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05-06 13:59:54

소모되는 남자

도서명 소모되는 남자: 남녀차에 대한 새로운 사회진화적 해석(韓)
Is There Anything Good about Men? How Cultures Flourish by Exploiting Men(英)
발행일 2010년
저자 로이 바우마이스터
(Roy F. Baumeister)
출판사 Oxford University Press
시그마북스(역)
ISBN 9788984457263
#교보문고

1. 개요2. 저자 소개 및 출간 배경3. 목차 및 주요 내용
3.1. 챕터별 내용 정리3.2. 남성은 여성보다 천차만별이다3.3. 성차는 존재한다, 그러나 능력이 아니라 동기다
3.3.1. 사회적 삶의 차이: 왜 남성이 문화를 만드는가3.3.2. 남성을 갈아넣는 문화: 일해라 핫산!
3.4. 결혼, 남성들의 함정3.5. 페미니즘 학문하기
4. '억압' 가설에 대한 대안들5. 적용 및 유의점6. 비판점

1. 개요

"내가 읽어본 성차를 다룬 책 중 가장 말이 되는 이야기를 하는 책이다."
- 마틴 셀리그먼(M. E. P. Seligman)[1]
"...이 책은 특히 답을 이미 알고 있다고 확신하는 사람들을 위한 필독서다."
- 존 바지(J. Bargh)[2]

젠더학 및 젠더 관련 이슈에 대해서 논의하는 책이 많이 쏟아져나오기는 하지만 페미니즘의 영향력 밖에서 해당 논쟁에 뛰어드는 문헌들은 많지 않다. 본서는 심리학, 특히 사회심리학, 진화심리학, 문화심리학의 관점에서 젠더를 바라보고 있다. 즉, 대자연의 진화적 압력이 남성 및 여성의 사회적 삶의 양상을 서로 다르게 만들어 갔고, 또한 문화 역시 유사한 선택압에 의해 영향을 받아 생존 및 번영을 위해 남성과 여성을 각기 다르게 활용하게 되었다는 것이 그 요지다.

책의 제목이 약간 직관적으로 와닿지 않을 수 있는데, 좀 더 위키러들의 젊은이들의 감각으로 번역한다면 "남밀레", "갈려나가는 남자"(…)라고 제목이 달리는 편이 훨씬 더 느낌이 와닿았을 것이다. 원문에서는 직접적으로 "착취하다"(exploit)라는 단어를 쓰고 있다. 즉 남성들은 현대사회에서 여성과 여러 면에서 달라지게 되고(성차의 존재), 때때로 이 차이는 남성을 여성보다 유리하게 할 수도 있으나 한편으로는 불리하게 했으며(트레이드오프), 남성들은 그렇게 얻은 우월성(?)으로 여성을 지배하며 문화 권력을 휘두르기는커녕 오히려 그 문화에게 가혹하게 착취당하며 갈려나가고 있다는 의미다.

상단의 논지를 뒷받침하기 위해 저자는 다수의 진화심리학사회심리학 논문들, 그리고 각종 (종합)사회조사를 근거로 들고 있다. 물론 본인이 직접 말미에 밝힌 바 이 책은 학술문헌이 아니라 에세이의 성격이라고 하듯이, 단순한 추론이나 추정, 비유 등등에 상당히 자주 의존하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미 경험적 데이터를 신뢰한다는 점에서, 본서는 젠더 이슈에 발을 담그는 다른 서적들과는 달리, 실증주의와 과학적 방법에 크게 의지하는 지적 배경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실 이는 심리학자들이라면 거의 대부분이 (심지어 여성심리학 전공자들도) 어렵지 않게 동의할 만한 연구 전통이다.

하단에 좀 더 자세히 풀어 설명하겠지만 현대 페미니즘에 대한 비판도 담고 있는데, 이 비판은 페미니즘이 추구하는 이상 자체에 대한 비판이라기보다는 페미니즘을 연구하고 학문으로서 가르치는 방식, 그리고 페미니즘으로 사회현상을 설명하는 방법론에 대한 비판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 저자는 이와 관련하여 《Professing Feminism》 이라는 책에 크게 의지하고 있는데, 여성학이 학문으로서 얼마나 이념에 주화입마하고 건전한 논쟁 없이 병들어 있는가에 대해서 내부고발을 하는 책이므로, 관심이 있다면 더 읽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그 외에도 자주 언급하는 책으로 노라 빈센트(N.Vincent)의 《548일 남장 체험》 이 있다. 어쨌건 이 관점은 다시금 박가분 씨의 《포비아 페미니즘》 5장에서 수용 및 재생산되고 있으며, 한편으로 조던 피터슨 역시 물론 그도 심리학자이므로 자신의 강연과 토크에서 적극적으로 인용하는 관점이 되었다.

2. 저자 소개 및 출간 배경

저자 로이 바우마이스터(R.F.Baumeister)는 독일계 미국인으로, 출간 당시 플로리다 주립대학교에 재직중인 사회심리학자이다. 사실 본업은 사회심리학 분야이지만 정작 사회심리학계 연구자들의 적지 않은 수가 이 사람을 진화심리학자라고 칭하는 데에도 거부감이 없을 정도로 진화론적인 배경 역시 탄탄하다. 사회심리학 분야에 있어서 그는 숱한 이론적 조망들을 세워낸 원맨쇼(…)를 펼친 대가 중의 대가인데, 몇 가지만 들자면 사회적 자기, 자기조절과 자기통제, 장기적 목표추구, 소속욕구 이론(Need-to-Belong Theory)[3], 사회성 계량기 이론(Sociometer Theory)[4], 자아고갈 이론(Ego-Depletion Theory)[5], 위협받은 이기주의 이론(Theory of Threatened Egotism)[6], 기타 셀 수 없이 많은 주제들에 학술적 교통정리를 한 바 있다. 이러한 학문적 배경이 반영되어, 본서에서도 5장에서 소속욕구 이론이 일부 소개되고 있다.

진화심리학 분야에 있어서 그는 인간의 사회성과 성선택의 진화적 기원을 구명함으로써 성심리학의 진화적 접근을 열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인간의 사회성에 대한 사회심리학의 논의들이 진화론적 근거를 갖추게 되었다. 쉽게 말해, 우리가 "인간은 본래 사회적 동물이야!" 라고 일상적으로 말할 때, 그 근거를 누가 따진다면 바로 이 사람 이름을 대면 된다! 심리학계에서 기본적인 심리적 욕구와 관련하여 자율성, 유능성, 죽음회피, 불확실성 회피, 자기확증, 인지적 일관성, 기타 등등이 있지만 그 중의 메이저한 요인으로 당당히 이름을 올리고 있는 것이 바로 소속감(belongingness) 내지는 관계성(relatedness)인데, 그 이론적 밑바탕에는 이 사람이 있다.

하여간 이 정도로 영향력이 크기 때문에 미국과학정보기구에서 가장 많이 인용된 심리학자 중 하나로 당당히 선정되는 영예를 안았고, 2018년 9월 기준으로 구글 스칼라에서 집계한 h 인덱스160에 육박한다. 심리학계가 사회과학 분야들 중에서는 그나마 인용지표과학계량학적인 부분이 활성화되어 있는 과학자사회인데, 그래도 이공계에 비하면 상당히 뒤처져 있는 편이다. 따라서 이 점을 고려한다면 실제로 학계에서 느껴지는 주관적인 영향력은 더욱 높다고 할 수 있다.[7]

출간 배경에 관련하여 저자가 힘주어 말한 것을 언급하자면, 저자는 문화가 여성들을 이용해 온 것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만 남성들 역시 문화에 의해 이용되고 있다는 점은 알려져 있지 않다는 것을 주장한다. 문화가 여성들을 "착취" 해 왔다면, 남성들 역시 그 "착취" 에 대해서는 다를 바 없다는 것이며, 어디까지나 그 양상이 서로 달랐을 뿐이라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저자의 메시지를 직접 옮기자면, "…남성들을 희생양으로 만들어서 어떤 이득을 취하려는 의도로 쓴 책이 아니"며, "이 책의 요지를 남성이 차별받고 있다거나 남성과 여성의 지위가 비등하다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핵심을 놓친 것"이고, 이 경우 저자 역시 "메시지 전달에 크게 실패한 것"이라고 한다(p. 17). 즉 페미니즘에 분노한 남성들에게 여성에 대한 피해의식을 불어넣는 것은 이 책의 본래 저술목적이 아니며, 언뜻 그렇게 보이더라도 그렇게 읽으면 안 된다.

3. 목차 및 주요 내용

  • 1장: 이상하고 생뚱맞은 질문
  • 2장: 여성과 남성, 누가 더 우월한가
  • 3장: 못하는 건가, 안 하는 건가
  • 4장: 남성에 대해 가장 과소평가된 사실
  • 5장: 여성이 더 사회적인가
  • 6장: 문화는 어떻게 작동하는가
  • 7장: 여성과 남성, 그리고 문화
  • 8장: 소모적 존재, 대체 가능한 삶
  • 9장: 남성성의 획득과 남성의 자존심
  • 10장: 결혼과 성관계를 이용한 남성 착취
  • 11장: 그 다음은 무엇인가

책의 전체 내용을 세줄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 흔히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남성과 여성의 사이에는 성차가 분명히 존재하지만, 이는 능력에서가 아니라 동기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 여러 영역들에서 나타나는 양성 간 성차는 필연적으로 그 트레이드오프를 동반하며, 남녀의 우위와 열위가 서로 다르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양성은 상호보완적인 존재이다.
  • 문화는 타 문화권과의 경쟁에서 생존하고 궁극적으로는 번영하기 위해 양성 모두를 착취하므로, 여성뿐만 아니라 남성들도 착취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3.1. 챕터별 내용 정리

각 챕터의 내용들을 각각 세 문장으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책에서 전반적으로 논의하고자 하는 내용들은 몇 종류로 추려서 하단에 다시 챕터 구분 없이 소개할 것이다. 우선 1장에서 5장까지의 내용은 남녀의 성차에 대해서 기존에 제기되던 남성우월주의적인 관점과 (래디컬)페미니즘적 관점이 모두 잘못되었을 수 있다고 말하면서, 남성이 여성보다 특질의 분산(variance)이 더 크다는 것, 그리고 성차가 능력의 영역이라기보다는 동기(motive)의 영역일 수 있음을 제안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6장에서 8장까지의 내용은 문화가 실재하는 시스템으로서 개인의 삶에 영향을 끼치고 있으며, 문화 역시 집단의 하나로서 진화의 원리에 따라 생존경쟁을 펼치고 있고, 그 과정에서 남성들을 특정한 방법으로 활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9장에서 11장의 내용은 남성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이며 남성성이 어떻게 획득되는 것인지를 앞서 논의했던 내용들을 토대로 소개한다.
  • 1. 이상하고 생뚱맞은 질문
    페미니스트들의 전통적인 주장에 따르면 우리 사회는 여성을 착취하여 남성에게 혜택을 주는 구조를 유지하고 있지만, 경험적으로 이는 현실을 잘 설명하지 못한다. 그러나 남녀는 저마다의 우월함이 있고 그 대가로 어떤 면에서 열등함을 감수하게 되며, 그 상충관계를 알고 있는 문화는 남성들 역시 소모품으로서 착취함으로써 번영하게 된다. 이 책은 기존의 페미니즘적 설명보다 저자의 대안적 의견을 따를 때 우리 사회의 위와 아래를 전반적으로 더 균형 있게 바라볼 수 있다는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다.
  • 2. 여성과 남성, 누가 더 우월한가
    남성이 여성보다 우월하다는 과거의 견해는, 한때 양성이 평등하다는 생각으로 이어졌다가, 다시 여성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쪽으로 변화해 왔다. 하지만 이들 견해는 어느 한쪽의 우월성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남성이 여성보다 능력의 분산이 더 크게 나타난다는 사실을 간과했기에 현실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진화론적인 시각에서 볼 때, 양성 간에는 생물학적 기원의 차이가 분명 존재하지만, 어떤 우월함은 필연적으로 다른 열등함을 야기한다는 사실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 3. 못하는 건가, 안 하는 건가: 남녀의 실제 차이가 발견되는 부분
    심리학계의 연구를 비롯하여 많은 논자들과 세간의 여론은 양성 간에 존재한다고 여겨지는 성차를 능력의 관점에서 접근하였으며, 존재하기는 하지만 대체로 미약한 수준이라고 간주해 왔다. 그러나 양성 간 성차의 핵심은 누가 누구보다 뛰어나거나 우월한가와 같은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무엇을 더 선호하고 더 하고 싶어하는가에 대한 동기의 문제라고 보아야 한다. 동기의 관점에서 바라볼 때, 이공계에 여성들이 진출하는 경향이나 남녀 간 성생활의 차이, 워커홀릭들 중에 남성들이 더 많은 이유, 여성은 작곡이나 즉흥연주를 하지 않는 이유 등등이 쉽게 설명될 수 있다.
  • 4. 남성에 대해 가장 과소평가된 사실
    양성 간에 실제로 존재하는 성차 중에서 가장 과소평가되었지만 가장 근원적이고 핵심적인 것은 바로 남녀의 재생산 성공률의 차이이고, 그것이 갖는 진화적 압력을 이해함으로써 성차를 온전히 파악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여성보다는 남성이 재생산 성공률이 더 낮기 때문에, 남성들은 여성들보다 더 위험추구적이고 모험을 감수하며 인생을 걸고 도박해야만 자손을 남길 수 있게 되었고, 현대 인류는 그런 남성들의 유전자를 물려받았다. 이러한 진화적 배경을 바탕으로 할 때, 우리는 어째서 현대의 남성들이 고위험 직종에 근무하며 더 높은 임금을 얻고, 창의력을 더 발휘하며, 권력에 대한 야망이 더 크고, 기회만 있다면 주저 없이 섹스하려 하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 5. 여성이 더 사회적인가
    기존에 학계와 일반인들은 남성들은 난폭한 전쟁광이며 관계를 망치는 싸움꾼이고, 여성들은 우호적이고 배려하며 평화적인 유대감을 형성한다는 통념을 믿어 왔으나, 사실 모든 사람들은 사회적 소속의 욕구를 지니고 있다. 사회성에 대한 개념적 정의는 여성들이 주로 관심을 갖고 있는 친밀한 양자적 관계로 한정되어 왔으나, 만일 남성들이 관심을 갖는 대규모 사회적 집단으로까지 사회성을 확장시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실제로는, 남성들은 여성들과 서로 다른 종류의 사회적 관계를 추구하며, 이것은 각 조건에서 요구하는 방향으로 양성의 관심과 선호를 달리 조성하여, 오늘날 알려진 다양한 동기적 성차들을 형성해 냈다.
  • 6. 문화는 어떻게 작동하는가
    문화는 실재하며, 정보를 바탕으로 형성되는 조직화된 시스템으로서, 자신의 생존을 목표로 하고, 구성원에게는 신체적 안전과 물질적 욕구를 충족시키고 대규모의 인구가 조화롭게 공존하도록 도울 수 있다. 문화는 대규모 집단의 번영에 도움을 주며, 성공적인 문화일수록 정보의 누적, 노동의 분업, 잉여자원의 교환이 명확하게 나타나서 구성원들이 더 나은 삶의 수준에 도달하게 한다. 여러 문화들은 전쟁의 형태로 충돌 및 경쟁하며, 이때 남성을 독특한 방식으로 사용하는 문화는 남성을 독특하게 사용하지 않는 문화와 경쟁했을 때 도태되어 사멸하게 될 위험이 상대적으로 더 낮다.
  • 7. 여성과 남성 그리고 문화: 불평등의 뿌리
    문화가 여성들에게 불리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이에 대해 여성을 억압하기 위해 남성들이 공모하고 모의했다는 페미니스트들의 설명은 잘못되었다. 왜냐하면 문화의 형성과 유지, 발전에 있어서 문화는 대규모 집단에서 자신을 드러내고 성취하며 혁신을 이루고 싶어하는 남성들의 열망에 더 크게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여성들도 같은 시간에 소규모의 우애적이고 친밀한 관계를 열정적으로 영위했지만, 그것이 문화에 크게 영향을 끼치지 못한 탓에, 남성들은 여성들이 무능력하다고 오해하게 되었으며 제도적으로도 여성들에게 기회를 주지 않았다.
  • 8. 소모적 존재, 대체 가능한 삶
    문화는 남성에 의해 형성, 유지, 발전되어 왔지만, 정작 그 문화는 남성들은 소모적이고 내버려도 되는 존재로 여기는 반면, 여성들은 언제나 보호하고 버릴 수 없는 존재로 여기며, 이는 특히 전쟁 중에 확연히 나타난다. 문화의 관점에서 보면, 여성과 달리 남성은 문화가 필요로 하는 수요보다 만성적으로 공급이 많은 "음경 과잉" 상태에 있으며, 문화는 이 잉여남성들을 위험하고 가능성 낮지만 번영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활동들에 투입시킨다. 여성들이 남성적인 사회 속에서 겪는 착취들은 그들이 여성이기 때문이 아니라 남성들이 겪는 착취에 똑같이 노출되기 때문이지만, 여성들은 남성들이 자기들끼리만 유대와 돌봄의 네트워크를 독점한다고 잘못 판단한다.
  • 9. 남성성의 획득과 남성의 자존심
    남성성은 성취 지위에 속하는 것으로서, 남성들은 그것을 획득함으로써 더 많은 재생산 기회를 얻기 위해 동기화되며, 문화는 이러한 남성들의 심리를 이용하여 번영한다. 남성들은 자기 자신을 증명하지 않으면 언어적 모욕과 같은 존경의 결핍을 경험하게 되고, 결국 작게는 생산적인 사람이 되기 위해, 크게는 위대한 사람이 되기 위해, 어떠한 고된 희생이라도 감수하려 한다. 문화는 능력주의와 경쟁주의를 통해서 유능한 남성들을 십분 활용하려 하며, 남성들에게 누구나 유능해지면 막대한 보상이 기다린다는 생각을 심어주고, 소수의 성공한 엘리트에게는 그만큼 보답하면서도 가혹하게 착취한다.
  • 10. 결혼과 성관계를 이용한 남성 착취
    남성들의 성욕은 여성들보다 높으며, 심지어 기혼 남성들도 이로 인해 만성적인 섹스 결핍 상태로 고통 받고 있다. 문화는 남편들의 성적 절박함을 도구적으로 활용하여, 성적 보상이 약속되는 한 어떤 터무니없는 위험한 일에 기꺼이 뛰어들도록 위험추구를 부추기고, 그로 얻어진 부를 아내와 자녀에게 이전시킨다. 결혼이라는 제도는 경제학적으로 볼 때 섹스와 금전의 거래를 안정화시킨 제도이나, 남성들은 장기적으로 안정적인 결혼생활을 유지하기 어렵기 때문에, 문화는 남성들이 사랑의 열병에 빠진 사이에 결혼에까지 이르도록 사랑의 로맨스에 대한 문화적 요소들을 생산한다.
  • 11. 그 다음은 무엇인가
    현대사회에서 남성은 마치 없어지면 유토피아가 올 것처럼 나쁜 존재로 여겨지기도 하지만, 남성들은 여성과 상호보완적인 관계 속에서 문화를 발전시켜 왔다. 현대 공교육 체제와 각종 제도적 정책들은 갈수록 남성들의 권리는 줄이고 책임은 줄이지 않음으로써 유능한 남성들이 실력을 발휘할 기회를 줄여 가고 있다. 우리는 차이가 없다고 애써 강조할 것이 아니라, 차이가 존재하지만 이를 통해 분업화를 실현할 수 있기에 오히려 가치 있는 차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

3.2. 남성은 여성보다 천차만별이다

파일:baumeister-fem.jpg
페미니스트들이 추측하는 남성과 여성의 구간별 관측빈도.
남성이 여성보다 더 높은 사회/경제/정치/문화적 지위를 점유한다.
표시된 영역에서 여성의 수를 늘리는 것이 목표다.
파일:baumeister-alt.jpg
저자가 제안하는 남성과 여성의 구간별 관측빈도.
남성의 분산이 여성의 분산보다 더 크게 나타난다.
저자는 표시된 영역에서 남성의 관측빈도가 높음에 주목한다.

우리 사회의 다양한 지위들, 즉 사회적 지위, 문화적 지위, 경제적 지위, 정치적 지위에 있어서 남성과 여성은 어떻게 다를까? 페미니스트들이 예전부터 줄곧 주장해 온 것 중 하나는, 여성들이 전반적으로 남성들보다 구조적인 약자이며 열위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유리천장이나 임금격차와 같은 다양한 현상들로 인하여, 여성들은 남성들보다 사회적으로 약자이며, 경제적으로도 더 빈곤하고, 정치적으로도 권력을 잡기 힘들고, 문화적으로도 혐오받는 상태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억압과 압제의 배후에는 남성중심적 가부장제 사회가 자리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경향이 있다. 실제로 이 중에서 경제적 열위에 대해서는 빈곤의 여성화(feminization of poverty)라는 표현이 생겨났을 정도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남성들은 남성으로 태어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여성들보다 더 높은 지위를 향유하는 혜택을 누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의 분석에 따르면 그렇지 않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페미니스트들이 진단한 문제의 원인은 반만 맞는 말이다. 분명히 사회 지도층과 엘리트들, 권력자들, 부유층들은 여성보다 남성이 압도적으로 많기 때문. 그러나 저자는 시선을 돌려서 이제 사회의 밑바닥을 바라볼 것을 조언한다. 범죄자들, 빈곤층들, 노숙자들, 3D직종 종사자들 역시 명백히 남초이며, 남성들은 전쟁 중에 전사하거나 산업재해로 목숨을 잃는 일이 여성에 비해 훨씬 비일비재하다는 것[8]이다. 저자의 진단에 따르면, 확실히 남성들은 상층부에도 여성들보다 많이 존재하지만, 하층부에도 여성들보다 많이 존재하며, 따라서 사회의 중간 즈음에서는 여성들이 남성들보다 더 많다. 요컨대, 남성들의 분산은 여성들보다 더 크다고 생각할 수 있다. 흔히 세상은 정규분포라는 말을 하지만, 페미니스트들의 경우에도 약간 다른 의미로 해당될 수 있는 셈이다. 중층부에 속한 여성들은 자기들보다 상층부를 올려다보고, 그곳에 얼마 없는 남성들이 얼마 없는 여성들보다 더 많은 것을 발견한 뒤, 자기들보다 아래에는 남성들이 얼마 없을 거라 짐작하게 된다는 것.

남성들의 극단성이 더 크다는 문제는 임금격차를 일부 설명할 수도 있다. 풀어 말하면, 임금격차는 최저임금제 등으로 인하여 바닥 효과를 발생시킨다. 즉, 남성 집단이건 여성 집단이건 간에 최하위층이 중하위층과 함께 뭉개져 합쳐져 버리면, 결국 남성 집단의 오른쪽 "꼬리"는 여성 집단의 오른쪽 "꼬리"보다 더 두꺼운 상태로 남게 된다. 여기서 문제는, 평균은 늘 극단값에 끌려간다는 것.[9] 결국 소수의 세계적인 남성 기업가들과 남성 자산가들과 남성 투자자들이 전체 남성들의 소득수준의 평균을 끌어올리게 되고, 그만큼 강하게 평균을 끌어올릴 아웃라이어를 갖고 있지 못한 (그러나 그렇게까지 가난하게는 살지 않는) 여성들의 경우 상대적으로 평균이 낮아진다는 논리다. 전반적인 경향을 통해 보자면 더 많은 여성들이 중산층, 내지는 크게 생계를 걱정하지도 않지만 크게 사치를 즐기지도 않는, 단지 소확행 정도는 적당히 할 정도가 되는 지위를 누리고 있으나, 이 부분이 평균의 장난으로 인해 가려지곤 한다는 것이다.

이를 반대로 생각하면, 어째서 학교에서 대개 여학생들이 남학생들보다 더 성적이 좋은지를 설명할 수도 있다. 저자에 따르면, 현대 미국에서는 만성적인 "학점의 인플레이션"이 발생하고 있고, 이는 거꾸로 천장 효과를 발생시킨다. 즉, 남성 집단이건 여성 집단이건간에 최상위층이 중상위층과 함께 뭉개져 합쳐져 버린다는 것이다. 남성들 중에는 불세출의 천재가 더 많은 만큼 최악의 구제불능아(…)도 여성들보다 더 많다. 하지만 AA, AAA, S랭크 등을 달아줄 법한 그런 소수의 천재들은 학점 인플레로 인하여 적당적당한 수재들과 함께 똑같은 A를 받게 된다. 이 경우, 대부분 곧잘 수업을 따라올 수 있는 여학생들이 더 유리하다. 왜냐하면 구제불능아들로 한정할 경우 여성들보다 남성들이 더 많기 때문에, 남성 집단의 왼쪽 "꼬리"가 더 두껍게 되기 때문. 평균은 그 불쌍한 친구들로 인해 깎아먹히게 되고, 전반적으로 여학생들이 우수한 것처럼 나타난다.[10]

그런데 저자는 이러한 남성들의 큰 다양성이 생리적, 심리적 수준에서도 나타난다고 지적한다. 예컨대 남성들의 지능지수나 몇몇 성격 지표, 신체적 특성들을 살펴보면 남성들은 여성들 사이에서 나타나는 성별 내 차이보다 확실히 심한 성별 내 차이를 보인다.[11] 이것은 어떻게 봐도 가부장제로 책임을 돌릴 수가 없다. 정신지체, 지적장애, ADHD 아동들의 통계를 보면 명백히 남아들이 여아보다 많은데, 이런 남초 경향이 "여성을 억압하고자 공모한 남성권력"에서 비롯됐다고는 볼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여성억압의 논리로는 설명될 수 없는 반례인 것. 흔히 페미니스트들은 이런 류의 생각에 대해 "생물학적 결정론"이라며 반대[12]하지만, 실증적 관찰을 통해 발견한 패턴 자체를 반대하는 것은 그냥 자기 보고 싶은 것만 보겠다고 선언하는 셈이다. 그나마 그들의 말이 옳다 해도, 도대체 가부장적 사회가 더 많은 남성들에게 낮은 IQ를 만들어 주어서 얻을 것이 무엇인지 설명할 길이 없어진다. 남은 길은 반지성주의로 빠지는 길 뿐.

또한 남성들은 밑에서 서술할 위험추구 성향을 보이기 때문에, 인생의 여러 중요한 결정들에 대해서 모 아니면 도, "남자답게 올인" 같은 과감하고 때로는 무모한 결정들을 할 수 있다. 물론 이 결정들은 많은 경우 잘못된 투자를 하게 하고, 범죄를 저지르게 하고, 때로는 자기 몸을 망치기도 함으로써 사회의 밑바닥에 깔리는 남성들의 수를 늘리는 데 공헌한다(…). 하지만 극소수의 결정은 신의 한 수가 되기 때문에, 결국 이들은 운 좋게 성공하여 돈을 벌고, 권력을 잡고, 문화를 발전시키고, 사회를 이끈다는 것이다. 그리고 페미니스트들의 눈에는 오직 이렇게 성공한 남성들만 보인다는 것. 반대로 여성들의 경우에는 전반적으로 안정을 추구하고 좀 더 조심스러우며 온건한 삶을 살아가는 경향이 있어서, 이렇게 하면 문화를 바꾼 인물로서 역사에 이름은 못 남기더라도 만족스럽고 행복한 삶 정도는 살 수 있게 된다. 어찌보면 여성들은 남성들보다 좀 더 합리적이고, 현실적이고, 신중하며, 심사숙고한 경향을 보인다고 긍정적으로 볼 수도 있다.

3.3. 성차는 존재한다, 그러나 능력이 아니라 동기다

"나는 100여 명 규모의 남성 집단이 선박을 건조하고 탐험을 위해 항해하는 것을 동일한 규모의 여성 집단도 똑같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능력이 아니다. 원한다면 할 수 있었지만 여성들은 원하지 않았다. 여성들은 대부분 대규모 집단에서 활동하지 않았다."
- R. F. Baumeister, p. 267

남성과 여성 사이에 성차가 존재할지, 그리고 만약 존재한다면 어느 쪽이 더 높게 나타날지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다양한 생각들이 제안되어 왔다. 저자는 이를 세 가지로 구분하면서, 시간에 따라서 번갈아 가며 인류의 사고를 사로잡아 왔다고 말한다. 첫째, 1960년대까지 막연하게 진실일 것이라고 여겨졌던 통념으로, 남녀 간에는 성차가 존재하며 남성이 여성보다 더 뛰어나고 우월하다는 주장이다. 물론 여성들에게는 다행히도, 이 생각은 1970년대 들어서 남녀 간의 성차는 실제로는 대체로 무시해도 될 정도로 작다는 사실이 밝혀짐에 따라[13] 성차에 대한 회의론으로 대체되었다. 이때 어떤 지식인들은 성차라는 것이 문화에 의한 양육방식에 따라 전적으로 영향 받아 나타난다고 주장하였으나, 저자가 보기에 이는 현실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80년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이제는 성차가 존재하긴 하는데 여성이 남성보다 더 뛰어나고 우월하다는 입장이 나타났다고 하였다. 즉, 여성성은 인류의 이상적 지향점이지만 남성성은 인류의 가장 결함 있는 모습이라는 것이었다.

저자는 현대사회의 이곳저곳에서 남성성을 부족하고 문제 있는 무언가로 묘사하는 경향이 있음을 발견해 왔다. 수많은 소설가들과 수필가들, 비평가들이 "남성이 없는 세상은 얼마나 평화롭고 아름다울지 상상해 보세요!" 와 같은 메시지를 전파하고 있으며, TV 쇼와 시트콤들, 어린이용 도서들의 경우에도 아버지는 날이 갈수록 우스꽝스럽고 희화화되거나 악랄한 이미지로 그려지는 경향이 나타났다. 상업 광고들에서 남녀가 서로 경쟁을 하거나 경기를 한다면, 그 결과는 거의 반드시 여성의 승리로 귀결되었다. 이 문제를 저자 부부가 인식한 이후 10년 동안 쭉 관찰한 결과에 따르면, 남성의 승리를 어설프게 인정하는 단 두 건(…)을 제외한 모든 광고들에서 여성이 승리하는 모습이었다고 한다. 학계의 연구를 통해서도 여성에 대한 긍정적 이미지를 확인할 수 있는데, 성차별을 연구하는 심리학자 앨리스 이글리(A. Eagly) 교수가 우리 사회가 남성에 연결시키는 특성과 여성에 연결시키는 특성을 주제로 연구한 결과, 사람들은 여성을 긍정적 존재라고 표현하는 "여자들은 대단해"(Women are wonderful)의 메시지를 갖고 있었다.[14]

이 와중에 2005년에는 하버드 대학교 총장이었던 로런스 서머스(L. Summers) 교수가 이공계 여교수들에 관련한 설화사건을 일으킨 적이 있었는데, 오늘날의 지식인들은 "수학이나 과학을 잘 하는 사람들 중에는 여성보다 남성이 많더라" 는 단순한 발견을 말하는 것조차도 사회적으로 지탄을 받고 매장당하게 되는 발언이 된다는 게 저자의 탄식이다. 현실적으로 그런 경향이 나타난다고 해도, 가급적 그것은 남성들이 이공계 교수가 되는 것을 체계적으로 지원하는 가부장제의 혜택을 받은 결과로 이해되어야 하며, 그저 대학에서의 성 평등 예산을 더 추가해야 할 근거가 되는 것일 뿐이라는 얘기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이러한 '예민한' 이야기들은 사실 예민할 수밖에 없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저자에 따르면, 성차를 바라보는 시각이 근본적으로 바뀔 필요가 있다. 로런스 서머스 교수를 비롯하여 지금까지의 사실상 모든 사람들은 성차를 이야기할 때 능력(ability)의 관점에서 이야기해 왔다. 즉 이 관점에서는 성차가 존재한다는 것이 필연적으로 어떤 한 쪽의 우월성을 의미하게 될 것이었다. 서머스 교수 역시 이공계 교수들 중에는 남성들이 많다는 이야기를 했지만, 이것이 능력의 프레임에서 해석됨으로써, 마치 "남성들은 원래 여성들보다 수학과 과학을 더 잘 한다" 는 메시지로 읽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 관점의 크나큰 문제점으로서, 이것이 논의를 감정적인 방향으로 오도하고 상대방에게 공격적이게 될 수 있다는 부분을 지적한다. 서머스 교수가 말 한 마디에 매우 곤혹스런 상황에 처하게 된 것도 예상할 수 있었던 일이라는 것.

따라서 저자는 이제 성차를 능력이 아닌 동기의 관점에서 볼 것을 주문한다. 동기(motive)는 약간 다른 맥락에서 본다면 선호(preference)라고도 바꾸어 말할 수 있을 것인데, 즉 이쪽 성이 저쪽 성보다 무엇을 더 "잘 한다"고 접근하는 대신에, 무엇을 더 "좋아하고", 더 "원한다"고 접근하자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성차는 의외로 많은 지점들에서 나타난다. 그러나 이 수많은 성차들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존재한다는 것이 곧 어떤 성별이 더 우월하다거나 하는 의미를 갖지는 않는다. 상단에 인용된 내용을 다시 보자. 100명의 집단을 이루어서 배를 건조하고, 신대륙을 향해 온갖 역경을 무릅쓰고 탐험을 하고 모험을 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유독 남성들이 하던 활동 중 하나였다. 남성은 그런 활동을 할 수 있고, 여성들은 할 수 없어서가 아니었다. 여성들도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여성들끼리 힘을 합쳐서 똑같은 활동을 할 수 있었겠지만, 단지 여성들은 그런 활동을 원하지 않았다. 하기 싫어서 안 한 것이다. 따라서 이를 두고 여성이 남성보다 열등하다고 볼 수는 없는 노릇인 것이다.

설령 능력의 성차가 존재하는 주제라 하더라도 동기로 관점을 바꾸어 볼 때 더 생산적인 논의가 가능해지는 경우도 많다. 예컨대 성욕의 성차는 능력 면에서 본다면 멀티 오르가즘(…)을 경험할 수 있는 여성들이 압도적으로 우월하다. 하지만 성욕을 동기의 관점에서 보면 시도때도 없이 내면의 야수(…)와 싸워야 하는 남성들이 훨씬 더 강한 동기를 갖고 있다. 이렇게 한다면 작금의 포르노 산업이 넘쳐나는 이유에 대해서, 여성성에 대한 분노(?) 같은 막연한 이념적 주장 이외에 다른 방향에서 더 건설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남녀의 성욕의 성차가 동일하다고 생각한다면 어째서 남성들이 그처럼 포르노자위행위 없이는 못 배기는 존재인지 설명할 수 없어지게 되고, 남은 결론은 답정너 식의 "이게 다 여성혐오 때문이다" 정도의 설명뿐이기 때문.

이런 경향은 다양한 주제들을 설명하는 데 중요하다. 예컨대 서머스 교수를 곤경에 빠뜨렸던 주제로 돌아가 보자. 분명, 이공계의 고학력 여성들은 연구자로서의 삶을 중도에 포기하는 경력단절을 경험하고, 흔한 고등학생 수준에서도 여학생들은 수학과 과학에서 크게 두각을 드러내지 않는다. 여기에는 성차가 존재한다. 여성들이 수학과 과학을 더 못 하는 성차가 아니라, 여성들이 수학과 과학을 하라면 얼마든지 할 수 있지만 단지 흥미를 느끼지 못할 뿐이라는 성차가 존재한다. 심지어 한 문헌[15]에 따르면, 수학을 끝내주게 잘 하는 우등생 여학생들조차 좋아하는 과목이나 분야를 고르게 하면 늘 인문학을 선호하고 그쪽으로 진로를 택해 가 버린다는 이야기가 있다. 뒤집어 말하면 인문학 계열의 여성 전공자들은 수포자라서 그쪽으로 간 게 아니다. 어차피 이들은 왕년(?)에는 무슨 과목이든지간에 고르게 고득점을 받았던 똑소리나는 여학생들이었지만, 단지 인문학이 더 좋았기에 그쪽 전공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저자가 본서에서 소개하는 또 다른 주제는, 재즈 연주자들 중에 에밀리 렘러(E. Remler)와 같은 소수의 사례를 제외한다면 대체로 늘 남성이 더 많다는 것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기존에 주어진 악보를 바탕으로 연주해야 하는 장르나 보컬 분야에서는 늘 여초의 경향이 있지만, 작곡이나 즉흥연주처럼 창의력을 활용하여 기존에 없는 무언가를 새로 만드는 분야에서는 남초의 경향이 나타난다. 언뜻 이는 여성이 남성보다 창의력이 떨어진다는 것처럼 보이기 쉽다. 하지만, 이 역시 단지 동기에 있어서의 성차일 뿐이다. 여성들도 필요하다면 작곡을 얼마든지 할 수 있지만, 그런 건 여성들이 원하는 음악활동이 아니라는 것. 남성들은 끊임없이 자신만의 음악세계를 창조하고 새로운 가능성을 개척하는 쪽으로 늘 동기부여되어 있지만, 여성들은 기존에 완성된 작품이나 악곡을 활용하여 분위기를 띄우고 가까운 사람들을 즐겁게 만드는 쪽을 선호했다는 것이다.[16] 반대로 말한다면 남성들도 기존에 완성된 타인의 작품을 연주하는 것은 얼마든지 즐겁게 할 수 있지만, 그들은 한편으로 그런 연주에 있어서도 가능한 한 자기만의 색채를 드러내고 편곡하거나 재해석하는 쪽을 선호할 것이라고 볼 수 있다.

3.3.1. 사회적 삶의 차이: 왜 남성이 문화를 만드는가

성차가 능력의 여부가 아니라 동기의 여부에 달린 것이라는 저자의 제안은, 사실 이상의 이야기보다는 더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 남성과 여성들은 자신의 사회적 관계를 꾸려나가는 데 있어서도 서로 다른 방향으로 동기화된다. 성격심리학에 따르면 남성들의 대인관계에 관련된 성격적 특징은 흔히 주체성(agency)이라는 표현으로 정리될 수 있는데, 주체적이고 독립적이며 자기주장이 강하고 스스로를 실현하려 하는 경향이 뚜렷한 특질을 의미한다. 반면에 여성들의 대인관계에 관련된 성격적 특징은 흔히 공동성(communion)이라는 표현으로 정리될 수 있는데, 이는 가까운 사람들을 돌보고 배려하며 끈끈한 유대감을 갖고 서로를 상호적으로 지지 및 지원하는 경향이 뚜렷한 특질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 유념할 것은, 흔히 남성들이 여성들보다 더 비사회적(asocial)이라는 식으로 오해[17]되곤 하지만, 남성들이 더 자립심이 강하고 독립적이라고 해서 꼭 비사회적인 사람들이라고 볼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는 주체성에 대한 큰 오도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기본적 욕구인 소속의 욕구(N-Belong)는 남녀 모두에게 공히 적용되는 것이다. 물론, 남성들이 소규모의 상호지지적인 유대적 공동체를 형성하지 않는 경향이 더 큰 것은 사실이다. (위의 논의를 잘 따라왔다면, 이것이 "남성들은 그럴 수 없다" 가 아니라 "남성들은 그런 걸 좋아하지 않는다"로 해석되어야 함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회생활은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세상에는 더 큰 사회적 집단에 소속되어서 정치, 문화, 경제, 사회의 여러 기관과 제도, 기업 등에서 공통의 목표를 위해 협동하는 방식의 사회생활도 존재한다. 아니, 남성들은 사회생활이라 하면 일차적으로 그런 것부터 떠올릴 가능성이 높다! 여성들이 사회생활에 대해 흔히 생각하는, 가까운 사람들 사이에서 자신의 평판을 관리하고 주위의 기분을 맞춰주는 등의 그런 것과는 전혀 차원이 다른 개념화인 것이다.

이 지점에서 동기의 성차를 접목시켜 보면 결과적으로 다음과 같은 진술이 가능해진다. 남성들은 사회적 삶을 꾸려갈 때 거시적인 수준의 집단에 소속되어 협동하는 쪽으로 동기화되는 반면, 여성들은 사회적 삶을 꾸려갈 때 가까운 사람들과 친밀하고 끈끈한 유대관계를 형성하는 쪽으로 동기화되는 차이가 발생한다. 물론 때로는 남성들이 끈끈한 유대관계를 형성하거나 여성들이 대규모 집단을 이루어 협력하는 것이 필요한 상황이 있을 수 있다. 그럴 때는 그들도 상대방 성별에 못지않게 잘 할 수 있다. 하라면 할 수 있겠지만 그저 안 하는 것뿐이다. 반대로 자신들이 정말로 동기화되고 선호하는 영역에서의 사회생활을 할 때, 이들은 저마다 자신들의 삶과 열정과 시간과 힘을 아낌없이 투자하여 밀도 있는 삶을 살아가게 된다.

한 가지 사례를 들어 보자. 페미니스트들에 의해서 자주 간과되곤 하는 남녀 간 성차 중 하나는, 직장에서 남성 직원들 사이에는 여성 직원들 사이에서보다 워커홀릭이 훨씬 더 많다는 것이다. 이를 기존의 구태의연한(…) 능력의 성차 관점에서 설명해 보자. 이는 매우 간단한데, 여성 직원들은 그만큼 회사를 위해 자신의 정력을 쏟아부을 능력 자체가 안 된다는 얘기로 이어진다. 인사과 담당자들이 주목해야 할 것은, 동기의 성차로 접근하면 전혀 다른 결론이 나온다는 것이다. 남성들은 회사와 같은 대규모 집단의 일원으로서 자기 자신이 기계장치 속의 나사못처럼 취급되는 걸 감수하고서라도 기꺼이 회사에 몸바쳐 일하기를 추구한다. 하지만 여성들은 그렇게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회사를 위해 그렇게 개처럼 죽어라 일해서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는 것인지" 쉽게 이해하지 못한다. 요컨대 남성들은 직장에서 자기 자신을 하얗게 불태우는 것을 미덕으로 생각하고, 여성들은 직장에서 워라밸을 지켜나가는 것을 강조한다. 남성들은 가정보다 일을 늘 우선시하여 몸도 망가지고 가족관계도 망가지고 사생활도 전부 반납하는 걸 당연히 여기지만, 여성들은 그렇게 일하다가는 금세 현자타임이 오게 되며,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기 위해 때때로 바캉스도 좀 떠나고, 자기 자신을 격려하는 의미에서 스스로에게 선물도 좀 주고, 일하느라 고생한 나를 위한 선물♡ 회사 약속과 동창회 약속이 겹치게 된다면 가급적 동창회를 위해 회사에 빠지려고 기회를 엿보게(?) 된다는 것이다.

남성 위키러들은 이 지점을 읽으면서 '그렇게 놀 거 다 놀아서야 어디 회사의 중책을 맡겠으며, 언제 유리천장을 뚫고 올라가서 권력을 잡을 것이며, 언제 위대한 경영자가 될 수 있겠냐'고 생각할 수 있다. 저자에 따르면 이와 같은 반응은 남성 특유의 동기화이고, 실제로 이런 마인드로 인하여 남성들이 지금껏 문화를 주도해 올 수 있었다.라고 한다. 여성들이 추구하는 사회생활이 틀렸다고 볼 수는 없다. 단지 그것이 문화의 발전과 진보에 딱히 기여하지 않을 뿐이며, 그걸 나쁘다고 말하는 게 바로 남성중심적 시각이다. 여기서 남성중심적 문화의 기원이 등장한다. 문화를 만들고, 유지하고, 관리하며, 이끌어가는 데 더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남성이었지, 여성은 아니었다. 여성들이 남성들처럼 대규모 집단의 진보와 발전&번영을 위해 끊임 없는 노력을 했다면, 우리 문화가 좀 더 수평적인 젠더구도를 가졌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문화는 여성의 영향보다는 남성의 영향을 더 크게 받았다. 인류는 대항해시대에 모험가들의 배에 몰래 승선했다가 운수 좋게 막대한 성공을 거두어 금의환향한 밀항자에게는 큰 영향을 받았어도, 같은 시기에 집 안에 머무르는 동안 기운 옷을 꿰매며 아이들이 커 가는 이야기를 행복하게 나누던 주부들에게는 그다지 영향을 받지 않았다.

물론 어떤 남성들은 워라밸을 강조하면서 안온한 삶을 추구하기도 하고, 마찬가지로 어떤 여성들은 다른 직원들을 압도하는 열정과 전문성으로 회사를 먹여살리기도 한다. 이는 단순한 결론으로 이어진다. 전자의 남성들은 자신이 추구하는 삶을 살아가는 대신, 예외 없이 문화에 크게 공헌하지 못한다. 이 남성은 소위 "문화적 남성권력"과는 그다지 연이 없는 삶을 살아간다. 후자의 여성들은 유리천장을 돌파하여 올라가 알파우먼이 된다. 그러나 여러 성비에 대한 데이터들이 보여주듯이, 이런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소수다. 다른 동료 남성 및 여성들에 비하면, 이들의 삶은 그저 다른 이들이 잘 선택하지 않는 "가지 않은 길" 인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회사를 위해 희생할 것을 요구하는 남성중심적 기업문화는 종종 여성들이 진입해 들어올 때 문제를 일으키기도 한다. 이 여성들은 자신들의 유능함을 적극적으로 어필하면서, 자신을 "남성들과 똑같이 대해 달라"고 으레 요청하게 마련이다. 그러면 그 말을 들은 직장 상사는 그녀에게 '정말로' 남성들과 똑같이 일할 것을 기대한다. 그녀 역시 군말없이 회사를 위해 목숨바쳐 일해야 하고, 다른 모든 일이 있더라도 회사에서 부르면 즉각 달려가야 하고, 사생활 모두 반납하고 오직 회사를 위해 일하다 죽을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회사에서 왜 구태여 그렇게까지 일해야 하는 건지 이해하지 못하며, 오히려 자신의 웰빙과 일상을 무너뜨려 가면서 회사의 노예가 되는 길을 "비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성에 차지 않은 직장 상사는 "이거 봐, 여자들은 회사에 뽑아 봐야 도움이 안 돼" 라고 혀를 차면서, 그녀 때문에 자기 부서의 실적이 떨어질 것을 걱정한다.[18] 결국 일터에서 소외당하고 배제당하는 것을 느낀 그녀는 (자기 관점에서 사회생활이란 원래 상호지원적인 유대감의 공동체라고 생각하고 있으므로) 직장의 남성 동료들이 죄다 자기들끼리만 업무 정보를 공유하고 자기들끼리만 "부둥부둥" 하며 도와줘 주면서 자신 혼자만 그 유대감의 공동체(?)에서 따돌린다고 믿게 된다. 처음부터 그 남성 동료들은 이름만큼은 아름다운 무슨 "유대감의 공동체"는 커녕 회사를 위해 저마다 가혹하게 갈려나가는 와중인데 말이다. 이 회사에서는 다른 양상의 사회생활이 펼쳐지고 있음을 누군가 상기시켜 주지 않는 한, 이 여성은 혼란에서 벗어나기 힘들 것이다.

이러한 동기의 차이에는 진화적인 압력, 구체적으로는 성선택의 압력이 작용해 온 것이 하나의 원인이라 여겨진다. 4장에서 이를 길게 풀어 설명하고 있지만, 결과론적으로 말하자면 남성들은 가능한 한 위험을 추구하고 창의적인 방안을 모색하며 기회가 닿는 한 섹스에 적극적으로 임하도록(…) 동기화된 개체들만이 살아남았다. 남성들은 다른 남성들을 압도하고, 따돌리며, 앞서나가고, 최소한 다른 남성들과 차별화되는 독특성이라도 보여주어야 자손을 재생산할 수 있는 기회라도 얻을 수 있었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남성들은 닥치는 대로 뭐든간에 해야 했다. 다시 말해서, 위험을 추구하는 쪽으로 동기화된 남성들은 다른 남성들보다 앞서나감으로써 재생산의 기회를 더 많이 얻을 수 있었다. 가만히 앉아서 추월당하는 것보다는 뭔가 도박이라도 해서 그것에 자신의 대를 남기는 기회라도 걸어보는 게 낫지 않은가. 그리고 저자가 본서에서 동기의 차이와 관련하여 힘주어 지적하는 또 다른 진화적인 압력은, 남성들이 대규모 집단에 소속되어 분골쇄신하기를 선호할수록 그 남성들은 재생산에 유리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문화가 그 배후에 존재한다.

3.3.2. 남성을 갈아넣는 문화: 일해라 핫산!

저자가 채택하는 접근방법은 문화를 마치 진화론에서 생물종의 각 개체들을 대하듯이 바라보는 것이다. 어떤 종의 개체들이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한 개체들만 남겨지고 나머지는 도태되면서 점차 경쟁력을 키워 가서 번영하듯이, 여러 문화권들 중에서 조금이라도 더 혁신적이고 진보적이며 효과적인 문화는 그렇지 못한 문화를 앞서나가게 되고, 결국에는 전자의 문화가 후자의 문화를 멸절시키거나 내지는 지배하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문화가 효과적인지를 판단하는 기준은 의외로 단순한데, 구성원들의 삶의 물질적인 수준을 높여서 빠르고 안정적인 재생산이 가능하게 하고, 마침내 인구를 증대시키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도 자연주의의 오류를 조심해야 한다. 더 효과적인 문화가 덜 효과적인 문화를 압도한다는 기술(description)은, 그렇게 해야만 한다거나 내지는 그렇게 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다는 규정(prescription)이 될 수 없다. 저자가 지적하는 인류 문명의 냉혹한 측면은, 세상에는 전쟁이 존재하고 이를 통해서 더 성공적인 문화와 그렇지 못한 문화가 가려진다는 것이다. 유전자의 관점에서 인간들을 줄세우기를 한다면, 저자에 따르면,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을 한 명만 꼽을 때 거의 반드시 칭기즈 칸이 될 거라고 한다. 유라시아 대륙의 숱하고 숱한 민족들 속에서 그의 유전자가 광범위하게 전해져 내려오는 것은 고금의 그 어떤 남성도 이루어내지 못한 성과라는 것. 마찬가지로 그가 통치하던 몽골 제국은 아시아와 유럽의 그 어떤 다른 문화들에 견주어 보더라도 이견의 여지 없이 가장 "성공적"이라고 평가될 만한 문화라는 얘기다. 그러나 현대의 보편적 윤리의 측면에서 볼 때는 그렇게 성공적이라고 판단할 수 없을 것이다.

사실 전쟁이라는 것은 굳이 환원한다면 남성 집단 간의 경쟁이 과격화된 양상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스티븐 핀커(S. Pinker)가 지적하듯이 현대사회에 들어서 점점 전쟁은 줄어들어 오고 있다지만, 남성들의 유전자에 각인된 본능에 따르면 전쟁은 단지 뼈와 살이 튀기지 않을 뿐이지 지금도 지속되고 있을 따름이다. 경쟁 업체를 따돌리고 자신의 회사를 시장에 안착시키는 것, 상대방 정당에 대해 흑색선전을 함으로써 자신의 정당이 반사이익을 얻게 하는 것, 상대방 팀의 키커가 승부차기를 준비하는 동안 있는 힘을 다해 야유를 퍼붓는 것 등등이 전부 유전자의 관점에서는 전쟁과 다를 바가 없다. 이렇게 보면 남성의 가장 큰 적은 바로 남성, 즉 남적남이 성립한다. 페미니스트들의 주장과는 달리, 남성의 적은 여성이 아니며,[19][20] 남성들은 공통의 기득권을 위해 (유대적 공동체 비슷한 무언가로) 연대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서로 편을 갈라 싸운다! 남성들은 상대방 남성 외집단을 무너뜨릴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여성들을 자기 편으로 만들 준비가 되어 있다. 남성들이 "진짜로" 작정하고 전쟁 준비를 하는 것에 비교한다면, 어떻게 보든지간에 남성들은 여성들에게 적대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서로 다른 문화가 충돌할 때 인명을 해치지 않는 양상으로 경쟁한다면 양측에는 좋은 일이지만, 만일 전쟁이 수반된다면 이제 상황은 심각해진다. 더 효과적으로 군비를 동원하고, 기꺼이 국가를 위해 목숨바칠 준비가 된 남성들을 더 많이 징발하며, 더 똑똑한 장교들을 양성할 수 있는 문화는 살아남고, 그렇지 못한 문화의 남성들에게는 유전정보 전수의 단절만이 기다릴 뿐이다. 그렇게 승전국 남성들의 유전자가 패전국의 여성들에게도 전해진다. 사람들의 행복과 단란한 삶의 관점에서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유전자가 전쟁을 극도로 써먹어 왔다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승전에 필요한 삶의 요소들을 담고 있는 유전자는 현대에까지 계승되었고, 결과적으로 가장 효과적인 문화들이 현대에까지 살아남았다.

그렇다면, 이제 전쟁을 하기에 가장 적합한 남성들의 동기화 경향성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대답할 준비가 되었다. 바로 국가(대규모 집단)를 위하여 얼마든지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쳐서 갈려나갈 마음의 준비를 끝낸 남성들이 전쟁에 가장 적합하다. 이런 남성들이 승전국의 남성이 되어서 자신의 유전자를 보존할 수 있었고, 좀 더 마이웨이 성향이 강하고 반-전체주의적(?)인 남성들을 더 많이 가진 문화권은 패전국이 되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현대의 남성들은 승자의 유전자들을 주로 물려받았기에, 오늘날에 이르러서도 대체로 남성들은 자신이 몸담은 집단을 위해서 기꺼이 희생하고 봉사하는 것에 상당히 호의적인 태도를 보인다. 그리고 문화 역시 이를 잘 '알고' 있기에, 가능한 한 이런 남성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진보를 이루어낸다.

문화가 남성을 활용하는 방식은, 누가 봐도 사지인 게 뻔한 전쟁터로 남성들을 가차없이 밀어넣는(…) 전쟁의 양상에서도 보듯이, 다분히 "소모적" 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문화는 남성에 대해서는 목숨은 내다버리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저자가 직접 예를 든 바 독소전쟁의 사례에서 보듯이 남성들이 아무리 죽어나가더라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기도 한다. 또 다른 저자의 예를 들자면 타이타닉 호의 레이디 퍼스트가 있다. 1등석 신사들의 생존율(34%)보다 3등석 아낙네들의 생존율(46%)이 더 높았던 것은, 결국 우리 문화가 남성의 목숨을 그만큼 하잘것없이 여기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문화는 대개 여성들의 생명에 대해서는 의외로 끔찍하리만치 아끼는 경향을 보인다는 것.[21] 이를 설명하기 위해 저자는 음경 과잉(penis surplus)이라는 용어를 제안한다. 문화가 번영하기 위해서는 인구의 증대가 필요한데, 여기에 필요한 여성의 수는 언제나 수요가 공급을 초과하는 반면, 여기에 필요한 남성의 수는 언제나 공급이 수요를 초과한다는 것이다.[22] 그렇기 때문에 문화는 남성들에 대해서는 딱히 아쉬울 게 없다. 물론 남성들도 상기했듯이 천재들이 많은 만큼 아무나 위험하고 궂은 일을 시킬 수는 없으니, 소수의 남성 엘리트들은 꼭꼭 숨겨두고 온갖 권리와 혜택들을 몰아주면서, 다수의 "내버려도 되는" 남성의 인명은 아무렇지도 않게 사지로 몰아넣는다. 살아 돌아오면 문화의 생존을 위해 수고한 대가치고는 다행인 것이고, 죽어 돌아오면 그냥 제 팔자라는 식. 레이디 퍼스트지뢰찾기총알받이로 여성들을 내모는 전통에서 유래했다고 떠드는 페미니스트들 보고 있나?[23] 물론 정말로 아무렇지도 않게 인명을 취급하면 남성들의 사기가 떨어질 게 뻔하므로, 희생자에 대해서 그만큼의 예우와 (여성과 어린이로 구성된 유족들에 대한) 보답은 빼놓지 않는다. 산업재해의 경우에도 남성 사망자는 여성 사망자보다 유가족에 대한 금전적 지원의 폭이 더 크다.

그렇다면 이런 비극적(…)인 남성들의 굴레에서 한발 물러나 있는 듯한 엘리트들은, 최소한 이들에 한해서라면, 페미니스트들의 설명대로 온갖 기득권과 이익들을 전부 받아챙겨 가며 세상을 발 아래에 두고 다른 모두를 착취하고 억압하면서 강자의 유열을 즐긴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저자에 따르면 이조차도 사실이 아니다. 문화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런 극소수의 천재들은 투입량에 비해서 산출량만큼은 그야말로 확실하므로, 쥐어짜면 쥐어짤수록 그 문화는 실시간으로 발전하고 진보할 수 있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엘리트들이 제일 보답도 많이 받지만, 한편으로는 제일 고생도 많이 한다. 사실상 인류 문화는 이런 소수의 타고난 천재들의 등골이 부러져 가면서(…) 얻어낸 성과물들을 바탕으로 세워졌으며, 그 모든 이득을 모든 남성들과 모든 여성들이 나누어 가졌다는 얘기다. 재계의 큰손들이 분 단위로 일정을 쪼개 가면서 전세계를 돌아다니는 것, 유능한 금융업 종사자들이 와이드 모니터 석 대를 앞에 두고서 점심을 김밥 한 줄로 때우고 넘기는 것, 희대의 천재들이 모였다는 실리콘밸리 연구소에 수염도 제대로 못 깎고 광대뼈까지 다크서클이 내려온 반 좀비급의 연구원들이 어슬렁거리는 것 등등이 다 같은 얘기다. 당장 2018-2019년에 손흥민 선수가 국가대표팀과 토트넘 핫스퍼에서 혹사 논란이 공공연히 제기될 정도로 뛰던 걸 생각해 보라. 정말이지 표현 그대로, 문화가 유능한 남성들을 취급하는 꼴은 딱 "핫산" 수준이다.

저자는 시드니 시에서 유람선 관광을 하는 동안 초호화 저택들을 많이 보았지만, 대부분의 집들은 낮 동안 텅 비어 있었으며 그나마 보이는 사람도 전부 여성뿐이었다고 언급한 바 있다. 가혹하게 갈려나가는 우리 사회의 남성 엘리트들은, 그 보답으로 엄청난 금전적 보상과 명예와 권력을 얻지만, 정작 본인은 제대로 써 보지도 못한다. 이렇게 가학적(?)일 정도로 일한 대가로 벌어들인 돈으로 스스로의 건강도 챙기고 인생도 좀 즐기고 해야 이치에 닿을 것 같은데, 그게 아니더라는 얘기다. 이렇게 모인 금전은 결국 이 남성의 아내와 자녀들이 누리게 된다. 물론 이들 남성들이 억울해할 만한 상황은 아니겠지만, 돈 버는 사람 따로, 돈 쓰는 사람 따로 있다는 얘기다. 이처럼 성공적인 문화에서는 대개 "남성 부양자"로서의 특징이 나타나며, 남성에서 여성으로의 부의 이전은 남성들에게 "한 사람 몫을 하고 싶다면, 네 밥 값은 스스로 벌어라. 네 가족들까지 먹여살릴 수 있을 정도라면 더 좋고!"를 요구한다.

이는 문화가 어떻게 남성들을 개처럼 굴릴 수 있는가와도 관련되어 있다. 많은 문화권에서는 남성성을 귀속 지위가 아닌 성취 지위로 간주한다. 즉, '소년이 되는 것' 은 그냥 그렇게 태어나는 것이지만, '남자가 되는 것'은 뭔가 그럴싸한 업적을 세워야 한다는 것이라고 본다. 저자는 소비량보다 생산량이 더 많을 때 비로소 남성으로서 자기 몫을 한다는 인정을 받는다고 지적하면서, 남성들이 자신의 남성성을 추구하기 때문에 이를 동력으로 삼아서 일터에서 기꺼이 갈려나가려 하는 것이라고 제안한다. 아내가 남편보다 돈을 많이 벌어올 때 남편이 스트레스를 받는 이유, 가장이 실직한 이후 발기부전으로 고통 받기 십상인 이유 역시 돈을 번다는 것이 남성성의 획득과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 이런 심리가 존재하기 때문에, 남성들은 자기 자신이 남성이라는 사실을 어떻게든 확인받고야 말겠다는 단순한(?) 일념 하에 회사의 개가 되기를 기꺼이 자처한다. 이런 남성들이 모이고 모여서, 결국 우리 문화는 수많은 뭇 남성들의 피땀어린 희생과 헌신으로 조금씩 발전해 나가고 있으며, 와중에 운 좋게 발견한 소수의 천재 남성들에 대해서는 그만큼 가혹하게 착취함으로써 비약적인 진보를 이루어내고, 그에 대한 정당한 수준의 보답을 함으로써 남성들의 동기부여를 유지한다.

문화가 남성을 갈아넣기 위해 소수의 엘리트들에게 충분한 예우와 보답을 하는 한편으로, 문화는 또한 그렇지 못한 다수의 남성들에게 "존중의 결여", 즉 공공연히 모욕을 가하여 자극하기도 한다. 실제로 남성성이 극명한 집단에서도 자주 나타나지만, 군에 갓 입대한 신병들에게 너희들을 이제부터 진정한 남자로 만들어 줄 것이며 그 전까진 남자도 아니라고 고함치는 고정관념적 교관의 이미지나, 축구 경기에서 패색이 짙은 전반전을 끝내고 라커룸에 들어온 선수들에게 험하게 욕을 하고 모욕을 주는 수석코치의 이미지, 자기가 지도하는 학생들이 답을 찾지 못할 때마다 교묘하게 비웃고 공공연히 망신을 주는 시니컬한 물리학 교수의 이미지 등등이 전부 그 사례다. 흔한 말로 "고추 떼라 그냥!"과 같은 관용적 표현들은 바로 문화가 남성들을 자극하는 방식인 것이다. 문화는 이런 말을 듣는 후배 남성들이 더욱 자극받아서 간절하게 (혹은 복수심에 가득 차서) 유능함과 위대함을 추구하게 되기를 원한다. 영화 《풀 메탈 재킷》 의 하트먼 중사나 영화 《위플래쉬》 의 플래처 교수 등은 괜히 나온 캐릭터 설정이 아닌 것. 물론 이들이 점차 유능함을 키워 갈수록 모욕의 정도는 줄어들지만, 아주 사라진다고 확신할 수는 없다.[24]

3.4. 결혼, 남성들의 함정

문화가 남성들을 부려먹는(…) 또 다른 중요한 방식이 바로 결혼이라는 제도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문화가 번영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조건들 중 하나가 바로 인구의 증대이다. 세상이 꼭 산술적으로 돌아가는 건 아니긴 하지만, 아무래도 인구가 더 많은 쪽의 문화는 다른 것들이 엇비슷하지만 인구는 더 적은 쪽의 문화를 제압하기에 더 수월하다. 문화는 이를 위해 그 구성원들의 성욕을 열심히 부추겨야 하고, 다행스럽게도(?) 이미 남성들의 성욕은 늘 완전히 채워지지 못한 상태로 허덕이고 있는 상태이다. 따라서 문화는 인구의 증대를 위해 남성들의 성욕을 최대한 써먹어 보자는 쪽으로 제도를 갖추게 된다.

물론 문화가 섹스를 가능한 한 장려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허용해서 부모 없는 아기나 가정의 붕괴, 사회적 혼란과 같은 무질서를 초래할 정도의 제약 없는 섹스파티(…)까지 긍정하지는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적 혼란을 초래할 수 있는 다른 방식들보다는 가급적 일부일처제를 통해 안정을 도모한다. 놀랍게도 이 지점에서 문화는 현대의 행동주의자들이 프리맥의 원리(Premack's Principle)라고 부를 수도 있을 법한 미끼를 던진다. 즉, 남성들에게 섹스를 인센티브로서 활용하여, 남성들이 생산적 활동에 참여하면 참여할수록 그만큼 성욕을 충족시킬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 관점에서 보면 결혼이란 곧 남성이 여성을 금전적으로 부양하는 대신 평생 그녀의 성을 소유할 수 있는 권리를 구매하는, 일종의 그럴싸한 성매매 제도라고도 할 수 있다. 성욕을 충족해야 한다면, 일단 사회적으로 제 밥값은 할 줄 알아야 하고, 그렇게 돈을 벌어서 비싼 데이트 비용이나 약혼 반지를 감당할 정도의 재력이 됨을 확인하면, 비로소 한 여성의 몸을 평생 동안 구입하여 그녀만을 대상으로 즐기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걸로 이야기가 끝나는 건 아니다. 남성들은 만성적으로 성욕이 높기 때문에, 중년 부부조차 연구자들이 "한 달에 섹스를 얼마나 자주 하시나요? 본인이 원하는 섹스 빈도는 어느 정도인가요?" 의 두 가지 질문을 하면 아내들은 대개 두 질문에 대한 대답이 비슷하게 나오는 반면, 남편들은 대개 전자보다 후자에서 월등히 높은 숫자를 부른다고 한다(…).[25] 남성들은 만성적인 욕구불만을 겪으면서도 아내에 대한 정절을 지키기 위해 지나가는 여성들을 바라보는 것조차 제대로 할 수 없다. 게다가 거의 대부분의 여성들은 나이가 들어갈수록 신체적인 매력이 감소하게 되며, 이는 남편들에게 상당한 스트레스가 된다. 저자에 따르면 이 지점에서 불륜의 유혹이 찾아오게 된다고 하며, 아직 아내가 젊을 때인 신혼 시절에 정절 서약을 하는 것은 남성들에게는 "지키지 못할 약속"이라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화는 어쨌건 그것이 가능하다고 남성들이 믿게 만들어야 한다. 결국에는 아내에 대한 성적인 아쉬움을 느끼는 날이 언젠가 온다는 것을 이들이 깨닫게 되면, 결혼이라는 제도 자체의 존립이 위협받을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 그렇기 때문에 문화는 아직 철없을 20대 즈음의 남성들에게 "신혼의 낭만"이니 "위대한 사랑의 힘"이니 하는 온갖 핑크빛 판타지를 늘어놓게 된다고 한다. 물론 결혼 이전의 소위 '프리 섹스'에 비하자면 아쉬움을 느낄 남성들도 있겠지만, 최소한 "이 여자야말로 내 여자다"라는 불타는 듯한 열정은 평생 그녀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생각을 심어줄 수 있다고.

문제는, 20대의 남성들에게 있어서 결혼이 이처럼 로맨틱하고 이상적이고 설레는 일처럼 느껴지더라도, 현실은 대개 그렇지 못하다는 점이다. 흔히 연애 권력이라는 표현이 돌고 있지만, 결국에는 연애 권력이라는 것도 30대 이후로 넘어가면 뒤바뀌게 된다. 저자에 따르면, 20대 시절에는 칼자루가 여성에게 있다. 이때의 남성들은 금권력도 거의 없고, 생활도 불안정하며, 냉정하게 보면 가정을 이룰 수 있을 만큼의 사회경제적 능력을 갖추고 있지 못한 상태이다. 반면 20대의 여성은 신체적으로 성적인 매력이 절정에 달해 있는 시기이며, 딱히 당장 한 남자에게 의존해야 할 필요성 또한 그다지 느끼지 못한다. 즉, 20대에는 아쉬운 쪽이 남성이다. 그러던 것이 나이가 들면서 상황이 반전되어, 칼자루가 남성에게 넘어간다. 30대 이후의 남성은 대개 자립하고, 안정적인 수입원이 있으며, 상당한 사회적 지위에 올라서는 경향이 있다. 반면 30대 이후에 결혼을 희망하는 여성은 신체적 매력이 점점 감소하게 되고, 영영 결혼에 골인하지 못할 것 같아서 다급해지게 된다는 것.[26] 즉, 노총각과 노처녀가 만나면, 아쉬운 쪽은 노처녀 쪽이다. 20대의 ""으로서의 여성들이 남성에게 선뜻 섹스에 응했다가 자칫 성적으로 착취당할까 걱정한다면, 30대의 ""으로서의 남성들은 여성에게 선뜻 돈을 쏟아부었다가 자칫 금전적으로 착취당할까 걱정한다. 다른 표현으로 말하면, 20대의 여성들이 성적 접촉의 '진도'를 마음껏 늦추는 갑질을 할 수 있듯이, 30대의 남성들은 금전적 헌신의 '진도'를 마음껏 늦추는 갑질을 할 수 있다. 물론 이거 다 남성 쪽에서 번듯한 직장을 갖고 경제적으로 자립했을 때를 가정하는 것이니, 히키코모리 백수 니트들은 너무 좋아하지 말자.

이상의 이야기를 냉정히 정리하면, 남성들은 20대 때 결혼하느니 차라리 30대 이후에 느긋하게 결혼하는 쪽이 더 합리적이다. 하지만 남성들이 늦게 결혼하면 할수록, 문화의 입장에서는 남성에게서 여성으로의 부의 이전은 늦어질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문화는 남성들이 사랑에 한창 눈멀어 있을 순진한 나이에 마치 그 사랑이 평생 영원할 수 있다는 식으로 감미롭게 유혹하고,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리기 전에 연인과 결혼하겠다는 서류에 도장을 찍을 때까지 남성들을 몰아 간다. 남성들이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이미 너무 늦었다. 이미 자신은 사랑의 열병에 빠진 심신미약(?) 상태에서 누군가와 섣불리 결혼해 버린 채, 지금껏 그 사람에게 코가 꿰여서 단물(?)을 쪽쪽 빨리는 처지가 된 것이다. 그나마 그 상대방이 여우 같은 마누라와 토끼 같은 자식들이니 참고 있을 뿐. 결국 사랑의 로맨스 어쩌고 하는 아름다운 이야기는 남성을 겨냥하는 것이다. 결혼생활의 시궁창은 적당히 가리고, 막연한 동경심과 환상에 호소하여 평생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의 계약을 맺게 한다는 점에서는 큐베 저리가라할 문화적 전략인 셈.

결국, 문화가 이렇게 억지스럽게 결혼을 유지시키는 이유는 결혼을 통해 남성에게서 여성으로의 안정적인 부의 이전이 성립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가장 크게 걸림돌이 되는 것이 바로 이혼으로, 이혼은 돌싱남에게는 큰 경제적 어려움을 초래하는 것은 아니지만 돌싱녀에게는 대체로 큰 위기를 맞게 할 수 있다. 특히나 아직 양육해야 할 미성년의 자녀가 있을 때에는 더욱 그렇다. 문화의 관점에서 이혼은 전력을 다해 막아야 할 문제이며, 설령 이혼을 허용하더라도 부의 이전은 최소한 보장해 주려고 한다. 그래서 많은 문화권들은 일차적으로 이혼을 법적으로 금지하려 하거나, 이것이 안 될 때에는 일부다처제를 실시하거나, 처첩제를 실시하거나, 이혼을 허용하되 남성이 여성에게 위자료를 지급하고 양육비를 지원할 것을 법적으로 명시하는 등의 조치를 취한다. 이혼 시 여성 측이 남성 측의 재산을 "왕창 떼어 간다"고 흔히 받아들여지는 이유는, 결국 문화가 그 쪽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문화는 여성들이 남성의 재력에 어느 정도 빌붙는(?) 처지임을 반영한 채로 굴러가고 있는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현대사회는 점차적으로 결혼의 구속력이 약화되어 가는 추세라고 한다. 실제로, 남성들이 점점 더 늦은 나이에 결혼하려 하는 경향이 확산되면서 선진 서구사회의 인구 증대 역시 한계를 맞이하고 있으며, 더 이상 남편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하지 않는 직업여성들이 증가하면서 맞벌이 부부가 흔해지고, 세계화로 교통과 통신이 발달하면서 부부들이 점점 물리적으로 서로 떨어질 기회가 많아지며, 시민 결합이나 동거 등의 대안적 결혼제도들이 다수 출현하고, 졸혼 등의 이슈가 떠오름에 따라 이혼에 대한 긍정적인 시선이 늘어나며,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섹스 로봇과 같은 성욕 관련 산업들이 확산될 것이라는 예측은 하나하나가 결혼제도에 대한 큰 위협이 될 수 있다. 문화의 관점에서는 가히 좋은 일은 아니겠지만, 저자가 추정하듯이 뭇 남성들에게는 만성적 섹스 결핍 상황을 어느 정도 해소시켜 줄 수 있다는 점에서 희소식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3.5. 페미니즘 학문하기

주제가 주제인 만큼, 본서에서는 페미니즘에 관련된 이야기가 자주 나온다. 저자는 자신이 "진정한 페미니스트"라는 식으로 말하거나 하진 않지만, 저자 연배의 남성들은 대체로 1970년대 이전까지의 리버럴 페미니즘에 대해서 좋은 기억을 갖고 있으나 이후 페미니즘이 급진화되면서 남성 적대적인 성향으로 변모한 이후로는 페미니즘이 불편하게 느껴진다고 토로한다. 1장에서 저자는 이들을 "성 대결에 집착하는 싸움꾼들"이라고 말하는데, 이들이 항상 말하는 젠더 정치학(gender politics)은 남녀가 본질적으로 갈등 관계라고 이해하게 만드는데, 저자가 보기에는 실제로 남녀는 적대하는 관계가 아니라는 것이다. 상기했던 사례처럼 출산 중 산모사망률을 크게 낮추는 데 도왔던 사람들이 바로 남성들이기도 했고, 서프러제트 당시 일부 남성들이 폭력을 동원하여 여성들을 억압하긴 했지만 그보다 훨씬 많은 남성들은 여성이 투표에 참여하는 것에 대해 반감을 갖지 않았다는 것. 그러나 어딜 가나 늘 튀는 놈이 주목 받게 마련이고, 과격할수록 세간의 시선을 끄는 경향이 있다는 것. 이는 여성을 적대하는 남성이나 남성을 적대하는 여성이나 매한가지라고 한다.

이와 관련하여 저자가 추가로 드는 개인적 일화가 있는데, 저자가 몸담고 있는 대학교에서 젊은 조교수들의 과중한 업무를 지원하기 위한 프로그램을 도입할 것이 논의되고 있었다고 한다. 대체로 조교수들은 연구자로서는 전성기이기 때문에 가장 활발한 연구성과를 내야 하고, 그러면서도 교수진에서는 젊은 축에 들기 때문에 학부생들의 진로상담과 같은 학생지도를 해야 하며, 나이 지긋한 원로교수들이 헛기침하는 동안 학과의 대소사를 챙겨야[27] 하고, 결국 이 모든 업무량으로 인해 "번아웃"되어 버린 젊은 연구자가 경력을 이어가지 못하고 탈락하고 만다는 것. 그리고 이는 특히 여성으로서 교수가 된 연구자들이 더욱 심하다는 것이다. (상기 논의를 잘 따라왔다면, 여교수들이 이를 버티지 못하는 것이 "능력이 부족해서" 가 아니라, 대학을 위해 그렇게 갈려나가야 하는 처지를 "이해할 수 없어서"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저자가 지적하는 것이 두 가지 있다. 첫째, 여교수들의 처지를 안쓰럽게 여겨서 커리어 지원 프로그램을 만들자고 자발적으로 제안한 사람들은 바로 학과 내 기득권을 가진 남성 교수들이었다. 둘째, 자신들을 위한 지원정책이 새로 만들어지고 있다는 걸 알게 된 그 대학교의 여교수들은, 똑같이 고생하기는 남녀 모두 피차일반이므로 남성 조교수들에게도 해당 프로그램의 혜택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고 역으로 제안했다. 결과적으로 그 새 프로그램은 모든 조교수들을 대상으로 실시되었다. 여기서 저자가 묻는 것은, 도대체 이 사례의 어딜 봐서 남녀가 서로 적대하냐는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페미니스트들은 주로 그런 반례에는 크게 관심을 갖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들은 사회적 억압을 설명하기 위해 다양한 통계 데이터들을 제시하지만, 대개 그 통계는 동료 사회과학자들의 합리적인 검토를 통해서 얻어진 해석을 따르지 않고 자의적으로 오용된다고 한다. 물론 통계를 올바른 방식으로 조심스럽게 해석한다면 다행이겠지만, 자신이 전심전력으로 신봉하는 대전제를 미리 정해놓고 그것을 뒷받침하기 위해 통계를 거론한다면 이는 심각한 오도를 초래한다는 것. 특히나 그 대전제는 늘 "가부장적인 남성권력의 억압과 착취"이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이를 뒷받침할 수 있어 보이는 데이터가 나오면 다른 모든 데이터들은 도외시하게 되고, 설령 일관된 데이터를 얻게 된다 하더라도 다른 모든 설명들을 다 제쳐두고 결론으로 도약해 가게 될 수 있다는 게 문제다. 우연히도 이 책이 출판되고 몇 년 못 가서, 사회심리학계에도 이념에 의한 체계적 편향성(systematic bias)이라 하여 이 이슈가 뜨거운 감자로 떠오르기도 했다.

저자가 읽었던 책 중에서 《Professing Feminism》 이라는 책에 따르면, 여성학계는 저자가 본서에서 제시하는 것과 같은 다양한 대안적 논리들을 그저 외부인의 참견이라고 여기고 묵살하는 등의 학문적 고립을 야기하고 있다. 학계가 연구기관이 아니라 운동가 양성기관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페미니스트들은 서로에게 거의 비판을 하지 않으며, 그저 관심이 있는 것은 자신들의 신조와 사상에 얼마나 순수하게 전념하고 있는지에 대한 것뿐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 굳이 비판을 한다 해도 수정주의자 개량주의자 동료가 페미니즘의 정신을 해치거나 권력과 타협하려 하는 것을 발견할 때뿐이라는 것. 반면 저자가 몸담고 있는 심리학과 같은 다른 분야들에서는 주로 새로운 사실을 밝히기 위한 연구방법론통계적 방법, 이론적 조망을 놓고 논쟁을 하는 데 집중하며, 참신하고 건전한 논쟁이 벌어지는 것이 오히려 장려된다. 따라서 저자는 교수 생활을 어느 정도 하다 보면 저런 류의 집단을 봤을 때 대충 견적이 나오기 때문인지 페미니스트들과 굳이 논쟁하려 하지 않으며, 본서 역시 그들을 설득하기 위한 목적으로 쓴 것도 아니라고 한다. 결국 저자가 페미니즘에 대해 가장 크게 지적하는 것은 학문함의 자세라고 할 수 있다.

나무위키에 한하여 생각건대, 페미니즘에 관련된 연구들에서 실제로 담론의 과포화가 발생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학문 내적인 문제제기가 제기될 필요성이 있어 보인다. 일반적으로 사회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담론을 동원할 경우, 우선적으로는 논문에서 세우는 논리가 그 담론을 얼마나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를 살필 필요성이 분명 있지만, 그 다음으로는 그 담론이 현실을 얼마나 잘 설명하는지, 대안적 설명은 없는지를 반드시 살펴야 한다. 여타 사회과학계에서도 이론적 조망에 대하여 명확히 이해함으로써 첫째 조건을 선결시키지만, 더 나아가서 실증적이거나 질적인 방법을 통하여 반드시 그 이론적 조망이 주어진 현실을 설득력 있게 설명해 내도록 노력한다. 안타까운 것은, 여성학계 및 인접분야들에서는 담론의 설득력을 담론으로 담보하려는 경향이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들이 논문을 준비할 때 가장 많이 가해지는 피드백은 과연 저자가 보부아르의, 소쉬르의, 마르쿠제의, 들뢰즈데리다의, 푸코의, 바르트의, 버틀러의, 파농의, 크리스테바의, 브라이도티의 사상을 얼마나 제대로 이해했는가에 주로 집중되는 경향이 있다. 이처럼 담론에 담론이 얽혀서 한데 뒤엉키고, 사변적 논의와 (심지어 다분히 유희적이기까지 한) 지적 현학이 어우러지면서, 담론 자체의 내적 정합성은 진보하지만 점점 현실과 유리되어 갈 위험이 있다.[28] 이들이 사실상 실증적 접근 자체를 거부하고 회의하는 근거로서 입장 이론(standpoint theory), 즉 과학적 시각과 방법 자체가 연구자의 가부장적이고 남성중심적인 시각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논리를 드는 것도 마찬가지 맥락으로 보인다. "입장 없이 기술 없다", "과학자는 젠더 평등할지 몰라도 과학계는 젠더 불평등하다"와 같은 선언과 슬로건들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4. '억압' 가설에 대한 대안들

※ 이하의 서술은 "기존의 설명에 대한 대안적 설명" 으로서 제시된 것으로, 만일 "오해와 진실" 내지는 "거짓말에 대한 반박" 으로 표제어가 바뀌게 되면 학문적으로 매우 심각한 오도와 왜곡을 초래한다. 사회과학에서, 특히 사회심리학에서 대안적 설명(alternative explanation)이라는 표현은 기본적으로 반론(counterargument)의 뉘앙스를 가지면서도, 그 강도는 거의 "기존 주장의 재고 요청", "추가적 요인의 고려 필요" 수준으로 약하다.
  • 임금격차 : 여성이 남성보다 실제로 임금을 더 적게 받는다고 한다면, 가부장적 사회가 여성들이 많은 임금을 받지 못하도록 공모하고 있기 때문인가?
    • 남성들은 더 높은 임금을 받기 위해 더 오랫동안, 더 위험한 일을, 더 스트레스 많은 일을, 기꺼이 감수할 의향이 있다. 하지만 여성들은 일터에 자신의 삶을 그렇게까지 꼭 바쳐야 하는지에 대해 회의적이다. 남성들은 여성들에 비해 위험한 임금협상에 더 적극적이고, 이는 많은 경우 사측을 납득시키는 데 실패하지만 그래도 성공적인 소수는 자신의 임금수준을 높인다. 남성들은 여성들보다 안온한 삶을 덜 즐기고, 하이리스크 하이리턴을 더 선호한다. 그 결과 어떤 남성들은 그 "리스크" 탓에 사회의 하층부로 전락하지만, 어떤 남성들은 그 "리턴" 덕분에 사회의 상층부로 도약함으로써 여성들이 상상할 수 없는 임금을 챙긴다.
    • 임금격차의 데이터는 바닥 효과를 일으킨다. 즉, 그 데이터의 상한선이 없지만, 하한선은 0 내지는 최저임금이라는 명확한 한계가 존재한다. 남성들 간의 임금의 격차는 여성들 간의 임금의 격차보다 크기 때문에, 바닥 효과가 존재할 때 저임금 남성 집단은 최저임금의 혜택을 입어 사라지게 되고, 고임금 남성 집단은 상한선이 없기 때문에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는다. 만일 평균비교를 할 경우, 극단값 내지 이상점에 이끌리는 평균의 특성상, 남성의 임금수준은 여성보다 더 높게 나타난다.
  • 남아선호 : 우리 사회가 실제로 딸보다 아들을 선호한다고 한다면, 가부장적 사회가 아들을 딸보다 더 선호하도록 부모의 양육투자를 바꾸기 때문인가?
    • 명백히 딸을 선호한다고 응답하는 부모들도 첫째가 딸이면 둘째는 아들이길 바라는 경향이 관찰되며, 딸부잣집 부모들도 딸들을 사랑한다고 확고히 응답한다. 오히려, 아들들은 딸에 비해 양육이 힘들고 자원이 많이 소모되어, 첫딸을 낳은 부모들은 둘째를 낳고 싶어하지만 첫아들을 낳은 부모들은 이미 완전히 지쳐버린다. 중국과 같은 문화권의 남아선호의 경우 이런 곳에서는 아들에게만 배타적으로 부모봉양의 사회적 책임이 지워지기 때문에, 남아선호는 부모가 자신의 미래를 대비하기 위해 투자하는 것이다.
  • 정치계의 성비 : 여성 정치인들이 남성 정치인들보다 더 낮은 비율을 보인다고 한다면, 가부장적 사회가 남성에 대한 여성의 지배 가능성을 차단하기 때문인가?
    • 여성들도 사회를 지배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며 실제로 효과적이기도 하다. 하지만 여성들은 권력경쟁에 뛰어드는 것 자체를 원치 않으며, 대체로 무관심하다. 그 결과 권력욕에 목말라 있는 남성들이 그 자리를 주로 차지하게 된다.
  • 유리천장 : 사회의 최상층에 여성보다는 남성들이 더 많이 존재한다고 한다면, 이는 전반적으로 남성들이 여성들보다 더 높은 사회적 지위를 누리기 때문인가?
    • 사회의 상층부에 여성보다 남성이 더 많듯이, 사회의 하층부에도 여성보다 남성이 더 많이 존재한다. 즉, 통계학적으로는 여성보다 남성의 분산이 더 클 수 있으며, 우리 사회의 중간쯤에서는 남성보다는 여성들이 더 많이 발견될 수 있다.
    • 남성들은 여성들에 비해서 조직의 상층부로 올라가려는 동기를 더 많이 느끼고, 그렇게 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소중한 것들을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러나 여성들은 대체로 그런 워커홀릭과 같은 삶이 무의미하다고 여기며, 자신의 삶에서 그보다 더 가치 있다고 여겨지는 다른 것들을 더 많이 찾아낸다. 일부 여성들은 남성들처럼 경쟁적이고 공격적으로 사업에 임하는데, 이들이 보통 조직의 상층부로 올라가는 여왕벌이 된다.
  • 발화권력 : 남성들이 여성들보다 더 독재적이고 공격적, 고압적이면서 덜 상냥하고 덜 평화적이며 덜 배려하는 화법을 사용하는 것은, 남성들이 여성들을 대할 때 자신이 권력자라는 우월의식을 갖고 있기 때문인가?
    • 남성들은 여성들을 대할 때 항상 권력감을 경험하지는 않으며, 오히려 남성 위계에서 하위층에 위치한 남성들은 거의 언제나 권력감과는 무관한 삶을 살아간다.
    • 남성들이 직설적이고 지시적, 권위적인 말하기 전략을 사용하는 이유는, 그것이 친근한 관계보다는 대규모 집단 간 경쟁 상황에서 더 도움이 되기 때문이고, 남성들은 그런 거시적인 수준의 사회적 관계에 있어 여성들보다 더 많은 관심과 선호를 보이기에, 결과적으로 여성과는 다른 말하기 전략이 나타난다.
  • 문화권력 : 여성들이 문화적으로 억압 받는 희생양이 되는 경향은, 남성들이 권력을 독점하고 여성의 억압을 목적으로 삼아서 의도적으로 그런 문화를 만들었기 때문인가?
    • 문화는 대규모 집단에서 작동할수록 더욱 효과적이며, 남성들은 여성들보다 소수의 친밀한 관계보다는 대규모의 집단 간 경쟁에 더 동기화되어 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남성들이 문화적 권력에 가까이 위치하게 되었다. 이는 여성집단보다는 남성집단에서 문화가 더 자생하기 쉬운 경향으로 이어졌다. 즉 문화의 형성과 발전은 여성들의 사회적 삶보다는 남성들의 사회적 삶에 더 큰 영향을 받았다.
    • 문화는 주로 여성을 착취하기보다는 남성들을 이용함으로써 번성해 왔다. 남성들의 혁신적이고 위험추구적인 성향은 적지 않은 경우 몽상적이거나 바보 같은 불나방 같은 생각으로 밝혀지곤 하며, 여성들의 위험회피적 성향은 안정적이고 편안한 삶의 조건을 보장한다. 하지만 결국에는 남성들 중 누군가는 성공적으로 혁신을 이루어 사회와 문화를 진보시키며, 이는 여성들이 자체적으로 만들어내는 발전의 동력보다 더 빠르고 강하다. 그 결과 여성들의 지위는 남성들의 체계적인 억압과 적대로 인해 추락했다기보다는, 남성들이 저희들끼리 성공과 실패와 영광과 오욕을 경험하며 진보해 나가는 동안 상대적으로 정체되었다. 그 시간 동안 여성들은 주로 상호지지적이고 유대감 강하며 친밀한 사람들 사이에서 서로를 세심히 돌보는 삶을 밀도 있게 살아갔다.
  • 성별 고정관념 : 여성들이 남성들보다 능력에 있어서 열등하다는 생각은, 여성들의 사회 진출을 막기 위해 공모한 남성들의 정당화 논리인가?
    • 여성 능력의 열등함에 대한 고정관념은 거의 명백히 잘못되었지만, 이는 남성들이 여성들을 막아서기 위해 억지로 만든 것이 아니라, 여성들이 단지 대규모 집단에서 영향력을 끼치는 것에 남성만큼 관심이 크지 않은 것을 두고 "여성들은 무능력하다" 고 잘못 판단한 남성들의 대응 편향이 작동했기 때문이다. 무동기는 무능력과 같지 않지만, 문화의 상층부를 차지한 남성들은 여성들이 자신들의 세계에 별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을 보고 무능력하다고 잘못 생각했다. 남성들의 경우 업적을 달성하거나 성취를 하지 않는 것은 흔히 무능력한 남성이기 십상이었기 때문이다.
  • 여성들의 고등교육 : 여성들이 한동안 대학에 입학하길 거부당했던 것은, 여성들이 계몽될 기회를 차단하기 위해 남성들이 공모했기 때문인가?
    • 사람들은 현재 상태가 만족스러울 때 굳이 그것을 바꾸려 하지 않으며, 남성들은 자신들의 세계에 여성들이 나타나는 "변화" 를 부담스럽게 생각하는 현상유지 편향을 일으키고 있다. 페미니스트들은 이에 대해 여성에 대한 억압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상 이런 비협조와 반감은 (변화가 필요하다고 인식되지 않는 한) 어떤 종류의 변화에서든 동일하게 나타날 수 있다.
    • 고학력 여성들이 학계나 연구직에서 물러나는 것은 그들이 학계에서 버틸 수 없도록 남성들이 압력을 가해서가 아니라, 그와 같은 사회 상층부에서 문화가 그들에게 비인간적일 정도로 착취적이고 희생과 노력과 헌신을 요구하는 것에 대해서 염증을 느끼고, 그 대신 결혼을 통해 삶의 안정을 획득하는 합리적이고 위험회피적인 길을 선택했기 때문일 수 있다. 우리 사회는 엘리트들에게는 그만큼 더 잔인하게 그들의 재능과 자질을 착취하며, 고학력 남성들은 그렇게까지 해서라도 자신이 위대해지고 싶어하지만, 고학력 여성들은 도대체 왜 그렇게 비합리적으로 자신의 삶을 포기해야 하는 건지 이해하지 못한다.
  • 조직생활의 어려움 : 어떤 조직이나 집단에 소속되어 있는 여성들이 소모적이고 착취당하고 억압받는다고 느끼는 것은, 남성중심적 문화에 의한 여성차별적 조직풍토 때문인가?
    • 원래 대규모 집단은 (주로 남성인) 구성원들을 소모시키는 방향으로 작동하며, 여성들은 그 이전까지 여성들과의 친밀한 관계 속에서 서로가 대체할 수 없고 소중하며 특별한 존재로 대우받는 것에 익숙해 있었다. 이제 대규모 집단에 소속되어 남성들의 생존의 논리에 노출된 여성들은, 자신들이 경험하는 소모성이 여성에게만 제한적으로 적용되는 것이며, 남성 구성원들은 (마치 자신들이 여성들끼리 교류하면서 경험해 왔던 것처럼) 서로를 소중하고 특별한 존재로 대하는 특권을 누릴 것이라고 짐작했다. 하지만 남성들은 원래부터 그 소모적이고 별 볼 일 없는 기계부품의 나사 같은 대우를 견디면서 대규모 집단에 헌신하는 입장이었다. 현대의 많은 조직들은 여성들의 참여가 증가함에 따라, 적어도 대외적으로는, 그 구성원들을 점점 더 중시하려 애쓰고 있다.
  • 언어적 성희롱 : 직장에서 종종 여성들이 남성 상사로부터 모욕적인 말이나 성희롱을 듣게 되는 것은, 그 상사와 그가 몸담은 회사가 여성혐오적이기 때문인가?
    • 남성들 사이에서는 상급자가 하급자에게 언어적 모욕을 하여 존경의 결핍 상태로 방치하는 것이 의례화되어 있으며, 이를 통해 하급자가 더욱더 자극 받고 성취에 동기화될 것을 강제한다. 직장에 들어온 여성들은 자기 자신을 남성들과 똑같이 (즉 권리에 있어 평등하게) 대해 달라고 요구하고, 남성 상사는 그걸 곧이곧대로 받아들여서 남성들만의 존경의 결핍 문화를 여성에게까지 적용시킨다. 그리고 그런 모욕을 받은 여성들은 그것을 성희롱으로 간주하고 항의하게 될 수 있다. 여성들 사이에서 그런 모욕과 폄하는 당장 절교를 부를 정도로 심각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점점 많은 여성들이 사회생활에 뛰어들면서 언어적 모욕의 문화는 남성들 사이에서도 약화되어 가고 있으며, 그것 이외에도 남성들을 동기화할 문화적 자극물들은 많이 있다.
  • 남성들의 성적 행동 : 남성들이 여성들보다 더 포르노를 많이 보고 더 많은 성적 판타지를 갖고 있고, 더 자주 섹스를 원하는 것은, 남성들이 여성들에 대한 여성억압적인 분노를 갖고 있기 때문인가?
    • 이는 페미니스트들이 남성의 성욕과 여성의 성욕이 동등한 수준이라고 먼저 전제한 이후, 설명되지 않는 남성의 성적 행동을 분노로 돌렸기 때문일 수 있다. 남편들은 (심지어 중년기에도) 아내가 원하는 것 이상으로 섹스를 원하며, 그럴 수 없다면 포르노라도 보려 하고, 사실상 모든 남성들이 섹스와 관련된 모든 것들에 대해서 필사적으로 자신의 시간과 돈과 노력을 쏟아붓는다. 섹스에 대한 남성들의 갈망은 여성들의 눈에는 자신들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다른 동기가 있어 보였고, 페미니스트들은 이를 설명하기 위해 여성억압을 가져왔다. 그러나 실상 남성들은 여성들에 비해서 현격한 수준으로 더 강한 성욕을 지니고 있다.
  • 생명보험금 : 남성의 생명보험금보다 여성의 생명보험금이 더 적다는 것은, 우리 사회가 그만큼 여성들을 별 것 아니고 가치 없는 존재로 여기기 때문인가?
    • 보험사들은 남성이 주로 가장으로서 가정의 주요 부양자라는 생각을 보험금 책정에 반영하며, 이는 오히려 그 사회가 남성들의 삶의 의미가 거의 전적으로 "돈 벌어 오는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남성이 사망하게 될 경우, 남겨진 유족들은 (특히, 남편을 잃은 아내는) 재정적인 위기에 처하게 될 가능성이 높고, 보험금에는 이들을 더욱 많이 지원할 필요가 있다는 사회적 인식이 반영되었다.

5. 적용 및 유의점

우선, 본서는 갈등론을 기능론으로 반론한 것이기 때문에, 전자가 꼭 틀렸고 후자가 옳았다는 것이 아니다. 양자간의 관계는 "대안적 설명" 정도밖에는 되지 못한다.[29] 기능론이 늘 그렇듯이 사회 엘리트들은 사회를 위해 그만큼 더 크고 중요한 기능으로 봉사한다는 식의 설명이 나오지만, 그것이 과연 현실의 불평등의 규모를 얼마나 잘 설명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조심해서 받아들여야 한다. 그래도 저자의 확실한 장점은 반증하기에 좀 더 쉽다는 것이다.[30] 즉, 페미니스트들의 시각은 옳고 그름을 판별하기 더 어려운 반면, 저자의 시각은 옳고 그름을 판별하기 더 쉽다. 사회현상 그 자체의 본질이 어떠한가와 무관하게, 사회현상을 이해하는 관점으로서 어떤 하나를 굳이 선택해야 한다면, 페미니스트들의 시각보다는 저자의 시각이 더 지적으로 성실하면서도 효과적일 것으로 보인다. 다시 주의를 주자면, 페미니즘이 틀려서라기보다는, 페미니즘의 동성사회성이나 젠더권력 등의 주요 주장들은 그것이 틀렸는지 여부를 알기 힘들기 때문이다.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이 책의 내용을 역차별 논리에 활용하는 것은 저자의 의도를 매우 크게 오용하는 것이다. 저자는 여성이 남성에게 억압받는다는 주장만큼이나 남성이 여성에게 억압받는다는 주장 역시 경계하고 있으며, 남녀가 서로의 장단점을 보완하는 관계일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남성이 문화와 그 시스템으로부터 착취받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여성이 그 역차별적 문화의 통제권을 쥐고 있는 것이 아니며, 저자의 문화에 대한 분석에 따르면, 그럴 일은 앞으로도 거의 없을 것이다. 여성들의 사회적 삶의 양상은 여성들이 문화와 제도를 주도하고 지배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저자가 확실하게 말하는 것은 "문화가 남성을 착취하는 것이 과소평가되고 있다"이며, 그 이상으로 "역차별" 논리로 나아가는 순간 그것은 저자와는 무관한 주장이 됨에 유의해야 한다.

매우 거시적인 논의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개개인으로서가 아닌 범주로서의 남성과 여성을 상정하고, 개별 집단으로서가 아닌 범주로서의 집단을 상정한다. 따라서 특정 기업체가 실제로 유능한 여성을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채용하지 않는 등의 성차별적인 사건도 얼마든지 발생할 수 있다. 실제로 심리학계의 한 감사연구(audit study)[31]에 따르면, 모든 내용이 정확히 동일한 두 건의 이력서를 이름만 John McKayJoan McKay로 살짝 다르게 했을 때, 사람들이 남성의 이름인 John의 이력서를 더 긍정적으로 평가하더라는 보고도 있다. 개별 사례의 수준에서는 얼마든지 벌어질 수 있는 일이다. 본서는 이러한 상황들로 반론될 수 없지만, 마찬가지로 본서는 이런 상황이 없을 것이라고 낙관하지도 않음에 유의해야 한다.

진화심리학에 근거하는 모든 문헌들이 그러하듯이, 본서 역시 독자들이 이해할 때 자연주의적 오류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따라서 남성 독자들이 육아와 양육에 동기화될 때 스스로를 이상한 사람처럼 여길 필요가 없고, 여성 독자들이 스스로가 경쟁에 뛰어들고 야망에 불타오르는 것이 문제가 있나 하면서 고민할 필요가 없다. 진화적 경향은 그냥 그런 방향이 원시사회의 환경에서 생존에 유리했다는 것을 확인할 뿐이지, 현대사회의 개인에게 규정적이고 규범적인 효력을 갖지 못한다. 예컨대 남성이 여성보다 성욕이 강하기에 매 순간 스스로의 욕망을 억누르는 고통스런 싸움을 벌여야 한다는 10장의 서술은, 실제로 성범죄를 저지르는 것이 도덕적으로 괜찮다거나 이해받을 수 있다는 결론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가해자가 아무리 천 번을 참다가 한 번 참지 못했다 해도, 그 희생자에게 그 고통은 평생 갈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고 나서 페미니즘에 대해서 숙고하는 것은 중요하며, 실제로 저자가 자주 인용하듯이 《Professing Feminism》과 같은 어떤 책들은 비판이론으로서의 페미니즘 자체에 대한 비판이론으로 기능한다. 하지만 페미니즘은 남성들에게 불안과 놀람, 스트레스를 촉발시켜서, 지금껏 당연하다고 여겼던 것들에 대해 한번 더 검토하게 하는 긍정적 효과를 가져왔다. 이 스트레스에 반응하여, 어떤 남성들은 건전한 자성과 자발적 변혁을 통해 스트레스를 완화하지만, 또 어떤 남성들은 페미니즘을 폄하하고 무시함으로써 스트레스를 완화하려 한다.[32] 이 책은 전자의 남성들에게는 또 다른 의미로 큰 도움이 되겠지만, 만일 후자의 남성들에게 읽힐 경우에는 세상을 다양하고 폭넓게 바라보는 시야를 갖는 자기발전의 기회를 잃게 될 수도 있다. 래윈 코넬이 《남성성/들》 에서 현대 마스큘리즘의 분석을 통해 지적했듯이, 현대의 마스큘리즘적 메시지들은 페미니즘으로 인해 남성들이 받은 스트레스와 억울함을 해소시켜 주는 데 머무르고 있으며, 개인과 사회의 남성성의 변혁을 촉발하지 못하고 있다. 본서는 페미니즘의 한계를 지적하기는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런 한계가 명확한 페미니즘의 메시지를 통해서라도 뭔가를 배워야 하는 처지일 수 있다. 따라서 본서는 일부 개인들의 여성혐오적이고 차별적이며 전근대적인 젠더 관념에 대한 면죄부까지는 될 수 없음에 유의해야 한다.

6. 비판점

이상의 유의점들을 고려하더라도 잠재적인 비판의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저자가 언급했듯이, 기존에 제시된 젠더에 대한 의견들이 현실을 온전히 설명하지 못하긴 하지만, 마찬가지로 저자의 의견 역시 그 자체로 현실을 "다 설명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도 아닐 것이다. 페미니즘 이론가들이 사회의 하층부에서 발견되는 남초 경향을 간과했던 것처럼, 저자 역시 어떤 지점에서는 이 복잡한 인간사의 특정 측면을 여전히 간과하고 있을 수 있다. 따라서 좀 더 복잡하지만 체계적인 상위호환급 설명이 새롭게 제안됨으로써 저자의 주장이 대체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것이 대개 심리학 학설들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발전하는 방식이다.

따라서 나무위키에 한정하여 몇 가지 지적할 만한 점들을 자체적으로 찾아본다면 다음과 같다.

우선, 저자는 9장에서 남성다움이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쟁취해야 하는 것임을 지적했고 이는 실제로도 합당한 것으로 보이나, 여성다움에 대해서는 그만큼의 고찰 없이 여성은 그냥 여성으로서 귀속된다고 판단한 것 같다. 그러나 여성들이 "진정한" 여성이 되기 위해 늘 머리단장과 옷단장을 하고 화장을 하며 몸매 관리를 하는 현실[33]을 생각하면, 여성들도 여성다움을 쟁취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하고 있는 것일 수 있다. 문화는 여성들에게 여성의 몸이란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ex. 쓰리사이즈) 기준을 마련[34]했고, 남성들이 남성다움을 인정받기 위해 다른 객체로서의 남성과 결투를 벌이듯이, 여성들은 객체화된 자신의 몸과 결투를 벌여야 했을 것이다. 저자가 소개한 "남성다움은 소비량 < 생산량이다" 의 부등식은, 같은 맥락에서 여성에게도 대입될 수 있다. 저자는 자급자족성을 언급하면서 여성성의 귀속성을 주장하지만, 자급자족을 못하여 남성의 부양을 받는 여성이라 해도, 저자의 주장과는 달리 남성의 투자(?)만큼 남성을 성적으로 만족시키지 못하면 여성이 아니게 되는 건 똑같다. 하지만, 저자가 여성다움에 대하여 고찰이 없던 것은 아니다. 저자는 분명 여성들은 옷, 화장, 몸매 관리[35]를 위해 최선을 다한다고 언급하고 있다. 다만, 저자가 지적하는 것은 ‘이중잣대’의 관점이다. 여성과 남성이 다르게 평가된다는 것. 즉, 여성은 외모로 평가받고, 남성은 성취로 평가받는다[36]는 것이다. 여성들이 평가받는 젊음아름다움은 그것이 결여된 여성은 그것을 ‘진짜로’[37] 가질 수 없고, 그렇기에 그것은 성취보다는 상대적으로 주어지는 경향성이 있다고 말한다. 이와 달리 남성은 주어진 외모보단 다른 남성을 능가함으로써 얻어지는 사회적 지위나 돈을 통하여 존중을 획득해야 했기에 상대적으로 성취의 경향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분명 오늘날은 과거와 달리 그 경계가 애매모호해져 남녀가 유사한 토대 위에 올려져 있지만, 아직 이중잣대는 남아있다.) 또한, 소비량 < 생산량은 문화에서 남성다움을 어떻게 정의하는지를 나타내는 설명이다. 저자는 역사상 많은 여성이 남성의 부양을 받았지만, 그것이 여성스러움의 자격을 떨어뜨리는건 아니라고 주장한다.[38] 그렇기에 남성과 생산성에 관한 설명은 그것대로이고, 여성의 성적 부분은 남성의 생산성에 대한 교환의 방식일지언정 자급이나 소비 < 생산량으로 여성스러움을 다뤄야 할 부분은 아니다. 하지만, 이성을 성적으로 만족시켜야 한다는 압박은 오히려 남성이 더 많이 받고 있다. 많은 남성들이 어떻게 하면 여성을 성적으로 만족시킬 수 있는 지에 대해 마치 강박증에 걸린 것처럼 굴고 있는 게 현실이다.[39] 이 역시도 남성에게 요구되는 성취에 대한 관점으로 분석해 볼 여지가 있다.

저자는 남성 집단 간의 갈등에 초점을 맞추어서 남성 간 연대, 즉 동성사회성(homosociality)의 가능성에 대해 회의한다. 물론 여성을 체계적으로 억압함으로써 남성 간의 유대감을 재확인한다는 페미니즘의 시각은 남성과 여성의 사회적 삶의 양상에 차이가 있기에 비판받을 여지가 있다. 하지만 동성사회성이 나타나는 양상은 페미니즘이나 저자가 예상했던 것보다 복잡할 수 있다. 예컨대, 남성들 사이에서는 종종 "남자 대 남자로서 서로 그러는 거 아니다", "같은 남자끼리인데 뭐 어떠냐", "당신도 남자니까 알지 않느냐" 와 같은 포섭의 메시지가 오가기도 한다.[40] 이 자체는 여성을 혐오한다거나 남성들 간에 돌봄과 배려의 관계를 형성하는 것은 분명히 아니다. 따라서 페미니즘의 접근은 한계가 있다. 하지만, 군필 여부가 한국사회에서 갖는 의미를 확장해 본다면, 이 포섭의 메시지를 받지 못한 여성들에게 이것이 갖는 의미는 "너희는 끼워주지 않겠다"일 수 있다. 이 점에서는 남성들 간의 경쟁구도를 최우선으로 놓는 저자의 분석 역시 한계를 갖는다. 즉 1) 동성사회성은 존재할 수 있지만, 2) 페미니즘이 분석하는 것과 현실은 서로 다를 가능성이 크고, 3) 저자의 지적처럼 남성들 간에는 기본적으로 경쟁과 갈등관계가 깔려있기는 하지만, 4) 때때로 남성이라는 이름 아래에 이들을 한데 묶고 여성들은 끼워주지 않는 집단의식으로는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11장에서 저자가 제안하는 임금격차 해소 방법은 기업의 입장에서, 경영학의 입장에서 보면 이윤의 극대화라는 목표를 정면으로 거부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기업은 인건비를 줄이기 위해서는 기꺼이 원숭이라도 데려다가 쓸 준비가 되어 있지만, 이렇게 된다면 오히려 여성 채용을 더 꺼리게 될 위험도 있다. 그렇다고 국가가 나서서 규제를 가한다거나, 심지어 저자의 제안처럼 전세계적으로 동일한 규제가 가해지도록 하는 것은 기업의 경영을 지나치게 침해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 어쩌면 문화가 늘 그러하듯이 더 성공적인 경영원칙을 견지하는 기업만이 살아남도록 하는 것이 사회 모두에게 혜택을 주게 될지도 모른다. 이 지점에서 본서의 논지는 다소 불명확한데, 책의 최후반부를 정독한 위키러가 있다면 확인바람.

본서의 논지는 임금격차 해소 방법을 제시하는 데 있지 않다. 본서에서의 얘기는, 현재 나타나는 임금격차가 반드시 차별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를 억지로 개선하려 해봐야 비현실적인 방법이거나, 부작용만 발생할 거라는 게 저자의 생각이다. 오히려 자연적으로 임금격차가 발생한다는 걸 인정하고, 격차를 억지로 맞추려고 하기보다는 남녀가 모두 제각각의 어려움이 있으므로, 이를 보완하고 개개인들이 자신의 재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게 전체 조직 측면에서 좋다는 이야기를 한다.

남녀가 각각 능력이 아닌 선호의 수준에서 성차를 보인다는 본서의 설명은, 적어도 저자의 관점에서는 "새롭고 참신한 제4의 관점"이라고 제시되고는 있지만, 막상 페미니스트들은 심드렁하게 받아들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기나긴 서구 페미니즘의 역사 속에서 이 주장 역시 이미 1980년대에 내세워졌고 페미니즘에 의해 거부[41]되었던, 이미 오래 전부터 접해 봤던 논리이기 때문이다. 이 주장은 미국의 대형 유통업체 시어스(Sears) 사(社)가 평등고용기회위원회(EEOC; equal employment opportunity commission)로부터 직장 내 성차별이 존재한다며 고발당했을 때 변호인단을 통해서 내세웠던 것이다. 속칭 "시어스 송사"(Sears v. EEOC)라고도 불리는 이 법적 공방에서, 시어스 사는 여성들이 주변적이고 하위적인 직종으로 배치된 것은 여성들 본인들부터가 성취지향적 직종을 '선호'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일과 가정의 양립이 가능한 직종을 희망했기에 그저 그것을 반영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이는 바우마이스터의 관점과 거의 일치하는 것이다.[42] 이에 대한 비판은 《백래시》 로 유명한 페미니스트 수전 팔루디(S. Faludi)가 이미 제기한 바 있는데, 팔루디의 취재에 따르면 하위직을 선호한 여성들을 거론해 보라고 EEOC가 요구하자 시어스 사는 어렵사리 3명을 거론했고, 이들 중 연락이 닿은 두 사람은 자기도 모르는 새 좌천당한 처지였으며 둘 다 야망 있는 생계부양자였다. 팔루디가 시어스 매장을 방문할 때마다 판매사원 여성들에게 그 논리를 전해주면, 점원들은 한결같이 허공에 삿대질을 하면서 치를 떨었다고(…). 본서 역시 경험적 데이터 없이 가설 수준에서만 거론하는 제안이라고 명시했음을 고려하면, 남녀 간 선호의 성차 역시 아직 확정적으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참고로 이 송사는 시어스 측의 승리로 끝났는데, 법원은 "여성 차별의 근거가 '지나치게 사내 통계 데이터에만 의존'하고 있고, 그 많다는 피해자들 중 단 한 명도 제시해 보이지 않았다"면서 시어스 사에 성차별이 존재한다고 볼 수 없다고 판시했다. 그러나 이에 대해 EEOC 측은 "피해자를 내세우는 순간 그 개인의 품성과 행실을 쥐 잡듯이 털어댈 것 같아서 일부러 보호했더니, 이번에는 통계만 들이댄다는 이유로도 거부를 하냐" 면서 반발했다고.


[1]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사회심리학자이자 긍정심리학자. h-인덱스는 2018년 9월 현재 148 가량이다. 긍정심리학이라는 새로운 연구의 지평을 열어낸 "학문의 아버지" 로서, 대표적인 연구 업적인 학습된 무기력은 학부 1학년생들의 심리학개론 교과서들마다 빠지지 않고 소개되고 있을 정도이다. 사회심리학자들과는 "배금주의가 인간에게 행복을 가져다줄 수 있는가" 와 같은 연구주제에 관련하여 협력하고 있다.[2] 예일대학교 사회심리학자. h-인덱스가 약 90~100 가량으로 추정되는, 또 다른 명망 높은 "빅 네임" 에 속한다. 사회심리학계에서 그는 사회적 인지의 관점에서 점화(priming)의 메커니즘을 밝히고, 행동 측정의 수준에서 이를 연구 패러다임으로 정립하였다. 그의 대표적인 연구로 "사람들은 노인에 관련된 단어나 표현들을 접하고 나면 저도 모르게 좀 더 느릿느릿 걷게 된다" 는 것이 있다. #참고[3] Baumeister & Leary, 1995.[4] Leary & Baumeister, 2000.[5] Baumeister, Bratslavsky, Muraven, & Tice, 1998.[6] Baumeister, Smart, & Boden, 1996.[7] 이공계 쪽에서 바로 감을 잡을 수 있도록 정황적으로 추측할 때, 만일 심리학계에도 노벨상이 있었다면 이 정도 명성은 잠재적인 노벨상 후보로도 거론될 수 있을 수준이다. 어디까지나 감을 잡을 수 있게끔 표현한 것이므로 느낌만 잘 받아들일 것.[8] 이는 남성주의자 워런 패럴(W.Farrell) 역시 언급했던 것으로서, 저자도 이를 인용하고 있다.[9] {1, 2, 3} 의 평균은 2지만, {1, 2, 99} 의 평균은 34로 확 올라간다.[10]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남고생들과 여고생들을 비교할 경우, 남고생들은 수시보다는 수능에, 여고생들은 수능보다는 수시에 강한 경향을 보인다. 그런데 수능의 난이도에 따라서 이러한 우열관계가 때로 조절되기도 한다. 실제로, 불수능이 되는 해에는 남고생들의 평균 점수가 훨씬 높아지지만, 물수능이 되는 해에는 여고생들의 평균 점수가 남고생들을 한참 넘어서는 경향을 보인다. 앞서 소개한 '평균의 장난' 을 잘 따라왔다면,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지는지 바로 대입이 가능할 것이다.[11] 생물학에서는 이를 가리켜 ‘수컷 변이 가설(Greater Male Variability Hypothesis, GMVH)’이라고 부른다. 이는 인간뿐만이 아니라 다양한 동물들에서 발견되는 경향이다.[12] 심지어 학계 내의 페미니스트가 압력을 행사하여 이러한 내용을 담은 논문이 출판되는 것을 저지하기도 한다! #1 #2 참조.[13] Maccoby, E. E., & Jacklin, C. N. (1978). The psychology of sex differences. Stanford University Press.[14] Eagly & Mladinic, 1989, 1994; Eagly, Mladinic, & Otto, 1991.[15] Hausman, P. (2000). A tale of two hormones. In Lecture presented at the National Academy of Engineering SE Regional Meeting (April 26), Atlanta, GA.[16] 본서에서 언급되진 않았지만, 실제로 서양 고전음악사를 보면 역사에 이름을 남긴 불후의 작곡가들은 거의 대부분 남성인 반면, 클라비코드 등을 연습하거나 이를 살롱 등에서 연주하고 있는 귀부인들의 모습들은 로코코 시대 등에서 화가들의 중요한 그림 주제가 되곤 했다.[17] 실제로 학계에서도 Baron-Cohen(2002) 같은 문헌들은 남성성이 경등도의 자폐증(…)과 유사하다는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18] 실제로 다른 부서들에 여성 직원들이 같은 비율로 존재하지 않는다면, 상대적인 실적에는 영향이 있을 수도 있다. 다시 언급하지만, 여성들이 원래 일을 "못 해서"가 아니라, 그렇게까지 일을 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기에 실적이 떨어졌음에 유의.[19] 저자에 따르면, 여성들의 삶에서 중요한 문제였던 출산 중 산모사망 문제에 크게 기여했던 사람들이 바로 남성이었다. 물론 여성들은 어머니와 딸, 혹은 산파와 산모 간의 유대적 공동체를 통해 지식을 전수함으로써 이 위험을 어느 정도 관리해 오긴 했지만, 의학미생물학 연구와 같은 "남성적"인 방법이 적용되었을 때 산모사망률은 비로소 현대사회의 수준에까지 감소할 수 있었다. 진짜로 여성들이 남성의 적이었다면, 이는 불가능한 수준의 시혜였을 것이다.[20] 흥미롭게도, 한편 이 주제에 대해서 언급하는 페미니즘 도서인 《200년 동안의 거짓말》(For Her Own Good)에서는 의사들이 산파의 영역에 제대로 준비도 되지 않은 상태로 "쳐들어왔고", 당시 페미니스트들은 저소득층 유색인종 위주의 산파들에게 연대의식을 느끼지 않았기에 이를 그냥 방관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 무렵 산부인과 의사들은 산모들의 수에 비해 태부족했고, 그나마 숙련도 역시 산파들보다 한참 떨어졌으며, 여성의 출산 중에 함께하기는커녕 도리어 자리를 비우기 일쑤였다고. 그러나 이 도서에서는 산모사망률에 대해서 언급이 전혀 없다는 점에 유의해야 할 것이다.[21] 더욱 재미있는 것은, 《페미사이드》 와 같은 여러 여성학 서적들에서 주장하는 여성 살해의 양상을 보면 대표적으로 강간치사, 여아 유기, 명예살인, 안전 이별 같은 개별적인 살인 사례를 들고 있다는 것이다. 지적 호기심이 동하는 진지한 위키러라면 비교를 위해 함께 읽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22] 극단적인 케이스를 간략하게 머릿속으로 상상해 보자. 만일 섹스를 할 때 100% 임신이 확정된다면, 100명의 남성과 3명의 여성이 존재할 때, 9개월 후 인구는 고작 106명이 될 뿐이다. 하지만 반대로 3명의 남성과 100명의 여성이 존재하고, 억세게 운 좋은(?) 이 남성들이 100명을 두루 섭렵(??)한다면, 9개월 후 (혹은 이들의 능력 여하에 따라 플러스 알파의 시간 후) 인구는 무려 203명으로 폭증한다! 남성들은 많아 봐야 쓸모가 없고, 여성들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셈이다.[23] 저자는 구 소련의 인명경시적인 전쟁 스타일을 염두에 두고 본서를 집필했지만, 당장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6.25 전쟁 당시 본서의 논리와 정확히 똑같은 일이 벌어졌다. 전쟁 당시 채병덕 장군은 200만 징병설(…)을 주장했다가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이 길길이 뛰게 만들기도 했고, 그 정도가 아니더라도 닥치는 대로 학도의용군이니 뭐니 하면서 거의 80~100만 명 가량의 남성들을 죄다 징병했지만, 어떤 경우에도 여성들은 늘 지켜주면 지켜주었지 징병하지는 않았다.[24] 저자는 조지 워커 부시의 최측근 정치참모조차 부시 대통령에게 걸핏하면 "똥더미에서 피어난 꽃" 이라는 비아냥을 들어야 했다는 점을 소개하고 있다.[25] 심지어 저자에 따르면, 예컨대 남편이 아내와 한 달에 세 번씩 10분만 섹스를 할 수 있다는 것은, 아내에게는 자신의 자녀와 한 달에 세 번씩 10분만 함께할 수 있는 것과 유사한 정신적 고통을 안겨줄 거라고 한다![26] 일본 여성들이 자조적으로 하는 말 중에 국내에도 잘 알려진 것으로, "여자 나이는 크리스마스 케이크다. 숫자가 24가 될 때까지는 너도나도 달려들지만, 25를 넘어가는 순간 누구도 쳐다보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물론 이 문단의 이야기는 전부 남녀 양측이 그 나이가 되도록 여전히 결혼을 희망한다는 전제 하에 성립하는 이야기다.[27] 사실 이 대목은 국내의 대학교들이 유독 심하다. 가장 짬밥 딸리고 힘없는 젊은 교수들이 학과장 노릇을 하거나 혹은 손 많이 가는 행정업무를 떠안곤 하는 것.[28] 이는 여성학계의 많은 논자들이 인문학에 지적 기초를 세우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예컨대 미러링의 대표적인 옹호자인 유민석 씨는 주디스 버틀러의 언어사회적 이론을 근거로 삼는 언어철학 전공자이고, 남혐이 불가능하다는 요지로 70페이지가 넘는 현학적인 글을 쓴 것으로 유명한 윤김지영 교수는 프랑스철학 전공자이며, 여성학 경력자인 이나영 교수와 정희진 씨의 경우 탈식민주의와 언어사회적 이론에 근거한 주장을 펼치고 있고, 《페미니즘 리부트》 의 저자 손희정 씨는 심지어 영화학 전공자이다. 이 사람들끼리만 "빅 네임"이라고 모여들어서 사회현상을 설명한다고 하니, 추상적 담론이 강조될 수밖에 없는 것.[29] 예컨대 경찰을 생각해 보자. 기능론의 설명처럼 경찰은 민중의 지팡이인가? 아니면 갈등론의 설명처럼 권력의 앞잡이인가? 무조건 어느 하나가 옳고 무조건 다른 하나가 틀렸다는 식의 생각은 매우 위험하다.[30] 물론 진화심리학에 기초해서 사회현상을 설명하는 주장이기 때문에, 그 특성상 아예 딱 떨어지게 명확히 반증되는 건 아니다.[31] Swim, J., Borgida, E., Maruyama, G., & Myers, D. G. (1989). Joan McKay versus John McKay: Do gender stereotypes bias evaluations?. Psychological Bulletin, 105(3), 409.[32] 심리적인 수준에서 본다면, 페미니즘의 주요 주장을 반론함으로써 남성들은 페미니즘에 의해 촉발되었던 스트레스와 과잉각성(불편감)을 낮추는 생리적 자기조절의 효과를 얻는다고 말할 수 있다.[33] 본서에서는 여성들의 꾸밈노동이 남성들이 부과한 억압이 아니라 여성들 사이에서 부과되는 사회적 압력이라고 설명하는데, 이를 고려하더라도 여성성이 성취 지위에 속한다는 점은 여전히 변하지 않는다.[34] 공연히 몸매가 별로(?)인 해외 여성운동가들이 나체시위를 하면서 자기 몸에다 "이것 또한 여성의 몸이다" 라고 써놓는 게 아니다. 굴곡이 없거나 펑퍼짐한 신체는 남성들에게 단지 "건강하지 못한 몸" 이라는 취급을 받는 데서 그치지 않고, "저게 어딜 봐서 여자 몸이냐"는 평가를 받는다는 것이다.[35] 이때 문화의 미의 기준 형성에 진화적 바탕이 있음을 고려해야 한다.[36] 어느 쪽이 더 우월하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37] 지금과 같은 성형수술의 보편화는 인간의 역사로 봤을때 최근의 일이다. 또한, 성형수술 역시 한계가 존재한다.[38] 반대로, 얹혀 사는 남성은 남성이 아니다.[39] 남성의 성적 만족감은 자신의 오르가즘적 쾌감도 그렇지만, 그보단 여성이 오르가즘을 느끼는 모습에 더 큰 만족을 얻는 경향이 있다.[40] 사회심리학적으로도, 기존의 갈등적인 집단 맥락이 약해지고 남성이라는 상위 범주(superordinate category)가 현저해지면 얼마든지 예측 가능한 상황이다.[41] 페미니즘에 의해 거부되었다는 소리가 남녀 성차가 과학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라는 점에 주의. 남녀 선호 간에 유의미한 성차가 존재한다는 이론적, 통계적 근거는 21세기 들어서도 숱하게 나왔다. 조던 피터슨이 자주 인용하는 스칸디나비아 국가 연구가 그 중 하나.[42] 이때 시어스 사는 이 논리의 학문적 근거로서 한 여성사학자를 전문가 증인으로 내세웠는데, 그 학자가 인용한 문헌의 저자가 EEOC 측의 증인으로 직접 나서서 "저 사람이 내 연구결과를 크게 오독했다"고 반론하는 촌극이 벌어졌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여성사학자는 시어스 측 변호인 중 한 사람과 친분이 있어서 끌려나온 것이었고, 별도의 연구자료 없이 시어스 측이 던져준 자료만 가지고 증언을 준비했던 것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