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09 03:18:05

화백회의

和白會議
1. 개요2. 명칭3. 설명4. 외국과의 비교5. 기타6. 창작물에서

1. 개요

일이 있으면 반드시 여러 사람과 의논하여 결정하는데, 이를 '화백(和白)'이라 하며, 한 사람이라도 의견이 다르면 그만둔다.
事必與衆議, 號「和白」, 一人異則罷.
신당서 동이열전 신라
신라정치제도로, 만장일치귀족 회의이다.

2. 명칭

화백회의(和白會議)라는 명칭의 뜻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화()는 조화시킨다는 뜻이며 이는 회의 참석자인 귀족들의 의견을 수렴, 조정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백()은 아뢴다는 뜻이며 이는 회의의 결론사항을 왕에게 보고한다는 것을 의미한다.[1] 요컨대, 화백회의란 주요 귀족세력의 뜻을 조율하여 이를 왕에게 아뢰기 위한 회의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이는 신라 상대까지 회의에 왕이 직접 참여했다는 기록과 어긋나는 뜻이 된다. 포항 냉수리 신라비와 봉평비 등을 통해 당시 회의에는 이미 왕으로 재임 중이던 지증왕법흥왕이 참여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이 당시에는 왕도 회의의 참석자이므로 따로 결론을 보고받을 입장이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화백회의라는 명칭은 법흥왕 시기 상대등을 설치하고 왕은 직접 회의에 참석하지 않게 된 이후부터 알맞은 명칭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 이전 시기에는 별다른 명칭으로 불리었을 것으로 추론할 수 있다.

3. 설명

신라의 귀족회의이며 만장일치제로 잘 알려져 있다. 잘 살펴보면 마그나 카르타 직후의 영국 의회와 유사한 점이 많다.

초기에는 서라벌의 6부[2]의 우두머리들이 모여서 열었고, 국가의 기틀이 잡힌 후에는 상대등의 주관 하에 대등들이 열었던 회의다. 문제는 진골만 대등이 될 수 있어서 사실상 종친회의로 전락해버린 것이다.《수서(隋書)》와 《당서(唐書)》에 단편적이나마 신라의 화백제도에 관하여 자료를 제시하고 있다.
其有大事, 則聚群臣, 詳議而定之.
큰 일이 있으면 여러 신하를 모아 상의하여 정했다.
수서》 <신라전>

事必與衆議, 號和白, 一人異則罷.
일에는 반드시 여럿의 뜻을 모았으니 화백이라 하였으며 한 사람만 달라도 그만두었다.
당서》 <신라전>
이에 따르면 화백회의는 국가에 중대사건이 있어야 개최되고, 회의의 참석자는 일반 백성이 아니라 군관(群官 혹은 백관百官)이며[3], 또한 단 한 명의 반대자가 있어도 계획이 통과되지 않는, 다수결이 아닌 만장일치로 성립되는 회의체제였다.[4] 이러한 특성을 통해 화백회의가 귀족 사회적인 합의제도임을 알 수 있다.
왕의 시대에 알천공(閼川公)·임종공(林宗公)·술종공(述宗公)·호림공(虎林公)자장(慈藏)의 아버지이다.】·염장공(廉長公)·유신공(庾信公) 등이 남산의 우지암(亐知巖)에 모여 나라 일을 의논하였다.
《삼국유사》 삼국유사 제1권 기이 제1 진덕왕
화백회의를 개최하는 장소는 신라 국내에서 신령스러운 장소로 유명한 4곳을 차례대로 돌아가며 정했는데, 이를 사령지(四靈地)라고 한다. 서라벌을 중심으로 동쪽의 청송산(靑松山), 남쪽의 오지산(亐知山), 서쪽의 피전(皮田), 북쪽의 금강산(金剛山)이었다.

화백회의 초기에는 국왕이 직접 주재를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지증왕대의 포항 냉수리 신라비법흥왕대의 울진 봉평리 신라비에서 에서 확인되고 있다. 하지만 531년에 귀족의 우두머리격 관직상대등이 처음 임명되었고 이 시기부터 왕은 화백회의에서 벗어나고 새롭게 진골 귀족의 우두머리인 상대등이 대신해서 회의를 주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왕의 주재에서 벗어났다고는 하나 당시는 귀족이 위세를 떨치던 사회였으므로 화백회의의 위세도 막강했다. 그래서 국왕직 수행에 하자가 있다고 판단한 진지왕을 퇴위시키는 결정을 하고 실제 실행에 옮기기도 했다. 또한 화백회의의 장(長)인 상대등은 정당한 왕위계승권을 가진 자가 따로 없을 경우 왕위를 계승할 주요 후보자로 여겨졌다. 이후 문무왕, 신문왕 등 진골을 대대적으로 숙청하던 신라 중대를 거치면서 왕권이 강해지고 왕의 직속 회의 기구였던 집사부와 집사부의 수장인 시중의 권한이 강화되고, 상대등과 화백회의의 위상이 약화되었다가 다시 왕권이 추락하는 신라 하대에 다시 강화된 것으로 여겨진다.

화백회의는 강력한 신권의 상징이었다고 할 수 있으며 이러한 귀족 합의제는 후에 궁예태봉에서 최고 중앙관부로 설치한 광평성으로 계승되었다는 설도 있다. 이 경우는 광평성이 '신라의 제도에 의거했다'는 삼국사기고려사의 기록에 따라서 호족간의 합의기구로 해석하는 것인데, 그리고 이는 초기에 태봉의 제도를 답습한 고려의 도병마사(도평의사사)로 계승되었다고도 보여진다. 다만 광평성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이 부족하다보니 태봉과 초기 고려의 광평성을 신라의 집사부에 대응하는 국왕 직속 통치기구였다고 보는 설도 있다.

4. 외국과의 비교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 각지에서 만장일치제 귀족회의 사례가 있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에서도 귀족들의 "만장일치"(리베룸 베토)를 중심으로 하는 의회 '세임'[5]이 있었는데, 이를 악용해 주변의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러시아 등이 의원을 매수해 폴란드 정계를 올스톱시킬 여지도 있었다(…). 그래서 1791년 스타니스와프 2세 때 5.3 헌법이 제정되며 만장일치에서 2/3 다수결 제도로 전환되었다.[6] 헌법을 개정하는 당시의 의회는 아직 만장일치제라서 헌법을 가결시키는 것도 한 명이라도 반대하면 불가능했는데, 그래서 헌법이 가결될 당시 의회에는 국왕의 조카 유제프 안토니 포니아토프스키[7]가 군대를 이끌고 들어와 있었다. 그러나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이런 움직임을 경계한 러시아가 간섭군을 보내서 반동 세력을 지원했고, 이미 1차 폴란드 분할때 개입했던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도 끼어들면서 두 번에 걸쳐 추가 분할이 이어졌다. 이를 통해 폴란드 자체가 1795년에 망하며(…) 새로 제정한 헌법도 휴지조각이 됐다.

고대 러시아두마도 만장일치제였다.

로마원로원이나 몽골쿠릴타이 등도 유사한 측면이 있다.

5. 기타

  • 화백회의의 마지막 안건은 고려에의 항복 여부였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만장일치가 아닌 다수결로 결정된 사안이었다. 이는 경순왕이 화백회의의 결정을 뒤집은 셈이다. 달리 말하면 화백회의는 망국의 순간까지 남아 그것을 좌지우지할 정도로 그 천 년의 영향력이 유구했다는 뜻이 된다.
  • 경주시에서 이 이름을 따서 전시장경주화백컨벤션센터를 지었다.
  • 백제에서도 이런 비슷한 귀족회의인 정사암 회의가 있었는데, 화백회의와는 달리 다수결로 결정되었다. 고구려의 경우 제가회의가 대응된다.
  • 김재원 국민의힘 최고위원(당시 새누리당 의원)이 국회선진화법은 신라의 화백회의라고 언급했었다.#
  • 여야 동수로 이루어진 지방의회도 화백회의에 대응된다고 볼 수 있다. 어느 한 당이 등원을 거부해버리면 정족수가 모자라 회의를 개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민선 8기 경기도의회의 여야 비율이 정확히 5:5였다.[8] 그리고 더불어민주당 측이 이동환 시장의 해외출장을 문제삼아 등원을 거부하면서 시의회가 멈추는 바람에 2023년에 15일간 준예산이 집행된 고양시의 사례도 있다.

6. 창작물에서

6.1. 선덕여왕(드라마)

주인공 덕만이 추진하는 조세개혁이 화백회의를 통과해야 하는데 화백회의의 대등들은 모두 대귀족들이라 조세개혁에 찬성할 리가 없었다. 더구나 대등 10명 중에 2명은 덕만파라 설득할 수 있다 쳐도 나머지 8명은 미실파였다. 그래도 중소귀족들의 조세개혁 열망이 높아 눈치는 보였는지 미실파가 꼼수를 썼는데, 만장일치제인 화백회의의 특성을 악용하여 조세개혁안을 찬성 9, 반대 1로 부결되도록 만들어 덕만파를 제대로 엿먹였다(…).

그러자 덕만이 또 한 가지 안건을 내놓는데 만장일치제인 화백회의를 다수결로 바꾸자는 것이었다. 물론 덕만파 2명만 찬성해주고 나머지가 반대해서 이는 부결. 덕만도 이를 예상했지만 화백회의 무용론을 중소귀족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 나름대로 성과였다고 덕만은 생각했다. 그러나 나중에 덕만을 만났을 때 미실은 덕만이야말로 화백회의의 수혜자라는 사실을 역설한다. 만약 다수결 체제에서 '덕만공주가 정무에서 손을 떼게 한다'는 안건이 나오면 대등 10명 중 미실파가 8명이므로 덕만은 어찌할 방법이 없다. 그나마 만장일치제에서는 덕만파가 2명 있어서 이걸 막을 수 있다는 것. 덕만도 이를 딱히 반박하지 못한다.

이후 미실 측이 또 꼼수를 부리는데 미실파 대등 8명끼리만 회의를 열어 '덕만공주가 정무에서 손을 떼게 한다'는 안건을 날치기 통과시키려 하면서 덕만파 대등 2명(김용춘, 김서현)은 회의장에 못 들어오도록 군사를 풀어 막아버린 것. 덕만파 화랑들의 도움으로 포위를 뚫고 덕만파 대등 2명을 회의장에 진입시켜 안건 통과를 막긴 했는데, 이것은 '덕만이 무력으로 화백회의장을 공격했다'는 누명을 뒤집어씌워 정변을 벌이기 위한 미실 측의 꼼수였으며 이 사건을 발단으로 미실의 정변이 시작된다.

드라마 후반 비담의 난 때도 또 화백회의가 악용된다. 대등 10명 중 반란군에 가담한 대등이 7명이었고, 심지어 상대등 비담이 반란군의 수장이었기에 자기들끼리 화백회의를 열어 선덕여왕을 폐위시킨다는 안건을 만장일치 통과시켜 반란군의 명분으로 써먹는다.

[1] 白은 신라향가에서 ᄉᆞᆲ로 쓰여 사뢰다는 뜻으로 쓰인다. 오늘날에는 "주인 ", "관리소장 " 등의 용법과 "고백(告白)하다"의 "백" 등에 남아있다.[2] 이씨의 알천 양산촌(급량부), 최씨의 돌산 고허촌(사량부), 정씨의 취산 진지촌(본피부), 손씨의 무산 대수촌(점량부), 배씨의 금산 가리촌(한기부), 설씨의 명활산 고야촌(습비부)[3]귀족 독재정.[4] 단 한번의 예외가 있었는데 경순왕의 고려에 대한 항복 결정이다. 반대하는 의견이 만만치 않았음에도 경순왕은 고려에 항복하고 말았다. 만일 신라가 항복하지 않고 고려에 대항하였다면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5] 현재 폴란드 의회 하원 이름도 세임이다.[6] 그 외에도 입헌군주정, 세습군주정, 국왕의 자유도시, 종교의 자유, 귀족에 대한 과세, 귀족들이 농민들을 자의적으로 재판하지 못하게 하는 것, 농노제를 소작제로 전환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7] 후에 나폴레옹의 휘하에서 싸우며 조국의 독립을 위해 노력한 폴란드의 성웅. 나폴레옹의 26인 원수 중 유일한 외국인이며, 그에 걸맞은 활약을 펼쳤다. 그러나 결국 1813년에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어이없이 사망했다.[8] 이 경우 연장자가 의장을 맡는 관례에 따라 국민의힘이 의장을 가져갈 수도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국민의힘 내에서 다선 의원들의 파워에 밀려 불만을 품은 일부 의원들이 당을 배신하고 민주당에 반란표를 던지는 바람에 민주당 의원이 의장이 되었다. 정당 간의 이념 싸움이 치열한 국회와 달리 지방의회 의원들은 이념보다는 그냥 당장 눈앞의 이익 싸움이 더 치열하기 때문에 의외로 반란표라는 게 제법 나온다. 수틀리면 소속 당도 쉽게 등지곤 한다.