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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박근혜에 대한 비판을 설명한 문서.2. 대통령 임기 중 여론
2.1. 지지율
자세한 내용은 박근혜/지지율 문서 참고하십시오.박근혜는 지난 4년의 임기 동안 30~50%의 지지율을 유지했지만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여파로 2016년 11월 3일, 임기가 1년 넘게 남은 시점에 지지율이 5%까지 떨어졌다. 이는 그때까지 최저 지지율 기록을 갖고 있던 1997년 외환 위기 시점의 김영삼 전 대통령의 기록을 깬 역대 최저의 지지율이었다. 임기 말 김영삼이 최저 지지율 6%, 부정 평가 78%이었지만, 박근혜는 최저 지지율 4%, 부정 평가 93%를 기록했다.
심지어 호남에서는 지지율이 아예 0%이었다. 사실 호남이 대대로 反보수당, 親민주당 성향의 지역이라는 걸 감안하더라도 지지율 0%까지 곤두박질친 보수 계열 정치인은 박근혜 이전까지는 없었다. 게다가 오차범위 내에서의 0%대가 아니다. 한국갤럽의 조사에서도 호남 지지율만이 유일하게 공란이었는데, 여론조사에 응한 호남 사람들 중 지지를 표한 사람이 정말로 한 명도 없었다.
리얼미터 통계를 인용해서 "2016년 11월 4일, 대국민 담화 (혹은 제2차 대국민 사과) 이후로 지지율 하락 추세가 멈칫하더니 소폭 반등하여 10% 이상으로 미약하게 회복되었다."는 주장이 있지만, 이는 다른 여론 조사 기관의 지지율을 그대로 대입해서 생긴 착시 효과였다. 박근혜/지지율 문서에도 나왔듯이 한국갤럽과 리얼미터는 서로 다른 기관이고, 조사 방법도 다르기 때문에 서로 다른 숫자가 나올 수밖에 없다. 리얼미터 통계 상으로도 게이트가 터진 10월 이후 한 번도 지지율 상승 없이 계속 하강했다. 그나마 리얼미터 통계에서도 계속 10% 선을 유지하고 있다가 11월 3주차에서 10%가 무너졌다. 어느 기관에서 조사를 하든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진 이후 11월 17일까지 계속 하강만 하고 상승은 없었다.
2.2. 20대 총선 결과
당선된 후에 신뢰를 어기는 배신의 정치는 결국 패권주의와 줄 세우기 정치를 양산하는 것으로 반드시 선거에서 국민들께서 심판해 주셔야 할 것입니다.
박근혜, 2015년 6월 25일 국무회의 모두발언 중. 원문 이 발언의 의도는 자신에게 비협조적인 야당 및 비박계 정치인들을 심판하라는 것이었지만, 결국은 박근혜 본인과 친박계 정치인들이 국민의 심판을 받게 되었다.
박근혜, 2015년 6월 25일 국무회의 모두발언 중. 원문 이 발언의 의도는 자신에게 비협조적인 야당 및 비박계 정치인들을 심판하라는 것이었지만, 결국은 박근혜 본인과 친박계 정치인들이 국민의 심판을 받게 되었다.
2016년 4월 13일 진행된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16년 만에 여소야대 현상이 나타나면서 박근혜 정부는 크나큰 위기에 봉착한다. 당시 여당 새누리당이 122석을 얻으면서 원내 제1당을 더불어민주당에게 내주었고, 중도 이념을 표방한 국민의당이 38석을 얻으며 선전했다. 그 외에도 새누리당의 주요 표밭이었던 대구와 강남을 잃었고, 민주당은 오랜 지지 기반인 호남을 잃는 등 지역주의 균열이 일어났다. 새누리당 지도부는 총선 실패의 책임을 지고 사퇴하였다. 노무현 대통령 탄핵 때보다 상황이 안 좋았다.
여당 참패의 원인으로 전문가들은 민심이 정권 심판론을 선택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후술된 박근혜 정부의 부정적 평가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박근혜 정부는 집권 기간에 담뱃값 인상, 단통법, 도서정가제, 맥통법, 노동 개혁을 비롯한 실책을 밀어붙였다. 초이노믹스라는 거창한 정책을 빌려서 집값을 가계 부채로 유지하는 방안을 국민들에게 강요했고, 대놓고 친재벌 및 규제 혁파, 정규직 및 노조 탄압 등을 선전했다. 가계 부채와 청년 실업률이 역대 최고치를 기록할 만큼 경제도 엄청 나빠졌다. 그리고 위안부 문제를 당사자들 몰래 처리하고, 세월호와 전염병 유행 등 국민 안전 위기에서도 정부의 안위만 걱정하는 형태의 정책만 내고 상식적으로 납득이 안 될 언행만 일삼았다.
그리고 이 상황에서 오로지 일을 안 하는 국회와 발목을 잡는 민주당을 탓하며 국민들에게 심판해주기를 요구했다.[1] 새정치민주연합이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당으로 분열되고, 야권 분열이라는 호재와 신뢰도가 높기 힘든 지역 위주의 여론조사의 우위를 과신한 박근혜 정부와 친박은 공천관리위원장 등의 요직을 이용해 노골적으로 공천에 개입했다. 박근혜가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사람들을 모조리 쳐내고 당선되기 쉬운 곳에 함량 미달의 친박 인사들을 마구 공천하는 행태가 선거 내내 반복되었고, 이것 때문에 새누리당에서는 온갖 내분이 일어났다. 당시 당 대표의 옥새런으로 대표되는 유승민, 주호영, 장제원, 강길부 등 비박계의 불복, 진박 마케팅, 윤상현 막말 파동 등 여당 지지자들은 물론, 일반인들마저 눈꼴 시리게 만드는 추태가 선거 기간 내내 반복되었고, 민심 이반이 눈에 보이기 시작하자 새누리당이 선택한 타개책은 국민들에게 한 번만 뽑아 달라고 반다송을 부르는 구걸 전략이었다.
똑같이 공천 파동이나 논란거리 등이 있었던 더불어민주당은 사태가 심각해지기 전에 문재인의 개입 및 비대위 사퇴 후 재조직, 유세단 등의 활동으로 그 상처를 봉합해가며 총선 승리를 위해 모든 것을 거는 절박함을 보여줬고, 국민의당은 안철수의 이미지 덕분에 호남에서 있었던 함량 미달의 공천 파동이 거의 보도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1번과 2번에겐 기회가 많았다는 전략이 제대로 먹혀들어갔다. 결국 공천 논란과 구태 정치의 논란 이미지는 모조리 새누리당에게 몰려간 것이다. 그 결과 수도권 거의 대부분 지역에서 더불어민주당이 압승했으며, PK 지역에서도 더불어민주당의 의석과 지지율이 상당히 상승했다. 심지어 보수의 성역인 TK에서도 더불어민주당 및 민주당 계열[2]에게 2석을 허용했다. 그 덕에 더불어민주당은 텃밭이었던 호남권에 걸린 의석을 국민의당에게 상당수 내주고도 1석 차이로 새누리당을 제쳤다. 중위 투표자 이론에 따라 중도층, 중도 보수층을 빼앗은 야당이 승리했으며, 박근혜 정부가 밀어붙이던 모든 정책에 제동이 걸릴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결과적으로 제동이 걸린 것은 정책이 아니라 박근혜 정부 그 자체가 되었다.
3. 상세
추락한 대통령 : 67%서 4%로(채널A 제작) |
박근혜 터널 : 2013-2016(뉴스타파 제작) |
"제가 대통령이었으면 진작 했어요. 그러니까 제가 이번에 대통령으로 되면 할 겁니다."
— 2012년 대선 토론회에서
— 2012년 대선 토론회에서
"'내가 이러려고 대통령을 했나'하는 자괴감이 들 정도로 괴롭기만 합니다."
— 2016년 제2차 대국민 담화에서
— 2016년 제2차 대국민 담화에서
"피청구인의 헌법과 법률 위배행위는 재임 기간 전반에 걸쳐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피청구인의 위헌·위법 행위는 대의민주제 원리와 법치주의 정신을 훼손하였다."
"법 위배행위가 반복되지 않도록 하여야 할 헌법 수호 의지가 드러나지 않는다."
"피청구인을 파면함으로써 얻는 헌법 수호의 이익이 압도적으로 크다."
— 이정미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 박근혜 대통령 탄핵 심판 선고 중에서
"피청구인의 위헌·위법 행위는 대의민주제 원리와 법치주의 정신을 훼손하였다."
"법 위배행위가 반복되지 않도록 하여야 할 헌법 수호 의지가 드러나지 않는다."
"피청구인을 파면함으로써 얻는 헌법 수호의 이익이 압도적으로 크다."
— 이정미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 박근혜 대통령 탄핵 심판 선고 중에서
박근혜 정부 시기에는 헬조선이라는 신조어가 유행했고 청년 실업률도 역대 최악이었다. 2015년 대한민국 교수들의 뽑은 올해의 사자성어로는 혼용무도(昏庸無道)[3], 사시이비(似是而非), 갈택이어(竭澤而漁)[4], 위여누란(危如累卵)[5], 각주구검(刻舟求劍)이 나왔다.[6]
행정 실무 능력이 없다시피 하다는 평가가 압도적이었다. 과거 2012년 대선 토론회에서 박근혜 당시 대선 후보는 국정현안에 대한 문재인 후보의 질문에 "그래서 대통령 되려고 하는 거 아니에요?", "제가 대통령 되면 다 할 겁니다.", "그래서 제가 대통령이었으면 진작 했어요."라고 대답하였는데, 이 말은 박근혜 대통령이 국정 현안을 아예 모른다고 시인한 꼴이었다. 정치인 박근혜가 수십 년간 보여준 말들은 '자신이 정권을 잡으면 경제를 살리겠다', '일자리를 늘리겠다'는 식의 두루뭉술한 주장만 있을 뿐, 구체적으로 그것을 어떻게 실현할지 대책과 근거가 전무했다.[7]
시간이 지나면서 박근혜의 현실성과 합리성이 결여되어서 성과라고는 보이지 않는 국정 운영에 지지자들도 하나둘 등을 돌리기 시작했고, 그럼에도 40%에 육박하는 콘크리트 지지층[8]만 믿고 진박을 운운하며 박근혜 바라기 마케팅에만 열을 올리던 새누리당은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참패를 당했다.
이토록 숨은 실태가 명백히 드러나 지지하던 사람들의 대부분이 등을 돌리고, 연일 하야 요구가 빗발치는 와중에도 박근혜는 대통령으로서의 진심 어린 사죄는커녕 자리를 지키려고 발버둥치는 추태만 보여주었다. 폭정으로 저항을 받았던 이승만과 전두환도 정권이 기반을 잃으면서 자리를 끝내 포기하였지만[9] 박근혜는 민주주의 국가의 지도자라면서 이승만이나 전두환보다도 권력 욕심을 놓지 않았다. 비슷하게 실패한 여성 지도자인 영국의 리즈 트러스와 방글라데시의 셰이크 하시나조차 각각 자신의 실패를 받아들이고 비교적 깨끗하게 사임한 것과[10] 국민들의 저항을 이기지 못한 채 사임한 것과 비교해도 조금이라도 권력을 내려놓지 않기 위해 발버둥을 치다가 쫓겨난 것이니 어떻게 보면 박근혜 쪽이 더욱 추하다.[11] 심지어 박근혜의 국정 운영이 국가 발전이 아닌 최순실 일가의 사리사욕을 채우는 것을 돕기 위한 수단[12]에 가까웠음을 감안하면 자신이 옳다는 신념도 아닌 부정부패를 끝까지 저지르겠다는 의도에서 나오는 권력 욕심이라는 점에서 명백한 독재자들인 이승만, 전두환, 셰이크 하시나와 비교해도 더욱 질이 나쁘다고 볼 수 있다.
그동안 국정 농단과 비선 실세의 존재, 그리고 그동안의 실책의 근본 원인이 모두 드러난 상황에서도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하고 권력을 유지할 방안 찾기에만 급급한 모습을 보인 바 있으며, 2016년 12월 탄핵안이 가결된 이후로는 아예 노골적으로 국민들을 분열시키고 여론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끌기 위해 지속적으로 물밑 공작을 시도하는 모습을 보여왔다. 전통 지지 세력이었던 박사모, 어버이연합, 엄마부대 등의 어용단체와 극우 인사들은 물론, 새롭게 떠오른 남녀 갈등마저 워마드 등을 통해 국민 분열과 여론 선동의 소재로 삼으려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스스로에 대한 개인적인 평가마저 전부 갉아먹었다.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고의로 국민 간 분열을 획책하는 모습은 박근혜에게서만 찾아볼 수 있었던 현상은 아니지만, 박근혜는 엄연히 민주주의라는 틀이 갖춰져서 이러한 시도가 금기시될 (그것도 메이저 선진국인) 국가에서 대놓고 이런 행위를 저지른 것이며, 그 목적조차도 국가 발전이 아닌 자기 영달과 측근들의 비리를 은폐하기 위한 것이라는 데서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13]
결국 정치적 스펙트럼을 떠나서 어떻게 지도자로서 최악의 인간상인 존재가 이렇게 당 대표를 거쳐 대통령까지 되었는지 심각하게 생각해야 하며, 동시에 한국 정치사의 반면교사로 삼을 일이다. 대통령은커녕 기본적인 사회인의 자질조차 의심되는 존재가 국가 원수가 된 것은, 한국 민주주의의 고질적 병폐인 세대 투표, 지역 투표, 해결되지 못한 산업화의 독재 평가 담론 등이 뭉쳐서 발생한 일종의 사회병리적 현상으로 보자는 의견까지 있다. 앞서 언급된 것처럼, 이미 박근혜의 무능함은 선거 전부터 충분히 드러나고 있었음에도 많은 보수층은 그저 박정희 신화를 계승한 핏줄이라는 것 외에는 아무런 능력도 없는 박근혜에게 무분별하게 동정했고, 그렇지 않은 이들조차 진보층에 대한 적대감에 애써 사실을 외면하며 박근혜에게 지지를 보냈다. 즉, 선거 시 후보자의 자질을 제대로 살피지 않고 세대, 지역, 심지어 그놈이 그놈이라는 논리까지 앞세우며 투표에 임하는 유권자들이 그 대가를 뼈저리게 치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냉소적인 비판으로 박근혜의 진정한 공로는 '박정희 신화'를 시원하게 갈아버린 것이라는 평가도 있다. 박근혜가 정계에서 성공하고 결국 대통령이란 자리까지 오르게 된 것은 다른 것도 아닌 아버지 박정희에 대한 국민들의 긍정적인 평가와 그로 인한 '후광' 때문이었다. 결국 그 이후 박근혜의 어마어마한 실정은 곧 새마을운동,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경부고속도로 등이 대변하는 박정희 신화까지 깔끔하게 훼손했다. 이것은 셰이크 하시나의 폭정이 독립영웅이던 아버지 셰이크 무지부르 라흐만의 긍정적인 평가까지 다 말아먹은 것과 일맥상통한다.
믿기 힘든 일은 경제 정책 표류, 외교 고립, 세월호 사건 당시 7시간 30분 동안 대통령이 실종되는 초유의 사건을 겪고도 박 대통령의 지지율은 임기 내내 꾸준히 50%대를 넘기고 있었으며, 최저치도 40%대였다는 사실이다.[14] 매스컴에 극우 성향의 칼럼을 써온 것 외에 이렇다 할 이력이 없는 윤창중[15]을 청와대 대변인으로 등용하는가 하면, 최순실의 딸 정유라를 두둔한 김희정이 그 공로로 여성가족부 장관에 오르는 등[16], 박근혜 정부는 임기 초부터 황당할 정도의 인사 참사를 되풀이했지만, 국민들의 국정 수행 지지도는 한 번도 떨어지지 않았다. 이후 언론에 의해 최순실 게이트가 적나라하게 드러나기 시작한 2016년 말 경이 되어서 박근혜의 지지도는 30% 가량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만큼 박근혜에 대한 국민들, 특히 보수층의 지지는 대단했다. 박근혜 측에서는 국민들의 맹목적인 지지를 발판으로 삼아 최순실의 사익 추구와 국정농단을 철저히 숨겨올 수 있었던 셈이다. 박근혜가 몰락하기 시작한 것은 2016년 말 최순실의 사익을 위해 설립된 미르재단과 K스포츠의 실체가 드러나고[17], 고영태 등 관련자들의 내부 고발이 터져 나오면서 시작되었다. 결국 임기 내내 콘크리트 지지층을 확보하고 있었던 박근혜도 언론의 공세와 명백한 물증 앞에서는 어쩔 수가 없었고, 이는 결국 탄핵으로 이어지게 되었다.[18]
3.1.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자세한 내용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문서 참고하십시오.엄청난 검증의 쓰나미가 몰아닥칠 것입니다. 쓰나미가 몰아치면 아무리 깊이 감춰둔 것도 다 드러납니다. 그때 가서 또 땅을 치고 후회해야 하겠습니까?
2007년 8월 6일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 중 유세 발언. 이 발언은 당시 라이벌이었던 이명박 후보를 공격하기 위해 썼던 표현이지만, 결국 본인과 나중에 이명박에게 그대로 돌아오고 말았다. 그리고 이때 서로를 공격했던 네거티브 발언들은 당연하지만 전부 사실이었다.
2016년 10월경에는 40년 절친이자 사이비 종교 교주 최태민의 친딸인 최순실이 대통령 본인 대신 국정운영 전반을 도맡아 한 비선실세[19]란 사실이 폭로되면서 대국민 사과를 하는 등 사면초가의 상황에 빠졌다. 최순실은 국정 운영 전반을 마음대로 움직인 것도 모자라서 국정 운영에서 얻어낸 기밀 정보들을 이용해 자신과 그 일족의 이익을 창출하고, 대통령의 권력을 이용해 수백 억의 돈을 수수하기까지 했다. 최태민 일가의 전횡은 조응천, 박관천, 이명박 전 대통령, 이제는 동생들(박지만과 박근령)도 걸고 넘어졌고, 이로써 무당 하나에 나라가 좌지우지됐다면서 여야와 시민 사회 등을 막론한 탄핵론이 등장하게 되었다.2007년 8월 6일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 중 유세 발언. 이 발언은 당시 라이벌이었던 이명박 후보를 공격하기 위해 썼던 표현이지만, 결국 본인과 나중에 이명박에게 그대로 돌아오고 말았다. 그리고 이때 서로를 공격했던 네거티브 발언들은 당연하지만 전부 사실이었다.
특히 대통령의 사과와 JTBC에서 관련 보도가 있었던 2016년 10월 25일에는 순식간에 네이버 실시간 검색어 1위부터 10위가 박근혜 탄핵, 하야 등으로 채워졌으며, 트위터에서도 마찬가지로 실시간 트렌드에 관련 해시태그가 최상단에 올랐다.[20] 그 스캔들에 관한 내용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문서로.
11월 21일 민병두 의원에 의해 밝혀진 바로는 박근혜는 이 사건에 대해 '내가 뭘 잘못했는지 모른다.'는 반응을 보여서 주위 및 국민들을 어이없게 만들었다. 즉 그녀의 대국민 사과 등 입장 발표들은 정치적인 쇼이자 거짓말이었다. 또한 탄핵소추안이 가결된 후에도 최순실은 시녀 같았던 사람이라며 그런 사람 때문에 나라가 이렇게 됐다며 여전히 상황 파악이 안 되는 자기중심적인 모습을 보였다.
임기 내내 최순실의 확인 없이는 국정을 운영하지 못했다고 한다.[21] 탄핵 사유에는 포함되지 않았지만 박근혜는 집무실에서 매일 업무를 처리했던 전직 대통령들과 달리 거의 모든 시간을 관저에서 보냈으며, 청와대 본관 집무실로 출근한 날이 절반도 안 됐다. 사실상 대통령직에 있으면서 출근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22] 그 때문인지 아무리 긴급한 사항도 대면보고보다 서면보고를 선호했다고 하며, 이는 세월호 사건이 터진 7시간 동안 대통령에게 연락이 닿지 않는 초유의 사태를 빚었다. 이는 국회가 제출한 탄핵 사유 중 하나였지만 실제 법정에서 탄핵 사유로 인정되지는 않았다.
임기 내내 국정 운영이 대단히 즉흥적이고 충동적인 성향을 띤 것은 최순실의 영향으로 보인다. 당시 북한의 핵 개발로 인해 대북 제재의 필요성이야 논란의 여지가 없지만, 국내 기업들의 피해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하루아침에 개성공단을 폐쇄했고[23], 특별한 이유도 밝히지 않은 채 하루아침에 고위공무원들을 대거 좌천시켰고[24][25] 다분히 주관적인 기준에 의해 문화계 인사들에 대한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불이익을 주는 등의 행태가 그런 것이다. 박근혜의 오른팔인 전 여성가족부,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조윤선은 박근혜 정부에 비판적인 성향을 지닌 인사들에 대한 블랙리스트를 만드는 것에 직접 개입한 것이 밝혀져 구속 수감됐다.
3.2. 인간성 및 자질 문제
자세한 내용은 박근혜/비판/자질 문서 참고하십시오.3.3. 개인처신 문제
자세한 내용은 박근혜/개인처신 문제 문서 참고하십시오.3.4. 역사의식 편향
자세한 내용은 박근혜/역사관 문서 참고하십시오.3.5. 사이비 종교 유착 관계
자세한 내용은 박근혜/비판/사이비 종교 논란 문서 참고하십시오.3.6. 민주주의 후퇴
자세한 내용은 박근혜 정부/평가/민주주의 후퇴 문서 참고하십시오.3.7. 박근혜와 최태민
자세한 내용은 박근혜와 최태민의 부적절한 관계 문서 참고하십시오.4. 긍정적으로 볼 여지?
"미숙한 권력이 오만하기까지 했습니다."
- 전원책
- 전원책
박근혜의 임기 중에 낸 성과들은 전부 전임 대통령들이나 국회의원들에게 우선 공이 있으며, 박근혜 본인이 대통령 임기 동안 세운 업적은 거의 없었다.[26] 박근혜는 업적이 전무한 것은 물론 임기 내내 물의만 일으킨 것도 모자라서 최소한의 염치조차 찾을 수 없었다.
그나마 이념과 사상에 따라 평가가 갈릴 항목이 몇 개 있을 뿐이지만, 그것들마저도 전임 대통령 이명박이 차린 밥상에 박근혜는 숟가락만 얹은 꼴이었다. 박근혜의 정책 대부분은 "박근혜가 아닌 비선실세 최순실이 본인의 사익 추구를 위해서, 혹은 즉흥적으로 생각해낸 뒤 주도한 정책이었으며, 대부분이 권력을 위해 보수층을 모으려는 포퓰리즘에 기반한 것이었거나 국익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은 정책들이다."라는 의견이 주를 이루고 있다. 그래서 박근혜 정부가 들어선 이후 제정된 긍정적인 내용의 법률들도 박근혜가 직접 주도한 것이 아니라 의회가 직접 시민들의 여론을 수렴하여 발의하고 제정한 유형이 대다수를 차지했다.
2016년 10월, 초대형 정치 스캔들이자 권력 비리인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지고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동년 12월 9일에 가결되었다. 그리고 2017년 3월 10일 11시 21분경에 박근혜 대통령 탄핵 심판을 헌법재판소가 공식적으로 만장일치로 인용하면서 박근혜는 그렇게 권좌에서 쫓겨났다. 게다가 2017년 3월 31일에는 전직 대통령으로는 세 번째로 구속 수감까지 당했다.
당장 전임 대통령 이명박과 비교해 보아도 박근혜는 DNA부터 금수저[27]에, 조직의 맨아래에서 일해보는 등 제대로 된 사회적 경험을 하지도 않고, 목숨을 담보로 자신의 역량을 증명한 이력도 없다. 그야말로 살아오면서 검증된 능력이 전혀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스스로 바닥에서 올라온 경험이 없다. 실제로 대통령직에 있을 때도 전세계 민주 국가들이 지닌 President가 아닌, 제왕적인 느낌의 대통령에 가까웠다. 최소한 이명박의 경우에는 공도 있고 과도 있어 우파 진영에서도 호불호가 갈리는 대통령 시절과는 별개로 서울특별시장 한정으로는 진보 진영에서도 공을 인정할 정도로 역대 모든 시장을 통틀어 매우 능력이 뛰어난 인물로 1~2위권에 올려도 될 정도로 검증된 인물이다.
오죽하면 혹자는 박근혜의 등장과 몰락으로 전임 대통령의 업적이 재평가받고 전임 대통령들의 지지자를 더욱 늘린 것이 유일한 업적이라고 비꼬기도 한다.
당시 청와대에서는 2016년 12월, 박근혜정부 3년동안 성과라는 제목으로 경제 부흥, 창조 경제 육성 등을 중심으로 긍정적인 일면을 홍보했으며, 249페이지 분량의 관련 문서를 홈페이지에 공개하기도 했다. 이 보고서에서 소개하는 주요 업적들은 다음과 같다.
- 4대 개혁 추진으로 경제 재도약 기반 구축, 꾸준한 경제 민주화
- 창조경제의 성과 가시화 및 청년 일자리 창출 토대 마련
- '생애주기별 맞춤형 복지' 완성으로 평생 사회 안전망 기틀 마련
- 튼튼한 안보와 원칙에 입각한 남북관계 재정립, 국익 우선 신뢰 외교로 국제적 위상 강화[28]
- 부정부패와 비리 척결, 자유민주주의와 헌법 가치 수호
이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과장되거나 '숟가락이나 얹었다'는 게 일반적인 의견이다. 그리고 전두환 전 대통령 추징금 환수, 담뱃값 인상, THAAD 국내 도입, 전시작전권 연기 등을 업적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으나 이에 대한 논란도 많이 있다.
경제민주화는 폐기라도 해도 무방하다. 박근혜의 공약이었던 경제 민주화를 설계한 이는 김종인이었다. 하지만 경제민주화 공약을 사실상 파기해버리자, 실망한 나머지 김종인은 이후 탈당했다. 이걸 수혈하겠다고 경제학자 출신의 최경환이 주도하는 경제 정책이었던 초이노믹스는 원래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통해, 근혜노믹스 또는 창조노믹스라는 이름을 밀었다고 한 것이 공개되었다.
그리고 일자리 창출은 역대 최악의 청년 실업 시대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무색해졌다. 그리고 일자리 창출을 위한다고 추진했던 4대 개혁 중 하나가 바로 '노동계 버전 유신 헌법'이라 불렸던 노동개혁이다. 비정규직 사용 기간이 2년에서 4년으로 무려 두 배로 늘어난 것, 근로 시간이 줄어들지 않는 것까지 포함하고 있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노동개혁 반대 서명을 시민 단체에서 자비 투표소를 구입해 투표한 결과, 96%가 반대했을 정도였는데, 이런 상황에서 정부는 맞불로 노동개혁 찬성 서명을 했고, 그 첫 서명자가 박근혜였다. 결국 이 노동개혁 법안은 2016년 5월 19일에 모두 폐기되었다. 청와대에서는 진영 논리에 갇혀 법안 통과가 지지부진해졌다고 평했다.
문화가 있는 날이 박근혜의 정책 중 매우 드물게 호평을 받았지만, 이마저도 박근혜가 제멋대로 휴일로 정한 수요일을 문화가 있는 날로 정했다는 비판이 있다.
일부에서는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라는 점을 내세우기도 하나, 박정희 대통령의 딸이라는 후광 때문에 대통령이 되었다는 의견이 강세이다. 원래 낙하산 인사일 뿐이었고, 그 정의(무능력 + 인맥빨 + 낮은 인격 수준 + 돈빨)를 모두 만족한다. 낙하산 인사는 무능력과 인맥, 돈 등의 문제 때문에 쓴소리를 듣는 평가를 피할 수 없다. 따라서 박근혜 대통령은 저 5가지를 모두 갖추고 있으므로, 정계 입문 시절부터 낙하산이나 다름없었다. 실제로 박근혜 정부 초기에는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라는 점은 분명히 의미가 있었다. 하지만 이는 박근혜가 아니라 다른 어떤 여성 정치인이었어도 마찬가지다. 박근혜 본인의 공이라고 볼 수는 없다. 오히려 박근혜 정부의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여권이 기존보다 더 퇴보되는 악영향만 낳았고, 앞으로 또다른 여성 대통령이 나올 여지를 가로막게 되었다.
하지만 박근혜는 앞서 말한 것처럼 긍정적으로 볼 만한 부분이 전무함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옹호를 받아왔는데, 이런 꾸준했던 옹호의 이유는 보통 60대 이상 극보수층에게 많이 적용된다는 '박정희의 후광 효과 + 진보 세력에 대한 부정적 인식 + 감성적 지지 + 박근혜 정부의 무능과 잘못을 절대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인지부조화 + 콘크리트 지지층 + 헌정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라는 의미 등이 그 근거로 지목되었다. 당연하게 이런 뚜렷한 근거도 없고 맹목적이기만 했던 옹호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와 같은 박근혜 정부의 가렴주구식 국정 운영에 지대한 역할을 했다. 당장 새누리당의 친박 계열이 박근혜에게 이유 없는 무조건적인 지지와 선거 마케팅으로 삼는 황당한 짓까지 하는데도 견제가 먹히지 않았던 이유는 결국 30%에 달하는 콘크리트 지지층에 대한 신뢰 때문이었다. 후술하듯이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이후로는 지지율 4%를 기록하며 이런 꾸준한 옹호도 급속도로 사라졌지만 눈으로 뚜렷이 드러나는 각종 실책과 사회 문제들을 목격하면서도 눈과 귀를 막고 진영논리에만 열을 올리던 행태가 어디에서 나왔는지는 생각해봐야 할 문제다.
5. 관련 문서
[1] 제19대 국회의 전·후기 국회의장은 새누리당이었고, 국회부의장은 전·후기에 여야 공동으로 맡았다. 새누리당은 151>149>146, 야당은 127>123석으로 줄었다. 쟁점 법안에 대한 처리 요건을 150>180석으로 만든 건 여당이 제안한 것이지, 야당이 제안한 게 아니다.[2] 대구 수성 갑 더민주 김부겸, 대구 북구 을 무소속 홍의락. 원래 더민주였으나 이 당시에는 탈퇴했기 때문에 무소속이었다. 한동안 국민의당 입당설이 돌았으나 더민주로 복귀했다.[3] 군주가 어리석어 세상이 온통 어지럽고 무도하다. 어리석고 무능한 군주를 가리키는 혼용(혼군(昏君)과 용군(庸君)을 아우르는 이름)과 세상이 어지러워서 도리가 깨진 것을 묘사한 '논어'의 '천하무도'(天下無道) 속 '무도'를 합친 표현.[4] 못의 물을 모두 퍼내 물고기를 잡는다. '눈 앞의 이익만을 추구하여 먼 장래는 생각하지 않음'을 뜻한다.[5] 달걀을 쌓은 듯이 위태로운 형태. 비슷한 표현은 누란지위.[6] 박근혜의 입장에서도 할 말이 있는 것이, 올해의 사자성어는 노무현, 이명박 전 대통령들 때에도 항상 나쁜 말만 있었다. 올해의 사자성어 자체가 그 해 한국 사회의 어두운 면을 부각하는 게 컸다. 실제로 2010년대에 들어온 후부터 꾸준하게 국민들로부터 가장 평가가 좋은 노무현 대통령도 재임 당시 그나마 가장 좋았던 말이 "여건은 조성되었으나 일이 성사되지 않아 답답함과 불만이 폭발할 것 같다"는 뜻의 밀운불우(密雲不雨)였다. 이것도 박근혜가 정치를 잘했다고 변호하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7] 2004년 <손석희의 시선집중>에서 손석희와 박근혜가 했던 인터뷰를 이에 대한 예시로 들 수 있다. 당시 방송에서 손석희는 박근혜에게 한나라당이 경제를 잘 이끌 수 있음을 입증하는 구체적 근거와 IMF 시절 집권 당으로서 경제 위기를 일으킨 신한국당에 비해 어떻게 달라진 모습을 보일 것인지 질문했다. 그러자 박근혜는 제대로 된 답변은 전혀 하지 않고 횡설수설하다가 끝내는 ''저하고 싸움하자는 거예요?"라는 태도로 받아친 적이 있다. 이 인터뷰에서 박근혜가 "경제 살리기에 앞장서고 일자리를 늘리자" 등 누구나 할 소리를 하는 것 외엔 구체적인 국정 지식이나 실무에 대해선 완전히 무지하며 제대로 설명할 능력이 없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싸움 운운하는 소리는 농담으로 한 얘기라고 하지만, 결국 자기 주장에 대한 근거를 하나도 대지 않았다는 사실은 달라진 게 없었다.[8] 이 역시 당선 당시 51.6%의 득표율을 기록했던 것과 비교하면 어느 정도 지지자가 떠났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이 51%의 득표율은 박근혜의 지지자들만 아니라 대선 당시 그가 국정을 잘할 것이라고 믿은 일반 국민들도 상당수 포함됐기 때문에, 사람들이 등을 돌린 건 당연했다. 오히려 그런 실책들을 저질렀는데도 지지율이 30% 밑으로 떨어지지 않을 정도로 역대 대통령 중 유례가 없는 맹목적 지지자들을 보유했음에도 그 지지자들 대부분이 결국 등을 돌리게 만들었다.[9] 정확히 말해서 자리를 포기한 건 아니고 어쩔 수 없이 시위대의 요구를 수용한 것이었다.[10] 물론 겨우 한 달 반밖에 못 버텼다는 것 때문에 전세계적으로 조롱거리가 되었지만 달리 보면 그만큼 자신의 정책 실패에 대한 책임을 지고 국민들의 반발을 받아들이며(참고로 사임 당시 트러스에 대한 평가는 탄핵정국 당시 박근혜보다도 높았다) 권좌에서 내려오는 염치라도 있었다는 뜻이다.[11] 하시나는 도합 300명이 넘는 민간인을 학살한 후 쫓겨난 것이었으므로 죄질은 하시나가 압도적으로 더 나쁘다.[12] 모부투 세세 세코는 자신이 통치하던 자이르(현 콩고민주공화국)를 자신의 부를 일구기 위한 ATM기처럼 전락시키며 도둑정치라는 말까지 만들어낸 아프리카 역사상 최악의 독재자 중 한 명으로 악명이 높다.[13] 전임인 이명박의 4대강, 자원외교도 부정부패와 국고 탕진으로 엄청나게 욕을 먹긴 했지만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국가 발전에 대한 뚜렷한 목표를 갖추며 행해진 정책이었던 것과 정반대로(이명박이 저것들을 통해 비자금을 챙겼다는 증거도 나오지 않았다), 박근혜의 창조경제는 표면적으로도 뚜렷한 목표가 없었을 뿐더러 나중에 밝혀진 실제 목적은 문자 그대로 최순실 배불리기였기에 더더욱 비판받아 마땅하다.[14] 박근혜/지지율 문서 참고.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본격적으로 터지기 전까지는 임기 중 어떤 실책에도 절대 떨어지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다.[15] 후에 인턴의 엉덩이를 만지고 알몸 상태로 인턴을 호출하는 등의 성추행으로 경질되었다.[16] 이 점에서 박근혜는 여권 신장에 대한 생각이 전혀 없었음이 드러난다. 여성 인권 신장에 가장 힘쓰고, 가장 힘써야 할 여가부 장관을 이런 식으로 임명하면 여권 신장이 가능할까? 굳이 여권 신장까지 안 가더라도 여성가족부는 해바라기 센터 등을 운영하고 성교육에도 힘을 보태고 있으며, 근처에 사는 성범죄자의 신원을 보낸다. 이 모든 일을 말아먹으라는 것과 다를 바 없으니 이는 다른 부서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후 김희정은 2016년 20대 총선에 부산광역시 연제구 국회의원에 출마했으나, 당시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았던 더불어민주당 김해영 후보에게 출구 조사까지 뒤집히면서 제대로 참교육 받았다. 심지어 김해영은 민주당 당적으로 첫 출마해서 한 번에 당선되었다. 보통 PK에서 민주당계 정당으로 출마하는 사람은 최소 재수, 심하면 4수 이상 출마해 욕 먹으면서 민심을 쌓고 나서야 당선된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보통 놀라운 일이 아니다. 김경수가 그런 케이스로, 선거에서 낙선 후 김해 지역의 마을 잔치에 돌아다니면서 민심을 쌓았다고 한다. 김희정은 이미 지역구 관리가 엉망이라는 평을 받고 있었다. 이미 2008년에도 한나라당 후보로 나왔으나, 친박연대 후보에게 밀려 낙선한 전적이 있다. 후에도 반성 없이 여당 후보로 나온 탓에 아예 민주당으로 갈아엎자는 여론이 생긴 것이다.[17] "박근혜 대통령이 미르·K스포츠재단에 돈 낼 기업과 액수까지 지시했다"는 증언이 나왔다.[18] 이미 조선일보나 JTBC 등의 언론에서는 증거를 확보하고 있었으나, 워낙 높은 지지율 탓에 눈치만 보고 있었던 것이 임기 말에 터져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19] 대통령의 휴가 계획, 의상 등 사적인 영역뿐만 아니라 국가의 외교, 경제 정책 등의 중대한 수준의 국정 업무까지 관여했으며, 최순실 본인은 고위 공무원들로부터 마치 '상전'처럼 모셔졌다고 한다. 여기에 더하여 최순실의 친딸인 정유라는 아무런 공직도 없었던 어머니의 위세를 빌려 대학교에 부정 입학하고 각종 특혜를 받았다.[20] 실검 1위 탄핵 등 박근혜 관련 검색어 10위 중 7개 "탄핵은 정치적 분노" 2016년 10월 25일 <영남일보>, 심상정 “인터넷 실검 1위 탄핵, 2위 박근혜 탄핵...朴 대통령 사과 수용 못 해” 2016년 10월 25일 <아시아투데이>, 박근혜 대통령 대국민 사과문 발표에도...실검 상위권 휩쓴 '탄핵' '하야' 2016년 10월 25일 <동아일보>, 박근혜 대통령 대국민 사과에 트위터 "두 번 순수했다가는..."등 후끈 2016년 10월 25일 <서울경제>, 박 대통령, 최순실 사과 뒤 포털 실검 1위는 '탄핵' 2016년 10월 25일 <한겨레>, '최순실 연설문' 이후 탄핵·하야 등 실검 도배..."국민 분노 비등점 향해" 2016년 10월 25일 <서울신문>, [주요 반짝 뉴스] 박근혜 대통령 대국민 사과에도 온라인은 분노의 불꽃 활활...실검 '탄핵' '하야' 장악 외 <스포츠경향>, 포털 실검 1~10위 최순실 게이트 관련 '탄핵·하야·jtbc' 도배 2016년 10월 25일 <디지털타임스>, 실검 1위 탄핵... 네티즌도 정치권도 쏟아지는 '탄핵' 얘기 2016년 10월 25일 <중앙일보>, JTBC 최순실 연설문 보도에 '탄핵' '하야' 실검 등장... 박근혜 대국민사과까지 2016년 10월 25일 <부산일보>.[21] 조금의 도움? 최순실 '컨펌' 없으면 국정 못 한 박근혜[22] 박근혜, 세월호 참사 당일 재택근무. 출근 비율 절반도 안 돼(JTBC뉴스룸)[23] 상식적으로만 접근해도 폐쇄하기에 앞서 남북 협상 카드로 쓰는 것이 더 유리했을 것이다. 하다못해 폐쇄를 결정했어도 발표하기 전에 입주했던 기업에 미리 귀띔을 하든지 해서 생산품과 설비를 최대한 빼오도록 유도하는 등 피해 최소화를 고려해야 했음에도 그러지 않았다.[24] 박 대통령 수첩 보면서 “문체부 국·과장 나쁜 사람이라더라"[25] 일부는 영전했고, 일부는 원래 자리로 복직했지만 대부분은 능력자임에도 다시 돌아올 수 없었다.[26] 물론 업적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전임 대통령들과 비교하면 미미한 수준에 불과했다.[27] 박근혜는 10.26 사건 직후인 1980년에 압구정 현대아파트 몇 십 채는 살 만한 돈이던 6억 원을 전두환에게서 받았다. 이는 2023년 소비자물가지수 기준 약 41억 원에 달하는 거액이다. 그리고 제부 신동욱은 2016년 11월, CBS 김현정의 뉴스쇼 인터뷰에서 박정희가 사망하고 나서 최태민 목사가 박근령에게 200만 원 짜리 아파트 한 채를 얻어주었다고 한다. 최태민은 이어 박지만에게도 아파트 한 채를 구해준 것으로 보이는데, 결과적으로 박정희의 비자금 6억 원 중에서 동생들의 아파트 2채 가격을 제외한 298채 가격을 언니인 박근혜가 가졌다고 한다. 이보다 중요한 것은 이미 이 시기에 박근혜와 최태민은 통장을 같이 쓰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증언하였다는 것이다.[28] 대표적인 사례로 42년 만에 한미원자력협정 개정, 한일 위안부 협상 타결을 들고 있다. 다만 위안부 협상의 경우에도 논란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