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명 | Ce sexe qui n'en est pas un(佛) 하나이지 않은 성(韓) |
발행일 | 1977년(원서) 2000년(역서) |
저자 | 뤼스 이리가레 (L.Irigaray) 이은민 역 |
출판사 | Les Editions de Minuit(원서) 동문선(역서) |
ISBN | 97827073015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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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본서는 기존의 정신분석학 및 철학 사상이 줄곧 놓치고 있었던 여성의 섹슈얼리티에 대한 독자적 관념을 세운 이리가레의 1970년대 중기 저술의 선집이다. 구체적으로, 본서는 섹슈얼리티를 단일한 '하나' 로 이해하는 정신분석학과 라캉철학 등 서구의 남성적으로 경도된 철학 풍조를 비판하고, 여성의 자족성을 언급하기 위해서 여성이 스스로에게 타자성의 관계를 가짐을 강조하였다. 또한, 이리가레는 본서에서 여성의 가치가 남성에 의해 '상품으로서의 교환가치' 로 정해지는 경향을 비판하기도 했다.제일 먼저 소개할 특징치고는 조금 서글프지만, 독해가 어렵다. 프랑스 철학자들과 문예비평가들의 텍스트가 어렵다는 것은 우리나라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악명이 높긴 하다. 하지만 이리가레의 텍스트는 유독 특이하게 어려운 점이 있다. 이처럼 은유적이고 때로는 시적이며 불명료한 글쓰기 및 언어유희는 학계에서도 악명이 높으며, 그 철학을 소개하는 과정에서 많은 오역과 논란을 낳았다.[1] 이리가레의 이런 글쓰기 방식은 다분히 의도적인 것으로, 자크 라캉(J.Lacan)의 지적 계보를 따라서 정확하고 체계적인 글쓰기를 '아버지의 법' 에 종속되는 것이라고 여기고 가급적 피하려 했기 때문이다. 또한 아래에 조금 더 다루게 되겠지만 엘렌 식수(H.Cixous)의 여성적 글쓰기(ecriture feminine)의 영향을 받았고, 확고하고 단정적이고 명확한 글쓰기를 통해 로고스의 단일성을 지지하는 것을 피하는 것 자체가 자신의 철학적 입장이기도 했다.[2] 물론 이 문제가 본인에게는 양보할 수 없는 문제라 할지라도, 이로 인해 독해가 어려워지는 것은 사실이다.
이리가레 본인도 자신에게 글이 너무 어렵다는 비판이 가해진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본서를 보면 7장에서 다양한 질문들과 비판들에 대해 이리가레가 직접 디펜스를 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여기서는 만연체이지만 책 전반에 걸쳐 이런 것만은 아니다.)
"이처럼 제기된 질문이 지나치게 여러 가지 은유적 표현에 근거한다는 사실에 사람들이 반기를 든다면, 이 질문이 환유(액체와 관련된 부분이 더 많은)보다 은유(이른바 고체의 성격인)의 우월성을 거부한다고 대답하기 쉬울 것이다. 혹은─메타언어학적 성격의 이 '범주들' 과 '이분법적 대립' 의 진정한 구분을 유보하면서─어떤 식으로든 언어 활동 자체 (역시) '은유적' 이고,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 언어 활동이 무의식의 '주체' 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아직까지 이루어지는 복종, 무의식의 상징 작용에 굴복하는 것에 질문하기를 거부한다고 대답하기는 쉬울 것이다. 이때 이 상징 작용은 고체에 우선권을 둔다."[3]
- p.145
- p.145
어쨌거나 본서는 저자 뤼스 이리가레가 1973년에서 1976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에 발표한 여러 논문들을 모은 선집이다. 이는 저자가 1974년에 출판한 문제작 《Spequlum》[4] 의 해설본과도 같으며, 독자들을 고려하여 원본보다는 철학적 고찰이 크게 감소하였다. 본서의 논리는 한 세대 이전의 사상가인 시몬 드 보부아르(S.de Beauvoir)와 크게 달라지는데, 보부아르는 《제2의 성》 에서 "여성은 만들어진다" 를 주장했으나, 이리가레는 그 이전에 "나는 (만들어진) 여성이다" 라는 진술을 표현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또한 타자성에 대해서도 양측의 생각이 다른데, 실존주의에 입각한 보부아르는 동일자의 반대축으로 존재하는 제2의 위치로서의 타자를 상정했지만, 이리가레는 여성들이 스스로의 몸을 여성적으로 정의하는 방식이라고 보았다.
1.1. 출간 배경 및 저자 소개
이 단락의 내용은 김수진(2012),[5] 김지은(2018),[6] 박미선(2002),[7] 송유진(2011),[8] 양미란(1999),[9] 태혜숙(2000)[10]의 문헌을 참고하였다. |
1970년대 프랑스의 지적인 지형도는 같은 시기 미국의 그것과는 상당히 달랐다. 이리가레 외에도 모니크 위티그(M.Wittig), 엘렌 식수, 줄리아 크리스테바(J.Kristeva) 등의 면면으로 구성된 프랑스 특유의 페미니즘 사상은 정신분석학과 문예비평을 접목한 것으로, 성차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공한다고 알려져서 오늘날에는 흔히 "차이 페미니즘" 이라고도 불리곤 한다. 이는 언어적 장벽의 문제로 인하여 미국 페미니스트들이나 대중에게는 쉽게 전해지지 못했고, 대서양을 건너 미국에 상륙하게 된 것은 십여 년이 지난 1980년대 즈음이 되어서였다. 이 프랑스 페미니즘은 자크 라캉 등을 따라서 섹슈얼리티와 언어 사이의 관계에 주목하고 있었다. 많은 이들은 남자아이의 경우 상상계에 머무르던 이 소년이 오이디푸스적 단계를 성공적으로 해결함으로서 상징계에 진입하는 반면, 여자아이의 경우 상상계 내에서 오이디푸스적 단계를 해결하는 데 실패함으로써 그대로 상상계 속에 머무른다고 생각했으며, 이 차이에 있어서 언어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에 대한 논의도 많이 이루어졌다.[* 이와 관련하여 프랑스어의 성차별적 경향에 대해서도 이미 널리 알려져 있는데, 예컨대 프랑스어에는 "여의사" 에 해당하는 단어가 없고, "의사" 를 여성형으로 바꾸면 엉뚱하게도 "치료법" 이라는 다른 명사가 되어 버린다고 한다.
문제는 섹슈얼리티의 주요 비평가들과 이론가들이 남초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이들은 섹슈얼리티에 대한 이론을 세운다고 하면서도 실상은 철저히 남성의 관점에 입각해서 자기들이 이해한 대로 여성을 정의하고 설명했다. 결과적으로 이 설명은 여성의 입장에서는 도저히 공감할 수가 없었다. 물론 크리스테바처럼 이를 착실히 따르면서도 어떤 의미 있는 페미니즘적 작업을 하려는 시도가 없진 않았지만, 이리가레에게 있어서 이는 그냥 좌시할 수 없는 문제였다.[11] 그래서 이리가레는 여성의 성에 대해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정신분석학적 전통을 비판하고 더 온전한 설명을 하기 위해 우선 철학 텍스트에서 답을 찾기로 했다. 하지만 문헌을 검토한 결과는 더욱 가관이었는데, 프로이트, 레비나스, 푸코, 들뢰즈, 데리다, 라캉 같은 사람들뿐만 아니라 그 이전의 데카르트, 칸트, 헤겔, 심지어 플라톤에 이르기까지 만족할만한 답을 찾지 못했다.
이 문제가 생각보다 심각하다고 느낀 이리가레는 서양 철학사와 사상사 전체에 어떤 거대한 암묵적인 전제가 깔려있는 게 아닌가 의심하고, "정신분석학을 정신분석한다" 는 당초의 의도를 확장하여 "서구 문화와 사상 그 자체를 뒷받침하는 근본적인 무언가를 찾아낸다" 는 의도에 이르렀다. 그에 따르면, 서구인들의 발상에는 로고스(이성)와 그 단일성에 대한 강박적인 숭배와 집착이 존재해 왔으며, 특히 이는 섹슈얼리티의 언어로 치환하자면 매사 페니스를 기준으로 생각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이 담화의 세계에서 지배적인 질서로 작용하면서, 사람들로 하여금 "그게 당연한 거 아냐?" 라는 인식을 갖게 했으며 그 이외의 모든 것은 상상할 수 없거나 혹은 불완전한 (예컨대 비이성적인) 것처럼 간주되어 배척되게 만들었다. 이러한 전반적인 사상적 기초에 대해서 이리가레는 남근-이성중심주의(phallogoscentrism)라고 불렀다.[12] 페미니즘의 맥락에서 예를 한 가지 들자면, 페미니즘의 가치를 "(양성)평등" 이라고 믿는 것 역시 단일한 하나로서의 섹슈얼리티를 지향하기 때문에 이리가레의 비판의 대상이다. 도리어 이리가레는 우리가 성차를 부정하는 평등의 논리에서 벗어나서 성차를 긍정하는 차이의 논리로 넘어가야 한다고 보았다. 남근-이성중심주의적 담화 질서를 벗어날 때, 우리는 비로소 섹슈얼리티의 복수성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상의 이야기가 바로 《Spequlum》 의 대략적인 내용.
이리가레의 생애는 다소 불분명하다. 이리가레는 반(反)전기적 입장을 갖고 있어서, 자신에 대한 생애정보가 자신의 메시지를 왜곡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일명 정치적인 것의 개인화, 즉 "내 삶을 개인적 생애로 축소하면 여성의 철학사상이라는 내 급진성이 사라진다" 는 것이다. 그나마 세간에 알려진 것으로, 처음에는 언어심리학을 전공했으며, 《치매환자의 언어》(La langage des dements)라는 학위논문에서는 유독 여성 환자들은 자기 자신을 주어의 자리에 올리지 않고 숨기는 언어생활을 한다는 것을 발견하기도 했다. 이후 라캉 일파에 소속되어 있었으며 1968년에는 언어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처럼 개인사가 불분명한 이리가레지만, 상기한 논리를 학계에 설파했을 때 그가 겪은 일만큼은 그의 사상을 논할 때 대표적으로 언급되는 희대의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1974년에 비단 정신분석학뿐만 아니라 서양철학사 전체를 비판하는 논문인 《Spequlum》 을 출판하자 그야말로 학계가 난리가 났던 것. 이리가레는 이 한 타래의 글 때문에 거센 비난을 받았고, 자신이 속해 있던 라캉주의자 일파에서 파문(…?)당했으며, 동료들과의 교류는 전면적으로 끊겨 버렸고, 심지어 자신이 소속되어 있던 뱅센(Vincennes) 대학에서 뜬금없이 해고당했다. 이후로 저자는 프리랜서 작가로 저술활동을 이어갔는데, 본서에도 몇몇 부분들을 보면 이때의 일에 대해 쌓인 게 좀 있었던 모양이다(…).
2. 목차 및 주요 내용
- 1장: 거울, 다른 쪽에서
- 2장: 하나이지 않은 성
- 3장: 정신분석 이론으로의 회귀
- 4장: 담화의 권력/여성의 복종
- 5장: 여자는 다 그런 것
- 6장: 액체의 '작동'
- 7장: 질문들
- 8장: 여자들의 시장
- 9장: 여자들 사이의 상품들
- 10장: '프랑스 여자들'이여, 더 이상 애쓰지 마라
- 11장: 우리의 입술이 저절로 말할 때
책의 각 챕터의 순서는 상당히 체계적인 편이다. 시간이 없다면 2장, (가능하다면 6장도,) 8장, 11장 정도만 읽어도 된다.
우선 1장과 11장은 각각 인트로와 아웃트로에 해당하는 산문체 저술인데, 저자의 의도는 이 두 장을 서로 연결시켜서 명확한 시작도 끝도 없게 하는 것이라고 한다. 1장은 똑같은 내용을 프랑스어 원서로 읽는 것과 동일한 난이도의 해독(?)을 보장하며(…),[13] 11장의 경우 여성이 자신의 몸에게 말을 거는 유려한 우유체의 화법으로 작성되어 있다. 그 동안 침묵당하고 섹슈얼리티를 억압 당한 자신의 몸에게 말을 걸며 깨워 가자는 내용인데, 독자에 따라서는 살짝 울컥하는 마음이 들 정도의 잔잔하면서도 낭만적인 묘사가 돋보이며 이는 이후의 《너, 나, 우리》 에서의 유토피아적 묘사를 예견하기까지 한다.
이후로 2장에서 7장까지는 기존 《Speculum》 에서 문제삼았던 "하나이지 않은 성" 이라는 테마를 바탕으로 하며, 핵심 내용을 설명하는 2장 및 이를 담화 이론의 관점에서 부연하는 5장, 기존 정신분석학과 라캉철학의 계보를 개관하고 문제제기를 하는 3장, 저자의 입장에 대한 인터뷰(대담)으로 구성된 4장,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유체에 빗대는 6장, 저자에게 쏟아진 수많은 질문과 비판, 대담들에 대해 응답하는 기나긴(…) 7장[14]이 이어진다.
다음으로 8장에서 10장까지 이리가레가 주창한 "여성거래 이론" 이 등장한다. 핵심 내용을 설명하는 8장, 그리고 여성거래 이론에서 바라보는 게이 및 레즈비언에 대한 해석을 제시하는 9장, 마지막으로 남근-이성중심주의와 여성거래 시장이 작동하는 사회에서 나타나게 되는 음란물의 양상 및 특징을 설명하고 이의를 제기하는 사설인 10장이 이어진다. 이상의 세 챕터들은 앞서의 내용에 비해서 훨씬 독해가 쉽고 직관적인 글쓰기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 장들의 분량도 짧아서 괴롭진 않다.
책의 전체 내용을 세줄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 정신분석학을 비롯한 서구 철학은 남근-이성중심적 담화 질서 속에서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포착하는 데 실패해 왔으나, 담화를 지배하고 있다 보니 그 무지를 발견하지도 못했다.
- 여성의 섹슈얼리티는 오히려 유체에 비유할 수 있으며, 비체계적이고 자족하는 성질로 인하여 지배적 담화에서는 불완전하거나 불가해한 잔여물처럼 여겨졌고 침묵을 강요 받았다.
- 남성들은 성이 유일한 하나라고 믿기 때문에 동성애적인 남성 간 관계를 바탕으로 현대 문명을 이룩했으며, 여성들은 시장에서 교환되기 위해 어머니, 처녀, 창녀로 분류되었다.
2.1. 챕터별 내용 정리
각 챕터의 내용들을 각각 세 문장으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책에서 전반적으로 논의하고자 하는 내용들은 하단에 간략히 정리할 것이다. 먼저 이리가레가 어떤 맥락에서 "성은 하나가 아니다" 는 주장을 펼치게 되었는지를 설명하고, 이를 바탕으로 자연과학의 용어들까지 거침없이 동원하면서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유체에 비유한 것을 살펴본다. 이와 함께, 섹슈얼리티가 하나밖에 없다고 믿는 남성들이 동성애적 관계를 유지하면서 여성들을 시장에서 거래할 상품으로 취급하는 양상을 이리가레가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 확인할 것이다.- 1. 거울, 다른 쪽에서
미셸 수테의 작품 《Les Arpenteurs》 는 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와 대응된다. 이 작품에서 주인공 엘리스는 남근중심주의에 의해 규정되고 판단되면서 '이상한 나라' 에 위치하게 되고, 그녀의 본질은 인위적으로 재단된다. 우리는 이 작품을 통하여 여성이 욕망하는 것과 남근-이성중심주의가 강제하는 것을 분리할 수 있고, 검시경의 반대편으로의 여정을 시작할 수 있다. - 2. 하나이지 않은 성
여성의 섹슈얼리티는 다중적이고 분산되지만 친밀하고 자기색정적인 객체화에 있으며, 성적 만족을 위해 다른 것이 필요치 않은 자족의 상태에 있다. 그러나 기존의 사상과 철학에서는 섹슈얼리티의 차이를 정확히 포착하지 못했는데, 이는 이들이 단일성을 전제로 하여 섹슈얼리티를 이해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맹점을 지닌 체계 자체에 도전하지 않는 한, 여성들의 처지를 개선하려는 어떤 노력이든 남근중심주의를 전복시키는 데에는 실패할 것이다. - 3. 정신분석 이론으로의 회귀
프로이트는 거세공포,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남근선망 이론을 내세웠으나, 그 설명력의 부족으로 인하여 여성의 성적 발달은 암흑 지대로 남게 되었다. 이후 호르나이, 클라인, 존스, 랑플 드 그루, 도이치, 브룬스윅, 보나파르트, 라캉, 돌토에 이르기까지, 이 주제는 끝없는 논쟁과 수정의 대상이 되어 왔다. 여성의 성적 발달은 현재의 정신분석학이 갖는 취약점이 되고 있으며, 남근중심주의에 도전하기 위해서는 이 주제에 대한 문제제기를 해야 한다. - 4. 담화의 권력/여성의 복종
저자의 철학적 비판의 작업은 정신분석학의 담화적 한계를 문제삼기 위한 의도에서 시작되었으며, 문제가 되는 것은 담화 그 자체이다. 철학의 역사를 가능한 한 근본적으로 고찰해 보면, 철학은 특유의 목적론적이고 단선적인 언어활동을 통해 남근-이성중심주의를 드러낸다. 이를 혁파하려는 활동은 단순한 권력 투쟁 이상의 정치적 의미를 지니는데, 그 이유는 양성의 정치학이 여성거래라는 특수성을 갖기 때문이다. - 5. 여자는 다 그런 것
남성들은 자신들의 섹슈얼리티가 유일한 것이라고 생각하며 여성의 섹슈얼리티는 무시하는데, 정신분석학은 이것이 담화적 권력을 가진 사례이다. 그러나 남성들은 여성들을 자신의 쾌락에 대해서 침묵시키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신들이 욕망하고 이용하며 목적할 섹슈얼리티를 필요로 한다. 여성의 섹슈얼리티는 남성의 쾌락을 위하여 필요한 만큼만 요청되기 때문에, 여성은 자기만의 섹슈얼리티는 텅 빈 상태로 남성에게 봉사하게 된다. - 6. 액체의 '작동'
이 글에서 언급하는 고체나 액체와 같은 단어들은 자연을 관찰하는 용어를 지칭하지 않으며, 고체적인 담화를 통해 정의되는 것을 피하고자 하였다. 남근-이성중심주의 질서는 인식 대상을 체계화, 정형화, 규격화하고자 했으며, 유체적이고 비체계적, 비정형적인 여성의 섹슈얼리티는 잔여물이 되었다. 섹슈얼리티에서 고체화된 부분은 이제 '욕망' 으로 일컬어지며, 정신분석학자들은 나머지 모든 잔여물을 망각한 채 섹슈얼리티를 이해했다고 착각한다. - 7. 질문들
저자에게 그 동안 쏟아졌던 학계의 비판 및 대중적 인터뷰에 대해, 저자는 질문의 과정을 추적하는 데 초점을 맞추어서 부연하고 답변하고자 하였다. 이 질문들에 대한 답변을 위해, 저자는 자신이 《Speculum》 에서 어떤 배경과 어떤 방법론으로 어떤 고찰을 하고자 했는지 요약 정리하여 설명하였다. 또한 저자가 제시하는 시사점과 통찰에 대해 가해지는 학계의 여러 비판들에 대해서도, 저자는 자신의 주장을 적극 옹호하고 방어하고자 하였다. - 8. 여자들의 시장
남성들은 자신과 같은 남성을 재생산하고자 하는 동성애적 욕망에 따라 남성 간에 여성을 거래하며 사회적 질서를 유지해 왔다. 거래의 대상으로서 여성들은, 재생산의 가치를 갖는 어머니, 교환의 가치를 갖는 창녀, 양쪽 모두의 가능성이 있는 처녀의 역할로 나누어진다. 여성이 거래를 위한 '상품' 이 될 때, 여성들은 자신의 신체로 남성의 가치를 반영하느라 자신의 섹슈얼리티 및 욕망과 단절당하게 된다. - 9. 여자들 사이의 상품들
여성거래 시장의 존재는 우리 사회와 문화에서 이성애는 그저 성 역할 지정에 불과하고 그 실제 운영 원칙은 동성애에 입각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 사회에서 남성 간 동성애는 금기시되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여성거래 원칙의 실체를 노출시켜 위협하며, 남성을 비천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한편 우리 사회에서 여성 간 동성애는 정신분석학에 의해 설명되는 데 실패했으며, 남성들의 상상으로 왜곡된 형태로 그 존재를 드러내는 데 그친다. - 10. '프랑스 여자들'이여, 더 이상 애쓰지 마라
음란물은 성적으로 박식한 남성이 성적으로 무지한 여성에게 쾌락을 가르치는 내용을 담고 있으나, 여기에는 의문을 제기할 지점들이 많이 있다. 이를 고찰할 때, 음란물은 섹슈얼리티에 대한 남성들의 자신감과 여성의 고통에 대한 정당화를 반복적인 시퀀스를 통해 반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여성들은 남성들이 음란물을 통해 정당화하는 성적 규범 밖에서도 자신의 자연스러운 섹슈얼리티를 발견할 수 있으며, 이를 막을 명분은 없다. - 11. 우리의 입술이 저절로 말할 때
'나' 로서의 여성들이 그들의 몸을 타자로서의 '너' 로서 대할 때, 이들에게 다가가려면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언어적 양식이 필요하다. 여성들은 잘 말하거나 정확하게 말할 것에 대한 압박감을 이기고 어설프게나마 입을 열어서, 유체적이고 유동적인 몸짓을 시작해야 한다. 여성들은 '나' 와 '너' 의 만남을 위해서는 타자를 구분하여 침묵시키는 일체의 판단과 질서, 규칙, 종결을 거부하고 '우리' 를 이루어내야 한다.
2.2. 성은 하나가 아니다?
페미니즘 문헌들에 익숙한 독자라면 "성이 하나가 아니라 둘이라니, 페미니즘은 양성이 같다고 말하지 않는가?" 라는 의구심을 품을 수 있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먼저 미국 페미니즘과 프랑스 페미니즘의 문화적 차이와 논의의 전후상황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미국 문화는 양성을 자꾸 이원화시키고 우열관계를 부여했기에 미국 페미니즘이 이를 비판할 수밖에 없었지만, 프랑스에서는 성 그 자체를 이야기할 때 여성은 쏙 빼놓고 남성의 성만을 부각시키는 경향이 있었다. 그 결과, 프랑스에서는 양성이 같다는 말이 곧 "여성도 남성과 똑같으니, 별로 관심 가질 필요도 없다, 어차피 세상에 성은 남자 하나뿐이다" 와 같은 언설로 통하게 되었다. 프랑스의 페미니즘은 정신분석학과 라캉철학의 이론적 조망 속에서 이를 비판하고 고찰하면서 형성되어 갔는데, 이리가레는 정신분석학(으로 대변되는 서양철학)이 "섹슈얼리티(리비도)는 일단 남자가 디폴트다, 나머지는 없다" 는 식으로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없는 취급하는 것을 문제삼았다. 이들이 바라보는 여성이란 결국 거울에 비친 남성, 우물에 비친 남성의 모습에 불과하다는 것이다.[15] 따라서 본서의 제목을 뒤집으면 "서양철학은 자꾸 성이 하나라는 개소리(…)를 한다" 가 된다. 이제부터는 이리가레가 비판하고자 하는 이런 남성중심적인 문화적 발상을 "지배적 담화 질서" 라고 통칭하기로 하겠다.아무튼 저자는 본서 2장에서부터 이어지는 많은 내용에 걸쳐서 이 지배적 담화 질서를 비판한다. 원래 《Speculum》 에서는 서양 철학 역사 전반을 둘러보는 형태였지만, 본서에서는 그 중에 정신분석학 하나만을 특별히 포커싱하여 논의한다. 정신분석학자들은 리비도(libido)라는 이름으로 섹슈얼리티를 설명하려 했지만, 결국 여성의 섹슈얼리티는 설명하는 데 실패하고 말았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정신분석학자들의 무의식 속에 지배적 담화 질서가 전제되어 있었기에, 섹슈얼리티를 다루는 데 있어서 일단 남성이 디폴트이고, 나머지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여성의 섹슈얼리티는 남성에 비해 뭔가 불완전하고, 뒤떨어지고, 결핍되고, 뒤처지는 것으로서 설명되었다는 것. 히스테리, 남근선망(penis envy),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거세공포 등은 남성들이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불가해한 것처럼 느꼈기 때문에 억지스럽게 등장한 이론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배적 담화 질서는 어째서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담아내는 데 실패했을까? 저자는 여성의 섹슈얼리티의 특징을 먼저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한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놀랍게도 저자는 남녀 외부 생식기의 해부학적 구조를 들어서 여성의 섹슈얼리티의 특징을 설명한다. 먼저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이해하기 위해 여성의 외음부의 형태에 빗대어 보자. 여성의 음순이 두 입술처럼 서로 밀착하여 마주 접촉되어 있듯이, 여성의 성애는 저자가 "자기색정적" 이라고 표현했을 만큼 자기 자신을 애무하는 형태로 존재한다. 더 쉽게 말하면, 여성은 이미 자신의 몸이 있기 때문에 성애를 충족하는 데 다른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치 않다. 게다가 여성의 성감대는 실상 몸 곳곳에 퍼져 있으며,[16] 가장 사소하게 귓가를 어루만지는 것일지라도 분위기만 무르익는다면 오르가즘을 느낄 수 있는 것이 여성이다. 즉 여성에게 성애의 대상(타자)은 자기 자신으로서, 그나마도 전반적으로는 분산의 상태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분산되어 있으되, 여성들이 느끼는 자신의 몸은 객체이되 타자화할 필요가 없을 만큼 밀착되어 상시 접촉하는 상태이다. 두 음순이 평소 밀착해 존재하는 것처럼, 여성이 자신의 몸을 느끼는 것은 너무나 가까워서 착취나 소유, 강탈이라는 개념이 성립하지 않을 정도이다. 종합적으로, 여성의 섹슈얼리티는 스스로부터 충족되는 자족성이라는 특징을 갖는다.
이제 반대로 남성의 섹슈얼리티를 남성의 외음부의 형태에 빗대어 보자. 주지하듯이 남성의 페니스는 한 사람당 하나씩이고, 자위행위를 제외하면 '가장 이상적인' 쾌락의 획득 방식은 역시 페니스의 질내삽입이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남성의 몸에는 삽입에 활용할 수 있는 질이 없다는 것. 다시 말해, 최상의 쾌락을 얻기 위해 남성은 자신의 몸이 아니라 여성의 몸(내지는 최소한 오나홀)을 활용해야만 한다. 이걸 최대한 단순한 논리로 환원해 보자. 여성과 달리, 남성에게 성애의 대상(타자)은 자신이 아니라 타인이 되며, 다중적이거나 분산된 방식이 아니라 삽입 후 마찰이라는 직접적이고 집중적인 방식을 따른다. 남성들은 상대방과 페니스 이외에는 어떤 신체부위를 접촉하지 않고서도 일단 피스톤 운동만 성립한다면 얼마든지 오르가즘에 도달할 수 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남성의 페니스와 상대방 여성의 질 사이에는 '밀착' 은커녕 도리어 너무나도 먼 물리적, 규범적, 심리적 거리가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남성의 페니스가 이제나저제나 나타날 여성의 질을 필요로 하는 것처럼, 남성이 자신의 성애를 충족하려면 타인을 착취 또는 강탈하든지, 그보다 바람직하게는 소유하든지 해야 한다. 종합적으로, 남성의 섹슈얼리티는 그것을 충족하기 위해 다른 무언가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요구성이라는 특징을 갖는다.
결과적으로 남성들은 여성의 섹슈얼리티에 대해 큰 오해를 하고 말았다는 게 이리가레의 주장이다. 즉, 여성의 성기는 "없다." 남성들이 성기에 대해 으레 기대할 법한 "우람한" 하나가 안 보이기 때문이다. 남성의 페니스는 그 형태상 지칭 가능한 하나의 실루엣을 갖지만, 여성의 음순은 없는 것처럼 취급되고, 여성들도 자신의 성기를 없는 것처럼 취급할 것이라고 믿어서, 마침내 이런 남성들의 인식 하에 남근선망 이론이 나타나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여성의 섹슈얼리티 역시 없는 것처럼 간주된다. 여성들은 섹슈얼리티를 충족하는 데 따로 무언가를 필요로 하지 않지만, 여성에게 섹슈얼리티 따위 없다고 보는 이 남성들에 따르면 이런 자족성은 여성 특유의 '수동성' 으로 비칠 뿐이다. 하지만 여성들은 이런 오해를 발견하거나 교정해주지 못하는 상황이다. 여성들 본인들조차 똑같은 지배적 담화 질서 속에 갇힌 채 무엇이 문제인지 간파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울끈불끈 하는 "우람한" 하나를 섹슈얼리티로 취급해 주는 문화 속에서 여성들은 "나는 저런 게 없는 거구나" 라는 생각을 하도록 교육 받았다. 실상 여성들은 없는 게 아니라 반대로 '온 몸에 걸쳐 존재하는' 것인데, 서구 문화는 그것에 성기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 귀면 귀고 목덜미면 목덜미지, 아무데나 있는 게 어딜 봐서 성기냐는 것이다. 그 결과 여성들은 자신과는 상관도 없는 남성만의 욕망을 위해서 자기 몸을 넘겨주고, 자신의 섹슈얼리티는 망각 속에 빠뜨리고 말았다. 이렇게 해서 남녀 간에는 성적 의존관계가 형성된다는 것이다. 서구사회를 지배하는 "단일성" 이라는 이름의 담화 질서는, 여성들의 섹슈얼리티를 마치 부산물, 잔여물, 찌꺼기, 파편처럼 취급하게 했다.
이런 한계 많은 담화 질서가 어떻게 아직까지 문명을 일구면서 유지되어 올 수 있었을까? 이리가레는 남근-이성중심적 성격을 가진 담화 질서가 우리의 모든 사고방식과 문화적 규범을 지배해 버렸기 때문이라고 본다. 지배적 담화 질서는, 마치 하나밖에 없는 단단히 발기된 페니스를 묘사하듯이, 세상 만물을 정형화, 규격화, 체계화, 고체화하는 방향으로 우리의 생각을 몰아간다. 당장 저자가 《Speculum》 에서 분석의 대상으로 삼았던 철학사 역시, 그 철학적 담화 속에서 역사 전반에 걸쳐 체계성, 응집성, 가치의 보편성, 목적론적 담화, 단선적 담화가 나타났다. 특히나 동시성, 유동성, 상호성을 갖는 주제인 여성에 대한 이야기조차, 이 남성들은 "여자들은 자신의 성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 하지만 우리는 다 알고 있지" 라는 식으로 담화 속에서 여성들을 추방시켜 왔다.[17] 하지만 이들은 알고 있는 것이 아니고, 그들은 모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단지 그 설명의 대상이 일원성, 유일성, 독자성, 단일성이라는 남성의 지배적 담화 질서에 맞게 조직되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이 정확한 설명에 도달하지 못한 채 침묵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입이 있어도 자신들의 말을 옮겨 줄 담화의 공간이 없는 이 여성들은, 결국 남성의 섹슈얼리티를 공허하게 흉내내거나, 거울(반사경)이 되어서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포기하고, 부정하고, 양보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저자는 현실을 바꾸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여성들만의 담화의 공간이 만들어져야 한다고 강변한다. 이것은 본서의 7장에서 "이중적 총체" 라는 용어로도 표현된 바 있었는데, 그 구체적 방법론으로는 남근-이성중심적인 담화 질서를 따르지 않는 대안적 통사론을 활용하는 "여성적 글쓰기" 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팔루스가 너무 강하기 때문에 당장 여성들의 섹슈얼리티를 속시원히 풀어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여성들끼리 한번 까르르 웃는 소리조차도 지배적 담화 질서가 영향을 끼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여성 화자가 여성 청자를 상정하고 글쓰기를 할 때[18] 그들의 남성적 통사론 사이사이로 종종 여성만의 통사론이 나타나기도 한다. 확실하게 결정짓는 대신 미결 상태로 남기고, 규정하는 대신 유연하게 하고, 재단하는 대신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착취적인 표현이 아닌 교환하는 표현을 사용하게 된다는 것이다.[19] 이리가레가 의도적으로 빙빙 에둘러 말하고 단정적인 표현이나 중심 문장을 잘 배치하지 않으려 하는 이유도 이것. 물론 남성들도 지배적 담화 질서에서 벗어난 글쓰기를 추구하는 것이 필요하긴 하겠지만, 그 결과물을 "여성적 글쓰기" 로 볼 수 있을지까지는 예측하기 어렵다고 한다. 확실한 것은 그런 활동이 지배적 담화 질서를 전복시키는 데 기여할 것이라는 점.
이상의 내용을 바탕으로, 남성과 여성에 대해서 서구 전통이 이해하는 각각의 섹슈얼리티가 갖는 특징들을 표 형식으로 정리한다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오른쪽 열에서 여성이 묘사되는 방식이 매우 부정적인데, 이는 위에서 언급했듯이 남근-이성중심주의적인 담화 질서에 여성이 잘 부합하지 않기 때문에 나타나는 몰이해라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남근-이성중심주의적 남녀 이해 (서양철학이 전제하는 섹슈얼리티의 단일 모형) | |
남성 | 여성 |
인간다움의 디폴트값 | 부족한 형태의 남성 |
채워짐 | 공허함 |
이성적임 | 비이성적임 |
명확함 | 모호함 |
체계적임 | 두서없음 |
정형적임 | 무형적임 |
규격, 표준, 완성 | 부산물, 잔여물, 찌꺼기, 파편 |
정량적임 | 정성적임 |
지배적 담화 질서에 부합 | 지배적 담화 질서와 충돌 |
2.2.1. 여성은 유체다: 자연과학의 용어들
이리가레는 위의 논리를 더 연장하여, 본서의 6장에서 본격적으로 여성을 '액체' 또는 '유체' 에 비유한다. 물론 여성들이 본질적으로 그런 특성을 갖는다기보다는, 앞서 언급했듯이 지배적 담화 질서가 여성들을 자꾸 정형화하고 형상화하는 데 실패함으로써 유체로 간주되었다는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여성은 "형태와의 관계에서 여분으로 남는 것"(p.146)이 되어 버렸고, 체계화와 형상화가 불가능한 액체가 되어 버렸다. 이해를 돕기 위해 섹슈얼리티에 대한 지배적 담화 질서를 네모꼴의 형틀에 비유하자면, 여성의 섹슈얼리티는 이 형틀에 맞지 않는 부분이 너무 많아서 형틀 밖으로 넘쳐 나간 부분들이 잔뜩 발생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어찌어찌 형틀을 통해 짜여지고 굳혀진 여성의 섹슈얼리티는 이제 '남근선망', '거세공포',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같은 형태의 이름이 붙여졌지만, 문제는 이 넘쳐 나간 잔여물 '찌꺼기' 들을 어떻게 볼 것인가였다. 정신분석학은 이 여분의 잔재들을 "타나토스" 라고 치부하는 것 이상의 방법이 없었다. 이 남은 부분은 "굳혀진 섹슈얼리티" 가 아닌, "녹아 있는 섹슈얼리티" 에 가까우며, 형틀에 맞지 않는 문제를 드러내는 부분들이라고 할 수 있다. 여성의 섹슈얼리티가 액체 내지 유체에 가깝다는 것은 이런 식으로도 이해할 수 있겠다.저자는 여성의 액체성을 언급할 때 "이중적 움직임"(p.152)을 거론한다. 즉, 여성들은 고체성을 갖는 지배적 담론 질서에 맞지 않지만, 한편으로는 그럭저럭 적응해 살아가기도 한다. 저자에 따르면, 양성은 담화에 있어서 적응성이 서로 다르다. 남성들은 자신들에게 이롭건 해가 되건 간에 일단 확실하게 딱딱 떨어지는 담화를 선호한다. 만일 담화 질서가 맞지 않는다고 느낄 경우에는 이판사판으로 붙어서 이쪽이 깨지든 저쪽이 박살나든 간에 끝장을 보기를 원한다. 하지만 여성은 액체에 가깝기 때문에, 자신들에게 침묵을 요구하는 남근-이성중심주의적인 담화 질서에 대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같은 낯선 기분을 느끼면서도, 그것을 전복하기보다는 어찌어찌 적응해 가며 살아간다. 그리고 그 결과로 여성들은 히스테리적 억압, 불감증, 혹은 성적인 마비를 겪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야기를 보다 보면 불편한 지점이 발생한다. 이리가레가 정말로 물리학적으로 잘 정의된 고체와 액체의 개념에 입각하여 자신의 사유를 펼치고 있는 것이 맞는가? 하술하겠지만 이리가레가 엄밀한 의미를 갖는 과학적 용어들을 마음대로 끌어와서 자꾸 이상한 의미로 활용하는 게 아니냐는 비판은 하루 이틀 나왔던 게 아니었다. 게다가 이리가레 본인이 과학적 방법의 남성 편향성을 주장하면서 어그로를 잔뜩 끌었던 것도 있다. 하지만 본서에서는 의외로(?) 이런 문제에 대해서 나름대로 선을 그으려는 대목들을 발견할 수 있다. 이리가레는 6장 서두에서부터 우리가 논의하게 될 액체의 속성이라든지 하는 이야기는 물리적 현실에서 말하는 그 액체가 아니라고 선을 긋는다. 이리가레에 따르면, "이 자연의 특성들 가운데 몇 가지를 축소시키고, 이상적인 시선으로만 그 특징들을/자연을 직시해야만 할 것이다"(p.142). 용어를 어떻게 정의하느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용어 간의 관계가 어떻게 되느냐는 것으로, 이와 같은 관점을 정당화하기 위해 이리가레는 놀랍게도(?) 고틀로프 프레게(G.Frege)의 이름을 들기도 한다. 아무튼 이리가레가 말하는 액체적 특징이란 "상징 양식에서 실제 액체의 몇 가지 속성을 배제" 하고, "그 이상적인 특징만을 계승"(이상 p.144)한 결과이며, "구체적 현실과의 관계는 상실"(p.145)할 것을 각오하고서 논의의 진척을 위해 관념적으로 동원하겠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몇몇 문장들만으로 이리가레에 대한 과학계의 혐의가 쉽게 벗겨지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용어의 전용 논란에 대해서는 6장을 둘러싼 전후맥락을 함께 파악할 필요도 있다. 기존의 라캉철학계에서는 고체, 액체 등의 물리학적 의미를 갖는 용어들을 빌려다가 논의하는 것이 한창 진행중이었으며, 이리가레는 이 논쟁의 흐름 속에 올라타서 고체로서의 남성과 유체로서의 여성을 주장한 것이다. 따라서 6장은 별도의 서문이 없으며, 첫 시작부터 '그에게', '그가' 같은 대명사가 등장하고 있고, 추가적인 부연설명 없이 라캉이 새롭게 정의한 '실재' 라는 단어가 인용되고 있다. 따라서 6장의 이해를 위해서는 라캉철학계 내의 기존의 논쟁에 대해 먼저 이해해야만 하고, 이해했다 하더라도 다시금 이리가레의 난해한 암시적 글쓰기에 익숙해져야 한다. '비정형적인 것을 측량하고 재단하고 규격화하여 정형적이게 한다' 는 아이디어는 미셸 푸코 등의 사상가들이 근대성에 대해 논의할 때에도 매우 중요하게 취급되므로, 가능하다면 인문학 전반에 걸친 배경지식이 요구된다.
2.3. 여성거래 이론: 어머니, 처녀, 창녀
"우리가 알고 있는 사회, 우리의 문화는 여자들의 교환 위에서 세워졌다. ...(중략)... 사회적 질서, 상징적 질서, 간략하게 질서로의 전이를 보장하는 것, 그것은 남자들, 혹은 남자들의 집단이 자기들 사이에서 여자들을 유포시키는 것이다. 즉 이것이 근친상간 금지라는 명목 하에 인정된 규범이다. ...(중략)... 이 금기는 수 세기 전부터 우리 사회의 기초가 되어 온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질서의 기초를 보장한다."
- p.223
- p.223
저자는 위에서 길게 살펴보았듯이, 남성들이 "세상에 성은 하나밖에 없다" 고 믿는 경향이 있음을 주장한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의문이 들 수가 있다. 아무리 자기들밖에 모른다 해도 결국에 그들의 대다수는 이성애 지향일 텐데, 그들도 어쨌거나 여성이라는 섹슈얼리티에 대해서는 인식하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결혼 상대를 물색하는 남성들이 '여성의 섹슈얼리티' 에 대해서 정말로 모를 수가 있는가? 저자에 따르면 그들은 여전히 모른다. 이를 위해 저자는 먼저 클로드 레비스트로스(C.Levi-Strauss)의 발견을 빌어온다. 많은 인류학적 사회들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결혼 문화에는 좀 특이한 점이 있었다. 결혼을 앞둔 예비 신랑은, 자신과 한 가정을 이루게 될 예비 아내를 취할 때 그녀의 가족에게 마치 시장에서 물건을 구입하고 대금을 지불하는 것처럼 그 대가를 지불하는 모습을 보인다는 것이다. 그나마 그것도 아내 본인이나 처제, 처형, 장모에게 지불하는 게 아니라, 장인이나 처남에게 지불한다고. 여성이 자신의 남편을 찾기 위해 섹슈얼리티를 드러낼 기회 따위는 주어지지 않았다. 레비스트로스는 이를 관찰하면서, "남성들은 노동력을 생산하는 주체로서 그에 대한 응분의 보수를 받기 위해 여성을 '구입' 한다" 고 말했다. 남성들은 여성의 섹슈얼리티에 대해 알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이리가레는 서구의 남근-이성중심적 문화가 인위적으로 여성들을 침묵시킴으로써 여성들을 상품화한다고 말한다. 처음부터 섹슈얼리티를 갖출 수 있는 인간으로서의 취급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성이 상품이 된다면, 결국 그 상품을 판매하는 판매자가 있어야 할 것이고, 구매하는 구매자가 있어야 할 것이며, 여성이 팔려가는 시장이 있어야 할 것이다. 이리가레는 남성들이 여성거래 시장에 참여함으로써 (자기들의 성적 지향이 무엇이든 간에)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침묵시킨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남성들은 이를 바탕으로 자신들의 집단의 질서와 응집력을 유지한다. 이리가레의 눈에 이런 여성거래 문화는 동성애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 그 이유는 남성 간 거래의 목적이 "자기와 유사한 존재인 남성을 번식시키는" 것이고, 여성은 그저 "이 관계의 목적으로 기능할 때에만 가치를 가진다"(이상 p.225)는 점 때문이다. 다시 말해, 여성은 그저 도구일 뿐이고, 그 목적은 언제나 "우리들 남성 만세!" 라는 것이다.
물론, 현대에 '상품', '시장', '거래' 같은 단어들을 동원할 때 이름을 입에 올리지 않으면 섭한 유명한 아저씨(…)가 있다. 바로 카를 마르크스다. 저자는 자연에 대한 가치의 부여, 노동과 생산, 노동의 분화, 가치의 축적 등의 측면에서 볼 때, 여성이 거래되는 양상은 마르크스가 자본주의를 분석하면서 규정한 특성들을 상당 부분 반영하고 있음을 발견한다. 심지어 더 나아가, 오히려 모든 착취와 갈등의 구조의 근원에는 여성에 대한 착취가 존재한다고 볼 수도 있다.[20] 저자 왈, "역사에 나타난 모든 사회 체제들은 생산 계급에 대한 착취, 즉 여성의 착취를 기반으로 작용한다"(pp.226-227). 그런데 마르크스를 검토하던 저자 이리가레는 난관에 봉착했다. 여성거래 시장에서 부의 축적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였다. 여성의 가치가 정말로 아들을 재생산하기 위함이라면, 남성들은 한 여성을 골랐다면 그녀에게 만족한 채 순풍순풍 자녀를 만들기만 하면 되었다. 하지만 남성들은 그런 걸 그다지 원하지 않았다. 남성들은 '번식' 보다는 오히려 '섭렵'(…)을 더욱 욕망하고 있었다. 상품가치로서의 여성은 단순히 재생산 가치 그 이상의 '덤' 과 같은 무언가가 있었다.
이 지점에서 저자는 상품으로 팔려나가는 여성들의 가치는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는 결론을 도출한다. 첫째, 재생산을 위해 '사용' 해야 할 자연적 가치가 있다. 우리 사회는 '번식 목적의 여성' 들에게 주어지는 역할을 어머니라고 이름붙였다. 이들 여성들은 일단 한 번 사용을 위해 소유한 후에는 절대로, 다시는 여성거래 시장에 내놓아서는 안 된다. 남편들은 다른 '놈팽이들' 이 눈독을 들이지 못하게 각별히 신경을 써야 한다. 아들들은 절대 어머니를 범해서도 안 되고, 행여 타인이 모욕이라도 했다간 그 고귀하고 고결한 가치가 훼손될 수 있으니 전력으로 맞서서 혼쭐을 내야 한다. 둘째, 욕망의 해소를 위해 '교환' 해야 할 사회적 가치가 있다. 우리 사회는 '섭렵 목적의 여성' 들에게 주어지는 역할을 창녀라고 이름붙였다. 이들 여성들은 욕망의 해소를 위해 이미 사용된 상태이지만, 어머니와는 정반대로, 도리어 그 사용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시장에서의 교환의 경험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그 가치가 점차 증가한다. 남성들에게 있어서 이들은 범할수록 가치가 감소하기는커녕, 도리어 더 많이 범하는 것이 이들의 가치를 더욱 높인다.
물론 어머니와 창녀는 모두 똑같이 첫경험을 해 보았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단지 그 이후로 어떤 목적을 위해 소비되는 상품인가가 갈릴 뿐이다. 그렇다면 아직 첫경험을 하지 않은, 소위 '남자를 알지 못하는' 여성들도 어떤 가치를 갖는다고 볼 수 있을까? 저자에 따르면 처녀라는 사회적 역할이 지워진 여성들이 여성거래 시장에서 가장 큰 가치를 갖는다. 처녀로 이름붙여진 여성들의 몸은 그 자체로 교환의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담고 있는 장소이자 기호이다. 처녀들은 향후 남성들의 욕망을 위한 교환수단이 될 수도 있고(창녀), 누군가에게 소유되어서 재생산에만 전념하는 생식수단이 될 수도 있다(어머니). 다시 말하자면, 처녀는 자기 자체로서는 존재하지 않고, 그저 시장에 내놓아야 할 잠재적 교환물로서의 가치를 지닐 뿐이다. 여성거래 시장을 경매 현장에 비유하자면, 처녀들은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이 모두 함께 "오오오!!" 하면서 탄성을 지를 정도로 고급의 매물인 셈이다.
이제 달리 설명해 보자. 남성들은 자기 여친에 대해서는 "넌 내꺼야!"(…)라면서 소유의식을 드러내고, 기사도니 뭐니 온갖 배려를 아끼지 않으며 지켜주려고 한다. 그러던 남성도 그날 밤 자신이 좋아하는 AV 여배우에 대해서는 아무 죄책감 없이 그녀를 성적으로 소비하며, 다른 남성이 그녀를 소비하는 것에 대해 질투심을 드러내지도 않는다. 똑같은 남성이 '타인' 인 여성을 똑같이 좋아한다는데, 정작 대하는 방식은 정반대다. 이리가레의 관점에서 이런 이중생활(?)은 전혀 이상할 것도 아니고 놀랄 것도 아니다. 우리 사회가 여성을 두 가지 역할로 나누어 놓았기 때문이다. 그럼 여성들은 어떻게 살고 있는가? 여성들은 자기들대로 우리 사회가 부여한 세 가지 사회적 역할에 최대한 맞추려고 기를 쓰는 갑갑한 상황이다. 어머니 역할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여성들은 행여라도 남들의 손가락질을 받을까 하여 일부러 수수한 옷차림을 하고 가능한 한 '색기' 를 드러내지 않으려고 한다. 처녀 역할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여성들은 하늘거리는 파스텔톤 드레스를 입은 채 어떻게든 어린아이처럼 순진무구한 모습을 보이려고 한다. 창녀 역할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여성들은 도발적이고 섹시한 옷차림에 짙은 화장을 하고 자신의 몸에 쏟아지는 뭇 남성들의 시선을 즐긴다. 모든 여성들이 자신의 몸으로 남성의 욕망을 투영하는 것이다. 자신의 몸은 자신이 사색하고 스스로를 반영해야 할 공간인데, 그 몸으로 마치 거울(반사경)처럼 남의 욕망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래서야 결국 여성들은 스스로를 잃어버리고, 자신의 몸과도 단절되는 운명을 맞이할 뿐인 것이다.
이상의 서술을 보면서 느꼈겠지만 이리가레의 여성거래 이론은 이후의 페미니스트들에게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으며, 여성 아이돌 문화[21]나 여성 영화배우 캐릭터, 음란물 분석 및 광범위한 매체비평, 서사비평 등에 범용적으로 활용되었다. 현대에도 남성들의 단톡방 성희롱 사건이나 소위 '쩡 나누기' 같은 음란물 공유 행태가 뉴스에서 불거지면, 페미니스트들이 일차적으로 동원하는 이론적 조망은 대개 이리가레의 사상에 기초하는 경우가 많다. 당장 본서에서도 10장에서 저자가 음란물에서 소비되는 여성의 이미지에 대해 언급한 바 있기도 했고... 하지만 그 이후로 여성거래 이론에 태클이 없었던 건 아니어서, 그 이후로 이브 세지윅(E.K.Sedgwick)과 우에노 치즈코에 의해 동성사회성(homosociality)이라는 개념으로 발전되면서 이리가레의 당초 이론은 곧 비판 받게 되었다. 남성들 사이의 관계는 그렇게 동성애적인 것이 아니며, 동성 간의(homo) 사회적인(social) 양상으로 새롭게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남성의 욕망이 단순히 리비도 하나로 이해되던 것에서 벗어나, 리비도와 카텍시스(cathexis)의 두 종류로 구분된다는 보다 발전된 이해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우리 사회는 이성애규범성이 지배하는 사회가 아니던가? 저자는 서구 사회가 수천 년 간 남성들 간의 동성애를 통해 이어져 왔다고 주장하지만, 그렇다면 서구 사회가 동성애를 공공연히 배척하는 이유를 설명할 수 없지 않을까? 저자 역시 8장 서두에서부터 이 문제를 인식하지만, 동성애의 표현이 금기인 이유는 동성애가 '지배하되 표현되지는 않는' 지위에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즉, 동성애는 처음부터 "표현되어야 할 관계의 형태" 가 아니라, "남성 간 관계를 순조롭게 하는 방식으로서 작동할 관계의 형태" 라는 것이다. 저자의 논리에 따르면 동성애적인 남성 간 관계는 "이 남자가 좋다" 가 아니라, "우리 남자들끼리가 좋지!" 라는 의미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성 소수자 문제를 짧게 다루는 9장에서도, 남성 간 동성애는 마치 아버지와 아들 간의 근친상간을 연상케 하는 위협적인 행위로 받아들여지며, 페니스마저 "남자들 사이의 쾌락을 위한 단순한 도구"(p.252)라고 격하시켜서 남성을 거래의 주체가 아닌 거래의 상품으로 추락시킨다고 설명하고 있다. 9장에서는 레즈비언에 대해서도 다루고 있는데, 기존의 정신분석학은 이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고,[22] 그나마 우리 사회의 지배적 담화 질서는 이 불가해한 현상을 이해 가능한 형태로 나타내기 위하여 "남자들의 망상에 팔리는 창녀로서"(p.256), 즉 남성향 백합물의 형태로 연출한다고 한다.
3. 논란과 의의, 한계점들
이리가레의 사상은 북미권에서는 생물학적 본질주의(biological essentialism)가 아니냐는 극심한 공격에 노출되었다. 마거릿 휫포드(M.Whitford), 토릴 모이(T.Moi), 앤 존스(A.R.Jones), 재닛 세이어(J.Sayer), 린 세갈(L.Segal) 등은 이리가레가 본질주의로 귀결될 것이라고 비판했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이리가레가 데리다의 뒤를 따라서 주체와 객체의 구분법이라는 대립적 사고방식을 해체하기 위해 부득이 여성의 몸을 비유로 삼았을 거라는 해석도 있다. 이것을 이름하여 전략적 본질주의(strategic essentialism)라고 부르는데, 본질적이라고 가정되는 대립항을 잠시 이용하여 그 대립항을 내부에서부터 약화시키고 종국에는 그런 사고방식 자체를 해체하자는 것이다.이리가레의 설명 역시 해부학적이긴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은유이며, 관계적인 것이고, 전략적으로 차용됐다는 설명이 있다. 이리가레는 해부학적인 접근을 시도함으로서 서구문화의 비평, 모녀관계에 대한 보다 정확한 설명, 남성중심적 가계를 더 잘 설명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렇기 때문에 이리가레가 몸에 대해 말할 때는 단순한 생물학적 결정론이나 프로이트 식의 해부학적 운명론의 관점에서의 몸이 아닌, 얼마든지 재구성되고 변화 가능한 조건에 가깝다. 오히려 지금까지 설명한 이리가레의 관점에서 본다면, 무엇이 본질이라고 말하는 것이야말로 이리가레가 매우 경계하는 언설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종합적으로, 이리가레의 메시지는 "여성들이여, 본질로 회귀하라" 가 아닌, "여성들의 몸은 안녕들 하십니까" 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이리가레에 대해 종종 엮이는 또 다른 논란은, 그 논리가 모계중심주의 혹은 모성 예찬론이 아니냐는 것이다. 예컨대 먼 훗날 엘리자베트 바댕테르(E.Badinter)는 《잘못된 길》 에서 90년대 무렵의 페미니스트들이 남성을 악마화하기 위하여 모성애와 '어머니의 희생' 을 강조하는 실수를 저질렀다고 비판한 바 있다. 그런데, 종종 이리가레가 모성과 임신에 대해 긍정적으로 언급하기는 하나, 모성을 대안적 가치나 새로운 윤리적 원칙으로 삼고 있지는 않으며, 오히려 여성의 위치를 재생산의 자리로 한정시키는 서구 문화를 비판하고 있는 것에 더 가깝다. 이에 대해 태혜숙(2000)은 이리가레가 모계를 언급할 때 이는 어디까지나 상상계를 대체하여 상징계를 변화시키기 위한 수단이며, 여성 간 관계 및 모녀관계를 인식하지 못하는 상상계를 폐기하고 해당 관계들까지 모두 인식해낼 수 있는 대안적 상상계를 정립시키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라고 하였다.
이리가레의 본서는 서구문명 및 언어생활에서 지금껏 침묵당해 왔던 여성들의 섹슈얼리티의 위치를 복원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무엇이 나쁘다, 무엇이 열등하다, 무엇이 뒤떨어진다" 는 주장에 대해 반발하기는 쉽다. 그러나 그 무엇의 '존재 자체' 를 아예 언어 수준에서 상정하지 않는 담화 속에서 생각이 그 존재에까지 이르는 것은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이럴 때에는 그 담화에 포함되지 않은 외부의 누군가가 와서 "너희들, 아까부터 왜 이러이러한 것에 대해서는 생각을 안 하고 있었어?" 라고 깨우쳐 주는 것이 중요하다. 즉, 본서는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말을 꺼내고, 생각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생각해내는 작업인 것이다.
또한 본서는 단순히 구조의 존재를 지목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구조의 동태적 성격을 강조함으로써 사회적 변화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그 사상사적 가치를 갖는다. 기존의 다른 프랑스 페미니스트들이 단순히 여성적 상상계를 형성할 수 있는 '여성적 글쓰기' 를 강조했다면, 이리가레는 이를 바탕으로 그 상상계 자체를 변화시키고자 여성들의 잠재성(virtualite)에 기대를 걸었다는 점에서 좀 더 정치적 포지션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크리스테바와도 잘 대조되는데, 예컨대 크리스테바는 "한번 진입한 상징계는 벗어날 수 없다" 는 입장에 있었지만, 이리가레는 "기존의 상상계를 대안적인 것으로 변화시킨다면 상징계도 변화할 수 있다" 고 보았다.[23] 이처럼 프랑스 페미니즘이 향후 나아갈 길에 대해서 명확히 제시하는 경향은 훗날 《나, 너, 우리》 에서 구체화되었으며, 이 성과는 여성신학계 등에도 영향을 주었다.
저자가 사회적 변화를 일으키기 위해 제시한 중요한 방법론이 바로 미메시스(mimesis)였다. 이리가레가 말한 미메시스를 간략히 요약하면 불완전한 모방이라고 할 수 있는데, 여성들이 자신만의 상상계를 통해 팔루스에 의존하지 않고 여성 자신을 말하기 위해서는 정치적 레즈비어니즘이나 경제적 독립이 아니라 바로 이 미메시스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여성에 대한 기존의 담론을 문제삼기 위해 그것을 반복하되, 충실하지 않게만 재현하고, 종국에는 그것의 철폐를 목표로 한다.[24] 하지만 현실적으로 팔루스는 너무나 강하고, 여성들이 직접 단시간에 일구어낼 수 있는 자체적인 상상계는 쉽게 도래하기 힘들기에, 그 사이에 전략적으로 미메시스를 밀고 있어야 한다는 것. 완전한 침묵도 아니요 완전히 담론체계 밖으로 나가서 소통 불가능한 방식도 아닌, 희미하고 어눌하게나마 여성의 존재를 드러내자는 것이다.[25] 이처럼 지금으로서는 여성이 팔루스의 영향력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상태로 정의되는 것이 어렵기 때문에, 이리가레는 "여성들의 상상계는 아직 도래하지 않았다" 고 말한다.
이상의 이리가레의 사상에 대해서 그 주요 비판점 역시 꽤나 잘 정리되어 있다. 첫째, 여성들의 개인차를 설명하기가 불가능하다. 본서에서는 늘 여성이 어떤 거대한 집단으로서 거론되는데, 극도로 거시적인 문화비판 서적인 만큼 여성 개개인보다는 집단으로서의 여성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다. 둘째, 그러면서도 거시적 사회분석에서 흔히 거론되는 사회적 착취와 갈등 문제에 적용하기 어렵다. 이는 특히 페미니즘 진영에서 꽤 자주 신자유주의를 하나의 이념으로 취급하여 비판의 소재로 다루는 것을 고려하면 상당한 약점이다. 셋째, 이리가레의 논리는 선진 산업사회의 백인 중산층만을 위한 논리라는 비판을 받았다. 《너, 나, 우리》 등에서 그려낸 '우리의 차이' 에 기초한 이상적인 양성관계는 사회적 안전망이 충분히 갖추어지고 안정된 서구사회에나 해당되는 문제이고, 제3세계에는 적용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넷째, 교차성 담론과 접점이 약하다. 특히 이는 현대에 들어 페미니즘이 교차성에 깊은 관심을 갖는다는 점에서 또 다른 약점이 된다. 마지막으로, 과학철학의 관점에서 이리가레는 과학이 그 연구주제를 선정하는 것에 있어서도 남근-이성중심주의가 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주장했는데[26] 이것이 과학자들에게 반박을 받았다. 이는 이후에 앨런 소칼과 리처드 도킨스 등도 거론하는 떡밥이 되었는데, 과학계의 연구 흐름에 대해 명확히 이해하지 못한 상태로 어설프게 과학을 평론하려는 시도라고 비판되었다. 즉, 유체역학의 연구가 늦는 이유는 단순히 그것이 더 어렵기 때문이지, 고체역학보다 더 '여성적이어서' 가 아니라는 것.
4.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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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느 학계나 골머리를 앓는 문제이지만, 전문 번역가들은 외국어에 통달한 반면 그 학계 고유의 전후맥락이나 용어의 한정적 정의에 익숙하지 못해 학술적인 오역을 일으키고, 그 분야 연구자들은 학계의 논의의 흐름을 알고 있는 반면 외국어에는 그만큼 익숙하지 못해 언어적인 오역을 일으키곤 한다.[2] 실제로 이리가레는 "○○는 ●●이다" 형태로 딱 떨어지게 구성되는 문장에 대해 계사(繫辭)라는 문법의 관점에서 비평한 적이 있다.[3] 최대한 캐주얼하게 해석해 보자면 이렇다. "내 글쓰기에서 쓰이는 비유가 어렵다고 말들이 많은 모양인데, 내 은유법도 환유법에 비하면 더 남근-이성중심적이고 '고체' 적인 거거든? 남근-이성중심적 철학은 좋아해도 은유법까지는 못 좋아하는 모양이네? 그리고 뭐 이분법적으로 보는 거냐는 불만은 나오겠지만, 내가 보기엔 어차피 모든 언어생활이 다 무언가의 은유거든? 매사 명확하게 말하라고 요구하는 것 자체가 벌써 남근-이성중심적인 대전제의 은유잖아? (이것도 은유라고 볼 수 있을지도 좀 생각해 봐야 되겠지만.) 난 너희들의 무의식 속에 깔려 있는 남근-이성중심적 대전제에 굴복하는 일 따위는 못 해." 하지만 이리가레였다면 이 각주의 '해석' 시도에 대해 "또 다시 어떤 언어 활동에 굴복시키는 것"(p.149)이라며 발끈했을 것이다.[4] 여기서 Spequlum은 단순한 '거울' 이 아니라 오히려 '검시경' 으로 번역되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여겨지며, 더 정확히는 (타자인 여성에 대한) 검시경이라고 볼 수 있다. 본래 이 단어는 산부인과에서 질 내벽을 검사하기 위해 사용하는 작은 거울을 가리켰다.[5] 김수진 (2012). 성적 차이를 사유하는 새로운 지평. 한정숙 편저, 여성주의 고전을 읽는다: 계몽주의에서 포스트모더니즘까지 두 세기의 여정. 한길사, 서울.[6] 김지은 (2018). 남근중심주의의 정신분석학적 해체를 통한 여성의 복권: 엘렌 식수와 뤼스 이리가레의 논의를 중심으로. 2018 한국영어영문학회 국제학술대회 발표자료집. 149-157.[7] 박미선 (2002). 성차의 윤리학과 성별화된 권리. 여/성이론, 6, 67-87.[8] 송유진 (2011). 뤼스 이리가레의 여성 주체성과 성차의 윤리학에 관하여. 여/성이론, (25), 149-168.[9] 양미란 (1999). 뤼스 이리가라이의 『나, 너, 우리--차이의 문화를 위하여』. 한국여성신학, (39), 106-109.[10] 태혜숙. (2000). 몸의 정치, 성차의 윤리. 여/성이론, 2, 228-245.[11] 김수진(2012)은 크리스테바가 라캉의 모범생이라면 이리가레는 반항아와도 같다고 비유했다. 다른 문헌들에서는 크리스테바는 초기 구조주의자, 이리가레는 후기 구조주의자라는 차이가 있기 때문이라고도 설명한다. 단, 일각에서는 이리가레가 정신분석학을 전복시키려는 시도를 했다고도 이해하지만 이는 사실 적절치 않은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이리가레는 "정신분석학자들의 무의식을 정신분석하겠다" 는 취지에서, 그리고 정신분석학이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제대로 포착해내지 못하는 이론적 한계를 채워넣기 위해 자신의 작업을 시작했기 때문이다.[12] 태혜숙(2000)에 따르면, "여성을 무시하고 배제하는 것은 서구철학 질서 자체가 구조적으로 필요로 하는 것이었다"(p.233).[13] 스위스의 영화감독 미셸 수테(M.Soutte)의 작품 《Les Arpenteurs》(1972)에 대한 일종의 리뷰 성격이다. 이 작품을 평론하기 위해서 루이스 캐럴(L.Carrel)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와 겹쳐 보고 있기에, 두 작품 모두에 일가견이 있지 않고서는 정말 단 한 문장도 이해하기 어렵게 되어 있는 것이 1장이다.[14] 1975년 3월에 툴루즈 르 미라유에서 개최된 철학 분과 교육 연구부 세미나, 1974년 뱅센 대학의 박사학위논문 심사 과정에서 나왔던 심사위원들의 질문, 1975년 2월 26일 방송 프로그램 《Dialogues》 에서 필리프 라쿠-라바르트(P.Lacoue-Labarthe)가 던진 질문, 한 인터뷰에서 한스 포를라그(H.R.Forlag)와 프레드릭 엥겔스타드(F.Engelstad)가 던진 질문 등이다.[15] 양미란(1999)의 문헌에서는 이런 여성의 모습을 "남근적 여성" 이라고 지칭한 바 있다.[16] 바로 이런 맥락에서 이리가레는 페미니스트들 사이에 핫하던 떡밥, 즉 "여성은 쾌감을 질에서 얻는가, 아니면 클리토리스에서 얻는가" 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었다. 기존의 페미니스트들은 페니스의 질내삽입을 통해 느끼는 쾌락이 수동적인 것이라고 여기고 이를 부정하거나 혹은 평가 절하했으며, 그 대신 클리토리스 자위를 추천하는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이리가레의 사상에 입각해 보면, 여성의 성감대라는 것은 결국 both A and B의 논리이지, either A or B의 논리가 아니었다. 즉 이리가레의 대답은 "둘 다." 오히려 후자야말로 페미니스트들이 가장 피해야 하는 논리인 것이다.[17] 이 점에서 저자는 본서의 5장에서, 남성들이 자아내는 정신분석학의 담화 질서는 가히 제국주의적이라고 비판했고, 자기중심적인 쾌락을 절대화하고 신성화하는 것에 대해서는 '섹슈얼리티의 자칭 신' 이라며 비판했다.[18] 이때 잠재적 청자 중에 단 한 명이라도 남성이 상정될 수 있다면 여성만의 대안적 통사론은 나타나지 않는다고 한다.[19] 이렇게 놓고 본다면 국내에서 통하는 소위 여자어와 같은 것인가 싶을 수 있겠지만, 같은 여자어라고 할지라도 여성이 남성에게 여자어를 쓰는 경우는 남성의 섹슈얼리티 세계를 위협하지 않도록 하려는 지배적 담화 질서의 결과물이기 때문에 이리가레가 부정적으로 볼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여성들끼리 통하는 여자어가 있다면 이것에 대해서는 꽤 호의적인 반응을 보일 수도 있겠다.[20] 현대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이 주장에 그다지 동의하지 않는 경우가 많으며, 이들이 페미니즘 진영과 연대하는 것을 결정적으로 가로막는 요인이기도 하다.[21] 청순 컨셉의 아이돌과 섹시 컨셉의 아이돌이 극명하게 양분되는 것은 유독 여성 아이돌에게 자주 나타나며, 남성 아이돌의 경우 두 컨셉이 서로 거의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혼합되어 있거나, 적어도 청순한 행동과 섹시한 행동 간의 구분이 규범화되어 있지 않다. 즉, 여성 아이돌의 경우 순백색처럼 맑고 순수하던 그녀가 갑자기 가죽 의상을 입고 낯뜨거운 안무를 소화한다면 '우리 애한테 저따위 춤을 추게 시킨 놈이 누구냐' 는 기존 팬층의 반발이 나타날 수 있으나, 남성 아이돌의 경우 여리여리하던 미소년이 갑자기 상의를 찢고 복근을 드러내거나 하면 환호를 받을지언정 '가치가 떨어져서' 상심하는 팬들은 많지 않다. 연예계에 나타나는 이런 경향은 커뮤니케이션학 및 비평계를 중심으로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다.[22] 정신분석학에 따르면 여성 간 동성애는 여성들이 남성의 섹슈얼리티를 모방하는 남성 콤플렉스라고 한다. 프로이트는 자신이 이해하기 힘든 것을 접할 때마다 해부학으로 회귀하는 나쁜 버릇(…)이 있어서, "몸매가 남성적이거나 각진 골격을 지닌 여성은 레즈비언일 가능성이 높다" 는 설명을 내놓았다고.[23] 이와 관련하여 송유진(2011)의 문헌에서 상상(imagination)에 대한 구체적인 해설이 나온다. 이 문헌에 따르면, 상상이란 개인이 외부 세계를 담론의 권력 하에서 인식할 때 각 대상들 간의 관계를 실제 관계와는 다소 달라지는 방식으로 사유하게 되는데, 이때 대상은 인식의 주체를 거울처럼 비추는 반영의 성격을 갖게 되고, 이 왜곡으로 인해 발생하는 불연속을 채워넣는 작동의 과정이 바로 상상이다. 상상은 대개 그것이 허구임이 알려져 있지만, 상상의 한 종류인 망상(illusion)은 아예 그것이 허구인지조차 모른다. 이렇게 상상된 표상들의 체계적 작동을 통해서 개인으로 하여금 특정 관념을 진리라고 생각하도록 하는 것을 이데올로기(ideologie)라고 한다. 이리가레는 남근중심적 상상계가 이데올로기의 한 종류라고 보고 있다. 송유진(2011)의 해설에 따르면, 남성 주체는 섹슈얼리티라는 사유의 대상을 자기 자신의 재현(re-presentation)으로 간주하여, 여성의 섹슈얼리티라는 자신이 인식하지 못하는 불연속을 '존재하지 않는 것' 으로 채워넣는 상상을 하고, 이를 동일성, 단일성, 단수성이라는 망상으로 뒷받침한다.[24] 예컨대 팔루스를 통해 보면 여성들의 말은 비논리적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이를 부분적으로만 모방하는 미메시스를 통해 보면 여성들의 말이 미완이고, 흩어지며, 재잘거림이 되고, 그것조차도 어디까지나 남성들의 부분적인 시각에 지나지 않음을 알 수 있게 된다.[25] 정희진 씨 등의 국내의 많은 문화평론가들이 이 논리를 들어서 메갈리아 및 워마드의 반사회적인 행적들을 정당화하고 합리화하는 데 악용했다. "그들이 비록 그럴지라도 지금껏 여성으로서 침묵당해 왔던 처지인데 어떻게 곧바로 품위 있고 교양 있게 호소한단 말인가? 그들의 어눌한 몸짓과 절규를 문제삼지 말고 존중해야 한다!" 같은 식이다. 행동으로서의 악행까지도 언어 이론을 가지고 정당화하는 것은 국내 페미니즘 진영에서 하루 이틀 일은 아니다.[26] 《An Ethics of Sexual Difference》 에 따르면 과학 분야에서 정의, 개념화, 모형화, 객관성, 보편성, 연구주체와 연구대상의 분리, 이용가능성 등을 보면 남근-이성중심적 사고방식을 알 수 있다고 한다. 이리가레는 여기서 서구 자연과학이 고체역학은 많이 연구했지만 유체역학은 상대적으로 도외시했다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