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1-31 23:38:16

프랑크 밀

프랑크 밀의 역임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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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루시아 도르트문트 주장
디르크 후퍼
(1985~1987)
프랑크 밀
(1987~1988)
미하엘 초르크
(1988~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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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크 밀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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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前 축구선수
파일:frankmill.jpg
<colbgcolor=#f0f0f0> 이름 프랑크 밀
Frank Mill
출생 1958년 7월 23일 ([age(1958-07-23)]세)
서독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에센
국적
[[독일|]][[틀:국기|]][[틀:국기|]]
직업 축구선수 (스트라이커 / 은퇴)
축구 감독
소속 <colbgcolor=#f0f0f0> 선수 BV 아인트라흐트 (1964~1972 / 유스)
로트바이스 에센 (1972~1976 / 유스)
로트바이스 에센 (1976~1981)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 (1981~1985)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1986~1994)
포르투나 뒤셀도르프 (1994~1996)
기타 포르투나 뒤셀도르프 (1996 / 디렉터)
국가대표 파일:독일 축구 국가대표팀 로고.svg 17경기 0골 (서독 / 1982~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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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독일의 전 축구선수

2. 선수 경력

2.1. 클럽 경력

2.1.1. 로트바이스 에센

BV 아인트라흐트 1916에서 유스 생활을 하던 중, 1972년 스카우터들의 눈에 들어 로트바이스 에센으로 팀을 옮겼다.
76/77시즌 부터 성인팀에서 경기를 뛰기 시작했다. 호르스트 흐루베슈과 주전 경쟁을 하며 첫 시즌 19경기 3골을 득점했다.밀은 11월 27일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를 상대로 한 3:1 패배에서 에센의 유일한 골로 데뷔했다.
에센은 그의 첫 시즌에서 6승에 그치며 강등되었다.

2부리그에서는 지속적으로 승격 도전을 하는 팀이었다. 80/81시즌에는 40경기 38골로 득점왕을 차지하기도 했다.

2.1.2.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

유프 하인케스 감독의 묀헨으로 이적하여 81/82시즌부터 활약했다. 쿠르트 핀칼과 함께 공격진에서 활약하며 리그 32경기 14골을 득점했고 묀헨은 7위로 시즌을 마쳤다. 82/83시즌에는 9골 득점에 그쳤고, 팀 역시 12위로 부진했다.

83/83시즌은 성공적이었다. 리그 19골로 팀을 3위로 이끌었다. DFB-포칼에서도 결승에 올랐다.
바이에른 뮌헨과의 결승에서 밀은 전반 32골 선제골을 넣었으나, 볼프강 드렘러의 83분 득점으로 경기는 승부차기 끝에 바이에른의 승리로 끝났다.

묀헨에서의 남은 두 시즌에서도 리그 16골, 13골로 활약했다. 85/86시즌 UEFA 컵 16강 1차전, 레알 마드리드를 상대로 한 역사적인 5:1 승리에서 선제골을 기록하기도 했다.
하지만 묀헨은 2차전에서 4:0으로 패하여 대회를 탈락했다. 헬무트 그라쇼프 감독은 이에 프랑크 밀을 지목하여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결국 밀은 구단 운영진 및 감독과의 갈등으로 이적을 선택하게 된다.

2.1.3.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1986년 여름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로 1300만 마르크로 이적했다. 토마스 헬머, 노르베르트 디켈과 함께 합류했는데, 이들 3인은 도르트문트의 성공에 크게 기여한다.

86/87시즌 도르트문트는 4위로 시즌을 마쳤고, 밀은 17골을 득점했다.[1]
88/89시즌에는 DFB-포칼 결승에서 SV 베르더 브레멘을 상대로 결승골을 득점하며 4:1 승리를 이끌었다.
하지만 이후 점점 득점이 감소하며 미하엘 루메니게, 위르겐 베그만, 스테판 샤퓌자, 플레밍 포블센 등에 의해 주전자리를 완전히 빼앗긴다.

93/94시즌에는 리그 12출전에 그쳤으며 득점도 실패했다. 결국 밀은 도르트문트를 떠나게 된다.

2.1.4. 포르투나 뒤셀도르프

1994년 여름, 출전시간 확보를 위해 2부 리그의 포르투나 뒤셀도르프로 이적했다.
리그 27경기 5골로 팀을 3위로 이끌며 승격시켰다.
승격한 이후 95/96시즌, 분데스리가에서 1. FC 쾰른, FC 샬케 04를 상대로 1골씩을 득점하며 2골로 시즌을 마쳤다.
이후 선수에서 은퇴하였다.

2.2. 국가대표 경력

1982년 3월 21일 유프 데어발 감독의 독일과 브라질의 친선전에서 85분에 교체 투입되며 데뷔하였다.
1988 서울 올림픽에서는 주장으로서 팀을 이끌고 동메달을 차지했다. 1984, 1988 월드컵에서 10골을 기록하며 독일 선수 중 올림픽 최다 득점자이다.
UEFA 유로 1988에서 출전하였고, 1990 FIFA 월드컵 이탈리아에도 소집되었지만, 프란츠 베켄바우어의 독일 팀에서 그는 루디 푈러, 위르겐 클린스만, 카를하인츠 리들레에 이은 4순위 공격수였고 경기에도 출전하지 못했다.

3. 여담

  • 2017년 출간된 그의 자서전에서 분데스리가 경기를 앞두고 도핑 약물을 사용한 적이 있다고 시인했다.
  • 축구선수가 되기 전에 꽃집을 운영하던 어머니를 도와 플로리스트로 일했었다.
  • 다혈질로 유명한데, 노르베르트 디켈은 "밀은 하수구에 들어간 것처럼 행동한다"고 이에 대해 말한 적 있다.
  • 은퇴 이후 포르투나 뒤셀도르프의 디렉터로 부임했으나 성적 부진으로 1년만에 사임하였다.
  • 신가드를 신지 않는 것으로 유명해서 "Hängesocke[2]"이라는 별명이 있었다.
  • 독일에서 우베 바인, 마우리시오 가우디노 등과 축구 학원을 운영하고 있다.


[1] 노르베르트 디켈은 20골, 미하엘 초르크 14골을 득점했다.[2] 흔들리는 양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