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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의 역사에 대해 다루는 문서이다.2. 20세기
2.1. 1900년대
1900년 독일 축구 협회(DFB)가 창설되었고, 1908년 4월 5일 스위스 바젤에서 스위스 국가대표팀을 상대로 독일 국가대표팀의 첫 A매치 경기가 열렸다.2.2. 1920년대
2.2.1. 오토 네르츠 감독
오토 네르츠 감독은 1926년에 선임되었으며,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의 첫 전임 감독이다. 그에게 주어진 목표는 1928년 암스테르담 올림픽이었다.[1] 그러나 1928년 올림픽에서는 2라운드에서 우루과이를 만나 1:4로 대패하였다.2.3. 1930~1940년대
1930년에 개최된 제1회 1930년 우루과이 월드컵에는 불참했다.첫 출전한 1934년 이탈리아 월드컵에서는 3위를 기록했다.
2.3.1. 제프 헤어베어거 감독
1936년부터 제프 헤어베어거 감독을 선임한다.193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는 오스트리아를 흡수하여 월드컵에 출전했다. 직전 대회인 1934년 월드컵에서 독일이 3위, 오스트리아가 4위를 거두었던 성적도 있고 1937년 독일은 11경기에서 10승을 거둘 정도로 전력도 탄탄했다. 이래서 당시의 독일은 가장 강력한 우승 후보로 거론되었다. 그러나 실상은 달랐는데 독일은 대회 직전에 급조된 팀이었기 때문에 팀워크 부분에서 많은 문제점을 노출했다. 대회이 열리기 불과 두 달전에 오스트리아가 합병되었는데, 양국 대표팀 통합부터 시작하여 선수들 간의 갈등[2]까지 온갖 문제들을 해결하기에 두 달이란 시간은 너무 짧았다. 독일 축구 챔피언십 때문에 월드컵에 출전할 만한 선수들을 따로 모으기도 불가능했던건 덤. 여기에 윗선의 개입이 상황을 더욱 꼬아놨는데 대외적으로 대표팀이 하나의 독일처럼 보여야 된다는 이유로 11명의 선수 구성 비율을 기본적으로 6:5로 맞춰야 한다는 강압[3]도 있었다.
결국 당시 독일은 축구 협회부터 코칭 스태프까지 매우 혼란스럽고 잡음이 많은 상황에서 급조되다시피 구성되었고, 제대로 손발을 맞춰볼 기회도 없이 곧바로 월드컵에 출전해야 했다. 결국 졸전 끝에 1라운드에서 허무하게 탈락했다.[4] 시드 배정국 중 유일하게 탈락, 공식 순위는 10위. 이 대회는 독일 대표팀이 8강 안에 들지 못한 셋뿐인 월드컵이다.[5] 아예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각각 따로 월드컵에 나왔거나 헤어베어거에게 선수 선발과 구성에 전권을 줬다면 더 나은 결과를 거두었을 것이다.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중단되었던 월드컵은 1950년에 재개되어 브라질에서 개최되었다. 물론 독일과 일본은 2차 대전 추축국이라는 이유로 FIFA로부터 월드컵 출전을 금지당했다.[6]
2.4. 1950년대
▲1954 스위스 월드컵 우승 후 줄리메컵을 들고 있는 주장 프리츠 발터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연합국은 독일축구협회(DFB)와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을 해체했다. 그리고 1945년 11월 FIFA는 독일과 일본에 국제 경기 참여 금지령을 내렸다. 이후 1950년 9월까지 독일은 모든 국제 대회에 출전을 금지 당했다. 1945년 11월, 북독일 리그와 남독일 리그가 각각 첫 경기를 시작하며 서독에서 프로축구 리그가 재건되었으나 위와 같은 이유로 독일 대표팀의 재건은 한동안 이루어지지 못했다.
1948년 스위스가 FIFA에 독일 징계 철회를 요청했으나 기각되었다. 당시 스위스 축구 클럽들은 독일 클럽들과 경기를 치르고 있었지만 프랑스 등의 항의로 중단되었다. 1949년에는 잉글랜드가 독일 징계 철회를 요청했다. 이후 1949년 서독 정부의 수립을 계기로 연합국 군정 허가 하에 독일 클럽에 대한 제재가 제한적으로 완화되었다. 1949년 말 슈투트가르트에서 DFB의 공식적인 재건식이 열렸다. 재건된 DFB는 제2차 세계 대전 이전 기존 독일 대표팀의 계승을 천명했다. 전쟁으로 국제 대회가 중단될 때까지 대표팀 감독을 맡았었던 헤어베어거 감독이 다시 대표팀 감독에 선임되어 국가대표팀 재건의 중책을 맡았다. 1950년 브라질 월드컵을 앞두고 스위스가 다시 독일의 징계 철회를 요청했다. 비록 브라질 월드컵에서 독일의 출전은 이루어지지 못했지만, 브라질 월드컵 직후인 1950년 9월 드디어 독일에 대한 징계가 풀리고 FIFA 회원 자격이 복구되었다. 1950년 11월 22일 슈투트가르트의 네카르스타디온에서 스위스 대표팀과 감격적인 전후 첫 A매치(친선전)가 열렸다. 서독의 전후 첫 공식 경기가 열린 슈투트가르트의 네카르스타디온은 그리 큰 경기장이 아니었지만 당시 무려 10만명 이상이 몰렸다.[7]
한편 동독은 1952년 서독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서독과 별도의 독자적인 새로운 축구협회(DFV)를 창립하고 동독 국가대표팀을 창단했다. 독일은 1964년 도쿄 올림픽 때까지 동하계 모두 올림픽에 동서 단일팀을 구성하여 출전했기 때문에 축구 역시 단일팀을 구성해야 한다는 여론이 있었고, FIFA와 유럽 축구 연맹(UEFA) 측에서도 동독 대표팀도 제2차 세계대전 이전 독일 국가 대표팀의 기록을 사용하는 것을 허용했지만 정작 동독 정부 측에서 분단 이전 독일축구협회와 국가대표팀을 인정하지 않고 새로운 축구협회와 대표팀을 꾸렸다.
서독은 출전 금지가 풀린 첫 메이저대회인 1954 스위스 월드컵에서 우승컵을 차지하면서 화려하게 복귀했다. 당시 독일은 서독, 동독, 자를란트 3개국 대표팀으로 나눠어 출전했다. 자를란트는 이 대회가 메이저 대회 처음이자 마지막 출전이었으며, 2년 후 서독에 흡수되었다. 사실 이 대회는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특이한 대전방식을 도입했는데, 조별 예선에서 풀리그를 거치지 않았고,[8] 8강 이후 토너먼트에서는 조 1위끼리 맞붙거나, 조 2위끼리 맞붙는 방식이었다. 이런 이상한 대전방식 때문에 서독은 조별리그에서 불리한 입장에 있었는데, 같은 조 최약체팀인 승점자판기 한국과 경기를 치르지 않게 된 것이었다. 당시 6.25 전쟁이 끝난지 1년도 안 된 시점의 한국은 명백한 약체팀이었다. 그러나 서독은 이러한 특이한 대전 방식의 헛점을 이용하는 전략인 접근을 취했는데, 조별리그에서 당시 세계 최강 헝가리와 맞붙었을 때 주전 7명을 제외한 사실상 2군을 내보내 일부러 패배하게 하여 조 2위로 8강에 올랐다. 조 1위로 8강에 오른 헝가리는 각조 1위인 브라질과 우루과이를 차례로 만나 혈전을 치르며 결승까지 올라와야 했지만, 서독은 토너먼트에서 조 2위 국가인 유고슬라비아와 오스트리아를 차례로 만나 각각 2:0, 6:1로 꺾으며 손쉽게 결승에 진출했다. 그리하여 결승전에서 서독은 헝가리와 다시 만나게 되었다. 당시 마자르 군단 헝가리는 세계 최강의 축구 대표팀으로, 이날 결승전에서 서독에게 패배하기 전까지 4년여 동안 A매치 32경기 무패라는 대기록을 작성하고 있었다. 결승전은 초반 8분만에 헝가리가 두 골을 선취하며 2:0으로 앞서나가며 패색이 짙었다. 그러나 2분 후 막스 모를로크가 만회골을 터트리며 추격을 불씨를 지피기 시작했고 이어 헬무트 란이 2골 1도움을 기록하는 맹활약을 펼치며 끝내 경기를 경기를 뒤집는데 성공하며 극적으로 우승을 차지했다. 이렇게 당시 세계 최강이던 마자르 군단 헝가리를 극적으로 꺾고 우승을 차지한 이 경기는[9] 결승전이 열렸던 도시 베른의 이름을 따서 베른의 기적이라 불리고 있다. 이 우승은 패전과 조국의 분단이라는 이중고에 시달렸던 서독 국민들에게 감동과 희망을 안겨준, 독일에게는 결코 잊지 못할 역대급 성과다.[10] 이후 16회 연속 대회 8강 진출이라는 위업을 달성했다.[11]
1958 스웨덴 월드컵에서는 죽음의 조인 1조에 배정되었다. 체코슬로바키아, 북아일랜드와 무승부를 거두며 다소 고전했으나 남미의 강호 아르헨티나를 격파하고 1승 2무로 조 1위로 8강에 진출했다. 8강에서 유고슬라비아를 만나 1:0 승리를 거두고 4강에 진출했다. 4강전에서 개최국 스웨덴에게 패배하여 결승 진출에 실패했다. 최종 순위는 4위가 되었다.
2.5. 1960년대
1962 칠레 월드컵 조별 리그에서 서독은 개최국 칠레와 스위스를 눌렀으나, 당시 그리 강한 전력이 아니었던 이탈리아와 비겨 2승 1무를 거두었다. 그래도 조 1위의 성적으로 8강 토너먼트에 진출했으나, 8강전에서 유고슬라비아에 0:1로 패하고 말았다. 4강 진출 실패의 충격으로 서독은 통합 프로리그의 필요성을 실감하고,[12] 이듬해 1963년 분데스리가를 출범시켰다. 분데스리가는 급속도로 발전하여 1990년 독일 재통일로 인해 경제침체의 영향을 받을 때까지 70~80년대 세계 최고의 축구리그 중 하나로서 위용을 뽐냈다.2.5.1. 헬무트 쇤 감독
분데스리가 출범과 때를 같이 하여 54년 스위스 월드컵 우승의 주역인 명장 제프 헤르베르거가 물러나고 1964년부터 헬무트 쇤이 새로 대표팀 감독으로 부임했다. 1956년부터 수석코치를 맡은 사람을 감독으로 올린 내부 승격이다.1960~70년대 서독은 국가대표 B팀을 상설 운용했다. 다른나라에서도 간헐적으로 국가대표 B팀을 운용하는 사례가 종종 있었지만, 당시 서독은 B팀을 매우 활성화하여 상설화시켰다. 국가대표 B팀은 50년대부터 있었지만, 62년 칠레 월드컵 4강 탈락 충격으로 인한 서독 축구계 개혁 이후 국가대표 B팀도 강화되어 1965년부터는 다른나라 A대표팀과 평가전을 갖기 시작했다... DFB는 B팀을 통해 차세대 국가대표 A팀 멤버로 성장할 선수들을 선별하여 육성했다. 이후 B팀은 1974년 우승 멤버들을 배출하는 산실 역할을 했다. 1970년대에 이르러 서독 B팀은 웬만한 다른나라 국가대표팀 못지 않은 강력한 전력을 가졌는데, 당시 워낙 뛰어난 선수들이 넘쳐났던 A대표팀에 승선하지 못했던 다른 우수한 선수들이 B팀에 수용되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헬무트 쇤 감독이 A대표팀의 조직력을 고려하여 다분히 FC 바이에른 뮌헨과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 양팀 선수층 위주로 A대표팀을 꾸렸던 측면이 있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중하위권팀에 소속된 뛰어난 선수들이 B팀에 많이 소속되기도 했다. 그러나 80년대 이후 클럽 경기 일정이 많아지고, A매치로 인정받지 못하는 B팀의 특성상 선수들의 동기 부여에도 한계를 보이면서 B팀은 사라지게 되었고 나중에 23세 이하 대표팀 등의 형태로 간접적으로 계승되었다.
1966 잉글랜드 월드컵에서는 준우승을 거두었다. 조별 리그에서 서독은 첫 경기에서 스위스를 5:0으로 대파한 후, 2차전에서 아르헨티나와 비겼으나, 3차전에서 스페인을 이기면서 2승 1무의 성적으로 조 1위로 8강 토너먼트에 진출했다. 브라질이 조별 리그에서 탈락하면서 서독은 대회 최고의 우승후보로 부각되었고, 그러한 평에 걸맞은 뛰어난 경기력을 선보이며 8강에서 남미의 강호 우루과이우루과이를 4:0으로 대파하였고, 4강에서 우승후보 소련을 만나 레프 야신의 놀라운 선방에도 불구하고 파상공세 끝에 두 골을 넣고 결승까지 올랐다. 결승전에서는 개최국 잉글랜드와 만났다. 이 경기는 장군멍군식으로 전개된 경기였다. 1:1 상황에서 피터스의 득점으로 잉글랜드가 앞서나갔고, 2:1 상황에서 베버가 동점골을 넣었는데 뱅크스와 무어는 이 이전 상황에서 공이 슈넬링어의 팔에 맞았으므로 잉글랜드가 프리킥을 차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주심이 무시했다. 2:2 동점 상황에서 경기는 연장전으로 이어졌고 제프 허스트의 튕겨져 나온 공이 골로 인정되는 오심[13]으로 경기는 3:2가 되었다. 만회골을 위해 총공세를 펼치던 서독은 수비진까지 모두 잉글랜드 진영으로 올라와 공격에 가세했으나 체력의 한계로 인해 위협적인 찬스는 만들지 못했으며, 롱패스는 번번이 차단당했고, 이 상황에서 무어의 롱패스를 받은 허스트가 그대로 전진하여 득점시키면서 4:2로 경기가 종료되었다.[14]
2.6. 1970년대
▲축구 사상 위대한 팀 .. 1972-1974 독일 (Football's Greatest International Teams .. Germany 1972-1974)
1970 멕시코 월드컵에서는 3위를 기록했다. 조별 리그 3경기에서 3연승을 거두고 조 1위로 토너먼트에 진출한 서독은 8강전에서 잉글랜드와 리턴매치를 갖게 되었다. 전반전에는 2:0으로 끌려갔으나, 후반전에 이르자 잉글랜드가 체력이 급격히 떨어지는 모습을 보였고 서독이 반코트 게임으로 경기를 주도하며 두 골을 성공시켜 경기는 연장전으로 이어졌다. 연장전에서 마침내 역전골을 터트려 잉글랜드에 설욕하며 4강에 진출했다. 이탈리아와의 4강전은 연장전까지 이어지며 선취득점-동점-역전-재동점-재역전-재재동점-추가골이 이어지는 역대급 명승부를 펼친 끝에 4:3으로 석패하여 결승진출에 실패했다. 이것이 월드컵에서 독일이 이탈리아에 패배한 첫 경기다. 이전까지는 이탈리아와 무승부만 있었다. 이 경기에서 베켄바워는 이탈리아의 거친 파울로 쇄골이 부서지고 어깨가 탈골하는 부상을 입었으나 이미 2명을 교체한 후였기 때문에 삼각건으로 탈골된 팔을 상체에 고정시킨 후 끝까지 경기에 뛰는 투혼을 발휘하여 전세계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게르트 뮐러는 대회에서 총 10골을 성공시켜 득점왕에 올랐고, 그해 발롱도르를 수상했다.
UEFA 유로 1972에서 헬무트 쇤 감독은 당시 분데스리가를 양분하던 FC 바이에른 뮌헨과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 선수들을 주축으로 대표팀을 구성했다. 1970년 월드컵 대표팀 멤버가 많이 포함되어 있었지만 부상 등의 이유로 볼프강 오베라트, 베르티 포크츠, 볼프강 베버 등이 참여할 수 없었다. 특히 1970년 월드컵에서 맹활약하며 그해 발롱도르 5위에 올랐던 중원 플레이메이커 오베라트의 공백은 적지 않은 타격이었다. 오베라트 대신 발탁된 이가 바로 귄터 네처였다. 네처 역시 분데스리가에서 오버라트와 쌍벽을 이룬 뛰어난 중원 플레이메이커였다. 헬무트 쇤 감독은 1970년 월드컵을 앞두고 오베라트와 네처를 공존시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지만 실패했고, 결국 쇤 감독은 둘 중 오베라트를 주전으로 선택했다. 이후 네처는 오베라트에 밀려 대표팀에 승선할 기회를 많이 얻지 못했다. 하지만 네처 역시 분데스리가에서 맹활약하며 1971년 발롱도르 4위에 올랐고, 1972년 유로에서 주전으로 활약하게 된다. 이 대회에서 서독 대표팀은 압도적인 경기력을 보이며 승승장구했다. 베켄바워와 네처가 경기를 조율하면서 화려한 축구를 구사했고, 전방에는 어떻게 해서든 골로 결정짓는 게르트 뮐러가 있었다. 특히 예선 플레이오프 빅매치였던 잉글랜드전 웸블리 원정경기에서 잉글랜드를 완전히 압도하면서 3:1로 승리했다. 결승전에서는 소련을 상대로 일방적인 경기를 경기를 펼치며 3:0의 대승을 거두고 유럽 정상에 올랐다. 이 대회에서 서독 대표팀이 보여준 창의적인 축구는 '아트사커', '람바참바 풋볼'이라 불리며 찬사를 받았다. 서독이 이런 창의적인 축구를 보인데는 판타지스타 패스마스터 귄터 네처의 역할이 컸다.[15] 유로대회에서의 활약을 바탕으로 1972년 발롱도르 투표 1~3위를 서독 선수들이 독식했다. (1위 프란츠 베켄바워, 공동 2위 게르트 뮐러, 귄터 네처) 2000년대 중반 이전 독일 축구하면 투박하고 실리적인 축구를 떠올리지만 독일 축구가 항상 그랬던 것은 아닌데 대표적으로 유로 1972 당시 서독은 브라질에 비견되는 아트사커를 구사한다는 찬사를 받았다.
▲1974 서독 월드컵 우승의 주역 프란츠 베켄바워와 게르트 뮐러
자국에서 개최된 1974 서독 월드컵을 위해 구성된 서독 대표팀은 당시 분데스리가와 유러피언컵을 호령하던 전성기의 FC 바이에른 뮌헨 주축 멤버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카이저' 프란츠 베켄바워, '폭격기' 게르트 뮐러를 위시하여, 제프 마이어, 파울 브라이트너, 울리 회네스 등 베스트 11 중 6명이 바이에른 뮌헨 소속이었다. 당시 서독 대표팀은 귄터 네처와 볼프강 오베라트라는 두명의 뛰어난 중원 플레이메이커를 보유하고 있었는데, 오베라트는 1970 월드컵에서 주전 플레이메이커로 활약했고, 오베라트가 부상으로 빠진 1972년 유로에서는 귄터 네처가 활약하면서 일약 스타가 되었다. 헬무트 쇤 감독은 분데스리가에서 라이벌이었던 자존심 센 이 두 명의 플레이메이커를 공존시키기 위해서 노력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1972 유로에서 네처의 임팩트가 워낙 컸기 때문에 서독 국민들은 네처를 원했으나, 쇤 감독은 오베라트를 1974 월드컵 주전으로 선택했다.[16] 오베라트가 중원 플레이메이커로 선택되면서 서독 대표팀의 색깔은 72년과 다소 달라졌는데, 창의성 있는 아트사커 대신 활동량과 기동력, 전사와 같은 투쟁력이 보다 강조되었다는 평을 듣는다. 조별 리그 1, 2차전에서 서독은 칠레와 호주를 각각 1:0, 3:0으로 꺾었다. 3차전 상대는 동독이었다. 이 경기는 서독과 동독의 역사상 유일한 A매치였으며 당시에 상당한 화제를 모았던 경기였다. 그런데 서독은 이 경기에서 의외로 동독에 패하면서 조 2위로 8강에 진출했다. 서독 국민들은 마치 대한민국이 북한에게 패한 것과 같은 커다란 충격에 휩싸였고, 이에 헬무트 쇤 감독은 국민들에게 동독전 패배에 대해 대국민 사과를 해야만 했다. 다만 서독이 8강 리그에서 유리한 B조에 속하기 위해 고의로 동독전에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는 설이 있으며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믿고 있다. 74년 월드컵부터 8강, 4강 토너먼트 대신 2개의 조별리그로 치러지는 새로운 룰이 적용되었는데, 동독에게 패해 조 2위가 된 서독(1조 2위)은 유고슬라비아(2조 1위), 스웨덴(3조 2위), 폴란드(4조 1위)와 함께 B조가 된 반면, 1조 1위 동독은 브라질(2조 2위), 네덜란드(3조 1위), 아르헨티나(4조 2위)와 함께 A조가 되었다... 8강 리그 결과 A조에서는 토탈사커로 선풍을 일으키던 요한 크루이프의 네덜란드가 3승 무패로 결승에 올랐고, B조에서는 서독이 3승 무패로 결승에 올랐다. 양 팀 모두 3승무패로 결승에 올랐지만 유력한 우승 후보인 브라질, 아르헨티나 등 남미의 강호들을 발라버리며 결승에 올라온 크루이프의 네덜란드는 상대적으로 전력이 약한 팀들을 이기고 올라온 서독보다 훨씬 큰 인기를 얻고 있었고 전세계가 네덜란드에 열광하고 있었다. 결승전이 시작하자마자 네덜란드는 크루이프 팬들에 의해 전설로 불리는 그 유명한 16번의 볼터치 후 크루이프가 회네스에게 걸려 넘어지면서 페널티킥으로 선취 득점했다. 하지만 네덜란드는 거기까지였다. 선취 득점 이후 일방적인 서독의 경기였다. 헬무트 쇤 감독은 크루이프를 봉쇄하기 위해 대인방어에 뛰어난 베르티 포크츠를 기용하였는데, 포크츠가 크루이프를 효과적으로 봉쇄하면서 네덜란드는 예전같은 경기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서독은 일방적으로 네덜란드를 몰아붙인 끝에 전반 25분 베른트 횔첸바인이 얻어낸 페널티킥을 파울 브라이트너가 성공시키며 동점을 만들었다. 이후 서독의 공세는 더욱 거세어졌다. 서독은 수비수인 브라이트너나 심지어 크루이프의 전담 마크맨인 베르티 포크츠까지 문전 돌파 후 슛을 날리는 등 수비수들까지 전천후로 공격에 가담하며 그야말로 최고 수준의 토털 풋볼이란 이런 것이다 하는 것을 네덜란드 앞에서 시전했다. 이렇게 서독은 수비수들까지 돌아가면서 공격에 가담하는 등 수시로 위치를 바꿔가며 유기적인 플레이를 펼쳤으며 리베로 베켄바워는 최후방에서 경기를 조율하는 동시에 크루이프의 침투를 무력화시켰다. 역전골을 넣게 위해 계속 밀어붙이던 서독은 전반 43분 게르트 뮐러의 골로 마침내 역전에 성공했다. 후반전에도 서독은 계속 기회를 잡았다. 뮐러가 두번째 골을 넣었으나, 오프사이드가 선언되었다. 그러나 이 오프사이드 판정은 오심으로 밝혀졌다. 85분에는 횔첸바인이 또다시 페널티 에어리어에서 넘어졌으나, 주심의 휘슬은 울리지 않았다. 결국 2대1로 승리하며 서독이 두 번째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렸다.[17]
UEFA 유로 1976에 서독은 1974년 월드컵 우승멤버와 비슷한 멤버구성으로 출전했다. 조 1위로 조별 리그를 통과한 서독은 8강전에서 스페인을 꺾었고, 4강전에서는 유고슬라비아에 4:2 역전승을 거두고 결승전에 올랐다. 결승전에서는 체코슬로바키아가 초반에 두 골을 넣어 손쉽게 승리를 가져가나 했으나, 서독의 집요한 반격으로 디터 뮐러와 베른트 횔첸바인의 연속골로 2:2 동점이 되어 연장전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승부차기에서 4번째 키커 울리 회네스가 실축하면서 아쉽게 준우승에 머물렀다. 한편 회네스 다음 키커인 체코슬로바키아의 마지막 키커 안토닌 파넨카가 바로 이 경기에서 파넨카킥을 시전하며 우승을 확정지었다.
유로 1976이 끝나면서 그동안 대표팀을 이끌었던 베켄바우어, 뮐러, 오베라트, 회네스, 하인케스 등이 은퇴하면서 대표팀은 세대 교체에 들어가게 된다. 19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을 앞두고 서독 대표팀은 클라우스 피셔, 디터 뮐러, 칼 하인츠 루메니게 등 신예들을 대거 기용하여 공격진을 꾸렸다. 이들은 당시 분데스리가에서 게르트 뮐러를 퇴물로 만들며 득점왕 경쟁을 펼치던 뛰어난 자원들이었으나 막상 대회가 시작되자 경험 부족 때문인지 한결같이 부진한 모습을 보이게 된다. 또 중원에서 경기를 조율하던 베켄바우어와 오베라트를 대체할 만한 걸출한 플레이메이커들이 부재했던 것도 컸다. 19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 1라운드 조별리그에서는 2차전에서 멕시코를 6:0으로 바르기도 했지만, 1차전에서 지난 대회 4강 폴란드와 0:0 무승부를 기록한데 이어 3차전에서도 튀니지의 밀집수비를 뚫지 못하고 0:0으로 비겼다. 조 2위로 2라운드(8강)에 올랐다. 그러나 1934년 이탈리아 월드컵에 이은 막장 쓰레기 대회라는 오명에 맞게 아르헨티나의 손쉬운 우승을 위해서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한 것인지 강팀들이 모조리 A조에 묶였다. A조에 전대회 우승 및 준우승국인 서독, 네덜란드를 비롯해 이탈리아, 오스트리아가 함께 묶였다. 서독은 1, 2차전에서 이탈리아, 네덜란드에 각각 0:0, 2:2 무승부를 거두었다. 3차전에서 오스트리아를 꺾고 4강에 오를 것으로 기대되었다. 그러나 이미 네덜란드가 2승을 선취하면서 결승 진출이 확정되었고, 오스트리아에 승리를 거두더라도 결승 진출이 좌절된 서독은 오스트리아전에서 포크츠의 자책골 등으로 2:3로 패하면서 6위로 대회를 마감했다. 대규모 세대 교체가 이루어진 후 치러진 1978년 월드컵에서 서독은 기대에 비해 다소 저조한 성적을 거두었으나 이때 세대 교체로 새로 대표팀에 들어온 멤버들은 이후 1980년대 초반까지 대표팀의 주축으로 활약하면서 1980년 유로 우승, 1982년 월드컵 준우승 등을 일궈낸다.
2.6.1. 유프 데어발 감독
헬무트 쇤이 월드컵 종료 이후 은퇴를 선언하며, DFB는 국가대표팀 수석코치와 아마추어 국가대표팀 감독을 역임한 유프 데어발을 감독으로 선임하였다.2.7. 1980년대
▲유로 1980 결승전 벨기에전 선발 라인업(슈마허, 칼츠, 슈틸리케, K. 푀르스터, 디츠, 슈스터, 브리겔, 뮐러, 루메니게, 흐루베슈, 알로프스)
1980년 이탈리아에서 열린 유로 1980을 앞두고 당시 대표팀에서 엄청난 활약을 했던 스트라이커 클라우스 피셔[18]가 부상으로 빠지고, 대체선수로 대표팀 경험이 없던 호르스트 흐루베슈가 승선하게 되면서 우려를 자아내기도 했으나, 본선 조별리그 첫경기에서 서독은 체코슬로바키아를 만나 루메니게의 골로 승리하면서 4년전 결승전 승부차기 패배를 설욕했고, 두번째 경기인 네덜란드전에서는 78-79시즌 분데스리가 득점왕 클라우스 알로프스의 해트트릭으로 네덜란드를 꺾었다. 조 1위로 결승에 올라 결승전에서 호르스트 흐루베슈의 골로 벨기에에 2:1 승리를 거두고 우승했다. 네덜란드전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한 알로프스는 대회 득점왕을 차지했고, 이 대회에서 활약한 루메니게는 80년, 81년 연속으로 발롱도르를 수상했다.
1982년 스페인 월드컵에서는 준우승을 거두었다. 아래에 서술될 히혼의 수치로 빛이 바랜 비운의 대표팀이지만 80년 유로 우승 멤버가 주축이 되어 좋은 경기력을 보여주었다. 문제는 실력이 뛰어났던 만큼 너무 자만했다는 점인데 그것이 결국 히혼의 수치라는 비극을 초래한 단초가 되었다. 이 대회 조별리그 3차전에서 히혼의 수치, 또는 알제리에서 안슐루스라 불린 사건이 발생했다. 독일 축구 역사상 최악의 흑역사라 불리는[19] 이 사건은 1934년 이탈리아 월드컵, 19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 아르헨티나-페루전 등과 더불어 월드컵의 위상에 먹칠을 가한 흑역사로 남아있다. 서독은 전세계의 지탄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서독이라는 나라의 신뢰도에 먹칠을 가한 사건이기 때문에 서독 국내의 비판 여론도 거셌다. 내막은 이렇다.
우승후보였던 서독은 조별리그 첫 상대인 알제리를 아주 우습게 봤는데, 유프 데어발 감독은 "알제리를 이기지 못하면 바로 기차타고 집으로 가겠다"고 호언장담하기도 했다. 그러나 서독은 만만하게 봤던 알제리에게 1-2로 패하는 이변의 희생양이 되면서 개망신을 당하고 말았다. 조별리그 2차전에서 루메니게의 해트트릭에 힘입어 4-1 대승을 거두었지만, 알제리전의 패배가 문제가 되어 오스트리아와의 마지막 3차전을 앞둔 상황에서 아래과 같은 전적으로 2라운드 진출을 장담하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순위 | 팀 | 전 | 승 | 무 | 패 | 득 | 실 | 차 | 승점 |
1 | 오스트리아 | 2 | 2 | 0 | 0 | 3 | 0 | +3 | 4[20] |
2 | 알제리 | 3 | 2 | 0 | 1 | 5 | 5 | 0 | 4 |
3 | 서독 | 2 | 1 | 0 | 1 | 5 | 3 | +2 | 2 |
4 | 칠레 | 3 | 0 | 0 | 3 | 3 | 8 | -5 | 0 |
순위 | 팀 | 전 | 승 | 무 | 패 | 득 | 실 | 차 | 승점 |
1 | 서독 | 3 | 2 | 0 | 1 | 6 | 3 | +3 | 4 |
2 | 오스트리아 | 3 | 2 | 0 | 1 | 3 | 1 | +2 | 4 |
3 | 알제리 | 3 | 2 | 0 | 1 | 5 | 5 | 0 | 4 |
4 | 칠레 | 3 | 0 | 0 | 3 | 3 | 8 | -5 | 0 |
▲1982 스페인 월드컵 결승전 이탈리아전 선발 라인업(브라이트너, 슈틸리케, 슈마허, 브리겔, 루메니게(주장), 피셔, 리트바르스키, B. 푀르스터, 칼츠, 드레믈러, K. 푀르스터[22])
82년 월드컵 당시 서독은 80년 유로에서 맹활약했던 클라우스 알로프스가 갑작스런 부진으로 대표팀에서 탈락하고, 득점기계 클라우스 피셔가 노쇠한 상황이었지만 월드 클래스로 성장한 칼-하인츠 루메니게 덕분에 여전히 우승 후보로 꼽혔다. 그러나 대회 도중 루메니게가 부상을 입는 악재를 겪게 된다. 다행히 루메니게의 대체 자원으로 투입된 신예 리트바르스키가 기대 이상으로 맹활약하여 루메니게의 공백을 메웠고 서독은 2라운드를 통과하고 준결승에서 플라티니가 이끄는 프랑스와 격돌했다. 루메니게가 부상으로 선발출장하지 못했지만 리트바르스키가 초반에 득점에 성공하여 손쉽게 풀어나가나 했더니 페널티킥을 헌납하여 동점이 되어 결국 연장전에 돌입했다. 연장전 전반에 연속으로 두 골을 먹고 3:1로 패색이 짙었으나 연장전에 교체 투입된 루메니게가 만회골을 넣었고, 이어 클라우스 피셔가 전매특허인 오버헤드킥을 작렬하며 극적으로 동점을 만들어 승부차기에 돌입했고 결국 결승에 진출했다.[23][24] 이 경기는 오늘날에도 독일에서는 세비야에서의 스릴러(Thriller von Sevilla)라고 부르는 명경기. 그러나 4강전에서의 체력 소모가 결승전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결승에서는 파올로 로시가 이끄는 이탈리아와 맞붙게 되었다. 결승전에서 서독은 루메니게가 선발로 정상 출장하면서 루메니게, 피셔, 리트바르스키로 이어지는 3각 편대를 오랜만에 정상적으로 가동하였고 이 3인방은 연달아 이탈리아의 골문을 두드리며 가공할 만한 공격력을 선보이는 듯 했다. 그러나 리트바르스키, 루메니게, 피셔 모두 차례로 문전 앞에서의 찬스를 살리지 못하며 기회를 날렸고, 간간히 튀어나오는 이탈리아의 빠른 역습에 노쇠한 서독 수비진은 다소 버거워하는 모습을 보였다. 결국 전반 24분 브리겔의 무리한 수비로 페널티킥을 헌납했다. 이후 서독은 실점을 만회하기 위해 총공세에 나섰고 수비진까지 적극적으로 공격에 가담해 브리겔, B. 푀르스터가 차례로 슈팅을 날렸으나 역시 골문을 빗나갔다. 이후에도 루메니게의 슛이 빗나가는 등 서독은 결승전 내내 결정 짓지 못하는 장면을 반복했다. 후반 내내 브리겔, 슈틸리케, 푀르스터 등 서독 수비진은 이탈리아 진영까지 넘어와 공격에 가담하다가 이탈리아에게 소유권이 넘어가면 수비 전형으로 전환하면서 극심한 체력 소모를 겪은 반면 이탈리아는 예의 수비 위주의 전술로 서독에 비해 체력을 아끼는 효율적인 운용을 펼치다가 빠른 역습으로 기회를 노렸고 이런 전술은 공격에 가담하고 있는 서독 수비진에게 매우 효과적이이서 적은 공격 기회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는 연이어 득점에 성공하면서 3:0으로 앞서나가며 승부를 결정지었다. 막판 브라이트너의 만회골로 3:1으로 종료되었다.
유로 1984에서는 조별리그에서 포르투갈과 무승부, 스페인과 경기에서 패배를 하며 1승 1무 1패로 4강 토너먼트 진출에 실패하고 5위로 대회를 마감했다. 4강 진출 실패의 책임을 지고 유프 데어발 감독이 자진사퇴하고 프란츠 베켄바워가 대표팀 사령탑으로 부임했다. 그러나 이 대회가 독일에게 전혀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닌데, 그것은 데어발 감독이 1980년 유로 우승과 1982년 월드컵 준우승을 거둔 검증된 대표팀 멤버에 수술을 가하며, 루디 푈러, 안드레아스 브레메, 로타어 마테우스 등 신예들을 과감히 주전으로 기용하는 세대교체를 시도했다는 점이다. 이 84년 대표팀은 유로 4강 진출에 실패하면서 당시에는 실패로 비춰졌으나 이때 세대교체로 등장한 인물들은 이후 1986 월드컵 준우승에 이어 1990 월드컵 우승을 이뤄내는 주역이 되었다.
2.7.1. 프란츠 베켄바워 감독
유로 1984 종료 이후, 수석코치 내부 승격의 전통을 깨고 베켄바워가 감독에 선임된다.
▲1986 멕시코 월드컵 준결승 프랑스전 선발 라인업(슈마허, 야콥스, 브레메, 에르더, 푀르스터, 브리겔, 마테우스, 롤프, 마가트, 루메니게 (57. 푈러 교체), 알로프스)
1986년 월드컵은 프란츠 베켄바워 감독의 첫 메이저 대회였다. 여전히 서독은 강팀 중 하나이긴 했지만 이전만큼 주목을 받는 우승후보는 아니었다. 서독 대표팀은 세대교체 와중이었고 이로 인해 유로 1984에서 4강에 오르지 못하는 부진을 겪기도 했다. 과거 서독 대표팀의 스타플레이어들이 대거 은퇴했고, 로타어 마테우스, 루디 푈러, 안드레아스 브레메, 피에르 리트바르스키, 볼프강 롤프 등 20대 중반의 다소 생소한 신예들이 대표팀의 추축을 차지하고 있었다. 베켄바워 감독 역시 현역 은퇴 직후 아무런 지도자 경력 없이 대표팀 감독에 선임되었기 때문에 경험 부족 문제가 지적되기도 했다. 86 월드컵은 마라도나의 아르헨티나, 플라티니의 프랑스, 디펜딩 챔피언 이탈리아, 전통의 강호 브라질 등이 서독보다 더 주목받는 팀이었다. 그밖에 게리 리네커의 잉글랜드, 개최국 멕시코 등도 주목받는 팀이었다.
실제로 1986년 월드컵에서 서독은 조별리그에서 다소 부진한 모습을 보였다. 덴마크에 2:0으로 패하는 등 1승 1무 1패의 성적으로 조 2위를 기록했다. 사실 조별리그에서 득점보다 실점이 많았다. 16강에서는 모로코를 맞아 박빙의 경기를 펼치다가 종료 직전 마테우스의 골로 가까스로 8강에 진출했다. 8강에서는 개최국 멕시코를 맞아 박빙의 승부를 펼치며 승부차기 끝에 간신히 4강에 올랐다. 서독은 8강까지 강호들을 피해갔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접전을 펼치며 어렵게 4강에 올랐다. 그러나 서독은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특유의 3-5-2를 바탕으로 한 톱니바퀴 같은 조직력으로 토너먼트에서 무실점을 기록하고 있었다. 대회가 진행되면서 서독의 조직력과 경기력은 더욱 날카로워졌고 서독의 강점 중 하나인 강인한 체력도 대회 후반으로 갈수록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준결승에서 서독은 유로 1984 우승국인 미셸 플라티니의 프랑스와 맞대결을 펼치게 되었다. 명승부를 펼칠 것이라는 세간의 기대와 달리 4강전은 서독의 일방적인 경기였고 2:0의 완승을 거두었다.[25] 플라티니가 등장하기 이전까지 축구 변방이었던 프랑스는 월드컵과 같은 큰 대회 경험이 부족했다. 프랑스는 8강에서 브라질과의 혈투를 치른 후 4강에서 급격하게 체력이 저하된 모습을 보였다. 서독 역시 8강에서 연장전과 승부차기를 거쳤음에도 불구하고 4강전에서 프랑스를 압도하는 경기력을 보였다. 또 서독이 특유의 조직력으로 플라티니를 철저히 봉쇄하자 플라티니에 크게 의존하던 프랑스는 결국 별 힘을 써보지도 못하고 무너지고 말았다. 결승전에서는 대회에서 최고의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디에고 마라도나의 아르헨티나와 맞대결을 펼치게 되었다. 서독은 2골을 연속으로 실점하며 패색이 짙었으나 후반에 교체투입된 루디 푈러가 맹활약하여 29분과 35분 카를하인츠 루메니게와 루디 푈러가 연속골을 넣으며 극적인 동점에 성공했다. 그러나 후반 39분 아르헨티나의 호르헤 부루차가가 결승골을 성공시키며 3:2로 아르헨티나가 우승을 차지했다. 경기 후 베켄바워 감독은 마라도나를 지나치게 의식하여 수비 전술로 나간 것이 패인이었다며 자신의 전술적 선택을 후회했다고 한다.[26] 베켄바워 감독은 두 골을 먹힌 후 이판사판의 심정으로 맞불 작전으로 전환하였고 루디 푈러를 투입하고 마라도나를 전담마크하라고 지시했던 마테우스에게 마라도나 마크를 하지 말고 공격에 가담하라고 지시했다. 이후 서독의 경기력이 확 살아나면서 순식간에 두 골을 만회했다. 물론 마테우스의 전담 마크에서 해방된 마라도나 역시 살아났지만 아르헨티나는 마라도나와 부르차가 등을 제외하면 클래스가 떨어지는 선수들이 많았고 처음부터 이런 방식으로 했다면 서독이 우승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분석이 많다.
▲UEFA 유로 1988 준결승 네덜란드전 선발 라인업(헤르게트, 보로프카, 콜러, 푈러, 임멜, 클린스만, 톤, 브레메, 밀, 롤프, 마테우스)
1988년 유로에서는 조 1위로 4강에 올랐다. 4강 상대는 마르코 반 바스텐, 루드 굴리트, 프랑크 레이카르트의 오렌지 삼총사를 비롯한 호화 멤버로 구성된 네덜란드였다. 서독은 페널티킥으로 선취 득점을 했으나 이후 똑같이 페널티킥을 내줬고 결국 1:2 역전패를 당하며 결승 진출에 실패했다. 서독을 이기고 결승에 진출한 네덜란드는 소련을 2:0으로 꺾고 대회 우승을 차지했다.
2.8. 1990년대
▲1990 이탈리아 월드컵 결승전 아르헨티나전 선발 라인업(베어톨트, 일그너, 콜러, 부흐발트, 푈러, 아우겐탈러, 리트바르스키, 브레메, 헤슬러, 클린스만, 마테우스)
1982, 1986 월드컵에서 연속 준우승에 머물렀던 서독은 삼수 끝에 1990 이탈리아 월드컵에서 마침내 세번째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86 월드컵에서 8강까지 천신만고 끝에 올라오며 그야말로 살아남은 팀이 강팀이라는 사실을 보였던 서독 대표팀은 90년 월드컵에서는 조별리그 첫 경기부터 결승전까지 4강을 제외한다면 시종일관 상대를 압도하며 그야말로 강팀, 무적의 팀이 무엇인가를 몸소 보여줬다. '압박축구' 전술의 유행으로 역대 최소득점으로 유명한 90년 월드컵에서 서독은 조별리그 1, 2차전에서 유고슬라비아와 아랍에미리트를 각각 4:1, 5:1로 대파하는 가공할 만한 공격력을 보이며 우승후보답게 조 1위로 손쉽게 16강에 올랐다. 16강에서는 또다른 우승후보 네덜란드와 리턴매치를 갖게 되었다. 1990년 월드컵의 명경기로 꼽힌 이 경기에서 양팀은 서독 국가가 연주될 때 네덜란드 관중들이 야유를 퍼부으면서 휘슬이 울리기도 전부터 과열되기 시작했다. 치열한 신경전을 벌이며 초반 팽팽한 경기를 이어갔다. 이 과정에서 프랑크 레이카르트가 돌파하던 루디 푈러를 발로 차 넘어뜨리면서 분위기가 험악해졌고 결국 둘은 동반 퇴장을 당했다. 레이카르트의 선제 도발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스트라이커가 퇴장당하게 된 서독은 이후 투지가 불붙었다. 특히 네덜란드 선수들의 도발로 흥분했던 푈러를 격하게 뜯어 말렸으나 결국 푈러가 퇴장당하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던 클린스만은 이후 격한 감정 표출을 하며 네덜란드 수비진을 농락하며 골문을 연이어 강타했다. 동반 퇴장 이후 서독 선수들이 전의를 불태운 반면 네덜란드는 급격히 무너지는 모습을 보였다. 서독이 네덜란드 진영에서 일방적인 경기를 펼친 끝에 위르겐 클린스만과 안드레아스 브레메의 연속골로 2:1 승리를 거두었다. 8강에서 체코슬로바키아를 1:0으로 꺾은 서독은 4강에서 게리 리네커의 잉글랜드를 맞아 쉽게 이길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방심했는지 다소 지쳤는지 이전과 다르게 잦은 실수를 하며 베컨바워 감독의 얼굴이 차갑게 굳기도 했다. 이 경기에서 잉글랜드의 강한 압박 전술을 제대로 공략하지 못하며 승부차기 끝에 결승에 올랐다. 결승전은 디에고 마라도나의 아르헨티나와의 리턴매치. 브라질, 이탈리아 등 우승후보들을 연이어 꺾으며 결승까지 올라온 아르헨티나는 토너먼트에서 수비 위주의 역습을 노리는 전략으로 승리해 결승까지 올라왔다. 결승전에서도 아르헨티나는 서독을 상대로 10백을 시전했다. 하지만 경기는 전반전 후반 한때 아르헨티나가 기회를 잡은 것을 제외하면 내내 서독이 몰아붙이는 일방적인 경기였다. 아르헨티나는 수비적인 전술로 임했지만 전혀 성공적이지 못했고 서독 선수들에게 숱한 돌파와 슈팅을 허용했으나 운좋게 실점하지 않으면서 아슬아슬한 경기를 이어갔다. 서독은 숱한 찬스를 만들며 슈팅을 날렸지만 문전 골결정력 부족으로 득점 기회를 번번히 날려버렸다. 후반이 되자 아르헨티나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고 결국 서독 선수들의 계속된 돌파를 거친 수비로 끊으며 연이은 퇴장을 당했다, 서독은 계속된 파상 공세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아르헨티나의 골문을 열지 못했으나 결국 안드레아스 브레메가 페널티킥을 성공시켜 세번째 월드컵 우승을 이루었다.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 우승은 특히 서독이 징크스를 안고 있던 적지에서의 우승이었던데다[27] 동독과의 통일 분위기가 한껏 조성된 상황에서 국민들의 기쁨을 배가시킨 우승이었다.[28] 주장인 중앙 미드필더 로타어 마테우스는 공수를 오가는 전천후 활약을 펼치며 4골을 넣어 득점 2위를 차지했고, 그해 발롱도르를 수상했다. 90 월드컵은 DFB가 '서독 대표팀'으로 출전한 마지막 대회이기도 하다. 대회가 끝난 후 베켄바워가 대표팀 감독직에서 물러나고 수석코치였던 베르티 포크츠가 후임 감독이 되었다.
2.8.1. 베르티 포크츠 감독
▲유로 1992 결승 덴마크전 선발 라인업(콜러, 일그너, 에펜베르크, 부흐발트, 헬머, 로이터, 리들레, 클린스만, 헤슬러, 브레메, 자머)
통일 이후 첫 국제 메이저 대회였던 유로 1992에서는 주장 마테우스가 부상으로 빠졌고, 대표팀의 3-5-2 전술에서 클린스만과 투톱을 이루었던 루디 푈러가 조별예선 첫 경기에서 부상을 당해 대회를 접는 등 전력 누수가 있었다. 본선 조별리그에서 스코틀랜드에게 2:0 승리, CIS에게 1:1 무승부, 네덜란드에게 1:3 패배로 불안하게 4강에 진출했으나, 스웨덴을 3:2로 이기고 결승에 진출했다. 그러나 이변의 팀 덴마크에 패하며 준우승에 그쳤다. 당초 푈러와 클린스만의 백업 공격수로 대표팀에 승선했던 카를하인츠 리들레는 조별리그 첫경기에서 푈러가 불의의 부상을 당하며 대회에서 아웃되자 이후 결승까지 주전으로 활약하며 대회 득점왕에 올랐다.
▲1994 월드컵 조별리그 한국전 선발 라인업(일그너, 콜러, 베어톨트, 자머, 에펜베르크, 부흐발트, 헤슬러, 브레메, 클린스만, 리들레, 마테우스)
1994년 미국 월드컵에서부터 독일의 쇠락이 눈에 띄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독일은 전대회 우승국의 명성에 걸맞지 않게 조별리그에서 시원찮은 경기력을 보였다. 약체 볼리비아에 1:0의 진땀승을 거두었고, 스페인전에서는 1:1 무승부, 그리고 대한민국과의 마지막 경기에서는 3:2로 한국에게 자칫하면 역전패할 뻔한 경기력을 보여주며 16강에 간신히 올랐다. 16강전에서는 벨기에를 만나 3:2로 꺾었지만, 8강전에서 불가리아에 1:2의 역전패를 당하는 수모를 당하고 8강에서 탈락한다.[29] 19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 4강 진출 실패의 충격 이후 16년 만의 일이었다.
94 월드컵에서의 부진은 세대교체 실패가 주원인으로 꼽힌다. 유로 92부터 칼-하인츠 리들레[30], 마티아스 자머, 슈테판 에펜베르크가 새로 대표팀에 승선했으나, 나머지 멤버는 모두 90년 월드컵 우승 멤버였다. 새로 합류한 리들레나 자머도 결코 적지 않은 나이였다. 게다가 대표팀에서 가장 어린 에펜베르크[31]는 조별예선 한국전에서 불미스런 일을 일으키고 대표팀에서 퇴출되었다.[32] 때문에 한국전 이후엔 백업 멤버 바그너[33]가 출전했지만 에펜베르크의 공백을 메꾸기엔 역부족이었다. 당시 독일 대표팀은 평균 31세가 넘는 94 월드컵 최고령팀이었다. 고령의 멤버들로 구성된 94 독일 대표팀은 엘니뇨로 인해 섭씨 36~39도에 달하는 기록적인 폭염으로 유명했던 94년 월드컵에서 체력적인 문제를 노출하면서 똥줄 경기력으로 일관했다.
▲유로 1996 결승전 체코전 선발 라인업(슈트룬츠, 자머, 바벨, 아일츠(46분 보데), 헤슬러, 헬머, 치게, 쿤츠, 숄(69분 비어호프), 클린스만, 쾨프케)
유로 1996에서는 로타어 마테우스가 빠지고 그를 대신한 새로운 리베로 마티아스 자머를 중심으로 공격진에는 백전노장 위르겐 클린스만과 중고신인 올리버 비어호프가 활약했다. 특히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던 선수였던 비어호프는 이 대회에서 맹활약하며 깜짝 스타로 떠올랐다. 결승전에서 체코의 베르게르가 페널티킥을 성공시키며 앞서나갔으나 교체 투입된 비어호프가 만회골을 넣어 동점을 만들었고, 연장전 전반 5분 비어호프가 극적인 역전 골든골을 넣으면서 2:1로 독일이 우승컵을 차지했다. 이로써 독일은 유로 대회 최다 우승의 기록을 세웠다.
▲1998 월드컵 8강 크로아티아전 선발 라인업(콜러, 하만, 타르나트, 하인리히, 비어호프, 뵈른스, 마테우스, 헤슬러, 예레미스, 클린스만(주장), 쾨프케)
1998년 프랑스 월드컵을 앞두고 당시 대표팀의 핵인 리베로 자머가 부상으로 대회에 출전할 수 없게 되자 대신 만37세의 노장 마테우스의 대표팀 승선이 결정되었다. 16강에서 멕시코에 2:1 승리를 거두는 등 그럭저럭 8강에 올라왔으나, 8강에서 독일은 크로아티아에 0:3으로 완패당했다.
이 경기에서 전반 막판에 뵈른스가 백태클 및 차징으로 다이렉트 퇴장당하는 역적질을 저지른 탓에 독일 수비에 구멍이 뚫리기 시작하여 결국 무너진게 컸지만, 이 경기에서 크로아티아는 딱딱하고 투박한 독일식 축구를 어떻게 해체하는지 잘 알고 있음을 제대로 보여줬다. 그리하여 독일은 크로아티아 특유의 독일 약점 공략전술과 다보르 슈케르, 크로아티아의 LTE급 역습에 그대로 털려 결국 KO되고 말았다. 이때 당시 크로아티아는 조별리그에서 최고 허접 자메이카에게도 패배한 일본을 상대로 하마터면 비길 뻔한 경기력을 보여주었다고는 해도 처녀 출전국치고는 1998 프랑스 월드컵 본선 최대 돌풍팀이었다.
이 경기 이후 당시의 크로아티아에게 당한 충격은 독일인들에게 거의 종말에다 나라잃은 슬픔에 가까운 충격을 줬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 독일은 크로아티아전 패배로 8강에서 탈락한 이후 독일 축구는 약 6년간 최악의 암흑기를 겪게 된다. 또 1994년 미국 월드컵 8강전에서 불가리아에 역전패를 당한 데 이어 1998년 프랑스 월드컵 8강 크로아티아전에서 대패를 당한 이후 독일은 한동안 동유럽 징크스, 동유럽 공포증에 시달리게 되었다. 또 여전히 고전적인 3백을 고집해 현대 전술사의 흐름에 뒤쳐졌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2.8.2. 에리히 리베크 감독
동유럽 징크스로 인해 연속된 월드컵 4강 진출에 실패하고 이후 몰타와의 평가전에서도 졸전을 벌이자 결국 포크츠 감독이 사임하고, 독일 축구 연맹은 에리히 리베크를 감독으로 선임한다.
이후 1999년 2월,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은 미국과의 평가전에서 처음으로 0:3의 완패를 당했고 1999년 7월, 컨페더레이션스컵에서 또 다시 미국에게 0:2의 패배를 당해 토너먼트에 진출하지 못하는 최악의 수모를 당한다. 미국과의 경기에서 2번 맞붙어서 0:3, 0:2로 패배한 것이다. 당시 올리버 칸에 옌스 레만, 로타어 마테우스까지 출전한 독일을 미국이 2번이나 맞붙어서 3:0, 2:0으로 밟아버림으로써 전차군단이라는 독일 축구의 명성에 최악의 수모를 안겨주었다. 경기 내용 상으로도 미국에 아무런 힘도 못쓰고 슛팅 한번 제대로 못하고 완패를 당하는 독일의 모습을 볼 수 있다.[34]
2.8.3. 암흑기?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 우승 후 그해 말에 독일은 드디어 염원이었던 통일을 이루었다. 통일 독일이 들어서면서 축구계에서는 월드 챔피언인 독일 대표팀이 기존의 서독 선수들은 물론 동독의 선수들까지 융합되면서 더욱 강해질 것이라는 전망이 많았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통일로 인한 경제적 침체와 지지부진한 세대교체로 이전만큼의 위용을 전혀 보여주지 못한다. 에리히 리베크의 암흑기로 대표되는 이 90년대 후반 ~ 2000년대 전반은 독일 대표팀에게 잃어버린 10년으로 비유할 수 있는 암흑기로, 당시 메이저 대회에서 기록한 성적들을 보면 이러하다.- 1990 FIFA 월드컵 이탈리아 - 우승
- 유로 1992 - 준우승
- 1994 FIFA 월드컵 미국 - 8강전에서 탈락
그 유명한 슈테판 에펜베르크의 법규가 시전된 대회였다. 그것도 무려 대한민국 국대 앞에서... 이후 독일은 그 법규를 시전한 에펜베르크를 추방시킨 상태로 토너먼트전을 치렀고, 16강에서 벨기에를 꺾었지만, 8강에서 불가리아한테 역전패를 당해 탈락하고 말았다. - 유로 1996 - 우승
-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 - 8강전에서 탈락
베르티 포크츠 당시 독일 감독이 "크로아티아 쯤이야 쨉도 안되는 나라다"라고 비웃기까지 했지만 막상 경기가 시작되자 수비의 핵인 크리스티안 뵈른스가 백태클에 차징까지 곁들인 비신사적인 반칙으로 다이렉트 레드카드를 받으며 수적 열세가 되었고 결국 0:3이라는 끔찍한 대패를 당해 탈락하고 말았다. 이에 포크츠 감독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고 이후 얼마 못가 감독직에서 물러나고 말았다. - 유로 2000 - 조별리그 탈락
-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 준우승
- 유로 2004 - 조별리그 탈락
- 2006년 월드컵 이후 암흑기 종료. FIFA 월드컵, UEFA 유러피언 챔피언십 6대회 연속 4강 이상 진출
1990년대에는 계속 하락세를 걸었기 때문에 녹슨 전차군단이라는 오명을 썼다. 마테우스가 부상으로 빠지고 마티아스 자머의 하드캐리해서 유로 1996을 우승해 통일 독일 최초로 메이저 대회를 우승하긴 했지만 1994, 1998 월드컵과 유로 2000, 2004에서 계속된 부진으로 이런 비아냥을 계속해서 들어야 했다. 가장 큰 이유는 통일로 인한 막대한 경제적 부담으로 인한 재정 상황의 악화로 분데스리가 내 대형선수들이 유출되고, 분데스리가가 상업적으로 저평가되어있어 해외 중계가 덜 되기 때문에 자국민들 빼고는 메이저 대회가 열리기 전까지 사람들의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암흑기 시절 동안 메이저 대회 직전마다 뛰어난 자원들이 자꾸 부상에 시달리는 고질적인 비극이 매 대회 계속됐는데, 바이에른 뮌헨의 전설적인 테크니션이자 전차군단 공격의 선봉격인 메멧 숄은 잦은 부상으로 유로 2000을 제외하면 메이저 대회에 제대로 출전한 적이 없다. 유로 2000에서 20세의 나이로 대표팀에 발탁된 제바스티안 다이슬러는 천재적인 플레이로 세계를 놀라게 하며 독일 최고의 재능이라는 찬사를 받았으나, 이 대회 이후 선수 커리어 내내 너무나 잦은 부상으로 우울증에 걸려 정신병 치료까지 받았으며, 결국 27세라는 한창 나이에 은퇴하고 말았다. 이리하여 유로 2000은 다이슬러가 참여한 처음이자 마지막 메이저 대회가 되고 말았다. 올리버 칸, 메멧 숄과 더불어 90년대 말 ~ 2000년대 초 바이에른 뮌헨의 전성기를 이끈 굴지의 중원사령관 슈테판 에펜베르크는 그 특유의 성깔머리로 대표팀 막내 시절인 1994년 월드컵 한국전에서 F*ck 사건으로 대표팀에서 영구 퇴출되어 이후 단 한 차례도 대표팀에 소집되지 못했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을 앞두고는 도르트문트의 전설적인 리베로이자 당시 독일 대표팀 전술의 핵인 마티아스 자머가 부상당하여 40세를 눈앞에 둔 노장 로타어 마테우스를 써야만 하는 상황까지 이어졌다. 이처럼 주전급 선수들의 줄부상에 독일인들은 눈물을 흘렸는데, 당시의 독일에 노장 선수들의 뒤를 이을 후배들이 없다시피 했던 역사들도 큰 몫을(?) 했다.
잘 거론되지 않지만, 독일 대표팀의 암흑기는 능력 있는 지도자의 부재도 한 몫 했다. 암흑기의 시발점이 된 시점의 감독인 베르티 포크츠는 유로 96 우승으로 명장 소리도 듣기도 했지만, 3백을 고수하는 등 전반적으로 감독으로서의 역량이 뛰어나지는 않았다고 보는 시각이 많다. 게다가 마테우스, 클린스만, 에펜베르크 등 자존심 강한 선수들이 즐비한 독일 대표팀에서 전임 감독 베켄바워보다 선수 장악력이 크게 떨어진다는 지적도 받았다. 실제로 90년대 당시 독일 대표팀 선수들이 감독인 포크츠의 지도력에 불만을 갖고 마테우스를 더 따른다는 사실이 기사화되기도 하는 등 포크츠의 지도력과 선수 장악력은 줄기차게 구설수에 올랐다. 이는 조직력을 장점으로 하던 독일 대표팀에게는 치명적일 수 밖에 없었다. 문제는 포크츠 정도의 능력과 커리어를 지닌 감독조차 당시 독일에는 없었다는 것. 포크츠가 저조한 성적 때문에 번번히 경질설에 시달리면서도 98년까지 장기집권한 것도 사실 포크츠를 대체할 만한 마땅한 감독 후보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포크츠의 후임 독일 대표팀 감독을 선출할 때도 심각한 인물난을 겪어서 감독으로서 실패에 가까운 커리어를 갖고 있던 울리 슈틸리케가 유력하게 거론될 정도였다. 그나마 막판에 뒤집혀서 에리히 리베크가 감독으로, 슈틸리케가 수석 코치로 부임하게 되었지만, 리베크 역시 전형적인 분데스리가 중하위권팀 감독이었다. 리베크의 후임인 루디 푈러 역시 지도자 경력이 없는 상태에서 독일 대표팀 사령탑으로 부임했다. 푈러의 후임인 클린스만도 마찬가지. 어쨌거나 요아힘 뢰프라는 걸출한 수석코치가 있었던 클린스만 시대에야 비로소 암흑기가 끝났고, 클린스만의 뒤를 이은 뢰프는 2021년까지 장기집권하였다.
부수적으로, 암흑기 시절에는 팀웍도 좋지 않았다. 사실 독일 대표팀은 과거에도 기술적으로는 세계 최고라 할 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랜 기간 강호로 군림해온 것은 특유의 팀웍과 조직력 덕분이었다. 그런데 90년대 암흑기에는 독일 대표팀의 가장 큰 장점인 팀웍에서도 문제를 노출했다. 무엇보다도 이전과 달리 감독 및 코칭스태프를 존중하지 않는 분위기가 선수단에 팽배했다. 과거의 명감독들에 비해 카리스마가 부족한 포크츠가 대표팀 감독이 되면서 선수들이 감독의 지시를 따르지 않는다는 기사가 주기적으로 올라왔다. 후임 리베크 감독 시절에는 더욱 심해져서 훈련시간에 선수들이 수석코치 울리 슈틸리케를 비웃는 기사가 국내에까지 소개될 정도로 막장 분위기를 보였다. 80년대 이전에는 지도자들이 뛰어난 커리어를 가진 카리스마적인 지도자였던 탓도 있으나 이 시절에는 분데스리가에 워낙 뛰어난 선수들이 많았기 때문에 당시에는 뛰어난 선수들이 대표팀 승선을 위해 엄청나게 경쟁했으며 대표팀 훈련장에 와서는 감독과 코칭스태프들에게 인정받고 눈도장 찍기 위해 헌신적인 자세로 훈련에 임했다. 하지만 분데스리가의 암흑기인 90년대에는 세대 교체를 하고 싶어도 그럴만한 젊은 인재들이 없어 어쩔 수 없이 노장들만 계속 반복해서 대표팀에 승선하게 되었는데, 나이도 많고 대표팀 경력도 많고 대체 자원도 없다는 것을 잘 아는 노장들이 코칭스태프에게 고분고분하지 않게 되었던 것이다. 세대교체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노장들이 이런 태도를 보이니 대표팀 경력이 짧은 젊은 선수들도 곧 마찬가지 태도를 보였다.
3. 21세기
3.1. 2000년대
(유로 2000에서 포르투갈에게 0:3으로 패배를 당했던 경기 장면)
유로 2000은 독일 대표팀 역대 최악의 대회라 부를만 하다. 독일은 조별리그에서 꼴지인 4위를 차지하며 탈락하고 말았다. 독일은 톱시드로 A조에 배정됐다. 그러나 조별리그 첫경기인 루마니아전에서 1-1로 비기며 불안하게 시작하더니, 두번째 경기인 잉글랜드전에서 앨런 시어러의 골로 0-1로 패하고 말았다. 이날 패배는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 결승에서 석연찮은 판정으로 잉글랜드가 우승한 이후 처음으로 독일이 A매치에서 잉글랜드에 패한 경기였다. 그리고 조별리그 마지막 경기에서 포르투갈의 세르지우 콘세이상에게 해트트릭을 얻어 맞으면서 0:3으로 참패하여 1무 2패로 A조 최하위로 탈락했다.[35]
3.1.1. 루디 푈러 감독
위의 유로 2000 성적을 이유로 대표팀 감독이 교체된다.2002년 월드컵 유럽지역예선에서는 뮌헨 홈구장에서 잉글랜드에게 1:5로 대역전패하는 망신을 당해 월드컵 본선진출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에 직면했다. 1930년대 오스트리아전 이래 독일 국가대표 홈경기에서 70년 동안 최고실점 경기였다.[36][37][38] 이날 대패하기 전까지 26년 동안 잉글랜드를 비롯한 영연방국가의 대표팀이 독일 대표팀을 이긴 적은 단 두번밖에 없을 정도로 독일은 압도적인 우위를 보이고 있었다. 잉글랜드에게 1:5로 역전당한 것도 충격이지만 마이클 오언 단 한사람에게 철저하게 농락당한 것은 더더욱 충격이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본선에서 독일은 준우승을 차지했고, 잉글랜드는 8강에서 브라질에게 발목이 잡혀 탈락했다.) 물론 이때 독일은 승점 3점 차로 조1위였고 잉글랜드는 월드컵에 나가기 위해 반드시 독일을 꺾어야 한다는 동기부여가 있기는 했다. 아무튼 이 경기 이후 상황은 뒤바뀌어 독일이 월드컵 진출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이후 독일은 플레이오프에서 우크라이나와의 1차전에서도 0:1로 끌려간 상황에서 미하엘 발락이라는 구세주가 나타나 동점골을 터뜨려 간신히 무승부로 이끌고 2차전에서도 홀로 두 골이나 뽑아내는 원맨쇼로 이겨서 2002 한일 월드컵 본선에 겨우 진출한다.
2018년의 그 일이 터지기 전까지 독일 축구 역사상 최악의 경기로 폭력사태까지 터진 독일과 카메룬의 경기장면이다.
2002 한일 월드컵에서는 메멧 숄이 부상으로 쓰러지고 독일의 기대주였던 차세대 테크니션 제바스티안 다이슬러도 부상, 거기에 레버쿠젠 3연준의 주역인 수비의 핵 옌스 노보트니마저 쓰러지는 악조건에서도 준우승이라는 성적을 거뒀다. 그러나 대진운에서 행운이 따라준데다가 올리버 칸이라는 전설적인 골키퍼와 위기때마다 터져준 미하엘 발락의 한방 그리고 쓰리백의 안정적인 수비 활약으로 가능했다. 조별예선 첫번째 경기 사우디아라비아 전에서는 8:0의 기록적인 대승을 거두었다. 그리고 카메룬의 조별예선 마지막 경기에서 독일이 2:0의 승리를 거두었는데 양팀 퇴장 1명씩, 경고 6명을 받은 최악의 혈전이었다.[39] 독일은 카메룬에 승리를 거두고 16강에 진출했으나 주심의 카드남발이 심했다 쳐도 너무 거친 경기였다.[40]
[41] 이후 독일은 토너먼트에서 다시는 못 올 꿀대진을 받았다. 16강 상대는 당시 남미 예선을 4등으로 겨우 통과했던 파라과이였다. 그런데 독일은 파라과이를 상대로 졸전 끝에 경기 막판에 터진 올리버 뇌빌의 결승골로 1 : 0 승리를 거두며 8강에 올랐다. 8강 상대는 미국이었는데 독일은 미국을 상대로도 고전을 면치 못하고 미하엘 발락의 결승골로 간신히 1 : 0 승리를 거두었다.
4강 상대는 포르투갈, 이탈리아, 스페인 등 그 대회 우승후보들로 거론된 팀들과 연달아 씨름을 하느라 지쳐서 기진맥진한 개최국 대한민국이었다. 독일은 이 지칠대로 지친 대한민국을 상대로도 역시 고전하다가 미하엘 발락의 결승골로 간신히 1 : 0 승리를 거두었다. 결승전 상대는 역시 지역예선에서 6번이나 패배할 정도로 비실거렸던 브라질이었다. 독일은 브라질에 0 : 2로 패배하며 준우승에 그쳤다. 물론 2002년의 준우승은 16강전 및 토너먼트에서 축구계에서 강호로 인정받는 팀을 만나지 않은 최상의 대진운 탓이 크다고 말하지만 독일에게는 기대 이상의 실적을 올린 것이다.
2002 한일 월드컵 결승전 독일과 브라질의 결승전에서 베를린에서 독일인들의 독일 대표팀 응원 모습이다. 결승전에서 0:2로 브라질에 패배했으나 독일인들은 독일의 예상밖의 월드컵 준우승이라는 성적을 얻으며 독일인들로 하여금 4년간 최악의 암흑기를 겪은 자국 축구에 대한 희망을 얻게 해준 대회였다.
그러나 이 후 프랑스와의 친선경기에서 0-3 완패, 헝가리와의 경기에서도 0-2로 패하더니, 4월달에 열린 루마니아와의 UEFA 유로 2004를 앞둔 마지막 평가전에서 무려 1-5 대패를 당하면서 2002년 이전으로 리셋이 되어버렸고, 자국에서는 아예 유로대회에 불참하는 것이 좋겠다라는 맹비난을 들어야만 했다.[42]
결국 UEFA 유로 2004에서 독일은 조별리그에서 탈락했다. 조별리그 첫 경기인 네덜란드전에서 1:1로 비길 때까지만 해도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약체 라트비아전에서 9백 수비를 뚫지 못하고 0:0으로 비기고 말았다. 그리고 반드시 승리가 필요했던 체코와의 3차전에서 독일은 90년대 바이에른 뮌헨이 재현한 5-4-1 포지션까지 꺼내들면서 마지막 발악을 하지만 결국 체코에 1:2로 패하면서 조3위로 조별리그에서 탈락하고 말았다.
사실 이 시기 루디 푈러감독이 무작정 쓰리백만 고집했던건 아니었다. 당시 독일도 4-4-2나 4-2-3-1[43] 포메이션을 정착하기 위해 애를 썼다. 플레이메이커에 메멧 숄, 혹은 세바스티안 다이슬러로 두고 좌우에 올리버 노이빌레, 베른트 슈나이더, 혹은 토르스텐 프링스를 두며, 더블 볼란치에 미하엘 발락과 프랑크 바우만 혹은 파비안 에른스트와 세바스티안 켈, 시몬 치우머를 배치시키고, 풀백에 마르코 레머, 옌스 노보트니, 크리스토프 메첼더, 외르크 뵈메 혹은 토르스텐 프링스를 배치시키면 됐었다. 하지만 숄과 다이슬러, 노보트니는 유리몸이였고 레흐머와 뵈메는 미카엘 타르나트과 마르코 보데만큼의 클래스를 보여주질 못했다. 즉 플레이메이커는 없고, 풀백들은 엉망이니, 그렇다고 4-4-2를 쓰자니, 발락의 파트너로 굳게 믿었던 바우만과 치우머, 에른스트는 국대에만 오면 호러쇼를 보여주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적어도 2006년 슈바인슈타이거, 메르테자커등 영건들이 성장하기 전까지 모든 팀의 코어를 발락 1명에게 몰빵할 수 밖에 없었다. 토르스텐 프링스의 경우 알다시피 풀백자원의 고갈로 불가피하게 풀백에 배치되면서 발락과의 중원호흡을 2006년 월드컵 이전까지 맞추질 못했다.
독일 국가 대표팀이 암흑기를 겪는 동안 분데스리가 클럽들은 적어도 2002년도까지 어느정도 경쟁력을 보여주었다. 통일로 인한 경제난으로 분데스리가의 위상이 과거보다는 떨어졌지만 1995-96 UEFA컵을 우승한 FC 바이에른 뮌헨, 1996-97 시즌에는 보루시아 도르트문트가 무려 UEFA 챔피언스 리그를 우승하고 FC 샬케 04가 UEFA 컵을 들어올리는 등 활약을 이어갔다. 바이에른 뮌헨은 1998-99 시즌 챔스 준우승[44], 2000-01 시즌 챔스 우승을 달성했고 바이어 04 레버쿠젠도 2001-02 챔스 준우승의 쾌거를 올리는 등 독일 클럽들도 결코 몰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2002-03 챔피언스리그에서 바이에른 뮌헨의 광탈에, 16강에 간 레버쿠젠도 8강 진출에 실패하면서 불안감을 보이더니 2003-04 시즌 도르트문트의 챔스 탈락, 그리고 UEFA컵에서도 샬케와 동반 조기탈락에, 바이에른 뮌헨과 슈투트가르트도 16강에 그치면서 이 시기 UEFA 랭킹 포인트를 달랑 2점밖에 받지 못했다. 2004-2005 시즌엔 레버쿠젠, 브레멘, 뮌헨이 모두 16강을 돌파했지만 레버쿠젠은 첼시에게 완패당하고 브레멘은 리옹에게 2-10으로 학살당하면서 결국 바이에른 뮌헨만 아스날을 잡고 8강에 진출하지만 뮌헨마져 첼시에 4-5로 패배하면서 또 다시 4강진출에 실패, UEFA컵에서는 도무지 힘을 쓰지 못했고, 05-06시즌에 UCL에선 아예 세리에A클럽에게 학살당하면서 또 16강에서 탈락. 그나마 샬케가 UEFA컵에서 4강까지 갔지만 세비아에게 0-1로 패하면서 2006년 말까지 분데스리가는 프랑스 리그앙에게도 포인트가 밀리며 5위까지 추락하게 되었다. 이러한 암흑시대는 2000년대 독일의 유망주 정책이 08-09시즌 서서히 빛을 보면서 다시 경쟁력을 갖추게 되고 09-10시즌 리그 랭킹 포인트 점수 1위를 기록하면서 동시에 다시 부활한 국대와 같이 암흑기를 끝내게 된다.
1990년대 말부터 시작된 암흑기 시기 동안 독일 축구협회는 독일 축구를 근본적으로 개혁할 필요성을 느끼고 유소년 축구에 대대적인 투자를 감행했다. 그 결과 독일은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유소년 축구 시스템을 갖췄다는 평을 받는다. 유소년 정책이 결실을 보기 시작한 것은 2000년대 후반부터다.
3.1.2. 위르겐 클린스만 감독
UEFA 유로 2004에서 형편없는 경기력으로 조별예선에서 탈락하자 독일 축구협회는 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했고 루디 푈러 감독 역시 전술면에서 여러 비판을 받아왔었던 만큼 결국 독일 축구협회의 뜻을 받아들이며 사임했다. 루디 푈러의 뒤를 이을 감독으로는 위르겐 클린스만이 내정되었다. 클린스만 감독은 당시 부진했던 대표팀에 대한 비판적인 여론을 등에 업고 적극적인 개혁을 추진했는데, 당시에는 다소 생뚱맞게 비춰졌던 부분도 있어서 언론이나 축구협회와 다소 마찰을 빚기도 했다. 그러나 개혁의 필요성에는 다들 공감하는 분위기라 결국 일단 클린스만이 하는대로 내버려 둬 보자 하는 분위기로 흘러갔다.클린스만은 필립 람, 바스티안 슈바인슈타이거, 루카스 포돌스키, 페어 메르테자커 등 젊은 피를 대거 주전으로 발탁하여 적극적으로 세대교체에 나섰다.[45] 2004년에는 아시아 원정을 통해 신예들을 시험하기도 했다. 클린스만호가 본격적으로 선보인 것은 2005년 컨페더레이션스컵에서 였다. 독일은 4강에서 호나우지뉴, 호비뉴, 아드리아누 등이 활약한 브라질에 2:3으로 석패하면서 3위에 그쳤지만, 신예 멤버들과 기존 멤버들이 조화를 이루며 골고루 활약하면서 기대감을 가지게 했다.
결국 2006 독일 월드컵에서 3위에 오르면서 부활에 성공했다. 이로써 녹슨 전차는 12년 후의 그 일이 일어나기 전까지 옛말이 되었다. 자국에서 열린 월드컵에서 독일은 조별 리그에서 3승 무패를 거두고 조 1위로 16강에 올랐다. 16강전에서는 스웨덴을 2:0으로 가볍게 꺾고 8강에 올랐다. 8강에서는 우승후보 아르헨티나와 격돌했는데, 양팀은 승부차기까지 가는 팽팽한 경기를 벌였고, 독일이 4강에 진출했다. 4강에서는 숙적 이탈리아와 대결을 벌였다. 2006 이탈리아 대표팀은 역대 이탈리아 대표팀 중 거의 최약체로 꼽히는 팀이었다. 월드컵 직전 평가전에서도 졸전을 펼치며 연패하는 등 심각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월드컵 개막 직전 세리아A 승부조작 스캔들이 터지며 이탈리아 대표팀은 최악의 상황에서 월드컵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러나 승부조작 스캔들로 궁지에 몰린 이탈리아 대표팀은 코너에 몰린 쥐처럼 초인적인 힘을 내며 예상외의 선전을 펼치고 있었다. 4강전은 독일과 이탈리아의 팽팽한 접전이었다. 이탈리아는 이번 월드컵에서 죽기살기로 경기에 임하고 있었다. 승부는 연장전이 거의 끝나갈 때까지 가려지지 않았고, 승부차기에 엄청나게 강했던 독일은 연장전 막판에 내심 승부차기를 반기는 분위기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독일이 승부차기에 강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이탈리아는 오히려 막판에 매섭게 몰아쳤고, 연장전 종료가 다가오면서 집중력이 흐트러진 독일 대표팀의 수비를 뚫고 파비오 그로소가 선제골을 넣었다. 이후 추가시간을 포함해 남은 약 2분의 시간동안 독일은 동점을 위한 총력전에 나섰지만 오히려 이탈리아의 역습을 허용하여 알레산드로 델 피에로가 추가골을 넣으며 결국 0:2로 패배해 3·4위전으로 내려앉고 말았다. 3·4위전에서는 신예 바스티안 슈바인슈타이거의 맹활약으로 포르투갈을 3:1로 이기고 최종순위 3위로 대회를 마쳤다. 젊은 선수들 위주로 구성된 2006 독일 대표팀은 월드컵에서 좋은 경기력을 보였고, 특히 루카스 포돌스키, 바스티안 슈바인슈타이거 등 신예들이 기대 이상의 뛰어난 활약을 펼치며 대표팀의 앞날을 기대하게 만들었다.
3.1.3. 요아힘 뢰프호
독일 월드컵이 마무리되고 클린스만이 스스로 감독직에서 물러나자 후임으로 수석코치였던 요아힘 뢰프가 감독으로 승격된다. 클린스만 체제에서도 전술 부분은 뢰프가 맡아왔었다고 한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16년이라는 기나긴 뢰프 감독의 시기가 진행된다.UEFA 유로 2008에서는 준우승에 머물렀다. 이 대회에서는 그동안 대표팀의 주축이었던 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가 다소 노쇠한 모습을 보이면서 2006 월드컵 때보다 저조한 활약을 보였으나, 미하엘 발락과 필립 람이 건재하고, 2006 월드컵에서 맹활약하며 앞으로 독일 대표팀을 이끌어갈 차세대 스타로 주목받은 루카스 포돌스키와 바스티안 슈바인슈타이거가 날라다니며 독일을 토너먼트에서 캐리하였다. 독일 대표팀은 조별리그에서 폴란드와 개최국 오스트리아를 제압했으나 크로아티아에 발목을 잡히며 조2위로 토너먼트에 진출했다. 8강과 4강에서 각각 초절정의 흐름을 타고 있던 호날두의 포르투갈과 터키를 3대2로 제압하며 저력을 보여주었고, 결승까지 올라갔지만, 스페인의 티키타카를 만나 너무 무기력한 모습으로 준우승에 머물고 말았다. 특히 절정의 세트플레이 감각을 보이던 클로제와 슈바인슈타이거가 결승에서 몇차례 세트플레이찬스를 어처구니없이 날려버렸고 교체멤버 케빈 쿠라니는 삽질의 끝판을 보여주며 모처럼의 메이저대회 우승 기회를 날리고 말았다.
2006년 월드컵에서 세대교체에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았던 독일이지만, 이후에도 세대교체는 계속되어 2010년 남아공 월드컵을 앞두고 대표팀에서 새로운 얼굴들이 대거 등장했다. 특히 2009년 U-21 우승멤버들이 대거 투입되었는데, 토마스 뮐러, 메수트 외질, 사미 케디라, 제롬 보아텡, 마누엘 노이어가 그들이다.[46] 특히 메수트 외질과 토마스 뮐러는 월드컵에서 맹활약을 펼치며 남아공 월드컵이 배출한 최고의 스타로 떠올랐다. 사실 이들 젊은피들은 대표팀에서 검증된 자원이 아니었고 독일 국내에서도 별로 알려지지 않은 신예들이었다. 독일 국내에서도 이들 신예들에 대한 기대가 크지는 않았고, 그보다 월드컵 개막 직전에 대표팀의 정신적 지주 미하엘 발락이 부상으로 제외되면서 대표팀 경기력에 우려의 목소리가 컸던 상황이었다. 그러나 대회가 시작되자 이들 영건들의 활약으로 독일은 놀라운 경기력을 보였고 이에 대표팀에 필수불가결한 존재로 여겨졌던 발락은 조용히 대표팀 은퇴 수순으로 접어들었다.
3.2. 2010년대
2010 남아공 월드컵 본선 조별라운드 1차전에서 독일은 호주를 4 : 0으로 이기면서 우승후보의 위력을 보이나 했더니 세르비아전에서 미로슬라프 클로제가 경고누적으로 퇴장당하고 경기가 급격히 기울면서 세르비아에 0 : 1로 패배하는 이변이 연출되었다. 그러나 마지막 3차전에서 가나를 상대로 고전 끝에 메수트 외질의 결승골로 1 : 0 신승을 거두고 2승 1패의 전적으로 조 1위로 16강에 진출했다. 16강에서는 잉글랜드를 4 : 1로 대파하며 뮌헨에서 당했던 1 : 5 굴욕을 9년만에 철저하게 갚아주었다.[47] 8강전에서는 리오넬 메시, 곤살로 이과인, 카를로스 테베즈, 앙헬 디 마리아 등 호화진용을 구축한 디에고 마라도나 감독의 아르헨티나와 격돌했다. 박빙의 승부가 될 것으로 예측되었으나 뚜껑을 열어보자 독일이 충격적일 정도의 압도적인 경기력으로 4 : 0의 압승을 거두면서 독일은 대회에서 가장 강력한 우승후보로 떠올랐다.[48] 그러나 4강 스페인전에서는 토마스 뮐러가 경고누적으로 출전하지 못했는데 4강전에서 뮐러의 공백은 컸다. 또 16강전과 8강전에서 독일이 보여준 가공할만한 역습 패턴에 대해 철저히 분석하고 나온 스페인이 강한 전방압박과 특유의 점유율 축구로 독일의 역습을 사전에 차단하는데 성공했고, 결국 독일은 스페인에 0 : 1로 졌다. 즉, 독일은 스페인의 카를레스 푸욜에게 결승골을 내주고 결승 진출에 실패한 것이다. 독일을 이긴 스페인은 남아공 월드컵에서 우승하고 독일은 3위 결정전에서 우루과이를 맞아 3 : 2 승리를 거두고 3위로 대회를 마감했다.[49]2014 브라질 월드컵 지역예선에선 오스트리아, 스웨덴, 카자흐스탄, 아일랜드, 페로 제도랑 같은 조를 이뤄서 쉽게 본선진출을 이룰 것으로 예측되었고, 안방에서 4 : 0으로 앞서다가 연달아 4골을 먹히며 비긴 스웨덴 경기를 빼고 전승하면서 결국 최종예선 결과 9승 1무로 압도적인 1위로 본선 진출 확정했다.[50]
2014 브라질 월드컵에선 포르투갈, 가나, 미국과 함께 죽음의 조인 G조에 속했다. 독일의 조별리그 1차전 상대는 크리스티아누 호날두가 버티던 포르투갈이었다. 상당히 어려운 경기가 될 것이란 예측과 달리 결과는 매우 싱거웠다. 토마스 뮐러의 해트트릭을 앞세워 독일이 4 : 0 대승을 거두었다.[51] 그러나 2차전 가나와의 경기에선 매우 고전했으며 하마터면 질 뻔했다가 간신히 2 : 2 무승부를 거두었다. 3차전 미국과의 경기에서도 독일은 우세한 볼 점유율을 바탕으로 시종일관 공격적으로 밀어붙였으나 의외로 골을 넣지 못했고 후반전에 터진 토마스 뮐러의 결승골로 1 : 0 신승을 거두며 2승 1무의 전적으로 조 1위로 16강에 진출했다.
16강 상대는 바로 32년 전 히혼의 수치라는 악연으로 얽힌 북아프리카의 알제리였다. 수비의 핵인 마츠 후멜스의 결장과 요아힘 뢰프의 괴상하기 짝이 없는 '포터백'[52] 전술 그리고 슈코드란 무스타피의 희대의 민폐 플레이 때문에 알제리를 상대로 고전을 면치 못했다. 그렇게 90분을 하염없이 0 : 0으로 보냈다가 연장전에 간신히 안드레 쉬얼레와 메수트 외질의 골을 앞세워 2 : 1 신승을 거두고 8강에 올랐다. 그리고 8강 상대는 라이벌인 프랑스였다. 독일은 프랑스를 맞아 전반 13분에 터진 마츠 후멜스의 헤더골을 끝까지 잘 지켜 1 : 0 승리를 거두고 4회 연속 4강 진출에 성공했다.
4강 상대는 바로 개최국인 브라질이었다. 2002년 대회 결승전에서 맞붙은 후 12년 만에 재회한 두 팀. 누가 이길지 예측불허인 경기로 예상되었고 승부차기까지 갈 수도 있다는 예측이 지배적이었으나 브라질을 상대로 무려 7 : 1이라는 믿을 수 없는 스코어로 대승리를 했다. 독일이 득점을 너무 많이 하자, 차범근조차 독일이 골을 그만 넣었으면 좋겠다고 몇 번이나 말할 정도였다. 12년 만에 결승진출에 성공한 독일은 리오넬 메시가 이끄는 아르헨티나에 1 : 0 승리를 거두고 마침내 통일 이후 처음으로 월드컵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우승의 주역은 토마스 뮐러, 마누엘 노이어, 안드레 쉬를레, 필립 람, 마리오 괴체 등.
2014 브라질 월드컵 우승 |
독일이 UEFA 유로 1996 우승 이후 침체기를 겪다가 2006 독일 월드컵을 기점으로 암흑기에 벗어나 다시 강호로 거듭났다는 평가를 받고는 있지만, 2014 브라질 월드컵 전까지 18년동안 독일에 국제대회에서의 우승실적이 없었기 때문에 절대강자 수준이라 보기 힘들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4강까지 올라가는 횟수는 많지만 우승은 18년동안 없었다는 것. 이러한 점으로 인하여 독일은 유로 1996을 기점으로 우승으로 가는 길목의 수문장으로 전락하고 말았다는 평가도 받았다. 결국 2014년 월드컵 우승을 차지하고 세계축구 정상의 자리를 탈환하면서 이러한 오명을 벗는데 성공했다.
2014년 10월 11일 유로 2016 예선 2차전 폴란드와의 원정 경기에서, 0대2 패배를 당하였다. 이 패배는 독일과 폴란드가 맞붙기 시작한 1933년 이래 독일의 첫 패배. 이전까지는 12승 6무라는 압도적인 상대전적이었으나 1패가 추가되었다.
2016년 3월 26일 올림피아슈타디온 베를린에서 벌어진 독일과 잉글랜드와의 친선전에서 2:3으로 독일이 역전패했다. 독일은 전반 43분께 토니 크로스의 선제골과 후반 12분 사미 케디라의 패스를 마리오 고메스가 골로 연결시켜 2:0으로 앞서나갔다. 이에 잉글랜드는 후반 16분 해리 케인의 추격골을 시작으로 후반 29분 제이미 바디가 동점골을, 그리고 경기종료를 앞두고 추가된 시간에 에릭 다이어가 역전골로 잉글랜드에 승리를 안겼다. 친선전이라고는 해도 독일로서는 불쾌한 패배이기도 한데 공교롭게도 이게 1970 FIFA 월드컵 멕시코 8강전과 비슷한 상황이었다는 점이다. 당시에는 독일이 0:2로 뒤지던 상황에서 프란츠 베켄바워의 추격골, 우베 젤러의 동점골, 그리고 연장전에서 터진 게르트 뮐러의 역전골로 3:2로 이겼었는데 이번에는 상황이 바뀌어 독일이 2:0으로 이기고 있던 경기를 잉글랜드가 뒤집었다는 것이고 그리고 결승골이 연장전이 아닌 경기종료 직전의 추가시간 상황에서 나왔다는 점이다. 요아힘 뢰프 감독으로서는 UEFA 유로 2016을 앞두고 예방주사를 맞은 것이나 다름없을테지만 전차군단으로서는 다시 한번 방심해서는 안되는 이유가 하나 더 늘었다.
2016년 3월 29일에 있었던 이탈리아와의 평가전에서 무려 4:1이란 스코어로 승리했다. 21년 만에 아주리 징크스를 격파했다.[53] 그리고 마침내 7월 3일에 열린 유로 2016 8강전에서 천적 이탈리아를 승부차기 끝에 6:5로 제압하고 4강에 올랐다. 그간 토너먼트에서 이탈리아만 만나면 짐을 싸야 했던 독일로서는 비록 공식기록은 무승부이긴 하지만 메이저대회에서 처음으로 이탈리아를 넘어선 것이기에 그 의미는 남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경기에서 사미 케디라와 마리오 고메즈의 부상, 마츠 후멜스의 경고누적 등 전력의 누수가 생겼고 결국 4강전에서 프랑스에게 0:2[54]로 패배하며 결승 진출에 실패하고 만다. 사족으로 독일은 58년 월드컵 4강-66년 월드컵 결승전 이후 월드컵-유로 대회에서 개최국에게 진 적이 없었는데 이번 대회에서 50년만에 홈팀에게 무너지는 결말을 맞이하고 말았다.
브라질 월드컵 우승팀 자격으로 2017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 러시아에 출전하게 되었지만, 정작 독일 내에서는 그다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축협이나 감독이나 이번 대회는 당장의 성적이 아닌 미래의 재능 양성을 위해 쓴다고 공포했고, 심지어 컨페드컵 폐지론마저 나돌았던 상황. 그리고 진짜로 선수 명단을 제출했을 땐 선수 평균 연령이 무려 약 23세에 A매치 출전 경험도 약 17경기인 파격적인 스쿼드를 발표했다. 당연히 FIFA는 대회의 질을 떨어뜨린다니 무시한다니 반응이 상당히 부정적이었으나...독일은 이를 비웃듯 호주와 카메룬을 상대로 각각 3득점씩 올리며 2승을 챙겼고, 강호 칠레와도 대등한 경기력을 보이며 2승 1무로 조 1위를 거머쥐었다. 4강에서는 멕시코를 상대로 4:1 대승을 거두며 결승에 무난히 안착했고, 다시 만난 칠레에게 고전하는 듯 했으나 행운의 선제골[55]을 넣고 효율적인 지역방어와 역습 위주의 경기를 펼치며 1:0으로 승리, 조국 최초의 컨페더레이션스컵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독일 입장에서는 성적과 실험 모두 대성공을 거둔 셈이다.
2017년 10월 9일 아제르바이잔전을 마지막으로 러시아 월드컵 예선 C조에서 10전 전승으로 마무리하며 가볍게 월드컵 본선에 진출했다.[56]
그런데...
3.2.1. 최악의 암흑기(2018~2023)
이 당시는 전반적으로 필립 람이 팀에 차지하는 지분이 절반 이상인, 이른바 몰빵된 팀이었다. 때문에 람이 뛰면 일부(천적인 이탈리아나 급부상한 스페인)를 제외하고는 승승장구하는 팀이었으나 그가 빠지자 이런저런 비주류 팀들에게 쳐발렸다. 필립 람 대신 바스티안 슈바인슈타이거가 주장 완장을 차고 뛴 유로 2016 지역예선에서는 폴란드 축구 국가대표팀에게 0 : 2로 패배하던데 이어 아일랜드 축구 국가대표팀과의 경기를 0 : 1, 1 : 1 로 끝내 아일랜드를 이겨보지 못하고 예선을 마무리했으며 이후 2018년 러시아 월드컵에서는 멕시코 축구 국가대표팀에게 0 : 1로 패배한 게 문제가 아니라 경기력이 너무 엉망이라서 보다못한 박지성조차 "저런 놈들은 대한민국과 비벼볼만하다"고 평가할 정도였었으며 실제로도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에게 결국 0 : 2로 패배하는 독일 축구 역사상 초유의 사태를 맞이했다.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까지의 '녹슨 전차군단' 시절에는 유로에서만 부진했을 뿐, 월드컵에서는 비록 대진운빨이라지만 2002년에 준우승을 거두기도 하고 아무리 못한다 해도 최소 8강까지(1998년)는 진출했었다. 그러나 이 기록도 2018 러시아 월드컵에서 사상 처음으로 조 꼴찌로 조별리그에서 탈락해서 결국 깨져버렸고 이후로도 팀 내외적으로 답이 안보이는 행보만을 보이고 있다.
그러니까 그 러시아 월드컵이 막상 열리자 멕시코와의 첫 경기에서 아무 힘도 못써보고 0:1로 충격패를 당하고 스웨덴과의 두 번째 경기에서는 선취점을 빼앗기고 훌륭한 수비수까지 경고누적으로 퇴장당한 끝에 20초 남긴 상태에서 토니 크로스의 기적같은 역전골로 2:1 승리를 했지만,[57] 앞서 서술했던대로 대한민국과의 마지막 경기에서 0:2로 패배하여 조 4위 즉, 독일 축구 역사상 초유의 그것도 조 최하위로 월드컵 조별리그에서 탈락하는 큰 치욕을 겪고 만 것이다.[58][59][60]보러 가기 (나무위키에서 재생 불가)
독일이 월드컵에서 무득점 2점차 이상의 패배를 당한 것은 1998년 프랑스 월드컵 8강전에서 크로아티아에게 0:3으로 대패하고, 2002년 한일 월드컵 결승전에서 브라질에 0:2로 패배하고 2006년 독일 월드컵 준결승전에서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에게 0:2로 패배를 당한 이후 12년만의 일이다. 전술한 팀들은 다 한 축구 하는 강호들이니 변호할 여지라도 있지만, 그런 강호들 축에 들지도 못하는 대한민국에게 무득점에 그것도 다실점 패배라는 세계구급 굴욕을 당하고 만 것이다. 독일 국대가 동아시아에 예상치 못한 변수가 생겨버리는 바람에 피해가 정말로 막심한 상황이 되어버렸다. 게다가 이번 2018 러시아 월드컵 대 한국전 패배는 독일이 월드컵 본선에서 아시아 국대에게 최초로 패배한 경기였다. 해당 항목에 자세히 기술돼 있지만 이 한국전 패배 전까지 독일은 아시아 국가들과의 월드컵 본선 성적 6승 무패로 전승을 기록하고 있었다. 오죽하면 베를린 교통 공사(BVG)가 독일에서 열린 2018년 유럽 버스기사 대회를 앞두고, 요 경기 결과에 빗대 '(아시아 국가인) 한국은 이 대회에 참여하지 않으니 (우리 버스기사가 우승을 차지할) 절호의 기회'라는 식으로 홍보 활동을 벌였다.
한국전에서 패배하여 사상 초유의 월드컵 조별리그 탈락이라는 최대의 치욕을 당한 이후 가진 첫 A매치(2018년 9월 7, 10일) 2연전인 프랑스전과 페루전에서 페루에게는 승리하고 프랑스에게는 무승부를 거두며 자존심을 조금이나마 살리는 데 성공했다. 특히 프랑스와의 UEFA 네이션스 리그 1차전에서는 프랑스의 강점인 역습을 사전에 모조리 차단하는 수비와 압박 위주의 전술을 들고 나와 월드컵 우승국을 쩔쩔매게 했으며, 골키퍼의 선방만 아니었으면 충분히 승리를 노려볼만한 경기력이었다. 다만 이 경기만으로는 판단하는 게 무리인 게, 독일이 2018년 월드컵에서 망한 이유는 강팀을 상대로 못해서가 아니라 상대적 약체를 상대로 졸전을 펼치고 승점을 잃었기 때문이다.[61] 아니나 다를까 페루와의 평가전은 로이스와 베르너의 부진으로 인해 기회는 많이 잡고도 간신히 승리만 거두는 모습을 보이며 월드컵의 악몽을 극복하려면 시간이 아직 많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2018년 10월에 가서는 월드컵 본선 진출에도 실패한 네덜란드[62]에게도 0 : 3이라는 나락을 향해가는 참패를 맞이함으로써, 우승은 커녕 리그 B로 강등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에까지 몰렸다. 월드컵에서 사용했던 뻔한 전략을 또 다시 쓰다가 네덜란드의 역습에 발목이 잡혀버린 것이다.[63] 게다가 다음 상대는 월드컵 우승팀 프랑스다.[64] 독일이 3점차로 패배한 것은 2007년 체코에게 0 : 3으로 진 이후로 무려 11년 만의 일이었다.
냉정히 독일이 앞으로 좋은 성과를 얻고 싶다면 과감히 뢰프를 사퇴시키고 더 젊은 선수를 등용할 생각이 있는 감독으로 팀의 체질 개선을 해야할 것이다. 그러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현재 뢰프 & 선수단은 외부의 비판을 지나치게 무시하고, 자신들의 스타일을 지나치게 맹목적으로 고집하고 있는데 문제는 이게 더 이상 먹히지가 않는다는 것. 이는 선수단 구성은 물론 포메이션을 짤 때에도 문제가 있다. 뢰프는 종종 풀백에 센터백이나 기동성이 아쉬운 선수를 선호하는데,[65] 이제는 더 이상 이 전술은 현대축구에서 먹히질 않는 시대착오적 전술이다. 또한 다른 좋은 윙어가 있음에도 베르너 & 뮐러와 같이 함량 미달인 선수를 꾸준히 기용하고 있다.
여튼 우려 속에 치른 프랑스와의 2차전은 전반은 꽤나 선방하며 크로스의 페널티킥으로 1:0으로 앞섰으나, 후반에 뒷심 부족으로 그리즈만에게 두 골을 내주며 결국 1:2로 역전패했다. 전반전은 우세하게 진행했지만 결국 또 골 결정력 부족에 울었던 독일이다. 주범은 이 놈과 이 놈. 긍정적인 면을 꼽아보면 흔들리던 수비가 훨씬 견고해졌다는 점, 그리고 월드컵 챔피언을 상대로 기죽지 않고 자신들의 플레이를 펼쳤던 점 정도를 꼽을 수 있다. 여러모로 아쉬움이 많이 남는 경기가 되었다. 다만, 수비가 견고했다는 것에는 윙백도 센터백 & 풀백으로 구성할 정도로 밸런스가 뒤에 쏠린 3백을 큰게 더 큰 원인이다.
UEFA 네이션스 리그 18-19 시즌 리그 A 1조 5차전인 네덜란드 vs 프랑스 전은 네덜란드가 2:0으로 승리하면서 6차전인 독일vs네덜란드 전의 결과와 상관없이 독일은 결국 리그 B로 강등이 확정되고 말았다. 게다가 독일은 마지막 네덜란드전에서 선제골을 2골이나 넣었으나 뒷심부족으로 후반 막판에 네덜란드에게 2골을 내줘 2:2로 비겨 무승부를 거둠으로써 이제 독일은 다음 시즌인 20-21 시즌에선 리그 B에서 뛰어야 한다. 20-21시즌 리그 B 소속팀은 독일 외에 오스트리아, 웨일스, 핀란드, 폴란드, 아이슬란드, 크로아티아, 러시아, 체코, 노르웨이, 스코틀랜드, 세르비아가 있다. 거기다 리그 A 승격팀들은 우크라이나,[66] 덴마크,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67] 스웨덴 이렇게 4팀. 심지어 UEFA 네이션스 리그 순위가 나왔는데, 독일은 리그 A 12개 팀 중 11위다. 12위는 다름아닌 리그 A 최약체가 예상되었던 아이슬란드. 심지어 폴란드(10위)한테도 밀렸다. 독일은 카잔의 치욕을 기점으로 치욕이란 치욕은 다 당하고 있는 셈이다. 경기 결과도 4번의 대결에서 한 번도 못 이겼다는 게 문제다. 적어도 크로아티아는 막판에 스페인을 이겨서 다 올라간 스페인의 다리를 부러뜨렸고 이탈리아 역시 적어도 폴란드만이라도 이겨서 최소한의 체면치례를 했건만 독일은 그 딱 1번을 이기지 못하고 2무 2패의 초라한 전적으로 결국 리그 B로 추락하고 만 것이다.
리그 B에서 더 떨어질 일은 거의 없어보인다는 것이 위안이다. 무엇보다도 독일은 이제 더 이상 월드컵 우승후보가 아니다! 그 이유가 바로 팀의 기량이 강하고 약하고를 떠나서 이제는 완전히 읽혀버린 상태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2018년 월드컵 조별리그 첫 경기인 멕시코전에서 고스란히 드러난 것이다. 멕시코 수준이야 불보듯 뻔한데 그런 멕시코를 상대로 아예 모든 면에서 일방적으로 압도당한 끝에 결국 이런 충격적인 패배를 당하고 만 것이다. 이건 독일이 멕시코보다 실력이 없는 팀이 아니라 독일의 스타일이 멕시코에게 완전히 읽힌 것이다! 그 때문에 독일은 2018 러시아 월드컵을 포함해 그 이후 승리라는 게 스웨덴전의 승리와 러시아와의 친선경기 승리 정도밖에 없는데 이건 그냥 독일 측의 선수 스펙이 좋아서 선수빨로 이겼을 뿐이다. 실제로도 독일은 선수 스펙이 비슷한 프랑스와 네덜란드에게는 UEFA 네이션스 리그 2018-2019 시즌에서 정말 찍소리도 못하고 각각 1무 1패씩 총 2무 2패를 거두며 결국 리그 B로 강등당했다. 독일이 다시 월드컵 우승후보가 되려면 뢰프를 경질시키든 유임시키든 간에 그 동안 써왔던 전술을 완전히 버리고 아예 다 갈아엎어야만 한다. 이 전술, 이 스타일 등을 갖고는 이젠 앞으로 어느 대회 어느 경기에서도 써먹기가 힘들다. 아니나 다를까, 월드컵과 비슷한 전술과 멤버로 나선 10월 네덜란드전에선 아무것도 못하고 털려버렸지만, 공격진을 완전히 갈아엎고 나서부터는 이후 3경기에서 6골을 기록하는 등 좋은 모습을 보였다.
이건 펩 과르디올라에 의해 전성기를 맞았던 점유율 축구에 대한 카운터로 선 수비 후 역습 전략이 나오기 시작한 후부터 드러난 조짐인데, 사실 독일 축구계는 그 두꺼운 선수층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이런 텐백 전술을 뚫어줄 크랙 자원이 부족했다.[68] 과르디올라가 뮌헨 감독을 역임했었고, 그 바이에른 뮌헨에서 독일 국대에 승선하는 것이 상당수였으므로, 독일 국대 선수들은 점유율 축구에 최적화되어 있었다. 그런데 2018 러시아 월드컵에서 멕시코가 1:0으로 승리하면서 그 전략의 파훼법을 처음으로 제시했고, 한국이 2:0으로 승리하여 독일을 사상 최초로 월드컵 조별리그에서 탈락시켜 버리면서 이 점유율 축구의 파훼법이 전세계에 확실하게 알려지게 되었다.
2018년 러시아 월드컵 때 한국 축구 국가대표팀이 텐백을 비롯한 선 수비 후 역습으로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을 이겨버렸으니 당연히 전 세계의 주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당시 유럽 축구 국가대표팀들이 해당 대결을 주목한 이유는 단순히 독일에 대한 조롱만이 아니라 약체임에도 세계 최강이라 불리던 독일 축구의 기술을 완전히 격파했기 때문에 그 기술이 주목받은 것이다. 네이션스 리그에서 네덜란드를 만난 독일은 또 그 점유율 축구를 들고 나왔고, 당연히 한국보다 선수층과 시스템이 더 탄탄한 네덜란드가 그 경기를 안 봤을 리 없으니 네덜란드는 역시 그 파훼법으로 손쉽게 승리했다. 결국 이 텐백을 뚫을 자원과 전략을 마련해야 한다는 점에서 독일은 한동안 타 국가들로부터 망신을 더 당하게 될 전망이다.
이런 조짐은 2014 FIFA 월드컵 브라질에서 우승하자마자 바로 보여줬다. 필립 람이 은퇴하자마자 독일은 공수 밸런스가 붕괴되었고, 독일에는 람만큼 중원 사령관을 하는 선수가 없어서 하는 수 없이 바스티안 슈바인슈타이거로 대체했으나, 슈바인슈타이거는 람만큼 뛰어난 자질이 아니었기에 UEFA 유로 2016 지역예선에서 폴란드와 아일랜드에게 연이어 패배했다. 독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약체들에게 연달아 잡힌 것이다. 그러나 컨페더레이션스컵에서 2군급 선수들을 내보내고도 깔끔하게 우승하고, 2018 FIFA 월드컵 러시아/지역예선(유럽)에서도 체코, 북아일랜드, 산마리노 등 독일로서는 가장 만만한 상대들과 맞붙어 10전 전승을 기록했기에 다시 우승후보가 되는 게 아닌가 싶었지만, 막상 본선에 나와 보니 람의 부재는 정말로 뼈아팠다. 그 외에도 지나친 경거망동과 기고만장도 독일의 몰락의 원인이 되었는데, 2016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남자축구 부분 결승전에서 패배한 후 당시 수비수로 출장한 로베르트 바우어가 손가락 7개를 치켜세우며 브라질을 도발하여 구설수에 올랐다거나, 러시아 월드컵 지역 예선에서 독일이 산마리노를 8:0으로 꺾고 난 직후, 뮐러가 "산마리노는 아마추어 팀이며, 이런 팀과의 경기는 쓸데없는 부상 위험만 만든다. 스케줄도 바쁜데 이러한 경기를 대체 왜 하는지 모르겠다."라는 발언을 하여 전세계적으로 비난과 비판을 받거나,[69] 이러한 승리에 심취해서 전력분석을 소홀히 했다가 치명적인 타격을 크게 입고 말았다. 게다가 토니 크로스[70]가 2017년 새해 인사를 지난 대회 참극을 빗대어 2017의 1과 7을 브라질 : 독일로 조롱했다가 한국에게 0:2로 무너지고 조별리그 최하위로 광탈당하자 브라질의 한 여행사가 SNS로 찾아가서 그대로 되갚아 주었다. 거기다가 새해 시작할 때마다 2와 0을 각각 태극기와 독일 국기로 놀림거리라는 업보를 받고 말았으며, 나중에는 일본에게도 1:2로 역시 무너져서 2111년 이후에도 일장기와 독일 국기로 놀림거리라는 업보로 계속 이어지게 생겼다.
2018년 마지막 A매치 2연전 중 첫 경기인 러시아와의 평가전에서는 간만에 시원시원한 독일스러운 경기력을 보이며 3:0 완승을 거두었다. 이 날은 단순히 내용 뿐만 아니라 선수들 역시 유망주와 젊은 선수들을 위주로 선발 라인업을 꾸렸고[71] 후반에도 신예들을 위주로 교체를 했기에 드디어 세대교체를 시작했다는 데에 의미가 있다. 러시아 역시 다소 경험이 부족한 선수들을 시험하는 경기여서 결과에 큰 의미를 부여하긴 뭐하겠지만 드디어 구식 선수들을 제외하고 팀을 개편했다는 것에 초점을 맞추면 성공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게다가 네덜란드와의 최종전에서는 시종일관 압도적인 경기를 펼쳤지만 아쉽게 막판에 집중력이 떨어지며 2대2로 비기게 된다. 결과는 분명 아쉽지만 2018년의 마지막 세 경기는[72] 세대교체의 시동을 걸고 원래 독일의 모습으로 점차 돌아오고 있다는 점에서 어둠 숙에서 잠깐이나마 독일 축구에 기대심리를 살짝이나마 엿볼 수 있다. 결국 독일 축구 역사상 최악의 한 해를 보냈었다.
2019년 3월 5일, 뢰브 감독이 바이에른 뮌헨의 훈련장을 찾아 토마스 뮐러, 마츠 후멜스, 그리고 제롬 보아텡에게 더 이상 국가대표팀에 뽑지 않겠다고 통보하며 본격적으로 세대교체의 시작을 알렸다. 문제는 한창 시즌이 바쁠 때[73] 아무런 예고도 없는 거의 일방적인 통보였던지라 선수도 구단도 상당히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다는 것이다. 이어 카를하인츠 루메니게 뮌헨 사장은 "통보를 뮌헨이 중요한 경기를 치르는 기간에 꼭 해야 했는가?"라고 성명서를 냈고, 로타어 마테우스도 세대교체에는 동의하지만 발표 타이밍이 상당히 안 좋았다며 뢰브를 비판했다. 이들 베테랑을 대놓고 안 뽑겠다고 선언한 이후 치러진 세르비아와의 평가전에서는 홈에서 1:1 무승부가 났다. 독일과 세르비아의 축구에서의 위상차를 생각해보면 홈에서 무승부가 난 것 자체도 상당히 부끄러운 일인데, 경기 내용면에서도 좋다고 말할 수가 없는 것이, 전반 12분만에 결정적인 1:1 찬스를 허용해 선제골을 먹힌 것이다. 이후 후반에 레온 고레츠카가 만회골을 넣었는데, 전반전 시작 얼마 안 돼서 선제골까지 먹힌 것은 수비 조율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는 뜻이다. 이후 현지시각으로 2019년 3월 24일, 네덜란드와 UEFA 유로 2020 예선 경기를 치렀다. 독일은 지난번과 비슷하게 젊은 선수들 위주로 기용했으며, 몇몇 베테랑들도 경기를 뛰었다. 키미히, 크로스, 그리고 최근 말이 많던 노이어도 선발로 나섰으며 로이스는 후반에 교체 출전했다.
초반엔 독일의 맹공으로 2:0 까지 달아났는데, 특히 젊은 공격수인 19번의 리로이 자네와 20번의 세르주 그나브리가 각각 한 골씩 기록했다. 자네는 수비할때 미드필드 진 아래까지 내려오는 적극성을 여러번 보였고, 20번 그나브리는 두 번째 골을 앞에 수비수 두명을 흔들고 혼자서 만들어낸 골이었다. 그와 더불어서 노이어는 전반에만 슈퍼 세이브 둘을 기록했으나, 전판 막판에 한 골을 허용하고 후반 초반에 동점골을 내주고 만다. 동점 상황에 이르자 요아힘 뢰프 감독은 후반 25분경, 그나브리를 빼고 일카이 귄도안을 투입하였으며 그 후 후반 막판인 43분에 고레츠카를 빼고 마르코 로이스를 넣으며 승부수를 띄웠다. 그점이 통했는지 후반 45분, 니코 슐츠가 로이스의 패스를 받아 극적인 결승골을 터트렸다. 결과는 네덜란드에 3:2 승리. 네덜란드 적지에서 32년만에 거둔 독일의 원정 승리였다. 뢰브 감독은 기존의 전술에서 벗어나 빠른 기동력을 지닌 선수 위주로 팀을 꾸렸고, 후반에는 용병술을 통한 승부수로 오랜만에 네덜란드를 상대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이제 관건은 독일이 이런 좋은 모습을 바탕으로 앞으로 다시 오뚝이처럼 벌떡 일어날 수 있느냐이다.
2019년 6월에 열린 A매치 2연전에서도 꽤 시원시원한 경기력을 보였다. 유로 예선 2연전을 치르며 벨라루스와 에스토니아를 상대했는데, 우선 벨라루스 원정을 가서 자네와 로이스의 골로 2대0 승리를 거두었다. 그리고 에스토니아를 홈에서 맞아 무려 8:0이라는 스코어로 대파하면서 3경기에서 전승, 4경기 4승을 거둔 북아일랜드를 맹추격하고 있다.[74] 물론 상대가 상대인지라 아직 이러한 결과로 독일의 부활을 논하기는 이르지만, 네덜란드전을 시작으로 유로 예선에서 다득점으로 3연승을 했다는 것은 분명히 고무적인 일이다. 특히 2018년에 13전 4승 3무 6패라는 치욕적인 성적을 거두었던 걸 감안하면 현재는 4전 3승 1무로 작년 이맘때에 비하면 훨씬 나아진 상황이다. 게다가 독일이 작년에 한 4승 중 3승이 평가전 성적이었고, 올해 독일의 3승은 모두 공식 경기에서 나온 것이다. 2019년 9월 7일에 벌어진 유로 예선 네덜란드와의 홈경기에서는 2:4로 완패했다. 승점 3점이 절실했던 네덜란드는 약체들과의 경기를 부담없이 대비할 수 있게 되었지만 독일은 상승세가 꺾인것 처럼 보인다. 전반적으로 냐브리의 탐욕적인 슈팅이 더 점수차를 벌릴 수 있는 기회를 날렸고, 요나탄 타와 마테이스 더리흐트는 누가 더 못하는가를 겨루는 듯 서로 안 좋은 의미에서의 대활약을 해버렸다. 그나마 더리히트는 상대가 니코 슐츠나 로이스같은 독일 내에서도 실력 있는 선수에게 뚫린거라 변명이라도 해볼만하지만 요나단 타는 공을 건드리지 않았으면 어차피 오프사이드였던 것을 자책골까지 기록하며 변명의 여지조차 없애버렸다. 게다가 네덜란드는 더리흐트 정도만 못 한 거지만 독일의 경우 공격도, 수비도 안 되는 총체적 난국 상황이었으니. 하지만 며칠 뒤에 열린 북아일랜드 원정 경기에서는 분위기를 반전시키며 2대0으로 이겼다. 물론 경기력 자체가 좋다고 보긴 어려웠지만 조 선두를 상대로 승점 3점을 챙기며 본선 진출에 한 발짝 더 다가섰다. 2019년 11월 17일 벨라루스와의 유로 예선 7차전 경기에서도 4:0 대승을 거두며 2020년 유럽선수권대회 본선 진출을 확정지었다. 간간히 벨라루스에 위협적인 장면도 내주었지만[75] 전체적으로 경기를 주도하면서 낙승을 거두었다. 이후 칙른 북아일랜드와의 최종전에서도 6대1 대승을 거두며 조 1위로 진출해 톱시드를 거머쥐었다. 하지만 막상 본선 조추첨에서는 그 톱시드가 무색하게 월드컵 우승국 프랑스와 유로 우승국 포르투갈과 묶여버리며 조별예선에서 역대급 빅뱅매치업을 선고받았다.[76][77]
3.3. 2020년대
2020년 A매치는 네이션스 리그로 시작하게 되었다. 첫 상대인 스페인과의 홈 경기에서는 베르너의 선제골로 앞서가다가 후반 추가시간에 가야에게 동점골을 먹히며 비겼다. 다음 경기인 스위스와의 원정 경기에서는 귄도안의 선제골로 앞서가다 후반전에 동점골을 허용하며 또 비겼다. 이것으로 독일은 네이션스 리그에서 지난 시즌을 포함해 6경기째 무승을 기록중이다.[78]2020년 10월 7일, 쾰른에서 있었던 터키와의 친선 경기에서 또다시 3:3 무승부를 기록하였다. 독일이 선제골을 넣은 후 터키가 동점, 독일의 역전골 이후 터키가 다시 동점을 이루는 경기내용의 반복이었다. 올시즌 A매치에서만 무승부가 3차례가[79] 나와서 걱정이 되는 부분이다. 게다가 이번 A매치에서 난적이라고 할 수 있는 팀은 네이션스 리그 조별리그 상대인 스페인 한 팀 뿐이어서 독일의 경기력에 대해 우려를 표할 수 밖에 없는 실정이다.
네이션스 리그에서는 같은 조 스페인이 스위스를 상대로 삽질을 하는 동안 우크라이나를 제압하고 조 1위를 찍기도 했고, 마지막 스페인과의 맞대결에서 비기기만 해도 4강에 진출하는 상황이다. 하지만 현지 시간으로 2020년 11월 17일, 네이션스 리그 조별리그 마지막 경기에서 종이인형 2명과 서드키퍼를 끌고 나온 스페인에게 무려 0:6이라는 충격적인 대패를 당했다. 스코어도 충격적이지만 유효슈팅 0에다가 전통적으로 뛰어난 피지컬을 앞세우는 힘있는 축구를 하던 독일이 피지컬을 강점으로 두기는 어려운 스페인에게 제공권 싸움에서 밀리면서 대패했다는 것도 충격적이며 89년전 오스트리아에게 0:6으로 대패한 이후 또다시 반복된 참사였다. 또, 자신들이 브라질에게 안겨주었던 그 6점차 패배를 스페인으로부터 고스란히 돌려받는 형국이 되었다.
이렇게 갈수록 디 만샤프트는 추락의 길을 걷고 있는데다, 거기에 뢰프를 끝까지 기용한다는 독일축구협회에 대해 독일인들의 민심은 극도로 차가워졌으며, 지금까지의 국가대표팀의 최악의 암흑기로의 추락은 할 말을 잃을 정도다. 당장 2020년 독일 국대 A매치 가운데 독일이 압도적인 경기력을 보인 경기들이 없다. 심지어 예전 같았으면 거의 발라버리는 수준의 타 유럽팀들과의 경기 마저 그저 '평타' 수준의 경기로 끝내는 경우도 많아져서 독일인들의 근심이 나날이 커지고 있는 상황에 결국 2020-21 UEFA 네이션스 리그에서 이렇게 큰 참사가 벌어지고야 말았다. 아예 2018 러시아 월드컵 이전의 독일의 모습은 완전히 사라져버린 모습이어서 '괜한 걱정이 독일 걱정'이라는 말은 완전히 옛말이 되어버렸다. 당장 2021년에 열릴 UEFA 유로 2020에서도 프랑스, 포르투갈을 상대해야 되는데, 왠지 시작부터 험난할 것으로 보인다.
결국 요아힘 뢰프 본인도 한계를 느꼈는지 2021년 3월 11일, 유로 2020을 끝으로 감독 자리에서 물러날 것을 선언했다. 기사.
사임을 선언하고 2주 후인 2021년 3월 25일 열린 2022 월드컵 유럽예선 아이슬란드와의 홈경기에 3:0 완승을 거두었다. 그 동안 독일은 카잔 참사 이후 압도적인 모습을 보이기는 커녕 2000년대와 비견될 최악의 암흑기 행보를 이어갔고 특히 지난해 11월 스페인 참사를 당했던 독일 입장에서 2021년 첫 경기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닌 아이슬란드에 완승을 거두면서 재기의 발판을 마련했다. 이어진 루마니아와의 경기에서는 1:0으로 승리하며 모처럼 연승을 하면서 일단 출발은 좋았다[80]. 그러나 얼마 후 조 최약체 중 하나인 북마케도니아와의 경기에서 1:2로 패배하며 20년 만에 월드컵 지역예선에서 패배하는 굴욕을 당하고 말았다.[81] 이 패배로 독일 축구 대표팀의 엘로 레이팅은 1934 까지 내려갔으며(12위), 이 수치는 요아힘 뢰프 부임 후 세 번째로 낮은 수치다. 특히 카잔의 기적 이후 19년 5월 20일 1932, 9월 6일 1933, 이 패배로 1934. 북마케도니아에게[82] 충격패를 당한 독일은 잉글랜드한테 1:5로 대패한 이후 20년 만에 월드컵 지역예선 탈락을 걱정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그래도 그 때는 잉글랜드가 우승후보 언저리에 놓인 팀 중 하나였는데다 유럽의 강호 중 하나인지라 독일은 그 고비만 어찌어찌 넘기면 되겠다는 생각으로 플레이오프로 가서 우크라이나를 이기고 본선에 올랐었지만, 이번에 맞붙은 북마케도니아는 지역예선에서도 약체 중에서도 최약체에 해당되는 팀이기에 이 고비를 넘긴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닐 정도로 상당히 심각한 상황이다.[83]
그리고 UEFA 유로 2020 개막을 단 2주 앞둔 상태에서 치른 덴마크와의 평가전마저 졸전 끝에 1:1로 비기며 불안감만 더더욱 증폭시켰다.
그렇게 유로 대회는 시작되었고 죽음의 조에 배치받은 독일은 힘든 일정을 치르게 되었으나 조별리그 전부를 홈에서 치르게 되어 유리한 위치였다. 그런데 첫 경기인 프랑스전부터 오랜만에 국대에 복귀한 마츠 후멜스가 자책골을 기록하며 0:1로 패배하고 말았다. 점수가 0대1이라서 독일이 월드컵 우승팀을 상대로 꽤 선전한 게 아니냐는 의견도 나오고 있지만 사실 프랑스가 선제골을 넣은 후 이상하리만큼 보수적으로 플레이하며 적극적인 공격보다는 탄탄한 수비를 위주로 경기를 풀어갔기 때문에 골이 더 많이 안 나온 것일 뿐, 경기력 자체는 프랑스가 독일을 압살해버렸다. 수비진의 고군분투와 오프사이드만 아니었으면 충분히 대패를 해도 이상할 것 없는 경기였다. 이날 패배로 엘로 레이팅은 13위인 1915까지 하락. 뢰브 부임 후 최저치를 기록했으며, 13위도 2005년 이후 가장 낮다.
두 번째 경기인 포르투갈전에서는 전반부터 호날두에게 선제골을 먹히고 불안한 출발을 하게 됐다. 그러나 상대의 2번의 자책골에 힘입어 역전에 성공했고, 후반에 2골을 추가하며 결국 4:2로 대승을 거두었다.[84]
그리고 3차전 헝가리전은 전반 초반에 어이없게 첫 골을 먹으며 또 불안한 출발을 했고, 동점골을 넣긴 했지만 바로 또 실점하며 조 꼴찌로 탈락 위기에 놓였지만, 레온 고레츠카의 극적인 동점골로 2대2 무승부를 기록, 어찌어찌 16강은 갔다. 문제는 힘들게 올라간 16강에서 만난 게 우승 후보 잉글랜드라는 것...
결국 잉글랜드에게 무기력한 경기력만 보여주면서 0:2 완패, 16강에서 초라하게 물러나게 되었다. 이로써 뢰브와의 동행은 씁쓸한 마무리로 끝나고 말았다.[85]
3.3.1. 한지 플릭 감독
유로 2020을 2주 앞둔 2021년 5월 25일, 뢰브의 후임자로 한지 플릭이 선임되었다.독일은 감독이 교체된 이후 첫 경기로 9월 3일[86], 리히텐슈타인과 월드컵 지역예선을 치르게 되었다. 일단 이기기는 했지만, 조 최약체를 상대로 슈팅을 30개나 때려박고도 2:0이라는 스코어밖에 못 내며 뭔가 만족스럽지 못한 모습을 여전히 보이고 있다.
그러다가 9월 6일[87], 아르메니아를 6:0으로 대파하면서 조 선두로 껑충 뛰어올랐고, 9월 9일[88] 아이슬란드전도 4:0 낙승으로 선임 효과를 제대로 누리고 있다.
이후 10월 9일[89] 루마니아전도 2:1로 역전승하면서 본선 진출에 어느덧 9부 능선을 넘었고, 10월 12일[90], 북마케도니아 원정경기서 4:0 승리를 거두고 (개최국을 제외한) 전 세계를 통틀어서 첫 번째 2022 FIFA 월드컵 카타르 본선 진출팀이 되었다.
11월 12일 지역예선 9차전 상대인 리히텐슈타인을 2개월 전과 달리 이번에는 9:0으로 아주 박살을 내버렸다. 부임 후 6경기에서 모두 승리를 챙기고 있는데, 이는 독일 국가대표 역대 감독들 중 부임 기준 최다 경기 연승 기록에 해당한다. 또한 같은 기간 동안 득점도 무려 27골에 실점은 단 1골만을 내 주었다. 신임 감독 체제 첫 6경기에서 27득점은 독일 대표팀 역대 최초 기록이다. 또한 같은 기간에 30명의 선수들을 기용했는데, 이 중 12명이 골을 11명이 도움을 기록하며 많은 선수들이 막강한 공격력에 기여하고 있는 모습이다.
11월 15일 지역예선 10차전 상대인 아르메니아전은 본선도 확정됐겠다, 대다수의 주전들도 뺀 채 경기를 치렀는데, 그래도 역시나 독일은 독일이었고, 4:1 대승을 거두며 도합 9승 1패에 조 1위라는 호성적으로 예선을 마쳤다. 이제 앞으로의 과제는 지난 월드컵에서의 그 치욕을 극복하며 다시 오뚝이처럼 벌떡 일어서느냐의 여부다.
이후 2022 FIFA 월드컵 카타르 조 추첨에서는 로타어 마테우스가 독일을 스페인이 있는 E조로 뽑아 스페인과의 재대결이 성사되었다.
2022년 첫 A매치 2연전에서는 이스라엘과 네덜란드를 상대했다. 이스라엘을 상대로는 1.7군 정도의 라인업으로 실험적인 성격의 경기를 했고, 세트피스 두 방으로 2대0으로 무난히 이겼다.[91] 네덜란드전은 플릭 체제가 처음으로 상대하는 강팀이었는데, 전반에는 좋은 모습을 보이며 선제골까지 넣었고, 후반 초반까지도 괜찮은 흐름을 유지했다. 하지만 동점골을 허용하고 나서 수비 집중력이 갑자기 흐트러지는 모습을 보였고, 후반 막판에는 네덜란드에게 주도권을 내줘 1대1 무승부로 만족해야 했다. 플릭 감독의 연승 기록이 깨진 것, 막판에 흔들렸던 것 등 아쉬운 점도 있었지만, 그래도 독일이 실로 오랜만에 강팀을 상대로 대등한 모습을 보여준 것에서 호평도 꽤 들리고 있다.[92]
22/23 UEFA 네이션스 리그에서는 작년 유로컵 챔피언 이탈리아, 준우승팀 잉글랜드, 그리고 조별예선에서 독일을 떨구기 직전까지 갔던 헝가리와 함께 죽음의 조에 편성되었다. 안 그래도 월드컵에서 죽음의 조를 통과해야 하는 독일에게 대회 시작 전부터 고생길이 제대로 열린 셈이다. 하지만 아직까지 진정한 강팀과의 대결 경험이 많이 없는 플릭의 독일에게는 자신들의 수준을 확인하고 더 끌어올릴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하다. 특히 스케줄상 월드컵 전에 평가전을 치를 기회도 없는데, 네이션스 리그에서라도 강팀들을 상대로 스파링하는 게 현재의 독일에게 가장 필요한 과정일 수도 있다. 거기에 상대 중 하나가 지긋지긋한 천적 이탈리아이므로 동기만큼은 최상이다.
네이션스 리그 첫 경기인 이탈리아전은 1:1 무승부를 거두었다. 카타르 월드컵 본선 진출에 실패한 이탈리아는 2군급 라인업을 들고 나왔지만, 징크스는 징크스였는지 숨막히는 압박 수비로 독일의 공격을 무력화시켰고, 선제골을 넣기도 했다. 다만 독일도 물러나지 않고 실점한지 불과 3분 만에 동점골을 넣으며 뒷심을 발휘했다. 뢰브 시절 보기 힘들었던 뒷심과 플릭 감독의 용병술은 칭찬할 만하지만, 한편으로는 독일이 발전했어도 아직도 갈 길이 멀다는 걸 대변해주기도 했다. 그리고 양 윙어들과 풀백들이 수준 이하의 모습만 보이며 현 대표팀의 인재 부족 문제가 드러나기도 했다.
이어 잉글랜드와 헝가리와의 연전에서 2경기 연속 1:1 무승부를 거두며 3월 네덜란드전까지 무려 4연속 1:1 무승부라는 진기록을 달성했다. 두 경기 모두 독일은 공격 전개에 어려움을 겪으며 상술한 인재 부족 문제를 또 뼈저리게 느껴야만 했다. 특히 주전 공격수들인 티모 베르너와 카이 하베르츠가 부진한 모습을 보이며 플릭 감독의 고민은 더더욱 깊어지게 되었다. 사실 플릭이 부임한 이래로 독일이 이탈리아와 잉글랜드같은 강호들을 상대로 대등한 경기를 펼치며[93] 승점을 꾸준히 따가는 것과 무패행진을 이어가는 것을 보면 발전한 면이 분명히 있긴 하다. 하지만 결국 축구는 골을 넣어야 이기는 스포츠인데, 공격수 인재들이 다 부진하거나 아예 없는 현실 앞에는 제아무리 플릭이라도 별 수 없다. 이제 와서 스트라이커를 발굴하기에는 너무 늦으므로 하루빨리 공격진들의 결정력을 향상시키는 게 최우선 과제이다.
해답을 찾았는지 4차전 이탈리아와의 경기에서 무려 5:2로 대승을 거둠으로서 국제 대회에서 처음으로 이탈리아를 이겼다. 이날 공격진들은 이전의 부진을 다 떨쳐내고 수비력이 강한 이탈리아의 골문을 5번이나 때리며 무시무시한 경기력을 선보였다. 비록 2실점을 하긴 했지만 이는 압도적으로 이기고 있을 때 느슨해져서 나올 법한 실책이고[94] 처음으로 아주리 징크스를 극복했다는 점에서 소득이 많았다.
그러나 5차전과 6차전에서는 1무 1패에 그치며 네이션스 리그 조 3위로 마무리했고, 안 그래도 빡센 조에 걸린 월드컵인데 독일인들은 4년 전의 대참사가 반복되는 게 아니냐며 불안에 떨고 있다. 그나마 긍정적인 것은 잉글랜드 원정에서 좋은 경기력을 간간히 보이며 3:3으로 무승부를 거뒀다는 거지만, 잉글랜드 역시 폼이 말이 아닌 상황이라서 딱히 긍정적이라 할 것도 없다.
게다가 월드컵을 앞두고 가상의 일본인 오만과 평가전을 치렀는데, 졸전 끝에 1:0으로 신승하면서 자국인들과 자국 언론들과 외신들은 월드컵이 걱정된다고 한탄하고 있다.
그리고 그 한탄은 뜻밖에도 현실화가 되었는데, 조별리그 첫 경기에서 일본에 1:2로 역전패하며 초장부터 조별리그 2회 연속 광탈의 위기에까지 봉착하게 된 것이다.[95] 자세한 내용은 2022 FIFA 월드컵 카타르/E조/독일 vs 일본 문서를 참고.
이후 2차전에서 스페인과 1:1로 비겼다. 큰 고비는 넘겼지만, 1차전에서의 역전패로 인해 그 전까지 겪지 않았던 경우의 수를 따져야만 하는 상황이 되었고, 마지막 3차전에서 코스타리카를 상대로 4:2로 크게 꺾긴 했으나, 스페인이 일본에게 뜻밖의 역전패를 당하는 대이변이 일어나 3차전에서의 분전에도 불구하고 조 3위에 그쳐서 결국 조별리그 2회 연속 탈락의 고배를 마시고 말았다.
이렇게 독일은 2018년에는 한국에게, 2022년에는 일본에게 당한 패배가 조별리그 최종 결과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쳐 조별리그 2회 연속 탈락이라는 비참한 결과를 만들어버리고야 말았다. 그래서 독일에게는 옛날에 동유럽 징크스를 겪었듯이 이제는 동아시아 징크스를 겪어버릴 판국이 되었다.[96] 결국 조별리그에서 또다시 광탈한 이후 올리버 비어호프 단장이 독일의 2회 연속 조별리그 탈락의 책임을 지고 단장 자리에서 자진해서 물러났다.
이제 독일에게 반등할 기회는 UEFA 유로 2024 개최 전까지 준비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준비하고 이를 결과로 증명하는 것 밖에는 달리 길이 없다.[97] 여기서도 나쁜 결과가 나온다면 신임 독일 감독의 경질론이 또다시 도마에 오를 것이며,[98] 설사 우승을 해도 대회 내내 경기 내용이 별로라면 결과는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는 과거 영광은 일단 덮어두고 현주소에 집중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일단 2023년 3월 평가전에서는 페루를 상대로 무난한 경기력으로 2:0 승리를 거두었다.[99] 하지만 이어진 벨기에와의 경기에서는 수비라인의 최악의 플레이로 인해 전반 10분도 안 되어 2골이나 허용했고, 전반 30분까지는 제대로 된 기회 한 번도 못 잡고 일방적으로 끌려다녔다. 하지만 플릭의 적절한 선수 교체로 흐름을 재빨리 가져왔고, 나머지 60분은 벨기에를 압도했으나 후반에 역습으로 한 골을 더 먹으며 2:3으로 아깝게 패배했다.[100]
2023년 6월 평가전에서 우크라이나를 상대로는 3:3으로 비겼다. 전반 초반 플릭 감독의 게겐프레싱 전술로 우크라이나를 몰아 붙였고 니클라스 퓔크루크가 선제골을 기록하였으나 이후 게겐 프레싱의 문제점 중 하나인 뒷공간 허용을 그대로 드러내면서 동점골을 내줬고 이후 수비진의 자책골과 또다시 등장한 환장할 호러쇼로 연달아 2골을 내주며 1:3으로 끌려갔다. 이후 플릭은 또 다시 적절한 선수 교체를 가져오면서 분위기 반전을 노렸고 결국 후반 막판 카이 하베르츠의 추격골과 요주아 키미히의 PK골로 동점을 만드는데 성공하였다. 패배는 면했지만, 여전히 수비진의 뒷공간 허용 문제는 해결될 조짐이 보이지 않고 있으며 높은 점유율과 압박 축구에 비하여 답답한 공격력을 드러내며 플릭 감독은 또 한번 머릿속이 복잡해지게 되었다.
6월 17일 폴란드전에서는 무수히 많은 슈팅을 날렸음에도 한 골도 넣지 못하는 답답한 축구를 보여주며 0:1로 패했다. 폴란드 역시 날린 유효슈팅이라곤 딱 하나였을 정도로 똑같이 경기력이 답답하기 짝이 없었는데, (독일은) 그걸 먹혀버렸다. 심지어 6월 21일 치른 콜롬비아와의 경기에서는 경기력마저 뺏기고 점유율 하나만 간신히 지킨 채 0:2로 완패하였다. 6월 A매치 전적 1무 2패에 단 한 번도 스코어가 앞선 적이 없는 심각한 경기력이다.
9월 A매치에서는 일본한테, 그것도 홈그라운드인 볼프스부르크에서 1:4 로 무너지는 대참사를 냈다. 가볍게 선제골을 내준 뒤 잠깐 동점을 만들었다가 또 이른 시간에 실점하며 전반을 1:2로 마쳤고, 후반에는 플릭 특유의 답답한 공격 모드로 들어가며 비비기만 하다가 후반 추가시간에 내리 두 골을 먹으며 참사의 종지부를 찍었다. 타조관광의 주인공 뤼디거를 비롯한 측면은 그야말로 영혼까지 털렸으며, 관중석에서는 하프타임부터 야유가 터져나왔다. 테어슈테켄의 슈퍼세이브도 여럿 있었을 만큼 독일의 경기력은 매우 좋지 못했다.[101] 심지어 일본과의 전적도 1승 1무 2패로 되려 열세가 되어버렸다.[102]
이렇게 5경기 연속 무승에 450분동안 단 한번도 리드를 잡지 못하는 기록을 세우며 다시 한지 플릭 경질론에 불이 붙었다. 최근 5경기에서 A매치 1무 4패 6득점 13실점이라는 처참한 성적을 보여주었으며, Elo Rating도 2006년 3월 이후 가장 낮은 1889점까지 추락했다. 결국 한지 플릭 감독은 2023년 9월 10일, 그 일본과의 경기에서 대패한 책임을 지고 독일 축구 123년 역사상 처음으로 경질되는 사태를 맞이하고 말았으며 이로써 2년간의 플릭호 체제도 온갖 잡음 끝에 최악의 모습으로 막을 내리고 말았다. 공교롭게도 이 날 자국 농구 국가대표팀이 그 미국을 꺾고 결승에 진출해서 2023 FIBA 농구 월드컵 필리핀-일본-인도네시아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대비되는 모습을 보였으니 그야말로 극과 극이었다. 결국 독일은 자국 축구의 현주소를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으며, 독일 축구도 이탈리아 축구처럼 암흑기의 길을 걷고 있는 게 아니냐는 의견도 있을 정도다.
3.3.1.1. 루디 푈러 감독 대행
플릭 감독이 일본과의 A매치 직후 경질되면서 루디 푈러 단장이 독일 국대 임시 감독에 부임하게 되었다.그리고 한지 플릭의 경질 이후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은 프랑스를 2:1로 이기고 6개월만에 A매치 승리를 맛보며 간신히 재기할 수 있게 되었다.
9월 22일, 감독직을 율리안 나겔스만에게 이임하고 다시 단장직으로 복귀하였다.
3.3.2. 율리안 나겔스만 감독
2023년 9월 22일, 후임 감독으로 전 FC 바이에른 뮌헨 감독인 율리안 나겔스만이 부임했다. 독일 출신 감독이자 리버풀 FC 감독인 위르겐 클롭을 원하는 여론[103]이 많았지만, 클롭은 리버풀에 집중하겠다며[104] 거절했고, 바이에른 뮌헨에서 물러나 무직 상태로 있던 나겔스만이 낙점되었다. 바이에른과의 잔여 계약 기간이 남아 있어 원칙적으로는 감독 부임이 불가능했으나, 어차피 클럽이 아니니 리그나 챔스에서 경쟁할 일도 없고 타 국가도 아닌 본국 독일의 국가대표 감독을 맡는 것이라 같은 독일 소속인 바이에른 입장에서는 막아야 할 명분도 딱히 없다. 더군다나 나겔스만이 아무 일도 안 하는 채로 그의 연봉만 지출되는 상황이 바이에른에게 달갑지 않았기에 국대와의 친선경기 진행과 잔여 연봉을 독일축구연맹에서 부담하는 것을 조건으로 내걸어 독일 국대 감독 부임을 정식 승인하였다.계약 기간은 UEFA 유로 2024가 열리는 2024년 7월까지로, 평균 재임 기간이 8년이 넘는 과거 감독들과 달리 이례적으로 1년도 안 되는 매우 짧은 계약을 맺었다. 사실상 올해 안으로 망가져 있는 국가대표팀을 수습해 유로 2024에서 성과를 내라는 무언의 압박으로, 이 대회의 성적을 보고 계약 연장 여부를 결정하겠다는 의도로 보인다. 나겔스만 감독은 이에 대해서도 군말 없이 ‘유로 2024를 성공적으로 준비하고 나서 미래를 생각하면 된다.’라며 자신감을 내비쳤다.
나겔스만의 데뷔전인 미국과의 경기에서는 초반 미국의 파상공세에 살짝 말리면서 선제골을 내줬으나 이후 3골을 연달아 넣으며 3:1로 역전승을 거두면서 성공적인 데뷔전을 치렀다. 그러나 이어진 멕시코와의 경기에서는 치열한 접전끝에 2:2로 무승부를 거두며 아직 갈길이 멀었다는 것을 보여주게 되었다.[105][106]
11월 벌어진 튀르키예와의 경기에서 본인의 전임자를 떠오르게 하는 황당한 전술과 선수 기용을 선보인 끝에 2:3으로 패하며 대표팀 감독으로써 여정이 매우 험난해질 것으로 보인다.[107] 아니나 다를까 오스트리아전에서도 차이점이 없는 전술로 2연패를 해버렸다. 오히려 튀르키예전보다 더 심각했는데, 두 골이라도 넣은 튀르키예전과 달리 90분 동안 유효슛을 고작 두 번 기록했을 정도로 공격적으로 고전했다. 수비도 마찬가지여서 경기 내내 오스트리아의 공격진에게 폭격당했고, 상대의 무딘 결정력과 케빈 트랍의 선방이 아니었으면 또 한 번의 참사가 나왔을 것이다.
2023년 A매치 일정 결과를 종합해보면 월드컵 이후 총 11경기를 했는데, 승리는 고작 3번 뿐이고,[108] 무려 6패나 적립되었다. 이는 독일 축구 역사상 최악의 해라 불린 2018년과 같은 패배 수이다.[109] 독일이 이긴 상대는 페루와 미국, 그리고 프랑스[110](!) 밖에 없다.
한편 2023년 12월 초에 있었던 UEFA 유로 2024 본선 조 추첨에서는 스코틀랜드, 헝가리, 스위스와 함께 A조에 편성되었다. 나름 괜찮은 조긴 하지만, 독일의 현재의 모습으로는 이런 쉬운 조도 쉽사리 뚫을 수 있을지 미지수인 상황이다.[111]
현재 독일은 잇다른 A매치에서의 부진으로 전세계적으로도 동네북으로까지 취급당할 정도로 위신이 땅바닥에까지 떨어진 상황이다. 이러한 상황에선 2024년부터 제대로 각성해서 자국에서 열리는 유로 2024에서 정말 뛰어난 경기력으로 우승해야 예전과 같은 모습과 평판을 겨우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여담으로, 2023년 A매치에서의 거듭된 부진과 2023 AFC 아시안컵 카타르에서 본인들에게 두 차례나 굴욕을 안겼던 일본에게 2차례나 피파랭킹을 역전당할뻔 했으나, 일본이 아시안컵 본선에서 이라크와 이란에게 발목을 잡히면서 다행히(?) 그런 참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여기에 아프리카의 세네갈도 2023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코트디부아르의 조별리그에서 3전 전승을 거두며 독일을 역전하기 직전까지 갔지만 16강에서 승부차기 끝에 패배하며 아쉬움을 삼켰다. 이란 또한 아시안컵을 우승할 경우 독일을 역전할 수 있었으나 4강전에서 카타르에게 발목을 잡혔다.
2024년 첫 A매치인 3월 23일 프랑스와의 원정 평가전에서는 플로리안 비르츠의 경기 시작 7초만에 나온 선제골[112]과 카이 하베르츠의 추가골로 2:0으로 승리하며 좋은 스타트를 끊었다. 그리고 이 경기를 통해 토니 크로스가 국가대표 복귀전을 치렀고, 비르츠의 골을 어시스트했다. 이후 3월 27일 네덜란드와의 홈에서 열린 평가전에서도 2:1 역전승을 기록했다. 이제 이 좋은 분위기를 유로컵 본선에서도 이어나가야 할 것이다.
계약 종료를 3개월 앞두고 나겔스만의 바이에른 뮌헨 복귀설이 돌았지만, 2024년 4월 19일, 대표팀 계약을 2026년까지로 연장하였다. 따라서 2026 FIFA 월드컵까지 나겔스만 본인이 담당하게 되었다.[113]
유로를 앞둔 상태에서 치른 최종 평가전에서는 복병 우크라이나와 그리스를[114] 상대로 각각 0:0 무승부, 2:1 승리를 거두었다. 우크라이나전은 공격 전개와 수비 조직력은 좋았으나 결정력의 부재로 득점을 못했다. 그리스전은 전반전에는 나쁜 경기를 펼쳤지만 후반 용병술로 극적인 역전승을 거두었다. 비록 완벽한 경기력은 아니었으나 최근 월드컵 직전 평가전들 마냥 졸전은 아니었다는 점을 위안으로 삼을 만하다.[115]
일단 유로 2024 개막전인 스코틀랜드와의 경기는 5:1 대승을 거두며 기분 좋은 출발을 했고, 헝가리와의 2차전도 2:0 완승을 거두며 16강을 가뿐히 확정지었다. 16강이 확정된 상태에서 치른 스위스와의 최종전은 경기 종료 무렵에 간신히 터진 동점골로 1:1 무승부로 경기를 끝내며 조 1위로 가볍게 조별리그를 마쳤다. 이후 덴마크와의 16강전에서도 2:0 완승을 거두며 가벼이 8강 진출에 성공했고, 8강 상대는 16강에서 조지아를 4:1로 개작살낸 스페인으로 결정되었다.
그리고 아쉽게 8강에서 연장끝에 스페인에게 1:2로 패배하며 유로 대회를 마쳤다. 사실 토너먼트 대진운이 너무 없기는 했으나, 스페인의 호스트 징크스와 90년 넘게 홈에서 스페인에게 패배한 적이 없었던 것을 생각하면 정말 아쉬운 경기였다.
이렇게 결과는 다소 아쉽지만 그래도 2018년 러시아 월드컵부터 지금까지의 대회 중 이번 유로가 가장 좋은 성적을 낸 대회라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며[116] 독일이 어느 정도 부활에 성공할 수 있었음을 알린 대회였다. 그리고 독일을 탈락 시킨 스페인이 결국 해당 대회에서 우승한 최강팀이었다는 점에서, 스페인에 석패한 독일 대표팀에 대한 평가는, 2020년 이후의 반등한 경기력이었다고 평가를 받았다. 나겔스만 본인도 좋지 못한 경기력과 성적을 낸 초반에 비하면 부정적인 평가를 뒤집는 데 성공하였다.
유로 대회가 끝난 이후 대표팀의 2010년대 전성기를 이끈 마누엘 노이어, 토마스 뮐러, 토니 크로스와 주장 일카이 귄도안이 모두 은퇴하며 완전한 세대교체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공석인 주장직은 요주아 키미히에게 넘겨졌다.
[1] 월드컵은 1930년이 첫 경기로 이 항목에 들어올 수 없다.[2] 오스트리아 선수들이 독일에 감정이 좋았을리는 당연히 없고 그렇다고 독일 선수들도 오스트리아 선수들에게 포용적으로 대해주지 않았다. 아무리 헤어베어거가 명장으로 평가받는 인물이라고 해도 그건 1954년 월드컵 우승까지 합쳐진 평가이지 이때의 헤어베어거는 대표팀 재임 만 2년도 안된 신출내기였다. 당시 재임중이던 감독들 중 최고의 감독인 비토리오 포초든 선수단 장악에 일가견이 있는 후대의 알렉스 퍼거슨이든 누구라도 당시의 조건하에 이 문제를 해결하기는 불가능하다.[3] 독일 선수가 6이든, 기존 오스트리아 선수가 6이든 어쨌든 비율을 최대한 비슷하게 맞추라는 의미이다.[4] 물론 처음에는 1:1 무승부였지만, 재대결에서 2:4로 패배해서 탈락했다. 이 2경기에서 그 말도 안되는 6:5 원칙은 지켜졌다.[5] 나머지 둘은 2018년 러시아 월드컵, 2022년 카타르 월드컵. 게다가 그 나머지 둘은 1라운드(조별리그) 통과에 실패했다.[6] 사실 이탈리아도 독일, 일본과 마찬가지로 구 추축국인데도 불구하고 브라질 월드컵에 출전할 수 있었다. 이는 다른 두 나라에 비해 이탈리아가 먼저 연합군에 항복한 후 연합군으로 전향하면서 패전국이 아닌 특수지위국으로 분류되었기 때문에 월드컵 출전 금지라는 제재를 면할 수 있었던 것이다.[7] 참고로 당시 슈투트가르트 인구가 50만명이 안됐다.[8] 그래서 당시 대한민국은 서독과 같은 조였음에도 헝가리 축구 국가대표팀, 튀르키예와만 경기를 치렀다.[9] 조별리그에서도 헝가리와 만났는데, 그 때는 3:8로 발렸다. 더군다나 이 당시의 헝가리는 현재도 축구 역사상 최고의 팀들 중 하나로 손꼽히는 무시무시한 강팀이었다.[10] 다만 약빨이 있었다는 의혹이 있다.[11] 17회째는 알다시피... 그리고 그 다음에도...[12] 당시까지는 통합 분데스리가가 아닌, 각 지방의 레기오날리가(Regionalliga) 우승팀끼리 또 토너먼트를 벌여 우승자를 가리는 방식이었다.[13] 골로 인정되려면 골라인을 완전히 통과해야 한다. 영국 옥스포드대 공과대학과 임페이얼 칼리지의 연구 등에서도 이것이 노골임이 인정되었다.[14] 허스트가 막판 추가 득점을 상황도 관중이 난입하는 상황이어서 논란을 야기했다. 근데 어차피 서독 선수들이 쫓아가기를 포기한 상태였고 완벽한 1:1 찬스였기 때문에 이 골에 대해서 취소되어야 한다느니 하는 논란은 없다. 당시 경기를 뛴 베켄바우어도 훗날 인터뷰에서 잉글랜드의 우승에 대해 언급하며 무어와 찰튼을 치켜세울 때 세 번째 골에 대해서는 오심이라고 언급했지만, 네 번째 골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15] 네처는 1972 유로에서 일약 스타로 떠올랐고 이듬해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했다.[16] 귄터 네처는 1974년 월드컵 동독전에서 교체로 출전한 것이 전부였다. 1972년 유로에서 갑작스런 성공 이후 네처가 자기 관리를 소홀히 해서 폼이 떨어졌는데 이는 네처 스스로도 인정했다. 또 스타일 상 대표팀에서 네처와 베켄바워의 역할이 겹쳤고, 이때문에 베켄바워가 대표팀에서 네처를 견제했다는 썰도 있다. 네처가 레알 마드리드 선수였기 때문에 당시 서독의 쇄국정책 때문에 대표팀에서 탈락했다는 얘기도 있지만, 어디까지 네처의 폼 저하가 주 원인이었다. 쇤 감독은 월드컵 전 평가전에서 계속 네처를 기용하며 어떻게든 그를 활용해보려고 노력했다.[17] 줄리메컵이 브라질에게 영구 수여된 이후 최초로 FIFA 월드컵 트로피를 들어올린 팀이기도 하다.[18] 대표팀에서 통산 45경기 32골이라는 기록을 남겼다.[19] 차라리 1998년 월드컵 크로아티아전에 0:3으로 패한 것이 훨씬 자랑스럽고 영광스러운 일이 될 정도.[20] 이 당시에는 이기면 승점 2점이었다.[21] 훗날 2014 FIFA 월드컵 브라질 16강에서 독일과 알제리가 만났을 때는 독일이 알제리를 이겼다.[22] 결승에서 파올로 로시를 전담 마크했다.[23] 신예 리트바르스키는 이날 경기에서 선제골을 넣고, 만회골과 동점골을 어시스트하는 등 1골 2어시스트로 맹활약했다.[24] 승부차기에서 한때 한국 국대 감독을 맡았던 그 분이 키커로 나서서 실축했다. 실축하고는 그대로 푹 쓰러져 땅을 손바닥으로 치는 모습이 몹시 애잔하다...[25] 아이러니하게도 이 경기는 흡사 유로2012 4강전인 독일(1986년 프랑스)과 이탈리아(1986년 서독)와의 경기의 서막을 보는 듯 했다. 이탈리아는 조별리그에 스페인을 상대로 명승부를 펼치며 무승부를 기록했으나 이 후 크로아티아에 고전해 무승부를 거두며 1승 2무 조 2위로 8강에 진출했고 8강에서도 잉글랜드를 상대로 승부차기 끝에 간신히 4강에 진출한 반면 서독은 당시 포르투갈 - 네덜란드 - 덴마크로 이루어진 죽음의 조에서 3전 전승을 찍고 8강 체코를 상대로도 정규시간 내에 승리를 거두면서 이번에야말로 아주리 징크스를 깰 수 있다란 예상이 지배적이였으나 결과는 이탈리아의 2 : 1 승리, 그 것도 서독은 후반 막한 PK를 얻어 간신히 영패를 모면했을 뿐이다.[26] 마테우스의 인터뷰[27] 완전 반대상황이 2006년에 펼쳐지긴 했다.[28] 이 시기를 다루고 있는 영화 굿바이 레닌에서 이 시기의 모습이 잘 묘사되어있다.[29] 8강에서 이 대회 시작전까지 무승이었던 불가리아를 만나 후반전에 마테우스의 페널티킥으로 앞서나갔으나, 스토이치코프에게 프리킥으로 얻어맞고, 레치코프에게 역전골을 내주어 1:2로 역전패를 당해 탈락하였다.[30] 리들레는 90 월드컵 엔트리에 들었고 우승 멤버가 되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완전한 백업 멤버로서 주전으로 경기에 나서지는 못했다. 리들레가 본격적으로 주전이 된 것은 92 유로부터였다.[31] 대표팀에서 가장 어렸으나 대회 당시 만 25세였다.[32] 한국전 도중 야유를 보내는 관중들을 향해 꼴뚜기질을 하다가 즉시 교체 및 귀국 조치를 당하고 더 이상 국제 무대에 발을 들이지 못하게 되었다.[33] 대표팀 통산 출전 6회.[34] 이와 비견될 최악의 패배는 2004년 4월 열린 루마니아와의 경기에서 당한 1:5 대패를 들 수 있다. 그나마도 후반 막판까지 0:5로 지고 있다가 필립 람의 만회골로 간신히 영패를 면한 것.[35] 잉글랜드는 조3위로 동반 예선탈락했다.[36] 70년전에 오스트리아에 0:6으로 진 적이 있다. 1930년대 오스트리아는 섀도우 스트라이커의 아버지라 불리는 마티아스 신델라라는 엄청난 슈퍼스타를 앞세워 월드컵 4위를 기록하는 등 전성기를 구가하던 강팀이었다.[37] 이 경기 주심은 그 유명한 피에를루이지 콜리나 심판이었다. 이후 이상하게도 콜리나 심판과 독일과의 악연이 2002 한일 월드컵 결승전까지 그대로 이어지게 된다. 사실 이 경기가 있기 전에 독일 축구 협회에서 콜리나에게 선물이라고 준 게 하필이면 이것(!!)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진다.[38] 이후 스페인도 2014년 브라질 월드컵에서 이와 비슷하게 네덜란드한테 1:5로 대역전패하는 수모를 당했다.[39] 그 퇴장도 모두 경고 누적으로 인한 퇴장이기에 팀 당 8개의 옐로 카드가 제시된 것이다.[40] 이후 2006 독일 월드컵에서는 이보다 훨씬 더 심한 난투극으로 얼룩진 즉, 뉘른베르크의 전투라고 불리는 포르투갈 대 네덜란드의 16강전 경기가 열렸다.[41] 그런데 사람들은 당시 독일의 성과를 대부분 발락과 칸의 투맨쇼로 그나마 월드컵에서 준우승을 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둘이 워낙 압도적인 퍼포먼스였으니... 그리고 막말로 우크라이나와의 플레이오프에서 발락이 없었으면 독일은 진작에 예선에서 탈락했을 수도 있다. 2002 월드컵에서 독일은 주전들의 줄줄이 부상을 메첼더, 프링스 등 젊은 선수들의 기대 이상의 활약과 디트마르 하만의 중원 조율, 미하엘 발락, 마르코 보데의 위기상황에서의 한방, 거기에 올리버 뇌빌의 기동성과 베른트 슈나이더의 창의성, 미로슬라프 클로제의 고공폭격이 더해져 의외로 밸런스 자체는 잘 잡힌 팀이었다. 워낙 구식전술을 들고나온 루디 푈러 감독 체제하의 답답한 공격전개로 자국 팬들조차 야유했지만 2002년 월드컵만 하더라도 쓰리백이 의외로 먹히면서 수비라인이 어느정도 제 몫을 해주었고 4강전부터는 포백으로 과감하게 전환하는 등 2002 월드컵은 그래도 그 최악의 부상악령의 상황에서 기대이상의 성과를 얻은 것이다.[42] 99년 미국전보다도 훨씬 더 심한 졸전이였다. 여기서 독일은 경기내내 패스자체가 루마니아 선수들에게 죄다 컷팅당했고, 당시 루디 퓔러 감독은 발락에 대한 의존증을 줄이기 위해 프랑코 바우만, 파비안 에른스트 카드를 과감히 꺼내들었으나 전반에만 4골이나 먹히면서 자멸했다. 독일의 만회골도 후반 89분, 루마니아 선수들이 봐줘서 노마크 상태인 필립 람이 냅다 꽃을 중거리 골이였으니 그야말로 총체적 난국 그 자체였다.[43] 4-2-3-1은 의외로 역사가 깊은 포메이션이다. 데포르티보가 이 포메이션으로 2000년대 초 전성기를 구가했고, 90년대만 하더라도, 거스 히딩크 감독의 네덜란드와 레알 마드리드가 틈틈히 사용했던 포메이션이다.[44] 캄 노우의 기적으로 유명한 그 경기다.[45] 다만 이들은 전임 푈러 감독 시절 대표팀에서 처음 승선했다. 하지만 주전으로 도약한 것은 클린스만 감독 시절이다.[46] 마츠 후멜스와 회베데스도 2009 U-21 대표팀 출신이다. 이들은 2010 남아공 월드컵 스쿼드에는 포함되지 못했지만 2014년 브라질 월드컵에서 주전으로 활약했다.[47] 다만 2 : 1로 앞선 상황에서 프랭크 램파드의 골 라인을 넘은 슈팅이 골로 인정되지 않은 오심이 있었다.[48] 물론 당시 아르헨티나 감독인 디에고 마라도나의 최악의 지도력도 한몫하기는 했다.[49] 토마스 뮐러는 남아공 월드컵 영플레이어상과 골든슈를 차지했다.[50] 한편 2위인 스웨덴은 플레이오프에서 포르투갈의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에게 털리며 탈락했다.[51] 물론 페페가 토마스 뮐러 머리에 헤더를 가해서 퇴장당하며 포르투갈이 자멸한 게 컸다.[52] 포백 라인을 전부 센터백으로 구성하는 전술을 말한다.[53] 이제 국제대회에서 이탈리아를 이긴다면 아주리 징크스를 완전히 격파하게 된다. 참고로 이 경기에서의 승리는 통일 독일로서 가진 대 이탈리아전 승리라는 점에서 뜻깊은 경기였다. 다만 정식 메이저 국가 대항전{FIFA 월드컵과 유로}에서의 성적은 여전히 독일의 무승이므로 이들 무대 중 하나에서 독일이 이탈리아를 이긴다면 아주리 징크스를 정복하게 되는 셈이다. 그런데, 이탈리아가 2018 러시아 월드컵 본선 진출에 실패했다.[54] 그리즈만 2골[55] 칠레의 마르셀로 디아스가 페널티박스 바깥쪽에서 공을 지나치게 소유하다가 티모 베르너의 압박에 공을 놓쳤고, 베르너는 브라보를 제치고 라르스 슈틴들에게 연결, 슈틴들이 마무리했다.[56] 당시 독일이 유럽 지역예선에서 남긴 성적은 그야말로 충격과 공포 그 자체였다. 득점43점, 실점 4점, 골득실 +39, 승점 30. 괜히 월드컵 전까지만 해도 우승 후보 0순위로 평가받은 게 아니다.[57] 사실 이 경기도 그다지 좋았던 것은 아니었다. 전반 32분때 스웨덴의 올라 토이보넨에게 선제골을 허용하고 질질 끌려가다가 후반 2분에 마르코 로이스가 동점골로 균형을 맞춘 뒤, 후반 추가 시간 종료가 임박했을 때 크로스의 프리킥으로 역전골을 넣어 가까스로 승리했던 것.[58] 엄밀하게 말하면 나치 독일 시절인 (80년 전) 1938년 프랑스 대회 1라운드 탈락이 있었으므로 최초라고 할 수는 없으며, 해외 해설진 역시 "1938년 대회 이후 80년만에 첫 본선 탈락"이라고 밝히고 있다. 다만 지금과 같이 조별리그가 도입된 이후로 탈락한 경우로서는 최초가 맞다.[59] 게다가 이게 같은 유럽이나 강호인 남미가 아닌 승점자판기 역할에 '충실해야 될' 아시아 국가대표팀에게 당했다는 사실이 더더욱 치욕적이다. 디펜딩 챔피언 징크스를 당한 국가들도 아시아 국대들은 무조건 잡았었다. 그런데 독일만 실패한 것이다. 이 하나만 가지고 봐도 디펜딩 챔피언 징크스를 당한 국가들 중 최악이라는 사실을 면치 못할 정도다.[60] 이후 독일은 그 다음 월드컵에서도 아시아 팀을 상대로 또다시 패배하고 그 패배 하나로 인해 결국 월드컵 조별리그 탈락이라는 치욕을 또다시 쓰고 말았다.[61] 물론 그렇다고 강팀을 상대로 잘 한 것도 아니다. 월드컵 진출 확정 후 잉글랜드, 프랑스, 스페인, 브라질과 가진 평가전에서는 3무 1패의 성적을 거두었다. 그렇다고 약체인 사우디아라비아에게는 홈에서 졸전 끝에 간신히 승리를 거두었을 정도.[62] 독일과 달리, 네덜란드는 어느정도 리빌딩에 성공을 하였다. 쿠만 부임 이후 포르투갈을 3:0으로 압도하거나 프랑스를 2:0으로 이기는 막강한 모습을 보여주며 프랑스를 제치고 네이션스리그 4강에 진출했다. 그리고 네덜란드의 그 월드컵 본선 진출을 못했다는 조편성부터가 그 월드컵을 우승한 프랑스, 그 월드컵에서 8강에 올라간 스웨덴이 들어온 죽음의 조였다. 같은 지역예선에서 독일이 체코, 산마리노 등 코흘리개들을 상대한 것과는 격이 다르다. 실제로 본선에 올라온 독일의 꼬라지를 보면 스웨덴이나 이탈리아 자리에 독일이 들어갔으면 독일도 얄짤없이 지역예선 탈락이었다(본선에서의 선수들을 사용했을 경우). 그냥 네덜란드가 독일보다 훨씬 강해서 진거다.[63] 다만 이 경기는 더 심했던 게 믿고 있던 마츠 후멜스마저 거한 삽질을 하는 바람에 마누엘 노이어 혼자만 개고생해야 했다.[64] 독일이 다음 경기에서 프랑스에게 패해도 프랑스가 이후에 네덜란드를 잡아주고 본인들이 또 네덜란드를 이기면 잔류가 확정된다. 문제는 독일의 현 경기력을 보면 그마저도 굉장히 힘들어 보인다는 것이다.[65] 대표적으로 바스티안 슈바인슈타이거가 있는데 이 선수는 기동성과 슈팅이 별로 좋지 못했다. 만일 슈바인슈타이거의 기동성이 클로제 수준이었다면 애초부터 2010년 남아공 월드컵 준결승에서 스페인한테 패배하는 일이 없었을 것이다.[66]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와 무려 4년 넘게 전쟁하고 있다. 우크라이나는 전쟁 때문에 혼란한 상황이고, 우크라이나 정부는 친EU파와 친러파로 갈려서 스포츠 지원은 커녕 수십년 째 나라 내부 수습도 못하는 상황이니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이상으로 엄청난 선전이다. 당연히 우크라이나 축구 국가대표팀 내 선수들도 친EU파와 친러파가 갈려서 싸우는 와중에 승격한 것이다.[67] 아직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는 완벽한 주권을 행사하고 있지 못하고 민족들끼리 대통령을 한 명씩 총 세 명을 뽑는다는 것과, 이러한 정국 불안정으로 인해 스포츠도 세 쪽으로 분열되어 발전이 저해를 받는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정말 엄청나게 선전한 것이다.[68] 당장 토마스 뮐러만 봐도 점유율 축구의 전성기 때 자신의 커리어 최정점을 찍었고, 그 이후로 하향세에 있다. 즉 텐백을 뚫는데 있어 이렇다할 모습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69] 정작 독일축구협회 측과 뢰프 감독도 오히려 이런 뮐러를 옹호해 줘서 더 큰 비난을 받았다. 결국 논란이 일자 뮐러는 비하 의도가 아니라며 해명했지만 뮐러의 해명마저도 큰 문제가 되어서 더욱 비난을 받았다.[70] 여담으로 크로스는 러시아 월드컵이 끝난 뒤에도 변함없이 계속 부진 속에 빠져있었으며, 그런 모습을 보다못한 미하엘 발락이 "요하임 뢰프 감독은 러시아 월드컵 이후 자진해서 사퇴해야 했다."며 강도높게 비판했다. 이에 크로스는 "아무래도 발락이 국가대표 감독을 맡고 싶었나 보다."라며 엄연한 선배인 발락에게 빈정거리는 태도를 보였다.[71] 베테랑으로 칠 만한 선수가 주장 노이어 한 명이었다.[72] 프랑스전 1:2 패, 러시아전 3:0 승, 네덜란드전 2:2 무다. 실은 9월에 프랑스와 거둔 0:0 무승부도 경기력은 괜찮았지만, 새로운 선수들을 본격적으로 기용하기 시작한 건 10월 프랑스전부터이다.[73] 당시 리버풀과의 챔피언스리그 16강전을 앞둔 중요한 시기였다.[74] 다만 북아일랜드의 4전은 모두 벨라루스, 에스토니아를 홈/원정에서 만나면서 거둔 것으로, 앞으로 그들에게 남은 상대는 네덜란드와 독일 4연전이었다.[75] 그 위협적인 장면은 전부 마누엘 노이어의 선방에 막혀버렸다. 심지어 페널티킥까지 막혔다.[76] 플레이오프 종료 후 헝가리가 이 조에 합류하게 된다.[77] 정작 독일이 2번 포트로 밀어낸 네덜란드는 우크라이나, 오스트리아, 그리고 최약체로 불리는 북마케도니아라는 무난한 조 편성을 받아들였다. 아이러니하게도 독일에게 이 지옥의 조 편성을 뽑아준 인물은 다름 아닌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 역대 최고의 주장 중 한 명인 필립 람이었다.[78] 스페인과 스위스전 모두 이길 수 있었던 경기를 무승부로 끝냈다는데서 아쉬움이 남는다. 앞으로 독일이 A매치를 치를 때 고민해야 할 문제거리다.[79] 네이션스 리그 2경기 포함한다.[80] 하지만 이 루마니아전 역시 좋다고 할 경기는 될 수 없는 것이 고작 1점차 승리였기 때문이다. 물론 루마니아가 수비를 중요시하는 팀이고, 이 경기에서도 루마니아의 골키퍼가 맹활약을 한 점도 감안해야 하지만, 명색이 그래도 아무리 독일인데, 상대적으로 약체에 속하는 루마니아를 상대로 고작 1점차 승리밖에 못 거뒀다는 것은 자존심에 상처받는 일이다.[81] 참고로 그 20년 전의 경기는 독일이 자신들의 홈 경기장에서 잉글랜드에 1:5로 대패한 그 경기다.[82] 원래 국명은 마케도니아였는데, 2018년 부로 국명이 변경되었다. 그렇지만 마케도니아라는 이름이 워낙 익숙한 이름이라서 아직까지 북마케도니아라는 이름은 꽤 낯설은 이름이다.[83] 게다가 현재 월드컵 지역예선 조별 순위가 3위인데다 골득실도 1위와 2위에 비해 열세여서 그야말로 좌불안석인 상황이다. 최악의 경우, 본선 진출에 실패라도 한다면 그야말로 독일축구협회가 단체로 석고대죄를 해도 모자랄 정도의 위기를 맞이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 이미 말한 바이지만, 독일과 함께 조를 이룬 국가들 가운데 독일에게 위협이 되거나 독일을 탈락시킬 정도의 위협이 될 만한 국가도 없어서 변명조차도 못할 입장이다.[84] 독일이 2000년 유로 대회에서 포르투갈에 0:3 패배를 당한 것을 마지막으로 모든 경기에서 포르투갈을 이겨왔는데, 경기력이 이전보다는 불안한 지금의 독일도 포르투갈만큼은 기막히게 잘 이기고 있다.[85] 이제 남은 과제는 2022 FIFA 월드컵 카타르 본선진출이다. 관건은 독일 국대 감독을 맡게 될 한지 플릭이 어떤 전술이나 선수단 운영을 할 것인가다. 더구나 독일이 계속되는 하향세 가운데 대표팀 감독에 오른 상황이기 때문에 독일 국대의 부활이란 막대한 사명 또한 있다. 어쨌든간에 당장 최우선 목표는 독일의 카타르 월드컵 본선진출이며 이는 어쩌면 플릭 감독의 커리어를 걸어야 할만큼 중대한 과제가 될지도 모른다.[86] 한국시간 기준.[87] 역시 한국시간 기준.[88] 역시 한국시간 기준.[89] 한국시간 기준.[90] 역시 한국시간 기준.[91] 재밌게도 후반 막판에 양 팀이 페널티킥을 하나씩 얻었는데, 둘 다 못 넣었다(...).[92] 더욱이 네덜란드 홈임에도 골 이외의 지표에서는 다 앞섰다.[93] 특히 잉글랜드전은 플릭 부임 이후로 최고의 경기력을 보이며 유로 준우승 멤버를 다 들고 나온 잉글랜드를 그야말로 압도해버렸다. 결정력 부족과 수비 실책으로 비긴 것이 정말 아쉬울 정도였다.[94] 2014 FIFA 월드컵 브라질 당시 E조의 프랑스 대 스위스 경기와 유사하다. 공교롭게도 이 경기도 5:2로 프랑스가 크게 이겼고, 프랑스가 먼저 5골을 때려박았다.[95] 독일이 일본에 역전패를 당한 것 하나만으로도 일찌감치 독일의 조별리그 광탈 위기가 거론된 것은 다름 아닌 2차전 상대가 스페인이기 때문이다. 이미 스페인은 2010 FIFA 월드컵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잉글랜드와 아르헨티나를 큰 점수차로 꺾어 승승장구하던 독일을 준결승전에서 카를레스 푸욜의 헤딩골로 1:0으로 꺾어 독일을 3위 결정전으로 떨어뜨리고 스페인과 네덜란드의 대결이 되어버린 남아공 월드컵 결승전을 지켜보는 신세로 만들었으며, 네이션스 리그 2020-21 시즌에서도 독일을 무려 6:0으로 완전히 박살내기까지 할 정도로 확실한 독일 킬러 중 하나다. 게다가 독일 대 일본 경기 직후 나온 스페인 대 코스타리카 경기에서는 스페인이 아예 코스타리카를 무려 7:0으로 짓밟아버리는 무시무시한 위력까지 보여주어 독일을 더욱 긴장시키게 만들었다.[96] 오죽하면 일각에서는 2018년에는 대한민국에 완패를 당하고 2022년에는 일본에 역전패를 당했듯이 2026년에는 중국한테 패배할 차례라는 설레발까지 벌써부터 나올 정도다. 하지만 지역예선에서 항상 빌빌대고 아시아 내에서도 현재는 약체 취급받을 정도로 위상도 왕창 추락한 데다가 다른 팀들에 비해 의지력까지 약한 것으로 알려진 중국한테까지 이런 수모를 당할 가능성은 거의 희박해 보인다. 오히려 이란, 사우디아라비아, 호주 같은 다른 아시아 국가들이라면 일말의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른다. 특히 사우디아라비아는 지난 카타르 월드컵에서 아르헨티나를 상대로 역전승을 거둔 일이 있었던 만큼 다시 맞붙는다면 지난 한일 월드컵 때의 그 수모를 설욕할 가능성도 있다. 그 외에도 여기에 거론된 또다른 나라들인 이란과 호주도 독일에게 갚아줘야 할 것들이 있는데, 이란은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 당시 조별리그 F조에서 독일에 0:2로 완패해서 16강 진출에 실패한 수모를 갚아줘야 하고, 호주도 1974 FIFA 월드컵 서독 당시 조별리그에서 동독과 서독한테 연달아 0:2 및 0:3으로 각각 완패한 것과 더불어서 2010 FIFA 월드컵 남아프리카 공화국 당시 조별리그 D조에서 초장부터 0:4로 대패한 것들도 다 갚아줘야 한다. 더군다나 호주는 남아공 월드컵 당시 독일전 대패가 결정타가 되면서 이후 가나전 무승부와 세르비아전 승리를 기록하고도 골득실에서 밀리면서 불행하게 16강 진출에 실패했기에 복수심이 남다를지도 모른다.[97] 더군다나 유로 2024는 독일 본인들이 개최국이다. 만약 자국에서 열리는 대회마저 졸전을 보이다가 형편없이 무너진다면 그야말로 자국민들의 민심과 평판 그리고 신뢰는 회복 할 수 없을 정도로 최악으로 떨어질지도 모를 전망이며, 자국팀을 응원하는 것보다 타국팀(특히 독일과 겨루는 상대팀)을 더 응원할 극단적인 상황도 벌어질 것이다. 실제로도 2023년 가을, 일본과의 친선경기에서 1:4로 크게 무너지자 기가 질린 독일인들은 일본 선수들이 공을 잡을 때마다 환호하는 모습을 보이기까지 했다. 마치 2014 브라질 월드컵 때 미네이랑의 비극 당시 브라질의 어이없는 실점 장면에 기가 질린 브라질인들이 결국 독일이 공을 잡을 때마다 환호하는 그야말로 아이러니한 모습을 보여주었듯이 말이다.[98] 정작 이미 2023년 9월 9일에 치른 일본과의 평가전에서의 1:4 대패로 인해 한지 플릭은 유로컵 본선도 못 치르고 독일 축구 연맹으로부터 감독직에서 경질된 상태다.[99] 결국 당해 가을, 플릭이 해고되면서 이 경기가 플릭이 마지막으로 독일 국대를 이끌고 승리한 경기로 남게 되었다.[100] 뢰브 시절에 전반전에 연속골을 먹고도 정신을 못 차려서 스페인에게 박살난 걸 생각하면 그나마 발전한 것이지만, 냉정하게 보면 이 정도로도 발전이라고 한 것이라면 독일의 명성과 위상이 최악으로 떨어질 정도로 암흑기에 빠져 있는 셈이다.[101] 만일 테어슈테겐의 선방쇼조차도 없었다면 그 이상의 스코어도 나올 수 있었고 심한 경우 미네이랑의 비극 때 자신들이 했던 것을 역으로 당하거나 세비야 쇼크를 한번 더 맛보게 되는 비참한 꼴이 되었을 가능성도 있었다.[102] 사실 6월 평가전만 봐도 이 참사는 사실상 예견되어 있었다. 이런 질이 낮은 경기력으로는 당시 위르겐 클린스만이 이끌었던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을 상대로도 도저히 이긴다고 쉽사리 장담할 수가 없는데, 그보다 더 강한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한테 복수한다는 그야말로 혼이 덜 난 모습을 보인 것이다. 차라리 러시아 월드컵에서 타격을 입었던 대한민국을 먼저 상대했어야 했었다. 당시 대한민국도 클린스만 감독의 이런저런 문제점들로 잡음이 많고 혼란스러웠던 상태였으며 그나마 이길 수 있는 상대였었고, 플릭 감독에게도 차가운 자국 여론을 달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러나 여전히 독일 축구는 아시아 축구가 만만하게 보였는지 일본을 먼저 불러들였다가 이런 비참한 꼴을 당하고 만 셈이다.[103] 독일에서는 리버풀 감독과 국대 감독을 병행하면서 국대는 대회 있을 때 잠깐씩만 보는 것도 좋으니 자국을 위해서 제발 와 달라는 이야기까지 나올 정도로 많은 지지를 받았다.[104] 이게 당연한 것이, 클롭은 리버풀을 9년이나 지휘해왔고, 그동안 프리미어 리그 출범 이후 클럽 최초 리그 우승 및 챔피언스 리그 우승까지 달성하면서 리버풀 팬들이 제2의 샹클리라고 할 만큼 리버풀 팬들에게도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감독이다. 그런 감독이 그것도 시즌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타 팀으로 가는 것은 도의적으로 봐도 옳지 못한 일이다.[105] 참고로 멕시코는 지난 월드컵 조별리그에서 탈락하는 등 최근 몇 년간 최악의 부진을 겪고 있다. 그런 멕시코를 상대로 비긴 것이다.[106] 심지어 지난 2018년 러시아 월드컵에서는 멕시코를 상대로 0:1로 패한 적도 있다. 긍정적으로 보자! 그 때보다는 성적이 나아졌잖아?[107] 현재 독일의 문제점은 득점력에 비해 높은 실점률을 보인다는 점이다. 3월에 벌인 페루전 이후로 모든 경기에서 실점을 기록하고 있는데 이 중 2실점 이상 기록한 경기가 다수일 정도로 독일의 수비에 구멍이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108] 정작 이 승리 경기들조차도 하나같이 경기 내용은 별로였다.[109] 다만 그 때는 월드컵 출전으로 인해 2023년보다 2경기를 더 치른 상황이었다. 즉, 더 적은 경기를 치렀는데도 패배 수가 같은 2023년이 더 심각한 상황이다.[110] 아무리 이날 프랑스가 힘을 뺐다지만, 현재로서는 승리한 것 자체가 참 신기하고 놀랄 노인 상황이다(...). 특히 독일 역시도 부상으로 인해 풀 스쿼드 가동이 불가능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더더욱. 심지어 프랑스는 독일 굴욕 월드컵인 러시아 월드컵에서는 우승을, 카타르 월드컵에서 준우승을 거둔 팀이다.[111] 더군다나 독일은 지난 대회에서 헝가리 때문에 조별리그에서 자칫하면 광탈할 뻔 했다.[112] 역대 A매치 최단시간 골이었으나 같은 날(!) 오스트리아가 슬로바키아 상대로 6초만에 골을 만들며 깨졌다.[113] 물론 중간에 성적이 조금이라도 부진하면 중도에 계약을 해지하거나 짤릴지도 몰라서 오래 갈지는 미지수일 것이다. 참고로 계약에 유로 2024에서 부진 시 조기 계약해지 조항이 존재한다고 한다.[114] 두 팀 모두 본선에 직행하지 못하고 플레이오프로 밀려났으나 (우크라이나 진출, 그리스 탈락), 예선 조편성을 하필 잉글랜드/이탈리아, 프랑스/네덜란드라는 지옥의 대진을 받아서 밀려난 것이지 실제로는 고춧가루 부대 역할을 꽤 톡톡히 했다.[115] 2018년 월드컵 직전에는 오스트리아에게 무기력하게 역전패했고, 사우디아라비아를 상대로는 2:1로 간신히 이겼다. 2022년 월드컵 때는 오만을 상대로 역대급 졸전을 펼치며 1:0으로 겨우 이겼다. 역시 독일 잡는 데는 아시아가 최고.[116] 2018 월드컵 32강 탈락, 2020 유로 16강 탈락, 2022 월드컵 32강 탈락, 2024 유로 8강 탈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