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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장왕 관련 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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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000><colcolor=#c5b356> 고구려 제28대 태왕 보장왕 | 寶臧王 | |||
보장왕릉으로 추정되는 고분군 전경. | |||
출생 (음력) | <colbgcolor=#fff,#1c1d1f>590년대 중후반[1] | ||
고구려 장안성 | |||
사망 (음력) | 682년 | ||
당 파촉땅 | |||
능묘 | 힐리가한 무덤 옆[2] | ||
재위기간 | 고구려 제28대 태왕 | ||
642년 음력 10월 ~ 668년 11월 3일[3] (26년 1개월)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000,#000><colcolor=#c5b356> 본관 | <colbgcolor=#fff,#1c1d1f>횡성 고씨 | |
성씨 | 고(高) | ||
휘 | 장(藏) / 보장(寶臧)[4] | ||
부모 | 부왕 대양왕 모후 미상 | ||
왕후 | 고복남의 모후 | ||
자녀 | 태자 고복남 왕자 고덕남, 고임무[5], 고덕무[6], 고안승[7]. 고인승[8], 고련(高連)[9] | ||
왕손 | 고보원[10], 고진(高震)[11], 고숙수(高叔秀)[12] | ||
종교 | 도교 | ||
왕호 | 보장왕(寶臧王) | ||
고장왕(高藏王)[13] | |||
작위 | 상주국 요동군왕 고구려왕, 당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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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구려의 제28대이자 마지막 태왕이다. 망국의 군주라서 잘 부각되지 않는데 재위 기간이 26년으로 긴 편이다.[14]고대 장수만세 왕조로 유명한 역대 고구려 왕들 중에서도 손꼽히게 장수한 것으로 추정되는 인물이다. 보장왕은 682년에 사망했는데 보장왕의 생년은 590년대 중후반으로 추정되며, 600년대로 낮추더라도 70~80대라는 결론이 나오기 때문. 668년 고구려가 멸망했을 당시 이미 고령이었음에도 불구하고 677년에 안동도호부에 파견되었으며 681년에 고구려부흥운동을 시도한 걸 볼 때 이때까지도 상당히 건강했던 것으로 추정되므로 고대의 의학수준까지 고려하면 엄청난 강골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 부흥운동에 실패하고 파촉 유배를 가고 나서는 한계였는지 얼마 안 가 죽었지만 망국 당시 60대였던 백제 의자왕이 3개월 만에 화병으로 사망한데 반해 망국 당시 의자왕보다 나이가 많았을 것으로 추측되는 보장왕은 망국 이후에도 13년이나 존버하면서 부흥운동을 계획한 걸 보면 연씨 가문의 꼭두각시로 알려진 것과 달리 실제로는 멘탈과 근성도 대단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2. 생애
2.1. 재위 이전
보장왕은 평원왕의 손자로 아버지는 왕족인 고대양이었다. 영양왕과 영류왕의 조카였으며 태자 고환권의 사촌이었다.전왕인 영류왕 고건무는 태자를 비롯한 아들이 있었으므로 고보장은 본래 태왕위에 오를 팔자가 아닌 평범한 왕족이었다. 하지만 연개소문의 쿠데타가 터져 영류왕이 시해당했고, 연개소문의 옹립으로 태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2.2. 재위 기간
막리지 연개소문은 쿠데타를 일으켜 독재 체제를 수립하는 데 성공했다. 보장왕은 명목상의 국왕으로 추대되었기에 큰 목소리를 내지 못했고, 이는 연남생, 연남건, 연남산 형제의 시대에도 마찬가지라서 사실상 실권이 없이 보냈다고 보는 편이다.[15]즉위 직후 당나라에 사람을 보내 도교를 받아들이자는 연개소문의 진언에 따라 당의 도사를 초빙하여 도교를 장려했다. 불교 측이 "도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배척한다." 하고 대놓고 디스할 정도로 불교계에서는 반발이 심했다. 현존하지 않는 《구삼국사》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남아있다.
성사는 원래 고구려 반룡사(盤龍寺) 스님이었는데, 보장왕이 도교에 현혹되어 불법을 폐기하자 성사는 방장(方丈)을 날려 백제의 고대산(孤大山)에 이르렀다. 후에 한 신인이 고구려의 마령(馬嶺)에 나타나서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너희 나라는 패망이 며칠 안 남았다"고 하였다. 자세한 것은 《해동삼국사》(海東三國史)와 같다.
《대각국사문집》 권17 고대산 경복사의 비래방장에서 보덕성사의 영정에 예배함.
《대각국사문집》 권17 고대산 경복사의 비래방장에서 보덕성사의 영정에 예배함.
그러나 당나라는 고구려에 대한 야욕을 버리지 않았고 '신라를 공격하지 말라.'고 트집을 잡다가 연개소문에게 거절당했다. 결국 누적된 갈등은 폭발하여 고구려-당 전쟁이 시작되었다. 특히 645년의 침공은 중국을 통일한 전쟁영웅 당태종이 온 국력을 기울여 직접 나선 전쟁이었다. 당군은 개모성, 요동성 등을 일시적으로 점거하는 등 강력한 무력을 보였지만 신성, 건안성, 안시성 등 요동 외곽에서 격퇴당하여 초라하게 쫓겨나간다.
고구려는 당과 맞서는 동시에 백제, 말갈과 함께 신라 공격에 열을 올렸다. 신라의 김춘추는 직접 고구려 평양성에 와서 역사적인 외교 회담을 열었으나 실패로 돌아갔으며 똑같이 고구려에 패배의 아픔을 삭히면서 복수에 몰두하던 이세민과는 이해가 맞아떨어져 한민족의 역사를 바꿀 나당동맹이 성사되었다.이세민 사후에도 계속 고구려와 당나라는 일진일퇴의 소모전을 계속하였고 고구려와 백제, 말갈의 신라에 대한 공세도 이어졌다. 하이라이트 사건은 세 나라의 연합군이 신라 북쪽 33개의 성을 뺏은 사건이다. 나당연합군은 미증유의 대군을 동원하여 먼저 백제를 기습했는데 백제가 의외로 빨리 멸망하면서(660) 고구려를 양면에서 공격할 발판을 마련하게 되었다.
661년 당은 백제를 멸망시킨 여세를 몰아 수십만 대군을 일으켜 수륙 양면으로 고구려에 일격을 시도했다. 고구려에서는 백제 부흥군, 왜와 연계하여 남쪽의 신라군을 견제하고 거란, 철륵 등과 연계하여 당군을 분산시킨 후 당나라의 대군을 사수 전투에서 전멸시키는 데 성공했다(662).
이로 인하여 국력이 고갈된 당나라에서는 고구려에 대한 야욕을 재고하게 되었다. 하지만 고구려 입장에서도 백제부흥운동은 실패로 돌아가고 남쪽 지역에서 안정이 이루어진 상황에서 화친을 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는지 666년에는 태자를 당 고종의 봉선의식에 보내 친선 의사를 보였다.
연개소문의 죽음 이후 연남생이 대막리지의 직위를 이었으나 그의 나이는 고작 32세에 불과했고, 부친 연개소문에 재주가 미치지 못하였다. 그렇게 되자 결국 그의 동생들인 연남건, 연남산이 형 연남생의 직위를 탐내면서 내분이 일어나게 되었다. 결국 연남생이 내분에서 패하여 국내성에서 항거하다 결국 국내성을 비롯한 요동 일대를 당나라에 바치면서 항복했고, 연개소문의 동생 연정토도 신라에 항복했다.
결국 이러한 치명적인 내분에 힘입어 668년 나당연합군은 평양성 공략에 나섰다.이때 보장왕은 결사 항전을 주장하는 연남건을 물리치고, 연남산과 함께 항복 사신을 보내는 데 찬성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평양이 포위되었을 때 수령 98명을 거느리고 먼저 항복을 청했고, 이때 신라 측 요인으로 참전한 문무왕의 동생 김인문이 왕을 당나라군 총사령관 이세적 앞으로 데려가 보장왕의 죄상을 열거했다고 한다.
보장왕이 연개소문 일가와 어떤 관계였는지를 두고 여러 해석이 있다. 일방적으로 연개소문에 휘둘리는 군주였다는 해석도 있는가 하면, 오히려 연개소문이 전권을 장악한 상황에서 겉으로는 협력하나 이면에서는 대립하면서 나름대로 자신의 권력은 지키면서 제 역할을 했다는 해석도 있다. 항복 이후에도 연남생처럼 편안한 여생을 보낼 수 있었는데도 그걸 포기하고 고구려부흥운동을 일으키려고 했으니, 현재로서는 전자보다는 후자 쪽에 해석에 무게가 실리기도 하고 대중 매체에서도 그렇게 그려지는 편이다.
2.3. 항복 이후
고구려부흥운동 | ||||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 <colbgcolor=#000> 연대 | 부흥운동 | 주요인물 | 결과 |
670~673 | 한성의 고구려국 | 검모잠 / 고연무 / 안승 | 실패 | |
681 | 안동도호부에서의 #항복 이후의 모반 | 보장왕 | 무산 | |
684 | 금마저에서의 보덕국의 반란 | 대문 | 실패 | |
696~698 | 요동 일대의 반당전쟁 | 걸걸중상 / 걸사비우 / 대조영 | 발해 | |
897~901 | 송악의 궁예 정권 | 궁예 | 후고구려 | |
918 | 왕건의 역성혁명 | 왕건 | 고려 | |
1217 | 최광수의 난 | 최광수 | 실패 |
<colbgcolor=black><colcolor=white> 당이 봉한 보장왕의 생전 관작 | |
작위 | <colbgcolor=white,#1c1d1f>조선왕(朝鮮王) |
품계 |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16] |
직위 | 사평대상백원외동정(司平大常伯員外同正) |
요동주도독(遼東州都督) |
668년 고구려 멸망 이후 당나라로 끌려가 당태종의 묘에 참배했다. '사평대상백원외동정(司平大常伯員外同正)'에 임명됐다.
과거 고구려의 중심 지역이었던 요동 지방에서 고구려부흥운동이 거세지자[17] 그를 677년 '요동주도독 조선왕'(遼東州都督 朝鮮王)[18]에 봉하고 안동도호부로 부임하게[19]하여 고구려부흥운동을 무마시키려고 했다.
당나라가 봉한 보장왕의 사후 관작 | |
직위 | 위위경(衞尉卿) |
요동에 도착한 보장왕은 당나라가 토번과 전쟁하고 있는 기회를 틈타 말갈과 손을 잡고 고구려 부흥을 위해 반란을 일으키고자 했다. 그러나 실패하여 681년(신문왕 1년) 고구려와는 대륙 반대편인 촉 땅[20]에 유배당했다. 고구려부흥운동 실패로 인한 멘탈붕괴와 파촉 유배의 후유증인지 얼마 안 가 682년에 사망했으며, 죽은 후 '위위경'에 봉해져 돌궐의 힐리가한 무덤 옆에 묻혔다.
나라를 팔아 넘긴 연남생은 사후 시호를 받고 당나라 조정에서 제사를 치러주는 등 화려하게 살다 갔지만, 보장왕은 나라가 망하고도 다시 한 번 독립을 시도하다가 초라하게 죽었다. 비록 재위 시절에는 허수아비 군주였지만, 이후 고려와 조선 등 후대 왕조들의 최후를 생각한다면 그래도 망국의 군주들 중에서는 나름 적극적으로 활동했던 것으로 평가된다.[21]
연남생의 증손자인 천비(연비)의 묘지명에서는 천비가 보장왕의 외손자라고 나온다.
보장왕이 죽은 뒤 당나라는 그의 손자 고보원(高寶元)을 686년 '조선군왕(朝鮮郡王)'에 임명했고[22]
696년 거란족 반란의 여파로 요동 지역에서 당의 지배권이 약화되자 698년 고보원을 '좌응양위대장군 충성국왕(左鷹揚衛大將軍 忠誠國王)'으로 임명해 요동에 부임시키려고 했으나 무마되었다.[23]
699년 당나라는 다시 보장왕의 아들인 고덕무(高德武)를 안동도호부에서 격하된 안동도독부의 장관인 '안동도독(安東都督)'으로 임명하여 파견했다. 이외에도 보장왕의 후손들은 당나라의 수도 장안에 머물며 고구려 유민들을 대표한 '고려 조선군왕(高麗 朝鮮郡王)'을 세습했다고 한다. 고덕무에게서 독립 정권인 소고구려가 탄생했다는 학설도 있다.
한편 일본 사이타마현 히다카시에 '고마 신사'(高麗神社)라는 곳이 있는데, 이곳에는 668년 고구려 멸망 이후 보장왕의 아들 고약광(高麗若光·일본 이름 '고마노 잣코')이 유민 1700여 명을 데리고 정착했으며, 현재까지 그 후손이 고려촌을 이루며 전해지고 있다. 기사 출처 2017년에 아키히토 덴노, 미치코 황후 부부가 처음으로 이곳을 찾아 참배하기도 했다.# 이때 아키히토 덴노가 신사 관계자들에게 "고구려는 몇 년에 멸망했습니까?"라고 질문했다고 한다.
3. 《삼국사기》 기록
삼국사기(三國史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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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석문 및 문헌기록상 신라 최초로 성씨를 사용한 왕은 진흥왕임 * 29~31권까지 연표 * 32~40권까지 잡지 |
{{{#!folding [ 열전(列傳) ]
}}} ||보장왕은 2권이나 될 정도로 기록이 많으며 고대사 인물답지 않게 기록이 매우 상세하다. 《삼국사기》에서 신라의 문무왕과 보장왕만이 혼자서 2권을 차지한 왕이다.[24] 기록 양이 어지간한 고려 시대의 왕들보다 조금 적은 정도.[25] 보장왕은 고구려 역대 국왕 중 최다 기록을 보유했으나 안타깝게도 망국의 왕이 되었다.
3.1. 《삼국사기》 21권
《삼국사기》 <보장왕 본기(상)>一年冬十一月 왕이 즉위하다
一年 신라의 김춘추가 와서 군사 지원을 요청하다
二年春一月 왕이 그 부친을 왕으로 봉하다
二年春一月 당나라에 조공하다
二年春三月 당에 도교를 구하니 노자의 도덕경을 보내주다
二年夏閏六月 당태종이 왕을 책봉하다
二年秋九月 신라가 당에 구원병을 청하다
二年秋九月十五日 밤이 밝은데 보름달이 보이지 않다
三年春一月 당이 상리현장을 보내 신라를 공격하지 말 것을 요구하다
三年秋七月 당 태종이 고구려를 공격할 준비를 하다
三年秋九月 당 태종이 백금과 숙위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다
三年冬十月 당 태종이 고구려 정벌의 필요성을 역설하다
三年冬十一月 당 태종이 고구려 공격을 위한 병력을 동원하다
四年春一月 당의 이세적의 군대가 유주에 도착하다
四年春三月 당 태종과 이세적이 출정하다
四年夏四月 당군이 고구려의 성을 공격하다
四年夏五月 비사성이 함락되다
四年夏五月 당군이 요동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키다
四年 백암성이 당 태종에게 항복하다
四年 개모성이 함락되다
四年 고구려 군대와 말갈 병력이 당 태종의 군대와 싸워 패하다
四年 당군이 안시성 전투에서 패하여 돌아가다
四年冬十月 당 태종이 고구려 원정을 후회하다
五年春二月 당 태종이 고구려 원정이 실패한 이유를 묻다
五年夏五月 당 태종이 다시 고구려 정벌을 논의하다
3.2. 《삼국사기》 22권
《삼국사기》 <보장왕 본기(하)>六年春二月 당군이 소규모 병력으로 다시 침략하다
六年夏五月 당의 이세적 군대가 쳐들어왔다 돌아가다
六年秋七月 당군에 패하다
六年秋八月 당태종이 고구려를 정벌하고자 배를 만들게 하다
六年冬十二月 왕자 임무를 당에 들여보내 사죄하다
七年春一月 당 태종이 바다를 건너 공격하게 하다
七年夏四月 당 고신감의 군대에 패하다
七年夏六月 당 태종이 고구려를 정벌하고자 하다
七年秋七月 평양에서 머리가 2개인 아이가 태어나다
七年秋七月 당 태종이 배를 만들게 하다
七年秋九月 평양에서 노루와 이리 떼가 서쪽으로 이동하다
七年秋九月 당군이 박작성을 공격하다
八年夏四月 당 태종이 고구려 침략 전쟁을 포기하라고 유언하다
九年夏六月 보덕화상이 백제로 가다
九年秋七月 곡식이 서리와 우박 피해를 입다
十一年春一月 당에 조공하다
十三年夏四月 고구려 멸망을 예언하는 말이 떠돌다
十三年冬十月 거란을 공격하였으나 패하다
十四年春一月 신라의 33성을 빼앗다
十四年春二月 당이 공격해오다
十四年夏五月 당군이 요수를 건너와 큰 피해를 입히고 돌아가다
十五年夏五月 평양에 폭우가 내리다
十五年冬十二月 당의 황태자 책봉을 축하하다
十七年夏六月 당군의 공격이 실패하다
十八年秋九月 호랑이가 평양성 안에 들어와 사람을 잡아먹다
十八年冬十一月 온사문이 설인귀의 당군에 패하다
十九年秋七月 평양 강물이 핏빛으로 변하다
十九年冬十一月 당이 고구려를 공격해오다
二十年春一月 당이 평양을 향해 공격해오다
二十年夏四月 당이 고구려 원정을 중지하다
二十年夏五月 신라 북한산성을 공격하다
二十年秋八月 소정방의 당군이 평양성을 포위하다
二十年秋九月 평양성이 당군에게 항복하다
二十一年春一月 방효태의 당군이 연개소문과 싸워 전사하다
二十五年 태자가 당의 태산 제사에 참가하다
二十五年 연개소문의 아들 사이에 권력 다툼이 일어나다
二十五年夏六月 연남생이 당으로 달아나다
二十五年秋八月 연남건이 막리지가 되다
二十五年秋九月 당 고종이 연남생에게 벼슬을 내리다
二十五年冬十二月 당 고종이 고구려를 공격하기 위한 준비를 하다
二十六年秋九月 당군이 고구려의 성을 빼앗다
二十七年春一月 당이 유인궤를 요동도부대총관으로 임명하다
二十七年春二月 부여성 등 40여 성이 당에게 함락되다
二十七年夏四月 동북쪽에 혜성이 출현하다
二十七年秋九月 멸망하다
二十七年冬十月 당군이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가다
二十七年冬十二月 당이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두다
唐 高宗 摠章二年春二月 왕의 서자 고안승이 신라에 투항하다
唐 高宗 摠章二年夏四月 당 고종이 고구려인을 대거 옮기다
4. 대중매체에서
명색이 고구려의 마지막 왕이다 보니 고구려 말기를 다룬 각종 창작물에 거의 빠지는 법 없이 등장한다. 이 때 묘사되는 모습이 크게 2가지로 나뉜다. 1번째는 연개소문에 의해 의도치 않게 왕좌에 올라 소심하고 찌질한 모습만 보이는 모습, 2번째는 나름 강단있는 모습으로 등장해 연개소문과 함께 국정을 주도해 나가는 모습 등이다. 특히 보장왕이 연개소문과 결탁해 영류왕을 살해했다는 독특한 내용 전개도 나왔다. 최근에 나온 창작물일수록 말갈과 결탁해 고구려부흥운동을 시도했다는 실제 기록을 기반으로 하여, 보장왕이 무능한 허수아비보다는 제법 영민하고 능력도 갖춘 왕으로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4.1. 소설
- 김정산의 소설 《삼한지》에서는 그야말로 나약한 모습으로 묘사되는데 재위 내내 연개소문의 허수아비 신세가 되어 늘 끌려다니기만 하는 모습만 보여준다. 다만 작중에는 연개소문이 영류왕을 시해한 후에 보장왕의 아버지인 대양에게 눈물콧물 다 쏟으며 애걸복걸한 끝에 보장왕을 옹립한 것으로 묘사되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연개소문은 진심으로 보장왕에게 충성을 다 하고 있는 듯한 묘사가 많이 나온다.
4.2. 영화
- 2011년 개봉한 영화 <평양성>에서는 배우 정규수가 서북 방언을 살려 가며 연기했다. 실권자인 연개소문과 그 자식들인 연남생, 연남건, 연남산으로 인해 왕권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는 소심하고 나약한 전형적인 허수아비 임금으로 묘사된다. 풍자와 개그가 많은 영화다보니 시도 때도 없이 촐랑대고 호들갑 떤다. 제대로 된 왕으로 지내 본 적이 없어서인지 명분보다는 생존을 우선하는데다 당나라군에 수도가 포위된 상황에서 전쟁을 지속하는건 승산이 없다고 판단했는지 결사 항전하려는 연남건에게 "내래 살고 싶어!"를 외치며 성문을 직접 열고 고구려 중신들과 함께 제일 먼저 당나라군에 투항한다.
4.3. 드라마
- 1992년 KBS 드라마 <삼국기>에서는 배우 서영진[26]이 연기했다. 90년대식의 사극 캐릭터에서 그리는 전형적인 왕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쿠데타로 즉위하긴 했지만, 어쨌든 왕으로서의 위엄은 잃지 않으려 노력하는 모습이며, 매사에 침착한 성격으로 묘사된다. 연개소문과의 관계는 전적으로 연개소문을 신뢰하는 듯한 모습이다.[27] 평양성 함락 직후 대전에 당나라 장수들이 들어와 그들과 마주하게 되자 한숨을 쉬며 눈을 지그시 감은 후, 수레에 실려 당나라로 압송되는 모습으로 퇴장한다. 그 유명한 안악 3호분의 신원미상 벽화의 모습 그대로 옷과 부채를 든 채로 등장하기 때문에 분장은 역대 보장왕 중에서도 가장 압권.
- 2006년 SBS 드라마 <연개소문>에서는 배우 이배국[28]이 연기했다. 연개소문을 신격화하다시피 미화한 드라마인 만큼 무능하기 이를 데 없는 왕으로 나오는데 연남건이 연남생에 맞서 쿠데타를 일으킨 뒤 선도해와 신성 등이 이 틈에 연씨 가문을 몰살하고 왕권을 강화해야 한다는 진언을 함에도 겁에 질린 나머지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답을 한다.
대왕의 꿈에서의 보장왕 |
- 2012년 KBS 드라마 <대왕의 꿈>에서는 배우 안신우가 연기했다. 작중 연개소문이 쿠데타를 일으켜 새롭게 왕위에 오르는 장면에 처음 등장하는데 결연한 표정으로 왕관을 받아들여 자신의 머리에 쓰고 옥좌를 차지하는 장면이 인상깊다. 연개소문에게 휘둘리는 듯한 모습으로는 묘사되지 않으며 오히려 연개소문과 함께 국정을 의논하며 그와 뜻을 함께하는 등 상당히 친밀한 관계로 묘사된다.[29] 하지만 주인공이 신라 사람이기에 그 뒤로 큰 비중은 없고 연개소문과 국정을 논하는 장면에서만 가끔식 나오며 실제 역사와는 다르게 고구려 멸망 직전 신라한테 항복한다.[30]
칼과 꽃에서의 보장왕 |
- 2013년 KBS 드라마 <칼과 꽃>에서는 배우 온주완이 연기했다. 작중에는 영류왕의 조카로써 왕을 보필하는 일종의 가신(家臣) 내지 호위무사와 비슷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역시 기존의 비실비실한 이미지는 어디에 던져버렸는지 몸이 날렵하고 무예에 능하며 용맹하면서도 현명한 모습을 보여준다. 처음에는 영류왕에게 충성을 다하며 영류왕과 대립하는 연개소문 세력과 치열한 암투를 벌이지만 왕을 시켜주겠다는 연개소문의 꾀임에 넘어가 결국 연개소문의 쿠데타에 동참하여 궁을 장악하고 주인공인 영류왕의 공주에게 칼까지 들이댄다. 여기서 과거가 드러나는데 실은 어려서부터 부모와 동떨어져 살며 영류왕의 직속 부하가 되도록 교육받았으며 이 때문에 꽤 오래 전부터 영류왕에게 악감정을 품고 있었다는 것이다. 결국 연개소문과 더불어 영류왕을 시해한 보장왕은 결국 처음에 약조한대로 연개소문의 지지를 얻어 왕위를 얻게 된다. 하지만 점차 연개소문에게 쏠리는 권력에 불안감을 느끼며 도수 등의 귀족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려 하나 도수 등이 연개소문의 휘하로 들어가면서 실패한다. 연개소문이 이 사실을 안 뒤로 보장왕은 거의 모든 권력을 빼앗긴 허수아비가 되고 마는데, 자신이 허수아비라는 사실을 자각하고는 내관 복장을 입고 내관인 척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5.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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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대 영양왕 | 27대 영류왕 | 평강공주 | 대양왕 | |||||||||||||||
고환권 | 28대 보장왕 | |||||||||||||||||
고복남 | 고임무 | 고덕남 | 고덕무 | 공주 | ||||||||||||||
부흥 보덕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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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버지인 고대양이 580년대 초반 생으로 추정되기에 보장왕은 최대 590년대 중후반에 태어났다고 볼 수 있다.[2] 시안 국제항무구 신축가판 가오자이촌 서쪽 추정.[3] 음력 9월 21일, 율리우스력 10월 31일[4] 삼국사기상으로는 장이 먼저 표기되어 있고 보장이라고도 한다고 같이 등재되어 있다. 물론 아예 따로 시호가 없어서 그냥 휘호를 사용한 보장왕이라 불린 점, 장의 한자가 보장의 장과 정확히 일치한다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빼도 박도 못하는 축약표기에 해당한다.[5] 2남, 막리지를 지냈다.[6] 3남, 안동도독(安東都督).[7]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서는 보장왕의 서자 안승(安舜)이라 기록되었고, <신라본기>에서는 연개소문의 동생 연정토의 아들 안승(安舜)이라 기록되었으며 《신당서》<고려전>에서는 보장왕의 외손자 안순(安舜)으로 기록되었다. 따라서 서자 혹은 외손자.[8] 횡성 고씨 족보상에서만 등장하는 인물로 횡성 고씨의 시조에 해당한다. 사서에는 등장하지 않는다.[9] 고진묘지명과 고씨부인 묘지명에서 등장. 운휘장군(雲麾將軍) 우표도대장군(右豹韜大將軍) 안동도호(安東都護)였다고 기록되어 있다.[10] 조선군왕(朝鮮郡王)→좌응양위대장군 충성국왕(左鷹揚衛大將軍 忠誠國王). 아버지가 누구인지는 불명확하나 확실한 것은 고덕무는 아니라는 것이다.[11] 자는 모(某). 아버지 고련으로부터 안동도호를 세습했다고 묘지명에 적혀있다. 묘지명에 적힌 최종 관직은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공부상서(工部尙書) 특진(特進) 우금오위대장군(右金吾衛大將軍) 안동도호(安東都護) 담국공(郯國公) 상주국(上柱國).[12] 고진의 아들. 고진묘지명 기재 당시 관직은 조청대부(朝請大夫) 심택령(深澤令).[13] 보장왕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고장왕은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등장한다. 망국의 군주라 시호가 없다. 보장왕은 이름+왕, 고장왕은 성씨+이름의 축약표기+왕. 의자왕도 마찬가지다. 장지를 시호로 삼는 고구려의 습속을 고려하면, 파수왕(灞水王, 고구려의 시법을 고려하면 파천왕/파양왕) 정도로 불렸을 것이다.[14] 고구려 고씨 태왕가 출신의 다른 왕들이 재위했던 기간을 고려하면, 특별히 긴 것도 아니다. 신빙성이 의심될 정도로 긴 태조대왕 같은 군주들은 둘째치고서라도 장수왕의 존재도 있고, 그 외에도 30년 정도 재위했던 이들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보장왕의 경우도 고구려의 전체 국왕 28명이 재위했던 평균치인 25년에 근접한다. 역사상으로 망국의 군주라고 해도 재위기간이 긴 경우는 여러 사례가 있는데, 고조선의 우거왕은 20년은 재위했을 것으로 여겨지며, 실질적으로 동부여의 마지막 왕인 대소왕도 42년은 재위했다. 백제의 의자왕은 19년을 재위해서 그렇게 짧지만은 않았고, 발해 대인선도 20년을 재위했다.[15] 권력이 《삼국지》의 헌제처럼 거의 없었는지, 나름대로 발언권은 있었는지 정도의 이견은 있지만 적어도 실권은 없었다는 것이 정설이다.[16] <천비묘지명> 기록.[17] 당시 고구려부흥운동의 구심점은 신라로 망명해 고연무, 검모잠 등에 의해 한성(황해도 재령군)에서 새로운 고구려 왕으로 추대된 안승의 고구려국이었고, 안승을 새로운 고구려 왕으로 인정함으로써 신라가 고구려 유민들의 보호자이자 후원자라는 헤게모니를 선점한 것에 대한 대응책이었다는 지적도 있다.[18] 조선은 고조선을 말한다. 고조선의 수도가 평양이었으므로 훗날 이성계의 조선 건국 이전까지 조선이라는 말은 평양과 그 근처의 지명 비슷하게 쓰였다. 비슷한 호칭을 받은 사례로 조선국공 이자겸이 있다.[19] 안동도호로 임명되진 않았음에 주의.[20] 지금의 중국 쓰촨성.[21] 특히 드라마 대조영에서 이런 면을 잘 다뤘는데, 왕위에 있을 때는 연개소문 가문에 밀려 아무것도 하지 못했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멸망, 퇴위 후에 능동적으로 움직일 수 있었다.[22] 《동국통감》 권9 <신라기>에 따르면 백제 의자왕의 증손자이자 부여융(扶餘隆)의 손자 부여경(扶餘敬)이 '웅진도독 대방군왕(熊津都督 帶方郡王)'을 받은 시기와 같다.[23] 일설에 의하면 고보원은 오히려 반당군(反唐軍)에 합류하였다고 한다. 출처: 이종욱, 《고구려의 역사》(출판사 김영사, 2005) 539쪽[24] 《삼국사기》에 기록된 왕 중에서 신라 왕은 문무왕의 기록이 가장 많이 남아 있으며, 백제는 의외로 시조인 온조왕이 가장 많다. 문무왕은 《삼국사기》에 기록된 모든 왕들 중에서도 기록이 가장 많아서 명실상부한 No.1이다.[25] 고려의 왕들은 《고려사》에 기록이 보통 해마다 3개 이상 남을 정도로 상세하며, 조선은 이보다 더 자세해서 《조선왕조실록》 및 《승정원일기》 등 각종 기록 덕분에 연, 월 단위가 아닌 일 단위 기록이 남아 있다.[26] 2000년 KBS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는 경보대사 역, 2004년 KBS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구키 요시타카 역.[27] 극중 연개소문 역의 배우 조경환이 개인 사건으로 일시 잠적하는 바람에 여기서는 연개소문이 중원 정벌전 도중 유시를 맞고 중태에 빠져 죽는 것으로 그려진다. 이때 연개소문의 사망 소식을 듣고 매우 비통해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단적인 장면이지만, 그만큼 두 사람의 관계는 서로 신뢰관계 정도로 적절하게 묘사된다.[28] 2002년 SBS 드라마 <야인시대>에서는 휘발유 역.[29] 연개소문 역시 일방적으로 국정을 주도하는 타 매체와 달리 보장왕을 설득해서 합의 하에 정책을 추진하는 모습을 보인다.[30] 다만 항복을 결정하는 장면에서 고구려 구백년 사직을 운운하는데, 이는 드라마 연개소문과 전작인 광개토태왕에서도 나온 오류이다. 다만 환빠 감성 그득한 역사왜곡물인 이들과는 달리 고구려를 띄우려고 그런 것도 아니고, 기나긴 사직의 문을 자신의 손으로 닫아야 한다는 한탄에 가까운 표현인지라 그렇게 까이지는 않는 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