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6 20:32:04

김기춘/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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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춘은 어떤 검사, 어떤 정치인이었나?
[1]

1. 초년 시절2. 유신체제 시절
2.1. 유신헌법 저작2.2. 박정희의 두주(杜周)
3. 제5공화국 시절4. 제6공화국 시절5. 문민정부 시절6. 국민의 정부-참여정부 시절7. 이명박 정부 시절8. 박근혜 정부 시절
8.1. 비서실장 재임: 왕실장, 기춘대원군
9.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9.1. 최순실 청문회 증인출석9.2. 특검 수사 및 재판9.3. 전국경제인연합회에 보수단체 지원 강요(화이트리스트)9.4. 세월호 7시간 훈령 및 서류 조작9.5. 양승태 대법원 사법농단 의혹 사건
10. 이후

1. 초년 시절

일제강점기 기간이던 1939년 11월 25일 경상남도 통영군(거제도) 장목면 시방리 403번지[2]에서 아버지 김석윤과 어머니 강신방 사이에서 4남 3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김석윤은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 제국 육군 헌병대에서 복무했다.

외포초등학교, 마산중학교, 경남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대부분의 정치인들이 선거에서 서민적 이미지 메이킹을 위해 어린 시절을 가난했다고 묘사하듯이, 김기춘도 집안이 가난하여 가정교사 일을 하면서 고학했다고 밝힌 적이 있다.

가정환경이나 출신이 어떻든 아무튼 그는 학업성적이 매우 우수하여, 1958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법학과(58학번)에 입학했다. 그리고 3학년 재학 중이던 1960년 고등고시[3] 사법과에 합격해서 출세길이 열리게 된다. 5.16 장학회[4]의 1기 장학생으로 뽑혔었다. 입대 전 고등고시에 합격했기 때문에 1961년 6월 5일 해군 군법무관으로 임관하여 1964년 8월 10일 대위로 전역했다. 1966년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법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검사로 임용되면서 법조계에 입문하여, 광주지방검찰청 근무 시절 지금의 부인 박화자와 결혼했다. 이어 부산지방검찰청, 서울지방검찰청에서 검사로 근무했고 이후 법무부로 자리를 옮기면서 출세하게 된다.

초임 검사 시절부터 그는 출세지향주의적이고 정치적인 기질을 보였는데, 심재륜[5][6]의 회고에 따르면 그는 검사 때 법무부 장관 신직수의 눈에 띄려고 날마다 장관 집 앞 언덕을 오르는 노력을 했다고 한다. 남들 잠자는 시간에 일찍 일어나 출세를 위해 상관을 하염없이 기다렸던 것이다. #

2. 유신체제 시절

2.1. 유신헌법 저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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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 수뇌부는 체육관 선거로 국민의 참정권을 차단하는 새 헌법을 만들려고 했고, 겨우 9년차 평검사였던 김기춘에게 개헌을 맡겼다. 구색을 맞추기 위해, 나중에 갈봉근, 한태연과 같은 헌법학자들이 합류하여 헌법 개정작업을 착착 밟았다. 정작 갈봉근과 한태연은 이리 회고한다. 이미 김기춘이 만든 뼈대를 손도 대지 못하도록 했다고 한다. 즉, 김기춘이 유신 헌법의 초안을 마련하는 데 큰 역할을 한 셈이다.

김기춘은 유신헌법이 국민투표로 확정되자, 검찰 기관지('검찰')에 다음과 같이 기고한다.(1972.12 <유신헌법 해설> '검찰' 48호)
유신헌법은 우리의 현실에 가장 알맞은 민주주의 제도를 이 땅위에 뿌리박아 토착화시키는 일대 유신적 개혁의 시발점이다. 박정희 대통령 각하의 구국영단을 강력히 지지하는 우리 국민의 정치적 결단에 의하여 확정을 보게 됐다.

1974년 박정희 저격 미수 사건 당시 묵비권을 행사하던 문세광을 하루 만에 설득했다고 주장하면서[7] 이 사건을 수사하는 데 공을 세워 중앙정보부 대공수사국장[8]으로 승진하게 된다. 박정희는 김기춘을 김똘똘이라고 부르며 총애했다고 전해진다.

2.2. 박정희의 두주(杜周)[9]

당시 중정 대공수사국은 국가안보보다는 정권안보를 위해 온갖 무리수를 일삼던 중앙정보부 최대 부서였으며, 김기춘은 30대의 나이에 이 부서를 지휘하면서 온갖 무리수를 벌인다. 이 당시 중앙정보부는 스탈린 시절의 소련 NKVD와 거의 하는 일이 같았으며, 소련의 대숙청 시절과 마찬가지로 독재에 반대하는 수많은 세력을 체포해 고문으로 "간첩"을 조작하는 일이 본업이었다. 이렇게 중앙정보부 대공수사국장을 지냈던 동안 수많은 용공 간첩조작 사건의 수사 기획자가 아니냐는 의혹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10]

그가 직접 조작하거나 조작 의혹이 있는 사건만 여러 건이다. 1974년 유신헌법의 긴급 조치 위반을 북한의 지령이라고 주장하여 주동자들에게 간첩혐의를 씌운 민청학련 사건이 대표적이며, 그리고 2000년대 들어 재심으로 무죄 및 8명의 사법살인으로 확정된 인민혁명당 사건 (1974년 4월) 등이 있다.

1960년대까지 북에서 보내는 남파간첩은 대체로 지리와 풍습에 익숙한 월북자들이었는데, 분단이 20년 이상 고착화되자 이들도 남한 사회 적응에 어려움을 겪는 데다가, 대부분 40~50대에 이르는 등 고령화되어 남파되어도 효과적인 공작활동이 힘들어졌다. 이 때문에 북에서도 양이 아니라 질을 중시하게 되고, 특수훈련을 받은 소수의 정예 공작원을 보내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70년대 중반이 되자 남파간첩수가 격감하였고, 그나마 남파되는 간첩도 훈련이 잘 되어있다 보니 5~60년대처럼 잘 잡히지도 않았다. 그래서 방첩 조직은 노는 일이나 헛발질이 많아졌다. 그러므로 김기춘이 감독한 간첩조작은 정권안보 외에도, 자신의 실적 및 공안 조직 보존의 1석 3조의 효과가 있었던 셈이다.

이런 것을 보면, 김기춘이 제5공화국 정권에서 찬물을 먹었음에도 5공 정권의 대표적인 고문조작 사건인 부림사건을 다룬 변호인(영화)을 왜 그렇게 싫어했는지를 바로 알 수 있다. 바로 이 영화에서 나오는 장면들은, 자신이 중앙정보부에서 하던 짓을 그대로 묘사했기 때문일 것이다. 아래도 나오지만, 김기춘은 청와대 비서실장 재직 시절 이 영화를 관람한 후, 화를 엄청나게 내면서 그런 영화를 제작한 제작사를 왜 가만히 두냐고 부하들을 질책했다고 한다.

김기춘이 지휘한 재일교포 유학생 간첩단 (1975년 11월)[11] 사건이 왜 악질이냐면, 자이니치로 온갖 차별을 받다가 조국의 품을 그리며 유학 온 유학생의 조국애에 못을 박았기 때문이었다. 이 당시 대한민국에 온 재일교포 출신 유학생이 500여 명 정도였는데, 이 사건으로 거의 그 중의 10%에 가까운 40여 명이 연루되었다고 한다.[12]

이렇게 중앙정보부에서 신나게 "첩보 소설 작가" 노릇을 하던 김기춘은 유신 말기 다시 엄청난 운빨을 다시 만나게 된다. 즉, 1979년 10.26 직전에 중앙정보부에서 청와대 법무비서관으로 전근한 것. 이것이 왜 엄청난 운빨이 되었는지는 아래에서 자세히 서술.

법무비서관 시절 박근혜-최태민 관계를 잘 알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최근의 증언에 의하면 이때부터 최태민-박근혜와 김기춘이 밀착관계를 갖게 되었다고 한다. 즉 김기춘은 청와대 비서관으로 근무하면서 이런 부적절한 관계를 근절하려고 노력한 것이 아니라, 거기에 편승하여 출세를 도모한 것.

3. 제5공화국 시절

70년대에는 엄청 잘 나갔지만, 80년대 들어서는 된통 깨졌다. 그 이유는 김기춘이 중정에서 근무하던 1970년대 후반, 대통령의 명령으로 보안사를 크게 손보았다가 보안사를 권력기반으로 하는 전두환 일당, 즉, 신군부가 등장하면서 보복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 발단은 1977년 20사단 예하 60연대 1대대장 월북 사건이었다. 보안대가 전방 대대장 유운학 중령을 과도하게 갈구는 바람에 유 중령이 참다못해 월북한 사건[13]으로, 6.25 전쟁 이후 최고 계급의 현역 군인이 월북한 사건이기도 하다. 유운학은 육군보병학교에서 공격작전 전술교관으로 근무했을 만큼 국군의 전술을 꿰뚫고 있었으며 장성 진급도 유력한 인재였는데, 무전병까지 포섭해서 월북하는 바람에 한국군의 작전교범과 암호체계가 모조리 조선인민군의 손에 넘어감으로써 한국군은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이 사건의 진상을 듣고 격노한 박정희 대통령은 중앙정보부의 대공수사국장으로 있던 김기춘에게 그 처리를 지시하였다.[14] https://blog.naver.com/joheim/222143819810박정희의 지시를 받은 김기춘은 보안사 조직 축소안을 마련했고, 관련된 보안사-보안대 간부들을 여럿 중정에 끌고와서 혼을 내주기도 했다. 이 사건은 명백하게 보안사의 잘못이었기 때문에 사실 김기춘이 잘못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독재국가에서 필연적인 정보기관 사이의 암투 때문에 김기춘은 보안사 간부들에게 미운털이 단단히 박혔다.

10.26 사건 이후 전두환이 사령관으로 있던 보안사[15]가 중앙정보부를 접수했을 때, 중정에 들이닥친 보안사의 요원들이 가장 먼저 한 말이 "김기춘 어딨어!"였다. 하지만 김기춘은 몇 달 전 청와대 법률비서관으로 전직한 상태여서 보안사로 체포되는 일은 피할 수 있었다. 김기춘이 만약 중앙정보부에 계속 있었다면 보복을 당했을 가능성이 높다. 정말 운빨은 기가 막히게 터진다.

그나마 검찰에서 연명할 수 있었던 것은 한때 검찰에서 부하로 두고 있었던 노태우의 처고종사촌 박철언에게 줄을 댔고, 당시 보안사 비서실장이던 대령 허화평에게 충성을 맹세한다는 편지를 써 보냈기 때문이다. 이 일화는 박철언의 회고록에 나온다.[16] 박철언은 나이로는 김기춘보다 3살 어리고, 고시합격은 8년 정도 늦은 사법시험 8회이니 기수를 중시하는 검찰로서는 까마득한 후배다. 그럼에도 살기 위해서 한참 후배인 박철언을 통해 5공 실세에게 청탁을 한 것이다.

어쨌든 김기춘은 무사히 살아남아 1980년 대검찰청 특수1과장·서울지검 공안부장을 역임했고, 1981년에는 출입국관리국장을 지내다가 12월 17일 법무부 검찰국장[17]으로 임명된다. 이어 1982년 장영자·이철희 금융사기 사건 수사결과를 발표하면서 "중앙정보부 출신인 이철희를 나름 보호하기 위해 기자들에게 '장영자-이철희 사건'이라고 언론에 브리핑했다가, 전두환이 "모든 것을 이철희가 했지 아녀자인 장영자가 했겠느냐, 누가 이런 식으로 언론에 얘기했느냐"고 격노한 뒤 '이철희-장영자 사건'으로 사건 이름이 변경되는 일을 겪었다. 월간조선

이후 김기춘은 법무연수원 연구부장으로 좌천된다.[18] 이때 찾아오는 손님이나 이전에는 여럿 거느렸던 부하들도 거의 없이 밥도 항상 혼자 먹는 등 갖은 수모를 당했다고 한다. 검찰의 고위직은 당시 안기부 요원들에 의해 근황이 일거수일투족 체크되고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밥을 혼자 먹는다는 것은 단순히 친구나 찾아오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 아니라 조직의 기피인물이라는 뜻이다. 즉, 김기춘과 얽히면 5공 정권의 요주의 인물이 된다는 뜻이었다. 유신시절 무소불위를 저지르던 과거를 감안하면 몰락의 극치였다.[19]

법무연수원에서 절치부심하며 버틴 끝에 결국 1985년 3월 대구지검장으로 부임했다. 1986년 5월에는 고검장으로 승진하여 대구고검장과 법무연수원장을 지냈다.

4. 제6공화국 시절

전두환이 물러나자 그는 다시 출세가도를 달린다. 박철언이 6공의 황태자 노릇을 하면서 자신과 친분이 있는 선배 김기춘을 적극적으로 뒤에서 밀었기 때문이다. 5공 때 먹은 찬밥은 6공에서 전화위복이 되는데, 그는 5공 때 한직으로 돈 사실을 가지고 깨끗하고 강직한 검사로 연극했다.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1988년 검찰총장에 오르는데, 이는 박정희의 또 다른 가신이었던 신직수[20]를 제외하면 지금까지 깨지지 않는 최연소 취임 기록이다.[21] 고문경찰 이근안에 대한 수사 지시를 내리고 5공비리 사범 50여 명을 구속시키는 등, 5공 청산에 앞장섰으나, 정작 6공 세력까지 얽힌 비리, 5.18을 비롯한 중요 사안은 냅둔다.

13대 국회 때 여소야대로 정권이 수세에 몰리자 적절한 시기에 굵직굵직한 공안사건을 터뜨려 정권의 위기를 해결해주는 구원자 역을 하게 된다. 그중 하나가 서경원 의원 간첩사건 의혹인데, 이때 평화민주당 김대중 총재가 연루되어 있다는 언플을 하면서 김대중의 이미지에 흠집을 냈으나, 결과적으로 김대중은 결백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후 2년간의 검찰총장 임기를 다 채우고 6개월간 휴식기를 가진다.

이때 노태우 정부는 3당 합당을 통해 김영삼, 김종필과 힘을 합친 후 공안정국을 조성하며 학생운동권의 분노가 폭발하게 된다. 여기에 명지대학교 학생인 강경대 군이 전경의 쇠파이프에 맞아 사망하자, 386세대 최후의 항쟁이라는 1991년 연쇄 분신 파동이 벌어져 정권은 위기에 몰리게 된다. 이때 매주 분신자가 나오면서 전국민 항쟁으로 확산될 기미가 보이자, 김지하[22]는 5월 5일 조선일보에, "죽음의 굿판을 때려치우라"라는 글을 기고해 운동권이 기획분신을 정치적 도구로 삼는다는 주장을 펼쳤고, 그와 동시에 서강대 총장이던 박홍 루카 신부가 "분신을 부추키는 어둠의 세력이 있다"고 주장했다.

1991년 5월 27일 막 법무부장관으로 취임한 김기춘은 예전의 그 솜씨를 발휘, "김지하박홍 신부의 말이 근거 있다"며 검찰에 특별 수사를 지시하여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 사건을 일으킨다. 즉, 재야단체 전민련에 소속되어 있던 운동권 강기훈이 운동권 동지였던 김기설 씨의 분신자살(1991년 5월 8일)을 부추기고 유서를 대필해 줬다는 플롯을 짠 것이다. 정부가 이러한 내용을 대대적으로 발표하면서[23] 분신정국은 급속히 공안정국으로 반전되었으며, 그 직후인 1991년 6월 4일 국무총리로 지명된 정원식 한국외대 겸임교수[24]가 운동권 학생들에게 계란세례를 당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완전히 전세가 역전된다.

김기춘은 자신의 솜씨를 발휘해 정권의 위기를 찬스로 전환시켰고, 운동권은 치명타[25]를 입었으며 이 사건을 기점으로 공안검사 출신들이 승승장구하는 결정적인 계기[26]가 되었다. 강기훈은 무려 24년 만에 2015년 재심 절차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이를 지휘한 김기춘이나 관련 공안 검사들은 전혀 사과나 반성을 한 바 없다.

강기훈 씨는 출소 후, 전민련 운동권 선배였던 정봉주 전 의원의 주선으로 정봉주가 운영하던 학원에 1990년대 잠시 전산담당으로 취직하지만, 정봉주가 정계로 입문하면서 학원 경영을 그만두자 이후 (전과자 전력 때문에) 변변한 직업을 갖지 못했다고 한다. 여러 번 재심을 청구하였으나, 실제로 재심에 들어간 것은 2007년이었고, 재판 과정에서 홧병으로 간암이 발병하였다고 한다. 결국 재심으로 무죄판결을 받았음에도 안정을 위해 언론 접촉도 피했다. JTBC 정봉주는 자신이 진행하는 한 팟캐스트에서 2016년 말 현재 강씨의 병세가 위중하다고 밝힌 바 있다.[27]

5. 문민정부 시절

역사 바로 세우기를 내세운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당연히 청산 대상이 되어야 정상이었는데, 여기서도 다시 한 번 운빨이 터진다. 어처구니없게도 김영삼과 동향 및 동문이라는 이유였다.[28][29] 5공, 6공 시절 김기춘의 후견인 역할을 했던 박철언은 김영삼과의 불화로 정치보복을 받아 소위 "슬롯머신 비리"사건으로 감방에 갔다. 이때 박철언과 같이 얽혀서 감옥에 간 사람이 이건개 당시 대전고검장. 이건개는 사시 1회로서 김기춘보다 2살 어리고, 고시로는 1회 후배로서 여러모로 김기춘과 비교될 만하지만[30] 김기춘만한 운빨은 없었던지 김영삼의 아들 김현철에게 줄을 댔어도 이 사건으로 사법처리가 되어 관운이 끝나고 말았다. 이분도 여기서 안 끝났으면 김기춘처럼 검찰총장까지 갈 수 있었다는 게 정설이다. 그런데 김기춘은 박철언과 가까이 지냈음에도 무사했다. 그야말로 기가 막힌 운빨과 보신 본능을 가지고 있다고 봐야할 듯.[31]

김기춘은 3당 합당 이후 여당 정치인으로 변신한 김영삼에 일찌감치 줄을 서왔으며, 법무부장관에서 물러난 1992년 12월 11일 부산 지역 기관장들을 모아 지역감정 조장을 음모한 "우리가 남이가"로 유명한 초원복집 사건을 일으킨다. 그런데 당시 여당이었던 민주자유당 측은 거꾸로 정주영 측의 도청을 문제삼았고, 부산 민심은 더더욱 김영삼에 기울어, 김영삼은 대선에서 당선되었다.

김기춘은 초원복집 사건으로 기소되었으나, 재판이 진행되는 중 당시 대통령선거법 규정을 위헌제청신청하는 기발한 수를 내어 결국 위헌결정을 받고, 재판에서도 면소 판결을 받았다.

이후 서울에서 변호사 활동을 하다가, 1995년 2월에는 KBO 총재에 임명된다.[32] 그리고 국회의원 임기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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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화 이글스 선수들과 악수하는 KBO 총재 시절의 김기춘.

1996년 15대 총선에서 신한국당 공천을 받아 고향인 거제도에서 국회의원 후보로 출마한다. 당시에도 유신헌법의 초안자라는 점, 초원복집 사건의 주범이라는 점이 결격사유로 지적되었는데, 김기춘은 언론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변명한다.
나와 관련된 얘기에 대해 변명하고 싶지는 않다. 유신이 이뤄진 1972년에 나는 당시 임용된 지 7년 된 만 32살의 평검사였다. 나는 내가 역사를 왜곡하는 데 직접 참여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복국집 사건에 대해서는) 당시 내가 경남 분들이 표를 몰아줘야 한다고 얘기는 했지만 호남을 비방한 적은 전혀 없다.

선거 결과 김기춘은 압도적인 표차로 다른 후보들을 누르고 당선된다. 거제는 김영삼 대통령의 고향이었던 만큼, 여당 후보로 출마한 이상 국회의원 당선은 누워서 떡먹기였다.

6. 국민의 정부-참여정부 시절

김영삼을 적극 지지하여 따낸 국회의원이라는 직위는 정치적 방탄복이 되었고, 그는 재심에서 무죄로 밝혀진 유신-5공시절의 여러 조작사건에서 검사나 수사관으로 활약했음에도 아무 법적 처벌을 받지 않았다. 이후 2002년에는 재선의원 신분에도 보통은 3선 이상이 보임되는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위원장에 선출되었다. 이는 김기춘의 법조인으로서의 경력이 높기 때문에[33] 낮은 선수에도 추대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파일:external/photo-media.hanmail.net/NIS20040312174304253.jpg
2004년 국회 법제사법위원장으로서 노무현 대통령 탄핵 의결서를 보여주는 김기춘. 왼쪽은 당시 새천년민주당[34]에 있다가 참여정부 말기 친박으로 전향한 당시 법제사법위원회 함승희 간사.[35] 헌법에 따라 김기춘 법제사법위원장은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사태 당시 탄핵심판 청구인이 되었다. 하지만 헌법재판소는 탄핵심판을 기각했다.

과거 공안 조작사건 기획과 지역감정 유발, 공작정치의 전력으로 시민단체에 의해 총선 낙선 대상으로 지목되기도 했지만 일단 거제시 자체가 한나라당 텃밭이었고 박근혜 대표와 밀접한 관계였기 때문에 당연히 공천을 받았다. 그리고 무난히 3선에 성공한다.[36] 또한 이 당시에 노무현 대통령을 싸이코라고 지칭하는 막말을 하기도 했다. 이후 한나라당 여의도연구소 소장직을 지냈다. 당시 당 대표는 박근혜였다.

2007년 박근혜 한나라당 대선후보 캠프의 좌장노릇을 했으며, 원로 친박 정치인으로 구성된 7인회의 일원이었다.[37]

7. 이명박 정부 시절

2008년에 공천권을 쥔 이명박 측이 친박 대숙청을 할 때[38] 너무 고령이라는 이유[39]로 공천에서 윤영에 밀려 탈락해서 야인이 되었다.

변호사 생활을 하던 김기춘은 한국기원 상임이사 - 부이사, 대한통운 사외이사[40]를 거쳤고, 이후 2009년 8월부터 2013년 8월 박근혜 정부의 비서실장이 되기까지 한국에너지재단 이사장[41]을 맡았다. 2010년 3월에 한나라당 상임고문에 임명되었고, 한나라당 전당대회 의장을 맡아 2010년 최고위원회의에서 안상수 대표의 선출을 발표했다. 동년 11월에는 한나라당 윤리위원장에 임명되었는데 과거 행적 때문에 당 내에서도 논란이 되었다.[42] 별다른 활동은 하지 않았지만, 최순실 일당과 가까이 지낸 것이 서서히 밝혀지고 있다.

2009년 10월, 미공개 회고록 <오늘도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인 것처럼>을 남겼다. 이 회고록에서, 김기춘은 1970~80년대 사고방식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군사정부 시절 국가범죄에 대한 과오에 대한 반성이나 성찰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으며, 노골적인 극우반공주의 의식, 편협한 정치적 시각도 여과 없이 표출 돼 있다. 요컨대 ‘극우의 향기’가 물씬 풍기는 김 전 실장의 내면세계를 고스란히 자신의 신념을 드러내고 있다. #

8. 박근혜 정부 시절

8.1. 비서실장 재임: 왕실장, 기춘대원군

드물게 보는, 사심이 없는 분
박근혜 (2015년 신년기자회견에서 김기춘에 대한 평) 관련기사

김기춘은 2013년 8월 5일에 제2대 대통령비서실장으로 임명되었다.[43] 취임한 김기춘 비서실장은 부속실로 쏠리던 힘을 비서실로 당겨왔다는 평을 듣는다. 김기춘 비서실장은 이재만 총무비서관을 포함해 5명으로 구성된 청와대 인사위원회의 위원장을 맡고 있었으며, 평소 인사 문제에 있어서 뜻을 강력히 관철하는 것으로 알려진다. # 이렇듯 막강한 권력을 자랑했기에 붙은 별명이 기춘대원군, 왕실장.[44]

김기춘이 청와대 비서실장이던 시절에 저질렀거나 관련된 사건들은 다음과 같다.
  • 2013년 9월 13일 채동욱 검찰총장이 혼외자 문제가 불거지며 사퇴를 결정하자, 이의 배후에 김기춘 실장이 거론되며 사퇴를 주장하는 목소리가 높아진다. # 당시 야권에서는 국가정보원 여론조작 사건을 덮기위해 조선일보를 통해 채동욱의 개인정보를 흘려 수사 중이던 검찰총장을 찍어내려고 했다는 주장이 있었다.
  • 2013년 12월 31일에 외아들인 김성원(당시 47세) 씨가 교통사고로 인한 뇌출혈로 식물인간이 되었다. 자식의 사고에도 주변에 알리지 않고 평소처럼 업무를 처리하였다고 찬사를 보내는 언론이 있기도 했지만 천벌을 받은 것이라는 말도 많았다.
  • 2014년 4월 청와대 7시간 의혹 사건과 관련해서 대통령의 행방에 관해 모른다고 답변하면서 대정부질의 중이던 박영선 의원조차 어이를 상실해 몇번이나 추궁했고, 이로 인해 세월호 7시간이 급속도로 확대된 빌미를 제공했다. 사실 정상적인 경우라면 비서실장은 이런 자리에서 설령 사실이 아니더라도 '그 때 대통령님은 집무를 보고 있었습니다.' 라는 등의 말을 하는데, 김기춘은 저런 충격적인 말을 그냥 툭 던져버렸다. 또한 이 때의 모습은 평소의 김기춘과는 다르게 매우 짜증이 난 듯한 감정이 밖으로 표출된 몇 안 되는 모습인데 본인조차 세월호 7시간 동안 있었던 일에 대해서 뭔가 불만이 있었다는 주변의 추측이 있었고, 이는 어느 정도 납득될 상황임이 밝혀졌다. 김기춘은 직무대로 사건 인지를 하고 바로 보고를 하려했었는데 대차게 꼬인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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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방조죄. 단식 생명위해행위 단식은 만류해야지
부추길 일X 국민적 비난이 가해지도록 # 언론지도 생각포기

-김영한 청와대 민정수석이 기록한 김기춘 비서실장의 지시내용
  • 2016년 12월 6일 고 김영한 청와대 민정수석의 업무수첩이 공개되었는데, 이 중 세월호 유가족인 김영오씨의 단식을 두고 김기춘의 지시기록이 논란이 되었다. 김영오씨의 단식을 두고 언론지도를 지시한 기록이었는데 민주주의 국가에서 언론통제를 시도한 것 자체도 문제가 있는 것이었고, 이 자칭 언론지도를 통해 국민적 비난이 가해지게하는 대상이 누구인가를 두고 유가족 김영오씬지 단식을 부추기는 집단인지는 이 문장만으로는 확인은 불가능하지만 김기춘의 해당 언론지시가 있은 뒤 2014년 7~8월 무렵 조중동 등 언론매체에서 주도적으로 세월호 유가족 김영오씨에 대한 인신공격성 보도 연달아 대서특필로 써갈긴 것과 9월 초 생긴 광화문 폭식농성 사건 등으로 추정컨데 전자에 더 가까워 보인다.

이런 만행을 저지르다. 2015년 3월 자원외교 비리 조사에 따른 성완종에 대한 사정이 본격화하기 직전 비서실장직에서 사퇴한다. 이른바 성완종 리스트에서 그의 이름이 등장해서 해명하는 곤란을 겪어야 했다. 후임은 이병기.

9.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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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서도 역시 등장하며, 최순실에 대해 모른다고 말했다. 그런데 청와대 재직 시절, '최순실을 주의하라'는 구두 보고를 받은 것으로 전해졌다는 것이다. # 이쯤되면 입만 열면 거짓이다. 게다가 최순실 소유의 건물에 김기춘이 활동하고 있는 증언이 나왔다.#

최근에 비서실장에서 물러난 뒤 차움병원에서 줄기세포 치료를 받아서 논란이 되고 있다. 가명인 KKC를 써 치료를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기사 김기춘이 김종 문화체육관광부 제2차관에게 최순실을 소개했다는 기사가 나온다. 당초에 최순실을 모른다는 것이 거짓말이었다는 증거인 셈이다. 이때 생긴 별명으로는 줄기세포 + 김기춘에서 따온 줄기춘이 있다.

게다가 성완종 자살 직후 일본에서 반값’ 면역세포 치료했다는 것이 드러났다.기사

세월호 7시간 동안 김기춘은 수석들의 입과 귀를 막았다고 한다. 그것들과 관해서도 모른다고 발뺌했다. 게다가 최 씨 일가 국정개입에 대해 몰랐고 그것에 대해 자괴감이 들 정도라고 말한다. 그리고 김종 전 차관이 그렇게 말했다면 나는 정신 나간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차은택이 최순실의 지시를 받고 김기춘과 만남을 가졌다고 주장하면서 김기춘이 최 씨 일가를 몰랐다는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했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불거진 이후 차은택을 모른다고 발뺌하다가 차은택이 구속된 후 김기춘을 만났다는 것을 자백하자, 마지못해 인정하기도 했다. (마찬가지로 최순실을 모른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80년대부터 육영재단 관련 사안에 개입해온 그가 모를리 만무.) 하지만 워낙 빠져나가는 게 능한 데다가 운빨이 상당하고, 여기에 검찰총장과 법무장관을 거쳤기에 전관예우(검찰의 비호)를 받고 있어서 이번에는 법적 처리가 될지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결국 문화체육관광부 고위 공직자들의 집단 사표를 받는 데 관여한 혐의로 피의자로서 수사하게 되어 그의 불패신화가 흔들리고 있다.

김영한 민정수석이 남긴 비망록에 의해 통진당 해산을 헌재 결정 이틀 전에 알고 있었고, 전국교직원노동조합 법외노조화에도 손을 썼다는 사실까지 밝혀졌다. 기사 심지어 세월호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는 유가족과 동조 단식을 하는 문재인 전 새정치민주연합 대표(당시 의원)와 가수 김장훈 씨 등의 행동을 ‘자살방조죄’로 규정하고 ‘언론지도’를 통해 비난 여론을 조성하려고 한 정황까지 드러났다. 기사

2013년 말 개봉했던 영화 변호인을 본 직후 혀를 차고 못마땅해하며 왜 이런 영화를 만드는 회사들을 제재하지 않느냐유진룡 당시 문화체육관광부장관에게 말했던 사실이 당사자인 유 전 장관의 인터뷰릍 통해 드러났다. 그는 CBS 노컷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순수 문화예술 쪽에서도 반정부적인, 반정부적인 행동을 하는 그런 사람들이나 단체에 대해서는 왜 지원을 하느냐? 왜 제재를 하지 않느냐는 요구를 김기춘 실장이 직접 또는 모철민 교육문화수석, 김소영 문화체육비서관을 통해서 다각도로 문체부에 전달했다"며 이것이 이후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로 이어졌다고 밝혔다.#

9.1. 최순실 청문회 증인출석

모릅니다. 저는 알지 못합니다.
제가 나이가 들어서....
2016년 12월 7일, 2차 청문회에 출석했다. 주요 증인이 거의 다 핑계를 대고 불참한 가운데 고령임에도 출석한 것은 드문 일이었다. 이렇게 빠질 수 있음에도 굳이 나온 이유을 김어준은 "자신의 건재를 과시하려 했다"고 평가했다. 즉 자신이 상황을 통제하고 있다는 사실을 과시하면서 도피하던 우병우나 아직 구속되지 않은 문고리 및 관련자에게 입 다물라는 암시를 주려고 했다는 것이다.

과연 법률전문가답게 대개 법률지식이나 수사 경험이 없는 의원들의 여러 질문을 요리저리 피하면서도 오후 늦게까지 빈틈을 보이지 않았다.[46] 자신이 실수한다 싶으면 노령으로 인한 기억력 쇠퇴나 오래전에 발생한 일에 대한 기억착오라고 주장하며, 미꾸라지처럼 올가미에서 벗어났다.

특히 김영한 전 민정수석의 업무수첩(비망록) 내용을 전면 부인했으며, 본인이 내린 "(비판 여론 무마를 위해) 시신 인양을 늦추라"는 지시도 사실상[47] 고인이 된 아들까지 들먹이며 사실을 부인했다. 이를 보다 못한 국민의당 김경진 의원[48]은 거의 울분에 찬 비판을 하였다[49]. 발언내용이 속기록에 남는 공식적인 자리이기에 '지옥에나 떨어지라'는 말을 정중하게 에둘러 표현하였고, 밑에 말은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아들을 거의 능욕하다시피 하는 김기춘을 비판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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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10시경 박영선 의원이 주갤제보를 바탕으로 빼도 박도 못할 증거를 제시하여 최순실을 모른다는 것도 거짓말로 들통났다. 청문회에서 계속 최순실을 모른다고 하다가는 빼도 박도 못하게 위증죄로 고발될 처지였기 때문에, "최순실을 못 들었다고 볼 수 없다"는 표현으로 위증죄를 피해나가려고 한 것. 과연 법비(法匪)라고 할 수 있다. 모릅니다로 일관하는 것이 청문회 당시 그의 무적 논리였는데 그것이 깨진 것이 큰 충격이었던 듯. 청문회가 끝나고 퇴장한 장면이 나왔을 때를 잘 보면 거의 부축을 받다시피해서 걸어 나갔다.

게다가 당시 후보 토론회에서는 주갤의 추가 제보로 정윤회에 대해 당시 행적까지 언급하는 발언까지 들어 있었던 게 확인되어 정윤회를 몰랐다는 말이 도저히 사실일 수가 없게 되었고 김기춘은 정윤회를 몰랐다는 게 개인적인 접촉이 없었다는 의미였다고 버티려 했으나 새누리당 황영철 의원이 이어서 질의하면서 "지금 증인이 유신 시절부터 해당 영상은 물론 박근혜 정권 비선실세 관련 보고서까지 최씨 일가에 대한 정보를 질리도록 반복해서 들은 위치인데 증인은 청문회 이전에는 존재를 아예 모른다고 말 해놓고 이제 와서 개인적 접촉이 없었던 의미라고 하면 사람들이 믿겠는가?"하고 힐난하자 오전 청문회 때와는 달리 제대로 대답을 잇지 못했다.

청와대 재임 시에는 문고리 3인방의 전횡을 차단하기는커녕 그들을 적당히 봐주어 권력을 공유, 비서실장으로서 장수할 수 있었다고 한다. 즉, 그는 최순실-문고리3인방의 조력자다. 월간중앙

청문회에서 주갤의 제보로 크게 털린 것이 매우 큰 충격이었는지 채널 A와 한 전화 인터뷰에서 김기춘의 부인 박화자가 직접 "남편은 현재 청문회에 나간 것을 크게 후회하고 있다"고 말했다. 기사

과거에도 자신을 큰 위기에서 여러 차례 구해 주었을뿐만 아니라 화려한 부활을 만들어 준 박철언이 감옥에 갈 때도 김영삼에게 붙어서 모른 척 했듯이, 현재 보신을 위해서라면 의리충성심도 없는 듯, 차은택을 만난 사실을 극구 부인하다가 차은택이 자백하자 이를 박근혜 지시라고 하며 차은택 관련 비리 혐의를 위기에 몰린 박근혜에게 전가하는 추태까지 보이고 있다.[50]

법을 훤히 꿰뚫었으며, 본심을 감추고 박쥐새끼처럼 행동하는 것에 타고난 인물이라서[51] 이것으로 실형 선고까지는 받을 가능성이 희박하지만, 정치가로서는 사형 선고를 받았다. 과거처럼 적절한 시기를 기다리며 재기를 노리는 것도 어려운 것이, 그의 나이 이미 79세다(2017년 기준).

이후 측근들이 정말로 최순실을 모르냐 묻자 "내가 최순실 모를 리 있겠나"라고 털어놨다. #

9.2. 특검 수사 및 재판


2017년 1월 18일, 특검팀은 직권남용과 위증 혐의로 조윤선 문체부 장관과 함께 사전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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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밖에도 여러 혐의를 비롯해 증거인멸까지 저지른 정황까지 밝혀졌다.

2017년 1월 20일 오전 9시가 조금 넘어 서울 대치동 특검 사무실에 들러 수사관들과 함께 법원으로 이동해 3시간 반의 영장실질 심사를 받고, 서울구치소로 옮겨져 수감됐다. # 당시 서울구치소의 최고령 수감자라고 한다.

이 즈음, 문익환 목사의 아들인 배우 문성근은 신랄한 비판 글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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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월 21일, 결국 새벽 3시 48분 조윤선과 함께 구속되어 말년을 꼴사납게 장식하는 굴욕을 당한다.[52]다음 날에는 특검에 소환되어 수갑을 찬 채 출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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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검은 김기춘 전 실장이 직무를 벗어난 광범위한 국정 개입에 나서고, 비선실세 최순실 등을 비호한 것으로 보고 수사를 확대하고 있다. #

결국 구속영장 실질심사 과정에서 문화계 블랙리스트의 작성 및 실행 지시를 주도했다는 것을 시인했다고 한다. # 그런데 자신은 이게 불법인 줄 몰랐다고 진술했다. 조금만 나이가 들어도 알 만한, 중대 헌법 위반 사항을 자타가 공인하는 한국 최고의 법률가가 몰랐다고 진술해서, 많은 사람이 망연자실했다. 그야말로 법마의 추잡한 마지막이다.
서울고등법원 제9형사부 결정



【사건】 2017초기42 특별검사의직무범위이탈에대한이의신청

【신청인】 김AA, 전 대통령 비서실장(변호인 법무법인 케이씨엘 담당변호사 정동욱, 변호사 김경종, 강정우)



【주문】

이 사건 이의신청을 기각한다.



【이유】

1. 신청인의 주장
박AA 정부의 최BB 등 민간인에 의한 국정농단 의혹 사건 규명을 위한 특별검사의 임명 등에 관한 법률(이하 ‘특별검사법’이라 한다)에 따라 특별검사가 신청인에 대하여 직권남용 및 권리행사방해 혐의로 수사하고 있는 ① 문화사업에 대한 불법개입 및 관련 인사조치, ② 특정 문화예술계 개인·단체에 대한 지원배제(이른바 ‘문화계 블랙리스트’ 작성). ③ 국회에서의 증언·감정 등에관한 법률위반의 점은 각 특별검사법 제2조 각호에 규정하는 특별검사의 직무범위를 이탈하였으므로, 특별검사는 직무범위를 이탈한 위 사항에 대하여는 수사 및 공소제기 등 일체의 절차를 정지하여야 한다.



2. 판단
가. 특별검사법의 관련 규정
특별검사법이 정하고 있는 특별검사의 수사대상 관련 규정은 다음과 같다.

제1조(목적) 이 법은 제2조에 따른 사건의 진상규명을 위하여 독립적인 지위를 가지는 특별검사의 임명과 직무 등에 관하여 필요한 사항을 규정함을 목적으로 한다.

제2조(특별검사의 수사대상) 이 법에 따른 특별검사의 수사대상은 다음 각 호의 사건 및 그와 관련된 사건에 한정한다(이하 일부 생략).
2. 최BB(최bb) 등이 대한민국 정부 상정 개편 등 정부의 주요 정책결정과 사업에 개입하고, 정부부처·공공기관 및 공기업·사기업의 인사에 불법적인 방법으로 개입하는 등 일련의 관련 의혹사건
5. 최BB(최bb) 등이 자신들이 설립하거나 자신들과 관련이 있는 법인이나 단체의 운영과정에서 불법적인 방법으로 정부부처·공공기관 및 공기업·사기업으로부터 사업 등을 수주하고 씨제이그룹의 연예·문화사업에 대하여 장악을 시도하는 등 이권에 개입하고 그와 관련된 재산을 은닉하였다는 의혹사건
6. 정CC의 청담고등학교 및 이화여자대학교 입학, 선화예술중학교·청담고등학교·이화여자대학교 재학 중의 학사관리 등에 있어서의 특혜 및 각 학교와 승마협회 등에 대한 외압 등 불법·편법 의혹사건
8. 제5호부터 제7호까지의 사건과 관련하여 안DD 전 청와대 정책조정수석비서관, 김EE 전 청와대 교육문화수석비서관, 이FF·정GG·안HH 전 비서관 등 청와대 관계인, 김II 전 문화체육관광부장관, 김J 전 문화체육관광부차관, 송KK 전 한국콘텐츠진총원장 등 공무원과 공공기관 종사자들이 최BB(최bb) 등을 위하여 불법적인 방법으로 개입하고 관련 공무원을 불법적으로 인사조치하였다는 의혹사건
15. 제1호부터 제14호까지의 사건의 수사과정에서 인지된 관련 사건

나. 신청인에 대한 구속영장청구서의 범죄사실의 요지
신청인에 대한 구속영장청구서의 범죄사실의 요지는 아래와 같다.

1) 문화사업에 대한 장악 시도 등 이권 개입과 이와 관련된 공무원·공공기관 종사자들의 불법 개입 및 관련 인사조치

최bb은 평소 진보성향이나 현 정권 비판인물들을 기피하였고 CJ 그룹 제작 영화나 드라마를 좌파적 성향이라 비난하였으며, 대통령도 CJ 그룹 관계자에게 위와 같은 정치적 편향을 지적하였다.

신청인은 회의 등에서 종북세력의 문화계 장악과 CJ 등 재벌들의 비협조 문제를 거론하였고, 민간단체 보조금 TF를 통한 좌파 지원현황의 전수조사를 지시하는 등의 방법으로 ‘문화예술계 지원배제 명단’을 작성한 후 이에 포함된 문화예술계 개인·단체에 대한 지원을 배제하였으며, 대통령, 김II 등과 순차 공모하여 위 명단의 적용에 미온적 태도를 보인 공무원 최LL, 김MM, 신NN에 대하여 사직을 강요하였다.

신청인은 대통령, 조OO, 신PP, 정QQ, 김EE, 김RR, 김II, 최bb 및 문체부 담당 공무원 등과 순차 공모하여 대통령 및 비서실장, 정무수석, 소통비서관, 정무비서관, 교문수석, 문체비서관, 문체부 장관, 문체부 공무원 등의 직권을 남용함과 동시에 두려움을 느낀 피해자 예술위·영진위·출판진흥원 소속 임직원들로 하여금 예술위 책임심의위원 선정, 문예기금 지원심의, 영화진흥사업 지원심사, 세종도서 선정심사 등에 부당 개입하게 함으로써 각각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하였다.

2) 국회에서의 증언·감정 둥에관한법률위반

신청인은 2016. 12. 7. ‘박AA 정부의 최BB 등 민간인에 의한 국정농단 의혹 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국정조사 청문회(제8차)’에 출석하여 선서한 후에 블랙리스트 작성 여부, 홍SS 배제 노력과 제재 조치 강구 및 문화예술계 좌파 책동에 대한 투쟁적 대응 등의 지시 여부에 관하여 위증하였다.
다. 특별검사법에 따른 특별검사의 수사범위
1) 특별검사법의 입법 배경 및 신청인에 대한 범죄인지 경위

민간인 최BB(최bb)과 최TT·장UU 등 그의 친척이나 차VV·고WW 등 그와 친분이 있는 주변인 등(이하 “최BB(최bb) 등”이라 한다)이 정부 주요 정책결정과 사업에 관여하고 정부부처·공공기관 등 인사에 불법적으로 개입해 국가시스템을 혼란시킨 의혹과, 재단법인 미르 등을 통한 사익 취득을 시도하였다는 의혹 등 관련 의혹들이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확산되었다. 이에 국회는 2016. 11. 22. 최BB 등 민간인에 의한 국정농단에 대한 국민적 의혹을 해소하고자 특별검사법을 제정하였다[53]

특별검사는 최BB의 정책결정 및 인사 불법 개입 의혹사건(제2조 제2호), 씨제이 장악 시도 등 의혹사건(제2조 제5호), 승마협회 등에 대한 외압 등 의혹사건(제2조 제6호), 안DD, 김EE 등 청와대 관계인, 김II 등 공무원의 최BB을 위한 불법적 개입과 인사조치 의혹사건(제2조 제8호)을 광범위하게 수사하는 과정에서, 신청인이 위 나.의 1)항 기재와 같이 대통령, 김II 등과 순차 공모하여 국가공무원인 최LL, 김MM, 신NN으로 하여금 사직서를 제출하도록 하고, 대통령, 최bb 및 문체부 담당 공무원 등과 순차 공모하여 블랙리스트를 작성하고 문화예술 관련 지원에서 배제되도록 한 혐의가 있다고 판단하였다. 이에 2016. 11. 22. 신청인에 대한 이 부분 범죄사실을 인지하여 수사를 개시하였고, 2017. 1. 18. 위 범죄사실을 근거로 신청인에 대한 구속영장을 청구하여 2017. 1. 20. 영장이 발부되었다.[54]

2) 판단

앞서 본 바와 같이 특별검사법은 제2조에 규정한 박AA 정부의 최BB 등 민간인에 의한 국정농단 의혹사건의 진상규명을 위한 것인데, 이해관계 충돌의 측면에서 일반 검찰제도로 다루기에 부적절한 사건에 대하여 일반 검사가 아닌 임시적이고 특별한 지위에 있는 검사를 임명하여 사건에 대한 수사와 기소를 담당하게 함으로써 공정성과 객관성을 담보하기 위하여 사건의 의혹 단계에서 입법되었다. 특별검사법은 이러 한 입법 배경을 반영하여 제2조 제1 내지 14호에서 ‘의혹사건’이라는 포괄적인 용어를 공통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위와 같은 사정들을 종합하면, 제2조 제15호의 ‘관련 사건’이란 헌법상의 적법절차 원리나 형사절차의 법정주의 원칙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도 내에서 특별검사법의 입법 배경과 목적 및 법의 특수성 등을 감안하여 제2조 제1호부터 제14호까지 사건의 수사 과정에서 인지된 것으로서 제2조 각호가 규정하는 개별 의혹사건과 사이에 합리적인 관련성이 있는 사건을 의미한다고 할 것이고, 이러한 합리적인 관련성이 인정되는 경우라면 제2조에 열거되지 않은 사람이라도 특별검사의 수사 및 기소의 대상이 된다(대 법원 2002. 12. 24. 선고 2002도5296 판결 참조).

그렇다면 위 범죄사실은 특별검사법 제2조 제2, 5, 6, 8호 기재 각 의혹사건의 수사 과정에서 인지된 것으로서 위 각 호에서 규정한 의혹사건과 합리적 관련성이 있다고 봄이 타당하고, 신청인에 대한 범죄인지 및 수사과정에서 변호인참여권이 보장되는 등 헌법과 형사소송법이 정한 적법절차가 준수된 것으로 보이며 달리 신청인의 주장을 인정할 만한 소명자료는 제출되지 않았으므로, 이는 특별검사법 제2조 제15호에 해당하여 앞서 본 특별검사의 수사대상에 포함된다. 따라서 신청인의 주장은 받아들일 수 없다.

3. 결론

그렇다면 이 사건 이의신청은 이유 없으므로, 특별검사법 제19조 제4항 제1호에 따라 기각한다.

2017. 2. 3.

판사 황한식(재판장), 신숙희, 김종기
김기춘이 자신을 특검이 수사하는 데 대해 2017년 1월 31일 이 이의신청을 하였으나, 특별검사는 이의신청이 이유 없다는 취지의 의견서를 서울고등법원에 제출하였는데,#서울고등법원은 2월 3일 오전 김기춘의 이의신청을 기각하였다.#, 서울고등법원 2017초기42, 특별검사의직무범위이탈에대한이의신청, 법률신문

2017년 5월 27일, 보석 신청을 했다. 당연히 네티즌들은 얌전히 감방에서 반성하고 있을 것이지 어딜 튀어나오려고 하냐?며 싸늘한 시선을 보내는 중. 이때 보석 신청 사유 중 건강이 안 좋아서 심장이 멎을지도 모른다였는데, 해당 기사의 베스트 댓글에는 네가 멎게 한 심장이 얼마나 되는지 아냐는 글이 올라왔다.

차라리 국회의원 3선으로 끝내고 대통령 비서실장직을 맡지 않고 무난히 정계에 은퇴하였다면, 이렇게까지 몰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검찰총장과 법무부 장관, 국회 법제사법위원장직을 거친 역대급 거물 변호사가 되어 전관예우를 통해 막대한 수입을 올리는 것은 물론 박정희 전 대통령의 지지자들에게는 유신헌법의 원작자로서 칭송을 받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결국 검사 시절부터 품고 있던 출세욕과 권력욕이, 다른 사람들의 인생과 본인의 인생을 파멸시키고 후세에 더러운 이름을 남겼다.

6월 28일 공판에서 실시된 피고인신문에서, 대통령을 잘 보좌하지 못한 정치적 책임을 통감하며 사약이라도 주면 재판을 받을 것도 없이 마시고 죽고 싶다고 읍소하면서도,[55]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는 자신은 모르는 일이고 따라서 법적인 책임은 전혀 없으며 아무쪼록 옥사만은 면하고 싶다고 발뺌하였다. #

이러한 주장은, 그의 '주군' 박근혜가 2017년 기자단 신년 인사회 때 "완전히 엮은 것입니다."라고 한 것이나 정규재와의 인터뷰에서 "그동안 진행 과정을 추적해보면 뭔가 오래전부터 기획된 것이 아닌가 하는 그런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라고 한 것과도 일치한다. 그리고 재판에서 2~3년의 형만 받아도 그의 나이를 생각해 볼 때 사실상 종신형을 받는 셈이다.

7월 27일 1심 재판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직권남용과 위증부분에 대해 유죄판결을 받았다. 형량이 특검 구형에 비해 낮긴 하지만 법원이 블랙리스트 작성을 인정한 셈이기 때문에 앞으로 박근혜 재판에도 중요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조윤선 전 장관은 직권남용에 대해서는 무죄판결을 받았지만, 김상률 전 수석은 징역 1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 받고 법정구속 되었다. 자세한 재판상황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재판/김기춘·조윤선·김상률·김소영에서 참조.

1심 선고 이후 김기춘 측과 특검 측 모두 항소장을 제출했으나 김기춘 측의 변호인이 특검법의 특별 규정[56]을 간과하고 항소이유서를 기한을 넘겨 제출하는 바람에 김기춘 측의 항소가 기각될 위기(?)에 처했다. 그래서 한동안 법꾸라지는 법으로 망한다는 드립이 흥했으나... 항소심 재판부에서 직권으로 받아들였다. #

그래서 한동안 아깝다는 드립이 흥했으나[57], 항소법원은 1심에서 무죄를 선고한 1급 공무원 사직 강요 혐의도 유죄로 판단하였고, 2018년 1월 23일 올려치기 당해 1심보다 무거운 징역 4년을 선고하였다. # 1심이 끝난 2017년 7월 청와대 캐비넷에서 발견된 문건들을 특검 측이 증거물로 제출하였고, 이것이 받아들여진 것. 변호인 측은 이 문건의 증거 능력에 이의를 제기했으나 재판부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이것이 결정적인 증거가 되어 오히려 형량이 늘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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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출입기자들의 기사에 의하면 입정한 뒤 선고 전까지는 초조한 표정이었으나, 판결문 낭독이 선고 부분으로 들어서자 오히려 모든 것을 달관한 표정을 지었다고 한다. 실제 재판정을 나서 호송차에 탑승할 때 찍힌 사진에서도 모든 것에서 초탈한 듯한 표정을 짓고 있다.

2018년 1월 25일, 상고이유서를 제출하였다. # 박영수 특검팀 역시 구형된 형량이 크게 줄어든 것을 이유로 29일 상고이유서를 제출함으로써 재판은 대법원의 최종 판단으로 넘어갔다. #

2018년 8월 6일 새벽 구속기간 만료로 구속취소결정을 받아 석방되었다.[58] 참고로, 구속은 수사·공판·형집행 과정에서 피의자·피고인의 신병을 확보하기 위한 절차일 뿐 형벌이 아니기 때문에 '형을 다 살고 나온 정치인'에는 해당하지 않는다. 김기춘의 경우 아직 재판이 확정된 것이 아니므로, 구속되었던 기간인 18개월 이상의 실형이 최종 확정될 경우 18개월을 차감한 기간을 다시 복역하여야 한다.

하지만, 특검이나 검찰이 다른 범죄사실로 구속영장을 발부받지 않는 이상 대법원의 구속취소결정은 형사소송법 규정에 따른 기계적인 절차일 뿐이다. 즉, 피고인을 구속한 채로 법정 구속기간 안에 재판을 마치지 못한 이상 더 이상 구속할 근거가 없어 석방은 불가피하다는 뜻. 따라서 법원이 구속피고인에 대한 공판 절차를 18개월이 넘도록 질질 끈 점을 비판하면 모를까 구속취소결정 자체를 비판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 보수세력들이 김기춘에 대해 진보세력이 폭력을 휘둘렀는데 왜 안잡아가냐? 라고 정치보복이라고 그를 두둔하는데 이건 틀렸다. 진보 보수를 떠나 김기춘의 죄는 자유민주주의 헌법 체계에서 간첩 조작과 문화계 블랙리스트는 이념을 떠나 자유 민주주의 사회에서 용납 할 수 없는 중대한 범죄이다. 종북몰이를 하여 자신을 반대하는 사람을 아무 증거도 없이 간첩으로 모는 것 자체가 헌법의 자유와 인권을 쌈싸먹는 행위이다.

9.3. 전국경제인연합회에 보수단체 지원 강요(화이트리스트)

별개로 진행되고 있던 화이트리스트 재판의 10월 5일 1심 선고공판에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고 법정구속을 명받아 재수감되었다.#

2020년 10월 15일, 보수단체를 불법 지원한 혐의로 징역 1년이 확정되었다. 당초 2019년 2심까지는 1년 6개월이었으나 2020년 2월 상고심 파기환송에 이은 10월 대법원 확정판결로 이렇게 된 것이다. 다만, 구속기간이 선고형을 넘었으므로 재수감은 되지 않았다.

국정원 특수활동비 청와대 상납 사건/재판/허현준·김기춘·박준우·조윤선·현기환·김재원·신동철·정관주·오도성 참고.

이 사건은 후일 2022년 윤석열 정부 특별사면으로 사면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사면을 결정한 윤석열 대통령과 한동훈 법무부장관문재인 정부 시절 윤석열 서울중앙지방검찰청 검사장 - 한동훈 서울중앙지방검찰청 3차장을 맡아 당사자를 감옥으로 보냈던 사람들이다. 이명박·김기춘·원세훈·김경수 특별사면 대상…사면심사위 종료

9.4. 세월호 7시간 훈령 및 서류 조작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재판/김기춘·김장수·김관진·윤전추 참고.

9.5. 양승태 대법원 사법농단 의혹 사건

2019년 12월 4일 구속기간 만료로 석방 되었지만 양승태 대법원 사법농단 의혹 사건으로 다시 검찰 수사를 받았다. 주요 혐의는 상고법원 관련하여 사법부와 행정부간의 거래에 개입되었다는 혐의다. 그리고 그동안 주군을 위해 충성을 바쳐왔던 그가 주군을 배신하기 시작했다. 김기춘, 2014년에도 법원행정처와 日징용피해자 소송 논의 정황, "김기춘, 삼청동 공관서 대법관 만나 강제징용 재판 논의 정황", 이번엔 '강제징용 재판거래 의혹'… 검찰에 또 소환된 김기춘, 檢, '일제 강제징용 재판 거래 의혹' 김기춘 전 비서실장 14일 재소환 통보, [포토] 석방 8일만에 검찰 소환되는 김기춘, [포토] 나오지 않은 김기춘

이후 임종헌/재판의 증인으로 소환됐지만 출석을 두 차례나 거부했다. #

10. 이후

2021년 10월 노태우 전 대통령의 빈소를 방문해 "민주정부 이행 과도기에 훌륭한 역할을 하셨다."고 발언했다. 그는 노태우 정권에서 최초로 임명한 검찰총장이었으며[59], 법무부 장관까지 지내며 노태우 정권의 시작부터 끝을 함께한 인물이었다. 여담이지만 그의 얼굴은 많이 수척해진 티가 났다.

2022년 3월 24일, 자신이 모셨던 박근혜 전 대통령이 삼성병원에서 퇴원하자 친박, 박근혜 정부 시절 주요 직책을 역임했던 인사들과 함께 병원 앞에 마중을 나갔다. 동년 5월 10일에는 서울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인 사위 안상훈이 대통령비서실 사회수석비서관에 임명되었다.

2022년 윤석열 정부 특별사면으로 사면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사면을 결정한 윤석열 대통령과 한동훈 법무부장관문재인 정부 시절 윤석열 서울중앙지방검찰청 검사장 - 한동훈 서울중앙지방검찰청 3차장을 맡아 당사자를 감옥으로 보냈던 사람들이다. 국정원 특수활동비 청와대 상납 사건/재판/허현준·김기춘·박준우·조윤선·현기환·김재원·신동철·정관주·오도성 참고. 이명박·김기춘·원세훈·김경수 특별사면 대상…사면심사위 종료

2024년 신년 특사 때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재판/김기춘·조윤선·김상률·김소영의 파기환송심이 확정된지 1주일도 안 돼서 사면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사면을 결정한 윤석열 대통령은 황교안 권한대행 체제 시절 박근혜 정부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를 수사했던 박영수 특검에 수석파견검사였다.

[1] 이미지에서 오류가 하나 있는데, 초원복집 사건노태우 정부 시기의 일이다. 다만 당시는 노태우의 임기 말이었고 초원복집 사건 자체가 14대 대선에서 김영삼의 당선을 위해 벌린 일로 실제로도 영남을 결집시켜 당선에 도움이 됐다.[2] 1914년 통영군거제군을 흡수함. 그 후 1953년 거제군이 다시 분리되었다.[3] 사법시험은 1963년부터 생기고, 그전에는 일본의 제도를 그대로 들여온 고등고시라고 해서 붙기만 하면 판검사로 임용되었다.[4] 박근혜가 이사장으로 있던 정수장학회의 전신[5] 공안 쪽으로 돌았던 김기춘과는 달리 특수부 쪽의 수사통이지만, 김기춘과 마찬가지로 매우 보수적인 인물이다. 2002년 당시 TV에서 이회창 지지 연설을 하기도 했다. 이회창 지지는 사실 그가 국민의 정부 시절, 고검장을 하다가 검찰 수뇌부와 마찰을 빚어 잘렸다가 소송으로 2년 반만에 돌아와 후배 장관과 총장을 모셔야 했던 이력 때문일 가능성이 크지만 검사 개인으로 평가했을 때는 매우 유능하고 청렴강직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참여정부조차 그를 법무부장관으로 스카웃하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기춘을 안 좋게 봤다.[6] 김기춘에 대한 심재륜의 악평은 법조계에 흔히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특수와 공안이라는 검찰 내부조직 간 라이벌 의식의 소산이라고 볼 수도 있다.[7] 김기춘은 회고에서 문세광에게 "'내가 소설 <자칼의 날>을 읽었는데, 당신이 자칼이 아니냐'고 추켜세우자, 문세광이 여기에 감명 받아 술술 불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현재 많은 사람들이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어쨌든 저런 무용담보다는 오히려 고문이나 고문 위협으로 불게 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즉, 문세광은 김기춘의 설득으로 조총련 조직의 지령을 받았음을 자백했다고 했지만, 문세광은 전혀 공작원 훈련을 받지 않고 조총련과도 관계가 미약한 재일교포 운동권에 불과했다. 장거리에서 표적을 맞힐 수 있는 권총사격을 포함한 특수공작 훈련은 커녕 가벼운 고문에도 쉽게 술술 불 정도로 나약한 인물이었다.[8] 현재 국가정보원 국장은 2급이 배치되는 자리이다. 당시 김기춘의 나이는 40살이 채 되지도 않았다. 물론 유신헌법을 만든 당사자인 만큼 정권 차원에서 키워준 쪽에 가깝지만.[9] 한무제의 혹리(酷吏)로 법을 무시하고 한무제의 뜻대로 판결을 멋대로 내린 일로 악명이 자자했다.[10] 김기춘 자신은 대공 수사국장을 지내던 동안 고문 행위 사실 자체가 없다고 전면 부인했으나 #, 그가 재직하던 시절 대표적으로 공안 사건이 터졌던 '학원 간첩단 침투 사건'은 대표적인 용공 간첩 조작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11] 이전과 이후에도 보안사 등 여러 공안기관에 의해 재일교포 유학생들은 손쉬운 조작 간첩이 되어 희생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 이유는 사상의 자유가 보장된 일본에서 자란 재일교포들은 한국의 유신체제를 비판적으로 본 데다가, 일본이라는 중립지대에서 자란 자신을 남한과 북한 어느 편도 아니라는 생각을 가진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이런 재일교포 간첩 조작 사건은 1970년대 초반부터 80년대 중반까지 계속된다. 더 비극적인 것은 남한으로 유학온 재일교포뿐만 아니라, 북송된 재일교포들도 김일성 독재체제가 확립된 북한에서 비슷한 운명을 맞은 경우가 많았다는 것이다.[12] 이 시기를 다룬 영화 그때 그 사람들에서 중앙정보부 소속 안가 경비원들이 당구를 치면서 재일동포 간첩 조작에 대해 신나게 썰을 푸는 장면이 있다. 이 썰을 푸는 요원한테 국가보안법을 들먹이며 장난으로 용공으로 모는 다른 동료 요원은 덤.[13] 당시 함께 근무하던 사람들의 증언들이 많다.참고 물론, 대외적으로는 유운학을 PX 공금을 횡령했다가 수사망이 조여오자 조국을 배신한 파렴치범으로 보도하였다.[14] 이 사건을 계기로 20사단과 5사단이 자리를 맞바꿔 5사단은 연천, 20사단은 양평으로 이동한다.[15] 다만 김기춘이 보안사를 털 당시에 전두환은 1사단장을 맡고 있었다. 확실한 것은 전두환과 김기춘 상호간에는 연관성이 없다고 해도, 당시 대다수의 보안사 인력들이 김기춘에게 가진 반감이 심했고, 10.26 당시에 김기춘을 털어버리려고 했던 것이다.[16] 김기춘 본인은 "충성편지는 물론 5공 실세로부터 도움을 받은 일 자체가 일절 없다"며 부인한다.[17] 두 보직은 요즘에는 검사장 취급이고 검찰국장은 검사장급에서 가장 센 보직이지만 이 시기에는 요즘에 비해서는 실권이 약했다.[18] 원래 기수를 중시하는 검찰에서 낮은 기수의 후배가 자기와 동등하거나 높은 자리에 오르면, 스스로 사표를 내는 문화가 있다. 이곳은 그렇게 용퇴를 거부한 검사들이 가는 곳이다. 연구직이라고 하지만 하는 일은 없고 그냥 놀면서 독서하는 자리라고 할 수 있다. 문재인 정부우병우 라인을 정리할 때 이곳으로 발령을 냈고, 결국 이곳으로 발령난 검사들은 거의 사표를 냈다. 김기춘은 그 수모를 견디며 몇 년을 버틴 것이다.[19] 그러나 이렇게 한직에 있을 때도 육영재단 등, 최태민-박근혜의 전횡에 개입했다고 한다. 최순실 게이트가 불거진 이후, 5공 시절의 1980년대 남매-자매간 갖은 분쟁 때문에 바람잘날이 없던 육영재단 일에 현직 검사였던 김기춘이 최태민-박근혜를 위해서 자주 나타났다는 증언이 있다.[20] 1963년에 36세로 임명된다. 심지어 이 쪽은 검사 출신도 아닌 군 법무관 출신이었다.[21] 김기춘의 검찰총장 취임 당시 나이는 겨우 만 49세.[22] 이분은 유신 시절 고초를 당했지만, 5공 시절 이미 변절했다는 설이 있다. 이미 그 당시부터 기관원들과 친하게 지냈다고…[23] 여기에 정보기관이 퍼트린 듯한 유언비어도 돌았다. 즉, 운동권이 김기설을 "강제분신", 즉 태워 죽이고 이를 자살로 위장했다는 것. 이런 유언비어는 보수 개신교계와 택시운전사들을 통해 살포되었기 때문에, 이 또한 안기부의 공작의 가능성이 있다.[24] 본래 서울대 사범대학 교육학과 교수였으나 문교부 장관직을 하면서 사퇴했고 이후 덕성여대와 한국외대에서 겸임교수 생활을 했다.[25] 이 사건 이후로 386이 주동이 된 학생운동권의 현실 정치에 대한 영향력은 급격히 쇠퇴하며, 1996년 여름 주사파 학생들이 장악한 한총련연세대 사태를 일으켰다가 진압당하는 것을 끝으로 학생운동은 사실상 종말을 맞는다.[26]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에 수사 기획자였던 당시 법무부 장관 김기춘을 비롯해 대검찰청 강력부장 강신욱과 그 밑에 당시 담당 수사를 맡았던 검사들인 남기춘, 신상규, 윤석만, 곽상도, 임철 등이 전부 공안통 검사 출신으로 이 사건 이후로 연일 승승장구하고 출세가도를 달리게 되었다.[27] 다행인 것은 이후 강기훈 씨의 병세가 나아졌는지 아직도 생존해있다.[28] 단순히 동향 동문 정도가 아니라, 김영삼이 매우 아꼈다고 한다. 근데 김기춘과 거의 정반대의 삶을 살아온 문재인도 김영삼-김기춘과 동향(거제)-동문(경남고등학교)임은 함정. 이미 문재인과 김기춘은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사태 대통령 측과 국회 측을 대리해 법리로 맞붙은 적이 있으며, 결과적으로 국회의 탄핵안은 헌재에서 기각되어 문재인이 승리한 바 있다.[29] 비슷한 사례로 민정계 중에서도 제14대 대통령 선거 경선에서 김영삼을 지지했던 이른바 민주계는 문민정부 출범 후에도 대부분 승승장구했다.[30] 박정희의 군내 후견인이었던 이용문 소장(1916-1953)의 아들로서, 한때는 육영수박정희는 그를 박근혜의 남편감으로도 고려했다고 한다.[31] 당시 이건개와 박철언을 탈탈 털어서 교도소로 보내버린 사람이 홍준표 검사이다.[32] 2009년 2월 취임한 유영구 총재 이전까지 KBO 총재는 은퇴 정치인이나 퇴역 장성들이 낙하산으로 앉던 자리였다. KBO/역대 총재 문서 참조.[33] 이미 김기춘은 88~90년에 검찰총장, 91~92년에 법무부 장관을 지낸 인물이었다. 만일 김기춘이 정치인이 아닌 변호사 개업을 했다면 기수와 경력이 상당히 높은 전관 변호사가 되어 큰 수입을 올릴 수 있었을 것이다.[34] 열린우리당이 분당되어 나간 잔류 민주당.[35] 17대 총선18대 총선 낙선 후, 강원랜드 사장으로 있었다. 여담으로, 17대 총선에서 함승희를 떨어뜨린 사람은 열린우리당 정봉주 의원이다.[36] 사실 열린우리당 장상훈 후보와 민주노동당 나양주 후보가 받은 표를 합치면 과반을 넘겼다. 만일 두 사람이 단일화라도 했다면 김기춘이 자기 지역구에서 3선을 못 했을 가능성도 있었지만, 당시 두 정당의 방향성이 달라서 이뤄지지는 못 했다.[37] 당시 기준으로 강창희 전 의원, 최병렬 전 한나라당 대표, 김기춘 의원, 현경대 전 의원, 김용갑 의원, 김용환 전 의원, 안병훈조선일보 부사장이 친박 7인회의 구성원이다. 이 중에서 김용환과 김기춘은 유신시대의 인물이며, 김용갑, 최병렬, 강창희, 현경대는 5공-민정당 출신이다. 안병훈은 언론인 출신이므로 논외.[38] 이 시기에 친박계는 친이계가 주도권을 잡자, 한나라당에서 내쫓기다시피 했는데, 김기춘을 포함해서 이해봉, 박종근, 이규택, 김무성, 서청원, 홍사덕 등의 중진 의원들이 공천 과정에서 대폭 갈려나갔다. 게다가 정치 경력이 짧은 편이었던 한선교, 김세연 등도 줄줄이 잘려나갔다. 결국 이 중에서 상당수는 무소속이나, 친박연대로 가서 당선돼서 돌아온다만 김기춘은 아예 불출마했다. 중진 중에서 그나마 살아남은 인사가 허태열 정도.[39] 정작 이명박은 41년 생으로, 39년 생인 김기춘보다 겨우 2살 어린데다가 김기춘보다 4살 많은 자기의 친형인 이상득을 공천을 줘서 논란이 되었다. 뭐 하지만 대통령 입장에서 여당 내 비우호 계파에 자기보다 나이와 정치 경력이 많은 사람이 있으면 매우 부담스럽기는 하다.[40] 10.2.9 자진사퇴.[41] 본 임기는 3년이었으나 중임되었다. 이후 대통령비서실장 입각에 따라 1년만에 물러난다.[42] 심지어 홍준표가 대표로 바뀌었음에도 윤리위원장직에서 잘리지 않았다.[43] 동시 한국에너지재단 이사장 직에서 사임했고 새누리당 탈당 및 당적도 내려놓았다.[44] 전임 비서실장인 허태열은 2013년 8월 윤창중 성추행 사태가 터지자 인사 실패를 책임지고 물러났다. 한 언론인터뷰에서 익명의 청와대 관계자는 “인사와 관련해 허태열 전 실장과 보좌진 그룹이 나뉘면서 두 그룹 간 마찰이 생겼다”고 말하여 허태열 전 실장과 3인방과의 알력이 있었을 수 있다는 지적이 있었다. #[45] 두 사람 모두 검사로서는 공안통 출신, 한 명은 유신헌법 저자, 또 한명은 국가보안법 전문가이다. 자세한 내용은 황교안 참조.[46] 비슷한 나이의 정몽구(1938년생) 현대자동차 회장이 청문회장에서 거의 질문이 없었음에도 답변에서 횡설수설한 것을 보면 김기춘이 얼마나 영특하고 교활한지 알 수 있다.[47] 본인이 아들의 성년후견인이므로 사망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48] 김기춘, 김경진 모두 천주교 신자다. 그리고 김경진의 현재 소속 정당도 김기춘이 몸담던 새누리당의 후신인 국민의힘이다.[49] "김기춘 증인, 당신께서는 죽어서 천당 가기는 쉽지 않으실 것 같습니다."[50] 자신은 오직 박근혜가 시켰기에 비선들을 만난 것이라며, 사태에 관한 조그마한 책임까지도 전부 박근혜 한 사람에게 죄다 떠넘기는 식의 변명만을 한다.[51] 청문회 나간 것 자체를 크게 후회할 정도로 박영선 의원에게 영혼까지 털렸는데도 예의 바르게 "본인이 먼저 악수를 요청"할 만큼 자신에 대한 적대 측들의 적대감을 최대한 줄이려던 사람이다.[52] 김기춘이 잘 나가던 시절에 검찰총장과 법무부 장관을 지낸 거물 법조인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이 만큼의 개인적인 굴욕은 없었을 것이다.[53] 특별검사법 제안이유 참조[54] 특별검사 작성의 2017. 2. 1.자 의견서 및 첨부된 범죄인지보고 등 참조[55] 이것도 본인이 잘못한 것을 시인한다기보다는 그냥 나 억울하다고 시위하는 것에 가깝다.[56] 형사소송법상 항소이유서는 항소심 재판부가 소송기록을 넘겨받았다는 사실을 피고인에게 알리는 통지(소송기록접수통지)가 도달한 날 이후 20일 이내에 제출해야 하지만 최순실 특검법에서는 재판의 신속한 진행을 위해 이 기한을 7일로 못박고 있다. 내용이 상당히 특이하고 얼핏 봐서는 법조문상 눈에 금방 안 띄는 규정이기 때문에, 변호사들도 이런 규정이 있는 줄 모르는 예가 왕왕 있다.[57] 위 문단에도 같은 취지의 취소선 드립이 쳐져 있었다.[58] 김기춘이 구속된 것은 1월 21일로, 형사소송법에 따르면 법원이 피고인의 구속 기간을 2개월씩 총 두 차례를 연장할 수 있는데(항소심과 상고심에서는 추가 심리가 필요한 경우 3차까지 가능. 즉, 1~3심을 통산하여 산술적으로 상정할 수 있는 구속기간의 최대치는 6+8+8=22개월이지만, 구속피고인에 대한 심급별 공판 진행기간은 이 기간보다 짧고 구속기간갱신결정 또한 2개월을 정확히 꽉 채운 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므로 실제 구속기간은 이보다 짧을 수밖에 없다.) 이미 2월 7일에 기소된 김기춘은 1심과 2심 두 번의 재판에서 모두 구속기간이 연장되었었다.[59] 전두환 시절 임명된 이종남 검찰총장이 유임되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두 번째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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