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03-28 08:53:32

신진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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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리그 남자부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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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진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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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리그 10주년 올스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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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삼성화재 블루팡스 감독
신진식(申珍植)
생년월일 1975년 2월 1일 (만 [age(1975-02-01)]세)
출신지 전라남도 고흥군
출신학교 익산남성중 - 남성고 - 성균관대
포지션 레프트
신체사이즈 신장 188cm, 체중 80kg
소속팀 삼성화재-대전 삼성화재 블루팡스 (1996~2007)
지도자 대한민국 배구 국가대표팀 트레이너 (2010)
홍익대학교 배구부 감독 (2011~2013)
대전 삼성화재 블루팡스 코치 (2013~2016)
대전 삼성화재 블루팡스 감독 (2017~ )
국가대표 1996 애틀랜타 올림픽
1998 방콕 아시안 게임
2000 시드니 올림픽
2002 부산 아시안 게임
2006 세계 남자배구선수권대회
2006 도하 아시안 게임
수상경력 아시아청소년배구선수권 MVP (1992)
한국배구 슈퍼리그 신인왕 (1994)
한국배구 슈퍼리그 인기상 4회 (1995~1997·2001)
한국배구 슈퍼리그 MVP 4회(1998·99·2001·2002)
한국배구 슈퍼리그 베스트6 3회 (1998·99·2001)
한국배구 슈퍼리그 공격상 (2002)
1998 방콕 아시안 게임 은메달
2002 부산 아시안 게임 금메달
2006 도하 아시안 게임 금메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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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 현재 (프로화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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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도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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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배구 입문 및 성장3. 갈색폭격기의 리즈 시절4. 은퇴 및 지도자의 길5. 대내외적인 평가6. 기타

1. 개요

대한민국의 前 배구 선수, 現 대전 삼성화재 블루팡스의 감독.

갈색폭격기라는 별명으로 현역 시절 김세진과 함께 실업배구 77연승 및 겨울리그 9연패의 신화를 쓰며 대전 삼성화재 블루팡스의 먼치킨 시절을 이끌었던 남자 배구계의 전설적 인물.

2000년 올림픽에서 러시아 국가대표팀과 맞서 국제대회 한 경기 득점 세계신기록을 작성하기도 했다.http://inside.volleycountry.com/thread/6275-men-s-best-scorers-in-one-match-senior-international-matches

2. 배구 입문 및 성장

신진식의 배구 인생은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시작됐다. 신진식은 초등학교 4학년 때 전학을 가게 된 전주시 송천초등학교에서 담임선생님의 권유로 시작된 배구에 재미를 느꼈다. 당시 신진식은 높이뛰기 선수와 배구를 겸할 만큼 운동 신경이 뛰어났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어린시절 배구인생은 결코 순탄치만은 않았다. 배구부가 있는 덕진중학교에 진학하기 위해 초등학교 6학년 때 송천초등학교에서 덕진초등학교로 전학을 갔다. 그러나 덕진중학교 배구부는 그가 중학교 2학년 때 해체되었다. 자신의 배구 인생이 여기서 끝나는 거라 생각했던 신진식은 운이 좋게도 해체된 배구부 선수들 중 몇 명을 익산시의 남성중학교로 전학시키는데 명단에 오르는 기회를 얻어 배구 인생을 이어간다.

남성중학교를 졸업하고 남성고등학교에 진학한 신진식은 이호[1]와 함께 좌우 쌍포로 맹활약하며 남성고등학교를 고교 최강 팀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이러한 맹활약으로 고등학교 2학년 때 U-17 청소년대표로 뽑혀 제2회 세계대회에 참가하게 된다. 당시 세계대회에서 준결승까지 오르며 승승장구했으나, 아쉽게 준결승전에서 패하면서 브라질과 3~4위전을 펼치고 난 후, 신진식은 그 당시 대회에서 자신의 키가 작다는 것을 절실히 깨닫고서 지속적인 점프 연습과 작은 키를 보완하기 위한 한 박자 빠른 공격을 위해 꾸준한 체력훈련을 시작한다.[2] 이런 노력에 힘입어 그는 애틀랜타 올림픽 예선전에 당당히 대표 선수로 선발될 수 있었고, 일본에서 있었던 올림픽 예선전에서 1990년대 당시 대한민국 배구 대표팀을 깐따삐아로 날려보낸 에이스 나카가이치 유이치가 버틴 숙적 일본을 3:1로 누르고 올림픽 출전권을 획득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당시 한일전 승리의 주역이라는 점과 일본의 에이스인 나카가이치 앞에서도 대담하게 대결하는 모습 때문에 배구선수 '신진식'이라는 이름은 이때부터 서서히 팬들에게 각인되기 시작했다. 덤으로 신진식의 거무잡잡한 피부 때문에 '갈색폭격기'라는 별명도 붙었다. 어어? 마치 누구 별명인 무기하고 느낌이 비슷하다?

3. 갈색폭격기의 리즈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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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대학교 졸업을 앞둔 신진식에게 처음 러브 콜을 보낸 팀은 현대자동차서비스였다. 당시 현대자동차서비스성균관대학교에 전폭적인 지원을 했기에, 신진식의 졸업 후 현대자동차서비스가 스카웃을 할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그러나 1995년 11월에 삼성화재가 창단되고 같은 삼성그룹 산하였던 성균관대학교와 협력하는 관계로 급진전되면서, 그가 4학년 때인 1996년에 결국 성균관대학교 배구부 지원 팀이 삼성화재로 바뀌게 되었고, 학사 문제까지 겹쳐 결국 삼성화재 입단이 확정된다.[3] 사실 당시 삼성화재는 완전 신생 팀이었고 신예스타 김세진 외에는 특별한 스타 선수가 없었기에 뛰어난 실력을 선보이던 신진식을 스카웃하려 노력했다. 신진식은 개인적으로도 성균관대학교의 라이벌이었던 한양대학교 출신인 김세진과 대학 시절부터 라이벌로 맞대결을 펼치는 경우가 많았기에, 프로 리그에서도 김세진과 함께 맞대결을 펼치고 싶어서 같은 팀으로 들어가게 된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 동안 신진식이 몸담았던 성균관대학교와 협력 관계였음에도 불구하고 신진식을 놓치기 일보 직전까지 간 현대자동차서비스삼성화재를 상대로 법정 소송까지 진행하는 스카우트 파동이 발생했으며, 일단 삼성 측이 현대에 위약금을 주는 선에서 해결됐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당시 성균관대학교 배구부 감독이자 친 현대파인 김남성 감독이 고집을 부리다가 감독직에서 해임되는 사태가 일어났다.

입단 과정에서 잡음이 있긴 했어도 결국 신진식은 1996년 11월 삼성화재에 입단하게 되었다. 1년 먼저 삼성화재에 입단한 김세진과 그는 좌진식, 우세진을 이루고, 갈색폭격기라는 별칭이 부여되는등 삼성화재의 무적 시대를 여는 주인공 역할을 했다. 2001년 1월 7일 대한항공전을 시작으로 삼성화재는 77연승이라는 남자 구기 종목 사상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우게 되었다. 2004년 배구챔피언결정전 2차전에서 현대캐피탈에 3:2로 아쉽게 패하면서 기록이 깨졌을 때, 현대 배구단 관계자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배구 팬들마저 기쁨의 탄성을 질렀다. 그만큼 당시 배구판에서 삼성이란 존재는 창단(스카웃 만행)부터 현재까지 거대한 힘이자 공공의 적이었다. 당시 삼성은 신진식, 김세진, 최태웅, 김상우 등 국가대표에 버금가는...정도가 아니라, 국대 주전 세터로서 최태웅 시대가 열린 이후론 사실상 네 명 그대로 국대 전위가 되었던, 초호화멤버가 주축이었다. 그는 프로리그 뿐만 아니라 국제대회에서도 국가대표팀의 주역으로 기량을 발휘하며 아시안 게임에서 2개의 금메달과 1개의 은메달을 따내는 등 배구 선수로서 그야말로 화려한 경력들을 쌓는다.

4. 은퇴 및 지도자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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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이상 대한민국 배구의 대들보로 활약한 신진식은 2007년 5월 소속 팀 대전 삼성화재 블루팡스로부터 갑작스런 은퇴 통보를 받았다. 삼성화재는 세대교체를 위해 신진식을 비롯해 김상우, 방지섭에게 은퇴를 종용한 것이다. 신진식, 김상우 등 걸출한 스타를 보유한 탓에 수년간 젊은 선수를 뽑지 못했던 삼성화재는 간판스타에 대한 예우보다 세대교체가 우선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갑작스런 은퇴 통보에 당시 신진식은 충격이 꽤나 컸으며, 2007년 12월 1일 개막하는 2007-2008 시즌에 1년 더 선수 생활을 하고 싶다는 의사를 피력했다. 아직 은퇴하기 이른 시기였기에, 신진식의 은퇴설이 나오면서 다른 구단으로 이적해야 한다는 여론도 꽤나 강했다.[4] 그러나 결국 '친정 팀에서 유종의 미를 거뒀으면 좋겠다'는 주위의 권고에 따라 결국 지도자 연수를 떠나는 것으로 가닥을 잡고 2007년 12월 미련없이 현역 은퇴를 선언하였다. 삼성화재 구단 측에서는 성대하게 은퇴식을 마련해 주었으며, 그의 은퇴식에는 먼저 현역에서 은퇴한 동료 김세진도 참석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후 2년 간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어학 연수 및 지도자 코스를 밟고 2010년 8월 당시 신치용 국가대표팀 감독을 보좌해 2010 광저우 아시안 게임 배구 국가대표팀 트레이너로 참여하였다. 2010∼2011 시즌 프로배구 V리그에서는 KBS N 스포츠 해설위원으로 마이크를 잡기도 하는 등, 차근차근 지도자 준비를 해 왔다. 2011년 5월 홍익대학교 배구부 감독으로 공식 부임했다. 은사인 신치용 삼성화재 감독이 적극 추천하여 성사된 것인데, 신치용 감독은 신진식이 선수 은퇴 후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유학할 때도 다양한 자료를 보내 주는 등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덕분에, 2013-2014 시즌을 앞두고 신치용 감독의 부름을 받아 삼성화재의 코치로 발탁되어 팀에 복귀하였다. 이후 신치용 감독과 임도헌 수석코치를 보좌하였고, 2015년 5월에 신치용 감독이 구단의 단장제일기획의 스포츠단 운영관련 임원으로 이동함에 따라 임도헌 수석코치가 후임 감독이 되면서 신진식은 수석코치로 승격되었다.

2016년 10월 14일, V리그 개막을 하루 앞두고 삼성화재의 수석코치에서 사임했다. 출처 코보컵 이후 사임하기로 결심했다고...

그러다 2017년 4월 3일, 챔프전의 흥을 깨며 사임한 임도헌 감독의 후임으로 친정팀의 감독으로 복귀하게 되었다. 그리고 신진식이 감독으로 부임하자마자 블루팡스는 1라운드에서 호성적을 달리며 명가의 재건을 향한 길을 달리고 있다. 그리고 11월 29일, 팀의 10연승을 이끔과 동시에 17-18 시즌 남자부에서 가장 먼저 10승 고지에 올렸다. 순위도 1위를 유지함과 동시에 갓진식이라고 불리우며 많은 칭찬을 받고 있으며, 특히 류윤식, 황동일 등을 살려냈다는 반응이 많다. 초반에 부진했을 때 돌진식이라고 까였던 건 넘어가자. 이후 12월 2일에 11연승까지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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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12월 2일, 대한항공 전에서 5세트 9-14의 열세를 뒤집고 11연승을 확정한 날 승장 인터뷰 도중 박철우에게 물세례를 받은 장면이다. 여기까지만 보면 그야말로 새로운 명장의 탄생을 알리는 듯 했겠으나...

12월 6일, 현대전 3-0 패배를 시발점으로 해서 점차 팀의 경기력이 저하일로를 보이고 있어 지도력에 의문을 제기하는 시각이 점점 늘고 있다. 시즌 초반의 적은 범실과 단단한 플레이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예전의 범실항공(...)을 연상시키는 범실 퍼레이드와 함께 경기력이 무너지는 양상이 자주 나타나고 있으며, 특히 2018년 연초를 전후로 해서 대한항공 - 현대캐피탈 - 한국전력에 연이어 3연속 패배를 기록하며 팬들의 성토마저 이어지고 있는 상황. 특히 예전의 아스트랄한 상태로 돌아가 버린 황동일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이로 인해 중앙 속공 라인이 살아나지 못하고 있으며, 대학 시절 최고 세터로 인정받았던 스피디한 토스 스타일의 김형진을 제대로 살려 쓰지 못하며 도리어 삼성화재 기존의 몰빵배구를 계속 고수하는 경기 내용을 보이고 있어 이제는 팬들의 평가도 점점 초반의 돌진식으로 다시 돌아서는 추세다. 그래도 이 시즌은 데뷔 시즌이고, 시즌 일정도 아직 많이 남은 만큼 좀 더 지켜봐야겠지만, 현재로서는 프로배구 감독으로서 좋은 점수를 얻기는 힘든 상태.

그래도 1월 7일 홈경기에서 KB손해보험을 3대1로 꺾고 연패에서 탈출하였고, 나흘 뒤에는 OK저축은행을 접전 끝에 3대2로 꺾었으며, 또 이틀 뒤에는 우리카드를 역시 접전 끝에 3대2로 꺾으며 다시금 힘을 내고 있다. 그러나 올스타 브레이크 끝나고 맞이한 대한항공과의 경기에서는 셧아웃을 당하였다. 이유는 대한항공의 강서브에 리시브 라인이 흔들린데다[5] 타이스, 박철우 쌍포가 범실과 벽치기를 벌이며 자멸했기 때문. 이대로라면 그나마 지키던 2위마저도 한국전력이나 대한항공에게 내줄 가능성이 높다는 의견도 있다.

이후 OK저축은행과 우리카드전에서 풀셋 접전[6] 끝에 어렵게 승점 4점을 보태는 데 성공하며 2위 수성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7]

2018년 2월 16일 대전에서 열린 현대캐피탈과의 경기에서는 타이스, 박철우 뿐만 아니라 모처럼 박상하, 김규민이 괜찮은 활약을 보여주었음에도 팀은 풀세트 접전 끝에 패하였다. 그런데 이 날 경기 4세트 11-9으로 앞선 상황에서 역전당하자 곧바로 작전타임을 불러 김규민에게...
허리 괜찮아? 왜 그래, 왜? 허리 왜 만지냐고?
이것은 겉으로는 자신의 선수의 몸 상태를 파악하려는 의도로 물어본 것으로 보이지만 상당수의 배구팬이 보는 삼성화재 팀의 평소 분위기와 엮어서 볼 때 그 말투를 잘 들어보면 너만 아프냐? 다른 사람들은 안 아프냐? 아무리 아파도 참고 견뎌야 하는 것 아니냐?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8]
뒤이어 15-19 상황에서 두 번째 작전 타임을 부르고 선수들에게
아니, 야, 잘하다가 지금 점수 좀 주고 그러면... 끝났어, 지금? 왜 이래? 아, 그럼 불만있으면 얘기하고...
라면서 얼굴을 붉혔다. 물론 경기가 뜻대로 풀리지 않고 선수들이 긴장이 풀어져서 그랬을지는 모른다. 하지만 평소 작전 타임 때 그의 언행을 보면 질책이 많은 편이다. 아무리 명선수는 명지도자가 될 수 없다고 한다지만, 자신의 후배 선수들의 기를 죽이는 발언을, 그것도 프로 선수들에게 하는 것으로도 그는 지도자로서의 자질이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결국 초반의 그 기세는 어디로 가고 2위로 시즌을 마치고 말았다. 거기에 대한항공과의 플레이오프에서 무려 1차전을 승리했음에도[9] 2, 3차전을 어이없게 내리 내주면서 4년 만의 챔피언결정전 진출 기회가 좌절되고 말았다.

이후 류윤식이 군입대하면서 OK저축은행에서 FA를 선언한 송희채가 팀에 들어왔고 그 보상선수로 부용찬이 OK저축은행으로 떠났다. 그리고 삼성화재의 리베로 자리는 김강녕이 맡게 되는데 김강녕의 불안한 리시브 때문에 작전타임 때 보면 거의 김강녕이 신진식 감독의 밥이다. 특히 2018년 12월 2일 우리카드와의 경기에서는 이런 말을 남긴다.
야, 몇 개를 먹어, 몇 개를... 딱 그 점수잖아. 딱 그 점수야, 니가 먹은 점수. 아니 뭐 갖고 해, 그러면[10]

이런 말은 리베로가 겪고 있는 고충을 전혀 모른다는 말로 해석된다. 리베로는 수비만 하는 포지션이기 때문에 공격에 가담할 수 없다. 리베로가 세터 못지 않게 중요한 포지션이기 때문에 리베로가 만에 하나 다치면 그 팀의 수비는 크게 구멍나기 쉽다. 그리고 점수를 내줄 때마다 스트레스를 그만큼 받기 쉽다. 이처럼 리베로는 세터 못지 않을 정도로 스트레스에 취약한 포지션인데도 저런 말을 할 정도면 얼마나 선수들을 신뢰하지 못하는지 짐작이 간다.

결국 18-19 시즌은 봄배구 진출에 실패하고 말았다.

그의 지도 철학을 엿볼 수 있는 기사. 링크.

이후 2019년 3월 25일 1년 재계약을 체결했다.
삼성화재 신진식 감독 재신임, 1년 더 지휘한다

5. 대내외적인 평가

현역 시절 플레이 스타일은 주공과 보공, 위치에 상관없이 제 역할을 해 내는 올라운드 스타일이었다. 1990년대 중반~후반 당시 배구도사 박희상(前 현대캐피탈 코치, 現 송산고등학교 감독)과 비슷하다고 비교될 정도. 후위에 신진식과 박희상이 있으면 국제전에서 수비 문제는 걱정이 없었다.

또한 윙 스파이커 치고는 키가 작지만, 탄력넘치는 점프와 긴 팔[11]로 키 큰 상대편 수비수에게도 밀리지 않았고, 한 박자 빠른 공격이라든지 스파이크 정점 때 상대 블로커의 벽[12]을 이용하여 터치아웃 유도를 많이 이끌어 낼 정도로 순간판단과 VQ가 상당히 뛰어났다. 공이 터져 찢어질 정도의 파열음으로 코트에 꽂아버리는 초강력 스파이크는 그야말로 신진식의 전매특허. 야수가 따로 없다.

다만 국제무대의 구분으로는 단신 공격수였고, 1990년대 중후반 당시 국가대표 주전 세터 신영철은 현란한 속임수와 횡패스로 기교와 맞춰잡기에 능한 박희상을 더 선호했기 때문에 힘으로 정면돌파하던 신진식과는 궁합이 맞지 않았다. 그래서 국대 선발 초반에는 그렇게 대접받지 못했고, 개인 기록도 그저 그랬다. 신진식이 대표팀에 발탁되기 전에 이미 박희상은 신영철과 절묘한 호흡을 선보이며 1994년 월드리그에서 공격 2위[13]와 수비상을 수상했고 1994년 세계선수권 8강, 1995년 월드리그 6강의 주역 중 한 명이었던 대표팀의 핵심 레프트였다. 신진식은 이후 1995년 월드컵에서 처음으로 대표팀에 발탁됐고 1996년에 이르러 주전으로 자리를 잡아 김세진에게 부상이 있었던 그해 올림픽 예선전에서 나카가이치를 누르고 각종 공격 지표에서 1위[14]를 차지했지만 1999년 월드컵까지 아시아권을 벗어난 대회에서의 뚜렷한 성과는 없었다.[15] 1999년부터 배구계의 내분[16] 때문에 월드리그도 보이콧 할 정도로 배구계가 막장이 되었던지라 국제무대 출전이 줄어들었는데, 마지막 올림픽 출전이었던 2000년 올림픽에서는 대표팀이 조별리그에서 탈락했지만 5경기씩 각 팀의 조별리그 일정이 끝난 시점에 신진식이 대회 전체 선수 중 득점 1위[17]였다. 올림픽 본선 조별리그 득점 1위로 득점력을 과시한 것인데 준결승 진출에 성공하는 4개의 팀이 다 한국과 같은 조에서 나왔던 만큼 대진의 질도 높았다.

국가대표로서의 신진식을 본다면 스피드 배구가 태동하기 전 그가 최전성기를 보내던 시절에 괄목할 만한 상을 타든가 아시아권 밖의 국제무대에서 꾸준히 잘했던 건 아니었지만 중요하거나 가장 큰 대회에서 상당히 잘했던 적이 있었고 2000년대 이후로는 대표팀의 경쟁력 하락과 함께 이경수와 장병철이 분전하던 2004년 올림픽 예선전에서 당시 같이 노장으로 분류되던 김세진과 노쇠화에 컨디션 난조까지 겹쳐 별다른 힘을 쓰지 못하기도 했지만 아시아선수권 우승과 MVP, 아시안 게임[18]에서 주포 중 하나로 두 대회 연속 금메달 매치 포인트를 직접 장식하며 대표팀의 고참 선수로서 충분히 몫을 다했다.

상대 블로커를 이용한 공격을 많이 펼치다보니 어깨 부위에 잔부상이 있었으며, 선수 말년에 가서는 손목을 틀어치는 스파이크를 많이 구사하다보니 손목 부상 또한 많았다.

현재 남자배구 선수들의 기본기 문제에 대해 안타깝게 바라보는 지도자 중 하나다. 신진식이 현역으로 있던 1990년대~2000년대 초중반까지만 해도 틈새없는 수비력을 바탕으로 근성있는 공격이 대한민국 배구의 특징이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공격력만 우선으로 한 채 기본기는 구석 저리로 밀어놓은 현 지도자들의 지도방식과 더불어 기본기가 전혀 없는 선수들에 대한 쓴소리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래서 본인이 본격적인 지도자 생활을 시작한 홍익대학교 배구부에서는 기본기를 중시로 한 지도를 실천하고 있다고 한다. 그 덕택에 그동안 고만고만했던 홍익대학교가 대학배구 준우승을 할 정도로 팀 전력을 끌어올렸다.

6. 기타

  • 김세진과는 라이벌이긴 해도 연령대도 거의 같고 삼성화재의 리즈시절을 함께 연 주역이라 두 사람의 우정은 꽤나 깊은 것으로 유명하다. 전성기 시절 사귀던 여자친구들[19]과 함께 만나기도 할 정도였고, 서로의 은퇴식에도 각각 참여하며 우정을 과시하기도 했다. 결정적으로 그들의 찐한 우정은 아래의 짤방 하나로 입증되기도 한다.

파일:external/pds.joinsmsn.com/htm_200612272232100105000001050200-004.jpg
이 사진은 2016년 우리동네 예체능 배구 편에 등장해 또 한 번 주목받았다(...)

김세진MBC 황금어장 라디오스타에 출연하여 신진식에 대한 언급을 하며 자기보다 여러 모로 나을 정도로 기술과 체력적인 면에서 모두 대단한 선수로 치켜세우기도 했지만 블로킹만큼은 자신이 한 수 위라고 자신있게 주장하기도 했다.[20] 또한 외모 면에서는 자기가 한수 위이며 팬들의 숫자도 자기가 훨씬 많았다고 너스레를 떨기도 했으며,[21] 대학교 신입생 시절 상경하며 고등학교 때 입던 츄리닝을 대학교 훈련 때도 입으려고 봇짐[22]에 싸가지고 온 순진한 선수였다고 밝혔다. 김세진은 그런 순진한 신진식을 밤문화(?)에 끌어 들였고, 덕분에 신진식은 춤으로 신발이 닳을 정도로 춤을 춘 '댄싱킹'으로 활약했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2017-18 V리그 올스타전에서 이재영, 이다영 자매에게 이끌려 스테이지(...)로 나왔을 때는 그냥 미스터 홍당무가 되었다
  • 배우자인 권세진 씨는 성균관대학교 체육학과 동문이자 동갑내기 1년 후배[23]로 조우하였다. 당시 175㎝의 늘씬한 키에 빼어난 몸매로 입학 때부터 많은 남성들의 시선을 사로잡아, 당시 대학 최고의 배구스타였던 신진식도 한눈에 반했고, 신진식은 권씨를 알게된 지 이틀 만에 춘계대학연맹전 우승 뒤풀이에 초대하며, 믿음직스럽고 유머 감각이 넘치는 신진식의 행동에 마음을 열었다고 한다. 졸업 후 한때 4개월간 헤어진 적도 있었으나 이미 서로에 대한 사랑이 너무나 깊어져 결국 1999년에 결혼에 골인했다. 슬하에는 아들 현수, 현빈 군이 있다.
  • 출발 드림팀에서 배구 올스타팀으로 출전하였다. 뜀틀 대결이었는데 신진식이 2m60을 뛰어 넘으면서 종전기록인 2m50[24]을 넘어선다. 하지만 체조 올스타팀으로 출전한 여홍철이 2m80을 기록하면서 기록이 깨졌다.
  • 2017-18 V-리그 올스타전에서 최태웅과 함께 나란히 코트에 깜짝 난입하여 오랜만에 현역 시절의 호흡을 재연하였는데 팬들에게 엄청난 환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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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뿐만 아니라 올스타전에서 이재영, 이다영 자매에게 끌려와서 깜짝 댄스를 선보였는데 자신보다 한참 밑의 후배 선수들과 춤을 추는 것이 부끄러웠는지 금방 얼굴이 홍당무가 되기도 했다.
  • 흑역사로는 2004년 12월에 음주운전으로 입건된 적이 있다.


[1] 당시만 해도 공격수로 활약했으나 키가 더 자라지 않아 결국 리베로로 전향하게 되었다.[2] 1995년 모 신문 기사에 따르면, 당시 신진식은 서전트 점프 높이 80cm에 유난히 긴 팔로 실제 타점이 같은 키의 선수보다 10cm는 더 높았다고 한다. 또한 익산 남성고등학교 시절 교내 고등학교 마라톤 대회에서 3년 연속 우승을 했었으니 기본적인 스태미너는 두말할 나위도 없었다. 특히 과거 사이드아웃 제도였을 때는 남자부 경기가 기본 2시간, 길게는 3시간(...)이 넘어가는지라 선수 개개인에게 철인과도 같은 체력이 요구되던 때에 신진식은 절대 지치지 않는 백만돌이였다.[3] 삼성에 안가면 학점을 주지 않는다고 거의 협박에 가깝게 대했다[4] 실제로 예전부터 그토록 신진식을 원했던 현대캐피탈은 얼마 남지 않은 선수 생활이라도 그를 기용하고 싶어했고 신진식도 이에 동조하며 이적에 대해 상당 부분 이야기가 진행되었다.[5] 이 경기에서 삼성화재의 서브 에이스는 0개, 대한항공은 9개나 되었다. 이 중 가스파리니가 5개를 기록하였다.[6] 올 시즌 들어 유난히 풀셋 접전이 많았는데, 특히 우리카드와의 경기는 1경기를 제외하고 모조리 풀셋 경기였다. 2월 2일 우리카드전에서도 풀셋을 가자 경기 후 인터뷰에서 말하길, “또 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고...[7] 2018년 2월 4일 현재, 1위 현대캐피탈과의 승점차가 9점에 달하고 있고 앞으로 남은 두 번의 맞대결에서 모두 이기는 것도 사실상 어렵기 때문에 이제는 2위를 지키는 것이 최선일 수밖에 없다.[8] 그 옛날 가빈이 잔부상을 안고 뛰었고, 그로저가 경기 중에 다리를 부여잡을 정도로 뛰었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9] 역대 플레이오프에서 1차전 승리팀의 대부분(92%)이 챔피언결정전에 진출하였다.[10] 해당 동영상은 삼성화재-우리카드 4세트 19분 20초쯤에 나온다.[11] 전성기 때 대략 스파이크 높이가 320cm 대로 예상된다.[12] 여기서 블로커의 벽은 블로킹 잡으러 위로 뻗은 팔인데, 자세히는 윙 스파이커가 큰 공격 시 이용 하는 블로커의 손 부위(주로 손끝)이다.[13] https://sports.news.naver.com/general/news/read.nhn?oid=001&aid=0003868906[14] https://sports.news.naver.com/general/news/read.nhn?oid=001&aid=0004137027[15] 그렇다고 해도 90년대 중반의 대표팀과 비교할 때 신진식이 전면으로 나선 90년대 후반 대표팀의 전력이 신영철의 은퇴로 떨어지긴 했으나 큰 차이가 있었던 건 아니다. 대진운 같은 요인도 있었고 한중일 호각세에 배구 강국들에게 졌잘싸나 가끔 비비던 수준이었던 것은 변함없었다. 90년대 중반 황금기의 끝인 1996년 올림픽보다 룰 개편으로 급변하던 2000년 올림픽에서 더 잘 싸우기도 했다.[16] 대표적으로 이경수 사태.[17] https://www.sports-reference.com/olympics/summer/2000/VOL/mens-volleyball.html에서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18] 대회에 따라 경쟁국의 전력에 편차가 있다.[19] 후에 둘 다 이때 사귀던 여자친구와 결혼했다. 다만 김세진은 2004년 이혼한다.[20] 겸손이 섞여 있겠지만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말인게, 김세진은 신장이 197cm로 신진식보다 거의 10cm 가까이 클 정도였으며, 전위에 있을 때 블로킹 실력 역시 발군이었다. 신체조건이 매우 중요한 배구라는 종목에서 신진식은 김세진에 뒤지지 않는 활약을 했고, 이는 기술적 측면에서 신진식이 우위에 있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21] 1990년대 중반 배구는 농구 못지 않게 인기가 많았다. 특히 1990년대 중반은 대한민국 남자배구 대표팀의 제2의 리즈시절이라고 할 만큼 월드리그, 세계선수권대회 등의 국제대회 성적도 좋았다. 국제전만 있으면 잠실체육관이나 장충체육관에 빈자리가 없을 정도. 또한 김세진이나 신진식처럼 인기 많은 선수들은 팬레터도 그에 비례해서 받기도 했다.[22] 옆에서 이야기를 듣던 심권호는 봇짐 싸가지고 왔다는 말에 "진짜 촌놈이었구나"라고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23] 생일이 빠른 신진식이 1년 선배[24] 조성모 이상인 등이 기록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