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26 14:04:14

안드레아스 쾨프케

안드레아스 쾨프케의 수상 이력
{{{#!folding [ 펼치기 · 접기 ] 둘러보기 틀 모음
개인 수상
파일:IFFHS 세계 최고의 골키퍼.png
베스트팀
파일:Kicker 로고.svg
1987-88 · 1992-93 · 1994-95
파일:UEFA 유로 1996 심볼.svg

1993 독일 올해의 축구 선수
토마스 헤슬러
(AS 로마)
안드레아스 쾨프케
(1. FC 뉘른베르크)
위르겐 클린스만
(AS 모나코 FC)

FIFA 월드컵 우승 멤버

UEFA 유러피언 챔피언십 우승 멤버
1996
}}} ||
독일의 축구인
파일:안드레아스쾨프케.jpg
<colbgcolor=#eee,#191919><colcolor=#000,#e5e5e5> 이름 안드레아스 쾨프케
Andreas Köpke
출생 1962년 3월 12일 ([age(1962-03-12)]세)
서독 슐레스비히홀슈타인주
국적
[[독일|]][[틀:국기|]][[틀:국기|]]
신체 182cm
직업 축구 선수 (골키퍼 / 은퇴)
축구 코치
소속 <colbgcolor=#eee,#191919><colcolor=#000,#e5e5e5> 선수 홀슈타인 킬 (1979~1983)
SCC 베를린 (1983~1984)
헤르타 BSC (1984~1986)
1. FC 뉘른베르크 (1986~1994)
E. 프랑크푸르트 (1994~1996)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 (1996~1999)
1. FC 뉘른베르크 (1999~2001)
코치 독일 대표팀 (2004~2021 / 골키퍼 코치)
헤르타 BSC (2019 / 골키퍼 코치)
대한민국 대표팀 (2023~2024 / 골키퍼 코치)
통산 득점 2골
국가대표 59경기 (독일 / 1990~1998)
{{{#!wiki style="margin: 0 -10px -5px"
{{{#!folding 정보 더 보기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colbgcolor=#eee,#191919><colcolor=#000,#e5e5e5> 등번호 독일 대표팀 - 12번, 22번, 1번
1. FC 뉘른베르크 - 1번
E. 프랑크푸르트 - 1번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 - 1번
가족 아들 파스칼 쾨프케 }}}}}}}}}

1. 개요2. 선수 경력3. 지도자 경력
3.1. 한국 대표팀 골키퍼 코치
4. 기록
4.1. 대회 기록4.2. 개인 수상
5. 여담6.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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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독일축구 선수 출신 코치. 선수 시절 포지션은 골키퍼.

유로 1996 우승 당시 독일의 주전 멤버로 전임자였던 보도 일그너[1]와 후임자였던 올리버 칸이 워낙 뛰어난 골키퍼들이라 상대적으로 초라해보이는 경향이 있지만 쾨프케 역시 1996년 베스트 유러피언 골키퍼를 수상할 정도의 실력자였다.

은퇴 이후 독일 축구 협회와 대표팀에서 골키퍼 코치를 오랫동안 맡아 오면서 기존의 방어 위주의 플레이에서 벗어나 독일 내에 빌드업을 장착한 골키퍼들의 산파 역할을 한 개척자다.

2. 선수 경력

파일:Andreas Köpkee.jpg
상대적으로 뒤늦게 빛을 본 대기만성형의 선수로 1979년 홀슈타인 킬에서 처음 선수 생활을 시작해 1990년 처음으로 국가대표에 승선하기까지 무려 11년이 걸렸다. 독일이 통산 세번째 우승을 차지한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에도 당당히 명단에 이름을 올렸지만 이 시기 독일의 주전 수문장은 보도 일그너였기에 서브 골키퍼로의 역할에 만족할 수 밖에 없었다.[2] 1993년 독일 올해의 선수로 선정될만큼 훌륭한 실력을 소속 클럽에서는 선보였지만, UEFA 유로 19921994년 미국 월드컵에서도 주전은 변함없이 일그너였고,[3] 게다가 일그너가 그보다 무려 5살이나 젊었기에 국가대표에서는 평생 후보로 만족해야 할 것처럼 보였지만 1994년 월드컵 8강에서의 충격적인 탈락 이후 일그너가 27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국가대표 은퇴를 선언하면서 그에게 드디어 서광이 빛추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주전 자리를 차지한 UEFA 유로 1996에서 눈부신 선방을 보여주면서[4] 독일의 우승을 이끌었고 이를 바탕으로 1996년 유럽 올해의 골키퍼 상을 수상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이 시기에 이미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은 서서히 침체기로 빠져들고 있었고 1998년 프랑스 월드컵 8강전에서 크로아티아에게 3-0으로 참패를 당한 직후 국가대표의 자리에서 은퇴를 선언한다.

파일:external/lh6.googleusercontent.com/bc9d3a746f1a.jpg
▲1998 월드컵 8강 크로아티아전 선발 라인업(콜러, 하만, 타르나트, 하인리히, 비어호프, 뵈른스, 마테우스, 헤슬러, 예레미스, 클린스만(주장), 쾨프케)

1998년 프랑스 월드컵을 앞두고 당시 대표팀의 핵인 리베로 자머가 부상으로 대회에 출전할 수 없게 되자 대신 만37세의 노장 마테우스의 대표팀 승선이 결정되었다. 16강에서 멕시코에 2:1 승리를 거두는 등 그럭저럭 8강에 올라왔으나, 8강에서 독일은 크로아티아에 0:3으로 완패당했다.



이 경기에서 전반 막판에 뵈른스가 백태클로 퇴장당하는 역적질을 저지르며 독일에 구멍이 뚫리기 시작하며 무너지기 시작한게 컸지만, 이 경기에서 크로아티아는 딱딱하고 투박한 독일식 축구를 어떻게 해체하는지 잘 알고 있음을 증명했다.[5] 그리하여 독일은 크로아티아 특유의 독일 약점 공략전술과 다보르 슈케르, 크로아티아의 LTE급 역습에 그대로 털려 결국 KO되고 말았다. 이때 당시 크로아티아는 조별리그에서 최고 허접 자메이카에게도 패한 일본을 상대로 하마터면 비길 뻔한 경기력을 보여주었다고는 해도 처녀 출전국치고는 1998 프랑스 월드컵 본선 최대 돌풍팀이었다.

이 경기 이후 당시의 크로아티아에게 당한 충격은 독일인들에게 거의 종말, 나라 잃은 슬픔에 가까운 충격을 줬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 독일은 크로아티아전 패배로 8강에서 탈락한 이후 독일축구는 약 6년간 최악의 암흑기를 겪게 된다. 또 94년 월드컵 8강전에서 불가리아에 패한 데 이어 1998년 월드컵 8강 크로아티아전 패배한 이후 독일은 한동안 동유럽 징크스, 동유럽 공포증에 시달리게 되었다. 또 여전히 고전적인 3백을 고집해 현대 전술사의 흐름에 뒤쳐졌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UEFA 유로 1996때와는 다르게 1998 프랑스 월드컵에서는 예선전 유고슬라비아전에서 알까기로 실점을 허용하는 듯 다소 각 떨어진 모습을 보이긴 했지만 마티아스 자머가 부상으로 빠진 녹슨 수비진이 더 문제였고, 크로아티아전은 크리스티안 뵈른스의 퇴장이 너무나 치명적이었다. 그리고 실점한 중거리포들도 너무 말도안되게 바운드까지 먹어서 구석으로 가는 역사적인 럭키슛들이었고 아마 당시 잘나가던 호르헤 캄포스, 파비앵 바르테즈, 에드빈 판데르사르, 김병지도 어쩔 수 없이 먹혔을만한 상황이지만 3실점 탈락이라는 멍에를 혼자 다 뒤집어쓰고 말았다. 당시 경기 중 감정이 격해진 나머지 골대를 후려치던 모습이 독일인들로 하여금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6] 그리고 그 결과로 쾨프케의 뒤를 이어 국가대표에서 거의 10년 동안 벤치만 달구던 한 맺힌 굇수이 수문장으로 등장하는데...

한편 클럽 커리어 상으로는 대부분의 시기를 1. FC 뉘른베르크에서 보낸 뉘른베르크의 레전드 출신이다. 덕분에 나중에 뉘른베르크의 홍보 담당 대사를 맡기도... 뉘른베르크 외에도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올랭피크 드 마르세유에서 전성기의 한 자락을 보냈으며 2001년을 끝으로 선수에서 은퇴한다.

3. 지도자 경력

2004년부터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의 골키퍼 코치를 맡으며 독일 국가대표의 성공시대의 황금 조연으로 활약했다. 쾨프케의 지도를 받은 선수 면면만해도 올리버 칸, 옌스 레만, 마누엘 노이어, 마르크안드레 테어 슈테겐, 베른트 레노 등 압도적인 이름값들이 상당수 보이고 있으니 독일 국대에 얼마나 큰 기여를 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들에게 주입시킨 골키퍼로부터 비롯되는 빌드업이나 노이어 특유의 스위퍼 골키퍼 등 현대적인 골키퍼상을 정립시키는데도 기여하기도 했다.

선수로서 한솥밥먹던 위르겐 클린스만과 독일 국대로 지도자까지 동반 데뷔했으니 그와는 연줄이 제법 두터웠으며 클린스만이 퇴진한 뒤 수석코치였던 요아힘 뢰브가 감독으로 승격하자 이어서 뢰브를 보필하기 했다. 2014 브라질 월드컵에선 독일이 우승하기도 했으니 선수로서도 지도자로서도 월드컵 우승을 맛보던 진기록을 달성하던 바 있었다. 그러다 2021년 6월 뢰브 감독이 UEFA 유로 2020을 끝으로 사임하자 본인도 17년간 몸 담았던 대표팀 코치직을 내려놨다.

2019년에는 위르겐 클린스만헤르타 BSC의 감독으로 임명되자 그를 따라 헤르타의 골키퍼 코치를 잠시 역임했었다.

3.1. 한국 대표팀 골키퍼 코치

파일:독일 국기.svg 위르겐 클린스만
파일:오스트리아 국기.svg 안드레아스 헤어초크 | 파일:이탈리아 국기.svg 파올로 스트링가라 |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차두리
파일:독일 국기.svg 안드레아스 쾨프케 | 파일:독일 국기.svg 베르너 로이타르트 |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이재홍

2023년 3월 9일, 위르겐 클린스만 감독의 취임 기자회견에서 쾨프케의 한국 대표팀 클린스만호 골키퍼 코치 부임이 확정되었다. 워낙 초호화 코치라 한국이 데려오긴 하늘의 별따기 자원이었지만, 클린스만의 인맥이었기에 무난히 선임되어 상당히 팬들에게 호평을 받았다. 한국 대표팀의 역대 골키퍼 코치 중에서는 가장 이름값이 높다고도 볼 수 있다.

클린스만호 출범 당시만 해도 클린스만 본인만이 국내 상주를 약속받았고 쾨프케를 포함한 코치진은 국내 상주 조항에서 예외였던 터라 관련해서 논란이 있었지만, 정작 국외 일정을 빌미로 실질적으로 국내 체류가 없다시피한 클린스만과는 달리 쾨프케는 자발적으로 한국에 상주하며[7] K리그를 순회하며 선수 점검을 성실히 이행한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그런지 클린스만 감독과 헤어초크, 스트링가라 코치에 대한 평가가 안 좋은 데 로이타르트 피지컬 코치와 그는 평가가 좋다.

카타르 아시안컵 사우디전 승부차기에서 조현우가 선방을 하는 모습을 누구보다 긴장스럽게 바라보면서 열광하는 모습을 보였다. 조현우도 쾨프케 코치의 도움이 컸다고 언급했다.

이후 위르겐 클린스만의 경질 이후 자연스럽게 한국 대표팀을 떠났다. 하지만 후속 취재에 의하면 구식 골키퍼 훈련만 했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는데, 대표팀 골키퍼들이 딱히 불만을 가지지도 않았고 오히려 긍정적인 평가를 했던 걸 보면 정말 딱 기본적인 골키퍼 훈련만 했을 수도 있다. 물론 쾨프케가 애초에 골키퍼 코치인 만큼[8] 이게 딱히 잘못되었다고 하기에는 판단하기 쉽지 않다.

그가 독일 대표팀에서 촬영한 빌드업 훈련을 비롯한 체계적인 골키퍼 훈련법을 강의하는 영상#이 유튜브에 남아있는 것을 보면 과연 그렇게 훈련세션이 올드한 것인지는 선수들 외에는 알 수 없다.

본인이 FC 뉘른베르크 주요 선수였고, 자신의 아들이 뉘른베르크에 뛰는 지라 팀에 있는 옌스 카스트로프 발탁작업을 주도했다고 한다. 물론 이는 클린스만호가 해체되고 나서 동력을 잃어버렸다.

4. 기록

4.1. 대회 기록

4.2. 개인 수상

5. 여담

  • FM에서도 본좌급 라인 GK 코치로 유명하다.

6. 둘러보기

1 일그너 · 2 로이터 · 3 브레메 · 4 콜러 · 5 아우겐탈러 · 6 부흐발트 · 7 리트바르스키 · 8 헤슬러 · 9 푈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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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클린스만 · 19 플뤼글러 · 20 · 21 헤르만 · 22 쾨프케
파일:독일 국기.svg 프란츠 베켄바워

1 쾨프케 · 2 뵈른스 · 3 하인리히 · 4 콜러 · 5 헬머 · 6 · 7 묄러 · 8 마테우스 · 9 키르스텐
10 헤슬러 · 11 마르샬 · 12 · 13 예레미스 · 14 바벨 · 15 프로인트 · 16 하만 · 17 치게
18 클린스만 · 19 로이터 · 20 비어호프 · 21 타르나트 · 22 레만
파일:독일 국기.svg 베르티 포크츠


[1] 일그너는 1990년 월드컵 우승을 이끌며 어린 나이에 독일 대표팀 주전 넘버원을 차지 했지만 1994년 월드컵을 기점으로 하향세에 접어들면서 은퇴후 쾨프케에게 주전 자리를 내주었다. 심지어 쾨프케가 일그너보다 무려 5살 연상이다.[2] 그가 젊은시절인 1980년대는 선배인 토니 슈마허가 있었고 슈마허의 은퇴 후 일그너와 경쟁하게 되었는데 분데스리가에서의 위상은 쾨프케가 일그너 보다 좀더 높았지만 당시 베켄바워 감독의 전술상으로 장신의 일그너가 주전 골키퍼로 더 적합하다 판단했고 토너먼트 특성상 승부차기 까지 대비하는 상황까지 올수있기에 장신키퍼가 유리한점을 고려해서 실력보다는 전술상으로 쾨프케가 주전이 되지 못한 불운이었다.[3] 베켄바워 감독 시절에도 전술상으로 쾨프케가 주전이 되지 못했지만 당시 수석코치였던 포그츠가 감독으로 승격되어 바뀌어도 월드컵 우승 주전 골키퍼를 교체할 명분이 없었고 토너먼트에서 승부차기 까지 대비해야하는 상황에서 장신인 일그너가 더 적합하다는 점에서는 포그츠 감독도 같은 생각이었다. 게다가 94 미국 월드컵 전까지 일그너의 폼도 쾨프케 못지않게 이때까지는 좋았다.[4] 특히나 잉글랜드와의 4강 경기에서 경기 내내 일방적으로 잉글랜드에게 밀렸지만 안정적으로 골문을 지킨데 이어 승부차기에서 가레스 사우스게이트의 슛을 막으며 팀을 결승으로 이끌었다.[5] 이미 2년전 유로 96 8강에서 양팀이 당시나 이때나 비슷한 멤버로 경기를 해봤고 비록 당시는 크로아티아가 2-1로 패배했지만 독일에대한 공략법을 이당시 선수들이 어느정도 습득한셈이다.[6] 사실 3골이나 먹히긴 했지만 쾨프케가 뭘 어찌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뵈른스가 백태클로 한 큐에 레드카드를 먹고 퇴장당한 수적열세의 상황에서 야르니와 블라오비치의 대각선 중거리 슈팅도 도무지 막을 수 없는 구석으로 꽂혀들어가기도 했고...[7] 사실 별로 이상할 것도 없는 게 국대 골키퍼 중 유럽파는 0명이다. 다만 아랍 리그에서 뛰는 김승규와 일본에서 뛰는 송범근이 있어서 전원 국내파까지는 아니지만...[8] 골키퍼라는 포지션이 요구하는 역량이 타 포지션들과 많이 다르기 때문에 골키퍼 코치는 코치진 내에서도 유독 따로 노는 경향이 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