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성한 관련 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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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강대학교, 성균관대학교, 한양대학교를 함께 부르는 명칭이다.2. 유래
대중에게 인터넷이 보급되기 시작한 2001년 초부터 퍼진 단어로 알려져있다. 이 시기부터 대학을 시작으로 어떤 군을 지칭할 때 첫 글자를 따서 한 데 묶는 문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2005년 네이버 지식인 해당 문서에서는 이 용어가 부연 설명 없이 바로 쓰이고 있다.[1] 다만 기사에서 확인되는 것은 2011년부터다. 성한서, 성서한, 한서성, 한성서 등등 부르는 순서는 자기들 마음대로다. 이런 식으로 명칭을 제각각 부르면서 3개 학교의 학생들은 자기네 학교가 더 낫다면서 인터넷에서 싸움을 벌이곤 한다. 이건 소위 연고대도 마찬가지다. 고대생은 고연대라고 부르고, 연대생들은 연고대라고 부르는 것처럼 말이다. 어쨌거나 즉 어디가 더 우수하든, 어디가 더 낫든간에 가나다 순으로 묶으면 저 이름이 맞긴 하다. 그러므로 가나다 순으로 서술한다.3. 비교
구분 | 서강대학교 | 성균관대학교 | 한양대학교 |
교훈 | "진리에 순종하라" (Obedire Veritati) | "인의예지" (仁義禮智) | "사랑의 실천" (愛之實踐) |
슬로건 | 그대 서강의 자랑이듯, 서강 그대의 자랑이어라 | 예로부터 나라의 인재는 성균에 모여 왔으니, 그대 머묾이 우연이겠는가 | The Engine of Korea |
상징 | 알바트로스 | 은행나무 | 사자 |
대학교 역명 | 서강대역 | 없음[2] (인사캠) 성균관대역 (자과캠) | 한양대역 (서울캠) 한대앞역 (ERICA캠) |
인근 지하철역 | 대흥역, 신촌역 | 혜화역 (인사캠) | 왕십리역, 용답역, 마장역 (서울캠) 중앙역 (ERICA캠) |
응원 구호[3][4] | 청! 년! 서! 강! | 킹고[5] 킹고 에스카라[6] 킹고 훌라 훌라 S.K.K 킹고 킹고 에스카라 킹고 훌라 훌라 S.K.K 성대 성대 빅토리 야! | 라치오스[7] 라파파 카리오스 라파파 루카루카 루카카 라치오스 한 대! 한! 양! 대! 야! |
4. 각 학교의 특징
4.1. 서강대학교
서강대학교 개교년도는 1960년이다. 그리고 1970년에서야 종합대학으로 승격하였다. 또한 다른 두 대학과 달리 종교적 색채가 강하다.[8] 가톨릭 신앙과 예수회 교육 이념을 토대로 예수회가 설립한 교육기관이기 때문이다. 2024년 7월 기준 9단과대학 4학부 24전공 체제로 운영되고 있다. 1970년대에 서강대학교는 성대, 한양대와 달리 전기대학 군에 속해 있었다.[9]사범대, 음대, 미대, 체대, 의대, 약대, 치대가 없다. 서강대 특유의 문화인 독후감 쓰기, 지정 좌석제, 학교종과 맞물려 '서강고등학교'와 같은 별명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대한민국 제18대 대통령인 박근혜 대통령이 졸업한 학교이기도 하다. 박근혜 대통령은 서강대학교 70학번으로서 이 대학 전자공학과를 졸업하였다.
서울권 대학에서 장애인 학생을 받은 최초의 학교이다.[10] 두 번째는 성균관대.[11]
4.2. 성균관대학교
성균관대학교의 개교년도는 1398년이긴 하지만 오늘날의 모습으로서의 성균관대학교가 설립된 시점은 1946년이다. 그리고 1953년에 비로소 종합대학으로 승격되었다. 다만 성균관 출신 유림들이 설립했다는 점, 1398년 개교가 대한민국 정부 및 교육부(당시 문교부)에서 정식으로 승인받은 사항이라는 점, 캠퍼스 부지에 옛 성균관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1398년 개교가 자의적인 표기는 아닌 것으로 인정된다.성균관과 성균관대의 연속성은 다음과 같은 사실로 인해 인정된다. 1953년 문교부에서 성균관의 역사를 성균관대가 승계하기로 결정했었다. 당시 유림인 김창숙이 문교부에 성균관의 역사 승계를 강력히 요구했었고, 1951년 구 교육법[12]의 대학 규정에 따른 사립대학 법인격에 따라 문교부에서 대학재단 성균관대학의 성균관 역사 승계를 1953년 인정[13]해 줬다.
이공계의 경우는 수학교육과와 컴퓨터교육과만 서울캠퍼스에 남게 되었고 나머지 이공계는 삼성의 방침에 따라 1970년대 당시 새롭게 지은 수원캠퍼스에 설치되었다.[14][15] 대표적인 예로 약학과는 성균관의 대학화 이후 초기에 생긴 학과인데 수원으로 소재지가 변경되어 학내가 시끄러웠다고 한다. 이러한 삼성의 수원 캠퍼스 계획과 일부 학과의 수원 이전을 불편하게 여긴 학생들의 격한 반발로 삼성이 퇴진하고[16], 약 20년 후인 1997년에야 삼성이 다시 한번 성균관대의 재단을 맡게 되었다.
유학대학이라는 독특한 단과대학이 존재한다. 또한 이 항목의 다른 두 대학과 달리 이원화 캠퍼스다.[17]
대한민국 제18대 대통령인 박근혜는 재직 당시 정홍원, 이완구, 황교안을 국무총리로 연속 임명하기도 하였는데, 세 명 모두 성균관대 출신이라는 점이 이목을 끌었다. 그리고 당시 당대표가 김무성[18]이어서 서성한 정부[19]라는 이명이 붙기도 하였다. '썰전' 강용석 "박근혜 정부? '서성한 정부'" 발언…왜?
4.3. 한양대학교
한양대학교의 전신은 1939년 설립된 동아공과학원이다.[20] 동아공과학원은 1945년 광복과 함께 교명을 건국기술학교로 바꿨고, 1948년에는 4년제의 한양공과대학으로 변모했다. 이후 1959년에 종합대학으로 승격하면서 한양대학교로 이름을 변경하였다.의과대학은 60여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부속 병원은 서울과 구리에 있는데, 류마티스치료에 있어서 국내 최고의 병원으로 꼽히고 있다.
이 항목의 다른 두 대학과 달리 음악대학을 보유하고 있다. 음악가로도 활동했던 설립자 백남 김연준 박사가 1960년에 설립한 것을 모태로 한다. 분교[21]를 운영하고 있는 것도 차이점이다.
5. 대학배구 라이벌: 성균관대와 한양대
한양대학교와 성균관대학교의 배구부는 대한민국에 프로배구가 도입되기 전인, 대통령배 배구대회 시절 소녀팬들을 몰고 다니던 팀이었으며, 둘 다 강력한 우승 후보로서 라이벌 관계를 형성하였다. 대학배구가 최고 인기를 구가하던 당시 두 대학 배구부의 대표적 스타로는 한양대의 김세진, 하종화, 성균관대의 신진식, 마낙길 등이 있다. 김세진, 신진식 등 양교 유망주들은 새로 창단한 삼성화재 배구단에 입단하며 현대자동차서비스 배구단, 금성사 배구단, 고려증권 배구단 등이 지배하던 실업배구계에 지각변동을 일으켰고 신흥 강호로 자리매김하는데 기여했다.서강대학교에서도 배구단을 1981년부터 1985년까지 운영했으나 해체했다. 박주점이 졸업생이며 이상렬은 85학번이었기 때문에 입학하자마자 해체의 아픔을 겪으며 경기대학교로 편입해 선수생활을 이어나갔다.
6. 서성한과 삼성
삼성이 성균관대의 재단을 공식적으로 맡고 있는 만큼 성균관대에 대한 지원이 타 대학 보다 많은 것은 사실이다. 대학 중 최초로 삼성전자 입사가 보장되는 학과(반도체시스템공학과)를 설치했고, 서울의 인문사회캠퍼스에는 삼성의 창업주이자 이재용의 조부인 이병철의 호 '호암'을 딴 '호암관'이 1969년에 준공되었다. 수원의 자연과학캠퍼스에는 성대의 상징 건물 중 하나인 삼성학술정보관이 있다. 하지만 삼성은 성균관대에만 손을 대는 것은 아니다. 나머지 두 대학에도 상당한 지원을 하고 있다.한양대에도 지원을 많이 해 정보시스템학과에는 삼성 인턴십 과목이 개설되어 있으며, 컴퓨터공학부 내에 소프트웨어전공을 신설하여 전액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다. 또한 삼성디스플레이와의 취업 연계 트랙이 운영 중이다.
서강대는 이공계 1전공자에 한하여 특정 과목 이수시 장학금과 삼성 입사를 보장하는 삼성반도체트랙과 삼성디스플레이트랙에 지원할 수 있다. 그리고 서강대 정문 바로 왼쪽에 보이는 유리건물의 이름이 삼성-가브리엘관이다. 이름 그대로 삼성의 지원으로 지어진 건물이다.
7. 기타
- '평균 8~9등급인데 서성한 갈 수 있을까요?'라는 네이버 뉴스 댓글과 '대학에서 서성거릴 순 있겠네요.'라는 답글이 커뮤니티에서 화제가 되었었다.
8. 관련문서
[1] 04년 사용례도 있으나 해당 웹페이지의 내용이 특정 학교의 비하를 담고 있어 첨부하지 않는다.[2] 혜화역과 캠퍼스를 잇는 성균관대학교 셔틀버스가 운행 중에 있다.[3] '응원가'와는 다른 개념인데, 공통적으로 스포츠 경기 등에 쓰이나 응원 구호는 멜로디 없이 바로 외친다.[4] 성대와 한양대의 구호가 비슷하고 서강대는 결이 다른데, 서강대 응원단은 비교적 최근인 2010년에 창설되었고 1960~70년대에 만들어진 성대와 한양대의 응원단은 그 시절의 감성이 담긴 구호를 그대로 쓰고 있기 때문이다.[5] 교목 은행나무의 학명인 gingko를 발음하기 쉽게 kingo로 변경한 것이다.[6] 성균관대의 축제 이름이기도 하다[7] 한양대의 축제 이름이기도 하다[8] 성균관대도 유교를 바탕으로 하는 학교이지만, 유교는 종교라기보다는 철학적 측면이 강하다.[9] 당시는 수능과는 시험 제도가 판이하게 다르다. 대입 시험을 어느 정도 텀을 두고 2회(전기 시험, 후기 시험) 보았다. 또한 대학에 먼저 지원하고 시험을 보는 방식이었다. 따라서 전기에서 서강대에 떨어졌어도 후기 시험으로 성대, 한양대에 붙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10] 이때의 입학생이 영문학자 장영희이다.[11] 이때의 수혜를 받은 입학생은 작가 고정욱이다.[12] 5.16 군사정변에 따라 1962년 적용이 중지됐다가 민주화 이후 1998년 교육기본법으로 대체됐다. 하지만 대한민국 국회에서 교육법의 명시적인 폐지(안)을 처리하지 않아 교육법의 완전한 폐지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교육법 자체는 아직 살아 있긴 하다. 대한민국 정부에서 적용하지 않는 사문화된 법일 뿐..[13] 김창숙이 이 역사 승계를 인정받고 나서 사립대학 성균관대학의 법인 이사장에 취임했다.[14] 삼성이 성균관대의 재단을 처음으로 맡은 것은 1966년이다.[15] 삼성의 창업주이면서 1960~70년대 성균관대 이사장을 지냈던 이병철은 유교를 굉장히 신봉한 것으로 알려져있고 그 때문인지 삼성이 성균관대에 오랫동안 관심을 표하였다는 기사도 있다. 관련 기사 삼성은 성균관대 재단에서 물러났다가 97년에 성균관대 의과대학 설립을 이유로 다시 들어오게 되었다. 이렇게 성균관대의 운영은 삼성가의 가업이 되었다.[16] 우습게도 삼성이 나가고 난 뒤 들어온 봉명재단(도투락만두)도 기업이었는데 정작 학교 운영에 관심이 없어 오히려 학교의 재정적 어려움만 초래하게 되었다.[17] 한양대도 두곳의 캠퍼스를 가지고 있으나, 본교 - 분교 시스템이라서 성격이 다르다.[18] 한양대 경영학과 70학번[19] 청와대 참모진 구성을 고려해 성시경(성균관대, 고시, 경기고) 정부라는 이명이 더 많이 쓰이긴 했다. https://news.kbs.co.kr/news/pc/view/view.do?ncd=3008818[20] 이때의 학원은 공식적인 고등교육기관으로 지금의 학원과는 성질이 다르다.[21] 한양대학교 ERICA캠퍼스. 과거 명칭은 한양대학교 안산캠퍼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