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1-27 13:03:57

이사부

김태종에서 넘어옴

삼국사기(三國史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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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실제 홍길동을 언급한 건지 후대 인물 허균이 창작한 의적 홍길동을 언급한 건지 논란이 있지만 간접적인 언급으로 소설 홍길동전에서 대중화된 의적 이미지를 노래 가사로 사용했으므로 저자 허균을 생각하고 언급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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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병부령
이사부
異斯夫
파일:external/www.kado.net/517458_174429_1811.jpg
이사부 국가표준영정.[1]
<colbgcolor=#004098> 이름 김이사부(金異斯夫, 삼국사기)
김태종(金苔宗, 《삼국사기》)
이사부(伊史夫, 단양 신라 적성비)
이질부례(伊叱夫禮, 일본서기)[2]
박이종(朴伊宗, 삼국유사)
김(金) / 박(朴)(?)
본관 경주 김씨
골품 진골
관등 나마(奈麻)[3]이찬(伊飡)[4]
생몰년 480년대 ~ 562년 이후
직위 실직주(悉直州) 군주 (505)
아슬라주(阿瑟羅州) 군주 (512)
상신(上臣) (529)
병부령(兵部令) (541)
《삼국사기》 권44 이사부 열전
1. 개요2. 이름3. 생애
3.1. 탄생3.2. 최초 가야 일대 공격3.3. 우산국(울릉도) 복속3.4. 금관가야 공격3.5. 병부령에 임명3.6. 진흥왕의 한반도 정복사업 시기3.7. 가야멸망전 지휘3.8. 말년
4. 평가5. 기타6. 대중매체에서

[clearfix]

1. 개요

신라장군, 수군 제독, 진흥왕 재위기의 병부령(兵部令).[5]

신라 전반기 최고의 명장으로, 신라 지증왕에서 진흥왕 시기인 6세기 초중반 시기에 활동하였으며 신라군을 지휘하여 전성기영토 확장을 이룩한 공신이다. 상대등 거칠부(居柒夫), 대각간 구진(仇珍) 등과 함께 백제, 고구려를 공략함으로써 경상도 지역에 국한되어 있던 신라의 영토를 한강 유역까지 확장하고 한반도 중심을 차지하는 데 기여했다. 또한 동해로 진출하여 우산국을 합병함에 따라 신라는 당시 삼국 가운데 가장 넓은 해양 주권을 가지게 되었으며, 왜국가야와의 전투에서도 승리하였다. 특히 가야인들에게는 저승사자와 같았던 인물로, 이사부의 손에 가야군이 여러 번 격파당했고 결국에는 후기 가야 연맹을 이끈 대가야를 함락시키면서 가야는 역사 속에서 사라지게 된다.

2. 이름

異斯夫【或云苔宗】, 姓金氏, 奈勿王四世孫.
이사부(혹은 태종이라고도 한다)는 성이 김씨이고, 내물왕의 4세손이다.
삼국사기》 권44 〈열전〉 中 제4 이사부(異斯夫)
王敎事 大衆等 喙部 伊史夫智 伊干支...
왕이 대중등(大衆等)인 탁부(喙部)의 이사부지 이간지(伊干支) … 에게 교(敎)하시었다.
단양 적성비(550)〉
삼국사기》에 기록된 성은 김(金)씨이며 이름은 이사부(異斯夫)이다. "혹운(或云) 태종(苔宗)"이라고 하여 '이사부'를 '태종'이라고 부르기도 했다는 것을 알려 준다. 고대 한국어신라어는 오늘날의 일본어처럼 음(소리)과 훈(뜻)으로 쓰고 읽는 두 가지의 방법이 존재했으므로 같은 고유어 이름을 하나는 음차, 하나는 훈차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태(苔)'는 이끼를 뜻하므로 고대에 이것을 훈으로 읽었을 때는 대략 '잇' 또는 '이시'로 발음한 것으로 추정되며,[6] 종(宗)은 '부(夫)'에 대응하는 말이다. 고로 널리 알려진 이사부는 신라어의 음을 따서 쓴 이름이고 태종은 신라어의 뜻을 따서 쓴 이름이 된다.

성이 김(金)씨이므로 본명은 '김이시보'라고 읽고 쓸 때는 '김이사부' 또는 '김태종'이라고 한자를 빌려서 쓰는 셈이다. 비슷한 예로 입종(사부), 황종(거칠부), 세종(노리부), 금천(소나) 등이 있다.

일본서기》에서는 이질부례(伊叱夫禮), 정확히는 이질부례지간기(伊叱夫禮智干岐)라는 긴 명칭으로 기록했다. 일본식 만요가나를 적용한 발음은 '이시부레티칸키(イシブレチカンキ)'[7]다. 이를 분석해 보면 신라어와 가야어 어휘에서 지(智)는 존칭 '님'에 해당하며 간기(干岐)는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을 뜻하기 때문에 이름은 '이질부례'가 되는 것이다.[8] 기본적으로 '이질부례(이시부레)'와 '이사부'는 음운의 유사성으로 보아 같은 이름을 부르는 것이 거의 확실하다. 이 밖에도 6세기 신라 당대의 1차 사료에 해당하는 〈단양 적성비〉에서는 이사부지(伊史夫智)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역시 상술한 여러 표기들과 마찬가지로 '이시보레(isipore)'로 발음되었을 본래 이름을 포함하고 있다.

문제는 《삼국유사》이다. 여기서는 성을 박(朴)씨라고 기록해 놓았다. 이름은 이종(伊宗)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품계, 직위, 행적이 같으므로 '박이종'이라는 사람이 '김이사부'와 동일인임은 확실하다. 이종(伊宗)의 '이(伊)'는 '이사(伊史)'의 축약형으로 보이며 종(宗)은 상술하였듯 '부(夫)'와 대응된다. 그래도 결국 성씨를 전혀 다르게 썼기 때문에 이사부의 진짜 이름이 '김이사부'인지 '박이사부'인지는 알 수 없게 되었다.

이 때문에 오늘날에는 성씨를 제외하고 이름인 '이사부'만으로 불리고 있는데 이(李)씨의 존재 때문에 이사부의 성이 '이'고 이름이 '사부'인 것으로 알고 있는 사람이 굉장히 많다. 비슷한 사례로 이차돈 역시 이름이 '이차돈'이고 성은 따로 있다. 둘 다 이씨가 아니다.

3. 생애

파일:external/www.gokorea.kr/2487_1688_4730.jpg
국내 사서에서 나타나는 이사부의 주요 활동 지역. 여기에 남아있는 금석문일본 기록에 있는 몇몇 전공을 추가로 알 수 있다.

3.1. 탄생

삼국사기 이사부 열전의 기록에 따르면 이사부는 왕족의 피를 타고난 인물로서 내물 마립간의 4세손이라고 한다. 그 외에 이사부의 아버지나 할아버지 등 가계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지만, 지증왕 역시 내물 마립간의 증손이므로 상당히 가까운 혈연관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유사에는 박씨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에 대해서 혹자는 경주 김씨김부식이 삼국사기 편찬을 주도했기 때문에 이사부를 박씨가 아닌 김씨라고 썼을 것이라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지나친 음모론이다. 한때 김부식 개인의 행보를 기반으로 삼국사기를 과도하게 불신하는 주장이 있었지만, 현재는 중국과 일본 사서들과의 교차 검증 결과 삼국사기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신뢰성이 높은 사서로 인정받고 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이름이 다른 경우로는 신라 충신의 대명사로 알려진 박제상이 있는데 삼국사기에는 박씨라고 되어 있으나 삼국유사에는 김씨라고 되어 있다. 이처럼 같은 인물의 성씨가 서로 다르게 전해지는 것은 일연이 참고한 고서의 내용부터 문제가 있었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더욱이 이사부가 정말로 내물 마립간의 4세손이었다면 박씨였을 가능성은 더욱 떨어진다. 이에 대해서는 당시 신라 왕족들이 서로를 김씨, 석씨, 박씨 등으로 구분했다는 근거가 없기 때문에 이러한 혼란이 야기된 것이라는 주장이 지배적이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등에는 신라에서 국초부터 박씨, 석씨, 김씨 등의 3가지 성씨와 그외의 여섯 가지 성씨가 사용되었다고 전하지만, 정작 신라의 금석문이나 중국, 일본 등의 기록을 교차 검증해 보면 신라인들이 본격적으로 성씨를 사용한 시기는 빨라도 진흥왕 이후이다.[9] 이전의 법흥왕 같은 경우에 아예 중국 쪽에서는 '모진'이라는 이름으로만 알려졌을 뿐이었으며[10] 진흥왕 대에 이르러서야 신라의 왕들이 중국과 교류하면서 김씨를 칭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11][12]

화랑세기 필사본에 따르면 미실의 남편 김세종은 이사부의 아들이라고 한다. 그런데 세종(노리부)은 이사부는커녕 김유신의 큰할아버지라고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똑같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화랑세기 사본이 역사서가 아니라 개인의 창작이라는 주장의 중요한 근거로 쓰이고 있다.

이사부가 정확히 언제 태어났는지는 알 길이 없으나 이사부가 지증왕 때인 505년에 실직군주에 임명된 이래로 법흥왕진흥왕 시기를 걸쳐서 수십 년 동안 활동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당시에는 적어도 20대 정도의 나이는 되었을 것이다. 아무리 이사부가 금수저 출신이라지만 지금의 강원도 삼척시인 실직성은 고구려로부터 다시 수복[13]한 지 얼마 안 된 땅이고 신라에게 아주 민감한 최전방인데, 그런 곳의 군권을 통솔하는 지위낙하산 인사로 아무 것도 잘 모르는 어린애를 신분이 높다는 이유로 아무나 앉혔다기보다는 최소한 청년의 나이에 나름대로 검증된 지휘 능력재능이 있으니까 맡겼다고 봐야 이치에 맞기 때문이다.

삼국사기의 다른 부분을 찾아보면 사다함 열전에서 사다함이 15~16세일 때 전쟁에 참가하려 했는데 나이가 너무 어리다 해서 왕이 허락하지 않았던 부분이 있다. 신라 시대에도 전장에 나설 만한 어린 나이의 기준은 최소한 20세 정도였을 테니 이사부는 늦어도 대략 485년경에 태어났다고 볼 수 있겠다.

한편 위와 같은 이유로 이사부가 소지 마립간의 아들이라는 설이 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소지 마립간의 2번째 아내인 벽화부인은 날이군(오늘날 경상북도 영주시) 출신이고 소지 마립간과의 사이에서 아들을 낳았다고 했기 때문이다. 이 경우 어린 나이에 최전방에 배치된 것(모계로 소백산맥 일대의 호족 가문을 잇고 있기 때문)과 소지 마립간 사후 왕위에 오르지 못한 것(선혜부인의 아들이 아니기 때문에 미사흔계가 지지하지 않음)을 설명할 수 있게 된다. 다만 벽화부인이 소지 마립간의 유복자가 될 아들을 임신한 시점이 최소 500년 9월인데[14] 이사부의 추정 생년과 괴리된다는 부분이 약점이다. 게다가 이사부가 벽화부인이 임신한 시점에서 5년 후에 실직성의 군주로 부임하는 것 역시 이사부의 소지 마립간 아들 설을 반박하는 증거.

3.2. 최초 가야 일대 공격

智度路王時 爲沿邊官 襲居道權謀 以馬戱 誤加耶【或云加羅】國取之
지도로왕(智度路王) 때 변경 관리가 되어 거도(居道)의 계략을 모방하여 말놀이로써 가야(加耶)【혹은 가라(加羅)라고도 한다.】국을 속여서 빼앗았다.
삼국사기》 〈이사부 열전〉

이사부의 행적에서 처음으로 나타나는 사건. 삼국사기 본기에는 나오지 않고 열전에서만 나오는 사건이다.

위에서도 언급했듯 이사부가 최전방 실직성(삼척시)의 책임자라는 중요한 자리에 오르는 것은 적어도 20세는 되어야 가능했을 테니, 그 이전의 일인 이것은 적어도 10대 후반~20대 초반경의 일이었을 것이다. 서술 순서상 여기에서 실적을 냈으니 다음에 더 중요한 자리로 보냈다는 추측도 가능하다.

이사부가 모방했다는 거도는 신라 초기의 인물이다. 경주 주변에 있던 우시산국거칠산국[15]을 정복하려고 했지만, 함부로 전쟁 준비를 시작했다가는 주변 나라들의 정찰에 걸려 방어를 굳힐 테니 거도는 속임수를 썼다. 신라에는 매년 한 번씩 말들을 들판에 모아놓고 군사들이 말을 타고 달리면서 노는 정기적 행사 마숙(馬叔)이라는 게 있었는데, 거도는 이 행사를 치르는 것으로 위장했고 주변 나라들은 이번에도 마숙 행사라 착각해 별다른 대비를 하지 않았다. 이 틈을 타 거도는 이 기병을 이용해 두 나라를 기습 공격해 멸하였다. 사실 이는 병법 삼십육계 중 승전계의 제1계인 만천과해에 해당한다. 즉 병법의 기본. 중국에서는 삼국지태사자가 이 책략을 사용한 것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여기서 빼앗은 가야가 어디인지 명확하진 않다. 현대에는 가야라고 뭉뚱그려 부르지만 실제로는 여러 작은 나라들이 따로 있었던 게 가야기 때문이다. 단국대 전덕재 교수는 '이사부 가계와 정치적 위상'이라는 논문에서 지금의 경상남도 합천군 쌍책면에 있었던 가야계 소국 다라국이라고 추정했다. 그러나 다라국은 사비회의를 비롯한 일본서기의 여러 기사에서 6세기 중반까지 존속한 것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애매한 점이 있다. 만일 여기서의 가야가 다라국을 가리키는 것이 맞다면, 이사부의 침공으로 일시적인 타격을 입었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국력을 다시 회복한 것이라 볼 수 있다.

3.3. 우산국(울릉도) 복속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신라-우산국 전투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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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바다에 외따로 떨어진 울릉도가 최초로 한반도 본토의 정치체에 포함된 사건.[16] 단순한 무력 정복이 아니라 가짜 맹수를 이용한 책략을 사용해 항복시켰다는 점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505년 2월에 지증왕은 신라에 주, 군, 현의 제도를 정하고 실직주(悉直州, 오늘날의 강원도 삼척시)를 설치하였는데 이때 지증왕은 이사부를 실직주의 군주(軍主)로 삼았다. 이사부가 역사 기록 속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순간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에서 군주라는 직위의 명칭이 이로써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사부는 50여 년이 지난 562년까지 현역으로 활동했는데, 이사부의 정확한 생년은 알려지지 않지만 그가 평균 수명을 크게 웃돌지 않았다면 아무리 관대하게 계산해도 아직 새파란 젊은이의 나이로 한 지역의 군주직을 맡은 셈이다.

7년 뒤인 지증왕 13년(512년) 6월, 실직주 근처인 하슬라주(오늘날의 강원도 강릉시) 군주로 임명받았고 우산국 정벌을 개시해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하고 귀환했다. 정벌 과정은 삼국시대의 양대 역사책인 삼국사기삼국유사에 모두 실려 있다.
우산국(于山國)이 복종하여 해마다 토산물을 공물로 바치기로 하였다. 우산국은 명주(溟州)의 정동쪽 바다에 있는 섬으로 울릉도(鬱陵島)라고도 한다. 땅은 사방 백 리인데, 지세가 험한 것을 믿고 항복하지 않았다.
이찬 이사부(異斯夫)가 하슬라주(何瑟羅州) 군주가 되어 말하기를 "우산국 사람은 어리석고도 사나워서 힘으로 다루기는 어려우니 계책으로 복종시켜야 한다."라고 하고, 바로 나무로 사자를 가득 만들어 전함에 나누어 싣고 그 나라 해안에 이르렀다.
이사부는 거짓으로 말하였다.
"너희가 만약 항복하지 않으면 이 사나운 짐승을 풀어 밟아 죽이겠다."
그 나라 사람들이 두려워하며 즉시 항복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지증 마립간 13년(서기 512) 여름 6월

아슬라주(阿瑟羅州)【지금의 명주(溟州)이다.】 동쪽 바다에 순풍이 불면 이틀만에 이를 수 있는 거리에 우릉도(于陵島)【지금은 우릉(羽陵)이라고 한다.】가 있었는데, 섬 둘레가 26,730보였다. 섬에 사는 오랑캐들은 바닷물이 깊은 것을 믿고 교만하고 오만하여 신하 노릇을 하지 않았다. 왕은 이찬 박이종(朴伊宗)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토벌하도록 하였다. 박이종은 나무로 사자를 만들어 큰 배에 싣고 가서 그들을 위협하여 말하였다.

"항복하지 않으면 이 짐승을 풀어놓겠다."
그러자 섬 오랑캐들은 두려워서 항복하였다. 왕은 박이종에게 상을 내리고 아슬라주의 장관으로 삼았다.
《삼국유사》 지철로왕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은 대체로 큰 차이가 없지만, 하슬라주 군주 부임과 우산국 정벌의 선후 관계만 다르게 기술되어 있다. 삼국사기는 이사부가 하슬라 군주가 된 다음에 우산국을 정벌했다고 한 반면, 삼국유사에서는 우산국을 정벌한 상으로 이사부를 아슬라주에 부임시켰다고 한 것이다.

이 때문에 이사부가 우산국을 정복하기 위해 출항한 곳이 어디냐를 놓고 강릉시삼척시가 다투기도 했다. 학계에서는 삼척시 출항설을 지지하는 편인데, 삼국사기 기록대로 이사부가 하슬라 군주가 먼저 됐다고 해도 강릉에 가자마자 대규모 선단을 꾸리기는 어려웠을 거고 실직 군주 시절부터 원정을 준비했다고 보는 편이 합당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삼척시에서 울릉도는 동쪽으로 쭉 가면 되기 때문에 항해 방향을 잡기도 쉬운 편이다. 손승철 교수는 나중에 고려시대조선시대 기록을 참고해 봐도 삼척시가 동해 바다와 울릉도를 관리하기 수월한 최적의 출항지라고 주장했다.

우산국 정복에 사자 목상을 사용했다는 점 덕분에 현재 강원도 삼척에는 '이사부 사자공원'이 있고 지역 축제 때도 나무사자를 깎는 행사를 한다.

신라 사람이던 이사부가 먼 서역에 가서나 볼 수 있는 사자를 알았던 것은 신라에 뒤늦게 들어온[17] 불교의 경전에 사자가 있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물론 사자를 직접 본 적은 없었을 확률이 높기 때문에 전설 속의 동물로만 알았을 가능성이 크나 한반도에 사자의 존재가 간접적으로나마 알려져 영향을 끼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사부가 정복한 우산국은 신라의 문물을 받아들이고 빠르게 신라 문화에 동화되었다. 1957년과 1963년 두 번에 걸친 국립박물관 연구팀이 울릉도의 고분을 조사 발굴한 결과 우산국에 존재하는 다수 고분이 신라 이후에 조성된 것으로 밝혀졌다. # 우산국의 역사는 신라의 진출 이전에 시작되기는 했지만 신라에 복속된 뒤 동해안 지방에서 문화가 유입된 뒤 울릉도에 거대한 돌무지무덤을 축조할만큼 문화가 융성하고 국가 형태로 존재할 만큼 많은 사람들이 살기 시작한 때는 신라 때부터라고 한다.

대한민국에서는 왜인지 모르게 '독도를 최초로 점령한 사람'이라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다. 실제로 이사부 관련 이미지를 검색해 보면 아예 이사부가 울릉도가 아니라 독도에 나무사자를 데려가서 협박하는 듯한 일러스트까지 나온다. 아마 '독도는 우리땅' 가사에 "신라장군 이사부 지하에서 웃는다."로 등장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 인식을 반영하기라도 하듯 독도도로명주소로 '독도이사부길'이 있다.

하지만 이사부의 군대가 실제로 독도에 도달했는가에 대해서는 어떤 기록도 남아있지 않다. 또한 삼국사기 및 삼국유사 등 중세 이전 사서에서 우산국의 어떤 부속 도서를 묘사한 내용도 찾아볼 수 없으며 따라서 이 부분에 대해서는 확인된 바가 없다.

단, 지금도 날씨 맑은 날에는 울릉도에서 독도가 맨눈으로 잘 보이듯, 당시 우산국의 주민들이 울릉도 성인봉을 비롯해 울릉도 동쪽의 아무 높은 언덕 위에 올라가면 육안으로 독도를 관측할 수 있었음은 분명하다. 그러므로 독도를 '우산국의 일부(영해)'로 간주하는 관점은 존재한다. 즉, 독도는 우산국의 주민들이 물리적으로 얼마든지 인식할 수 있는 거리 내에 있고 어로 등 경제 활동을 실시하는 반경 내의 바위섬이었으며 우산국은 신라에 복속되었으니 곧 한국의 전통적 영유 근거가 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독도 관련 연구소 및 재단에서 근거를 채집하는 방향은 이 쪽이다. 무주지 논쟁 및 역사적 선점 사실에 대해 논쟁할 때 이사부의 우산국 정벌 기록은 결정적인 건 아니더라도 정황적 증거로는 충분히 인용할 수 있다.

3.4. 금관가야 공격

법흥왕 16년(529년) 4월 신라가 가야 방면 확장을 위해 지금의 김해시에 자리잡고 있던 금관가야를 압박하자, 신라가 가야를 모두 집어삼킬 기세에 위기감을 느낀 인근 탁순국의 왕 기능말다는 왜국에 지원군을 요청했다. 이윽고 오미노 케나노 오미(近江毛野臣)가 이끄는 왜군이 구사모라(오늘날의 창원시)에 도착했는데, 신라가 협상을 위해 거칠부를 사신으로 보내니 오미노 케나는 어째서 왕이 직접 오지 않았냐고 불평하며 돌려보냈다. 이에 이사부는 3천 명의 군대를 이끌고 다다라원에서 3개월 동안 무력 시위를 벌여 왜군을 퇴각시켰고, 복귀하는 과정에서 금관가야를 비롯한 네 곳[18]의 백성들을 대거 포로로 끌고 갔다.

이미 가야 안에서 주도권을 대가야에 내주고 쇠퇴하고 있던 금관가야였지만[19] 이 사건을 계기로 완전히 치명타를 입은 셈이었다.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532년, 구형왕이 순순히 먼저 신라에 항복하겠다고 전하면서 멸망한다. 신라 초기부터 수백 년 동안 영남 지방의 양대 라이벌이었던 금관가야가 이사부의 활약으로 멸망하고 신라의 전성기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국내의 대표적인 삼국시대 사료인 삼국사기삼국유사에는 이사부의 금관가야 정벌에 대한 언급이 없고, 구형왕이 신라에 자진 항복한 사실만 적혀 있다. 금관가야 정복에 이사부가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은 일본 측 기록인 일본서기에서만 기록하고 있는데, 학계는 대체로 이 내용을 정설로 인정하고 있다.[20]

3.5. 병부령에 임명

진흥왕 2년(541년) 국방장관 격인 병부령(兵部令)에 취임해 명실상부한 군부의 정점에 올랐다. 7살의 어린 나이에 즉위한 진흥왕은 성년인 18세(551년)가 될 때까지 약 11년간 어머니 지소태후의 섭정을 받았다. 따라서 이사부를 병부령에 임명한 인물도 실질적으로 지소태후였다. 병부령은 법흥왕 3년(516년)에 처음 설치되었는데, 법흥왕 대에는 법흥왕 본인이 군권을 장악하고 있어서인지 병부령이 공석인 때가 많았다. 법흥왕 사후 진흥왕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르자 섭정인 지소태후는 용맹과 지략을 겸비한 명장 이사부를 병부령에 앉혀 국방을 안정시키려 했던 것이다.

진흥왕의 섭정 시기 동안 이사부는 군권을 바탕으로 국정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창녕 척경비에 "과인(진흥왕)이 어릴 때 왕위에 올라 정치를 보필하는 신하에게 맡겼다"라고 기록된 것에도 이같은 상황이 엿보인다. 그러나 지소태후는 조정에서 이사부의 권력이 너무나 커지는 것을 견제하기 위해서인지 544년 병부령을 2명으로 늘린다. 그러나 이후에도 이사부는 여전히 중용되었으며, 후술하겠지만 진흥왕이 친정을 행사하기 전까지 국방에서 커다란 업적을 여럿 남긴다.

진흥왕 6년(545년) 7월, 이사부는 왕에게 "국사라는 것은 임금과 신하의 선악을 기록하여 잘잘못을 만대에 보이는 것입니다. 이를 편찬하지 않으면 후대에 무엇을 보이겠습니까?"라고 아뢰며 나라의 역사를 편찬하는 일을 건의했다. 이에 진흥왕은 거칠부에게 편찬을 명했고[21] 거칠부가 쓴 것이 신라 최초의 정사(正史)인 《국사(國史)》이다.[22]

3.6. 진흥왕의 한반도 정복사업 시기

이 후로도 신라의 정복 전쟁 일선에서 계속 활약했다. 진흥왕 11년(550년) 3월에는 백제와 고구려가 도살성(오늘날의 충청북도 증평군 도안면)과 금현성에서 서로 치고받아 싸우고 있었는데, 이사부는 양국이 지친 틈을 타 군대를 이끌고 가서 두 나라의 군대를 어부지리로 모두 쳐부수고 두 성을 차지한 뒤 군사 1천 명을 주둔시켰다. 이후 고구려가 병력을 보내 금현성을 쳤다가 이기지 못하고 퇴각하자, 신라군은 이들을 추격하면서 그대로 북진하여 남한강 상류 유역을 차지하는 큰 전과를 올렸다. 이로써 신라가 영남을 넘어 남한강 유역에 영토를 걸치게 됐다.

이때 세워진 단양 신라 적성비에도 이사부의 이름이 나와서, 고구려 영역이었던 단양 지역을 현지 주민 야이차(也爾次)의 도움과 희생으로 평정하는 데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했던 듯하다. 단양 적성비의 참전 장수 명단에서 첫머리에 등장하는데, 이를 통해 원정군에서 서열이 가장 높았고 신라의 한강 유역 진출을 기획하고 총지휘한 것이 이사부라고 추정하기도 한다.

이렇게 한반도 중부 공략전 초반에는 이사부가 참여했지만 정작 전투가 가장 치열했고, 신라가 가장 급격하게 세력을 넓히는 데 성공한 551년의 거칠부를 비롯한 아홉 장군의 북한강 상류 정벌 → 한강 하류 차지 → 554년 관산성 전투까지의 과정에서는 딱히 이사부의 이름이 나타나지 않게 되고, 대신 거칠부김세종, 김무력 같이 이전에 항복한 가야계 인물들이 대신 신라군의 주력으로 역사의 전면에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를 두고 젊은 진흥왕이 친정을 시작한 후 당시 최고 권력자였던 이사부를 견제하기 위해 실각시킨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한다.[23]

이사부는 이미 이때 60대 후반의 고령이었다.[24] 지금으로부터 1500년 전 시대 사람들의 평균 수명을 고려하면 더 이상 현장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활발히 수행할 만한 나이는 아니었던 것이다. 단양 적성비의 내용을 고려할 때, 고령이었던 이사부는 새로 점령한 단양부터 충주까지의 지역에 남아 신라의 지배 체제를 공고히 하는 역할을 맡았을 가능성이 있다. 혹은 병부로 돌아가 왜구 등 후방의 침입을 대비했을 수도 있다. 이후 이사부는 아래 단락에도 나오듯이 562년 대가야 정복 때 다시 등장하는데, 당시 대가야의 완전 정복은 어느 정도 대세가 결정된 상황에서 커다란 무력 충돌 없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고령의 이사부가 직접 출병한 것도 이해할 수 있다.

친정을 시작하자마자 활발한 정복 활동을 벌였던 진흥왕의 성격 상 친정이 시작되기 얼마 전에 있었던 독성산성 전투 및 도살성·금현성 전투에서도 소년 진흥왕의 의견이 개진되었을 가능성이 있고, 그렇다면 당연히 병부령 이사부와도 의견 조율이 있었을 것이다. 진흥왕 섭정기에 지소태후가 이사부에게 지나치게 권력이 집중되는 것을 견제하면서도 끝까지 이사부를 신뢰했던 것을 보면 섭정기부터 진흥왕과 이사부 역시 신뢰 관계를 형성했을 가능성이 높다.

3.7. 가야멸망전 지휘

기록에 나오는 마지막 업적은 진흥왕 23년(562년)에 있었던 대가야 정복이다.[25] 당시 가야의 정세를 보면 금관국은 진작에 망했고 안라회의사비회의의 결렬, 독성산성 전투 등으로 안라국도 크게 약화되면서 반파국(대가야)만이 마지막 구심점으로 남아 있었다.

신라의 후방에 걸림돌이 될 백제왜국관산성 전투에서 모조리 정리한 뒤인 562년 9월에 진흥왕의 명에 따라 병부령 이사부가 군대를 이끌어 대가야로 진격했고, 부장으로는 유명한 화랑 사다함이 참전했다. 반파국 도설지왕의 항복을 받고, 반파국을 도우러 왔던 왜군도 격파하여 왜장들을 포로로 잡아 모욕하는 등 반파국 정복은 성공리에 끝났고 가야는 마침내 완전히 멸망해 낙동강 하류 전역이 신라의 영토로 편입됐다. 이때 이사부의 나이는 대충 잡아도 70대였다.

3.8. 말년

대가야 정벌 이후의 행적에 대한 기록은 없으며, 죽고 어디에 묻혔는지에 대한 흔적도 없다.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진흥왕의 왕권 강화 과정에서 말년에 실각했을 것이라는 설을 제기하기도 한다. 위 내용과 같이 적어도 3대 왕을 섬기면서 평생에 걸쳐 업적이 상당히 많은데도 불구하고 김유신을 비롯한 다른 인물들과 비교해도 기록이 다소 부실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유신의 사례가 이례적인 경우일 뿐, 신라 전기 인물 가운데 임금과 직계 왕족이 아닌 인물의 생몰에 대해 소상히 기록된 경우는 많지 않기 때문에 이사부의 만년에 대한 기록이 부실한 것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다. 김유신의 경우 업적상 이사부와 비견될 만한 명장이지만 그에 앞서 신라 중대 무열왕계 왕들의 외척이 되는 김해 김씨 집안의 웃어른이었던데다, 이후 김유신의 후손들이 잠시 역적으로 몰려 가문이 몰락했다가 9년만에 재기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후손들은 가야계 김씨의 전성기였던 김유신에 대한 자세한 행적을 기록할 필요성이 있었다. 그런 배경에서 탄생한 것이 김유신행록이고 삼국사기에서 김유신 관련 기록 분량이 많은 것도 김유신행록을 참고했기 때문이다. 즉 김유신 기록이 많은 것은 많이 기록해야 할 절박한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이고, 따라서 기록 및 후대의 대우에 있어서 이사부와 김유신에 대해 같은 기준과 관점을 적용할 필요는 없다.

이사부 관련 기록이 줄어드는 시점부터 슬슬 금관국 왕족 계통 김무력, 김서현 등의 활동이 대폭 잦아지기도 하는데,[26] 진흥왕이 이사부를 견제하기 위해 신흥 세력인 가야계를 등용했다는 견해도 있다. 젊은 진흥왕이 자신의 수족으로 젊은 세력을 키우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사부 역시 진흥왕 대의 최대 군사적 사건 중 하나인 대가야 토벌에 기용되었다는 점에서 진흥왕은 만년의 이사부 역시 노장으로서의 권위를 충분히 세워주었다고 볼 수 있다. 당시 이사부의 나이는 70대로 추정되며 이미 진작에 은퇴하거나 2선으로 물러나도 이상하지 않았을 나이였다.

따라서 말년에 원로 대신으로서 평안하게 여생을 보내다가 사망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4. 평가

신라 역사상 최고의 명장 가운데 한 명으로, 정복전쟁의 영웅이라는 점에서 왕과 신하라는 차이만 빼면 파사 이사금의 재림이라 할만하다. 신라의 전성기를 활짝 열어 젖히고 삼국통일의 기틀을 다지는 데 앞장선 장군이며, 백제고구려의 양면 공격에 시달리는 신라를 지켜내고 삼국통일의 대업을 완수한 김유신을 제외하면 그 어떤 장군도 이사부 위에 놓일 수 없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활동 기간이 굉장히 긴데, 서기 500년 초부터 560년대까지 활약했으니 최소 50~60년에 달하는 세월 동안 전장을 누빈 사람이다. 620년대에서 660년대 후반까지 40여년 간 활약했던 김유신보다도 더 긴 활동 기간을 자랑한다. 신라뿐 아니라 한국사 전체를 통틀어서 보더라도 이사부만큼 긴 시간을 전장에서 보냈고, 그때마다 전공을 올린 사람은 드물 것이다.

5. 기타

  • 강원도 영동 지역과 여러 인연이 있는 위인이기 때문에 강원도 지방자치단체가 많이 내세우는 콘텐츠가 이사부다. 삼척시에서는 이사부광장, 이사부사자공원 등의 관련 지명과 이사부축제를 개최하고 있으며 나무사자를 깎는 행사 등을 한다. 이사부 초상화도 곳곳에 걸려 있다. 강릉시에서도 이사부 크루즈를 운항한다. 그리고 삼척시에서 이사부를 주인공으로한 영화를 제작한다고 한다.

6. 대중매체에서

  • 김훈의 장편소설인 《현의 노래》에서는 가야에서 신라로 망명해온 악공 우륵이 주인공이다보니 그에 걸맞게 '칼'을 상징하는 냉혹한 군인으로서의 모습이 강조되는 편이다. 우륵과의 접점은 적지만 사실상 제2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비중이 높다. 사다함도설지 등과 함께 대가야를 멸망시켰으나 진중에서 잠을 자던 중 갑자기 발병한 노환으로 쓸쓸히 급사한다. 2007년에 제작이 예정되었다는 영화판에서는 배우 안성기가 이사부 역으로 캐스팅 되었으나 정확한 제작 일정이나 개봉 일자는 현재까지도 감감무소식이다. 아마 영화화 계획 자체는 물건너간 듯.
  • 1987년 KBS 드라마 《이차돈》에서는 배우 故 김성원이 연기했다.
  • 2009년 MBC 드라마 《선덕여왕》에서는 배우 권성덕이 연기했다. 이사부의 주 활동 시대가 선덕여왕보다는 1~2세대 앞이라 초반부에만 노년의 모습으로 문노가 화랑 비재를 주관할 때 미실의 회상에서 특별 출연했다. 세종의 아버지이며 진흥왕, 노리부와 함께 지증왕부터 내려온 불가능한 꿈인 망라사방(網羅四方)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고 진지왕이 진흥왕의 업적을 잃고 주색에 빠졌을 때는 노환 및 병으로 상태가 좋지 않아 직접 참여하지는 못했으나 진지왕 폐위에는 적극 동의했다. 마지막으로 노리부 및 거칠부와 만나 미실을 황후로 올리는 것까지만 힘써달라고 부탁했는데 그 이유가 "미실은 단지 황후가 되고 싶을 뿐이며 황후만 되면 누구보다도 성심껏 을 섬길 것"이었기 때문이었다.[27] 이후 사망했는지 더이상의 등장은 없다.
파일:The Legend of Cao Cao Kim Isabu.png
  • 영걸전 시리즈》 게임 《삼국지조조전 Online》에서 진흥태왕의 패에 속하는 고대 무장으로 본래 플레이어블로 등장할 예정이었다가, 제작진이 한국사와 일본사 고대무장이 출시되면 능력치 논란이 일어날 것을 우려해 결국 일부러 등장시키지 않아 미등장 데이터로 남았다. 표준 영정을 그대로 그린듯한 일러스트인데 중기병스런 갑주로 중무장하고 있지만 내부 데이터상 병종은 우산국 정벌을 감안한 듯 수군이다. 데이터상의 장수 특성은 수전 보조/방어력 보조 13%이다. 주태와 비슷한 특성인데 이대로 나왔으면 대견고 버프와 귀면문 보조구를 이용해 아군을 호위로 지키는 방어형 수군으로서 섬멸전이나 경쟁전에서도 상당히 쓸만했을 것으로 보인다. 스탯도 무력 86, 지력 77, 통솔 93, 민첩 84, 행운 81의 능력치로 감녕과 더불어 수군계 통솔 공동 1위.

[1] 권오창 화백이 그렸으며 2011년 지정되었다. 상상도이지만 우수한 복식 재현을 자랑하는 공식 영정 중 하나로, 삼국시대에 널리 쓰이던 목가리개가 달린 찰갑의 형태와 삼루환두대도의 모습을 잘 구현하였다. 특히 삼국시대 인물의 표준영정으로서는 무령왕의 영정과 함께 재현 상태가 뛰어난 몇 안 되는 사례이다. 당장 광개토대왕 문서에 실린 영정을 봐도 재현 오류가 심각하다.[2] '이름' 문단에서도 하술하겠지만, 삼국시대 당시에는 ㅅ 또는 '시' 음가를 표기하기 위해 질(叱)을 썼기 때문에 실제 음가는 '이시부레' 정도가 되겠다. 신라어를 음차한 것이기 때문에 가장 당대에 가까운 발음일 수 있다.[3]일본서기》에 이사부가 '이질부례지나말(伊叱夫禮智奈末)'이라고도 불렸다는 기록이 있는데, 여기서 나말(奈末)은 나마(奈麻)의 이표기이다. 아마 일본서기에 이사부가 등장한 시점인 529년 당시에는 나마였다가, 신라 내에서의 정치적 입지가 점차 강화되면서 550년 이전에 이찬까지 승진한 것으로 보인다.[4]삼국사기》 〈신라본기〉와 〈사다함 열전〉에 '이찬 이사부'라는 표현이 여러 차례 나오며, 〈단양 신라 적성비〉에서도 이사부의 관등을 '이간지'라고 기록하여 교차 검증된다.[5] 병부의 재상. 현대로 치면 국방부장관이다.[6] 이는 '이끼'의 중세 국어 시기 어형인 '잇'~'이ᇧ'과도 일치한다.[7] 일본서기가 편찬될 당시는 아직 일본어에서 구개음화가 일어나기 전이었다. 현대 일본어로 읽으면 '이시부레치칸키'가 된다.[8] 학자들이 추정하는 바에 따르면 중고한어에서 伊는 /*ʔiɪ/ '이', 夫는 /*pɨo/ '프오', 禮는 /*lei/ '레'로 발음되었으며, 고대 한국에서의 한자음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叱는 /*si/를 표현하는 데 사용되었으므로 伊叱夫禮의 발음을 굳이 복원한다면 /*ʔiɪ.si.pɨo.lei/ '이시보레'가 되겠다.[9] 565년 2월 진흥왕이 북제에서 '신라국왕 김진흥'이라는 이름으로 관작을 제수받은 기록이 《북제서》에 남아있다.[10] 때문에 중국에서는 법흥왕의 성이 모씨이고, 이름이 진이라고 착각하기도 했다.[11] 고대로 갈수록 종통, 단일 계통의 혈통 개념이 희박하고 종족, 족단 개념이 강한데, 익히 알려져 있듯이 신라에선 외손, 사위 계승도 가능했다. 성씨를 사용한 이후에 족단 차원에서 계보를 거슬러 올라가며 성을 소급해 붙이는 과정에서, 김씨 족단이 "이분이 우리 (친)할아버지였지..." 하며 김씨로 적는 동안 박씨 족단 측 기록에서는 "이분이 우리 (외)할아버지였지..." 하며 박씨로 적을 수 있다는 것.[12] 김부식이 삼국 중 가장 늦은 신라의 역사를 고무줄처럼 늘렸다고 보는 견해도 있지만, 애당초 김부식이 참고한 자료는 고려 건국 이전에 신라인들의 손에 의해 한 번 필터링을 거친 문헌일 가능성이 높다. 김부식은 다만 전해지는 문헌을 충실히 옮겼을 수도 있고 이는 일연도 마찬가지였다. 더욱이 김부식은 엄연히 따져서 삼국사기 편찬의 총책임자였지, 혼자서 모든 부분을 일일이 집필하거나 편찬하지는 않았다는 점 또한 명심할 필요가 있다.[13] 삼척 지역은 내물 마립간 때 점령했다가 고구려 광개토대왕에게 빼앗겼다가 재수복한 지역이다.[14] 애초에 처녀 벽화 설화가 기록된 부분이 삼국사기 소지 마립간 22년조, 즉 500년의 기록이다.[15] 각각 지금의 울산광역시부산광역시에 해당한다.[16] 울릉도에 대한 언급 자체는 더 이전의 중국 기록에서도 간략하게 등장한다.[17] 지증왕 당시니까 아직 국교는 아니었다. 그러나 소지 마립간 시기의 사금갑 설화에서도 알 수 있듯, 불교 자체는 법흥왕 이전에도 유입되어 신라 사회에 스며들고는 있었다.[18] 일본서기에는 각각 금관(金官)/수나라(須那羅), 배벌(背伐)/비지(費智), 안다(安多)/다다라(多多羅), 위타(委陀)/화다(和多)라고 기록되어 있다. 금관/수나라(쇠나라)는 본문의 해석대로 김해 금관가야임이 확실시되지만 나머지 3개 지역의 경우 위치를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비지의 경우 일본서기의 다른 기사에서 발귀(發鬼)나 불지귀(弗知鬼)라고도 언급되는데, 대구광역시 북구에 있었던 팔거리현(八居里縣) 또는 북치장리(北恥長里)와 음운상 일치한다. 또한 다다라(多多羅)의 경우 본문의 링크에도 나와있듯 부산광역시 사하구 다대동으로 비정하는 학설이 있다.[19] 금관가야는 삼국시대 초반에 낙동강 물길을 이용한 교역으로 번성한 나라였는데, 5세기에는 신라가 커지면서 낙동강 동쪽이 전부 신라 땅이 되었으므로 마음대로 지리적 이점을 살릴 수 없게 된 지 오래였다. 서기 400년 신라-왜 전쟁에서 왜군과 함께 신라를 공격했다가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보낸 5만 대군에 의해 참패한 것도 금관가야의 세력이 꺾이는 데 기여했다.[20] 하지만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정설로 따르는 현행 한국사 교육과정에서는 일본서기의 서술 방식에 대한 각종 논쟁을 고려해 이사부의 활약은 생략하고 법흥왕 대에 금관가야가 항복했다고만 가르친다. 후술할 대가야 정벌에 대해서는 이사부와 화랑 사다함이 쓰여있는 것과 대조된다.[21] 거칠부는 한문을 반드시 알아야 하는 승려 경력이 있고 소싯적에 신라와 고구려 등 이곳저곳을 유람하며 많은 문사들과 인맥을 쌓은 인물이었기 때문에, 역사서 편찬에는 이사부 본인이나 다른 자들보다 적임자였다.[22] 다만 이 책의 제목이 정말로 "국사"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이런 논란은 백제에서 근초고왕 대에 박사 고흥이 지었다는 《서기》에도 적용된다. 원문에는 단순히 "국사를 짓도록 하였다", 즉 나라의 역사를 기록하게 했다는 식으로 풀이해도 큰 문제가 없기 때문이다. 한편 일연이 삼국유사 편찬 당시에 인용했다고 전하는 "국사(國史)"라는 문헌 또한 실상은 "구삼국사"나 "삼국사기"를 말하는 것으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므로, 이사부의 건의에 따라 지었다는 "국사"와는 별개의 책일 가능성이 높다.[23] 상술한 도살성·금현성 전투에서 이사부가 나제동맹 관계인 백제군까지 공격했는데, 곧 깨지기 직전이긴 했지만 아직은 동맹이 깨진 게 아니었으므로 이사부가 책임을 지고 잠깐 물러났다고 추정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정황상 이런 추측은 가능성은 낮다.[24] 활동 연대를 감안했을 때 실직 군주에 임명될 때 20세였다고 쳐도 금현성, 도살성 전투 때는 이미 환갑도 넘은 65세다.[25] 대가야 정복 1년 전인 561년에 새긴 창녕 진흥왕 척경비는 하필 최고위 직책을 보유한 인물 리스트가 써 있던 부분이 마멸이 심해 읽을 수 없는데, 여기에 이사부의 이름이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26] 그리고 금관가야뿐 아니라, 단양 적성비창녕 척경비의 내용을 참고하면 대가야 계통 인물인 도설지도 진흥왕이 측근으로 가까이 했던 정황도 나타난다.[27] 때문에 초창기에 유독 노리부와 화백회의가 계속해서 미실을 황후로 올리려고 했던 까닭이 설명된다. 하지만 결국 문노가 납치되었다가 강 속에 던져진 마야부인을 살린 뒤 무사 귀환하면서 다 어그러져 버렸고 황후의 꿈이 날아간 미실은 결국 그 꿈을 포기하고 대소 귀족들을 규합해 자신의 파벌을 이루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