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22 15:44:04

처첩



1. 개요2. 상세3. 기타

1. 개요

처첩()은 말 그대로 본처[1]을 통틀어서 부르는 말이다. 후처와 첩은 엄연히 다른 단어이다. 후처는 '죽거나 쫓겨나는 등의 사유로 더 이상 집안에 존재하지 않게 된 본처[2]의 자리를 이어받아 새로운 본처가 된 여자'를 이르는 말이며, 첩은 '본처 외의 여자들' 을 이르는 말이다.

이런 형식의 가정을 꾸리는 제도를 일부일처제의 일종인 '처첩제도' 라고 부르기도 한다.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는 동아시아권의 후궁 제도를 들 수 있다.[3]

남성 1명에 여러 여성이 부부가 된다는 것에서 일부다처제와 비슷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약간의 차이는 있다. 사실 일부다처제의 변형판으로 봐야 할 듯. 일부다처제의 경우 아내들 간 상하관계 없이 동등한 대접을 받지만, 처첩제의 경우 정실로 대접받는 처는 한 명인 경우가 보통이고 그렇지 못한 나머지 여자들은 첩으로 불리며 차별 대우를 받았다. 시대와 지역에 따라 정실이 여러 명, 첩도 여러 명인 경우도 있었는데 이 경우 정실은 일단 동등한 지위, 후궁은 좀 더 낮은 지위. 한국사에서는 가령 왕건이 그랬다.[4] 조선 왕실이나 근대 유럽 등은 정실은 반드시 한 명이고 그 외엔 첩이었다.[5]

단순히 아들을 많이 낳으려는 용도나 여자를 많이 집안에 두기 위한 용도는 아니고(...) 일종의 각 가문 간의 혼례를 활용한 결탁과정 중 하나기도 했다. 특히 황실에 보내지는 첩(후궁)의 경우 가문의 영광임과 동시에 황실의 인질이기도 했다.

2. 상세

일부일처제가 확고했던 문화권에선 거의 볼 수 없었고, 처첩제도가 확실히 자리잡은 문화권에서나 주로 볼 수 있었다.

일단 가정 내에서 기본적인 서열은 본처가 위이고 첩들은 뭐가 어찌되었든 본처보다 아래라고 하지만, 첩이 남편의 총애를 받아 실질적인 서열은 본처보다 높게 쳐지는 경우가 발생하기도 했다.

여기서 본처는 단순히 남편의 첫째 부인의 위치에 있었기에 서열이 첩들보다 높은 것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첩보다 신분이나 본처의 친정의 지체나 명성, 재산 등이 높았고, 그만큼 시가(媤家)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권한도 첩들의 집안보다 강했기에 한 가정 내의 아내들 중 가장 높은 서열로 취급받을 수 있었다.

물론, 첫째 부인임에도 불구하고 이런저런 사정 때문에 자신 뒤에 들어온 다른 여자에게 본처(정실) 자리를 빼앗기거나 내줘서 첩의 신세가 된 경우도 있었고,(인현왕후희빈 장씨의 사례가 대표적) 첩의 친정보다 여러모로 딸리는 집안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본처 자리를 거머쥔 데 성공한 경우도 있었으며, 본디 다른 첩들보다 집안의 힘이 강했지만 가세가 기울어서 본처 자리 말고는 내세울 게 없어져서 첩들보다 영향력이 줄어든 본처의 경우도 있는 등, 온갖 예외가 존재한다.

극단적인 사례로 효정옹주의 경우 옹주의 신분으로[6] 시가고 남편이고 자기보다 밑이었지만[7] 정작 남편 조의정이 첩이랑 어울리느라 자기에게 소홀히 대했다는 의혹이 있고[8] 그런 의혹 속에서 불행하게 삶을 마쳤다.[9][10] 효정옹주의 사례는 그래도 특이사례로 보통 왕이나 황제가 버젓히 살아있고 허수아비도 아닌 상태에서 왕녀/황녀의 배우자들의 신분까지 왕족/황족보다 낮다면 자기 처에게 함부로 할 수가 없었다.

또한 한 남편[11]을 여러 여자가 나눠 가져야 하는 처지에 놓이기에 남편의 애정 분할 문제, 가정 내의 주도권 문제,[12] 시가 관련 문제[13][14], 재산 문제, 그리고 대를 이을 아이의 출산 가능 여부 문제[15] 등을 놓고 본처와 첩들이 끊임없이 다툴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했다.

그중에서도 남편의 총애를 못 받거나 대를 이을 아들을 못 낳고 딸만 낳거나, 그걸 넘어서서 아이를 아예 못 낳을 경우 본처라고 해도 가정 내에서 홀대받았고,[16] 첩이라고 해도 대를 이을 아이[17]를 낳으면 순식간에 신세역전을 이룰 가능성이 생겼기 때문에,[18] 남편의 총애 문제나 아이 문제로 본처와 첩이 다투다가 어느 한쪽이 집에서 쫓겨나거나 죽는 경우도 있었다.[19][20]

여기서 더 나아가서, 어느 한쪽의 아이를 죽이거나 내버리는 것도 모자라 눈 뜨고 아이를 빼앗기는 경우, 혹은 아이가 바꿔치기되는 경우 등 온갖 사달이 나기도 했다. 이 문제가 잘못 번졌다간 말 그대로 막장 드라마를 실시간으로 찍는 꼴을 볼 수도 있었다.

게다가 본처와 첩이 똑같이 아들이라도 낳는 날에는… 형식상으로는 적장자[21]가 가문 계승권을 쥐긴 한다지만[22], 그렇게 되었다간 자기 아들[23]이 가정 내에서 설 자리가 없어질 걸 걱정하는 첩(들)이 본처의 아이를 어떻게든 처리하고 자기 아이에게 가문 계승권이 돌아가게 하기 위해 가정 내에서 헬게이트를 강림시키는 사달이 난 경우도 까보면 꽤 있는 편이다.

특히 높은 신분에 속한 가문이나 왕실, 황실 같은 경우에는 이런 문제가 더더욱 심했다. 가문 계승권을 자신의 자식이 얻게 한다는 것에 단순히 가정 내의 주도권만이 아니라 온갖 부가적인 것들[24]이 다 따라오다 보니 당연히 이를 자신/자신의 자식이 얻게 하기 위해 온갖 모략이 펼쳐질 수밖에…[25]

게다가 권력을 못 얻은 이들은 본처건 첩이건 할 거 없이 뒤안길로 사라져 하대받게 되는데, 특히 첩들은 본처보다 우선순위로 내쳐지는 경향이 강했으니[26] 당연히 이런 암투가 횡행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의외로 이런 문제가 평화롭게 해결된 경우도 많지만,[27] 심할 경우 부인들 간의 다툼이 이복형제/이복남매 간의 다툼으로까지 번지는 경우도 허다했다고 한다.

정석대로 적장자가 무사히 가문은 계승해도 문제는 끝나지 않는다. 적어도 집안 내에서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얻은 본부인이 첩이나 그 자식들을 비천한 신분으로 만들어 팔아먹으려는 일도 종종 있었으니... '고황후 여씨와 척부인의 사례'가 대표적이다.[28] 2라운드 시작[29]

3. 기타

여담이지만 위에 기술한 '처와 첩 사이의 갈등' 을 처첩갈등이라고 하며, 위에 기술했다시피 처첩갈등은 여러모로 온갖 문제를 낳았기 때문에 만악의 근원으로 치부되기도 했다.

그리고 드라마 시나리오나 소설이나 만화 소재로 다루기에도 편한 소재이기 때문에 예나 지금이나 온갖 곳에서 우려먹히는 사골급의 소재. 특히 궁중암투를 다루는 드라마/소설/만화/애니에서는 직접적으로 부각되든 아니면 간접적으로 암시되거나 일어날 기미만 비치든 간에 어찌되었든 약방의 감초 역을 수행할 수밖에 없는 소재가 바로 "본처 1+ 첩 다수 + 그 외 온갖 변수들[30]로 확장된 궁중판 처첩갈등" 이다(…).[31] 세세한 스토리는 달라도 큰 틀만 놓고보면 괜히 다 비슷비슷하게 보이는 게 아니다

을 한두 명만 두는 것도 아니고 많이 두는 것을 축첩제도라고 부르기도 했다.[32]

본처가 아예 자식을 두지 못할 경우 첩의 아이를 양자 삼는 것이 서브컬쳐에서 나오기도 한다. 옹정황제의 여인이 그러한 예시. 옹정황제의 여인의 황후는 아이가 없기 때문에 다른 후궁의 아들 중 하나를 자기 양자로 삼아서 호적에 입적시켜버렸다. 이 경우 아들을 빼앗긴 후궁 입장에선 아들을 통한 신분상승의 기회가 사라지게 되어버린다고 나온다. 한편 후계자 구도를 자기 파벌에 더 유리하게 만들려고 이미 어머니가 죽은 후궁 소생 아이를 다른 후궁이 양자 삼는 경우도 있었다.

유교사상에 기반한 고전소설은 대체로 본처를 우대하고 첩을 하대하는 경향이 강해, 대부분의 경우 본처가 선역이고 첩이 악역이다. 사씨남정기가 대표적 예시. 반면 현대의 궁중암투물 등에서는 여주의 위치에 따라 처첩의 묘사가 달라진다. 주인공이 정실이라면 첩들이 악역이 되고, 주인공이 첩이라면 정실이 악역이 된다.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아예 '여주-남편-악녀'의 구도를 벗어나, 처첩제 안에서 본처와 여러 첩들이 갖는 각자의 고충을 모두 조명하고, 그들에게 그런 고충을 안겨주어 서로를 물어뜯으며 암투를 벌이게 만든 근본적인 원인을 다루는 작품도 있다. 다음웹툰 작약만가: 불환곡이 대표적.
[1] 측실, 소실이라고 하기도 함[2] 이런 경우 첫 번째 본처를 전처라고 한다.[3] 본처(정실)로 볼 수 있는 왕비(왕후)/황후 1명과 첩(측실)으로 볼 수 있는 후궁들로 왕실/황실 내명부를 구성하는 제도.[4] 왕건과 하룻밤만 보내고 후궁첩지는 받았지만 궁궐에 들어오지 못하고 그대로 수절한 첩들도 많다. 물론 고려의 문화상 재가가 가능했지만 그럴경우 후궁의 자리는 자연스럽게 박탈당했기 때문에 가문과 왕실의 끈을 위해서 조선시대처럼 수절할수 밖에 없었다.[5] 정확히는 유럽에서는 첩을 두는 제도 자체가 아예 없었다. 기독교 영향으로 일부일처제를 엄격하게 지켰으므로, 법적으로 인정받는 혼인관계는 정실부인과의 관계뿐이었고, 다른 여자들과의 관계는 그냥 '혼외의 정부를 두는 것'으로 취급했다.[6] 옹주나 공주라면 조선시대에서 처로써는 사실상 끝판왕이었다.[7] 어느 정도냐면 옹주나 공주는 사실상 조선시대 시월드 제외대상이었다. 옹주나 공주가 출궁하면 시가가 아니고 왕이 내어준 곳에서 남편과 둘이서 살게 되었다. 물론 궁궐과 가까운 곳, 즉 왕의 눈이 쉽게 미치는 곳에서 말이다. 그리고 그들의 남편인 부마들은 기존 명문가보단 살짝 쳐지는 가문에서 뽑아서 (왕실의 시가 견제) 이론상이라면 아내를 낱잡아볼 순 없었다.[8] 조의정은 당시 기준 첩을 들이는게 불법인 왕의 부마이면서도 첩을 들였다. 이 조의정이란 사람은 국왕 중종에게 자기 딸을 홀대한 일로 여러 번 문책까지 먹었으나 태도를 끝내 고치지 않았다. 그리고 효정옹주가 아들을 낳은 뒤 상태가 악화되었을때 중종이 의원과 의녀를 보냈으나 그녀가 그 전에 죽어버렸다. 그래서 조의정이 부러 효정옹주의 상태가 위독함을 늦게 알렸다는 의혹이 생겼다.[9] 중종이 효정옹주 사후 각 잡고 그에게 복수해 기어이 유배보냈다. 한편 조의정의 첩 풍가이는 조의정보다 더 지독하게 당했다. 그녀는 곤장 100대를 맞았으나 목숨이 끈질겼는지 죽지 않았다. 그 탓에 상궁 은대에게 납치·감금당해 10일을 더 버티다가 결국 매질을 또 당하고 죽었다. 풍가이는 사실상 암살의 방식으로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실행범 은대를 감싼 것이 중종이고 문종왕후는 은대가 1년밖에 벌 안 받고 풀려나게 해준 장본인이다. 당시 왕실이 은대와 한통속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 부분. 어찌보면 풍가이도 신분이 한참 밀리는 일개 첩으로써 억울한 측면을 보여주는 인물이다. 왕실에서 조의정에게 마저 못한 화풀이를 풍가이에게 죄다 몰아서 한 셈.[10] 다만 풍가이는 조의정이 불법으로 들인 첩이었음에도 신하들에게 동정표를 샀다. 그 이유는 풍가이가 자기의 한 손가락이 없는게 어머니를 고치기 위해서라고 말했고 고문을 받았음에도 중종이 원하는 식의 자백을 내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교 문화에서 효심이 중시되는 것과 풍가이의 태도가 효정옹주에 대한 충심의 증거로도 보여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풍가이 본인이 이런걸 알거나 노려서 부러 그런 태도를 취한 것인지 아니면 정말 일개 종 출신 첩으로써 억울해서 그런건지는 알 수 없다. 확실한건 신하들의 동정여론이 그녀를 감형시켜주진 못했다는 것이다.[11] 정확히는 남편의 애정과 집안의 재산을 포함한 가정의 온갖 것들, 그리고 모든 아내들의 최대의 적 시월드 시가(특히 시부모) 식구들과의 관계 등)[12] 사실 처와 첩을 분간하는데 있어서 가정 내의 주도권을 잡는 강도가 가장 중요했기에, 다른 처첩 관련 문제들보다도 처첩 당사자들이 가장 신경썼을 문제였을거다. 보통 아내들 중 가장 가정 내에서 강력한 주도권을 행사해야 정상인 것은 처(정실)이지만 첩이 처를 누를 정도로 가정 내 주도권 문제에 강하게 간섭 가능하다는건 그만큼 처첩 내의 위계서열이 어떤 이유로든 이미 뒤집혔음을 암시하기 때문. 단순히 첩이 남편의 총애를 믿고 기세등등하게 날뛰어서 이렇게 되는 경우도 있지만 처가 남편이나 시가에게 여러 이유로 미움받아 그 지위가 위축되거나, 첩이 후계자를 먼저 보거나 남편/시가에게 여러 이유로 예쁨받아서 이렇게 되는 경우도 있었다.[13] 설령 남편이 총애하지 않는 본처/첩이라 할지라도 시어머니와 시아버지를 포함한 시가 식구들이 여러 가지 이유[33]를 들어 총애해 줄 경우, 가정 내에서 주도권을 못 쥘지언정 다른 아내들보다 더 높은 발언권을 얻을 수도 있었다. 왜냐하면 본처와 첩에게 영향을 가할 수 있는 남편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존재가 시가(특히 시부모)였으므로[14] 그렇기에 본처에게나 첩에게나 남편만큼이나 신경쓰이는 것이 다름 아닌 시가가 그녀들에게 작용할 수 있는 영향력이었다.[15] 특히 아들(적자).[16] 옛날에는 대를 이을 아이를 중시했기 때문에, 본처가 오랫동안 아이를 못 낳으면 당연히 집안에서 홀대받기 쉬운 분위기가 형성될 수밖에 없었다.[17] 특히 아들[18] 특히 본처가 오랫동안 아이를 못 낳을 때 첩이 아들을 낳는 크리가 터지면 그냥 헬게이트. 물론 이를 방지하기 위해 서자라고 해서 첩의 아이는 보통 정식 후계로 인정치 않고 신분상으로도 본처의 아이들과 차별을 두는 제도도 존재하긴 했다.[19] 쫓겨난다고 해도 의지할 친정이 있으면 그나마 다행인데, 그것마저 없으면 그냥 길바닥에 나앉는 수도 있었다. 더 큰 문제는 암투가 너무 치열해진 끝에 누구 한쪽이 죽는 사달이 나버리는 것이었지만.[20] 다만 보통 쫓겨나는 쪽은 남편이나 시가에게 압박을 가할 친정의 세력이 약하거나 없는 쪽이었다. 친정의 권세가 특히 시가보다 강하면 강하면 남편/시가도 눈치를 봐야 하기 때문에...이럴 경우 사실 첩들은 본처에게 승산이 거의 없는 경우가 많았다. 첩이 첩이 되는 이유가 낮은 신분에 있다보니(...)[21] 본처가 낳은 장남[22] 일단 적자가 가문 계승에 있어서 가장 정통성이 높다고 친다. 서자에게 정통성을 더 높게 두면 잘못했다가 처첩갈등 등의 문제로 집안이 콩가루 집안이 되어서 막장 드라마를 찍을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23] 그리고 자기 자신[24] 권력, 재산 등[25] 물론 창작물에서 묘사되는 '처첩갈등 = 어느 가정이건 심각함' 이란 클리셰와 달리, 역대 왕조들을 잘 살펴보면 처첩갈등 문제가 크게 두드러진 때도 있었으나 그렇지 아니한 때도 제법 있었다. (즉 가정 내/가문 내/왕·황실 내의 처첩갈등들이 여러 사람의 피를 보는 수준까진 가지 않았을 경우) 물론 역사에 기록될 만큼 시끄럽지 않았을 뿐 뒤에선 갈등이 있었을지도 모를 노릇이지만.[26] 즉 쫓겨나는 순간 명줄 끝인 경우도 의외로 있었다는 뜻. 뭐, 친정이 권세가 있다면 다시 친정에 의지할 수도 있지만, 그러지 못하는 이들의 경우 향후 인생자체가 무너지게 된다.[27] 가족 구성원 모두가 개념인/대인배여서 서로서로 상부상조하며 잘 챙겼다든가(...) 가문의 법도가 워낙 엄해서 아무도 거스를 생각 안 하고 고분고분 따랐다든가, 본처 말고 죄다 딸만 얻었다든가 하는 경우...[28] 적장자가 가문을 계승했다고 쳐도 자식이 없거나 일찍 요절하거나 하고 그 뒤에 본부인의 슬하에 적장자를 대신할 만한 자식이 없게 될 경우, 첩들과 그 자식들에게도 기회가 돌아갈 가능성이 있음을 우려해서인 듯.[29] 참고로 이 대결의 승자는 엉뚱하게도 고황후 박씨였는데 이유는 해당 문서 참조[30] 왕(황제) 포함[31] 한국 사극에서 자주 쓰인 소재 중 하나인 장희빈인현왕후, 그리고 숙종 관련 이야기를 다룬 고전소설들과 사극들, 중국 사극인 옹정황제의 여인, 완전한 궁중판 처첩갈등이라고 보긴 좀 힘들지만 어쨌든 처첩갈등 소재가 나온다는 점에서는 비슷한 맥락을 타는 일본 고전소설 겐지모노가타리 등, 하여튼 뒤져보면 정말 많다…[32] 첩을 물건 쌓는 것처럼 여럿 뒀다는 의미(...) 실제로 첩은 '들인다'로 서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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