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04-10 22:12:46

양성평등에 반대한다

도서명 양성평등에 반대한다
(도란스 기획 총서 1)
발행일 2017년 1월
저자 정희진 편저
(권김현영, 루인, 류진희, 정희진, 한채윤)
출판사 교양인
ISBN 9791187064084
#교보문고

1. 소개2. 목차 및 주요 내용
2.1. 챕터별 내용 정리2.2. 페미니즘 ≠ 양성평등2.3. 양성평등의 패러다임으로 발견할 수 없는 것들
2.3.1. 보수 개신교계와 반동성애 운동
2.4. 메갈리아미러링의 옹호
3. 서평

1. 소개

페미니즘퀴어학의 관점에서 "양성평등은 페미니즘이 추구하는 이상과 가치를 대변하지 못한다" 고 주장하는 문헌. 트위터나 기타 커뮤니티에서 페미니스트들이 "페미니즘의 목표는 양성평등이 아니다", "양성평등 역시 또 다른 세련된 여성혐오일 뿐이다" 등의 주장을 하는 경우, 그 출처는 본 문서에서 설명하는 문헌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핸드북의 형태를 하고 있으며 정희진 씨가 편집인으로서 기고를 정리하였다. 대신 들어가는 글은 모두의 의견을 고르게 반영하고자 노력하였다고. 2년 동안의 준비기간을 거치며 사전 세미나와 토론, 합평회, 의견 교환 등을 거쳐서 저술되었으며, 연구 커뮤니티가 상시화될 필요성을 체감하였다고 한다. 일단 발간되자 국내 페미니스트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어, 발간 후 한 달만에 2쇄의 인쇄에 돌입했고, 2017년 3월경에는 저자들과의 북토크 역시 성황리에 치러졌다.

이 책은 "도란스 기획 총서" 의 첫 프로젝트로 발간된 것이다. 성(性)문화 연구 모임 "도란스" 는 트랜스(trans)의 일본어 도란스(トランス)에서 온 이름이다. 이들은 젠더, 섹슈얼리티, 탈식민주의의 관점에서 사회연구를 하는 집단이라고 스스로를 소개한다. 저술에 참여한 저자들은 정희진,[1] (필명) 루인,[2] 권김현영,[3] 류진희,[4] 그리고 한채윤[5]이다. 도란스는 동년 5월에 기획 총서 시리즈의 다음 서적으로서 《한국 남성을 분석한다》 를 출판하였다.

2. 목차 및 주요 내용

  • 들어가는 글
  • 1장: 양성평등에 반대한다 (정희진, 2017)
    • 남성과 여성의 지위는 대칭적이지 않다
    • 양성 개념의 문제: 인간은 양성으로 구성되어 있지 않다
    • 이중 노동으로서 양성평등: 성별 분업의 근본적 문제
  • 2장: 음란과 폭력을 다시 생각한다 (루인, 2017)
    • 전 지방검찰청장 사건의 등장
    • 범죄자로 등장한 퀴어와 퀴어 범죄학
    • 성과 범죄 사이
    • 공공성을 다시 묻는다
    • '괴물'을 보호하라
  • 3장: 미성년자 의제강간, 무엇을 보호하는가 (권김현영, 2017)
    • 미성년자와 성관계한 성인을 처벌해야 할까?
    • 미성년자 의제강간법이 만들어진 이유
    • 미성년자에게 진짜 유해한 것
    • 미성년자 의제강간법을 둘러싼 오해
    • 성적 자기 결정권은 섹스할 권리가 아니다
  • 4장: 그들이 유일하게 이해하는 말, 메갈리아 미러링 (류진희, 2017)
    • 메갈리아를 둘러싼 지형
    • 2000년대 여성들: 촛불소녀, 배운녀자, 메갈리안
    • 여혐 vs. 남혐? 대항 발화로서 미러링
    • 포스트(post) 여성 주체
  • 5장: 왜 한국 개신교는 '동성애 혐오'를 필요로 하는가? (한채윤, 2017)
    • 왜 교회는 동성애를 '싫어하는가'라는 의문
    • 개신교, 차별 금지법을 '금지'하다
    • '거룩한 혐오'가 탄생하다
    • 통일 대박과 '공동의 증오'의 필요성
    • 동성애라는 훌륭한 적과 식어버린 인두

책의 전체 내용을 세줄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 양성평등 패러다임은 그 개념화에 있어서 '양성' 단어로서도 '평등' 단어로서도 부적절하기에, 페미니스트들의 비판적 성찰이 필요하다.
  • 양성평등 패러다임으로는 새로운 젠더 관련 쟁점들, 예컨대 퀴어범죄학적 접근이나 미성년자 의제강간, 보수 개신교계의 성소수자 혐오 등을 이해하기 어렵다.
  • 양성평등 패러다임에 구애받지 않는 새로운 여성 주체들은 메갈리아 등을 중심으로 연대하고 있으며, 이들이 양성평등 이후의 여성운동을 만들어 갈 것이다.

2.1. 챕터별 내용 정리

각 챕터의 내용들을 각각 세 문장으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으며, 해당 챕터가 이 책에서 갖는 역할을 괄호 속에 정리하였다. 책에서 전반적으로 논의하고자 하는 내용들은 몇 종류로 추려서 하단에 다시 챕터 구분 없이 소개할 것이다. 여기서는 (위키러 여러분의 초유의 관심을 모으리라 생각되는) 페미니즘이 양성평등과 같다고 볼 수 없는 이유, 그리고 양성평등의 패러다임으로 볼 수 없는 쟁점들, 메갈리아와 미러링에 대한 페미니즘 언어학의 옹호, 보수 개신교계가 반동성애를 '동원' 해 온 역사를 우선 소개한다.
  • 들어가는 글
    지금까지의 양성평등 담론은 보편주의에 호소하는 유용한 전략적 패러다임이었다. 그러나 양성평등이라는 단어 자체가 갖는 사회구조적 및 젠더적 문제가 있는 한, 이는 비판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앞으로의 여성주의는 한국 사회의 논쟁의 구도를 변화시키기 위하여 새로운 사회로의 이행을 제시할 필요가 있다.
  • 1. 양성평등에 반대한다 (양성평등의 개념화에 대한 비판적 성찰)
    양성평등의 "양성" 개념은 LGBTI+ 등으로 대표되는 성소수자들의 존재를 고려할 때 적절하지 않다. 양성평등의 "평등" 개념은 주어진 사회구조 속에서 소수의 (간택된) 여성들에게 소수의 (중산층의) 남성과 동일한 지위를 주는 것이나, 페미니즘은 억압적 사회구조의 전복을 목표로 하기에 받아들이기 어렵다. 양성평등의 개념은 여성의 공/사적인 이중노동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을 때 매우 유해하며, 페미니즘이 진정 촉구하는 것은 남성들의 사적 영역에서의 평등의 실천이다.
  • 2. 음란과 폭력을 다시 생각한다 (양성의 패러다임으로 해석될 수 없는 새로운 퀴어학적 쟁점)
    제주지검장 공연음란행위 사건은 우리 사회가 특정 성적 행위에 대해 범죄 혹은 해프닝이라고 결정하는 한 사례이다. 양성평등의 패러다임에서는 어떤 성적 행위가 정상적이고 어떤 것이 "퀴어" 한지를 판단하는 기준이 무엇인지를 성찰할 수 없다. 이와 같은 섹슈얼리티의 쟁점에 제대로 접근하기 위해서는 젠더 규제의 형성을 탐구하는 퀴어 범죄학의 도움이 필요하다.
  • 3. 미성년자 의제강간, 무엇을 보호하는가 (양성의 패러다임으로 해석될 수 없는 새로운 사회적 쟁점)
    과거 우리 사회의 미성년자 의제강간법의 보호법익은 자라나는 청소년들의 건전한 성적 발육에 맞춰져 있었다. 그러나 미성년자들의 섹슈얼리티를 무턱대고 보호하려는 노력은 현실과 맞지 않을뿐더러 도리어 그들에게 유해하기까지 하다. 우리 사회는 이제부터 미성년자들에게 성적 주체로서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제공하고, 미성년자 대상 성범죄에 대해서는 그 이면에 있는 권력관계를 성찰해야 한다.
  • 4. 그들이 유일하게 이해하는 말, 메갈리아 미러링 (양성의 패러다임 이후 등장한 새로운 여성 주체들)
    메갈리아는 우리 사회에 갑작스럽게 나타난 집단이 아니며, 일찍이 촛불소녀, 배운녀자 등의 다른 이름으로 사회 속에 나타났었던 연속성 있는 집단이다. 이들의 주요 전략인 미러링은 전복적 쾌락을 위해 생산되며, 양성평등을 향한 엄숙함이나 숭고함이 아닌 사회적 억압에 대항하는 발칙하고 가벼운 분위기를 띤다. 포스트-여성 주체로서 이들은 양성평등이라는 가부장제적 꿈에 함몰되지 않고, 진정한 페미니스트 전사로서 해방을 위해 싸워 갈 것이다.
  • 5. 왜 한국 개신교는 '동성애 혐오'를 필요로 하는가? (양성평등 담론 밖 투쟁에서 나타나는 양성의 개념)
    지난 2007년, 2010년, 그리고 2014년, 한국 개신교계는 자신들이 위기에 빠질 때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주기적인 반동성애 운동을 기획해 왔다. 반동성애 운동을 통해 한국 개신교계는 부끄러운 과오와 도덕적 방종을 덮고, 성도덕의 수호자의 입지를 굳혀서 사회적 영향력을 제고하고 정치세력화를 도모한다. 따라서 한국 개신교계는 동성애가 실제로 위협이 된다거나 혐오스러워서가 아니라, 정치적인 필요에 의해 반동성애를 동원하는 것이다.

2.2. 페미니즘 ≠ 양성평등

Feminism ≠ Gender Equality
"정부 기구나 여성 단체의 명칭뿐 아니라 일상적 대화에서도 '양성평등'은 의심할 여지 없이 페미니즘 그 자체이자 목표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gender equality'의 의미는 성별/들 간의 평등이거나 성별 제도로 인한 차별 시정을 뜻하는 것이지, 양성 간의 평등이 아니다. 나도 전략적 차원에서 간혹 '양성평등'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만, 양성평등은 여성주의의 덫이다. 여성주의의 목적 중 하나는 사회 정의로서 성차별을 철폐(완화)하는 것이지, 남녀 평등을 실현하는 것이 아니다. 오랜 역사도 역사지만, 집단과 집단이 평등해지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p.49

여기서 정희진(2017)이 제시하는 근거를 몇 가지로 나누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 "양성"(兩性)은 잘못된 개념이다. 둘째, "평등"(平等) 역시 잘못된 개념이다. 셋째, 양성평등의 패러다임은 여성에게만 이중노동이 부여되는 현실을 쉽게 간과하게 한다.

먼저 양성 개념에 대해, 여기서도 정희진(2017)은 지식사회학과 포스트모더니즘-포스트식민주의 전통을 이어받으며 입장(standpoint)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사람들은 인간이 생물학적으로 양성으로 나누어질 수 있다고 믿지만, 이는 도나 해러웨이(D.Haraway) 등의 지적에 따르면 허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연과학적 지식의 중립성은 (이들에 따르면) 허구에 불과하기 때문이며, 따라서 사회문제를 자연화하는 본질주의 역시 무의미하기 때문이라고.[6]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권력관계는 양성이 마치 "조화를 이루는 대칭의 관계" 처럼 여겨지게 하지만, 실상 이런 사회적 약속은 1) 불평등을 은폐하고 2) 제3의 사고를 가로막으며 3) 다른 모든 언어와 사고방식을 지배할 수 있다고 한다. 게다가 오늘날에는 젠더가 실체라기보다는 규범의 수준에서 작동하고, 기존의 젠더 이분법으로 설명할 수 없는 다양한 성소수자들이 (ex. 인터섹스 등) 존재하기 때문에 더 이상 양성의 개념이 유효하지 못하게 되었다고 본다.

다음으로 평등 개념에 대해서도 정희진(2017)은 비관한다. 리버럴 페미니즘은 평등이라는 보편적 가치를 여성에게도 부여하자고 (특히 남성들에게) 설득함으로써 여성의 활동영역을 넓히긴 했지만, 여성의 지위를 끌어올리진 못했다. 강자가 말하는 평등은 약자를 특수화시켜서 배제한 결과로서의 평등이기 때문이다. 특수성의 개념은 자신이 그런 예외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 의해 특징지어진다. 흔히 평등의 가치는 여성을 남성과 동격의 지위로 만드는 것을 암시하지만, 이와 같은 "사회질서 내의 수직이동" 은 실제로 페미니즘이 추구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정희진(2017)에 따르면, 페미니즘은 기존 사회질서 그 자체에 대한 반란과 전복에 초점을 맞춘다.

더불어 정희진(2017)은 우리 사회에서 양성평등이 여성들이 직면하는 이중노동의 문제를 교묘하게 가릴 수 있다고 비판한다. 개인의 노동의 영역은 공적 영역(직업적 성취)과 사적 영역(가사노동 및 돌봄노동)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양성평등의 개념은 아무리 적극적으로 적용하더라도 남성들의 사적 영역에서의 노동을 증가시키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이를 나무위키 한정으로 다시 정리하면 (원서에는 없는) 다음의 표로 나타낼 수 있다.
  남성 여성
공적 영역 Cell A
남성의 취업 및 승진
남성의 임금수준
남성의 고용안정성
남성의 직업적 자기실현
Cell B
여성의 취업 및 승진
여성의 임금수준
여성의 고용안정성
여성의 직업적 자기실현
사적 영역 Cell C
남성의 식사준비 및 설거지
남성의 청소와 빨래
남성의 육아 및 보육
남성의 명절 가사부담
Cell D
여성의 식사준비 및 설거지
여성의 청소와 빨래
여성의 육아 및 보육
여성의 명절 가사부담

위의 표에서, 과거에는 셀 A와 셀 D가 강조되었고 나머지 두 셀은 상대적으로 덜 강조되거나 젠더 규범에서 어긋난 것처럼 받아들여졌다. 그러다가 리버럴 페미니즘과 양성평등 담론이 확산됨에 따라, 셀 B의 여성의 사회참여가 셀 A와 같은 수준까지 끌어올려져야 한다는 공감대가 나타났다. 하지만 정희진(2017)에 따르면 이는 불충분한 평등이다. 여전히 사적 영역에서는 셀 C에 비해 셀 D가 더 많은 비중을 갖고 강조되고 있고, 이러한 차이는 기존의 양성평등 담론만으로는 쉽게 탐지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 진정한 평등은 셀 C의 비약적 증가를 전제로 하지만, 리버럴 페미니즘을 비롯한 양성평등 패러다임의 관점에서는 그것이 가능할지 의문이라는 것이다. 즉 남성은 셀 A만을 담당하고, 여성은 셀 D에 더하여 셀 B의 노동까지 이중으로 짊어지는 이중노동의 문제가 발생한다고 보았다.[7]

정희진(2017)은 더 나아가, 육아정책이나 보육정책이 지지부진한 것은 남성들의 사적 노동이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며, 국가는 어디까지나 남성들의 의견만을 들을 뿐이니 남성들은 사적 노동부터 더 열심히 해야 한다는 결언을 내놓았다.[8] 이 지점에서 그의 언급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육아가 여성 운동의 의제인 것 자체가 잘못이다. 육아는 남성의 성 역할이 되어야 한다[9]. 남성도 여성이 겪는 육아와 모성으로 인한 죄의식, 스트레스, 자기 분열, 커리어 포기 경험을 겪어야 한다. (중략) 정책과 예산을 결정하는 최고 권력자가 '육아로 고통받는' 남성 대중의 압력을 받지 않는 한, 질 좋은 보육원은 공약에 머물 것이다."

p.54

또한 페미니즘이 상대편 진영(ex 남성연대같은 마스큘리즘 계열, 기독교 우파, 안티페미니즘 계열)에게 "양성평등" 이라는 단어를 빼앗겼기 때문에 더 이상 이 단어를 사용할 수 없다는 고민 역시 반영되어 있다. 멀리 가지 않더라도 성재기 씨의 사망 이후 시민단체 "남성연대" 는 그 이름을 양성평등연대로 바꾼 바 있다. 하지만 이미 호주의 사회학자 래윈 코넬(R.W.Connell)이 자신의 저서 《남성성/들》 에서 지적하듯이, 현대의 마스큘리즘은 더 이상 페미니즘과 연대하지 않으며 오히려 상처 입은 남성성을 회복시켜서 안도와 위안을 주는 방향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분석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이 상황에서 양성평등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페미니즘의 동력은 약화될 가능성이 있다.

2.3. 양성평등의 패러다임으로 발견할 수 없는 것들

2장, 3장, 5장에서 논의되는 주제들은 전통적인 "남과 녀" 프레임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새로운 섹슈얼리티 관련 주제들이다. 2장에서는 어떤 음란행위가 범죄로 혹은 해프닝으로 판단되는지, 3장에서는 미성년자들의 성적 자기결정권이 보호되고 있는지, 5장에서는 보수 개신교계가 반동성애 운동을 왜 그렇게 조직적으로 이끌고 있는지를 다룬다.

2장에서 저자 루인(2017)에 따르면, 우리 사회는 어떤 음란행위는 범죄로 이해하지만 어떤 음란행위는 해프닝으로 치부하고 만다. 저자가 소개하는 새로운 분야인 퀴어범죄학(queer criminology)은 당사자에게 내려치는 처벌이 무엇을 의미하고, 어떻게 공공성을 구성하고, 무엇을 은폐하는지에 대한 고찰을 돕는다. 저자에 따르면, 어떤 음란행위는 그것이 지배 규범에 합치되는가 아닌가의 여부에 의해 판단된다. 성소수자 인권 운동에 있어서도 비슷한 흐름의 변화가 있었다. 기존의 운동가들은 "동성애자도 성적 지향을 제외하면 모든 것이 같다" 면서 지배 규범에 합치되게 하려고 노력했지만, 새롭게 나타난 퀴어학은 그것이 마치 특정한 선호나 지향은 부적절하다는 듯한 식의 도덕적 판단을 전제하고 있다고 인식했다. 그 결과 퀴어문화축제와 같이 고의적으로 "퀴어" 한, 대중의 도덕적 판단의 시선을 전복시키는 성소수자 행사가 나타났다는 것.

이와 같은 지배 규범은 제주지검장 공연음란행위 사건에 대한 대법원 판결문에서도 드러나는데, 대법원은 '보통인' 들의 '건전한 사회 통념', '선량한 성적 도의 관념' 에 입각하여 판결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루인(2017)은 이것이 이성애-비트랜스 규범을 토대로 하며, 무엇이 도덕적인지 아닌지를 우리 사회의 일부만이 판단할 수 있다는 생각을 유지시킨다고 본다. 이렇게 하면 성범죄자는 규범에 어긋나는 '괴물' 이 되어서 우리 사회에서 추방당할 수 있지만, 그럼으로써 누군가를 정상인이라고 규정할 수 있는 권리는 안전하게 보호된다. 공연음란 행위의 범죄화를 통해서 우리 사회가 보호하는 법익은 선량한 시민이 아니라, 이성애-젠더 이분법적 맥락에서의 사회질서를 보호한다는 것.

다음으로 3장에서 권김현영(2017)은 미성년자 의제강간 문제를 꺼낸다. 우리나라의 미성년자들이 성관계에 동의 가능하다고 받아들여지는 나이는 13세인데, 이 이하의 연령에서는 설령 미성년자 측이 성인과의 관계에 동의했다고 하더라도 성인이 강제로 범했다고 보고 강간으로 취급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저자에 따르면 이 연령은 세계적으로 유례 없이 낮은 사례라고 한다.

권김현영(2017)은 이 법을 통한 보호법익이 미성년자의 건전한 성적 발육이라고 이해되지만, 그 이면에는 미성년자가 성적 중립성을 갖는 "순진한" 존재, 다시 말해 "순백의 도화지" 같은 존재라는 인식이 존재한다고 본다. 문제는, 미성년자를 섹스로부터 보호하려는 시도는 "정상적 인간이라면 표준적으로 보아 지금쯤 이러하게 되겠지" 라는 식의 직선적 시간관에 기초하며, 미성년자를 둘러싼 권력관계를 은폐하고 섹슈얼리티는 무조건적인 보호의 대상으로 제한하어 해석한다는 것이다. 그 대신, 저자는 미성년자들이 보호받아야 할 것은 그들의 성적 자기결정권이어야 한다고 본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이 권리는 "임신과 출산을 책임질 수 있는 사회적 힘을 가진 성인 남성의 권리" 에 가깝게 이해되고 있기에, 10대들의 섹슈얼리티에 대한 우리 사회의 태도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어정쩡한 상태에 가깝다. 10대의 섹슈얼리티를 보호하려고 애썼던 청소년보호법[10]은 청소년의 섹슈얼리티를 보호하기는커녕 문화계에 대한 억압의 근거로 활용되었다는 것.

단, 권김현영(2017)은 미성년자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보장한다는 것이 섹스할 권리를 보장한다는 의미는 아니라고 말하면서, 섹스를 비롯한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결정하고 책임질 수 있는 주체로서의 사회적 권리가 부여되어야 한다는 의미라고 하였다. 이를 위해서는 미성년자들에게 더 많은 권리를 주고 (ex. 청소년을 위한 선거연령 하향) 현실적으로 그들이 책임질 수 없는 문제에 대해서는 청소년을 보호함으로써 (ex. 성관계 동의연령 상향) 양쪽 사이의 간극을 좁혀 가는 것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2.3.1. 보수 개신교계와 반동성애 운동

흔히 성소수자 운동에 연대하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보수 개신교계가 펼치고 있는 반동성애 운동에 대해서 "저 사람들은 대체 왜 저럴까" 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하게 마련이지만,[11] 이 책에서 한채윤(2017)은 질문을 약간 바꾸어 "저 사람들은 대체 왜 '조직적으로' 저럴까" 의 질문을 던진다. 따라서 이 글은 동성애개신교의 조화에 대한 교리해석의 문제를 회피한다. 또한 이에 대한 답을 하기 위해 "왜 하필 그 시기였나" 의 통시적인 접근을 취한다.

저자는 여기서 성소수자 인권운동과 보수 개신교계 사이의 관계를 특징짓는 중요한 변곡점 세 부분을 거론한다. 2007년 10월, 2010년 9월, 그리고 2014년 6월.

한국의 소수자 인권운동은 1990년대 중엽부터 시작되었다. 2000년대 초반에는 홍석천 씨와 하리수 씨가 대중의 관심을 끌었고, 비슷한 시기에 퀴어문화축제가 국내에서도 시작되었다. 기존의 통념에 따르면, 이 시기부터 보수 개신교계가 발끈하며 온갖 방해공작을 펼쳤어야 할 것 같은데...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2007년 9월이 되기까지, 개신교계에서 성소수자에 관련하여 내놓은 논평은 성전환자 관련 2회, 동성애 관련 1회, 도합 3회에 불과했다. 저자에 따르면, 2000년대 중반의 개신교계는 공포에 질려 있던 상황이었다. 거센 반미 운동, 반개신교 활동,[12] 그리고 노무현 정부로 상징되는 반권위주의 풍조가 팽배해지면서, 개신교계의 분위기는 "악의에 찬 세력에 의해 교회가 장악당할 위기에 처했다" 에 가까웠다고. 특히 사학법투쟁 경험은 개신교계 지도층의 이권을 뿌리째 뒤흔드는 사건이었고, 저자에 따르면, 이들은 "우리의 기득권(영향력)을 지키려면 세속 입법과정에 더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 고 생각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 이전까지 한국 사회에는 두 세력 간의 갈등의 경험이 없었기에, 대한민국 법무부를 비롯한 세속 정부나 퀴어 진영에서도 개신교계의 반발은 그다지 예상하지 못했다고 한다. "거룩한 혐오" 의 탄생으로 꼽을 수 있는 첫 변곡점이 2007년 10월에 "차별금지법 반대" 의 이름으로 나타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 이후 2010년이 되기까지, 다시 보수 개신교계는 침묵을 지켰다. 이 시기에 이들이 유순해져서가 아니고, 내부적으로 더 시급하게 처리해야 할 심각한 사건들이 많이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통일교가 정당을 창립하면서 개신교계에 큰 위협으로 다가왔으며, 불교계에서 이명박 정부의 종교 편향성을 규탄하는 시위를 열었고, 세계교회협의회(WCC)로 인한 내부 갈등이 불거졌으며, 사랑의교회 증축과 관련된 논란이 터지면서 보수 개신교계는 이런 내홍들을 처리하느라 동성애는 상대적으로 후순위에 두어야 했다.

둘째 변곡점인 2010년 9월, 트리거는 김수현 작가의 《인생은 아름다워》 방영이었다. 개신교계의 사회적 명망이 바닥을 치고 있던 상황에서 이들은 이를 좋은 국면 타개책으로 활용했다. 에스더기도운동본부가 활발한 활동을 시작했으며, 모 신문에 "〈인생은 아름다워〉 보고 '게이' 된 내 아들 AIDS로 죽으면 SBS 책임져라!" 라는 제하의 기상천외한(…) 논리를 주장하는 광고가 실린 것 역시 이때의 일이다. 교계에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동년 10월에는 군형법상 계간이 위헌 소지가 있으니 개정하라는 권고안이 발표되었고, 군인들 사이의 섹스로 인하여 국군안보가 저하될 것을 우려한(…) 어버이연합 등이 추가로 개신교계와 동맹을 맺었다.

그 이후 2014년이 되기까지, 보수 개신교계에서 본격적으로 반동성애가 의제화되었지만, 아직 퀴어 진영에 대한 직접적 공격이나 충돌로 이어지진 않았다. 개신교계는 본격적으로 정치세력화를 꾀하면서 반동성애를 핵심 의제로 내걸었고, 한채윤(2017)에 따르면, 심지어 서울시 오세훈 무상급식 논란 때에는 심지어 "무상급식 찬성하면 동성애 확산된다" 는 괴문자가 돌기도 했다고 한다(…). 이때 이들의 적개심이 직접적 충돌로 이어지지 않은 것 역시 심한 내홍 때문이어서, 이 시기에 한기총이 분열되었고, WCC가 주최되었으며, NCCK는 교회일치운동을 의제화함으로써 곧 죽어도 가톨릭과는 대립각을 세워야만 하는 (혹은 그렇게 보여야만 하는) 보수 개신교계를 직접적으로 위협했다.

셋째 변곡점인 2014년 6월, 마침내 퀴어문화축제에 대한 최초의 조직적 방해가 나타났다. 한채윤(2017)에 따르면, 개신교계는 이때 반동성애 운동을 통하여 내부갈등을 효과적으로 봉합하고 잠재울 수 있음을 확인했다고 한다. 그렇게 사분오열되어 싸우던 목사들끼리도, 어디서 퀴어문화축제가 개최된다는 소식만 들려오면 (심지어 서로 이단드립을 주고받던 사이에서도) 기쁘게 웃으며 서로 악수할 수 있었던 것. 무엇보다도, 이를 통해 개신교계 내부의 결점은 감추고 사회적 지배력을 강화시켜서 정치세력화에 박차를 가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한채윤(2017)은 보수 개신교계의 역사적 흐름을 분석하면서, 개신교계 내부의 혼란과 사회적 지탄이 심해지던 순간 성소수자 혐오가 "필요해졌다" 고 진단한다. 물론 2000년대 이전까지의 개신교계가 남부끄럽지 않은 역사를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단지 그 이전까지는 친미 반공 코드를 내세워서 이를 무마할 수 있었지만, 이제 시대가 바뀌어서 다른 무언가가 필요해졌을 뿐이다. 저자가 보기에 반동성애는 상당히 효과적인 전략이었다. 왜냐하면 개신교계에 있어 성 소수자들은 "어지간히 억압해도 끈질기게 저항해 주리라 기대할 수 있으면서도 현재진행형의 위협이 되는 적대자" 들로 여겨졌기 때문이었고, 더불어 반동성애 논리를 채택한다는 것은 (그동안 자신들의 폐부를 찌르며 괴롭혀 오던) 성도덕적 규탄의 칼날을 피함과 함께 도리어 성도덕의 수호자로 우뚝 설 기회가 되기 때문이었다. 저자가 보기에 반동성애는 "식어버린 인두" 로서 더 이상은 변화하는 사회에서 예전만한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할 것으로 보이지만, 그렇다면 이들은 이제 정치적 필요에 따라서 또 새로운 혐오의 대상을 찾아내게 될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고 한다. 적어도 이들의 성소수자 혐오는 교리적 해석으로 논박하면서 대응할 만한 성질의 것은 아니라는 것.

이상의 논의에서 보듯이, 2장, 3장, 그리고 5장에서 소개하는 세 가지 쟁점들은, 민가영(2017)의 평가에 따르면, 묘하게도 하나의 공통적인 진술로 압축하여 엮을 수 있다.
AA가 BB의 위협으로부터 CC를 보호하려 할 때, AA가 실제로 보호하는 것은 AA 그 자체이다.
  • 2장: 우리 사회가 성 범죄자들의 위협으로부터 선량한 성적 도의 관념을 보호하려 할 때, 우리 사회가 실제로 보호하는 것은 우리 사회 그 자체이다.
  • 3장: 우리 사회가 미성년 성관계의 위협으로부터 미성년자의 건전한 성적 발육을 보호하려 할 때, 우리 사회가 실제로 보호하는 것은 우리 사회 그 자체이다.
  • 5장: 보수 개신교계가 방종한 성생활의 위협으로부터 우리 사회의 성윤리를 보호하려 할 때, 보수 개신교계가 실제로 보호하는 것은 보수 개신교계 그 자체이다.

이들 저자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것은 이런 쟁점들이 양성평등에만 치중하는 전통적 젠더 담론으로는 제대로 탐지되지도 못하고 논의되지도 못한다는 것이지만, 위에서 보듯이 "어떤 위협으로부터의 보호의 시도는 실상은 그 보호의 대상이 아니라 보호하는 주체의 자기만의 이익을 대상으로 한다" 는 공통적 분석이 담겨 있음은 흥미롭다. 특히 2장과 3장은 우리 사회가 1) 시스-비트랜스적이고 성인 남성을 중심으로 하는 권력관계가 작동하는 현실과 2) 무엇이 규범적으로 옳고 그른지를 특정 집단에게만 배타적으로 판단하는 현실을 은폐하려 한다는 공통의 비판을 내놓고 있다.

2.4. 메갈리아미러링의 옹호

류진희(2017)는 메갈리아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인물 중 하나로, 여기서는 메갈리아는 어느 날 갑자기 돌발적으로 나타난 집단이 아니라 2000년대 이후 여성운동의 흐름의 일부라고 평가하고 있다. 본래 이들은 여성 고학력 집단을 의미하는 "배운녀자" 로 스스로를 정체화하고 있었는데, 거슬러 올라가면 2008년 촛불집회 당시 "촛불소녀" 의 이미지로 대중 속에서 나타났으며, 더 거슬러 올라가면 2000년대 초중엽의 소위 "빠순이" 라는 팬 문화의 핵심 소비층이었다.[13] 더 나아가, 류진희(2017)는 이들의 주요 전략인 미러링 역시 양성평등 담론 이후의 새로운 여성 주체들이 만들어 갈 문화 역량이라고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저자에 따르면, 2000년대 무렵 국내에 신자유주의가 본격적으로 뿌리내리기 시작하고 과열 경쟁이 확산되던 시점, 공교롭게도 여성인권 문제가 함께 강조되기 시작했다. 결국 남성들은 갑작스럽게 증가한 경쟁의 부담에 더하여 여성들에게까지 위협을 받는 상황에 처했으며, 그 결과 메갈리아는 촛불소녀에서 이어지는 시간적 연속성이 탐지되지 못하고 "낯선 존재" 로서 남성들에게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고 본다. 고학력 여성 집단에 대해서 주류 사회는 부정적인 이미지를 형성하고 있었고 (ex. "20대 여성의 투표율이 가장 낮다"[14]등) 여성들과의 경쟁에서 패배하며 남성성에 상처를 입은 88만원 세대 남성들은 메갈리아라는 낯선 존재에 대해 백래시(backlash)를 일으켰다는 게 저자의 분석.

류진희(2017)는 메갈리안들이 기존의 페미니스트와는 여러 점에서 차별화되는 특징을 갖는 포스트 여성 주체가 된다고 보고 있다. 더 이상 양성평등을 위해 헌신하지 않으며 오히려 일상 속 억압에 격렬히 저항한다는 점, 디지털 세대 특유의 패러디적 대항을 활용한 전복적 쾌락을 소비한다는 점, 숭고한 열정이나 계몽을 더 이상 중시하지 않는다는 점, 스스로를 호전적 전사로 칭하며 해방의 언어로서의 페미니즘을 실천한다는 점이 그 특징이라고 한다. 이는 기존의 양성평등과 보편적 가치를 위해 헌신하던 "진지하고 숭고한 인권 운동가" 의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류진희(2017)가 그려내는 메갈리안의 모습은 "예상할 수 없이 자유분방하며 재기발랄한 쾌락주의자" 에 가깝다.

이들의 전략인 미러링에 있어서도 저자는 전폭적인 긍정과 지지를 보낸다. 유민석(2015) 및 윤지영(2015) 등의 문헌에 의거하여, 저자 역시 미러링이 "가부장적 질서를 심문하고 해체하는 발화" 라고 이해하고, 집합적 정동으로서의 분노에 기초하고 있는 퍼포먼스의 일종이라고 주장한다. 더불어 미러링은 본래의 발언을 아카이빙하고 시대상을 고발하는 역할 역시 수행한다고 본다. 이것이 효과적일 수 있는 이유는, 저자의 주장에 따르면, 미러링의 의미의 반전은 (ex. 삼초한, 싸튀충) 남성 중심적 서사를 낯설게 하여 젠더 규범의 불합리성을 폭로하고, 소위 "개념녀" 라는 코르셋을 무효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류진희(2017)는 미러링에는 린치가 포함되지 않기에 증오발언이 아니라 새로운 저항의 방식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여혐발언은 온/오프라인 모두 가능하지만 남혐발언은 온라인 이외에서는 말도 꺼낼 수 없는 현실을 고려할 것을 주장하였다.

류진희(2017)는 계속하여 미러링에 대한 남성들의 반발을 논의에 포함시킨다. 대표적인 백래시는 대칭적 인식이라는 것이다. 예컨대, "메갈이나 일베나 똑같다" 는 발언이 백래시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페미니즘은 다양성이 매우 큰 느슨한 연대이지만, 남성들은 클로저스 티나 성우 교체 논란과 같이 소위 "메갈 사상검증" 을 통해서 이를 여혐과 남혐의 이분법으로 환원시켰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웹툰에 대한 예스컷 운동에서도 보듯이, 남성 창작자들과 소비자들은 성 상품화 창작물에는 표현의 자유를 부르짖으면서, 여성 창작자들이 남성을 성 상품화하면 창작은 권력이 아니라고 주장하기 때문에 모순적이라고 한다.

이상의 내용에 대하여 나무위키에 한정하여 생각건대, 이 문헌을 근거로 함으로써 메갈리아의 거의 모든 활동이 페미니즘의 실천으로서 정당화되는 길이 열렸다고 볼 수 있다. 류진희(2017)의 메갈리아를 옹호하는 논변은 다소간 세대론적인 관점을 연상시키고, 미러링에 대한 옹호의 논변은 사실상 주디스 버틀러를 위시하는 언어사회학적인 배경을 전제하고 있다. 메갈리아 이용자들의 예측할 수 없는 반사회성은 곧바로 "디지털 세대 특유의 재기발랄함으로 전복되는 가부장적 억압" 으로 포장될 수 있으며, 그 반사회적 극단성이 어느 정도이든 간에 이런 논리로는 브레이크를 걸 근거가 존재하지 않는다. 짧게 말해, 저자는 메갈리안이 가질 것으로 추측되는 세대적 특성인 예측 불가능성에 대해 지나치게 낙관하고 있다.

또한 저자는 유민석(2015) 등과 같이, 미러링에 대해서 언어의 관점에서 접근하는 전형적인 옹호론을 보인다. 이 경우 그 근거는 대항발언(counterspeech) 내지는 되받아치는 발화가 권력관계에 의미 있는 효과를 끼칠 수 있다는 이론적 추론에 기초한다. 이 접근의 한계점은, 행동에 있어서의 미러링은 (이것을 정말 미러링이라고 이름붙일 수 있는지에 대한 성찰은 논외로 하더라도) 옹호할 근거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발화행위와 권력관계에 대한 언어학적 고찰을 바탕으로 미러링이 정당화되는 것이기 때문에, 발화가 아닌 다른 방법(행동)을 취하는 미러링까지 정당화하려면 추가적인 논리가 필요하다. 흥미롭게도 저자는 "미러링은 행동하는 메갈리안의 모습으로 공중 속에 나타난다" 면서, "소위 '나쁜 미러링' 의 사건사고 사례를 수집한다고 할지라도 그 입에 재갈을 물릴 수는 없다" 고 말한 바 있다. 이것이 과연 행동으로서의 미러링을 개념적으로, 도덕적으로 옹호한 것일지는 현재로서는 불분명하다.

저자는 워마드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페미니즘 내부에서 가장 크게 걸림돌이 되었던 부분은 워마드가 강하게 표방하는 반동성애적 측면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류진희(2017)는 이와 관련하여 성소수자 포용 문제로 메갈리아가 워마드 등으로 분열되던 것과 관련, 여성성이 해체되는 과정으로 진단하면서, 우리 각자가 작고 많은 소수자로서의 특성들을 자신의 내면에서 발견해 내어, 최종적으로는 남성이라는 큰 범주를 중심으로 하는 억압의 구조를 혁파할 것을 요청하였다. 여러 자료들을 살펴보면, 여성계와 퀴어 진영 사이에서의 '균열' 이 남성 성소수자들 일각에서 상정하는 것만큼 극적이지는 않았을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저자는 17번 각주에서[15] 몇몇 자료들을 안내하고 있다.

참고로 이 문헌에서 류진희(2017)는 나무위키를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류진희의 관점에서 보기에 나무위키란 단순히 메갈 = 일베 대칭의 구도를 주장하는 데서 더 나아가, 심지어 "일베보다도 더한 이 시대의 최악" 으로 몰아가기 위해 관련 사건사고들을 수집하는 데 골몰하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고 한다. 그 와중에 "나무위키" 의 작명이 마치 "남우", 즉 남성 동료들 간의 끈끈한 동성사회성(homosocial)을 위해 위키가 만들어졌다는 식으로 독자들이 오도되도록 이끄는 문장도 존재한다. 작명은 당연히 사실이 아니다. 어쨌든 해당 대목을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다.
메갈리아를 일베보다 더한 이 시대의 최악으로 꼽는 이들은 '메갈'의 실상을 드러낸다는 사건·사고를 수집하고 나열하는 데 골몰한다. 그러면서 자신들이 제공하는 관련 사실, 즉 '팩트'는 의심할 여지 없는 지식이라고 믿는다. 그리하여 사이트 사용자가 직접 내용을 입력하고 또 삭제할 수 있는, 인터넷 협업 한글 백과사이트인 '남우(男友)'들의 '나무위키'에서는 지금도 정보들이 쌓여 가고 있다. 결국 이 데이터 다발이 양적으로 상대를 굴복시킨다는 '팩트 폭력'이나 '팩트 폭격'이 되고, 때로는 자기 확신을 거쳐 집단 신념이 된다. 이는 언뜻 "남성/지식/진실 vs. 여성/서사/허구"라는 구도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전자(지식)는 주목을 끌기 위한 조작, 즉 '주작'이 아닌지 의심되고 후자(서사)는 현실에서 자신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이야기로 수용된다. "이것이 팩트다"라는 주장은 종종 구조적인 문제에 접근하는 비판적 사고를 봉쇄하기도 한다.

pp.146-147

여기서 의아한 것 중의 일부는, '어떤 주장이 주작이 아닌지 의심하는' 과정은 결과적으로는 주장들의 신뢰성을 높이기 위한 방법으로 볼 수 있는 것이지, 그 자체만으로 "따라서 모든 지식적 주장은 주작으로 취급할 수 있다" 는 엉뚱한 결론이 될 수도 없거니와, 저자가 의도하는 것처럼 '수용되는 서사' 와 대조하더라도 오히려 더욱 믿을 만한 정보원이 된다는 점이다. 이와 같은 대조는 '만들어졌을 법한 이야기 vs. 진짜 현실의 이야기' 구도를 간단히 형성하지만, 사회를 분석하는 글에서 '현실' 이라는 리스크 큰 개념을 꼭 사용해야 했었는지는 의심스럽다. 왜냐하면, 주작으로 의심되는 주장들에서 교차검증을 걷어내면 그것 역시 '(남성들이 그들의 삶 속에서 구성한 '현실' 속에서) 수용되는 서사' 와 동일하기 때문이다. 이 구도에 대해 '아이러니하다' 고 평했던 류진희(2017)의 문장은, 정작 그것이 이중의 아이러니함을 품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또한, 팩트폭력은 꼭 양적인 우월성으로 상대방을 찍어누른다는 의미가 아니다. 물론 제네비브 를로이드(G.Lloyd)와 같은 논자들이 남성을 이성과 정량성, 팩트에 대응시키고 여성을 감성과 정성성, 허구에 대응시키는 문화를 비판했던 바 있긴 하다. 하지만 최소한, 팩트는 그것이 팩트라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단 하나만 있을 때에도 파괴력을 갖는다. 비난해야 하는 대상은 그렇게나 많은 양의 팩트를 수집하는 데 골몰하는 나무위키가 아니다. 오히려 그렇게나 많은 양의 팩트가 수집되는 동안 어떠한 자정작용도 보이지 않았던 메갈리아와 워마드가 비난의 초점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사실 제일 팩트가 많이 수집되어있는 것은 일베디시 다.

3. 서평

이 책이 발간된 직후에 세 건의 서평이 나왔는데, 이 중 두 건은 전적이고 적극적인 지지를 보내는 서평이고, 한 건은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하여 정면으로 반박하는 내용을 담은 서평이다. 지지를 표명하는 두 건의 서평을 우선 소개한 다음, 반박하는 서평은 하단에 따로 나누어서 상세하게 설명하기로 한다.

우선 김현(2017)의 짧은 서평은[16] 이 책에 담긴 다섯 챕터의 내용들이 하나의 공통된 질문 하에 묶일 수 있다고 보았다. 다섯 챕터는 모두 "합의된 것들에 대한 재질문" 을 담고 있다는 것. 저자에 따르면, 1장에서 문제제기하는 합의는 "인간은 양성으로 구성되어 있다" 는 것이고, 2장에서는 "공개적 장소에서의 자위행위는 음란하다" 는 합의를, 3장에서는 "청소년은 성적으로 가능할 수 없다" 는 합의를, 4장에서는 "메갈리아의 미러링은 남혐이다" 는 합의를, 그리고 5장에서는 "동성애 혐오는 하느님의 뜻이다" 는 합의를 겨냥하고 있다고 한다.

다음으로 민가영(2017)의 서평은[17] 페미니즘의 시각에서 이 책의 시의적절성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그는 양성평등이라는 패러다임이 하나의 거대한 "체제의 바벨탑" 을 쌓아올렸으며, 국가와 기업이 그 바벨탑에 편승했다고 평한다. 처음에 가부장제라는 질서에 대한 저항으로서 시작한 페미니즘은, 어느 순간부터 그 질서 내에서 자신의 위치를 상승시키고 싶다는 욕구와 혼합되었고, 그 결과 양성평등에 대한 지지가 나타났다고 본다. 다시 말해, 저자가 보기에 양성평등의 이미지는 성공적인 직업여성 이상도 이하도 아닐 뿐이다.

민가영(2017)은 또한 양성평등이 말하는 남성과 여성의 관계는 A와 B의 관계가 아니라 A와 ∼A의 관계이며, 결과적으로 양성평등이 말하는 평등이란 ∼A인 쪽이 A에 최대한 가까워지는 것이라는 정희진(2017)의 분석에 적극적으로 동의하면서, 양성평등이 말하는 평등은 평등이라고 볼 수도 없다고 평가한다. 당초에는 타인에 대한 의존을 넘어서는 존립을 위하여 양성평등이 추구되었겠지만, 이제 이것이 바벨탑이라는 인식이 생겨났기 때문에, 저자는 인간 존재의 의미가 큰 도전을 맞이할 것이라고 전망한다.

3.1. 마르크스주의적 비판

이처럼 인문학페미니즘의 분야에서 호평 받고 있는 본서이지만, 마르크스주의의 관점에서는 불만스러운 점이 상당히 많은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들은 본서의 사상적 바탕이 포스트모더니즘과 포스트식민주의에 입각함에 따라 반유물론적 관점을 취하고 있다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다. 이런 심경을 드러내는 것으로 보이는 성지현(2017)의 서평을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18]

우선적으로 성지현(2017)은 본서가 전제하는 포스트식민주의의 방법론을 문제삼고 있다. 그에 따르면, 본서는 "권력자가 언어를 만들고, 이로써 다시 현실을 만든다" 고 전제하며, 모든 현실은 결국 권력을 통해 구성된 재현이라고 상정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포스트식민주의의 접근은 남성의 언어가 어떻게 생겨났는지는 고려하지 않는 순진한 관념론에 지나지 않는다. 사회구조의 분석에 있어서 언어의 힘을 강조하는 이런 관점은, 또한 언어가 기본적으로 집단적 상호작용을 위한 의사소통의 기능을 위해 나타났다는 점을 무시하며, 언어가 언제나 사회 구성원들에게 "결정적" 이고 "완전한" 영향을 끼친다고 과장한다.

권력구조와 여성에 대해서 유물론에 입각하여 볼 경우, 사뭇 다른 해석이 가능해진다. 성차별에 대해서 정희진(2017)은 젠더가 문화적 구성물인 만큼 남녀의 생물학적 속성을 거론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유물론의 관점에서는 이는 모두 계급사회적인 가족제도를 배경으로 한다. 사회의 근본적 분할선이 바로 계급이기 때문이다. 같은 의미에서, 정희진(2017)과 미셸 푸코가 주장하는 권력 역시 실체가 모호한 개념화라고 할 수 있다. 유물론에 따르면, 권력은 계급과 분리될 수 없다. 분리되는 순간 대체 그 권력이 어디로부터 온 것인지 설명할 길이 막히기 때문이다. 남녀의 생물학적 속성 역시 논외로 칠 수 없는데, 왜냐하면 그것이 실재하지 않을 경우 남성 권력이 어디서 연유하는 것인지 설명하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더불어 (상단에서 인용한 바 있듯이) 정희진(2017)은 남성들에게도 육아의 고통을 체감시켜야 이중노동의 문제가 해결되고 진정한 노동의 평등이 도래할 것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하지만 성지현(2017)은 이것이 육아를 분담하지 않는 남성 개인에 대한 비난일 뿐이라고 반론한다. 게다가 이런 식의 주장은 오히려 국가가 보육지원을 소극적이게 만드는 데에도 악용될 수 있는 논리라고 우려한다. 남성들의 가사노동 참여를 핑계로 예산지원을 줄일 경우 이를 막을 근거가 약해지기 때문이다. 보육지원의 만성적인 부족은 마르크스주의적으로 더 명쾌하게 설명될 수 있다. 원래 보육지원은 상당한 정부지출을 요구하기 때문에, 자본주의 체제는 이를 싫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성지현(2017)은 또한 양성평등이 과연 "여성운동의 덫" 이라고 볼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다른 의견을 취한다. 그에 따르면, 양성평등은 몇 가지 이유로 정당화될 수 있는 의제이며, 문제에 대한 진단이 잘못되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우선, 남녀가 평등해야 한다는 아이디어 자체가 문제라고 볼 수는 없다. 정말 문제는 지금까지 우리가 어떤 평등을 어떻게 추구할 것인가에 대해 성찰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페미니즘은 양성평등을 의제화했기 때문에 한계를 나타내고 있는 게 아니다. 저자에 따르면, 페미니스트들의 양성평등 운동이 자본주의 자체를 전복시키는 투쟁을 하지 않으면서 평등을 추구하려 했기 때문에 한계를 나타냈다고 봐야 한다.

양성평등은 또한, 경우에 따라서는 남녀를 불문하고 모든 노동자 계급에게 이로울 수 있다. 이 경우에도 "어떤 평등을 어떻게 추구할 것인가" 가 중요하다. 예컨대, 저자에 따르면, 양성평등의 확대를 위해 부유한 자본가들의 손아귀에서 권리를 쟁취해 내는 방식을 따를 수 있다. 이런 경우에라면 성지현(2017)은 그 양성평등은 분명 바람직한 것이라고 평가한다.

또한 성지현(2017)은 젠더 주류화(gender mainstreaming)에 대해서도 의문을 표한다. 젠더 주류화를 통해 국가 기관과 각종 법 제도들이 여성의 입장을 반영하고 여성들의 사회 참여를 보장하는 길이 열렸지만, 이는 결국 그 자체로 여성차별적인 체제인 자본주의를 긍정하고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에 현실이 개선될 수 없다는 것이다. 현대 페미니즘이 변화하는 현실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다면, 페미니스트들은 그 원인을 양성평등 담론 자체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여성들이 자본주의 체제의 고위직으로 진입하는 데에만 골몰하는 현실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

그보다 근본적인 수준에서, 성지현(2017)은 여성운동에 있어 진정 필요한 것은 포스트모더니즘이 아니라 마르크스주의라고 천명한다. 그에 따르면 정희진(2017) 등이 취하는 포스트모더니즘적 관점은 사회적 투쟁에 있어 분명한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우선,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담론 자체가 자본주의에 대한 근본적 도전이 가능할지에 대해 의심하며, 결과적으로 이들의 논리는 기껏해야 담론에 균열을 내는 "해체" 로서의 저항만이 가능하다는 결론을 피할 수 없다. 이것은 고작해야 "언어적 투쟁" 에 불과한 것으로, 언어를 통해 권력관계를 어찌해 보겠다는 이들의 발상은 당장 냉혹한 경제적 조건을 바꾸기 위해 투쟁하는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는 가당치도 않은 방식인 것이다. 게다가 마르크스주의는 노동자 계급이야말로 자본주의에 대한 "저항의 주체" 라고 그 가능성을 높이 평가하지만,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노동자 계급 역시 한낱 담론을 실천하는 처지에 있을 뿐이라는 시각으로 바라본다. 이런 식으로는 제대로 된 사회적 변화를 이끌기 힘들다는 것.

이상의 내용에서 보듯이, 사회운동과 사회적 변화에 대한 접근방식에 있어서 "언어가 권력을 반영한다" 는 정희진(2017)의 시각과 "노동자 계급의 당장의 물질적 조건을 개선해야 한다" 는 성지현(2017)의 시각은 정면 충돌한다. 이 서평의 제목이 《담론이 아니라 여성 억압의 물질적 조건을 근본적으로 바꿔야》 인 것은 바로 이 점을 반영하는 것. 즉 마르크스주의의 관점에서 볼 때 본서의 접근 방식은 담론에 담론이 뒤섞이는 말잔치에 지나지 않으며, 우리 사회의 정치경제적 환경을 바꿀 힘도 없고 바꿀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비관하는 (것으로 보이는) 본서의 논의들은 불만스럽게 느껴질 것이다.


[1] 여성학, 젠더학, 평화학자. 다수의 저술활동 및 언론 인터뷰.[2] 한국퀴어아카이브 퀴어락 소속. 다수의 저술활동 경력이 있으며 홈페이지를 운영중이다.[3] 여성주의 연구활동가. 다수의 대학에 출강하며 다수의 저술활동 경력이 있다.[4] 여성학자. 해방기 여성의 서사를 전공했으며 한국학 및 한국문화를 강의한다.[5] 성소수자 인권운동가. 퀴어문화축제 기획단장이며, 비온뒤무지개재단 상임이사.[6] 이 주제에 대한 더 많은 논변을 원할 경우, 샌드라 하딩(S.Harding)이나 이블린 폭스 켈러(E.F.Keller) 등의 저작을 참고할 수 있다.[7] 사실 그런 비판에서 나온 게 바로 래디컬 페미니즘이다. 즉 사적 영역에서도 남성이 개입하게 해서 셀 C와 셀 D의 지분을 비슷하게 하자는 것[8] 후반부에 다시 서술되겠지만 이 부분은 "문제의 책임을 가사노동에 관심 없는 남성 개개인에게 넘긴다" 고 다른 연구자들에게 비판 받았다.[9] 정확하게는 남성과 여성이 모두 육아에 참여해야 된다는 뜻이다.[10] 1997년의 소위 "빨간 마후라 사건" 은 일탈 미성년자들 사이의 유희적인 성관계가 사회에 알려져서 충격을 준 사례로, 이때 강간 피해자조차 "무섭지 않았어요?" 라는 질문에 "그냥 같이 논 건데요?" 라고 무심하게 대답한 것이 이슈가 된 사건이다. 이는 이들 사이에 촬영한 영상이 성인들 사이에서 음란물로서 퍼져나가 소비되면서 세간에 알려졌고, 청소년보호법이 제정되는 계기가 되었다.[11] 서두에서 저자는 자신이 목격한 세 가지 답변에 대해 그것이 불충분하다는 재반론을 펼친다. 1) 동성애자들은 스스로가 죄인임을 인정하지 않아서이다. → 그렇다 해도 불교인이나 무교인에 비하면 동성애에만 유달리 심한 혐오를 보인다. 2) 개신교가 내적 부조리를 가리기 위해 외부의 적을 만들고 싶기 때문이다. → 왜 굳이 동성애가 그 타깃이 되어야 하는지는 불분명하다. 3) 성경에 따르면 동성애는 죄이기 때문이다. → 성경에 명시된 수백 가지의 죄들에 비하면 동성애에만 유달리 심한 혐오를 보인다.[12] 실제로 아프가니스탄 피랍 사태와 《만들어진 신》 의 국내 번역이 이 시기이며, 사학법제정 반대투쟁도 이 즈음이었고, 개신교계에 속칭 "안티기독교" 라고 불리는 존재들이 거론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13] 저자에 따르면 이들은 남성 아이돌을 대상으로 하는 동성애적 팬픽을 소비하던 여성들에서 기원한다고 한다.[14] 물론 실제로는 오히려 20대 남성의 투표율이 제일 낮다.[15] 해당 각주를 그대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메갈리아 하강과 분화의 도화선이기도 했던 게이 논쟁에 관해서는 정현희, '왜 메갈리아는 게이 논쟁을 필요로 했는가', 《THE 더러운 커넥션 제8외 LGBT 인권포럼 자료집》, 성소수자차별반대 무지개행동 기획단 외 주최, 2016년 3월 4일~6일; 유정민석, '내가 남혐 걸린 게이다 이기야!- 혐오 세력 메갈 vs 한남충 게이라는 혐오의 구도를 넘어서', 〈퀴어인문잡지 삐라3 길티 플레저〉, 노트인비트윈, 2016년 9월 참조.[16] 김현 (2017). 합의하에. 창작과비평, 45(1), 421-423.[17] 민가영 (2017). 양성평등이라는 이름으로 쌓아 올린 바벨탑. 여/성이론, 36, 189-197.[18] 성지현 (2017). 담론이 아니라 여성 억압의 물질적 조건을 근본적으로 바꿔야. 마르크스21, 20, 28-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