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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7 내란 五一七內亂 5.17 Internal Disturbance | |
국회의사당을 점거하고 국회의원들의 출입을 통제하는 계엄군 | |
<colbgcolor=#536349><colcolor=#fff> 일시 | 1980년 5월 17일 ([age(1980-05-17)]주년) |
장소 | 대한민국 전역 |
원인 | 12.12 군사반란 이후 신군부의 본격적인 정권 장악 기도 |
결과 | 민주화 운동 분쇄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설치 |
영향 | 내각 총사퇴 및 최규하 대통령 하야 전두환 정부 출범 |
피해 | 국회 폐쇄, 헌정 중단 및 민정 붕괴 5.18 광주 민주화 운동 무력 진압 (대민학살 등) 학생운동 무력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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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정치활동 일체 금지 |
전국 대학에 휴교령 어젯밤 긴급 비상각의서 의결 옥내외 집회·시위 금지 태업·파업을 하면 엄단 |
5.17 내란 또는 5.17 쿠데타는 1980년 5월 17일에 전두환, 노태우를 비롯한 신군부 인사가 정권 장악을 위해 주도한 비상계엄 확대조치에 의해 발생한 사건을 가리킨다. 1979년에 발생한 12.12 군사반란과 이어서 보면 6개월이나 걸린 세계에서 가장 오래 걸린 쿠데타라는 수식어가 붙는다.[1]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는 쿠데타의 일환으로서 진행되었다.[2]
전두환을 주축으로 한 신군부 세력이 헌법과 민주주의의 가치를 훼손한 사건을 5.17 내란이라고 지칭하고 이런 비정상적 상태에 저항하는 광주 시민들을 전두환과 신군부 세력이 무력으로 짓밟자 이에 그들이 대항한 사건이 5.18 민주화운동이다. 이러한 연관성을 까닭으로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강압적인 진압을 이 사건과 묶어서 '5.18 내란'이라고 지칭하기도 한다. 실제로 일부 저서들, 그리고 1997년에 있었던 12.12, 5.18 사건 재판 당시에는 5·18 내란 사건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2. 배경
1972년 10월 유신으로 종신집권 체제를 구축한 박정희 대통령은 통일주체국민회의, 유신정우회, 긴급조치 등을 이용해 집권을 연장했다. 그렇게 좀처럼 끝날 것 같지 않던 유신 체제는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피살되면서 저물기 시작했다. 그리고 대통령 권한대행이 된 최규하 국무총리는 10월 27일을 기하여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하였다.[3] 다만 이전부터 이미 유신 헌법하의 대한민국 제4공화국이었고 부산·경남[4] 지역은 부마민주항쟁으로 이미 계엄령이 내려진 상태였기 때문에 큰 변화는 없었다.12월 6일 통일주체국민회의는 박정희의 사망으로 인해 진행된 대통령 보궐선거에서 최규하를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최규하의 임기는 유신헌법 규정상 박정희의 잔여 임기 기간인 1984년 12월 6일까지만 하기로 했지만 헌법을 개정해서 새 대통령을 선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고 최규하 대통령 본인도 빠른 시일 내에 민주헌법으로 개헌하여 차기 대통령을 선출한 뒤 권력을 이양할 것이라는 약속을 하고 여야 모두의 지지를 받아 무난하게 당선되었기에 국민들은 유신 체제가 드디어 끝날 것이라는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12월 7일 최규하 대통령은 민주화, 개헌 요구와 학생들의 집회, 시위를 철저히 금지한 긴급조치 제9호를 12월 8일자로 해제했다. 이로써 서울의 봄이 찾아올 기반이 마련됐다.
그러나 그로부터 5일 뒤 12.12 군사반란이 터졌고 계엄사령관이 교체되는 소란이 계엄령하에서 일어났다. 군부 내부에서 발생한 일이었기에 당장 국민에게 미치는 변화는 없었으나 이로써 국정의 실권을 대통령과 정부가 아닌 전두환을 필두로 한 신군부가 가져가는 결과를 낳았기에 5.17의 중요한 도화선이 되었다.
이듬해인 1980년에는 서울의 봄이 찾아왔다. 민주공화당과 신민당은 개헌특위를 열어 유신 체제를 끝낼 개헌 논의를 시작했다. 국회 양당과 정부는 연내 개헌에 합의했다. 김종필, 김영삼 등은 대선이 곧 치러질 것이라고 확신하고 정치 행보를 넓히기 시작했으며 2월 25일 인촌기념관에서 열린 김성수 추도식에서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이 회동했다. 다만 그 당시 김대중은 보안사의 보도검열 때문에 사진 등으로 직접 언급되지 못한 채 '재야 유력인사' 등으로 에둘러 지칭됐다.
2월 29일 김대중이 사면, 복권되었는데 신민당 참여를 거부하고 재야세력과 합작하여 3파전이 벌어졌다. 김종필, 김영삼, 김대중을 일컫는 삼김이라는 단어는 이때 최초로 등장했다.[5]
3월 대학가가 개강하자 각 대학은 학생회를 재조직하고 학내 민주화를 외치기 시작했다. 4월 하순에 이르러서는 학생들의 시위가 학내 문제에 국한되지 않고 전두환 퇴진, 계엄 해제 등 정치적 현안으로 번졌다. 시위는 학교 내에서만 이루어지다가 5월 14일에 서울 지역 27개 대학 총학생회가 가두시위를 결의했고, 학생들의 가두시위는 5월 15일에 정점에 달했고 서울역에는 10만 여명의 학생들과 시민이 운집했다. 진압에 나선 경찰과의 충돌이 이어졌고 전경이 시위대가 몰고있던 버스에 치여 사망하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국회는 학생들과 시민들의 요구에 호응하였다. 5월 15일 국회 헌법개정특별심의위에서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을 합의하였다.[6] 신민당, 공화당 양당은 5월 20일 국회 임시회 개회를 합의하였고 개헌안의 정부 이송, 비상 계엄 해제, 정치범 석방 및 복권 논의가 예정되었다.# 야당인 신민당은 물론 공화당 역시 비상 계엄 해제에 상당히 동조하였고 이미 양당이 합의한 개헌안인 만큼 통과될 가능성도 높았다.
15일 시위가 절정에 이르자 가두시위에 나섰던 서울대학교 총학생회장 심재철은 더 이상 시위가 과열되면 군부에 무력 개입의 빌미를 준다며 전국 학생회장단을 설득하여 시위를 해산하고 학교로 돌아가자고 주장했다. 당시 군부는 무력 진압을 암시하고 있었고 서울대 학생처장 이수성 교수는 군부로부터 무사귀교를 보장 받았다면서 학생 지도부들을 설득했다. 이날은 해산하고 다시 준비하여 다음에 집결하기로 한 시위 지도부의 결정을 서울역 회군이라고 부르는데 더 자세한 과정과 논쟁점은 해당 문서를 참고하면 된다.
정치권에서는 계엄을 해제하여 군부의 개입 여지를 차단하고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을 통과시켜 유신 체제를 끝내고 민주화로 나아가는 길을 열고자 했고 학생과 시민들은 거센 목소리로 군부 퇴진과 민주화를 요구했다. 이대로 가면 민주화가 오는 듯했지만 신군부는 순순히 권력을 내려놓을 생각이 없었다.
3. 전개
4월 하순부터 학생들의 시위가 전두환을 향하기 시작하자 보안사 내부에서는 군부가 전면에 나서 정국을 장악할 방안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5월 초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보안사 정보처에 시국수습방안 작성을 지시했고 권정달 보안사 정보처장은 5월 12일 '비상 계엄 전국 확대', '국회 해산', '국가 보위 비상기구 설치'를 골자로 하는 시국수습방안을 보고했다.# 신군부 세력은 정부를 몰아붙여 1980년 5월 17일 21시 30분경 비상계엄 전국 확대를 국무회의에 상정하게 했다. 이때 신군부가 표면적으로 내세운 계엄령의 확대 이유는 '사회 혼란에 따른 북한의 남침 위기'였다.
5월 16일 오후 10시 10분 제2차 석유 파동으로 인한 원유가 폭등에 대처하기 위해 중동 순방 중이던 최규하 대통령이 예정보다 하루 전에 귀국했다. 바로 다음 날인 17일 외부와의 모든 전화선이 끊어지고 중앙청 내부 계단과 복도에 1~2m 간격으로 무장군인들이 배치된 공포 분위기 속에서 신현확 국무총리 주재 하에 청와대 수석비서관과 장관들이 참석한 확대국무회의가 열렸다. 공포에 짓눌린 장관들과 수석비서관들은 밤 9시 40분에 확대국무회의에서 전국 비상 계엄 선포를 의결하였다. 전화선까지 차단된 상황에서 단 8분 만에 아무런 토론과 설명도 없이 이루어졌다. 5.16 군사정변 당시 상황을 오판하여 쿠데타를 지지한 윤보선이나 무작정 도망간 장면보다도 어이없는 통과였다.
밤 11시 40분, 신군부의 꼭두각시로 전락한 최규하 대통령은 문화공보부 장관 이규현을 시켜 5월 17일 24시를 기해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한다고 발표했다. 최 대통령은 특별선언을 통해 "이 중대한 시기에 일부 정치인, 학생 및 근로자들의 무책임한 경거망동은 이 사회를 혼란과 무질서, 선동과 파괴가 난무하는 무법지대로 만들고 있어 우리 국가는 중대한 위기에 직면해 있다"고 하면서 "이러한 상태가 더 이상 계속된다면 우리의 국기마저 흔들리게 할 우려가 없지 않아 단안을 내리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라고 했다.
제주도까지 계엄령을 선포함으로써 지역 계엄이 전국 계엄으로 확대된다. 이렇게 되면 계엄지휘체계는 국방부 장관이 배제되고 계엄사령관이 대통령의 직속으로 바뀌는데 이 당시 대통령은 허수아비인 상황이었고 전권을 쥐게 된 계엄사령관 겸 육군참모총장 이희성 대장은 12.12 군사반란 이후 신군부에 의해 추대된 '바지사장'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에 이는 사실상 신군부가 완벽하게 장악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관계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던 5월 17일 아침 신현확 국무총리는 청와대로 가서 최규하 대통령에게 마지막 승부수로 동반 퇴진을 선언하자고 제안했다고 한다. 신군부가 민간 정부를 완전히 짓밟고 가는 모양새를 연출하고 대통령과 총리 부재로 인해 관련 조치들이 합법적으로 진행되는 것이 불가능해지는 것을 노렸던 것. 하지만 최규하는 이에 대해 고개를 저었고 신현확은 이후 신군부에 업혀서 살아남을 길을 택한 최규하는 민간 정부 출범이라는 공약을 어긴 사람이라고 끊임없이 비판하곤 했다고 한다.
계엄 전인 16일에 국방부에선 주영복 국방부장관의 주재로 군단장급 이상 전군 주요 지휘관회의가 긴급 소집되어 '시위 진압에 군을 투입할 것인가'란 의제로 회의를 벌였다. 회장은 국방부 장관실로 하였지만 이보다 앞서 당시 육참총장이었던 이희성은 총장실에서 지휘관끼리 입을 맞추자는 의도로 사전 리허설을 했으나 지휘관들 사이에서 군 투입 관련 찬반 양론으로 나뉘어져 합의를 이끌어내지 못했다.
본 회의에서 주영복 장관은 회의 내내 "북한의 도발에 대비해야 할 시점에 학생들이 데모를 일으켜 사회가 어수선하니 군이 나서서 수습해야 한다"는 취지로 주재했으나 안종훈[7] 군수기지 사령관이 조심스럽게 군은 맨 마지막에 나서야 한다고 군 투입 반대 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즉시 정호용 특전사령관이 "현재는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 시대입니다. 만약 이것을 놔두면 점점 위험해집니다. 국회가 개회되면 국가를 오도할 사례가 많아집니다. 소수 주장을 허용하고 있습니다. 다수가 군 개입을 지지해야 합니다"라고 하여 분위기를 띄우자 장성들은 군 투입에 이의를 제기하지 못한 채 44명의 육/해/공 지휘관들은 백지 명부에 서명을 하고 말았다.[8] 이 사정을 당시 3군단 사령관 전성각은 아래와 같이 증언하였다.
이날 회의는 군을 떠날 각오를 하지 않고서는 반대의견을 낼 수 없는 분위기인 것으로 기억된다.
- 원 출처: <장군의 비망록: 격동의 현대사를 주도한 장군들의 이야기> 1권 '전성각 장군(김문 글)' - 별방. 1998.
그리고 모든 것이 하나회의 손아귀에 넘어갔다. 계엄포고령 10호에 따라 5월 18일 새벽부터 정치 활동이 전면 중단되고 어떠한 정치적 옥내외 집회 및 시위도 금지되었다. 이어 모든 대학에 휴교령을 선포하고 군부대가 진주하였다. 서울역 회군 이후 전국 학생회장단이 모여 있던 이화여자대학교를 급습해서 전원 체포하여 학생운동 세력을 무력화시키고 민주화를 요구해 온 재야인사와 사회운동 세력을 지명수배해 일제 검거하였다.[9] 거기에 이날 새벽 2시경에 무장한 33사단 101연대 병력이 국회의사당을 점령하고 봉쇄하여 사실상 헌정 중단 사태가 발생했다.- 원 출처: <장군의 비망록: 격동의 현대사를 주도한 장군들의 이야기> 1권 '전성각 장군(김문 글)' - 별방. 1998.
동시에 보안사는 비상계엄 하루 전에 전군 보안부대 수사과장회의를 소집해 17일 비상계엄 전국 확대 계획, 검거할 예비검속인원 8백여 명을 통보했다. 신군부를 견제할 수 있던 제도권 정치 세력인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등 삼김에 대한 탄압이 시작되었다. 5월 17일 당일 김대중은 "사회혼란 및 학생, 노조 배후조종 혐의"로 20여명과 함께 전격 연행되어[10] 내란음모 조작 사건으로 이후 사형 선고를 받게 되었고 김영삼은 오전 10시에 가택 연금되었으며 김종필은 보안사령부에 감금되었다. 이어 5월 18일에는 김종필, 이후락 등을 포함한 박정희 정권 시절의 거물 10여 명이 부정축재자로 발표되었고 신군부의 협박 앞에 재산을 헌납하고 정계 은퇴를 선언한다. 훗날 이에 대해 정치활동을 재개한 7년 후의 제13대 대통령 선거 관훈토론회에서 김종필은 "5·16이 형님이고 5·17이 아우라고 한다면 나는 고약한 아우를 둔 셈이다."#라고 회고하기도 했다. 단 하루 만에 모든 정적들이 제거된 것이다.
한편 국회 임시회가 예정되어 있었던 5월 20일 공화당과 신민당 양당의 국회의원들이 국회 앞에 모였지만 탱크까지 동원해 국회 정문을 막아서고 있었던 군인들과 실랑이를 벌인 끝에 결국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모두 돌아가야 했다.
이날 수배령이 떨어진 이들 가운데 600여 명이 체포되었고 신문과 방송들은 수배자들의 명단과 죄목을 경쟁하듯 우수수 쏟아냈다. 5월 21일 무력감을 느낀 신현확 내각은 총사퇴했고, 박충훈 한국무역협회 회장이 국무총리 서리를 맡았다. 사실상 내각조차 없는 상황에서 최규하는 완벽한 허수아비로 전락했다.
전국 계엄이 선포되면서 사전에 계획되었던 대로 계엄군이 전국에 배치되었다. 시민들의 시위가 전국에서 산발적으로 일어났으나 신군부가 이미 예비검속을 명목으로 시위 주동자등 2,699명을 체포하였기에 시위는 조직력을 갖추기 어려웠고, 그 마저도 계엄군에 의해 무자비하게 진압되었다. 5월 17일 이전부터 진행되고 있던 정선에서의 노동자 파업도 이 날을 기해 무자비하게 진압되었다. 광주에서도 학생 시위가 벌어졌고 계엄군이 진압에 나섰으나, 여기서는 계엄군의 무자비한 진압에 시민들이 반발하고 시위에 가세하면서 진압에 실패하는 일이 발생했다. 내란을 일으킨 신군부는 광주에서의 시위를 용인할 생각이 전혀 없었고, 광주를 봉쇄하고 공수부대를 투입하였다. 광주에서의 시위는 끝내 계엄군의 발포로 수많은 시민들이 목숨을 잃으며 강제로 진압당했다.
그렇게 5.17 내란은 전두환이 주도하는 신군부 반란군들의 승리로 끝났다.
광주의 저항 시도까지 유혈진압으로 마무리한 신군부는 5월 31일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약칭 국보위)라는 초법적인 기구를 설치하여 행정, 입법, 사법 삼권을 모두 장악하였다. 국보위 위원장은 최규하 대통령이었으나 바지사장에 불과했고 모든 실권은 상임위원장 전두환과 신군부가 쥐었다.
무력함을 느낀 최규하가 8월 16일 사임하자[11] 8월 21일 전군주요지휘관회의에서 전두환을 국가 원수로 추대하기로 결의해서 9월에는 전두환이 박정희의 유산인 유신헌법에 따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99.9%의 득표율로 당선되어 제11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국보위는 제멋대로 헌법을 뜯어 고친 뒤 10월 27일 새 헌법에 따라 이미 명패만 남아 있었던 국회와 모든 정당들을 강제해산하고, 스스로의 명칭을 국가보위입법회의로 바꾼 뒤 국회의 입법권을 행사하였다. 이후 신군부는 여야를 막론하고 관제정당들을 조직하는 등 외향적으론 민주주의 체제를 유지하는 척 포장했다. 여당인 민주정의당은 물론 야당인 민주한국당, 한국국민당 포함 야당들도 모두 보안사령부가 만들었다. 당뿐 아니라 이후 국회의원 선거 공천과 후보 배분도 각 당이 자체적으로 하지 않고 위에서 조정해주는 방식이었다.[12]
1981년 제5공화국 헌법에 따라 선거인단에 의한 간접선거에서 전두환이 90.1%의 득표율로 당선되어 제12대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반란 세력 신군부는 완전한 승리를 만끽했다.
==# 판결문으로 바라본 군사반란 당시 상황 #==
서울고등법원 1996. 12. 16. 선고 96노1892 판결 [반란수괴·반란모의참여·내란중요임무종사·불법진퇴·지휘관계엄지역수소이탈·상관살해·상관살해미수·초병살해·내란수괴·내란모의참여·내란중요임무종사·내란목적살인·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류위반(뇌물)
(1) 국회의사당의 폐쇄 1980.5.18. 01:45경 계엄군 소속 제33사단 101연대 1대대 3중대 소속 장교 3명, 사병 95명이 엠(M)16 소총 등을 휴대하고 경장갑차 8대와 전차 4대를 지원받아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1 소재 국회의사당을 점거하여 같은 해 8.30.까지 국회의원 등 일체의 출입자를 통제하면서 같은 해 5.20. 09:00경 김영삼 신민당총재의 기자회견에 참석하였던 황낙주, 손주항, 오세응 등 국회의원 38명과 의원비서관, 보도진 등 3백여 명이 5.20. 10:15경 국회 정문에 도착, 국회의사당으로 들어오려 하자, 위 계엄군들이 소총으로 황낙주 의원 등을 밀어내어 국회의원들의 국회 출입을 저지하였다. 계엄군은 뒤(다. (1)과 (7))에서 보는 바와 같이 여,야 국회의원 등 정치인들을 체포하고 국회의원들의 국회 출입을 계속 저지하여, 5.20. 10:00 개회예정인 제104회 임시국회의 개회가 불가능하게 되어 1980.6.18. 위 임시국회가 자동 폐회되었고 피고인 전두환이 대통령에 취임한 같은 해 9.1. 후인 9.20. 제105회 정기국회가 열려 9.22. 남덕우 국무총리와 이한기 감사원장에 대한 임명동의안만을 처리하고 휴회에 들어간 뒤 같은 해 10.27. 공포된 제5공화국 헌법 부칙 제5조 제1항에 따라 제10대 국회의원의 임기가 종료됨으로써 국회가 사실상 해산되었다. (2)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의 설치와 운영 피고인 전두환은 1980.5.초부터 권정달에게 비상기구설치를 검토하도록 하여 이를 시국수습방안의 하나로 성안하여 같은 해 5.17. 최규하 대통령에 건의할 준비를 하였다. 피고인 전두환은 같은 해 5.19.경 다시 권정달을 통해 유신헌법상의 대통령 긴급조치권에 의한 비상기구 설치를 대통령에게 건의하였으나 최 대통령이 현행법규의 테두리 안에서 가능한 방안을 연구해 보라고 언급하자, 형식적으로는 대통령의 계엄업무에 대한 자문기구의 형태로 비상기구를 설치하되, 실질적으로는 피고인 전두환 등의 주도로 행정각부 등을 통제하여 국정을 수행해 나가겠다는 의도하에 같은 해 5.23.경 권정달을 시켜 이원홍 대통령비서실 민원수석비서관에게 국보위의 설치 필요성을 설명하면서 그 설치 요강을 제시하고, 위 이원홍이 비서관들로 하여금 조문화 작업을 하게 하여 같은 해 5.24.경 계엄법과 정부조직법에 근거하여 대통령에 대한 자문기구 형태로 국보위를 설치하는 내용의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설치령이 성안되어 1980.5.27. 제46회 국무회의에서 위 설치령을 의결하게 하여 국보위를 발족시켰다. 피고인 전두환은 국보위 업무를 실질적으로 국가보위비상대책상임위원회를 중심으로 추진하기로 하면서 1980.5.31. 상임위원장에 자신이 취임하고, 당연직 상임위원을 군장성 12명과 대통령 비서관 4명으로 구성하고, 피고인 이학봉, 허화평, 허삼수와 함께 각 분과위원과 전문위원을 선정하여 피고인들이 그 실권을 장악한 후 국보위상임위원회를 통하여 뒤에서 보는 바와 같이 공직자숙정, 언론인 해직, 언론통폐합, 불량배소탕 등 소위 국정개혁작업을 수행하여 국보위상임위원회를 통하여 피고인 전두환 등의 국정수행능력을 내외에 과시하여 집권세력으로 부각시키는 데 이용하면서 국보위상임위원회가 사실상 국무회의 내지 행정각부를 통제하거나 그 기능을 대신하여 헌법기관인 행정부와 대통령을 무력화시켰다. (3) 헌법제정권력에 대한 강압 뒤의 범죄사실란에서 인정하는 바와 같이 피고인들이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국회를 봉쇄하며, 정치활동을 금지하고, 주요 정치인들을 구속한 행위에 대하여 이를 강력히 항의하고 그 시정을 요구하는 광주시민들의 시위를 피고인들이 공수부대병력을 동원하여 난폭한 방법으로 분쇄한 행위도 국헌문란에 해당한다. 민주주의국가의 국민은 주권자의 입장에 서서 헌법을 제정하고 헌법을 수호하는 가장 중요한 소임을 갖는 것이므로 이러한 국민이 개인으로서의 지위를 넘어 집단이나 집단유사의 결집을 이루어 헌법을 수호하는 역할을 일정한 시점에서 담당할 경우에는 이러한 국민의 결집을 헌법기관에 준하여 보호하여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국민의 결집을 강압으로 분쇄한다면 그것은 헌법기관을 강압으로 분쇄한 것과 마찬가지로 국헌문란에 해당한다 (4) 국헌문란 위 (1)의 행위는 입법권을 담당하는 헌법기관인 국회의 기능을 마비시켜 사실상 이를 전복한 것에 해당한다. 위 (2)의 행위는 대통령과 행정부의 권한을 사실상 대행함으로써 그 권한행사를 불가능하게 한 것이다 위 (3)의 행위는 헌법제정권력으로서의 국민의 결집을 강압으로 분쇄한 것이고 이것은 헌법기관을 강압으로 분쇄한 것과 같다. 이들은 형법 제91조의 국헌문란행위에 해당한다. 위의 국헌문란행위는 우발적으로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피고인들이 이러한 국헌문란을 목적으로 하여 다음 나.와 같이 사전에 모의하고 준비한 뒤 이러한 목적을 강압에 의하여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계획에 따라 다음 다.와 같이 폭동하여 이를 성취한 것이다. 나. 모의와 준비 제1항 기재와 같이 1979.12.12.에 일어난 군사반란(이하 12·12 군사반란이라고 부른다) 이후 피고인 전두환은 1980.4.12.부터 중앙정보부장서리를 겸임하고 피고인 노태우는 1979.12.13. 수경사령관에, 피고인 유학성은 1979.12.18. 제3군사령관에, 피고인 황영시는 1979.12.24. 육군참모차장에, 피고인 이희성은 1979.12.13.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에, 피고인 주영복은 1979.12.14. 국방부장관에, 피고인 차규헌은 1979.12.19. 육군사관학교장에, 피고인 정호용은 1979.12.13. 특전사령관에 각 취임하여 군의 지휘권을 실질적으로 완전히 장악한 뒤 피고인 허삼수, 허화평 및 1980.1.12. 보안사 대공처장으로 승진한 피고인 이학봉과 공모하여 다음과 같이 국헌문란을 모의하고 준비하였다. (1) 피고인들은,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할 이유가 없을 뿐만 아니라 10·26 사건으로 선포되어 있는 지역비상계엄조차 계엄법상의 목적과 요건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 해제를 요구받고 있는 상황에서, 국정을 장악하기 위해 국회를 해산하는 동시에 입법, 행정, 사법을 통제하는 비상기구를 설치, 운영할 계획을 마련하고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그 수단으로 군을 배경으로 비상계엄을 제주도를 포함한 전국으로 확대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리고 국정장악의 목적을 달성할 때까지 필요시 언제든지 병기를 휴대한 계엄군을 동원할 수 있다는 위협적인 상황을 조성하면서, 계엄군 병력이 전국의 주요 대학과 국회, 언론기관 등에 배치되는 것을 계기로, 향후 피고인들의 퇴진과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를 제압하고 피고인들의 국정 장악에 반대하여 저항할 것으로 예상되는 주요 정치인과 재야인사, 학생운동 지도자들을 소요배후조종이나 부정축재 혐의로 체포하여 제거하는 등의 방법으로 헌법기관인 대통령, 국회 및 행정부 그리고 피고인들의 국헌문란행위에 반대, 항의하는 국민들의 결집을 계엄군의 무력을 사용한 강압에 의하여 전복 또는 그 권능 행사를 불가능하게 할 것을 결의하였다. (2) 피고인 전두환은 1980.5.초 보안사 내 참모들에게 군이 전면에 나서 정국을 장악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해 검토할 것을 지시하고, 이에 따라 피고인 이학봉, 허화평, 허삼수와 및 권정달 보안사 정보처장, 정도영 보안사 보안처장이 2, 3일간 수시로 만나 논의한 끝에 비상계엄의 해제와 전두환의 퇴진 등을 요구하는 대학가의 시위를 강력히 제압하고 군이 전면에 나서 정국을 장악하기 위해서는, 군 주도 세력의 협조하에 지역계엄보다 한층 강화된 전국계엄을 실시하는 동시에 과도정부적 성격의 소극적인 내각을 통제하기 위한 비상기구의 설치와 계엄해제 요구를 결의할 가능성이 있는 국회의 해산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였다. 그리고 이를 '시국수습방안'로 정리하기로 하여, 1980.5.4.경 서울 종로구 궁정동 소재 중앙정보부장 안가에서 피고인 노태우, 유학성, 황영시, 차규헌, 허화평, 허삼수, 이학봉, 정호용은 권정달로부터 위와 같은 방안을 설명들은 후 모두 이의 실행에 동의하고, 피고인 전두환은 5.12.경 권정달로부터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는 동시에 비상기구를 설치하고 국회를 해산할 필요가 있다는 내용의 시국수습방안을 보고받고, 피고인 유학성, 황영시, 노태우, 정호용과 함께 수시로 논의한 끝에 전군주요지휘관회의에서 군지휘관들이 위 시국수습방안을 지지하는 결의를 하도록 유도함으로써 전군의 의사를 배경으로 하여 위 시국수습방안을 추진하기로 하였다. 피고인 유학성은 5.15.경 서울 용산구 용산동 소재 육본 참모총장실에서 피고인 이희성에게 위 시국수습방안을 설명하면서 협조를 부탁하고, 피고인 이희성은 이를 승낙하고, 피고인 주영복은 5.17. 전군주요지휘관회의 전에 피고인 전두환의 지시를 받은 권정달로부터 위 회의에서 다루어야 할 안건으로 위 시국수습방안을 통보받고 이의 실행에 동의하였다. (3) 피고인 황영시는 피고인 이희성과 함께 시위 진압에 군을 동원할 것에 대비하여 1980.5.3. 특전사 예하 9공수여단을 수도군단에 배속시키고, 5.6. 해병 1사단 1개 연대를 소요사태 진압부대로 사용할 수 있도록 조치하는 한편, 5.6.부터 5.9.까지 2군 및 수도권 지역 전 부대를 대상으로 소요진압 준비태세를 점검하고, 5.8. 01:00 포천에 주둔하고 있던 13공수여단을 서울 거여동 3공수여단 주둔지로, 5.10. 01:00 화천에 주둔하고 있던 11공여수단을 김포 1공수여단 주둔지로 각 이동 배치하고, 5.9. 해병 1사단 1개 연대를 추가로 소요 진압에 투입할 수 있도록 조치하였다. 위 피고인들은 5.14. 13:00 김재명 육본 작전참모부장을 본부장으로 하는 소요진압본부를 설치하고 전군에 소요사태 진압부대 투입 준비지시를 하달하여, 차후 명령에 따라 수도경비사령부는 특전사 예하 4개 공수여단을 작전통제하여 수도권 강북지역의, 수도군단은 9공수여단을 작전통제하여 수도권 강남지역의, 2군사령부는 7공수여단과 해병 1사단 2개 연대를 작전통제하여 부산, 대구, 광주지역의 각 소요사태 진압을 준비하도록 하였다. 위 피고인들은 이어 신현확 국무총리나 관계장관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5.14. 17:30 3공수여단을 국립묘지에 배치하고, 5.14. 18:25 청와대 등 특정경비지역 방어를 위하여 광화문 지역 경찰 저지선 뒤에 수경사 9개중대와 화학지원대를 배치한 데 이어 같은 날 20:29 전국 71개 방송국 및 중계소에 경계 병력을 배치하고, 5.15. 12:00 양평에 주둔하고 있던 20사단 61, 62연대를 잠실체육관과 효창운동장으로, 5.17. 00:01 20사단 60연대를 태릉으로 각 이동시키는 등 계엄군의 예비이동을 실시하였다. (4) 피고인 전두환은 1980.5.초 피고인 이학봉에게 학원 소요사태를 근절하기 위해서는 학생 시위를 배후에서 조종하는 정치인과 재야인사, 대학 복학생 및 재학생 대표들을 검거하여야 한다는 이유로 그들에 대한 조치 방안을 검토하도록 지시하면서, 부정축재자들에 대한 조치 방안도 아울러 검토할 것을 지시하고, 피고인 이학봉은 권정달로부터 관련 자료를 협조받아, 5.13. 검거대상을 학생시위 배후조종자에 대해서는 국기문란자로, 부정·부패행위자에 대해서는 권력형부정축재자로 각 분류하기로 하고, 이를 피고인 전두환에게 보고한 다음 권정달과 함께 대상자 선정작업을 마무리하여, 이른바 국기문란자와 권력형부정축재자의 선정 기준, 명단, 혐의 내용 등을 정리한 '국기문란자 수사계획'과 '권력형부정축재자 수사계획' 등 두 개의 보고서를 작성, 5.15. 피고인 전두환에게 최종 보고하고, 피고인 전두환은 이들을 검거할 준비를 하라고 지시하였다. (5) 피고인 전두환, 노태우, 유학성, 황영시, 이학봉, 차규헌, 정호용, 허삼수, 허화평은, 1980.5.12. 여·야 총무가 계엄해제 등 정치현안을 다루기 위한 임시국회소집에 합의하고 신민당이 비상계엄해제결의안을 국회에 제출하자 임시국회가 1980.5.20. 개회되면, 비상계엄해제가 본격 논의되어 계엄 상황을 이용한 정국 장악에 차질이 빚어질 것을 우려한 나머지 그무렵 위 시국수습방안을 임시국회 소집일 이전인 5.17. 전격 실행하기로 하였다. (6) 피고인 전두환은 5.16. 13:00경 조문환 국방부차관을 통해 피고인 주영복에게 같은 달 17.에 전군주요지휘관회의를 개최하여 줄 것을 요구하면서 회의에 상정할 안건은 회의 직전에 알려주겠다고 통보하고, 5.16. 13:30경 다시 피고인 주영복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위 안건을 전군주요지휘관회의에서 반드시 관철하여 대통령의 재가를 받아줄 것을 요구하고, 이에 따라 피고인 주영복은 그 시경 조문환 차관에게 5.17. 10:00에 전군주요지휘관회의를 소집하도록 지시하였다. 피고인 전두환은 5.17. 09:30경 권정달을 피고인 주영복에게 보내, 비상계엄 전국 확대, 국회 해산, 비상기구 설치 등을 내용으로 하는 시국수습방안을 자신이 대통령에게 보고할 예정이니 이를 전군주요지휘관회의의 결의사항으로 대통령에게 건의해 달라고 요구하는 한편, 5.17. 10:00경 청와대에서 최규하 대통령에게 대통령 부재 중의 안보상황과 국내 치안상황을 보고하면서도 전군주요지휘관회의의 개최사실에 대하여는 보고하지 아니하였다. 피고인 정호용은 5.17. 10:35경 육군참모총장실에서 피고인 이희성에게 피고인 전두환 등이 추진하는 시국수습방안을 전군의 일치된 의견으로 유도해 내도록 협조하여 달라고 부탁하였다. (7) 피고인 이학봉은 5.16. 오후 소요배후조종 및 권력형부정축재자 등의 거주지역 보안부대 대공과장들을 보안사로 불러 검거대상자 명단을 나누어 주면서 별도 지시가 있을 경우 즉시 검거에 나설 것을 지시하였다. 피고인 전두환은 5.17.경 피고인 이학봉에게 같은 날 22:00를 전후하여 소요배후조종자 및 권력형부정축재자들을 전원 검거하라고 지시하였다. (8) 피고인 노태우는 5.17. 08:00경 서울 중구 필동 2가 84 소재 수경사에서 이현우 30경비단장, 성환옥 헌병단장 등에게 당일 국무회의가 있을 것이니 철저한 경비와 보안유지를 하라고 지시하고, 피고인 황영시는 5.17. 08:00경 참모차장실에서 나동원 민사군정감 등에게 전국계엄이 곧 실시될 것임을 알리면서 그에 따른 준비를 지시하였다. (9) 피고인 주영복은 앞에서 본 바와 같이 권정달로부터 전군주요지휘관회의에서 다루어야 할 안건으로 위 시국수습방안을 통보받고 이의 실행에 동의한 후, 회의 시작전인 5.17. 10:50경 국방부장관실에서 류병현 합동참모의장에게 외부로부터 요청이 있어 회의를 소집하였는데 논의할 안건은 비상계엄 강화, 국회 해산, 비상기구의 설치 문제라며 그에 대한 의견을 묻고, 류병현 합동참모의장이 이에 대해 비상기구의 설치와 국회 해산 문제를 군지휘관회의에서 논의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는 견해를 표명하고, 이어 피고인 이희성과 김종곤 해군참모총장, 윤자중 공군참모총장이 합석한 자리에서도 같은 의견을 표명하자 이를 회의 안건에서 보류하기로 작정하였다. 그리고 5.17. 11:00경부터 서울 용산구 용산동 소재 국방부 제1회의실에서 피고인 이희성, 황영시, 노태우, 정호용 및 공소외 류병현, 김종곤, 윤자중 등 육,해,공군 주요 지휘관 43명이 참석한 가운데 전군주요지휘관회의를 열어, 최성택 합동참모본부 정보국장의 북한 동향 및 국내외 정세 분석 보고에 이어, 계엄하에서 학원 소요가 진정되기는 커녕 오히려 과열, 폭력화되어가고 있고 북괴의 동향도 심상치 않으므로 지역계엄을 전국계엄으로 확대하고자 하니 의견을 개진해 달라고 하고 대부분의 참석자들이 계엄 확대에 이견이 없다는 발언을 한 가운데, 안종훈 육군군수사령관이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는 국민의 합의에 의해 하여야 하는데 시기상조라며 반대 의견을 표명하자, 피고인 정호용은 사회 안정을 위하여 군이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이 필요하다는 요지의 주장을 하고, 피고인 노태우, 황영시도 그에 동조하는 발언을 하는 등으로 참석자들의 발언이 끝나자, 피고인 주영복은 비상계엄 전국확대를 전군 주요지휘관들의 의견으로 대통령에게 건의하기로 결론을 내리고, 백지를 돌려 참석자들로부터 연서명을 받아 5.17. 14:30경 전군주요지휘관회의를 마쳤다. (10) 피고인 주영복은 5.17. 16:20경 위 연서명을 휴대하고 피고인 이희성과 동행하여 신현확 국무총리를 찾아가, 전군주요지휘관회의에서 논의된 비상계엄 전국확대 방안을 건의하면서 대통령을 보좌할 비상기구를 설치하고 정계 정화를 위하여 국회를 해산하자는 논의도 일부 있었다고 보고하였다. 피고인 주영복, 이희성은 이어 같은 날 17:10경 다시 최규하 대통령을 찾아가 신현확 국무총리가 배석한 가운데, 피고인 주영복이 전군주요지휘관회의에서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여 계엄을 강력하게 시행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결론이 나와 이를 건의한다고 하면서 일부에서는 비상기구의 설치와 국회해산 문제도 거론되었다고 보고하였다. 이에 대해 최규하 대통령이 신현확 국무총리의 의견을 묻는 등 장시간 숙고 끝에 같은 날 19:00경 계엄 확대방안에 대해서만 국무회의에서 논의해 볼 것을 지시하고, 피고인 전두환은 그 직후 별도로 소요배후조종 및 권력형부정축재 혐의자에 대한 체포 및 조사 계획을 보고하여 최규하 대통령으로부터 그에 대하여는 적법하고 신중하게 처리할 것을 당부받았다. (11) 피고인 이학봉은 5.17. 11:00경 보안사로 중앙정보부, 경찰 등 합동수사단 관계자들을 소집하여 계엄확대 조치의 배경을 설명하고, 중앙정보부 안전조사국과 대공수사국은 소요배후조종자 중 국민연합 관련자들을, 보안사 대공처는 권력형부정축재자들을, 경찰은 소요 관련 복학생과 재학생 대표들을 각각 검거, 수사하도록 지시하면서 대상자 검거시각은 5.17. 22:00로 하되 상황에 따라 융통성을 가지고 시행하도록 하는 한편, 5.17. 12:00경 검거대상자가 있는 각 지역 보안부대에 전언통신문을 보내 같은 날 22:00를 기하여 대상자들을 일제히 검거하라고 지시하였다. (12) 5.17. 12:00경 피고인 노태우는 박동원 수경사 작전참모 등에게 합수부나 중앙정보부로부터 병력지원 요청이 오면 즉시 지원해 주라고 지시하였다. (13) 피고인 전두환은 1980.5.초부터 권정달에게 비상기구의 설치를 검토하도록 하여 이를 시국수습방안의 하나로 성안하여 최규하 대통령에 건의하려다가 일시 보류하였고, 그 5.19.경 다시 권정달을 통하여 유신헌법상의 대통령 긴급조치권에 의한 비상기구의 설치를 대통령에게 건의하여 대통령으로부터 현행법규의 범위안에서 가능한 방안을 연구해 보라는 지시를 받고 계속 그 방안을 준비하였다. 다. 폭동행위 피고인들은 위 가.항에서 모의하고 준비한 시국수습방안을 실행하여 헌법에 의하여 설치된 국가기관인 국회, 대통령, 행정부를 강압하여 그 권한행사를 사실상 불가능하게 하고 이를 항의하거나 반대하는 국민들의 결집을 강압적으로 분쇄하기 위하여 공모하여 다음과 같은 행위를 하였다. (1) (예비검속) (가) 1980.5.17. 18:00경 보안사 대공처장 피고인 이학봉의 지시에 따라 서울지역 보안부대의 지휘를 받은 치안본부와 서울시경찰국 수사관들이 서울 서대문구 대현동 11의 1 소재 이화여자대학교에서 회의 중이던 전국 대학 총학생회장들 약 50여 명을 검거하기 위하여 출동하였으나 검거계획이 사전에 노출되어 대부분이 도주하는 바람에 10여 명만을 검거하고, (나) 5.17. 23:00경 중앙정보부의 지원 요청에 따라 출동한 수경사 헌병단 소속 장교 1명, 사병 18명 등이 서울 마포구 동교동 178의 1 소재 김대중 국민연합 공동의장 집에서 그를 체포하는 등 그 무렵 사회혼란조성 및 학생,노조소요관련 배후조종 혐의로 김대중 국민연합 공동의장, 문익환 목사, 김동길 연세대학교 부총장, 인명진 목사, 고은태 시인, 이영희 한양대학교 교수 등을 체포하고, 예춘호, 김녹영, 이택돈, 손주항 국회의원을 현행범이 아님에도 체포하고, (다) 5.17. 23:00경 보안사 대공처 소속 수사관 등이 서울 중구 신당 4동 340의 38 소재 김종필 공화당 총재의 집에서 그를 체포하는 등 그 무렵 권력형부정축재라는 불분명한 범죄 혐의로 김종필 공화당 총재, 이후락, 박종규, 김진만 국회의원, 김치열 전 내무부장관, 오원철 전 청와대경제제2수석비서관, 김종락 코리아타코마 사장, 장동운 전 원호처장, 이세호 전 육군참모총장 등을 구속영장 없이 체포하고, (라) 피고인 이학봉의 지시를 받은 광주지구 보안부대가 5.17. 23:00경부터 시위주동자에 대한 이른바 '예비검속'을 실시하여 재야인사와 학생회 간부 등 연행대상자 22명 중 정동년, 권창수, 오진수, 이승룡, 유재도 등 8명을 체포하는 등 전국 각 지역에서 비상계엄 확대와 병행하여 실시한 예비검속 과정에서 총 2,699명을 체포하는 등 전국적인 비상계엄의 위력을 과시하여 헌법과 법률에 정한 절차에 의하지 아니하고 신체의 자유 등을 침해하고 동시에 헌법에 의하여 설치된 국가기관인 대통령과 국회의원 그리고 국무위원 등을 강압, 외포케하여 폭동하였다. (2) (무력에 의한 국무회의장의 포위, 차단) 피고인 전두환, 노태우는 공모하여, 피고인 노태우가 5.17. 17:00경 전군주요지휘관회의를 마치고 수경사로 돌아와, 박동원 작전참모에게 중앙청에서 비상국무회의가 열릴 예정이니 중앙청 건물 안에는 헌병단 병력을, 건물 밖에는 제30경비단 병력을 충분히 배치하라고 하면서 국무회의장 주변에는 더욱 철저한 경비와 보안유지를 해줄 것을 재차 당부하고, 박동원은 이를 이현우 제30경비단장과 성환옥 헌병단장에게 지시하여, 5.17. 19:35 중앙청 외곽에는 권총과 엠(M)16 소총 등을 휴대한 수경사 30경비단 소속 장교 18명, 사병 324명과 장갑차 4대를 주둔지인 경복궁에서 이동 배치하고, 현관과 국무회의장에 이르는 계단과 복도 등 중앙청 내부에는 권총과 소총으로 무장한 수경사 헌병단 소속 장교 17명과 사병 236명을 주둔지인 수경사로부터 이동시켜 약 1, 2m 간격으로 배치함으로써 국무회의에 참석하는 국무위원들에게 그 위력을 보임과 동시에, 성환옥은 외부와의 연락을 차단할 목적으로 헌병단 통신과장에게 보안유지를 당부하면서 중앙청 내 전화선을 절단하라고 지시하여 인입 2,440 회선과 구내배송선 일체를 통신실 근무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절단하고, 배치된 병력들은 출입자를 검문하면서 국무위원 외에는 출입을 통제하고 중앙청 내 근무 공무원들을 사무실에서 내쫓아 5층에 있는 방으로 모두 몰아넣은 후 5.18. 07:00경까지 외부로 나가지 못하도록 함으로써 계엄군의 위력을 과시하여 헌법에 의하여 설치된 국가기관인 국무위원들을 강압, 외포케하여 폭동을 하고, 동시에 작당하여 병기를 휴대하고 반란을 하였다. (3) (비상계엄의 전국확대) 피고인 이희성, 주영복은 5.17. 21:42 중앙청에서 신현확 국무총리가 주재하는 제42회 임시국무회의에 참석하여, 피고인 주영복은 제주지역은 물론 전국적으로도 계엄법상 비상계엄 선포가 가능한 '전쟁 또는 전쟁에 준할 사변과 적의 포위공격'이라는 상황이 발생한 사실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단순히 북괴의 동태와 전국적으로 확대된 소요사태 등을 감안할 때 전국 일원이 비상사태하에 있다고 판단되어 계엄확대 선포안을 제출한다고 제안 설명을 한 후 반대 토론 없이 8분만에 이를 의결시키고, 이어 최규하 대통령의 재가를 받아 같은 날 23:40경 정부 대변인인 이규현 문화공보부장관으로 하여금 5.17. 24:00를 기하여 비상계엄 선포지역을 전국 일원으로 변경한다고 발표하게 하고 이로써 전국적인 비상계엄의 위력을 과시하여 헌법에 의하여 설치된 국가기관인 국회와 행정부 등 국가기관을 강압, 외포케하여 폭동하였다. (4) (주요시설에 대한 계엄군의 배치) 피고인 황영시는 1980.5.17. 17:00경 계엄의 확대와 그에 따른 계엄군의 전면 투입을 예상하여 김재명 작전참모부장에게 소요진압부대 투입준비를 지시하고, 피고인 이희성은 5.17. 22:30 전군에 소요 진압부대 투입 작전명령을 하달하여 5.18. 02:30경까지 광주 소재 전남대학교, 조선대학교를 포함한 전국 92개 주요 대학과 국회 및 신민당사와 공화당사, 언론기관, 공공기관을 포함한 136개 주요 보안목표에 엠(M)16 소총 등을 휴대한 계엄군 2만 5천여 명을 배치 완료하여 각 해당시설을 점거하여 계엄군의 위력을 과시하고 이로써 헌법과 법률이 보장하는 정치활동의 자유, 언론의 자유 등을 유린하여 헌법과 법률의 기능을 소멸시키고, 또한 헌법에 의하여 설치된 국가기관인 국회의원과 국무위원 등을 강압, 외포케하여 폭동하였다. 5) (정치활동금지 및 집회금지 등에 관한 계엄포고령의 발표) 피고인 이희성은 5.17. 20:05경 계엄사 참모장 나동원에게 보안사에서 정치활동의 금지 등을 골자로 하여 입안해 온 계엄포고 초안을 전달하여 이를 계엄포고 제10호로 기안하게 하고, 위와 같이 비상계엄의 시행지역이 전국으로 확대됨에 따라 5.18. 01:00경 모든 정치활동의 중지, 정치목적의 옥내외 집회 및 시위 금지, 언론, 출판, 보도, 방송의 사전 검열, 각 대학(전문대학 포함)의 휴교, 공공집회에서의 선동적 발언과 질서를 문란시키는 행위 불허, 포고령 위반자에 대한 영장 없는 체포, 구금, 수색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계엄포고 제10호를 발령하고, 피고인 전두환 등은 이를 기화로 국회의원들의 국회의사당과 정당 당사 출입까지도 통제하도록 지시하고, 피고인 전두환은 그 무렵 헌법 및 정부에 대한 비방, 5.17. 비상계엄지역 확대조치에 대한 비판, 포고령위반 내용 등의 보도통제를 골자로 하여 정보처에서 작성한 보안사령관 명의의 '5.17. 계엄지역 확대조치 및 포고령 10호에 의한 보도통제 지침'을 '위반 시 폐간'이라는 지시와 함께 계엄사 보도검열단에 시달하여 이에 따라 보도통제를 시행하도록 하고 이로써 비상계엄의 위력을 과시하여 헌법에 의하여 설치된 국가기관인 국회의원과 국무위원 등을 강압, 외포케하여 폭동하였다. (6) (야당 총재의 연금) 피고인 전두환, 노태우는 공모하여, 5.18. 오후 김영삼 신민당총재가 정무회의를 주재하여 연행자 석방, 계엄군 철수 등을 요구하고, 5.20. 09:00에는 다시 서울 동작구 상도1동 7의 6 소재 집에서 기자회견을 하려 하자, 피고인 노태우가 5.18. 07:20경 상도동 집에 성환옥 헌병단장이 지휘하는 수경사 헌병단 10, 53중대 병력 118명으로 하여금 엠(M)16 소총 등을 휴대하고 주둔지인 수경사에서 출동하게 하여 외부인의 출입을 통제하였으나, 김영삼 총재가 이미 집안에 들어와 있던 기자들을 상대로 5.17. 조치를 비난하는 기자회견을 강행하자, 외부인의 김영삼 총재 자택 출입과 김영삼 총재의 외부 출입을 금지하는 가택연금 조치를 취하는 등 계엄지역에서 지휘관으로서 권한을 남용하여 부득이한 사유 없이 부대를 불법 진퇴시키고 이로써 계엄군의 위력을 행사하여 헌법과 법률이 보장하는 정치활동의 자유를 유린함으써 헌법과 법률의 기능을 사실상 소멸시키고, 헌법에 의하여 설치된 국가기관인 국회의원과 국무위원 등을 강압, 외포케하여 폭동하였다. (7) (국회의사당의 폐쇄) 피고인 전두환, 노태우, 유학성, 황영시, 차규헌, 허화평, 허삼수, 이학봉, 정호용은 피고인 이희성으로 하여금 5.18. 01:45경 33사단 101연대 1대대 3중대 소속 장교 3명, 사병 95명으로 하여금 엠(M)16 소총 등을 휴대하고 경장갑차 8대와 전차 4대를 지원받아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1 소재 국회의사당을 점거하도록 하고 이를 기화로 같은 해 8.30.까지 국회의원 등 일체의 출입자를 통제하게 하면서 같은 해 5.20. 09:00경 김영삼 신민당 총재의 위 기자회견에 참석하였던 황낙주, 손주항, 오세응 등 국회의원 38명과 의원비서관, 보도진 등 3백여 명이 같은 날 10:15경 국회 정문에 도착, 국회의사당으로 들어오려 하자, 출입 통제지침을 다시 내려 보내 배치 계엄군으로 하여금 위 소총으로 황낙주 의원 등을 밀어내게 하여 국회의원들의 국회 출입을 저지하고 이로써 계엄군의 위력을 행사하여 헌법에 의하여 설치된 국가기관인 국회의원을 강압, 외포케하여 폭동하고, 동시에 작당하여 병기를 휴대하고 반란을 하였다. (8) (저항시민에 대한 강압) (가) 5.18. 01:10경 특전사 7공수여단 소속 장교 94명, 사병 680명이 엠(M)16 소총 등을 휴대하고 전남대학교와 조선대학교를 점거한 상황에서, 같은 날 08:00경부터 전남대학교 학생 30여 명이 휴교령이 내려질 경우 학교 정문앞에 모여 시위를 하기로 한 사전행동지침에 따라 광주 북구 용봉동 300 소재 전남대학교 정문에 모이기 시작하여 5.18. 10:00경에는 2백여 명에 이른 학생들이 공수부대원들의 학내 잔류 학생에 대한 구타행위를 비난하면서 비상계엄 해제하라, 공수부대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치고 돌을 던지는 등 시위를 하자, 위 공수부대원들이 학생들의 강제 해산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이들을 쫓아가 진압봉으로 어깨 외에 머리 등을 무차별 가격하고 체포한 학생들을 난폭하게 연행하여 충돌이 발생하고, 학생들이 5.18. 10:30경 다른 학생 6백여 명과 함께 광주 시내 중심지로 이동 집결하여 계엄 해제, 전두환 퇴진, 김대중 석방 등을 요구하면서 경찰병력과 격렬한 공방을 벌이는 등 시위가 확산되었다. (나) 피고인 전두환, 이희성, 황영시, 정호용은 광주 서구 치평동 98 소재 전투병과교육사령부 등으로부터 위와 같은 시위 상황을 보고받고, 광주에서의 시위가 피고인들의 정국 장악에 상당한 장애가 될 수 있다고 판단하여 이의 확산을 방지하고, 헌법기관인 대통령과 국회 및 행정부를 전복 또는 권능행사를 불가능하게 할 목적으로 계획한 국회해산과, 입법, 사법, 행정을 통제하는 비상기구의 설치 등의 조치를 계속 추진하기 위하여, 광주 시위 상황에 대한 언론보도를 통제하면서 강력한 진압이 예상되는 공수부대의 시내투입과 증파로 이를 조속히 제압하기로 방침을 정하였다. (다) 피고인 이희성은 윤흥정 전투병과교육사령관에게 계엄군을 투입하여 조속히 시위를 진압하라고 독려하고, 위 윤흥정은 다시 정웅 31사단장에게 7공수여단 33, 35대대를 광주시내로 투입, 시위를 진압하도록 지시하여, 전남대학교와 조선대학교에 주둔하고 있던 위 부대원들이 금남로 일대로 출동, 같은 해 5.18. 16:00경부터 시위대를 해산시키면서 인근 점포나 골목, 건물 안까지 시위대를 추적하여 체포하고, 그 과정에서 시위대와 시민들을 구분 없이 진압봉으로 가격하고, 심지어 머리를 가격하거나 체포된 시위대의 상의 등을 벗기고 기합을 주기도 하는 등의 과잉진압을 실시하여 광주시민 405명을 연행함과 동시에 80여 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라) 피고인 황영시는 5.18. 오전 피고인 이희성에게 합수부측에서 광주 지역에 병력을 증원하여 시위를 조속히 진압해 달라는 요청이 있었다고 보고하면서 1개 공수여단의 증파를 건의하고, 피고인 이희성은 피고인 황영시와 김재명 작전참모부장으로부터 병력 증원을 건의받고 김재명에게 1개 공수여단의 증파를 지시하고, 피고인 정호용은 김재명에게 증파 부대로 11공수여단의 지정을 건의하고, 5.18. 15:30경 11공수여단이 주둔하고 있는 동국대학교로 가 최 웅 11공수여단장에게 광주에 가서 임무수행을 잘 하라고 격려하고, 이에 따라 11공수여단 병력 장교 162명, 사병 1,038명은 5.19. 00:50경 엠(M)16 소총 등을 휴대하고 광주에 증파되어 차량에 탑승하고 배속받은 장갑차의 선도로 위력시위를 하고, 한편 전날 부상을 입은 시민 김경철(남, 23세)이 국군광주통합병원으로 후송되었으나 후두부열상 등으로 사망한데다 출처를 알 수 없는 유언비어가 난무하면서 광주시민들의 분노를 자극하여 5.19. 10:00경부터 시민들이 대규모로 가세하면서 공수부대의 과잉진압에 항의하며 돌과 화염병을 던지는 등 격렬한 시위를 전개하자, 이들을 소총 개머리판과 진압봉으로 무차별 가격하고 심지어는 일부 부대원들이 대검을 사용하는 등 강경한 진압작전을 감행하여 그 과정에서 많은 광주 시민들이 부상을 입고, 그 중 김안부(남, 34세)가 전두부열상 등으로 사망하였다. (마) 그 무렵 피고인 전두환은 광주지구 보안부대로부터 상황보고를 받으면서 그 보고 및 조치가 미흡하다고 판단하여 5.19.경 최예섭 보안사 기획조정처장과 홍성률 1군단 보안부대장, 최경조 대령, 중앙정보부 박정희 과장을 광주에 파견하여 상황을 보고받거나 연행자 조사 등을 지원하도록 하는 한편 피고인 이희성에게 시위의 조속한 진압을 요구하고, 피고인 전두환은 현지로부터의 건의에 따라 피고인 이희성에게 시위 진압에 소극적인 윤흥정 전교사령관을 교체하도록 요구하고, 피고인 황영시는 피고인 전두환과 논의하여 피고인 이희성에게 그 후임으로 소준열 육군종합행정학교장을 추천하고, 5.20. 18:00경 그에게 내정사실을 통보해 주면서 사태가 수습되면 중장으로 진급시켜 주겠다고 약속하여 5.21. 16:30경 미리 전교사로 내려가게 한 뒤 5.22. 10:00 전교사령관으로 취임하게 하고, 위 윤흥정을 체신부장관으로 추천하여 입각하게 하였다. (바) 한편, 피고인 정호용은 김재명 작전참모부장에게 추가 증파부대로 3공수여단을 건의하고, 피고인 이희성은 이에 따라 5.20. 다시 엠(M)16 소총 등을 휴대한 3공수여단 병력 장교 255명, 사병 1,137명을 광주에 보내, 시위 진압에 추가 투입하고, 같은 날 오후 들어 공수부대의 과잉 진압에 격분한 택시기사들이 중심이 되어 차량 시위가 전개되면서 트럭, 버스 등의 돌진 공격이 계속되자, 3,7,11공수여단 병력들이 최루탄과 진압봉을 사용하여 진압을 계속하고, 5 20. 24:00경 광주역 앞에서 3공수여단 12,15대대 장교들이 시위대의 차량 공격에 대응 발포하여 많은 광주 시민들이 부상을 입혔다. (사) 피고인 이희성, 황영시, 정호용은, 5.21. 08:00경부터 전남도청 앞에서 수만명의 시위대에 의해 철수를 요구받고 있는 11공수여단 대대장들로부터 필요한 대책을 강구하여 줄 것을 건의받고도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아니함으로써 5.21. 12:00경 전남대학교 앞에서 3공수여단 병력이 차량으로 공격을 시도하는 시위대에게 발포하여 성명불상 운전사 등이 총상으로 사망하고, 5.21. 13:00경 전남도청 앞에서 11공수여단 병력이 장갑차와 버스를 이용하여 돌진해 오는 시위대에게 발포를 시작하고, 이어 인근 건물 옥상에 배치된 병력들이 시위대를 향하여 집단적으로 발포하여 박민환(남, 26세) 등이 총상으로 사망하는 등 상당수의 희생자가 발생하고, 이에 따라 시위대들이 광주를 비롯한 인근 지역의 경찰서, 지, 파출소 등에서 총기와 실탄을 확보하여 무장 저항을 시작하자, 공수부대원들이 전남도청 일대에서 이들과 총격전을 벌이는 등 폭동하였다. (9) (무장시위대의 진압) (가) 피고인 전두환, 황영시, 이희성, 주영복, 정호용은 광주에서의 시위와 시민들의 무장 상황을 보고받고 피고인들의 시국수습방안에 따라 정국을 장악하기 위해서는 강경진압이 불가피하다고 판단하여, 광주에서 피고인들의 퇴진과 민주화를 요구하며 저항하는 시위대를 무장 폭도로 규정하고 계엄군으로 하여금 광주 외곽을 봉쇄하고 사상자가 발생하더라도 조속히 진압하기로 공모하고, 피고인 이희성, 같은 주영복은 5.21. 16:35경 국방부장관실에서 피고인 주영복과 공소외 진종채 2군사령관, 정도영 보안사 보안처장, 류병현 합참의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회의를 열어 계엄군을 광주 외곽으로 전환 재배치하여 외곽을 봉쇄하고, 1개 연대를 추가 투입하며, '폭도 소탕작전'을 5.23. 이후에 의명 실시하고, 피고인 황영시는 5.21. 16:00경 이구호 기갑학교장에게 기갑학교 전차 1개 대대(32대)를 동원하여 시위대를 진압할 것을 지시한 데 이어, 5.23. 12:30경 김기석 전교사 부사령관에게 무장헬기 및 전차를 동원하여 시위대를 조속히 진압할 것을 지시하였고, 피고인 이희성은 피고인 황영시가 전해 준 자위권 보유를 천명하는 경고문을 류병현 합참의장등과 상의하여 문안을 수정한 뒤 5.21. 19:30 육본 기밀실에서 방송을 통하여 이를 발표하고, 이어 같은 날 20:30경 전교사령관을 통해 3개 공수여단과 같은 날 오전에 추가로 투입된 20사단 등에 자위권 행사를 지시하고, 계엄 훈령 제11호로 각 예하부대에 자위권 발동 지시를 하달하여 이에 따라 그 무렵 광주 외곽으로 재배치되고 있는 계엄군들에게 자위권 발동이 고지되고 실탄이 분배되었다. (나) 5.21. 22:10경 광주 서구 백운동 소재 효천역 부근에 배치되어 광주-목포간 도로를 차단하고 있던 20사단 61연대 2대대가 짚차의 선도하에 트럭, 버스 등 차량 6, 7대에 탑승하고 목포 쪽에서 광주쪽으로 이동하던 시위대에 총격을 가하여 시위대 버스 2대를 전복시키고, 5.22. 00:15경 61연대 1대대 1중대와 연대 수색중대 병력이 증원되어 다시 같은 날 01:00경 위 61연대 병력이 광주 쪽에서 버스 5, 6대에 탑승하고 온 시위대에 총격을 가하여 그 과정에서 별지 (2) 피해자 및 피해상황일람표 순번 제1항 기재와 같이 강복원을 사망하게 하였다. (다) 5.22. 08:30경 효천역 부근에서 바리케이드를 치고 매복 중이던 20사단 61연대 2대대 병력이 그 곳을 빠져나가려던 승용차에 총격을 가하여 별지 (2) 피해자 및 피해상황일람표 순번 제3항 기재와 같이 탑승자 중 왕태경을 사망하게 하였다. (라) 5.22. 16:00경 20사단 62연대 2대대는 같은 날 17:00까지 광주 서구 화정동 소재 국군광주통합병원을 확보하라는 지시에 따라 장갑차 3대를 선두로 하여 통합병원 쪽으로 이동하던 중 부근 민가 지역에서 시위대에 총격을 가하여 그 과정에서 별지 (2) 피해자 및 피해상황일람표 순번 제4항 기재와 같이 김영선 등을 각 사망하게 하였다. (마) 해남에 주둔하고 있던 31사단 93연대 2대대는 부근 우슬재와 복평리에 매복 중 5.23. 05:30경과 같은 날 10:00경 두 차례에 걸쳐 시위대에 총격을 가하여 그 과정에서 별지 (2) 피해자 및 피해상황일람표 순번 제5항 기재와 같이 박영철 등을 각 사망하게 하였다. (바) 5.23. 09:00경 11공수여단 62대대가 매복하고 있는 광주 동구 주남마을 부근 광주-화순간 국도를 광주방면에서 화순방향으로 진행하던 미니버스가 정지 신호를 무시하고 질주하자, 위 부대원들이 집중 사격하여 별지 (2) 피해자 및 피해상황일람표 순번 제6항 기재와 같이 버스에 타고 있던 박현숙 등을 각 사망하게 하였다. (사) 5.24. 01:30 11공수여단에 현 주둔지인 주남마을에서 광주 송정리 비행장으로 이동하라는 전교사의 지시가 하달되자, 11공수여단이 같은 날 13:30경 주남마을을 출발하여 육로로 이동 중, 그 선두가 광주-목포간 도로에 접한 광주 서구 진월동 소재 효덕초등학교 삼거리 부근에 이르렀을 무렵 트럭을 타고 그 곳에 와 있던 무장시위대 수명을 발견하고 총격을 가하고, 뒤따르던 병력들도 주변을 향해 일제히 총격을 가하여 별지 (2) 피해자 및 피해상황일람표 순번 제7항 기재와 같이 효덕초등학교 뒤 놀이터에서 놀던 전재수, 부근 원제마을 저수지에서 놀던 방광범을 각 사망하게 하였다. (아) 5.24. 13:55경 11공수여단의 선두 63대대가 효천역 부근에 이르렀을 무렵 같은 날 오전에 20사단 61연대와 임무를 교대하여 부근에 매복하고 있던 전교사 보병학교 교도대 병력이 위 63대대 병력을 무장시위대로 오인하여 선두 장갑차와 후속 트럭에 90mm 무반동총 4발을 명중시키는 등 집중 사격을 가하여 공수부대원 9명이 사망하자, 63대대 병력은 부근 일대를 수색하여 무장시위대를 체포하면서 시위대로 오인받고 체포된 마을 주민들에게 총격을 가하여 별지 (2) 피해자 및 피해상황일람표 순번 제8항 기재와 같이 권근립 등을 각 사망하게 하였다. (자) 피고인 전두환, 황영시, 이희성, 주영복, 정호용은, 전남도청을 근거지로 저항하고 있는 시민과 학생들의 시위를 조속히 제압하지 아니하면 내란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는 급박한 상황에 있었으므로 이를 조속히 진압하여 시위가 다른 곳으로 확산되는 것을 막으려는 의도하에, 피고인 이희성은 5.23. 09:00부터 육군참모총장실에서 진종채 2군사령관으로부터 외곽으로 물러나 있던 병력의 광주 재진입작전 계획을 보고받는 자리에서 피고인 황영시, 계엄사 참모장 나동원 및 계엄사 참모들과 광주재진입작전을 논의하였고, 곧이어 피고인 정호용 등이 합석하여 광주재진입작전의 구체적 실행방법을 의논하고 현지 지휘관의 가용시간 등을 고려하여 같은 달 25. 02:00 이후에 의명 개시하도록 결정하고, 피고인 전두환은 같은 달 23. 오후 피고인 정호용을 통하여 소준열 전교사령관에게 친필 메모를 보내 공수부대의 사기를 고려해 주고 희생을 무릅쓰고라도 사태를 조기에 수습해 줄 것을 당부하고, 그 무렵 피고인 황영시도 소준열에게 전화를 하여 희생이 따르더라도 사태를 조기에 수습해 줄 것을 요구하고, 이에 소준열이 김순현 전교사 전투발전부장에게 광주 재진입작전 계획인 '상무충정계획'을 마련하도록 지시하였다. 한편, 피고인 이희성은 5.25. 04:00경 김재명 작전참모부장에게 광주 재진입작전 계획을 수립하라고 지시하여 육본 작전지침인 '상무충정작전'을 만들어 같은 날 12:15 국방부 내 육군회관에서 피고인 전두환, 주영복, 이희성, 황영시, 노태우(이 부분은 피고인 노태우에 대하여는 기소되지 아니함) 및 공소외 류병현 등이 참석한 가운데 위 상무충정작전을 5.27. 00:01 이후 실시하기로 최종 결정하였다. 피고인 전두환, 황영시, 이희성, 주영복, 정호용은 상무충정작전은 시위대의 무장상태와 작전의 목표에 비추어 시위대에 대한 사격을 전제하지 않고는 수행할 수 없는 것이고 이를 실시하여 전남도청을 다시 장악하려면 무장을 하고 있는 시위대를 제압하여야 하고 그 과정에서 이에 저항하는 시위대와의 교전이 불가피하여 필연적으로 사상자가 생긴다는 사정을 잘 알면서 그 작전의 범위 내에서는 발포와 살상을 용인하는 의사로 재진입작전의 실시를 강행하기로 하고 이를 지시하였다. 피고인 황영시는 5.25. 오후 김재명 작전참모부장과 함께 광주에 내려 가 소준열 전교사령관에게 이를 직접 전달하였다. 공소외 소준열은 피고인 정호용에게 각 공수여단의 훈련상황에 대하여 질문을 하여 3공수여단이 가장 훈련이 잘 되어 있다는 대답을 듣고 도청진입임무를 3공수여단의 특공조에게 부여하는 등 광주재진입작전의 공수여단별 임무를 결정한 다음 5.26. 10:30 전교사령관실에서 20,31사단장, 3, 7, 11공수여단장, 전교사 예하 보병학교 교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진압작전 지휘관회의를 개최하여, 각 공수여단별로 특공조를 편성하여 전남도청 등 목표지점을 점령하여 20사단에 인계하기로 결정하면서 작전시각은 보안상 추후 통보하기로 한 후, 같은 날 16:00경 광주비행장을 방문하여 3, 7, 11공수여단장에게 5.27. 00:01부로 작전을 개시할 것을 지시하였다. 피고인 정호용은 5.26. 오전 피고인 전두환을 방문하여 재진입작전에 필요한 가발을 지원받고, 같은 날 14:00경 피고인 이희성을 방문하여 충격용 수류탄과 항공사진을 지원받고 같은 날 21:00경 이들 장비를 가지고 광주비행장에 도착, 예하 부대원을 격려함으로써 재진입작전 준비를 마쳤다. 5.26. 23:00경부터 공수여단 특공조에 의한 침투작전이 실시되어 3공수여단 특공조인 11대대 1지역대 장교 13명, 사병 66명은 5.27. 04:00경 전남도청에 도착, 후문을 넘어 최후 항쟁을 결의하고 남아 있는 무장 시위대에 무차별 총격을 가하면서 진입하여 같은 날 05:21 도청을 점령하고, 7공수여단 특공조인 33대대 8, 9지역대 6개 중대 장교 20명, 사병 181명은 5.27. 05:06 광주공원을 점령하고, 11공수여단 특공조인 61대대 4중대 장교 4명, 사병 33명은 같은 날 04:46 제1목표인 전일빌딩과 관광호텔을 저항 없이 점령하고, 이어 같은 날 06:20 여자기독교청년회(YWCA) 건물을 총격전 끝에 점령하여 모두 295명의 시위대를 체포하면서 이날 광주 재진입작전 과정에서 특공조 부대원들로 하여금 시위대에 대하여 총격 등을 가하게 하여 국헌을 문란할 목적으로 별지 (2) 피해자 및 피해상황일람표 순번 제9항 기재와 같이 이정연 등을 각 살해하게 하고, 전국적인 비상계엄하에서 군이 발휘할 수 있는 무력을, 피고인들의 퇴진과 민주화를 요구하며 피고인들의 국정 장악에 반대하여 저항하는 시민들을 상대로, 직접 행사하여 헌법제정권력으로서의 국민들의 결집을 강압, 외포케하고 나아가 헌법에 의하여 설치된 국가가관인 대통령과 국무위원 등을 강압, 외포케하여 폭동하였다. (10) (공직자숙정) 피고인 전두환, 허삼수는 국보위 사회정화분과위원회를 통해 '공직자 숙정계획'을 입안하고 1980.6.15.경부터 1차로 2급 이상 고위공직자에 대한 숙정에 착수하여 각 부처의 자료를 취합, 숙정대상자를 선정하고 이를 4등급으로 분류한 후 사회정화분과위원회 전체회의에서 그 등급을 최종 확정하여 가장 중한 에이(A)급 15명은 합수부 조사 후 처리하기로 하고, 비(B)급 164명은 의원면직 형식으로 처리하기로 결정하여 1980.7.2.경 그 명단을 각 부처에 통보하면서 해당자를 전원 의원사직하도록 하고 불응자나 조사 희망자는 7.14.부터 7.20.까지 사회정화분과위원회에 이의를 제기하도록 지시하여 이를 해당자에게 통보, 사직하게 하고, 입법부와 사법부에 대해서는 각 11명의 숙정대상자 명단을 통보하고, 1980.7.초순경 하위직 공무원 숙정을 위해 각 부처에 각 기관장 책임하에 공무원 부적격자를 선정하여 같은 달 말까지 숙정하되 고위 공직자 조치결과에 준하여 처리하라고 지시하고, 같은 방법으로 7.7.부터 정부산하단체 및 국영기업체 임직원에 대한 숙정도 진행하여 7.31.까지 장관 1명, 차관 6명, 도지사 3명을 포함한 2급 이상 공무원 243명을 비롯하여 입법부 11명, 사법부 61명, 행정부 5,418명 등 공직자 5,490명과 국영기업체, 금융기관 및 정부산하단체 등 127개 기관 임직원 3,111명 등 총 8,601명으로 하여금 일부 당사자들의 의사에 반하여 공직 또는 관련직을 사임하도록 강요하고, 이들 중 일부가 이에 불복하여 소청을 제기하자, 1980.9.중순에는 각 부처에 공문을 보내 1980.9.16. 국무회의에서 정화대상자로 사퇴한 자 중 소청제기자에 대하여는 9.25.까지 전원 고발, 구속하기로 결정하였으니 소청 취하를 강력히 추진하고 취하 실적이 부진한 기관장은 문책할 것임을 통보하여 협박하는 방법으로 헌법에 의하여 설치된 국가가관인 대통령, 국회의원, 국무위원 등을 강압, 외포케하고 직업선택의 자유와 공무원의 신분을 보장하는 헌법 및 국가공무원법, 지방공무원법 등의 관계규정의 기능을 사실상 소멸시켜 폭동하였다. (11) (언론인 해직) 피고인 전두환은 1980.6.경 허문도 국보위 문교공보분과위원 등이 언론사 통·폐합방안, 언론인 정화계획, 언론관계법 제정 등을 내용으로 작성한 '언론계의 정화, 정비계획'을 보고받고 그 전면 시행을 보류한 상태에서 문교공보분과위원회를 통하여 '언론계 자체정화 계획'을 수립하게 하여 1980.7.24.경 이를 이광표 문화공보부장관에게 전달되도록 하고, 7.30. 신문협회와 방송협회가 '언론자율정화 및 언론인 자질향상에 관한 결의문'을 발표하게 하여 자율정화 형식을 취한 후, 1980.7.말 경 이상재 언론대책반장이 작성한 보도검열 비협조자 등 언론계 해직대상자의 명단을 이광표 장관을 통해 해당 언론사에 통보, 각 언론사에서 대상자들의 사직을 종용하여 933명이 1980.10.말까지 소속 언론사로부터 해직되게 하는 등 계엄군의 무력을 배경으로 언론인 등을 협박하는 방법으로 언론의 자유와 직업선택의 자유를 보장하는 헌법규정의 기능을 사실상 소멸시켜 폭동하였다. (12) (정계요인에 대한 기소·재산몰수·공직사퇴강요) (가) 피고인 이학봉은 피고인 전두환의 지시에 따라 1980.5.17.부터 김대중 국민연합 공동의장 등 37명을 소요배후조종 혐의로 체포한 후 사법경찰관리의 구속기간인 10일을 초과하여 53일동안 구속하고, 같은 해 7.9.에야 계엄사령관인 피고인 이희성으로부터 구속영장을 발부받은 다음, 5.12. 그 중 김대중 등 24명은 내란음모사건 관련자로 육본 계엄보통군법회의 검찰부에, 나머지 계엄법위반사범 13명은 수경사 계엄보통군법회의 검찰부에 각 송치하여, 군검찰부가 1980.8.14. 이들 전원을 구속 기소하고, (나) 1980.7.2. 계엄 확대와 동시에 권력형부정축재자로 체포한 김종필 공화당총재 등 연행자 9명을 연행 46일만에 석방하면서 모두 853억원의 부정축재 재산을 국가에 헌납하고 모든 공직에서 사퇴하게 하고, (다) 1980.7.17.경 김용태 등 공화당 간부 6명, 정해영 등 신민당 간부 8명, 구자춘 전 내무부장관 등 고위 관료 출신 3명 등 17명을 정치적 비리와 부패행위로 국가기강을 문란케 하였다는 불명확한 범죄혐의로 구속영장 없이 체포하고, 8.19. 김용태 등으로부터 총 288억원의 부정축재 재산을 헌납받는 동시에 공직에서 사퇴하게 하고, (라) 1980.8.13. 김영삼 신민당총재로 하여금 총재직을 사퇴함과 아울러 정계에서 은퇴한다고 발표하게 함으로써 계엄군의 무력을 배경으로 하여 집권에 장애가 될 수 있는 정치인과 재야 세력 등을 협박하는 방법으로 신체의 자유, 재산권의 보호, 정치활동의 자유를 보장하는 헌법규정의 기능을 사실상 소멸시켜 폭동하였다. (13) (최규하 대통령 사임과 전두환의 대통령 취임) 피고인들은 전국적인 비상계엄하에서 군이 발휘할 수 있는 위력을 직접 행사 또는 과시하고, 국보위 상임위원회를 통하여 국정을 장악하여 대통령과 행정각부를 강압함으로써 대통령으로서의 권한행사에 한계를 느낀 최규하 대통령으로 하여금 1980.8.16. 끝내 대통령직을 사임하게 하고, 피고인 전두환은 8.22. 전역하고, 8.27. 제7차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 후보로 단독 출마하여 재적 대의원 2,540명 중 2,525명이 투표한 결과 2,524표를 얻어 제11대 대통령에 당선, 같은 해 9.1.에 대통령에 취임하여 폭동하였다. (14) (언론통·폐합) 1980.10.초순경 보안사의 이상재 언론대책반장이 허문도 정무제1비서관의 검토자료를 토대로 자율결의 형식에 의한 언론통·폐합을 내용으로 하는 '언론 건전육성 종합방안 보고서'를 작성하자, 피고인 전두환, 노태우, 허화평, 허삼수는 10.중순경 청와대 대통령 집무실에서 김경원 비서실장, 이광표 문화공보부장관, 우병규 정무제1수석비서관, 이웅희 공보수석비서관, 허문도 정무제1비서관이 참석한 가운데 권정달로부터 이를 보고받았으나 김경원 비서실장, 이웅희 공보수석비서관 등의 반대로 그 추진을 보류하였다가, 그 무렵 피고인 허화평, 허삼수는 다시 허문도로부터 언론통·폐합의 필요성에 대해 수차 설명을 듣고 이에 동조하고, 피고인 전두환은 그 실행을 결심하여 허문도로 하여금 '언론창달계획'이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만들게 한 다음 1980.11.12. 이광표 장관이 문화공보부의 결재안으로 가져오자, 이를 결재하여 피고인 노태우에게 전달하게 하고, 그 집행을 의뢰받은 피고인 노태우는 11.12. 16:00경 한용원 정보처장과 김충우 대공처장에게 언론사 사주들을 불러 신속히 처리하되 그 집행에 차질이 없도록 하라고 지시하여, 같은 날 18:00경 중앙 언론사의 사주들은 보안사 대공처가, 지방 언론사의 사주들은 정보처 주관하에 지방의 각 지역보안부대가 소환하여 통·폐합조치에 이의가 없다는 내용의 각서를 받고, 이에 따라 지방지를 1도 1사 원칙에 따라 10개로 통합하고, 공·민영 방송구조를 공영방송 체제로 개편하는 등 신문 28개, 방송 29개, 통신 7개 등 64개 매체를 신문 14개, 방송 3개, 통신 1개 등 18개 매체로 통·폐합하는 등 일방적으로 언론기관 통·폐합방안을 마련한 후 군정보수사기관을 동원하여 협박함으로써 이를 실행하고, 이로써 영업의 자유와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는 헌법규정의 기능을 사실상 소멸시켜 폭동하였다. (15) (정치활동규제와 대법원판사 사직강요) (가) 피고인 전두환은 현홍주 중앙정보부 정책정보국장, 박배근 치안본부 정보제2과장, 한용원 보안사 정보처장으로 하여금 정치인별 신상카드를 가지고 정치활동규제 대상을 선정하게 한 다음 이를 결재하여 사회정화위원회에 그 명단을 전달, 1980.11.12. 정치활동에 대한 규제조치를 발표하게 하고, 이를 실행함으로써 정치활동의 자유를 보장하는 헌법규정의 기능을 사실상 소멸시켜 폭동하고, (나) 피고인 이학봉은 1980.8.14.로 예정된 김대중 등에 대한 내란음모사건의 재판을 앞두고, 1980.5.20. 대법원에서 상고기각으로 확정된 박정희 대통령 피살사건의 피고인 김재규 등에 대한 판결에서 내란목적살인죄를 인정할 수 없다는 취지의 소수의견을 낸 양병호 대법원판사를 1980.8.3.경 그의 집에서 서울 용산구 서빙고동 소재 보안사 서빙고분실로 연행하여 3일 동안 소수의견을 내게 된 경위 등을 조사하면서 사표를 강요하여 그로 하여금 사표를 제출하게 하여, 8.9. 위 판결에서 함께 소수의견을 낸 민문기, 임항준, 김윤행, 서윤홍 대법원판사와 함께 일괄 사직하게 하고, 이로써 헌법에 의하여 설치된 국가가관인 대법원판사를 강압, 외포케하여 폭동하고, (다) 계엄하에서 김대중내란음모사건 등에 대한 재판이 1981.1.23. 대법원의 상고기각으로 사형이 확정된 다음날인 1.24. 24:00를 기해 비상계엄을 해제하였다. 라. 피고인들의 역할 위 일련의 행위들 중 피고인 전두환은 내란수괴 및 반란수괴로서, 피고인 노태우, 유학성, 황영시, 차규헌, 허화평, 허삼수, 이학봉, 정호용은 내란 및 반란의 모의에, 피고인 이희성, 주영복은 내란의 모의에 각 참여한 것으로 인정된다. |
==# 헌법재판소 결정문으로 바라본 군사반란 당시 상황 #==
헌법재판소 1995. 12. 15. 선고 95헌마221·233·297(병합) 전원재판부〔취하〕 [불기소처분취소]
(1) 비상계엄 전국확대 전의 시국상황 (가) 정치·사회·학원 등의 동향 1979.10.26. 박○희 대통령의 사망으로 당시 헌법규정에 따라 대통령의 권한을 대행하게 된 청구외 최○하 국무총리는 10.27. 04:00를 기하여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 일원에 비상계엄을 선포하였으나, 그 후 대통령긴급조치 제9호를 해제하는 한편 청구외 문○환, 함○웅 등 재야인사들을 석방하고, 청구외 김○중에 대한 가택연금을 해제하는 등 민주회복을 위한 일련의 조치를 취하였다. 그런데, 피의자 전○환이 군내의 추종세력을 규합하여 1979.12.12. 군사반란을 일으켜서 청구외 정□화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을 체포하고 군내 반대세력을 제거한 뒤, 그의 추종세력을 군요직에 중용시켜 군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1980.4.14.에는 그 스스로 중앙정보부장서리직까지 겸임하자, 국민들 사이에는 민주화와 정치발전에 대한 비관론이 더욱 우세해졌다. 1980.5.1. 서울대 총학생회는 정치권 일각의 폭력시위 자제촉구에도 불구하고 피의자 전○환을 중심으로 하는 신군부의 정치개입이 민주화에 가장 큰 걸림돌이라는 이유로 정치투쟁을 전개하기로 결정하였고, 이에 따라 5.13. 서울시내 대학생 2,500여명이 세종로 일대에서 야간시위를 벌인데 이어, 5.14. 서울지역 27개 대학 70,000여명이 서울 중심가에서 가두시위를 하였고, 5.15. 서울역앞 광장에서 대학생 100,000여명이 시위하던 중 경찰가스차 3대가 소훼되고 버스돌진으로 전경 1명이 사망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그러자 1980.5.15. 자정 서울시내 대학교 총학생회장들은 가두시위를 중지하고 정상수업에 들어갈 것을 결의하여, 학생시위는 일단 소강상태에 들어갔으나, 5.16. 고소외 김○삼, 김○중이 시국수습대책 공동발표를 통해 계엄의 해제, 정치일정의 발표 등을 요구하면서 5.19.까지 정부의 답변이 없으면 5.22.부터 민주화투쟁을 전개할 것을 발표하였고, 서울시내 총학생회장단도 피의자 전○환의 퇴진 등을 요구하면서 이에 응하지 않으면 5.22.부터 가두시위를 재개할 것을 결의하였다. (나) 보안사령부(이하 “보안사”라 한다)의 동향 피의자 전○환이 합동수사본부장에 취임하고, 보안사 처장들이 합동수사본부의 각 국장에 임명됨으로써 보안사는 중앙정보부 경찰 등 모든 수사·정보기관을 조정, 통제하는 핵심기구로 등장하였다. 피의자 전○환은 대민사찰업무를 담당하는 보안사 정보처를 복원하고, 청구외 이○재 준위를 반장으로 언론대책반을 편성하여 보도검열업무를 감독하면서 “케이(K)-공작계획”이라는 언론공작계획을 세워 언론계 중진들을 포섭하는 한편,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함과 동시에 비상기구를 설치하고 정치활동을 규제할 필요가 있다는 보안사 정보처의 정세분석반의 보고에 따라 청구외 이○봉 보안사 대공처장 겸 합동수사단장에게 소요 배후조종혐의자의 검거와 부정축재혐의자의 검거를 지시하였고, 이에 따라 청구외 이○봉은 1980.5.16. 국무회의에서 계엄확대 결의가 되기도 전에 전국 보안부대 대공과장회의를 소집하여 5.18. 00:00부로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되니 학생시위 주동자와 배후조종자를 일제 검거하라는 지시를 하달하였다. (다) 계엄확대 이전의 군(軍) 동향 1980.2.18. 피의자 이○성 계엄사령관이 폭동진압훈련인 충정훈련을 1/4분기 이전에 완료하도록 지시하자, 피의자 노○우 수경사령관 등은 1차 충정회의를 개최하여 학생시위를 주도하는 세력을 이상주의적 맹목저항세력으로 규정하면서, 문제학생과 교수를 사회로부터 격리하여야 하고, 군투입을 요하는 사태가 발생하는 경우에는 강경한 응징조치를 취하여야 한다고 결정하였다. 1980.5.13. 대학생들이 서울시내에서 가두시위를 벌이자, 육군본부는 5.14. 소요진압본부를 설치하는 한편 전군에 소요진압부대 투입준비를 지시하고, 국립묘지, 청와대, 중앙청, 광화문 등에 군병력을 배치하였다. (2) 피의자 전○환의 정국장악 (가) 비상계엄 전국확대의 전격추진 피의자 전○환은 1980.5.17. 10:00경 청구외 최○하 대통령에게 비상계엄의 전국확대 등 시국수습방안과 소요 배후조종자 및 권력형 부정축재 혐의자의 체포조사계획을 보고하였고, 당시 국방부장관인 피의자 주○복은 피의자 전○환의 요청에 따라, 5.17. 11:00 전군주요지휘관회의를 개최하여 비상계엄의 전국확대를 대통령에게 건의하자는 의견을 모은 다음 백지에 참석자들의 연서명을 받고, 16:20경 청구외 신○학 국무총리에게 비상계엄의 전국확대, 비상기구의 설치, 국회해산 등 시국수습방안을 보고하였다. 청구외 최○하 대통령이 1980.5.17. 19:00경 피의자 전○환, 이○성, 주○복 및 청구외 신○확 등의 보고를 받고, 비상계엄의 전국확대방안을 논의하기 위한 국무회의의 소집을 지시하자, 19:35경 중앙청에서 그 외곽에는 수도경비사령부 30단 소속 장교 18명, 사병 324명이 배치되고, 현관과 국무회의장에 이르는 2층 계단과 복도 등 내부에는 집총한 수도경비사령부 헌병단 소속 장교 17명, 사병 236명이 약 1m 간격으로 배치된 가운에 국무회의가 개최되었고, 그 자리에서 찬반토론 없이 단 8분만에 계엄확대 선포안이 의결되었으며, 그 직후 청구외 최○하 대통령의 재가를 거쳐 정부대변인인 문공부장관이 5.18. 00:00를 기하여 비상계엄 선포지역을 전국 일원으로 변경한다고 발표하였다. 1980.5.18. 01:00경 피의자 이○성 계엄사령관은 모든 정치활동과 정치적 발언을 금지하고, 정치목적의 옥내외 집회, 시위를 금지하는 계엄포고 제10호를 발령하였으며, 육군본부는 02:00경 전국 92개 주요대학과 국회를 포함한 136개 주요 보안목표에 계엄군 25,000여명을 배치하였다. (나) 정치인과 재야인사의 체포, 연금 피의자 전○환은 1980.5. 초경 학원소유사태를 근절한다는 명목으로 피의자 이○봉 합동수사단장을 시켜 정치인 및 재야인사의 대학생 대표들 중 검거하여야 할 대상자를 선정하게 한 다음, 5.17. 10:00경 청구외 최○하 대통령에게 청구외 김○중, 김○길, 김○필, 이○락, 박○규, 김○열 등 정치인에 대한 체포계획을 보고하는 한편, 피의자 이○봉으로 하여금 검거대상자로 선정된 정치인 등을 일제히 검거하도록 지시하였다. 그에 따른 이른바 예비검속결과 총 2,699명이 검거되었는데, 그 중 2,144명은 훈방되고 404명에 대하여는 공소가 제기되었으며, 청구외 김○중, 문○환, 김○현, 예○호, 이○찬, 한○헌, 한○상, 이○범 등 24명은 이른바 김○중 등 내란음모사건 관련자로 육군본부 계엄보통군법회의에 회부되었다. (다) 국회의 점거·봉쇄 신민당과 공화당이 임시국회의 소집을 합의함에 따라 1980.5.17. 청구외 민○식 국회의장 대리는 제104회 임시국회가 5.20. 10:00에 개최됨을 공고하였다. 그러나 비상계엄의 전국확대에 따라 1980.5.18. 01:45 장갑차, 전차 등을 앞세운 수도군단 예하 33사단 101연대 1대대 병력들이 국회의사당에 진주하였고, 그 대대장인 청구외 이○신이 상부의 통제지침을 이유로 위 임시국회에 참석하기 위하여 국회의사당으로 들어가려 하는 국회의원들의 국회출입을 강제로 저지하였던 까닭에 임시국회는 자동폐회되고 말았다. (3) 광주시위의 진압 (가) 계엄확대 이전의 상황 1980.5.14. 광주지역 7개 대학의 학생들은 전남도청 앞에서 가두시위를 벌였고, 군은 피의자 이○성 계엄사령관의 소요사태 진압부대 투입준비명령에 따라 5.14. 19:00 광주내의 여러 방송국에 병력을 배치하는 한편, 5.15.에는 전남대학교와 조선대학교의 교정에 천막 24개동을 가설하는 등 시위진압부대를 투입하였다. 광주시내 9개 대학생 30,000여명은 5.15.과 5.16. 다시 가두시위를 벌였고, 5·16 화형식을 끝으로 해산하였다. (나) 계엄확대와 계엄군의 배치 2군사령부는 1980.5.17. 10:40 광주 소재 8개 전문대학에 31사단병력을 투입하도록 지시하였고, 국무회의에서 19:35계엄확대 선포안이 의결된 직후인 19:40경 전투교육사령부에 대하여 5.18. 00:01 이전까지 시위자를 체포하고, 04:00 이전까지 대학을 점령할 것을 지시하였으며 5.17. 20:00경 7공수여단에 대하여 전남대학교와 조선대학교를 5.18. 02:00까지 점령하고 04:01까지 소요주모자를 체포할 것을 지시하였다. 그리하여 계엄군은 전라남도내 16개 대학 및 중요시설을 점령하고, 대학을 수색하여 전남대학교와 조선대학교에서만 100여명의 학생들을 체포하였다. 이와 동시에 2군사령부는 1980.5.18. 광주시내 직장예비군이 보유하고 있던 무기와 탄약을 회수하는 한편, 31사단의 무기고 접근자 발포승인 건의에 대하여 군인복무규율에 따라 지휘관이 재량실시하도록 지시하였다. (다) 5월 18일 상황 전남대학교를 점령한 계엄군에 의해 등교를 저지당한 대학생들이 돌을 던지며 시위를 벌이자, 공수부대원들은 진압봉으로 도주하는 학생들의 어깨, 머리 등을 가격하고, 체포한 학생들을 난폭하게 연행하여 일부 학생들이 부상당했다. 10:30경 전남대학교 후문쪽에서는 공수부대원들이 단지 야유를 보낸다는 이유만으로 시내버스에서 내리거나 타고 있는 학생들을 진압봉으로 가격하고, 연행하여 꿇어 앉히는 등 강경진압을 하였다. 등교를 저지당한 대학생들이 광주시내로 진출하여 전○환 퇴진과 김○중 석방을 요구하며 시위하면서 수천명으로 불어난 시위대와 경찰 사이에 격렬한 공방이 벌어졌고, 그 와중에 전투경찰이 퇴각하면서 방치한 페퍼포그차가 소훼되기도 하였다. 피의자 이○성 계엄사령관은 09:00경 공수여단의 증파를 지시하여, 11공수여단이 광주로 이동하게 되었다. 그는 또한 14:00경 청구외 윤○정 전투교육사령관에게 군병력을 투입하여 시위를 진압할 것을 명령하였고, 청구외 정○ 31사단장은 14:05경 전남도청, 금남로 지역에 군병력을 투입할 것을 지시하였다. 시위대와 대치하고 있던 공수부대원들은 시위진압명령에 따라, 엠(M)16 소총은 등뒤로 멘 체 손에 진압봉을 들고 시위대와 시민들을 때리고, 인근 점포나 골목, 건물 안까지 추적하여 시위대를 체포하였으며, 도주를 방지한다는 명목으로 체포된 사람들의 상·하의, 혁대를 벗기거나 머리를 땅에 처박게 하였다. 이날 모두 273명이 체포되었는데, 피해자 김○철이 후두부열상 등으로 사망하였고, 피해자 이○남 등 광주시민 수십명이 부상을 입었다. (라) 5월 19일 상황 공수부대의 강경진압에 분노한 시민, 학생들은 아침 일찍부터 시내 곳곳에 모이기 시작하였고, 상가는 대부분 철시상태로 들어갔으며, 관공서나 기업체, 초·중·고등학교에서도 정상업무나 수업이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공수부대원들은 장갑차로 무력시위를 벌였으나, 10:00경부터 충장로, 금남로 등에서 시민들은 화염병, 돌, 보도블럭 등을 던지며 격렬하게 저항하였다. 공수부대원들은 다방, 여관, 민가 등을 수색하고, 검거한 시위대를 진압봉으로 때리거나 군화를 신은 발로 걷어찼으며, 피검거자의 도주를 막는다는 이유로 옷을 벗겨 300여명을 연행하였다. 12:00경 시위학생들이 쫓겨 여자기독교청년회(YWCA) 건물내로 들어가자, 공수부대원들은 직원이 내린 셔터를 들어올리고 안으로 들어가 진압봉으로 때리면서 학생들은 물론 신용협동조합 직원들까지 끌어내 도로에 무릎을 꿇리고 머리를 땅에 처박게 하였고, 건너편 무등고시학원에서 이를 목격한 학원생들이 때리지 말라고 고함을 치자, 공수부대원들은 학원으로 몰려가 학원생들을 진압봉과 소총 개머리판으로 가격하고 밖으로 끌어내 트럭에 실어 연행하였다. 15:27경 문화방송 앞에 집결한 시위대 3,000여명은 광주의 상황을 보도하지 않는 방송태도에 격분하여, 방송국 건물에 돌을 던지고, 취재차량 1대를 불태웠다. 15:55경 전남대학교에 주둔하고 있던 7공수여단은 착검한 상태에서 차량을 타고 무력시위를 벌였다. 16:00경 광주일고, 대동고, 중앙여고 학생들이 수업을 거부하고 교내시위를 벌였고, 16:40경부터 광주시민들의 시위참가를 호소하는 가두방송이 시작되었으며, 북동사무소 앞에서는 공수부대원 300여명이 가택수색을 하면서 학생들을 진압봉으로 때리고 체포하였다. 17:30경 공수부대원들이 광주일고 앞 광주공과기술학원에서 밖을 내다보던 학원생과 사무원 등 40여명을 무차별 체포, 연행하였으며, 체포된 사람들을 팬티만 입힌 채 기합을 주고, 장갑차를 앞세워 진압하는 등 강경진압을 계속하였다. 시민들도 이에 격렬하게 저항하여 누문동, 역전, 임동, 양도파출소 등 4개 파출소가 시위대의 공격으로 파괴, 점거되거나 방화되었고, 육군본부는 23:08경 3공수여단의 광주투입명령을 하달하였다. 이날의 시위진압과정에서 피해자 김안부가 전두부열상으로 사망하였고, 학생과 시민 수십명이 부상을 입었는데, 부상자 중 피해자 최○기 등 5명은 자상(刺傷)을 입었다. (마) 5월 20일 상황 07:00 3공수여단이 광주에 도착함으로써 광주지역에는 총 3개 공수여단 10개 대대가 투입되었다. 전남도교육위원회는 광주시내 중·고등학교에 대해 임시휴교조치를 하였고, 상가는 절반 가량 철시하였으며, 광주지역기관장들은 공수부대를 철수시키거나 그들의 복장을 일반군인복장으로 교체할 것을 건의하였다. 7공수여단의 부대원들은 10:30경 카톨릭센터 앞에서 30여명의 남녀를 체포하여 속옷만 입힌 채 기합을 주고 진압봉으로 때렸다. 12:00경 피의자 정○용 특전사령관이 광주에 와서 공수여단장들을 격려한 뒤 귀경하였고, 특전사는 전용무전기를 설치하여 공수여단으로부터 독자적으로 상황보고를 받았다. 이날 오후, 2∼3만 명에 이르는 시민들은 가드레일 등으로 바리케이트를 치고 장갑차를 앞세운 공수부대의 진압에 대하여 격렬하게 저항하였고, 공수부대원들의 무차별 폭력에 분개한 택시기사들이 50여대의 영업용 택시를 몰고 광주역에 집결하여 시위를 벌였으며, 18:00경 무등경기장에 100여명의 택시기사들이 다시 집결하여 계엄군을 몰아낼 것을 결의하고 5∼6대의 버스와 트럭을 앞세우고 전조등을 켠 채 경적을 울리며 전남도청 앞 관광호텔까지 진출하였다. 19:30경 10,000여명의 시위대가 수십대의 차량을 앞세우고 금남로 시위대와 합류하였고, 19:45경 문화방송국 앞에서 저녁 8시 뉴스시간에 광주의 상황을 보도할 것을 요구하였다가 끝내 보도가 이루어지지 아니하자, 방송국 건물에 방화하였다. 20:10경 광주지방노동청 부근의 주유소를 점거한 시위대가 차량에 기름을 부어 불을 붙인 후 대치하고 있던 경찰 쪽으로 밀어 붙였고, 그 와중에서 고속버스 1대가 상무관 부근 경찰 저지선으로 돌진하여 경찰관 4명이 그 버스에 깔려 사망하고 5명이 부상을 입었다. 20:00경 공수부대의 일부 대대장들은 광주시민들의 차량돌진공격을 저지하기 위하여 권총을 사용하였고, 피의자 최○창 3공수여단장은 대대장들의 실탄지급요청에 따라 22:30경 위협용으로만 사용하되 위협용 이외의 사용시에는 사전에 보고하라는 지시와 함께 여단 본부대 병력 20명으로 지원조를 편성하여 실탄을 각 대대에 전달하게 하였는데, 그 지원조는 실탄전달 과정에서 시위대를 해산시키기 위하여 차량에 거치된 엠(M)60 기관총과 엠(M)16 소총으로 광주시민들을 향해 위협사격을 하였다. 20:50경 광주시청이 시위대에 의하여 점거되고, 22:00경 광주경찰서와 서부경찰서가 점거되었으며, 23:00경 광주세무서가 불타는 등 사실상 전남도청을 제외한 광주시내의 전지역을 광주시민이 장악하게 되었는데, 광주세무서 예비군무기고에서는 칼빈 소총 17정이 시위대에 탈취되기도 하였다. 11공수여단은 시위의 진압을 사실상 포기한 채 조선대학교와 전남도청 앞에서 광주시민들과 대치만을 계속하였으며, 24:00경 위 여단의 61, 62대대장들은 그 휘하의 중대장들에게 실탄이 삽입된 탄창을 1개씩 지급하고, 위급시 대대장의 명령에 따라 사용할 것을 지시하였다. 이날 밤, 광주역 일대의 시위진압과정에서 피해자 김○화, 김○두, 김□수, 이○일 등이 총에 맞아 사망하였고, 피해자 최○철, 김○환/ 나○돈, 강○곤, 정○택과 성명불상자 1명이 총상을 입었다. (바) 5월 21일 상황 육군본부의 증원결정에 따라 20사단 병력 3,000여명이 광주에 증파되었으며, 04:30 육군본부는 계엄사 대책회의에서 폭도소탕작전을 5.23.부터 명령에 따라 실시하되 자위권을 발동하기로 결정하였다. 피의자 소○열이 16:30경 신임 전교사령관으로 부임한 다음 광주사태의 정치적 수습방안을 건의한 청구외 정○ 31사단장으로부터 3개 공수여단에 대한 작전통제권을 이양받아 공수부대를 직접 지휘하기 시작하였다. 전남대학교에서는 10:00경부터 정문에 40,000여명, 후문에 10,000여명의 시민과 학생들이 3공수여단 병력과 대치하며 공방을 벌였는데, 엄청난 시위군중이 모인데다가 시위대 일부는 총기로 무장하였다는 첩보가 전해지자, 13대대의 중대장 이상 장교들에게 위급한 상황에서 지휘계통의 명령에 따라서 사용하라는 지시와 함께 실탄이 지급되었고, 일부 장교들이 시위대의 차량돌진공격에 대항하여 사격을 함으로써 피해자 최○애와 성명불상자 2명이 총상으로 사망하고, 피해자 최○환, 양○권, 신○균 등이 총상을 입었으며, 공수부대에 의하여 연행된 피해자 안○환, 장○환은 광주교도소에서 타박상 등으로 사망한 상태로 발견되었다. 전남도청 앞에서는 08:00경 수만명의 시민들이 사체 2구가 실린 손수레를 앞세운 채 공수부대의 만행을 규탄하고 도지사 면담, 공수부대 철수, 연행자 석방, 과잉진압 사과, 계엄사령관 면담 등을 요구하면서 시위를 벌였는데, 그 시위 과정에서 전남도청으로의 진출을 시도하는 시위대의 차량에 의하여 공수부대원 1명의 사망한 반면, 전남도청 쪽으로 오는 시위차량을 향하여 공수부대 장교가 발포하여 운전자가 사망하였고, 13:30경에도 시위차량에 공수부대원들이 일제히 발포하여 장갑차 위에서 머리에 흰띠를 두르고 태극기를 흔들던 청년이 사망하였으며/ 다시 시위대 중 5∼6명이 태극기를 흔들고 구호를 외치고 나오자 공수부대원들은 이들을 향해 발포하였다. 14:50경 공수부대가 전남도청 인근 건물의 옥상에 병력을 배치하여 시위대를 향하여 총격을 가하자, 시민들도 파출소 등에서 탈취해온 총기로 무장하고 총기사용방법에 대한 교육을 실시하였으며, 17:00경에는 총기사용교육을 받은 시위대들이 조를 편성하여 시내 요소에 배치되는 등 이른바 시민군이라 불리는 무장 시위대가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였다. 16:00경 7공수여단과 11공수여단이 전남도청에서 시외곽으로 철수함으로써 전남도청은 20:00경 시민군에게 접수되었는데, 이날의 시위진압과정에서 총에 맞아 사망한 사람은 40여명에 이르렀다. 3공수여단은 16:30경 전남대에서 철수하여 광주교도소로 이동하면서 수십명의 연행 시민들을 천막이 쳐진 트럭에 태운 뒤 최루탄과 가스를 집어넣고, 진압봉으로 때리고 군화 발로 구타하여 연행자 수명을 살해하였다. 또한 광주교도소 앞을 지나던 담양 거주 주민 4명이 칼빈 소총에 의한 총격을 받아 그중 2명이 사망하기도 하였다. 14:00 계엄군의 외곽철수와 자위권발동이 결정되었으며, 19:30 피의자 이○성 계엄사령관이 방송을 통하여 자위권보유를 천명하는 경고문을 발표하였고, 20:30 피의자 소○열 전교사령관이 예하부대에 자위권행사를 지시하였으며, 20사단에는 21:00 자위권발동지시가 하달되었다. 22:10경 효천역 부근에 배치되어 있던 20사단 61연대 2대대 병력과 시위대간에 교전이 발생하여 시위대의 버스 2대가 전복되고, 이어 다음날 00:15경 또 다시 교전이 벌어졌는데, 그 두차례의 교전과정에서 시위대 10여명이 사망하거나 부상을 입었다. (사) 5월 22일 상황 05:00경 광주에서 목포로 승용차를 타고 가던 피해자 황○열 일행이 송암동 연탄공장 앞 바리케이트에서 검문을 받고 통과허가에 따라 진행하던 중 부근에 매복중이던 20사단 61연대 수색중대 병력으로부터 시위대로 오인되어 사격을 받는 바람에 승용차 운전자가 사망하고 피해자 황○열 일가 3명은 총상을 입었다. 09:00경 광주교도소 부근에서 시위대와 3공수여단 11대대 11지역대 병력간에 총격전이 벌어져 시위대 3명이 총격으로 사망하였고, 그 밖에도 광주시 외곽에서는 군 점령지역을 통과하는 시민들의 차량에 총격이 가해져 수명의 시민이 사망하였다. 시민들은 차량에 일련번호를 부여하여 조직적인 활동을 시작하였고, 시민수습대책위원회가 구성되어 군투입 금지, 과잉진압 인정, 연행자 전원석방, 사후보복 금지, 사망자 보상 등을 요구하면서 그 요구가 관철되면 무장을 해제하겠다고 제의하였다. 그러나 학생수습위원회는 무조건적인 무장해제에 관하여 반대의사를 분명히 하여 의견이 대립되는 형국이었다. 청구외 최○하 대통령, 박○훈 국무총리서리 등이 대화의 길을 모색하는 동안, 군은 무장시위대의 시외곽 탈출방지, 고속도로 봉쇄 등을 지시하고, 선무방송을 하였다. 한편 16:00경 20사단 62연대 2대대는 광주통합병원을 확보하라는 지시에 따라 통합병원 쪽으로 이동하다가 민가지역에서 무장시위대와 총격전을 벌였는데, 그 와중에서 인근 동네에 거주하는 피해자 이○실 등 8명(그중 3명은 칼빈 총상)이 총상으로 사망하고 계엄군도 1명이 총상으로 사망하였다. (아) 5월 23일 상황 10:00경 11공수여단 62대대 4지역대 병력은 주남마을 앞에서 소형버스가 정지신호를 무시하고 질주하자 이에 집중사격을 가하여 그 버스에 타고 있던 학생, 방적공원, 운전사 등 10여명을 살해하였으며, 송정리 삼양타이어공장, 해남, 녹동, 광주교도소 부근, 영산포/ 나주 등지에서 총격전이 벌여져 수명의 시위대가 사망하였다. 09:35경 전남도청내에 학생수습위원회 본부가 설치되어 무기회수활동을 전개하였고, 13:00경 학생수습위원장인 청구외 김□길 등이 계엄분소를 방문하여 회수된 총기 3,000여정 중 200정을 반납하고 계엄분소 지휘관들과 협상을 벌였으나, 수습위원회측의 요구사항 중 예비검속자 및 연행자 전원석방에 대하여는 타협점을 찾지 못하고 다음날 다시 의논하기로 하였다. 15:00경 50,000여명의 시민들은 전남도청 앞 광장에서 제1차 민주수호 범시민궐기대회를 개최하였다. (자) 5월 24일 상황 13:30경 주남마을을 출발한 11공수여단 선두가 광주-목포간 도로에 접한 효덕국민학교 삼거리 부근에 이르렀을 무렵 무장시위대 10여명을 발견하고 그들과 총격전을 벌였는데, 뒤따르던 병력이 주변을 향하여 총격을 가하는 와중에서 효덕국민학교 뒤 놀이터에서 놀고 있던 피해자 전○수, 방○범이 총상을 입고 사망하였다. 13:55경 11공수여단 63대대와 전교사 보병학교 교도대 병력간에 오인 총격전이 벌어져 병력 9명이 사망하고 63대대장 등 군인 33명이 총상을 입는 사고가 발생하였는데, 이에 격분한 나머지 11공수여단 63대대 병력은 부근 일대를 수색하여 체포한 무장시위대 1명과 시위대로 오인하고 체포한 마을청년 피해자 권○립, 김○후, 임○철을 총으로 살해하고 하수구에 숨어있던 피해자 박○옥을 찾아내 역시 총으로 살해하였다. 시민수습대책위원회는 질서유지와 총기회수에 힘쓰는 한편, 계엄군과 협상하여 계엄군의 시가진입금지, 과잉진압 시인, 연행자석방, 사후 처벌금지 등을 약속받았으나, 시민수습대책위원회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학생, 청년들에 의하여 제2차 민주수호 범시민궐기대회가 개최되고, 그 자리에서 시민수습대책위원회에 대한 성토가 이루어졌다. (차) 5월 25일∼27일 상황 5.25. 11:00경 학생, 청년 수습대책위원들은 청구외 홍○순, 이○홍, 송○숙, 명○근 등을 참석시켜 수습방안을 논의한 끝에 김○중 석방, 계엄령 해제, 정치일정 단축 등 3개 요구사항을 확인한 후, 그 요구사항이 관철될 때까지 무력 항쟁을 계속하기로 결의하였다. 5.25. 15:00경 무기반납식을 갖기로 했던 계획이 백지화되고, 50,000여명의 시민이 전남도청 광장에 모여 제3차 민주수호 범시민궐기대회를 개최하여 과도정부의 즉각 퇴진을 요구하였다. 계엄군은 피의자 이○성 계엄사령관의 지시에 따라 5.25. 광주재진입 작전계획을 수립하는 한편, 전남도청에 계엄사 탄약검사반을 잠입시켜 수류탄을 해체하는 등 광주재진입작전을 위한 준비를 하기 시작하였고, 계엄군의 진입작전이 임박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시민과 학생들은 5.26. 11:30경 30,000여명이 모인 가운데 제4차 민주수호 범시민궐기대회를 개최하여 계엄군측의 협상위반을 성토한데 이어 15:00경 전남도청 앞에서 다시 제5차 민주수호 범시민궐기대회를 개최하여 시민행동강령을 채택, 발표하고 금남로부터 화정동까지의 가두행진을 끝으로 대부분 해산하였으며, 전남도청을 사수하기로 한 200여명만이 남아 무장한 채로 전일빌딩, 계림국교에 배치되어 있었다. 5.27. 새벽 계엄군이 광주에 재진입하여 07:25경 계획대로 작전을 완료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피해자 양동선 등 시민, 학생 17명이 총상으로 사망하고, 295명이 체포되었다. (4) 청구외 최○하 대통령의 하야와 피의자 전○환의 집권 (가) 국보위의 설치·운영 비상계엄의 전국확대를 관철한 군부는 대통령긴급조치에 의한 비상기구 설치를 주장하다가 반대에 부딪히자, 대통령령인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설치령을 의결시킨 다음, 1980.5.31. 국보위를 발족하여 피의자 전○환이 국보위내의 실권기관인 상임위원회의 위원장이 되고, 분과별 위원장과 상임위원으로서 군장성 18명, 공무원 12명이 임명되었다. 국보위는 그후 공무원숙정을 단행하여 공직자 5,490명, 국영기업체, 금융기관 및 정부산하단체 등 127개 기관의 임직원 3,111명 등 합계 8,601명을 사직시키고, 과외금지, 대입본고사의 폐지, 대학졸업정원제 등을 골자로 하는 교육개혁을 시행하였으며, 불량배 소탕에 관한 삼청계획에 따라 총 57,561명을 검거하여 3,052명을 재판에 회부하고, 38,259명을 군부대 순화교육(이른바 삼청교육)에 회부하였다. 국보위는 1980.10.27. 제5공화국 헌법과 함께 국가보위입법회의설치령이 시행됨에 따라 국가보위입법회의로 변경되었다. (나) 김○중 등 내란음모사건의 기소, 재판 계엄사는 청구외 김○중 국민연합 공동의장 등이 변칙적인 혁명사태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할 목적으로 복직교수와 복학생을 선동하여 광주소요사태를 일으키고 격화시켰다는 취지로 기소하였다. 그 결과 청구외 김○중은 1980.9.17. 계엄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았고, 10.24. 계엄고등군법회의에서 그에 대한 항소가 기각된 데 이어, 1981.1.23. 대법원에서 상고마저 기각됨으로써 사형이 확정되었으나, 그후 국내외 비난여론에 따라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 (다) 청구외 최○하 대통령의 하야 비상계엄의 확대로 중단되었던 정부의 개헌작업이 재개되어 1980.8.10. 대통령간선제, 임기 6년, 단임제를 골격으로 하는 헌법요강이 작성되었으나, 피의자 전○환은 1980.8. 중순경 대통령간선제와 임기 7년을 관철하도록 지시하여 헌법개정안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1980.8.10. 청구외 최○하 대통령은 하야준비를 지시하고, 피의자 전○환에게 이를 전했으며, 청구외 유○성 중앙정보부장은 피의자 전○환의 집권이 기정사실화되었으니 통일주체국민회의 소집에 협조해 줄 것을 청구외 김□환 내무부장관에게 요청하였다. 1980.8.16. 청구외 최○하 대통령이 하야하였다. (라) 피의자 전○환의 집권 피의자 전○환이 1980.8.27.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재적대의원 2,540명 중 2,525명이 투표한 가운데 2,524표를 얻어 제11대 대통령에 당선되고, 9.1.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1980.9.29. 제5공화국 헌법개정안이 공고되고, 10.22. 실시된 국민투표에서 투표율 95.5% 찬성 91.6%로 확정되어, 10.27. 공포되었다. 1981.2.25. 개정헌법에 따라 실시된 선거인단에 의한 대통령선거에서 전체 유효투표의 90.2%인 4,755표를 얻은 피의자 전○환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어 3.3. 제12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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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 2017년 계엄령 문건 사건D Na 제203특공여단 사격장 총기 사망사건A 문재인 정부 GP 파괴 부실검증 의혹Na Nk 육군 통신장교 석면 사망사고A 포항 해병대 헬기추락 사고N 양구 GP 일병 총기 사망 사건A ? | |
2019년 | 2019년 러시아 군용기 독도 영공 무단 침범 사건I 고양시 여자화장실 군인 묻지마 폭행 사건A P |
[1] 물론 내전을 포함한 양상의 다른 쿠데타들도 많으므로 실제로 가장 긴 쿠데타라는 것은 아니다.[2] 다만 서중석 교수의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한국 현대사> 개정증보 3판 머리말에 의하면 학계 일각에선 이 사건을 쿠데타로 안 보는 경우도 있다고 하는데, 이는 전두환의 쿠데타가 12.12 군사반란으로 일단락됐다는 전제이며 이 경우 5.17 내란은 친위 쿠데타에 해당한다.[3] 이 조치는 사실상 최규하 스스로 대통령 권한대행으로서의 군 통제권을 포기한다는 뜻이었다. 왜냐하면 당시 계엄법 9조에 의하면 전국을 계엄지역으로 선포하는 경우에는 대통령이 지휘감독을 하게 되지만 그 이외에는 국방부 장관이 지휘감독을 하기 때문이다. 원래 최규하는 정치에 휘말리기를 싫어했기에 정치적 부담감이 크다고 판단하여 제주도를 제외하고 계엄을 선포해버렸다. 이 때문에 계엄령 이후 '계엄사령부'가 유일한 권력의 중심이 되었고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장으로 10.26 수사 총책을 맡은 전두환이 더더욱 권력의 핵심으로 부각됐다. 12.12 군사반란은 전두환을 위시한 신군부(하나회)가 이 계엄사령부 및 전체 군권을 장악하게 만든 사건이다.[4] 당시 울산은 경상남도에 속했다.[5] 다만 이 시기 한 미국 외교관의 말을 인용해 "김영삼은 무능, 김대중은 과격, 김종필은 부패하다"는 식으로 셋 다 이상적인 지도자감이 아니라고 부정적으로 평가한 미국 <뉴스위크> 지 4월 7일자 보도처럼 부정적인 시선도 있었다.[6] 5월 16일 동아일보에 보도된 국회개헌특위 헌법안 전문(全文). 전문(前文)에 5.16 군사정변을 명기할지 여부만이 합의되지 않았다. 이를 제외하면 사실상 모두 합의되었고 대통령 직선제는 물론 대통령 4년 중임제, 언론의 편집, 편성권 보장 등의 내용을 담았다.[7] 육사 9기. 12.12 군사반란 당시 군수참모부장으로서 장태완 수경사령관, 정병주 특전사령관, 김진기 헌병감 등과 함께 반란군 강경진압을 주장했었다.[8] 안종훈 사령관도 주영복 장관이 소신을 밝히라며 다그치자 양해되었다는 듯 고개를 두어번 끄덕이며 묵인해버렸다. 안 사령관은 다음해 예편되었다.[9] 여담으로 당시 경희대학교 법과대학 학생이었던 문재인도 재학 중 10월 유신 반대 운동을 해서 찍혔는지 강화도에 있는 처가에 갔다가 영장도 없이 끌려갔다. 법대생답게 영장을 제시하라고 했지만 당연히 통하지 않았고(...) 유치장에 그대로 수감되었으며 수감 중 사법시험 2차 합격 소식을 그의 아내 김정숙으로부터 듣게 되었다. 이런 사유로 국가유공자 자격을 받을 수도 있었지만, 받지 않았다.[10] 물론 영장 따위 없는 불법 구속이었다.[11] 이 과정에서 최규하의 하야를 5시간에 거쳐 설득한 인물이 그의 오랜 친구 김정렬로, 그는 이 공로로 제5공화국의 마지막 국무총리를 지냈다. 대통령 최규하가 하야하면서 국무총리 서리인 박충훈이 대통령 권한대행이 되었다.[12]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민주정의당으로 공천 신청을 했더니 야당인 민주한국당으로 공천 조정이 되었다는 황당한 코메디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