 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항의와 설득을 하기도 했으나 그는 끝끝내 방송 내용을 바꾸지 않았다. 나중에는 하고 싶어도 할 수 없게 되었는데 이미 침수가 시작되어 버려 방송장비가 물에 잠겨 고장나 버렸기 때문이다. 배를 버리지 않았던 몇몇 승무원들은 마지막에 탈출하라는 지시를 내렸지만 방송이 아닌 육성으로는 주변에 있던 사람에게만 전해질 수 있을 뿐이었고 그때는 이미 너무 늦은 상황이었다.

만약 승객들이 "배가 침몰되는데 빠져나가야지, 안에만 있다가 죽으란 거냐" 등의 판단을 내리고 구조대의 접근이 용이한 바깥쪽으로 이동했다면 좋았겠지만 승객들은 선원들이 전문가이니 그들의 말이 옳을 것이라 믿고 자리를 지키고 있었으며 나만 살겠다고 제멋대로 먼저 행동했다가 모두를 위험에 빠뜨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무서웠지만 가만히 있었던 사람도 있었다.
가만히 있으라니까, 어, 가만히 있어야지. 왜냐면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저희보다 그 사람들이 더 잘 알 거잖아요.
- 한 생존자의 증언
사실 세월호는 너무나도 순식간에 급속도로 기울어져 모든 사람이 비상사태가 발생했음을 즉시 알아차릴 수 있는 수준이었다고 한다. 실제로 희생 학생들이 찍은 영상을 보면 대구 지하철 참사 이야기를 하면서 믿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9] 그러나 계속해서 반복된 '현재 위치에서 움직이지 마세요'라는 방송이 피해자들의 탈출 의지를 결정적으로 꺾어 놓은 것이다. 승객들이 '이제 좀 나가봐야 하는 것 아닌가?'하고 본능적으로 불길함을 느끼고 움직일 만하면 그 자리에 움직이지 말라는 방송이 나오고 또 나오면서 그들을 멈추고 주저앉혔다. 더 공분케 하는 것은 이 문제의 방송을 한 장본인 여객부 담당 선원 강혜성[10]이 선장, 항해사 등과 달리 승객들을 두고 도망가지 않고 배에 끝까지 있다가 운 좋게 구조되었다는 이유로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다는 것이다.
차라리 내버려두었으면 스스로 비상구나 갑판으로 빠져나와 퇴선을 준비할 수 있었던 많은 승객들이 안내방송 때문에 객실이나 복도에서 대기하다 희생됐다.(중략)
검찰은 강혜성을 기소하지 않았다. 함께 적극적으로 도주하지 않았고 마지막에 몇몇 승객의 탈출을 돕기도 했다는 점에서 다른 선원들과 차이가 있기는 하다. 하지만 강혜성은 사무장 양대홍 씨로부터 지시받은 수준을 넘어 매우 강도 높게 반복적으로 승객들의 탈출 의지를 꺾는 방송을 했다.

시간이 지나고 상황이 크게 변해 누가 봐도 탈출하지 않으면 안 되는 급박한 시점에도 강혜성은 '임의로' 승객들의 탈출을 가로막는 방송을 계속했다. 매우 심각하고 중대한 판단 착오였다.

검찰이 강혜성의 책임을 일방적으로 면제해준 것은 적절한 조치라고 할 수 없다.
<세월호, 그날의 기록> 563쪽
시간이 지나면서 상황이 급속도로 악화되자 승객들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탈출을 시도했으나 이미 때가 늦었다. 운 좋은 소수만 탈출할 수 있었을 뿐 결국 총 476명의 탑승자 중 3분의 2가 되는 304명에 달하는 사람들은 끝내 배를 빠져나오지 못하고 바닷물 속에서 수장되고 말았다.
세월호 참사에서 가장 많이 회자되었고 참사 피해자들에게는 화인처럼 새겨졌을 '가만히 있으라'라는 말을 우리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가만히 있으라'라는 명령의 부당함은 어른들의 말만 믿고 기다린 '착한 바보', 착한 학생의 이미지와 함께 유통되었다. 좋게 말하면 순수하고 나쁘게 말하면 어리석은 어린 희생자의 이미지. 같은 지시에 따랐던 일반인 희생자를 우리는 '착한 바보'라 부르진 않았다. 그나저나 정말 학생들은 가만히 있었던가. 누군가는 의심했고, 누군가는 가만히 있지 않았으며, 누군가는 가만히 있지 않으면 더 위험해질까봐 그 지시에 따르기로 했다. 세월호 참사는 피해자들이 가만히 있었기에 당한 사고가 아니라, 저마다 살아내려는 삶의 의지와 도전을 짓밟은 선장과 선원, 나아가 정부가 만들어낸 사건이었다.
- 생존자 및 사망자 형제자매 구술증언록, <다시 봄이 올 거예요> 권말 해설 중에서.

3.1. 이유

대형 사고가 발생했거나 사고가 예상되는 상황이 일어났을 때 이를 통제하는 사람들이 "일단 가만히 있으라."고 하는 케이스는 세월호 이외에도 존재한다. 9.11 테러 당시에도 이런 식의 대응이 있었고[11] 삼풍백화점, 대구 지하철 참사도 마찬가지였다.[12] 통제자들이 기다리라고 해 놓고 도망치는 경우도 마찬가지로 존재한다.

이렇게 통제자들이 많은 사람들을 그 자리에 내버려두고 도망치는 것에는 여러 원인이 존재한다. 일단 사고가 발생했을 시 혼선을 막기 위해 사람들을 통제하는 것은 어느 기관에서든 마찬가지인 매뉴얼이다. 따라서 사고가 해프닝으로 끝날 경우 혼선에 따른 2차적인 사고가 발생할 가능성이 줄어들며 만약 정말 사고가 일어났어도 '메뉴얼을 준수했다' 는 최소한의 변명이 가능해진다. 물론 이준석 선장의 경우 그딴 변명으로 무마할 정도가 아니지만 말이다.

세월호는 매우 급속도로 기울어져[13] 복원력을 상실한 상태였다. 만약 이준석 선장이 승객들을 위해 적극적으로 조치를 취했더라면 배의 침몰은 막을 수 없었겠지만 승객들 모두가 조끼를 입고 구명 보트를 탄 채 바다 밖에 나와 있다가 구조되었을 것이다. 게다가 이준석을 포함한 선원들이 한 교신내역을 보면 그들은 배가 침몰을 피할 수 없는 상황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들에게 구조의무가 있었다는 것도.

하지만 승무원들은 승객들을 내팽개쳤다. 선원들에게서 사고 소식을 들은 청해진해운사 역시 승객들을 대피 및 탈출시키라고 지시하기는커녕 TV 뉴스만 바라보면서 사람들 목숨은 전혀 신경쓰지 않고 부정하게 과적한 화물들에 대한 서류를 조작하는 게 제일 우선이었다.[14]

그래도 해경들이라도 구조했다면 희생자 수라도 줄일 수 있었겠지만 도저히 구조를 했다고 볼 수 없는 것을 넘어 구조를 못 한 게 아니라 안 한 거나 다름없는 방만한 구조 작업으로 결국 대형 참사를 막을 수 없었다. 단 한 번만이라도 퇴선 명령을 했다면, 해경이 단 한 번만이라도 객실 문을 직접 열고 들어갔다면, 항공구조사가 깨진 유리창 사이로 로프만 설치했다면, 대다수 승객이 살 수 있었거나 희생자가 크게 줄었을 것이다.
헬기 소리 들려서 내다봤는데 헬기 역시 방송을 전혀 안 했어요. 123정도 마찬가지고...카메라만 앞에 나와있고. 그런데 단 한 번도 구조요원이 어떻게 해야 한다는 지시 아닌 지시 같은 도움을 주는 발언을 한 적도 없고.
(중략)정말 힘든 탈출이었죠.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거기에 우리를 지키는 누군가는 없었어요. 정말 단 한 명도...
생존자 김성묵, 다큐멘터리 <부재의 기억>에서 증언하며.
진짜 중요한 것은 살릴 수 있었던 아이들을 살렸으면 우리 같은 사람들이 있을 필요가 없었을 텐데... 제대로 구할 수만 있었다면... 그런데 그 누구도 구하지는 않고 상황을 보고報告, 보고, 보고(만 하고)...
민간잠수사 김관홍
그런데 아무도 제대로 구조를 안 했다. 세월호가 가라앉던 101분 동안 선원, 해경, 항공구조사 그 누구도 "퇴선" 한마디를 하지 않았다. 단 한 명도 배로 들어와 구조 활동을 한 사람은 없으며 스스로 탈출하는 사람을 자신들의 배나 헬기에 태우는 게 다였다. 그나마도 승객들을 구조할 수 있는 유일한 해경 선박인 123정은 세월호 곁에 한 차례 접근한 후 계속 멀찍이 떨어져 있기만 했고 더 적극적으로 구조한 것은 민간 어선들이었다. 그 이유도 밝혀지지 않았다.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의혹 문서에서도 알 수 있듯 여전히 세월호 좌초에 대한 음모론이 돌아다니고 피해자 가족들이 1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진상규명에 힘쓰는 이유다.
"무능한 선장"이 수백 명을 내버리고 탈출하는 상황에서 구조 당국은 어떻게 해야 하나.
배를 버린 선장과 선원들을 제일 먼저 구조하고 배 안에 갇혀 있는 승객들은 팽개친 다음 선장과 선원들을 비난하기만 하면 되는가.
세월호 참사에서는 도주한 선장과 선원들에게 모든 책임을 돌리는 해경이 있다.
팔코 해안경비대장[15]처럼 도주하는 선장에게 "당장 배로 돌아가라"고 소리치거나 선장을 대신해 절실한 마음으로 구조를 진두지휘하는 해경지휘부가 없었다. 정작 그 무능한 선장과 선원들이 도주할 수 있게 만들어준 것이 바로 그들이었다.
<세월호, 그날의 기록> 5부 중에서.

참고로 선원과 현장 해경 외에 해경 상황실, 서해청, 해수부와 청와대의 대처도 정말 어이가 없는데 구조활동을 강화하는 게 아니라 현장 영상 없느냐고 몇 번을 다그치질 않나, 인원수를 계속 물어보고 또 물어보는 바람에[16] 해경은 한 사람이라도 더 구하고 있어야 할 급박한 시간에 보고 영상을 준비하고 사람 수를 세느라 시간을 낭비해야 했다. 그 와중에 엉뚱한 소리나 하고 말이다. 이미 모든 것이 늦은 뒤인 10시 28분경에 배로 내려가거나 물에 뛰어내리게 해야 한다느니 '먼저 구조한 사람은 정말 공을 세울 수 있는 거 아니에요?' 같은 어처구니없는 대화를 하고 있질 않나, 이미 배가 선수만 남기고 완전 침몰하여 내려갈 수 없는 상태라는 말을 듣고 걱정하는 게 아니라 '아까 진작 좀 내려가서 그림이 되었어야 하는데... 그게 문제란 말이에요' 같은 말을 지껄이지 않나. 수백 명이 죽어가는 대규모 재난 상황을 그저 자신들의 성과를 올릴 기회로밖에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와중에 서해청과 항공구조단의 통신에서는 내부 수색은 정확히 안 했다면서 '선내에는 사람이 거의 없다'고 거짓말한 사람도 있었다.

3.2. 추태

이준석 선장 일행은 방송으로 승객 여러분 안심하십시오로 승객들을 안심시킨 뒤 구조선이 오자 자기들만 살겠다고 황급히 옮겨 탔고 영상까지 찍혔는데 하필 속옷 차림으로 구조선에 옮겨 타려고 했다.

파일:이준석 패션.jpg

물론 그도 사람이기 때문에 살고는 싶을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삶에 대한 의지 및 열망이 강력하고 죽음의 위기가 닥쳐왔을 때 살고자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려고 할 수 있다. 때문에 그가 도망치고자 한 것은 이해가 갈 수도 있을 것이라고 어디까지나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그가 단순한 승객이었다면 배의 위험을 파악하고 신속하게 탈출한 현명한 생존주의자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승객이 아닌 세월호선장이었다.

선장은 단순한 직함이 아니다. 선장은 자신이 담당하는 배의 최고 결정권자다. 따라서 총체적으로 선박을 책임지는 사람이다. 이것은 어선, 군함, 설령 함대 사령관이 타는 기함에서도 바뀌지 않는다.[17] 사령관은 전투나 항해를 비롯한 여러 부분에서 함장에게 명령을 내릴 뿐이다. 명령을 수행하는 사람은 함장이다. 따라서 유사시에 승객들을 안전하게 해야 할 의무가 있다.

물이 차고 있는 기울어진 배 안쪽으로 들어가 돌아다니며 승객들을 구해 올 용기까지는 없었더라도, 끝내 사망자가 생겨 형사처벌을 받더라도 최소한 퇴선 방송을 열심히 계속 외치는 등 탈출을 돕는 데 노력을 기울여 피해를 최소화하려 했다면 충분히 감형받을 수도 있었으며 여론도 어느 정도 아쉬움과 분노는 있을 지라도 이해와 동정을 구할 여지를 만들 수라도 있었다. 최소한 메뉴얼이라도 준수했다면 위에서 말한 대로 "난 메뉴얼대로 한 것뿐이다." 라는 말이라도 할 수 있었을 것이다.[18]

다른 예로 대구 지하철 참사 당시 방화범이 불을 지른 1079호의 기관사는 불길이 치솟는 상황에서도 각 객차를 뛰어다니며 대피 안내방송을 하고, 직접 소화기를 들고 화재를 진압하려 시도하다가 승객들 대부분이 나간 뒤에야 탈출했다. 기관사의 노력 때문에 1079호에서는 사망자가 많이 나오지 않았으며[19] 그는 이 후 유가족들에게 감사의 말을 들으며 크게 비난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20]

반면 이준석과 그 이하 선원들 - 당직사관이었던 3등항해사 박한결[21], 1등항해사 강원식, 2등항해사 김영호, 조타수 조준기, 박경남, 오용석, 1등항해사수습 신정훈, 1등기관사 손지태, 3등기관사 이수진, 조기장 전영준, 조기수 이영재, 박성용, 김규찬 등은 모두 합당한 조치는 일절 없이 부리나케 도망쳤으니 그에 대한 비판은 너무나도 당연하다. 더욱이 이준석은 마치 도둑이 제 발 저리듯이 승객들을 피해 은밀하게 움직여서 탈출을 시도했고 아무도 모르게 빠져 나간다는 것에 정신 없어서 팬티 차림으로 나오게 된 것이다. 이 장면에 있어서 대놓고 변명의 여지가 필요 없다. 상선사관들만 나열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 중에도 이렇게 뻔뻔하게 살아남은 이들이 있는데 세월호에서 가장 먼저 구조된 이들인 조리부 직원 두 명이다. 비선박직이라고는 하지만 그들에게는 유사시에 승객들을 안내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22]

추가로 해경의 대처도 어이가 없는데 왜냐하면 이준석과 그 외 선원들이 나온 곳은 승객들이 출입할 수 없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선원의 의무를 방기한 범죄를 저지르고 있다는 것을 모를 수가 없었을 텐데 이럴 때는 코스타 콩코르디아 호 좌초사고의 항구 경비 당국자처럼 배로 돌아가라고 다그치고 질책했어야 했다. 그런데 순순히 구조선에 태우고나 앉아 있었으며 심지어 당장 조사를 시작했어야 할 이준석을 해경 간부 집에 재우기까지 했다.[23] 그랬으면서 승객 중 한 명으로, 학생을 인솔할 책임은 있었다지만 배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일반인이며 엄연한 피해자 중 한 명인 강민규 당시 단원고 교감에게는 조사 과정에서 욕설을 퍼붓고 험하게 대했다는 증언이 있으니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결국 그는 다음날 충격을 이기지 못해 안타까운 선택을 하고 말았다.[24] 해경의 부적절한 대처가 없었더라면 이런 비극을 막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4. 결과

파일:21457982.jpg

잠수해서 겨우 빠져나온 마지막 탈출자 박준혁 군의 사진이다.

"모든 승객은 즉시 질서 있게 갑판 위로 올라와 구명조끼를 입고 구명보트에 탑승해 주시기 바랍니다"라는 안내 한 번만 제대로 해 줬어도 이렇게 많은 희생자가 생기지 않았을 상황이었으니[25] 승객들이 뒤통수 맞은 격이 된 것은 두말할 필요 없었다. 즉, 일어나지 않아도 되었을 일이 대참사가 되어 버린 격이다.

이준석 선장에게는 이후의 재판에서 살인죄가 인정, 적용됨에 따라 무기징역이 선고되었다. 다만 사형이 선고되었다고 해도 현재까지 20년 가까이 실질적인 사형 집행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최대 종신형으로 살게 되었을 듯하다.[26]

이준석 문서의 재판 과정 문단에서 언급되다시피 본인은 반성할 기미 같은 건 없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27] 사건 당시의 나이를 생각하면 가석방을 바라보기에는 최소 형기를 채우기도 전에 옥중에서 세상을 떠날 가능성도 작지 않지만 정말 정말 만에 하나 출감하는 일이 생긴다고 해도 남은 평생을 국민들의 따가운 눈초리를 받으며 살게 되거나 평생 살해 위협에 시달리며 살게 될 것이다.

해경들도 문제가 있는데 전술했듯 45도 이상 기운 세월호 선체에 450여명의 승객이 있는 것을 알고도 단 한 번의 선내 진입도, 퇴선 지시도 하지 않았다. 국민의 생명을 지켜야 할 경찰의 가장 기본적인 의무를 저버린 것이다.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데는 선원들뿐 아니라 해경 지휘부가 임무와 역할을 다하지 않았던 탓도 있다. 하지만 이쪽은 처벌조차 제대로 되지 않았다. 말단인 딱 한 명, 당시 출동한 해경 정장만 업무상과실치사로 3년 살고 나왔을 뿐이다. 피해자와 가족들의 끈질긴 요구로 김석균 전 해경청장 등 지휘부가 사건으로부터 6년여 만인 2020년 2월 재판에 넘겨졌지만 '유죄가 입증됐다고 보기 어렵다'며 무죄 판결이 나왔다. 재판부 나름의 논리라는 것이 있지만 피해자들에게는 크나큰 상처가 될 수밖에 없었다.

5. 여담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타이타닉호 침몰 사고와 발생 일자가 딱 하루 차이나는데 끝까지 배에 남아 최후를 맞이한 RMS 타이타닉 호의 선장 에드워드 스미스와 대조되어 더 욕을 먹었다.

한국사에서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를 비롯해 사건 사고가 일어났을 때 책임자가 가만히 있으라고 해 놓고 구조 의무를 내팽개쳐서 일이 커진 사례는 많다. 6.25 전쟁 당시 국민 여러분 안심하십시오로 대표되는 국민 기만 행각과[28] 대구 지하철 참사와 같은 경우이며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는 가만히 있으라는 안내 방송은 없었지만 대피조차 없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비슷한 류에 속한다.

이 때문에 재난상황에서 가만히 있으라는 말에 거부반응을 표출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세월호 사고에 대한 트라우마로 보는 시각이 있으며 아예 전 국민적 트라우마로 인해서 "가만히 있으라고 방송이 나올 때가 탈출의 마지막 기회다."라고 믿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2016년 경주 지진 당시에는 야간자율학습을 하던 학교들 중 몇몇은 지진이 발생하고 있음에도 가만히 있으라고 학생들을 통제하여 논란이 되었는데 학생들은 2차 지진(본진)이 일어나자 학교의 통제에 응하지 않고 밖으로 도망쳤다. 물론 지진이 발생할 때는 함부로 바깥에 나가는 것보다는 차라리 그 자리에 가만히 있는 게 훨씬 안전한 게 맞다.[29] 지진 문서 참조. 하지만 이 경우엔 대부분 '지진 중에 위험하니 가만히 있으라'가 아니라 지진 후 안심하고 야간자율학습을 계속하라는 것이 문제였다. 경주에서는 이로 인해 학부모들이 항의하자 그제서야 야간자율학습을 중단했다.

위의 경주 지진과 비슷한 사례로 2014년 5월 2일 상왕십리역 전동열차 충돌탈선사고와 2017년 1월 22일 서울 지하철 2호선 잠실역에 정차한 열차에 화재가 발생하자 객실에서 앉아 대기해 달라는 1차 안내방송이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승객들은 비상스위치로 문을 직접 열고 대피했으며 약 2분 후에야 비로소 대피하라는 2차 안내방송이 나왔다. 다행히 인명피해는 없었으나 당시 승객들의 반응을 비롯한 여론은 왜 가만히 대기하라는 방송이 나왔냐며 비판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다만 가만히 있으라는 것 자체는 안전을 위해서 필요한 기본적 조치다. 사람들을 진정시키고 질서를 유지해 대피시키는 것은 아무런 조치 없이 난잡하게 대피시키는 것보다 훨씬 시간을 단축할 수 있으며 이는 위기탈출 넘버원에서 증명한 바 있다.[30] 세월호 사건의 문제는 가만히 있으라고 진정만 시켜 놓고 대피를 시키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대참사가 발생하면서 진정책이 거의 먹혀들지 않게 되었다는 점은 가만히 있으라는 지시에 불응하여 발생할 또 다른 피해[31]의 여지가 생겼음을 시사하기도 한다.

결국 이준석 등 세월호 선원들은 가만히 있으라는 안내방송으로 세월호 승객들 상당수를 희생시킨 일에 더해서 불순한 의도 없이 정말 안전을 위해 가만히 있으라고 하는 지시사항까지 통하지 못하게 하여 언젠가 터지게 될 또 다른 위험 요소를 만들어냈다고 할 수 있다.

9.11 테러 때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물론 세월호 침몰과는 맥락이 다르며 해당 상황은 북쪽 타워가 비행기에 충돌한 후 비행기가 충돌하기 전의 남쪽 타워 사람들이 뭔 일인지 상황 파악조차 못 했을 때 저런 조치가 나왔다고 한다. 당연히 당시 그 누구도 2WTC에 비행기가 박히기 전까지 이게 테러인 줄은 꿈에도 몰랐었으므로[32] '가만히 있으라'가 최선의 선택지이긴 했다. 당연히 당시 북쪽 타워 사람들은 굳이 안내 방송 없이도 다 탈출을 시도했으며 남쪽 타워도 비행기가 충돌하자마자 북쪽 타워와 비슷하게 흘러갔다.[33]

신카이 마코토 감독이 너의 이름은.을 제작할 때 "가만히 있으라"는 말에 대해 듣고 놀랐다고 한다. 감독은 이 대사를 영화에 실제로 등장시켰다. 자세한 사항은 너의 이름은./기타 문서 참조.

6. 관련 문서



[원주] "기다리래. 기다리라는 방송 뒤에 다른 안내 방송은 안 나와요." 세월호가 물 속에 가라앉은 지난 16일 오전 10시 17분, 세월호에서 단원고 학생의 마지막 카카오톡 메시지가 전송됐다. 오전 9시 30분 해경 구조정이 도착하고도 약 50분 뒤다.(『연합뉴스』, 2014. 4 .28)[2] 참사 100일(2014년 7월 24일)을 기해 나온 추모시집.[3] 강 교감: "침착하세요. 방송에 귀를 주목하고 학생들에게도 침착하라고 독려 문자 부탁, 움직이지 마시고." 김모 교사: "얘들아 움직이지 말고 있어, 다들 괜찮니?" (새정치민주연합 전해철 의원이 입수한 카톡 메시지 자료#)[4]더불어민주연합 국회의원[5] 사실 구조자들이 아무리 신속하게 작업을 한다고 해도 모든 사람들을 구조하기에는 무리가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일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즉, 잘만 대처했으면 모두가 살 수도 있었던 일이었으니 문제다.[6] 그러나 본인은 빠져나오지 못하고 사망하였다.[7] 대형 선박 사고였던 만큼 일단 탈출이라도 했으면 전국의 해경과 어부들이 총동원해 구조작업에 나섰을 것이다.[8] 출처: <세월호를 기록하다>[9] 1997년생인 학생들이 유치원생이었을 때 일어난 일이었지만 워낙 유명한 사건이라 잘 알았던 듯.[10] <세월호, 그날의 기록>에서 실명 공개[11] 다만 9.11 테러 때는 설마 두 번째 비행기가 충돌할 거라고 절대 상상을 못 했으며 충돌한 북쪽 건물과 달리 남쪽 건물은 멀쩡했고 모두가 북쪽 건물의 비행기 충돌을 '사고'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사실 9.11 테러 자체가 비행기로 빌딩에 들이박는다는 전무후무한 테러인지라 이는 사실상 불가항력이었다, 그리고 함부로 나갔다가는 건물에서 떨어지는 잔해나 심지어 사람에 맞아 크게 다칠 수도 있기 때문에 남쪽 건물 내의 사람들을 대피시키지 않고 '안전한' 건물 내에 머물게 하는 것은 아마 그 상황에선 최선의 선택이었다. 무엇보다도 차후 대피령을 내릴 수 있었던 방송실이 2차 충돌의 '그라운드 제로'여서 방송실 내 인원이 전원 사망하고 설비가 파괴되었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건물 내 인원들을 버렸다기에는 무리가 있다. 남쪽 건물은 충돌로 인해 비상계단과 엘리베이터 모두가 파괴되는 바람에 대피 명령을 내렸더라도 대피할 수 있는 경로 자체가 없었기에 설령 방송실이 살아남아 대피를 지시했더라도 피해는 큰 차이가 없었을 거라는 게 중론이다.[12] 삼풍백화점의 경우 붕괴 며칠 전부터 경영진들이 건물에 균열이 생겼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매출 하락을 우려해 자신들만 먼저 탈출하고 고객들에게는 백화점이 붕괴되기 직전까지 알리지 않은 것으로 유명하다. 이 중 몇몇 고객들은 지붕이 내려앉는 등 여러 붕괴징조를 눈치채고 미리 백화점을 빠져나가 생존한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대구 지하철 참사의 경우 불이 난 1079호 전동차보다 반대편 승강장에 들어온 1080호에서 희생자들이 더 많이 발생했는데, 기관사가 승객들에게 "곧 발차한테니 대기해달라"고 안내방송을 하면서 승객들의 탈출이 지체됐다. 정작 중앙로역은 화재로 인해 단전이 되어 발차가 불가능한 상태였고, 그 후 10여분이 지난 뒤 사령실로부터 대피 명령을 받고 승객들에게 탈출방송을 하였다. 이 때 기관사가 탈출하면서 마스터키를 뽑아가는 바람에 자동으로 출입문이 모두 닫혔고, 수동으로 탈출할 줄 몰랐던 수많은 승객들을 유독가스에 질식되어 최후를 맞이했다.[13] 그 원인은 ▷화물 과적, 고박 불량 ▷무리한 선체 증축 ▷조타수의 갑작스런 급변침 등이 있으나 현재까지 확정되지 못하고 있다.[14] 출처: <세월호, 그날의 기록>. 참고로 청해진해운 대표이사 김한식징역 7년을 선고받으면서 사법처리되었다.[15] 비슷한 시기에 일어난 코스타 콩코르디아 호 좌초사고 때의 당시 항만경비대장. 선장이 도망치자 미친듯이 분노하며 질책하고, '이제 내가 책임자다!'라고 외쳤다. 이 녹취가 공개되자 영웅이 되었다.[16] 당시 청와대는 이상할 정도로 '현장 영상'과 '인원 수'에 집착했다.[17] 함대의 전략을 결정하는 제독일지라도 탑승한 함의 조작에는 함장이 결정권을 지니고 있다. 항공모함도 존재의의라고 할 수 있는 함재기의 전대장이 있지만 모함, 즉 배를 어떻게 운전하는지는 함장이 결정한다. 물론 항공모함인 만큼 함재기 운용에 지장을 주지 않는 선에서지만 말이다. 즉, 수직적 군계급 체계에서조차도 배의 최고지휘관은 함장이며 계급상 이들보다 위에 있는 장교들조차도 함장의 권위를 존중하는 것이다. 만일 함장을 거치지 않고 직접 기함에 명령을 내리는 건 그게 제독이라도, 심지어 해군참모총장이나 대통령이라도 분명한 월권이다.[18] 사고에 대해 유연하게 대처하지 못하고 그저 매뉴얼 대로만 움직이는 건 지휘자로서 명백한 무능이지만 무능해서 대처가 미흡했던 것과 사실상 고의로 아무런 대처도 하지 않고 자신의 생존만을 위해 움직이는건 전혀 다른 문제다.[19] 1079호는 열차가 역에 도착하는 순간 김대한이 불을 질렀기 때문에, 출입문이 모두 열려있어 승객들 대부분이 탈출하는데 성공하였다. 다만 가연재 시트 때문에 유독가스가 너무 급속도로 퍼져 1079호의 승객 중 49명이 역 안에서 질식사했다.[20] 다만 구조활동을 마친 뒤 관제실에 화재가 발생했다는 사실을 보고하는 걸 깜빡하고 대피하면서, 이에 대한 책임으로 재판에서 금고형을 선고받았다.[21] 당직항해사관은 선장 혹은 다른 항해사가 인계를 받지 않는 한 당직 시간 중 선장에 준하여 선박에 대한 책임을 진다.[22] <세월호, 그날의 기록> 참조.[23] 해당 해경은 구원파라느니 하는 온갖 루머에 시달렸으며 자기는 그냥 시키는 대로 한 것뿐이라며 언론과 여론으로부터의 엄청난 공격에 억울해했다.[24] 시신이 발견된 것은 4월 18일이지만 그가 잠적한 것은 17일이다.[25] 그러면 선장이 튀어도 승객들이 알아서 "아 여기에 있다간 우리 다 죽겠구나!"라는 심정으로 너도나도 알아서 탈출했을 것이다. 물론 대형 선박이 가라앉는 해상 사건사고인 만큼 탈출하다가 다쳐서 못 나올 수도 있고 운이 나빠 빠져나오지 못한다든가, 빠져나오는 데 성공해도 수영을 못한다든가 구명조끼가 없거나 하면 말짱 꽝이지만 문제의 핵심은 방송 하나만 했다면 수백명이나 배 안에 갇힌 채 죽을 리는 없다는 점이다. 바보라도 선장이-아니 선원 중 누구라도 좋고 해경이라도 상관없으니 지금 배가 가라앉고 있으니 빨리 나오라고 한다면 대부분은 나올 테니까. <세월호, 그날의 기록>에 따르면 세월호 참사는 안내와 구조작업만 제대로 되었어도 승객 대부분이 충분히 살 수 있는 조건이었다.[26] 대한민국이 오랫동안 사형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그렇지 분명한 사형제 국가다. 다만 하도 오랫동안 사형이 이뤄지지 않아서 국제 인권 단체인 엠네스티에서 실질적 사형 폐지 국가로 분류했을 뿐이다.[27] 나중에 이준석이 반성한답시고 옥중에서 쓴 편지조차 이준석 본인의 정신적 고통만을 주장하는 등 전형적인 4과문에 가까운 내용이라서 대차게 까였다.[28] 이 경우엔 그래 놓고 서울에 남아있던 사람들을 부역자로 처벌하는 희대의 병크를 저질렀지만 반대로 1.4 후퇴 때는 교훈으로 삼았는지 후퇴 한 달 전 대피 명령을 내렸다.[29] 물론 흔들림이 끝난 뒤에는 머리를 보호하며 질서있게 대피해야 하지만 흔들림이 계속되고 있는 와중에 성급한 대피는 더 큰 피해를 부른다.[30] 중구난방으로 탈출하면 탈출하는 와중에 다치거나 압사하는 위험이 뒤따르지만 질서정연하게 탈출하면 그럴 위험이 줄어든다. 물론 무턱대고 가만히 있으라보다는 바로 질서정연하게 대피시키는 게 안전하다. 순간의 혼란을 막기 위해 일단은 가만히 있으라는 메세지를 통해 대중들을 진정 시킨 뒤 최대한 빠르게 이들을 질서정연하게 탈출시킬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혼란을 막는 게 생각보다 시간이 지체되는지라 정작 그냥 바로바로 대피시키는 게 피해가 적게 나온다.[31] 대피 과정에서 발생할 압사 및 구출 지연, 만일의 폭력 사태 등이 있다.[32] 당시에는 대다수의 시민들이 기체가 고장이 났거나 조종사가 형편이 없어서 재수 없게 1WTC를 들이박은 줄 알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과거 전투기가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에 추돌했던 사고도 테러가 아니었으니 이상한 것도 아니었다.[33] 남쪽 타워에서는 안내방송이 없었다. 비행기가 방송실에 정확히 들이박는 바람에 방송을 할 사람들이 현장에서 전원 즉사하고 방송설비가 모조리 파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